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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성군(安城郡) 관아, 고려 주심포양식이 남아 있는 안성객사

조선시대 안성군(安城郡)은 안성시청이 있는 도심을 중심으로 안성천 주변의 넓은 평야지대에 있었던 지방행정구역으로 북쪽으로는 양성현이, 동쪽으로는 죽산도호부가 있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백성군(白城郡)으로 불렸으며, 고려 태조때 안성현으로 이름이 바뀐 이래로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이 지역은 고려시대까지는 충청도에 속했다가 조선초부터 경기도에 포함되었다. 조선시대 안성군은 종4품 군수(郡守)가 고을수령으로 있었던 지역으로 전국의 군현중에서 중간정도 규모이다.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유래할 정도로 조선시대 안성유기(安城鍮器)가 전국적으로 유명했으며, 충청도와 한양을 연결해 주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상업이 크게 번성했던 지역이다. 일제강점기에 안성군, 죽산도호부, 양성현이 합쳐서 오늘날 안성시를 이루고 있다.

안성시에는 남아 있는 조선시대 안성군 관아의 중심이 되는 객사(客舍)와 중등교육기관인 향교가 옛 관아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객사는 국왕의 궐패를 모시고, 해당 지역을 방문하는 중앙관리가 잠시 머무는 숙소역할을 하는 곳으로 각 지역마다 해당 지역의 규모에 걸맞는 규모의 객사를 갖추고 있었는데, 안성은 전국에서 평균 정도 규모의 객사를 갖추고 있었다. 원래 안성읍내에 있던 것을 이곳저곳 옮겨다니다 1995년 수리.해체를 한 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안성객사는 고려시대부터 있어 왔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출토된 기와 명문에 조선 숙종대에 고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객사 건물은 고려시대에 처음 지어졌다고 알려져 있으며, 주심포계 양식의 공포를 사용하고 있으며, 궐패를 모신 정청(正廳) 건물은 대청마루를 사용하지 않는 등 고려시대 건축양식 남아 있는 많지 않은 건물 중의 하나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성시 도심에서 죽산 방향으로 가는 도로 인근에 위치한 안성객사이다. 원래는 안성군 관아가 있던 안성 읍내에 있었으나, 일제시대부터 여러곳으로 이전했다가 지금의 안성도서관 앞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중앙에 궐패(闕牌)를 모시는 정청이 있고 이 지역을 방문하는 인사들이 머무는 방인 좌.우익랑이 양쪽에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성객사 중앙 위치한 정청(正廳)이다. 객사에서 정청은 임금의 위패인 궐패를 모시고 신년 등 여러 행사때 절을 올리는 곳이다. 안성객사는 고려시대에 처음 지어진 건물로 여러차례 수리가 있었지만 고려시대 양식이 많아 남아 있는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다른 지역 객사는 중앙에 넓은 대청마루가 있는 반면에, 안성객사는 고려시대 목조건축물인 봉정사 극락전처럼 마루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객사 중앙에는 ‘백성관(白城館)’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백성(白城)’은 통일신라시대 안성지역의 고을 이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청은 기둥 머리 위에만 처마를 받치는 공포를 얹은 고려 주심포계 양식의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성객사의 좌익랑. 가운데 1칸을 온돌방으로 사용하고 있고, 앞면 2칸의 넓은 마루를 두고 있다. 정청과는 달리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좌익랑 온돌방

OLYMPUS DIGITAL CAMERA우익랑은 앞면 4칸 건물로 온돌방 2칸, 마루 2칸으로 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우익랑 마루.

OLYMPUS DIGITAL CAMERA안성객사.

OLYMPUS DIGITAL CAMERA객사문.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객사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안성객사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안성객사

OLYMPUS DIGITAL CAMERA뒷쪽에서 본 안성객사

OLYMPUS DIGITAL CAMERA 안성시 보개면 안성시 종합운동장 주변에 위치한 안성객사.

SANYO DIGITAL CAMERA2009년 안성객사

OLYMPUS DIGITAL CAMERA안성군 관아에서 설치하던 안성향교. 다른지역에 비해 비교적 늦은 시기인 중종대에 처음 세워졌다고 한다. 최근인 1980년대까지 건물들이 중수되었다고 하며, 내력이 깊은 건물은 없지만, 앞면 11칸의 2층 누마루를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안성군이 교통에 요지에 위치하고 있어 여행하는 유생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다른 지역에 비해서 강당건물을 크게 지어놓고 있다.

안성객사
객사란 지방 관아의 중심 건물로 고을 수령이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상징하는 전패를 놓고 절하는 의식인 망궐례(望闕禮)를 행고,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머물렀던 시설이다. 안성객사는 조선초기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다. 명문이 쓰여진 기와는 조선 숙종 21년(1695)에 고쳐졌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원래 읍내의 관에 부변에 있었다고 하는데 1932년 명륜여자중학교로 옮겨졌다가 1995년 해체.수리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정면3칸의 주심포계 맞배집인 정청건물이 중앙에 있고, 좌우에 정면2칸, 옆면 2칸의 익공계 팔작집이 날개처럼 덧붙여 있다. 정청은 곡선굽을 가진 주두(柱頭), 헛첨차와 사다리꼴 보머리, 항아리형 단면의 보 등 고려시대 주심포계 건축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안성 객사는 몇동 남아 있지 않은 고려시대 주심포계 건축이라는 점에서 건축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안성시청, 2014년)

종친부(宗親府) 경근당과 옥첩당, 왕실 종친을 관리하던 관청

경복궁 건춘문은 조선시대 왕실 가족들이 드나드는 출입문이며, 그 앞에는 왕실 친인척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관청인 종친부(宗親府)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에 현대식 병원이 들어서고 한국전쟁이후 육군통합병원과 기무사령부가 자리잡았다. 종친부 건물은 1980년대에 경기고등학교가 있던 자리에 만들어진 정독도서관 마당으로 옮겨졌다가 최근에 기무사령부가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그 자리에 들어서면서 종친부 건물도 같이 옮겨졌다.

종친부는 궁궐을 드나드는 외척이나, 상궁 등을 감시하거나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할 목적으로 경복궁 건춘문 앞에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종친부는 종친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는 중앙부처이기는 하지만 <경국대전>을 비롯한 법령에는 직제와 인원에 대한 규정이 명확하지 않았으며, 종친들에게 명예직으로 관직을 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까닭에 종친부는 조선시대 최고의 관청이었던 의정부보다 지위가 높은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종친부 건물 또한 그 위상에 맞게 지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종친부 건물은 정청인 경근당과 별채인 옥첩당, 그리고 두 건물을 연결해 주는 복도로 이루어져 있다. 정청 건물인 경근당은 앞면 7칸으로 관청건물 중에서는 상당히 규모가 큰  규모로 의정부나 삼군부 청사와 비슷한 규모이다. 경근당에는 국왕의 어진 등을 보관했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 사무공간은 별채인 옥첩당에서 했던 것으로 보인다. 낙산 서울성곽 동쪽과 육사교정으로 옮겨진 삼군부 건물과 함께 조선시대 관청 건물 중 남아 있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조선시대 관청가인 육조거리에 있었던 의정부를 비롯한 주요 관청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어 조선시대 관처의 모습을 실제로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시대 왕실 친인척인 종친을 관리하던 업무를 담당했던 관청인 종친부.

의정부의 비롯하여 조선시대 중앙관청건물은 가운데 정청을 두고 양쪽에 실무관헌들이 근무하는 별채 두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재 종친부 건물은 정청에 해당하는 경근당과 별채인 옥첩당이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2010년 정독도서관 마당에 있었던 종친부 청사.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
종친이란 국왕의 친가 쪽 친척을 말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임금의 정식부인에게서 난 자손은 4대손까지, 후궁에게서 난 자손은 3대손까지 종친으로 대우하였다. 종친부는 종친과 관련된 일들을 의논하고 처리하던 관아였으며, 국왕들의 족보와 초상화를 관리하는 일도 담당하였다. 원래 종친부는 경복궁 동쪽 문인 건춘문의 맞은 편에 있었는데, 이는 건춘문이 왕족과 외가의 친척, 상궁들이 드나드는 문이었기 때문이다. 이 건물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1981년에 정독도서관으로 옮겨졌다. 건물은 본채인 경근당과 그 오른쪽 결채인 옥첩당, 그리고 그 둘을 연결하는 복도로 이루어져 있고 본채 앞에는 월대라는 넓은 단이 있다. 복도는 본채의 뒤쪽과 결채 앞쪽의 트인 공간을 서로 연결해 주는데, 두 건물의 바닥 높이가 서로 다리기 때문에 계단의 기능도 겸하고 있다. 이 건물은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관아 건물 세 동 가운데 하나로 조선 후기 서울 중앙 관청의 격식을 보여주는 드문 사례이다. <출처:서울시청>

OLYMPUS DIGITAL CAMERA종친부 정청 건물에 해당하는 경근당(敬近堂).

건물은 앞면 7칸 규모의 큰 건물이다. 종친부에서 역대 모든 제왕의 어보(왕의 도장)와 영정(초상화)을 보관하였다고 하는데, 이 건물에 보관했을 것으로 보인다. 건물 앞에는 주요 행사를 치를 수 있는 월대가 조성되어 있으며, 별채인 옥첩당과는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근당 현판.

OLYMPUS DIGITAL CAMERA종친부 경근당에는 높지는 않지만 넓은 월대를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건물 앞쪽 1칸은 통로로 사용하는 복도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뒷쪽에서 본 경근당과 옥첩당.

경근당은 뒷쪽에도 옥첩당과 연결된 복도를 두고 있어 왕래를 쉽게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종친부 경근당.

OLYMPUS DIGITAL CAMERA종친부 별채 건물에 해당하는 옥첩당(玉牒堂).

앞면 5칸 규모의 건물로 실무 관헌들이 근무하는 장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옥첩당 현판

OLYMPUS DIGITAL CAMERA종친부 옥첩당과 경근당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옥첩당 앞쪽 복도와 경근당 뒷쪽 복도가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옥첩당.

OLYMPUS DIGITAL CAMERA우물

조선시대 종친부에서 사용했던 것이며, 두개의 타원형 갓돌로 만들어졌다. 우물 갓돌의 네모형 괴임에는 동서남북을 표시하며, 물동이를 놓기도 하고 정수를 떠 놓고 소원을 기원했던 자리이다. 우물옆 소나무는 약300년전 정자수로 식재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서울시청>

OLYMPUS DIGITAL CAMERA경복궁 동문에 해당하는 건춘문.

조선시대 궁궐을 출입하는 종친, 외척, 상궁, 나인 등은 건춘물을 통해서 출입을 했다. 종친부는 건춘문 앞에 위치하고 있어 궁궐을 출입하는 인사들을 감시하고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복궁과 종친부 사이를 지나는 큰 길. 원래는 북악산에서 발원한 개천이 흐르는 곳이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종친부 터에 남아 있는 고목.

SANYO DIGITAL CAMERA2010년 종친부 경근당.

SANYO DIGITAL CAMERA2010년 종친부 옥첩당

OLYMPUS DIGITAL CAMERA2014년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

종친부
조선왕조 역대 모든 제왕의 어보(왕의 도장)와 영정(초상화)을 보관하고, 왕과 왕비의 의복을 관리하며 종실제군(宗室諸君)의 봉작승습·관혼상제 등 모든 사무를 맡아보던 곳이다. 조선 전기에는 ‘재내제군소’라 하였으나 여러 차례 그 명칭과 기능이 바뀌었다가, 세종 12년(1430)에 종친부라 하였다. 순종 융희 1년(1907)에는 이를 폐지하고, 이곳 사무를 규장각으로 옮겼다. 원래 삼청동에 있던 것을 1981년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출처:문화재청>

종친의 정원은 없었으며 관직은 대군(大君:王嫡子)·군(君:王庶子)·영종정경(領宗正卿)·판종정경(判宗正卿:정2품)·군(정1품~종3품)·지종정경(知宗正卿:정2품~종1품)·종정경(宗正卿:종2품)·도정(都正:정3품)·정(正:정3품)·부정(副正:종3품)·수(守:정4품)·영(令:정5품)·전부(典簿:정5품 朝官) 각 1명, 부령(副令:종5품)·감(監:정6품)·주부(主簿:종6품 朝官) 각 1명, 직장(直長:종7품 朝官) 1명, 참봉(종9품:朝官) 1명으로 구성되었다. <출처:두산백과>

삼군부(三軍府) 총무당과 청헌당, 조선시대 최고 군사기구였던 삼군부 청사

삼군부(三軍府)는 조선초 군사관련 업무와 군령을 통합관리하던 관청으로 종래의 십위군을 중.좌.우군의 3군으로 나누고 자체 감독권과 지원권을 갖는 중앙 군사체제였다. 삼군부 체제는 후에 오위체제로 개편되기까지 중앙부대인 동시에 왕권과 수도를 방위하는 병력을 지휘.감독하는 최고 군부로 자리잡았다. 조선중기 이후에는 큰 역할을 하지는 못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군사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비변사(備邊司)가 국가 최고합의 기관으로 자리잡으면서 군사 뿐만 아니라 정치.외교 등 국정전반에 걸친 최고 의결기구로 그 기능이 확대되면서 의정부가 유명무실화되고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비대화되었다.

고종대에 흥선대원군은 비대화된 비변사를 견제하기 위하여 의정부의 기능을 회복하고 조선개국초의 정신을 되찾는다는 의미로 다시 삼군부를 설치하고 기존의 비변사는 의정부와 통합하였다. 삼군부는 최고 군사기구로 오늘날 합동참모본부와 비슷한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삼군부는 1880년 근대적인 군사체제를 도입한다는 취지로 폐지되고 그 직무는 통리기무아문으로 올겨졌다. 그후 임오군란으로 다시 부활하기는 했다가 다시 폐지되었다. 삼군부는 1880년 혁파될 때까지 최고의 군사기구로서 병인.신미양요를 치루는 국방상 중요 역할을 수행하였다.

삼군부 건물은 조선시대 중앙부처 관아 건물 중 하나로 정청인 총무당(總武堂), 그 좌우에 보조건물격인 청헌당(淸憲堂)과 덕의당(德義堂)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한말인 고종때 지어진 삼군부 청사는 약 100년이 조금 넘은 건물로 건축문화재로서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볼 수 있지만, 조선시대 최고 행정기구인 의정부와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관아로서 의정부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어 당시 관아건물 형태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건물은 앞면 7칸의 규모가 상당히 큰 편에 속하는 건물로 많은 사람들이 근무했던 장소로 보인다. 삼군부 청사가 있던 광화문 앞 육조거리 서쪽에는 예조가 있었으나, 고종대에 군부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서 이곳에 삼군부 청사를 세웠다고 한다.

정청인 총무당은 서울 돈암동 서울성곽 낙산 동쪽편 언덕 아래로 옮겨졌고 보조 건물인 청헌당은 공릉동 육군사관학교로 옮겨졌고, 덕의당은 남아 있지 않다. 청헌당은 1967년까지 광화문 광장 서쪽 정부종합청사자리에 있었다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청헌당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그리 크지 않은 건물로 초익공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조선시대 광화문 앞 육조거리 모형. 삼군부 청사가 있던 대로 서쪽편에는 원래 예조가 있었으나, 구한말 삼군부를 설치하면서 예조를 옮기고 삼군부 청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 규모나 형태는 대로 동쪽편 의정부와 비슷하게 지었으며, 정청인 총무당과 양쪽에 익랑형태의 청헌당, 덕의당과 실무자들이 근무했던 행각으로 구성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원래 삼군부 청사가 있었던 곳에는 현재 정부종합청사가 세워져 있다. 삼군부 건물은 1967년 이 건물이 세워지기 전까지 이 곳에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문무가 조화를 이루를 정치를 추구했으며, 최고 군사조직인 삼군부는 경북앞 광화문 서쪽에, 의정부는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북구 돈암동 한성대학교 교정 서쪽편 언덕 아래에 위치한 삼군부 총무당 건물. 삼군부 총무당 건물은 앞면 7칸의 큰 건물로 중앙3칸은 대청마루, 양쪽으로 1칸씩 온돌방과 창고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후기 구한말에 지어진 많은 한옥건물들과 건축 수법이 비슷하고, 당시의 관청 건물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희귀한 건축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건물은 팔작지붕에 다포계 양식을 하고 있지만, 사찰건물들처럼 공포를 화려하게나 많이 주지는 않고, 굵고 간결하게 하여 단정하면서도 절도가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건물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많은 사람이 참석하는 회의장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삼군부 총무당 현판 글씨는 강화도 조약 업무를 주관했던 신헌이라는 사람이 쓴 글씨라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건물 양쪽에는 2칸씩 방을 두고 있는데, 삼군부 고위직이 근무했던 곳으로 여겨진다.

OLYMPUS DIGITAL CAMERA건물 앞.뒤에는 넓지 않는 통로 목적의 마루를 두고 있으며, 건물 앞에는 별도로 월대를 두고 있지는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삼군부 총무당 전경. 총무당은 삼군부 청사의 정청 건물로 양쪽에 익랑격인 청헌당과 덕의당을 두고 있는 구조이다. 의정부나 육조같은 조선시대 중앙 관청은 대부분 이와 비슷한 구조의 주건물과 실무관헌들이 근무하는 행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한성대 교정에서 내려다 본 삼군부 총무당

OLYMPUS DIGITAL CAMERA낙산공원에서 내려다 본 삼군부 총무당 뒷편

SANYO DIGITAL CAMERA2010년 삼군부 총무당.

삼군부 청헌당, 서울 노원구 공릉동
이 건물은 1868년(고종5)에 지은 것으로, 조선말기에 설치된 삼군부의 청사다. 이 청사를 지은 2년 뒤인 1870년 4월에 화재가 발생하여 건물 79칸이 모두 없어졌으며, 같은 해 윤 10월에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때 청헌당까지 다시 지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1967년까지 본래 위치에 있었으나 정부중앙청사를 지으면서 같은해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 1977년에 수리하면서 다소 모습이 달라졌다. 청헌당의 규모는 정면5칸, 측면 3칸이며, 기둥 위를 초익공을 짜고 팔작지붕을 얹어 꾸몄는데, 이는 조선말기 건축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삼군부 시절에는 정청인 총무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크기가 다소 작은 청헌당과 덕의당이 나란히 있었고, 총무당과는 복도각으로 이어져 있었다. 조선 초에 문무를 양립하는 정치를 펴고자 의홍삼군부를 창설하고, 건물도 의정부 맞은편에 두었었다. 고종은 이런 국초의 전통을 되살려 1865년(고종2)에 삼군부를 다시 설치하고 대궐의 수비와 도성 순찰같은 업무를 총괄하게 하였다. <출처:서울시청>

OLYMPUS DIGITAL CAMERA육사경내로 옮겨져 있는 조선시대 최고군사조직인 삼군부 관아 건물 중 청헌당이다. 구한말인 1868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많지 않은 조선시대 중앙 관아 건물 중 하나이다. 정청인 총무당에 비해 규모가 작고 소박해 보인다. 삼군부 실무 관헌들이 근무하던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문살은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형태인 띠창살을 사용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청헌당 현판

OLYMPUS DIGITAL CAMERA기둥위에 보를 바치는 구조는 초익공을 하고 있으며, 겹쳐마 서까래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추녀마루끝 용머리 장식.

OLYMPUS DIGITAL CAMERA삼군부 청헌당 전경.

OLYMPUS DIGITAL CAMERA삼군부 청사가 있었던 광화문 대로 육조거리.

 삼군부 총무당(總武堂),
이곳은 1868년(고종5)에 지은 것으로 조선말기에 설치된 삼군부의 청사(청헌당, 총무당, 덕의당) 가운데 중심건물이었다. 그런데 <고종실록>에는 1870년 4월에 발생한 화재로 청사의 건물 79칸이 소실되고 같은 해 윤 10월에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총무당까지 화재를 입어 다시 지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삼군부로 사용하던 당시에는 정청인 총무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규모가 작은 청헌당과 덕의당이 나란하게 있었다. 총무당은 좌우 두 청사와 복도각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다. 1880년에 삼군부가 혁파된 뒤에는 통리기무아문, 시위대청사로 사용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조선보병사령부 건물로 쓰였다. 총무당은 1930년대에 현재 자리로 옮겨졌으나, 덕의당은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다. 이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규모이며, 건물의 기둥머리는 익공으로 짜고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만들었다. 이는 조선 말기의 건축특성을 잘 보여준다. 조선은 1865년(고종2) 정부와 군부를 분립시켰던 국초의 전통을 되살려 삼군부를 다시 설치하였다. 삼군부는 군무를 통솔하고 변방에 관한 일까지 관장했다. 총무당의 현판 글씨는 강화도조약 때 조선의 대표였던 신헌이 썼다. <출처:서울시청>

강화 용흥궁(龍興宮),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잠저(潛邸)

강화읍 관청리에 소재한 조선 25대 철종이 강화도 유배시절에 살았던 잠저(潛邸)인 강화 용흥궁이다. 용흥궁은 원래 초가였던 것을 철종이 즉위한지 4년이 되던해에 강화유수 정기세가 현재와 같은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관아가 있던 지역이라 좁은 골목안에 대문을 세우고 일반 민가처럼 사랑채, 안채, 문간채를 지었는데, 이를 별전, 내전, 외전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 잠저는 인조, 철종, 고종처럼 정상적으로 왕세자를 거쳐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국왕이 후사가 없거나 반란 등의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왕위에 추대된 왕이 민간인 신분으로 살았던 집을 말하며 태조의 함흥본궁, 인조의 저경궁, 영조의 창의궁 등이 있다.

은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의 손자로 그의 형 회평군의 옥사로 가족이 강화도에 유배되어 살다가 헌종 사후 덕완군으로 책봉되었다가 1849년에 왕위에 즉위했다. 철종철종의 재위시기는 구한말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했으며, 청나라의 몰락 등 동아시아 정세 또한 극히 나빴던 시기이기도 한다.강화읍 관청리는 역사유적지구라고 할 수 있는 고려궁지, 강화유수부 동헌, 강화성당, 강화성공회성당 등이 모여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강화유수부 관아가 있었기때문에 강화도로 귀향을 왔던 철종 가족들은 강화유수의 감시를 받으면서 관아 주변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강화 용흥궁,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조선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거쳐하였던 잠저로 강화유수 정기세가 철종 4년(1853)에 지금과 같은 건물을 짓고 용흥궁이라고 하였다. 좁은 골목 안에 대문을 세우고 행낭채를 두고 있어 창덕궁 낙선재와 같이 소박한 분위기를 풍긴다. 궁 안에는 철종 잠저임을 기록한 비석과 비각이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내전 1동, 외전 1동, 별전 1동 등이다. <출처:강화군청>

OLYMPUS DIGITAL CAMERA강화 용흥궁 전경. 강화읍 관청리 언덕에 세워진 강화성공회 성당 아래 주택가에 세워진 한옥건물이다. 원래는 초가였던 것을 철종 즉위 후 강화유수 정기세가 크게 지었다고 한다. 창덕궁 낙선재처럼 구한말 서울지역 양반가 저택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솟을 대문과 양쪽으로 외전이라고 불리는 문간채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집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던 문간채가 있다. 골목과 붙어 있는 문간채는 솟을대문 양쪽으로 2칸씩 방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문간채에 해당하는 외전 마당. 안채와는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외전에서 내전(안채)을 출입하는 중문과 담장.

OLYMPUS DIGITAL CAMERA내전이라 불리는 안채. ‘ㄱ’자형 건물로 각 앞면 3칸씩으로 가운데 2칸짜리 넓은 대청마루가 있다. 낙선재와는 달리 경북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폐쇄적인 ‘ㅁ’자형 구조대신 개방적인 ‘ㄱ’자형 건물배치를 하고 있다. 서울도심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주택의 구조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청마루. 앞면 2칸규모이며, 앞쪽에는 통로로 사용하는 툇마루를 달아놓아 넓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안방은 양쪽으로 큰 문을 달아놓아서 시원해 보인다. 구한말 양반가옥에서 사용했던 가구들을 놓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쪽편에는 앞면 5칸 규모의 행랑채가 있다. 하인들이 머무는 작은 방과 마루, 3개의 광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 민간주택에 비해서 광이 많은 편이다. 행랑채 왼편에는 안채에서 외부로 출입하는 출입문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골목 담장쪽에 만들어 놓은 광. 행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바깥 골목에서 본 행랑채. 서울지역 도시 한옥의 모습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채뒷편의 작은 우물과 별전이라 불리는 사랑채와 연결되는 쪽문.

OLYMPUS DIGITAL CAMERA일반 사대부 저택의 사랑채라고 할 수 있는 뒷편에 있는 별전. 앞면4칸에 누마루를 두고 있는 조선후기 양반가 사랑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랑채에는 작은 온돌방과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당시 양반가 저택에 비해서는 상당한 소박한 규모의 사랑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랑채 마당에 있는 우물

OLYMPUS DIGITAL CAMERA우물 왼편 언덕에는 이곳에 철종이 머물렀던 잠저임을 알려주는 비석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이 곳이 철종이 머물렀던 잠저(潛邸)임을 적어 놓은 비석.

 

경복궁 편전(便殿), 국왕의 집무공간인 사정전(思政殿) 일원

경복궁 편전 영역인 사정전(思政殿) 일원은 정전인 근정전(勤政殿) 뒷편에 자리잡고 있다. 이궁(離宮)으로 처음 세워졌다가 임진왜란 이후 법궁(法宮) 역할을 했던 창덕궁은 편전인 선정전(宣政殿)이 협소하여 침전이었던 희정당(熙政堂)을 편전으로 같이 사용했던 반면, 경복궁은 법궁으로 국왕의 집무공간인 편전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

경복궁 편전은 중앙에 사정전을 두고 양쪽에 부속건물이 온돌방이 있는 만춘전과 춘추전을 두고 있다. 사정전(보물1759호)은 태조가 경복궁을 창건할 때 편전 건물로 지어진 건물로 조선을 설계했던 정도전이 이름을 지었다. 경복궁 처음 세웠을때는 양쪽의 만춘전과 천추전이 행각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오늘날처럼 독립된 건물 형태로 만들었다. 편전 정면에는 수행원들의 업무공간인 행각 대신 왕실을 주요 물품들을 보관하는 창고인 내탕고(內帑庫)가 배치되어 있다.

편전은 국왕이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으로 국왕이 주재하여 국가정책 등을 결정하는 어전회의나 국왕과 신하들이 유학경전을 토론하는 경연(經筵) 등 주요한 회의가 열렸다. 편전인 사정전 내부는 근정전처럼 넓은 대청마루로 이루어졌으며, 국왕의 권위를 강조하는 딱딱한 느낌을 주는 공간이다. 실제로는 국왕이 주재하는 어전회의는 편전인 사정전에서, 경연은 자유로운 분위기를 주는 수정전(修政殿, 옛 집현전)을 열렸을 것으로 보인다. 편전 부속건물인 만춘전과 천추전에서는 동절기에 어전회의를 열거나, 신하들을 접견하는 용도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사정전(思政殿) 일원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더불어 일상 업무를 보던 곳으로,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 세미나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매일같이 열렸다. 1867년 중창된 사정전은 공식업무공간으로 마루만 깔려 있지만, 좌우의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은 비공식 업무시설로서 온돌방을 두어 왕과 신하들에게 편의를 제공했다. 사정전 앞의 행각에 천지현황(天地玄黃) 등 천자문 순서로 이름을 붙인 창고가 있어 왕실의 요긴한 물품들을 저장했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경복궁 내 국왕의 공식적인 집무공간인 편전의 중심건물인 사정전이다. 조선의 법궁으로 정문에서 정전을 거쳐 침전까지 연결되는 ‘一’자 축에 위치하고 있다. 창덕궁 편전인 선정전이 출입문에서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는 반면, 사정전은 근정전처럼 마당에 홀로 서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편전 출입문인 사정문(思政門). 삼문의 형식을 하고 있으며, 근정전과는 답도로 연결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현재의 사정전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세워진 건물이다. 건물은 장대석으로 두른 3단의 기단위에 쌓았으며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다. 건물은 벽이 없이 사방이 문과 창(窓)으로 되어 있다. 경복궁을 창건했을때는 사정전과 만춘전, 천추전은 행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정전 기단과 계단. 국왕이 사용하는 중앙 계단은 답도로 연결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계단 한쪽편에는 조선시대에 많이 사용된 시계인 앙부일구가 놓여 있다.

앙부일구(仰釜日晷, 보물845호, 복제품), 
앙부일구는 세종 16년(1434)에 처음 만들어진 천문의기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던 해시계의 일종이다. 시계판이 가마솥같이 오목하고 하늘을 우러러 보고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 청동의 오목판 안바닥에는 일곱 개로 세로줄이 그려져 있는데, 이를 시각선(時刻線)이라고 한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면서 생기는 그림자가 이 시각선에 비쳐지면서 시간을 알 수 있다. 바닥에는 시각선 이외에 열세 개의 가로줄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24절기를 나타낸다. 제일 바깥 줄은 동지의 해 그림자가 따라가는 줄이며, 제일 안쪽 줄은 하지선이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사정전 현판. 겹처마에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으며, 화려한 단청으로 장식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정전 분합문과 창.

OLYMPUS DIGITAL CAMERA추녀마루 잡상

OLYMPUS DIGITAL CAMERA사정전 내부는 넓은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구는 많이 배치해 놓고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편전은 국왕이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으로 중앙에 어좌가 배치되어 있다. 어좌 앞쪽에는 사초(史草)를 작성하는 사관(史官)과 비서설에 해당하는 승정원 관원이 배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으로 국왕과 주요 관료들이 참여하는 어전회의가 주로 열렸던 것으로 보인다.

어전회의
이곳은 어전회의를 하던 편전이다. 어전회의는 임금이 조정의 신하들과 중요 국정을 논의하던 회의이다. 조선왕조에서는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라는 유교이념에 입각하여 국정의 근본을 위민정치에 두었으며, 그것은 곧 국민을 소중히 여기는 정치였다. 이같은 바탕 위에서 나라의 중요 국사는 반드시 어전회의를 거쳐서 시행하였다. 임금의 친림하에 삼공(영의정, 좌.우의정)과 육경(육판서)을 비롯하여 각기 안건에 따라 필요한 현직 및 전직 신하들이 동.서로 정좌하고, 검결, 주서 등 사관이 배석한 가운데 국사가 논의 되었다. 임금은 조신들로 하여금 의견을 충분히 피력하게 한 후 이를 수렴하여 그 사안에 대해 결정을 내렸다. 이같은 어전회의에서의 공정한 국정심의를 위해 다음과 같은 제도가 뒤따랐다. 첫째, 사관제도이다. 국법에 의하여 영의장과 같이 최고의 관직자라도 특별한 경우 외에는 사관의 입회없이 임금과 혼자서 대화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어전회의에서도 사관은 반드시 신하들의 발언과 행동은 물론, 임금의 언행마져 낱낱이 기록하여 남겼다. 이를 사초라 하고, 이는 후에 실록편찬의 기본자료가 되었으니, 군신의 언행은 저절로 신중하고 주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언관제도이다. 만약에 어전회의에서 타당성이 결여된 결정이 내렸을 경우에는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에서 그 시정을 요구하였는데 이들 언관에게는 면책특권이 있었다. 이는 선비(유생)들의 언론을 존중하고, 잘못된 어전회의의 결정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었다. 어전회의를 중심으로 하는 이같은 정사처리는 민의에 바탕한 조신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제도로서, 당시에는 상당히 합리적인 국정운영이었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 어좌 위로는 두마리의 용이 붉은색 여의주를 중심으로 배치된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우물천장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건물 내부에도 다포계 공포를 배치하여 화려한 느낌을 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뒷쪽에서 본 사정전

SANYO DIGITAL CAMERA2008년 사정전

OLYMPUS DIGITAL CAMERA편전 출입문인 사정문

경복궁 천추전과 만춘전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크기와 구조가 같다. 지금의 천추전은 고종의 경복궁 재건 당시에 세워진 것이다.천추전과 만춘전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크기와 구조가 같다. 만춘전은 한국전쟁 때 소진되어 기단과 주춧돌, 고막이돌만 남아 있던 것을 1998년에 다시 중건되어 오늘에 이룬다. 천추전과 만춘전 두 건물의 중앙에는 대청이 있고 좌우로 방이 있는 구조이다. 대청마루의 동서로 두 개의 방이 있고 이 좌우의 방을 덥히기 위해 구들을 놓아 두 건물의 동서쪽 기단에 뚫린 구멍이 바로 아궁이이고 굴뚝은 뒤편 처마 끝에 바짝 붙어 있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만춘전은 편전 부속건물로 사정전 동쪽에 위치한다. 건물은 앞면 6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겨울에 집무를 볼 수 있도록 온돌방이 있다. 가운데 2칸은 대청마루, 양쪽에 2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고종대의 중건된 만춘전건물은 한국전쟁때 파괴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88년 중건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오른쪽 온돌방에 재현해 놓은 국왕의 집무공간. 편전건물로 회의를 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일상적인 업무를 보거나 손님을 접견하는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왼쪽편 온돌방

OLYMPUS DIGITAL CAMERA온돌방 바깥쪽에 마루가 있다. 국왕을 수행하는 수행원들이 대기하는 공간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건물 옆면에 아궁이가 있고, 뒷편에 벽돌로 쌓은 굴뚝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2008년 만춘전

OLYMPUS DIGITAL CAMERA만춘전에서 침전인 강녕전으로 출입하는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만춘전 동쪽편 행각. 국왕 수행하는 인원들이 업무를 보는 공간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이 행각은 경복궁 내에서도 특이하게 통로로 사용할 수 있는 툇마루를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궁으로 연결되는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 천추전은 사정전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만춘전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건물은 만춘전과 마찬가지로 앞면 6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천추전 굴뚝

SANYO DIGITAL CAMERA2008년 천추전

OLYMPUS DIGITAL CAMERA천추전 서쪽편 행각. 당호는 걸려 있지만, 동쪽편 행각과 달리 툇마루가 없다.

OLYMPUS DIGITAL CAMERA부엌처럼 생긴 창고.

OLYMPUS DIGITAL CAMERA편전 영역 앞쪽에는 행각을 두지 않고 왕실물품을 보관하는 내탕고가 있다. 내탕고는 왕실의 재물인 금.은.비단.포목 등을 보관하는 창고이다. 내탕고 재물은 재해나 기근이 있을때 백성을 구휼하거나 국왕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등 국왕의 권위를 유지하는 재원 역할을 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 창고는 천지현황(天地玄黃) 등 천자문 순서로 이름을 붙여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