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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공화춘, 화교의 역사를 보여주는 짜장면박물관

짜장면박물관은 인천시 중구 선린동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옛 공화춘 건물에 있는 박물관이다. 이곳은 인천 차이나타운의 대표적인 중국요리점인 공화춘(共和春)이 있던 곳이다. 박물관에는 임오군란때 청나라 군대와 함께 인천을 통해 한반도에 정착했던 화교들의 역사와 오늘날 대표적인 서민음식으로 사랑받고 있는 짜장면의 역사를 보여주는 내용으로 전시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또한 1층에는 1960년 공화춘 주방을 재현하고 있다.

공화춘건물은 중국 호텔인 주점(酒店)으로 1908년에 지어졌다. 건물은 중정을 갖춘 지상의 2층의 건물로 구운벽돌로 외장을 마감하고 있다. 공화춘은 1912년 산동성 출신 화교인 우희광이 개업하여 1883녀까지 운영되었다. 공화춘(共和春)이라는 이름은 중화민국 수립을 기념하기 위해 ‘공화국의 봄’이라는 의로 지어졌다. 공화춘은 1970년대까지 인천지역에서 유명한 중국요리점이었다. 짜장면을 이곳에서 처음 만들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고급 요리점이었던 곳이다. 2012년 옛 건물을 복원하여 짜장면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차이나타운의 역사
인천 차이나타운은 현재의 인천 중구 선린동(善隣洞)과 북성동 일대에 정착한 화교들이 그들만의 생활문화를 형성한 곳이다. 초기에는 청나라 거상들의 점포와 음식점 및 주택들이 들어서 있었고, 청나라 관청이 있는 동네라는 뜻에서 ‘청관’이라 하였다. 상거래가 활기를 띠면서 동순태, 동순동 등 거상들이 자리를 잡았고 중화루, 공화춘과 같은 유명한 중국 요릿집들이 개점하는 등 매우 번창하였다. 광복후 선린동으로 동명을 개정하여 옛날과 같은 친선교류를 유지코자 하였으나, 우리 정부가 화교의 경제권 확장을 제한하는 정책을 폄으로써 화교사회는 위축되었다. 1990년 한중수교를 계기로 이곳은 대중국 교류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는데, 역사적 의의가 깊은 관광명소로서 뿐만 아니라 중국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품격있는 차이나타운으로 탈바꿈하였다. <출처:짜장면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지금은 짜장면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옛 중국요리점인 공화춘 건물. 1908년 중국호텔인 주점(酒店)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구한말 산동성 장인들이 참여하여 지은 중국풍의 근대식 건축물이다.

공화춘 현판
공화춘 현판은 짜장면박물관 건물이 중국 음식점 공화춘으로 사용되던 시절 건물 입구 외벽에 걸려 있던 유물이다. 제작 연대가 1950년대 이전으로 추정되는 현판에는 각가 ‘共和春(공화춘)’, ‘特等料理(특등요리)’, ‘包辦會席(포판회석, 연회석완비’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원래는 일반적인 현판처럼 비스듬히 걸려 있었으나 1960년대 말 건물을 대대적으로 수리하면서 벽면에 직접 부착하였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노출되어 훼손이 심한 것을 수습하여 보존 처리하였다. <출처:짜장면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공화춘 현판.

OLYMPUS DIGITAL CAMERA짜장면 박물관 2층. 홍콩영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중국요리점 2층의 모습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공화춘 주식증서, 1914년, 1922년

OLYMPUS DIGITAL CAMERA공화춘 회계장부(1914~1949년), 공화춘 식대 계산서(1961년)

제1전시실, 짜장면의 탄생, 개항기 인천항의 풍경

한국 최초의 화교사회
외국 영토에 거주하는 중국인을 통틀어 화교(華僑)라 일컫는데, 현지에서 태어나 현지 국적을 가진 2세, 3세는 화인(華人)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한국의 화교는 1882년 임오군란 때 광동서 수사제독 오장경(吳長慶)의 군대를 따라 온 상인 40여 명이 한국에 체류하면서 교역을 한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는데, 이 해 중국과 수륙무역장정(水陸貿易章程) 체결 이후 이들의 활동도 활발해졌다. 청국은 1883년 말부터 영사업무를 시작하였는데, 이때부터 인천에 많은 중국인들이 건너오기 시작하였다. 1884년에는 엣 세관 뒤편에 집을 짓고 식료품, 잡화류 등의 수입과 해산물류의 본국 수출에 종사하였고, 외국 선박이 입항하였을 때 식료품과 식수를 공급하였다. 중국과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던 인천 지역의 화교 사회는 가장 먼저 상업 이민을 주축으로 형성되어 갔으며 점차 조선의 상권을 장악하였다. 1900년 전후 의화단사건으로 중국의 산동성 일대가 전라에 휩싸이자 중국인들이 대거 한국으로 건너오게 되었는데, 주로 인천을 거주지로 삼았기 때문에 인천은 화교들의 본거지가 되어 서울과 함께 양대 세력을 형성하였다.  <출처:짜장면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인천영사관에서 발행한 화교여권(1934년)

청국조계지
일본 전관조계에 이어 1884년 청국 전관조계가 설정되었는데, 현재의 선린동 일대 구릉지대에 위치하였으며 면적은 약 5,000평이었다. 조계의 설정 이후 화교의 이주가 비로소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조선에 대한 중국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중국 이주자들이 급증하여 애초에 설정된 조계지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1887년 한국인이 거주하는 삼리채(三里寨)에 새로운 거주지를 확장하였다. 지금의 내동에서 경동을 거쳐 싸리재로 뻗어 있던, 당시의 경인가도 양측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후 청국조계지는 급격히 위축되어 점차 잡거지가 되어갔고, 일제강점기에 조계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1914년 4월1일 지나정(支那町)이라는 이름으로 인천부 행정구역에 편입되었다. <출처:짜장면박물관>

화교와 세자루의 칼
화교들이 외국에 정착을 시작할 때면 세 자루의 칼(三把刀)이 유일한 그들의 생계 수단이었다. 음식점과 주방에서 사용하는 식칼인 육도(肉刀)와 채도(菜刀), 양복점에서 사용하는 가위인 전도(剪刀), 이발소에서 사용하는 면도칼인 체도(剃刀)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말은 화교들이 음식점, 양복점, 이발소에 주로 종사하였음을 말해준다. <출처:짜장면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화교의 이발도구 삭도(削刀), 1920년대

짜장면을 먹는 노동자, 쿨리(Coolie)
1890년대를 전후하여 인천의 부둣가는 외국과의 무역이 한창이었다. 배에서 내리고 싣는 물건을 나르기 위해 고용된 수많은 짐꾼과 인력거꾼이 필요하였는데, 대부분 산동지방 출신의 노동자인 쿨리였다. 이들은 별다른 재료없이 춘장에 수타면을 비벼, 즉석에서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고향의 메뉴인 짜장면을 먹었는데, 이들을 상대로 손수레 노점상이 하나 둘 생기면서 ‘짜장면’의 보급이 시작되었다. <출처:짜장면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짜장면의 먹는 인천항의 중국인 노동자. 짜장면이 실제로 널리 보급된 것은 춘장이 상품화되고 혼분식장려운동이 있었던 해방 이후이다.

제2전시실, 1930년대 공화춘과 짜장면

공화춘의 옛 모습
1883년 인천이 개항하면서 청국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고, 중국 음식점들이 생겨 났으며 이때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짜장면이 탄생하였다. 공화춘은 신해혁명 후 ‘공화국천년의 봄’을 맞는다는 의미로 1912년에 문을 연 중국음식점으로 짜장면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원래 공화춘은 현재 건물의 동쪽부분(동원)만을 사용하였으나, 사업이 번창함에 따라 1968년경 서쪽 건물(서원)을 매입.개보수하여 1983년 폐업때까지 사용하였다. <출처: 짜장면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문화재로 지정된 공화춘 건물 모형. 가운데 마당을 두고 있는 2층 건물로 벽돌로 지었다. 대표적인 중국풍 근대건축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1968년경 공화춘 2층 접객실의 옛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상당히 고급스러운 중국요리점이다.

젓가락 이야기,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에서 젓가락은 필수적인 식사도구이다. 중국에서는 은나라때부터 사용하였고 하며, 재료는 참대나무로부터 뼈, 옥, 은 등 다양하였다. 중국 북방에서는 나무로 만든 젓가락을 많이 쓰고, 남방에서는 참대젓가락을 많이 사용한다. 나무젓가락은 보기가 좋으면서 값이 싸고, 쉽게 부러지지 않는 장점이 있다. 이밖에 상류층과 고급 음식점에서는 상아젓가락을 사용하기도 한다. 예전의 중국 통치자들은 금, 은 젓가락도 사용하였고, 특히 황제들은 독살을 염려해 은 젓가락을 많이 사용하였다. 젓가락의 모양과 크기, 색깔도 용도에 따라 다양한데, 음식을 굽거나 삶을 때는 긴 젓가락을 사용하고,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해 여러가지 색깔의 젓가락을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남자용과 여자용을 구별하기 위해 크기를 달리하고, 날것과 익힌 것을 따로 집는 젓가락도 등장하였다. 그리고 결혼식 등 좋은 날에는 붉은색 젓가락을 사용한다.

  • 우리나라는 금속재질이며 중국과 일본의 중간크기이다. 김치와 채소 같은 음식을 집기 편하도록 납작하게 생겼다.
  • 중국의 재질은 나무이며, 큰상의 중앙에 놓인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긴형태이다. 또한 기름진음식을 집기 편하게 가장자리가 뭉뚝하게 생겼다.
  • 일본의 재질은 주로 나무이며 작은 독상에 놓인 음식을 집기 용이한 짧은 형태이다. 국수와 해산물을 집기 편한 끝이 뽀족하게 생겼다. <출처:짜장면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공화춘 젓가락, 1960년대

화교의 고향
인천 화교들은 산동성 출신이 대부분이다. 그들이 한국에 정착하게 된 이유는 무역과 노동을 위한 경제적 이유, 자국 내의 정치적 혼란 등을 피해 안전한 곳에 정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중국과 가장 가깝다는 지리적 여건이 가장 크게 작용하였다. 산동성 출신 화교 가운데는 영성현(榮成縣), 모평현(牟平縣), 문등현(文登縣) 출신이 주류를 이루고, 특히 영성현과 문등현 출신들은 동향회를 결성하여 친목을 다지고 있기도 하다. 산동성 영성현, 모평현, 문등현 등은 위해시(威海市)와 연태시(烟台市) 소속으로 산동성 가운데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교동지구에 위치한 지역이다. <출처:짜장면박물관>

제3전시실, 짜장면의 전성기 1970년대

외식문화 대표주자 짜장면
짜장면이 외식문화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사랑받기 시작한 계기는 ‘사자표 춘장’의 등장과 전후 미국의 밀가루 원조이다. 1948년 ‘영화장유’라는 식품회사를 차린 산동출신 화교 왕송산은 달콤한 맛을 선호하는 한국인을 위해 중국 춘장에 설탕을 가열하여 만든 끈끈한 갈색의 물질인 캐러멜을 혼합하였다. 여기에 6.25전쟁 후 가장 많이 지원된 것이 밀이었는데, 때마침 쏟아져 나온 값싼 밀가루와 이 소스의 만남으로 ‘짜장면’은 더욱 대중화되었다. <출처:짜장면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선린반점’이라는 이름으로 70년대 전형적인 중국집을 재현해 놓고 있다. 중국요리점인 ‘공화춘’과는 달리 일반인들이 많이 찾던 소박한 음식점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짜장면을 먹는 가족들. 입학식과 졸업식 등 중요한 행사때 가족이 찾았던 중국음식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가족처럼 당시 대부분의 아이들은 중국집에는 짜장면만 있는 줄 알고 살았다.

짜장면 가격
짜장면이 서민들의 대표적인 외식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물가 변동에 따라 가격이 변하게 된다. 1960년대 초 쌀값이 3,010원(80kg한가마니) 할때 15원하던 짜장면 값은 1970년대 중반 140원, 1980년대 350원이었다가 1990년대에서 2000년대를 거치면서 급등하게 된다. 1990년대 초기 1,300원이었던 짜장면 가격은 2000년대 경제위기를 전후해 짜장면은 3,000원(쌀한가마니 20만원)까지 치솟게 된다. 현재 짜장면 한그릇은 4,000~4,500원으로 50년동안 450배가 올랐다. 이제 짜장면 한 그릇의 가격 변화가 서민들의 외식 문화에 영향을 끼칠 만큼 대중적인 음식으로 여겨지고 있다. <출처:짜장면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인천 중화요업조합 협정가격표(1964년경), 공화춘 음식 요금표(1970년대). 짜장면은 대표적인 서민음식으로 60년대 이후 물가관리차원에서 가격인상에 심한 통제를 받았다. 지금과는 달리 협정가격표를 지켜야만 했다.

OLYMPUS DIGITAL CAMERA수성고랑주와 진로 고랑주, 고랑주잔, 청테물컵과 재떨이, 양념통. 70~80년대 중국집에서 볼 수 있었던 전형적인 식기들이다.

철가방
광복 후 짜장면, 짬뽕으로 대변되는 중국음식은 신속배달이라는 구호 아래 급속히 대중화되었는데, 이에 따라 음식 배달을 위한 ‘철가방’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나무로 된 가방을 만들었지만 너무 무거운데다가 넘친 음식물들이 나무에 스며들어 생기는 위생문제 때문에 오래 사용되지 못하였다. 그 뒤 플라스틱 철가방도 만들었으나 금형 비용이 비싸 일반화되지 못하다가, 알루미늄판과 함석판 같은 싼 재료가 등장함에 따라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출처:짜장면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초기에 사용된 나무로 만든 배달 가방.

명품 디자인 철가방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디자인문화재단은 지난 반세기 한국인의 일상을 대표할 수 있는 생활속 디자인 가운데 하나로 중국음식점의 ‘철가방’을 선정했다. 모나미 153볼펜, 신라면, 칠성사이다, 포니자동차, 시발택시 등과 함께 큰 영예를 누리게 된 것이다. ‘철가방’이 명품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알루미늄의 색상이 밝고 깨끗한데다가 단순하지만 구조적인 기능이 뛰어난 데 있다. 더불어 쉽게 열리지 않는 뚜껑, 음식물을 쉽게 닦아낼 수 있는 편의성, 약간 찌그러져도 원상 복구가 쉬운 친근한 가변성도 돋보인다. 이같은 장점들로 ‘철가방’은 후세에 물려줄 우리 시대의 생활문화유산이 된것이다. 비록 개발자나 디자이너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음식배달용 도구인 ‘철가방’의 명성은 내내 빛을 잃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출처:짜장면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지금은 중국집뿐 아니라 대부분 음식점에서 배달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철가방.

OLYMPUS DIGITAL CAMERA철가방을 배달하던 자전거

OLYMPUS DIGITAL CAMERA지금은 오토바이를 이용하고 있다.

자장면? 짜장면!
‘자장면’이 맞나? ‘짜장면’이 맞나? 누구나 한번쯤 궁금하게 여겨봤던 철자이다. 국어사전은 이를 ‘자장면(炸醬麵)’으로 표기해 왔는데, 중국식 발음은 ‘짜지앙미옌(zhajiangmian)’이다. ‘짜지앙미옌’은 ‘짜장미옌’에서 ‘짜장면’으로 발음하기 좋게 자연스레 변천했을 터이나, 언어 순화 차원에서 된소리 사용을 자제한다며 현실음과 다른 ‘자장면’을 표준말로 정했다. 그러나 대중들은 ‘짜장면’을 즐겨 써 왔고, 그 발음이 중국 현지의 발음과 비슷할 뿐만 아니라, 맛이 다소 ‘짜다’는 이미지까지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최근 국립국어연구원이 표기법상 ‘자장면’도 맞고, ‘짜장면’도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대중은 그와는 상관없이 이미 수 십년 전부터 ‘짜장면’이란 낱말을 통해 ‘짜장면’의 맛과 추억을 간직해 왔던 것이다. <출처:짜장면박물관>

블랙데이,
매월14일은 대한민국 신세대들이 만들어 낸 비공식적 기념일로 알려져 있다. 2월14일은 “발렌타인데이”, 3월14일은 “화이트데이”라며 의미를 부여해 즐긴다. 다음달인 4월14일은 “블랙데이”라고 한다. 아직 연인을 구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검은색 계통의 옷을 입거나 짜장면, 블랙커피 같은 검은색 계통의 음식을 먹고, 마시며 이날을 즐긴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다양한 종류의 짜장면.

짜장면의 종류와 조리법, 한국의 짜장면 맛이 달다면 중국의 짜장면은 짠맛이 강하고, 한국의 짜장면은 춘장을 볶다 물을 넣어 짠맛을 연하게 풀어주며, 양파와 양배추 등 야채를 듬뿍 넣어 전체적으로 단맛이 나게끔 만든다. <출처:짜장면박물관>

추억의 짜장면 그릇
짜장면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살이 두툼하게 붙은 수더분한 사기그릇에 담아야 제 맛이 난사. 그 모양새와 어울리게 듬뿍 담아낸 국수와 짜장에서 만든 이의 넉넉한 마음씨를 읽기도 한다. 양파와 단무지, 또는 춘장을 내놓는 종지도 요란하지 않아 좋다. 식초와 간장병도 잊지 못할 추억의 식기이다.생김새나 장식은 다양하지만, 다른 그릇들과 우아한 하모니를 이루며 신맛과 짠맛을 자아낸다. <출처:짜장면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중흥루 면기, 청화 새우그림 면기, 꽃그림 면기, 요리용 대접(1950년대), 중화반점, 민생원, 신생반접 접시(1960~1970년대)

혼.분식 장려운동
혼.분식 운동은 국민 식생활 개선을 위한 게몽운동으로 주곡인 쌀을 자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원조 곡물이 쌓여가자 정부에서 내려진 조치이다. 보리, 콩, 조 등 잡곡을 섞은 밥이 혼식이고 밀가루 음식이 분식이다. 1964년부터 1977년까지 10여년 동안 진행된 혼분식 장려 운동은 대대로 이어온 쌀 중심의 식습관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1965년 13.8kg에 불과하던 1인당 연간 밀소비량이 불과 4년 뒤인 1969년엔느 28.7kg으로 2배이상 증가했다는 통계도 있다. 혼.분식 장려 정책이 완화된 후에도 보리의 소비량이 급감한 것과는 달리 밀의 소비는 그대로 유지되어 쌀 다음으로 중요한 곡물이 되었다. 밀을 활용한 제과업, 제빵업, 제면업이 빠르게 성장하였다. <출처:짜장면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혼분식장려운동 포스터.

대한제분 곰표 밀가루의 역사
1950년대 한국 전쟁은 인명.재산 등 한반도 내 모든 것을 앗아갔다. 당시 살아남은 사람들은 혹독한 추위와 전쟁에 대한 공포 등 전쟁 후유증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특히 배고픔은 가장 참기 힘든 고난으로 국가 차원에서 큰 고민거리였다. 이때 식량난 해결이라는 역사적 의무를 띠고 대한제분이 창립된다. 대한제분은 국내 최대의 제분 시설과 생산량을 통해 국내 식량난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주며, 1960년대 말부터 국내 경제성장의 한 축을 담당한다. 특히 혼.분식 장려운동기 시절 국내 밀가루의 쓰임이 커지자 많은 양의 밀가루를 분식업계에 제공하면서 밀가루 하면 ‘곰표밀가루’라는 용어가 탄생될 만큼 절대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고, 최근까지 국내 밀가루 음식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출처:짜장면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한국전쟁 이후 미국에서 밀가루를 원조해었으며, 밀가루를 가공하는 제분공장들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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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지역을 대표하는 대한제분의 밀가루 제품들.

OLYMPUS DIGITAL CAMERA부산에서 만들어진 금성제분과 제일제당 밀가루

OLYMPUS DIGITAL CAMERA밀가루를 이용하여 라면을 비롯하여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다양한 봉지면이 만들어졌다. 농심 ‘짜파게피’를 비롯하여 짜장면도 봉지면으로  만들어졌다.

OLYMPUS DIGITAL CAMERA레토르트 및 인스턴트 식품

공화춘 주방

공화춘 주방은 1층에 자리잡고 있다. 주방은 1960년대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주방은 면을 만드는 수타주방, 양파, 고기 등 다양한 재료를 손질하는 칼판주방, 화덕에 춘장과 볶는 모습을 등을 볼 수 있다.

수타주방
수타면은 모든 면 음식의 기본이다. 전국 어느 중국 음식점을 가도 면음식을 주문하면 “쿵 쿵” 소리부터 냈다. 우리나라 수타면의 역사는 중국 산동성 출신 화교들이 짜장면을 만들어 먹었던 19세기말부터였다. 밀대로 민다음 칼로 썰어 면을 뽑던 한국식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그 후 한국인들이 이 기술을 배우고, 중국 음식점을 개업함에 따라 전국으로 확산됐다. <출처:짜장면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수타주방에서 수타면을 뽑는 장면을 재현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칼판주방은 양파, 고기 등 다양한 재료를 손질하는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주방용 뜰채와 깔때기, 1960년대

 

OLYMPUS DIGITAL CAMERA화덕주방, 음식을 프라이팬으로 볶고 있다.

프라이팬 다루는 방법
중국 프라이팬은 밑이 둥글고 아주 두꺼워서 불이 골고루 닿아 열을 고르게 받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팬을 흔들면서 재료를 높이 띄웠다가 받았다가 하는데, 이게 바로 식혔다가 익혔다가함녀서 겉과 속을 골고루 익히는 기술이다. 센불로 요리해도 타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출처:짜장면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짜장면 조리법

OLYMPUS DIGITAL CAMERA짬뽕 조리법

OLYMPUS DIGITAL CAMERA공화춘 수습 접시편, 1960년대

OLYMPUS DIGITAL CAMERA“공화춘(共和春)” 상호가 새겨진 접시편, 공화춘 수습 면기, 1960년대

OLYMPUS DIGITAL CAMERA음식운반대. 중국음심점을 대표하는 이미지인 철가방이 음식운반대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조왕신(灶王神),
조왕신은 부뚜막 신이고, 한 가정에서 일어난 일년 동안의 일을 옥황상제에게 보고하는 직책을 가지고 있다. 중국에서는 섣달 23일 저녁에 조왕신 그림 앞에 고기, 엿, 떡 등의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낸 후 조왕신 그림을 불에 태우는데, 이것은 조왕신을 하늘나라로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설에는 다시 조왕신 그림을 부엌 벽면에 붙이는데 이것은 조왕신을 다시 맞이 한다는 뜻이다. 제물 가운데 엿과 떡은 조왕신의 입을 붙게 하여 옥황상제를 찾은 조왕신이 제대로 입을 열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술을 아궁이 주변에 바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조왕신이 술에 취해 제대로 옥황상제를 찾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결국 집안의 나쁜 일을 옥황상제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기 위한 조치이다. <출처:짜장면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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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왕신을 그린 그림. 중국에서는 부뚜막을 지키는 신으로 여겨진다.

[인천시립박물관 특별전] 오래된 이웃 화교

인천시립박물관에서는 1914년 겨울 “오래된 이웃, 화교”란 제목으로 특별전시회를 열었다. 이번 전시는 한국에 정착한 화교의 역사와 오늘날 한국 화교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내용들이다. 역사 이래로 중국 본토에서 국경을 넘어 한반도에 정착한 사람들은 많지만 이들을 화교라 부르지 않는다. 한국 화교는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청나라 오장경 부대를 따로 상인들에서 출발하며, 오장경은 한국 화교의 시조로 여겨진다. 이후 청나라와의 조약을 통해 화교상인들의 유입은 늘어났으며 산동성 출신들이 주로 이주하였다. 화교들은 인천을 거점으로 무역업 등에 종사하면서 전국 각지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해방이후 각종 규제조치로 화교들이 쇠락하기도 했으나, 1990년대 중국과의 수교 이후 화교의 사회적 지위나 삶의 환경은 크게 개선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교(華僑)란 본국을 떠나 해외각처로 이주하여 현지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중국인 또는 그 자손을 말하며, 1921년에 제정된 중화민국헌법에 따라 정의되 조례에는 ‘僑居國外國民’라 정의되어 있다. 화교가 언제 처음 생겨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말에서 남송대까지 북방민족의 침입을 피히 동남아시아로 이주해간 한족(漢族)들을 그 중심으로 보고 있다. 당시 한반도에도 많은 이주민이 있었지만 대부분 현지화되어 한국내 많은 성씨들이 이때 이주한 인물을 조상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들을 화교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명나라와 청나라때는 서구의 식민지개척에 편승하여 많은 화교들이 이주하였으며, 일부는 화교왕국을 세우기도 하였다. 19세기 노예제 폐지와 자본주의 발달에 따른 노동력부족 등으로 많은 중국 하층민들이 해외로 이주하여 하였다. 이때 미국을 비롯하여 식민지 각국으로 이주한 중국노동자를 비하해서 쿠리(coolie)라 불렀다.

과거 입학식과 졸업식 같은 특별한 날이면 먹던 ‘짜장면’. 이 음식은 이제 남쪽 끝 마라도에서도 볼 수 있는 한국인이 가장 즐겨먹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이 ‘짜장면’으로 기억되는 사람들을 우리는 ‘화교(華僑)’라 부릅니다. 이들이 우리사회에 들어온지도 130여 년이 지났지만, 사실 화교란 단어가 대주에게 익숙해진 것은 오래되지는 않았습니다. 이전에는 단지 중국인이라 칭해고, 그보다는 ‘되놈’, ‘짱꼴라’로 더 많이 불렀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낯선 이방인이었고, 어울리기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화교에게 관심 갖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골목에서 무언가 다른 말을 하는 무리와 마주치면 서로를 피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벽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어디서부터 기인하는 걸까요? 왜 자기 나라인 중국이 아니라 한국 땅에서 살고 있을까요? 그리고 그들은 이땅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중국인’이라는 다수에 속해 있으면서 한국사회 속 소수자인 화교, 이들 화교에 관한 이야기가 이제 시작됩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인천시립박물관 특별전, 오래된 이웃 화교

중화가(中華街): 공간_차이나타운
인천역에 내려 첫 번째 패루 중화가를 지나면 차이나타운이 시작됩니다. 이곳에 중국인들이 모여 살게 된 것은 1882년 임오군란에서 비롯됩니다. 광동의 상인들은 한국에 파견된 청나라 오장경의 부대를 따라왔고, 곧이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면서 화교상인들의 유입은 늘어만 갔습니다. 결국 1884년 ‘인천지구화상지계장정’에 따라 ‘청관조계(淸館租界)가 형성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청관의 명칭은 ‘지나정(支那町)’ 그리고 다시 ‘미생정(彌生町)’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동안 인천은 화교 진출의 거점으로 이용되었고, 화교는 전국으로 퍼져나가 우리 사이 곳곳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해방을 맞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이곳의 명칭은 현재의 선린동(善隣洞)으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여러 제약 속에서 화교들이 빠져나가면서 90년대까지 이 지역은 점차 쇠락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최근 인천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다시 부흥하고 있습니다. 주말이면 서울과 경기 등지에서 방문한 사람들로 거리는 북적거리고, 인천공항과 인천항을 통하여 많은 중국인들이 방문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첫번째 전시주제는 우리나라 화교의 역사를 인천지역 화교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임오군란과 화교의 영입

OLYMPUS DIGITAL CAMERA임오계림사변과 오무장 사당. 임오군란을 계기로 화교가 인천을 통해 건너왔다고 하며, 당시 군대를 이끌고 참전한 오장경을 화교의 시조로 여긴다.

임오계림사변(壬午鷄林事變), 1932년, 미야타 가이코츠(官武外骨)가 정리한 임오군란 관련 신문잡지기사를 임오군란 발생 50년을 기념하여 출간한 것이다.  오무장공사(吳武壯公祠), 현대, 1885년 고종은 임오군란을 평정한 오장경(吳長慶)의 공을 기려 부대가 주둔했던 옛 동대문운동장 인근에 그의 사당을 세웠다. 1969년 명동에 있던 한성화교중학교가 연희동으로 이전되면서 이 사당도 함께 옮겨졌다. 한국 화교들은 오장경을 근대 화교의 시조로 여겨 매년 5월23일 제사를 지낸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임오군란 석판화, 1882년,

일본에서 보도용으로 제작된 다색판화. 1882년 구식군대의 반발로 시작된 임오군란은 일본세력 배척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일본 공사를 비롯한 일본인들은 인천을 통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차이나타운의 형성,

OLYMPUS DIGITAL CAMERA청일전쟁 석판화, 1885년,

청일전쟁은 1894~1895년 조선의 지배를 둘러싸고 중국(청)과 일본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이전까지 조선에 대해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던 청나라는 전쟁에서 패하면서 그 위세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화교의 숫자도 급감하게 되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차이나타운의 형성

OLYMPUS DIGITAL CAMERA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 대한국대청국통상조약(大韓國大淸國通商條約, 복제). 구한말 개항장 인천을 통해 화교들이 들어오던 시기의 조약들이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1882년, 1882년 8월23일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체결 된 통상조약으로 「고종실록」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이 조약으로 청 상인들의 내륙까지 들어오게 되어 조선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 1884년, 1884년 체결된 청국 상인들의 거주지역에 관한 조약. 이를 통해 오늘의 선린동 일대 구릉지대의 약 5천 평에 청국 조계가 설정되었다. 대한국대청국통상조약(大韓國大淸國通商條約, 복제), 1899년, 한중 양국의 우호.왕래.통상에 관한 조약으로 거류민의 보호와 무역허용범위, 주택.토지 임차와 관련된 내용 등이 규정되어 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제물포항 각국조계도, 1880년대,

1880년대 후반에 제작된 제물포 각국조계의 계획도이다. 중앙의 일본조계를 중심으로 청국조계와 각국조계의 모습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제물포항 각국조계도(복제), 1893년,

지금의 북성동 일대 각국조계를 확장하기 위한 계획도이다. 확장하고 했던 땅은 3,565㎡로 혜관과 관련된 시설을 설치하기 위해 마련한 땅으로 보인다. 청국조계와 경계가 표시되어 있으며, 필지 별로 등급이 설정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인천부지도(仁川府地圖), 1918년,

지금의 북성동 일대가 지나정(支那町)으로 표시되어 있다. 한일병합 이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새로운 정명(町名)을 만들었는데, 청관.청국 거류지로 불리던 곳을 지나정으로 개칭하였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인천시가안내약도, 1930년대 후반,

인천시가의 주요도로, 철로, 인천항 등을 간략하게 표시한 약도로, 지금의 북성동 일대를 미생정(彌生町)으로 표기하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지나정에서 미생정으로 바뀐 결과이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화교의 증가

OLYMPUS DIGITAL CAMERA화교의 인구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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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인 집단분포도, 대한제국기,

조선전도에 중국인 집단 분포도를 인원수만큼 지역별로 표시한 지도이다. 지역의 이름과 인구 표시 기호는 빨간색으로 표기하였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대련-조선-북해도 정기선 안내, 청도-인천-상해 관광안내 소책자

대련(大連), 조선, 북해도 정기선, 일제강점기, 대련~북해도 사이의 정기노선에 관한 안내서로 인천과 부산을 거점으로 이용하고 있다. 정기선의 발착지와 노선도 등의 내용이 들어있다. 청도-인천-상해 관광안내 소책자, 일제강점기, 관광안내용 팸플릿으로 인천-청도, 인천-상해 간 해상노선이 개설된 경위와 관광코스 등을 설명하고 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우선항로도 사진엽서, 화교영취소맥분상세표.

조선우선(郵船)항로도 사진엽서,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한반도로 오는 가장 대표적인 루트는 대련 혹은 산동반도에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화교영취소맥분상세표, 1942년, 인천화상상회(仁川華商商會)에서 중화민국 주인천영사분관에 발신한 자료. 밀가루 배급을 위탁받은 화상상회에서 교민들에게 배급한 내용을 보고하는 문서이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청관거리 사진 (1920~30년대)

인화문(仁華門): 사람_인천 화교 사람들
인천에 자리잡은 화교들은 주로 중국에서 수입한 식료품과 잡화를 팔았고, 한국 전역에 퍼져 있는 화상들과 긴밀한 관계를 통해 사업을 번창시켜 나갔습니다. 1898년 의화단 운동으로 산동성 일대가 전란에 휘말리자, 이 일대 중국인들이 가까운 한국으로 피난을 와 화교인구가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화교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한국인들과의 충돌도 많아졌습니다. 사용하는 언어와 문화적 배경이 달랐고, 일제의 이간책으로 여러 소요들이 발생했습니다. 결국 1931년 중국 길림성에서 한국인과 중국인이 충돌한 만보산 사건이 전해지면서 인천.서울.평양 등에서 화교에 대한 습격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교들은 잡화점, 비단가게, 양장점, 이발소, 요식업 등을 중심으로 점차 그 활동 범위를 확대해 나갔습니다. 이어지던 화교 사회의 호황은 해방을 전후로 막을 내립니다. 1948년 한국정부는 외국인 입국을 불허하면서 화교의 유입은 종식되었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수립으로 중국과의 교역은 중단되었습니다. 이어 창고봉쇄령과 외화사용 규제로 화교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습니아. 1961년 내려진 외국인토지소유금지법과 1970년의 외국인토지취득관리법으로 화농은 밭을 잃었고, 화상들은 점포의 크기를 줄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1998년 이후부터는 외국인의 부동산 관련 규제 완화, 영주권과 지방선거권 인정 등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인천 차이나타운 활성화 계획과 중국경제의 성장으로 화교사회가 재도약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130여 년의 화교 역사는 한국 근대사와 함께 하면서도 다른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그들이 걸어온 세월을 실제 화교 인터뷰를 바탕으로 재구성해 보고자 합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두번째 전시는 인천에 정착해 살았던 화교들이 살아왔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왕oo 이야기
내 아버지는 산동출신 상인어었어, 의화단운동의 혼란을 피해 가족들과 함께 동북지방으로, 다시 토비와 마적을 피해 신의주로 이주해 왔지.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어. 신의주는 화상.화공.화농학교가 있었는데, 가업에 따라 화상학교에 진학하여 상인으로써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네. 내 나이 스무 해가 되던 땐가, 당시 화교상인들이 활발히 활동하던 인천으로 옮겨왔고, 중국 본토와의 무역뿐만 아니라, 중화요리점에 채마밭에 사업들을 점차 키워나갔지. 그 때, 나 말고도 많은 화교들이 잡화점.양복점.이발소 등을 열었고, ‘쿨리’라 불리는 노동자들도 늘어만 갔어. 그러자 당시 일제하의 조선인들은 일자리를 뺏어간다고 걱정이 많아지더군. 결국 만보산 사건이 터졌고, 화교들에 대한 습격 때문에 나는 군산으로 잠시 피신하기도 했지. 이때부터 화교단체의 조직돠 활동에도 힘쓰기 시작했다네. 그렇게 해방을 맞고,곧이어 6.25가 시작된 거야. 젊은 화교들 중엔 한국군에 참여해 첩보요원으로 활동하는 녀석도 있었어. 내 조카도 그 중 하나였지. 중공군으로 위장하여 함흥에 갔던 녀석은 그 후로 소식을 알 길이 없네. 체포되어 고문을 받아 죽었다나… 전쟁이 끝나고, 전국 각지에는 화교들이 차린 음식점들이 생겨났네. 나 역시 요리점을 하던 차에 중화요식업조합에 참여했고, 여기서는 각지역의 화교업무를 처리하기도 했지. 이것들은 지역의 화교협회로 바뀌었고, 그 중에서 난 인천화교협회의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옛 중화루 사진. 중화는 공화춘과 함께 인천을 대표하는 중국요리집이었다. 원래는 최초의 서구식 호탤에 대불호텔이었던 것을 1918년 청나라 상인들이 인수하여 운영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중화루(中華樓) 간판, 일제강점기,

1918년 뢰소정(라이샤오징)을 비롯한 청나라 상인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로 알려진 대불호텔을 인수하여 중국요리 전문점 ‘중화루(中華樓)’를 개업하였다. 이후 급증한 산동출신 화교 상인과 노동자로 인하여 공화춘과 함께 인천을 대표하는 중국요리집으로 성장하였다. 아들과 손자를 거쳐 영업을 지속하다가 1970년대 초에 폐업하였고, 1978년 건물마저 철거되었다. 위쪽의 간판은 건물 박공 부분에 있던 것으로 보이며, 아래쪽의 간판은 1층 입구 우측에 걸려 있던 것이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화교 상인으로 성장하다.

OLYMPUS DIGITAL CAMERA인천화교협회를 비롯한 상업에 종사했던 화교단체 관련 문서들이다.

인천중화상회 외교문서, 1931년, 인천화교협회의 전신으로 중국 국민당의 지도를 받던 인천중화상회의 외교문서이다. 조선화상무역조합, 1945년, 조선화상무역조합(인천부 미생정 8번지)의 업무관련 서류집으로 1942~1945년의 내용이 담겨있다. 인천화상해산(海産)조합장정, 1937년, 해삼물 수출무역에 종사하던 화상들이 모여 만든 인천화상해산조합의 규정집이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화교 기업 관련 각종 자료

인천화상 동순동고빈유한공사 주식장부첩, 1935년, 동순동고빈유한공사에서 주주 한봉명에게 발급한 주식장부첩이다. 화상 동순동 주식회사 증권, 1934~1935년, 인천의 화상 동순동이 만든 고빈유한공사에서 주주에게 발급한 증권이다.

OLYMPUS DIGITAL CAMERA1942년 화교 세대별 직업분포와 관련기사

화교 삼도(三刀). 음식점에서 사용하는 고기칼과 채소칼, 양복점에서 쓰는 재단가위, 이발소 면도칼인 체도를 말한다. 화교들은 이 세가지 칼을 바탕으로 중화요리점, 양복점(세탁소), 이발소를 운영하며 현지에 자리잡았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이발도구 세트, 재단가위, 육도, 월병틀, 차이나타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중국 과자 월병을 만드는 틀, 추석날 밤 월병을 빚어 달에 바친 다음, 친척과 친지들에게 선물하는 풍습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배추(결구백채)의 도입을 장려하는 전단지.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배추는 이때 도입된 종자라고 한다.

결구백채 재배법 전단지, 1940년대, 우리주변에서 쉽게 먹을 수 있는 채소인 배추는 원산지가 중국으로 결구백채(結球白菜)라 한다. 화교들은 고향에서 이 백채를 가져왔고, 조선총독부의 장려정책으로 지금은 김치를 만드는 가장 대표적인 재료가 되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인천지역 화교 명부 자료

인천화교 세대별 명부, 1942년, 화상들의 영업점을 중심으로 구성원의 인적사항을 기재함과 동시에 세대별 사항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 화교구성원 전반을 파악하려는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여한화상전화번호부, 1972년, 전국화교의 전화번호부이다. 각종 긴급신고 및 주요전화를 시작으로 한성특별시의 사관교단, 잡화상, 한의원, 기타, 부도색인, 주택이 각 도(道)로 나누어져 정보가 기입되어 있다. 이들 정보는 모두 상호, 대표, 전화, 주소로 나누어진 표에 쓰여 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칠성문 밖에 있는 중국인의 채마밭에 감자며 배추를 도적질하러 밤에 바구니를 가지고 간다. … 소작인인 중국인 왕서방이었다. ” – 김동인의 “감자” 중 -

‘짱꼴라’는 원래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중국놈이라는 뜻으로 ‘청국노(淸國奴, 잔코로)라 부르던 것에서 변한 것이다.

‘짱깨’는 중국 상인이나 점포 주인을 ‘장꿰이(掌櫃)’라고 부르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번다. 신작로 닦아 놓으니 왕서방이 먼저 지나간다.

OLYMPUS DIGITAL CAMERA일제강점기 화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잘 보여주는 김동인의 소설 『감자』.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왕서방은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배금주의자이자 호색한으로 묘사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화교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묘사한 대중가요와 오정희의 소설 “중국인 거리”. 배금주의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짱개’라는 말의 어원이 되는 돈상자.

장궤(掌櫃), 일제강점기, 화교들이 사용하던 돈괴. 중국인을 비하하는 뜻으로 쓰는 ‘짱깨’라는 말은 이 물건의 중국발음 ‘장꾸이’에서 온 것으로 이 돈괴를 맡은 사람, 즉 상점의 지배인을 뜻하는 말에서 파생되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경계의 사람들

OLYMPUS DIGITAL CAMERA한국전쟁 당시 많은 화교들이 참전했으나 화교라는 신분상 제약으로 이를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참전용사증서, 1999년. 화교신분을 유지하던 김성정씨의 경우 한국으로의 귀화를 선택하고서야 참전용사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참전화교들은 공식 기록이 없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참전위령비 하나 받지 못했다. 포장 수여식 사진과 포장증, 1973년, 한국전쟁에 참여한 몇몇 화교들은 그 공로가 인정되어 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화교신분인 관계로 유공자로 인정받지는 못하였다. 일부 전쟁에서 부상당한 화교의 경우 치료비를 자비로 해결해야만 했다. SC지대 참전략사,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한국전쟁 당시 사진

SC지대 대원사진, 국내 화교 참전부대인 4863부대 SC지대 김성정씨와 사촌동생 김정의씨의 사진이다. 이 중 김정의씨는 전쟁당시 공작활동을 위해 낙하산을 타고 적 후방에 침투한 뒤 실종되어 돌아오지 못했다. 남한 포로 송환을 환영하는 화교들, 인천 화교 각 단체에서 남한 포로 송환을 환영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슬라이드 필름이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혼인증서와 인천화교협회 공문

OLYMPUS DIGITAL CAMERA화교등기증, 중화민국 영사관에서 발급한 화교여권

진oo 이야기
내 어릴쩍 이야기부터 해불꼐. 내 어머니는 한국인, 아버지는 화교였지 집안 생활은 여느 한국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어. 다만 집 안에는 관우사당이 있었고, 8살이 되던 해에 화교학교로 진학했을 뿐이야. 이때 내 기억은 아름답지만은 않아. 아버지는 중국말을 하는데, 어머니는 한국말을 해. TV드라마는 한국말을 하는데, 학교에서는 대만교과서를 배운단 말이야. 또 학교를 다녀올 때면 우리 교복을 보고는 다른 한국 애들이 맨날 놀리는 거야. 결국 부모님은 남고 나만 대만으로 갔어. 근데 거기선 또 나를 외성인(外城人)이라 그래. 대만 사람이 아니라는 거지. 그래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지. 그런데 그 와중에 집안 사정은 점차 나빠졌더라고. 한국 정부는 한국경제를 농단한다며 화교 수십명을 감옥에 집어넣질 않나, 화물과 재산을 몰수하질 않나… 그나마 여윳돈이 있던 사람들은 중국집을 차렸지만, 난 뭐.., 가진 것도 없고 화교학교는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지, 취직은 안되지, 결국 중국집 배달을 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온거야. <출처:인천시립박물관>

화교학교에 진학하다.

OLYMPUS DIGITAL CAMERA화교학교 교과서와 공책, 졸업장 등. 한성화교중학교는 지금 연희동에 자리잡고 있으며, 연희동.연남동 일대에 화교들이 많이 거주한다.

화교학교 교과서, 1990년대, 한국 화교 학생들을 위한 대만교과서로 1990년대에 이용되었다.한성화교학교 공책, 광복이후, 한성화교중학교에서 사용하던 공책으로 대해(해서의 큰 글자)와 작문을 연습하기 위한 것이다. 국어 과본, 1960년, 대만교육청에서 발한한 것으로 인천화교중산중학교의 교과서로 추정된다. 대만에서 교과서를 받아와야 했기때문에 그 수가 맞지 않아 제본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화교학교 졸업장, 인천화교소학교와 인천화교중산중학교이 졸업증이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화교학교 모자, 학생수첩(1978년), 주판

OLYMPUS DIGITAL CAMERA관우사당(재현), 화교들은 가정에 관우를모시는 사당을 두었다고 한다.

관우는 유비, 장비와 함께 촉나라를 세운 실존 인물이다. 송대 이후 무신(武神)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여러 형태로 변형되어 상업을 수호하는 재물신 불교의 호법신, 마귀를 물리치고 병을 치료하는 의신(擬神) 등으로 받들어진다. 많은 화교들이 재물과 벽사를 관장하는 관우를 가신(家神)으로 모신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결국 중국집

OLYMPUS DIGITAL CAMERA화교의 주요 규제. 해방 이후 어려운 경제사정 속에서 화교에 대한 차별적인 조치들이 많이 시행되었으며 이런 상황때문에 한국내 화교들은 동남아시아 화교에 비해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OLYMPUS DIGITAL CAMERA중국집 식기류와 공화춘 젓가락, 차주전자, 공화춘부채, 1905년 건립된 공화춘은 짜장면을 최초로 팔기 시작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공화춘은 자리를 옮겨 계속 운영되고 있으며, 원래 자리는 짜장면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중화음식업 동업협정 가격표, 1945년 이후, 중화요식업총회 경기도지부에서 발행한 중화음식업 동업협정 가격표로 음식 종류에는 한글과 한자가 병기되어 있다.

선린문(善隣門):이웃, 그리고 변화
한국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화교는 중국 산동성 출신이며, 여전히 산동 사투리를 쓰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중국의 공산화와 한국의 정책에 갇혀 대만 국적을 지닐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화교 이주민의 대다수는 남성이었으며,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한국 여성들과 결혼하였습니다. 이로써 중국 본적과 대문 국적으로 한국 땅에 사는 사람들이 된것입니다. 화교가 자리잡은 지도 130여 년이 흘렀습니다. 화교들은 이제 한국 사회의 일부가 되었고, 지금 한국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계속 살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젊은 세대로 갈수록 말하는 것, 먹는 음식, 생각하는 것까지 한국 사람과 구별하기는 어려워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방인으로서 중국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지켜나가려고 합니다. 이들의 정체성이 유지되는 가장 큰 이유는 모국어와 화교학교 교육이겠지만, 한국 사회의 차별과 한국인의 배타적 성향도 못지않은 이유로 말해집니다. 세번째 패루는 인천 차이나타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선린문(善隣門)입니다. ‘좋은 이웃’이란느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곳의 지역 이름과도 같은 뜻입니다. 그 이름 속에 담긴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선린문이라고 한다. 세번째 전시는 중국과의 국교 수교 이후 나아진 환경속에서 살아가는 화교들의 정체성과 그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한다.

강oo 이야기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태어난 나를 사람들은 6.25세대로 부릅니다. 전쟁통에 태어났냐고요? 아니 아니, 화교가정 대부분의 어머니는 한국인이라 세대를 거쳐~ 거쳐 중국 화교의 피는 6.25%만 섞였다는 뜻이랍니다. 화교소학교에 들어갔지만 일반 중고등학교를 졸업해 중국어보다는 한국어가 편하고, 또 친구들처럼 걸그룹을 좋아하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청년일 뿐입니다. 내가 태어날 무렵 우리 부모님은 중국집을 경영했지만, 중국과의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보따리상을 하였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으로는 그 무렵부터 여러가지가 좋아졌다 합니다. 내가 열 살 무렵인가? 외국인은 땅도 갖지 못하게 했던 게 없어지고, 중학교 무렵에는 영주권도 인정받게 되었답니다. 저 고등학교 때는 지방선거권도 인정받았어요. 내가 살던 차이나타운은 활성화 계획이 잡히면서 관광객도 많아졌지요. 덕분에 우리집 수입도 늘어갔습니다. 하지만 계속 화교로 지내기엔 어려움이 많더라구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위해 인턴원서를 내려 했지만 인터넷 접수창에는 주민등록번호만 넣을 수 있을 뿐 외국인등록번호를 적어봐야 오류라고만 나옵니다. 중국어는 능숙하지만 깡통여권을 가진 나는 출입국도 쉽지 않아 회사에서 원하질 않구요. 아버지는 반대하셨지만 취업을 위해서도, 대학에서 만난 여자친구와의 미래를 위해서도 귀화를 선택했고, 지금은 유통회사의 직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나는 한국 땅에 남아 가정을 꾸릴 계획이지만, 형은 미국으로 동생은 대만으로 이민을 갔어요. 그런 게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출처:인천시립박물관>

화교? 누가인가요? 그들이 생각하는 이웃

OLYMPUS DIGITAL CAMERA화교신분에 대해 정의한 중화민국헌법(1912)와 중화인민공화국 관련 법률. 출생보고표, 외국인사항신고서(사본)

중화민국헌법(사본), 1912년 제정된 중화민국헌법에 따라 제정된 화교신분증명조례에서는 화교를 ‘僑居國外國民’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귀교교권권익보호법(사본),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에 의해 제정된 화교 정의.

교외국외적 중국인(僑居國外的 中國人), 바이두(百度), 본국을 떠나 해외 각처로이주하여 현지에 정착, 경제활동을 하면서 본국과 문화적.사회적.법률적.정치적 측면에서 유기적인 연관을 유지하고 있는 중국인 또는 그 자손.

OLYMPUS DIGITAL CAMERA대만여권(왼쪽)과 화교들이 사용하는 깡통여권(오른쪽). 신분증번호가 없어 한국 화교들은 대만인들이나 한국인들이 받는 무이자 입국 혜택이 없다고 한다. 

깡통여권, 화교들에게 대만 여권은 두가지로 나뉜다. 대만에 호적이 있으면서 신분증번호가 있는 여권과 호적이 한국 등 다른 나라에 있어 신분증번호가 없는 여권이 그것이다. 무비자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신분증 번호가 있는 여권일 뿐이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