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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 면천읍성, 옛 면천군 읍치

충남 당진군 면천면에 있는 면천읍성(沔川邑城)이다. 조선초 세종 때(1439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읍치에 쌓은 읍성이다. 성을 둘레는 약 1,200m 정도로 큰 돌을 다듬어 쌓았았는데 바깥쪽은 석축이고 내부는 흙으로 덮어 경사진 토축을 이루고 있다. 서쪽과 남동쪽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남쪽 성벽과 남문은 최근에 복원하였다. 성문은 4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는 남문과 옹성을 복원해 놓았다. 조선초 해안에서 가까운 읍치에 쌓은 평지성으로 쌓은 읍성의 전형적인 형태와 내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01<당진 면천읍성>

면천군은 홍주진관에 속했으며 종4품 동첨절제사가 파견(면천군수가 겸임?) 되었으며, 산하에 수군(선군,船軍)이 배치되었다. 조선초에는 충청지역 세금으로 걷어들인 곡식을 면천지역으로 운송하여 창고에 두었으나 성종 때 공세곶으로 창고로 옮기면서 그 기능이 약해졌다. 경기도와 가까운 지역으로 해산물과 소금의 산지이기도 했다. 읍치에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견고한 읍성이 세워졌다.

충청도 면천군<면천읍성 위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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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천군지도, 여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23년>

 면천읍성은 일제강점기 이후 면소재지로 도시화가 덜 진전되어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동쪽은 저수지를 쌓으면서 성벽이 훼손되었으나, 서쪽 성벽은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서문이 있던 자리 남쪽은 원형에 가깝게 정비되어 있으며 북쪽은 복구되기 전 모습이 남아 있다.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06<서문터와 서쪽 성벽>

성벽은 바깥쪽은 큰 돌을 다듬어 석축을 쌓았는데 높이는 3.6m 정도이다. 안쪽부분은 흙으로 경사지게 쌓아 토축성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바닥의 폭은 6.8m, 윗면의 너비가 2.4m이다.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19<바깥쪽 성벽>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12<안쪽 성벽>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13<성벽 위>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05<정비되기 전 모습을 보여주는 서문 북쪽 성벽>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14<서문 북쪽 성벽(안쪽)>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27<허물진 성벽을 볼 수 있는 서남쪽 성벽>

남쪽 성벽은 최근에 복원공사를 하여 옛 모습을 복원해 놓고 있다. 옹성이 있는 남문과 양쪽의 치성, 성벽 등이 복원되어 있다.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02<서남쪽 성벽>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30<서남쪽 성벽(안쪽)>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33<서남쪽 성벽>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46<남쪽 성벽>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36<남쪽 성벽>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37<남쪽 성벽(안쪽)>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47<남문과 주변 성벽>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44<남문 동쪽 성벽>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39<남문 동쪽 성벽(안쪽)>

방어시설로는 치성 3곳이 확인되었으며 원래는 7곳의 치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성문은 4곳에 두고 있으며 남문은 옹성을 쌓아 방어하고 있다.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24<서남쪽 치성>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03<남쪽에서 본 모습>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48<남문 동쪽 치성>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45<남문 옹성>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43<남문 옹성 입구>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40<남문 옹성 내부>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41<남문 문루>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38<내부에서 본 모습>

당진 면천읍성(남문)
면천읍성은 세종 21년(1439) 11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평지읍성으로 조선후기까지 면천의 군사 및 행정중심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성벽은 자연석을 잘 다듬어 쌓았는데, 외부는 석축이고 내부는 돌을 채운 후 흙으로 덮어 쌓았다. 현 성벽의 둘레는 1,336m인데, 성을 쌓을 당시는 치성과 옹성의 길이를 합한 전체 길이는 1,536m 정도로 추정된다. 현재 옹성 1개소, 문지 4개소를 비롯하여 치성 3개소가 확인되었으나 원래 치성은 7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면천읍성의 남문은 옹성 형태로 구성되어 있어 왜구의 공격을 막기 쉽고, 그 옆에 수로가 있다. 18세기 이후 성의 기능을 상실한 이후 시작한 면천읍성 복원 정비 사업으로 원기루 등 누각을 비롯한 남문의 여러 시설물을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하였으며, 2014년에 완료하였다. (안내문, 당진시청, 2023년)

읍성 서쪽 치성과 주변 성벽에는 글자가 새겨진 성돌이 남아 있다. 성돌에는 ‘기미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축성연도(세종21년)를 확인해 주고 주고 있다. 면천읍성은 충청도 인근 고을의 인원들이 파견되어 축성되었는데 책임 군현, 축성구간 등의 내용이 글로 새겨져 있다. 현재 글자가 새겨진 3개의 성돌이 확인되었다.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21<글자가 새겨진 서쪽 치성 부근 성벽>

면천읍성 각자성돌, 500여년 전에도 공사실명제가 있었다.
면천읍성에는 읍성의 축조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각자 성돌이 남겨져 있다. 각자성돌은 면천읍성 공사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기 위해 돌에 책임 군현의 이름을 새긴 성돌이다. 면천읍성에서 확인되는 각자성돌에는 연도, 구간 책임 군현, 축성구간 등이 새겨져 있는데, 현재의 공사실명제로 공사가 끝난 후 그 구간에서 부실이 발생하면 해당 군현에서 보수를 책임진다는 표시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에는 50여군의 장정들이 면천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면천읍성의 축성에 많은 군현이 동원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확인되는 각자성돌은 총 3개이다. (안내문, 당진시청, 2023년)

서치성에는 ‘기미년’이라는 축성연대와 옥천이라는 고을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옥천현에서 축성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22<글자가 새겨진 서치성 성돌>

1. 서치성에서 확인되는 각자성돌에는 ‘기미년 옥천서면 장육십척 사촌’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기미년은 세종21년(1439)으로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에서 확인하는 축성기록과 일치한다. 옥천은 현재 충청북도 옥천으로 해당 구간부터 옥천현이 축성한 구간으로 판단할 수 있다. (안내문, 당진시청, 2023년)

서쪽 성벽에는 ‘석성종면’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성돌을 볼 수 있다. 석성현 인원이 축성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51<’석성종면’이 새겨진 성돌>

2. 읍성의 서벽에는 ‘석성종면’이라고 새겨진 성돌이 확인된다. 석성은 현재 충남 부여군 석성면으로 해당 군현의 축성 흔적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당진시청, 2023년)

서치성 끝 부분에는 ‘기미년’이라는 글자와 함께 ‘옥천’, ‘결성’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옥천현과 결성현 인원이 담당한 부분의 경계로 보인다.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52<’옥천’과 ‘결성’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성돌>

3. 서치성 끝 지점에서 확인된 각자성돌은 ‘기미년 옥천 종말’과 ‘기미년 결성수공 사십육척 팔촌 시면’이라 새겨져 있는데 각각 옥천의 끝 지점과 결성(충남 홍성군 결성면)의 첫 지점을 알려주는 성돌이다.  (안내문, 당진시청, 2023년)

면천군(沔川郡) 관아 건물들은 일제강점기 이후 허물어지고 그 터만 남아 있다. 2007년 옛 동헌 출입문인 풍락루를 복원했으며, 면천초등학교가 사용했던 객사터는 2016년 학교가 이전하면서 객사건물을 복원하였다. 읍치를 둘러싸고 있던 읍성 성벽과 객사터에 남아 있는 수령 1,100년의 면천 은행나무, 객사터 앞 오래된 낡은 주택들과 상점들이 읍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11<면천읍치>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09<면천군 객사>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07<동헌 출입문인 풍락루>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10<객사 마당에 남아 있는 수령 1,100년 은행나무>

당진 면천읍성 20230316_08<읍치 마을>

당진 면천읍성,
이 읍성은 1439년(세종21) 11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평지읍성으로 조선후기까지 면천의 군사 및 행정중심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성벽은 자연석을 잘 다듬어 쌓았는데, 외부는 석축이고 내부는 돌을 채운 후 흙으로 덮어 쌓았다. 현 성벽의 둘레는 1,336m인데, 성을 쌓을 당시는 치성과 옹성의 길이를 합한 전체 길이는 1,536m 정도로 추정된다. 현재 옹성 1개소, 문지 4개소를 비롯하여 치성 3개소가 확인되었으나 원래 치성은 7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벽의 바깥면에 옥천.진잠.석성 등 충청도 관내의 군현 명칭이 새겨진 성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읍성을 쌓는데 다른 지방의 사람들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면천읍성은 조선시대 성을 쌓은 규정이 잘 반영된 우수한 유적으로 해안지역 읍성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당진군청, 2023년)

<출처>

  1. 안내문, 당진시청, 2023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3년
  3. “면천군(沔川郡)”, sillokwiki, 2023년

 

 

김해 김해읍성, 옛 김해도호부 읍치에 쌓은 읍성

경남 김해시 동상동 옛 김해도호부 읍치에 남아 있는 김해읍성이다.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왜구에 대응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쌓았던 읍성 중 하나이다. 일본과 가까운 까닭 지리적인 상황으로 상당히 견고하게 쌓았던 읍성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 16년에 석성으로 축조된 김해읍성은 둘레 4,418척(약 1.3km) 정도이다. 동.서.남.북에 성문을 두고, 성벽 바깥에는 해자 두고 있었다. 왜구 대응하기 위해 쌓은 전형적인 읍성의 전형적인 형태를 하고 있으며, 읍성북쪽에는 산성인 분산성을 두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성벽과 성문은 대부분 철거되어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2008년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던 북문(공진문)을 복원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김해읍성 북문(공진문)>

병조에서 각 지역의 성 쌓는 공사와 관련하여 아뢰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청컨대, 금년 안으로 충청·전라·경상 3도의 각년(各年)에 시작해 쌓는 성(城)의 마치지 못한 것을 금년 안으로 마쳐 쌓게 하옵시며, 그리고, 남해에 쌓는 성은 일찍이 선군(船軍)을 부리어 쌓게 하였사오니, 극심한 추위와 장맛비와 더위와 방어하기에 가장 긴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하여 쌓게 하고, 또 해문(海門)의 요충(要衝)인 김해의 읍성(邑城)도 금년에 시작하여 쌓게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65권, 세종 16년 8월 1일 을사 1번째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김해시 구도심에 있던 성벽들은 대부분 철거되고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그 흔적을 찾아 보기는 힘들다. 북문은 성벽과 옹성 일부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김해읍성 고지도>

김해읍성<김해읍성 위성지도>

옛 김해읍성의 북문에 해당하는 공진문은 2008년에 복원되었다. 성문은 옹성 형태를 하고 있있는데 조선후기에 읍성을 중건하면서, 당시의 축성경향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문루에는 조총을 방어하기 위해 총구를 설치해 놓는 판문을 달아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문과 문루>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성문과 문루>

옹성은 성문 바깥쪽에 반달모양의 장애물 형태의 옹성을 쌓아서, 성문을 공격하는 적을 효율적으로 제압하기 위한 방어시설이다. 조선후기 중국 성곽의 사례를 참조하여 많이 축성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옹성 성벽(바깥쪽)>

OLYMPUS DIGITAL CAMERA<옹성 성벽(안쪽)>

OLYMPUS DIGITAL CAMERA<옹성 출입로>

읍성 성벽은 일제강점기 대부분 허물어지면서 그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수로왕릉 부근에서는 삼국시대 토성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읍성 서문터 부근>

김해읍성 북문, 김해시 동상동
김해읍성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16년(1434) 석성으로 축조되었으며, 문종 원년(1451)에는 둘레 4,418척, 높이 13척, 여장 931개소, 적대, 20개소, 옹성을 갖춘 문 4개소, 냇물 한곳, 우물 28곳, 해자는 둘레 4,683척의 규모를 갖추었다고 한다.<김해읍지>에 나타난 읍성 4대문의 명칭은 각각 해동문, 해서문, 진남문, 공진문으로서 북문인 공진문은 현종7년(1666)에 부사 이화악이 중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해읍성은 일제강점기에 읍성철거정책으로 철거되고 고종 32년(1895) 이후 거의 흔적이 없어졌다. 현재의 김해읍성 북문은 동상동 현 위치에 성벽과 옹성일부가 잔존하던 것을 2006년부터 2년간 전면 발굴을 하여 하부구조 및 축성기법을 조사, 분석하고 <김해부내지도> 등의 고지도류와 각종 문헌자료를 참고하여 2008년 3월 복원하였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2. 조선왕조실록,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3년
  3. 위키백과, 2023년

 

부산 동래읍성, 동래부 읍치

부산시 동래구 옛 동래부 읍치를 둘러싸고 있던 동래읍성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말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쌓은 읍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일본과 교류하는 관문역할을 했으며 임진왜란 때 동래성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원래 규모는 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둘레 1km 정도의 일반적인 읍성이었는데 조선후기 영조 때(1731년)에 현재의 규모로 크게 증축하면서 평산성 형태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읍치 주변 도심의 성벽과 성문은 없어졌으며 마인산 주변 성벽 일부만 남아 있었다. 현재는 북문과 동장대, 서장대, 북장대 등의 시설과 성벽 일부가 복원되어 있다.

부산 동래읍성 01-20211125<부산 동래읍성>

부산 동래읍성 06-20211125<서장대 부근 옛 성벽>

동래읍치 주산인 마안산을 중심으로 동서쪽 구릉과 읍치가 있는 평지를 연결하여 쌓은 평산성이다. 전체 규모는 둘레 약 3.8km로 상당히 큰 규모의 읍성으로 군사지휘소 역할을 하는 동장대, 북장대, 서장대를, 성문으로는 동문, 서문, 남문, 북문, 인생문, 암문을 두고 있다.

부산 동래읍성<부산 동래읍성>

부산 동래읍성 19-20211125<북장대가 있는 마안산>

부산 동래읍성 18-20211125<동장대가 있는 충렬사 뒷편 구릉>

부산 동래읍성 41-20211125
<동래읍성 축성비>

성문은 현재 북문과 북장대와 동장대 사이 언덕에 있는 인생문이 복원되어 있다. 성문은 적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바깥쪽에 옹성을 설치한 조선후기 성문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정문에 해당하는 남문은 앞쪽과 뒷쪽에 별도로 성문이 있는 이중구조로 되어 있었다.

부산 동래읍성 20-20211125<북문(안쪽)>

북문은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성문이라기보다는 비상시 퇴각하기 위한 암문 성격이지만 옹성과 문루를 갖추고 있는점이 특이하다.

부산 동래읍성 24-20211125<북문 바깥 옹성>

부산 동래읍성 23-20211125<옹성 내부>

부산 동래읍성 25-20211125<북문 바깥쪽 길>

부산 동래읍성 22-20211125<복원된 북문 동쪽 성벽(바깥쪽)>

부산 동래읍성 35-20211125<북문 문루 옆에서 보이는 북문 동쪽 성벽>

부산 동래읍성 26-20211125<북장대로 이어지는 성벽길>

부산 동래읍성 29-20211125<북문과 북장대 사이 성벽>

부산 동래읍성 28-20211125<북장대 아래 치성>

부산 동래읍성 30-20211125<치성 동쪽 성벽>

부산 동래읍성 31-20211125<북장대 오르는 길>

북장대는 동래읍치 주산인 마인산 정상부에 있는 군사지휘소인 장대이다. 이곳에서는 동래읍치와 주변지역의 경치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부산 동래읍성 33-20211125<북장대>

부산 동래읍성 32-20211125<북장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동래부 읍치>

부산 동래읍성 21-20211125<북문 서쪽 성벽(바깥쪽)>

부산 동래읍성 34-20211125<북문 서쪽 성벽(안쪽)>

부산 동래읍성 16-20211125<북문 서쪽 성벽(안쪽)>

부산 동래읍성 15-20211125<북문 주변 성벽>

부산 동래읍성 02-20211125<북문 서쪽 정상부로 연결되는 성벽>

부산 동래읍성 04-20211125<북문 서쪽 구릉 정상부>

부산 동래읍성 03-20211125<북문 서쪽 정상부 성벽과 치성>

북문 서쪽 정상부에서 서장대 사이에는 조선후기에 쌓은 복원전 성벽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부산 동래읍성 07-20211125<옛모습이 남아 있는 성벽>

부산 동래읍성 08-20211125<허물어진 모습의 치성>

부산 동래읍성 09-20211125<치성 아래 복원된 성벽>

부산 동래읍성 10-20211125<서장대와 주변 성벽>

부산 동래읍성 12-20211125<서장대>

부산 동래읍성 11-20211125<서장대 아래 성벽>

동래지역에는 삼한시대 독로국(瀆盧國) 등으로 불린 성읍국가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삼국시대 가야 고분인 복천동고분군(사적)이 북문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부산 동래읍성 14-20211125<서쪽 구릉에서 내려다 보이는 복천동고분군(사적)>

동래 읍성지 (東萊 邑城址),
이 성지는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 중심지를 둘러싸고 있었던 읍성이다.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현재의 동래 시가지 중심지역인 평탄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세에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 형식으로 쌓았다.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읍성이다. 삼한시대 이후 동래에는 독로국(瀆盧國) 등으로 불린 성읍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 때 이미 성을 쌓았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동래성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에 보이는 1021년 (현종 12)에 동래군의 성을 수리한 것이 처음이다. 조선시대에 동래부는 대일 외교상 중시되어 관아의 규모도 크고, 격식이 높았다. 정3품의 부사가 재임하는 왜적 방어의 제1관문이었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음력)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1차 공격목표가 되어 동래부사 송상현을 위시한 군관민의 장렬한 전투가 벌여졌던 최대 격전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었던 성을 1731년 (영조 7)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훨씬 규모가 큰 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 때의 성이 지금 흔적이 남아 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증축된 성의 규모는 성곽의 둘레가 약 3.8km였다. 읍성에는 동서남북문과 인생문(人生門) 및 암문(暗門)이 있고, 각 문에는 문루가 있었다. 동문을 지희루(志喜樓), 서문을 심성루(心成樓), 남문을 무우루(無憂樓), 암문을 은일루(隱一樓)라고 한다.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翼城) 을 두었는데, 앞쪽의 세병문(洗兵門)과 뒤쪽의 주조문(朱鳥門)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나머지 3문에도 옹성(藝城)을 부설하여 적이 성문을 쉽게 공격할 수 없게 하였다. 일제 시대에 시가지 정비계획으로 평지의 성은 철거되고, 산지에만 성곽의 모습이 남아있다. 지금 성내에는 북문, 인생문, 동장대, 서장대, 북장대가 복원되었고, 치성(雉城), 여장(女牆) 등이 부분적으로 복원, 보수중이다. (안내문, 부산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부산시청, 202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거제 오량성, 오양역을 지키기 위해 쌓은 성

경남 거제시 사등면 오량리에 있는 오량성(烏良城)이다. 거제도 입구에 있는 오양역을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조선초 연산군 때(1500년)에 쌓은 성이다. 주요 교통로에 있는 역(驛)을 지키기 위해 쌓았는데 일반적인 읍성과 비슷한 규모이다. 성의 축성방법은 인근 읍성인 사등성, 고현성과 비슷하다. 오량역은 왜구의 침략이 극심했던 고려말에 폐지되었다가 조선초에 고성 읍치 부근에 있던 송도역과 거제현 읍치까지 거리가 너무 멀어 편의를 위해 견내량(거제대교) 부근에 있는 현재의 위치에 역을 다시 설치하였다.

거제 오량성 01-20220221<거제 오량성>

지현사 손이순의 청에 따라 거제현의 오양역을 복구하다.
거제현(巨濟縣)의 오양역(烏壤驛)을 복구(復舊)하였으니, 지현사(知縣事) 손이순(孫以恂)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당초에 고성(固城)의 송도역(松道驛)에서 거제현까지가 70리이고, 거기서 옥포(玉浦)·영등(永登) 각 포까지는 또 요원(遼遠)하므로, 송도역 말이 많이 시달려서 죽게 되는 까닭으로 이 역을 설치하게 된 것이었다.  (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 8월 17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성의 둘레는 1,172 m, 성벽의 높이는 2.61 m, 성벽의 폭은 5 m 정도이다. 동,서,남,북 4곳에 성문을 두고 있으며 방어를 위해 모서리와 성문 옆에는 치성이 있다. 북쪽과 서쪽은 성벽이 온전히 남아 있으며, 동쪽과 남쪽 성벽은 허물어진 상태로 남아 있다. 북동쪽을 흐르는 하천을 천연해자로 하고 성벽 바깥에 해자를 파서 방어를 보완하였다.

거제 오량성<거제 오량성>

거제 오량성 31-20220221<둔덕기성(사적)에서 내려다 보이는 오량성과 고성 앞바다>

북동쪽과 북서쪽 성벽은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 있는데 큰돌로 쌓은 석축성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모서리와 성문 옆에 방어를 위한 치성이 있다.

거제 오량성 03-20220221<서문 북쪽 성벽(바깥쪽)>

거제 오량성 04-20220221<서문 북쪽 성벽(위)>

거제 오량성 14-20220221<서문 북쪽 성벽(안쪽)>

거제 오량성 02-20220221<서문 부근 치성>

거제 오량성 08-20220221<위에서 본 치성>

거제 오량성 10-20220221<치성 남쪽 성벽(위)>

거제 오량성 13-20220221<치성 남쪽 성벽(바깥쪽)>

거제 오량성 11-20220221<서문 부근 허물어진 성벽(위)>

거제 오량성 12-20220221<서문 부근 성벽(바깥쪽)>

거제 오량성 06-20220221<오량성 내부 마을>

거제 오량성 24-20220221<북서쪽 모서리 치성터와 서쪽 성벽>

거제 오량성 20-20220221<북쪽 성벽(바깥쪽)>

거제 오량성 23-20220221<북쪽 성벽(안쪽)>

거제 오량성 15-20220221<북쪽 성벽(안쪽)>

거제 오량성 19-20220221<허물어진 북문 부근 성벽>

거제 오량성 17-20220221<북문 옆 치성터>

거제 오량성 18-20220221<북문 동쪽 성벽(안쪽)>

오량성이 있는 곳은 거제도의 관문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임진왜란 때 한산대첩이 있었던 견내량(거제대교)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남해안 연안 해로의 중요한 거점으로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역(驛)을 보호하기 위해 읍성 규모의 성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량성 남쪽에는 견내량 교통로를 통제하기 위해 통일신라 때 쌓은 둔덕기성(사적)이 있다.

거제 오량성 09-20220221<오량성에서 보이는 견내량(거제대교)>

거제 오량성
거제 오량성은 연산군 6년(1500)에 역을 왜적으로부터 보호하고자 만든 성이다. 처음에 보를 돌로 쌓아 만들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오량성으로 발전하였다. 오량성의 역은 고려 말에 폐지되어 고성의 송도역과 합해졌다가 세종 7년(1425)에 다시 설치되었다. 성의 둘레는 1,150m, 성벽 너비는 4.5m 이며, 높이 4m 정도의 성벽이 남아있다. 성의 동서남북에는 성문이 있었고, 네모진 성벽의 모퉁이와 성문 주변에는 성벽에 붙은 적을 공격하려고 성벽을 사각형으로 돌출되게 쌓은 치성이 8곳에 설치되었다. 성벽은 아래에 받침돌을 놓고 큰 돌을 안쪽으로 약간 들여서 세워 쌓은 다음에 그 위로 작은 돌을 눕혀 쌓는 조선 전기 읍성의 형태 이다. 성 밖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해자가 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5. 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 8월 17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거제 사등성, 조선초 거제현 읍치였던 읍성

경남 거제시 사등면 사등리에 있는 사등성(沙等城)이다. 고려말 왜구의 침입으로 육지로 피신했던 주민들이 조선초 세종 때 돌아오고 거제현 관아가 복구되면서 읍치가 되었던 읍성이다. 사등성은 해안과 너무 가까우면서 평지에 위치하고 있어 수비하기 힘든 점이 있었으며 읍성 내부도 면적이 넓지 않아 많은 주민들을 수용하기에 부족했다. 이런 이유로 문종 때 관아를 인근 고현성으로 옮기면서 읍성으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조선초기에 쌓았던 읍성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곳으로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거제 사등성 25-20220221<거제 사등성>

성벽의 둘레는 986 m이고 높이는 6.1 m 정도이다. 동서남북으로 성벽의 길이 250m 정도인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동.서.남.북으로 4곳에 성문을 두고 있으며 그 사이에 방어를 위해 치성을 쌓았다. 성벽 바깥에는 폭 20 m 정도의 해자를 파서 수비를 강화하였다.

거제 사등성<거제 사등성>

현재 사등성은 북문 주변 성벽을 발굴,조사과정을 거치면서 옛모습으로 복원해 놓고 있으며 나머지 성벽은 복원하기 전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거제 사등성 24-20220221<북문 동쪽편 복원된 치성>

사등성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북쪽 성벽은 당시 규정에 따라 성벽 안쪽에 낮은 계단을 두고 있으며, 서쪽 성벽은 계단 위에 다시 석축을 쌓아 올렸음이 확인되었다. 복원된 성벽은  발굴조사 때 확인된 축성방식에 따라 복원하였다.

거제 사등성 23-20220221<서쪽 성벽(바깥쪽)>

거제 사등성 17-20220221<서쪽 성벽(위)>

거제 사등성 18-20220221<서쪽 성벽 (안쪽)>

거제 사등성 26-20220221<북쪽 성벽(바깥쪽)>

거제 사등성 19-20220221<북쪽 성벽(안쪽)>

사등성지의 정비.복원과 관련하여 2012년과 2014년 북쪽 성벽을 조사한 결과 계단식 내벽이 조사되었고, 2015년 서쪽 성벽 조사에서는 무너진 기존 성벽 상부에 수직에 가까운 내벽을 쌓은 것이 확인되었다. 이는 세종 20년(1438년)의 <축성신도>의 규정에 따라 내벽을 계단식으로 축조한 사실과 세종 이후 내벽을 수직되게 축조한 사실을 증명해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따라서 원형 보존 차원에서 구간별 발굴조사 된 수법대로 정비.복원하였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사등성은 동,서,남,북 4곳에 성문을 두고 있는데 성문 앞에 ‘ㄱ’자 형태로 옹성을 두어 방어를 보완하고 있다. 성문 사이에는 앞쪽으로 돌출된 치성을 두고 있다. 사등성은 조선초 쌓은 규정에 따라 제대로 쌓은 읍성으로 옹성이 조선 초기에 사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거제 사등성 04-20220221<북문 옹성>

거제 사등성 06-20220221<옹성 출입문>

거제 사등성 08-20220221<옹성에서 읍성 내부로 들어가는 출입문>

거제 사등성 14-20220221<성벽 위에서 본 옹성>

거제 사등성 10-20220221<옹성에서 본 서쪽 성벽>

북문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성벽은 아직 보원되지 않아 복원하기 전 읍성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성벽의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거제 사등성 07-20220221<북문 남쪽편 성벽(바깥쪽)>

거제 사등성 12-20220221<북문 남쪽편  성벽(위)>

거제 사등성 13-20220221<북문과 서문 사이에 있는 치성>

사등성지, 경남 거제시 사등면 사등리
이 성은 삼한시대 변진 12국 중의 하나인 독로국의 왕성이었다고 하나, 증명할만한 자료는 없다. 다만 조선의 <문종실록>에 의하면 고려 말엽 왜구의 침략을 당해 거창으로 피난을 갔던 거제도민이 조선 초기에 왜구의 침략이 줄어들자, 섬안의 수월리라는 곳으로 들어와 나무로 방책을 쌓고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 뒤 1426년(세종 8)에 거제현의 관아가 수월리에서 사등리로 옮겨지면서 성을 쌓기 시작하여, 1448년(세종 30)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후 이 성은 거제현의 관아를 고현으로 옮길 때까지 거제읍성으로 사용되었다. 평지에 쌓은 이 성은 둘레 986 m, 높이 5 m, 폭 5 m의 규모이다. 사방에 성문을 두었는데, 이 성문에 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낮은 담을 설치하였다. 입구는 ‘ㄱ’자 모양의 또 다른 성을 마련해 외부로부터 완전히 엄폐되어 있다. 전체적인 형태는 ‘卍’형을 이루며, 성 주위에 폭 20 m의 방어용 도량을 설치하였다. 현재는 성안에 학교와 마을이 있고, 성밖은 농경지이다.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조선시대 성곽 연구의 좋은 자료이다. 1980년대 국고의 지원을 받아 성곽의 일부를 복원하고 주위를 정화하여 보호 관리하고 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거제시청, 2010년,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