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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루판 가오창고성(高昌古城), 당 장안성을 모방해서 건설한 도성

중국 투루판시에 있는 옛 고창국 도성이었던 가오창고성(高昌古城)이다.  현 투루판시 동쪽 화염산 계곡에서 강물이 흘러드는 투루판 분지 북쪽편에 자리잡고 있다. 실크로드 천산북로의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여 교역을 통해 크게 번창했으며 당 현장법사가 인도를 방문하는 길에 설법을 펼쳤던 곳으로 유명하다. 투루판 분지내에서도 계곡과 가까운 까닭에 지금도 고창고성 주변에는 농지가 많고 주민들도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이슬람 세력이 터를 잡기 이전에는 불교가 번창했던 곳으로 화염산 협곡에 있는 베제클라크 석굴, 토유크 석굴 등 많은 불교 유적을 남겨 놓고 있다.

한(漢) 시기 투루판 교하고성에서 번성했던 차사전국(車師前國) 국경 부대원들이 만든 요새였던 곳으로 남북조시대 북량(北凉) 망명정권이 442년 이곳에 터를 잡았으며 450년 교하고성(交河古城)에 있던 기존 세력을 몰아내면서 투루판분지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唐) 시기 한족정권이 고창국이 크게 번성했으며 이후 위구르세력인 회골칸국 자리잡았다. 14세기 몽골과의 전쟁으로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며 그 기능을 잃었다.

SANYO DIGITAL CAMERA<가오창고성 북문을 들어서면 볼 수 있는 풍경>

가오창고성은 북문을 통해 출입할 수 있으며 북문 주변에 마을과 농경지들이 형성되어 있다. 내부는 100만 ㎡에 이르는 넓은 지역으로 건물터 등의 많이 남아 있지 않으며 유적지는 외성, 내성, 궁성 등 성벽과 궁성터, 대불사터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건물터 등을 볼 수 있다. 당나귀가 끄는 마차를 타고 궁성터, 대불사터 등 주요 유적지들을 탐방하게 된다.

SANYO DIGITAL CAMERA<주요 유적지로 이동하는 수단인 당나귀가 끄는 마차>

가오창고성운 둘레 5.4km, 면적, 200만 ㎡의 상당히 넓은 도성(都城)이다. 지금은 폐허가 건물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상당히 큰 규모의 형성하고 있다. 이전 시기 중심지였던 자오허고성(交河古城)이 강을 끼고 있는 요새 형태를 하고 있는데 반해 가오창고성은 평지에 높은 성벽을 쌓은 중국 읍성의 형태를 하고 있다. 성벽은 외성과 내성, 궁성으로 나뉘어 있으며, 외성은 벽의 두께가 12m에 높이가 11m에 달한다.

SANYO DIGITAL CAMERA<북문 옆에 남아 있는 외성 성벽>

SANYO DIGITAL CAMERA<북문 서쪽 외성 성벽>

SANYO DIGITAL CAMERA<보존상태가 좋은 서쪽 외성 성벽>

가오창 고성은 당(唐) 장안성을 모방하여 건설했는데 전체적으로 직사각형 형태를 하고 있다. 도시는 외곽, 도심, 궁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영역은 높은 성벽으로 지역을 구분하고 있으며 도로는 잘 정비되어 있었다. 실크로드와 연결되는 북문을 들어서 비교적 많은 건물터들이 남아 있는데 많은 상인들이 거래를 했던 상업지구였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북문 입구에 있는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상가건물로 보이는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북문에서 내성과 궁성으로 들어가는 길>

북문에서 남쪽으로 200 m 정도 들어가면 내성 성벽으로 보이는 큰 건물터가 나타난다. 높은 성벽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바깥쪽에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북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내성 성벽>

SANYO DIGITAL CAMERA<내성 성벽과 주변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내성 안쪽에 있는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궁성 바깥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내성 안쪽 도심 건물터>

내성을 들어서면 200 m 정도 안쪽에 옛 고창국 궁성이었던 건물터와 성벽이 보인다. 궁성터는 비교적 넓은 규모로 개별 건물터에 대한 역할과 기능들에 대해서 설명이 없지만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들의 밀집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 궁궐을 모방한 것으로 보이는 공간배치를 보여주고 있으며 탑처럼 보이는 큰 구조물이 궁궐터에 자리잡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2개의 탑의 우뚝 서 있는 궁성터>

SANYO DIGITAL CAMERA<궁성 성벽>

SANYO DIGITAL CAMERA<궁성 성벽>

SANYO DIGITAL CAMERA<궁성 내부>

SANYO DIGITAL CAMERA<궁성터에 남아 있는 탑>

SANYO DIGITAL CAMERA<궁성 성벽>

궁성과 서쪽 내성은 약  200 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도심이 형성되어 있다. 내성 서쪽 성벽은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며 그 사이에는 큰 규모의 건물들이 여러곳 남아 있다. 가오창고성 내에서 관청같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공간으로 보이며 남쪽편에 대불사 절터가 배치되어 있다.  내성 성벽 안쪽에는 건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흔적들이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보존상태가 좋은 내성 서쪽편 성벽>

건물들은 흙벽돌로 쌓아 올렸는데 대부분 2층 이상의 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투루판 분지의 더운 날씨를 고려하여 석굴처럼 벽을 두껍게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궁성 서쪽 내성>

SANYO DIGITAL CAMERA<궁성 서쪽 내성>

SANYO DIGITAL CAMERA<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궁성과 서쪽 내성 사이 공간>

SANYO DIGITAL CAMERA<궁성 바깥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궁성 바깥 건물터>

가오창고성 남서쪽에는 현장법사가 설법을 했다고 전해지는 대불사 절터가 남아 있으며 주변에 내성 성벽과 주거지들이 비교적 원형을 잘 보전하고 있다. 대불사 절터는 높은 성벽의 내성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주변에는 크고 작은 건물들이 밀집해 있다. 종교 사원을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고대도시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SANYO DIGITAL CAMERA<궁성터 남쪽>

SANYO DIGITAL CAMERA<대불사까지 이어지는 내성 성벽>

SANYO DIGITAL CAMERA<궁성 남서쪽 대불사 부근>

대불사 부근에 남아 있는 성벽과 건물터를 살펴보면 내성은 상당히 높게 쌓았으며 성벽 안밖으로 성벽을 이용하여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SANYO DIGITAL CAMERA<가오창고성 내성과 대불사 사이의 공간>

SANYO DIGITAL CAMERA<가오창 고성 내성>

SANYO DIGITAL CAMERA<대불사와 내성 사이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대불사 남쪽 상업지역으로 보이는 건물터>

건물들은 벽돌로 두꺼운 벽을 쌓아 더위를 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대부분 2층 이상의 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건물터 내부>

SANYO DIGITAL CAMERA<대불사 바깥쪽에 남아 있는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가오창고성 남문으로 이어지는 내성 바깥쪽 큰 길>

대불사는 당나라 현장법사가 인도로 순례를 떠나는 길에 잠시 들러서 1개월 동안 설법을 했던 곳이다. 내부에는 불상을 모셨던 불전과 법회가 열렸던 강당, 승려들이 기거했던 요사채 건물들이 남아 있다. 가오창고성에 남아 있는 건물들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어 당시 사람들이 살았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대불사 절터>

SANYO DIGITAL CAMERA<불상을 모셨던 불전>

SANYO DIGITAL CAMERA<현장법사가 설법했던 강당건물>

SANYO DIGITAL CAMERA<승려들이 기거했던 요사채 건물들>
<출처>

  1. 위키백과, 2020년
  2. 百度百科, 2020년
  3. 실크로드문명기행, 정수일, 한겨레출판사, 2006년

청도 청도읍성, 청도군 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읍성

경북 청도군 화양읍 일대에 있는 옛 청도군 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청도읍성이다.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고려말 왜구의 피해가 극심할 때 쌓은 읍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읍성은 임진왜란 직전 부산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에 있던 방어시설을 정비할 때 다시 쌓았다. 일제강점기 이후 기초부분만 남고 성벽을 비롯한 대부분의 시설이 허물어졌던 것을 최근에 다시 복원하고 있다.

성은 둘레 1.88 km 정도이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성벽의 높이는 약 1.7 m이며 북쪽이 낮은 경사진 지형을 적절히 활용하였다. 동.서.북쪽에 성문과 문루가 있었으며, 고종 때 남문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방어시설로는 성문과 모서리부분에 치성을 쌓았으며 성문 앞에는 옹성을 두었다. 정사각형 형태를 하고 있는 남원성이나 인근 언양읍성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청도 청도읍성 17-20200106청도군 읍치에 남아 있는 청도읍성. 임진왜란에 대비하여 다시 쌓은 읍성으로 둘레 1.8 km의 사각형을 평면을 하고 있다.

청도 청도읍성 01-20200106청도읍성 동쪽 성벽. 약 340 m 정도 일직선으로 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기초만 남아 있던 것을 옛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동쪽 성벽에는 동문, 동문을 방어하기 위한 치성, 동북쪽 모서리에 있는 치성 등 방어시설을 하고 이다.

청도 청도읍성 05-20200106읍성 동문터. 읍성 내부를 들어오는 주출입문으로 일제강점기 이후 도로를 개설하면서 주위가 훼손되었다.

청도 청도읍성 03-20200106동문 남쪽에 있는 치성. 바깥으로 길게 나와 있어 동문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청도 청도읍성 02-20200106동쪽 성벽 바깥쪽 언덕에 있는 석빙고(보물 323호). 동쪽 바깥은 경사가 있는 언덕으로 되어 있어 적을 방어하기 쉽다. 산성에서 볼 수 있는 지형적 특징이다.

청도 청도읍성 07-20200106동문 안쪽 성벽. 바깥쪽은 큰돌로 석축을 쌓았으며 안쪾은 토성처럼 흙으로 쌓아 쉽게 오르내릴 수 있다. 조선시대 읍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청도 청도읍성 21-20200205복원하기 전 모습. 성벽은 무너지고 기단부 석축만 일부 남아 있다.

청도읍성 동쪽 성벽
청도읍성 동쪽 성벽은 읍성 동쪽에 일직선으로 쌓은 총 길이 약 340 m이다. 성벽 구간은 2005년 지표조사에서 성 터 위에 집 짓고 길을 내면서 헐리고 남은 성벽과 함께 동문루, 폐문루, 치성 3곳이 확인되었다. 문헌에 동문루는 임진왜란 때 북.서문루와 함께 불타 없어진 뒤 숙종 35년(1709)에 봉일루로 새로 지었고 그 후 다시 없어져 정조 22년(1798) 옛 터에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성벽 주위로 땅을 사서 2006년에 동문루 터, 2007년에 동문루 옆 치성, 2016 ~ 2018년에 성벽을 차례로 발굴조사했다. 성벽 조사에서기초와 몸체(체성+내탁)가 확인되었다. 기초는 정리한 터 위에 층마다 크기가 다른 잡석을 흙과 섞어 마주보게 다진 3층이다. 기초 밖에는 잡석과 흙을 섞어 다져 보강했다. 몸체는 기초 위에 약 5 m 너비로 성돌을 마주보게 내.왜벽을 쌓고, 그 사이에 잡석을 채우고 틈새에는 잔돌과 흙을 채워 쌓아 올렸다. 몸체 안쪽에는 흙으로 완만하게 경사를 두어 성벽을 튼튼하게 하고, 성벽으로 오르내리기 쉽도록 내탁했다. 동문루 터는 일제강점기 때 도로를 내면서, 근.현대에는 도로를 넓히면서 훼손되었음이 확인되었다. 폐문루 터는 임진왜란 이후에 성벽을 고쳐 문루를 설치했다가 19세기 쯤에 사용하지 않았음이 확인되었다. 성벽 밖으로 네모반듯하게 돌출시켜 성벽과 함께 쌓은 치성은 동문루 옆과 성벽 남.북쪽 모서리에서 각기 확인되었다. 정비사항은 2008년에 주차장, 관광안내소, 화장실 등 이곳을 찾은 탐방객을 위한 휴게 편의시설을 설치했다. 2009 ~ 2010년에 동문루 좌.우측의 성벽과 치성, 2018년에 동문루 남쪽의 성벽을 남은 성벽 위에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쌓기법대로 쌓았다. 성문 흔적이 확인되지 않은 동문루는 이전 모습으로 재정비했고, 폐문루는 이전 모습으로 덮어 터를 보존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청도 청도읍성 04-20200106동문 북쪽 성벽.

청도 청도읍성 13-20200106북동쪽 모서리에 방어상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새 설치한 치성.

청도 청도읍성 15-20200106치성 아래에서 본 동쪽 성벽

청도 청도읍성 14-20200106청도읍성 남쪽 성벽. 북쪽으로 경사진 지형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으며 그 아래쪽에 해자처럼 연못이 있다.

청도 청도읍성 08-20200106북동쪽 성벽 위. 토성처럼 흙으로 쌓은 성벽길이 있으며 조총공격에 대비해 여장을 설치하였다.

청도 청도읍성 09-20200106북동쪽 모서리에 설치한 치성.

청도 청도읍성 11-20200106치성에서 보이는 동문 부근 동쪽 성벽.

청도 청도읍성 12-20200106북쪽 성벽.

청도 청도읍성 10-20200106치성에서 보이는 북쪽 성벽. 멀리 치성과 북문이 보인다. 양쪽 치성에서 성벽을 오르는 적을 제압할 수 있다.

청도 청도읍성 16-20200106고지도에 표현된 청도읍성. 평지에 거의 정사각형을 하고 있는 인근 언양읍성이나 남원성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01-20200106읍성내 있는 옛 청도군 관아 객사.

청도읍성, 경북 청도군 화양읍 일원
읍성은 지방관아가 소재한 고을의 방어를 목적으로 축성된 성곽이다. 청도읍성이 처음 축성된 시기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 전해지며, 현재의 규모는 조선시대 선조 년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선조 때 왜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동래에서 서울로 향하는 주요 도로변에 성을 수축하였는데 청도군수 이은휘가 선조 23년(1590) 시작하여 2년 후 완공하였다. 둘레가 1,570보(약 1.88 km), 높이는 5자 5촌(약 1.65 m)이며 동문.서문.북문이 있었다. 임진왜란과 여러 번의 화재로 소실되기도 하였지만 수차례 개축하여 읍성을 유지하여 왔고, 고종 7년 (1870) 남문을 건립하여 4문을 갖추게 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도시화와 도로개설로 문루는 철거되고 성벽 일부는 훼손되었으나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경상북도 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었다. 청도읍성은 성의 기저부가 전역에 걸쳐 남아 있고, 각종 지리지와 고지도에 자세한 기록이 있어 발굴조사와 고문헌 고증을 거쳐 북문(공북루)를 중심으로 성벽과 옹성 등 성곽을 복원해 나가고 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강진 전라병영성(사적397호), 전라도 병마절도사 본영

전남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에 있는 전라병영성(사적 397호)이다. 전라도와 제주도 53주 6진을 총괄하는 육군 지휘부인 병마절도사 본영이 있던 곳이다. 조선초 태종 때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광주시의 광산현에 있던 병영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처음 쌓았다. 성의 둘레는 1 km 정도이공 동.서.남.북에 옹성과 2곳의 치성을 두고 있는 평지성이다. 배후에는 수인산(해발 561 m)에 산성을 두고 있다.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 때 왜구에 함락되었으며, 임진왜란 직전에 다시 수축하였다. 1894년 동학혁명 때 농민군에 함락되었으며 이후 갑오개혁 때 제도개편으로 폐영되었다. 경상우병영 진주성이나 충청병영 청주 상당산성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며 조선초 충청병영이 있었던 해미읍성과 비슷한 규모이다. 조선후기에 하멜이 머물렀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성벽 바깥쪽에 하멜기념관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강진 전라병영성 서쪽 성벽 . 조선초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쌓은 여러 읍성 중 한곳으로 한반도 서남부 육군을 총괄하던 지휘부가 있던 곳이다. 해안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당시 왜구의 침입이 상당히 위협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중종 때 일어난 을미왜변 때 왜구에 함락되기도 했다.

SANYO DIGITAL CAMERA서쪽 성벽 남쪽에 있는 치성

SANYO DIGITAL CAMERA병영성 남문. 출입문 앞에 방어를 위해 옹성을 쌓아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동쪽편 남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동쪽편 북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병영성 동쪽에 있는 하멜기념관에서 본 모습. 우리나라에 표류되어 머물렀던 하멜이 이곳 전라병영성에서 취조를 받고 머물렀다고 한다.

강진 전라병영성
전라병영성은 조선 1417년(태종 17)에 초대 병마도절제사 마천목 장군이 축조하여 1895년(고종 32) 갑오개혁까지 조선왕조 500년간 전라도와 제주를 포함한 53주 6진을 총괄한 육군의 총지위부였다. 수많은 역사와 일화 속에 민족저항의 산 증거로 존속되어 왔으며, 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불타고 곧 이은 갑오개혁의 신제도로 폐영되었다. 전라병영성의 성곽 전체 길이는 1,060 m이며, 높이는 3.5 m, 전체면적 93,139 ㎡이다. 1997년 사적 지정 당시 성곽 내 육군지휘부 건물이나 유적은 소실되었으며, 성곽만 일부 남아 있는 상태였다. 강진군의 지속적인 복원 정비사업으로 성문과 성벽의 복원은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 현재 여장복원공사 및 성 내부 주요시설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안내문, 강진군청)

<출처>

  1. 안내문, 강진군청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나주 나주읍성(사적 337호), 전라도 나주목 읍치

전남 나주시 옛 나주목관아 읍치에 있는 나주읍성(사적 337호)이다. 고려시대에 처음 성을 쌓은 것으로 보이며, 조선초 전국적으로 읍성을 정비할 때 현재의 규모로 쌓은 것으로 보인다. 읍성의 둘레는 약 940 m 정도이며 성벽의 높이는 약 2.7 m 정도이다. 성벽 대부분은 일제강점기에 헐어졌으며 서문 주위에 석축이 일부 남아 있다. 성문은 동.서.남.북문이 모두 있었으며 현재는 남문인 남고문과 동문인 동점문과 서문이 복원되어 있다. 복원된 남고문은 총루가 있는 2층문루를 두고 있으며, 동점문은 옹성을 갖추고 있다. 복원된 성문은 조선후기 성문 양식을 하고 있는데 임진왜란 이후 현종 때 대대적으로 보수된 모습을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호남지방을 대표하는 나주목의 읍성으로 전주읍성과 비슷한 형태를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옛 나주읍성 남문인 남고문. 석축만 일부 남아 있던 것을 1993년에 복원한 것이라 한다. 조총을 사용할 수 있는 총안이 있는 2층문루를 두고 있다. 조선후기 현종때 수리한 모습을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읍성 내부에서 본 남고문.

나주 나주읍성 사적337호 01-20190923남고문 석축 발굴 당시 모습. 바닥에 깔려 있던 석축이 확인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읍성 동점문. 남고문과 달리 앞쪽에 방어시설인 옹성을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동점문 문루. 총안을 두고 있는 조선후기 성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옹성 내부.

SANYO DIGITAL CAMERA읍성 내부에서 본 동점문.

나주읍성 동문터, 사적337호
나주읍성의 축조 연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나주는 마한 54개국 가운데 하나인 「불미지국」으로 비정되고 있으며 고려시대 성종 2년(983) 목(牧)으로 승격한 이래 전주와 함께 전라도의 주요 지방도시였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 이전 또는 고려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려태조의 나주경략, 현종 1년(1010) 거란의침입시 현종이 남순하여 10여 일간 머물다가 환도한 사실 등은 지방행정 중심도시로서 나주의 비중과 함께 나주읍성의 존재 가능성을 추론해 볼 수 있는 자료들이라 할 수 있다. 나주읍성이 문헌에 나타나는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 열전 김경손전이다. 고려 고종 24년(1237) 이정년 형제가 백적도원수라 칭하고 담양에서 반란을 일으켜 광주 등지의 고을을 수중에 넣고 나주로 진출 나주성을 포위하고 전투하였다는 기록에 현문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 나주성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고려말기에 나주읍성에 문루가 갖추어져 있었음은 정도전의 「등나주동루유무로서」에서 확인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군사적 목적과 행정적 기능을 지닌 읍성인보체제로 전환하게 되면서 읍성 축조론이 대두된다. 이때 나주성은 이미 태종4년(1404) 10월에 완성되어 읍성축조 대상에서 제외되나 문종대에 이르러 축성이 법대로 쌓아지지 않고 성내에 민호가 많음에 따라 성터를 7,000척으로 정하여 개축을 시도하였으나 흉년이 겹쳐 세조3년(1457)에도 완성하지 못하였다. 그후 나주목사 김계희에 의해 현재의 성터 규모로 완성되었다. 한편 나주읍성은 일제강점기에 훼철되기 시작하였다. 1913년 7월23일자 매일신보 기사를 보면 ‘나주인들이 남문의 보존을 희망하나 이미 성벽의 태반이 없어졌고 동문은 1912년에 붕괴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같은 신문 1916년 10월 1일자에 도로공사 등의 영향으로 동.서.북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남문만 남아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1920년에 제작된 「속수나주지」에 남문이 남아 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1916년 10월 ~ 1920년 사이에 없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나주읍성은 대부분의 조선시대 읍성과 마찬가지로 평지와 구릉을 이용하여 축조한 평산성으로 배후에는 금성산성을 두고 있다. 성벽은 잔돌끼움 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현재 성벽의 바깥부분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둘레가 3,679 m, 면적은 974,390 ㎡이다. (동문 동점문, 서문 서성문, 남문 남고문, 북문 북망문)

나주 나주읍성 사적337호 02-20190923나주읍성 서문 부근에 남아 있는 석축. 약 100 m 정도 남아 있다고 한다.

<출처>

  1.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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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남원읍성(사적 298호), 정유재란 때 큰 전투가 있었던 역사적인 장소

전북 남원시 동충동에 남아 있는 옛 남원읍성(사적 298호)이다. 통일신라 때 남원에 소경을 설치하면서 성을 처음 쌓았다고 하나 그 흔적은 남아 있다. 현재의 읍성은 1597년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다시 쌓은 것이다. 성벽의 둘레는 2.4 km 정도이고 성벽 높이는 약 4 m 정도이다. 자연적인 지세를 이용해서 쌓은 일반적인 조선시대 읍성과는 달리 정사각형을 하고 있으며 성내에는 남북과 동서로 바둑판처럼 큰 길이 있다. 성벽 바깥쪽은 잘 다듬은 돌로 석축을 쌓았으며 안쪽은 흙으로 토축을 쌓고 있는 전형적인 읍성 형태를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북서쪽에 일부 성벽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 고쳐지은 것이지만 조총 공격에 대비한 방어시설은 여장이 없으며 전통적인 방어시설인 치성 외 별도의 방어시설은 두지 않고 있다. 아마도 당시 서둘러서 성벽을 수리하면서 전통적은 읍성축성 방식을 적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1957년 8월 조.명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졌던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당시 조.명연합군은 양원을 비롯한 명군 3000 여명과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조선관군 1000여명이 남원성을 지키고 있었던 반면 왜군은 고니시를 중심으로 56000여명의 대병력이 호남지방을 공략하기 위해 남원성으로 집결하였다. 조.명연합군은 왜군에 맞서 싸웠으나 크게 패하고 만여명의 민.관.군이 희생되었다. 남원을 함락시킨 왜군은 전주를 무혈입성하고 충청도까지 진출했으나 명랑해전으로 보급로에 문제가 생겨 더이상 진격하지는 못하였다.

SANYO DIGITAL CAMERA남원읍성(사적 298호). 둘레 2.5 km 규모의 읍성으로 정유재란 당시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다시 쌓은 것이라 한다. 중국읍성을 모방하여 정사각형 형태를 하고 있지만 전통적인 읍성 축성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왜군_남원성_침공_작전도
남원성 전투에 참여했던 가와가미 후사쿠니(川上久國)가 그린 남원성 침공 작전도(사진출처: 위키백과). 임진왜란 당시 남원성의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다. 중국식 읍성을 모방해서 만든 사각형 형태의 읍성으로 바둑판 모양으로 가로가 구성되어 있고, 동.서.남.북에 성문을 두고 있다. 성곽 바깥에는 해자를 파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성벽 바깥쪽은 잘 다듬을 돌로 석축을 쌓았으며 안쪽에는 흙으로 토축을 쌓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읍성 축성 양식을 사용하고 있다. 성벽 위에 조총 공격에 대비한 방어시설인 여장을 두고 있지 않다. 조총을 처음 접했던 임진왜란 당시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부분이다.

SANYO DIGITAL CAMERA성벽 바깥쪽 석축.

SANYO DIGITAL CAMERA흙으로 쌓은 성벽 안쪽.

SANYO DIGITAL CAMERA전통적인 방어시설인 치성.

SANYO DIGITAL CAMERA읍성 서북쪽 모퉁이. 별도의 방어시설을 두고 있지 않다.

SANYO DIGITAL CAMERA남원읍성 북쪽으로 보이는 교룡산성. 읍성과 상호 연계하여 방어하기 위한 산성이다. 한반도에서의 전통적인 방어전술은 지세가 험난한 산성을 이용하는 것이 적정하나 당시 읍성에 주력부대가 주둔하여 왜군의 대병력과 맞섰기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원성, 사적 298호, 전북 남원시 동충동
통일신라시대에 남원에는 지방 행정중심인 소경이 자리하였으며, 그에 따른 성곽이 있었다. 조선초기에 중국식 읍성을 본 따 네모 반듯한 모양으로 성을 고쳐 쌓았다. 규모는 2.5 km 가량의 둘레에 높이 4 m 정도였으며, 사방에 문을 두었고 성안에는 71개의 우물과 샘이 있었다. 정유재란(1597) 때 이곳에서 민관군이 합세하여 오만 육천여 왜군의 공격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성은 함락되었고 만 여명에 달하는 성안의 주민과 관군이 장렬히 전사하였다. 전투 중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고 민가 몇 채만 남았다고 하니 당시의 참화를 짐작할 수 있다. 시련과 좌절을 딛고 선 조상들의 기상을 간직해 온 남원성은 동학혁명과 전라선철도 개설 등으로 많이 허물어 졌는데, 최근에 일부를 복원하였다. (안내문, 남원시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남원시청,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
  4. 위키백과,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