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유적지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사적 114호), 정유재란 말 조.명연합군 수군이 주둔했던 곳

전남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에 있는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114호)이다. 이곳은 정유재란이 끝나갈 무렵 충무공이 이끌었던 조선수군과 진린의 명나라 수군이 진을 치고 머물렀던 곳으로 사실상 조.명연합군의 해군본부였다. 현재는 충무공을 모시는 사당인 충무사와 그가 죽은 후 잠시 묻혔던 가묘터가 남아 있다. 묘당도는 고금도 끝에 있는 작은 섬이었으나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고금도의 일부분으로 바뀌었다.

이곳은 임진왜란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진린이 세웠던 관왕묘가 있었다. 정유재란 말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진린은 그의 유해를 이곳에 모시시고 장례를 치렀다. 이후 17세기부터 관왕묘에 이순신장군과 진린장군을 같이 모시고 제사를 올려왔다. 일제강점기에 사당이 없어지고 제사가 중단되었다가 해방 이후 다시 사당을 세우고 충무공에 대한 제사를 올리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사적 114호). 고금도 동쪽끝에 있는 작은 섬이었으나 간척사업으로 지금은 고금도의 일부부으로 바뀌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묘당도 유적지로 들어가는 길.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충무공 가묘 유허, 이순신 장군은 노량에서 전사후 관음포에 올려졌고 남해 충렬사에 잠시 묻혔다가 이곳을 거쳐 충남 아산으로 옮겨졌다. 조.명연합군 수군 본영이 있었던 것으로 명나라 수군을 이끌었던 진린이 주도하여 이곳에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충무공 이순신장군 가묘 유허
이곳은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유해을 임시로 안장하였던 터이다. 이순신 장군은 이 고금도에서 수군본영을 설치하여, 수군을 훈련하고 전선을 건조.수리하는 등 군비를 재정비하여 왜적의 침입을 물리쳤다. 장군이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순국하자 본영이었던 이곳에 80여일간 안장한 후 이듬해에 충남 아산으로 옮겼다. (안내문, 완도군청,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가묘 유허 아래에 있는 재실로 보이는 건물.

OLYMPUS DIGITAL CAMERA묘당도 앞 바다. 앞쪽에 작은 섬들이 막고 있어 파도가 거의 없어 파도를 피하기 좋은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묘당도 북쪽 바다.

OLYMPUS DIGITAL CAMERA남쪽으로 보이는 바다. 사방이 섬으로 둘러 싸여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당 입구에 세워진 홍살문.

OLYMPUS DIGITAL CAMERA충무사 외삼문.

OLYMPUS DIGITAL CAMERA충무공을 모신 사당인 충무사. 원래 관우를 모신 관왕묘가 있었으며, 그 앞쪽에 충무공과 진린을 모신 동.서무가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없어지고 지금은 해방 이후 다시 세운 충무공만을 모신 사당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충무사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사당에 딸린 건물.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마당 한쪽편에 있는 관왕묘비. 이곳에 관우를 모신 관왕묘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비석은 숙종 39년(1713)에 세운 것으로, 관왕묘의 창건 이후의 내용을 기록한 비로, 명나라 수장이 충무공의 전사를 애석히 여겨 여기서 경혈하고 귀국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비의 규모는 높이 253 cm, 폭 93 cm, 두께 20 cm이다. 비각은 정.측면 1칸의 팔작집으로 원형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안내문, 완도군청,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묘당도 충무사 사당 아래 해안. 울창한 상록수가 숲을 이루고 있다.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사적 114호, 전남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
묘당도 일원은 본래 진린 장군이 건립한 ‘관왕묘’였으며, 관우 장군을 사당에 모시고 전쟁의 승리를 기원했던 곳이다. 진린 장군은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순국하자 이곳 (월송대)에 장군의 유해를 안장하고 장례를 치러주었다. 1666년, 동무에 진린 장군을 모셨으며, 1683년에 서무에 이순신 장군을 모셨다. 1791년 정조가 관왕묘에 ‘타보묘’라는 사액을 내렸으며, 1792년 동무에 명나라 부총관 등자룡 장군을 함께 모셨다. 일제강점시기(1940년대 초)에 유물이 훼손되고 제사가 중단되었으며, 사당이 황폐화 되었다. 1947년 11월 19일 사당에 이신신 장군만을 모시고 다시 제향하기 시작했다. 1953년 사당을 증건하고, 사당 명칭을 ‘충무사’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당 내에는 숙종 39년 건립한 관왕묘비가 있으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후 명나라 진린 장군이 혈서로 애도문을 쓰고 명나라로 돌아갔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안내문, 완도군청, 2018년)

<출처>

  1. 안내문, 완도군청, 2018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아산 이충무공 유허(사적155호), 현충사가 있는 이순신 장군 유적지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 있는 현충사라 불리는 이충무공 유허(사적 155호)이다. 이충무공 유적지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곳으로 젊은 시절 살았던 집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이충무공을 모신 사당인 현충사, 이충무공이 결혼한 이후 살았던 고택, 활을 쏘고 무예를 단련하던 활터, 셋째 아들 이면 공의 무덤 등이 있다. 이충무공의 무덤은 이곳에서 9 km 떨어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에 위치하고 있다. 기념관에는 난중일기(국보 76호)를 비롯하여 이충무공과 관련된 많은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현충사는 숙종 때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자 서원의 이름으로 숙종이 직접 이름을 지어 내렸다.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일제강점기인 1932년 사당이 중건되었으며, 1967년 국가적인 차원에서 성역화 사업을 진행하여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영정이 모셔진 사당 앞에 서서 내려다 보이는 경치가 아름다운 편이다. 이충무공 유적지로서 성역화된 이후 꾸준히 가꾸어 왔기 때문에 수목이 우거지고 조경이 아주 잘 꾸며져 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대표적인 유적지 중 한곳이다.

SANYO DIGITAL CAMERA아산 현충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1967년 이곳을 성역화하면서 새로 지은 곳이다. 원래 있던 구본전은 아래쪽으로 옮겼다.

SANYO DIGITAL CAMERA현충사 정문. 현충사는 이충무공이 젊은 시절 살았던 곳으로 후손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 왔으며, 숙종 때 현충사라는 서원이 세워진 곳이기도 하다.

SANYO DIGITAL CAMERA현충사 충무문을 지나서 사당인 본전으로 들어가는 길. 1967년 이후 이곳을 성역화하면서 정원을 꽤 아름답게 꾸며놓고 있다. 아주 넓는 길이 충무공 영정을 모신 현충사까지 뚫려 있다. ㅎ

SANYO DIGITAL CAMERA큰길 옆 옛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던 정려(旌閭).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를 표창하여 그들이 살던 마을 앞에 그 훈공을 액자에 새겨놓고 길이 사표로 삼는 것이다. 이곳에는 이충무공 집안에서 받은 5개의 정려가 걸려 있다.

SANYO DIGITAL CAMERA이곳에 걸려 있는 정려 중 충숙공 이홍무의 정려이다.

  1. 충무공 이순신
  2. 강민공 이완: 완은 충무공의 조카로서 임진란 때에 충무공의 막하에서 종군하여 공을 세웠고 임진란이 끝난 다음해에 무과에 급제하고 충청병사 의주부윤을 지낸 후 정묘호란 때 청군에게 패하게 되자 몸을 불속에 던져 자결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의 충성을 높이 치하하여 병조판서의 벼슬을 내리고 강민공의 시호를 내렸다.
  3. 충숙공 이홍무: 충무공의 사대손으로 이인좌의 난 때 그의 조카인 충청병사 봉상과 함께 싸우다 옥중에 갇혀 온갖 고초를 당하면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장렬한 죽음을 택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의 충성을 높이 치하하여 이조판서의 벼슬과 함께 충숙공의 시호를 내렸다.
  4. 충민공 이봉상: 충무공의 5대손으로 27세 때 무과에 급제한 후 충청도 병마절도사, 포도대장, 한성부 우윤, 형조참판을 역임하였고 이인좌의 난 때 난군의 급습을 받아 돌아가셨다. 조정에서는 공의 충성을 높이 치하하여 좌찬성을 추증하고 충민공의 시호를 내렸다.
  5.  이제빈: 충무공의 8대손으로 어머니 임종시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어머니 생명을 연장시키려고 노력하였으며, 돌아가신 후에는 묘소에서 3년동안 시묘살이를 하는 등 효성이 지극한 분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안내문, 아산시청, 2009년)

SANYO DIGITAL CAMERA정려 뒷편에 있는 느티나무. 수령 300여 년 된 것으로 정자나무 역할을 했던 나무이다.

느티나무
이 느티나무는 수령이 300여 년이 된 것으로 추정되며 옛날부터 마을 사람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고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정자목으로 사용되던 나무이다. 나무높이 20 m, 나무둘레 480 cm, 수관폭 20 m로 넓은 그늘으르 제공하고 연못 옆에 위치하여 현충사의 휴식공간으로 사랑받고 있으며 아산시에서 시보호목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느티나무는 우리나라 자생수종으로 수명이 길고 수형이 단정하며 수관폭이 넓어 마을의 정자목으로 많이 심어지고 목재는 결이 아름답고 견고하여 좋은 건축, 가구재로 사용된다. (안내문, 아산시청, 2009년)

SANYO DIGITAL CAMERA충무공 영정을 모신 현충사 본전으로 오르는 길. 중간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이충무공 영정을 모신 현충사 출입문인 충의문.

SANYO DIGITAL CAMERA충의문 앞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SANYO DIGITAL CAMERA이충무공 영정을 모신 사당인 현충사. 1970년대 지어진 앞면 5칸의 사당건물로 목조건축물을 모방한 콘크리이트 건물이다.

SANYO DIGITAL CAMERA현충사 내부. 이충무공 영정이 모셔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현충사 앞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본전
이 본전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1932년 민족성금으로 중건된 구본전을 유물관 옆으로 이전하고 1967년 성역화 사업으로 새로이 건립한 것입니다. 묘소는 이곳에서 9 km 떨어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안내문, 아산시청, 2017년)

SANYO DIGITAL CAMERA현충사 아래 서쪽편에 위치한 구본전. 일제강점기에 중건된 사당 건물로 현충사를 성역화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구본전은 1704년 이충무공의 공덕을 길이 받들고저 아산 지방 선비들이 조정에 상소하여 숙종 32년(1707)에 서원 형식의 사당을 세웠다. 그 후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현충사가 없어지게 되었으나 1932년 6월 5일 이충무공유적보존회와 동아일보사가 주축이 되어 민족성금으로 이 건물을 다시 세우게 되었으며, 1966년 4월 현충사 성역화 계획에 의해 본전이 새로 세워짐에 따라 1968년 9월 9일 지금의 위치에 원형대로 이전된 것이다. (안내문, 아산시청, 2009년)

SANYO DIGITAL CAMERA구본전의 주련은 위당 정인보가 현충사를 중건할 때 쓴 글이다.

  • 一誓海山綱常於百代(일서해산입강상어백대): 바다와 산에 맹세하므로 강상을 후세에 이르도록 세웠으며
  • 再造乾坤無伐矜於當時(재조건곤무벌긍어당시): 천지를 구해냈으니 내세워 자랑함이 없었네

SANYO DIGITAL CAMERA왼쪽편 주련

  • 成人取義精忠光於檀聖(성인취의정충광어단성): 인을 이루고 취하니 지극한 충성은 단군이래 빛나고
  • 補天欲日功德蓋於槿邦(보천욕일공덕개어근방): 크고 밝은 공덕은 온 나라를 덮었네. (안내문, 아산시청, 2009년)

SANYO DIGITAL CAMERA이충무공 고택. 이 집은 이순신이 결혼 후 살았던 집으로 종택에 해당하는 집이다. 건물은 ‘ㄷ’자형 안채와 사랑채를 겸한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 뒷편 언덕에는 불천위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 종손들이 살아왔던 안채만 원래 있던 것이고 문간채는 새로 지은 건물이다.

SANYO DIGITAL CAMERA고택 옆 활터에 있는 수령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

SANYO DIGITAL CAMERA이충무공이 활을 쏘고 무예를 단련하던 활터. 과녁 너머 능선은 말을 달리던 곳이다.

활터
이 활터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활을 쏘시던 장소로 남쪽에 있는 과녁과의 거리는 145 m입니다. 그리고 활터를 둘러싼 방화산의 능선은 말을 달리던 곳으로 일명 치마장이라 부릅니다. 은행나무는 수령이 500여 년에 이르며 충청남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안내문, 아산시청, 2009년)

SANYO DIGITAL CAMERA활터 뒷편으로는 이충무공 가족들이 묻혀 있는 무덤들이 있는데 그 중 이충무공 셋째 아들인 이면 공의 무덤이 잘 알려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활터 뒷편에 있는 무덤들.

SANYO DIGITAL CAMERA이면 공 무덤으로 오르는 계단.

이면 공 묘소
이곳은 충무공의 셋째 아들인 이면 공을 모신 묘소이다. 면은 1577년 아산에서 출생하고 어려서부터 인물이 누구보다 뛰어나고 지혜와 용맹을 갖추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므로 충무공이 그지없이 사랑하던 아들이었다. 면은 임진란이 일어났을 때 어머님을 모시고 고향집에 있다가 마을 안에서 분탕질을 하고 있는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니 그때 나이 21세 였다. 충무공은 아들의 슬픈 소식을 듣던 그날의 일기에 이같이 적으셨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옳은 이친대,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남달리 영특하므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는 것이냐?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안내문, 아산시청, 2009년)

SANYO DIGITAL CAMERA이면 공 무덤.

아산 이충무공 유허, 사적 155호,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이곳 백암리 방화산 기슭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무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사시던 곳이다. 충무공이 순국하신지 108년이 지난 숙종 32년(1706) 이곳에 충무공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세웠으며, 1707년 숙종께서 친히 현충사라 사액하였다. 그 뒤 200여년간 공을 추모하는 향불이 끊이지 않았으나 한동안 일제의 탄압으로 사당은 퇴락하였었다. 이에 동아일보사가 주관하여 온 겨레의 정성으로 1932년에 사당을 중건하였다. 1945년 광복 후에는 매년 4월 28일에 온 국민의 뜻으로 다시 탄신제전을 올려 공을 추모하여 왔다. 1966년에는 일생을 충의에 살고 나라를 구하신 높은 덕과 충성을 기려 이곳을 성역화하고 현충사를 중건하였다. 종합적인 조경공사는 1974년까지 꾀해졌다. (안내문, 아산시청, 2009년)

<출처>

  1. 아산시청
  2. 문화재청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홍성 성삼문 유허, 성삼문 태어난 외가 마을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상리마을에 있는 성삼문 유허이다. 그의 외가가 있던 마을로 “아이를 낳았느냐”고 하늘에서 세번 물었다는 출생에 얽힌 이야기가 남아 있는 장소이다. 단종복위를 꾀하다 처형되어 그가 태어난 집은 없고 그 터만 남아 있다. 조선 숙종때 그를 기리기 위해 노은서원이 세워졌으며, 송시열이 비문을 지은 휴허비가 세워졌다.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노은서원은 없어지고 대신 위패를 묻은 노은단이 세워졌으며, 그 옆에는 최근에 지은 숭문사라는 사당이 있다. 마을에는 성삼문의 외손자 엄찬이 살았다는 고택이 남아 있다.

성삼문(成三問, 1418~1456년) 조선 세종 때 집현적 학자로서 한글 창제 등 당시 세종이 이룩한 업적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세조때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된 사육신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OLYMPUS DIGITAL CAMERA홍성 성삼문 유허. 그가 태어난 외가가 있던 마을로 집터와 유허비, 노은단 등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지금은 공터로 남아 있는 집터. 이곳에는 그를 기리는 노은서원이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

OLYMPUS DIGITAL CAMERA

유허비. 송시열이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성삼문선생 유허비
이 곳은 성삼문(成三問, 1418~1456년) 선생의 유허지이다. 선생은 태어날 때 하늘에서 “아이를 낳았느냐”고 세번 물은 일이 있어서 이름을 삼문이라고 하였다. 성삼문 선생은 조선 세종 때의 학자로 자는 근보, 호는 매죽헌이다. 1456년(세조2)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1668년에 민유중이 홍주 관찰사로 왔다가 선생이 살았던 유허를 돌아보고 선생이 태어난 노은동(현재의 홍북면 노은리 상리부락)에 돌로 추모의 표시를 하였는데, 뒤에 송시열이 유허비를 세우게 되었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김진상이 썼다. (안내문, 홍성군청, 2010년)

OLYMPUS DIGITAL CAMERA집터 뒷편에 있는 노은단.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이 없어지면서 서원에 모셨던 사육신의 위패를 묻은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노은단 오르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노은단 현판.

OLYMPUS DIGITAL CAMERA위패를 묻은 노은단.

OLYMPUS DIGITAL CAMERA노은단 앞쪽에는 최근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사당인 숭문사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숭문사 사당.

OLYMPUS DIGITAL CAMERA유허 옆 노은리마을. 이곳에는 그의 외손 엄찬이 살았다는 고택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엄찬 고택. 성삼문의 외손 엄찬이 살았다는 곳에 남아 있는 고택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지어진 것이라 한다.

성삼문 선생 유허
성삼문 선생의 외할아버지 고택이 있던 곳으로, 이곳에서 선생이 출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선생의 자는 근보, 호는 매죽헌이며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1676년(숙종2)에 이옥량이 선생 등 사육신의 절의와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여기에 사우를 세우고 녹운서원이라 임금으로부터 이름을 받았고 뒤에 노은이라 바꾸어 불렀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 헐리게되니 유생들이 사육신의 위패를 묻고 노은단이라는 단을 세우고, 매년 음력 10월15일에 제향을 하고 있다. (안내문, 홍성군청,2010년)

<출처>

  1. 홍성군청
  2. 문화재청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4. 두산백과

당진 소소리 유적, 고조선시대 유물이 출토된 곳

충남 당진시 합덕면 소소리에 있는 철기시대 유적지이다. 합덕읍 소재지에서 1.5 km 정도 떨어진 낮은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다. 합덕에서 당진으로 연결되는 교통로에 있으며 근처에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가 있는 것으로 볼 때 예로부터 교통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쪽으로는 삽교천 하구를 간척한 넓은 평야가 있고, 서쪽으로는 크고 작은 산들이 자리잡고 있다. 부근 지역에 위치한 아산 궁평리, 남성리, 백암리, 예산 동서리 등에서도 한국형 동검 등이 출토되고 있다. 고조선시대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해상교통로에서 위치하고 있다.  전북 장수 남양리, 부여 합송리 유적과 함께 당시 서남부 지역에 존재했던 진(辰)의 중심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한국식 동검.칼자루장식, 잔무늬 거울 등의 청동기 등이 발견되었다. 1990년 주민이 유물을 발견하 신고한 것으로 발견과정이나 유구시설 등은 확인되지 않았다. 출토된 유물들의 연대는 고조선이 멸망하기 직전인 기원전 2세기로 추정되고 있다.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하는 곳은 현재 농경지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유적지에 대한 안내 표지판 등은 없다.

OLYMPUS DIGITAL CAMERA유물이 발견되었다는 지점. 참고자료에 적혀 있는 주소로 찾아갔다. 발견 과정이나 유구시설 등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아 주택과 농경지로 사용되고 있다. 주변 지역에 비해서 약간 높은 표고 30 m 정도의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유적지 앞을 지나는 도로. 합덕읍에서 당진시로 연결되는 옛 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이곳에 지금까지도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유적지 남쪽에 있는 초등학교.

OLYMPUS DIGITAL CAMERA유적지가 있는 언덕 서쪽편으로 나즈막한 산들이 보인다. 아래쪽으로 새로 개설된 4차선 도로가 지나간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쪽편에서 본 유물이 발견된 지역 주변 농경지.

당진 소소리유적 15-20170905유적지 주변으로 예산 동서리, 아산 궁평리, 아산 남성리, 아산 백암리 등지에서 한국식 동검 등 철기시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고조선 말에서 삼한시대까지 한반도 서남해안 해상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었던 주요 성읍국가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
28. 꺽창,

OLYMPUS DIGITAL CAMERA
29. 한국식동검.

OLYMPUS DIGITAL CAMERA30. 잔무늬 거울.

OLYMPUS DIGITAL CAMERA31. 숫돌, 32. 호살촉

OLYMPUS DIGITAL CAMERA33. 도끼.

OLYMPUS DIGITAL CAMERA34. 끌

OLYMPUS DIGITAL CAMERA35. 대롱옥.

충남 당진 소소리 유적
한국식 동검.칼자루장식, 잔무늬 거울 등의 청동기, 도끼.끌 등의 철기, 유리 대롱옥, 돌화살촉, 검은간토기 등이 출토된 유적이다. 장수 남양리, 부여 합송리 유적 등과 더불어 기원전 2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출처>

  1. 소소리청동기, 고고학사전, 국립문화재연구소, 2001년
  2. 중앙박물관

강릉 오죽헌, 율곡 이이와 어머니 신사임당 유적지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에 위치한 오죽헌(烏竹軒)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강릉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오죽헌내에에는 별채 외에 살림집이었던 안채와 사랑채, 이의 저서서 『격몽요결』과 어린시절 사용했던 벼루를 보관하던 어제각, 1970년대 이곳을 성역화하면서 지어진 영정을 모신 사당인 문성사, 각종 유품들을 전시하는 율곡기념관과 강릉시립박물관 등이 있다. 오죽헌 앞 마당에는 신사임당이 살았던 시절부터 있었다고 전해지는 배롱나무, 율곡매(栗谷梅), 율곡송(栗谷松) 등이 있다.

오죽헌(보물165호)은 조선초기에 지은 이 집은 별채로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사적인 의미와 율곡과 신사임당이 태어난 역사적인 의미를 같이 갖추고 있는 곳이다. 조선초 최치운(1390~1440년)의 처음 지었으며 그의 아들 응현은 사위 이사온에게, 이사온은 다시 사위 신명화(사임당의 부친)에게, 신명화는 또 그의 사위 권화에게 물려주면서 그 후손들이 관리해왔다.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오죽헌(별당)과 바깥채를 제외하고 모두 철거되고 문성사, 기념관 등이 지어졌으며, 현재의 모습은 1996년 정부의 문화재 복원 계획에 따라 옛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율곡 이이는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어머니인 신사임당과 함께 지폐에 인물이 들어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며 존경받고 있다. 조선후기 관동팔경 유람을 떠났던 선비들이 그의 발자취를 찾아서 이곳을 많이 방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별당인 오죽헌은 개인이 살던 가옥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로 보존이 잘 되어 있다.

강릉 오죽헌, 보물165호,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
오축헌은 우리나라 어머니의 사표가 되는 신사임당이 태어나고 또한 위대한 경세가요 철인이며 정치가로서 구국애족의 대선각자인 율곡 이이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사임당 신씨(1504~1551년)는 성품이 어질고 착하며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다. 어려서부터 경문을 익히고 문장, 침공, 자수 뿐만 아니라 시문, 그림에도 뛰어나 우리나라 제일의 여류 예술가라 할 수 있으며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고 있다. 율곡 이이(1536~1584년)선생은 어려서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워 13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명종 19년(1564년) 생원시, 식년문과에 모두 장원급제한 후 황해도 관찰사, 대사헌 등과 이조.형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조선 유학계에 퇴계 이황 선생과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로서 기호학파를 형성했고 당쟁의 조정, 10만군대의 양병을 주장하였으며 대동법, 사창의 실시에 노력하였다. 글씨,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문묘에 종사되었고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 강릉의 송담서원 등 20여개 서원에 제향되고 있다. 오죽헌은 강릉 유현인 최치운(1390~1440년)의 창건으로 아들 응현은 사위 이사온에게 물려주고 이사온은 다시 그의 사위 신명화(사임당의 부친)에게, 신명화는 또 그의 사위 권화에게 물려주면서 그 후손돌이 관리하여 오던 중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문성사, 기념관 등이 건립되어 현재와 같은 면모를 갖추고 선생의 위엄과 교훈을 길이 추앙하게 된 것이다. <출처:강릉시청>

OLYMPUS DIGITAL CAMERA강릉 오죽헌.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태어난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유적지이다. 1970년대 이후 이곳을 성역화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사진은 오천원권 지폐에 등장했던 장면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표시해 놓은 곳.

OLYMPUS DIGITAL CAMERA오죽헌 입구에 세워진 율곡 이이 동상.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는 어머니 신사임당 동상이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강릉 오죽헌(보물165호). 앞면 3칸 규모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별당 건물이다. 오른쪽 2칸은 넓은 대청마루, 왼쪽 1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있으며 가족들이 생활하는 안채와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볼 때 손님들을 접견하고 집안행사를 하는 공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죽헌(烏竹軒)
조선초기에 지어진 별당건물로, 당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주택이다. 이 건물은 주심포양식에서 익공양식으로 변해가는 건축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물로 평가받아 1963년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다. 왼쪽 마루방은 율곡이 여섯살 때까지 공부하던 곳이며, 오른쪽 방은 1536년 신사임당이 용이 문머리에 서려 있는 꿈을 꾸고 율곡을 낳은 곳이다. 몽룡실(夢龍室)이라 부르고 있는 이방에는 신사임당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율곡 이이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문성사. 원래 이곳에는 유품인 벼루와 저서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보관하는 어제각이 있던 자리이다. 1970년대 오죽헌을 성역화하면서 새로 지은 사당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문성사에 모셔진 율곡 이이 영정.

문성사(文成祠)
율곡 이이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이 자리에는 원래 어제각(御製閣)이 있었는데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서쪽으로 옮기고 문성사를 지었다. ‘문성(文成)’은 1624년 인조임금이 율곡에게 내린 시호로, ‘도덕과 학문을 널리 들어 막힘이 없이 통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문성사의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별채인 오죽헌 앞 마당.

OLYMPUS DIGITAL CAMERA문성사 옆 마당에 있는 율곡송이라 불리는 소나무.

OLYMPUS DIGITAL CAMERA율곡 이이가 이곳에서 살았던 시절에도 있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600여년이 넘는 배롱나무.

배롱나무(木百日紅), 강릉시의 시화(市花)로 꽃피는 기간이 100일이나 된다고 하여 백일홍이라고도 한다. 이 배롱나무는 고사한 원줄기에서 돋아난 새싹이 자란 것이므로 나이를 합치면 600여년이 넘는다. 사임당과 율곡 모자가 어루만졌을 이 배롱나무는 율곡송(栗谷松).율곡매(栗谷梅)와 함께 오늘날 오죽헌을 지켜주는 수호목으로서의 역할을 해오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율곡매(栗谷梅).

강릉 오죽헌 율곡매, 천연기념물
이 나무는 1400년경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이 오죽헌을 건립하고 별당 후원에 심었다고 하며, 신사임당과 율곡선생이 직접 가꾸었다고 전다. 사임당은 고매도(古梅圖), 묵매도(墨梅圖) 등 여러 매화 그림을 그렸고 맏딸의 이름을 매창(梅窓)이라고 지을 만큼 매화를 사랑하였다. 사임당 당시 율곡매는 상당히 굵었을 것으로 보이며, 본 줄기는 고사하고 곁가지가 자란 아들나무로 짐작된다. 율곡매는 꽃 색깔이 연분홍인 홍매(紅梅) 종류이며, 열매는 다른 나무에 비해 훨씬 알이 굵은 것이 특징이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오죽헌 살림집에 해당하는 안채와 바깥채(사랑채). 앞편 3칸 규모의 바깥채와 중문을 앞쪽에 두고 뒷편에 ‘ㄱ’자형 안채와 행랑채를 두고 있다. 경북 북부 지방의 ‘ㅁ’자형 한옥과는 달리 개방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안채.바깥채
조선초기에 지어진 오죽헌 내의 건물들은 1505년 병조참판을 지낸 최응현에 의해 전승되어 오다가,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오죽헌(별당)과 바깥채를 제외하고 모두 철거되었다. 현재의 모습은 1996년 정부의 문화재 복원 계획에 따라 옛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안채는 안주인이 생활하던 곳이고 바깥채는 바깥주인이 거처하던 곳이다. 바깥채의 툇마루 기둥에 걸여 있는 주련(柱聯)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새겨 놓은 것이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살림집 안쪽으로  『격몽요결』과 어린시절 사용하였던 벼루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은 어제각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유품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작은 건물인 어제각.

OLYMPUS DIGITAL CAMERA어제각 현편.

OLYMPUS DIGITAL CAMERA어제각에서 보관하고 있는 벼루와 『격몽요결』

어제각(御製閣)
율곡 이이의 저서 《격몽요결(擊蒙要訣)》과 어린시절 사용하였던 벼루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1788년 정조임금은 율곡이 어렸을 때 쓰던 벼루와 친필로 쓴 《격몽요결》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듣고, 그것을 궁궐로 가지고 오게 하여 친히 본 다음, 벼루 뒷면에는 율곡의 위대함을 찬양한 글을 새기고, 책에는 머릿글을 지어 잘 보관하라며 돌려 보냈다. 당시 임금의 명을 받은 강원도관찰사 김재찬이 이를 보관할 천수 있는 집을 지었는데, 그것이 어제각이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어제각 뒷편에는 오죽헌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는 검은 대나무(烏竹)을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기념관.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중앙박물관
4. 문화재청
5. 강릉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