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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쌍릉(사적 87호),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능으로 추정되는 곳

전북 익산시 석왕동에 있는 쌍릉(사적 87호)이다. 2기의 무덤이 남북으로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 쌍릉이라고 부른다. 쌍릉은 능산리고분군과 같은 굴식돌방무덤으로 남쪽에 있는 것을 소왕묘, 북쪽의 것을 대왕묘라 부른다. 일제강점기 이전에 도굴되어 나무로 만든 목관 외에는 유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복원된 목관의 형태나 관못, 꾸미개 등은 능산리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거의 비슷하다. 무덤의 구조나 출토 유물, 주위에 있는 미륵사지나 왕궁리유적 등을 고려해 볼 떄 백제 무왕과 왕비의 능으로 추정되고 있다.

익산은 백제 왕실이 멸망하기까지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어 왔던 지역으로 왕궁리유적.쌍릉.미륵사지.제석사지 등 백제 무왕(재위, 600~641년)과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왕궁리 유적은 무왕의 천도설과 관련된 곳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쌍릉은 7세기에 만들어진 돌방무덤으로 부장된 나무널은 무령왕릉 나무널과 같은 일본산 금송으로 만들어졌다. 미륵사는 미륵신앙을 배경으로 세워진 당대 최대 규모의 사찰이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익산 쌍릉(사적 87호). 부여 능산리고분과 비슷한 굴식돌방무덤이다. 백제말 무왕과 선화공주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공원으로 조성된 쌍릉 능역. 백제 무왕이 왕궁으로 조성했던 왕궁리유적에서 서쪽으로 2 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익산 토성이 있는 오금산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미륵사지는 이곳에서 북쪽으로 4 km 정도 떨어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왕묘가 있는 북쪽편 숲. 평지같은 낮은 구릉에 능을 조성했는데, 능산리고분과 비슷한 입지조건을 갖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2기의 능 중 북쪽에 위치한 대왕묘. 봉분은 지름 30 m, 높이 5 m 정도이다. 봉토 주위에 호석을 두른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발굴당시 유물은 도굴 당했으나 나무로 만든 관이 일부 남아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쪽편 소왕묘와 연결되는 숲길.

OLYMPUS DIGITAL CAMERA소왕묘도 같은 양식의 무덤으로 봉문은 지름 24 m, 높이 3.5m 정도이다.

익산 쌍릉, 사적 87호
이 두 능은 대왕릉과 소왕릉을 가리키는 것으로 백제말기 무왕(600~641년)과 선화공주의 능으로 추정되며, 좌향은 남향이다. 1917년 발굴조사 결과에 의하면 원형의 봉토 주위에는 호석(護石)을 두른 흔적이 있으며, 내부에는 석실이 마련되어 있다. 대왕릉의 현실은 장방형으로 벽은 화강암 판석을 다듬어 세웠으며 천정과 벽 사이에 육각형의 말각부재를 끼워 구축하였다. 현실 중앙에는 화강암의 관대가 있는데,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모양으로 그 위에 둥근 뚜껑을 덮은 목관이 놓여 있었다. 소왕릉은 전면 중앙에 짧은 연도가 있으며 입구는 판석으로 막아 놓았다. 현실의 길이 3.16 m, 너비 1.24 m, 높이 1.58 m이다. 두 능은 모두 동시대의 것으로 발굴조사 이전에 도굴 당하였으나 부패된 목관과 토기 등이 수습되어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출토유물과 현실의 규모 및 형식이 부여 능산리 고분과 비슷하여 백제 말기의 형식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널꾸미개와 널못, 7세기 전반, 익산 쌍릉, 1. 금동밑동쇠, 3. 금동 널못

OLYMPUS DIGITAL CAMERA널꾸미개와 널못, 7세기 전반, 익산 쌍릉, 1. 금동밑동쇠, 2.금동 널꾸미개,

OLYMPUS DIGITAL CAMERA능산리고분에서 출토된 금동 널꾸미개, 쌍릉에서 출토된 것과 거의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목관
널꾸미개와 금동 밑동쇠는 목관의 뚜껑과 몸체를 장식하는 부속품입니다. 꾸미개의 윗부분에는 도금된 장식에 월계형 꽃무늬가 뚫려 있습니다. 아랫부분에 부착된 장방형판에는 원형의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관 뚜껑에서 몸체로 꾸미개를 내리꽂고, 측면에서 금동 널못을 장방형판의 원형 구멍에 횡으로 꽂아서 목관의 몸체와 뚜껑을 결합하였습니다. 부여 능산리 7호분과 익산 쌍릉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세계유산백제, 국립중앙박물관특별전,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1. 나무 베개 편, 7세기전반, 익산 쌍릉, 국립전주박물관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으나, 한 면이 곡선을 이루고 있어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베개로 추정됩니다. 일부 금박이 남아 있으며, 적외선 촬영 결과 넝쿨무늬 형태의 문양도 확인되었습니다. (세계유산백제, 국립중앙박물관특별전,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2. 옥 꾸미개, 7세기 전반, 익산 쌍릉, 국립전주박물관

대왕묘 목관 안에서 출토된 옥으로 만든 꾸미개입니다. 당나라의 요패(腰佩)에 관한 규정에 의하면, 올제 요패는 문무관 3품 이상의 최고위 관료나 왕족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대왕묘 출토 꾸미개는 백제의 최고 지배층이 사용한 물품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세계유산백제, 국립중앙박물관특별전,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3. 목관 뚜껑과 금동 밑동쇠, 7세기 전반, 익산 쌍릉, 국립전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4. 사발, 7세기 전반, 익산 쌍릉, 국립전주박물관

대왕묘 관대의 남쪽 아래에서 엎어진 상태로 놓여 있었습니다. 바닥이 둥글고 몸통이 곡선상으로 조금씩 벌어져 오르다가 구연부에서 가볍게 꺾입니다. 이러한 기형과 제작 기술은 부여를 중심으로 한 사비기 고분이나 건물 터 보다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 지역에서 더 자주 발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익산 왕궁리 유적이나 미륵사지에서 비슷한 형태의 토기들이 다수 출토되어 7세기 익산 지역의 특징이 반영된 토기로 보는 견해와 신라계 토기로 보는 견해가 함께 제시되고 있었습니다. (세계유산백제, 국립중앙박물관특별전, 2016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국립중앙박물관

구리 동구릉 경릉(景陵, 사적 193호), 조선 24대 헌종과 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사적 193호)에 있는 경릉(景陵)이다. 조선 24대 헌종과 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이다. 왕과 왕비들의 능이 나란히 배치된 삼연릉이다. 헌종은 구한말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를 보냈던 왕으로 어린 시절에 왕위에 올라 권문세가에 시달렸던 대표적인 왕이다. 후사가 없어 강화도령이라 불렸던 철종이 왕위를 이었다. 효현왕후 사후 선조의 목릉(穆陵)이 있었던 자리에 별도 능역을 조성하지 않고 이곳에 왕릉을 조성한 것으로 보이며, 헌종과 계비 같은 사유로 이곳에 같이 능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구한말 세도정치 시기 왕권이 얼마나 약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동구릉(사적 193호)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1408년에 승하하면서 조성한 건원릉을 중심으로 역대 왕과 왕후의 능 9기가 조성되어 있다. 동구릉에는 한 분만 모신 단릉, 두분을 모신 쌍릉, 한곳에 산줄기를 달리해서 모신 동원이강릉, 두분을 함께 모신 합장릉, 세분을 나란히 모신 삼연릉이 있어 다양한 모습의 왕릉을 볼 수 있다. 동구릉에 왕릉을 조성한 왕으로는 태조를 비롯하여 5대 문종과 왕비, 14대 선조와 왕비,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18대 현종과 왕비, 21대 영조와 왕비, 추존왕인 문조와 왕비, 24대 헌종과 왕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동구릉 경릉. 조선 24대 헌종과 두분의 비가 같이 모셔진 삼연릉이다. 이곳은 원래 선조의 목릉이 있었던 자리이다. 구한말 세도정치기에 허약했던 왕실을 권위를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헌종.효현왕후.효정왕후 경릉
경릉은 조선 24대 왕 헌종과 두분의 비가 모셔진 능으로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세개의 봉분이 이어진 삼연릉 형식의 능이다. 헌종(1827~1849)은 1834년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15년 동안 임금 자리에 있었다. 효현왕후는 1837년(헌종3) 왕비가 되었고 1843년에 돌아가셔서 현 경릉의 첫 주인이 되었으며, 6년 뒤 현종이 돌아가시자 쌍릉 형식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이후 헌종의 두번째 비인 효정왕후가 1903년에 돌아가시자 삼연릉 형식으로 조성하게 되었다. 경릉에는 표석이 하나 있는데, 이는 1908년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진종, 헌종, 철종을 황제로 올리면서 제작한 비이다. 따라서 경릉 비석에는 ‘대한’과 ‘황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이 글자는 기존의 정릉 표석을 깎아서 다시 새긴 것이다. 표석의 전면과 후면에 새긴 글은 규장각 대재학 김학진이 지었고, 글씨는 당시 명필인 윤용구가 썼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능역 입구 정자각.

OLYMPUS DIGITAL CAMERA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 양쪽에도 박석을 깔아 놓은 것이 특이하다.

OLYMPUS DIGITAL CAMERA산릉제례를 올리는 공간인 정자각.

OLYMPUS DIGITAL CAMERA정자각 앞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왕릉 주인을 알려주는 표석이 세워진 비각.

OLYMPUS DIGITAL CAMERA왕과 왕비, 계비의 봉분이 나란히 배치된 삼연릉이다.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중국 베이징 명13릉 정릉(Dingling, 定陵), 명나라 13대 신종 만력제의 능

중국 베이징 명13릉에 있는 정릉(Dingling, 定陵)이다. 명나라 13대 신종 만력제(萬曆帝, 1563~1620년)의 능이다. 명13릉은 만리장성이 있는 천수산록 아래 창평구에 위치하고 있는 명나라 13명 황제의 능이 있는 곳이다. 대부분 개방되어 있지 않으며, 영락제의 장릉. 윤경제의 소릉. 만력제의 정릉 만이 일반에 공개되어 있으며 그 중 정릉은 시신이 묻혀 있던 내부 지하궁전도 공개되어 있다. 중국 황제의 능은 조선 왕릉에 비해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는 느낌을 준다. 능을 조성하는 데 있어서 봉분이 크고 잘 보이지 않는 등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 있지만, 기본 구성에 있어서 유교적 예법에 따르고 있어 전체적으로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다.

만력제는 명나라를 가장 오랜 기간동안 통치했던 황제로 돈을 밝혀서 내정을 문란하게 한 점과 과도한 임진왜란 개입으로 명나를 멸망케 한 점 등으로 중국내에서는 평판이 좋지 않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 때 적극적으로 도와준 점으로 인해서 후대에 송시열을 비롯하여 친명사상을 갖게 동기가 되게 한 황제로 명나라 멸망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그를 기리는 서원 등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SANYO DIGITAL CAMERA명13릉 중 지하궁전까지 일반에 개방되어 있는 정릉(Dingling). 명나라 13대 만력제의 능으로 조선왕릉과 조성방식 등 전체적으로 비교해 볼 수 있는 곳이다. 크고 웅장한 면모를 보이지만 유교적 특성이 반영되어 전체적으로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이자 국가 4A급 관광지로 전국중점문물보호물(단위)이며, 전국 중점 관광 명승지이다. 1959년에 대외적으로 개방되었으며, 1991년에는 국가 여행국에서 “중국 관광 명승지 40선” 중의 하나로 선정했다. 1992년 평가위원회는 “세계에서 보존 상태가 가장 완벽한 황제 고분 보유량이 가장 많은 고분군” 이라고 평했다. 시내에서 약 5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베이징(北京, 북경)시 창핑취(昌平区, 창평구) 내의 톈서우산루(天寿山麓, 천수산록)에 위치해 있으며, 버스를 이용해 갈 수 있다. <출처: 베이징 관광국>

SANYO DIGITAL CAMERA정릉의 입구에는 삼도의 형식에 맞추어 대리석으로 만든 3개의 다리를 볼 수 있고, 그 아래로는 작은 하천이 흐른다. 다리 상판은 울퉁불퉁한 판석을 깔아 놓고 있는데  예법에 맞게 의도적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릉은 앞 다리와 하천을 금천교와 금천으로 부르는데 중국은 금수교와 금수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옆쪽 작은 다리.

SANYO DIGITAL CAMERA다리 아래를 흐르는 금수.

SANYO DIGITAL CAMERA금수교를 건너면 신도비가 있는 곳까지 일직선으로 삼도를 깔아 놓고 있다. 양쪽에 심어놓은 가로수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가운데 신도는 편평하게, 황제와 제후왕이 다니는 양쪽길에는 울퉁불퉁한 박석을 깔았다.

SANYO DIGITAL CAMERA삼도는 황제의 업적을 세겨놓은 신도비 앞까지 연결된다. 신도비는 거북받침돌에 비몸과 머릿돌을 올려 놓은 당나라 비석의 형식을 하고 있다.

정릉 삼문,

신도비가 세워진 광장을 지나면 출입문이라 할 수 있는 삼문이 나타난다. 조선 왕롱 삼도가 시작되는 홍살문과 같은 기능을 하는 곳으로 보이며, 현재는 매표소 역할을 하고 있다. 삼문 앞에는 광장은 산릉제례에 참여하는 인원을 제외한 수행원들이 대기하던 장소로 보인다. 황제를 수행하는 많은 인원이 대기할 수 있도록  넓은 광장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삼문을 지나면 삼도가 깔려있고, 조금 걸어들어 가면 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월대를 볼 수 있다. 그 양쪽으로는 원래 담장이 있어 능역을 분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왕릉에서 볼 수 없는 건물터인데 황제가 참배를 준비하던 공간이 아닌가 생각된다. 월대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는 자금성 궁궐 건물 월대와 비슷하게 생겼다. 자금성에 비해서 낡아 보이는 것이 그 내력을 알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이 월대를 통과하면 정면에 비각으로 보이는 높은 건물과 능을 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정릉 출입문 앞 광장. 삼도는 신도비까지만 연결되어 있고, 광장에는 삼도가 보이지 않는다.

SANYO DIGITAL CAMERA정릉 입구의 유리기와 지붕을 하고 있는 삼문. 옛 출입문을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정릉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삼문에서 첫번째 건물이 있던 월대에서 내려다 본 삼문. 대리석으로 만든 삼도로 연결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월대와 계단이 남아 있는 건물이 있었던 자리. 출입문의 역할을 겸했던 것으로 보이는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 왕릉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이다.

SANYO DIGITAL CAMERA대리석으로 만든 계단. 화려한 문양을 장식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계단 기둥에 새겨진 장식. 봉황이 구름 사이로 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자금성 월대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용을 비롯하여 동물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 누조(漏槽). 단순한 형태의 우리나라 건축물과는 달리 화려하고 섬세하게 조각했다.

SANYO DIGITAL CAMERA월대 면적이 넓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삼문 형태이 출입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목조 건축물 기둥을 올려 놓았던 주춧돌을 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윌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삼문. 삼도 양쪽에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

내삼문이라 할 수 있는 첫번재 건물이 있었던 월대 계단을 내려오면 삼도는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그 앞으로는 제사를 올리는 조선왕릉 정자각에 해당하는 큰 건물이 있었던 월대를 볼 수 있다. 대리석으로 월대를 쌓아 놓고 있으며, 궁궐 건물과 비슷한 형태이다. 월대에 올라서면 성문 문루같이 생긴 누각이 보이고 그 뒷편 전체가 시신이 모셔진 봉분에 해당한다.

SANYO DIGITAL CAMERA월대에서 조선왕릉 정자각에 해당하는 건물이 있었던 월대까지 삼도가 연결된다. 멀리 봉분 앞에 있는 비석이 있는 누각이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월대를 오르는 계단. 가운데에는 자금성 정전 출입문처럼 답도가 설치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계단 가운데 있는 답도. 용광과 봉황이 구름속을 날고 있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자금성 계단의 답도에 비해 낡아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월대를 오르는 계단.

SANYO DIGITAL CAMERA월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삼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월대와 그 사이를 연결하고 있는 삼도.

SANYO DIGITAL CAMERA월대 위에 심어진 수령이 수백년 된 것으로 보이는 향나무. 조선왕릉 정자각과는 달리 나무를 심어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용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 배수구인 누조.

SANYO DIGITAL CAMERA월대 위에는 산릉제례를 올리는 정전에 해당하는 큰 건물이 있었던 주춧돌들이 남아 있다. 앞쪽에는 정자각 배위청처럼 지붕이 있는 툇간은 없고 넓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월대 양쪽으로 담장이 있어 봉분이 있는 곳과 공간을 분리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능역내 심어진 다양한 수목들.

봉분과 제단이 있는 영역

명13릉 정릉은 조선 왕릉과는 달리 봉분의 형태라기 보다는 편평한 동산과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정자각 역할을 하는 건물을 내려서면 삼도가 석물이 있는 제단까지 이어져 있고, 홍살문처럼 생긴 문이 제단 앞에 위치하고 있다.  제단에는 향로 모양의 대리석으로 만든 석물 양쪽으로 제기처럼 생긴 석물이 양쪽에 2개씩 놓여 있다.  한국과 중국의 풍습의 차이인지, 황제와 제후의 예법이 틀려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왕릉과는 다른 부분이 많다. 제단 뒷편에는 능의 주인을 알려주는 표석으로 보이는 비석이 있는 누각이 있고, 뒷편으로 능이 있는 영역을 구분하는 원형의 성벽을 쌓아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정자각에 해당하는 건물 계단을 내려서면 조선왕릉 입구 홍살문처럼 생긴 출입문이 있다. 봉분앞에 별도 출입문을 두지 않는 조선왕릉과 다른 부분이다.

SANYO DIGITAL CAMERA홍살문처럼 생긴 출입문을 지나면 2층 문루가 있는 건물로 삼도가 연결된다. 건물 앞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석물들이 놓여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조선왕릉 봉분 앞 석물과 같은 역할, 가운데 향로처럼 생긴 석물을 두고 그 양쪽에 제물을 올렸던 제기로 보이는 석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제단 뒷편으로 지하궁전이라고도 불리는 봉분을 출입하는 성문에 해당하는 문루와 바깥세상과 공간을 분리하는 역할의 성벽을 쌓아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문루 양쪽으로 성벽을 오르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이 길을 통해 능의 지하궁전으로 들어갈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
문루 내부에 있는 비석.

만력제의 정릉은 명13릉 중 지하궁전이라는 봉문 내부가 개방되어 있다. 중국 황제의 능은 조선 왕릉과는 달리 작은 봉분이 아니라 원형의 작은 동산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정릉 봉분은 자금성처럼 하나의 궁전을 구현 놓았은 느낌이다. 능 전체를 높은 성벽으로 두르고 있으며, 입구에는 문루를 두고 그 안에는 비석을 세워 놓고 있다. 문루를 지나 성벽을 따라 봉분 뒷편으로 돌아가면 지하궁전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지하궁전 내부는 여러개의 방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방마다 궁전의 방처럼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여러가지 집기들을 두고 있다. 내부는 생각보다 크고 넓으며, 제일 뒷편에 황제의 관이 있었던 자리가 있는 방이 있고, 앞쪽으로 여러가지 제기와 집기들이 있었던 여러개의 방이 있다. 벽화와 같은 장식은 거의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만력제(萬曆帝, 1563년 9월 4일 ~ 1620년 8월 18일)는 명나라의 제13대 황제이다. 휘는 익균(翊鈞)이다. 융경제의 3남이다. 1572년부터 1620년까지 48년간 재위하였다. 그의 치세는 역대 명나라 황제들의 통치 기간 중 가장 길며, 명나라가 건국된 지 200년쯤 지나고 왕조가 서서히 몰락해가는 시기였다. 묘호는 신종(神宗)이고, 시호는 범천합도철숙돈간광문장무안인지효현황제(範天合道哲肅敦簡光文章武安仁止孝顯皇帝)로, 그는 1572년부터 162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572년부터 1582년까지 장거정(張居正)이 섭정하였고 1582년부터 1620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하였다. <출처: 위키백과>

SANYO DIGITAL CAMERA봉분 주위에는 중국 성곽의 일반적인 모습인 마차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은 통로가 있고, 병사들이 지키고 있다는 성벽 바깥쪽으로 여장이 설치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계단 이외에 능역을 출입하는 출입문.

SANYO DIGITAL CAMERA뒷편 숲에서 보이는 문루.

SANYO DIGITAL CAMERA정릉 봉분 뒷편 성벽. 원형으로 성벽을 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내부로 들어가는 출입문.

SANYO DIGITAL CAMERA만력제 정릉 지하궁전 내부. 상당히 큰 규모의 석실이다. 내부에는 여러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만력제 지하궁전 뒷편 큰 방. 이곳에 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대리석으로 만든 큰 의자.

SANYO DIGITAL CAMERA도자기로 만든 제기

SANYO DIGITAL CAMERA지하궁전 내 여러가지 기물들.

SANYO DIGITAL CAMERA지하궁전을 나가는 출구. 지하궁전은 다양한 수목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 작은 동산 아래에 있다.

<출처>
1. 두산백과
2. 위키백과

남양주 사릉(思陵, 사적 209호), 조선 6대 단종 비 정순왕후의 능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에 있는 사릉(思陵, 사적 209호)이다. 조선 제6대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능이다. 정순왕후는 1968년(숙종 24)에 단종이 왕으로 복위되면서 ‘정순왕후’라 봉해졌고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일생을 보냈다 하여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붙였다. 추존왕이나 단종의 장릉과 마찬가로 사릉에는 병풍석과 난간이 설치되지 않았으며, 석물 중 무석인은 생략되었다.

정순왕후는 1440년(세종 22)에 태어나 1454년(단종2)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노산부인으로 강등되었다가 단종인 죽은 후 왕실을 떠나 작은 집을 지어 평생 흰 옷만 입고 수절하였다고 한다. 1521년(중종 16)에 82세로 죽었다. 후손이 없어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 시가 묘역에 묻혔다. 정순왕후는 사림들이 집권세력으로 등장했던 종종 때까지 꽤 오래 살았기때문에 왕릉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예우를 갖춘 형태의 묘역이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사릉 봉분 주위에 경혜공주 시가인 해주정씨 묘역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양주 사릉(사적 209호). 조선 6대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능이다. 정순왕후는 세조 집권후 노산부인으로 강등되어 서민으로 살다가 중종 때 죽었다. 단종 누이인 경혜공지 시가인 해주 정씨 묘역에 묻혔다. 사림이 집권세력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중종 때 묘역이 조성되어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고 있다.

남양주 사릉, 사적 209호,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
사릉은 조선 제6대 임금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의 능이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죽임을 당하자 왕실을 떠나 작은 집을 지어 평생 흰 옷만 입으면서 고기와 생선은 먹지 않고 수절하였다고 한다. 왕후가 후사없이 승하함에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시가인 해주 정씨가의 묘역에 장례하고 제사도 정씨가에서 지내왔다. 1968년(숙종 24)에 단종이 왕으로 복위되면서 ‘정순왕후’라 봉해졌고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일생을 보냈다하여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붙였다. 훗날 영조는 정순왕후가 궁궐을 나가 평생을 보낸 정업원(淨業院)터( 현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비각을 세우고 단종이 있는 영월 쪽을 좀 더 잘 보기 위해 올랐던 곳이라고 알려진 뒷산 바위에 ‘동망봉(東望峰)’이라는 글을 친필로 새겼다. <출처: 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사릉으로 들어가는 숲길.

OLYMPUS DIGITAL CAMERA산릉제례 공간인 정자각. 단종이 복권된 숙종때 왕릉의 모습을 갖추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자각 월대를 오르는 계단.  정자각 월대 규모가 다른 왕릉에 비해 약간 작은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자각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연결되는 참도.

OLYMPUS DIGITAL CAMERA정자각 앞 수라간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병풍석이나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추존왕이나 단종의 장릉처럼 무석인을 생략했다.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아래 왕릉 주인을 알려주는 표석이 세워진 비각

OLYMPUS DIGITAL CAMERA사릉이 있는 이곳은 단종 누이 경혜공주의 시가인 해주 정씨가의 묘역이다. 지금도 사릉 능역 안에는 해주 정씨 집안 무덤들이 여러곳 남아 있다. 왕릉으로 격상되기 전까지는 제사도 해주 정씨 집안에서 지내왔다고 한다.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구리 동구릉 숭릉(崇陵, 사적 193호), 조선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사적 193호)에 있는 숭릉(崇陵)이다. 조선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이다. 왕과 왕비의 능이 나란히 배치된 쌍릉이다. 숭릉은 산릉제례 공간인 정자각 양쪽에 통로 역할을 하는 익랑을 두고 있으며, 툇간 역할을 하는 배위청도 3칸이다. 이는 효종 영릉 천장과 숭릉 조성 시기가 겹치면서 국장을 간소하게 치르기 위해 임시빈전을 세우지 않고 정자각을 크게 지어 빈전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왕릉 석물도 효종 영릉을 이전하면서 묻어두었던 석물들을 다시 사용하였다.

현종은 효종의 북벌계획을 중단하고 훈련별대를 창설하는 등 군비증강에 힘썼다. 또한 국가재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대종법을 실시하였고 동철활자를 주조하였다. 현종이 재위했던 시기는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세력과 허목을 중심으로 한 남인세력간 당쟁이 심했던 시기로 특히 장례절차 문제로 정권이 교체되기도 하였다. 이런 까닭에 헌종의 능은 논쟁을 피하기 위해서 태조의 능역인 동구릉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동구릉(사적 193호)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1408년에 승하하면서 조성한 건원릉을 중심으로 역대 왕과 왕후의 능 9기가 조성되어 있다. 동구릉에는 한 분만 모신 단릉, 두분을 모신 쌍릉, 한곳에 산줄기를 달리해서 모신 동원이강릉, 두분을 함께 모신 합장릉, 세분을 나란히 모신 삼연릉이 있어 다양한 모습의 왕릉을 볼 수 있다. 동구릉에 왕릉을 조성한 왕으로는 태조를 비롯하여 5대 문종과 왕비, 14대 선조와 왕비,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18대 현종과 왕비, 21대 영조와 왕비, 추존왕인 문조와 왕비, 24대 헌종과 왕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조선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숭릉이다. 임시 빈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정자각을 크게 짓고, 효종 영릉에 사용되었던 석물을 사용하는 등 간손하게 조성된 왕릉이다.

현종.명성왕후 숭릉
제18대 현종(1641~1674)과 그의 비 명성왕후(1642~1683)가 안장되어 있는 숭릉은 동구릉에서 네 번째로 조성된 왕릉이다. 현종 숭릉의 특이한 점은 숭릉 정자각에는 양쪽에 벽이 없는 익랑이라는 공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양식을 가진 왕릉은 숭릉을 비롯하여 인경왕후 익릉, 장렬왕후 휘릉, 경종 의릉까지 4기가 있다. 이 중 숭릉 정자각 지붕은 유일하게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또한 숭릉 석물은 1659년 효종 영릉에서 사용하였던 석물을 다시 사용하였다. 효종 영릉은 본래 동구릉에 있다가 1673년(현종14)에 경기도 여주군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전에 사용하였던 석물을 모두 묻어 두었는데, 이듬해에 현종 숭릉을 조성하면서 효종 영릉의 석물을 꺼내어 다시 사용하게 된다. 이 내용은 숭릉이 만들어진 과정을 기록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숭릉산릉도감의궤>에 남아 있는데, 숙종과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석물을 새로 만들게 되면 백성의 노고가 가중될 것을 염려하여 다시 쓸것을 명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숭릉 들어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산릉제례을 올리는 공간인 정자각(보물 1742호). 이 정자각은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하게 남은 팔작지붕 정자각이다. 기존 정자각과는 달리 정전 5칸, 배위청 3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숭릉을 조성하던 시기와 효종 영릉을 여주로 천장하는 시기가 겹치면서 임시 빈전을 짓지 않고 정자각을 임시빈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기존 정자각보다 크게 만들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자각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숭릉 입구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연결되는 참도.

OLYMPUS DIGITAL CAMERA정자각 앞 수복방 건물.

OLYMPUS DIGITAL CAMERA왕릉의 주인을 알려주는 표석이 세워진 비각.

OLYMPUS DIGITAL CAMERA봉분은 하나의 담장 안에 왕과 왕비이 능이 나란히 있는 쌍릉 형식을 하고 있다. 석물들은 동구릉에 있던 효종 영릉을 여주로 옮기면서 묻어두었던 것들을 다시 사용하였다.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