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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수로왕릉(사적), 금관가야를 건국한 수로왕의 무덤

경남 김해시 서상동에 있는 수로왕릉(사적)이다. 가야국을 건국한 시조이자 김해김씨의 시조인 수로왕 무덤이다. 금관가야 주거유적인 봉황대(사적)와 지배층 무덤이 모여 있는 대성동 고분군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무덤의 조성연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고려 때가 왕릉의 보존상태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들어서면서 세종 때 최대 성씨인 김해김씨의 시조로서 왕릉에 걸맞는 수준으로 정비된 것으로 보인다. <지봉유설>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도굴되었는데 당시 순장의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무덤의 구조는 큰 돌방무덤이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김해 수로왕릉(사적)>

수로왕릉 능역은 조선시대 왕릉에 준하는 수준으로 정비된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시대 수로왕의 위패를 모시는 숭선전이 세워졌으며, 일제강점기 이후 역대 금관가야의 위패를 모신 숭안전이 추가되면서 종묘와 비슷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외에 안향각, 신도비각, 제기고, 전사청 등의 부속건물이 있다.

김해 수로왕릉1<수로왕릉 능역>

OLYMPUS DIGITAL CAMERA<능역을 출입하는 숭안문>

OLYMPUS DIGITAL CAMERA<실제 능역이 시작되는 홍살문>

OLYMPUS DIGITAL CAMERA<가락루>

출입문인 가락루를 들어서면 정면에 수로왕릉이 보이고, 왼쪽에는 수로왕릉에 대한 내력 등을 적은 신도비가, 오른쪽에는 영정을 모신 숭정각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수로왕릉 능역>

신도비각는 금관가야의 역사와 숭전전에 대한 내력을 기록한 기록된 비(碑)이다. 비각은 1885년에 3칸으로 창건되어 1926년과 1954년 두차례에 걸쳐 중수가 이루어졌고 1988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면서 보수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신도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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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

OLYMPUS DIGITAL CAMERA<숭정각>

OLYMPUS DIGITAL CAMERA<수로왕 영정>

OLYMPUS DIGITAL CAMERA<수로왕비 영정>

OLYMPUS DIGITAL CAMERA<제물을 준비하는 시생대>

수로왕릉은 납릉(納陵)으로도 불리며 지름 22m, 높이 6m 규모의 원형봉토분이다. 왕릉 앞에는 능비, 상석, 문무인석, 마양호석이 배치되어 있다. 납릉 정문은 앞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파사석탑을 사이에 두고 있는 물고기 그림이 유명하다.

OLYMPUS DIGITAL CAMERA<출입문인 납릉심문>

OLYMPUS DIGITAL CAMERA<납릉심문 현판>

OLYMPUS DIGITAL CAMERA<파사석탑과 물고기 그림>

OLYMPUS DIGITAL CAMERA<수로왕릉 봉분>

OLYMPUS DIGITAL CAMERA<문무인석>

OLYMPUS DIGITAL CAMERA<마양호석>

권 제2 > 제2 기이(紀異第二) > 가락국기(駕洛國記) > 수로왕과 왕후가 죽다(0189년 03월 01일(음))
왕은 이에 매양 외로운 베개를 의지하여 몹시 슬퍼하다가 10년을 지내고 헌제(獻帝) 입안(立安) 4년 기묘 3월 23일(199년)에 죽으니, 나이는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는 것이 왕후가 죽은 날보다 더하였다. 마침내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웠는데 높이가 1장이고 둘레가 300보였고, 거기에 장사 지내고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하였다. 그의 아들 거등왕(居登王)으로부터 9대손 구충왕(仇衝王)까지 이 묘(廟)에 배향(配享)하고, 매년 정월(正月) 3일과 7일, 5월 5일과 8월 5일과 15일을 기다려 풍성하고 깨끗한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삼국유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3년)

수로왕릉 동쪽에는 역대 수로왕과 역대왕의 위패를 모신 숭선전과 숭안전이 있다. 숭선전은 구한말 고종때 이름이 내려졌으며, 숭안전은 일제강점기 이후 추가되었다. 금관가야의 종묘와 같은 성격을 갖는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제향공간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제향공간 영역>

숭선전은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과 왕후 허씨의 위패를 모시는 전각이다. 거물은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경주의 박혁거세를 모신 숭덕전, 미추왕릉 앞쪽에 미추왕,문무대왕,경순왕을 모신 숭혜전, 탈해왕릉 앞에 숭신전 등이 비슷한 성격의 전각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숭선전과 안향각>

숭선전
가락국 시조 대왕, 시조 왕후 허씨의 위패를 봉안하여 향화를 받드는 전각. 가락국 제2대 도왕 원년(199년)에 창건되어 1698년에 새로이 제각을 건립하였고, 1792년 4칸으로 중건. 1878년에 숭선전으로 선액 되면서 3칸으로 건립되었다. 1926년과 1954년 두번에 걸쳐 중수되고 1973년에 보수되었으며 1987년 능 전면에서 현 위치로 이건되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숭안전은 역대 금관가야 왕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종묘와 비슷한 성격을 갖는 공간이다. 일제강점기 후 김해김씨 문중에서 조상을 모시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숭안전>

OLYMPUS DIGITAL CAMERA<제기고>

OLYMPUS DIGITAL CAMERA<전사청>

대호군(大護軍) 허전(許傳)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효휘전(孝徽殿)께서 돌아가시고 역월(易月)의 상제가 어느덧 지나갔습니다. 장사를 지낼 날짜가 정해져 묘혈(墓穴)을 팔 날이 점점 가까워지니 성상의 슬픔과 애통함은 뭇사람들의 심정과 같을 것입니다. 신은 구조(舊朝)의 신하로서 늙고 완고하기만 한 채 죽지 않고 겨우 목숨을 보존하고 있으니, 어찌 감히 세상일에 대하여 함부로 간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죽음을 무릅쓰고 감히 한마디 진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성명께서는 조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 <생략> _
이에 참람됨을 헤아리지 않고 지엄하신 성상께 아뢰는 것이니, 천지 부모께서는 이러한 사정을 굽어 살피시어 가락국 수로왕릉에 특별히 전호(殿號)를 내려 주고 아울러 삼국의 여러 능과 같이 능관을 두어 한편으로는 전성(前聖)의 성대한 법을 따르고 한편으로는 고국(故國)의 영령을 위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신은 지극한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상소한 내용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겠다.” (승정원일기, 고종 15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수로왕릉
서기 42년 구지봉에서 탄강하여 가락국을 세운 수로왕의 묘역으로 납릉(納陵)이라고도 불린다. 그 규모는 지름 22m, 높이 6m의 원형봉토분으로 능비, 상석, 문무인석, 마양호석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경내에는 숭선전(崇善殿)과 숭안전(崇安殿), 안향각(安香閣), 신도비각(神道碑閣) 등이 배치되어 있다. 납릉 정문에는 파사석탑과 유사한 흰 석탑을 사이에 두고 인도에서 흔히 보이는 쌍어모양이 새겨져 있어 수로왕비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연상케 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199년 수로왕이 158세로 돌아가자 대궐의 동북쪽 평지에 빈궁을 짓고 장사지낸 뒤, 주위 300보의 땅을 수로왕묘로 정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수로왕릉이 평지에 있는 것과 능역이 설정되었던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조선 선조 13년(1580) 영남 관찰사 허엽이 왕릉을 크게 수축하여 상석, 석단, 능묘 등을 갖추었고, 인조 25년(1647) 능비를세웠으며, 고종 15년(1878)에는 숭선전의 호를 내리고 능묘를 개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수로왕릉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에는 춘추로 제향을 올리고 있는데, 이 숭선전제례는 경남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3. 삼국유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3년
  4. 승정원일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3년

 

김해 수로왕비릉(사적), 금관가야 수로왕비의 무덤

경남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수로왕비릉(사적)이다. 금관가야를 건국한 수로왕의 왕비인 허황옥의 무덤이다. 수로왕비는인도 아유타국 공주로 배를 타고 건너와 왕비가 되었으며, 9명의 왕자를 낳았는데 그 중 2명은 허씨 성을 주었으며 김해허씨는 그 후손이라 전해지고 있다. 무덤 옆에는 인도에서 가져왔다고 전해지는 돌로 세워진 파사석탑이 남아 있다. 도심에 있는 수로왕릉과는 떨어져 있으나 오랜 세월 수로왕비의 무덤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김해 수로왕비릉(사적)>

건무(建武) 24년 무신 7월 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조회할 때 아뢰기를 “대왕이 강령하신 이래로 아직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셨으니 청컨대 신들의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항려가 되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 생략 ~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寢殿)에 있는데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하였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註 496의 공주로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살입니다. ~ 생략 ~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이틀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 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니 이들에게 각각 쌀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 생략 ~
(삼국유사, 권 제2, 제2 기이, 가락국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편찬위원회, 2023년)

능역은 조선초 세종 때(1446년)에 수로왕릉과 함께 성역화되어다. 봉분의 규모가 크지 않으며 봉분을 두른 호석은 없다. 능비와 상석은 조선 중기 인조 때(1647년)에 다시 설치하였다고 한다. 무덤 주위에는 높이 5m 정도의 담장이 있다. 왕릉에 속하지만 소박한 느낌을 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수로왕비 능역>

SANYO DIGITAL CAMERA<수로왕비 무덤>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능역내에서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과 관리인이 머무는 고직사가 부속건물로 있다.

SANYO DIGITAL CAMERA<재실과 고직사>

파사석탑은 허왕후가 인도에서 건너올 때 바다 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싣고 왔다는 돌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종류의 돌이라고 한다. 인근 사찰에 있던 것을 원래의 자리로 옮겨야 한다고 하여 조선시대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SANYO DIGITAL CAMERA<파사석탑 보호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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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석탑>

원래 바다를 항해할 때 균형을 잡기 위해 배의 바닥에 실었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과학적 분석결과 파사석은 붉은 빛이 도는 기이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찾기 힘든 암질인 것이 밝혀졌다.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04<정면에서 본 모습>

파사석탑
이 석탑은 <삼국유사> 등 고서에 수로왕비 허황옥이 48년(수로왕 7)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 가락국에 올 때 싣고 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탑의 부재 5층만 남아 있는데 조각이 기이하고 돌에 붉은 빛 도는 희미한 무늬 같은 것이 남아 있다. 신농본초(神農本草)에 닭벼슬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는 것이 바로 이 탑이어서 신비를 더하고 있다. 파도를 진정시켜준다는 신령스러운 탑으로 일명 진풍탑으로 불리운다. 원래 호계사(虎溪寺)에 있었으나 1873년에 절이 폐사되자 김해부사 정현석이 수로왕비역으로 옮겼으며, 이를 영구 보존하기 위해 1993년 5월에 다시 이 자리로 옮기고 보호각을 세웠다. (안내문, 김해시청, 2008년)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
금관(金官)註 183 호계사(虎溪寺)註 184의 파사석탑(婆裟石塔)이라는 것은 옛날에 이 읍이 금관국이었을 때 세조DB주석수로왕(首露王)의 비인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무신註 185에 서역의 아유타국(阿踰陁國)註 186에서 싣고 온 것이다. 처음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장차 동쪽으로 가려 하였는데 파도신의 노여움에 막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 부왕(父王)에게 말하였다.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라고 명하니 곧 쉽게 건널 수 있어서 남쪽 해안에 정박하였다. 붉은 돛, 붉은 깃발, 주옥(珠玉) 등 아름다운 것을 실었기 때문에 지금 주포(主浦)라고 부른다. 처음 언덕 위에서 비단 바지를 풀은 곳은 능현(綾峴)이라고 하며, 붉은 깃발이 처음 들어온 해안은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한다.
수로왕이 그를 맞이하고 함께 나라를 다스린 것이 150여 년이었다. 이때에 해동에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다. 대개 불교가 아직 들어오지 못하여 토착인들이 신복하지 않았으므로 본기에는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제8대 질지왕(銍知王) 2년 임진(452년)에 이르러서야 그 땅에 절을 세웠다. 또 왕후사(王后寺) 아도(阿道) 눌지왕(訥祇王)의 시대로 법흥왕대의 전이다.를 창건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복을 빌고 겸하여 남쪽의 왜를 진압하고 있는데 가락국 본기에 자세히 보인다.
탑은 모가 4면으로 5층이고 그 조각이 매우 특이하다. 돌에 미세한 붉은 반점 색이 있고 그 질은 무르니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본초(本草)≫註 187에서 말하는 닭벼슬의 피를 찍어 검사했다는 것이 이것이다.
금관국은 또한 가락국(駕洛國)이라고도 하는데 본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삼국유사, 권 제3, 제4 탑상, 금관성파사석탑,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3년)

수로왕비릉은 금관가야 건국설화  “구지가”와 관련된 구지봉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멀리서 보면 구지봉이 거북의 머리이며, 수로왕비릉이 자리한 위치는 목부분에 해당한다. 남쪽의 수로왕릉과는 수백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면서 구지봉을 지키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구지봉 오르는 길>

SANYO DIGITAL CAMERA<구지봉에서 보이는 수로왕비릉>

김해 수로왕비릉, 사적, 경남 김해시 구산동
김해시내 북단에 위치한 이 곳은 가락국 수로왕비의 능이다. 분산(盆山)에서 구지봉으로 내려오는 구릉에 위치하며, 동쪽 100m 지점에는 구산동 고분군이 있다. 조선시대 1446년에 수로왕릉과 함께 정화되었는데, 능비와 상석은 1647년에 설치된 것이다. 원형 봉분의 규모는 지름 16~18m, 높이 5m 정도로 봉분을 두르는 호석은 없다. 능 주위는 네모나게 돌담을 둘렀으며, 앞쪽으로 낮은 단의 축대가 있다. 능비에는 ‘가락국수로왕비보주태후허씨릉’이라 새겨져 있다. 경내에는 숭보재, 외삼문, 홍살문 등의 건물이 있으며, 능을 바라보고 오른쪽에는 파사석탑(婆娑石塔)이 있다. 이 석탑음 김해시 중심에 있었던 호계사에서 옮겨 온 것이라 한다. 삼국유사에는 서기 48년에 수로왕비가 인도에서 올 때 풍랑을 가라앉히기 위해 배데 싣고 왔던 것으로 기록하였다. 파사석은 우리나라에는 없는 돌로 닭 벼슬의 피를 떨구면 굳지 않는다고 하는데, 김해시의 향토사학자가 이를 확인하였다고 한다. (안내문, 김해시청, 2008년)

<출처>

  1. 안내문, 김해시청, 2008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3.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경주 효공왕릉(사적), 신라 52대 효공왕

경북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재위 897~692년)의 무덤이다. 효공의 이름은 요(嶢)이며 신라 49대 헌강왕의 서자이다. 신라 말 혼란기에 진성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재위기간 동안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세워졌으며 신라의 영토는 급격히 줄어들고 국력은 쇠약해졌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사자사’라는 절 북쪽에 묻혔다고 한다. 무덤은 둥글게 흙을 쌓은 형태로 규모가 크지 않으며 장식도 거의 없다.봉분 주위에 둘레석으로 사용되었는 돌이 몇개 남아 있다. 신라말 혼란기에 조성된 왕릉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효공왕릉(사적)>

효공왕이 즉위하다 ( 897년 06월(음) ), 효공왕(孝恭王)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요(嶢)이고 헌강왕(憲康王)의 서자(庶子)로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왕이 죽다 ( 912년 04월(음) ), 16년(912년) 여름 4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효공(孝恭)이라 하고, 사자사(師子寺) 북쪽에 장사 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12 신라본기 제12 효공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OLYMPUS DIGITAL CAMERA<봉분에 남아 있는 둘레석으로 보이는 돌>

왕릉은 신라 전성기를 대표하는 선덕여왕릉, 신문왕릉 등이 있는 사천왕사 동쪽 500 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다시한번 후삼국 혼란기를 수습하고자 하는 바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릉 앞쪽에는 ‘사자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낭산 동쪽 나즈막한 구릉에 위치한 효공왕릉>

OLYMPUS DIGITAL CAMERA<왕릉 앞 절터(?)>

신라 효공왕릉(孝恭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배반동
이 능은 신라 제52대 효공왕(재위 897~912, 김요)이 모셔진 곳이다. 봉분의 높이 4.3m, 지름 22m 크기로 둥글게 흙을 쌓은 타원형 봉토분이다. 봉분의 바닥에는 둘레돌로 보이는 자연석이 노출되어 있으며, 아무런 장식이 없는 매우 단순한 형태의 무덤이다. 효공왕은 진성여왕(眞聖女王)의 뒤를 이어 16년 간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견훤(甄萱)과 궁예(弓裔)가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세우고 신라의 영토를 침범하여 나라가 매우 어지러웠으나 평정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사자사(獅子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1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주 신문왕릉(사적), 신라 31대 신문왕

경북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년)의 무덤이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맏아들로 삼국 통일 후 귀족세력을 제압하고 사회안정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최고교육기관인 국학을 창설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문화를 증진하는 정책을 펼쳐 설총, 강수 같은 대학자를 배출하였다. 고려의 광종이나 조선의 태종에 비유되는 왕으로 귀족세력을 탄압하고 과감한 정치적 숙청을 단행하여 전제왕권을 확립하였다. 문무왕릉이 있는 동해에서 만파식적을 가져왔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여러차례 일어난 반란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통일 후 처음 조성한 왕릉으로 봉분의 규모가 크고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신문왕릉(사적)>

신문왕이 왕위에 오르다 ( 681년 07월(음) ), 신문왕(神文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정명(政明)으로 문무대왕(文武大王)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자의(慈儀) 또는 〔의(儀)를〕 의(義)라고도 적는다.왕후(王后)이며, 왕비는 김씨(金氏) 소판(蘇判) 흠돌(欽突)의 딸이다. 왕이 태자였을 때에 〔그녀를〕 맞아들였으나 오래도록 아들이 없었고, 뒤에 아버지〔흠돌〕가 난을 일으킨 데에 연루시켜 궁 밖으로 내쳐졌다[出宮]. 문무왕 5년(665)에 태자가 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당(唐) 고종(高宗)이 사신을 보내 〔조칙을 내려〕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선왕(先王)의 관작(官爵)을 그대로 잇게 하였다.

신문왕이 죽다 ( 692년 07월(음) ), 가을 7월에 신문왕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신문(神文)이라 하고 낭산(狼山)의 동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8 신라본기 제8 신문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왕릉은 문무왕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사천왕사와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 남쪽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왕릉이 있는 지역은 경주와 울산을 연결해주는 7번국도가 지나 가는 주요 교통로이며, 삼국통일 후 적대관계였던 왜(倭)가 울산을 통해서 가장 빨리 공격해 올 수 있는 경로에 있다. 신문왕릉은 왜를 경계한 문무왕의 유지를 이어 받아 이곳에 왕릉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신문왕을 뒤를 이은 성덕왕, 효소왕을 비롯하여 원성왕, 신무왕 등 통일신라 전성기 왕릉들은 대부분 7번국도 주변에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왕릉 출입문>

왕릉은 둥글게 흙을 쌓은 봉토분으로 통일신라 왕릉 중에서는 규모가 큰 편이다. 봉본은 규모는 높이 7.6 m, 지름 29.3 m, 밑둘레가 92 m에 이른다. 봉분 밑둘레에는 잘 다듬은 화강석을 5단으로 쌓은 뒤 44개의 사다리꼴모양의 보호석을 설치해 놓고 있다. 삼국 통일 후 중국 문물을 받아들이던 시기에 조성한 왕릉으로 당나라 능묘제도가 본격적으로 적용되지는 않았다. 봉분 앞에 상석이 놓여 있고 둘레석을 제대로 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앞에 있는 제물을 올리는 상석>

OLYMPUS DIGITAL CAMERA<옆에서 본 상석>

OLYMPUS DIGITAL CAMERA<둘레석>

OLYMPUS DIGITAL CAMERA<뒷에서 본 모습>

신라 신문왕릉(神文王陵,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453-1
이 능은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 김정명)이 모셔진 곳으로 경주의 동남쪽에 있는 낭산(狼山)의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능은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으로 밑둘레 92 m, 지름 29 m, 높이 7.6 m 이다. 밑둘레에 벽돌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5단으로 쌓은 뒤 사다리 꼴로 생긴 44개의 보호석을 설치하였다. 동쪽에는 크고 긴 돌로 쌓은 상석이 있다. 신문왕은 문무왕(文武王)의 맏아들로 문무왕의 뜻을 이어받아 옛 백제와 고구려 백성을 융합하는데 힘썼고, 국학(國學)을 두어 인재를 양성하였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주 헌강왕릉(사적), 신라 49대 헌강왕

경북 경주시 남산동에 있는 신라 49대 헌강왕(재위 875~886년)의 무덤이다. 헌강왕은 신라 48대 경문왕의 아들이며 뒤를 이은 정강왕과 진성여왕이 동생이다. 불교와 학문을 장려했으며 재위기간 태평성대를 이룬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강왕릉과 함께 경주 남산 북동쪽 구릉 끝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 쇠퇴기에 조성한 소박한 왕릉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헌강왕릉(사적)>

헌강왕이 즉위하다 ( 875년 07월(음) ), 헌강왕(憲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정(晸)이고 경문왕(景文王)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문의왕후(文懿王后)이고, 왕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이다. 왕은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책 보기를 좋아하여 눈으로 한 번 본 것은 다 입으로 외웠다.

헌강왕이 죽다 ( 886년 07월05일(음) ), 〔12년(886)〕 가을 7월 5일에 왕이 죽었다. 시호는 헌강(憲康)이라고 하였으며,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 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헌강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왕릉은 높이 4.2 m, 지름 15.3 m 규모의 원형봉토분이며 둘레석으로 잘 다듬은 화강석을 4단으로 쌓고 있는 특이한 형태이다. 무덤은 도굴되었으며 수해를 입어 긴급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내부 형태가 확인되었다. 내부는 관이 놓여 있는 석실이 있으며 천장은 둘글게 모아져 있다. 석실과 연결된 널길은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무덤 앞에는 제단이 있던 자리가 남아 있으며 봉문 주위에는 담장이 있었던 흔적이 있다. 전성기 통일신라 왕릉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며 문,무인상을 비롯한 석물은 남아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둘레석>

OLYMPUS DIGITAL CAMERA<무덤 앞 제단이 있던 자리>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주변 담장이 있던 자리>

OLYMPUS DIGITAL CAMERA<헌강왕릉 들어가는 길, 주변 소나무숲>

OLYMPUS DIGITAL CAMERA<왕릉 입구>

신라 헌강왕릉(憲康王陵,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 55
이 능은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 김정)을 모신 곳이다. 봉분 높이 4 m, 지름 15.8 m로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이며, 봉분 하부에 4단의 둘레돌을 돌렸다. 내부 구조는 연도가 석실의 동쪽 벽에 치우쳐 있으며, 석실의 크기는 남북 2.9 m, 동서 2.7 m이다. 벽면은 비교적 큰 깬돌을 이용하여 상부로 갈수록 안쪽으로 기울게 모서리를 죽이는 방식으로 쌓았다. 석실 입구에 돌문, 문지방, 폐쇄석, 묘도를 갖추고 있으며, 연도의 크기는 길이 142 cm, 너비 128~9 6cm이다. 석실 내에는 서벽에 접해서 2매의 판석으로 된 시상석이 있다. 헌강왕은 경문왕(景文王)의 태자로서 문치(文治)를 잘 하였으며, 이 시기에 처용무(處容舞)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왕위에 있는 동안 태평성대를 이루었는데, 거리마다 노래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일본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을 바칠 정도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 지냈다” 고 기록되어 있다. 1993년 왕릉 내부가 조사되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