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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 인각사지(사적 374호),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곳

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화산 북쪽 기슭에 남아 있는 인각사지(사적 374호)이다. 고려 충렬왕 때 일연이 이곳에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저술한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사찰입구에 우뚝 솟은 큰 바위가 기린의 뿔을 닮았다고 하여 인각사(麟角寺)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삼국시대에 처음 창건하였다고 하며 발굴.조사결과 고려시대에 절을 크게 중수하면서 건물의 위치가 바뀌었다고 하며 조선중기까지 큰 사찰이었나 거의 폐사되어 지금은 최근까지 극락전과 작은 요사채 만 있었다고 한다. 경내에는 일연의 사리를 모신 승탑과 탑비(보물 428호)를 비롯하고 고려시대 삼층석탑과 불상이 남아 있다. 특히 탑비는 중국에서 왕희지 글자를 집자하여 글을 새겼는데 후대에 왕희지 글자를 찾아 탁본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그 과정에 비석은 크게 훼손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군위 인각사지(사적 428호). 경주에서 안동,상주로 연결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어 고려시대에 번창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이후 쇠퇴하여 지금은 절터에 극락전을 비롯하여 몇동의 전각들만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인각사 주불전인 극락전.

OLYMPUS DIGITAL CAMERA극락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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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통일신라 삼층석탑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군위 인각사 삼층석탑
이 탑은 전형적인 신라 탑 양식을 이어 받은 삼층석탑으로 보기 드물게 상륜부가 남아 있어 탑의 양식과 구조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상대기단의 갑석은 2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툼한 부채꼴 모양의 받침에 얕은 사각형의 받침이 겹쳐져 있는 이중 탑신과 괴임대가 있다. 옥개석은 각층 탑신의 비율에 맞게 줄어들고 있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전체가 4단으로 되어 있으며, 모서리의 선은 많이 둘글려져 있다. 또한 이 탑은 제1탑신석이 제2탑신석보다 높이의 비례가 크고, 옥개석의 옥개받침이 4단인 점 등을 볼 때 고려 전기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신라말 ~ 고려초 시기의 석탑 연구에 있어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안내문, 군위 인각사,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극락전에서 보이는 삼층석탑과 절터. 발굴.조사결과 고려시대에 사찰을 중수하면서 절의 중심영역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삼국유사 저자 일연의 사리를 모신 승탑(보물 428호)

OLYMPUS DIGITAL CAMERA승탑 옆에 있는 불상

OLYMPUS DIGITAL CAMERA승탑 뒷편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탑비(보물 428호).

OLYMPUS DIGITAL CAMERA일연의 행적과 그를 기리는 글 등을 적은 비석. 왕희지 글자를 집자하여 비석에 새긴것으로 후대에 여러차례 탁복을 하는 과정에서 크게 훼손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인각사지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석재들. 통일신라시대 건물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고려 때 절을 중수하는 과정에서 재사용되었다고 한다.

인각사 발굴 조사 출토 부재
이곳에 전시된 석재는 인각사(사적 374호)를 정비하려고 발굴하는 과정에서 수습된 것으로 인각사 창건(642년)부터 고려시대까지 인각사에 사용된 석재 중 중요 부재를 모아 놓은 것이다. 1992년부터 2009년까지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 현 인각사 동쪽에서 통일신라시대 중심 사역 일부가 확인되었으며, 고려시대 후기부터 중심 사역이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인각사가 삼국유사를 저술한 보각국사 일연선사의 하안소(1284 ~ 1289년)로 사용되면서 통일신라시대에 정교하게 다듬어진 석재를 활용하여 건물을 증축하거나 개축한 것으로 보이며, 일부 고려시대에 제작된 석재도 확인된다. 전시된 부재는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제작된 인화문 석등대좌를 비롯한 심초석, 방형초석, 원형초석, 기단석 등이다. 이중 2005년 극락전 해체과정에서 확인된 심초석은 통일신라시대 인각사에 목탑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실증적 자료이다. (안내문, 군위 인각사,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최근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국사전

OLYMPUS DIGITAL CAMERA국사전 옆 일연의 행적 등을 설명해 주는 전시관.

OLYMPUS DIGITAL CAMERA비각 뒷편에 있는 산령각.

OLYMPUS DIGITAL CAMERA인각사 입구에 있는 요사채

OLYMPUS DIGITAL CAMERA극락전 아래에 있는 요사채. 극락전과 함께 절터를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찰 뒷편에서 보이는 인각사지 절터. 문화재로 지정되어 건물을 증축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각사는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화산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 대한불교 조계종 제 10교구 본사인 은혜사의 말사로 신라 선덕왕 11년(642)에 의상대사께서 창건하였다. 절 입구에 깎아지른 듯한 바위가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기린이 뿔을 바위에 얹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인각사라 하였다고 한다. 고려 중렬왕 때 일연이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이곳에 거처하면서 구산문도회를 두번이나 개최하였고, 여기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활자본으로, 5권 2책으로 구성되었다. 편찬 연대는 미상이나 1281 ~ 1283년(충렬왕 7 ~9) 사이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현재까지 고려시대의 각본은 발견되지 않았고, 완본으로는 1512년(조선 중종 7) 경주부사 이계복에 의하여 중간된 정덕본이 초고본이며, 그 이전에 판각된 듯한 영본이 전한다. 본서는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와 더불어 현존하는 한국 고대 사적의 쌍벽으로서, <삼국사기>가 여러 사관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사이므로 그 체재나 문장이 정제된 데 비하여, <삼국유사>는 일연성사 혼자의 손으로 씌어진 이른바 야사이므로 체재나 문사가 <삼국사기>에 못 미침은 사실이나, 거기서 볼 수 없는 많은 고대 사료들을 수록하고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헌이다. 즉, 그 중에서도 특히 고조선에 관한 서술은 한국의 반만년 역사를 내세울 수 있게 하고 단군신화는 단군을 국조로 받는 근거를 제시하여 주는 기록인 것이다. (안내문, 군위 인각사, 2019년)

<출처>

  1. 안내문, 군위 인각사,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충주 청룡사지, 조선 태조가 보각국사를 위해 크게 중창했던 사찰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에 있는 옛 청룡사 절터이다. 청룡사는 고려말 활동했던 승려 보각국사가 머물렀던 사찰이다. 조선 태조 원년(1392)에 그가 입적하자 태조는 ‘보각국사’라는 시호와 ‘정혜원융’이라는 승탑 이름을 하사하고 청룡사를 크게 중창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조선왕실과 관련된 사찰로 조선후기 숙종 이후까지 큰 사찰로 명맥을 유지해 왔으나 이후 폐사되어 지금은 절터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절터에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빼어난 조형미와 조각수법을 보여주는 보각국사탑(국보 197호)를 비롯하여 탑비(보물 658호), 석등(보물 656호) 등의 문화재가 남아 있다. 특히 절터 입구에는 조선후기 숙종 때 사찰을 크게 중건하면서 그 내력을 기록한 위전비가 남아 있어 청룡사가 조선후기까지 명맥을 유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청룡사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보각국사를 위해 크게 중창하는 등 조선왕실과 관련이 있었던 사찰이지만 조선후기 폐사된 이후 보각국사와 관련된 유물 외에는 그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SANYO DIGITAL CAMERA절터 입구에 세워져 있는 위전비. 조선후기 숙종 때 지역민들이 청룡사를 중창하면서 그 경위를 기록해 놓고 있다. 조선후기까지 그 명맥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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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전비에 새겨진 글. 청룡사를 중창할 때 시주한 신도들의 이름과 품목 등을 새겨놓고 있다.

충주 청룡사 위전비
숙종 18년(1692)에 세워진 2 m가 넘는 크기의 4면비로 당시 청룡사의 창건 및 경영 등과 관련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신도들이 전답을 기증한 내용을 적은 비이다. 청룡사는 고려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초기에는 보각국사가 머물면서 번성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나 그 이후의 사실은 이 비로서 짐작할 수 있다. 비에는 시주한 신도들의 이름과 품목 및 수량이 적혀 있으며 2~3차에 걸쳐 추가로 기록한 부분도 있어 절은 몇차례 걸쳐 보수.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이 비의 받침돌은 거북모양이고, 머리부분은 탑의 옥개석 형태로 되어 있으며 그 마루에는 용이 조각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한 것으로 당시의 사찰경영을 위한 경제상을 알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문, 충주시청, 2009년)

SANYO DIGITAL CAMERA절터에 남아 있는 승탑들.

SANYO DIGITAL CAMERA석종형 부도.

충주 청룡사지 석종형 부도
이 부도는 조선시대에 유행하던 전형적인 석종형 부도로서 정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2단의 하대석을 놓고 화강암의 탑신을 올려 놓았다. 탑신 윗부분은 복발 모양으로 조성하여 정상부에 3단의 돌기부분을 조각하였고, 탑신의 전면부에 문자를 음각한 흔적이 보이는데, 마멸이 심하여 눈으로는 쉽게 판독되지 않으나 ‘적운당사리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교적 대형에 속하는 부도 주변에는 장대석을 방형으로 돌려 놓아 탑구를 형성하였다. (안내문, 충주시청, 2009년)

SANYO DIGITAL CAMERA철터 안쪽에 있는 보각국사탑(국보 197호), 탑비(보물 658호), 석등(보물 656호). 고려말.조선초를 대표하는 승탑이다.  보각국사 혼수(混修, 1320~1392년)는 고려말 활동한 승려로 문장과 글씨에 능했으며, 계율을 따를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젊었을때는 청룡사에서 머물렀으며, 전국을 돌며 수도하다가 이곳 청룡사에서 입적했다고 한다. 시호는 ‘보각(普覺)’이며 탑이름은 ‘정혜원륭(定慧圓融)’이다.

SANYO DIGITAL CAMERA보각국사탑(국보197호).  정식 명칭은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이다. 탑은 8각형평면을 기본으로 하고있는데, 기단 아랫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가운데받침돌에는 사자상과 용을 교대로 새겼다. 탑신 몸돌에는 각면마다 무기를 들고 있는 탑신 몸돌에 새겨 넣은 신장상과 그 사이에 구름에 휩싸인 용을 섬세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새겨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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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각국사탑 앞에 세워진 석등(보물 656호). 높이 2.03 m로 받침돌과 화사석, 지붕돌, 머리장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받침돌은 사자가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어 사자석등이라 부른다. 가운데받침돌은 4각형이며, 윗받침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화사석은 4각형 형태로 앞뒤로 창을 내어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보각국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비(보물 658호).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돌을 올려놓은 단순한 형태이다. 조선 태조의 명을 받아 승려 희달이 세운 것으로 개국공신 중 한명인 권근이 글을 짓고, 승려 천택이 글씨를 썼다. 비석에 새겨진 글씨는 필체가 힘이 넘치며 격조를 갖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 뒷편에서 본 모습. 절터는 폐사된 후 울창한 숲으로 바뀌어 이곳이 절터임을 알기는 쉽지 않다.

충주 청룡사지 11-20110817고려말 청룡사에서 간행된 『금강반야경소론찬요조현록(보물 720-2호)』. 『금강반야경』의 주석서로서 발문에 따르면 1376년 보각국사의 설법을 듣고 이 책을 간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1. 안내문, 충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충주 미륵대원지(사적317호), 백두대간 고갯길에 있던 고려시대 절터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에 있는 절터인 미륵대원지(사적 317호)이다. 경주 불국사 석굴암을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보이는 고려시대 석굴사원이 있던 절터이다. 석굴은 큰 돌을 다듬어 축대와 벽체 등을 만들고 그 위에 지붕 등 목조 건축물을 올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에는 고려초 전국적으로 유행했던 투박하면서도 강인한 모습의 석조여래입상(보물 96호)를 모시고 있다. 석굴 앞에는 오층석탑(보물95호), 석등이 일렬로 나란히 세워져 있어 규모나 격식을 제대로 갖춘 모습을 하고 있다.

절터는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오래된 고갯길인 하늘재(명승 49호)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던 이 길은 조선초 문경새재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전까지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였다. 고려시대 한강유역 주요 사찰과 마찬가지로 주요 교통로 오가는 사람들이 쉬어가는 역할을 했던 사찰로서 절 앞에는 별도로 큰 규모의 여행자 숙소였던 원(院)이 있었던 건물터가 있다. 고려시대 주요 교통로에서 번창했다가 조선시대 이후 폐사된 여러 사찰 중 하나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충주 미륵대원지(사적 317호).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에 있었던 고려시대 절터이다.  경주 석굴암을 모방하여 조성한 석굴사원과 하늘재 고갯길을 이용하던 여행객이 묵을 수 있는 원(院)이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미륵대원지 공간배치도. 불상이 모셔진 석굴사원을 중심으로 사찰영역이 조성되어 있고, 하늘재 고갯길 옆으로 숙소로사용된 원(院) 건물터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절터에 입구에 있는 당간지주.

충주 미륵대원지 당간지주
당간지주는 깃발을 매다는 장대를 고정하기 위한 장치로 보통 사찰의 입구에 세워 신성한 지역임을 나타낸다. 현재 지주와 간대로 보이는 석재가 남아 있는데 간대 윗 면에는 2중의 원각선을 양각하였다. 지주는 아랫부분이 결실되어 전체 크기를 알 수 없으나 윗부분 바깥면에 6엽 연화문을 양각한 것은 희귀한 예이다. 통일신라시대보다 상대적으로 폭이 넓고 높이가 낮은 고려시대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준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절터는 석조여래입상이 모셔진 석굴과 그 앞으로 석등, 오층석탑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충주 미륵리 오층석탑(보물 95호). 원래 있던 바윗돌 위에 돌을 올려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5층 탑신을 올렸다. 탑신 몸돌에는 모서리에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튀어 나온 부분이 적고 경사가 심해 벽돌로 쌓은 전탑처럼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오층석탑과 석굴 사이 공간에 있는 석등. 통일신라 석등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는 8각석등이다.

충주 미륵대원지 석등
전형적인 8각석등으로 균형이 잘 잡힌 우수한 석등이다.하대석은 4각형이며 윗부분에 연꽃을 새겼다. 간주석은 아무런 무늬가 없는 8각형의 돌기둥으로 상대석에는 앙련을 조각하였다. 그 위에 등을 설치했던 8각형의 화사석이 있는데 4면에 화창이 있고, 화사석 위에는 8각의 옥개석을 두고 그 위에 꽃봉오리 모양의 보주를 조각하였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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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여래입상(보물 96호)은 5개으로 돌로 불상을 만들고 그 위에 얇은 돌로 만든 갓을 올렸다. 얼굴 형태 및 세부적인 표현에서 단순하고 투박하면서 힘이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굴 앞에서 녀려다 보이는 절터. 오른쪽(동쪽)편에 요사채 등이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OLYMPUS DIGITAL CAMERA석굴사원 옆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해체.수리 중인 석굴 축대에 사용되었던 석재들

OLYMPUS DIGITAL CAMERA왼쪽편 건물터 앞에 세워져 있는 사각석등. 고려시대 이후 유행했던 석등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충주 미륵대원지 사각석등
이 석등은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특이한 결구 수법을 보여주는 석등으로 특히 석주형 화사석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일부 석등에서만 사용된 기법으로 고려 수도인 개성 일대에서 확인되고 있다. 개성에서 멀리 떨어진 충주지역에 4각석등이 세워졌다는 것은 석등양식이 지방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고려시대 절터에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팔각석등과 고려시대의 사각석등이 함께 세워져 있음은 통일신라문화와 고려문화가 공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절터 왼쪽편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공간. 큰 돌로 축대를 쌓아 건물터를 조성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찰 옆쪽 건물터 아래에 있는 석조귀부. 상당히 큰 규모의 받침돌이다.

충주 미륵대원지 석조귀부
사찰의 남북 종축선에서 약간 좌측(동쪽)에 위치하여 북향하고 있으며 길이 605 cm, 높이 180 cm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거북모양 받침이다. 귀갑문은 생략하였으며, 좌측 어깨 부분에 작은 거북 두 마리가 기어 올라가는 형태를 양각하였고, 앞쪽의 발은 비교적 사살적으로 표현하였으나 형식화 되었다. 귀부의 등 가운데에 비좌가 있었으나 비를 세울 수 있는 정도는 아니며 수차례 발굴조사에서 비석조각조차 찾지 못했음을 볼 때 원래 비는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절터 오른쪽으로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절터 앞을 지나는 큰 길.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까지 연결되는 고갯길이다. 길 옆에 고갯길을 오가는 여행객을 위한 숙소인 미륵리 원터가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백두대간을 넘어가는 고갯길 하늘재(명승 49호)로 연결되는 길.

충주 계립령로 하늘재, 명승 49호
충주 계립령로 하늘재는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대원지에서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까지 연결되는 고갯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아달라왕 3년(156)에 개통되었는데, 이는 죽령보다 2년 앞선 것으로 가장 오래된 고갯길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삼국시대 군사적 요충지로 고구려가 남진할 때 중요한 거점이 되었으며, 신라가 북진할 때에도 길목이 되어 충주지방을 확보하는 통로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이 고개를 넘어 금강산으로 향하던 중 보물 제96호로 지정된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을 조성하였으며 태자의 누이 덕주공주는 석조여래입상과 마주 보이는 월악산 영봉 아래 덕주사 마애불을 조성하고 이곳에 머물렀다고 전한다. 계립경은 시기마다 이름이 달랐는데 신라시데에 계립령, 고려시대에 대원령으로 물리웠으며 대원령을 풀이하면 한울재가 되는데, 한울재가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하늘재로 바뀌었다. 한훤령은 하늘재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부근에 한훤령산성이 위치하고 있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충주 미륵리 원터. 하늘재 고갯길 옆으로는 사찰에서 운영한 여행객을 위한 숙소로 사용된 원(院)이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건물은 회(回)자 모양의 행각 형태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당 한 가운데는 말을 묶어두는 마방이 있다. 꽤 큰 규모의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출입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자리

OLYMPUS DIGITAL CAMERA여행객이 쉴 수 있는 방들이 있던 건물터. 방과 툇마루로 구성된 전형적인 행각 건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충주 미륵리 원터, 고려시대
충주 미륵대원지(사적 317호 창건과 더불에 지리적 중요성이 큰 이곳에 원을 별도로 세우고 운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원터는 고려초기 충주와 문경을 잇는 계립령로(지금의 하늘재)에 위치하며 충주를 넘어가면 문경 관음리에 절터가 있는데 이 또한 원의 기능을 갖추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조령(새재)이 개통되면서 미륵리의 원은 점차 그 기능을 상해 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지에 대한 조사결과 두 차례 중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났으며 건물의 형태는 ‘回’자 구조로 가운데 말을 묶어 두는 마방을 두고 주변에 여행자와 관리인이 기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이며 남북을 잇는 요충지인 계립령로에 자리했던 이 원터는 미륵대원지와 더불어 사원과 역원의 기능을 두루 갖춘 중요한 유적지이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미륵리 원터 뒷편 모서리에 세워져 있는 3층석탑. 땅기운이 약한 곳을 보강하기 위해 세운 석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륵리3층석탑
신라석탑의 양식을 따른 고려시대 초기의 일반형 석탑으로, 높직한 2중 기단 위에 3층의 몸돌 부분을 형성하고 그 위에 노반을 얹어 놓고 있다. 매우 안정감을 주며,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을 하고 있는 신라시대 정형화된 양식을 잘 따르고 있다. 중원미륵리사지의 동쪽 200 m 떨어진 한적한 곳에 탑을 세운 이유를 알 수 없으나 비보사탑설(도선국사에 의해 제기된 이론)에 의해 땅기운이 약한 곳을 보강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져 이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절터에 남아 있는 불상 머리. 석굴에 모셔진 석조여래입상처럼 또다른 불상을 조성하기 위해 만든 미완성 석불로 추정되고 있다.

미륵리 불두
높이 138 cm, 최대너비 118 cm의 대형 화강암 불두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남아 이다. 눈매는 일자형으로 보이며 입도 일자형으로 다소 작게 표현되었고 입술 윤곽선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코와 입 사이에는 사실적으로 음각 주름선이 나타나 있고 귀는 길며 코 끝은 오똑하지 않고 다소 편평하게 처리하였다. 미완성의 석불로 보이며 고려시대 지방 불상양식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충주 미륵대원지, 사적 317호
이 절터는 동쪽으로는 하늘재, 서쪽의 지릅재 사이의 분지에 위치하고 있고,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남북의 중요한 길목에 있어 불교 사찰의 역할 뿐 아니라 군사,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1970년대 말부터 3차례에 걸쳐 절터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미륵당, 미륵당초 등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고 지금도 이 일대가 미륵리로 불리고 있어 석굴사원의 이름은 미륵대원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사역내에 석불, 석탑, 석등, 당간지주, 돌거북 등 많은 유물이 남아 있어 고려시대 화려했던 절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특히 석불을 둘러싼 ‘ㄷ’형 석실은 경주 석굴암의 조영의사를 따른 것으로, 원래 조각상들이 끼워져 있었으나 몸고 침입시 절이 불타면서 파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출처>

  1. 안내문, 충주시청,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강진 월출산 월남사지, 백제계 양식 석탑이 남아 있는 고려시대 절터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마을에 남아 있는 월남사지 절터이다. 월남사는 기록에 따르면 고려시대 송광사 2대국사인 진각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남아 있는 삼층석탑이나 사찰 형태 등으로 볼 때 그 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절터에는 백제석탑 양식을 계승한 월남사지삼층석탑(보물 298호), 진각국사비(보물 313호)가 남아 있었다. 최근 인근 민가에서 신라계 양식의 지붕돌이 발견되어 2기의 석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010년에는 절터에 민가와 작은 사찰이 있었으나 죄근에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어 옛 절터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월남사는 정유재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되어 절터만 남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강진 월남사지. 발굴.조사가 진행되기 전 모습인데 마을 가운데 삼층석탑이 남아 있었다.

SANYO DIGITAL CAMERA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보물 298호). 화강석을 목재처럼 다듬어 짜맞추어 목탑처럼 만든 백제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는 독특한 형태의 고려시대 석탑이다.

SANYO DIGITAL CAMERA석탑 뒷편 불전이 있던 자리에는 최근까지 월남사라는 사찰이 있었다.

SANYO DIGITAL CAMERA월남사지 전각들이 들어서 있었던 석탑 왼쪽편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절터에는 발굴.조사가 진행되기 전까지 민가들이 들어서 있었고 건물터는 농경지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건물터 뒷편으로 보이는 월출산 봉우리.

SANYO DIGITAL CAMERA절터 한쪽편 마을에 자리잡고 있는 진각국사비(보물 313호)

월남사지,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월남사지는 월출산 남쪽에 있던 큰 규모의 절로 처음 세워진 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 진각국사 혜심(1178~1234)이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이후 어떤 과정을 거쳐 언제 절이 없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현재 절터에 남아 있는 유적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백제계 삼층석탑과 이규보가 쓴 진각국사비가 남아 있다. 월남사지는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불에 타 없어진 후 지금까지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월남사는 진각국사가 주석한 사실에도 백제계 석탑이 남아 있는 사지로서는 가장 그 규모가 커 주목되고 있다. 이 석탑은 법당지의 전면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최근에 현 석탑 좌측의 민가 장독대에서 석탑의 옥개석(지붕돌)이 발견되었는데 현지 주민들이 구전한 바로는 현 석탑의 주변에서 수습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시실을 볼 때 월남사지에는 원래 2기의 석탑이 있었던 것 같다. (안내문, 강진군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강진군청,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영주 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59호)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숙수사지 절터에 남아 있는 당간지주(보물 59호)이다.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 들어가는 소나무 숲길에서 볼 수 있다. 소수서원이 숙수사 절터에 세워졌음을 알려주는 문화재이다. 이곳은 순흥지역에서도 경치가 좋고 사람의 통행이 많은 교통의 요지로 인근 부석사 못지않게 큰 절이 있었다. 유물들은 부근 소수중학교 건립공사 중에 발견되었는데 모두 25구의 불상들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로서 볼 때 삼국시대 또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고려시대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과 그의 아들, 손자까지 숙수사에서 공부하였다는 것으로 볼 때 조선초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영주 소수서원 들어가는 길에 볼 수 있는 당간지주(보물 59호). 통일신라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로 이곳에 절터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전체적으로 소박하면서도 조각수법이 세련된 편이다.

숙수사지당간지주, 보물 59호
당간지주는 절의 위치를 알리는 상징적인 조형물이다. 절에서는 불교의식이나 행사가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높이 달았다. 당간지주는 당을 매달던 깃대, 즉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돌기둥이다. 유교의 성지인 소수서원에서 불교 유적을 만나는 것이 이채로운데, 원래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다. 출토된 유물이나 유적을 보면 인근 부석사 못지 않게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간지주 역시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절터에 세워진 서원임을 알 려주고 있다. (안내문, 영주시청, 2009년)

OLYMPUS DIGITAL CAMERA탄생불(신라 7세기), 반가사유상(신라 7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부처(신라 7세기), 보살(신라 7세기)

OLYMPUS DIGITAL CAMERA공양자, 통일신라 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신장, 통일신라 9세기

OLYMPUS DIGITAL CAMERA삼존불, 통일신라 9세기

숙수사 터에서 나온 불상
숙수사는 신라 때 창건된 사찰로 전해지며, 소수서원이 들어서기 이전에 이미 폐사되었다. 불상은 1953년 소수서원 뒤편에 신설된 소수중학교 건립공사 중에 발견되었는데, 현재 당간지주와 불상대좌, 광배 등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 발견되 불상은 모두 25구로 제작 시기는 감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며, 종류도 부처상, 보살상, 반가사유상, 탄생불, 신장상, 공양자상 등 매우 다양하다. (안내문, 대구박물관, 2013년)

<출처>

  1. 안내문, 영주시청, 2009년
  2. 안내문, 대구박물관, 2013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