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절터

경주 천군동 사지(사적), 통일신라 절터

경북 경주시 천군동에 있는 통일신라 절터인 천군동 사지(사적)이다. 전형적인 통일신라 삼층석탑 2기가 남아 있으며 절터 대부분은 농경지로 사용되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금당, 강당, 중문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절의 규모는 남북 79 m, 동서 61 m이다. 발굴당시 출토된 유물들은 대부분 기와이며 절터에서는 화강석 건축자재 일부를 볼 수 있다. 쌍탑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지만 다른 사찰과는 달리 금당 좌우에 회랑을 두고 있지 않다. 석탑의 양식 등으로 볼 때 8세기 후반 이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천군동 사지(사적)>

절터에는 2기의 삼층석탑(보물)이 남아 있는데 통일신라 가람배치의 특징인 ‘두개의 탑’이 세워진 형태를 하고 있다. 마을 들판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39년에 복원하였다. 동탑은 기단과 탑신만 남아 있고, 서탑에는 머리돌 장식이 일부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천군동 동.서 삼층석탑(보물) 서탑>

현재 절터 대부분은 농경지로 사용되고 있으며 절터 동쪽편으로는 경주 세계문화엑스포가 열리는 세계문화엑스포공원이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농경지로 사용되고 있는 절터>

삼층석탑 주변에는 절터에서 출토된 석재들을 볼 수 있다. 발굴,조사 당시 출토된 기와조각같은 유물들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특별한 유물들은 출토되지 않았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재들을 볼 수 있는 삼층석탑 옆 절터>

OLYMPUS DIGITAL CAMERA<주춧돌>

OLYMPUS DIGITAL CAMERA<화강석 석재>

OLYMPUS DIGITAL CAMERA<화강석 석재>

천군동사지가 있는 마을은 경주와 동해안 감포 등을 연결해 주는 4번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또한 보문관광단지에서 불국사를 거쳐 울산지역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이 마을 부근에서 4번국도가 만나는 교통의 요지였다. 인근에는 원효대사와 관련된 사찰인 고선사가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쪽에서 본 천군동 사지(사적)>

경주 천군리 사지(千軍里 寺址,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 548-1
이 절터는 여기에 있던 절의 이름을 알 수 없어 동리이름을 따서 천군리 절터라고 부른다. 무너진 탑재와 주춧돌만 흩어져 있었는데, 1938년 일본인들의 발굴조사에 의해 중문·금당 · 강당자리가 확인되었다. 가람배치는 통일신라시대의 쌍탑 1금당식 (雙塔一金堂式)이다. 앞에는 중문이 있고 그 안쪽 동서에 두 탑이 있으며, 그 뒤로 금당터와 강당터가 자리하고 둘레에는 회랑터가 있다. 중문터는 앞면 3칸에 옆면 2칸이고, 금당은 앞면과 옆면이 각각 5칸, 강당은 앞면 8칸에 옆면 3칸 규모였음이 밝혀졌다. 중문에서 강당까지의 남북 길이는 79m, 동서 길이는 61m정도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은 대부분 기와와 벽돌 종류로 지붕 맨 윗부분(용마루)의 양쪽 끝을 장식하였던 치미(尾)는 국립경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 양식인 쌍탑식 절 배치를 따랐지만 금당 좌우에 회랑이 없는 것이 특이하다. 이 절터는 현재 논밭으로 변하여 원래 모습을 확인 할 수 없다. 다만 동·서탑을 1939년에 다시 세워 보존하고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주 천관사지(사적), 귀족 가문의 후원을 받아 세워졌던 도심 사찰

경북 경주시 교동에 있는 천관사지(天官寺址, 사적)이다. 천관사는 통일신라 때 김유신이 인연이 있었던 기생 천관을 위해 세웠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건립 이후 그 역사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려 중기 이곳을 지나던 이공승이라는 사람이 천관사 내력과 관련된 시를 남긴 것으로 볼 때 당시까지 사찰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절터가 있는 곳은 통일신라 때 귀족층들이 살았던 주거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귀족가문의 후원을 받아 도심 주택가에 세워진 사찰의 입지조건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천관사지(사적)>

OLYMPUS DIGITAL CAMERA<절터>

절터는 오랜 세월 농경지로 사용되어 왔으며 2000년 이후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출토유물은 많지 않은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절터에 남아 있는 석재>

천관사 석탑을 장식했던 팔부중상 중 가루라상이 표현한 탑신 몸돌이 출토되었다. 가루라는 ‘상상의 새’를 말하는데 이를 이인화하여 입을 새부리 모양으로 표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팔부중, 8세기, 경주 천관사지 출토>

OLYMPUS DIGITAL CAMERA<2012년 발굴.조사 현장>

천관사는 경주 오릉 동쪽편 들판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 궁성이었던 월성 동남쪽 500 m, 김유신 집터인 재매정(사적)과는 400 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천관사지 북동쪽 경주 월성 일대>

OLYMPUS DIGITAL CAMERA<재매정에서 천관사 절터로 들어오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재매정(사적), 김유신 장군이 살았던 집터>

OLYMPUS DIGITAL CAMERA<천관사지 서쪽 경주 오릉 부근 마을>

경주 천관사지(天官寺址,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244
이 절터는 도당산 서꼭 기슭에 있으며 신라시대 김유신이 사랑하던 기생 전관 (天官)의 집을 절로 바꾼 곳이라 전한다. 김유신은 어머니 만명부인(南明大人)의 엄한 훈계를 명심하여 함부로 남과 사귀지 않았지만, 하루는 우연히 기생 천관의 집에 유숙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훈계를 들은 뒤 천관의 집에 들르지 않았다. 그 후 어느 날 술에 취하여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말이 이전에 다니던 길을 따라 천관의 집에 이르렀다. 김유신이 갈못을 깨닫고 타고 갔던 말의 목을 베고 안장을 버린 채 돌아 왔다. 훗날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한 뒤 사랑하였던 옛 여인을 위하여 천관의 집터에 절을 세우고 그녀의 이름을 따서 천관사(天官寺)라 하였다. 처음 건립 이후 이 절의 역사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중기 이공승(李公升)이 이 절을 지나면서 시를 지은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는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00년 국립 경주문화개연구소에 의하여 발굴조사 되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주 원원사지(사적), 통일신라 밀교를 이끌었던 사찰

경북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봉서산 기슭에 있는 통일신라 절터인 원원사지(遠願寺址,사적)이다. 통일신라 밀교 해동 진언종(眞言宗)을 이끈 안혜, 낭유 등과 김유신 등이 호국사찰로 창건했다고 한다. 절터에는 십이지신상과 사천왕상이 새겨진 동.서삼층석탑과 금당터, 석등 등이 남아 있다. 명랑법사가 세운 사천왕사와 함께 통일신라 밀교의 중심이 되었던 사찰이다. 절터 아래에는 최근 중건된 사찰이 있다.

밀교(密敎)는 비밀의 가르침이란 뜻으로 문자나 언어로 표현된 현교(顯敎)를 초월한 최고의 가르침을 말한다. 인도에서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대승불교로 다라니(陀羅尼)라 부르는 주문을 중시하며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대일경(大日經)>과 <금강정경(金剛頂經)>이 주요 경전이다. 중국에서는 밀종(密宗), 한국과 일본에서는 진언종(眞言宗)이라고 하며 티벳불교도 밀교에 속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원원사지(사적)>

절터 가운데에는 2개의 탑이 나란히 있는  쌍탑이 남아 있다. 2개의 모두 같은 양식으로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려놓고 있다. 그 양식으로 보아 8세기 중엽 통일신라 전성기때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원원사지 동.서삼층석탑(보물)>

석탑 기단에는 연화좌에 앉아 있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는데 통일신라 석탑 중 처음으로 배치한 것이다. 십이지신은 『약사경(藥師經)』을 외우는 불교인을 지키는 신장이다. 삼국시대에는 밀교의 영향으로 호국적인 성격을 가졌으나 이후에는 방위신의 역할을 바뀌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십이지신상이 새겨진 기단부>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
<탑 가운데 남아 있는 고려시대 석등>

절터 뒷편에느는 축대부분 만 남아 있는 금당터가 있으며 그 주위로 건물 기둥을 올려 놓았던 석재들을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금당터>

OLYMPUS DIGITAL CAMERA<건물 기둥을 올렸던 주춧돌>

OLYMPUS DIGITAL CAMERA<주변에 남아 있는 석재들>

절터 아래에는 최근에 중건된 원원사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절터 입구>

OLYMPUS DIGITAL CAMERA<절터 아래에 있는 원원사>

OLYMPUS DIGITAL CAMERA<명부전>

OLYMPUS DIGITAL CAMERA<원원사 절터로 오르는 길>

<출처>

  1. 안내문, 문화재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주 분황사지(사적), 신라 경주 칠처가람

경북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절터인 분황사지(사적)이다. 분황사(芬皇寺)는 <삼국유사>,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삼국시대 선덕여왕 때(634년) 창건되었는데 경주의 신성한 숲 7곳에 조성했던 칠처가람(七處伽藍) 중 하나이다.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계율종을 창시한 자장(慈藏, 590 ~ 658년)과 원효(元曉, 617 ~ 686년)가 머물면서 수행했다. 황룡사와 함께 선덕왕의 후원을 받았던 높은 위상의 사찰이었으며 원효가 창시했다고 여겨지는 불교 법성종(法性宗) 중심 사찰이었다. 고려시대 이후 법성종이 번성하지 못하고 몽골의 침입과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크게 쇠퇴하여 작은 사찰로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경주 분황사지(사적)>

분황사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분황사 모전석탑(국보)를 비롯하여 솔거가 그렸던 관음보살상 벽화, 웅장한 약사여래상이 모셔졌던 사찰이다. 분황사는 중문, 석탑, 3금당, 강당. 회랑을 갖춘 큰 사찰이었는데 몽고의 침입과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전각 대부분은 소실되었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모전석탑을 비롯하여 원효대사비를 세웠던 화쟁국사비부, 당간지주, 석정 등이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칠처가람의 신성한 숲을 연상시키는 분황사 전경>

2008년 발굴,조사 결과 분황사 석탑 남쪽에 중문터와 긴 회랑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그 앞쪽에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건물은 석탑, 금당, 중문이 남북으로 일직선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 황룡사와 담을 맞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2009년 발굴 현장 모습>

SANYO DIGITAL CAMERA<발굴, 조사 당시 남쪽 중문터와 회랑터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구황동 당간지주>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
옛날 절에서 당이라는 깃발을 달았던 깃대를 당간 이라고 하는데, 이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양옆에 세운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이 당간지주는 분황사 바로 남쪽에 있는데,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 높이는 360cm이다. 양 기둥 사이에는 동쪽으로 향한 돌거북이臺가 있는데 당간의 받침돌로 돌 거북이를 배치한 것은 다른 당간지주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기둥의 일반적인 형태이며 3개의 구멍을 설치하여 양 기둥이 서로 관통하도록 조성되어 있다. 이 당간지주는 황룡사 것이 아니라 분황사 소유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인다. (안내문, 경주 분황사, 2009년)

OLYMPUS DIGITAL CAMERA<분황사지 동쪽 건물터>

경북 경주시 구황동 분황사 절터에 남아 있는 모전석탑(국보 30호)이다.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서 쌓은 것으로 선덕왕 때  세워졌다. 남아 있는 신라 석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나 통일신라의 삼층석탑 등이 화강석을 이용해서 목탑처럼 쌓은 것이라면, 분황사 모전석탑은 벽돌로 쌓은 전탑을 모방해서 만든 것이다. 원래는 7층 또는 9층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현재는 3층만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분황사 모전석탑(국보 30호)>

1층 몸돌에는 4면에 감실을 만들고 입구에 인왕상을 새겨 놓고 있다. 이 인왕상은 이 석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인데 조각상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7세기 신라의 조각수준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단부 모서리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사자상이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인왕상>

OLYMPUS DIGITAL CAMERA<사자상>

SANYO DIGITAL CAMERA<분황사 석탑을 쌓았던 석재들>

석탑에는 사리와 함께 수정.금바늘 등의 공양품도 함께 발견되었는데, 비교적 초기의 사리갖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여성이 주로 사용하는 바늘, 바늘통, 가위, 집게 등이 있어 분황사의 발원자인 선덕왕과 이 사리갖춤을 관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 <수정, 향유병, 장신구>

OLYMPUS DIGITAL CAMERA <선덕여왕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하는 바늘, 바늘통, 가위, 쪽집게>

분황사에는 삼국시대 돌우물(石井)이 남아 있다. ‘호국룡변어정’이라 불리는 이 우물은 바깥쪽은 8각을 이루고 안쪽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다. 삼국통일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오는 유서깊은 우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분황사 석정>

분황사 석정(芬皇寺石井)
이 것은 호국룡변어정이라고도 불리는 신라시대 우물이다. 우물틀의 외부는 높이 70cm의 8각, 내부는 원형인데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와 원응의 진리를, 우물안의 4각형 격자는 불교의 근본인 사성체를 뜻한다. 삼국유사에 보면 “원성왕 11년 당나라의 사신이 와서 신라의 호국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서 본국으로 떠났다. 그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서 자신들은 통지, 청지에 사는 두 호국용의 아내인데 당나라 사신과 하서국사신이 자신의 남편과 분황사에 사는 호국용을 주문을 외어 작은 물고기로 변화시켜 대나무통 넣어 가지고 갔다고 하면서 이를 구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서 물고기를 다시 빼앗아 각각의 우물에 넣어 살게 하였다.”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경주 분황사, 2019년)

분황사지석탑 옆에는 원효대사를 위한 비석인 화쟁국사비 받침돌이 남아 있다. 고려 명종 때  원효대사를 위한 비석이나 시호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 왕이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추사 김정희가 절근처에서 발견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OLYMPUS DIGITAL CAMERA<화쟁국사비 받침돌>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이 비부는 고려사에 세워진 원로 비 의 받침들이다. 비석은 고려 숙종 6년(1101) 8월에 내린 조서에 의해 분황사에 건립 되었다. 숙종은 원효가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겨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유사로 하여금 비를 세우게 하였다. 현재 비는 없이고 비편만 가끔씩 발견되고 있다. 추사 김정희가 비신을 받쳤던 대를 절 근처에서 발견하여 이를 확인하였다. 현재 비대석에는 ‘차신라화쟁국사비적’ 이라고 쓴 김정희의 친필이 음각되어 있다. 비대는 직육면체이고, 상대는 비신을 삽입하는 직사각형의 홈이 파져 있다. (안내문, 경주 분황사, 2019년)

분황사는 석탑을 중심으로 동.서.북면 세곳에 불전을 배치한 품(品)자형의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흘 하고 있는 신라 최초의 공간배치이다. 기록에 따르면 30만근 이상의 구리를 들여 약사여래상을 조성해 금당에 안치하였으며 화가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도 있었다고 한다.

경주 분황사지 03<분황사 가람배치>

OLYMPUS DIGITAL CAMERA<분황사 출토 석조 유물>

SANYO DIGITAL CAMERA<불상과 석등>

OLYMPUS DIGITAL CAMERA<건물 주춧돌>

OLYMPUS DIGITAL CAMERA<연꽃무늬 받침돌>

OLYMPUS DIGITAL CAMERA<석조>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사자, 7~8세기, 분황사>

OLYMPUS DIGITAL CAMERA<연꽃보상화무늬수막새, 새무늬암맥새, 분황사 출토>

현재의 분황사는 임진왜란 이후에 중건되었는데 약사여래를 모신 보광전이 옛 북금당터 한쪽편 자리에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분황사 보광전>

분황사(芬皇寺), 사적 548호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된 이래 지금까지 법등(法燈)을 이어온 유서깊은 사찰이다. 분황사 창건 직후에는 당대의 명승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와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가 주석하였다. 분황사에는 솔거(率居)가 그렸던 관음보살상 벽화와 경덕왕 14년(755)에 강고내말(强古乃木)이 구리 306,700근으로 주성하였던 약사여래상 등이 있어 사격(寺格)을 높였다. 분황사는 당간과 지주·중문.석탑.3금당·강당·회랑을 갖춘 대가람이었으나, 고려시대 고종 25년(1238) 몽고침입과 조선왕조시대의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차례로 겪으면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어 버리고 광해군 원년(1609)에 중창하고 새로 주조한 보광전과 약사여래입상 등이 사역(寺域)을 지키고 있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신라의 석탑 중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모전석탑(국보 제30호), 원효대사의 비석을 세웠던 화쟁국사비, 구황동 당간지주, 신라 호국룡의 설화가 깃들어 있는 석정 등의 석조문화재가 남아있다. (안내문, 경주 분황사, 2019년)

<출처>

  1. 안내문, 경주 분황사,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크게 보기

투루판 자오허고성 대불사(大佛寺) 절터

중국 투루판시 자오허교성(交河故城)에 남아 있는 대불사(大佛寺) 절터이다. 후한부터 남북조시대까지 투루판 지역을 통치했던 차사전국의 수도 교하고성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불사는 면적 5,100 ㎡이며 이 도시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사찰이었다. 절터에는 불상을 모셨던 불단이 있는 큰 규모의 금당터를 비롯하여 2개의 탑과 우물, 요사채 등이 있었으며 중문 앞 광장에 큰 규모의 탑이 남아 있다. 자오허고성은 투루판 북쪽에서 강물이 분지로 들어오는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볼 수 있는 도시가 아니라  중동지역이나 지중해 도시국가와 비슷한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 불교 사찰인 대불사가 자리잡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자오허고성 중심부에 남아 있는 대불사 절터>

대불사는 흙벽돌을 쌓아서 만든 투루판 지역의 건축 양식을 사용해 목조 건축물인 동아시아 사찰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불교가 인도에서 전파되는 실크로드 중심에 있는 교하고성 대불사는 전래과정에서 나타난 가람의 배치 변화와 특징 등에서 중간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SANYO DIGITAL CAMERA<자오허고성 모형에 표시된 대불사 유적>

자오허고성 중앙대로가 끝 부분에 랜드마크가 되었던 대불사 불탑이 세워져 있다. 대불사 경내에 쌍탑형식의 불탑이 있지만 별도로 사찰 바깥에 거대한 불탑이 세워졌다. 불탑은 흙벽돌로 쌓은 3층 구조물로 길이 16 m, 너비 15.6 m, 높이 10 m 규모이다. 남쪽에는 출입구가 있으며 2층 동.서쪽에 불상이 있었던 자리가 남아 있다. 현장법사의 여행기인 소설 ‘서유기’에 등장하는 불탑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SANYO DIGITAL CAMERA<대불사 불탑>

대불사는 고성내 주거지역보다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문에서 대불사까지 중앙대로가 형성되어 있으며 양쪽에 관청, 주거지, 상업지구 등이 배치되어 있다. 중동의 고대도시와 마찬가치로 사찰 앞 광장을 중심으로 상업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자오허고성 정문에서 대불사까지 이어지는 중앙대로>

SANYO DIGITAL CAMERA<대불사 앞 광장과 중문>

SANYO DIGITAL CAMERA<대불사 앞 상업지구>

대불사는 흙벽돌로 쌓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져 있어 외형은 중동지방 사원과 비슷하지만 금당, 요사채로 구성된 사찰의 가람배치와 거의 비슷하다. 중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불상을 모신 큰 규모의 금당이 배치되어 있으며 금당 앞 마당에는 2개의 탑이 있었던 자리와 우물터가 남아 있다. 담장 안쪽에는 크고 작은 방들이 회랑을 형성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대불사 중문과 높은 담장>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대불사 내부>

금당 앞 마당에는 불국사 같은 통일신라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쌍탑식 불탑이 세워졌던 자리가 남아 있으며 금당 앞에 몸과 마음 씻는 물을 제공했던 우물터가 있다.

SANYO DIGITAL CAMERA<2개의탑이 있었던 자리>

SANYO DIGITAL CAMERA<탑이 있었던 자리>

SANYO DIGITAL CAMERA<우물터>

2개의 탑이 세워져 있던 금당 앞 마당에는 회랑처름 크고 작은 방들이 자리잡고 있다. 궁궐 정전이나 중동지방 신전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실리스크 공간배치를 하고 있으며 방들을 실크로드를 여행하는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로 많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금당 앞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벽으로 공간이 분리되어 있는 크고 작은 방들>

SANYO DIGITAL CAMERA<중문 옆 큰 규모의 방들>

SANYO DIGITAL CAMERA<방들을 구분하고 있는 내부 담장>

SANYO DIGITAL CAMERA<금당 앞 회랑을 구성하고 있는 방들>

SANYO DIGITAL CAMERA<방 내부>

SANYO DIGITAL CAMERA<금당 옆 공간에 있는 방들>

SANYO DIGITAL CAMERA<작은 규모의 방>

대불사는 중앙에 불상을 모신 금당을 배치해 놓고 있다. 투루판 지역 건축 특성을 살린 흙벽돌로 쌓아 만든 건물이지만 그 형태나 규모는 동아시아 사찰의 불전과 비슷하다. 금당은 2층으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흙벽돌로 건물을 올렸다.

SANYO DIGITAL CAMERA<대불사 금당>

SANYO DIGITAL CAMERA<금당을 오르는 계단>

내부에는 많은 불상들이 모셔진 불단이 있는데 닫집형태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단은 2층이 남아 있는데 2층에 여러 불상들을 모신 감실들이 있는데 내부에는 불상도 일부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금당 내 불상을 모신 불단>

SANYO DIGITAL CAMERA<불상을 모신 감실>

SANYO DIGITAL CAMERA<아직 남아 있는 감실내 불상>

SANYO DIGITAL CAMERA<다른 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금당 벽면>

대불사 뒷편 자오허고성 안쪽편에는 탑림(塔林)이라 불리는 공간이 배치되어 있다. 이곳에는 모두 101 개의 스투파가 있는데 그 중 가운데 있는 사리탑은 중국내 남아 있는 불탑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한다.  불탑에는 25 개의 정사각형 모양의 작은 사리탑이 각 모서리에 질서있게 배치되어 있다. 연대 측정에 따르면 1640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탑림(塔林)>

자오허고성 서쪽 암벽에 있는 야르호 석굴에서 출토된 천불도의 일부이다.

OLYMPUS DIGITAL CAMERA
<천불도 단편, 千佛圖斷片, 투루판 아르호 석굴 제4굴, 10~12세기>

<출처>

  1. 안내문, 자오허고성, 2010년
  2. 위키백과, 2020년
  3. 百度百科, 2020년
  4. 실크로드문명기행, 정수일, 한겨레출판사, 200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