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조선백자

백자 철화운용문 항아리(보물), 용과 구름을 생동감있게 표현한 작품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백자 철화운용문 항아리(보물)이다.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큰 백자 항아리로 철화기법으로 만든 백자 중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다. 겉면에 구름과 용이 그려져 있으며, 그 형태로 볼 때 국왕의 어주(御酒)를 담아두던 용준(龍樽)인 것으로 보인다. 철화안료로 구름속을 날고 있는 용의 모습을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비슷한 형태의 항아리 조각이 경기도 광주시 일대 분원 가마터에서 발견되고 있어 이 항아리도 그곳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철화(鐵畵)란 산화철 등을 주 안료로 하여 점토와 유약 등을 혼합하여 붓으로 도자기표면에 문양을 그리는 기법을 말한다. 고려청자부터 분청사기, 조선백자까지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철화백자는 붓을 사용하여 문양을 그리기때문에 회화적인 특징이 잘 나타난다.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철화운용문 항아리(보물).>

용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볼 때 궁궐에서 국왕의 술을 담아두는 용준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철화안료를 사용하여 용을 단순하면서도 생동감있게 그려 놓고 있다.

백자 철화운용문 항아리, 보물, 조선 17세기
백자 철화운룡문 항아리(白磁 鐵畵雲龍文 立壺)는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백자 항아리로 높이 45.8㎝, 아가리 지름 15.8㎝, 밑지름 15.7㎝이다. 아가리 부분은 짧고 약간 안쪽으로 기울어져 세웠으며, 몸체는 어깨 부분에서부터 팽배해졌다가 서서히 좁아지며, 아랫부분에서 다시 벌어지는 형태를 하고 있다. 유약의 색깔은 회백색을 띠고 있으며 광택이 은은하다. 아가리 부분과 어깨 부분에는 덩굴무늬와 연꽃무늬가 있고, 굽 위에는 이중으로 삼각형무늬가 있는데, 이것은 번개무늬의 변형으로 보인다. 몸체의 전면에는 구름과 여의주를 집어삼키려는 듯한 용의 모습을 표현하였는데, 용의 부릅뜬 눈과 입, 뿔과 수염, 갈퀴와 비늘이 휘날리는 구름과 함께 생동감 있게 묘사되었다. 굽은 안바닥을 오목하게 파내었으며, 굽 다리에는 가는 모래 받침을 받쳐 구운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러한 회백색의 유약과 특이한 그릇모양, 산화철 안료를 이용해서 그린 철회 기법의 무늬, 오목한 굽의 표현은 경기도 광주군 일대의 17세기 가마터인 상림리·선동리·정지리에서 발견되고 있어, 이 항아리도 이 곳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항아리 표면에 그려진 구름과 용의 모습을 보아, 당시 궁중에서 사용하던 그릇 중 하나인 듯하다. 철회 기법을 사용한 초기 작품으로 중요한 예이며, 17세기 전반 경의 대표적인 철회 백자 항아리이다. <출처: 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구름 사이로 용이 날고 있는 모습이 표현된 부분. 단순하면서도 간결한 필치로 구름과 용을 표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반대쪽 면.

20160120_163920-20160120분원이 있었던 경기도 광주 선동리 가마터에서 비슷한 형태의 백자 조각이 출토되어 이곳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처>
1. 이화여대박물관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백자 청화송죽인물문 항아리(보물), 사대부 취향이 잘 반영된 백자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백자 청화송죽인물문 항아리(보물)이다. 높이 47cm의 큰 항아리로 목이 짤고 어깨가 올라간 모습을 하고 있다. 겉면에는 청화로 소나무와 대나무, 그리고 동자를 거느린 선비의 모습을 그려넣고 있다. 그림의 화풍으로 볼 때 1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시대 지배계층인 사대부들이 선호했던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청화(靑華)는 코발트(Co)를 비롯하여 철, 망간, 동, 니켈 등 여러 금속화합물로 된 안료이다. 조선시대 청화안료는 주로 중국에서 수입하여 사용했으며, 고가의 안료였기때문에 관요에서 주로 사용했으며, 도화서 화원이 주로 그렸기때문에 청화백자에 그린 그림의 솜씨는 대체로 뛰어난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청화송죽인물문 항아리(보물)>

조선중기인 16세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선비가 소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려놓고 있다. 중국풍의 그림으로 지배층인 사대부들의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백자 청화송죽인물문 항아리, 보물, 조선 16세기
백자 청화송죽인물문 항아리(白磁 靑畵松竹人物文 立壺)는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높이 47㎝, 아가리 지름 15.4㎝, 밑지름 16.7㎝의 청화백자 항아리로, 목은 짧고 어깨가 올라가서 긴장감이 느껴지는 그릇 모양을 하고 있다. 밑 부분은 좁게 내려가다가 굽에서 나팔모양으로 퍼졌는데, 이러한 모양은 짧게 수직으로 내려가는 굽을 가진 초기 청화백자에서 흔히 보이는 형태이다. 목 윗부분에는 가로줄 하나를 그린 다음 그 밑에 구름을 그려 넣었고, 굽 부분에도 가로로 한 줄을 그렸다. 그릇의 몸통 전면에는 소나무 한 그루와 대나무 몇 그루를 그렸다. 소나무 밑에는 책상에 팔을 괴고 있는 인물을, 대나무 밑에는 거문고를 든 동자를 거느린 한 선비가 거닐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구도나, 인물의 배치 및 묘사가 16세기 후반의 화풍과 매우 유사하여, 이 항아리의 제작시기는 대체로 16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릇을 구우면서 굽이 두꺼워 터진 곳이 있고, 아가리 부분과 굽 부분에 약간 수리를 한 흔적이 있으나, 보기 드문 조선 전기의 걸작이다. <출처: 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으로 대나무 아래 선비가 동자를 거느리고 걷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나무와 소나가 숲을 이루고 있는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그림은 값비싼 청화안료를 사용하여 그렸기때문에 여백이 많은 편이며, 16세기 화풍이 잘드러나 있다. 도화서 화원이 그림을 그리고 관요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1. 이화여대박물관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국보), 18세기 회화 화풍을 보여주는 걸작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는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국보)이다. 조선후기인 18세기에 만들어진 걸작으로 큰 백자항아리 겉면에 넓은 이파리들고 포도넝쿨을 사실적으로 그려놓았다. 철사안료를 사용해서 그림을 그렸는데 농담과 강약이 뛰어나며 표현이 사실적인 18세기 회화에서 볼 수 있는 화풍이다. 도자기의 형태는 궁궐에서 사용하는 용무늬기 그려진 용준(龍樽)으로 보이며 포도넝쿨이 그려진 것이 특이하다. 조선후기에는 도화서 화원을 관요에 파견하여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게 했는데, 이 작품에 표현에 그림의 수준이 아주 뛰어난 것으로 볼 때 도화서 화원이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철화(鐵畵)란 산화철 등을 주 안료로 하여 점토와 유약 등을 혼합하여 붓으로 도자기표면에 문양을 그리는 기법을 말한다. 고려청자부터 분청사기, 조선백자까지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철화백자는 붓을 사용하여 문양을 그리기때문에 회화적인 특징이 잘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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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국보)>

철화안료를 이용하여 붓으로 도자기 겉면에 포도넝쿨을 그려놓고 있다. 18세기 회화의 화풍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 국보 107호, 조선 18세기
백자항아리 면 전체를 화폭 삼아 넓은 이파리들과 그 사이로 뻗어 내린 포도넝쿨이 그려진 대형의 항아리이다. 붓놀림이 자유자재하고 철사(鐵砂) 안료에 농담을 주면서 문양을 그려 마치 한 폭의 묵포도도(墨葡萄圖)를 연상케 한다. 포도그림의 구도와 세부표현 등에서는 심정주(1678~1750)나 권경, 혹은 이인문 같은 18세기 화가들의 화풍에 비견되기도 한다. 발색의 조절이 어려운 철사 안료로 자연스럽게 농담을 표현한 점에서도 뛰어난 솜씨가 보인다. 대형의 항아리에 용무늬 그려진 용준(龍樽)은 왕실 의례용으로 사용되었는데, 유사한 크기와 형태로 포도무늬를 그린 예는 이 항아리가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다. 회화적이고 문기 넘치는 문양 표현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아온 수작이다. <출처: 이화여대박물관>

20160129_112135-20160129넝쿨과 포도송이를 섬세하면서도 힘있게 사실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20160129_112152-20160129포도 넝쿨.

20160129_112143-20160129아가리 부분에 표현된 포도송이와 포도이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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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넝쿨이 표현되 부분에서 본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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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여백 사이로 보이는 포도넝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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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방향에서 본 모습

20160129_112300-20160129이화여대박물관에서 전시중인 모습.

<출처>
1. 이화여대박물관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화여대박물관 특별전, 조선백자] 문양에 보이는 교류와 유행

1. 조선왕실과 백자2. 백자에 담긴 출생과 죽음3. 지방의 백자4. 문인문화의 유행5. 백자의 제작6. 무늬로 보는 상징과 의미7. 문양이 된 문자8. 문양에 보이는 교류와 유행

조선후기에는 중국에서 생산된 도자기가 유럽까지 수출되었으며, 일본에서도 자체적으로 도자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경향이 반영되어 조선후기 백자에는 중국과 일본에서 유행한 장식기법이나 문양들이 반영된다. 도자기 표면을 도드라지게 장식하는 기법은 중국에서 만든 도자기에서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물론 유럽까지도 널리 인기를 끌었다. 또한 일본 에도시대에 유행한 도안들이 길상문으로 조선백자에 받아 들여진다. 도자기 문양을 통해서도 당시 동아시의 문화교류와 흐름을 단편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20160120_165307_HDR-20160120백자양각 무국문 병, 조선 19세기

조선후기 백자 문양에 보이는 교류와 유행
조선후기 백자에는 중국과 일본 등에서 동시대적으로 발달한 문양들이 새로운 장식 소재로 활용되었다. 기면이 도드라지게 장식하는 양각기법으로 나뭇가에 여러 송이의 만개한 꽃을 표현한 매화문은 중국 명.청대 제작품에도 나타나며, 중국과 조선을 넘어 유럽에서도 애호되었다. 영지초화문이나 보상화당초문, 율문 등 중국 청대와 일본 에도시대에 유행한 도안들은 조선에서도 길상문의 일종으로 선호되며 여러 기종에 장식되었고, 다른 길상 문양들과도 섞이며 다채로운 구성을 보인다. 국내 유적에서는 분원 제작품과 함께 중국산과 일본산이 모두 출토되어, 당시의 선호도를 확인할 수 있다. 여러 지역에서 보이는 문양의 유사성은 기법적 특징을 부각하거나 길상적 의미를 담아내는 가운데 도자기 문양의 광범위한 교류와 유행의 흐름을 드러내며, 조형적으로 한층 풍성해진 조선후기 백자의 발달상 역시 잘 보여주고 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20160120_165326-20160120백자청화 칠보화훼문 사각 병, 조선 19세기

조선후기에 주로 제작된 정사각형 병으로, 바각면에는 ‘무신 경슈궁三’의 점각 명문이 있다. 경수궁은 정조의 두번째 후궁인 화빈 윤씨의 궁으로, 1780년 화빈 책봉과 함께 궁호가 내려졌다. ‘戊申’의 간지 및 병의 양식적 특징으로부터 제작 시기는 1848년으로 추정된다. 옆면에는 소나무 껍질과 비슷하다고 하여 ‘송피릉(松皮菱)’이라고 불리는 창을 넣었다. 2면씩 각기 다른 문양을 구성하여, 한 면에는 송피릉 내부에 칠보문, 외부에 매죽문을 넣었고, 다른 면에는 내부에 화훼문, 외부에는 물 위에 꽃이 떠가는 모양의 ‘화류수문(花流水紋)’을 시문했다. 송피릉과 화류수문은 일본의 에도시대에 걸쳐 유행한 문양들로, 조선후기 백자에 활용된 예는 드물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20160120_165350-20160120백자청화 화문 화형 잔대, 조선 19세기

윗면의 모양이 옆으로 긴 능화형(菱花形)을 이루는 잔받침이다. 안쪽 면에는 청화로 여러개의 작은 원을 그리고, 원 안에는 꽃을 중심으로 다양한 도안을 구성했다. 일명 ‘환문(丸紋)’으로도 불리는 여러 종류의 원형 도안은 일본에서 에도시대에 걸쳐 의복과 직물 문양으로 유행했다. 각종 공예품에도 장식되었고, 일본 뿐 아니라 명말 청초 중국 경덕진에서 일본의 기호에 맞춰 수출한 숀즈이(祥瑞)자기 등 중국산 백자에도 시문되었다. 이 잔대는 조선후기 백자에 이러한 문양이 차용된 예로 주목된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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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청화 연화빙렬문 접시, 백자청화 망목문 접시.잔대, 조선 19세기

빙렬무늬, 그물무늬
구획면 안쪽으로 ‘ㄱ’자 테두리를 두르고 간략한 화문을 넣은 문양 구성은 중국 명대 후기 경덕진과 남방의 민요에서 대량 생산, 수출되던 ‘크락자기’에 연원이 있다. 크락자기는 일본, 동남아, 유럽 등지로 수출된 이래 각지에서 모방, 변형되었고, 조선에서는 주로 19세기경의 제작품에서 동시대 변형 양식의 영향이 보인다. 하나의 밤송이에 3개의 밤알이 놓여 자손번창의 의미를 내포하는 율문은 17세기 중반경 일본의 이마리(離万里) 자기에서 보이며, 국내에도 18세기 후반에 유입되었다. 19세기 분원에서 제작된 발, 접시, 합 등 여러 기종에 시문되었으며, 일본산 백자 역시 국내 유적에서 지속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그물망이 펼쳐져 있는 듯한 문양은 ‘망목문(網目文)’으로도 불린다. 일본의 에도시대에 걸쳐 의복과 염직의 도안으로 애호되며 도자기를 비롯한 공예품의 배경 문양으로도 즐겨 활용되었다. 빙렬문(氷裂文) 또는 빙죽문(氷竹文)으로 불리는 문양은 얼음과도 같이 날카로운 대나무 폭죽이 터지는 모습으로, 귀신을 쫓고 평안을 기원한다는 의미가 있다. 중국에서 각종 공예품의 장식에 널리 사용되었으며, 일본에서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중반에 걸쳐 많이 나타난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20160120_165426-20160120백자청화 율문 합, 조선 19세기

20160120_165436-20160120백자청화 율문 접시.발.잔, 조선 19세기

20160120_165447-20160120백자청화 화문 접시, 조선 19세기 서울 종로구 송현동 유적 출토, 백자청화 율문 접시, 일본 19세기~20세기 초, 서울 종로구 송현동 유적 출토, 백자청화 율문 접시, 일본 19세기~20세기초, 서울 종로구 청진동 유적 출토

20160120_165515-20160120조선후기 중국과 일본에서 유행한 문양.

20160120_165524-20160120
백자청화 화문 발.잔, 백자청화 화문 접시, 백자청화 만자문 매화문 사각 연적, 백자청화 화문 발, 조선 19세기

20160120_165536-20160120백자청화 화문 발, 조선 19세기

20160120_165554-20160120청화백자 영지.초화무늬 접시, 발, 조선 19세기

영지.초화무늬
중국 청대 경덕진 민요에서 유행한 보상당초문과 영지초화문은 조선에서도 청화백자의 문양으로 시문되었다. 보상당초문은 오랜 기간 공예품과 건축물에 장식되었는데, 외곽선을 살려 도안화한 문양의 청화백자가 중국 청대 경덕진 민요에서 대량생산되며 조선에서도 분원의 19세기경 제작품에 나타났다. 염지초화문 역시 중국 청대 경덕진 및 남방의 민요에서 유행한 이래 조선과 일본에서도 모방되었고, 근대기 일본에서는 스텐실 기법으로 대량 시문되며 지속적으로 유행했다. 이들 문양이 시문된 분원 제작품에는 굽 안에 왕실내 사용처를 청화 명문으로 표시한 예도 있어 고급품으로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국내 여러 유적에서는 분원산 및 중국산과 일본산이 모두 출토되어 광범위한 유행의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출처>

  1.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2016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6년

 

[이화여대박물관 특별전, 조선백자] 문양이 된 문자

1. 조선왕실과 백자2. 백자에 담긴 출생과 죽음3. 지방의 백자4. 문인문화의 유행5. 백자의 제작6. 무늬로 보는 상징과 의미7. 문양이 된 문자8. 문양에 보이는 교류와 유행

조선후기 백자에는 일반인들이 선호했던 십장생같은 길상의 의미를 갖는 다양한 문양들과 함께 문자들도 장식에 사용되었다. 특히 ‘壽’와 ‘福’이 장식된 청화백자가 관요와 지방가마에서 만들어져서 궁궐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이런 경향은 명청대에 고증학풍의 영향으로 비석이나 제기 등에 새겨진 글자에 대한 연구와 골동품을 수집하는 상류계층의 취향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도 글자가 새겨진 그릇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20160120_165227-20160120백수백복도(百壽百福圖)

이 디자인패널은 본 전시실에 진열되어 있는 청화백자에 시문되 다양한 서체의 수복자를 조합하여 백수백복도 병풍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백수백복도 병풍은 장수와 다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아 ‘壽’, ‘福’ 두 글자를 완전한 수를 의미하는 백자만큼 그려 넣어 8폭 내지 10폭으로 만든 것으로 주로 조선후기 궁중이나 세도가의 잔치에 사용되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20160120_164806_HDR-20160120
백자청화 복자문 화형 접시,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수.복자문 접시
수복자문을 시문할 때는 내저면의 가운데 글자를 써 넣거나 단선 내지 이중의 원권을 두르고 시문하는 방식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 중에서도 원권 안에 글씨를 쓰는 유형은 조선전기에 중국 명대 민요로부터 유입된 것으로, 왕실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조선말기까지 높은 비중을 차지하며 제작되었다. 서체는 초서나 예서 등이 사용되다가 점차 도안화 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20160120_164815-20160120백자청화 수복자문 화형 발, 조선 19세기

20160120_164827_HDR-20160120백자청화 수.복자문 접시,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수복자문 유개발.완.접시.종자,
발이나 완, 접시 등 각종 기명의 외면에 수복자문을 일정한 간격으로 여러 단을 이루도록 배열 장식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명대에 범어를 이와 같이 시문했던 예가 있고, 청대에는 이러한 구성의 ‘喜’자문이 칠기 장식문양으로 유행되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다른 글자보다 특히 수복자를 애호한 점이 특징이며 조선후기에는 청화백자 뿐 아니라 양각백자로도 제작되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20160120_164833-20160120백자청화 수자문 발,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문수무강자문 발
수복자문 외에 ‘萬壽無疆’ 네 자도 길상문자로 시문되었다. 이 발의 외면에는 나뭇가지 형태로 문양화한 글자를 사방에 배치하였다. 각각의 글라로부터 불수감과 매화, 모란, 배꽃이 자라나 생동감을 준다. 이러한 꽃나무와 길상문자의 조합은 조선후기 문자도(文字圖)에서도 발견된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20160120_164843-20160120백자양각 수복자문 주자, 백자양각 수복자문 뚜껑, 조선 19세기

20160120_164852-20160120백자양각 매죽문 사각 병, 조선 19세기

20160120_164908_HDR-20160120백자청화 수.복자문 발, 조선 19세기

20160120_164930-20160120백자청화 수.복자문 유개발, 조선 19세기

20160120_165017-20160120백자청화 편복문 합, 조선 19세기말~20세기초

20160120_164944-20160120백자청화 수복자문 발, 조선 19세기

20160120_165026-20160120백차청화 수복자문 유개발, 백자청화 수자문 육각 병, 조선 19세기

20160120_165035_HDR-20160120백자청화 수자문 사각 연적.통형 병

문자문은 전서체를 변형시켜 원형 혹은 장방형으로 도안화되어 그려지기도 하였다. 그 중 원형도안 수자문은 중국 청대자기류와 금속기에도 많이 사용되었던 문양으로 조선말기에는 특히 단독으로도 자주 시문되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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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청화 수자문 화형 접시, 조선 19세기

백자청화 수자문 화형 접시,
틀을 이용해 형태를 만들고 원형도안수자문으로 장식한 국화형 접시는 기형상 칠기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명말에서 청대에 걸쳐 유행하였다. 일본과 조선에도 전해졌는데 조선의 것은 형태와 질의 면에서 일본의 것과 상당히 유사하여 영향관계를 가늠할 수 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다른 문양과 조화를 이룬 수복문자

20160120_165054_HDR-20160120백자청화 초화문 호, 조선 18세기

백자청화 초충.초화문 접시
문자와 초화문이 복합 시문된 접시이다. 그릇의 중심에 장방형으로 도안호된 수복자를 원권 안에 그리고 그 주위로 국화나 난초, 패랭이와 같은 초화를 괴석이나 풀벌레와 함께 그려 화려함을 더했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20160120_165102-20160120백자청화 초충.초화문 접시, 조선 19세기말 ~20세기초

20160120_165113_HDR-20160120백자청화 초화수복자문 사각 주자, 조선 19세기

20160120_165123_HDR-20160120백자청화 만자문 이층 찬합, 조선 20세기 전반, 백자청화양각 화문 양이 향로, 조선 19세기말~20세기초, 백자청화투각 만자문 잔대, 조선 19세기

20160120_165131-20160120백자청화 만수무강자문 발, 조선 19세기

20160120_165139_HDR-20160120백자청화 복국화문 합, 조선 19세기 말~20세기 초, 백자청화 문자문 합, 조선 19세기말 ~20세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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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청화 칠보수복강녕문 합, 조선 19세기

문양이 된 문자: 수복자문(壽福字文)의 유행
길상의 의미를 가진 글자들은 문양으로서 백자의 장식에 사용되었다. 특히 수복자가 시문된 청화백자는 관요와 지방요에서 모두 생산되어 궁궐과 관청 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널리 애용되었다. 이것은 각종 공예품에 길상문자를 장식하던 중국 명청대의 풍조가 유입되어 처음에는 왕실을 중심으로 소비되던 것이 분원의 민영화 등으로 민간에까지 확산되고 성행했기 때문이다. 수복자문이 시문된 기종은 반상기명(飯床器銘), 즉 식기류에 많이 나타나 복을 누리며 장수하기를 염원한 기복적 성격을 보여준다. 수복자를 써 넣을 때는 다양한 서체를 사용하였는데 초서와 해서로 쓰인 것이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이며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방식은 원권을 두르고 그 안에 글자를 쓴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명대 민요에서 전해져 조선전기부터 말기까지 꾸준히 제작되었다. 원권이 없는 글자는 여러 단을 이루며 청화로 반쪽 시문되거나 백니필화암각(白泥筆畵陽刻)기법으로 제작된 고급기종의 문양이 되었다. 조선말기에 이르면 전서체를 변형시켜 만든 원형 혹은 장방형의 도안 수복자문이 많이 나타나 박쥐문이나 초화문 등과 함께 화려하게 장식되기도 하였다.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 2016년)

<출처>

  1. 안내문, 이화여대박물관.2016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