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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영흥사지, 경주 칠처가람 삼천기

경북 경주시 사정동 경주공업고등학교 주변은 삼국시대 경주 칠처가람 중 삼천기(三川岐) 영흥사(永興寺)가 있던 곳이다. 영흥사는 신라 23대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년 ~ 540년)의 부인 보도부인이 건립한 사찰로 최초의 비구니 사찰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 법흥왕비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영흥사에 살다가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영흥사는 경주 남천(문천), 서천(인천), 충효천(모량천) 이 만나는 지점 부근에 있어 삼천기(三川岐)에 해당하는 곳으로 추정되는데 흥륜사가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현재는 경주공업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어 옛 절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출토된 석조유물들이 학교내 정원과 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영흥사지 절터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공업고등학교>

진흥왕이 죽다 ( 576년 08월(음) )
〔37년(576)〕 가을 8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諡號)를 진흥(眞興)이라 하고,註 001 애공사(哀公寺)註 002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 왕이 어려서 즉위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교를 신봉하였다. 말년에 이르러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스스로 〔법명을〕 법운(法雲)이라고 지어 생애를 마쳤다. 왕비 역시 이에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머물렀다. 〔왕비가〕 돌아가시자, 나라 사람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영흥사지 절터는 경주공업고등학교 건물을 세우면서 많은 석조유물들이 출토되었으며 대부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건물기둥을 세웠던 주춧돌이 많이 보이며 석탑을 구성하는 몸돌, 지붕돌 등 다양한 형태의 석조유물들을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영흥사지 출토 석조유물 중 주춧돌>

OLYMPUS DIGITAL CAMERA<석탑 몸돌과 지붕돌로 보이는 석조유물>

OLYMPUS DIGITAL CAMERA<다양한 석조유물>

OLYMPUS DIGITAL CAMERA<석조유물>

신라의 불교는 법흥왕 14년(527)에 이차돈의 순교로 귀족들의 반발을 잠재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이차돈은 신라인들이 신성시여기는 숲에 절을 지어서 귀족들이 반발했는데, 이후에 이들 천경림에 지은 숲을 칠처가람이라고 한다. 그 중 서쪽을 중요시해서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를 비롯하여 영흥사, 담엄사, 영묘사 등이 경주도심의 서쪽 형산강변에 자리잡고 있으며 황룡사와 분황사는 도심 중앙에, 사천왕사는 남쪽인 낭산자락에 자리잡고 있었다. 경주공업고등학교 주변 마을과 신라초등학교 일대는 형산강 범람을 막기 위한 삼천기 천경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공업고등학교와 신라초등학교 사이에 있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절터 앞 마을, 신라인들이 신성시 여겼던 천령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마을 골목길>

OLYMPUS DIGITAL CAMERA<초등학교 옆 공터>

<출처>

  1.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
  2. 문화원형백과 삼국유사사전/박물지시범개발, 한국콘텐츠진흥원, 2007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4.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굴불사지, 백률사 아래 있는 절터

경북 경주시 동천동 소금강산 기슭 아래에 있는 절터인 굴불사지(掘佛寺址)이다.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이차돈의 순교와 관련된 백률사(栢栗寺)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8세기에 경덕왕이 백률사를 행차했을 때 염불소리가 들려 땅을 파보니 큰 돌이 나와 4면에 불상을 새기고 불굴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발굴.조사 결과 ‘동사(東寺)’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으며, 고려시대 쇠북에는 굴석사 (掘石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현재 절터에는 통일신라 사방불(四方佛) 신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인 석조사면불상(보물)과 절터였음을 보여주는 건물초석들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굴불사지 절터>

또한 경덕왕(景德王)이 백율사(栢栗寺)에 행차하여 산 아래에 다다랐을 때 땅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리므로 사람을 시켜서 파보라고 하니 큰 바위가 있는데, 사면에는 사방불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절을 창건하고 그 이름을 굴불(掘佛)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그릇되이 굴석(掘石)이라고 한다. (삼국유사 권 제3 제4 탑상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굴불사는 통일신라 경덕왕이 백률사 아래 바위에 사방불을 새기면서 창건된 사찰로 백률사를 오르는 언덕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백률사 오르는 길 입구>

OLYMPUS DIGITAL CAMERA<백률사 오르는 길 중간에 위치한 굴불사지>

절터에는 통일신라 때 조성된 석조사면불상(보물)이 남아 있다. 큰 바위 에 불상을 새겼는데 서쪽에는 아미타여래, 동쪽에는 약사여래, 북쪽에는 미륵보살, 남쪽에는 석가모니를 새긴 사방불(四方佛)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보물)>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1980년대 이후 절터에 대한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기와, 주춧돌 등의 건축부재와 ‘굴석사’라는 글자가 새겨진 쇠북 등이 출토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절터에 남아 있는 주춧돌>

OLYMPUS DIGITAL CAMERA<옛 건물터에 놓여진 주춧돌들>

OLYMPUS DIGITAL CAMERA<절터에서 출토된 건축부재들>

절터에서는 굴석사 (掘石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쇠북이 출토되었다. 고려시대 초인 1183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대정(大定) 23년(1183) 4월. 동경(경주)의 북산(소슴강산) 굴석사(굴불사)에 둔다. 무게는 일곱 근이 들어갔다. 담당하여 만든 사람은 전 호장 이백유이고, 동량은 도인 __이며, 대장은 의성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쇠북(金鼓), 경주 굴불사 터 출토, 고려 1183년>

백률사는 이차돈의 순교와 관련된 사찰이다. 이차돈의 목을 베었을 때 잘린 목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가 떨어진 곳에 백률사를 세웠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백률사(栢栗寺)>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5. 삼국유사,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보문동 사지(사적)

경북 경주시 보문동에 있는 통일신라 절터인 보문동사지(사적)이다. 일제강점기에 ‘보문사(普門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절 이름이 확인되었다. 절터에는 물을 담는 그릇인 석조(보물), 당간지주(보물), 연화문 당간지주(보물) 등이 남아 있으며, 금당터와 목탑터가 확인되었다. . 보문사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볼 때 경주에 있던 많은 사찰 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보문동사지(사적)는 명활산성과 경주 낭산 사이의 들판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신라 6촌 중 명활산 아래에 위치했던 명활산고야촌이 있던 마을로 신라가 6촌을 6부로 개편할 때 습지부가 되면서 설(薛)씨 성을 받은 지역이다. 이 사찰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낭산 북쪽의 황복사, 낭산 남쪽의 사천왕사와 삼각형을 이루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보문동 사지(사적)>

절터 규모는 크지 않은 편으로 서쪽에 당간지주(보물),  북쪽을 200 m 정도 떨어진 곳에 연화문 당간지주(보물)가 있다. 북쪽 연화문 당간지주와 금당 사이에 손을 씻고 물을 마시는 석조(보물)이 놓여 있어 북쪽으로 출입 통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 보문사지<경주 보문사지 가람배치>

문화재청 설명에 따르면 금당터을 중심으로 동.서 목탑터가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서쪽 낭산을 향해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세운 사천왕사 가람배치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금당을 중심으로 2개의 목탑이 있는 쌍탑식 가램배치를 보여주는 절터>

금당터는 흙으로 축대를 쌓고 있으며, 그 위에 기단석과 초석 등 건축부재들이 배치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금당터>

OLYMPUS DIGITAL CAMERA<금당터에 놓여 있는 석재>

OLYMPUS DIGITAL CAMERA<석재들>

OLYMPUS DIGITAL CAMERA<금당터 서쪽으로 보이는 경주 낭산(사적)>

OLYMPUS DIGITAL CAMERA<서탑터>

OLYMPUS DIGITAL CAMERA<동탑터>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금당터>

출입 통로에 주로 위치하고 있는 석조(보물)는 금당터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보문사지 석조(보물)>

보문사지 당간지주(보물)는 금당터 서쪽 100 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낭산 주변과 연결되는 출입문이 서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 보문동 사지(사적) 21-20060220
<보문사지 당간지주(보물)>

금당터 북쪽 200 m 정도 떨어진 곳에 연화문 당간지주(보물)가 위치하고 있다. 금당터와 연화문 당간지주 사이에 석조가 놓여 있어 북쪽에도 출입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연화문 당간지주(보물)>

OLYMPUS DIGITAL CAMERA<북쪽에서 본 절터>

경주 보문리 사지(慶州 普門里 寺址,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848-6
이 절의 처음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보문(普門)이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절 이름이 보문사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석제 유물이나 건물의 배치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절로 추측하고 있다. 현재 금당지 · 동서 목탑지 등의 건물터와 석조 · 당간지주 · 초석·석등부재 등이 남아 있지만, 절터의 대부분은 넓은 논으로 경작되고 있다. 금당지의 높이는 경작지의 표토에서 1m 정도이며, 흙으로 쌓은 축대 위에 건물의 기단석과 초석이 배치되어 있다. 목탑지는 금당지 앞의 높은 단 위에 남아 있는데, 서탑지의 중앙에 남아 있는 대형 초석에는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보문리 사지 서쪽에는 보물 제123호 보문리 당간지주가 있고, 북쪽으로 62m 지점에는 보문리 연화문 당간지주, 보물 제910호로 지정된 석조를 비롯하여 석등의 지붕돌 및 장대석 등 석조물이 남아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위키백과, 2021년

경주 천군동 사지(사적), 통일신라 절터

경북 경주시 천군동에 있는 통일신라 절터인 천군동 사지(사적)이다. 전형적인 통일신라 삼층석탑 2기가 남아 있으며 절터 대부분은 농경지로 사용되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금당, 강당, 중문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절의 규모는 남북 79 m, 동서 61 m이다. 발굴당시 출토된 유물들은 대부분 기와이며 절터에서는 화강석 건축자재 일부를 볼 수 있다. 쌍탑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지만 다른 사찰과는 달리 금당 좌우에 회랑을 두고 있지 않다. 석탑의 양식 등으로 볼 때 8세기 후반 이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천군동 사지(사적)>

절터에는 2기의 삼층석탑(보물)이 남아 있는데 통일신라 가람배치의 특징인 ‘두개의 탑’이 세워진 형태를 하고 있다. 마을 들판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39년에 복원하였다. 동탑은 기단과 탑신만 남아 있고, 서탑에는 머리돌 장식이 일부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천군동 동.서 삼층석탑(보물) 서탑>

현재 절터 대부분은 농경지로 사용되고 있으며 절터 동쪽편으로는 경주 세계문화엑스포가 열리는 세계문화엑스포공원이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농경지로 사용되고 있는 절터>

삼층석탑 주변에는 절터에서 출토된 석재들을 볼 수 있다. 발굴,조사 당시 출토된 기와조각같은 유물들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특별한 유물들은 출토되지 않았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재들을 볼 수 있는 삼층석탑 옆 절터>

OLYMPUS DIGITAL CAMERA<주춧돌>

OLYMPUS DIGITAL CAMERA<화강석 석재>

OLYMPUS DIGITAL CAMERA<화강석 석재>

천군동사지가 있는 마을은 경주와 동해안 감포 등을 연결해 주는 4번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또한 보문관광단지에서 불국사를 거쳐 울산지역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이 마을 부근에서 4번국도가 만나는 교통의 요지였다. 인근에는 원효대사와 관련된 사찰인 고선사가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쪽에서 본 천군동 사지(사적)>

경주 천군리 사지(千軍里 寺址,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 548-1
이 절터는 여기에 있던 절의 이름을 알 수 없어 동리이름을 따서 천군리 절터라고 부른다. 무너진 탑재와 주춧돌만 흩어져 있었는데, 1938년 일본인들의 발굴조사에 의해 중문·금당 · 강당자리가 확인되었다. 가람배치는 통일신라시대의 쌍탑 1금당식 (雙塔一金堂式)이다. 앞에는 중문이 있고 그 안쪽 동서에 두 탑이 있으며, 그 뒤로 금당터와 강당터가 자리하고 둘레에는 회랑터가 있다. 중문터는 앞면 3칸에 옆면 2칸이고, 금당은 앞면과 옆면이 각각 5칸, 강당은 앞면 8칸에 옆면 3칸 규모였음이 밝혀졌다. 중문에서 강당까지의 남북 길이는 79m, 동서 길이는 61m정도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은 대부분 기와와 벽돌 종류로 지붕 맨 윗부분(용마루)의 양쪽 끝을 장식하였던 치미(尾)는 국립경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 양식인 쌍탑식 절 배치를 따랐지만 금당 좌우에 회랑이 없는 것이 특이하다. 이 절터는 현재 논밭으로 변하여 원래 모습을 확인 할 수 없다. 다만 동·서탑을 1939년에 다시 세워 보존하고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주 천관사지(사적), 귀족 가문의 후원을 받아 세워졌던 도심 사찰

경북 경주시 교동에 있는 천관사지(天官寺址, 사적)이다. 천관사는 통일신라 때 김유신이 인연이 있었던 기생 천관을 위해 세웠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건립 이후 그 역사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려 중기 이곳을 지나던 이공승이라는 사람이 천관사 내력과 관련된 시를 남긴 것으로 볼 때 당시까지 사찰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절터가 있는 곳은 통일신라 때 귀족층들이 살았던 주거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귀족가문의 후원을 받아 도심 주택가에 세워진 사찰의 입지조건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천관사지(사적)>

이찬 김주원(伊飡 金周元)은 처음 상재(上宰)가 되고 왕은 각간으로 두 번째 재상이 되었는데 꿈 중에 복두(幞頭)를 벗고 소립(素笠)을 쓰고 12현금(絃琴)을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 생략 ~ 천관사 우물로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상서로운 조짐입니다.”라고 하였다. “위에 주원이 있는데 어찌 왕위에 오를 수 있겠소?” 왕이 말하자 아찬이 대답하기를 “청컨대 은밀히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지내면 될 것입니다.” 하자 [왕은] 이에 따랐다. (삼국유사 권 제2 제2 기이 원성대왕,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OLYMPUS DIGITAL CAMERA<절터>

절터는 오랜 세월 농경지로 사용되어 왔으며 2000년 이후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출토유물은 많지 않은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절터에 남아 있는 석재>

천관사 석탑을 장식했던 팔부중상 중 가루라상이 표현한 탑신 몸돌이 출토되었다. 가루라는 ‘상상의 새’를 말하는데 이를 이인화하여 입을 새부리 모양으로 표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팔부중, 8세기, 경주 천관사지 출토>

OLYMPUS DIGITAL CAMERA<2012년 발굴.조사 현장>

천관사는 경주 오릉 동쪽편 들판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 궁성이었던 월성 동남쪽 500 m, 김유신 집터인 재매정(사적)과는 400 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천관사지 북동쪽 경주 월성 일대>

OLYMPUS DIGITAL CAMERA<재매정에서 천관사 절터로 들어오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재매정(사적), 김유신 장군이 살았던 집터>

OLYMPUS DIGITAL CAMERA<천관사지 서쪽 경주 오릉 부근 마을>

경주 천관사지(天官寺址,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244
이 절터는 도당산 서꼭 기슭에 있으며 신라시대 김유신이 사랑하던 기생 전관 (天官)의 집을 절로 바꾼 곳이라 전한다. 김유신은 어머니 만명부인(南明大人)의 엄한 훈계를 명심하여 함부로 남과 사귀지 않았지만, 하루는 우연히 기생 천관의 집에 유숙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훈계를 들은 뒤 천관의 집에 들르지 않았다. 그 후 어느 날 술에 취하여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말이 이전에 다니던 길을 따라 천관의 집에 이르렀다. 김유신이 갈못을 깨닫고 타고 갔던 말의 목을 베고 안장을 버린 채 돌아 왔다. 훗날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한 뒤 사랑하였던 옛 여인을 위하여 천관의 집터에 절을 세우고 그녀의 이름을 따서 천관사(天官寺)라 하였다. 처음 건립 이후 이 절의 역사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중기 이공승(李公升)이 이 절을 지나면서 시를 지은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는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00년 국립 경주문화개연구소에 의하여 발굴조사 되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