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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옥산서원(사적), 회재 이언적을 모신 서원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옥산서원(玉山書院, 사적)이다. 조선중기 유학자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 ~ 1553년)을 기리기 위해 1592년(선조5)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처음 세웠으며 1573년 국왕으로부터 ‘옥산(玉山)’이라는 이름이 내려져 사액서원이 되었다. 옥산서원은 건축양식이 정형화된 후기의 서원들과는 달리 건물 배치나 건축양식에 있어서 자유로우면서도 형식적이고 절제된 면을 보여주고 있다. 강당건물인 구인당(求仁堂)을 중심으로 한 강학공간이 앞쪽에, 위패를 모신 체인묘(體仁廟)를 중심으로 제향공간이 뒷쪽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서원 입구에 위치한 청분각에는 이언적의 <수필고본>(보물), 김부식의 <삼국사기> 완본 9권(국보) 등 많은 서적들을 소장하고 있다. <한국의 역사마을, 양동마을>과 <한국의 서원>의 일부로 유네스코문화유산에 이중으로 등재되어 있다.

회재 이언적(1491~1553년)은 조선중기 문신으로 주로 중종대에 명종대에 관리이자 학자로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이 시기에 일어난 여러번의 사화에서 관직에 물러나거나 여러 사건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이언적은 학자로서 성리학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주자의 주리론에 근본을 두면서 당시 성리학의 거두였던 조한보와 무극태극논쟁을 벌였으며, 이는 조선 성리학사에 최초의 본격전인 논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학설은 이후 퇴계 이황에 의해 계승.발전되어 영남학파의 선구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학문적 성과에 따라 1610년(광해군2)에 명종의 배향공신으로 종묘에 배향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옥산서원(사적)>

들어가는 길

옥산서원은 경북 안강읍 옥산천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이언적은 말년에 관직을 그만두고 정혜사지 절터 부근에 독락당을 짓고 거처하면서 학문에 전념했다. 옥산천 계곡에서 경치가 뺴어난 바위 5곳에 이름을 짓고 오대(五臺)라 불렀는데 그 중 독락당 남쪽 600m 정도 떨어진 세심대(洗心臺) 부근에 서원이 세워졌다. 서원 부근에는 오랜 세월 다양한 나무가 심어져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옥산서원 입구의 울창한 숲>

OLYMPUS DIGITAL CAMERA<서원 들어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서원 앞 마당>

세심대(洗心臺)는 서원 앞을 흐르는 개천 가운데 있는 넓은 너럭바위 일대를 말한다. 독락당에서 흘러내려온 개천은 세심대에서 작은 폭포와 용소(龍沼)를 만들어 빼어난 경치를 만들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세심대>

세심대는 옥산서원 앞으로 흐르는 자계천 가운데에 자리한 너럭바위 일대를 말한다. 자계천을 흐르는 물은 세심대에서 떨어져 내려 작은 폭포와 용소(龍沼)를 만들이 빼어난 경치를 이른다.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4~1553)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독락당을 지어 머물면서 주변의 산과 계곡에 이름을 붙였는데 이를 사산오대(四山五臺)라고 하며, 그 중 하나가 바로 세심대이다. 세심대는 마음을 씻고 자연을 삼아 학문을 구하는 곳이라는 뜻이며, 바위에 새겨진 글씨는 퇴계 이황이 쓴 것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서원 정문에 해당하는 역락문 (亦樂門)은 삼문의 형식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주위로는 옥산서원 특유의 흙과 벽돌을 섞어서 만든 토담으로 둘러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원 정문인 역락문>

강학공간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세워진 서원으로 제향공간이 중심이 되었던 후대의 서원에 비해 강학공간과 고직사의 규모가 크고 학문연구에 중점을 둔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서원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다. 강학공간에는 강당건물인 구인당(求仁堂)을 중심으로 유생들의 기숙사인 민구재(敏求齋, 동재), 암수재(闇修齋. 서재), 휴식공간인 무변루(無邊樓)로 구성되어 있으며 교육중심의 서원답게 규모가 크고 짜임새 있는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독락문을 들어서면 출입문이자 이곳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의 휴식공간인 무변루가 있다.

유생들의 휴식공간인 무변루는 앞면 5칸의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설치하였다. 건물 양쪽에는 작은 누마루을 설치하였다. 계곡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대청마루에는 판문을 달아 놓고 있다. 경치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누각 건물인 무변루>

OLYMPUS DIGITAL CAMERA<강당에서 보이는 무변루>

OLYMPUS DIGITAL CAMERA<무변루 내부>

무변루 앞마당에는 계곡에서 물을 끌어 들여 흐를 수 있도록 작은 수로를 만들어 놓고 있다. 이는 궁궐 건물에서 볼 수 있는 금천과 비슷하게 서원 안팎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무변루 앞 마당>

강당건물인 구인당은 유생들이 공부하고 학문을 논하는 강학공간의 중심건물이다. 건물은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로,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잘 지어진 건물은 아니지만 단정하면서도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구인당은 이언적이 쓴 ‘구인록’에서 이름을 따 왔는데 당대의 명필 한석봉이 글씨를 썼다.

OLYMPUS DIGITAL CAMERA<강당건물인 구인당>

옥산서원은 선조에게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당대 명필 이산해가 현판글씨를 썼는데 구한말 화재로 소실되면서 추사 김정희가 다시 현판글씨를 썼다.

OLYMPUS DIGITAL CAMERA<옥산서원 현판>

OLYMPUS DIGITAL CAMERA<’구인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강당 대청마루>

OLYMPUS DIGITAL CAMERA<천정에 걸려 있는 글>

OLYMPUS DIGITAL CAMERA<오른쪽 온돌방>

OLYMPUS DIGITAL CAMERA<왼쪽 온돌방>

OLYMPUS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온돌방 아궁이>

강당 앞 마당 양쪽에는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던 동.서재에 해당하는 민구재와 암수재가 있다. 민구재는 상급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기거하던 곳으로 앞면 5는 건물로 온돌방 3칸과 작은 대청마루를 1칸씩, 2개를 두고 있다. 유생들을 서열에 따라서 분리하여 공부했음을 알 수 있다. 암수재는 하급생이 기거하는 곳으로 건물구조는 민구재와 똑깥다. 다른 서원에 비해 건물규모가 큰 편으로 교육기관의 역할이 강조되었던 초기 서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민구재>

OLYMPUS DIGITAL CAMERA<암수재>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강학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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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 옆 계곡을 출입하는 작은 쪽문과 오래된 고목>

강학 영역은 학문을 연구하는 공간으로 무변루, 구인당, 민구재(동재), 암수재(서재) 등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 유생들의 휴식 공간인 무변루는 ‘끝이 없는 누각’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편액의 글씨는 석봉 한호가 쓴 것이다. 처음 이름은 납청루였으나, 노수신이 ‘스승이 남긴 뜻에 맞지 않다’ 며 주돈이의 ‘풍월무변(風月無邊)’을 따와서 무변루로 고쳤다. 무변루를 마주 보고 있는 구인당은 이언적이 쓴 ‘구인록’ 에서 이름을 따왔는데, 이 현판도 석봉 한호가 썼다. 구인당은 헌종 4년 1838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지어졌다. 이곳은 강의와 토론이 열렸던 곳으로, 서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마루 양쪽의 양진재(兩進齋)와 해립재(偕立齋)는 교수와 유사(有司)들이 기거하던 곳으로 현대 학교의 교무실에 해당한다. 강당의 앞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이 학문을 닦으며 기거하던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있는데, 유생들 간에도 위계가 있어 나이가 많은 유생들이 동재에 기거하였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제향공간

제향공간은 위패를 모신 사당인 체인묘(體仁廟)를 중심으로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 서원 소장 목판을 보관하던 경각(經閣), 신도비가 있는 비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은 내삼문인 체인문 주위로 담장이 둘려져 있다. 사당 건물은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사당 건물 형태를 하고 있는데 규모가 크지 않고 단정하면서 절제된 느낌을 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체인문과 제향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

OLYMPUS DIGITAL CAMERA<사당인 체인묘와 전사청>

사당 옆에는 회재 이언적을 기리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이 신도비는 이언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건립한 것이다. 비문은 당대 유학지 기대승이 짓고, 글씨는 명필 이산해가 썼다. 원래 신도비는 서원 앞 계곡 부근에 세워져 있었는데, 안전을 위해서 후대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OLYMPUS DIGITAL CAMERA<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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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적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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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에 새겨진 글씨, 명필 이산해의 뛰어난 글씨체를 볼 수 있다.>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
문원공 회재 이언적(1491~1553년)은 조선 중종, 명종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이자 사림파 관료로 동방오현(東方五賢) 중 한사람으로 꼽힌다. 주자(朱子)의 주리론(主理論)에 근본을 두었으며 그의 이우위설(理優位說)은 이후 퇴계 이황에 의해 계승, 발전되어 영남학파 성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이 신도비는 이언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후학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비문은 호남의 거유(巨儒)였던 고봉 기대승이 짓고, 아계 이산해가 썼다. 비의 전체 높이는 320cm 이며, 비신의 높이는 204cm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경각은 옥산서원이 소장하고 있던 전적을 보관하는 건물로 앞면 3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이곳에는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어서, 어필, 내사본, 퇴계수필, 각종 전적 등을 봉안하고 있었다. 옥산서원은 경주부윤을 통해 국가에서 발행한 중요한 전적을 소장하고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각>

국보 322-1호 <삼국사기>는 1573년 경주부(慶州府)에서 옥산서원에 보내준 것으로 고려시대 원판, 조선 태조 때 새긴 것, 중종 때 시갠 것 등이 3종류의 판이 섞여 있다. 총9책으로 구성된 완질본으로 인출상태와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서울 성암고서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국보 322-2호 <삼국사기>는 1512년 다시 새긴 것을 찍은 것으로 인출당 당시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삼국사기, 고려 1145년, 1573년 인쇄, 종이에 인쇄, 국보 322-1호, 경주 옥산서원>

제향 영역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과 이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체인문, 체인묘, 전사청, 경각, 비각 등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체인문을 들어서면 회재 이언적의 위패를 모신 체인묘(體仁廟)가 있다. 사당은 신성한 공간이며 위엄을 갖추어야 하기에 내삼문의 주위로 담장을 둘렀다. 전사청(典祀廳)은 제사를 지내기 전날에 제수를 보관하던 곳으로, 평상시에는 제기와 제구를 보관한다. 사당 오른쪽에 있는 경각(經閣)에는 어서(御書), 어필(御筆), 내사본(內賜本), 퇴계수필(退溪手筆), 각종 전적 등을 봉안하고 있다. 사당 왼쪽에 있는 것은 선조 10년(1577)에 세워진 이언적의 신도비각이다. 신도비의 비문은 고봉 기대승이 짓고, 글씨는 아계 이산해가 썼다. 건립 당시에는 이 서원 앞의 계곡에 있었으나 훼손을 막으려고 서원 안으로 옮겼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고직사를 비롯한 부속건물들

동재인 민구재 옆으로는 살림집 형태의 고직사 건물들이 있는데 다른 서원에 비해 그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다. 고직사에는 상당히 많은 방을 두고 있는데, 서원을 방문하는 유력인사들이 잠시 머물 수 있도록 건물을 크게 지은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고직사>

OLYMPUS DIGITAL CAMERA<고직사 본채>

OLYMPUS DIGITAL CAMERA<고직사 행랑채>

OLYMPUS DIGITAL CAMERA<바깥에서 본 고직사>

OLYMPUS DIGITAL CAMERA<민구재와 고직사 사이의 공간>

OLYMPUS DIGITAL CAMERA<고직사에서 서원을 출입하는 작은 쪽문>

OLYMPUS DIGITAL CAMERA<옥산서원 유물전시관>

옥산서원(玉山書院, 사적)
이 서원은 회재 이언적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세웠다. 이언적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그의 성리학은 퇴계 이황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종묘에 명종의 공신으로 모셔져 있다. 그가 타계한 후 1572년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지방유림의 뜻에 따라 서원을 창건하였으며 1574년에는 선조에게서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5년(1868)에 흥선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에도 헐리지 않고 그대로 살아남은 47개의 서원과 사당 중 하나이다. 서원 건축의 역사로 보면 옥산서원은 초기의 건축물에 해당하는데, 당시에 지어진 서원들이 비교적 자유로운 구성을 따랐던 데 비해, 이 서원은 틀에 짠 듯 질서 정연한 형식을 보이고 있다. 까다롭기로 유명했다던 이 서원의 원규(지금의 학칙)만큼 이 건축물에서도 긴장과 절제가 묻어난다. 정문인 역락문을 들어서면 누각인 무변루가 있고, 강당인 구인당의 양쪽으로는 동재와 서재가 있으며, 강당 뒤쪽에 서 있는 것이 회재를 모신 사당인 체인묘이다. 동재의 오른쪽으로 지어진 여러 건물들은 서원의 살림을 맡았던 곳이다. 이곳 고직사(庫直舍)는 다른 서원에 비해 유난히 규모가 커서 예전의 재산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고직사 뒤에 있는 문집판각(文集板閣)은 목판을 보관하는 곳이다. 옥산서원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며, 그 현판 뒤에는 아계 이산해가 쓴 또 다른 현판도 걸려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화순 효산리와 대산리 지석묘군(사적), 대산리마을 부근 감태바위 고인돌군

전남 화순군 효산리와 대산리 지석묘군(사적) 중 감태바위 고인돌군이다. 전체 5 km 지역에 분포된 고인돌 중 보검재 고개를 넘어 춘양면 대산리마을 인근에 흩어져 있는 140기의 고인돌이다. 그중 마당바위 고인돌은 길이 6.5 m로 넓은 덮개돌로 고갯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잠시 쉬어갔던 곳을 보인다. 마을 뒷편 감태바위 주변에는 바둑판식 고인돌을 비롯하여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고인돌들이 좁은 지역에 밀집해 있으며, 뒷편에는 돌을 채석장도 같이 있다. 이곳을 지나 대산리 마을에도 약 46기의 고인돌이 있는데 발굴현장과 함께 살펴볼 수 있다.

전남 화순군 효산리와 대산리 지석묘군(사적)은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 모산마을에서 보검재(해발 188.5 m)를 넘어 춘양면 대산리로 연결되는 약 5 km의 고갯길 주면에 흩어져 있는 596기의 고인돌군을 말한다. 고창 고인돌 및 강화 고인돌 유적과 함께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화순 춘양면 대산리마을 뒷편에 위치한 감태바위 고인돌군. 140기의 고인돌이 마을 뒷편에 밀집해 있다.

감태바위 고인돌군은 채석장 바로 아래에 있으며 고인돌 축조 과정을 살필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고인돌 덮개돌의 채석 과정과 지상에 무덤방이 드러난 탁자식 고인돌과 고임돌을 괸 바둑판식 고인돌, 지상에 무덤방이 드러난 개석식 고인돌 등 여러 형식의 고인돌을 함께 살필 수 있는 곳이다. (안내문, 화순군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대산리마을. 이곳엔 약 46기의 고인돌이 발굴현장과 함께 전시되어 있는 공간과 체험장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감태바위 주변의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

OLYMPUS DIGITAL CAMERA또다른 고인돌. 화순지역에는 화산재가 굳어진 응회암이 많은 지역이다. 응회암은 가공하기가 쉬워 고인돌을 만들기에 적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화순 고인돌유적지 장동응회암
화순 고인돌 유적지에는 보검재 계곡을 따라 4 km 길이에 596기의 고인돌이 밀집 분포하고 있습니다. 고인돌의 재료인 장동응회암은 중생대 백악기 당시 커다란 호수였던 화순에 수차례의 화산폭발로 화산재가 쌓여 굳어진 암석입니다. 특히 이곳의 응회암은 화순지역에 넓게 분표하며 층과 층을 쉽게 떼어낼 수 있는 특징을 갖고 있어 고인돌을 축조하기에 적절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석검, 가락바퀴 등의 유물이 대거 출토외었으며, 2000년 12월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보호되고 있습니다. (안내문, 화순군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언덕 위에 있는 고인돌

OLYMPUS DIGITAL CAMERA언덕 위 높은 곳에 위치한 고인돌.

OLYMPUS DIGITAL CAMERA마을에서 보검재 고개로 올라가는 길. 도로 주변에 고인돌들이 흩어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도로를 따라 줄지어 있는 고인돌.

OLYMPUS DIGITAL CAMERA도로 옆에 있는 고인돌.

OLYMPUS DIGITAL CAMERA고갯길 중간쯤에 위치한 마당바위 고인돌. 길이 6.5 m의 상당히 크고 넓은 고인돌이다. 이 고갯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잠시 쉬어가던 곳으로 보인다.

마당바위 고인돌은 길이 650 cm, 두께 110 cm의 대형 덮개돌로, 마당처럼 넓다고 하여 마당바위 고인돌로 불린다. 덮개돌 아래에 받침돌 10매가 빋치고 있는 전형적인 바둑판식 고인돌로 주변에는 이곳이 묘지이었음을 표시했던 구획석이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이 고인돌 주변에는 조그마한 바둑판식 고인돌과 탁자식 고인돌도 있다. (안내문, 화순군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마당바위 아래 전형적인 탁자식 고인돌.

OLYMPUS DIGITAL CAMERA도로 아래쪽에 위치한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고인돌.

화순 효산리 및 대산리 지석묘군, 사적 410호
화순고인돌 유적은 2000년 12월 고창고인돌 및 강화고인돌 유적과 함께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이는 화순고인돌이 전 인류를 위하여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탁월한 문화유산임을 널리 인정받은 것이다. 화순고인돌은 남쪽 산기슭을 따라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산리를 잇는 보검재(일명 보성재, 해발 188.5 m) 계곡 일대 약 5 km 범위에 분포되어 있다. 특징은 좁은 지역 내에 고인돌 여러 개가 한 곳에 모여 있으며 당시의 자연환경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고, 또한 고인돌 덮개돌 채석장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어 돌을 캐는 것과 캔 돌을 쌓아 고인돌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유적은 국가 사적 제 410호로 지정되었고, 거점 지역별로 괴바위 고인돌군(47기), 관청바위 고인돌군(190기), 달바위고인돌군(40기), 핑매바위 고인돌군(133기), 감태바위 고인돌굴(140기), 대산리 발굴지(46기) 등에 596기의 고인돌이 빽빽히 분포해 있다. (안내문, 화순군청, 2017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화순군청

화순 효산리와 대산리 지석묘군(사적), 핑매바위 고인돌군

전남 화순군 효산리와 대신리 지석묘군(사적) 중 핑매바위 고인돌군이다. 전체 5 km 지역에 분포된 고인돌 중 보검재 고개를 지나 핑매바위까지 주변에 흩어져 있는 133기의 고인돌군을 말한다. 핑매바위는 길이 7 m, 높이 4 m의 거대한 고인돌로 오래세원 이 고갯길의 이정표가 되어왔다. 주변에는 많은 고인돌들이 흩어져 있으며 뒷편에는 돌을 채취했던 채석장이 보인다.

전남 화순군 효산리와 대산리 지석묘군(사적)은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 모산마을에서 보검재(해발 188.5 m)를 넘어 춘양면 대산리로 연결되는 약 5 km의 고갯길 주면에 흩어져 있는 596기의 고인돌군을 말한다. 고창 고인돌 및 강화 고인돌 유적과 함께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핑매바위 고인돌군은 보검재 고개를 넘어서 이정표가 되었던 핑매바위가 서 있는 곳까지 흩어져 있는 133기의 고인돌을 말한다. 주로 도로 위쪽에 분포하고 있으며, 아래쪽에도 여러기의 고인돌이 흩어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나주와 보성을 연결하는 보검재 고갯길에서 이정표가 되었던 핑매바위. 높이 4 m의 거대한 덮개돌이다. 자연석이 아니라 다듬은 흔적이 많이 남아 있으며 아래에는 덮개돌을 받쳤던 받침돌들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앞쪽에는 여흥민씨 재실이 있음을 표시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팽매바위 고인돌은 돌을 던진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며, 길이 7 m, 높이 4 m, 무게 200톤이 넘는 초대형 덮개돌로 세게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고인돌이다. 덮개돌의 아랫면은 다듬은 흔적이 뚜렷하고 받침돌이 고이고 있어 덮개돌 아래에 일정한 공간이 있다. 이 고인돌에는 마고할머니와 관련된 전설과 옛 장수가 묻혔다는 장군바위 전설 등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특히 고인돌 위 구멍에 왼손으로 돌을 던져 들어가면 시잡가고 장가간다는 전설이 전해오기도 한다. 핑매바위 주변에는 지동마을에서 보검재로 올라가는 산비탈을 따라 133기의 고인돌이 나란히 서 있다. (안내문, 화순군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고개너머 도로 아래에 흩어져 있는 고인돌.

OLYMPUS DIGITAL CAMERA도로 옆에 있는 고인돌.

OLYMPUS DIGITAL CAMERA아래쪽에 있는 고인돌.

OLYMPUS DIGITAL CAMERA핑매바위 윗쪽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으로도 고인돌들이 줄을 지어 모여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위쪽에 있는 비교적 큰 규모의 바둑판식 고인돌.

OLYMPUS DIGITAL CAMERA도로 옆에 보이는 작은 규모의 고인돌.

OLYMPUS DIGITAL CAMERA핑매바위 뒷편으로 보이는 채석장 주변

OLYMPUS DIGITAL CAMERA핑매바위 앞 도로.

OLYMPUS DIGITAL CAMERA핑매바위 부근에 있는 비교적 큰 규모의 고인돌

OLYMPUS DIGITAL CAMERA핑매바위 앞 도로 아래에 있는 고인돌군.

OLYMPUS DIGITAL CAMERA크고 작은 고인돌들이 흩어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상당히 큰 규모의 고인돌.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으로도 핑매바위보다 약간 작은 규모의 고인돌들을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아래쪽에서 본 핑매바위 주변.

화순 효산리 및 대산리 지석묘군, 사적 410호
화순고인돌 유적은 2000년 12월 고창고인돌 및 강화고인돌 유적과 함께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이는 화순고인돌이 전 인류를 위하여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탁월한 문화유산임을 널리 인정받은 것이다. 화순고인돌은 남쪽 산기슭을 따라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산리를 잇는 보검재(일명 보성재, 해발 188.5 m) 계곡 일대 약 5 km 범위에 분포되어 있다. 특징은 좁은 지역 내에 고인돌 여러 개가 한 곳에 모여 있으며 당시의 자연환경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고, 또한 고인돌 덮개돌 채석장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어 돌을 캐는 것과 캔 돌을 쌓아 고인돌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유적은 국가 사적 제 410호로 지정되었고, 거점 지역별로 괴바위 고인돌군(47기), 관청바위 고인돌군(190기), 달바위고인돌군(40기), 핑매바위 고인돌군(133기), 감태바위 고인돌굴(140기), 대산리 발굴지(46기) 등에 596기의 고인돌이 빽빽히 분포해 있다. (안내문, 화순군청, 2017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화순군청

화순 효산리와 대산리 지석묘군(사적), 관청바위 고인돌군

전남 화순군 효산리와 대산리 지석묘군(사적) 중 관청바위 고인돌군이다. 전체 5 km 지역에 분포된 569기의 고인돌 중 계곡 중간쯤 저수지 부근에 분포하고 있는 190기의 고인돌을 말한다. 계곡 북쪽 언덕을 따라 많은 고인돌들이 밀집하여 규칙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고인돌들은 대부분 4각형의 전형적인 바둑판식 고인돌 형태를 하고 있다. 뒷편 언덕에는 떼었던 큰 채석장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전남 화순군 효산리와 대산리 지석묘군(사적)은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 모산마을에서 보검재(해발 188.5 m)를 넘어 춘양면 대산리로 연결되는 약 5 km의 고갯길 주면에 흩어져 있는 596기의 고인돌군을 말한다. 고창고인돌 및 강화고인돌 유적과 함께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고갯길 입구에서 조금 지나서 작은 저수지 주변에 190기의 고인돌이 모여 있는 관청바위고인돌군을 볼 수 있다. 화순 고인돌유적지 중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이 모여있는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저수지 아래 계곡에 있는 고인돌.

OLYMPUS DIGITAL CAMERA관청바위 고인돌군은 도로 옆을 따라서 고인돌들이 규칙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관청바위 고인돌군은 보성 원님이 쉬면서 관청 일을 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고인돌군은 화순 고인돌 유적지에서 가장 큰 무리를 이루고 있는 대표적인 곳이다. 고인돌은 산기슭을 따라 규칙적으로 줄을 지어 분포하고 있으며 규모가 가장 큰 고인돌은 2003년 조사 결과 덮개돌 밑을 빙 둘러 받침돌이 놓여 있고 땅을 평탄하게 한 후 돌을 구획하여 깐, 묘소의 경계를 정한 구역이 확인되었다. (안내문, 화순군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도로를 따라서 고인돌들이 이어지고 있다.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덮개돌들을 볼 수 있는데 바둑판 형태의 덮개돌이 상대적을 많다.

OLYMPUS DIGITAL CAMERA도로 옆에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바둑판식 고인돌.

OLYMPUS DIGITAL CAMERA도로 옆 고인돌군.

OLYMPUS DIGITAL CAMERA고인돌군

OLYMPUS DIGITAL CAMERA도로 옆에 볼 수 있는 고인돌.

OLYMPUS DIGITAL CAMERA관청바위라 불리는 상당히 크고 넓은 고인돌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도로에서 연결되는 탐방로에서 첫번째로 보이는 고인돌군.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으로 보이는 채석장.

OLYMPUS DIGITAL CAMERA바닥판을 올려놓은 모습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고인돌.

OLYMPUS DIGITAL CAMERA탐방로를 따라서 보이는 고인돌..

OLYMPUS DIGITAL CAMERA탁자식 고인돌처럼 넓직하게 생긴 덮개돌.

OLYMPUS DIGITAL CAMERA전형적인 바둑판식 고인돌. 아래쪽에 작은 돌을 깔아 덮개돌을 받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탐방로를 따라 이어지는 고인돌.

OLYMPUS DIGITAL CAMERA도로와 만나는 지점에 볼 수 있는 상당히 큰 규모의 고인돌들.

OLYMPUS DIGITAL CAMERA상당히 큰 덮개돌 아래에 받침돌을 받히고 있는 고인돌.

화순 효산리 및 대산리 지석묘군, 사적 410호
화순고인돌 유적은 2000년 12월 고창고인돌 및 강화고인돌 유적과 함께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이는 화순고인돌이 전 인류를 위하여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탁월한 문화유산임을 널리 인정받은 것이다. 화순고인돌은 남쪽 산기슭을 따라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산리를 잇는 보검재(일명 보성재, 해발 188.5 m) 계곡 일대 약 5 km 범위에 분포되어 있다. 특징은 좁은 지역 내에 고인돌 여러 개가 한 곳에 모여 있으며 당시의 자연환경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고, 또한 고인돌 덮개돌 채석장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어 돌을 캐는 것과 캔 돌을 쌓아 고인돌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유적은 국가 사적 제 410호로 지정되었고, 거점 지역별로 괴바위 고인돌군(47기), 관청바위 고인돌군(190기), 달바위고인돌군(40기), 핑매바위 고인돌군(133기), 감태바위 고인돌굴(140기), 대산리 발굴지(46기) 등에 596기의 고인돌이 빽빽히 분포해 있다. (안내문, 화순군청, 2017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화순군청

구리 동구릉 건원릉(健元陵, 사적),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능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사적 193호)에 있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1335~1408년, 재위 1392~1398년)의 무덤인 건원릉(健元陵)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후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정릉에 이어 두번째로 조성되었다. 태조가 승하한 이후 풍수지리 등을 고려하여 명당자리를 찾아 6천여명의 인원이 동원되어 조성되었다. 건원릉은 고려 왕릉의 제도를 받아 들이면서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공민왕의 헌정릉 양식을 많이 따랐으며 내부는 석실로 만들었다. 하지만 봉분 주위에 곡장으로 두르고 석물의 배치 등이 이전 고려왕릉과 다른 독자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부분도 있다.

건원릉은 태종이 풍수지리설을 받아들여 조성한 동구릉은 뒷편 검암산을 주산으로 하고 좌우 지형이 청룡과 백호의 산세를 하고 있으며 남쪽의 안산을 바라보도록 능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에는 잔디가 아닌 억새풀로 덮여 있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태조를 위해 함흥에서 흙을 가져와 봉분을 조성하고 억새로 덮었다고 한다. 왕릉 앞 제사를 모시는 정자각(보물 1741호)은 왕릉이 조성할 때 처음 세워진 것으로 후대 정자각의 표준이 되는 건물이다. 건원릉의 원찰은 개경사이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동구릉(사적 193호)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1408년에 승하하면서 조성한 건원릉을 중심으로 역대 왕과 왕후의 능 9기가 조성되어 있다. 동구릉에는 한 분만 모신 단릉, 두분을 모신 쌍릉, 한곳에 산줄기를 달리해서 모신 동원이강릉, 두분을 함께 모신 합장릉, 세분을 나란히 모신 삼연릉이 있어 다양한 모습의 왕릉을 볼 수 있다. 동구릉에 왕릉을 조성한 왕으로는 태조를 비롯하여 5대 문종과 왕비, 14대 선조와 왕비,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18대 현종과 왕비, 21대 영조와 왕비, 추존왕인 문조와 왕비, 24대 헌종과 왕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구리 동구릉에 있는 건원릉.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무덤으로 후대 왕릉의 모범이 되었다. 고려 공민왕 헌정릉의 형태에 영향을 받았다. 후대 왕릉과는 달리 봉분 내부는 석실로 되어 있으며, 비각에서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태조 건원릉
조선 제1대 왕인 태조(1335~1408)는 함경도 영흥에서 태어났고, 1392년에 조선을 창건한 후 1408년에 돌아가셔서 이곳에 안장되었다. 태조 건원릉은 조선을 창업한 군주의 무덤답게 동구릉 중에서 유일하게 이수와 귀부를 갖춘 대형 비석 2기가 세워져 있다. 본래 태조는 먼저 돌아가신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을 도성 안에 조성하면서 자신이 묻힐 터로 삼았으나, 태조의 아들인 태종이 이 지역에 건원릉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건원릉을 관리하기 위하여 재궁으로 개경사를 세워 태조의 명복을 빌었다. 태조는 돌아가실 때 자신의 무덤에 고향에서 나는 억새를 심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건원릉에만 봉분에 억새가 심어져 있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능역과 바깥세상을 분리해 주는 작은 개천과 다리. 궁궐과 마찬가지로 금천과 금천교라 부른다.

OLYMPUS DIGITAL CAMERA왕릉 입구에 세워진 홍살문. 신성구역임을 표시하기 위해 세워놓은 구조물이다. 안쪽에 왕이 절을 올린는 판석이 깔린 배위(拜位)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홍살문 안쪽에서 제사를 올리는 건물인 정자각까지는 참도로 연결되어 있다. 가운데에는 혼령이 다니는 신도(神道)이며 작은 길은 국왕이 다니는 어도(御道)이다. 궁궐 정전 앞 마당과 마찬가지로 자세를 단정히 가질 수 있도록 거친 박석을 깔았다.

OLYMPUS DIGITAL CAMERA참도는 정자각 월대 옆면으로 연결된다.

OLYMPUS DIGITAL CAMERA건원릉 정자각(보물 1741호). 왕릉에서 제사를 올리는 공간이다. 건릉릉을 조성할 때 같이 세워진 건물로 여러 차례 수리를 했지만 원래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조선의 법전인『국조오례의』에 정의된 정자각의 표준이 된 건축물이다. 앞면 3칸의 크지 않은 건물로 앞쪽에 월대가 있어, 그 위에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툇간을 달아내어 ‘丁’자처럼 생겼다고 하여 정자각이라 부른다.

OLYMPUS DIGITAL CAMERA월대에서 본 정자작 내부. 뒷쪽 봉분을 향해 문이 열려 있으며, 내부에 제사상을 차려놓고 제사를 올린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자각 오른편에 위치한 수복방. 왕릉을 관리하는 관리나 하인들이 잠시 머무는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맞은편 수라간. 제사를 준비하는 건물이다. 수복방과 수라간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재실에서 그 기능을 수행하면서 대부분 없어졌던 것을 최근에 복원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자각 뒷편에 위치한 비각. 후대 왕릉과는 달리 선왕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와 왕릉의 주인을 알려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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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의 주인을 알려 주는 비석. 고황제(高皇帝)란 글자가 적혀 있는 것으로 볼 때 대한제국 선포 이후 세워진 비석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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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신도비(보물 1803호). 태조 이성계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해 놓고 있다. 신도비는 조선초 왕릉에만 볼 수 있다. 조선중기 이후 왕릉에서는 신도비는 없고 비석만 세워진다.

OLYMPUS DIGITAL CAMERA건원릉 봉분. 뒷편 검암산을 주산으로 하고 좌우 지형이 청룡과 백호의 산세를 하고 있으며 남쪽의 안산을 바라보도록 능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에는 잔디가 아닌 억새풀로 덮여 있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태조를 위해 함흥에서 흙을 가져와 봉분을 조성하고 억새로 덮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동구릉 입구 재실. 동구릉은 건원릉을 포함하여 9기의 왕릉이 모여있는 곳으로 입구에 큰 재실을 두어 왕릉을 통합하여 관리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건원릉의 관리 이력을 기록해 놓은 건원릉지(健元陵誌).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