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어진을 모신 전주 경기전(慶基殿) 동쪽에는 옛 전주사고 실록각(實錄閣)이 복원되어 있다. 최근에 복원한 건물로 문화재로서 가치는 별로 없지만 역사적 의미가 큰 곳이다. 실록을 보관하던 사고(史庫)인 실록각은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작은 2층 누각건물이다. 전주사고를 보지못했을때는 꽤 큰 것으로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건물크기가 의외로 작고 아담한 규모이다. 2층 누각에 보관하여 습기 등으로 실록이 훼손되지 않도록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태조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 부근에 사고를 두어 철저한 유지.관리가 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역대 국왕의 통치를 정리한 실록을 편찬하고 이를 보관하는 사고(史庫)를 설치.운영하였다. 실록은 4부를 발간하여 한양의 춘추관(春秋館) 사과와 충주, 전주, 성주 관아에서 보관하게 하였다. 전주사고에 보관되었던 실록들은 임진왜란 당시 유일하게 전화(戰禍)를 면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실록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산중에 사고를 짓고 사찰에서 관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전주사고에 보관되었던 실록들은 강화 정족산 사고에 보관하고 다시 4부를 복사하여 오대산, 태백산, 적장산 사고에 보관하였다. 전주사고는 건물은 불타 없어져 버렸지만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의 기능은 없어졌다. 하지만 조선의 역사를 온전하게 전할 수 있게 한 의미있는 장소이다.
전주시 풍남동 경기전 동쪽편에 위치한 전주사고 실록각. 임진왜란 이전에 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사고 설치되었던 곳이다. 전주사고는 임진왜란 이후 새로 설치한 사고로 실록 등을 옮기 이후 그 기능을 잃었다. 원래 사고가 있었던 터에 최근에 실록각 건물을 복원하였다.
실록각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누각 건물이다. 환기 등을 고려하여 1층은 사용하지 않고 2층에 실록 등을 보관하였다.
태조 어진을 모신 경기전에서 사고가 있는 마당으로 들어가는 출입문.
태조실록(복제본), 숙종실록(복제본). 실록은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서 보관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전에 편찬된 실록 중 전주사고에 보관하던 것만 전란을 피할 수 있었다. 이후 전주사고본을 복사하여 전국 5곳에 설치된 사고에 보관하였다.
강화도 전등사 옆 정족산 사고. 전주사고에서 보관 중이던 실록은 인조대에 이곳 정족산사고로 옮겨졌다.
전주사고(全州史庫)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춘추관과 예문관을 상설하고 사관을 두어 날마다 시정(時政)을 기록하였다. 한 임금이 전왕시대의 역사를 편찬하여 이를 실록이라 하고 특별히 설치한 사고에 봉안하여 왔었다. 조선왕조에서 실록을 편찬한 것은 1409년(세종8)에 정종실록 6권을 편찬하고 1413년(세종13) 태종실록 36권을 편찬한 후 태조.정종.태종의 3조 실록 각2부씩 등사하여 1부는 서울의 춘추관, 1부는 충주사고에 봉안하였다. 그러나 2부의 실록만으로는 그 보존이 매우 걱정되므로 1445년(세종27)에 다시 2부를 더 등사하여 전주.성주에 사고를 신설하고 각1부씩 분장하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때 춘추관.충주.성주의 3사고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고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병화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손홍록(孫弘祿), 안의 등이 실록을 내장산 용굴암에 이관, 사수하였기 때문이다. 전주사고에는 실록 784권 614책 47궤, 기타 전적이 556책 15궤가 봉안되어 있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실록각은 소실되었는데 1991년 이를 복원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국보151호)은 190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출처: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