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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 언양읍성(사적 153호), 평지에 쌓은 네모꼴 석성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에 있는 언양읍성(사적 153호)이다. 네모꼴로 만든 평지성으로 둘레는 약 1,000 m이며 큰돌로 석축을 쌓은 석성이다. 처음에 흙으로 쌓았는데 연산군 때(1500년) 돌로 새로 쌓았다. 동서남북 4곳에 성문을 두고 내부에는 4개의 우물을 두었다. 방어시설로는 성문 바깥에 옹성을 두었으며 네모퉁이와 성문 양쪽에 치성을 두었다. 석축은 큰돌을 대충 쌓은 후 빈공간에 잔돌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 신라의 축성방식과 유사하다고 한다. 읍성은 보통 낮은 구릉과 함께 낮은 산성과 평지성이 섞인 경우가 많은데 언양읍성는 네모꼴로 만든 평지성으로 임진왜란때 격전지였던 남원읍성과 비슷한 형태이다. 지금은 옛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았고, 북쪽과 동쪽의 일부 성벽만이 남아 있다. 최근에 남문이 복원되었다.

언양현은 울주군 언양읍, 상북면, 삼남면, 삼동면 지역으로 관할하는 조선시대 지방행정 단위로 현감(종6품)이 고을 수령이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울산도호부와 여러차례 분리와 통합을 거듭하였다. 남북으로 양산과 경주가, 동서로는 가지산을 너머 밀양과 동쪽 울산과 연결되는 교통상 주요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도 경부고속도로가 이 곳을 지나가고 있으며, 울산방향 분기점 또한 언양에 위치하고 있다. 읍성 남쪽에 언양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는데, 아마도 객사와 동헌이 있었던 곳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울주 언양읍성(사적 153호).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읍성으로 평지에 큰 돌로 석축을 쌓은 석성이다. 전체적을 정사각형 평면을 하고 있으며 현재는 북쪽과 동쪽 성벽 일부만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석축은 큰 돌을 대충 쌓은 후 빈 공간을 잔돌로 채워넣는 방식으로 신라의 축성법과 유사하다. 원래 높이는 4 m 였는데 지금은 그 일부만 남아 있다. 안쪽은 흙으로 쌓아서 언덕을 만든 다른 지역의 읍성과는 달리 돌로만 성벽을 쌓은 석성의 형태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북쪽 성벽. 최근에 복원한 부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북동쪽 모서리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쌓은 북동치

OLYMPUS DIGITAL CAMERA북쪽 성벽. 북문과 북동치 사이에 치성을 쌓았다.

OLYMPUS DIGITAL CAMERA복원하기 전 치성의 모습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북문으로 이어지는 성벽. 성벽 일부만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복원 공사가 진행 중일 때 북문과 북서치 사이의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북동쪽 성벽. 치성과 그 아래 성벽은 남아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언양읍성 내부.

사적153호 울주 언양읍성 10-20151110최근에 복원 남문과 문루인 영화루. 개거식 성문을 사용하고 있다.

<출처>

  1. 문화재청
  2. 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홍성 홍주읍성(사적 231호), 동문인 조양문

충남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에 있는 홍주읍성(사적 231호) 조양문이다. 홍주읍성에는 동문인 조양문, 서문인 경의문, 북문인 망화문, 남문인 홍화문을 두었는데 그 중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조양문만이 남아 있다. 성문은 큰 화강석을 쌓은 아치형 홍예문으로 성문 위에 문루를 두었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구한말 읍성을 수리할 때 흥선대원군이 문루 현판의 글씨를 직접 썼다고 한다. 구한말 항일의병이 이곳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성문이 크게 파손되었다. 현재의 성문과 문루는 1975년에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홍주읍성은 홍주목 관아가 있던 읍치로 규모가 크고, 잘 보존되어 있는 읍성이다. 읍성 내에는 홍주목 관아와 주요 관청들이 있었는데, 관아의 규모도 큰 편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훼손되기는 했으나 남쪽과 서쪽 성벽, 동문인 조양문, 홍주목 동헌과 아문이 남아 있다. 홍주읍성은 구한말 고종때 대대적인 수리를 하였는데 조선이 마지막으로 축성한 성곽이라 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홍주읍성 동문인 조양문. 아치형 홍예가 있는 전형적인 읍성 성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문 문루.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직접 글씨를 쓴 현판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문루는 1970년대에 복원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아치형으로 만든 성문. 바깥쪽에 옹성을 설치하지 않았다. 읍성 성문인 북문에만 옹성이 설치되어 있었다. 성벽에 총탄 흔적으로 보이는 구멍들이 몇군데 보이는데 구한말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생긴 흔적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조양문.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성문.

OLYMPUS DIGITAL CAMERA홍주읍성은 일부 훼손되기는 했지만 남쪽과 서쪽 성벽이 지금도 남아 있다.

조양문, 사적 231호, 충남 홍성군 오관리
이 문은 홍주성의 동문으로 조선 고종 7년(1870)에 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할 때 세운 문루다. 동문은 조양문, 서문은 경의문, 북문은 망화문이라 하는데 대원군이 친필로 문액을 하사하였으며 남문은 문루가 없다. 북문은 역대 목사들이 문루에서 사형수의 처형을 감시하기도 했는데 1894년 동학운동때는 수백명의 동학군이 여기서 처형되었다. 고종 광무 10년(1906) 항일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홍주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때의 흔적이 조양문 곳곳에 보인다. 일본인들에 의하여 서문과 북문은 파괴되어 없어지고, 조양문 또한 파괴되었으나 부분적인 보수로 퇴락되었던 것을 1975년에 문루를 해체.복원하여 옛모습을 찾게 되었다. (안내문, 홍성군청, 2010년)

<출처>

  1. 홍성군청
  2. 문화재청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4. 두산백과

홍성 홍주읍성 (사적 231호), 구한말 크게 보수한 읍성

충남 홍성군 홍성읍에 있는 홍주읍성(사적 231호)이다. 옛 홍주목 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읍성으로 언제 처음 쌓았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왜구의 침입이 대비하여 전국적으로 읍성을 쌓기 시작했던 세종때부터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읍성은 구한말인 고종때 홍주목사 한응필이 크게 보수하였으며, 일본에 대항한 큰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의 전투결과 및 일본인들로 인해 훼손되기는 했지만 홍주목 관아, 성문 등과 함께 옛 읍성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홍주읍성은 둘레 약 1.5 km에 달하는 비교적 큰 규모의 읍성이다. 사대문을 두고 있었으나 지금은 동문인 조양문과 남문인 홍화문이 복원되어 있다. 읍성내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관아 건물이 35동이나 있었으나, 지금은 홍성군청에 홍주아문과 동헌인 안회당이 남아 있다. 구한말에 증축한 이 읍성은 조선의 축성기술이 동원된 마지막 성곽으로 상당히 정성을 들여서 쌓았다. 이는 당시에 출몰했던 외국선박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크게 보수했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 집권자인 대원군이 직접 휘호를 써서 홍주아문 현판에 걸어 놓았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홍성 홍주읍성(사적 231호) 동문과 남문 사이 성벽. 구한말 외국선박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크게 수리한 것으로 구한말 성곽 축성기술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후기에는 큰 전쟁이 없어서 그런지 축성기술이 이전에 비해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홍주읍성 동문에 해당하는 조양문. 읍성 성문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성문이다.

홍주읍성홍주읍성은 충남 서해안 곡창지대인 내포평야의 중심지역으로 홍주목 관아가 있던 읍치였다. 서해안 천수만에서 20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내포평야 입구에 해당하는 곳이다. 충영병영이 설치되었던 해미읍성과 함께 서행안을 통해 들어오는 왜구의 침임에 대응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홍주읍성 배치도. 동.서.남.북 4곳에 성문을 두고 있으며 방어시설로 치성을 여러곳 두고 있다. 일제감점기 서문과 북문, 그 주위 성벽들은 없어지고 동문인 조양문과 홍주목 관아가 있던 남쪽편 성벽만 남아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은 높이 약 3.3 m 정도이며, 안쪽에 토축을 쌓고 바깥쪽에는 돌로 쌓은 석축성이다. 석축을 쌓은 돌은 가공해서 일정한 규격을 갖추고 있는 부분도 있고,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부분도 섞여 있다. 곳곳에 근래에 들어서 보수한 흔적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동문과 남문 중간쯤에 위치한 치성.

OLYMPUS DIGITAL CAMERA치성과 남문 사이의 성벽. 남쪽은 평지에 비해 지대가 약간 높은 언덕에 성벽을 쌓았다.

OLYMPUS DIGITAL CAMERA홍주성 남문.  2010년 발굴과 보수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지금은 문루가 있는 개거식 성문을 복원해 놓았다.

OLYMPUS DIGITAL CAMERA남문 안쪽에 있는 홍주성 수성비(오른쪽에서 2번째)와 공덕비들. 1824년(순조 24년) 홍주성 보수가 완공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원 비석이다.

홍주성 수성비, 충남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이 비는 1824년(순조24) 황폐된 홍주성 보수를 완공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본래 홍성읍 고암리에 있었다. 비문의 내용을 보면, 성의 축조과정을 알 수가 있다. 홍주는 지역이 바닷가에 있어서 서울의 서남쪽 방비를 위한 중요한 지역이다. 그러나 이 성이 부수어져 1823년(순조23) 봄에 부임한 진장 김계묵과 목사 이헌규가 이 성을 수리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해 8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1월에 마쳤다. 그리하여 완공된 성의 규모는 7리이고 일을 한 날이 100여일 이었다. 비의 뒷면에는 성쌓기 작업을 주도하고 감독한 사람들의 직책과 이름이 있어 당시 사회상을 파악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안내문, 홍성군청, 2010년)

OLYMPUS DIGITAL CAMERA남문 서쪽편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모습. 조선후기 성곽에는 대부분 조총과 화포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여장을 쌓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곳에는 여장을 설치되어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읍성 남쪽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읍성 남서쪽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남서쪽 성벽. 읍성 남서쪽에는 홍주목 관아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으며 출입문을 두고 있지 않았다. 일제강점이 이후 성벽을 끊어 길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홍주읍성 중 성벽이 남아 있는 남문 부근. 지금은 공원으로 바뀌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읍성 남서쪽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모습. 안쪽에는 홍주목 관아 건물들이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홍성군청을 비롯하여 관청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담장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안쪽으로 보이는 옛 홍주목 관아. 동헌 건물과 후원이었던 여하정이 남아 있다.

홍성 홍주읍성, 사적 231호, 충남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최초 축성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백월산 중턱에 위치했던 해풍현이 현재 위치로 옮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 성을 축조한 것으로 추측되며 규모는 1,300척의 토성으로 400개의 성첩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후 여러 차례 보수 확장을 하였고 조선시대 고종7년(1870) 홍주목사 한응필이 연봉금 3천냥과 원납금, 지세부과금으로 석성을 개척하여 1,830척에 560척을 증보하여 석축하면서 650개의 첩과 130개의 치, 2개의 곡성, 4곳의 우물과 연못을 신설한 다음 동서에 수문을 두어 서문천의 물을 끌어 동편 수문을 거쳐 남문천과 금마천으로 흐르게 하고 동서북에 문을 세우고 남문은 문루가 없는 홍예문으로 하였다. 같은 해 대원군이 휘호한 문액을 받았는데 동문은 조양문, 서문은 경의문, 북문은 망화문이라 하였다. 그 후 홍성지방 일본인들이 서문과 북문을 훼절하고 성곽곳곳을 철거하려던 것을 읍민들의 강경한 반대로 보존하였다. 홍주성은 최장 1,772 m에 달아였으나 810 m만 현존하며 성내에는 관아건물이 35동에 이르렀으나 조양문, 홍주아문, 안회당(동헌), 여하정만이 남아 있다. 1978년 10월 7일 강도 5도의 지진이 발생하여 성곽의 일부가 붕괴된 것을 계기로 성곽주변 가옥 64동 철거와 토지를 매입하여 주변정비 및 성곽을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안내문, 홍성군청, 2010년)

<출처>

  1. 홍성군청
  2. 문화재청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4. 두산백과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프라하] 근대 방어시설

프라하는 17세기초 당시 유럽의 세계대전이라 할 수 있는 30년 전쟁의 진원지로 인구의 1/3이 감소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30년 전쟁 기간 동안 중세에 쌓은 성곽들은 무용지물이 되었으며, 새로운 신무기에 대포에 대응하기 위해 대대적인 보강이 있었다. 하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이탈리식 축성기술을 적용함으로써 이후에 전쟁에서 성곽은 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19세기에는 황제의 요새기능 포기 명령과 도심의 개발로 중세에 쌓았던 성곽들의 많은 부분이 철거되었지만, 이때 비셰흐라드와 시타델라 성채, 도심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들 중 일부분이 보존되어 남아 있다.

초기 근대 방어시설, 기초개념 및 구축, 전투 방어, 요새 기능 축소
비교적 평온한 16세기가 지나고 17세기 초의 냉혹한 전란 현실이 몰아 닥쳤다. 왕국은 30년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 들었다. 전쟁 개시부터 중세 성곽은 대포 시대에 거의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에 보다 개선된 방어시설이 필요했다. 먼저 기존의 석성 앞에 흙으로 된 바스티온, 즉 성곽 돌출부를 축조한 뒤 토성으로 보강하고 다시 벽돌과 돌로 감쌌다. 중세 성곽은 구축될 당시 최신의 유럽 군사 건축의 모델이었지만 새로 축조된 바스티온 시스템은 시대에 뒤떨어진 이탈리아식 기술을 도입하였다. 예외적으로 도시형 시타델리 성채로 개조된 비셰흐라드(Vysehrad)성은 최후의 보루로 병영시설 및 창고를 갖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른쪽 강가의 바스티온 방어선은 프라하가 1648년에 스웨덴군으로부터 포위공격을 받았을 때 제구실을 했을 뿐 아니라 18세기 프랑스, 바이에른, 프러시아군대가 차례로 프라하를 공격해 왔을 때 방어 역할을 일부 수행했다. 특히 1741년 프랑스 연합군의 프라하 점령은 비셰흐라드성과 시타델라 성채 개선의 계기가 되었다. 19세기에 이르러 모든 방어시설이 급격히 노후되어 1848년 봉기때만 사용되었다. 반란 사건에 대한 후속 조치로 제국 행정부가 성채 일부를 반역자를 막을 수 있는 시설로 변경했다. 결국 그 후로는 이용되지 않았다. 그 당시 방어시설 건축가들은 바스티온 성채의 간단한 모델을 썼다. 먼저 평면도를 구획한 다음 그 주위에 참호를 파서 파낸 흙으로 오각형의 언덕, 즉 바스티온을 쌓고 그 위에 포를 설치할 포대를 만들었다. 각각의 바스티온을 토성으로 연결시키고 전체 구조물을 벽돌벽으로 보완했는데 대문, 창턱, 모퉁이 등은 모나게 깎은 사암으로 지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프라하시 구획 및 방어시설 도면, 채색 그림, 1830년 경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브루스카 대문, 그림엽서(채색된 사진 복사), 1900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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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셰흐라드 성의 레오폴드 대문 설계도, 마년필 채색 그림, 1700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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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병 갑옷(앞뒤 흉갑, 대퇴갑, 경갑, 투구), 금속, 가죽, 16세기 말 ~17세기 초

OLYMPUS DIGITAL CAMERA결투용 권총, 놋쇠, 호두나마, 1730~40년대

OLYMPUS DIGITAL CAMERA총검이 부착된 보병총, 부싯돌식 격발장치, 강철, 호두나무, 18세기 말~19세기 초

OLYMPUS DIGITAL CAMERA기마병용 권총, 강철, 린덴나무, 17세기 중반

OLYMPUS DIGITAL CAMERA기마병용 검과 검집, 강철, 놋쇠, 나무, 17세기 말 ~18세기 초

OLYMPUS DIGITAL CAMERA오스트리아 장교 흉갑, 강철, 놋쇠, 벨벳, 17세기 중반

OLYMPUS DIGITAL CAMERA총탄 흔적 흉갑, 강철, 18세기 말

OLYMPUS DIGITAL CAMERA팔목가리개.

OLYMPUS DIGITAL CAMERA말머리가리개, 강철,놋쇠,17세기초

OLYMPUS DIGITAL CAMERA장교 투구, 강철, 가죽, 17세기 중반

OLYMPUS DIGITAL CAMERA말이라는 뜻의 콘스카 대문, 현 국립박물관 위채(채색 사진, 1900년 경), 프라하 레트나에 위치한 제19번 보루 후방에 있는 반란 진압용 건물모습(현재 국무총리 관저가 들어선 자리), 사진(1880년대)

OLYMPUS DIGITAL CAMERA신시가, 비세흐라드 및 우예즈드 대문 주변의 프라하 바스티오식 방어시설 일부의 도면, 마르틴 요한 폰 에크(Martin Jahann von Eck)가 그린 그림, 채색 그림, 1741년 경.

OLYMPUS DIGITAL CAMERA서쪽에서 본 1741~1742년 전투 때의 프라하 전경, 18세기 후반의 동판 인쇄 채색 복사본, 19세기 말 복사.

OLYMPUS DIGITAL CAMERA마트하우스 메리안(Mathause Marian)에 의한 프라하 조감도, 채색된 동판 인쇄, 18세기

OLYMPUS DIGITAL CAMERA1694년에 세워진 지트나 대문 정면 모습, 사진, 187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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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대 우예즈드 대문 정면, 사진, 19세기 말.

OLYMPUS DIGITAL CAMERA페트르진 언덕 위에 설치된 중세 성곽 및 바스티온 방어선 일부 개관, 사진, 1930년대.

OLYMPUS DIGITAL CAMERA흙으로 구운 벽돌, 바스티온 방어시설은 기후와 포격에 잘 견디는 벽돌로만 축조되었다. 바스티온 축성 초기에는 여러 가지 크기의 벽돌이 사용되었다. 18세기부터 일정한 크기의 ‘성벽돌’이 표준화되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사암블록. 건축물은 이회암 외에 강도가 다른 여러가지 사암으로 축조되었다. 방어시설에는 주로 바스티온 모서리나 도시 대문 외벽 축조에 이용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이회암 벽돌. 중세 프라하 방어시설의 대부분은 이회암 벽돌로 축조되었다. 이회암은 가공하기가 쉬우나 오랫동안 천천히 건조해야 된다. 충분히 건조되지 않으면 겨울에 얼어서 부서져 버린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미장흙손, 가문비나무, 20세기 초.

OLYMPUS DIGITAL CAMERA벽돌 흙손 (복제품), 철, 나무, 14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다림추, 강철, 19세기

프라하 요새 기능의 폐기
황제 프란츠 요세프 1세가 1866년에 프라하시의 요새 기능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870년대 후반부터 도시권 개발의 필요에 따라 중세 성곽이 헐려지면서 점차적으로 바스티온 방어선도 철거되기 시작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스라호프 대문 주변 바스티온 방어시설 철거 작업 중 보존 상태가 양호한 중세 대문이 발굴되었다. 사진 20세기 초

OLYMPUS DIGITAL CAMERA신대문 주변 바스티온 성곽 철거 작업, 사진, 1875년

OLYMPUS DIGITAL CAMERA소지구 남쪽 변두리에 임대 주택 공사 중 까렐 황제 떄 중세 성곽 철거 작업, 사진, 1930년대.

OLYMPUS DIGITAL CAMERA대포를 보여주는 삽화, 윗줄 대포, 이래즐 구포(臼砲)색채 드로잉, 18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제19호 성 마리나 막달레나 보루에 위치한 신호 대포, 1880년대 사진

OLYMPUS DIGITAL CAMERA구형 포탄, 강철, 18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대포 포탄, 강철, 18세기말 ~19세기 초.

근대유적지 중 남아 있는 곳. 바로크 양식의 방어선 중 비셰흐라드와 시타델라 성채, 도시 성곽 북부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다. 바스티온 방어선은 현재 7.75km 보존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3.레오폴드 대문(1670년), 9.제36호 보루

OLYMPUS DIGITAL CAMERA14. 성채의 가장 취약한 부분에 돌출되어 있는 2개의 보루로 구성된 네모난 성곽(1639년 또는 1652년), 15.누셀스케 골짜기를 가로질러 수문이 설치된 중세 개조 성곽은 제32호 능보로 표시되기도 하였다.(14세기 중반), 16. 제31호 보루

OLYMPUS DIGITAL CAMERA18.계단식 보루 제3호. 38. 보존된 제11호 보루

OLYMPUS DIGITAL CAMERA42. 참호가 일부 보존된 제16호 보루의 오른쪽 잔재, 47. 참호가 일부 보존된 제19호 보루.

 

[수원화성] 화서문(華西門, 보물 403호)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보물1710호)

팔달산 서장대를 지나서 능선을 따라 연결된 성벽을 내려오면, 나즈막한 언덕에 설치된 서북각루에서 잠시 쉬었다가, 평지에 도달한다. 이곳에서 화서문(華西門, 보물403호)과 화서문을 지키는 망루 역할을 하는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보물 1710호)을 볼 수 있다. 화서문 부근을 보면 잘 알 수 있듯이 수원화성은 잘다듬은 화강석으로 외벽을 쌓은 석축성을 기본으로 하고 암문, 옹성, 포루, 공심돈, 여장 등에는 벽돌을 일부 사용하였다. 중국의 경우는 대부분 벽돌을 이용해서 쌓은 전성이다. 화서문은 화성 서남쪽 남양만과 서해안 안산지역으로 연결되는 길이 출발한다.

화서문은 화성의 4대문 중 서문에 해당한다. 1896년 (정조 20면)에 완공된 약 200년된 건축물이다. 정문인 팔달문이나 북문인 장안문보다 성문의 크기가 작다. 성문 바깥쪽에는 옹성을 쌓았으며, 팔달문과 달리 옹성에 출입문을 별도로 두고 있지 않다. 화서문은 축성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팔달문과 함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화서문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이자 정조대왕의 최측근인 채제공(蔡濟恭)이 썼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수원화성 서문에 해당하는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성문 앞에 옹성을 쌓고, 북쪽에는 공심돈을 두어 성문을 엄호하고 있다. 화서문을 통해 남양만과 안산일대 서해안 지역과 연결된다.

수원 화서문(華西門), 보물 403호,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장안동
화서문은 화성의 4대문 중 서쪽 대문이다. 1796년(정조19) 7월21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정조20) 1월8일 마쳤다. 화성 서쪽의 남양만과 서해안 방면으로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403호로 지정되었다.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더너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며 옹성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성문공사를 담당하였던 사람과 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출처:수원시청>

OLYMPUS DIGITAL CAMERA화서문은 화강석으로 석축을 쌓은 홍예문으로 1층 문루를 올려 놓고 있다. 성문 앞쪽에는 벽돌로 옹성을 쌓아 방어기능을 강화했다. 2층문루를 올려 놓은 팔달문이나 장안문에 비해 규모가 작다. 동문에 해당하는 창룡문과 비슷한 규모와 구조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화성 내부에서 본 화서문. 문루는 앞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판벽을 설치해 놓은 팔달문과는 달리 사방이 개방되어 있는 전형적인 문루 형태를 하고 있다.  문루 앞에 벽돌로 여장을 쌓아 조총 공격에 대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화서문 현판. 초대 수원유수를 지낸 채제공이 쓴 글씨라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문루를 오르는 계단.

SANYO DIGITAL CAMERA문루 내부. 사방이 개방되어 있는 전통적인 성문 문루 형태를 하고 있다. 이전에 세워진 읍성 문루에 비해 여장을 높게 쌓았다.

OLYMPUS DIGITAL CAMERA잘다듬은 화강석으로 석축을 쌓은 전통적인 홍예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문 바깥쪽에는 옹성을 쌓아 방어기능을 보완하고 있다. 화강석으로 석축을 쌓은 성문과 달리 구운 벽돌로 쌓은 중국풍의 전성(塼城)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옹성에 출입문을 두고 있는 팔달문과 달리 옹성 한쪽을 열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옹성 위는 용도처럼 여장이 있는 통로를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화서문 남쪽 팔달산으로 연결되는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안쪽.

OLYMPUS DIGITAL CAMERA서북각루에서 화서문으로 이어지는 성벽

SANYO DIGITAL CAMERA2010년 수원화성 화서문.

SANYO DIGITAL CAMERA2010년.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화서문 왼쪽에는 성문을 엄호하기 위한 방어시설로 서북공심돈을 두고 있다.  공심돈은 적의 동향을 살피기 위한 망루인 돈대이다. 수원화성에는 청나라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기술을 적용한 여러 시설물을 두고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공심돈이다. 구운 벽돌을 쌓어서 만든 시설로 당시 정조대왕이 크게 자랑스러워했다는 시설이다. 아마도 중국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인 천하제일관의 문루와 돈대, 성벽 등의 시설을 보고 수원 화성 축성시 많이 참조해서 그런것으로 보인다.

수원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보물1710호,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장안동
공심돈은 적의 동향을 살핌과 동시에 공격도 가능한 시설로 수원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1796년(정조20) 3월10일 완공된 서북공심돈은 3층 건물로 아래쪽 부분의 치성(雉城)은 석재로, 위쪽 부분의 벽체는 전돌로 쌓았다. 내부는 전투에 편리한 구조를 갖추었으며 계단을 통해 오르내렸다. 1797년(정조21) 1월 화성을 방문한 정조는 서북공심돈을 보고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든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며 매우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독창적인 건축형태와 효과적인 재료 활용을 보여주는 서북공심돈은 역사적, 학술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었다. <출처:수원시청>

OLYMPUS DIGITAL CAMERA화서문 동쪽편에는 성문을 엄호하기 위해 세운 방어시설인 서북공심돈이 있다. 수원 화성은 정약용 등 당대 최고의 실학자들이 동서고금의 성곽에 대한 기술을 연구하여 쌓은 조선시대 최고의 읍성으로 다양한 시설을 두고 있다.  공심돈은 수원화성에만 있는 시설로 청나라의 영향을 받았지만 치성 위에 돈대를 세우는 등 독창적인 면도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바깥으로 돌출되어 있는 공심돈. 석축으로 쌓은 치성(雉城) 위에 벽돌로 속이 비어 있는 2층 돈대(墩臺)을 쌓고 그 위에 누각을 올려 놓았다. 돈대는 속이 비어 있어 공심돈이라 부른다. 치성에는 북쪽과 서쪽편에 각 2개씩 현안(懸眼)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1,2층에는 각면에 바깥으로 조총공격을 할 수 있도록 6개의 총안(銃眼)을 설치하고, 그 위에 포루를 설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공심돈 내부로 들어가는 문.

OLYMPUS DIGITAL CAMERA수원화성 공심돈 내부(모형, 수원화성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공심돈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공심돈에서 화서문으로 이어지는 성벽. 성벽 아래 길을 화서문 옛길 (화수문~수원천)이라 부른다. 이 길은 수원화성 축성 때 만들어진 길로 몇백년 세월의 여유와 깊이를 품고 있는 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서북공심돈과 화서문.

SANYO DIGITAL CAMERA2010년 화서문과 서북공심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