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원찰

화성 용주사, 정조가 사도세자 현륭원 원찰로 삼은 사찰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 화산 아래에 위치한 용주사(龍珠寺)이다. 정조가 용주사를 사도세자의 현륭원을 지키는 원찰로 삼으면서 사실상 세러 창건되었다. 여주 신륵사, 서울 봉은사와 함께 왕릉을 지키는 대표적인 원찰이다. 현 사찰 전각 대부분은 정조 때 새로 지은 것들이다. 용주사에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위패가 모셔졌으며, 정조 사후에 정조와 효의왕후의 위패가 봉안되었다. 특히 이 곳에서 부모의 은혜를 강조한 『부모부모은중경』 목판이 제작,보관하고 있어 정조의 효심을 느낄 수 있다. 수원화성에서 현릉원으로 가는 능행길에 위치하고 있어 정조가 현릉원을 행차했을 때 잠시 들렀던 곳으로 보인다.

용주사는 일반 사찰과는 유교식 사당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사찰 입구앞 왕릉이나 서원, 향교처럼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사찰 출입문인 천보루는 사당처럼 삼문의 형식을 하고 있으며, 궁궐 전각등에 사용된 형태의 돌기둥을 사용하고 있다. 삼문에서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던 호성전까지는 박돌을 깔아 놓은 신도가 조성되어 있다. 주불전인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여러 전각들에서 당시 궁궐이나 관아건축 형식이 반영되어 있다. 당대의 화가인 김홍도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 사찰 건축에 관련되어 있으며,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국보급 문화재인 용주사 동종(국보 120호)이 이 곳에 있다.

SANYO DIGITAL CAMERA화성 용주사.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 현륭원 원찰로 삼으면서 크게 중건한 사찰이다. 일반 사찰과는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 위채를 모신 사당인 호성전을 두고 있으며, 홍살문이 세워져 있는 등 유교적인 특징들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 사찰이다.

SANYO DIGITAL CAMERA용주사 천왕문. 원래 있던 출입문은 아니고 최근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용주사 들어가는 길.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에 들어가는 길에 판석을 깔아 놓고 있다. 길 양쪽으로는 글을 새겨놓은 돌들이 줄지어 있다.

용주사는 정조가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시고 명복을 빌기 위해 원찰로 중건한 사찰이다. 다른 사찰과 다른 원찰로서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 출입문인 삼문과 홍살문, 그리고 길에 깔아 놓은 판석일 것이다. 삼문은 보통 궁궐이나, 사당, 서원 등에 사용하는 유교적인 예법을 반영한 문으로 사찰 출입문으로 사용하지 않지만 원찰 역할을 하는 봉은사 등에만 있는 양식이다. 삼문 양쪽으로는 중건 당시 세워진 행랑채가 있다. 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석탑이 있고, 서쪽편에는 최근에 만든 범종이 있는 불음각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 용주사 입구에 세워진 홍살문. 일반적인 사찰에서 볼 수 없는 왕릉, 서원, 향교 등에 세워지는 유교적인 성격의 출입문이다.

SANYO DIGITAL CAMERA용주사 출입문. 서원이나 사당처럼 삼문의 형식으로 문간채 사이에 솟을대문 형태로 지어졌다. 중앙문은 닫혀 있고, 혼령이 드나들 수 있도록 크게 틈이 있다. 양쪽에는 능행시 수행원들이 잠시 묵을 수 있도록 긴 행랑채를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용주사 출입문을 지키는 해태상.  우리 민족의 여유있는 정서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삼문은 창건 당시에 세워진 건물로 여러 차례의 개수를 거쳐 현재는 15평이고 좌우의 행랑은 총 40평에 달합니다.

SANYO DIGITAL CAMERA삼문을 들어서면 가운데 오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판석이 깔려 있는 신도는 사도세자의 위패가 모셔진 호성전까지 연결된다.

SANYO DIGITAL CAMERA천보루는 정조가 용주사를 중건할 때 세워진 건축물로 일반 사찰 누각과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기둥을 받치는 초석은 석조기둥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경복궁 경회루의 1층 기둥을 연상시키는 형태로 궁궐 건축 양식을 사용했다고 볼 수있다.

SANYO DIGITAL CAMERA천보루 기둥을 받치는 긴 초석.

SANYO DIGITAL CAMERA천보루 양쪽에는 요사채로 사용하는 건물이 회랑처럼 연결되어 있다. 사찰 건물이 아니라 권문세가의 저택을 연상시킨다.

SANYO DIGITAL CAMERA용주사 주불전인 대웅보전. 조선후기 정조때 지은 건물로 당대의 사찰 건축과 궁궐 건축 기술이 합쳐진 건물이다. 앞면 3칸의 건물로 화려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화려한 단청에 용머리를 새겨 놓고 있으며, 금빛 글씨가 빛나는 ‘대웅보전’이라는 글씨가 젹힌 현판이 걸려 있다. 내부에는 김홍도가 관여했다고 알려진 탱화와 닫집 등이 있다. 대웅전 하단부 초석은 궁궐 건물에서 사용하는 장대석을 사용하고 있으며, 지붕에 치미를 사용하는 등 다른 사찰의 불전과는 다른 점이 많다.

SANYO DIGITAL CAMERA대웅전 옆 종각에 있는 동종(국보 120호). 상원사 동종, 성덕대왕 신종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범종이다. 신라종 양식을 따르고 있는 고려초기에 만들어진 동종이다.  외형에서 보여주는 조형미나 겉면에 새겨진 비천상 등의 조각수법이 뛰어난 걸작이다.

 

SANYO DIGITAL CAMERA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인 호성전. 이 곳에는 사도세자, 혜경궁홍씨, 정조대왕, 효의왕후 김씨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매일 여섯번의 재를 올렸다고 한다. 경내의 판석이 깔린 신도를 비롯하여 삼문, 홍살문 등 유교적 특성이 있는 건물들이 있는 이유가 호성전에서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다. 당시 정조가 용주사로 여러번 행차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건물은 한국전쟁때 불타버린 것을 새로 중건한 것이다.

SANYO DIGITAL CAMERA용주사 지장전.

SANYO DIGITAL CAMERA천불전.

SANYO DIGITAL CAMERA시방칠등각

SANYO DIGITAL CAMERA대웅전 앞 요사채.

SANYO DIGITAL CAMERA맞은 편 종무소 건물

화성 용주사 부모은중경-20161111용주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보물 1754호). 정조대에 조성된 것으로 목판, 동철판,석판의 세종류가 있다. 김홍도가 제작에 참여하는 등 예술적ㅇ로도 상당히 수준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조의 부모에 대한 효심이 반영된 문화재이다.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안성 서운산 청룡사, 인조 셋째아들 인평대군의 원찰로 삼았던 사찰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서운산 자락에 위치한 청룡사(靑龍寺)이다. 고려 원종 때(1265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고려말 나옹화상이 크게 중창하면서 청룡사라 불렀다. 나옹선사가 중창한 이후 공민왕의 초상을 모신 사찰이었으며, 조선후기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원찰이 되었다. 1900년대부터는 남사당패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부근에 지금도 남사당마을이 있다. 남사당패는 봄부터 가을까지 안성장터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 장터에서 공연을 하면서 생활을 하다가 추운 겨울에 이곳 남사당 마을로 돌아와 지냈다고 한다.

청룡사는 주불전인 대웅전을 중심으로 불전과 요사채들을 갖추고 있다. 건물들이 많지는 않지만 가람배치가 짜임새 있고 고풍스러운 사찰의 멋을 갖추고 있다. 대웅전(보물824호)은 고려말 사찰을 중창할때 처음 세워졌다고 하며, 조선후기 중건할 때 새로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조석가여래삼존상(보물 1789호), 영산회괘불탱(보물 1257호), 감로탱(보물1302호), 18세기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가 만든 동종(보물11-4호) 등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으며, 사찰 마당에는 세워진 고려시대 삼층석탑이 청룡사의 오랜 내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성 청룡사. 고려말 나옹선사가 크게 중창하면서 고려 공민왕 초상을 모시던 사찰이었다. 조선후기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원찰이 되면서 왕실과 관련이 있는 사찰이 되었다. 대웅전을 비롯하여 소조불상, 괘불, 동종 등 청룡사 소장 문화재들 또한 이 시기에 조성되었다. 주불전인 대웅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산신각 등 여러 불전과 요사채들이 배치되어 있다.

안성 청룡사(靑龍寺), 경기 안성시 서운면 청룡길
청룡사는 고려 원종 6년(1265) 명본국사가 대장암으로 창건, 그 후 공민왕 13년(1394) 나옹선사가 지정연간(1341~1367)에 이 산을 지나면서 지혜의 해가 거듭 빛나고 자비의 구름이 광채를 냄에 이 곳에 신비한 징조가 있겠다고 생각하시고 하루를 묵게 되었는데, 과연 꽃비가 내리고 상서러운 구름이 일면서 용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이 곳에 주석을 하시면서 절을 크게 중창하여 산 이름을 서운산이라 하고 절 이름을 청룡사라 명명하였다. 절 안에는 대웅전, 관음전, 관음청향각, 명부전 등이 있고, 대웅전 앞에는 명본국사가 세웠다는 삼층석탑이 있다. 대웅전은 다포계의 팔작집으로 고려말 공민왕 때 지어져 조선후기에 다시 지은 것으로 조선 후기의 기법과 양식을 잘 보존하여 보물824호로 지정되었다. 청룡사에서 유명한 것은 자연미를 살린 기둥이다. 구불구불한 아름드리나무를 껍질만 벗긴채 본래의 나뭇결 그대로 살려 기둥으로 세웠다. 사람이 만드는 건축물에 최대한 자연미를 살린 우리나라 건축의 한 특징을 보여준다. 청룡사는 공양왕의 초상화를 봉안하다가 세종19년(1437) 세종의 명에 의하여 고양으로 옮겼고, 후에는 인평대군의 초상화를 모시고 왕실의 태평을 비는 원찰로 삼았었다. 이곳은 조선 후기에 등장한 남사당패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이들은 인근 불당골에서 겨울을 지낸 뒤 봄부터 가을까지 청룡사에서 준 신표를 들고 기예를 뽐내며 안성장터를 비롯해 경기, 충청도 등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연회를 팔며 생활했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청룡사 출입문인 천왕문.

OLYMPUS DIGITAL CAMERA청룡사 주불전인 대웅전(보물824호), 앞면 3칸에 다포계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소박하면서도 화려하게 지어진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옆면에서 본 대웅전. 구불구불하게 자란 원목을 그대로 기둥으로 사용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웅전에 모셔진 소조석가여래삼존상(보물 1789호)이다. 석가여래를 본존불로 왼쪽에 보현보살상이, 오른쪽에 문수보살상이 배치된 삼존불상이다. 곡선적이면서도 투박한 조선후기 소조불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안성 청룡사 16-20161110
대웅전에 보관되어 있는 범종(보물 11-4호). 조선후기 여러 사찰의 범종을 제작했던 승려 사인비구가 제작한 범종이다. 청룡사가 왕실과 관련있었던 사찰임을 보여준다.

안성 청룡사 15-20161110청룡사 감로탱(보물 1302호). 감로탱은 조상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그린 불화이다. 숙종 때 제작된 것으로 인평대군 원찰로서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청룡사 삼층석탑
이 탑은 높이가 2.38m로 평면 사각형의 단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이 탑은 부분적으로 파손된 지대석 위에 3단의 받침이 기단을 받치고 있다. 기단은 4장의 돌로 만들어졌는데 각 면에 모서리 기둥과 버팀 기둥이 새겨져 있다. 탑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다른 돌로 만들어졌으며 탑몸돌의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이 조각되어 있다. 1층 탑신에 비해 2층과 3층 탑신의 높이가 급격하게 낮아져 비례가 흐트러져 봉니다. 지붕들은 경사가 급다가가 전각에 이르러 살짝 반전되었으며, 합각선이 뚜렷하다. 상륜부는 현재 남아 있지 않고 석탑에도 훼손이 있다. <출처:안성시청>

OLYMPUS DIGITAL CAMERA청룡사 삼층석탑. 단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아담하면서 정형화된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청룡사 대웅전 앞 마댕에 세워진 당간지주. 거대한 괘불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청룡사 연산회괘불탱(靑龍寺靈山會掛佛幀, 보물1257호)이다.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설법을 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이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보살, 제자, 제석천, 범천, 사천왕, 팔부중 등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지장보살을 모신 명부전.

OLYMPUS DIGITAL CAMERA산신각.

OLYMPUS DIGITAL CAMERA봉향각.

OLYMPUS DIGITAL CAMERA요사채인 지봉당(智峯堂)

OLYMPUS DIGITAL CAMERA지봉당 맞은편 종무소.

OLYMPUS DIGITAL CAMERA청룡사 경내 한쪽편에 우뚝 서 있는 고목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안성 칠현산 칠장사, 인목대비가 영창대군 원찰로 삼은 사찰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칠현산에 칠장사(七長寺)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하였으며, 고려초 혜소국사가 이곳에서 수행하면서 크게 중건하였다. 칠장사는 여러차례 중수가 있었는데, 조선중기 광해군의 압박을 받았던 인목대비가 아들 영창대군과 아버지를 위한 원찰로 삼으면서 크게 중창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경기지역에 있는 사찰 중에서는 상히 큰 규모이다. 주불전인 대웅전, 관음보살을 모신 원통전, 죽은이를 위한 공간인 명부전이 있으며, 여러동의 요사채 건물을 두고 있다. 중요 문화재로는 칠장사를 창건했다고 볼 수 있는 혜소국사비(보물 488호)가 있고, 오불회괘불탱(국보 296호), 삼불회괘불탱(보물 1256호), 봉업사 옛 절터에서 옮겨온 석조여래입상(보물 983호) 등이 있다.

고려초 혜소국사가 이 곳에서 수련할 때 찾아왔던 7명의 악인을 교화하였다 하여 칠장사라고 하며, 뒷편에 있는 산을 칠현산이라고 부른다. 칠현산에 대한 설화외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오는데, 궁예가 10세까지 활쏘기를 했다는 활터, 임꺽정이 갖바치스님 병해대사에게 바친 꺽정불이야기, 암행어사 박문수가 과거시험을 보기전에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 임진왜란때 가토기요마사가 혜소국사비를 칼로 베었다가 무서워서 도망갔다는 이야기 등 많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성 칠장사. 고려초 밀교의 일종인 유가밀교 고승이었던 혜소국사가 머물면서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로 자리잡았으며,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가 아들 영창대군을 위한 원찰로 삼으면서 크게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성 칠장사,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칠장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며, 7세기 중엽 신라 선덕여왕대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고려 현종 5년(1014)에는 혜소국사가 왕명으로 중창하였고 칠장사와 칠현산이란 이름은 혜소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7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현인으로 만들었다는 설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려 우왕9년(1383)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충주 개천사에 있던 고려의 역조실록을 이곳으로 옮겼을 정도로 당시 교계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였다. 인조 원년(1623)에는 인목대비가 아들 영창대군과 아버지 김제남을 위한 원찰로 삼아 크게 중수하였다. 현종 15년(1674), 숙종 30년(1704), 영조 원년(1725), 고종 15년(1878) 등 수차례 중건을 하였으며 1970년대 이후 지속적인 보수를 통해 지금의 가람을 이루고 있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과 원통전을 비롯한 15동의 건물과 석탑, 동종 등이 있으며, 국보 296호인 칠장사 오불회괘불탱을 비롯하여 혜소국사비, 철제당간 등 많은 지정문화재가 있다. 또한 오랜 역사와 함께 칠장사에는 여러 구전이 내려오는데, 궁예가 10세까지 활쏘기를 하며 유년기를 보냈다는 활터가 남아 있으며, 의적 임꺽정이 갖바치스님 병해대사에게 바친 꺽정불 이야기, 암행어사 박문수가 과거시험을 보기 전에 나한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잠이 들었는데 꿈에 나타난 나한님이 과거시험 구절을 가르쳐 주어 장원급제했다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칠장사 일주문.

OLYMPUS DIGITAL CAMERA칠장사 전경. 산중에 자리잡고 있기는 하지만, 경사진 지형에 축대를 쌓아서 가람을 조성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영창대군 원찰로 지정되었지만, 불전 중심의 전통 사찰 가람배치를 유지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칠장사 천왕문.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칠장사 소조사천왕상
칠장사 사천왕상은 흙으로 빚은 소조상이며 영조2년(1726)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천왕은 세상의 중심에 가장 높이 솟아 있다는 수미산 중턱에 살면서 사방과 4대주를 수호하는 신장으로, 손에는 각각 비파(동방지국천왕), 보검(남방증장천왕), 용과 여의주(서방광목천왕), 창(북방다문천왕)을 들고 있다. <출처:안성시청>

OLYMPUS DIGITAL CAMERA천왕문에 모셔진 사천왕상 중 비파를 들고 있는 지국천왕과 보검을 들고 있는 증장천왕.

OLYMPUS DIGITAL CAMERA용과 여의주를 들고 있는 광목천왕과 창을 들고 있는 다문천왕. 북방을 지키는 다문천왕은 탑을 들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곳 사천왕상은 창만 들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천왕상이 밟고 있는 악귀의 모습이 조선시대 복장을 하고 있는 해악적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칠장사 마당 앞 쪽 전망 졶은 곳에 세워진 누각.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앞쪽으로 판문을 달아 놓고 있다. 신도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주불전인 대웅전. 조선중기 지역세도가들에 의해 여러차례 불타버린 것을 영조대에 중건하였다. 앞면3칸, 옆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안성 칠장사 27-20161109
칠장사 오불회괘불탱(국보 296호). 불전 앞 마당에 걸어놓고 예불을 드리는 대형 그림이다. 맨 윗부분에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석가불과 노사나불이 좌우에 모셔진 삼신불을, 중간은 약사불과 아미타불과 여러 보살들을, 아래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그려진 수미산 정상 도솔천궁을 표현하였다. 인조 때 그려진 것으로 동시대를 대표하는 불화이다.

안성 칠장사 28-20161109
칠장사 삼불회괘불탱(보물 1256호). 석가모니가 영축산에서 설법을 하는 모습을 그린 영산회상도이다. 조선 후기 숙종 때 그린 불화이다.

죽림리 삼층석탑
죽산에 흩어져 있던 탑부재를 죽림리 강성원 목장에서 관리하여오다 강성원 선생의 기증으로 2005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 설치하였다. 이 탑은 전체 높이가 375m이고 상대갑석은 하나의 판석에 옥신괴임을 2단으로 둥글게 처리하였다. 1층 탑신은 2매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고 한 면에는 둥근 문고리를 조각하였으며 탑신마다 모서리기둥이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모두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고 상륜부에는 방형 노반만이 남아 있다. 탑신부의 체감비율이나 옥개받침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대웅전 마당에 있는 죽림리 삼층석탑.

OLYMPUS DIGITAL CAMERA안성 죽산면 소재지에 위치한 봉업사지 옛 절터에서 옮겨온 석조여래입상(보물 893호)이다. 이 불상은 높이 1.57m로 불상과 광배가 같은 돌로 만들어졌다. 눈,코,입 등은 심하게 닳았으며, 옷주름은 여려겹으로 자연스럽게 잘 표현되어 있다. 고려초기에 만든 다른 석불입상에 비해서 전체적으로 신체비례가 적절한 편이다. 불상의 뒷면에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가 있다. 이 불상은 고려초기에 유행했던 이 지역의 불상양식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는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칠장사 거북바위

OLYMPUS DIGITAL CAMERA대웅전 옆 관음보살을 모신 원통전. 앞면 3칸이지만 작은 규모를 하고 있다. 익공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지장보살을 모신 명부전. 총21구의 목조지장삼존상과 시왕상이 모셔져 있다. 명부전(또는 지장전)은 최근에 새로 지은 것이 많은데 반해 칠장사 명부전에 모셔진 불상이 1706년에 제작된 것으로 볼때 그 이전부터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영창대군의 명복을 빌었던 원찰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명부전 처마 아래에는 칠장사와 관련된 설화들이 그려져 있다. 그 중 혜소국사와 칠현(왼쪽)에 관한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궁예가 활쏘는 장면

OLYMPUS DIGITAL CAMERA 임꺽정과 관련된 장면

OLYMPUS DIGITAL CAMERA대웅전 맞은편에 있는 큰 요사채인 응향각. 일반적인 사찰 가람배치에서는 강당을 두는데 반해 이곳에서는 요사채를 두고 있다. 사찰을 찾는 손님이 많았던 원찰의 성격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웅전 앞 마당 왼쪽편 요사채인 열반당.

OLYMPUS DIGITAL CAMERA맞은편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는 요사채.

OLYMPUS DIGITAL CAMERA혜소국사비가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내려다 보이는 칠장사.

OLYMPUS DIGITAL CAMERA혜소국사가 수행했던 암자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혜소국사비(보물 488호)

OLYMPUS DIGITAL CAMERA
혜소국사비는 받침돌인 귀부와 몸돌, 머릿돌이 따로 떨어져 있는 상태로 있다. 그의 행적이 새겨진 몸돌은 흑대리석으로 만들었으며, 옆면에는 길게 두마리의 용을 새겨놓고 있다. 이 비는 고려 문종 14년(1060)에 혜소국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글은 김현이 짓고 글씨는 민상제가 썼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혜소국사비 뒷편 작은 요사채.

OLYMPUS DIGITAL CAMERA산신각.

안성 칠장사 26-20100308
칠장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인목왕후 어필칠언시(보물 1627호).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김포 금정사, 봉릉사라 불렸던 추존왕 원종의 장릉을 지키는 원찰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에 있는 금정사(金井寺)이다. 인조의 아버지 추존왕 원종과 어머니 인헌왕후의 능인 장릉 인근에 있는 사찰이다. 삼국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원래 고상사라 불렀다. 인조가 부모의 묘를 현재의 위치로 옮길 때 인근에 있던 고상사를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 원찰로 삼고 봉릉사(奉陵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내력은 기록으로 별로 남아 있지 않으며 일제강점기에 김포현 관아 건물 자재를 이용하여 중수하면서 금정사로 바뀌었다. 현재의 전각은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것을 1970년대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정사는 주불전인 대웅전을 중심으로 요사채 건물 2동과 강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찰내 전각이 많이 들어서 있지 않으며 최근에 크게 신축했지만 장릉을 지키는 원찰로서 규모가 크고 짜임새 있는 건물 배치를 하고 있다. 금정사가 원찰로서 주변 넓을 땅을 소유하고 있어서 그런지 중앙승가대학이 사찰 뒷편에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기도 김포시 추존왕 원종의 장릉 인근에 있는 원찰인 금정사. 대웅전을 비롯하여 전각 대부분은 한국전쟁 이후 새로 지어졌지만 짜임새 있는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김포 금정사,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금정사는 신라 진흥왕때 창건되었으며, 창건 당시에는 고상사라고만 전하여 왔으며 달리 전해오는 기록은 없다. 조선 인조5년(1627)에 왕은 자신의 아버지를 원종으로 추증하고 어머니 역시 인현왕후로 추증하여 그들의 묘를 양주에서 김포로 이장하고 장릉이라고 하였으며 인근에 있던 고상사를 현재의 위치로 옮기려 장릉을 보호하는 사찰로 재건하면서 봉릉사라 칭하게 되었다. 일제 강압기인 1930년에 당시 주지 영송화상이 중수 하였고 다시 1938년에 주시 성화대사가 대한제국 말기 김포를 관장하던 현청을 일제가 강제로 헐어 낼 때 출입문중 목재와 주춧돌 등을 구입하여 사찰을 크게 중수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쓰러져 가는 사찰을 1974년 주지 정념과 고근이 다시 대웅전과 범종각을 새로 짓고 면모를 일신하였다. 이후 ‘능을 지킨다’는 ‘봉릉사’에서 절의 뒷산이 금정산이며 또한 법당 앞에서 에부터 좋은 물맛의 샘이 솟아나므로 인하여 ‘하늘우물’이라는 뜻의 ‘금정사’로 개명하여 김포지역 포교와 수행도량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의 건축양식은 앞면3칸, 옆면2칸의 단층맞배지중으로 된 기와집이며, 공포의 양식은 ‘다포계’를 기본으로 한 약식 공포이고, 창호는 빗살문으로 되어 있다. 대웅전 아래로는 범종각이 있다. 요사채 ‘본원’는 앞부분이 돌출된 형식이며 돌출된 전면은 누각양식으로 지어졌다. 7층석탑은 대웅전 앞 기단 아래에 있다. <출처:금정사>

OLYMPUS DIGITAL CAMERA금정사는 출입문을 별도로 두지 않고 입구에 있는 요사채에 금정사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주불전인 대웅전. 앞면 3칸, 옆면 2칸의 크지 않는 규모로 1981년에 중수한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웅전 앞 경내에 있는 다층석탑과 석등.

OLYMPUS DIGITAL CAMERA대웅전 아래 요사채 건물. 누마루가 있는 살림집 형태를 하고 있다. 승려들이 수행하는 공간이라기 보다는 이곳을 찾아온 신도들이 묵을 수 있는 공간으로 보인다. 최근에 중수되었지만 왕릉을 찾는 손님을 고려한 공간배치가 반영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찰입구에 있는 요사채. ‘ㄱ’자형의 전통 한옥과 비슷한 형태이다. 원찰로서 금정사를 이곳으로 옮길때 건물배치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울 정릉 원찰인 흥천사와 비슷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웅전 앞 강당 건물.

OLYMPUS DIGITAL CAMERA범종각.

OLYMPUS DIGITAL CAMERA금정사 경내 모습. 장릉 원찰로서 마당이 넓고 건물배치에서 짜임새가 있음을 알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장릉 원찰로 주변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중앙승가대학이 금정사 옆에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금정사 맞은편 인조의 아버지 추존왕 원종과 왕비 인헌왕후 장릉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서울 봉은사(奉恩寺), 서울을 대표하는 도심 사찰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봉은사(奉恩寺)이다. 종로의 조계사와 더불어 오늘날 서울을 대표하는 도심 사찰이다. 봉은사는 통일신라때 처음 창건되어 견성사라 불렸는데, 그 이후의 내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실제로는 조선 9대 성종의 선릉이 이곳에 조성되면서 작은 사찰이었던 견성사를 원찰로 삼으면서 널리 알려졌다. 현재의 봉은사는 조선시대를 여걸 중 한명인 중종비 문정왕후가 선릉 옆에 있던 사찰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고양 서삼릉에 있던 중종의 정릉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시작되었다. 임진왜란을 비롯하여 여러차례 전쟁과 화재 등으로 전각들이 소실과 중건을 거듭하였다. 현재 전각들은 대부분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다시 지은 것이다.

문정왕후는 조선시대 불교를 크게 중흥시켰는데, 봉은사와 양주 회암사를 크게 중창하고, 승과를 실시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이때 배출된 인재들 중 사명대사, 서산대사 등이 임진왜란 당시 승병으로 전란을 극복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고 그 공을 인정받아 조선후기에 많은 사찰들이 새로 중건될 수 있었다. 문정왕후의 불교장려 정책은 유림들의 미움을 받아서, 문정왕후와 함께 불교 중흥을 이끈 보우대사는 문정왕후 사후에 제주도로 유배되어 참형을 당했고, 조선 최대의 사찰이었던 양주 회암사는 폐사되는 운명을 맞았다. 하지만, 봉은사는 선정릉을 지키는 원찰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어서 폐사되는 운명을 피할 수 있었으며, 그 후에 한양에서 가장 가까운 사찰로서 그 명성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또한, 강남 개발과 함께 강남 도심권에 위치한 장점으로 인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경제력있는 사찰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 같다.

SANYO DIGITAL CAMERA봉은사 출입문인 진여문. 사찰의 산문이나 천왕문 등과는 다른 문루의 모습을 하고 있다. 내부에는 그림으로 그려진 사천왕상이 있다. 궁궐 출입문을 연상시키는 삼문 형식을 하고 있다. 현대에 만들어진 출입문이라 전통적인 예법을 무시하고 만든 측면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봉은사 입구의 승탑과 탑비.

SANYO DIGITAL CAMERA봉은사 종루.

SANYO DIGITAL CAMERA봉은사 강당 건물인 법왕루. 누마루 형태의 강당으로 앞면 7칸의 상당히 큰 건물이다.

SANYO DIGITAL CAMERA봉은수 주불전인 대웅전. 마당에는 1970년대에 부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조성한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궁궐 계단을 연상시키는 대웅전 계단. 가운데 답도를 두고 있는데, 이는 왕실과 관련된 원찰임을 강조하는 부분으로 보인다. 하지만 답도를 2개나 둔 것은 궁궐 정전과 다른 부분으로 장식적인 면만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대웅전 옆 지장전. 죽은이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장보살을 모시는 불전이다. 현대 불교에 인기가 많은 불전으로 대부분의 사찰들은 지장전이나 명부전을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대웅전 앞 경내 동쪽편에 위치한 선불당. 규모가 있는 한옥처럼 지은 건물이다. 요사채로 지어진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수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봉은사가 도심에 위치한 까닭에 손님이 묵을 이유가 별로 없어서인지 경내에 큰 요사채를 두고 있지 않다. 반면에 산중에 있는 사찰은 요사채의 규모가 날로 커지는 경향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선불당 뒷편 승려들이 기거하는 낡은 요사채 건물

SANYO DIGITAL CAMERA대웅전 뒷편 언덕에 있는 북극보전(칠성각). 이 곳에는 기도를 드리러 오는 신도들이 상당히 많아 보인다. 많은 신도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는데, 강남이라서 그런지 젊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SANYO DIGITAL CAMERA대웅전 뒷편 언덕에 있는 영산전. 목 십육나한상, 삼존불상, 영산전 불화가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영산전 앞 언덕에서 본 강남 삼성동 코엑스 빌딩들

SANYO DIGITAL CAMERA고승들의 영정들을 모신 영각.

SANYO DIGITAL CAMERA영각 내부에 모셔진 영정들. 조선중기 문정왕후와 함께 불교를 크게 중흥시킨 보우대사를 비롯하여, 임진왜란때 크게 기여하여 조선후기 불교 중흥에 기여한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보통은 조사당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곳 봉은사에는 영각이라 부른다.

SANYO DIGITAL CAMERA대웅전 서쪽편에 있는 거대한 미륵보살입상. 1996년에 조성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미륵보살입상 앞에 있는 미륵전. 강당 겸 문루 형식의 건물로 내부에 불상을 따로 모시지는 않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조선중기 이후 불교를 크게 중흥시킨 봉은사의 역할을 잘 보여주고 있는 판전이다. 이 곳에는 많은 불경 목판을 보관하고 있으며, 불교를 체계적으로 중흥시킨 불교계의 문정왕후와 보우대사의 업적이 잘 남아 있는 곳이다.

SANYO DIGITAL CAMERA추사 김정희가 죽기 직전에 쓴 글씨로 잘 알려진 판전 현판.

SANYO DIGITAL CAMERA중종의 능인 정릉, 봉은사는 선릉의 원찰로 원래는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문정왕후는 본인이 중종과 같이 묻히기를 원해서 서삼릉에 있던 중종의 능을 이곳으로 옮기고 봉은사를 크게 중창하였다. 문정왕후의 희망과는 달리 정릉에는 중종만이 묻혀 있다.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