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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루판 자오허고성 대불사(大佛寺) 절터

중국 투루판시 자오허교성(交河故城)에 남아 있는 대불사(大佛寺) 절터이다. 후한부터 남북조시대까지 투루판 지역을 통치했던 차사전국의 수도 교하고성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불사는 면적 5,100 ㎡이며 이 도시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사찰이었다. 절터에는 불상을 모셨던 불단이 있는 큰 규모의 금당터를 비롯하여 2개의 탑과 우물, 요사채 등이 있었으며 중문 앞 광장에 큰 규모의 탑이 남아 있다. 자오허고성은 투루판 북쪽에서 강물이 분지로 들어오는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볼 수 있는 도시가 아니라  중동지역이나 지중해 도시국가와 비슷한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 불교 사찰인 대불사가 자리잡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자오허고성 중심부에 남아 있는 대불사 절터>

대불사는 흙벽돌을 쌓아서 만든 투루판 지역의 건축 양식을 사용해 목조 건축물인 동아시아 사찰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불교가 인도에서 전파되는 실크로드 중심에 있는 교하고성 대불사는 전래과정에서 나타난 가람의 배치 변화와 특징 등에서 중간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SANYO DIGITAL CAMERA<자오허고성 모형에 표시된 대불사 유적>

자오허고성 중앙대로가 끝 부분에 랜드마크가 되었던 대불사 불탑이 세워져 있다. 대불사 경내에 쌍탑형식의 불탑이 있지만 별도로 사찰 바깥에 거대한 불탑이 세워졌다. 불탑은 흙벽돌로 쌓은 3층 구조물로 길이 16 m, 너비 15.6 m, 높이 10 m 규모이다. 남쪽에는 출입구가 있으며 2층 동.서쪽에 불상이 있었던 자리가 남아 있다. 현장법사의 여행기인 소설 ‘서유기’에 등장하는 불탑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SANYO DIGITAL CAMERA<대불사 불탑>

대불사는 고성내 주거지역보다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문에서 대불사까지 중앙대로가 형성되어 있으며 양쪽에 관청, 주거지, 상업지구 등이 배치되어 있다. 중동의 고대도시와 마찬가치로 사찰 앞 광장을 중심으로 상업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자오허고성 정문에서 대불사까지 이어지는 중앙대로>

SANYO DIGITAL CAMERA<대불사 앞 광장과 중문>

SANYO DIGITAL CAMERA<대불사 앞 상업지구>

대불사는 흙벽돌로 쌓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져 있어 외형은 중동지방 사원과 비슷하지만 금당, 요사채로 구성된 사찰의 가람배치와 거의 비슷하다. 중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불상을 모신 큰 규모의 금당이 배치되어 있으며 금당 앞 마당에는 2개의 탑이 있었던 자리와 우물터가 남아 있다. 담장 안쪽에는 크고 작은 방들이 회랑을 형성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대불사 중문과 높은 담장>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대불사 내부>

금당 앞 마당에는 불국사 같은 통일신라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쌍탑식 불탑이 세워졌던 자리가 남아 있으며 금당 앞에 몸과 마음 씻는 물을 제공했던 우물터가 있다.

SANYO DIGITAL CAMERA<2개의탑이 있었던 자리>

SANYO DIGITAL CAMERA<탑이 있었던 자리>

SANYO DIGITAL CAMERA<우물터>

2개의 탑이 세워져 있던 금당 앞 마당에는 회랑처름 크고 작은 방들이 자리잡고 있다. 궁궐 정전이나 중동지방 신전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실리스크 공간배치를 하고 있으며 방들을 실크로드를 여행하는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로 많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금당 앞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벽으로 공간이 분리되어 있는 크고 작은 방들>

SANYO DIGITAL CAMERA<중문 옆 큰 규모의 방들>

SANYO DIGITAL CAMERA<방들을 구분하고 있는 내부 담장>

SANYO DIGITAL CAMERA<금당 앞 회랑을 구성하고 있는 방들>

SANYO DIGITAL CAMERA<방 내부>

SANYO DIGITAL CAMERA<금당 옆 공간에 있는 방들>

SANYO DIGITAL CAMERA<작은 규모의 방>

대불사는 중앙에 불상을 모신 금당을 배치해 놓고 있다. 투루판 지역 건축 특성을 살린 흙벽돌로 쌓아 만든 건물이지만 그 형태나 규모는 동아시아 사찰의 불전과 비슷하다. 금당은 2층으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흙벽돌로 건물을 올렸다.

SANYO DIGITAL CAMERA<대불사 금당>

SANYO DIGITAL CAMERA<금당을 오르는 계단>

내부에는 많은 불상들이 모셔진 불단이 있는데 닫집형태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단은 2층이 남아 있는데 2층에 여러 불상들을 모신 감실들이 있는데 내부에는 불상도 일부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금당 내 불상을 모신 불단>

SANYO DIGITAL CAMERA<불상을 모신 감실>

SANYO DIGITAL CAMERA<아직 남아 있는 감실내 불상>

SANYO DIGITAL CAMERA<다른 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금당 벽면>

대불사 뒷편 자오허고성 안쪽편에는 탑림(塔林)이라 불리는 공간이 배치되어 있다. 이곳에는 모두 101 개의 스투파가 있는데 그 중 가운데 있는 사리탑은 중국내 남아 있는 불탑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한다.  불탑에는 25 개의 정사각형 모양의 작은 사리탑이 각 모서리에 질서있게 배치되어 있다. 연대 측정에 따르면 1640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탑림(塔林)>

자오허고성 서쪽 암벽에 있는 야르호 석굴에서 출토된 천불도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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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도 단편, 千佛圖斷片, 투루판 아르호 석굴 제4굴, 10~12세기>

<출처>

  1. 안내문, 자오허고성, 2010년
  2. 위키백과, 2020년
  3. 百度百科, 2020년
  4. 실크로드문명기행, 정수일, 한겨레출판사, 2006년

투루판 가오창고성 대불사(大佛寺)터, 당 현장법사가 인도 순례길에 머물렀던 곳

중국 투루판 옛 고창국 도성이었던 가오창고성(高昌古城) 외성 남서쪽에 위치한 대불사(大佛寺) 절터이다. 당나라 승려 현장법사가 인도로 순례를 떠나는 길에 잠시 들러서 설법을 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실크로드에 있었던 많은 사찰들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어 지금은 없어진 서역의 불교 사찰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현장법사는 고창국 국왕 국문태의 초청을 받아 이곳에서 1개월 동안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설법했으며 국왕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10년 후 순례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이곳을 다시 찾으려 했으나 고창국은 당(唐)에 의해 멸망하여 다른 길로 돌아왔다고 한다.

대불사절터는 고성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규모는 남북 70 m, 동서 120 m 정도이다. 가오창고성 내성이 있는 동쪽에 출입문을 두고 있으며 건물외벽들이 담장을 이루고 있는 도시형 사찰이다. 서역의 종교시설과 비슷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대불사 절터>

SANYO DIGITAL CAMERA<투루판 가오창고성 대불사 정문과 외벽>

SANYO DIGITAL CAMERA<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불상을 모신 불전이 보인다.>

대불사는 불상을 모신 불전을 중심으로 왼쪽에 법회가 열리는 돔형 강당이 배치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승려들이 거처하는 요사채들을 두고 있다. 실크로드에 있는 교통요지에 있는 사찰답게 사막을 여행하는 순례객들을 위한 요사채가 상당히 많은 것이 특징이다.

SANYO DIGITAL CAMERA<대불사  주불전>

SANYO DIGITAL CAMERA<주불전 앞 마당>

주불전은 불상을 모신 공간으로 중앙에 불상을 모시기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벽면에도 불상을 모시는 감실을 두고 있다. 목조건축물로 지어진 동아시아의 불전과는 달리 흙벽돌로 쌓은 서역의 불전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벽돌로 기단을 쌓고 건물을 올렸는데 아치형 지붕이 있었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대불사 주불전>

SANYO DIGITAL CAMERA<불상을 모셨던 자리>

주불전 마당 북쪽편에는 법회가 열렸던 강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현장법사가 설법을 펼쳤던 유서깊은 곳으로 옛 모습을 복원해 놓고 있다. 건물 벽면은 사각이며 돔형 지붕을 올려놓은 형태를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대불사 강당, 돔형 건물로 외부는 벽면으로 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대불사 절터에는 벽돌로 지은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는 대부분 승려들이나 순례객들이 머물 수 있는 요사채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사람들이 살았던 주거지 형태를 살펴볼 수 있다. 불전 앞 마당 주위에는 상당히 큰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사찰 입구 강당 옆에 있는 건물, 2층 이상의 크고 높은 건물이다.>

SANYO DIGITAL CAMERA<강당 맞은편에 있는 건물, 상당히 큰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강당 옆 주불전 뒷편에 있는 건물들>

SANYO DIGITAL CAMERA<주불전 옆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주불전 뒷편>

SANYO DIGITAL CAMERA<주불전 뒷편 요사채로 보이는 건물>

SANYO DIGITAL CAMERA<대불사 담장너머로 가오창고성 외성 성벽이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주거지 모습을 보이는 요사채 내부>

SANYO DIGITAL CAMERA<요사채 건물터>

가오창고성은 투루판 분지에 있었던 고성으로 서한(西漢)시대부터 13세기까지 존재했던 지역의 중심지였다. 현재 남아 있는 고성터는 둘레 5.4km 정도로 당나라 장안성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성터에는 외성과 내성 성벽을 비롯하여 고창국 궁굴터, 대불사 절터 등이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많은 건물터가 남아 있는 투루판 가오창 고성>

<출처>

  1. 위키백과, 2020년
  2. 百度百科, 2020년
  3. 실크로드문명기행, 정수일, 한겨레출판사, 2006년

군위 인각사지(사적 374호),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곳

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화산 북쪽 기슭에 남아 있는 인각사지(사적 374호)이다. 고려 충렬왕 때 일연이 이곳에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저술한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사찰입구에 우뚝 솟은 큰 바위가 기린의 뿔을 닮았다고 하여 인각사(麟角寺)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삼국시대에 처음 창건하였다고 하며 발굴.조사결과 고려시대에 절을 크게 중수하면서 건물의 위치가 바뀌었다고 하며 조선중기까지 큰 사찰이었나 거의 폐사되어 지금은 최근까지 극락전과 작은 요사채 만 있었다고 한다. 경내에는 일연의 사리를 모신 승탑과 탑비(보물 428호)를 비롯하고 고려시대 삼층석탑과 불상이 남아 있다. 특히 탑비는 중국에서 왕희지 글자를 집자하여 글을 새겼는데 후대에 왕희지 글자를 찾아 탁본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그 과정에 비석은 크게 훼손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군위 인각사지(사적 428호). 경주에서 안동,상주로 연결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어 고려시대에 번창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이후 쇠퇴하여 지금은 절터에 극락전을 비롯하여 몇동의 전각들만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인각사 주불전인 극락전.

OLYMPUS DIGITAL CAMERA극락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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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통일신라 삼층석탑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군위 인각사 삼층석탑
이 탑은 전형적인 신라 탑 양식을 이어 받은 삼층석탑으로 보기 드물게 상륜부가 남아 있어 탑의 양식과 구조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상대기단의 갑석은 2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툼한 부채꼴 모양의 받침에 얕은 사각형의 받침이 겹쳐져 있는 이중 탑신과 괴임대가 있다. 옥개석은 각층 탑신의 비율에 맞게 줄어들고 있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전체가 4단으로 되어 있으며, 모서리의 선은 많이 둘글려져 있다. 또한 이 탑은 제1탑신석이 제2탑신석보다 높이의 비례가 크고, 옥개석의 옥개받침이 4단인 점 등을 볼 때 고려 전기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신라말 ~ 고려초 시기의 석탑 연구에 있어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안내문, 군위 인각사,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극락전에서 보이는 삼층석탑과 절터. 발굴.조사결과 고려시대에 사찰을 중수하면서 절의 중심영역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삼국유사 저자 일연의 사리를 모신 승탑(보물 428호)

OLYMPUS DIGITAL CAMERA승탑 옆에 있는 불상

OLYMPUS DIGITAL CAMERA승탑 뒷편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탑비(보물 428호).

OLYMPUS DIGITAL CAMERA일연의 행적과 그를 기리는 글 등을 적은 비석. 왕희지 글자를 집자하여 비석에 새긴것으로 후대에 여러차례 탁복을 하는 과정에서 크게 훼손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인각사지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석재들. 통일신라시대 건물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고려 때 절을 중수하는 과정에서 재사용되었다고 한다.

인각사 발굴 조사 출토 부재
이곳에 전시된 석재는 인각사(사적 374호)를 정비하려고 발굴하는 과정에서 수습된 것으로 인각사 창건(642년)부터 고려시대까지 인각사에 사용된 석재 중 중요 부재를 모아 놓은 것이다. 1992년부터 2009년까지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 현 인각사 동쪽에서 통일신라시대 중심 사역 일부가 확인되었으며, 고려시대 후기부터 중심 사역이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인각사가 삼국유사를 저술한 보각국사 일연선사의 하안소(1284 ~ 1289년)로 사용되면서 통일신라시대에 정교하게 다듬어진 석재를 활용하여 건물을 증축하거나 개축한 것으로 보이며, 일부 고려시대에 제작된 석재도 확인된다. 전시된 부재는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제작된 인화문 석등대좌를 비롯한 심초석, 방형초석, 원형초석, 기단석 등이다. 이중 2005년 극락전 해체과정에서 확인된 심초석은 통일신라시대 인각사에 목탑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실증적 자료이다. (안내문, 군위 인각사,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최근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국사전

OLYMPUS DIGITAL CAMERA국사전 옆 일연의 행적 등을 설명해 주는 전시관.

OLYMPUS DIGITAL CAMERA비각 뒷편에 있는 산령각.

OLYMPUS DIGITAL CAMERA인각사 입구에 있는 요사채

OLYMPUS DIGITAL CAMERA극락전 아래에 있는 요사채. 극락전과 함께 절터를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찰 뒷편에서 보이는 인각사지 절터. 문화재로 지정되어 건물을 증축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각사는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화산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 대한불교 조계종 제 10교구 본사인 은혜사의 말사로 신라 선덕왕 11년(642)에 의상대사께서 창건하였다. 절 입구에 깎아지른 듯한 바위가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기린이 뿔을 바위에 얹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인각사라 하였다고 한다. 고려 중렬왕 때 일연이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이곳에 거처하면서 구산문도회를 두번이나 개최하였고, 여기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활자본으로, 5권 2책으로 구성되었다. 편찬 연대는 미상이나 1281 ~ 1283년(충렬왕 7 ~9) 사이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현재까지 고려시대의 각본은 발견되지 않았고, 완본으로는 1512년(조선 중종 7) 경주부사 이계복에 의하여 중간된 정덕본이 초고본이며, 그 이전에 판각된 듯한 영본이 전한다. 본서는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와 더불어 현존하는 한국 고대 사적의 쌍벽으로서, <삼국사기>가 여러 사관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사이므로 그 체재나 문장이 정제된 데 비하여, <삼국유사>는 일연성사 혼자의 손으로 씌어진 이른바 야사이므로 체재나 문사가 <삼국사기>에 못 미침은 사실이나, 거기서 볼 수 없는 많은 고대 사료들을 수록하고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헌이다. 즉, 그 중에서도 특히 고조선에 관한 서술은 한국의 반만년 역사를 내세울 수 있게 하고 단군신화는 단군을 국조로 받는 근거를 제시하여 주는 기록인 것이다. (안내문, 군위 인각사, 2019년)

<출처>

  1. 안내문, 군위 인각사,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충주 청룡사지, 조선 태조가 보각국사를 위해 크게 중창했던 사찰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에 있는 옛 청룡사 절터이다. 청룡사는 고려말 활동했던 승려 보각국사가 머물렀던 사찰이다. 조선 태조 원년(1392)에 그가 입적하자 태조는 ‘보각국사’라는 시호와 ‘정혜원융’이라는 승탑 이름을 하사하고 청룡사를 크게 중창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조선왕실과 관련된 사찰로 조선후기 숙종 이후까지 큰 사찰로 명맥을 유지해 왔으나 이후 폐사되어 지금은 절터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절터에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빼어난 조형미와 조각수법을 보여주는 보각국사탑(국보 197호)를 비롯하여 탑비(보물 658호), 석등(보물 656호) 등의 문화재가 남아 있다. 특히 절터 입구에는 조선후기 숙종 때 사찰을 크게 중건하면서 그 내력을 기록한 위전비가 남아 있어 청룡사가 조선후기까지 명맥을 유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청룡사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보각국사를 위해 크게 중창하는 등 조선왕실과 관련이 있었던 사찰이지만 조선후기 폐사된 이후 보각국사와 관련된 유물 외에는 그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SANYO DIGITAL CAMERA절터 입구에 세워져 있는 위전비. 조선후기 숙종 때 지역민들이 청룡사를 중창하면서 그 경위를 기록해 놓고 있다. 조선후기까지 그 명맥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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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전비에 새겨진 글. 청룡사를 중창할 때 시주한 신도들의 이름과 품목 등을 새겨놓고 있다.

충주 청룡사 위전비
숙종 18년(1692)에 세워진 2 m가 넘는 크기의 4면비로 당시 청룡사의 창건 및 경영 등과 관련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신도들이 전답을 기증한 내용을 적은 비이다. 청룡사는 고려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초기에는 보각국사가 머물면서 번성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나 그 이후의 사실은 이 비로서 짐작할 수 있다. 비에는 시주한 신도들의 이름과 품목 및 수량이 적혀 있으며 2~3차에 걸쳐 추가로 기록한 부분도 있어 절은 몇차례 걸쳐 보수.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이 비의 받침돌은 거북모양이고, 머리부분은 탑의 옥개석 형태로 되어 있으며 그 마루에는 용이 조각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한 것으로 당시의 사찰경영을 위한 경제상을 알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문, 충주시청, 2009년)

SANYO DIGITAL CAMERA절터에 남아 있는 승탑들.

SANYO DIGITAL CAMERA석종형 부도.

충주 청룡사지 석종형 부도
이 부도는 조선시대에 유행하던 전형적인 석종형 부도로서 정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2단의 하대석을 놓고 화강암의 탑신을 올려 놓았다. 탑신 윗부분은 복발 모양으로 조성하여 정상부에 3단의 돌기부분을 조각하였고, 탑신의 전면부에 문자를 음각한 흔적이 보이는데, 마멸이 심하여 눈으로는 쉽게 판독되지 않으나 ‘적운당사리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교적 대형에 속하는 부도 주변에는 장대석을 방형으로 돌려 놓아 탑구를 형성하였다. (안내문, 충주시청, 2009년)

SANYO DIGITAL CAMERA철터 안쪽에 있는 보각국사탑(국보 197호), 탑비(보물 658호), 석등(보물 656호). 고려말.조선초를 대표하는 승탑이다.  보각국사 혼수(混修, 1320~1392년)는 고려말 활동한 승려로 문장과 글씨에 능했으며, 계율을 따를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젊었을때는 청룡사에서 머물렀으며, 전국을 돌며 수도하다가 이곳 청룡사에서 입적했다고 한다. 시호는 ‘보각(普覺)’이며 탑이름은 ‘정혜원륭(定慧圓融)’이다.

SANYO DIGITAL CAMERA보각국사탑(국보197호).  정식 명칭은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이다. 탑은 8각형평면을 기본으로 하고있는데, 기단 아랫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가운데받침돌에는 사자상과 용을 교대로 새겼다. 탑신 몸돌에는 각면마다 무기를 들고 있는 탑신 몸돌에 새겨 넣은 신장상과 그 사이에 구름에 휩싸인 용을 섬세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새겨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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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각국사탑 앞에 세워진 석등(보물 656호). 높이 2.03 m로 받침돌과 화사석, 지붕돌, 머리장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받침돌은 사자가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어 사자석등이라 부른다. 가운데받침돌은 4각형이며, 윗받침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화사석은 4각형 형태로 앞뒤로 창을 내어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보각국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비(보물 658호).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돌을 올려놓은 단순한 형태이다. 조선 태조의 명을 받아 승려 희달이 세운 것으로 개국공신 중 한명인 권근이 글을 짓고, 승려 천택이 글씨를 썼다. 비석에 새겨진 글씨는 필체가 힘이 넘치며 격조를 갖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 뒷편에서 본 모습. 절터는 폐사된 후 울창한 숲으로 바뀌어 이곳이 절터임을 알기는 쉽지 않다.

충주 청룡사지 11-20110817고려말 청룡사에서 간행된 『금강반야경소론찬요조현록(보물 720-2호)』. 『금강반야경』의 주석서로서 발문에 따르면 1376년 보각국사의 설법을 듣고 이 책을 간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1. 안내문, 충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충주 미륵대원지(사적317호), 백두대간 고갯길에 있던 고려시대 절터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있는 절터인 미륵대원지(사적 317호)이다. 경주 불국사 석굴암을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보이는 고려시대 석굴사원이 있던 절터이다. 석굴은 큰 돌을 다듬어 축대와 벽체 등을 만들고 그 위에 지붕 등 목조 건축물을 올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에는 고려초 전국적으로 유행했던 투박하면서도 강인한 모습의 석조여래입상(보물 96호)를 모시고 있다. 석굴 앞에는 오층석탑(보물95호), 석등이 일렬로 나란히 세워져 있어 규모나 격식을 제대로 갖춘 모습을 하고 있다.

절터는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오래된 고갯길인 하늘재(명승 49호)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던 이 길은 조선초 문경새재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전까지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였다. 고려시대 한강유역 주요 사찰과 마찬가지로 주요 교통로 오가는 사람들이 쉬어가는 역할을 했던 사찰로서 절 앞에는 별도로 큰 규모의 여행자 숙소였던 원(院)이 있었던 건물터가 있다. 고려시대 주요 교통로에서 번창했다가 조선시대 이후 폐사된 여러 사찰 중 하나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충주 미륵대원지(사적 317호).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에 있었던 고려시대 절터이다.  경주 석굴암을 모방하여 조성한 석굴사원과 하늘재 고갯길을 이용하던 여행객이 묵을 수 있는 원(院)이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미륵대원지 공간배치도. 불상이 모셔진 석굴사원을 중심으로 사찰영역이 조성되어 있고, 하늘재 고갯길 옆으로 숙소로사용된 원(院) 건물터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절터에 입구에 있는 당간지주.

충주 미륵대원지 당간지주
당간지주는 깃발을 매다는 장대를 고정하기 위한 장치로 보통 사찰의 입구에 세워 신성한 지역임을 나타낸다. 현재 지주와 간대로 보이는 석재가 남아 있는데 간대 윗 면에는 2중의 원각선을 양각하였다. 지주는 아랫부분이 결실되어 전체 크기를 알 수 없으나 윗부분 바깥면에 6엽 연화문을 양각한 것은 희귀한 예이다. 통일신라시대보다 상대적으로 폭이 넓고 높이가 낮은 고려시대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준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절터는 석조여래입상이 모셔진 석굴과 그 앞으로 석등, 오층석탑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충주 미륵리 오층석탑(보물 95호). 원래 있던 바윗돌 위에 돌을 올려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5층 탑신을 올렸다. 탑신 몸돌에는 모서리에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튀어 나온 부분이 적고 경사가 심해 벽돌로 쌓은 전탑처럼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오층석탑과 석굴 사이 공간에 있는 석등. 통일신라 석등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는 8각석등이다.

충주 미륵대원지 석등
전형적인 8각석등으로 균형이 잘 잡힌 우수한 석등이다.하대석은 4각형이며 윗부분에 연꽃을 새겼다. 간주석은 아무런 무늬가 없는 8각형의 돌기둥으로 상대석에는 앙련을 조각하였다. 그 위에 등을 설치했던 8각형의 화사석이 있는데 4면에 화창이 있고, 화사석 위에는 8각의 옥개석을 두고 그 위에 꽃봉오리 모양의 보주를 조각하였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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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여래입상(보물 96호)은 5개으로 돌로 불상을 만들고 그 위에 얇은 돌로 만든 갓을 올렸다. 얼굴 형태 및 세부적인 표현에서 단순하고 투박하면서 힘이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굴 앞에서 녀려다 보이는 절터. 오른쪽(동쪽)편에 요사채 등이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사원 옆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해체.수리 중인 석굴 축대에 사용되었던 석재들

OLYMPUS DIGITAL CAMERA왼쪽편 건물터 앞에 세워져 있는 사각석등. 고려시대 이후 유행했던 석등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충주 미륵대원지 사각석등
이 석등은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특이한 결구 수법을 보여주는 석등으로 특히 석주형 화사석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일부 석등에서만 사용된 기법으로 고려 수도인 개성 일대에서 확인되고 있다. 개성에서 멀리 떨어진 충주지역에 4각석등이 세워졌다는 것은 석등양식이 지방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고려시대 절터에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팔각석등과 고려시대의 사각석등이 함께 세워져 있음은 통일신라문화와 고려문화가 공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절터 왼쪽편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공간. 큰 돌로 축대를 쌓아 건물터를 조성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찰 옆쪽 건물터 아래에 있는 석조귀부. 상당히 큰 규모의 받침돌이다.

충주 미륵대원지 석조귀부
사찰의 남북 종축선에서 약간 좌측(동쪽)에 위치하여 북향하고 있으며 길이 605 cm, 높이 180 cm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거북모양 받침이다. 귀갑문은 생략하였으며, 좌측 어깨 부분에 작은 거북 두 마리가 기어 올라가는 형태를 양각하였고, 앞쪽의 발은 비교적 사살적으로 표현하였으나 형식화 되었다. 귀부의 등 가운데에 비좌가 있었으나 비를 세울 수 있는 정도는 아니며 수차례 발굴조사에서 비석조각조차 찾지 못했음을 볼 때 원래 비는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절터 오른쪽으로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절터 앞을 지나는 큰 길.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까지 연결되는 고갯길이다. 길 옆에 고갯길을 오가는 여행객을 위한 숙소인 미륵리 원터가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백두대간을 넘어가는 고갯길 하늘재(명승 49호)로 연결되는 길.

충주 계립령로 하늘재, 명승 49호
충주 계립령로 하늘재는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대원지에서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까지 연결되는 고갯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아달라왕 3년(156)에 개통되었는데, 이는 죽령보다 2년 앞선 것으로 가장 오래된 고갯길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삼국시대 군사적 요충지로 고구려가 남진할 때 중요한 거점이 되었으며, 신라가 북진할 때에도 길목이 되어 충주지방을 확보하는 통로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이 고개를 넘어 금강산으로 향하던 중 보물 제96호로 지정된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을 조성하였으며 태자의 누이 덕주공주는 석조여래입상과 마주 보이는 월악산 영봉 아래 덕주사 마애불을 조성하고 이곳에 머물렀다고 전한다. 계립경은 시기마다 이름이 달랐는데 신라시데에 계립령, 고려시대에 대원령으로 물리웠으며 대원령을 풀이하면 한울재가 되는데, 한울재가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하늘재로 바뀌었다. 한훤령은 하늘재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부근에 한훤령산성이 위치하고 있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충주 미륵리 원터. 하늘재 고갯길 옆으로는 사찰에서 운영한 여행객을 위한 숙소로 사용된 원(院)이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건물은 회(回)자 모양의 행각 형태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당 한 가운데는 말을 묶어두는 마방이 있다. 꽤 큰 규모의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출입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자리

OLYMPUS DIGITAL CAMERA여행객이 쉴 수 있는 방들이 있던 건물터. 방과 툇마루로 구성된 전형적인 행각 건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충주 미륵리 원터, 고려시대
충주 미륵대원지(사적 317호 창건과 더불에 지리적 중요성이 큰 이곳에 원을 별도로 세우고 운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원터는 고려초기 충주와 문경을 잇는 계립령로(지금의 하늘재)에 위치하며 충주를 넘어가면 문경 관음리에 절터가 있는데 이 또한 원의 기능을 갖추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조령(새재)이 개통되면서 미륵리의 원은 점차 그 기능을 상해 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지에 대한 조사결과 두 차례 중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났으며 건물의 형태는 ‘回’자 구조로 가운데 말을 묶어 두는 마방을 두고 주변에 여행자와 관리인이 기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이며 남북을 잇는 요충지인 계립령로에 자리했던 이 원터는 미륵대원지와 더불어 사원과 역원의 기능을 두루 갖춘 중요한 유적지이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미륵리 원터 뒷편 모서리에 세워져 있는 3층석탑. 땅기운이 약한 곳을 보강하기 위해 세운 석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륵리3층석탑
신라석탑의 양식을 따른 고려시대 초기의 일반형 석탑으로, 높직한 2중 기단 위에 3층의 몸돌 부분을 형성하고 그 위에 노반을 얹어 놓고 있다. 매우 안정감을 주며,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을 하고 있는 신라시대 정형화된 양식을 잘 따르고 있다. 중원미륵리사지의 동쪽 200 m 떨어진 한적한 곳에 탑을 세운 이유를 알 수 없으나 비보사탑설(도선국사에 의해 제기된 이론)에 의해 땅기운이 약한 곳을 보강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져 이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절터에 남아 있는 불상 머리. 석굴에 모셔진 석조여래입상처럼 또다른 불상을 조성하기 위해 만든 미완성 석불로 추정되고 있다.

미륵리 불두
높이 138 cm, 최대너비 118 cm의 대형 화강암 불두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남아 이다. 눈매는 일자형으로 보이며 입도 일자형으로 다소 작게 표현되었고 입술 윤곽선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코와 입 사이에는 사실적으로 음각 주름선이 나타나 있고 귀는 길며 코 끝은 오똑하지 않고 다소 편평하게 처리하였다. 미완성의 석불로 보이며 고려시대 지방 불상양식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충주 미륵대원지, 사적 317호
이 절터는 동쪽으로는 하늘재, 서쪽의 지릅재 사이의 분지에 위치하고 있고,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남북의 중요한 길목에 있어 불교 사찰의 역할 뿐 아니라 군사,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1970년대 말부터 3차례에 걸쳐 절터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미륵당, 미륵당초 등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고 지금도 이 일대가 미륵리로 불리고 있어 석굴사원의 이름은 미륵대원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사역내에 석불, 석탑, 석등, 당간지주, 돌거북 등 많은 유물이 남아 있어 고려시대 화려했던 절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특히 석불을 둘러싼 ‘ㄷ’형 석실은 경주 석굴암의 조영의사를 따른 것으로, 원래 조각상들이 끼워져 있었으나 몸고 침입시 절이 불타면서 파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출처>

  1.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