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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벌교읍 옛 보성여관 건물, 벌교읍에 남아 있는 일본식 가옥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 있는 옛 보성여관 건물이다. 이 건물은 조정래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었던 벌교읍 옛 일본인 거리에 남아 있는 건물이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지어진 것으로 한옥과 일본식 가옥의 양식이 섞여 있는데 일본식 건물양식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건물은 2층으로 된 주 건물과 부속건물들이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벌교읍에서 공공건물을 제외하고는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이었다고 한다. 소설에서는 토벌대의 숙소로 사용된 남도여관으로 소개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벌교읍에 남아 있는 옛 보성여관 건물. 벌교읍에서도 가장 큰 규모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한옥과 일본식 가옥 양식이 섞여 있는 건물이다. 오늘날 일반적인 여관과는 달리 지역을 대표하는 호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보성여관 출입문. 도로 방향으로는 상가건물처럼 지어졌다.

보성 벌교 보성여관 09-20180324출입문을 들어서면 숙소가 있는 마당으로 복도가 연결되어 있다.

보성 벌교 보성여관 10-20180324지금은 방문객을 위한 휴식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는 도로옆 공간. 식당 등으로 사용했던 공간으로 보인다.

보성 벌교 보성여관 11-20180324전시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는 부분.

보성 벌교 보성여관 08-20180324가운데 복도를 지나면 아담하게 꾸며놓은 작은 마당이 있다. 마당을 중심으로 손님들이 묵는 숙소가 배치되어 있다. 전통 한옥의 ‘ㅁ’자형 공간배치를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보성 벌교 보성여관 01-20180324전통한옥의 대청마루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넓은 마루.

보성 벌교 보성여관 02-20180324툇마루가 있는 한옥양식이 반영되어 있는 부분.

보성 벌교 보성여관 03-20180324일본식 목조주택 양식이 반영되어 있는 부분.

보성 벌교 보성여관 07-20180324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보성 벌교 보성여관 12-20180324
2층복도.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의 형태를 하고 있다.

보성 벌교 보성여관 05-20180324다다미를 깔아놓은 2층.

보성 벌교 보성여관 04-201803242층 창문에서 보이는 벌교읍.

보성 벌교 보성여관 06-201803242층 복도에서 내려다 보이는 마당과 숙소건물들.

OLYMPUS DIGITAL CAMERA보성여관이 있는 벌교읍 거리. 경전선 벌교역에서 낙안읍성으로 연결되는 도로 주위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조성한 일종의 신도시였던 공간이다. 1970년대를 지나면서 일본인 가옥들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전형적인 시골 소읍 풍경으로 바뀌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벌교읍에서 랜드마크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 옛 보성여관 건물.

남도여관
검은 판자벽에 함석지붕, 전형적인 일본식으로 지어진 2층 건물은 옛 모습 그대로이다. 일본인들은 강점기 동안 전국적으로 이런 건물들을 수없이 지었는데 그동안 무차별적으로 헐어버리고 시멘트 건물들을 짓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이런 건물들은 구경하기 어려운 귀물이 되어가고 있는 형편이다. 역사는 문자의 기록만이 아니다. 유물을 보았을 때 설명이 필요 없이 지난 시대를 한순간에 실감하게 된다. 수난과 고통의 역사일수록 그 시대의 유물은 남겨지고 보호되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 중심거리로 소위 본전통이라고 불렸던 이 길에 이 건물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그 시절에도 이 건물은 여관이었고, 그때의 실제 상호는 보성여관이었다. 소설에서는 임만수와 그 대원들이 한동안 숙소로 사용한다. (안내문, 보성군청, 2012년)

지금이 어느때라고,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민심을 수습해야 할 임무를 띤 토벌대가 여관잠을 자고 여관밥을 먹어? (태백산맥 3권 85쪽)

<출처>

  1. 안내문, 보성군청, 2012년

광주 옛 전남도청 본관을 비롯한 관공서 건물들

광주 동구 광산동에 위치한 옛 전남도청을 비롯한 관공서 건물들이다. 광주와 전남지역을 대표하는 관공서 건물들로 오랜 세월 지역 중심 역할을 해왔던 중심지이자,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현장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에 건립된 전남도청을 중심으로 도청회의실, 1944년에 건립된 전남지방경찰청 민원실, 1966년대에 건립된 전남지방경찰청 건물 등이 남아 있다.

근.현대 역사의 현장이자 시대별 관공서 건물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지금은 옛 건물들을 리모델링하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옛 건물 원형이 잘 남아 있기는 하지만 리모델링 과정에서 건물을 거의 비워 놓고 있어 생동감이 약간 부족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일제강점기 이래 전남지역 중심지 역할을 했던 옛 전남도청. 지금은 근.현대사를 체험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옛 전남도청 본관. 1930년에 지어진 건물로 건축가 김순하가 설계와 시공에 참여하였다. 3층 건물로 그 규모가 크지 않으며, 일제강점기 관공서 건물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본관 출입문에는 앞쪽으로 돌출된 포치가 설치되어 자동차가 정차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관공서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형태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뒷면에서 본 전남도청 본관.

OLYMPUS DIGITAL CAMERA오른쪽에 있는 별관 건물. 도청 실무부서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전남도청 본관, 1930년 건립
이 건물은 관공서 건물의 설계와 시공을 일본인들이 독차지하던 시기에 한국인 건축가 김순하가 설계와 시공 과정에 참여하여 완성하였던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건립이후 70년 이상 전라남도의 행정적 중심이 된 곳이며, 1980년에는 5.18민주화운동의 산 현장으로서 전남 지역 근.현대사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정면에 수직으로 나란히 3개의 창을 설치하고 창문 사이에는 코린트 양식을 단순화한 주두로 장식하였는데, 이는 당시 건축물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의장이다. (안내문, 광주시청,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본관 왼쪽편에 있는 회의실 건물. 본관과 함께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이다. 2층 건물이지만 외부에서는 3층 건물처럼 보인다.

전라남도 도청 회의실,
이 건물은 일제시대 광주에서 활동했던 건축가 김순하가 설계했다. 광주에 남긴 그의 작품으로는 전라남도청.호남의원.춘목암 등이 있다. 지하1층, 지상 2층의 붉은 벽돌 건물로 2층 창문이 상.하로 나뉘어 있어 밖에서는 3층으로 보이게 했다. 또한 건물 좌.우 모서리의 곡면 처리와 출입구 정면의 유리장식은 시대를 앞선 조형구상으로 광주지역 근대 건축의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안내문, 광주시청,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도청 본관 건물 뒷편에 있는 옛 전남지방경찰청 본관. 1960년대에 지어진 관공서 건물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도청과 경찰청 건물이 나란히 있는 특이한 건물 배치를 하고 있다. 두 건물 사이 공간에 방문자 센터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 아시아문화전당 광장에서 보이는 전남지방경찰청 본관.

전남지방경찰청 본관, 1960년대 건립
이 건물은 1960년대 후반에 완공되어 2007년까지 전남지방경찰청 본관으로 사용되었다. 건축적 조형미보다는 관공서로서이 기능성을 우선시한 단순하고 반복적인 구조를 보인다. 콘크리트 격자 프레임을 통한 입면의 강한 질서감, 정면과 배면 출입구이 수직성 등 당시 한국 건축의 모더니즘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5.18민주평화기념관』으로 활용되는 내부는 수직.수평 노출 철골 프레임 구조를 사용하여 당시의 건축 양식과 조화를 이루도록 리모델링되었다. (안내문, 광주시청,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전남지방경찰청 민원실.

전남지방경찰청 민원실, 1944년대 무렵 건립
이 건물은 1944년 무렵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졌으며, 벽돌 조적조 벽체와 목조 트러스 구조로 설계되었고, 책을 펼쳐서 엎어놓은 모양의 박공지붕으로 구성된 절충주의 양식 건물이다. 노후된 지붕의 기와 대신 단열과 채광효과가 있는 로이유리로 지붕을 교체하여 근대 건축물이 외향적 특징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상징하는 빛의 산란 효과가 조화를 이루도록 리모델링되었다.  (안내문, 광주시청,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경찰청 본관 뒷편에 조성된 아시아문화전당 광장. 뒷편에 있던 건물들을 허물고 그 자리에 건물을 조성하였다. 전시공간들은 광장 지하에 지어졌다.

OLYMPUS DIGITAL CAMERA도청 앞 광정 너머로 보이는 전일빌딩.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도청 앞 상업지구를 형성했던 충장로 거리.

<출처>

  1. 안내문, 광주시청, 2018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원주 구조선식산은행 원주지점

강원 원주시 중앙동 구도심에 있는  옛 조선식산은행 원주지점 건물이다. 원주에서 맨처음 생긴 은행으로 1934년에 지어졌다. 단층 건물로 외관은 서구식이지만 외벽은 모르타르로 마감하는 등 일제강점기 후반부에 많이 나타나는 공공건축물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원주지역에서 거의 유일한 일제강점기 흔적을 보여주는 근대식 건축물이다. 원주는 강원감영이 있던 곳이지만 일제강점기 강원도청이 춘천으로 옮겨지면서 당시 흔적이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원주 도심에 있는 옛 조선식산은행 원주지점. 일제강점기 이후 생긴 은행 건물들과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앞쪽으로 약간 돌출되어 있는 출입문. 일제강점기 공공건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출입문 형태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창문은 수직적인 느낌을 강조하고 있다. 대리석 기둥을 본떠서 모르타르로 마감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은행 앞 거리. 강원감영 객사를 비롯하여 관아건물이 들어서 있던 곳으로 원주의 대표적인 상업지구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길바닥에는 타일로 옛 강원감영의 모습을 그려놓고 있다. 객사를 중심으로 관아 건물들이 있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도심 거리가 시작되는 지점.

구 조선식산은행 원주지점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일제의 경제적 침략에 큰 역할을 한 조선식산은행 원주지점으로, 원주 지역에서 맨처음 건립된 은행이다. 외관은 전체적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며 창문을 위아래로 길게 반복 배치하여 수직성을 강조하였고, 외벽은 인조석 질감의 모르타르로 마감하는 등 일제강점기 은행 건축물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안내문, 원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원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성주 한개마을 월곡댁, 20세기에 지어진 고택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에 있는 월곡댁이다. 마을 제일 안쪽 높은 곳에 위치한 고택으로 20세기에 지어졌다. 건물은 대문채, 안채, 사랑채, 중문채, 별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자형으로 되어 있으며 안채는 ‘ㄱ’자형을 하고 있다. 안채와 별채가 담장과 중문으로 분리되어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20세기에 지어진 집이지만 마을에 있는 기존 고택들의 공간배치 형식을 따르고 있다.

한개마을은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있는 전통마을이다. 조선초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가 처음 들어온 이래 후손들이 모여사는 성산이씨 집성촌이다. 마을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한주종택, 교리댁 등을 비롯하여 많은 고택들과 제사를 모시기 위한 재실 등이 남아 있다. 나즈막한 영취산이 마을을 감싸주고, 앞으로는 큰 하천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입지조건을 잘 갖추고 있으며, 마을앞 들판도 비교적 넓은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성주 한개마을 안쪽에 위치한 월곡댁. 20세기에 지은 집으로 바깥쪽에 사랑채, 안쪽에 안채가 있는 마을 고택들의 공간배치를 잘 따르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문채.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대문채. 문간방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랑채는 ‘-’자형 건물로 마을 높은 곳에 있으며, 넓은 사랑마루를 두고 있어 정자같은 느낌을 준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랑채 옆에 안채가 있고, 그 앞에 담장과 중문채를 두어 공간을 분리하고 있다. 그 앞에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별채가 있다.

성주 한개마을 월곡댁 07-20180110사랑채는 ‘ㄱ’자형이며 안마당이 꽤 넓다.

OLYMPUS DIGITAL CAMERA성주 한개마을 전경.

대산동 월곡댁,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이 건물은 1911년 이진희가 처음 건립하였으며 1930년에는 사당을, 1940년 경에는 별당채를 새로 추가하여 증축하였다. 가옥은 안채, 사랑채, 별채,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문채와 중문채가 각각 사랑채와 안채 앞에 놓여 있다. 사랑채에서는 중문을 거치지 않고 안채에 들어갈 수 있으나 별채에서는 중문채를 거쳐야만 안채로 출입할 수 있다. 별채는 안채 앞쪽에 세웠는데 사방이 담으로 막혀있어 폐쇄성이 매우 강하며 중문채 앞의 작은 협문으로만 출입이 가능하다. 사당은 가장 뒤쪽에 독립된 구역을 이루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와 지은 건물이면서도 각 건물이 독립적으로 배치되어 있고 안채도 ‘튼 ‘ㅁ’자형으로 구성되어 있어 이 마을의 공통된 특징을 잘 지니고 있다. (안내문, 성주군청, 2017년)

<출처>

  1. 안내문, 성주군청, 2017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년

[중앙박물관특별전, 미술 속 도시] 20세기초 근대 미술을 이끌었던 화가들

개항과 함께 서구의 문물이 급격하게 들어오면서 미술가들도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일부는 서양화라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였으며, 전통 미술을 계승했던 화가들도 서구의 새로운 기법을 적용하는 등 시대의 흐름를 따르게 된다. 마지막 도화서 화원인 조석진과 안중식은 새루운 경향을 받아들였으며 당시 미술가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구한말 새로운 문화를 이끌었던 한양의 중인층들은 도시의 경제적 여유를 바탕으로, 근대 문물을 수용하는 예술가이자 도시의 지식인으로서 큰 역할을 하게 된다. 20세기 초 한국의 미술계를 이끌어던 대표 화가들의 작품에서 근대 미술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울풍경, 휴버트 보스(1855~1935년), 대한재국 1899년,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조선을 그린 가장 오래된 유화작품이다. 당시 한양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네덜란드 출신 화가 휴버트 보스의 작품으로, 조선을 그린 가장 오래된 유화 작품이다. 주한 미국 공사관 부근 (현재 정동)에서 경복궁 쪽을 바라본 풍경이다. 화면 아래 나지막한 기와집들 사이에서 솟아오른 경복궁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그 위로는 백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이 화면 전체를 압도한다. 작은 캔버스에 그려진 풍경이지만, 낯선 이방인 화가 휴버트 보스는 조선의 수도, 한양의 지리적 입지와 전통적 경관이 지닌 특징을 분명하게 포착해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도시, 근대를 만나다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제대로 인식하기도 전에 개항과 더불어 서구의 문물과 신매체가 도시에 밀려 들어왔습니다. 미술가들은 낯선 환경 속에서 또 다시 변화를 모색해야 했습니다. 서화 교습소나 미술 단체를 중심으로 근대 화단이 형성되었습니다. 외국 유학을 떠나 ‘서양화’로 진로를 찾아간 화가들도 생겨납니다. 미술가들은 사진, 신문과 잡지라는 새로운 인쇄 매체에 적응하거나, 제작소에서 상품이 된 공예품을 생산하는 등 변화의 흐름에 발맞춰 변신을 꾀합니다. 그들은 근대 문물의 세례 속에서 식민지 현실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도시 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인 자화상, 그리고 낯익은 과거와 낯선 현재가 뒤섞인 도시 경관의 그림은 그러한 근대의 고민을 보여 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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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춘효, 안중식, 1915년, 비단에 엷은 색, 등록문화재 485호. 도화서 출신 화원으로 근대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던 안중식의 작품이다. 전통 방식을 계승하면서도 서양식 투시도법 등 서양화의 기법을 적용하고 있다.

화면 상단 가운데 우뚝 솟은 백악산을 중심으로, 새벽안개에 가려진 경복궁과 광화문의 전경을 그린 작품이다. 광화문과 해태상 사이는 서양식 투시도법을 적용하였고, 화면 아래 종로 육조거리는 텅빈 채로 적막감이 감돈다. 1915년은 조선총독부가 조선물산공진회 개최를 위해 경복궁의 전각들을 헐어냈던 시기로, 실제 경치를 보고 그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전체적인 분위기와 제작 배경에서 마지막 도화서 화사로서 안중식의 자존감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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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광장과 경복궁을 표현한 부분.

근대의 길목에서 
19세기 중엽 이후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는 조선에도 영향을 미쳐, 전통의 시대는 급작스럽게 막을 내렸고 미술계에도 예외 없이 변화가 시작됩니다. 마지막 도화서 화원인 조석진(1853~1920년)과 안중식(1861~1919년)은 전통과 근대를 잇는 교두보의 역할을 담당하여 화단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서화고동의 취미는 당대 모던보이들에게 대물림되면서 여전히 유행하였고, 더욱 장식적이고 감각적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여항문인에서 모던보이로 이어지는 도시인들은 여전히 경제적 여유를 바탕으로, 근대 문물을 수용하는 예술가이자 도시의 지식인으로서 선구적인 역할을 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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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춘효, 안중식, 1915년, 비단에 엷은 색, 등록문화재 485호.  위의 그림과 비슷한 구도와 내용으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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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절지, 안중식, 1914년, 비단에 색, 이홍근 기증. 구한말 많이 그려졌던 그림 형태로 섬세한 표현과 화려한 색감 등 서구의 미술기법을 받아들여 세련되면서도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안중식이 그린 대련의 기명절지도이다. 이전의 기명절지가 주로 담채로 그려진 데 비해, 안중식은 서양식 명암법을 구사한 정밀한 묘사와 사실적인 채색, 그리고 세로로 긴 화면에 맞는 길쭉한 기물의 배치로 세련된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장승업 이후 기물이 풍부해지고 정밀한 묘사가 더해져 완성도가 높아진 안중식의 기량을 잘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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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절지, 조석진, 20세기 초, 비단에 엷은 색. 19세 장승업의 화풍을 계승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서창청공(書窓淸供)” 즉 ‘서재의 말고 깨끗한 선비의 물건’들을 뜻하는 화제가 적힌 도화서 화사 출신 조석진의 작품이다. 크고 작은 고동기들이 중심을 이루고 그 아래로 가지나 붉은 무, 배추, 방송이 등과 같은 친숙한 소과들이 어우러져 있다. 사실적인 표현에 주력했던 안중식에 비해 이전 시기 장승업 화풍의 영향이 간취된다. 정확한 묘사보다 엷은 담채로 대상을 담백하게 그리는 전통의 양식이 근대에까지 계승되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기명절지, 이도영(1884~1933년).고희동(1886~1965년), 1915년, 비단에 엷은 색, 이홍근 기증. 전통 화법을 계승한 화가와 서양화를 배웠던 화가가 함께 그린 그림으로 어색함 없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고희동과 이동영이 그림을 완성하고 그들의 스승인 안중식이 글을 남긴 합작도이다. 화면 우측 이동영은 기물의 음영이나 입체감을 강조하지 않고 담백한 필치를 구사한 반면, 고희동은 옥수수 알의 색을 노란색과 푸른색으로 묘사하는 등 과일의 색채와 명암을 감각적으로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과 전통 화법을 계승한 이동의 화풍이 한 화면 안에서 대조와 조화를 이루는 작품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기명절지, 이도영, 1923년, 종이에 색, 국립현대미술관

장승업에서부터 조석진, 안중식으로 이어진 기명절지도는 관재 이도영에 이르러 꽃피웠다. 안중식의 첫 제자인 이도영은 스승의 화풍을 이어받아 온건하면서도 유려한 필력을 발휘하였다. 향로를 비롯한 고동기류에서부터 무와 밤, 고추와 같은 흔한 소채까지 소재의 폭이 넓어졌음을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해동역대명가필보, 한남서림 간행, 1926년, 종이에 인쇄

출판사이자 서점이었던 한남서림에서 낸 역대 필적 700점을 모은 서책으로, 표제는 오세창이 썼으며, 책머리에는 김규진(1868~1933년)의 휘호와 윤희구(1867~1926년)의 서문이 있는데, 이들 모두 한남서림 대표 백두용(1872~1935년)과 가까이 교류했던 서화가들이다. 특히 이 서점을 간송 전형필이 인수하여 이곳에 들어오는 고서화를 본격적으로 수집하였고, 훗날 1938년 보화각 건립에 토대가 된 의미 있는 곳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한동아집첩, 오세창(1864~1953년), 1925년, 종이에 엷은 색, 국립중앙도서관

오세창을 비롯한 김돈희(1871~1937년).이도영.고희동 등의 서화가, 한학자이자 시인인 이기(1856~1935년), 승려 박한영(1870~1948년), 역사학자 최남선 등 7명이 시회를 갖고 이를 기념하여 남긴 시화첩이다. 이들은 대부분 기술직 중인 집안 출신으로, 선조들의 시사 전통을 따르며 암울한 일제강점기에서도 지조를 잃지 않는 은일지사의 풍류를 추구하였다. 신지식층이면서도 고전과 민족문화의 연구에 몰두했던 이들에게 시회는 전통과 고전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탐구하는 공간이 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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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벽도, 김규진(1864~1933년) 외, 1920~1933년 경, 종이에 엷은 색

1920년대를 대표하는 서화가 14명이 각각 글과 그림을 나누어 그린 합작도이다. 해강 김규진, 위창 오세창에서부터 소정 변관식, 심산 노수현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서화가들이 참여하였다. 안중식, 조석진이 빠진 것으로 보아 1920년대 이들이 세상을 뜬 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근대기 성행하였던 서화합벽도 제작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서화가들의 친목 관계를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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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죽석도, 김규진, 1922년, 비단에 색, 개인소

세로 1.9미터가 넘는 김규진의 대형 난죽석도이다. 그의 문집과 「매일신보」에 따르면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기 위해 그렸다고 하나 실제로는 출품하지 않았다. 김규진은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능동적으로 활동한 서화가였다. 대중의 취향을 잘 파악하여 상업화할 줄 아는 선구적 감각이 있었던 그는 특히 대나무 그림을 잘 그려, 호를 딴 이른바 ‘해강죽’으로 유명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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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송낙일, 지운영(852~1935년), 1917년, 비단에 색, 이홍근 기증

근대 지식인이자 서화가였던 지운영의 작품으로, 해질 무렵 높이 솟은 소나무 숲으로 들어가는 선비의 모습을 주제로 하였다. 지운영은 안중식, 조석진과 비슷한 연배이면서도 그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갔던 인물이다. 그는 일찍이 외국에 나가 선진 문물을 수용한 서화가이자 근대 도시의 지식인으로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화면에 적힌 글을 통해 함께 함꼐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적 있는 박영효에게 준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도시의 자화상

전시에서는 일제강점기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을 배출한 일본 도쿄예술대학 대학미술관에서는 당시 조선 유학생들이 졸업작품으로 남겨 놓았던 자화상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졸업후 모두 서양화가로 활동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 미술계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이들의 작품에서는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젊은이들의 내면을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1915년, 고희동(1886~1965년)이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면서 최초의 서양화가가 등장하였고, 당시 그의 졸업은 신문에 날 만큼 큰 화제 거리였습니다. 1920~30년대가 되면 미술을 배우기 위해 떠나는 유학생이 증가하고 각종 전람회와 전시 공간이 확대되며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 서양화가들의 졸업작품인 자화상에서 급변하는 시대의 주인공으로 화가 자신의 내면이 드러납니다. 화가들은 경성이라는 도시 공간의 변화와 함께 일상의 풍경과 삶을 포착하며 삶과 예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해 나갔습니다. 식민지 현실 속에서 근대적으로 변모한 경성의 다양한 모습은 유혹과 동경, 환상과 절망이 교차하는 이중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되었던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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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고희동, 1915년, 캔버스에 유채, 일본 도쿄예술대학 대학미술관

최초의 서양화가로 알려진 고희동의 자화상으로, 한국인이 그린 최초의 유화작품 중 하나이다. 고희동은 일찍이 서양 문물을 접하고 1909년 24세에 궁내부 주사의 자격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 도쿄미술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돌아와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걸었다. 도쿄미술학교 졸업작품인 이 자화상은 정자관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한국인 관료이자 유학생으로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그는 이 높은 정자관을 그리기 위해 본래 자화상 규격보다 긴 캔버스를 사용했다. 궁내부 주사로서 6년간 일했던 한국인 관료이자, 한국인 유학생으로서의 자기의식이 반영된 작품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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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김관호(1890~1959년), 1916년, 캔버스에 유채, 일본 토교예술대학 대학미술관

평양 부호의 아들로 태어난 김관호는 1911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이 <자화상>에는 선배 고희동의 것과 달리 양장을 입고 정면을 응시하는 세련된 근대 지식인의 당당함이 반영되어 있다. 화면 곳곳에서 탄탄한 데생 능력과 뛰어난 색채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최우등으로 졸업하며 화제를 모은 김관호는 귀국 후 개인전을 개최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지만, 1927년 이후 화단에서 활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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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김찬영(1889~1960년), 1917년, 캔버스에 유채, 일본 도쿄예술대학 대학미술관

김찬영은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의 세번째 한국 졸업생으로, <자화상>은 현재 전하는 그의 유일한 유화 작품이다. 초점 잃은 눈동자와 붉은 구름이 피어나는 강가의 풍경은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세계로 인도한다. 졸업 후 김찬영은 한국유화가 1세대로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을 거부하면서 서양 모더니즘 미술의 수용자로서 활발한 비평 활동을 하다, 1930년대 이후에는 고미술수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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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김용준(1904~1967년), 1931년, 캔버스에 유채, 일본 도쿄예술대학 대학미술관

화가이자 평론가, 미술사학자이면서 『근원수필』의 저자로 잘 알려진 김용준의 자화상이다.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 유학 시절, 전통서화를 경시하다 장승업의 기명절지도를 본 순간 서양화가로서 갖고 있던 자부심이 한순간에 꺾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의 자화상은 근대 지식인이나 화가의 모습이 아닌, 한복을 입은 젊은 한국 청년으로서의 자의식을 보여준다. 졸업 이후에도 전통에 대한 그의 관심은 지속되었고, 2930년대 후반부터는 전통 회화로 전향하여 조선미술의 특징에 대한 글들을 발표하면서 전통 서화의 사상과 양식을 계승하는 현대미술을 모색하였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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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길진섭(1907~1975), 1932년 캔버스에 유채, 일본 도쿄예술대학 대학미술관

길진섭은 1932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1930년대 미술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 유학생이 증가하면서 이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며, 미술인들은 다변화 양상을 보인다. 이 자화상에서는 흰 셔츠에 붉은 넥타이를 맨 1930년대 전형적인 도시인의 모습이 나타난다. 날카로운 눈매로 정면을 응시한 채 왼쪽으로 몸을 삐딱하게 돌린 모습은 화가의 심리적 상태를 드러내 보인다. 한자 “吉”과 한글 “진섭”으로 쓴 서명은 이 시기 서양화가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인물회화, 고희동, 이도영 외, 1933년 이전 종이에 먹. 춘곡 고희동의 생일날 모임에서 남긴 메모와 그림, 이용우, 이한복, 이도영, 변관식, 이상범이 글과 그림을 남겼다.

OLYMPUS DIGITAL CAMERA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 김주경 (1902~1981년), 1927년,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1920년대 북악산을 배경으로 경성부청 건물이 화면 가운데 자리잡고 있고 오른쪽으로는 조선은행의 상징인 원형 돔이 살짝 드러나 있다. 1920년대 서울은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일제의 식민통치를 위한 건물들이 건립됐던 시기로, 경복궁에서 남산에 이르기까지 육중한 코크리트 건물들이 만들어 낸 경관은 도시의 새로운 상징이 되어 버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