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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이집트 문자와 예술

고대 이집트인이 돌이나 나무 등에 새긴 상형 문자는 ‘신성 문자(神聖文字, Hieroglyph)’라 부른다. 이집트 신성문자는 기원전 약 4세기 프롤레마이오스 왕조까지 사용되었다. 이집트 신화에  따르면 이 문자를 발명한 이는 지식의 신 ‘토트(Thoth)’라고 한다. 최초의 상형 문자는 기원전 4000년 전 무렵 선왕조시대에 재화의 교환과 함께 발달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5세기 이후 수백 년이 지나면서 상형문자는 점차 사용되지 않아 자취를 감췄다. 1799년 로제타스톤이 발견되면서 해독을 시도했으며, 프랑스인 상폴리옹이 완벽한 해독에 성공했다. 고대 이집트문명이 그림이 새겨진 새김돌에는 다양한 내용들이 그림과 함께 신성문자로 새겨져 있어 현대인들이 이집트 역사와 문화 등에 대해 폭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문자와 에술 20220125_01<파디마헤스(Padimahes), 타레모우(Taremou)/후기왕조 시대, 제25왕조 후기 ~ 제26왕조 초기/기원전 약 680~650년, 장석 반정이 있는 화강섬록암>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문자와 에술 20220125_02<옆에서 본 모습>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문자와 에술 20220125_21
<뒤에서 본 모습>

이 조각상의 주인공은 ‘파디마헤스’이며, 웅크리고 앉아 얼굴을 들어 앞을 보고 있다. 이 조각상은 신전의 바닥에 놓아 파디마헤스가 신들을 위한 의례에 영원히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인물 조각상을 신전에 모시는 잉는 자신의 혼이 무덤에서 나와 조각상에 깃들어 신에게 바쳐진 공헌물을 나누어 가질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내용은 고대 도시 타레모우의 신들에게 공물을 바치고 싶다는 소원을 담은 기도문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문자와 에술 20220125_22
<네페르카우의 석비(Nefer-khau), 테베/신왕국, 제19~20왕조/기원전 약1292~1075년/석회암>

이 석비는 저승세계의 구조를 보여준다., 맨 위쪽에는 태양이 배를 타고 내세로 이동하는 장면이 표현되었다. 그 아래에는 네페르카우가 내세를 다스리는 여섯 명의 신에게 예배를 드리고 있다. 긴 비문은 장례 공물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하단 왼쪽 구석에서 네페르카우는 두 손을 든 채 위쪽에 적힌 기도문을 암송하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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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헤메스라타위의 석비(Nehemes-Ra-tawy), 테베/후기왕조 시대, 제25~26왕조/기원전 약 760~656년/석회암, 채색>

부분적으로 채색이 된 이 석비에는 석비의 주인인 네헤메스라타위가 오시리스와 레호라크티(Re-Horkhty)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머리에 태양 원반이 달린 매로 표현된 태양신 레-호라크티는 저승의 신인 오시리스의 도움으로 매일 부활한다. 이 두 신이 함께 네헤메스라타위의 부활을 돕고 있다. 그림 아래에 적힌 공물 기도문은 내세에서 그녀의 영혼이 필요로 하는 모든 물건이 끊이지 않도록 적은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문자와 에술 20220125_03<제피와 안케네스이테스의 석비(Ankhenes-ites), 기르가/제1중간기/기원전 약2170~2008년/석회암, 안료>

이 석비는 무덤 내에서 행하는 제사의식을 보여 준다. 제피와 그의 부인 안케네스이테스는 공물 테이블 앞에 서 있는데, 이 테이블의 음식이 나서 자라는 ‘들판’을 뜻하는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다. 석비 오른쪽의 상형문자는 저승에 있는 두 사람에게 빵과 맥주를 주겠다고 약속하는 기도문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이집트 서기는 문서를 기록하는 역할을 했고 당시 상당히 높은 신분이었다. 서기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무릎에 손을 올려 놓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문자와 에술 20220125_04<인물상(Sennefer), 중왕국, 제12왕조, 아무넴하트 1세~세워스레트 2세 치하/기원전 약 1938~1837년/석회암, 채색>

이집트에서 서기는 문자를 기록하는 역할을 했고, 상류층에 속할 정도로 신분이 높았다. 서기는 주로 글을 읽거나 쓰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었다.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무릎에 손을 올 놓은 이 조각상의 포즈는 수천 년 전인 고왕국 제5왕조 때 처음 등장했다. 하지만 넓은 가발과 땅딸막한 얼굴은 제12왕조 초기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그의 앞치마에 쓰인 명문은 죽은 이의 영혼에 공물을 바칠 것을 주문하는 기도문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문자와 에술 20220125_05<얼굴 조각 일부(석관 뚜껑), 룩소르/신왕국, 제18왕조 초기/기원전 약 1539~1400년/화강암>

이 조각상은 전형적인 아치 모양 눈썹에 눈의 앞꼬리가 뒤꼬리보다 낮고, 화장으로 표현한 눈썹라인이 귀까지 길게 빠져 있다. 이것은 제18왕조 초기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문자와 에술 20220125_06<머리 조각 일부, 중왕국 제13왕조 초기, 기원전 약 1759~1675년/검은색 화강암>

이집트 유물 중에는 이 조각들처럼 부분적으로 파괴된 것들이 많다. 조각의 제작 연도는 비록 명문은 없지만 각각의 특징을 관찰하면 알 수 있다. 이 조각은 갸름한 얼굴에 솟아 오른 광대뼈, 뾰족한 턱으로 보아 중왕국 떄 만들어 진것으로 보인다 입술 선이 또렷하고 두툼한 것이 특징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문자와 에술 20220125_07<머리 조각 일부(석관뚜껑), 신왕궁, 18왕조 후기 ~19왕조 초기, 아마르나 시대~람세스 시대/기원전 약 1336~1250년/사암>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문자와 에술 20220125_08<긴 가발을 쓴 여성, 신왕국, 제18왕조 후기 ~ 제19왕조 초기/기원전 약 1336~1279년/석회암, 채색>

고대 이집트인들은 조상의 조각상을 집에 모셔 놓고 사후 세계에서의 편안한 삶을 기원하였다. 머리의 푸른 염료, 얼굴의 노란색 염료 흔적은 죽은 여성이 내세에 도달해 여신의 푸른색 청금석 머리카락과 노란색 황금빛 피부를 갖게 되었음을 가리킨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문자와 에술 20220125_09<민호테프의 석비(Minhotep), 나카다/신왕국, 제18~19왕조/기원전 1539~1075년/석회암>

이 석비에는 출납 책임자인 민호테프의 장례 공물을 요청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상형문자는 그림을 사용해 소리를 표현한다. 이 문자는 하나, 두 개, 혹은 세 개의 자음은 표현할 수 있으나 모음은 표현할 수 없다. 중간 줄 왼쪽에서 두 번째 그룹에 있는 공물 테이블처럼 생긴 기호가 물건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경우도 많다. 또는 그려진 물건과 발음이 같은 개념을 의미할 수도 있다. 따라서 마지막 줄 왼쪽에서 두 번째 그룹에 있는 앙크 상징은 ‘생명’ 또는 ‘살다’를 뜻하는 글자이지만 기호는 샌들 끈 모양이다. 이집트어로 샌들 끈이라는 단어의 발음과 ‘생명’을 뜻하는 단어와 소리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문자와 에술 20220125_10<서기가 표현된 석비, 테베, 몬투엠하트의 무덤/후기왕조시대, 제25왕조 후기 ~ 제26왕조 초기/기원전 약 670~650년/석회암, 안료>

이 석비에는 무덤 주인인 몬투엠하트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표현되어 있다. 왼쪽에 일부만 남아 있는 인물은 나일강 하구의 감시자이며, 오른쪽의 인물은 서기이다. 두 사람의 실제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고 직위만 적혀 있다. 서기의 몸은 정면이고 머리는 전형적인 옆모습을 하였다. 서기는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들고 흔히 글을 쓸 때 취하는 자세인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문자와 에술 20220125_11<아문호테프 1세의 석비, 테베/신왕국, 제18왕조 아무호테프3세 치하/기원전 약 1390~1353년/석회암>

이 석비는 아문호테프 1세로부터 7대가 지난 아무호테프 3세 때 만들어졌다. 여기서 아문호테프 1세는 죽은 자들의 땅을 다스리는 왕인 오시리스 신에게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 옆에 왕의 어머니인 아흐모세-노프레타리가 있다. 왕은 현세와 내세 사이에서 신과 연결된 존재로서 적절한 관계를 유지할 책임이 있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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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세르페크티니수와 파>네체르의 석비, 사카라/신왕국, 제18왕조/기원전 1539~1425년/석회암, 안료 흔적>

이 석비에는 앉아 있거나 서 있는 네 사람이 등장한다. 네 명 모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나 비문을 통해 각기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석비 왼쪽은 부부를 표현한 것이고 그 위에 적힌 글에 이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집트의 모든 인물 표현에서 머리와 다리는 측면으로, 어깨에서 허리까지는 앞면으로 그려진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자세지만 이렇게 하면 인간의 전체 윤곽을 표현할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문자와 에술 20220125_12<미라 발 덮개, 로마시대/약 10~99년/회반죽, 안료, 금박>

발 덮개는 부유한 상류층만 사용할 수 있는 사치품이었다. 가면이나 미라 덮개는 꼭 갖춰야 할 필수품이었지만, 발 덮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발 덮개 바닥면에는 적들이 묘사되어 있다. 두 명의 이방인은 손과 발이 묶인 채로 그려졌고 결국 왕의 발아래 짓밟히게 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방인을 위험한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제압한 형태로 표현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문자와 에술 20220125_13<미라 마스크, 로마 시대/약 150~200년/석고에 채색>

이집트의 예술은 점점 진화했다. 한 남성의 관에서 나온 이 마스크는 그리스와 로마의 초상화 양식에서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이집트의 예술가는 새로운 사상을 접하면 이를 받아들여 창작물에 녹여 내곤 하였다. 따라서 이와 같은 로마 양식의 가면은 이집트의 전통을 이은 마지막 단계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가면은 전통적인 이집트 가면과 마찬가지로 미라의 얼굴을 덮을 때 사용한 것이다. 머리모양은 당시 로마에서 유행하던 모습이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문자와 예술
지금으로부터 5천 년 전 시작된 이집트 역사에는 31개의 왕조와 무수히 많은 왕들이 존재했는데, 왕의 재위 기간이나 사건이 구체적인 연도와 함께 알려져 놀랍기만 하다. 그렇다면 고대 이집트 문화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자세히 알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이집트인이 사용했던 문자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기원전 3천년경 이미 여러 가지 사물을 본뜬 문자를 무덤의 벽이나 비석, 조각상, 돌로 만든 그릇 등에 새겨 넣었다. 이집트 문자는 그림문자인 성각문자(聖刻文字)와 이를 바르게 흘려 쓴 흘림체가 있었다. 당시에 문자를 사용하려면 특별히 훈련을 받아야 했으므로, 기록을 담당한 서기는 높은 지위를 누렸다. 한편 문자는 예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글자를 다루는 이가 곧 예술가이기도 했다. 문자와 예술 두 분야에서 모두 눈에 잘 띄는 굵은 윤곽선으로 사물을 묘사했다. 사람의 머리와 다리는 측면으로, 어깨에서 허리까지는 정면으로 그려싿. 왕이나 죽은 사람의 얼굴 조각은 주인공과 똑같이 만들지 않고 전형적인 모습을 따랐다. 때문에 무덤에 새겨진 인물의 모습은 신의 형상이거나 이상적인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문자와 에술 20220125_14<콤 옴보 사원 벽에 새겨진 성각문자 달력>

SANYO DIGITAL CAMERA<이집트 콤옴보 신전, 2008년>

달력의 사용
이집트인들은 별자리와 태양을 관찰해 달력을 만들었습니다. 1년, 365일, 열두 달로 우리가 쓰는 달력과 비슷했습니다. 한 해의 첫날은 지금의 7월로 나일강이 범람하기 시작하는 날입니다. 이집트인들은 1년을 세 시기로 나누어 ‘범람기’, ‘파종기’, ‘수확기’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구가 태양을 한바퀴도는데 365.25일이 걸려서 4년마다 하루 차이가 납니다. 나중에 로마인들은 윤년을 추가해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문자와 에술 20220125_15<린드 파피루스, 기원전 1650년경, 영국박물관>

수학과 기하학의 발달
피라미드와 같이 거대한 건축물을 지을 때 실수를 하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이집트인들은 건물의 면적이나 부피, 그리고 쓰이는 벽돌의 숫자까지 미리 정확히 계산했습니다. 이집트의 거대한 건축물을 보면 이집트에서 수학과 기하학이 발달한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원전 1600년 전에 쓰여진 ‘린드 파피루스’에는 피라미드의 부피를 구하는 방법을 비롯해서 총 87개의 수학 문제 풀이가 함께 적혀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문자와 에술 20220125_16<콤옴보 사원 벽에 새겨진 수술 도구>

의학의 발달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집트에 의사가 넘쳐나며 그들은 모두 외과나 산부인과 같은 전문 분야를 가지고 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미 고왕국 시대의 치과의사 무덤이 발굴되기도 했습니다. 몇종류의 의학 파피루스가 남아 있는데, 그 자료를 보면 뼈를 맞추는 방법이나 꿀과 식물을 치료약으로 사용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피부병이 생기면 오이나 알로에를 발랐습니다. 콤옴보 사원 벽에는 수술도구들이 새겨져 있어 흥미롭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SANYO DIGITAL CAMERA<기자 카프레왕 피라미드 앞 대스핑크스, 2008년>

스핑크스
사자의 몸에 왕의 머리를 한 스핑크스는 일반적으로 국가의 수호신으로서 이집트를 외부의 적들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스핑크스는 기자의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 앞에 있는 대스핑크스입니다. 이집트에서 가장 큰 스핑크스로 높이가 20 m에 달하며, 석회암층을 그대로 깎아서 만들었습니다. 모래바람 때문에 오랫동안 몸통 대부분이 모래에 묻혀 있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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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소르신전 오벨리스크>

오벨리스크
오벨리스크는 끝이 피라미드처럼 생긴 높고 뾰족한 기념물입니다. 태양신을 경배하고 중요한 인물과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신전이나 무덤 입구에 세웠습니다. 30m가 넘는 것도 있다. 당시에 어떻게 세웠을지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로마인과 근대의 유럽인들이 오벨리스크를 좋아해서 유럽으로 많이 옮겨졌습니다. 투트모세 3세가 만든 두 개의 오벨리스크는 ‘클레오파트라의 바늘’로도 불리는데 로마인에 의해 알렉산드리아로 옮겨졌다가, 다시 1878년과1881년에 런던과 뉴욕으로 옮겨 세워졌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SANYO DIGITAL CAMERA<룩소르 핫셉수트 장제전, 2008년>

여왕 핫셉수트
이집트의 파라오 중에는 여자도 있었습니다. 고왕국시대부터 여자 파라오가 있었는데 핫셉수트는 신왕국 최초의 여왕으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통치했습니다. 그녀의 치세에 이집트는 여러 나라와 무역을 하고 힘을 키워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그녀는 세계역사에서 강력한 힘을 가졌던 첫번째 여성이었다고 평가받기도 합니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큰 오벨리스크도 그녀가 만든 것입니다. 특히 데이르 알바흐리에 만든 그녀의 장례사원은 절벽을 배경으로 아름답게 지어져 방문자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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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소르신전 람세스2세 석상, 2008년>

람세스 2세
파라오 중에 가장 유명한 파라오는 람세스 2세일겁니다. 그는 67년 동안 왕으로 있으면서 여러나라를 정복하였습니다. 다음 왕들조차 그를 닮고 싶어해 줄줄이 ‘람세스’라는 이름을 써서 무려 ’11세’까지 있습니다. 카데시 전투에서 이집트의 골칫덩이였던 히타이트를 쳐부순 사건이 유명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전투의 승자는 불분명합니다. 그러나 람세스는 많은 사원과 조각상을 만들고 카데시 전투에서 승리한 모습을 조각해 놓았습니다. 이야기를 역사로 만든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2. 안내문, 이집트 보물전,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3. 안내문, 신비의 파라오 투탕카멘, 국립과천과학관 특별전, 2012년
  4. 위키백과, 2023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이집트 부적과 샤브티

이집트 부적이나 장신구들은 고대 이집트에서 장례절차와 그들이 생각한 사후세계을 표현한 문서인 ‘사자의 서’에 언급되어 있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되었던 신들이나 동물 등이 상징들이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미이라를 수호하고 내세에서도 삶을 계속 영위할 수 있게하는 주술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태양신을 상징하는 풍뎅이 모양의 스카라베, 호루스의 눈을 상징하는 미적으로 매우 뛰어난 ‘와제트의 눈’,  매모양의 가슴장식, 티예트 부적 등이 있다. 미이라에는 부적외에도 몸을 감싸고 있던 많은 장신구들이 있는데 날개를 펼친 상이집트를 상징하는 독수리와 하이집트를 상징하는 코브라 모양의 날개달린 옷깃, 순금원반과 채색 파이앙스로 구성된 세줄목걸이, 왕관 등 다양한 장신구와 철제단검, 발에 신었던 황금 샌들 등이 있다.

티에트(Tyet) 부적은 ‘이시스이 매’로 불리는 이집트에서 가장 흔한 부적 중 하나이다. 이시스 여신이 찬 벨트의 매듭을 뜻하며 육체를 보호해 줄 것을 기원한다. 벽옥으로 만들어 미이라의 목에 놓아야 한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이집트부적 20220125_18<1. 티예트 부적(Tyet, 이시스의 매듭), 신왕국, 제18~19왕조/기원전 약 1539~1075년/벽옥>

티예트(Tyet)는 이시스 여신이 찬 벨트의 매듭을 뜻한다. 이것은 <사자의 서>의 제156 주문에서 언급되는 부적 중의 하나다. <사자의 서>에 따르면 이 부적은 이시스에게 육체를 보호 해줄 것을 기원하는 부적이다 벽옥으로 만들어 미라의 목에 놓아야 한다. 형태는 앙크(ankh)와 비슷해 보이지만 팔이 아래를 향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앙크와 마찬가지로 이 부적 또한 ‘생명’과 ‘삶’을 의미한다. 이 부적이 주로 자주색이나 붉은색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이시스의 피’를 의미하기도 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제드 기둥은 오시리스의 척추를 상징하며, 안정과 영원을 의미한다. 이 부적의 형태와는 별개로 제드 기둥은 각종 장례용품의 장식 요소로 인기가 있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이집트부적 20220125_19<2. 제드 기둥 부적(Djed-pillar, 오시리스의 척추), 후기왕조 시대, 제26~30왕조/기원전 약664~332년/파이앙스>

제드는 원래 나무 기둥을 뜻했으나 후기 시대에 이르러 오시리스의 척추를 상징하게 되었다. <사자의 서> 제155 주문에서는 이 부적을 장례식 당일 날 시의 목에 올려 놓는다고 하였다. 장례를 주관하는 사제는 부적을 올려 놓으며 “오시리스여, 다시 일어서십시오! 다시 한 번 척추가 생겼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스카라브(Scarab)는 쇠동구리를 본뜬 조각상으로 심장을 상징한다. 부적 또는 인장(印章)으로 사용되었고 아래면에는 글자를 새겨놓았다. 쇠똥구리는 ‘생성과 재생’을 뜻하는 케페레르(Kheperer)라는 단어와 발음이 비슷하다. 이 부적에는 사후 심판의 자리에서심장이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도록 하는 주문이 있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이집트부적 20220125_20<3. 심장 스카라브(Scarab), 사카라/후기왕조 시대 제26왕조/기원전 664~525년/동석, 금박>

이집트인들은 심장이 사람이 살면서 했던 모든 생각과 행동을 다 알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생전의 나쁜 짓까지도 알고 있어 망자가 영생을 얻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심장 스카라브라 불리는 특별한 부적을 죽은 자의 심장에 올려 두었다. 스카라브는 쇠똥구리 또는 풍뎅이 모양의 부적이다. 이 심장 스카라브에는 <사자의 서> 제30장의 내용이 새겨져 있다. 심장 무게 다는 심판에서 주인을 배반하지 말도록 심장에게 부탁하는 글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이집트부적 20220125_21<4. 이시스, 어린 호루스, 네프티스,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기원전 305~30년/파이앙스에 유약

세트에게 살해된 오시리스를 다시 설려 호루스를 낳은 이시스는 오시리스가 사후세계로 간 뒤 여>동생인 네프티스와 함께 호루스를 키운다. 이시스는 오시리스를 죽이고 이집트의 왕좌를 빼앗은 질투심 많은 세트의 눈을 피해 아들을 숨겼다. 미라의 몸통 아래쪽에 놓은 부적으로 이시스와 네프리스가 호루스를 보호했던 것처럼 죽은 이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봉헌한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이집트부적 20220125_24<5. 파타이코스 부적(Pataikos), 후기왕조 시대, 제26~30왕조/기원전 약664~30년/파이앙스>

난쟁이 신 파타이코스는 악어 두 마리 위에 서서 양손에 뱀의 목을 쥐고 있다. 머리 위에는 태양신을 상징하는 스카라브가 놓여 있고 양 옆에는 오시리스의 부인과 여동생인 이시스와 네프티스가 서 있다. 뒤면에는 죽은 이의 영혼 중 하나인 바(bar)-새가 있다 이 부적은 사후세계에서 뱀과 악어로부터 죽은 이를 보호하도록 끈을 연결하여 죽은 이의 목에 걸었다. 파타이코스는 난쟁이 신 베스나 악어 위에 서 있는 어린 호루스 신과 연관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바(ba)는 고대 이집트에서 개인을 특성짓는 것을 말하며 육체가 죽은 후 존재하는 형태이다. 사람의 얼굴에 날개가 달린 동물의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후대 종교에서 말하는 영혼과는 다른 존재이다. 이집트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머리에서 바(ba)가 나와 죽은이가 먹을 음식을 모아 무덤으로 가져온다고 믿었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이집트부적 20220125_01<1. 바 부적(Ba Amulet), 사카라/후기왕조 시대, 제26~30왕조/기원전 약 664~332년/금>

바(ba)는 이집트인들이 초자연적 인격을 구성한다고 믿는 영혼 중 하나이다. 사람이 죽으면 인간의 머리를 한 새, 바가 무덤 밖을 돌아다니며 죽은 이가 먹을 음식을 모아 무덤으로 가져온다. 바 부적은 바가 무덤으로 되돌아오지 못했을 때 바를 대체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와제트 눈 부적은 호루스가 세트와 싸울 때 빼앗긴 왼쪽눈을 의미한다.  고대 이집트의 여신인 와제트(Wadjet)와 관련이 없지만 ‘호루스의 눈’ 대신 ;와제트 눈’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호루스는 아버지 오시리스를 치유를 위해 이 눈(‘와제트;)를 바쳤다고 하며 미라에 달린 와제트는 치유, 복원, 보호를 의미한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이집트부적 20220125_02<2. 와제트 눈 부적(Wadjet-Eye), 데이르 알바하리/후기왕조시대, 제26~30왕조/기원전 약664~332년/금>

고대 이집트어로 와제트라고 불리는 눈 부적은 이시스와 오시리스의 아들인 호루스 신의 눈을 표현한 것이다. <호루스와 세트의 신화>에서 세트는 호루스의 왼쪽 눈을 도려냈고 그것을 하토르와 토트 신이 치료한다. 호루스는 이후 죽은 자들의 땅에 있는 아버지 오시리스를 치유, 즉 ‘와지’하기 위해 이 눈(‘와제트;)를 바쳤다. 따라서 미라에 달린 와제트는 치유, 복원, 보호를 의미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이집트부적 20220125_03<3. 바 부적, 사카라/프톨레마이오스 시대/기원전 약 305~30년/금, 청금석, 터키석, 동석>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이집트부적 20220125_04
<4. 와제트 눈 부적, 사카라/후기왕조 시대, 페르시아 시대, 제27왕조/기원전 약524~404년/금>

개코원숭이 형상을 하고 있는 토트신이 와제트 눈을 가지고 있는 모습은 ‘호루스 눈’에 대한 신화를 잘 표현하고 있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이집트부적 20220125_05
<5. 와제트 눈을 가진 토트, 후기왕조 시대, 제26~30왕조/기원전 664~305 또는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기원전 305~30년/ 파이앙스>

이 부적은 세트 신이 호루스 신의 왼족 눈을 뽑았고 그것을 토트신이 치유했다는 신화를 직접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여기서 토트를 상징하는 성스러운 동물인 개코원숭이가 치유된 눈을 들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이집트부적 20220125_06<7. 아누비스 부적(Anubis), 후기왕조 시대, 제26~30왕조/기원전 약 664~30년/금>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이집트부적 20220125_07<8. 타웨레트 부적(Taweret), 신왕국, 람세스 시대, 제19~20왕조/기원전 약1292~1075년/파이앙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이집트부적 20220125_09<9. 와제트 눈 부적, 자가지그(부바스티스)/후기왕조 시대, 제26~30왕조/기원전 약 664~30년/파이앙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이집트부적 20220125_10<10. 기둥 부적 (Wadji), 후기왕조 시대 제26~30왕조/기원전 약 664~30년/파이앙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이집트부적 20220125_11<11. 쭉 편 오른손 부적, 신왕국/제18~19왕조/기원전 약 1539~1075년/파이앙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이집트부적 20220125_12<12. 호루스의 네 아들 부적, 후기왕조 시대, 제26~30왕조/기원전 약664~30년/파이앙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이집트부적 20220125_35<13. 부적, , 후기왕조 시대, 제26~30왕조/기원전 약664~30년/흑요석>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이집트부적 20220125_14<14. 삼각자 부적, 후기왕조시대, 제26~30왕조/기원전 약 664~332년/적철석>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이집트부적 20220125_15<15. 심장부적, 후기왕조시대, 제26~30왕조/기원전 약 664~332년/홍옥수>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이집트부적 20220125_16<16. 두 개의 손가락 부적, 프톨레마이오스 시대/기원전 약 332~30년/흑요석>

<17 인간 다리 부적, 고왕국, 제5~6왕조/기원전 약 2500~2130년/홍옥수>

<삼각자 부적>은 목수가 직각을 확인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를 차용하여 미라가 잘 만들어지기를 기원하는 부적이다. 손가락은 병의 치유를 상징하는데 <두개의 손가락 부적>은 내장을 제거하기 위해 절개한 복부 부위에 놓았다. <인간 다리 부적>은 사후세계에도 잘 움직이기를 기원하기 위해 만들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부적
이집트인들은 산자와 죽은 자 모두를 위해 부적을 썼다. 조각상 형태로 많이 만들어 졌으며 신의 형상이나 심장, 눈, 척추, 새, 곤충 모양 등 다양했다. 부적은 형태와 종류에 따라 각각 특별한 보호기능을 했다 종류에 따라 위치가 정해져 있었는데, 시신을 싼 아마천 안쪽에 놓였다. ‘바(Ba)’ 부적은 가슴 부위에 놓여 혹시나 ‘바’가 돌아오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도록 했고, 심장을 상징하는 쇠똥구리 모양 부전 ‘스카라브(scarab)’는 오시리스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 죄를 자백하지 않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겼다. 또 각 부적의 모양, 재료, 색상도 신화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미라 부적의 겉면을 장식한 푸른색과 녹색의 파이앙스는 식물과 물을 떠오르게 하여 재생을 상징했다. 미라의 목 아래쪽에 놓이는 기둥 모양 부적은 오시리스의 척추를 의미하며 안전을 상징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샤브티(Shabty)는 고대 이집트에서 죽은이의 사후세계를 동행하는 역할로 무덤에 껴묻거리로 묻어지는 인형을 말한다. 대체로 주인을 위해 대신 일을 하는 역할을 하며 <사자의 서>에도 언급되어 있다. 귀족이나 일반인들 사이에 유행하다가 왕족의 장례에도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이집트부적 20220125_31
<6. 센카마니스켄왕의 샤브티(Shabti of King Senkamanisken), 수단, 누리, 피라미드III/후기왕조 시대, 제25왕조/기원전 약 643~623년/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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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피누젬 1세의 장례 조각상(Funerary Figurine of King Pajudjem I), 데이르 엘바하리/제3중간기, 제21왕조/기원전 1025~1007년/파이앙스>

샤브티(Shabti)와 장례 조각상은 신이 죽은 이에게 저승에서 하도록 요구하는 각종 일을 대신하는 하인이다. 여기서는 괭이를 들고 있어 농사를 대신하는 의미를 가진다. 센카마니스켄왕의 샤브티에 새겨진 성각문자 주문은 <사자의 서> 제6장에 나오는 내용으로, 누비아의 왕 센카마니스켄을 대신해 내세에서 일할 것을 샤브티에게 부탁하고 있다. 훨씬 간략하게 이름과 직위만을 적은 문구도 장례 조각상에서 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이집트부적 20220125_25<8. 목걸이, 후기왕조 시대, 제26~30왕조/기원전 약664~332년/파이앙스>

후기왕조 시대가 되면 그물처럼 생긴 목걸이가 미라 싸개의 일부로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목걸이는 갑옷처럼 주술적 보호막을 형성하여 죽은 이의 육체를 해로운 힘으로 막아줄 거라고 믿었다. 후기왕조 시대 말에는 목걸이가 미라 전신을 감쌀 수 있을 만큼 커져서 그전까지 미라 겉사개 역할을 했던 커다란 아마천 수의를 대신하기도 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2. 안내문, 이집트 보물전,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3. 안내문, 신비의 파라오 투탕카멘, 국립과천과학관 특별전, 2012년
  4. 위키백과, 2023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죽음 뒤의 세계, 사자의 서

피라미드와 미이라(The mummy)는 고대 이집트 사람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생각을 잘 보여주는 흔적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인이의 영혼이 시신에 머문다고 생각하여 시신을 보존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사막지역인 이집트의 지리적 특징과 함께 많은 미이라들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장례절차와 사후세계를 기록한 문서인 ‘사자의 서(Book of dead)’, 시신을 모셨던 관과 껴묻거리 등에는 오시리스 신화를 비롯하여 당시 사람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바램과 살았던 모습 등이 남아 있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06<피라미드 모양의 새김돌, 신왕국~제3중간기 제20~22왕조 기원전 약 1185~718년, 석회암>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01<오시리스에게 예배가 드리는 모습>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03<레 신에게 예배를 드리는 모습>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04<바(Ba)가 부활의 상징인 제드 기둥에 앉아 있는 모습>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02<호루스와 토트가 정화의식을 행하는 장면>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05<이시스여신>

여성의 무덤에서 출토된 작은 피라미드이다. 네 면에 장식된 부조에는 이집트인의 세계관이 담겨 있다. 앞면인 감실과 뒷면에는 사후세계와 연관된 주요 신들인 오시리스와 레 신에게 죽은이가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오른쪽 면에는 무덤 주위를 날아 다니는 인간의 머리를 한 새(‘바Ba’)가 부활의 상징인 제드 기둥에 앉아 있다. 왼쪽 면에는 호루스와 토트가 죽은 이의 미라를 앞에 두고 정화 의식을 행하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SANYO DIGITAL CAMERA<스핑크스와 기자의 미라미드>

SANYO DIGITAL CAMERA<쿠푸왕의 대피라미드>

피라미드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무덤으로, 대부분 지금으로부터 4천여 년 전인 고왕국 시대에 세워졌다. 석관 안에 미라가 없는 경우가 많아, 무덤이 아닌 장례신전이라는 주장도 있다. 현재 기자를 중심으로 100여 기 이상이 발견되었다. 가장 큰 피라미드는 제4왕조의 두 번째 파라오였던 쿠푸왕의 피라미드로 ‘대피라미드’라고 한다. 기원전 약 2500년에 지어졌고 헬레니즘 시대부터 7대 불가사의로 불렸다. 높이가 146.6cm에 이르며 지어진 뒤 약 3,800여 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한 변이 230m 인데 각 변의 길이 차는 최대 4.4cm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정밀하다. 벽돌처럼 다듬은 돌 230만 개를 사용했는데 돌 하나의 무게가 평균 2.6톤이고 50~80토에 달하는 것도 있다. 대피라미드 안에서는 세 개의 방이 발견되었다. 지하에 미완성의 방이 하나 있고 중아 방과 석관이 있는 매장 방이 있다. 최근까지도 과학정 방법으로 조사 중이지만 현재까지 정확한 내부구조는 알 수 없다. 어떻게 지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바퀴 달린 차량과 크레인이 없던 때라 긴 경사로를 이용해 돌을 밀어 올렸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3만여 명의 인부가 10년 이상 참여했으며 전쟁포로, 노예, 그리고 나일강의 범람으로 농지가 침수되는 기간에는 농부들도 동원되었을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한번에 10만 명의 인원이 3개월 교대로 동원되었다. 돌덩이를 끌고 갈 길을 내느라 10년 동안 백성들의 고생이 계속되었다. … 길을 내고도 그곳에 돌을 쌓아 올리는데 다시 또 10년이 걸렸다. – 헤로도토스 <역사(The Histories)> 2권 124장 -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사자의 서(Book of dead)’는 이집트 신왕국 초기에 장례절차와 사후세계를 묘사한 고문서로 원래는 왕족이 아닌 사람들이 장례식 사후 안내서 역할을 했던 문서이다. 고왕국시절 피라미드 현실 벽면에 벽화 또는 상형문자로 적었는데 이를 ‘피라미드 문서’라고 부른다. 이런 내용이 중왕국시대 이후 귀족이나 부자의 관속에 문서로 적었으며, 신왕국시대에 들어서는 정형화된 형태의 ‘사자의 서’를 파피루스에 적어 관속에 묻었다. 여러 형태의 ‘사자의 서’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 묘사가 세밀하고 뛰어난 것으로는 영국 박물관에서 소장한 아니(Ani)의 필사본 ‘사자의 서’가 있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27<죽은이의 머리 위를 떠돌고 있는 바(Ba), 아니(Ani)의 필사본 ‘사자의 서’, 영국박물관 소장>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07<1. 미라 붕대,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혹은 그 이후, 기원전 332 ~ 서기 100년, 아마천.잉크>

이 마라 붕대에는 죽은 자들의 영역에 있는 영혼에게 음식을 바치고, 그들에게 그 음식이 무사히 도달하기를 기원하는 <사자의 서> 제148 주문이 인용되어 있다. 죽은 이는 제드 기둥 앞에 서서 여신이 받치고 있는 오시리스레하라크(Osiris-Reharakhy) 형상에 향을 피우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08<2. 미라 붕대,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혹은 그 이후, 기원전 332 ~ 서기 100년, 아마천.잉크>

이 붕대에 기록된 것은 <사자의 서> 제18장으로 죽은 이가 맞이할 여러 평의회의 신들 앞에서 죽은 이를 변호해 달라고 신에게 요청하는 내용이다. 이 붕대의 오른쪽 글귀 부분과 떨어져 있는 곳에 ‘세번째’라는 단어가 쓰여 있는데, 이것은 전체 미라 붕대 중 이 띠가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알려 주는 표시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09<3. 미라 붕대,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혹은 그 이후, 기원전 332 ~ 서기 100년, 아마천.잉크>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10<앞부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11<뒷부분>

<사자의 서>에는 심장을 다루는 주문이 많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마음이 있는 곳이 심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붕대에는 오시리스의 법정에서 죽은 이에 대해 불리한 증언을 하지 말아 달라고 심장에게 간청하는 주문이 쓰여 있다. 이런 주문은 미라의 심장 위에 놓이는 스카라브에 흔히 새겨지는 문구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카라브는 풍뎅이 모양으로 표현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12<4. 사자의 서, 제3중간기 제22왕조 기원전 약945~712년, 파피루스.잉크>

이것은 아문(Amun)신을 모시는 상당히 높은 지위의 신관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제15장과 제17장의 내용이 담겨 있다. 제15장은 태양신에게 바치는 찬가이고, 제17장은 사후세계에서 문제에 봉착했을 때 난관을 극복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테베의 사제인 제드콘수이우에판크로, 태양신 레로르아크티(Re-Hor-akhty)앞에 서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세로로 쓰여진 글에는 죽은 이를 환영하는 신의 인사말을 비롯해 죽은 이의 이름 및 가계도가 적혀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13<5. 저승의 서(Papyrus of the Amduat), 제3중간기 제22왕조 기원전 945~712년, 파피루스.잉크>

<저승의 서>에는 태양이 내세에서 12시간 동안 지나가는 길이 그림과 함께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태양이 배를 타고 저승세계를 통과하여 아침에 다시 산자들의 세계로 돌아가는 여정과 그 과정에서 이를 방해하는 적들을 물리치는 것을 보여준다. 이 파피루스는 태양이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 다시 떠오르기 직전인 12번째 시간을 다루고 있다. 이집트 사람들은 자신을 태양신과 동일시함으로써 사후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세력들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제3중간기 이전에는 왕만이 이 문서를 사용할 수 있었으나, 이후 시기에는 고위 관료들도 사후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보조 도구로 이 문서를 이용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사자의 서’는 이집트인들의 내세관을 잘 보여주는 문서로 장례식 절차부터, 부장품, 죽은자가 사후 세계를 여행하는 내용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은 생전에 쌓은 선행을 심판하는 사후세계의 신인 오시리스 앞에서 받는 “심장의 무게 달기 의식”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의식은 심판관인 오시리스 신 앞에서 죽은자의 심장을 큰 저울에 올려 지혜의 여신 마트의 깃털로 무게를 재는 의식이다. 이 재판에는 지식의 신인 토트, 죽음의 신 아누비스, 괴물 암무트, 파라오를 상징하는 호루스신이 참여하는데 오늘날 재판의 형태와 비슷하다고 한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14<후네페르(Hunefer)의 사자의 서(설명)>

사자의 서
죽은 자가 오시리스의 심판을 통과해 저승으로 무사히 들어가 영원한 삶을 얻는 여정에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주문을 담은 책이다. 초기에는 피라미드의 무덤방 벽이나 관에 새겨져 ‘피라미드 문서’라고 하였고, 신왕국 시대에 ‘사자의 서(Book of the Dead)’로 불리게 되었다. 파피루스에 적힌 것들이 많이 알려졌으며,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것처럼 미라를 감싼 아마천 붕대에 쓴 경우도 있다. 사자의 서에는 적어도 190여 개의 주문이 있다. 부자들은 문자와 함께 그림을 넣기도 하였다. 죽은 사람은 여러 위험과 괴물을 만나게 되는데, 이를 암송하여 위기를 넘기도록 괴물 이름을 적어 놓은 경우도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125번 주문으로, 최후의 심판에서 사는 동안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음을 심판관들에게 고백하는 내용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인이의 영혼이 시신에 머문다고 생각하여 시신을 보존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사막지역인 이집트의 지리적 특징과 함께 많은 미이라들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29<토티르데스의 관, 테베/후기시대, 제26왕조/기원전 약664~525년/ 나무, 채색한 회반죽>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21<얼굴부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15<위에서 본 모습>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17<바닥면>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20<관 내부>

토티르데스의 관
관은 미라를 보호할 뿐 아니라 여기에 망자와 오시리스를 연결하는 그림을 그려 죽은 이가 사후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미라의 주인공인 토티르데스(Thothirdes)는 관의 형태로 보아 제26왕조에 살았던 사람으로 추정된다. 이 관에는 토티르데스가 사후세계에서 이루고 싶은 소망들이 그려져 있다. 뚜껑 중앙 부분에 미라가 된 토티르데스가 누워있고 오시리스의 부인과 여동생인 이시스와 네프티스(Nephthys) 여신이 토티르데스를 애도하고 있다. 인간의 머리를 한 새 모습의 바(Ba)가 토티르데스 위를 맴돌며 그의 영혼이 죽음 이후에도 존재할 것임을 알린다. 바로 위 화면에는 토티르데스의 심장과 ‘진실’이 저울에 올려져 있고, 두 명의 신이 무게를 재는 심판으로부터 토티르데스를 데려가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진실하게 살았음을 마침내 증명한 토티르데스는 이제 사후세계에서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16<토티르데스의 관에서 나온 미라, 테베/후기 시대, 제26왕조/기원전 약 8세기/아마천, 유기물질>

토티르데스의 관에서 나온 미라
이 미라를 대상으로 방사선탄소연대측정을 실시했다. 또한 유물을 손상시키지 않고도 내부를 볼 수 있는 CT촬영도 시행했다. 방사선탄소연대측정 결과 이 미라의 주인공은 기원전 768년과 545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리고 CT촬영 결과 목 피부 아래가 아마천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기법은 기원전 712녀에 끝난 제22왕조 이후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이 조사를 통해 미라는 방사선탄소연태측정법 증과와 CT촬영 분석 결과가 서로 겹치는 기원전 8세기에 사망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스 이 미라는 앞의 토티르데스관보다 40년 이상 오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미라와 관은 원래 따로 출토되었던 것이 19세기에 고대 유물 중개인에 의해 합져진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CT로 본 미라
CT를 이용해 토티르데스 미라의 내부를 조사한 결과, 토티르데스라는 인물에 대한 몇가지 숨겨진 사실이 밝혀졌다. 먼저 성기를 확인하여 남성임을 알 수 있었다. 나이는 뼈의 성장 상태로 보아 19세 이상의 성인으로 추정되며, 건장한 골격의 소유자였다. 또한 미라에 대한 유일한 기록인 헤로도토스의 설명을 검증해 볼 수도 있었다. 그는 코를 통해 쇠고리를 두개골에 넣어 뇌를 제거했다고 했는데, 토티르데스의뇌는 완전히 제거된 상태였고 코와 두개골 사이의 뼈가 뚫려 있어 헤로도토스의 설명과 일치하였다. 뱃속의 장기는 왼쪽 옆구리를 절개하고 제거했음을 알 수 있었으며 이 역시 그의 설명과 일치한다. 심장도 남아 있었다., 한편 장기를 카노프스 단지에 넣지 않고 다시 몸속에 넣은 것은 헤로도토스의 설명과 차이가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이집트인들은 사후에도 삶을 계속 영위하기 위해서는 내장을 잘 보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피라미드 시대(기원전 2600년 경) 이후로 이집트인들은 내장을 네 개의 단지에 넣어 무덤 속에 보관했다. 폐와 비장, 간, 창자 등 네 개의 중요 장기에는 각각 수호신(임세티, 하피, 두아트무테프, 퀘배흐세 네베프)을 배치했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23<뚜껑 달린 카노푸스 단지, 후기왕조시대, 제26왕조/기원전 664~525년(혹은 그 이후)/석회암>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31
< 자칼인 두아트무테프(Duatmutef)>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32
<매인 퀘배흐세 네베프(Qebehsenebef)>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33
<인간인 임세티(Imsety)>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34
<개코원숭이인 하피(Hapi)>

카노푸스 단지는 신체를 미라로 만들 때 제거된 장기를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왕족들만이 사용하다가 나중에는 상류층과 중산층에서도 카노푸스 단지를 사용하였다. 물론 왕족들이 사용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었고, 신분이나 부유함에 따라 재료가 달랐다. 카노푸스 단지 중에는 뚜껑이 열리지 않는 것들도 있어, 단순히 봉헌용으로 용도가 바뀌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보통 한 세트가 네 개로 이루어져 있는 카노푸스 단지의 뚜껑은 각각 호루스의 네 아들을 상징한다. 자칼인 두아트무테프(Duatmutef)는 위를, 매인 퀘배흐세 네베프(Qebehsenebef)는 장을, 인간인 임세티(Imsety)는 간을, 개코원숭이인 하피(Hapi)는 폐를 보호한다고 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미라 제작
이집트인은 죽음을 초월한 영원한 삶을 위해 죽은 사람의 몸이 보존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미라를 만드는 것은 영생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의식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미라 제작 과정에 대해 묘사한 기록이 전한다. 그것은 생전의 모습을 최대한 유지시키기 위해 수분을 제거하고 해충의 번식을 막는 과정이었다. 먼저 뇌를 비롯하여 내장을 모두 꺼내고 몸속을 깨끗하게 씻은 뒤 내부를 향신료로 채웠다. 뇌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버렸지만 간, 폐, 위, 장은 썩지 않게 처리하여 ‘카노푸스’라고 불리는 특수한 병에 넣어 보관하거나 다시 미라에 집어 넣기도 했다. 심장은 육체 일부이지만 동시에 생각과 감정을 주관하는 장기로 여겼고 시신 속에 남겨 두었다. 이렇게 처리한 시신은 천연 소금을 사용해 70일간 탈수 시킨 뒤 신체 곳곳에 부적을 놓고 아마천으로 꼼꼼히 쌌다. 마지막으로 나무로 만든 사람 모양 관에 안치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26<페세바카이엔피페트의 관, 데이르 엘바하리/제3중간기, 제21왕조/기원전 약 1075~945년/나무(삼나무와 아카시아), 젯소, 안료>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25<얼굴>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35
<아랫부분>

제21왕조에 이르러 이집트의 귀족들은 무덤을 정교하게 만드는 것을 중단하였다. 대신 무덤 벽에 그리던 그림을 관에 그렸다. 파세바카이엔이페트의 관에는 여러 신들을 비롯해 그들을 숭배하는 죽은 이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또한, 죽은 이가 오시리스로 표현되어 있다. 관 왼쪽이 일부 손상되었는데 당시 목수들이 작은 나무 조각들을 나무롯으로 고정해 관을 만들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보수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또한 겉면을 석고를 바른 뒤에 채색하여 표면을 매끄럽게 만들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죽음 뒤의 세계
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음을 끝이 아닌 영원한 삶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여겼다. 미라와 많은 부장품들은 이 목표를 성취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다. 무덤에서 진행되는 모든 의례도 내세에 필요한 모든 필수품을 마련해 주기 위해 열렸다. 이집트인들은 영혼이 몇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카(ka)’는 육체와 동시에 태어나는데, 무덤 속 조삭상은 사후에 이 ‘카’가 머무는 장소이다. ‘바(Ba)’는 개인의 고유한 인격을 나타내며 몸을 떠나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 무덤 밖으로 나오기도 하였다. 영원한 삶을 위해서는 육체와 영혼의 모든 요소가 하나의 ‘아크(Akh)’, 즉 실제적인 영혼으로 통합되어야 했다. 이집트인들에게 저승으로 가는 입구는 해가 지는 서쪽에 있고, 사후 세계는 땅 아래에 있었다. 죽은 뒤 망자는 오시리스 앞에서 이승에서 진실한 삶을 살았는지 심판받았다. 이집트인들은 ‘마트(Maat)’, 즉 ‘정의’에 따라 살지 않았다면 영원한 삶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죽은 자는 자신의 심장을 저울에 올려놓고 반대편에는 정의를 상징하는 깃털을 놓아 저울질하였다. 심장이 깃털보다 가벼우면 심판을 통과하여 무사히 저승으로 갈 수 있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2. 안내문, 이집트보물전, 중앙박물관특별전, 2017년
  3. 안내문, 신비의 파라오 투탕카멘, 과천과학관특별전, 201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파라오와 이집트의 신들

파라오(Pharaoh)는 고대 이집트에서 최고통치자인 왕을 의미한다. 본래는 이집트에서 왕이 사는 성스러운 장소를 칭하는 말이었으나 점차 왕을 칭하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이집트에서 파라오는 오시리스신화 호루스의 현신으로 받아들여졌다. 오시리스는 사후세계를 다스리는 신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동생 세트에게 죽임을 당한 후 여신 이시스와 동생 네프티스의 도움으로 부활하였다. 오시리스와 이시스 사이에 태어난 신 호루스는 현세를 다스리는 신으로 여겨지며 파라오를 상징하고 있다.  이런 구도는 기독교, 불교 둥 후대 종교와 절대왕조에서 받아들여졌으며 세계사와 인류의 정신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친 부분이다.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신화  20220125_01<람세스 2세, 아비도스 람세스 2세 신전, 신왕국 제19왕조 람세스 2세 치하 기원전 약 1279~1213년, 석회암 안료>

이집트의 가장 유명한 파라오였던 람세스 2세의 아비도스 신전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 부조는 팡르 들고 있는 람세스 2세를 표현한 것으로 그가 신들에게 예배드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파라오는 이집트를 관장하는 많은 신과 관계를 잘 유지할 책임이 있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왕이 신에세 바치는 선물의 대가로 신이 이집트를 보호한다고 믿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자 장군이자 이집트 총독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가 세운 헬레니즘 왕국이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스스로 파라오라 칭하고 그리스와 이집트 문화가 융합된 헬레니즘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집트의 헬레니즘은 이슬람에 정복되기 전까지 크게 번창하였다.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신화  20220125_02<프톨레마이오스왕(프톨레마이오스 6세로 추정),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기원전 약 186 ~ 145년, 석회석 안료>

머리만 남아 있는 이 상은 이집트인들이 네메스(Nemes)라고 부르는 줄무늬 두건을 쓰고 있다. 지금은 분실되었지만, 머리 꼭대기에 보이는 손잡이 모양은 타조 깃털 형태의 금속 장식의 아랫부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집트 성각문자에서 ‘정의’를 뜻하는 단어가 타조 깃털 모양이며, 이와 같은 부착물은 왕과 정의의 관계를 보여주는 일반적인 상징이었다. 왕은 모든 이집트인들에게 정의를 보장할 책임이 있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신화  20220125_11
<왕의 머리(프톨레마이오스 12세로 추정), 테베,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기원전 약 80~58, 55~51년, 석회석>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의 두 왕관을 함께 쓴 머리조각상이다. 하이집트를 상징하는 붉은색 왕관 위에 상이집트를 상징하는 길쭉한 흰색 원형 왕관이 결합된 모양이다. 이 중 왕관을 쓰고 있는 왕의 모습은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모두 통치하는 왕임을 상징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신화  20220125_12
<여왕 또는 여신이 새겨진 장식판, 나일 델타 지역,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프롵레마이오스 9세 치하추정, 기원전 116 ~ 107년, 금 도금한 은판에 돋을새김>

여왕과 여신의 이미지는 너무 비슷하기 때문에 명문이 없다면, 누가 누구인지 구별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이 여성은 독수리 낱개모야으이 관이 귀 뒤쪽까지 이어지는 독수리 왕관을 쓰고 있고 드레스에도 깃털 표현의 흔적이 있다. 독수리는 ‘왕의 어머니’러 불리는 네크베크 여신을 상징하며 이집트 상형문자에서는 ‘어머니’를 상징한다. 여인의 의상에도 독수리의 상징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이 장식판은 정교한 상자에 부착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신화  20220125_13
<큰 칼, 텔 마아마르나 군사지구 출토, 신왕국 제18왕조 아마르나 시기 기원전 약 1352~1336년, 청동>

고대 이집트인들은 돌과 청동으로 도구와 무기를 만들었다. 최초의 도구는 석회암층에서 발견되는 규질암으로 만었다. 선앙조시대에 이집트인들은 구리와 비소를 섞어 청동을 만들었다. 두 재료는 고대 이집트 역사에서 계속 사용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신화  20220125_14
<세티1세의 경계비, 콤 알루피, 신왕국 제19왕조 세티1세 1년 기원전 약 1294년, 석회암>

비석에 쓰인 글에 따르면 세티 1세는 즉위 첫 해에 토지 두 구역의 측량을 명령했다. 이 석비는 두 영역이 나누어지는 경계에 세워졌다. 왕은 관청을 운영하고 백성이 먹고사는데 문제가 없도록 토지를 분배하고 관장했다. 세금 징수원과 농부는 들판에 세워진 석비를 통해 토지에 대한 왕의 규정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일반 백성이 왕의 힘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사례이다. 비석에 새겨진 왕은 투구 모양의 왕관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왕이 직접 나서서 바쁘게 행동한다는 것을 뜻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신의 아들, 파라오
파라오는 이집트를 통치하는 왕으로 신의 아들이자 대리자인 절대적 존재였다. 왕은 호루스 신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고귀한 신분이며, 동시에 오시리스의 아들이자 태양신 ‘레(Re)’의 아들이기도 했다. 또한 상이집트와 하이집트 모두의 왕이었는데, 각각의 정부는 독립적이었으나 한 사람이 통치하는 구조였다. 왕은 신들과의 관계를 통해 현세와 내세에서 이집트를 보호해야 했다. 강력한 권력을 가진 여왕도 존재했는데, 이시스.하토르 여신의 현신으로 여겨지곤 했다. 이집트는 대단히 견고한 계층 사회였다. 왕족과 귀족 외에도 관료, 군인, 성직자, 장인, 농부들이 있었다. 계층 사다리 맨 밑에 노예가 있는 시대도 있었다. 사회의 모든 계층은 무덤이나 묘에서 출토되는 여러 종류의 부장품에 반영되었다. 특히 고고학 기록에 가장 자주 보이는 계층은 교육받은 엘리트인 관료와 사제, 장인이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자연과 사회의 관점에서 많은 신들을 믿었다. 이집트 신화체계는 매우 복잡해서 어떤 신들은 많은 다른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그 역할도 다양했다. 고대 이집트 초기에는 신들을 숭배했던 도시들과 엮어 있었는데 점차 그 관계가 없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집트인들은 둘 이상의 신을 합해 새로운 신을 만들기도 했다. 이집트인들은 처음에는 동물 이미지로 신을 표현했든대 점차로 신은 인간의 남성이나 여성의 형태로 재현되었으며 그 이후 사람의 몸에 동물의 머리를 한 형태가 나타났다.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신화  20220125_31
<1. 아피스 황소(Apis bull), 후기왕조시대 제26~30왕조 또는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기원전 약664~30년, 청동>

고대 도시 멤피스의 아피스 황소 숭배는 이집트에서 가장 유서가 깊다. 아피스 황소는 프타(Ptah) 신의 현신이었다. 일반인들은 이런 조각상 같은 봉헌물을 바치면서 자신과 가족의 안녕을 빌었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신화  20220125_15
<2. 소베크(Sobek), 후기왕조시대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제26왕조 이후 기원전 664~30년, 청동>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신화  20220125_16
<3. 네이트(Neith), 후기 왕조 시대 제26~30왕조 기원전 약 664~332년, 석판>

네이트는 처음에는 나일강 하구 삼각주의 도시 사이스(Sais)를 관장하는 신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그녀를 우주의 창조자로 생각했다. 이후 역할이 점점 커지면서 네이트는 지혜, 길쌈, 어머니, 강, 물, 출산, 사냥, 전쟁, 운명의 여신이 되었다. 이 상에서 네이트는 자신으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하이집트의 붉은 왕관을 쓰고 있다. 하이집트를 통치했던 이집트 왕들도 이 왕관을 착용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신화  20220125_03<4. 셰솅크왕의 스핑크스(Sphinx of King Sheshenq), 제3중간기 제22~23왕조, 기원전 약 945~718년, 청동>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신화  20220125_04<5. 뱀관(Snake Coffin), 후기왕조 시대 제26~30왕조 기원전 약 664~332년, 청동 납>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신화  20220125_05<6. 개코원송이, 후기왕조시대 제26왕조 이후 기원전 664~332년, 청동>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신화  20220125_17
<7. 류트를 연주하는 베스(Bes with Lute), 후기왕조 시대 제26~30왕조 기원전 664~342년, 청동>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신화  20220125_06
<8. 고양이, 후기왕조 시대 시대 제26~30왕조 기원전 664~342년, 청동, 속이 빈 주형>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신화  20220125_07
<9. 숫양 머리 기둥 장식, 덴데라, 후기왕조시대 제26~30왕조 기원전 945~656년, 검은색 화강암 붉은색 물감 흔적>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신화  20220125_20
<고양이,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 로마시대, 기원전 305 ~ 기원후 100년, 나무. 금박을 입힌 석고. 청동. 수정. 유리>

고양이는 여신 바스테트를 상징한다. 바스테트는 태양신 레의 딸이며 하이집트를 수호하는 신이다. 속이 꽉 찬 이 나무 조각상은 바스테트 신전에 바치던 공물이었다. 고양이 양쪽 귀 사이에는 아침에 떠오른 태양을 상징하는 스카라브가 박혀 있는데, 이것은 고양이 털의 줄무늬를 예술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신화  20220125_21
<오시리스(Osiris), 아비도스, 후기왕조 시대 제26왕조 기원전 약 664~525년 혹은 그 이후, 청동.금박>

이 조각상은 죽은 자들의 땅을 다스리는 오시리스이다. 오시리스는 왕의 표식인 굽은 지팡이와 도리깨를 쥐고 있는 미라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상은 신에게 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이 바친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신화  20220125_26
<앉아 있는 와제트(Seated Wadjet), 후기왕조 시대 제26~31왕조 기원전 약664~332년, 청동>

와제트는 코브라의 모습으로 표현되다가 후기 시대에 와서 사자 머리를 한 여성으로 자주 묘사되었다. 태양신 레(Re)의 딸 중 한 명을 재현한 이 커다란 청동상은 이집트 몽구스의 미라를 보관하는 용도로 쓰였다. 뱀을 죽일 수 있는 몽구스는 뱀의 공격에 매일 분투하는 태양신의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와제트와 마찬가지로 몽구스 역시 태양신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신화  20220125_09<따오기의 관(Ibis Coffin), 투나 엘게벨 추정,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기원전 305~30년, 이후 일부 추가 제작, 나무.은.금.수정>

따오기(Ibis)는 달, 지혜, 글의 신으로 알려진 토트(Thoth)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후기 시대에 이르러 토트는 아문을 대신해 신전에서 최고신으로 추앙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지혜, 문자, 과학, 마법, 예술, 그리고 죽은 자들의 심판을 관장했다. 이 따오기 관은 토트신의 동물 형상 중 하나를 재현한 것이다. 정교하게 도금된 이 관 안에는 따오기 미라가 담겨 있다. 수정에 금 테두리를 돌린 눈, 도금된 몸체, 그리고 은으로 된 다리와 발 부분의 섬세한 묘사로 인해 이 관은 예술성이 뛰어난 동물 관으로 꼽힌다. 따오기의 관처럼 특정 신을 상징하는 동물 미라는 신에 대한 봉헌물이 되었고 후기왕조 시대와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는 이집트 전역에 수십만 구의 동물 미라가 묻혔다. 이런 유형의 관은 대부분 머리와 발이 청동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다양한 신
이집트인들은 세상에 초자연적인 힘이 가득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힘 중 하나를 ‘네체르(Netjer)’라고 불렀는데, ‘신’이란 뜻이다. 한 마을만을 보호하는 지역신도 있었고 매일 태양을 떠오르게 하는 것처럼 우주 전체를 관장하는 신도 있었다. 이집트인들은 둘 이상의 신을 합해 새로운 신을 만들기도 했다. 그 예로 상이집트 신들의 왕인 ‘아문(Amun)’이 하집트의 태양신인 ‘레(Re)’와 결합해 국가와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새로운 신 ‘아문-레(Amun-Re)’가 탄생했다. 이집트인들은 처음에 동물 이미지로 신을 표현했다. 신을 표현한 동물 조각상들은 기원전 3100년 이전의 선왕조 시대부터 만들어졌다. 기원전 3100년 이후 제1왕조 즈음이 되자 신은 남성이나 여성의 인간 형태로 재현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2675년 이후 제2왕조 후기에 이르러 신은 남성 혹은 여성의 몸에 동물의 머리를 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 세가지 형태의 신은 제2왕조부터 이집트의 다신교가 기독교로 대체되는 기원후 4세기까지 계속 숭배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신화  20220125_10<이집트 신의 계보>

신화의 세계
고대 이집트인의 세계관은 오시리스와 이시스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들의 부모는 창조신인 아툼의 자녀 게브와 누트이다. 이들은 네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바로 오시리스, 이시스, 세트, 네프티스였다. 이들은 서로 결혼하여 짝이 되었다. 왕과 왕비가 된 오시리스와 부인 이시스는 백성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이런 오시리스를 질투한 남동생 세트가 왕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세트는 왕의 몸 치수를 잰 뒤, 그의 몸에 맞게 특별 제작한 인간 모양의 상자를 주문했다. 이것이 이집트 관의 시초가 되었다. 준비가 끝나자 왕을 연회에 초대한 뒤 유인해 가두고 상자를 나일강에 던져 익사시켰다. 세트는 왕위에 올랐다. 이시스는 오시리스의 시신을 찾아 그를 마법으로 잠시 살려 낸 뒤 아들인 호루스를 잉태했다. 이시스는 여동생 네프티스의 도움을 받아 호루스를 이승에서 몰래 키웠다. 이후 호루스는 삼촌인 세트를 무찌르고 왕이된다. 이시스는 오시리스가 죽어서도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신전을 지었는데, 이것이 무덤의 효시다. 이후 오시리스는 지하 세계의 왕이 되어 죽은 자들의 삶을 심판하게 되었다. 이집트인은 죽은 뒤에도 편안하게 살기 위해 오시리스를 숭배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이집트보물전, 2017년
  3. 위키백과, 2023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이집트인의 삶, 일상생활

이집트문명은 기원전 3천년 경 나일강 하구에서 시작되었다. 이집트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사막지역에 위치하고 있지만 적도 부근 빅토리아호수와 에디오피에서 우기에 내린 비가 흘러 내려오면 나일강은 범람하여 주변 토지를 비옥하게 하였다. 홍수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천문학, 수학, 토목기술 등을 발달시켰으며 상형문자는 이집트인들이 살았던 모습과 역사, 정신세계 등을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문명20220125_01<1. 늪지대 풍경, 기자(Giza), 제 5~6왕조 기원전 약 2500 ~2170년, 석회석 안료>

나일강 주변의 늪지대는 이집트인들에게 중요한 식량원이었다. 이 부조처럼 무덤 돌에 그려진 늪지대는 이집트의 비옥함을 상징하며, 사후세계에서도 풍족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여준다. 작품에는 파피루스로 만든 작은 배 안에서 다양한 종의 물고기를 잡고 있는 남성들이 묘사되었다. 왼쪽 아랫부분으 새끼를 낳고 있는 하마는 다산(多産)을 상징한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SANYO DIGITAL CAMERA<이집트 나일강, 아스완 부근, 2008년>

자연환경
이집트는 아프리카 북동쪽에 위치하며 서쪽으로 리비아, 남쪽으로 수단, 동쪽으로 이스라엘, 그리고 북쪽으로 지중해와 맞닿아 있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으로 이웃하는 아프리카, 서아시아, 남유럽의 고대 국가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고 주변 지역과 교류하며 이집트 문명은 더욱 활짝 꽃을 피웠다. 이집트 사람들은 척박한 환경 때문에 나일강을 따라 삶의 터전을 일구었다. 크게 하지집트와 상이집트로 나뉘는데, 하이집트는 북쪽의 나일강 하류 일대로 지금의 카이로가 있는 삼각주 지역이고 상이집트는 그 남쪽의 나일강 상류 주변이다. 이집트인들이 일찍이 그들의 나라를 ‘타위(Tawy, 두 개의 땅)’라 불었을 만큼 이 두 지역은 중요한 공간이었다. 나일강의 동서 양 옆으로 넓은 사막이 있다. 이 거대한 사막은 외부로부터 나라를 보호하는 장벽 역할을 했다. 수도 카이로의 연평균 강수량이 2~5 mm이고 몇년간 비가 전혀 내리지 않을 때도 있어 이집트인들에게 나일강은 귀중한 젖줄이다. 나일강의 지류는 적도 인근의 빅토리아 호수와 에티오피아의 높은 산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우기 때 이 지역에 비가 내리면 7~8월에는 항상 강이 범람하였다. 홍수는 이집트인에게 주기적으로 비옥한 토양을 선물하였고, 이는 찬란한 문명을 일구는 바탕이 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죽은이의 사후세계를 위해 껴묻거리로 묻은 많은 유물들을 통해 당시 이집트인들이 살았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여성과 남성의 장신구는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면서 초자연적인 힘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는 부적과 같은 기능도 같이 가지고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이기도 하지만 이집트에서 먼저 시작해서 주변지역에 영향을 미친 부분도 있다.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문명20220125_02<2. 동물이 그려진 꽂병, 아루라드 야햐(Aulad Yahya), 선왕조 시대, 나카다 3기 기원전 약 3300 ~ 3100년, 토기에 채색>

이 항아리에는 악어 또는 이집트몽구스로 추정되는 세마리의 동물과 뱀이 그려져 있다. 악어는 나일강에서 발견되는 가장 위험한 동물 중 하나이고 뱀 역시 사막에 사는 위험한 동물이다. 이 위험한 두 동물을 하나의 병에 그려 넣은 것은 이들을 주술로 위험을 통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사막은 언제나 위험한 장소였던 반면, 강은 커다란 위험을 품고 있는 동시에 생명을 살리는 물의 근원으로 여겨졌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문명20220125_03<3. 주걱모양 인형, 중왕국 기원전 약 2008 ~ 1630년, 나무에 채색>

한때 이런 주걱모양 인형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라고만 여겨졌다. 여성의 신체를 추상적인 형태로 단순화하였고 앞면에는 헤링본 패턴(V자형)의 드레스를 그린 것이 많았다. 하지만 뒷면에 임신한 여성들의 수호자인 하마 형상의 타웨레트(Taweret)가 그려져 있고 앞면에 삼각형 모양의 음부가 표현되어 다산과 순산을 기원하는 물건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문명20220125_04<5. 우유 용기, 사와마(Sawama), 신왕국 제18왕조 초기, 기원전 약 1539 ~ 1478년, 토기에 채색>

표면에 여성의 허리, 팔, 가슴 모양의 점토를 붙여 장식한 항아리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치료약과 처방전을 적어 놓은 <에버스 의학 파피루스>에는 “아픈 사람은 이 모유를 크림이 뜰 때까지 병에 담아 보관했다가 아픈 부위에 바르면 좋다.”고 적혀 있다. 이 우유 용기는 이와 같은 ‘마법의 액체’를 담는데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문명20220125_21
<5. 목걸이, 메칼리(Mechali), 신왕조시대 나카다 1기 기원전 약 3850 ~ 3500년, 석영 홍옥수 마노 동석 사문석>

구슬을 꿰어 만든 목걸이는 매우 오래된 무덤에서 발견된다. 이 목걸이는 232개의 구슬과 펜던트로 만들었다. 가장 큰 펜던트는 불투명한 황갈색 석영이고, 그 외에 옥수로 만든 펜던트 여섯 개와 마노로 만든 펜던트 한 개가 달려 있다. 여기에 오렌지 빛깔의 불투명한 큰 석영 고리와 동그란 모양의 갈색 동석 구슬을 덧붙였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문명20220125_05<6. 스카라브가 달린 팔찌, 아비도스(Abydos), 중왕국 제12왕조 기원전 약 1938 ~ 1875년, 자수정 장석>

이 보호 팔찌는 원형 또는 계란형의 자수정 구슬을 꿰어 만들었고, 끝으로 갈수록 점점 구슬 크기가 작아진다. 중앙에는 녹색 장석으로 만든 풍뎅이 모양의 스카라브가 달렸는데, 이것은 태양신을 상징한다. 반대쪽 끝에는 색이 연한 알 모양의 자수정이 달려 있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문명20220125_06,7. 베스와 타웨레트가 달린 목걸이, 신왕국 제18왕조 기원전 1539~1292년, 금 파이앙스 홍옥수.

이집트인들은 베스와 타웨레트의 이미지가 달린 이런 목걸이가 임신한 여성을 보호해 준다고 믿었다. 난쟁이 사자 모양의 베스는 아이들의 수호신이고 임신한 하마 모양인 타웨레트는 출산하는 여성들의 수호신이었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문명20220125_07<8. 신의 흉상이 달린 반지, 사카라(Saqqara), 프롤레마이오스 시대 후기 ~ 로마시대 기원전 100 ~ 기원후 100년, 금>

이 반지는 두꺼운 금제 봉을 두 번 반 감아서 만들었다. 양끝에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 때부터 로마 시대 초기에 오시리스의 현신으로 여겼던 소 형상의 세라피스 흉상과 오시리스 신의 부인인 이시스 신의 흉상이 표현돼 있다. 이 반지늘 끼는 자는 두 신의 보호를 받는다고 믿었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문명20220125_08<9. 귀걸이, 신왕국 제18왕조 기원전 약 1539~1292년, 금>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문명20220125_09<10. 헤어 링, 신왕국 제18~20왕조, 기원전 약 1539 ~ 1075년, 설화석고(방해석)>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문명20220125_10
<11. 카우리 모양의 금반지, 제2중간기 힉소스시대 제13~17왕조 기원전 약1630 ~ 1539년, 유약을 칠한 동석과 금>

이집트인들은 여성의 성기와 비슷하게 생긴 카우리 조개에 다산을 부르는 주술적 힘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부유한 이집트인들은 카우리 조개 모양의 부적이 달린 금반지를 자주 착용했다. 이 부적의 밑면에 표현된 꼬인 고리모양 패턴은 힉소스 시대 스카라브에서 자주 발견된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문명20220125_22
<12. 조세르 왕의 병, 사카라(Saqqara) 조세르 계단식 피라마드 복합체 ‘남쪽 무덤’ L실, 고왕국 초기 제3왕조, 기원전 약 1575 ~2635년>

사카라에 있는 조세르왕의 계단식 피라미드 안에서 출토된 수천 개의 석제 용기 중 하나이다. 이 시기의 돌 용기는 대부분 방해석의 일종인 이집트산 성화석고를 조각하여 만든 것이다. 바깥면은 끌모양의 도구와 석제 절구공이로 다듬었고 안쪽 면은 쪼아서 만들었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문명20220125_11<13. 계단형 항아리, 엘 마마리아(El Ma’amiya), 선왕조시대 나카다 1기 기원전 약 3850~3500년, 토기><14. 접시, 에드푸(Edfu), 초기왕조 시대 제1왕조 기원전 약 3100~ 2800년, 석회암>

몸통은 매끄러운 붉은색이고 입부분이 검정색인 이 항아리는 이집트에서 발견되는 가장 오래된 토기 형태 중 하나다. 나일강이 범람할 때 강둑 근처에 퇴적되는 진흙으로 만들었다. 도공들은 점토를 자갈로 문지르면 구웠을 때 붉은 색이 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테두리의 검정색 부분은 굽기 전에 검댕을 묻힌 것이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문명20220125_12<15. 큰칼, 엘아다이마에서 출토(el-Adaima), 선왕조시대 나카다 2기 후기 ~ 3기 기원전 약 3400~3200년, 처트(Chert)>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문명20220125_13<16. 재칼 손잡이 숟가락, 사카라(Saqqara), 신왕국 제18왕조 기원전 약1539 ~ 1292년 나무>

고대 이집트인들이 햇빛과 건조함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연고를 바를 때 사용하던 숟가락으로 추정된다. 이 순가락의 손잡이는 재칼모양이다. 보통 이런 물건의 동물 표현에서 재칼의 머리는 위에서 내려다 볼 떄의 형상이 반면 앞다리와 몸통, 꼬리는 옆모습이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문명20220125_32<17. 콜을 바르는 도구, 중왕궁 제12~13왕조 기원전 약 1980~1630년, 적철석 금 파이앙스>

콜(Kohl)은 남녀 모두 아이라이너로 사용했던 화장품 종류이다. 이 막대기는 콜을 찍어 바르는 도구이다. 아이라인을 칠하면 눈에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고 사람들이 선망하는 큰 눈을 연출할 수 이었다. 또 햇빛을 흡수하여 눈부심을 줄여 주었기 때문에 오늘날 이 선글라스와 같은 역할도 했다 콜은 납의 일종인 방연석을 가루로 내어 동물지방과 섞어 만들었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문명20220125_33<18. 페피2세의 병, 고왕국 제6왕조 페피2세 치하 기원전 약 2288~2224/2194년, 설화석고>

왕실에서 사용한 이 뚜껑이 있는 병은 페피2세에게 헌정된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식물 기름과 동물 지방을 사용해 피부 보습제와 클렌저를 만들었고, 머리 모양을 잡기 위해 머리에 바르기도 했다. 이집트 문자에는 다양한 종류의 기름, 연고를 일컫는 단어가 최소 일곱 개 이상 있다. 그러나 이 병에 어떤 것이 담겨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일상생활
고고학자들인 이집트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을 바탕으로 이집트인의 일상생활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먼저 출산 과정에서 주술적인 의미를 가진 조각상과 부적이 사용되었다. 탄생은 미지의 세상에서 현실 세계로 넘어 오는 위험한 순간이므로 이와 같은 상징물로써 어머니와 아이의 건강을 기원하려 했던 것이다. 남성과 여성 모두 아름다움을 위해, 그리고 작렬하는 태양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려고 화장품을 발랐다. 화장품 종류는 피부를 부드럽고 탄력있게 만드는 연고와 눈으로 시설을 집중시키고 태양 빛을 흡수하는 아이라이너 콜(Kohl)이 대표적이다. 거울은 화장을 하는 데 빠져서는 안될 필수품이었다. 장신구는 여성의 머리, 목, 팔목, 손가락 등을 장식하는 데 쓰였다. 여성과 남성 모두 장신구와 부적을 사용했다. 신체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할 뿐만 아니라 초자연적인 힘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는 기능을 갖는다고 믿었다. 청동과 돌로 만든 도구와 무기는 무덤에 부장되기도 했고 일상생활에서도 사용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문명20220125_19<이집트의 시대 구분>

역사
이집트 역사는 11개의 시기로 구분하는데 강력한 중앙정부가 존재했던 ‘왕국시대’와 왕의 힘이 약해지는 ‘중간기’가 번갈아 나타난다. 기원전 3천 년경 나르메르왕이 상.하이집트를 통일하면서 초기왕조 시대(기원전 300 ~ 2675년경)가 시작된다. 문자와 달력도 이 시기 즈음에 발명되었다. 고왕국 시대(기원전 2675~2170년)는 피라미드 시대라고 불릴 만큼 거대하고 웅장한 건축물이 세워졌다. 중왕국 시대(기원전 2008~1630년경)는 석회암이나 화강암을 이용한 석상 등 인상적인 예술 작품이 탄생한 시기이다. 이 시기가 지나면 중앙정부는 무너지면서 제2중간기가 도래한다. 신왕국시대(기원전 1539~1075년경)에는 람세스라 불린 강력한 왕들이 등장해 주변 지역을 정복하였다. 투탕카멘왕의 무덤도 이때 만들어졌다. 제3중간기가 되면서 외래 민족이 권력을 잡았고, 이후 리비아, 누비아, 페르시아가 번갈아 이집트 지역을 다스렸다.(후기왕조 시대, 기원전 664~332년).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정복과 함께 프톨레마이오스 시대가 시작되었고, 이때 이집트와 그리스 문화가 융합되었다. 기원전 30년, 클레오파트라 7세와 안토니우스가 이끈 이집트 해군이 로마의 옥타비아누승 의해 악티움 해전에서 패하면서 이집트는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세계문화관의 이집트 관련 유물들은 미국 브루클린박물관의 협조로 2022년 봄까지 전시되었다. 고대 이집트 신화, 사후사계 등 그들의 정신세계와 관련된 유물들 중심으로 간략한 이해를 돕는 충실한 전시가 되었다.

중앙박물관 세계관 이집트문명20220125_26<이집트 삶, 죽음, 부활의 이야기>

이집트, 삶, 죽음, 부활의 이야기
세계 4대 문명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집트 문명은 기원전 3천년경 나일강 하구에서 시작되었다. 나일강은 매년 범람하여 이집트 사람들에게 비옥한 토지를 선물하였고, 홍수를 극복하려는 노력에서 천문학과 수학, 달력이 생겨났다. 또 상형문자를 이용한 기록 문화가 발달하여 이집트 역사는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전한다. 고대 이집트 인들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몸이 썩지 않도록 미라로 만들었다. 탄생에서 죽음 뒤 세상까지 신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믿어 여러 신을 숭배하기도 했다. 이집트 문명 초기인 고왕국 시기(기원전 2675 ~ 2170년경)을 거쳐 신왕국시대(기원전 1539 ~1075년경)가 되면 람세스 2세를 비롯한 강력한 파라오들이 등장하여 영토를 넓히고 주변 국가와 활발히 교역하였다.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대왕(기원전 356~323년)의 정복으로 이집트 문화는 그리스 문화와 융합하였다. 세계문화관 ‘이집트실’은 국내 최초의 이집트 문화재 상설전시실이다. 이 전시실은 세계적인 이집트 문화재 소장 기관인 미국의 브루클린박물관과 공동 기획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13년부터 브루클린박물관 한국전시실을 지원해 왔으며, 이집트실 개관은 두 박물관의 오랜 협력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집트 상설전시실은 2022년 3월 1일까지 운영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사자의서 20220125_28<이집트, 삶 죽음 부활의 이야기>

세계문화관
국립중앙박물관은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선보이기 위해 기존 ‘아시아관’을 ‘세계문화관’으로 개편하였습니다. 다양한 문화를 접하면서 우리 문화를 되돌아보고, 각국의 문화를 폭넓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갖게 될 것 입니다. 세계문화관에서는 아시아 각 지역의 문화와 함께 동서양의 주요 문명을 1~2년 단위로 소개합니다. 모쪼록 관람객 여러분의 경험과 이해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2. 위키백과,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