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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宗廟)] 정전(正殿),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곳

종묘의 정전(正殿)은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이다. 정전(正殿)에는 태조와 현 국왕의 4대조, 사대부 가문의 불천위 조상에 해당하는 공덕이 큰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공간이다. 현재는 19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으며 신실 한 칸에는 한분의 왕과 그 왕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원래는 정전(正殿)을 종묘라고 불렀으나 지금은 영녕전을 포함하여 종묘영역 전체를 종묘라 부른다. 정전에는 국가에 큰 업적을 남긴 왕의 신위를 모시기로 되어 있었으나 조선중기 이후에는 업적이 많지 않은 왕과 왕비의 신전을 영녕전으로 옮기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왕조가 존속했던 500여년간 지속적으로 모실 신주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수차례에 걸쳐서 증축하게 되어 세계적으로 드문 긴 목조건물이 되었다. 정전은 신주가 모셔진 19칸의 신실과 그 양쪽에 익실 3칸씩으로 되어 있으며 그 양쪽에 누각형태를 하고 있는 동월랑과 창고 형태의 서월랑이 연결되어 있다. 정전 영역에는 종묘제례가 거행되는 넓은 월대가 설치되어 있다 월대 앞에는 그 앞쪽에는 역대국왕의 공신들을 모신 공신당(功臣堂)과 생활과 밀접한 일곱소신을 모신 칠사당(七祀堂)이 있으며, 서문 밖에 제례악을 준비하는 악공청(樂工廳)을 두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와 현직 국왕의 4대조, 불천위에 해당하는 공덕이 큰 왕을 모시는 종묘의 중심이 되는 공간이다. 오랜 세월 정전에 모셔할 신주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수차례 증축을 하면서 현재와 같은 긴 목조건물이 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종묘 정문인 외대문에서 신도로 연결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전 영역 남쪽편 출입문.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출입문으로 삼문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혼령들이 출입하는 신문(神門)으로 사용하고 있다. 국왕을 비롯한 제례에 참여하는 인원들은 동문을 통해 출입하고, 악공들은 서문을 이용한다. 정전영역은 궁궐 전각에 해당하지만 추녀마루에 잡상을 설치해 놓지 않았다.

OLYMPUS DIGITAL CAMERA신문은 혼령들이 쉽게 출입할 수 있도록 틈을 많이 만들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기둥아래 북모양의 태극문양 장식.

OLYMPUS DIGITAL CAMERA종묘 정전 영역. 건물은 신주가 모셔신 19칸의 신실이 있는 정전을 중심으로 양쪽에 3칸씩 협실, 그 양쪽에 동월랑과 제기고가 연결되어 있다. 건물은 상월대 위에 세워졌으며, 그 아래에는 종묘제례의식이 거행되는 넓은 월대가 설치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2008년 종묘 정전 영역.

OLYMPUS DIGITAL CAMERA종묘제례에 참석하는 국왕을 비롯하여 제관들은 준비공간인 전사청이 있는 동문으로 출입한다. 동문도 정문과 마찬가지로 앞면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추녀마루에 잡상은 없다. 국왕과 제관들이 목욕재개하고 대기하던 재궁과는 어도가 연결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문 안쪽 공간.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정전 동문.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곳, 정전(正殿)
종묘의 중심 건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太祖)를 비롯하여 역대 왕 중에서 특히 공덕이 크다고 평가된 19명의 왕과 그 왕비의 신위 총 49위를 모셨다. 건립 초기 7실의 단일 건물이었으나 생전의 공이 커서 정전에 계속 모셔지는 불천위(不遷位), 왕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사후에 추존되어 모셔지는 경우 등이 늘어남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증축되었다. 정전은 창건 시 7칸으로 세워졌으나, 1546년(명종1)에 신실4칸을 더하여 총11칸으로 늘어났다.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원년)에 11칸으로 복원되었고, 1726년(영조2)에 15칸으로, 1836년(현종2)에 19칸으로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정전의 좌우에는 협실이 각3칸, 동서월랑 각5칸이 설치되어 ‘ㄷ’자형 건물을 이룬다. 동협실은 제기를 보관한 제기고이며, 서협실은 신주를 모시고 이동할 때 쓰는 신여(神轝), 욕석(褥席), 병풍(屛風) 등을 두는 장소인 의물고(儀物庫)로 쓰였다. 정전의 남쪽 동편에는 공신당(功臣堂), 남쪽 서편에는 칠사당(七祀堂), 동편 담에는 수복방(守僕房), 동편 담 밖에는 전사청(典祀廳)이 자리잡고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종묘 정전(宗廟 正殿, 국보227호)
종묘의 중심부분으로 길게 지은 정전의 앞에는 넓은 월대를 두었고 사방으로 담장을 둘렀다. 남쪽의 신문으로 혼령이, 동문으로 임금을 비롯한 제관들이, 서문으로 제례악을 연주하는 악공과 춤을 추즌 일무원들이 출입했다. 1395년에 신실7칸의 규모로 창건했고 여러 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는 19칸에 이르러 매우 긴 목조 건물이 되었다. 몸체인 신실의 양쪽에는 창고와 부속실을 마련했다. 거친 월대 바닥과 그 위로 육중한 지붕이 떠 있는 모습은 숭고하고 고전적인 건축미의 극치를 이룬다. 남쪽 담장 안에는 공신당(功臣堂)과 칠사당(七祀堂)을 각각 동쪽과 서쪽에 세었으며, 서문 밖에 제례악을 준비하는 악공청을 두었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태조와 역대 국왕을 모신 종묘 정전. 정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를 비롯하여 19명의 왕과 그 왕비를 모시고 있다. 종묘를 처음 세웠을때는 7실은 단일 건물이었으나, 공덕이 큰 불천위에 해당하는 국왕이 늘어남에 따라 여러차례 층축되었으며, 1836년(현종2)에 19칸으로 증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종묘 정전은 19명의 왕과 왕비를 모신 19개의 신실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종묘 정전 신실

OLYMPUS DIGITAL CAMERA종묘제례를 지낼때 신실 내부의 모습. 내부는 개방된 넓은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향대청에 재현해 놓은 신실 내부. 종묘 신실은 신주를 모신 신주장을 중심으로 서쪽에 책장, 종쪽에 보장이 있다. 신주장 앞의 신탑에는 궤가 놓여 있고 그 앞에 제상과 좌우에 봉선과 황개가 놓여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보장(寶欌)은 왕과 왕비의 시호를 새긴 금보, 은보, 옥보를 보관하는 장이다. 보장에 모셔지는 보와 보통, 보함.  태조 금조(太祖 金寶), 태조의 시호 “강헌 지인계운 응천조통 광훈영명 성문신무 정의광덕 대왕지보”를 새긴 금으로 만든 도장이다. 신의고황후 옥보, 대한제국 선포이후 1899년에 태와 지를 고황제와 고황후로 추존하면서 옥으로 만든 황후의 도장이다. 보통(寶筒), 어보를 담는 내함으로 구리, 주석, 납을 합금하여 만들었고 내부에는 붉은 비단 천을 발랐다. 보함(寶函), 보통을 담은 외함으로 뚜껑에는 거북이 모양의 손잡이가 있으며 장식이 매우 아름답다.

OLYMPUS DIGITAL CAMERA책장(冊欌)은 왕과 왕비의 공덕을 기록하여 만든 금책, 옥책, 죽책 등을 보관하는 장이다. 태조 옥책, 이 옥책은 숙종 9년(1638) 정의광덕이라는 시호를 올릴때, 태조 생전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들을 옥돌에 새겨 만든 책이다. 옥책함(玉冊函), 옥책을 보관하는 함으로 표면에 붉은 칠을 한 다음 금으로 봉황, 매화, 난초, 대나무 등의 문양을 그렸고 뚜껑에는 자물쇠를 달았다. 정조 축책(正祖 竹冊), 영조대왕이 정조를 세손으로 임명할 때 내린 문서의 내용을, 대나무 조각에 금으로 글을 새겨 만든 책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제사 때 신주를 기대는 대, 궤几는 ‘의궤儀几’ 또는 구불거리는 형태때문에 ‘곡궤曲几’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주의 수에 맞게 제작되어 평소에 신탑 위에 놓였다가 대제 때 궤 앞에 신주를 모셨다. 이 궤에는 ‘일십삼’이라는 묵서명이 있어 정전1실에 부묘된 신덕왕후의 궤로 추정된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신주나무, 신주목神主木, 밤나무를 깎아 왕과 왕비의 신주로 쓰기 위해 만든 것이다. 정육각형의 몸체에 윗부분은 둥글게 하였다. 상.하와 사방에 구멍(규竅)을 내었다. 신주목의 중앙부분에 왕은 모호廟號.시호諡號.존호尊號를, 왕비는 시호.존호.휘호徽號를 순서대로 적어 신주로 봉안하였다. 신주를 봉안하는 함, 복제, 뚜껑과 받침대로 구성되며 받침대 안에 좌자座子를 깔고 신주를 봉안하였다. 1421년(세종3)에 궤의 앞뒤가 바뀔 수 있다고 하여 뚜껑과 받침대 앞면에 붉은 글씨로 ‘전前’자를 써서 구별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앞면이 막힌 신주궤를 사용하다가 1637년(인조15) 이후 내궤의 앞면을 비워 신주의 출납을 편리하게 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신탑에 까는 자리, 욕석褥席, 신탑 위에 깔았던 화문석이다. 신주를 놓는 곳에는 황화문석, 자방주요, 황화문석의 세겹으로 된 욕석을 깔아 신주를 모셨다.

SANYO DIGITAL CAMERA정전 신실앞 제사를 준비하는 퇴간.

OLYMPUS DIGITAL CAMERA종묘제례시 제사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

종묘대제는 조선왕조의 사당인 종묘에서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의례로, 봄.여름.가을.겨울.납일 등 1년에 5번 지냈으나 현재는 매년 5월 첫번째 일요일에 국제문화행사로 봉행되고 있다. 제향의식 뿐 아니라 제례악과 일무 등 유형과 무형의 세계유산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종묘대제는 세계적으로 보기드문 종합적인 의례이다. <출처:문화재청>

종묘 제향의 의식 절차
종묘 제향의 절차는 조선 초기에 큰 틀이 확립되었으며 시대에 따라 약간의 수정.변화가 이루어졌다. 국왕이 직접 의식을 수행하는 친제親祭의 절차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신관례(晨祼禮), 향과 술로 혼백을 모셔오고 예물과 폐백을 바침
축시 정가(새벽1시)에 초헌관(招獻官)인 왕과 제관이 입장하여 각자의 위치에 서면 제례가 시작된다. 왕은 향을 피우고 땅에 향기로운 술을 부어 하늘과 땅으로 돌아간 신의 혼백을 신주로 모시는 의식을 행하였다. 신을 모신후에는 흰 모시를 폐백(幣帛)으로 바치고 희생의 간을 불에 태워 제사 준비가 충실하게 되었음을 신에게 알렸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신관례는 신을 맞이하는 의식절차로 향과 술로 혼백을 모셔오고 예물과 폐백을 바친다.

궤식(饋食), 익힌 고기를 신에게 바치고 곡식을 태워 즐기시게 함. 신에게 익힌 음식과 술을 올려 즐겁게 해 드리는 절차로 제의의 핵심이 되는 의식이다. 궤식에서는 전사청에서 삶은 소.양.돼지의 고기를 생갑(牲匣)에 담아 남신문(南神門)과 신의 길을 통해 각 신실로 운반하였다. 제관들은 생갑을 조(俎)에 받쳐 제상의 서쪽에 올렸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천조례(薦俎禮),

삼헌례三獻禮, 신에게 술을 세차례 올려 즐기시게 함. 술을 올라는 헌작(獻爵)은 국왕이 단술(예제醴齊)을 올리는 초헌례(初獻禮), 왕세자가 탁주(앙제盎齊)를 올리는 아헌례(亞獻禮), 영의정이 청주(淸酒)를 올리는 종헌례(終獻禮)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초헌례 후에는 축문을 읽어 제사의 연유를 고했다. 종헌례때는 종묘에 부속된 배향공신(配享功臣)과 칠사(七祀)의 신위에도 한 잔의 청주를 올려 즐기게 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첫술잔을 올리는 초헌례(初獻禮), 국왕이 단술(예제醴齊)을 올린다.

OLYMPUS DIGITAL CAMERA왕세자가 탁주(앙제盎齊)를 올리는 아헌례(亞獻禮)

OLYMPUS DIGITAL CAMERA영의정이 청주(淸酒)를 올리는 종헌례(終獻禮)

OLYMPUS DIGITAL CAMERA신이 드신 술과 고기를 내려 받아 복을 받는 음복례(飮福禮).

OLYMPUS DIGITAL CAMERA송신사배(送神四拜), 신을 보내는 예를 올림, 국왕과 제관들은 하늘과 땅으로 돌아가는 신을 위하여 네 번 절하는 예(송신사배)를 올렸다.

OLYMPUS DIGITAL CAMERA망료례(望燎禮), 축문과 폐백을 묻고 태워 제의를 마무리 함. 신을 보낸 후에는 제례에 사용되었던 축문과 폐백을 묻고 태우는 망료례를 행하여 제례를 청결하게 마무리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축문을 태우는 망료,

OLYMPUS DIGITAL CAMERA정전은 국가를 상징하는 중요한 건물이지만 궁궐 정전과는 달리 겹처마와 단청을 사용하지 않고 지붕을 받치는 공포도 장식성이 거의 없는 익공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다. 종묘 정전의 단순하면서도 절제된 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전 추녀마루 잡상

SANYO DIGITAL CAMERA2008년 종묘 정전

OLYMPUS DIGITAL CAMERA정전 왼쪽편에 위치한 축문을 태우는 망료를 하는 장소

OLYMPUS DIGITAL CAMERA정전 동쪽편 동협실과 동월랑. 동협실은 제기를 보관한 제기고이며, 5칸규모의 서월랑은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이다.

제기의 보관처, 제기고(祭器庫),
종묘 제향에 사용되는 제기는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명에게 바치던 기물이었기에 조선초부터 정성껏 관리되었다. 1416년(태종16) 제기를 보관하기 위한 별도 공간인 제기고를 마련하였으며, 영조 대에는 당시 제기고로 쓰인 정전 동협실 내에 대규모 제기장을 설치하였다. 이 제기장은 1836년(헌종2) 정전이 동쪽으로 4칸 더 증축될 때 철거되지 않고 일부 수리된 채 현재의 동협실로 이전되어 전해지고 있다. 정전 동협실의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붙박이장 형태의 대규모 제기장(대장大欌)은 종묘 오향대제 때 사용된 제기를 보관한 대제제기장(大祭祭器欌)이다. 2층으로 이루어졌으며 내부에는 선반을 별도로 달아 많은 양의 제기를 보관하기 용이하도록 하였다. 제기장2층의 서쪽에는 일종의 별실이 있는데, 기록에 따르면 보.궤의 뚜껑을 두었던 장소이다. 영녕전의 제기고는 별도의 건물로 영녕전의 동북쪽에 자리하였다. 고종 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내부에는 정전 제기고와 유사한 형태의 2층으로 된 벽부형 제기장이 설치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종묘 정전 제기고의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장.

OLYMPUS DIGITAL CAMERA정정 서쪽편 서협실과 서월랑. 서협실은 신주를 모시고 이동할 때 쓰는 신여(神轝), 욕석(褥席), 병풍(屛風) 등을 두는 장소인 의물고(儀物庫)로 쓰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월랑은 5칸 규모로 벽과 창이 있는 창고처럼 지어졌다.

OLYMPUS DIGITAL CAMERA동문에서 하월대를 오르는 계단

OLYMPUS DIGITAL CAMERA정전 건물은 화강석으로 기단을 쌓은 월대 위에 올려져 있다. 월대에는 3곳의 계단이 있으며, 동쪽편 계단이 어도로 연결되어 있다. 아마도 국왕이 사용한 계단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신들이 드나드는 남문과 신도로 연결된 가운데 계단. 신들이 지나가는 계단인 듯 하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전 동쪽편 끝에 위치한 동월랑. 지붕이 있는 복도형식의 건물로 제사를 준비하는 장소이다. 월대를 오르는 3개의 계단이 있다. 종묘제례에 참여하는 국왕을 비롯한 제관들이 사용하는 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월랑 월대를 오르는 계단.

SANYO DIGITAL CAMERA동월랑 월대에서 본 정전 앞 상월대와 퇴간.

OLYMPUS DIGITAL CAMERA정묘 정전 앞에는 종묘제례 의식을 거행하기 위한 공간으로 넓은 월대가 설치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전 남쪽 신문을 들어서면 종묘제례 의식이 거행되는 넓은 월대가 조성되어 있고 중간에 혼령들이 이동하는 신도가 설치되어 있다. 월대는 궁궐 조정과 마찬가지로 거친 박석이 깔려 있으며, 혼령이 지나가는 신도와 어도, 국왕을 비롯한 제관들이 위치를 알려주는 판위에는 전돌을 깔았다.

OLYMPUS DIGITAL CAMERA동문을 들어서면 국왕의 이동하는 길에 전들을 깔린 어도가 설치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편 계단 앞 판위.

OLYMPUS DIGITAL CAMERA정전 가운데 계단 앞 제관이 서 위는 위치를 알려주는 넓은 판위

OLYMPUS DIGITAL CAMERA월대를 오르는 계단.

OLYMPUS DIGITAL CAMERA월대의 빗물이 흘러내리는 석누조.

OLYMPUS DIGITAL CAMERA 종묘제례악은 종묘제례 의식에 맞추어 연주하는 것으로, 기악.노래.춤이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이다. 악기 연주에 맞추어 선왕의 공덕을 기리는 노래를 부르며, 열을 맞추어 추는 일무를 춘다. 종묘제례악은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고, 2001년에 종묘제례와 더물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종묘제례악 연주

OLYMPUS DIGITAL CAMERA팔일무

OLYMPUS DIGITAL CAMERA악공들이 대기하던 정전 서쪽편에 위치한 악공청.

OLYMPUS DIGITAL CAMERA종묘제례시 악공들이 출입하는 정전 서쪽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우주를 묻은 위치를 표시한 책,

왕과 왕비의 신주가 부묘되기 전 혼전(魂殿)에서는 3년 동신 신주로 뽕나무로 만든 우주(虞主)를 사용했다. 신주를 부묘하면 쓰임새를 다한 우주는 정전 뒤뜰 담장 아래에 묻었는데 이 위치를 그림에 표시한 것이다. 정조를 비롯한 여러 왕과 왕비의 우주를 묻은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우주를 묻은 장소.

역대 공신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 공신당(功臣堂)
역대 군왕들의 재위 중 공이 크다고 평가 받은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고 배향하는 사당으로 배향당(配享堂)이라고도 한다. 태조부터 순종까지 정전에 모신 역대왕의 공신 83위의 위패를 안치하였다. 종묘가 창건된 1395년(태조4)에 처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5칸으로 정전 가까이에 있었으나, 1410년(태종10)에 동서월랑을 지으면서 월대 아래로 옮겨졌다. 성종대에는 3칸짜리 건물이어으나 1778년(정조2)에는 4칸으로, 헌종 대에는 6칸으로 증축되었다. 현재는 정면 16칸, 측면1칸의 건물로 정전의 남측 동편에 위치해 있다. 전면 중앙부 3칸에는 나무판자로 된 판문(板門)이 설치되었으며, 나머지 칸에는 광창을 설치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왕조 5백년동안 역대 국왕을 모셨던 공신들의 위패를 모신 공신당

83명의 공신들을 모시고 있다. 종묘가 창건된 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원래는 5칸의 작은 건물이었으나 정전과 함께 증축되어 현재는 16칸의 큰 건물이 되었다. 종묘에서 정전과 함께 중요시 되었던 곳으로 정치적 부침에 따라 모시는 공신이 바뀌기도 했으며, 공신당에 모셔진 공신들이 후손들이 전국의 권문세가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공신당에 모셔진 공신들

OLYMPUS DIGITAL CAMERA공신당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공신당 내부.

공신당은 전국의 권문세가와 관련되었기때문에 국가적에서도 상당히 신경썼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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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공신당에 배향된 황희의 위패, 복제,

세종의 배향공신인 황희의 위패이다. 공신의 위패는 밤나무로 제작하고 중앙에 ‘관직명.시호.이름’순으로 썼다. 왕이 불천지주가 되면 공신당에 게속 머무를 수 있었지만 왕의 신위가 종묘 정전에서 영녕전으로 옮겨지면 제향공신 위패도 내어서 자손에게 돌려보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정전 담장 바깥에서 보이는 공신당.

일곱 소신(小神)의 위패를 모신 사당, 칠사당(七祀堂)
인간생활의 여러 가지 일들을 사찰하고 처벌하는 일곱 소신의 위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서쪽으로부터 도로통행을 주관하는 국행지신(國行之神), 후손없이 죽은 옛날 제후로 사형을 주관하는 공려지신(公厲之神), 도성의 대문을 주관하는 국문지신(國門之神), 거처를 주관하는 중류지신(中霤之神), 음식에 관한 일을 주관하는 사조지신(司竈之神), 출입을 주관하는 사호지신(司戶之神,) 삼명(三命, 나이, 선을 행하고도 흉한 일을 당하는 것, 선한 일과 악한 일에 따라 보응하는 것)을 살피는 사명지신(司命之神)을 모셨다. 늦어도 1414년(태종14)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건물 규모는 3칸으로 1713년(숙종39)에 일부 수리가 되었다는 기록이 전할 뿐 공간에는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정면3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으로, 중앙에 판문이 설치되고 좌우칸에 살창을 설치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칠사당

일곱의 작은 신들에게 왕실과 궁궐의 모든 일과 만백성이 아무 탈 없이 잘 풀리도록 기원하는 사당이다. 칠사는 ‘봄의 사명(司命)과 사호(司戶), 여름의 사조(司竈)와 중류(中霤), 가을의 국문(國門)과 공려(公厲), 겨울의 국행(國行)’을 이르는 말이다. 칠사에게 지내는 제사는 토속 신앙과 유교 사상이 결합된 국가 의례였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칠사당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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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사당에 모셔진 위패. 복제,

일곱 소신 중 후손 없이 죽은 옛날 제후로 사형을 주관하는 공려지신의 위패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국조오례의의 설명과 도설,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1474년(성종5),

『국조오례의』의 내용을 보완하기 위해 실제로 의례를 행하는데 필요한 참고사항을 오례의 서례序例에 맞추어 설명하고 도설을 붙인 책이다. 길례吉禮 항목에 실린 <종묘전도宗廟全圖>는 종묘의 창건 당시 모습에 가장 가까운 그림으로 월랑月廊만 제외하면 창건때의 건축과 같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종묘의궤』중 <종묘전도>

OLYMPUS DIGITAL CAMERA종묘의궤의 속편, 종묘의궤속록宗廟儀軌續錄,

1706년 편찬된 『종묘의궤』의 속편으로 1706~1741년 사이의 건축, 제향 대상, 의식 등 종묘의 변화상을 전반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다. <종묘전도宗廟全圖>에는 1726년(영조2)의 정전 증축, 1732년(영조8) 재사齋舍 중건 등의 변화가 반영되어 있다. 정전의 좌우 협실에는 제기고祭器庫, 서고西庫가 있으며 신주神廚는 전사청으로 표기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예조의 업무를 기록한 책, 춘관통고春官通考, 1788년(정조12),

예조禮曹 소관의 업무 전반을 서술한 책으로 조선 초기부터 정조 초기에 이르는 전례의 변화가 반영되어 있다. 1474년의 종묘의 모습은 <원의종묘原儀宗廟>에, 1667~1726년 증축 이후의 모습은 <속의종묘續儀宗廟>.<속의영녕전續儀永寧殿>에, 1788년의 종묘는 <금의종묘영녕전전도今儀宗廟永寧殿全圖>에 묘사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종묘의 제향공간(祭享空間)과 건축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향의식을 행하는 공간인 정전과 영녕전이다. 정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재위중인 왕의 4대조상, 공덕이 큰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영녕전은 정전에 모시고 있던 신주를 옮겨 모시기 위해 지은 별묘이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정전을 종묘라 하였으나, 현재는 정전과 영녕전 및 부속 건물을 모두 합쳐 종묘라고 부른다. 조선왕조가 50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지속하면서 정전과 영녕전 내부에 모실 신주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두 건물 모두 몇차례에 걸쳐 증축되었다. 그 결과 정전은 19칸의 신실에 좌우 익실 각3칸을 갖춘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긴 목조건물이 되었으며, 영녕전 또한 16칸의 긴 건물이 되었다. 종묘는 매년 제사의식을 반복적으로 거행하는 공간으로 계획되었다. 정전과 영녕전에는 대규모의 월대가 설치되었으며, 왕과 왕세자가 위치하는 자리를 알려주는 판위(板位) 등을 전돌로 높게 마감하고 동선을 표시하는 등 일반 건축과 차이를 보인다. <출처:고궁박물관>

수원부(水原府) 관아, 낙남헌(落南軒)과 득중정(得中亭)

화성행궁에 속해 있던 많은 전각 중에서 원래 있던 건물 중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낙남헌(落南軒)이다. 낙남헌은 행궁 북쪽편에 위치한 건물로 화성유수가 손님을 접대하거나 연회가 펼쳐지던 곳으로 관아에서 누각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 누각인 낙남헌은 실제로는 수원유수가 사용하기 위해 세운것이 아니라 국왕이 행차할 때 사용하기 위한 건물이다.

낙남헌은 넓은 마루가 있고 앞 쪽에는 마당이 있어 행사하기 좋았던 장소로 보인다. 이 곳에서 정조의 화성 행차시 과거나 양로연 등 각종 행사가 펼쳐졌던 곳이다. 원래 이곳에는 수원유수가 활을 쏘면서 쉴 수 있는 공간인 득중정이 있었으나, 정조가 양위 후 자신이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낙남헌과 노래정을  짓고 득중정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세건물은 각각 독립된 것처럼 보이지만, 각 건물들이 연결되어 있어 하나의 건물군을 이룬다.

OLYMPUS DIGITAL CAMERA화성행궁 정전이자 동헌에 해당하는 봉수당 북쪽으로는 관아에서 주관하는 공식적인 연회를 가질 수 있는 정자에 해당하는 낙남헌(落南軒)과 활쏘기를 하면서 휴식을 취하는 용도로 지은 득중정(得中亭), 휴식공간으로 지은 노래당(老來堂)이 하나의 건물군을 형성하고 있다.

낙남헌(落南軒)
낙남헌은 각종 행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공간을 알맞게 배치한 행사용 건물이다.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득중정을 노래당(老來堂) 옆으로 옮겨 짓고, 그 터를 넓혀서 1794년에 완공하였다. 화성행궁 부속 건물 중에서 파괴되지 않고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유일한 건물이다. <출처:수원시청>

OLYMPUS DIGITAL CAMERA낙남헌은 앞면 5칸은 대형 건물로 관아에서 운영하는 누각이라 할 수 있다. 건물 앞쪽에는 넓은 마당이 있어 행사를 치루기 좋고 건물내부에도 넓은 마루가 있어 각종 연회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낙남헌은 넓지는 않지만 월대가 조성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낙남헌 내부. 온돌방 없이 넓은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 연회를 열기 위해 세워진 건물임을 알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낙남헌 내부 천장. 우물천장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낙남헌 뒷편으로 건물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2010년 3월 낙남헌

OLYMPUS DIGITAL CAMERA노래당은 낙남헌과 득중정에서 펼쳐지는 각종 행사 중에 휴식을 취하기 위한 건물이다. 또한 정조가 순조에게 양위하고 내려와 머룰려 했던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봉수당과 연결되는 출입문. 낙남헌 맞은편에는 원래 객사가 있었으나 다른 지방 관아와 마찬가지로 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득중정(得中亭)
득중정은 활을 쏘는 정자이다. 원래 낙남헌 자리에 있었으나, 1794년에 옮겨 짓고 옛 이름 그대로 정조가 쓴 편액을 달았다. 북쪽 방향으로 노래당과 이어져 있으며, 계단 앞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아 어사대(御射臺)를 두었다. 현재의 건물은 1998년 12월 복원된 것이다. <출처:수원시청>

OLYMPUS DIGITAL CAMERA득중정은 수원부 관아를 현재의 위치로 옮기때 세워진 정자이다. 원래는 낙남헌이 위치한 곳에 있었는데 정조가 낙남헌을 크게 지으면서 그 건물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두동의 건물이 연결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득중정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로 편액을 정조가 직접 써서 걸었고, 상량문은 홍양호가 짓고 썼다. 정조는 행차시 매번 활쏘기를 하였는데, 1790년에 새로 만들어진 이 정자에서 활을 4발 쏘아 4발을 모두 맞히고는 이를 기념하여 군사들의 회식을 이 곳에서 하였으며, 특별과거시험을 치러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을 선발하였는데 급제자에게 합격증을 내려 주는 행사도 이 곳에서 있었다. 또한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한 양로연을 시행하였다. <출처:수원시청>

OLYMPUS DIGITAL CAMERA득중정(得中亭)은 편액을 정조가 직접 써서 걸었다고 전해진다. 현재은 건물은 1998년에 복원했다고 하며 편액 또한 이때 다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득중정은 활을 쏘기 위해 사용한 정자이다. 많은 사람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활터는 아니고, 낙남헌 마당에서 특별한 행사가 있을때만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득중정 옆에 작은 행각 건물을 달아붙여 놓고 있다. 크지는 않지만 마루에 걸터 앉아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득중정에서 활쏘기를 할 때 수행하는 인원들을 위한 공간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화성행궁 뒷편 행각들.

 

강화 부근리 지석묘(사적), 동아시아 고인돌을 대표하는 유적지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에 소재한 지석묘(사적)이다. 하점면 일대 40여기의 고인돌과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에 분포하는 많은 고인돌을 대표하는 고인돌이다. 높이 2.6m, 덮개돌 길이 6.5m의 대형 고인돌로 탁자모양을 하고 있는 북방식 고인돌이다. 부근리 일대에서 무문토기조각과 간돌검 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볼 때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덮개돌, 받침돌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으며, 사체를 넣은 막았던 판석은 남아 있지 않다. 그 형태가 웅장하여 제단 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강화 고인돌은 2000년 12월 고창, 화순의 고인돌유적과 함께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강화고인돌은 밀집도가 높고 다양한 형식이 함께 존재한다는 점이 높게 평가받았다. 강화 고인돌은 157기가 보고되어 있으며, 주로 고려산 북쪽과 별립산 일대에 분포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탁자형태를 하고 있는 북방식과 바둑판 형태를 하고 있는 남방식이 고루 분포하고 있어 남쪽과 북쪽의 고인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아시아 일대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무덤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강화 부근리 지석묘(사적137호). 묘실을 구성했던 판석이 남아 있지 않아 탁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모습이 제단과 비슷하여 제단으로 보는 견해도 일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측면에서 본 고인돌

OLYMPUS DIGITAL CAMERA부근리 일대에서 출토된 간돌화살촉. 청동기시대 유물들이 부근에서 출토되고 있어 조성연대를 청동기시대로 보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청동기시대 고인돌을 조성하는 모습을 재현해 놓은 모형(강화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동쪽에서 본 모습. 안정감을 보여주는 정면과는 달리 약간 불안정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뒤쪽(북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서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강화도의 주산이라 할 수 있는 고려산.

강화에서는 약 40여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데 주로 고려산 북쪽 언덕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간척으로 지금은 고려산 북쪽에는 넓은 농지가 있지만, 원래는 갯벌이었다고 한다. 한강하구 주요 교통로에 위치한 지역으로 비교적 이른 시기에 고인돌을 조성할 수 있는 지배계층이 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부근리 서쪽 별립산 주변에도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강화 부근리 고인돌은 사적 13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찾는 강화도의 명소이다. 주변에는 고인돌을 조성한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청동기시대 주거지인 움집

OLYMPUS DIGITAL CAMERA강화 부근리 고인돌 유적지.

OLYMPUS DIGITAL CAMERA최근에 조성한 강화역사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2009년 강화 부근리 고인돌

강화 부근리 지석묘(사적137호),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우리나라는 고인돌의 나라라고 할 만큼 수량면에서 전세계적으로 단연 으뜸이다. 강화도 고인돌은 동북아시아 고인돌의 흐름과 변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강화도 지석묘로 잘 알려진 이 고인돌은 이른바 탁자식(북방식) 지석묘라고 분류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인돌이다. 해발 약 30m 높이의 능선 위에 세워진 이 고인돌은 흙으로 바닥을 수십층 다진 뒤 받침돌(지석)을 좌우에 세우고 안쪽 끝에 판석을 세워 묘실을 만들어 사체를 넣은 다음, 판석을 막아 무덤을 만들었으나 두끝의 마감돌은 없어진 상태여서 석실 내부가 긴 통로 같지만, 제단 기능의 고인돌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규모는 덮개돌이 긴축의 길이가 6.4m, 너비 5.23m, 두께 1.34m에 전체 높이 2.45m이다. <출처:강화군청>

강화역사박물관, 강화도의 고인돌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000년 무렵부터 시작된다. 이시기 사람들은 사냥.채집 단계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농업경제가 시작되었다. 농업사회에는 기술의 발달로 잉여생산이 생기고 집단내부에 지배층과 피지배계층으로 분리되기 시작하며, 권력자가 나타난다. 고인돌은 동아시아지역의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무덤양식으로 청동기와 함께 당시 권력자의 위상을 보여주는 흔적이라 할 수 있다. 돌멘(Dolmen)이라고 부르는 고인돌은 전세계적으로 분포되는데 그 중 한국, 일본, 중국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다. 그 중 한반도에는 약 45,000여기의 고인돌이 발견되었으며, 세계 고인돌의 40% 이상을 차지한다.

강화도에는 한반도 고인돌을 대표하는 부근리지석묘(사적137호)를 비롯하여 많은 고인돌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고창과 화순 고인돌군과 함께 세계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강화고인돌은 한강하구에 해당하는 고려산 북쪽편과 별립산에서 많이 분포하고 있다. 이들 고인돌들은 지금은 바다에서 먼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오늘날 강화도의 들판은 대부분 간척을 통해 조성했기때문에 실제로는 해안가 언덕에 조성한 무덤이라 할 수 있다. 강화도의 고인돌은 탁자식(북방식)과 바둑판식(남방식)이 섞여 있으며, 고인돌에서는 청동기시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고인돌의 나라, 강화
강화는 산과 물이 풍부한 곳으로 고인돌을 만들 수 있는 지배 집단이 일찍이 생겨났다. 또 고인돌을 만들기 좋은 편마암이 풍부하여 고려산과 별립산을 중심으로 고인돌 150여 기가 분포하고 있다. 고인돌의 분포지도를 보면 현재는 고인돌이 바닷가에서 떨어져 있지만 간척사업이 이루어지기 전인 청동기시대에는 바다와 가까운 해안지역과 연관이 있어 어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인돌인 강화 부근리지석묘(사적137호).

OLYMPUS DIGITAL CAMERA간돌화살촉(부근리 고인돌 출토)

세계의 문화유산 강화 고인돌
2000년 강화와 고창.화순. 고인돌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강화 고인돌은 탁자식과 바둑판식이 섞여 있고, 고려산 자락을 중심으로 한 고지대에 분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구 가치가 매우 높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70여 기의 고인돌 중 사적137호 강화 부근리 고인돌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은 탁자식 고인돌이다. 52톤 가량의 덮개돌을 두 기의 받침돌이 받치고 있다. 동편 솔반에는 부근리 고인돌군이 위치하고 있어 이곳이 청동기 문화권이었음을 보여준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강화도의 고인돌 분포. 한강하구에 해당하는 고려산 북쪽 능선을 따라 분포되어 있다. 간척하기 전 해안지역에 해당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강화도에 남아 있는 고인돌군. 탁자식(북방식) 고인돌이 대부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고천리 고인돌군

SANYO DIGITAL CAMERA신삼리 고인돌

SANYO DIGITAL CAMERA강화 오상리 고인돌군

OLYMPUS DIGITAL CAMERA 강화 오상리 고인돌군 발굴조사, 2000년 원형으로 모여 있늩 탁자식 고인돌11기를 발굴하고 이듬해 복원하였다. 버들잎 모양의 화살촉과 토기편을 비롯하여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여러면석기가 출토되었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간돌화살촉(내가면 오상리 출토)

OLYMPUS DIGITAL CAMERA관옥(내가면 오상리 출토)

OLYMPUS DIGITAL CAMERA토기편(내가면 오상리 출토)

OLYMPUS DIGITAL CAMERA반달돌칼(내가면 오상리)

SANYO DIGITAL CAMERA강화 삼거리 고인돌 발굴조사, 1966년 삼거리 소동마을을 발굴조사한 결과 탁자식 고인돌5기, 주거지 1기를 확인하였다. 주거지 안에서 서북한 지역의 팽이형 토기가 출토되어 강화와 서북한 지역 청동기 문화의 연관성을 알 수 있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팽이형 토기편(삼거리 고인돌 출토)

OLYMPUS DIGITAL CAMERA달모양도끼,돌도끼,가락바퀴, 석검, 간돌화살촉 (삼거리 고인돌)

SANYO DIGITAL CAMERA강화 부근리 점골 고인돌 발굴조사, 2009년 발굴하여 이듬해 복원하였다. 탁자식 고인돌이며, 덮개돌과 받침돌을 만들기 위한 작은 구릉이 확인되었다. 서쪽 받침돌에서 화살촉이 출토되었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부근리 점골고인돌 발굴전경

세계유산과 거석문화
거석문화는 큰 바위로 석상이나 무덤 등의 기념물을 만들었던 선사시대의 문화이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을 비롯하여 북유럽, 서유럽, 지중해, 아프리카, 인도, 아시아 등 세계적으로 분포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강화와 고창, 화순처럼 밀집되어 있는 곳은 세계 어는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세계의 거석문화

우리나라의 고인돌
전 세계에 존재하는 약 6만여 기의 고인돌 중 4만여 기가 우리나라에 있다. 중국에는 한반도와 연결된 요령성, 산동성 등에 분포하고 있으며, 일본에는 한반도와 마주보는 큐슈지방 등에 있다. 한반도의 고인돌은 북한의 대동강 유역과 서해, 남해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다. 강화지역의 고인돌은 북한과 남한 고인돌의 맥을 잇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고창과 화순의 고인돌은 보존상태가 좋고 분포 밀집도가 높은 특징이 있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우리나라 고인돌 분포

OLYMPUS DIGITAL CAMERAOLYMPUS DIGITAL CAMERA고인돌 건설과정

 

창덕궁 후원 연경당,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를 위해 사대부 저택처럼 지은 공간

창덕궁 후원 2번째 공간인 애련지 일원에 위치한 연경당은 낙선재와 함께 궁궐 건물 형식을 취하지 않고 사대부저택처럼 지어진 건물이다. 궁궐생활에 탈피하여 조용한 숲속에서 사대부 저택처럼 집을 짓고 휴식을 취하고 싶은 구한말 국왕들의 취향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국왕에 즉위하기 전 어린 시절을 사가(私家)에서 보냈던 고종은 궁궐보다는 사대부 저택을 선호하여 이곳 연경당을 애호했으며, 경복궁에도 후원에 건청궁을 짓고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손님들을 접견하였다.

연경당은 원래 순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손자로 세도정치가 극심했던 구한말 왕권을 회복할 수 있는 인물로 많은 사람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한 효명세자(1809~1830년)가 아버지 순조를 위해 지은 건물이다. 연경당은 창덕궁 후원 숲속에 사대부저택처럼 지은 건물로 안채와 사랑채가 분리되어 있다. 이후에 지어진 낙선재가 폐쇄적인 ‘ㅁ’자형 안채를 하고 있는 반면에, 연경당은 안채가 사랑채처럼 개방적인 ‘ㄱ’자형 구조를 하고 있으며, 넓은 마당과 행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연경당이 국왕을 위해 지어진 건물이기는 하지만, 국왕이나 왕비가 주최하는 각종 연회를 위한 공간으로 지어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효명세자는 아버지 순조를 위해 연경당을 짓고 여러차례를 연회를 열어 신하들을 초대하여 국왕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연경당 건물은 고종대에 중건된 것으로 고종과 순종은 이곳에 내외 인사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자주 가졌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 창덕궁 후원 2번째 공간인 애련지 부근 숲속에 자리잡고 있는 연경당(延慶堂)이다. 애련지 일대는 순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손자로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한몸에 받았지만 젊은 나이에 요절한 효명세자의 발자취가 많이 남아 있는 공간이다.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를 위해 사대부 저택처럼 지은 창덕궁 내 이궁(離宮)이라 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일반 사대부 저택처럼 솟을대문을 하고 있는 연경당 출입문인 장락문(長樂門). 연경당은 사대부 저택처럼 지었으나, 이궁(離宮)답게 장락문 앞으로 물길을 돌려 실개천이 흐르도록 하여 금천(禁川)과 같은 역할을 하도록 하고 있으며, 금천을 건너는 돌다리인 금천교(錦川橋)를 두고 있다. 반면에 국왕의 사적인 공간으로 삼도(三道)의 형식을 취하지는 않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연경당 앞을 흐르는 실개천은 애련지 연못으로 흘러든다.

OLYMPUS DIGITAL CAMERA연경당 앞 마당. 애련지와 의두합 안쪽에 위치한 연경당은 앞쪽으로 규장각이 있던 주합루와 창덕궁 침전영역과 연결되며, 뒷편으로는 옥류천과 길이 연결되어 있다. 조선시대 실제 국왕 일행이 후원을 행차할 때 이용하던 길이다.

SANYO DIGITAL CAMERA장락문을 들어서면 일반 사대부 저택처럼 대문간 행랑채가 있고 안채와 사랑채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별도로 있는 중문과 행랑채로 둘러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문간채 행각들. 일반 사대부저택과 달리 가마를 둘 수 있는 공간이 많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채가 있는 마당으로 들어가는 중문.

SANYO DIGITAL CAMERA연경당 안채. ‘ㄱ’자형 구조를 하고 있는 건물로 사당채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낙선재 안채가 폐쇄적인 경북지역 사대부 저택의 ‘ㅁ’자형 안채 구조를 하고 있는 반면에 연경당은 넓은 마당에 개방적인 구조를 하고 있는 중부지역 저택의 형태를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안채는 일반 사대부 저택과 달리 사랑채처럼 부엌을 두지 않고 있다. 연경당이 효명세자가 부모를 위해 궁중 연회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지었기때문에 넓은 대청마루와 방을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안채와 사랑채는 건물이 연결되어 있으며, 작은 쪽문을 통해 사랑채를 드나들 수 있도록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안채는 크고 작은 방들이 있는 행각으로 둘러져 있다. 국왕을 수행하는 인원들이 머물 수 있도록 많은 방을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안채. 궁궐내 휴식공간으로 지어졌기때문에 사방에 툇마루를 두고 있다. 툇마루에 걸터 앉아 마당과 주변 숲을 바라보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연경당 안채. 건물 규모는 크지 않지만 은근히 화려한 사대부집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안채와 사랑채 마당을 담장으로 분리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안채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행각. 일반 사대부저택에서는 볼 수 없는 구조로 많은 수행원들이나 손님들이 묵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연경당 사랑채. 앞면 6칸에 누마루가 있는 ‘-’자 형태의 건물이다. 안채와는 건물이 연결되어 있으며, 넓은 대청마루와 마당을 두고 있어 손님을 초대하여 연회를 가질 수 있는 건물구조이다. 현재의 연경당 건물은 순조대에 지어진 것은 아니고 고종대에 중건된 것이라고 한다. 연경당은 갑신정변때 김옥균 등 개화파들이 고종을 모시고 잠시 피한적이 있으며, 고종과 순종은 이곳에서 손님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자주 베풀었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사랑채에도 수행원이나 손님들이 머물 수 있는 행각이 많은 편이며, 뒷편에는 고종이 서재로 지었다는 선향재(善香齋)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선향재는 고종이 서재 겸 손님을 접견할 수 있는 응접실 용도로 지은 건물로 벽돌로 지은 중국풍의 건물이다. 경복궁 후원 건청궁 뒷편에 지은 집옥재와 비슷한 용도의 건물로 중국풍 건물을 선호했던 고종의 취향이 남아 있는 건물이다. 앞에는 차양을 설치하여 햇볕을 막거나 비를 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연경당은 국왕 거처하는 이궁으로 지은 건물로 중문도 솟을 대문을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수행원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인 행각들. 국왕이 모시는 가마를 둘 수 있는 공간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연경당 사랑채 마당

SANYO DIGITAL CAMERA연경당 사랑채와 안채를 분리해주는 담장. 그 앞에 괴석을 놓아서 장식적은 효과를 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뒷마당에도 담장으로 공간을 분리하고 있으며, 작은 쪽문을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선향재 뒷편 작은 동산에는 농수정(濃繡亭)이라는 작은 정자를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 농수정(濃繡亭)은 1칸짜라 작은 사모정 형태의 정자로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반도지 언덕에 있는 승재정과 비슷한 형태이다.

SANYO DIGITAL CAMERA연경당 사랑채로 출입하는 작은 협문. 국왕을 제외한 수행원들을 대체로 이 문을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연경당 안채 행각 바깥쪽.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수행원들이 출입하는 출입문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옥류천에서 내려오는 길에서 보이는 연경당 전경

OLYMPUS DIGITAL CAMERA연경당은 창덕궁에서 국왕 가족의 생활공간인 침전 뒷편 언덕 너머에 위치하고 있으며, 궐내각사와도 연결되어 있다.

연경당
효명세자는 아버지인 순조에게 진작례를 올리기 위해 1828년에 연경당을 건립했는데, 원래 모습은 지금과 상당히 달랐다. 진작례란 신하들이 왕과 왕비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는 행사로서 효명세자는 이를 왕권강화책으로 이용했다. 현재의 연경당은 1865년 고종이 새롭게 건립했다. 사대부 살림집의 제도를 본떠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서재인 선향재는 중국풍의 벽체와 서양풍 차양을 설치했다. 뒷마당 모퉁이 높은 곳의 농수정은 마치 매가 날개를 편 것 같이 날렵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