Tag Archives: 왕릉

경주 효공왕릉(사적), 신라 52대 효공왕

경북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재위 897~692년)의 무덤이다. 효공의 이름은 요(嶢)이며 신라 49대 헌강왕의 서자이다. 신라 말 혼란기에 진성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재위기간 동안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세워졌으며 신라의 영토는 급격히 줄어들고 국력은 쇠약해졌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사자사’라는 절 북쪽에 묻혔다고 한다. 무덤은 둥글게 흙을 쌓은 형태로 규모가 크지 않으며 장식도 거의 없다.봉분 주위에 둘레석으로 사용되었는 돌이 몇개 남아 있다. 신라말 혼란기에 조성된 왕릉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효공왕릉(사적)>

OLYMPUS DIGITAL CAMERA<봉분에 남아 있는 둘레석으로 보이는 돌>

왕릉은 신라 전성기를 대표하는 선덕여왕릉, 신문왕릉 등이 있는 사천왕사 동쪽 500 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다시한번 후삼국 혼란기를 수습하고자 하는 바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릉 앞쪽에는 ‘사자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낭산 동쪽 나즈막한 구릉에 위치한 효공왕릉>

OLYMPUS DIGITAL CAMERA<왕릉 앞 절터(?)>

신라 효공왕릉(孝恭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배반동
이 능은 신라 제52대 효공왕(재위 897~912, 김요)이 모셔진 곳이다. 봉분의 높이 4.3m, 지름 22m 크기로 둥글게 흙을 쌓은 타원형 봉토분이다. 봉분의 바닥에는 둘레돌로 보이는 자연석이 노출되어 있으며, 아무런 장식이 없는 매우 단순한 형태의 무덤이다. 효공왕은 진성여왕(眞聖女王)의 뒤를 이어 16년 간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견훤(甄萱)과 궁예(弓裔)가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세우고 신라의 영토를 침범하여 나라가 매우 어지러웠으나 평정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사자사(獅子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1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주 신문왕릉(사적), 신라 31대 신문왕

경북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년)의 무덤이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맏아들로 삼국 통일 후 귀족세력을 제압하고 사회안정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최고교육기관인 국학을 창설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문화를 증진하는 정책을 펼쳐 설총, 강수 같은 대학자를 배출하였다. 고려의 광종이나 조선의 태종에 비유되는 왕으로 귀족세력을 탄압하고 과감한 정치적 숙청을 단행하여 전제왕권을 확립하였다. 문무왕릉이 있는 동해에서 만파식적을 가져왔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여러차례 일어난 반란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통일 후 처음 조성한 왕릉으로 봉분의 규모가 크고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신문왕릉(사적)>

왕릉은 문무왕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사천왕사와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 남쪽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왕릉이 있는 지역은 경주와 울산을 연결해주는 7번국도가 지나 가는 주요 교통로이며, 삼국통일 후 적대관계였던 왜(倭)가 울산을 통해서 가장 빨리 공격해 올 수 있는 경로에 있다. 신문왕릉은 왜를 경계한 문무왕의 유지를 이어 받아 이곳에 왕릉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신문왕을 뒤를 이은 성덕왕, 효소왕을 비롯하여 원성왕, 신무왕 등 통일신라 전성기 왕릉들은 대부분 7번국도 주변에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왕릉 출입문>

왕릉은 둥글게 흙을 쌓은 봉토분으로 통일신라 왕릉 중에서는 규모가 큰 편이다. 봉본은 규모는 높이 7.6 m, 지름 29.3 m, 밑둘레가 92 m에 이른다. 봉분 밑둘레에는 잘 다듬은 화강석을 5단으로 쌓은 뒤 44개의 사다리꼴모양의 보호석을 설치해 놓고 있다. 삼국 통일 후 중국 문물을 받아들이던 시기에 조성한 왕릉으로 당나라 능묘제도가 본격적으로 적용되지는 않았다. 봉분 앞에 상석이 놓여 있고 둘레석을 제대로 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앞에 있는 제물을 올리는 상석>

OLYMPUS DIGITAL CAMERA<옆에서 본 상석>

OLYMPUS DIGITAL CAMERA<둘레석>

OLYMPUS DIGITAL CAMERA<뒷에서 본 모습>

신라 신문왕릉(神文王陵,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453-1
이 능은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 김정명)이 모셔진 곳으로 경주의 동남쪽에 있는 낭산(狼山)의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능은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으로 밑둘레 92 m, 지름 29 m, 높이 7.6 m 이다. 밑둘레에 벽돌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5단으로 쌓은 뒤 사다리 꼴로 생긴 44개의 보호석을 설치하였다. 동쪽에는 크고 긴 돌로 쌓은 상석이 있다. 신문왕은 문무왕(文武王)의 맏아들로 문무왕의 뜻을 이어받아 옛 백제와 고구려 백성을 융합하는데 힘썼고, 국학(國學)을 두어 인재를 양성하였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주 헌강왕릉(사적), 신라 49대 헌강왕

경북 경주시 남산동에 있는 신라 49대 헌강왕(재위 875~886년)의 무덤이다. 헌강왕은 신라 48대 경문왕의 아들이며 뒤를 이은 정강왕과 진성여왕이 동생이다. 불교와 학문을 장려했으며 재위기간 태평성대를 이룬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강왕릉과 함께 경주 남산 북동쪽 구릉 끝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 쇠퇴기에 조성한 소박한 왕릉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헌강왕릉(사적)>

왕릉은 높이 4.2 m, 지름 15.3 m 규모의 원형봉토분이며 둘레석으로 잘 다듬은 화강석을 4단으로 쌓고 있는 특이한 형태이다. 무덤은 도굴되었으며 수해를 입어 긴급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내부 형태가 확인되었다. 내부는 관이 놓여 있는 석실이 있으며 천장은 둘글게 모아져 있다. 석실과 연결된 널길은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무덤 앞에는 제단이 있던 자리가 남아 있으며 봉문 주위에는 담장이 있었던 흔적이 있다. 전성기 통일신라 왕릉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며 문,무인상을 비롯한 석물은 남아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둘레석>

OLYMPUS DIGITAL CAMERA<무덤 앞 제단이 있던 자리>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주변 담장이 있던 자리>

OLYMPUS DIGITAL CAMERA<헌강왕릉 들어가는 길, 주변 소나무숲>

OLYMPUS DIGITAL CAMERA<왕릉 입구>

신라 헌강왕릉(憲康王陵,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 55
이 능은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 김정)을 모신 곳이다. 봉분 높이 4 m, 지름 15.8 m로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이며, 봉분 하부에 4단의 둘레돌을 돌렸다. 내부 구조는 연도가 석실의 동쪽 벽에 치우쳐 있으며, 석실의 크기는 남북 2.9 m, 동서 2.7 m이다. 벽면은 비교적 큰 깬돌을 이용하여 상부로 갈수록 안쪽으로 기울게 모서리를 죽이는 방식으로 쌓았다. 석실 입구에 돌문, 문지방, 폐쇄석, 묘도를 갖추고 있으며, 연도의 크기는 길이 142 cm, 너비 128~9 6cm이다. 석실 내에는 서벽에 접해서 2매의 판석으로 된 시상석이 있다. 헌강왕은 경문왕(景文王)의 태자로서 문치(文治)를 잘 하였으며, 이 시기에 처용무(處容舞)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왕위에 있는 동안 태평성대를 이루었는데, 거리마다 노래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일본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을 바칠 정도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 지냈다” 고 기록되어 있다. 1993년 왕릉 내부가 조사되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주 정강왕릉(사적), 신라 50대 정강왕

경북 경주시 남산동에 있는 신라 50대 정강왕(재위 886~887년)의 무덤이다. 정강왕은 형인 헌강왕에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1년만에 병으로 죽고 여동생 진성여왕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 헌강왕릉과 함께 경주 남산 북동쪽 구릉 끝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 쇠퇴기에 조성한 소박한 왕릉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정강왕릉(사적)>

봉분은 흙으로 덮은 둥근 형태이며 이 4 m, 지름 14 m의 크지 않은 규모이다. 아래에는 잘 다듬은 화강석을 3단으로 둘레석을 쌓았다. 무덤 앞에는 제사를 위해 제단이 있다. 전성기 왕릉과는 둘레석에 십이지신상을 장식하지 않았으며 제단도 아주 간소하게 만들어졌다. 문.무인석을 비롯하여 석상들의 전혀 없다.

OLYMPUS DIGITAL CAMERA<앞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제사를 올리는 제단>

OLYMPUS DIGITAL CAMERA<둘레석>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담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흔적> 

신라 정강왕릉(定康王陵,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 53
이 능은 경주 남산(南山)의 북동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 끝 부분에 자리잡고 있으며, 신라 제50대 정강왕(재위 886~887, 김황)이 모셔진 곳이다. 봉분의 높이 4 m, 지름 15 m로 둥글게 흙을 쌓은 봉토분이다. 봉분 하단에는 둘레돌을 돌렸는데, 최하단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장방형 깬돌(割石)을 2단으로 쌓았다. 바로 앞에는 1매의 판석으로 된 상석이 있고, 그 앞에 다듬은 장방형 화강석으로 축조한 석단이 있다. 정강왕은 헌강왕의 아우로 886년 7월에 왕위에 올랐으나, 887년 7월에 병으로 죽어 왕위에 있던 기간이 만 1년밖에 되지 않았다. <삼국사기>에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주 흥덕왕릉(사적), 신라 42대 흥덕왕

경북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에 있는 신라 42대 흥덕왕의 무덤인 흥덕왕릉(사적)이다. 왕릉은 봉분 지름 20.8m, 높이 9m의 원형봉토분이다. 봉분 주위에 둘레석을 두르고 있으며 바깥에는 난간석으로 둘러져 있다. 둘레석에는 방향에 따라 12지신상을 새교 놓고 있다. 무덤 주위 모서리 4곳에는 돌사자를 배치하고 있으며 무덤 앞에는 문인석, 무인석, 화표석이 1쌍씩 세워져 있다. 앞쪽에는 비석에 세워져 있었는데 지금은 거북모양의 받침돌만 남아 있다. 주변에서 ‘흥덕’이란 글씨가 새겨진 비석조각이 발견되었다. 원성왕릉과 함께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잘 반영하고 있으며 구성요소는 원성왕릉과 거의 유사하다. 왕릉 중앙에는 전대나 후대의 왕릉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그리스.로마신전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의 큰 제단이 놓여져 있다.

흥덕왕은 원성왕의 손자로 형인 헌덕왕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애장왕을 죽이고 이찬이 되었으며 헌덕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즉위 후 당에 사신을 파견하고,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삼아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당으로부터 차를 들여와 전국적으로 재배하게 하였으며, 복식제도 등을 고쳤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흥덕왕릉(사적)>

흥덕왕릉은 경주에서 북쪽으로 20km 정도 떨어진 안강읍 육통리에 위치하고 있다.  경주 일대에 흩어져 있는 신라 왕릉 중 가장 먼곳에 위치하고 있다. 왕릉의 위치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흥덕’이라 적힌 비석 조각이 발견되어 흥덕왕릉임이 확인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울창한 소나무숲이 인상적인 흥덕왕릉 입구>

OLYMPUS DIGITAL CAMERA<흥덕왕릉이 있는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마을>

흥덕왕릉 주변은 경주지방에 주로 볼 수 있는 소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이곳 소나무는 곧게 자란 나무는 없고 각기 제멋대로 꾸불꾸불하게 자라고 있어 한폭의 그림같은 풍경을 만들어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울창한 소나무숲>

OLYMPUS DIGITAL CAMERA<소나무숲 사이로 보이는 흥덕왕릉>

흥덕왕릉 경사진 언덕에 봉분을 있고 그 아래에 문인상, 무인상, 화표석이 1쌍씩 배치되어 있다. 당나라의  무덤제도의 영향을 받은 원성왕릉(괘릉)의 형식과 공간배치를 많이 따르고 있다. 원성왕릉과 마찬가지로 무인석은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흥덕왕릉 능역>

OLYMPUS DIGITAL CAMERA
<입구에 세워진 화표석>

OLYMPUS DIGITAL CAMERA
<무인석(동쪽)>

OLYMPUS DIGITAL CAMERA
<무인석(서쪽)>

OLYMPUS DIGITAL CAMERA
<문인석(동쪽)>

OLYMPUS DIGITAL CAMERA
<문인석(서쪽)>

OLYMPUS DIGITAL CAMERA<봉분에서 내려다 보이는 문,무인석>

봉분은 밑둘레 65m로 신라 왕릉 중에서는 중간정도이다. 봉분에는 둘레석을 배치하여 무덤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봉분 바깥쪽에는 난간석이 있으며 4곳의 모서리에 돌사자를 배치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봉분 앞 제단은 탁자모양의 조선왕릉의 석상과는 달리 그리스나 로마의 신전에서 볼 수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당나라를 통해 서역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앞 제단>

OLYMPUS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둘레석은 바닥에 기단역할을 하는 돌을 깔고 그 위에 넓은 면석을 세웠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넣었는데 방향에 따라 12지신상을 새겨 넣었다. 면석 위에는 다시 갑석을 올려 마무리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둘레석>

OLYMPUS DIGITAL CAMERA<십이지신상 중 쥐(子, 오른쪽), 호랑이(寅), 왼쪽)>

OLYMPUS DIGITAL CAMERA<용(辰, 오른쪽), 뱀(巳, 가운데), 말(午, 왼쪽)

OLYMPUS DIGITAL CAMERA<양(未, 오른쪽), 원숭이(申, 가운데), 닭(酉, 왼쪽)>

OLYMPUS DIGITAL CAMERA
<개(戌, 오른쪽), 돼지(亥, 왼쪽)>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주위 난간석>

OLYMPUS DIGITAL CAMERA<동남쪽 사자상>

OLYMPUS DIGITAL CAMERA<서남쪽 사자상>

OLYMPUS DIGITAL CAMERA<서북쪽 사자상>

무덤 앞쪽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지금은 거북모양 받침돌만 남아 있다. 비석 몸돌이 없고 거북 얼굴도 많이 파손되었지만, 상당히 웅장하게 힘찬 조각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흥덕(興德)’ 이라 적힌 비석조각이 발견되어 무덤 주인을 흥덕왕임이 확인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거북받침돌>

OLYMPUS DIGITAL CAMERA<거북발>

OLYMPUS DIGITAL CAMERA<거북 등껍질>

OLYMPUS DIGITAL CAMERA<비석이 놓여 있던 자리>

OLYMPUS DIGITAL CAMERA
<글자가 새겨진 비석 조각,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신라 흥덕왕릉(新羅 興德王陵,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이 능은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 김수종/ 김경휘)을 모신 곳이다. 왕은 지금의 전남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두고 장보고 (張保皐)를 대사로 삼아 해상권을 장악하였으며, 당나라에서 차(茶)씨를 들여와 재배하도록 하였다. 밑둘레 65m, 직경 22.2m, 높이 6.4m 되는 이 능의 둘레에는 호석(護石)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겼고 그 주위로 돌난간을 둘렀다. 네 모서리에는 돌사자(石獅子)가 있고, 앞쪽에는 문인석(文人石)·무인석(武人石)을 세웠는데 무인석은 서역인 (西域人) 모습을 하고 있다. <삼국유사> 왕력편(王曆編)에 ‘능은 안강 북쪽 비화양(比火壤)에 있는데 왕비 장화부인(章花夫人)과 함께 매장했다.’고 하였다. 1977년에 국립경주박물관과 사적관리사무소의 발굴조사 때 상당수의 비편(碑片)과 함께 ‘흥덕(興德)’ 이라 새긴 비의 조각이 나와 흥덕왕의 무덤임이 밝혀졌다. 무덤의 앞 왼쪽에는 비석을 세웠는데, 지금은 비석을 받쳤던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만 손상된 채 남아있다. 당시의 둘레돌과 십이지신상 양식의 변천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