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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특별전, 미술 속 도시] 20세기초 근대 미술을 이끌었던 화가들

개항과 함께 서구의 문물이 급격하게 들어오면서 미술가들도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일부는 서양화라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였으며, 전통 미술을 계승했던 화가들도 서구의 새로운 기법을 적용하는 등 시대의 흐름를 따르게 된다. 마지막 도화서 화원인 조석진과 안중식은 새루운 경향을 받아들였으며 당시 미술가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구한말 새로운 문화를 이끌었던 한양의 중인층들은 도시의 경제적 여유를 바탕으로, 근대 문물을 수용하는 예술가이자 도시의 지식인으로서 큰 역할을 하게 된다. 20세기 초 한국의 미술계를 이끌어던 대표 화가들의 작품에서 근대 미술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울풍경, 휴버트 보스(1855~1935년), 대한재국 1899년,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조선을 그린 가장 오래된 유화작품이다. 당시 한양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네덜란드 출신 화가 휴버트 보스의 작품으로, 조선을 그린 가장 오래된 유화 작품이다. 주한 미국 공사관 부근 (현재 정동)에서 경복궁 쪽을 바라본 풍경이다. 화면 아래 나지막한 기와집들 사이에서 솟아오른 경복궁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그 위로는 백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이 화면 전체를 압도한다. 작은 캔버스에 그려진 풍경이지만, 낯선 이방인 화가 휴버트 보스는 조선의 수도, 한양의 지리적 입지와 전통적 경관이 지닌 특징을 분명하게 포착해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도시, 근대를 만나다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제대로 인식하기도 전에 개항과 더불어 서구의 문물과 신매체가 도시에 밀려 들어왔습니다. 미술가들은 낯선 환경 속에서 또 다시 변화를 모색해야 했습니다. 서화 교습소나 미술 단체를 중심으로 근대 화단이 형성되었습니다. 외국 유학을 떠나 ‘서양화’로 진로를 찾아간 화가들도 생겨납니다. 미술가들은 사진, 신문과 잡지라는 새로운 인쇄 매체에 적응하거나, 제작소에서 상품이 된 공예품을 생산하는 등 변화의 흐름에 발맞춰 변신을 꾀합니다. 그들은 근대 문물의 세례 속에서 식민지 현실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도시 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인 자화상, 그리고 낯익은 과거와 낯선 현재가 뒤섞인 도시 경관의 그림은 그러한 근대의 고민을 보여 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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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춘효, 안중식, 1915년, 비단에 엷은 색, 등록문화재 485호. 도화서 출신 화원으로 근대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던 안중식의 작품이다. 전통 방식을 계승하면서도 서양식 투시도법 등 서양화의 기법을 적용하고 있다.

화면 상단 가운데 우뚝 솟은 백악산을 중심으로, 새벽안개에 가려진 경복궁과 광화문의 전경을 그린 작품이다. 광화문과 해태상 사이는 서양식 투시도법을 적용하였고, 화면 아래 종로 육조거리는 텅빈 채로 적막감이 감돈다. 1915년은 조선총독부가 조선물산공진회 개최를 위해 경복궁의 전각들을 헐어냈던 시기로, 실제 경치를 보고 그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전체적인 분위기와 제작 배경에서 마지막 도화서 화사로서 안중식의 자존감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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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광장과 경복궁을 표현한 부분.

근대의 길목에서 
19세기 중엽 이후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는 조선에도 영향을 미쳐, 전통의 시대는 급작스럽게 막을 내렸고 미술계에도 예외 없이 변화가 시작됩니다. 마지막 도화서 화원인 조석진(1853~1920년)과 안중식(1861~1919년)은 전통과 근대를 잇는 교두보의 역할을 담당하여 화단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서화고동의 취미는 당대 모던보이들에게 대물림되면서 여전히 유행하였고, 더욱 장식적이고 감각적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여항문인에서 모던보이로 이어지는 도시인들은 여전히 경제적 여유를 바탕으로, 근대 문물을 수용하는 예술가이자 도시의 지식인으로서 선구적인 역할을 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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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춘효, 안중식, 1915년, 비단에 엷은 색, 등록문화재 485호.  위의 그림과 비슷한 구도와 내용으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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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절지, 안중식, 1914년, 비단에 색, 이홍근 기증. 구한말 많이 그려졌던 그림 형태로 섬세한 표현과 화려한 색감 등 서구의 미술기법을 받아들여 세련되면서도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안중식이 그린 대련의 기명절지도이다. 이전의 기명절지가 주로 담채로 그려진 데 비해, 안중식은 서양식 명암법을 구사한 정밀한 묘사와 사실적인 채색, 그리고 세로로 긴 화면에 맞는 길쭉한 기물의 배치로 세련된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장승업 이후 기물이 풍부해지고 정밀한 묘사가 더해져 완성도가 높아진 안중식의 기량을 잘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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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절지, 조석진, 20세기 초, 비단에 엷은 색. 19세 장승업의 화풍을 계승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서창청공(書窓淸供)” 즉 ‘서재의 말고 깨끗한 선비의 물건’들을 뜻하는 화제가 적힌 도화서 화사 출신 조석진의 작품이다. 크고 작은 고동기들이 중심을 이루고 그 아래로 가지나 붉은 무, 배추, 방송이 등과 같은 친숙한 소과들이 어우러져 있다. 사실적인 표현에 주력했던 안중식에 비해 이전 시기 장승업 화풍의 영향이 간취된다. 정확한 묘사보다 엷은 담채로 대상을 담백하게 그리는 전통의 양식이 근대에까지 계승되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기명절지, 이도영(1884~1933년).고희동(1886~1965년), 1915년, 비단에 엷은 색, 이홍근 기증. 전통 화법을 계승한 화가와 서양화를 배웠던 화가가 함께 그린 그림으로 어색함 없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고희동과 이동영이 그림을 완성하고 그들의 스승인 안중식이 글을 남긴 합작도이다. 화면 우측 이동영은 기물의 음영이나 입체감을 강조하지 않고 담백한 필치를 구사한 반면, 고희동은 옥수수 알의 색을 노란색과 푸른색으로 묘사하는 등 과일의 색채와 명암을 감각적으로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과 전통 화법을 계승한 이동의 화풍이 한 화면 안에서 대조와 조화를 이루는 작품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기명절지, 이도영, 1923년, 종이에 색, 국립현대미술관

장승업에서부터 조석진, 안중식으로 이어진 기명절지도는 관재 이도영에 이르러 꽃피웠다. 안중식의 첫 제자인 이도영은 스승의 화풍을 이어받아 온건하면서도 유려한 필력을 발휘하였다. 향로를 비롯한 고동기류에서부터 무와 밤, 고추와 같은 흔한 소채까지 소재의 폭이 넓어졌음을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해동역대명가필보, 한남서림 간행, 1926년, 종이에 인쇄

출판사이자 서점이었던 한남서림에서 낸 역대 필적 700점을 모은 서책으로, 표제는 오세창이 썼으며, 책머리에는 김규진(1868~1933년)의 휘호와 윤희구(1867~1926년)의 서문이 있는데, 이들 모두 한남서림 대표 백두용(1872~1935년)과 가까이 교류했던 서화가들이다. 특히 이 서점을 간송 전형필이 인수하여 이곳에 들어오는 고서화를 본격적으로 수집하였고, 훗날 1938년 보화각 건립에 토대가 된 의미 있는 곳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한동아집첩, 오세창(1864~1953년), 1925년, 종이에 엷은 색, 국립중앙도서관

오세창을 비롯한 김돈희(1871~1937년).이도영.고희동 등의 서화가, 한학자이자 시인인 이기(1856~1935년), 승려 박한영(1870~1948년), 역사학자 최남선 등 7명이 시회를 갖고 이를 기념하여 남긴 시화첩이다. 이들은 대부분 기술직 중인 집안 출신으로, 선조들의 시사 전통을 따르며 암울한 일제강점기에서도 지조를 잃지 않는 은일지사의 풍류를 추구하였다. 신지식층이면서도 고전과 민족문화의 연구에 몰두했던 이들에게 시회는 전통과 고전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탐구하는 공간이 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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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벽도, 김규진(1864~1933년) 외, 1920~1933년 경, 종이에 엷은 색

1920년대를 대표하는 서화가 14명이 각각 글과 그림을 나누어 그린 합작도이다. 해강 김규진, 위창 오세창에서부터 소정 변관식, 심산 노수현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서화가들이 참여하였다. 안중식, 조석진이 빠진 것으로 보아 1920년대 이들이 세상을 뜬 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근대기 성행하였던 서화합벽도 제작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서화가들의 친목 관계를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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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죽석도, 김규진, 1922년, 비단에 색, 개인소

세로 1.9미터가 넘는 김규진의 대형 난죽석도이다. 그의 문집과 「매일신보」에 따르면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기 위해 그렸다고 하나 실제로는 출품하지 않았다. 김규진은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능동적으로 활동한 서화가였다. 대중의 취향을 잘 파악하여 상업화할 줄 아는 선구적 감각이 있었던 그는 특히 대나무 그림을 잘 그려, 호를 딴 이른바 ‘해강죽’으로 유명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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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송낙일, 지운영(852~1935년), 1917년, 비단에 색, 이홍근 기증

근대 지식인이자 서화가였던 지운영의 작품으로, 해질 무렵 높이 솟은 소나무 숲으로 들어가는 선비의 모습을 주제로 하였다. 지운영은 안중식, 조석진과 비슷한 연배이면서도 그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갔던 인물이다. 그는 일찍이 외국에 나가 선진 문물을 수용한 서화가이자 근대 도시의 지식인으로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화면에 적힌 글을 통해 함께 함꼐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적 있는 박영효에게 준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도시의 자화상

전시에서는 일제강점기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을 배출한 일본 도쿄예술대학 대학미술관에서는 당시 조선 유학생들이 졸업작품으로 남겨 놓았던 자화상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졸업후 모두 서양화가로 활동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 미술계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이들의 작품에서는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젊은이들의 내면을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1915년, 고희동(1886~1965년)이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면서 최초의 서양화가가 등장하였고, 당시 그의 졸업은 신문에 날 만큼 큰 화제 거리였습니다. 1920~30년대가 되면 미술을 배우기 위해 떠나는 유학생이 증가하고 각종 전람회와 전시 공간이 확대되며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 서양화가들의 졸업작품인 자화상에서 급변하는 시대의 주인공으로 화가 자신의 내면이 드러납니다. 화가들은 경성이라는 도시 공간의 변화와 함께 일상의 풍경과 삶을 포착하며 삶과 예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해 나갔습니다. 식민지 현실 속에서 근대적으로 변모한 경성의 다양한 모습은 유혹과 동경, 환상과 절망이 교차하는 이중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되었던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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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고희동, 1915년, 캔버스에 유채, 일본 도쿄예술대학 대학미술관

최초의 서양화가로 알려진 고희동의 자화상으로, 한국인이 그린 최초의 유화작품 중 하나이다. 고희동은 일찍이 서양 문물을 접하고 1909년 24세에 궁내부 주사의 자격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 도쿄미술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돌아와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걸었다. 도쿄미술학교 졸업작품인 이 자화상은 정자관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한국인 관료이자 유학생으로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그는 이 높은 정자관을 그리기 위해 본래 자화상 규격보다 긴 캔버스를 사용했다. 궁내부 주사로서 6년간 일했던 한국인 관료이자, 한국인 유학생으로서의 자기의식이 반영된 작품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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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김관호(1890~1959년), 1916년, 캔버스에 유채, 일본 토교예술대학 대학미술관

평양 부호의 아들로 태어난 김관호는 1911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이 <자화상>에는 선배 고희동의 것과 달리 양장을 입고 정면을 응시하는 세련된 근대 지식인의 당당함이 반영되어 있다. 화면 곳곳에서 탄탄한 데생 능력과 뛰어난 색채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최우등으로 졸업하며 화제를 모은 김관호는 귀국 후 개인전을 개최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지만, 1927년 이후 화단에서 활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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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김찬영(1889~1960년), 1917년, 캔버스에 유채, 일본 도쿄예술대학 대학미술관

김찬영은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의 세번째 한국 졸업생으로, <자화상>은 현재 전하는 그의 유일한 유화 작품이다. 초점 잃은 눈동자와 붉은 구름이 피어나는 강가의 풍경은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세계로 인도한다. 졸업 후 김찬영은 한국유화가 1세대로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을 거부하면서 서양 모더니즘 미술의 수용자로서 활발한 비평 활동을 하다, 1930년대 이후에는 고미술수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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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김용준(1904~1967년), 1931년, 캔버스에 유채, 일본 도쿄예술대학 대학미술관

화가이자 평론가, 미술사학자이면서 『근원수필』의 저자로 잘 알려진 김용준의 자화상이다.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 유학 시절, 전통서화를 경시하다 장승업의 기명절지도를 본 순간 서양화가로서 갖고 있던 자부심이 한순간에 꺾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의 자화상은 근대 지식인이나 화가의 모습이 아닌, 한복을 입은 젊은 한국 청년으로서의 자의식을 보여준다. 졸업 이후에도 전통에 대한 그의 관심은 지속되었고, 2930년대 후반부터는 전통 회화로 전향하여 조선미술의 특징에 대한 글들을 발표하면서 전통 서화의 사상과 양식을 계승하는 현대미술을 모색하였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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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길진섭(1907~1975), 1932년 캔버스에 유채, 일본 도쿄예술대학 대학미술관

길진섭은 1932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1930년대 미술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 유학생이 증가하면서 이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며, 미술인들은 다변화 양상을 보인다. 이 자화상에서는 흰 셔츠에 붉은 넥타이를 맨 1930년대 전형적인 도시인의 모습이 나타난다. 날카로운 눈매로 정면을 응시한 채 왼쪽으로 몸을 삐딱하게 돌린 모습은 화가의 심리적 상태를 드러내 보인다. 한자 “吉”과 한글 “진섭”으로 쓴 서명은 이 시기 서양화가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인물회화, 고희동, 이도영 외, 1933년 이전 종이에 먹. 춘곡 고희동의 생일날 모임에서 남긴 메모와 그림, 이용우, 이한복, 이도영, 변관식, 이상범이 글과 그림을 남겼다.

OLYMPUS DIGITAL CAMERA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 김주경 (1902~1981년), 1927년,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1920년대 북악산을 배경으로 경성부청 건물이 화면 가운데 자리잡고 있고 오른쪽으로는 조선은행의 상징인 원형 돔이 살짝 드러나 있다. 1920년대 서울은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일제의 식민통치를 위한 건물들이 건립됐던 시기로, 경복궁에서 남산에 이르기까지 육중한 코크리트 건물들이 만들어 낸 경관은 도시의 새로운 상징이 되어 버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7년

 

[서울역사박물관특별전, 남산의 힘] 식민통치의 현장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의 휴식공간이었던 남산은 구한말 일본의 침략과 함께 침탈의 현장이  일본은 한양의 내사산으로 백성이 출입과 개발이 제한되었던 남산 일대에 핵심 통치기구인 통감부와 총독부를 비롯하여 각종 기관과 일본거류민들을 위한 주거지, 상업시설 등을 배치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의 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조선신궁, 신사, 이등박물을 위한 사찰인 박문사 등을 설치하였다. 해방 이후 일제의 식민통치를 상징하는 많은 시설들은 철거되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여러 곳에서 일제의 흔적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식민통치의 현장
신성하고 친근했던 남산은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일본은 남산을 기점으로 토지를 침탈하여 그들의 거점으로 삼고, 점차 서울의 중심부로 또 남쪽의 신시가지로 세력을 확장하여 ‘대경성’을 구축해 나갔습니다. 특히 남산 북록인 예장동 일대에는 일본인 거류지와 식민재배의 핵심통치기구를 지속적으로 증설하였습니다. 남산 산록 중 가장 눈에 잘 띄는 회현자락에는 조선신궁을 세워 조선인을 정신적으로 옭아매고자 하였습니다. 남산은 빼어난 경승지이자 그들이 야심차게 꿈꾸는 경성-용산 축의 중심이었습니다. 또한 경성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으며 반대로 경성 어디에서도 보이는 랜드마크였습니다. 바로 이 남산에 일본은 식민권력의 상징물을 이식하여 여기에 새겨졌던 조선인들의 기억을 해체하고자 하였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한국통감부와 조선총독부가 있었던 자리. 일제강점기 이후 KBS에서 사용하다가 그 건물들을 애니메이션센터에서 사용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한국통감부. 조선총독부 표지석.

수난의 그림자
일본은 남산을 거점으로 조선을 잠식해갔습니다. 먼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주둔해서 ‘왜성대(倭城臺)’라고 불렸던 남산의 북록, 예장동을 중심으로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었습니다. 1885년 일본공사관의 이전 후 일본인 전용 거류지로 공인되었고, 거류민은 1885년 19호 89명에서 10년 만에 500호 1,839명으로 빠르게 증가하였습니다. 거류지는 점차 확장되어 이 일대는 ‘경성 속의 동경’ 즉 일본인들의 중심지가 되어 상업시설, 백화점, 극장, 유흥가 등 근대식 문화의 전파 장소로 조선인들의 마을인 ‘북촌’과 대비되는 ‘남촌’으로 그 위세를 이어갔습니다. 또 러일전쟁을 앞두고는 남산 서남쪽 용산 일대에 병영을 배치하면서 일본인들이 거류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산으로부터 전방위적인 침투가 시작된 것입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경성 일본영사관 신축설계도, 복제, 1906년, 갑신정변으로 인해 체결된 한성조약에 의거해 일본은 조선정부로부터 남산 기슭의 공사관 터와 건축비를 받았다.

OLYMPUS DIGITAL CAMERA거류민의 석물어(제1편), 경성 사교단체인 ‘조선이석회’ 회원 30여명이 조선에 살면서 겪은 생활경험담으로, 한양공원의 창설이야기와 개원식 기념사진이 실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성회고록, 1922년, 오무라 유노죠가 쓴 책으로 1910년부터 1914년까지의 경성의 자치행정.교육.경제.위생.토목 등에 대해 기록했으며, 남산 아래에 자리한 거류민 단체에 대한 기록도 실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본정 사진엽서, 일제강점기, 본정(충무로)을 비롯한 남촌은 내지인과 식민정부를 위한 근대시설로 번영을 누렸고, 조선인 중심의 북촌은 낙후지역으로 인식되는 등 지역차별이 극심했다. 용산 식민통치기구 사진엽서, 일제강점기, 조선주차군사령부, 용산 총독관저, 용산병영 전경

OLYMPUS DIGITAL CAMERA통감부 자리 아래에 일제강점기 중심 상업지구였던 본정(충무로).

OLYMPUS DIGITAL CAMERA경성항공사진, 일제강점기, 남산 서남쪽으로 일본 병영들이 넓게 자리잡은 모습을 항공촬영하였다. 용산에서 경성 시내에 이르는 대경성 구축의 야욕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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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용산시가지 전도, 1909년. 통감부와 육군사령부 외 경성이사청, 공원, 용산의 병영, 유곽 등이 나타나 있는 지도로, 한일병합조약 이전 남촌과 용산일대에 이미 일본이 깊숙이 침투해 왔음을 보여준다.

OLYMPUS DIGITAL CAMERA일본인 거류지, 신정분도대한제국지도, 1908년

OLYMPUS DIGITAL CAMERA재조선일본공사관지도

OLYMPUS DIGITAL CAMERA일본인 거류지 전경, 1895년

식민통치 거점.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외교권을 박탈.감독하는 통감정치가 실시되면서 남산은 본격적으로 식민통치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이듬해 왜성대에는 통감부(병합 이후 총독부)가 설치되었고 일본공사관은 폐지되어 통감관저(병합 이후 총독관저)로 사용되었습니다.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 이후 소네 아라스케,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세 통감을 거치는 동안 일제는 한국의 외교권 외에도 내정 간섭을 통해 단계적으로 한국을 병탄할 준비를 추진해 갔습니다. 한편 1904년에는 통감부 동쪽에 헌병대사령부가 설치되는데, 이는 후에 일제 무력통치의 중추기관이 됩니다. 이외에도 남산 일대에는 경성이사청, 정무총감 관저, 일본 적십자사 등이 총집결하여 식민통치의 심장부가 되었습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국권 상실의 현장, 통감부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이것은 1910년 8월29일에 공포된 한일합병조약의 첫번째 조항이다. 이로써 조선은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한일합병조약은 공포 일주일 전인 8월22일, 남산의 통감관저에서 데라우치 마사다케통감과 총리대신 이완용 간에 조인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통감관저, 1909년.

OLYMPUS DIGITAL CAMERA총독부청사증축설계도, 복제, 1910년 추정, 왜성대의 통감부청사는 이후 총독부청사로 바뀌어 1926년 경복궁 신청사로 이전할 때까지 식민통치의 중심지로 사용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 총독부청사증축설계도, 복제,

OLYMPUS DIGITAL CAMERA한국병합기념화보, 1910년, 한국병합을 기념하기 위해 발행된 화보로 오사카신문에서 발행하였다. 남산 통감관저에서 조인된 병합조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주권은 박탈되었다.

항일의거의 현장: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사건
1919년 3.1운동으로 항일감정이 고조된 가운데 1921년 의열단 단원 김익상은 당시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 등 일제 요인을 처단하기 위해 총독부 건물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첫번째 것은 불발하였지만 두번째 것은 굉음을 내고 폭발하여 건물 일부가 파괴되었다. 식민지 조선인의 항일 감정을 만천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경성시가도, 1927년

OLYMPUS DIGITAL CAMERA남산 조선총독부 청사, 1925년 이전

OLYMPUS DIGITAL CAMERA통감부 초대장, 1900년대, 천장절(천황 생일) 축하 원유회 등 남산에 자리한 통감부에서 개최된 각종 행사 초대장과 봉투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통감부 관련 기념엽서, 1906년

OLYMPUS DIGITAL CAMERA한국병합기념 메달, 1910년, 일본 천황가를 상징하는 16꽃잎의 국화문이 시문되어 있다. 한일병합 기념엽서, 1910년, 제1대 이토 히로부미, 제2대 소네 아라스케, 제3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의 초상사진과 남산의 통감부청사 사진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한일합방조약 문서, 1910년

OLYMPUS DIGITAL CAMERA한일합방조약문서, 1910년

OLYMPUS DIGITAL CAMERA총독부청사 사진엽서, 일제강점기

OLYMPUS DIGITAL CAMERA총독관저 사진엽서, 일제강점기

OLYMPUS DIGITAL CAMERA문교의 조선, 1927년, 관변교육단체인 조선교육회의 잡지로, 1927년5월 은사기념과학관 개관 특집호이다. 은사과학기념관 안내지도와 실내 모습등이 실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성헌병대 보고서, 1907년, 한국주차헌병대의 보고 규정을 담은 책으로, 한국주차헌병대는 금위영 남별영터에 편성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은사기념 과학관 안내, 1927년, 은사기념 과학관의 유래와 배치도 및 관람순서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은사(恩賜)’란 천황으로부터 은혜로이 하사받는다는 뜻으로 일본이 과학을 전한다는 지배담론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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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마사카케 글씨, 20세기 초, 이완용 글씨, 1924년,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에서 물러날 때 지은 합작시. 각 구의 말미에는 이토 히로부미, 모리 오노리, 소네 아라스케, 이완용 4인의 호를 써놓았으며, 일본과 조선이 하나임을 노래하였다.

 

 

성공회 서울성당,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주교좌성당

서울 중구 정동 덕수궁 옆 영국대사관과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 성공회 서울성당이다. 외관상 웅장하면서 화려해 보여서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이다. 1890년 건너온 성공회가 우리나라에서 자리잡게 되면서 3대 주교인 마크 크롤로프가 1926년에 완공하였다. 십자형 평면구조를 하고 있는 로마네스크의 양식의 3층 교회건물이다. 기초와 벽면의 일부는 화강석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붉은 벽돌을 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지은 건축물 중에는 한옥의 특징을 반영하는 등 외형상 창의적이면서 현대적인 디자인이 많이 반영되어 있어 웅장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주고 있다. 직접 찾아가서 보면 상당히 이국적인 외형으로 흔히 보던 개신 교회의 건물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을 준다.

성공회는 16세기 영국에서 종교개혁때 카톨릭에서 분리된 종파이다. 다른 개신교와는 달리 주교제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등 카톨릭의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다. 대한성공회는 영국성공회의 한국 교구로 1889년 하군 군종신부였던 주교 고요한(Corfe, C.J)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한옥적인 특징을 잘 갖추고 있는 강화성당과 온수리성당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전통을 받아들이는데 노력을 했으며, 병원을 개설하는 등 적극적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활동도 많이 하였다. 이곳 성공회 서울성당도 1987년 6월항쟁의 진원지가 되었던 유서깊은 장소이도 하다.

OLYMPUS DIGITAL CAMERA성공회 서울성당. 일제강점기인 1922년에 짓기 시작해서 1996년에 사실상 완공하였다. 전통 교회건축 양식인 로마네스크 양식에 한국건축의 특징을 반영하 설계하였다. 영국대사관과 함께 덕수궁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공회 서울 성당. 건물은  ’+'형의 평면배치에 한옥의 특징이 일부 반영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예배를 집전하는 제단이 있는 건물 앞쪽. 외각에 동양의 정자 형태를 하고 있는 감실과 여러 종탑 등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한옥 건물을 형상화하여 장식하고 있는 건물 외붕.

SANYO DIGITAL CAMERA위쪽에는 정자 형태의 작은 종탑을 많이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자형 평면의 중심인 내진(Choir) 위에 큰 규모의 종탑을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익랑에는 작은 종탑과 출입문 등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예배를 보는 공간으로 외형상 2층으로 되어 있다. ‘+’자형 평면의 뒷쪽은 신자들이 앉는 신랑(Nave)과 통로인 측랑(aisle)로 구성되며, 뒷편에 출입문을 두고 있다. 출입문을 뒷쪽이 아닌 옆쪽에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출입문이 양쪽에 날개처럼 만들어졌으며, 가운데에는 감실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교회내부. 가운데 넓은 신자석(Nave)와 제단이 있는 내진(Choir)를 두고 양쪽에 1칸씩 통로인 측랑(Aisle)이 있으며, 양쪽에 돌출된 익랑(Transept)를 두어 전체적으로 ‘+’형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교회건축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교회입구 현관. 가운데 손을 씻는 세례대를 두고 있다. 세례대는 사찰이나 이슬람사원 입구의 큰 수조와 같은 역할을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입구 현관 위에 설치된 파이프오르간.

OLYMPUS DIGITAL CAMERA교회 내부에서 신성한 공간인 제단이 있는 내진(內陳, Choir)과 후진(Apse)이다. 내진에는 성가대석과 제단이 놓인다. 제단 뒷편 반원형 공간인 후진 벽면을 성스러운 그림으로 장식하고 있다. 유럽 전통적인 성당과는 달리 제단을 화려하게 장식하지 않고 있다. 카톨릭 대성당과는 달리 닫집형태인 주교좌(主敎座, Cathèdra)를 두고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신자들이 앉아서 설교를 듣는 신자석(身廊, Nave). 신자들을 위한 의자가 놓여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신자석 양쪽편 통로인 측랑(側廊, Aisle). 대형 교회에서 통로 역할을 하는 공간이지만, 신자석과 마찬가지로 의자가 놓여 있다. 벽면에는 교회와 관련된 성인들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 등이 걸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측랑 벽면에 걸려 있는 역대 성공화 주교들의 사진.

OLYMPUS DIGITAL CAMERA신랑 벽면에 걸려 있는 성공회와 영국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현판.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영국인들을 기리는 내용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교회 건물의 가로축과 세로축이 만나는 지점인 교차랑(交叉廊, Crossing). 거대한 돔을 만들거나 탑을 짓는 경우가 많다. 안쪽으로 익랑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신자석으로 사용하고 있는 익랑(翼廊, Transept).

OLYMPUS DIGITAL CAMERA한국적인 문살을 하고 있는 창문.

OLYMPUS DIGITAL CAMERA신자석 위 천장.

OLYMPUS DIGITAL CAMERA1층 출입문. 사무실 등으로 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1층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성당 뒷편에는 대한성공회 교회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한옥형태의 사제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1987년 민주화를 이끈 유월항쟁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OLYMPUS DIGITAL CAMERA한옥이지만 양옥 출입문을 사용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제관 뒷편으로 들어가는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그 옆에는 덕수궁 전각이었던 양이재 건물이다. 원래 황족과 귀족 자제들 교육을 위해 덕수궁에 세워졌던 건물인데 일제강점기 이후 성공회에서 매입하여 사용해 왔다.

SANYO DIGITAL CAMERA광화문 앞 대로에서 성공회 서울성당으로 들어가는 길. 뒷편에 영국대사관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당 옆에 위치한 성공회 수녀원.

OLYMPUS DIGITAL CAMERA수녀원 출입문

SANYO DIGITAL CAMERA2008년

OLYMPUS DIGITAL CAMERA2015년

성공회 서울성당, 1926년, 서울 중구 세종대로길(정동)
이 건물은 조선성공회 3대주교인 마크 트롤로프(Mark Trollope) 주교가 1922년 영국인 아더 딕슨(A.Dixon)의 설계대로 착공하여 1926년 5월2일에 헌당식을 가진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주교좌성당이다. 이 건물 건축 당시는 일제강점기여서 원래의 ‘큰 십자가’ 형의 설계대로 못 짓고, 양쪽 날개와 아래쪽 일부를 뗀 채 ‘작은 일자형’으로 축소되는 바람에 미완의 건물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1993년 원래의 설계도를 영국의 한 도서관에서 찾게 되어 본래 모습대로 1996년에 완공하였다. 이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에 한국 전통건축기법을 조화시킨 아름다운 건물로 991.7㎡ 면적에 화강석과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외형은 십자가 형태로 율동감을 보여주고 있으며, 성당 내부에는 좌우로 12사도를 상징하는 돌기둥이 서 있고 전면 반원형 벽면에 예수그리스도의 모자이크 상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지하성당에는 트롤로프 주교의 유해가 안치된 동판이 새겨져 있다. (안내문, 서울시청, 2015년)

<출처>

  1. 서울시청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3. 문화재청
  4. 두산백과

 

서울 구대법원청사, 서울미술관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옛 대법원 청사

서울 중구 서소문동에 위치한 구 대법원청사이다. 이 건물에 일제시대에 지어진 건물로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대법원 건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지하1층, 지상3층의 근세 고딕풍 건물로 철근콘크리이트조와 벽돌조 구조에 화강석과 갈색타일을 붙여 외벽을 장식하고 있다. 중앙계단을 중심으로 정사각형의 중정(中庭)이 좌우대칭을 하고 있는 日자형 평면배치를 하고 있다. 아치형 포치(Porch)가 돌출된 현관을 비롯하여 전체적으로 일제강점기 공공건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권위주의적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는 건물이다.

법원과 관련된 일화가 있는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서 걸어가다 보면 분수가 있는 삼거리가 있고, 그 남쪽편 언덕에 고딕풍의 오래된 건물인 구대법원청사 건물이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는 김장생, 이황 등 유명인사들이 살았던 곳으로 구한말에는 육영공원, 독일영사관, 독립신문사옥 등이 자리잡았던 유서깊은 곳이다. 구한말 사법기관인 평리원(平理院: 한성재판소)이 이곳에 자리잡으면서 1995년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사법부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다. 대법원 이전 이후 건물구조 등의 문재로 전면부를 남겨놓고 리모델링하여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도심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접근성 등의 장점으로 다양한 해외 걸작들의 순회 전시를 위한 공간으로 자주 활용되고 있다.

구 대법원청사, 등록문화재237호, 1928년, 서울 중구 서소문동
이 건물은 1928년에 지어진 경성재판소 건물이다. 그 자리는 조선말 개화기 때 평리원(平理院, 한성재판소)이 세워졌던 곳이다. 이곳은 1995년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대법원 청사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지하1층, 지상3층으로 근세 고딕풍으로 지은 것이다. 뾰족 아치가 아닌 반원형 아치를 사용함으로써 장중함을 더하고 있다. 이 건물은 철근콘크리트조와 벽돌조 구조에 화강석과 갈색타일을 붙였다. 건물의 평면은 日자로 만들었는데, 중앙계단과 연결통로를 중심으로 정사각형의 중정(中庭) 두개가 있어 좌우대칭을 이루었다. 법원 단지가 이전된 후 서울시가 이 건물을 인수하여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사용하기로 하고 개조공사를 하였다. 공사 중 구조적으로 약화된 부분들이 드러나 정면의 벽판만 보존하고 나머지 부분은 철거하여 새 건물을 이어 지었다. 이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 보존 방법 중의 하나인 정면보존 방법의 사례이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덕수궁 부근 정동길에서도 높은 언덕에 위치한 구대법원청사. 일제강점기에 법원청사로 지어진 건물로 1995년 서초동으로 이전할때까지 대법원청사로 이용되었다. 지금은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통해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구대법원청사가 자리잡고 있는 언덕. 덕수궁 동남쪽 나즈막한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주변에는 서울시청 서소문청사, 등기소 등 공공기관이 많이 자리잡고 있다. 원래 대법원과 관련된 공공기관들이 들어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구대법원청사 오르는 길. 원래는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었겠지만 지금은 숲속길로 탈바꿈했다.

OLYMPUS DIGITAL CAMERA청사는 언덕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건물 외형에서도 일제강점기 공공기관 건물에서 보여주는 위압적이면서 권위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는 구한말 근대적인 사법기관인 한성재판소가 들어선 이래 법조타운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건물은 지하1층, 지상3층 규모로 3개의 아치가 있는 포치(Porch)현관을 두고 있다. 일제강점기 공공건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구조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건물 외장은 화강석과 갈색타일을 붙였으며, 아치모양의 창문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아치형 현관 내부로 자동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현관 내부에서 본 청사 앞 마당.

OLYMPUS DIGITAL CAMERA미술관으로 탈바꿈한 건물 내부.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통해 전면부를 제외하고는 새로 신축한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미술관 1층. 건물내부가 원래 건물 형태와 완전히 다른 구조를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중앙 로비가 3층까지 완전히 개방되어 있어 넓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SANYO DIGITAL CAMERA2009년 르느와르 특별전이 열렸을 때의 모습.

SANYO DIGITAL CAMERA서울시립미술관 본관은 도심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미술관이다. 세계적인 걸작들이 순회전시를 위해 한국을 찾았을 때 가장 선호하는 공간인 것 같다.

SANYO DIGITAL CAMERA2층 전시실 입구.

SANYO DIGITAL CAMERA미술관 3층 휴게실

SANYO DIGITAL CAMERA2009년 구대법원청사

OLYMPUS DIGITAL CAMERA구대법원청사 앞 마당. 숲으로 가려져 있지만 덕수궁이 내려다 보이는 위치이다. 마당 앞 숲에는 야외조각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미술관 티켓박스.

OLYMPUS DIGITAL CAMERA배재학당 앞 정동길로 나가는 길.

육영공원 터, 육영공원은 정부에서 세운 근대식 교육기관으로, 서양학문을 가르쳤다, 1886년 9월 설립 당시부터 1891년 박동(현 수송동)으로 옮겨가지 전까지 이곳에 있었다. 독일영사관터, 독일영사관은 1884년 이곳에 있던 육영공원과 자리를 맞바꾸면서 정동시대를 열었다. 1902년 다시 상동(현 남창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이곳에 있었다. 독립신문사 터,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으로 한글판과 영어판 두가지로 발간하였다. 1896년 4월7일 창간할 때부터 1899년 12월4일 폐간될 때까지 사옥이 이곳 독일영사관터 안에 있었다. <출처:서울시청>

OLYMPUS DIGITAL CAMERA청사 마당과 정원은 퇴계 이황 집터, 김장생(金長生)의 생가터 등 권문세가들의 저택이 있었던 유서깊은 자리이다. 이 곳에 구한말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을 비롯하여, 독일영사관, 독립신문 등이 자리잡기도 하였다. 정원에는 현대 미술 조작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미술관 앞 마당에 전시된 작품.

OLYMPUS DIGITAL CAMERA숲의 수호자, 최우람 작, 2006, 스테인레스 스틸

OLYMPUS DIGITAL CAMERA생각하다, 배형경 작, 2012년, 청동

<참고문헌>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문화재청, 3. 두산백과

 

서울 배재학당 동관,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옛 배재학당 건물

서울 중구 정동길 옛 대법원청사였던 서울시립미술관 부근 언덕 옛 배재학당터에 남아 있는 배재학당 동관이다. 배재학당 졸업생이자 당시 교장이었던 신흥우에 의해 1916년에 세워진 건물로 설립자를 기념하는 의미로 아펜젤러 홀(Apenzeller Hall)로 불리었다. 건물은 지하1층, 지상3층으로 옛 배재학당의 교실로 사용되었다. 앞쪽의 현관과 양옆 출입구의 돌구조 현관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건물의 구조와 모습, 건물에 사용된 벽돌 구조가 매우 우수하다. 이 건물은 처음 지어질 때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있으며, 건물의 형태도 매우 우수하여 한국근대건축의 중요한 지표가 된다. 1984년 배재중고등학교가 고덕동으로 이전하면서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2001년 3월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2008년 7월24일부터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된다.

배재학당은 한국에 세워진 최초의 서양식 학교이다. 북감리교 최초의 선교사였던 아펜젤러는 이곳에서 1885년 두명의 학생을 가르쳤는데 이것이 배재학당의 시작이다. 1886년 아펜젤러의 교육에 대하여 고종황제가 그의 교육적 가치를 알게되어 배재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배재의 의미는 “유용한 인재를 기르는 집”이란 뜻이다. 1887년 한국 최초의 벽돌교사가 세워졌다. 배재학당에는 본관을 비롯하여, 서관, 대강당 등 많은 건물들이 있었다. 배재학당의 후신인 배재고등학교는 지금은 강동구로 이전하면서 서관은 고덕동 배재고등학교로 이전하였고, 동관은 법인사무실 등으로 사용하다기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옛 배재학당 터에는 지금은 재단관련 빌딩들과 배재공원 등이 들어서 있다.

서울 배재학당 동관, 1916년, 서울 중구 정동
이 건물은 1916년 준공하여 배재중.고등학교가 1884년 2월에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동교사(東校舍)로 사용한 곳이다. 배재학당은 선교사 아펜젤러(H.G.Appenzeller) 목사가 1885년 8월에 세운 학교로 처음에는 주변의 민가를 사들여 교사로 사용하였다. 교정에는 이 동관을 비롯, 1887년에 준공하여 1932년에 철거된 본관, 1923년에 준공한 서관, 1933년에 준공한 대강당, 광복 후에 세워진 현대식 교사 등 많은 건축물이 있었다. 이 가운데 서관은 고덕동으로 이전하여 복원되었고, 다른 건물들은 배재공원을 만들 때 철거되었다. 이 건물의 외관은 그대로 유지되어 배재 중.고등학교 이전 후 문화재로 지정(2001년)되었고, 내부 골격은 그대로 유지한 채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건물은 외장 및 치장쌓기 벽돌구조가 뛰어나고 정면 현관과 양 측면 출입구의 부재들이 건립당시의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 한국 근대건축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근대교육의 발상지에 현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1885년 아펜젤러 목사가 설립한 근대식 교육기관인 배재학당 건물 중 원래 자리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동관. 1916년에 준공된 지상3층, 지하1층의 서양식 건축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건물은 당시 유행하던 미국 도시형 주택 및 공공건물의 형태로 지었다. 천장 아래에 다락방 형태의 공간이 있고, 지하 공간도 교실로 활용하고 있다. 미국 동부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건물형태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계단이 있는 출입문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출입문. 당시 일본인들이 세운 근대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자동차가 지나갈 수 있는 출입문은 없고 계단을 통해서 걸어 올라가게 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측면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미국의 도시형 주택이나  건물 등과 마찬가지로 지하실을 활용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3층은 천장 아래 공간을 활용하고 있다. 지방 바깥으로 돌출된 창문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1층 로비로 들어서는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1층은 배재학당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1층 현관 로비, 양쪽에 전시실이 배치되어 있는데, 원래는 교실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1층 전시실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옛 교실을 재현해 놓은 전시실

OLYMPUS DIGITAL CAMERA당시 학생들의 수업모습

OLYMPUS DIGITAL CAMERA2층을 오르는 계단.

OLYMPUS DIGITAL CAMERA2층은 설립자 아펜젤러 가족이 살아왔던 모습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2층 중앙 로비

OLYMPUS DIGITAL CAMERA2층 전시실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전시실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3층을 오르는 계단. 바깥에서 보였던 지붕 바깥으로 돌출된 창문을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세미니실 등으로 사용하고 있는 3층

OLYMPUS DIGITAL CAMERA정동길에서 본 배재학당. 배재학당의 후신인 배재고등학교는 1980년대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하면 그 자리에는 재단과 관련된 빌딩,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동관 건물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배재학당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안내판

OLYMPUS DIGITAL CAMERA배재학당 앞 정동길

OLYMPUS DIGITAL CAMERA배재학당과 오랜 세월을 깥이 한 고목. 그 뒷편 옛 배재학당 자리에는 업무용 빌딩이 들어서 있다.

SANYO DIGITAL CAMERA2010년 배재학당 동관

<참고문헌>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문화재청, 3.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