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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봉선사, 세조 광릉을 지키는 원찰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부평리에 있는 봉선사(奉先寺)이다. 수원 융릉.건릉의 용주사, 서울 선릉.정릉의 봉은사와 함께 조선왕릉을 지키는 대표적인 원찰이다. 500여년 전 세조비 정희왕후가 선왕의 위엄을 기리고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세조의 광릉 부근에 있던 운악사를 크게 중창하고 봉선사로 고쳐부르면서 원찰로 삼았다. 명종 때에는 전국 교종을 대표하는 사찰로 경기도 내 전사찰을 관창하기도 하였다. 당시 전국 승려들의 교학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과거시험인 승과가 이곳에서 열렸으며, 서산.사명대사 같은 고승들도 응시하였다고 한다.

정희왕후가 봉선사를 크게 중장할 당시에는 사찰 가람의 규모는 89칸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등을 거치면서 여러차례 중수가 있었으며, 한국전쟁 때 사찰 전체가 불타버려 오래된 건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오늘날 봉선사 건물 대부분은 그 이후 새로 지은 것이다. 사찰 출입문을 비롯하여 왕릉을 지키는 원찰에서 특이한 가람배치가 반영되어 있다. 봉선사에 남아 있는 문화재로는 조선초기 범종인 대종(보물 397호)이 있다. 세조와 정희왕후의 광릉에서 1 km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 광릉숲과 함께 둘러보기 좋은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남양주 봉선사. 세조비 정희왕후가 광릉을 지키는 원찰로 삼으면서 크게 중창하였다. 서울 봉은사, 화성 용주사와 함께 조선왕릉을 지키는 대표적인 원찰이다.

남양주 봉선사,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봉선사는 고려 광종 20년(969)에 법인국사 탄둔이 운악산 기슭에 창건하고 운악사라 칭하였다고 한다. 운악사는 조선 세종 때 7개의 종파를 선종과 교종으로 통합됨에 따라 혁파되었다가 예종 1년(1469)에 정희왕후 윤씨가 선왕인 세조의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89칸으로 중창하고 봉선사라 개칭하였다. 봉선사는 명종 6년(1551)에 교종을 대표하는 사찰로서 전국의 승려 및 신도에 대한 교학진흥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으며 고종 광무 6년(1902)에는 경기도 내 전 사찰을 관장하기도 하였다. 1962년 전국의 사찰 중 제25교구 본사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어 지금에 이른다. 이 절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훼손되어 수차례 중수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법당 등 14동 150칸의 사우가 또다시 완전 소실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모두 근대에 건립된 것이다. 경내에는 조선초기 범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봉선사 대종(보물 397호)이 있으며, 짜임새 있는 구성과 사실적 묘사수법을 보여주는 봉선사괘불이 있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봉선사 일주문. 원래 있던 것은 아니고 최근에 새로 지은 것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찰 입구에 있는 고승들의 승탑과 탑비들

OLYMPUS DIGITAL CAMERA사찰 입구에 조성된 큰 연못.

OLYMPUS DIGITAL CAMERA연못을 지나  사찰 아래 넓은 공터에 옛 승과평이 있었던 곳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조선 명종대에 승과시험 과거장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 많은 고승들이 이곳에서 실시된 승과에 참여했다 전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봉선사 들어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광릉 원찰로 봉선사를 크게 중창할 때 같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500년 이상된 느티나무가 사찰 입구에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찰 강당의 성격을 갖는 청풍루. 원래 이곳에 천왕문과 해탈문이 있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봉선사 대종(보물 397호)이 있는 범종각

OLYMPUS DIGITAL CAMERA봉선사의 주불인 큰법당. 봉선사 주불전은 정희왕후가  봉선사를 크게 중창했을때 한강 이북에서 가장 큰 불전이었한다. 현재의 건물은 1970년에 중건하면서 대웅전이라는 이름대신 ‘큰법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큰 법당 앞 마당에 있는 삼층석탑.

OLYMPUS DIGITAL CAMERA큰법당 오른편에 위치한 지장전. 앞면 5칸에 옆면 3칸의 상당히 큰 규모의 불전이다. 원래는 세조와 정희왕후의 위패를 모셨던 어실각으로 봉선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다. 한국전쟁때 불타버린것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큰법당 왼쪽편에 위치한 관음전. 앞면 5칸의 상당히 큰 규모의 불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관음전 뒷편 삼성각. 일제강점기에 지은 건물로 한국전쟁 때 불타지 않은 유일한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지장전 뒷편 고승들의 영정을 모신 조사전.

OLYMPUS DIGITAL CAMERA승려들이 수행하는 요사채 중 경내 오른편에 위치한 방적당. 원래는 어느 단계의 수행을 끝내고 다음 수행을 준비하는 공간이라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왼쪽편에 위치한 큰 규모의 요사채 건물인 운하당은 이 사찰을 찾는 신도들이 머물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조선시대 광릉을 참배하기 위해 찾은 왕실이나 주요 인사들이 묵었던 공간으로 보인다. 뒷편으로 손님들이 묵을 수 있는 여러 동의 요사채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봉선사는 요사채 출입문. 양반가옥이나 재실처럼 솟을대문을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솟을대문 양쪽으로는 이 절을 방문한 신도들이나 손님들이 묵을 수 있도록 문간채가 준비되어 있다. 정희왕후를 비롯한 왕실가족들이 방문하는 경우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운하당 아래 넓은 마당과 문간채.

OLYMPUS DIGITAL CAMERA운하당 툇마루. 여러 방들을 오가는 통로이자 이곳을 찾은 신도들이 잠시 걸터 앉아 쉴 수 있는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운하당 왼쪽편으로는 판사관무헌이라는 건물이 있다. 조선시대에 봉선사 주지가 왕실로부터 세조와 정희왕후의 위패를 모시는 어실각을 봉향하는 봉향판사라는 직위를 받았기 때문에 판사관무헌이라고 한다. 원찰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옛부터 이 사찰의 주지가 머무는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운하당 뒷편으로도 여러동의 건물이 있는데, 이 사찰을 찾는 신도나 손심이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운하당 뒷편 장독대.

OLYMPUS DIGITAL CAMERA최근에 지은 요사채인 선열당.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여주 신륵사, 남한강변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사찰

경기도 여주시 천송동에 위치한 신륵사(神勒寺)이다. 남한강 수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조포나루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고달사를 비롯하여 고려시대 남한강변에 있던 여러 사찰 중 하나이다. 고려말 공민왕의 왕사를 지냈으며 보제존자라는 시호를 받은 고승 나옹선사가 입적한 곳으로 그의 제자들과 후원자들이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으로 남한강변에 있던 쇠락한 여러 사찰들과는 달리 세종대왕 영릉이 여주로 옮겨질 때 능을 지키는 원찰의 역할을 부여받으면서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신륵사는 세종 영릉이 여주로 옮겨진 직후인 성종대에 크게 중창되면서 대리석으로 만든 다층석탑을 중심으로 불전들이 배치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신륵사 가람은 주불전인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양쪽에 요사채인 심검당과 적묵당,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앞쪽에는 신도들이 잠깐 쉴 수 있는 강당이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 서쪽 뒷편 나옹선사 승탑 아래에는 고려말.조선초를 대표하는 승려로 조선왕실과 가까웠던 지공,나옹,무학대사 영정을 모신 조사당이 있고, 조사당 마당 서쪽편에 최근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명부전과 관음전이 자리잡고 있다. 신륵사는 영릉을 지키는 원찰로서 남한강변 경치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절을 찾는 신도나 여행객들이 많았을 것으로 보이며, 이들을 위한 요사채 건물이 많고 규모도 비교적 큰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여주 신륵사.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나지막한 봉미산에 있는 사찰이다. 남한강 일대에 있는 여러 사찰 중 규모가 작은 편이었는데 고려말 공민왕의 왕사를 지낸 나옹선사가 이곳에서 입적하면서 크게 중창되었으며, 세종 영릉이 여주로 옮겨진 직후인 성종 때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신륵사 유래
예로부터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느 날 원효대사의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지니,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이에 원효대사가 7일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의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그곳에 절을 지을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곳에 절을 짓기가 어려웠던 사실을 전하는 전설일 뿐 정확한 문헌사료가 없어 창건의 유래를 확실히 알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또한 절 이름에 관한 유래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고려 우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 馬岩 이란 바위 부근에서 용마 龍馬 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고려 고종 高宗때 건너편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이를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었는데, 이때 인당대사 印塘大師 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압하였다하여 신력 神力 의 신” 神 ” 과 제압의 뜻인 륵” 勒 “을 합쳐 신륵사 ” 神勒寺 ” 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농경사회에서 용은 물의 변화신으로 여겨져 왔다. 이처럼 용과 관련된 설화는 신륵사가 강가에 있음으로 해서 생겨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홍수와 범람이 잦은 남한강의 자연환경과 지역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옛 선인들이 이 절을 세우고 강을 돌본 것에서 이러한 설화가 생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속에는 한국의 자생풍수에 따른 비보 裨補 적인 의미 역시 부여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 때에는 신륵사 내 동대 東臺 위에 서 있는 전탑 때문에 벽절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출처: 신륵사>

OLYMPUS DIGITAL CAMERA신륵사 입구 일주문.

지금도 여주 신륵사 일대는 여주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남한강 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1960년대 여주대교 건설되기전까지 조포나루는 이 지역에서 남한강을 건너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으며, 조포나루가 있던 신륵사 입구는 많은 주막들이 들어서 있던 번잡한 곳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관광지로서 여주도자기 엑스포가 열렸던 도자기 축제장을 중심으로 관광단지가 형성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이기는 하지만 신륵사 일주문을 들어서 입구의 번잡함은 없어지고 신륵사 경내까지 이어지는 길은 남한강변을 내려다보면서 산책하기에 좋은 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신륵사 들어가는 길. 관광지로 조성된 신륵사 입구에서 남한강변을 따라 조성된 큰 길을 걸어 들어가면 된다. 남한강을 비롯하여 주변 경치가 아름다운 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신륵사 전경. 주불전을 중심으로 요사채, 강당, 조사당이 배치되어 있으며, 관음전 등 최근에 조성된 불전들은 조사당 옆 공간에 자리잡고 있다. 평지에서 높지 않은 곳에서 위치하고 있지만, 남한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신륵사 입구에 위치한 범종각.

OLYMPUS DIGITAL CAMERA신륵사 강당인 구룡루(九龍樓). 조선시대 관아 누각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사찰에서 설법을 강론하는 강당건물로 사찰을 찾은 신도들이 잠시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구룡루에 올라서면 남한강의 빼어난 경치와 조포나로를 오가는 배와 사람들을 내려다 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구룡루 옛 모습. 남한강변이 내려다 보이는 위치에 있는 건물의 특징으로 볼 때 사방이 개방된 누각 형태가 원래 모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구룡루 앞에서 내려도 보이는 남한강. 남한강으로 오가는 황포돛배와 건너편 여주시 도심 풍경을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강당 건물이 구룡루를 돌아 들어가면 신륵사 주불전이 있는 중심영역으로 들어선다. 주불건인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양쪽에 요사채가 들어서 있다. 마당에는 다층석탑이 세워져 있으며, 그 앞에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 사찰마당에 향나무를 심는 것은 일반적인 형태는 아니며, 공자묘나 서원 등에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원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신륵사 주불전인 극락보전.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그리 크지 않은 규모로 지어진 불전으로  숙종대에 지어진 것을 정조대에 중수하였다.

SANYO DIGITAL CAMERA주불전인 극락보전 앞 마당에 세워져 있는 높이 3m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다층석탑(보물 255호)이다. 통일신라 석탑이나 고려시대 경천사지 석탑 등에 비하면 아담해 보인다. 중국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도교풍의 장식이 많은 경천사지 석탑의 특징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극락보전 앞 요사채인 심검당. 앞면 5칸의 큰 건물로 승려들이 수행하는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심검당 뒷편 요사채.

OLYMPUS DIGITAL CAMERA심검당 맞은편 적묵당. 한옥 살림집처럼 지어진 건물로 사찰 종무실이 위치하고 있으며, 신륵사를 찾은 신도들이나 손님이 묵는 건물이다. 신륵사가 남한강 경치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절을 찾는 손님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극락보전 앞 마당에서 본 구룡루. ‘봉미산구룡루’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강당에 올라서면 남한강을 오가는 배들과 나룻터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경치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극락보전 뒷편 나옹선사 승탑 아래에 위치한 조사당(보물 180호). 현재 신륵사에 전각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앞면 1칸 규모의 작은 건물이다. 신륵사는 예종 때 영릉이 여주로 옮겨지면서 원찰로 정해지면서 전각들도 크게 중수하였는데 이때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조사당 내부에 모셔진 영정. 고려말을 대표하는 승려인 지공, 나옹, 무학대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조사당 뒷편 언덕에 위치한 나옹선사 석종(보물 228호), 석종비(보물 229호), 석등(보물 231호). 나옹선사(1320∼1376년)는 고려말을 대표하는 승려로 무학대사의 스승이기도 하다. 회암사 주지를 지냈으며, 고려말에서 조선초 불교를 정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승려로 전국의 많은 사찰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의 승탑은 양주 회암사를 비롯하여, 여주 신륵사, 원주 영전사에 세워졌으며, 여주 신륵사에는 그를 모신 조사당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신륵사 명부전.

OLYMPUS DIGITAL CAMERA관음전.

신륵사 팔각원당형석조부도
이 부도는 고려말 조선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통일신라시대부터 유행한 팔각원당형을 이어받고 있다. 재질은 화강석이고 전체 높이는 225cm이다. 원래 조사당 뒤 북쪽 구릉 너머에서 1966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봉안하였다고 전한다. 이때 사리를 봉안한 사리함이 발견되었지만 어떤 스님의 탑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부도란 스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탑을 의미한다. 이 부도는 팔각의 집모양을 받치는 3단형의 기단부와 팔각 집모양의 탑신부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는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대석과 일조로 구성된 팔각의 하대석에는 8개의 연꽃잎 무늬가 돋을새김되어 있고, 매우 낮은 원통형의 중대석은 문양이 없으며, 팔각의 상대석은 위로 향한 연꽃잎 무늬가 돋을새김해 놓았다. 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석은 팔각형태로 문을 새기고 범자를 돋을새김하였다. 지붕을 나타내는 옥개석은 기와골 끝에 꽃장식을 새긴 것이 특징이다. 전체적으로 육중하면서도 세련되며 간결한 기풍을 풍기고 있는 이 부도는 고려말 조선초 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신륵사 조사당 뒷편에 있는 승탑. ‘팔각원당형석조부도’라 불리며 원래는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하며, 승탑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신륵사 원구형석조부도
이 부도는 스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탑의 형태가 둥근 공모양을 하고 있어 원구형부도라고 불리운다. 현재 명문이 새겨져 있지 않아 어떤 스님의 탑인지 알 수 없다. 크기는 전체 높이가 220cm이고, 공모양의 탑신은 60cm로, 당시 조성되었던 부도들과 비슷하다. 이 부도는 크게 위부터 상륜부와 옥개석이 하나의 돌로, 그리고 원형 모양의 탑신이 하나의 돌, 그리고 기단부는 세개의 돌로 쌓았다. 아래쪽의 기단부는 일반적을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하대, 중대, 상대석으로 되어 있는데, 이 부도는 하대석이 결실되어 있다. 연꽃잎으로 장식된 상대석과 팔각의 돌 위에 각 모서리를 작은 원형의 연주문으로 장식한 중대석, 그리고 사각형의 지대석만 남아 있다. 상륜부는 연주문을 받침으로 한 세층의 보주형으로 장식했으며, 탑신 위의 옥기석 부분은 기와골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번갈아가며 용머리를 새기는 등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이 부도는 하대석이 결신된 것 이외에는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당시의 세밀하고 아름다운 문양이 조각되어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신륵사 원구형석조부도

신륵사 경내 동쪽편 남한강가 넓은 바위에는 다층전탑과 작은 삼층석탑이 자리잡고 있다. 벽돌로 쌓은 전탑은 신륵사를 찾는 사람뿐만 아니라 배를 타고 남한강을 오가는 많은 선박들에게 등대나 이정표같은 역할을 했던 탑이다. 다층전탑은 벽돌로 쌓아서 만든 전탑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조선 시대에 중건하면서 옛모습고 벽돌로 쌓은 전탑은 우리나라에서는 많지 않은 형태이고 많은 나람들이 오가는 남한강 나루터에서 눈에 띄는 이정표가 되었기때문에 신륵사를 벽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전탑 아래 바위 위에는 고려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는데, 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화상을 화장한 장소라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찰 안쪽으로는 신륵사의 이정표가 되었던 벽돌로 쌓은 다층전탑과 남한강 경치를 감상하기 좋은 작은 정자인 강월헌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남한강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정자인 강월헌(江月軒). 원래 있던 정자는 홍수로 떠내려가고 1972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신륵사 다층전탑. 벽돌로 쌓아 만든 전탑으로 남한강으로 내려다 보고 있다. 신륵사가 있는 이 곳은 조포나루라고 불리며, 이포나루, 광나루, 마포와 함께 한강의 4대 나루터로 불리며, 육상 수운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이 신륵사 다층전탑은 남한강을 오가는 많은 나룻배들에게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신륵사 다층전탑 아래 바위에 세워진 삼층석탑. 고려말에 제작된 정형화된 삼층석탑이다. 석탑자체는 소박하지만 남한강변 바위에 세워져 남한강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

OLYMPUS DIGITAL CAMERA신륵사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230호).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신륵사 경내 동쪽편 언덕에 세워져 있다. 고려말 유학자이자 조선의 건국에 반대했던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대장경을 인쇄하고 보관하기 위해 대장각을 세우면서 그 내력을 적은 비석이다. 대장각은 2층 건물로  다층전탑과 함께 남한강 일대에서 이정표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서울 흥천사(興天寺), 태조가 신덕왕후의 정릉 원찰로 세운 사찰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있는 흥천사(興天寺)이다. 이 사찰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을 조성하면서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창건되었다. 흥천사는 정릉이 있었던 덕수궁 부근에 있었는데 태종이 ‘왕자의 난’으로 집권한 이후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이후에도 오랜 기간 덕수궁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태조가 창건한 사찰로 권위가 있었기때문에 한양 도성안에 큰 사찰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중기 연산군 때 큰 화재로 가람 대부분이 소실되면서 흥천사는 대찰로서 위상을 잃어버리고 급격히 쇠퇴한다. 연산군의 할머니인 인수대비가 불교를 크게 지원했던 인물인데 이에 대한 반발로 연산군이 원각사를 비롯하여 도성내 큰 사찰들을 없애버린 것으로 보인다. 유학자인 사림들이 주류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불교를 배척했던 당시의 사회분위기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선조대에는 다른 곳으로 절을 옮겨짓고 신흥사로 이름을 고치기도 했으며, 정릉이 복구된 이후 정조 때 정릉과 가까운 현재의 위치에 크게 중건하였다고 한다.

흥천사가 정조 때 중건되기는 했지만, 현재 남아 있는 불전들은 대부분 구한말인 철종과 고종대에 지어졌으며 구한말 사찰건축의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북악산 동쪽편 자락 언덕에 가람을 조성하고 있는데, 경내 마당을 넓지 않은 편이다. 강당과 요사채 기능이 합쳐전 구한말에 크게 유행했던 ‘대방’이라는 건물이 앞쪽에 배치되어 있고 그 뒷편에 주불전인 극락보전, 좌.우에 지장전과 관음전이 배치되어 있다. 구한말 왕실의 비호를 받았으며, 흥선대원군이 지원하여 ‘흥천사’라는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다. 현재 사찰에는 대원군이 쓴 현판, 영친왕 쓴 글씨가 남아 있고, 한국전쟁 당시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가 이곳으로 피난했다고 한다. 원래 흥천사에 있었던 동종(보물 1460호)은 지금도 덕수궁에 자리를 지키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울 성북구 돈암동 북악산 동쪽 자락에 위치한 흥천사. 태조가 정릉 원찰로 세운 큰 사찰로 원래 덕수궁 부근에 있었으나, 불교를 배척하는 사회적 분위기때문에 정릉과 가까운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흥천사 연혁
1396년에 조선 태조 고황제 5년에 태조후비 강씨 신덕왕후꼐서 승하함으로 능지를 한성부 서부 황화방(지금 중구 정동)에 정하고 1월에 창봉함에 있어서 환후에 원찰을 건립하기 위하여 그해 12월에 능지 동편에 개기하여 1398년 7월에 170여칸에 대찰을 준공하여 흥천사라 명명하였다. 1492년 7월에 신덕황후를 추모하기 위하여 높이 2.8m의 대종을 본 사에 주조하다. 1504년 12월(연산군10)에 한성부 서부 황화방 소재 본사를 소실하였으며 1508년에 정릉을 숭화방 사아리로 봉하고 본사는 구지에 두고 사아리 능방에 소암을 신축하고 신흥사라 하다. 1669년에 신흥사가 능실에서 너무 구근하므로 우문외 창립 정유지로 이건 하였으나 건물이 극히 초초하야 1794년 9월에 본사주지 산경화상과 민경화상이 사아리로부터 돈암동 현위치로 이건하다. 1910년 덕수궁 근처에 흉폐된 신덕왕후 무덤 근처에 흥천사 5층 사리탑을 이재하다. 1747년(영조23)에 흥천사의 대종을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으로 옮겼던 것을 후에 다시 덕수궁으로 옮겨 놓았다. 1846년 계장화상이 칠성각을 창건하다. 1865년 운현궁 흥선대원군의 주호에 의하여 대방과 찰사를 재건 대찰의 면모를 갖추고 본명을 복활하다. 1934년 독성각을 시시시 원명화상이 재건하다. 1942년 종각을 주지 운월화상시 화옹스님이 중건하다. 1969년 용화전을 주지 일우화상시 화주 운파화상이 중건하다. 1970년 연화대를 일우화상시에 신축하다. <출처: 흥천사>

OLYMPUS DIGITAL CAMERA흥천사 일주문

OLYMPUS DIGITAL CAMERA부도군.

OLYMPUS DIGITAL CAMERA흥천사 대방. 조선후기 사찰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의 건물로 승려들이 기거하는 요사채와 신도들이 잠시 쉬어가거나 법회를 여는 강당 기능이 같이 있는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구한말 한옥 건축양식인 누마루를 양쪽에 달아내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내방. 양쪽 날개채를 달아 내었다.

흥천사 극락보전, 서울 성북구 돈암동, 1853년(철종4) 건축
극락보전은 1853년(철종4)에 세워진 것으로,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모신 흥천사의 주불전이다. 태조는 1397년(태조6)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을 조성하고 곁에 흥천사를 지어 원찰로 삼았다. 하지만 1409년(태종9)에 능을 다른 곳으로 옮긴 후 없어졌다. 1669년(현종10)에 정릉을 수리하고 근처 암자를 옮겨 신흥사라고 했으나, 1794년(정조18) 현재 터에 다시 지은 뒤에 흥선대원군의 후원을 받으면서 이름을 되찾았다. 극락보전은 다포로 공포를 짠 팔작지붕집이며, 규모는 정면3칸 측면 3칸이다. 판벽에는 불교 고사를 가득 그렸는데 반야용선도가 눈에 뛴다. 꽃문살과 기둥 위에 장식한 용머리 조각은 조선말기 건축에 나타나는 장식의 경향과 구조적 특성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 서울 근교 사찰에는 대방이란 건물을 짓는 경향이 등장한다. 이는 염불당과 주지실, 부엌과 누마루를 결합한 건물인데, 흥천사 대웅전 앞에도 대방이 있다. <출처:서울시청>

OLYMPUS DIGITAL CAMERA흥천사 주불전인 극락보전. 앞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화려한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으며 단청으로 장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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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천사 극락보전 문살장식. 포도나무와 작은 동물을 표현하고 있다.

흥천사 명부전, 서울 성북구 돈암동, 1855년(철종6) 건축
1855년(철종6)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을 모시기 위해 지은 건물로 1894년(고종31)에 고쳐 지었다. 지장신앙은 아미타신앙과 함께 조선시대에 널리 유행하여, 많은 사찰에 명부전이나 지장전이 세워졌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기둥 위에 다포와 익공을 절풍한 공포를 짜고 맞배지붕을 덮었다. 기둥머리에는 용 모양으로 조각한 부재를 끼워 장식을 더하였는데 이는 대웅전을 만든 건축방식과 비슷하다. 내부에는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시왕을 비롯한 여러 권속을 배치하고, 벽에 시왕도를 걸어 명부임을 나타냈다. 이에는 조선후기 사찰의 건축 특성이 드러나 있다. 흥천사는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를 위한 원찰로 도성 안의 정릉 옆에 지어졌다. 도중에 터를 한번 옮겼다가 1794년(정조18)에 지금 자리로 옮겨졌다. 철종대에 다시 지으면서 대웅전과 명부전을 세웠고, 고종대에 흥선대원군 등 왕실의 지원을 얻어서 절의 모습이 새로워졌다. 당대의 명필로 이름 높았던 흥선대원군이 만세루에 걸려 있는 흥천사 현판 글씨를 썼다. <출처:서울시청>

OLYMPUS DIGITAL CAMERA흥천사 명부전.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지장전 뒷편 미륵불입상.

OLYMPUS DIGITAL CAMERA극락보전 왼쪽편에 위치한 관음전. 특이한 건물형태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관음전 옆 연화대.

OLYMPUS DIGITAL CAMERA사찰 안쪽에 있는 요사채. 살림집 형태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덕수궁에 남아 있는 흥천사명 동종(보물 1460호). 태조가 신덕왕후를 위해 만든 것으로 ‘흥천사’라는 명문이 적혀 있다. 고려말 중국종의 특징이 반영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범종이다.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