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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중평마을

경북 청송군 판천면 중평리에 있는 중평마을(중들마을)이다. 평산신씨 후손들이 모여사는 집성촌이다. 청송과 진보 중간에 위치한 들판이라 하여 중평(中平)이라고 한다. 청송읍에서 북동쪽으로 4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진보, 영양과 안동 임하로 연결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들판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들판은 넓지 않은 편이다. 마을에는 평산신씨 판사공파종택, 서벽고택, 사남고택 등이 남아 있다. 마을 동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용전천 옆에는 사양서원이 있다.

청송 중평마을 DSC07080<청송 중평마을 입구>

청송 중평마을<마을 위성사진>

청송 중평마을 DSC07078<마을입구에서 보이는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

청송 중평마을 DSC07075<마을로 들어오는 길>

마을 안길로 들어서면 동쪽편에는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이 있고, 서쪽편에는 분가한 후손들이 지은 고택인 사남고택과 서벽고택이 있다. 서벽고택 뒷편에는 서당과 영모당이 있다.

청송 중평마을 DSC07025<마을 안쪽길>

청송 중평마을 DSC07026<종택 앞 마을길>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은 조선후기에 건축된 큰 규모의 저택이다. 종택은 본채, 별채, 대문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은 앞면 7칸, 옆면 5칸, 뒷편 5칸의 ‘ㅁ’자형 평면을 하고 있다. 별채는 앞면 5칸 규모의 큰 사랑채라 할 수 있다.

청송 중평마을 DSC07039<대문채>

청송 중평마을 DSC07038<별채>

청송 중평마을 DSC07028<공사중인 본채>

청송 중평마을 DSC07037<종택 앞 마을길>

청송 중평마을 DSC07033<동쪽으로 이어지는 마을길>

청송 중평마을 DSC07040<마을 서쪽길>

서벽고택(棲碧古宅)은 18세기에 종택에서 분가하면서 처음 지었으며 그 후 확장하였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4칸의 ‘ㅁ’자형 평면을 하고 있다. 중문칸 서쪽에 큰사랑방을, 오른쪽에 작은사랑방을 두고 있다. 뒷편에 서당과 영모각이 있다.

청송 중평마을 DSC07073<서벽고택>

청송 중평마을 DSC07050<옆쪽에서 본 서벽고택>

청송 중평마을 DSC07052<영모각과 서당>

청송 중평마을 DSC07053<서벽고택 앞길>

청송 중평마을 DSC07061<사남고택>

사남고택 (泗南古宅)은18세기 후반에 분가하면서 지은 집이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4칸의 ‘ㅁ’자형 평면을 하고 있다. 앞쪽에는 중문을 중심으로 왼쪽에 큰사랑방이, 오른쪽에 작은사랑방이 있다. 큰 사랑방은 기단을 높게 하고 별도로 팔작지붕을 올려 누마루가 있는 독립된 건물처럼 보인다.

청송 중평마을 DSC07058<사남고택>

청송 중평마을 DSC07062<사남고택 앞길>

<출처>

  1. 안내문, 청송군청, 2023년
  2. ‘중평리 평산신씨 집성촌’, 디지털청송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3. ‘평산신씨 판사공파 종택’, 디지털청송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4. 서벽고택’, 디지털청송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5. ‘사남고택’, 디지털청송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청송 덕천마을

경북 청송군 파천면에 있는 전통마을인 덕천마을이다. 청송을 본(本)으로 하는 청송심씨(靑松沈氏)가 모여사는 마을이다. 산줄기가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마을 동쪽으로 신흥천이 남북으로 흐른다. 대지주 심호택이 1880년 마을로 이사하면서 지은 99칸 대저택인 송소고택을 비롯하여 송정고택, 초전댁, 창실고택, 찰방공종택 등 여러 고택들이 남아 있다. 고위 관직을 역임한 권문세가라기보다는 경제적으로 성공한 지주계층이 모여 살았던 마을이다.

청송 덕천마을 20230831_16<청송 덕천마을>

청송 덕천마을<덕천마을 위성지도, 2023년>

덕천마을은 청송심씨 시조의 무덤이 있는 곳에는 약 4km, 청송읍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농촌 전통테마마을로 숙박체험 등을 할 수 있다.

청송 덕천마을 20230831_23<마을 입구>

청송 덕천마을 20230831_22<마을회관 부근>

청송 덕천마을 20230831_24<마을로 들어가는 길>

청송 덕천마을 20230831_12<안쪽에서 본 모습>

청송 덕천마을 20230831_25<마을 가운데 위치한 송소 고택>

송소고택(松韶古宅)은 19세기말 만석군 심호택 일가가 조상의 본가인 덕천마을로 옮기면서 지은 99칸 규모의 대저택이다. 경북 북부지역 한옥 양식을 하고 있으며 공간을 넓게 쓰고 있다. 각 건물마다 독립된 마당을 두고 있으며 담장으로 공간을 분리하고 있다. 건물은 큰사랑채, 작은사랑채, 안채, 별채, 행랑채(문간채), 방앗간채 등이 남아 있는데 다른 한옥에 비해 규모가 상당히 크다. 구한말 대지주 계층이 살았던 대저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청송 덕천마을 20230831_05<송소세장(松韶世莊)’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대문채>

청송 덕천마을 20230831_04<사랑채 마당>

청송 덕천마을 20230831_02<사랑채>

청송 덕천마을 20230831_03<안채>

청송 덕천마을 20230831_01<별채>

송소고택 남쪽에는 담장을 사이에 두고 송정고택이 있으며, 마을길을 따라 농촌 주택들을 볼 수 있다.

청송 덕천마을 20230831_08<송소고택 앞 큰 길>

청송 덕천마을 20230831_11<송소고택에서 마을 남쪽으로 가는 길>

송정고택(松庭古宅)은 1914년에 지어진 한옥으로 만석군 집안인 송소고택에서 분가한 집이다. 건물은 사랑채, 안채, 별채가 ‘ㅁ’자를 이루고 있으며 사랑채 앞에는 넓은 마당이 있다. 99칸 대저택 옆에 있어 작아 보이지만 규모가 있는 상류층 저택이다. 일제강점기 지방에서 살았던 지배층이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공간이자 대지주계층이 분가하는 과정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청송 덕천마을 20230831_06<큰길에서 보이는 송정고택>

청송 덕천마을 20230831_26<송정고택>

청송 덕천마을 20230831_07<남쪽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청송 덕천마을 20230831_09<마을 남쪽에 있는 하은당>

청송 덕천마을 20230831_10<마을 동쪽을 흐르는 신흥천>

마을 북쪽에는 99칸의 송소고택보다는 작지만 큰 규모의 고택들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지은 근대한옥도 있고, 송소고택보다 오래된 고택도 있다. ‘찰방공종택’, ‘초전댁’, ‘창실고택’ 등이 있다.

청송 덕천마을 20230831_52<마을북쪽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청송 덕천마을 20230831_51<찰방공종택 들어가는 골목길>

찰방공종택은 1933년에 지은 근대 한옥이다. 건물은 안채, 사랑채, 문간채가 ‘ㄷ’자 형태를 하고 있다. 뒷편에는 사당이 있다. 전통적인 고택의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잘 꾸며진 근대식 개량한옥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대저택인 청송 송소고택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다.

청송 덕천마을 20230831_13<찰방공종택>

청송 덕천마을 20230831_15<북쪽으로 이어지는 길>

청송 덕천마을 20230831_17<동쪽 마을회관으로 연결되는 길>

청송 덕천마을 20230831_18<서쪽 용골로 연결되는 길>

청송 덕천마을 20230831_19<마을북쪽 초전댁과 창실고택이 있는 곳>

초전댁(草田宅)은 1806년에 지은 집으로 마을에서는 꽤 오래된 고택이다. 건물은 안채, 사랑채, 중문채가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전형적인 경북 북부지역 한옥 양식을 하고 있는 건물로 조선후기 상류층이 살았던 저택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청송 덕천마을 20230831_20<초전댁>

창실고택(昌室古宅)은 1917년에 지은 근대 한옥이다. 송소고택 옆에 있는 송정고택과 거의 비슷한 형태와 규모이다.

청송 덕천마을 20230831_21<창실고택>

<출처>

  1. 안내문, 청송군청, 2023년
  2. ‘청송 덕천마을’, 디지털청송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3. ‘청송송소고택’, 디지털청송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4. ‘청송송정고택’, 디지털청송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5. ‘청송초전댁’, 디지털청송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6. ‘창실고택’, 디지털청송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의성 사촌마을

경북 의성군 점곡면에 있는 전통마을인 사촌마을(沙村里)이다. 1393년 안동김씨 김자첨이 들어와 살았으며 그후 혼인 등으로 안동권씨와 풍산류시가 들어와 살면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안동김씨 종택은 서애 류성룡의 외가이자 태어난 곳이다. 마을에는 조선중기에 지어진 고택인 만취당(晩翠堂,보물), 복원된 후산정사 등이 남아 있으며 구한말 이후에 지어진 고택들도 많이 남아 있다.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져 있으며 물은 풍부하다. 마을 서쪽에는 인공적으로 조성한 숲이 있다.

의성 사촌마을 20230830_01<의성 사촌마을>

의성 사촌마을<의성 사촌마을>

의성군 점곡면 소재지로 안동에서 16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전통마을과 면사무소, 초등학교 등 행정기관이 한군데 모여 있는 곳을 기와를 얹은 담장이 골목길을 따라 이어진다.

의성 사촌마을 20230830_16<마을 가운데를 지나가는 도로>

의성 사촌마을 20230830_13<마을로 들어가는 길>

만취당 뒤쪽에 있는 김성수 가옥은 18세기에 지어진 한옥으로 1988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하였다. 오래된 고택이지만 생활편의를 위해 수리하면서 일반적인 시골집처럼 보인다.

의성 사촌마을 20230830_14<김성수 가옥>

의성 사촌마을 20230830_12<최근에 복원한 초가집>

사촌리 향나무는 연산군 때 송은 김광수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500년 정도의 고목이다. 만취당 옆 골목에 심어져 있는데 높이 8m로 향나무 중에서는 상당히 크고 울창하다.

의성 사촌마을 20230830_51
<사촌리 향나무>

의성 사촌마을 20230830_09<만취당 옆 골목길>

의성 사촌마을 20230830_10<만취당 앞 골목길>

만취당(晩翠堂, 보물)은 김사원이 1582년에 지은 건물로 자신의 호를 따서 만취당이라 불렀다. 원래는 후진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서원 강당 규모로 크게 지었는데 후대에 마을 안동김씨 종가의 모임 장소로 사용되었다. ‘만취당’이라 적힌 현판은 석봉 한호의 친필이다. 대청마루에는 이곳을 찾은 온계 이해, 서애 류성룡 등이 남긴 글들이 남아 있다. 영조 때 동쪽으로 2칸, 서쪽으로 1칸씩 온돌방을 증축하였다.

의성 사촌마을 20230830_08<의성 만취당(보물)>

의성 사촌마을 20230830_04<만취당 내부>

의성 사촌마을 20230830_05<만취당에서 보이는 안동김씨 종택>

의성 사촌마을 20230830_06<만취당에서 보이는 사촌마을>

입향조인 김자첨은 1392년 사촌마을로 이주하면서 정착했다고 한다. 안동김씨 종택은 서애 류성룡의 외가이자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만취당과 비슷한 시기인 1584년에 처음 지어졌으나 원래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1959년에 중건하였다고 한다.

의성 사촌마을 20230830_02<안동김씨 종택>

의성 사촌마을 20230830_07<사랑채>

의성 사촌마을 20230830_31<종택 앞 골목길>

의성 사촌마을 20230830_30<만취당 앞 고택>

의성 사촌마을 20230830_20<마을 남쪽길>

의성 사촌마을 20230830_19<만취당 앞 고택 사랑채>

의성 사촌마을 20230830_29<만취당 앞 고택>

의성 사촌마을 20230830_21<안쪽 골목길>

의성 사촌마을 20230830_26<마을 안쪽 골목길>

의성 사촌마을 20230830_23<류한식 고가 앞 골목길>

의성 사촌마을 20230830_24<류한식 고가>

의성 사촌마을 20230830_28<뒤쪽에서 본 모습>

의성 사촌리 류한식 고가
류한식 고가는 안채 대청 종도리하에 상량 묵서명이 확인됨에 따라 1935년에 건립된 근대 한옥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소유자가 살림집으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구성은 안채, 사랑채, 고방채, 대문채이고,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튼 ‘ㅁ’자형이며 건물 일곽 외곽으로는 토석담에 기와를 이은 담장을 돌렸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에 5량가 팔작기와집이다. 구조는 자연석기단에 자연석 초석을 놓아 잘 마름질한 네모기둥을 세웠고, 심벽에 각종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안내문, 의성군청, 2023년)

의성 사촌마을 20230830_25<작은 규모의 한옥>

의성 사촌마을 20230830_27<만취당으로 연결되는 골목길>

의성 사촌마을 20230830_17<마을 큰길로 연결되는 골목길>

의성 사촌마을 20230830_18<고택 대문>

의성 사촌마을 20230830_15<동쪽으로 연결되는 도로>

 <출처>

  1. 안내문, 의성군청, 2023년
  2. ‘사촌리’, 디지털의성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3. ‘사촌리 김성수가옥’, 디지털의성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예천 금당실마을

경북 예천군 용문면에 있는 금당실마을이다. 조선시대 천하명당 십승지로 손꼽혔던 마을이다.  북쪽으로는 용문산을 비롯하여 백두대간에서 뻗어 내려온 높은 봉우리들이 둘러싸였으며 서남쪽으로는 금곡천이, 동쪽으로는 선동천이 흐르고 있어 배산임수의 풍수지리적 요건을 잘 갖추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 고인돌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지만 기록상으로는 15세기초부터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이후 함양박씨, 원조변씨가 들어오면서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여러성씨들이 모여살고 있는 전형적인 부촌(富村)이다. 마을에는 함양박씨 입향조를 모신 금곡서원을 비롯하여 재실과 사당들이 많이 남아 있으며 상당히 큰 규모의 고택들이 큰 마을을 이루고 있다. 대표적인 고택으로는 추원재, 사괴당, 반송재 등이 있다. 해방이후 고쳐지은 것으로 보이는 시골집에서도 옛 고택의 특징이 많아 남아 있어 화려했던 옛 마을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마을에는 학교와 면사무소, 전통시장 등도 모여있어 이곳이 지역의 중심지임을 알 수 있다.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01<예천 금당실마을>

예천 금당실마을<금당실마을 공간배치>

마을 탐방은 동북쪽에 있는 한옥체험관에서 출발하면 편리하다. 돌담장이 있는 골목길을 따라서 걸어가면 중산층이 살았던 초가집을 비롯하여 마을에 남아 있는 크고 작은 고택들을 살펴볼 수 있다. 고택들은 대부분 대지가 넓고 건물도 비교적 큰 편으로 당시 중상류층이 모여 살았던 마을임을 알 수 있다.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02<금당실마을 한옥체험관>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03<마을 돌담길>

골목길을 걸어서 들어가면 초가집들을 볼 수 있다. ‘유천초옥’은 최근에 다시 지은 집이지만 앞면 4칸의 비교적 큰 규모의 초가집이다. 당시 중산층이 살았던 것으로 집으로 보인다. 김대기가옥은 1920년대에 지은 건물을 최근 수리한 것이다.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04<유천초옥>

유천초옥, ‘-’자형의 안채와 서편에 아래채가 있으며, 1900년대 고가옥을 2008년도에 개축하였다. 안채는 정면 4칸 목조로서 홑처마에 안방과 사랑방 전면에 마루가 있는 한식 초가이다. 아래채는 정면 3칸의 작은 사랑채로 홑처마에 팔작지붕이며, 1칸은 화장실로 되어 있고 곳간과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안내문, 예천 금당실마을, 2022년)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05<김대기 가옥>

김대기 가옥, 독립운동가 김형식 선생의 1920년대 고가옥을 2008년도 개축하였다 ‘-’자형의 본채를 중심으로 우측에는 아래채, 좌측에는 헛간채로 각각 독립채로 구성되어 있고, 협문과 우물, 담장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초가이다. 본채는 정면 3칸이고 안방 옆에 마루를 설치하였으며, 홑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채는 정면 3칸으로 온돌방, 곳간, 마구의 초가 한옥으로 신축하였다. (안내문, 예천 금당실마을, 2022년)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06<마을안쪽 초가집>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08<마을 돌담길>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중상류층이 살았던 큰 규모의 고택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진사당’은 17세기에 처음 지었다고 하는 안채와 사랑채가 ‘ㅁ’장을 하고 있는 전통적인 한옥으로 비교적 큰 규모의 고택이다.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09<진사당>

진사당, 1680년
옛날 권진사가 살았다고 전해지는 ‘ㅁ’자형의 한옥으로 안채가 정면 5칸 측면 1칸 폭이 3량집으로 폭이 좁은 점이 특징이다. 안채와 사랑채가 팔작지붕으로 연결되어 있으나 지금은 허물어져 흔적이 없다. 안채는 정면 5칸 홑집으로 홑처마에 팔작지붕이다. 대청 위 대들보는 자연스럽게 휘어진 곡재를 사용하여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부엌 위에는 마루로 꾸며진 찬방이 있으며 광 위에 마루로 고미반자를 설치하여 공간 활용이 특이하다. (안내문, 예천 금당실마을, 2022년)

마을에는 한옥을 허물고 새로 지은 집들도 있는데 지금은 작은 집처럼 보이지만 문간채가 있는 것으로 볼 때 원래 고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10<골목길>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11<대문채기 있는 집>

‘오미소서’는 19세기에 지은 집으로 안채와 사랑채, 대문, 곳간, 마구간 등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양반가옥이다.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14<오미소서>

오미소서, 1871년
오미소서는 오미봉 산 아래 글 읽는 보금자리라는 의미이며, ‘-’자형의 안채와 행랑채는 남북의 같은 축선으로 배치되어 있고, 1871년에 건축하여 1920년에 중수하였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5량집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이며, 행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3량집으로 흙벽이다. 가장 우측에는 대문이 있고, 대문 좌측으로 온돌방, 곳간, 마구간, 디딜방앗간 등이 갖추어져 있다. (안내문, 예천 금당실마을, 2022년)

‘덕용재’는 20세기초에 지은 집으로 전통적인 ‘ㅁ’자형 형태를 하고 있다. 옛 양반가옥의 형태를 계승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25<덕용재>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37<옆에서 본 모습>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12<뒤에서 본 모습>

덕용재, 1920년
덕용재란 ‘덕을 지닌 용’이라는 뜻과 함께 용문에서 그러한 위인이 배출되기를 기원하는 뜻도 담고 있다. 2005년 고가옥을 중수할 때 나온 상량문에 의하면 봉화금씨 매헌 금보의 14세손인 금성락이 그 종택으로 건립하였다고 한다. 전통적인 ‘ㅁ’자 형태로 웅장하지는 않지만 사대부 가옥의 격식을 제대로 갖추었으며, 춘양목을 사용하여 그 짜임새가 견고하다. (안내문, 예천 금당실마을, 2022년)

‘반송재(伴松齋)’는 조선 숙종 때 문신 김빈이 낙향하여 살기 위해 지은 집이다. 이후 구한말 때 원래 살던집이 팔리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건물은 앞쪽에 ‘-’자형 사랑채가, 뒷편에 ‘ㄷ’자형 안채가 있는 튼 ‘ㅁ’자형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영남 북부지역 고위직을 지낸 상류층의 살았던 저택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집주인이 살고 있지 않고 비어 있어 금당실마을을 찾은 탐방객이 마을 고택의 모습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29<반송재>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27<사랑채>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26<안채>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28<반송재 앞 골목길>

‘광서당’은 1850년경에 지어진 집으로 튼 ‘ㅁ’자형을 하고 있는 고택이다. 안채는 앞면 6칸이며, 사랑채는 앞면 4칸으로 비교저거 큰 규모의 저택이다.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31<광서당>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32<사랑채와 중문>

광서당, ’-'자형으로 안채와 사랑채, 곳간채가 전체적으로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는 고가옥이며,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넛방의 외측으로 증량을 걸치고 마루칸을 덧달아서 공간을 확보하였으며 대청 위의 커다란 대들보는 단일부재로 얹고, 보아지는 꽃모양을 새겨 품위를 높였다. 사랑채는 ‘ㄱ’자형으로 2칸의 대청이 있고 좌측으로 2칸의 온돌방을 두고 있다.  (안내문, 예천 금당실마을, 2022년)

‘우천재’는 1870년대에 지어진 집으로 전통적인 양반가옥의 형태를 하고 있다. 사랑채 기단을 낮게 하여 소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33<우천재>

우천재
안채와 사랑채가 서로 연결되어 튼 ‘ㅁ’자형으로 구성되어 조선시대 전형적인 한옥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망와 명문에는 “강희이십년(1681)~”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수차례 개수를 거쳐 1870년경 현재의 건물이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채는 정면 4.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에 홑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낮은 기단에 간결하고 소박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손님을 맞이하기에 알맞은 구조이다. (안내문, 예천 금당실마을, 2022년)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38<돌담장이 있는 골목길>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39<큰 규모의 초가집>

‘월당화옥’은 의병장 박주상이 살았던 큰 기와집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작은 초가로 다시 지은 집이다. 일제강점기에 소박하게 다시 지은 집의 형태를 보여준다.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40<월당화옥>

월당화옥, 원래 이 터에는 예천지역 의병장 박주상의 출생지인 큰 기와집이 있었으나, 한말 의병활동으로 피신 중에 일본군의 소생으로 집이 소실되고 그 후 1930년대에 지은 초가집을 2008년 개축하였다. 본채와 아래채가 별재로 독립되어 있으며, ‘-’자형 본채는 목조 한옥 4칸 겹집으로 우측에 부엌과 좌측에 방이 있고 가운데에 소담한 마루가 설치되어 방문객과 대화의 장소로 활용하도록 하였다. (안내문, 예천 금당실마을, 2022년)

돌담장이 있는 마을 골목길을 걸어다니다 보면 일제강점기 이후 옛집을 허물고 지은 작은 시골집들을 볼 수 있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의 규모는 작지만 담장이나 대지의 규모로 볼 때 예전에 큰 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19<골목길>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20<1970년대 모습을 보여주는 시골집>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21<골목길>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23<골목길>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15<허물어진 담장을 볼 수 있는 골목길>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16<시골집>

마을 북쪽에는 함양박씨 3인을 모신 금곡서원, 함양박씨 입향조 박종린을 배향하는 추원재 및 사당 등이 자리잡고 있다. 서원, 사당, 재실 등 전통마을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잘 갖추어진 마을이다.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45<금곡서원>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41<서원 출입문>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42<강당>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51<마을 북쪽 골목길>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47<초가집>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49<경당재 및 사당>

마을 큰길에는 오래된 <천주교 용문공소>, 교회들을 볼 수 있다. 양반들이 모여살았던 전통 마을이지만 비교적 이른 시기에 카톨릭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17<마을 큰길>

예천 금당실마을 20221130_18<천주교 용문공소>

금당실 전통마을, 조선시대 전통 생활문화의 숨결이 살아 있는 십승지의 땅
우리나라 이상향을 대표하는 십승지의 하나로 꼽힌 길지이자, 조선 태조가 도읍지로 정하려고 했다는 이곳 금당실(金塘室) 전통마을. 병화와 질병, 기근이 없다는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의 금당실마을은 조선시대 양반문화가 서려있는 수많은 고택과 미로처럼 이어진 흙돌담길이 정겨움과 멋스러움을 자아내며, 역사와 문화, 전통을 간직해 오고 있는 우리나라 대표적 전통마을 중 한 곳이다. 조선시대, 세상이 어지러울 때마다 많은 재력가들이 이 곳을 찾음으로써 한때 서울과 같이 번성하기도 했고,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는 등 유교문화가 활발했던 곳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100여동의 크고 작은 고택과 돌담길, 유적들만이 남아 당시의 모습을 짐작케 해 주고 있다. 조선시대 역학과 천문, 지리에 능통하고 예언가로 유명했던 격암 남사고는 병화를 피해 살만한 곳이라는 이른바 남격암십승승지론(南格菴十乘之論)에서 이곳 금당실을 전국 십승지 중 한 곳으로 꼽았고,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 전국이 전장화되었던 임진왜란 때고 이곳은 온전했다 한다. ‘지형지세가 물위에 연꽃이 더 있는 형국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이곳을 지나면서 중국의 양양 금곡과 지형이 같다.”하여 ‘금당실’, ‘금당곡’, ‘금곡’ 등으로 불리었다 하며, ‘많은 명문권세들이 이곳에 거주하므로써 이곳을 찾는 벼슬아치들이 많아 유교와 양반문화가 번성해 흡사 서울과 같았고, 풍수적 관점에서 금당실과 맛질을 하나로 보면 그 형국이 서울과 흡사하다’하여 ‘금당 맛질 반서울’이라는 말 등 지명 유래와 관련한 많은 이야기도 전해온다. 금당실마을은 마을내 고인돌 무덤이 산재하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록상으로는 600여년전 15세기초 무렵 김천문씨가 이곳에 처음 정착하였고 그후 함양박씨, 원주변씨가 입향하면서 큰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하며 인근마을에 예천권씨, 안동권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유적으로는 함양박씨 3인을 모신 금곡서원, 함양박씨 입향조 박종린을 배향하는 추원재 및 사당, 원주변씨 입향조 변응녕을 기리는 사괴당고택, 조선 숙종 때 도승지 김빈의 유적지 반송재고택, 구한말 법무대신을 지낸 양주대감 이유인의 99칸 고택터, 남야 선생 사당, 서쪽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방풍림으로 조성되었다는 송림(松林)을 비롯해 인근 마을의 초간 권문해의 유적인 초간종택과 초간정, 안동권씨 입향조 야옹 권의를 추모하는 야옹정, 그리고 춘우재고택, 연곡고택, 미산고택 등 조선시대 문화가 서려있는 아름다운 전통마을이다. (안내문, 예천 금당실마을, 2022년)

<출처>

  1. 안내문, 예천 금당실마을, 2022년

 

산청 남사마을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에 있는 남사마을이다. 농촌 전통 테마 마을로 지정되면서 ‘남사예담촌’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전통마을로 지리산 중산리로 연결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양반들이 살았던 큰 고택에는 흙과 돌로 쌓고 그 위에 기와를 올려 놓은 높은 토담들이, 서민들이 살았던 가옥에는 나지막한 돌담들이 남아 있다. 마을에는 18세기에 지어진 이씨고가, 20세초에 지어진 최씨 고가를 비롯한 많은 기와집이 모여있으며 사양정사, 사효재, 영모재, 니사재 등 조상들을 모시는 재실들이 많이 남아 있다. 또한 고택 마당에는 부부 회화나무, 사효재 향나무, 하씨고가 감나무 등 수령 수백년이나 되는 오래된 고목들이 많이 남아 있다.

산청 남사마을 15-20220222<산청 남사마을>

산청 남사예담촌<남사마을 공간배치>

마을은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는 중산리계곡으로 연결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여러 편의시설이 있고 마을에서 가장 큰 저택이 최씨고가와 사양정사가 마을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산청 남사마을 05-20220222<최씨 고가 골목길>

최씨고가는 남사마을에 남아 있는 고택 중 가장 큰 규로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지어진 한옥이다. 건물은 안채, 외양간채, 사랑채가 ‘ㅁ’자형 평면을 하고 있다. 사랑채 양쪽에 중문을 두고 있으며 안채가 있는 마당은 외부와 분리되어 있어 유교적인 격식을 강조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남사마을 한옥을 대표하는 고택이라 할 수 있다.

산청 남사마을 06-20220222<최씨고가 대문>

산청 남사마을 07-20220222<최씨고가 사랑채>

최씨고가 앞쪽으로는 사양정사(泗陽精舍)가 자리잡고 있다. 사양정사는 1920년대 유학자 정제용의 후손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재실이다. 앞면 7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상당히 큰 규모의 재실 건물이다.

산청 남사마을 08-20220222<사양정사 골목길>

산청 남사마을 09-20220222<사양정사 대문채>

산청 남사마을 11-20220222<사양정사>

산청 남사마을 12-20220222<사양정사 뒷편 고택 마당>

사양정사 앞쪽에는 마을에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수령이 620년인 감나무를 볼 수 있다.

산청 남사마을 10-20220222<하씨고가 감나무>

하씨고가의 감나무, 수령 620년
고려말 원정공 하즙의 손자 하연이 어릴때 어머니에게 홍시를 드리기 위해 심은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감나무이다. 토종 반시감으로 산청곶감의 원종이기도 하며, 현재에도 감이 열리고 있다. (안내문, 산청군청, 2022년)

마을 입구에서 마을을 휘감으면서 흐르는 남사천까지는 가운데 좁은 골목이 150m 정도로 이어지며 양쪽으로 크고 작은 고택들이 담장이 있는 골목길로 연결된다.

산청 남사마을 34-20220222<마을 입구 고택>

산청 남사마을 33-20220222<고택 대문과 담장>

산청 남사마을 16-20220222<마을입구 예담원>

산청 남사마을 17-20220222<마을 중앙 골목길>

산청 남사마을 18-20220222<마을 안쪽 골목길과 담장>

산청 남사마을 19-20220222<최근에 수리한 것으로 보이는 고택>

산청 남사마을 20-20220222<마을 뒷편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마을은 뒷편으로는 남사천이 마을을 휘감고 흐로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남사천을 공자가 살았던 중국 곡부(曲阜)의 사수(泗水)의 이름을 따서 사수천이라 부른다.

산청 남사마을 21-20220222<남사천>

남사천 건너에는 현대 국악에 큰 역할을 했던 박헌봉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산국악당과 재실인 니사재가 있다.

산청 남사마을 26-20220222<남사천 너머 니사재와 기산국악당>

산청 남사마을 22-20220222<마을 뒷길>

마을 서쪽에는 영모당 이윤현을 기리는 재실인 사효재와 영모재가 있다. 사효재 앞에는 마을에서 이제개국공신교서(국보)를 소장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안내문과 기념비가 있다.

산청 남사마을 23-20220222<사효재 대문채>

산청 남사마을 24-20220222<사효재>

산청 남사마을 41-20220222
<사효재의 향나무, 수령 520년>

사효재는 1706년 피접중인 아버지를 해치려는 화적의 칼을 자신의 몸으로 막아낸 영모당 이윤현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이다. 향나무는 사효재를 짓기 전에 심겨져 있었으며 제례를 올릴 때 향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안내문, 산청군청, 2022년)

산청 남사마을 25-20220222<영모재>

산청 남사마을 27-20220222<영모당 효자비>

사효재 앞으로는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인 이씨고가 있다. 이 고택 앞에는 ‘부부 회회나무’로 잘 알려진 2그루의 고목이 아치를 이루고 있다. 드라마 ‘왕의 남자’ 촬영장소로 유명하다.

산청 남사마을 29-20220222<부부 회화나무>

이씨고가는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으로 18세기에 지어졌다. 건물을 안채, 사랑채, 외양간채, 곳간채가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공간은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 공간을 넓게 사용하여 개방적인 분위기를 주고 있다. 조선후기 남부지방 상류층 저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산청 남사마을 30-20220222<이씨고가 대문>

산청 남사마을 32-20220222<이씨고가 사랑채>

산청 남사마을 31-20220222<이씨고가 안채>

마을 입구 언덕에 있는 작은 정자에 오르면 한눈에 마을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산청 남사마을 35-20220222<마을입구 정자>

산청 남사마을 01-20220222<남사마을 전경>

산청 남사마을 02-20220222<최씨고가, 사양정사 등이 있는 마을 동쪽>

산청 남사마을 03-20220222<이씨고가, 사효재 등이 있는 마을 서쪽>

남사예담촌
지리산의 정기가 동으로 뻗은 곳에 예(禮)를 상징하는 니구산과 사수가 닿아 만든 반달 모양의 남사예담촌은 예부터 선비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숫룡의 머리를 한 마을 앞 당산과 암룡의 머리를 한 니구산이 서로의 머리와 꼬리를 무는 쌍룡교구(雙龍交媾)를 이루는 곳에 연꽃모양의 산이 둘러싸고 있어 말고 어진 기운이 마을을 수호하고 있다. 신의와 청령을 지키는 선비의 고장답게 단아한 기품과 예절을 품고 있는 전통한옥과 옛 토담, 효심으로 심은 수령 700년이 넘는 나무와 수많은 역사문화자원들이 한 폭의 동양화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절세 풍광이다. 옛 것을 통해 겸손과 겸양의 지혜를 배워 감사의 마음을 알게 하는 남사예담촌은 2003년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지정되어 한국인의 멋과 맛을 오감으로 체득할 수 있는 진정한 휴식처로 자리하고 있다. (안내문, 산청군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산청군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대한민국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