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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순천왜성,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가 쌓은 왜성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있는 순천왜성이다. 광양만이 내려다 보이는 낮은 구릉에 쌓은 왜성으로  정유재란 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가 호남지방 공략을 위한 전진기지로 쌓았다. 성벽을 쌓은 석축의 형태, 돌의 크기나 모양 등이 우리나라 산성과 다르고 일본 각 지역에 남아 있는 다이묘들의 성과 비슷하다. 성벽은 내성,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효율적인 방어를 위해 여러단계의 성문과 성벽을 두고 있다.

이곳은 왜장 고니시가 이끈 왜병이 주둔하면서 조·명연합군과 마지막 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본성 정상부에서 동쪽 광양만을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협이 어렴풋이 보이며, 광양제철소의 웅장한 모습도 같이 볼 수 있다.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주둔했던 울산왜성과 함께 임진왜란을 대표하는 왜성이다.천

SANYO DIGITAL CAMERA순천왜성.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쌓은 성곽 중 그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는 곳으로 일본인들은 순천성이라 불렸으며 한때는 사적으로 지정되기도 했었다.

SANYO DIGITAL CAMERA순천왜성은 광양만이 내려다 보이는 낮은 구릉위에 자리잡고 있다. 선박이 정박할 수 있으며, 주위를 감시하기 좋은 곳으로 전형적인 일본성곽의 입지조건을 잘 갖추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내성 첫번째 출입문. 순천왜성 내성은 2중으로 성벽을 쌓았는데 그 중 첫번째 성벽으로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는데 최근 일부를 복원해 놓았다.

문지
이 문지는 본성과 외성을 연결하는 주출입문이다. 문지 옆으로는 해자를 만들고, 바다 물을 끌어들여 섬처럼 만들어 방어에 치중하였던 건물지로 여겨진다. 만조 때 멀리서 이곳 출입로가 다리처럼 보인다 하여 왜교 또는 예교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문지 공사는 2007년 이루어 졌으며, 기존에 남아 있는 형태를 기본으로 하여, 일본성 축조방식을 자문받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문지를 쌓는 방식은 비교적 큰 돌을 이용하여 불규칙하게 쌓았다. (안내문, 순천시청, 2018년)

SANYO DIGITAL CAMERA복원해 놓은 바깥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본환이라 불리는 정상부로 오르는 길.

SANYO DIGITAL CAMERA순천왜성 정상부 본환 성벽. 일본성은 정상부 본환에 지휘부가 머무는 천수각이라는 불리는 건물을 세워둔다.

SANYO DIGITAL CAMERA본환이라 불리는 정상부 성벽.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성벽. 큰 돌을 잘 다듬어 촘촘히 쌓았으며, 약간 경사를 두고 있는 전형적인 일본성 축성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성문은 양쪽에 높은 성벽을 쌓아 적을 제압하기 좋은 형태를 하고 있다. 중국이나 조선의 읍성 등에서 볼 수 있는 둥근 형태의 옹성과 같은 역할이나 그 형태가 다르다. 포루투갈의 영향을 받은 축성방법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정상부에 위치한 본환에 남아 있는 천수기단. 이곳에 천수각이라 불리는 5층으로 추정되는 목조건축물을 세워 놓았다.

천수기단
천수 건물이 세워졌던 단으로 천수기단 앞에는 부속된 낮은 단이 있다. 천수는 성을 대표하는 권위와 상징의 건물이. 『정왜기공도권』에는 3층 팔작지붕의 천수대가 그려져 있으나 천수각 1층 아래에 오층망해루라고 쓰여져 있어 오층 건물이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천수기단은 오랜 세월 동안에 석축이 흐트러지고 일부가 무너져 2007년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석축쌓기 방식은 자연석을 불규칙하게 쌓는 방식이다. 모서리 돌은 쐐기질하여 쪼갠 돌을 사용하였고, 쐐기질 흔적이 잘 남아 있으며 위아래를 교차되게 쌓았다. 천수기단의 상부는 남아 있던 초석은 그대로 보존하고 기존 초석위에 새로운 초석을 놓아 건물의 규모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8년)

SANYO DIGITAL CAMERA정성부에서 내려다 보이는 광양항. 그 너머로 고니시 군대와 조.명연합군이 마지막 결전을 벌렸던 노량해협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순천왜성 아래는 원래 바다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매립되어 공단으로 바뀌었다.

순천 순천왜성 16순천왜성은 노량해협을 마주보고 있는 여수반도 입구에 세워졌다. 연안 해로를 장악하기 위해 여수항에 자리잡았던 전라좌수영 본영과는 달리 호남 내륙을 장악하기 용이한 지점에 요새를 구축해 놓았다.

순천왜성, 
이성은 전라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왜성으로 1597년 9월 중순부터 11월말에 이르기까지 약 3개월에 걸쳐 쌓았다. 1597년(정유년) 9월에 왜군은 경기도 부군 전쟁에서 패한 뒤 전라도와 경상도 남해안 지역으로 남하하였는데 이때 각 지역의 요충지를 찾아 새로운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이곳에 성을 축조하였던 것은 호남지방을 공략하기 위한 전초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1598년 9월부터 11월까지 2개월간에ㅐ 걸쳐 이곳에서 펼쳐진 싸움이 왜교성전투이며, 이는 조.명 연합군과 왜의 장수인 고니시 유키나기 사이에 벌어진 최대의 격전지였으며,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이기도 하였다. 당시 전재의 모습은 『정왜기공도권』에 그려져 있다. 성곽의 구조는 본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성에는 별도의 내성이 있다. 내성과 본성의 성벽은 각각2겹으로 축조되어 있고, 외성은 1겹으로 축조되어 있다. 성곽내에는 천수기단, 문지, 해자 등의 주요 건물지가 남아 있어 성곽 축조 당시의 성들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성곽내 주요 건물지에 관한 내용은 전쟁의 모습이 그려진 모습은 『정왜기공도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순천시청, 2018년)

<출처>

  1.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전라좌수영 본영

전남 여수시 군자동 일대에 있었던 전라좌수영 본영이다. 조선시대 왜구의 침입이 심했던 남해안 전라도와 경상도에는 수군절도사가 상주하는 본영을 각각 2곳을 두었는데 전라좌수영은 전라도 서쪽을 담당하는 수영이었다. 전라좌수영은 조선초 성종 때(1479) 순천 오동포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1895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수영에는 둘레 1.13 km의 수영성이 설치되었는데 현재는 성벽 일부만이 남아 있다. 성내에는 80여동의 건물, 2024호의 민가 등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은 객사 건물이었던 진남관(국보 304호)만이 남아 있다.

전라좌수영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이 수군을 이끌면서 왜군을 상대로 해전에서 승리를 이끌면서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임하면서 삼도수군통제영 본영이 되기도 하였다. 전라좌수영이 있었던 여수에는 거북선을 최초로 만든 선소(사적392호), 충무공을 추모하며 세운 타루비(보물 1288호), 사당인 충민사(사적381호), 전라좌수영을 지원했던 승병들의 머물렀던 흥국사 등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여수 구도심에 남아 있는 옛 전라좌수영. 객사였던 진남관(국보 304호)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옛 전라좌수영성 모형(유물전시관 내 전시). 여수 구항 일대 둘레 1.3 km의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다. 정문 앞에는 함선들이 정박하는 선착장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내부에는 80여 동의 관아 건물과 2,000여 호의 민가가 들어서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여수 앞 바다에서 보이는 전라좌수영성 일대. 객사건물인 진남관이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수군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진남관에서 내려다 볼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다.

전라좌수영성의 규모
전라좌수영성의 설치 당시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성종실록』에 의하면 성종 21년 10월에 전라좌수영성을 수축하였는데, 당시의 규모를 둘레 3,634자라 했다. 또 1847년 기록인 『호좌수영지』에서는 성주위가 3,158포척이라 했다. 성종년간의 규모를 당시 영조척을 기준으로 산정하면 약 1.13 km가 되는데, 현재 성곽의 터로 실측된 1.74 km와 약간의 차이만 있다. 이는 이후 설치되는 치나 오성의 치수 산정 또는 측량방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전라좌수영 관아 문루인 망해루.

OLYMPUS DIGITAL CAMERA망해루에서 옛 선착장으로 이어지는 길. 망해루에서 바다까지는 250 여 m 정도의 짧은 거리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진남관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전라좌수영 객사건물이었던 진남관(국보 304호), 앞면 15칸, 옆면 5칸의 상당히 큰 건물이다. 궐패를 모시는 객사이지만 전라좌수영 소속 지휘관들이 모여 회의를 하거나 수군훈련을 지휘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진남관 가운데 정청부분. 다른 지방 관아 객사와는 달리 좌.우익랑을 두지 않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진남관 내부. 벽체를 두지 않고 내부는 넓은 마루로 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진남관에서 내려다 보이는 여수 앞바다. 지금은 건물로 막혀 있지만 선박들의 움직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전라좌수영 본영, 여수
여수가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579년(성종 10) 순천 내례포의 수군 만호영을 설치하면서 기존에 있던 해남의 수영을 ‘전라우도수영’, 순천의 신설 수영을 ‘전라좌도수영’이라고 하면서 부터다. 1593년부터 1601년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기도 했던 여수는 조선시대 400년간 조선수군의 본거지로서 구국의 성지로 전승의 사명을 다한 곳이며, 지금까지 이순신장군의 기백과 충정 정신이 도도히 살아 숨쉬는 역사의 고장이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진남관 아래 전라좌수영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유물전시관.

OLYMPUS DIGITAL CAMERA난중일기(국보 76호, 복제품), 난중일기는 이순신장군이 임진란(1592~1598) 7년 동안 싸움터에서 손수 쓴 진중일기로 정조 때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편의상 붙인 이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서간첩(국보 76호, 복제품), 이순신장군이 친척들에게 친필로 보낸 편지를 수집하여 만든 책이다. 크기는 세로 33 cm, 가로 44 cm로 글씨는 한문 초서로 쓰여 있다.

충무공 이순신과 여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이곳 여수에 부임하여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전라좌수영의 본영이었던 여수는 거북선을 처음으로 출정시킨 곳인데, 1593년(선조 26) 8월부터 1601년(선조 34년) 3월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기도 하였다. 이순신의 수군이 옥포, 합포, 당항포, 율포, 노량, 명량, 한산도 등에서 거둔 승리는 조선이 왜적에게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여수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발자취가 곳곳에 문화유적으로 남아 있다. 거북선을 최초로 만든 선소, 공의 공적을 새긴 통제이공수군대첩비, 공을 추모하여 세운 눈물의 비석 ‘타루비’, 국내 최초로 세워진 이순신 사당 ‘충민사’가 있다. 또한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 선 승려들의 흥국사도 있으며, 송현마을에는 효성이 지극했던 공이 전쟁중에 어머니 변씨를 모셔와 보살핀 곳도 있다.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가 없었을 것이다’라는 이순신의 글을 되새기게 하는 이곳 여수는 임진왜란 때 위태로운 나라를 지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임명장, 전라좌수영 수군절도사 부하장교에게 직책을 수여하는 명령서

OLYMPUS DIGITAL CAMERA좌수영 수군의 서본, 전라좌도 수군이 쓰던 글씨교본

전라좌수영 여수와 임진왜란 
여수는 한반도 남쪽 끝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왜구의 침략경로에 노출되어 있어 왜구가 침략하기 시작한 고려 말부터 수군기지화 되다가 진례만호와 내례만호를 거쳐 성종 10년(1479)에 드디어 전라좌수영으로 승격되어 고종 32년(1895) 혁파되기까지 417년 동안 남해안 방어의 주력기지로 국방상 중요한 임무를 다했다. 특히 임진왜란 때 여수의 좌수영수군은 이순신장군과 함께 바다의 모든 왜적을 격파하였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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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소의 톱

여수 전라좌수영 31-20100911여수 선소 유적(사적 392호),  여수시 시전동에 있는 전라좌수영 조선소 유적이다. 이곳에서 거북선을 비롯한 함선들을 건조하였다.

여수와 거북선
임진란이 일어나기 1년 2개월 전 이순신장군이 전라좌수사가 되어 여수에 부임하여 선소에서 거북선을 건조하는 한편 갖가지 병기를 시험하는 등 마치 왜적의 침입을 미리 알고 있는 듯 대비하였다.
난중일기: 인전년 3월 27일 <일찍 조반을 먹고 배를 타고 소포로 나가 쇠사슬을 건너 매는 것을 감독하여 종일 기둥나무 세우는 것을 보고 겸하여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하였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철쇄방비시설. 전라좌수영 동쪽과 돌산도 사이의 해협에 선박의 통행을 막기 위해 방어시설이 설치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철쇄방비시설이 설치되었던 여수 종포와 돌산도 사이의 해협. 광양만을 통해 남해 노량해협으로 연결되는 연안항로의 주요 지점으로 지금은 거북선대교가 세워져 있다.

철쇄방비시설
이 방비시설은 전라좌수영의 동쪽 소포(지금의 종포)에서 건너편 돌산도까지 쇠사슬을 걸쳐 매어 적선의 야간통행을 막는 시설이었다. 우선 긴 쇠사슬의 중간중간에 큰 나무를 꿰어 부표로 사용하고, 이 쇠사슬을 바다에 가로질러 설치한 후 이것이 조류에 떠내려가지 못하도록 수면에 큰 돌을 달아매어 닻으로 사용했다. 『난중일기』에 ‘돌은 신생포(지금의 율촌)에서 떠왔고, 나무는 두산도(지금의 돌산)에서 베어 왔으며, 공은 거의 날마다 이 쇠사슬을 건너 매는 일을 감독했다’고 적혀 있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전라좌수영.삼도수군통제영.진남관
전라좌수영- 조선시대 남해안 방위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여수에 자리잡고 있던 수군영이다. 1479년(성종10) 처음으로 설치되었고, 1895년(고종32)에 없앴다. 현재 그 모습을 거의 잃은 채 성곽의 극히 일부와 진남관만이 남아 있다. 조선후기 기록에 의하면 당시 전라좌수영 성안에는 건물 80여 동, 민가 2024호, 우물 9곳, 연못 1곳 등이 있었다고 한다. 봄이면 주변에 매화가 만발하여 매영성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삼도수군통제영-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의 수군을 이끌고 경상도 해전에서 여러번 승리를 거두어 1593년(선조 26)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수군을 다스리는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직함으로써 전라좌수영이 1601년(선조 34)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었다.
진남관 –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지휘소로 사용한 진해루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수군의 중심기지였다. 여수지역에서 목재를 조달하여 건축하였으며, 정면 15칸, 측면 5칸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단층 목조건물 중 가장 크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순천 낙안읍성(사적 302호), 왜구 침입을 대비하여 쌓은 대표적인 조선시대 읍성

전남 순천시 낙안면에 있는 낙안읍성(사적 302호)이다. 조선시대 옛 낙안관 읍치를 둘러싸고 전형적인 읍성이다. 고려말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쌓았던 읍성 중 하나로 처음에는 흙으로 성벽을 쌓은 토성이었으나, 세종대 이후 돌로 다시 쌓았다. 동서를 가로지르는 큰 길을 중심으로 북쪽에 관아와 부속 건물들이, 남쪽에 향리계층을 비롯하여 읍치에서 터를 잡고 살았던 사람들의 가옥들이 배치되어 있다.  읍성의 규모가 크지 않은 편이며, 객사를 비롯한 관아건물들과 민가들이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다.

낙안읍성은 돌로 쌓은 석성으로 성의 둘레 1,410 m이며, 동서로 직선 거리 약 500 m, 남북으로 약 400 m 정도이다. 동.서.남문을 두고 있으며, 성문 앞에는 적의 공격을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 옹성을 두고 있다. 성벽 바깥쪽에는 해자를 두고 있으며, 동문 양쪽에 2개씩 돌출된 방어시설인 치성을 두고 있고, 남문 서쪽편 언덕이 장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읍성내에는 비상시 식수로 사용할 수 있도록 큰 우물과 연못을 두고 있다. 성문 주위를 제외하고는 성벽 위에 조총공격에 대비한 여장을 두지 않는 등 조선전기 읍성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낙안읍성 동문과 문루인 낙풍루. 목조건축물인 문루를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는 개거식 성문이다. 성문 앞에 옹성을 쌓아 개거식 성문의 취약점을 보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낙안읍성 배치도. 전체적으로 서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성문으로는 동.서.남문을 두고 있다. 동문 좌.우와 모퉁이에 바깥으로 돌출된 치성 4곳을 두고 있다.남문 서쪽에 약간 높은 언덕이 있는데 전투를 지휘하는 장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문을 나서면 송광사와 선암사가 있는 조계산으로 연결되는 길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낙안읍성 동문 옆 성벽. 성벽은 커다란 돌을 잘 다듬어 석축을 쌓은 석성이다. 성문 주위를 제외하고는 조총 공격에 대비한 방어시설인 여장을 두고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앞쪽에는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물이 흐를 수 있는 해자를 파서 방어력을 보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문 앞 해자를 건너는돌다리.

OLYMPUS DIGITAL CAMERA성문 안쪽에서 본 낙풍루.

OLYMPUS DIGITAL CAMERA낙풍루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낙안읍성 동문에서 서문으로 연결되는 큰길. 낙풍루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큰길 북쪽으로 관아 등이, 남쪽으로 민가들이 배치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문 남쪽편 성벽과 치성. 성벽 위에 방어시설인 여장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조선전기 읍성의 특징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동문 북쪽편 성벽. 성문 옆에는 깃발을 세워둔 여장을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문 북쪽편에 있는 바깥으로 돌출된 방어시설인 치성.

OLYMPUS DIGITAL CAMERA치성에서 보이는 동문과 주위 성벽. 성벽 앞으로 해자를 파 놓았으며, 성문 앞에는 옹성을 두고 방어력을 보완하고 있다. 성벽과 해자 사이에 서민들이 살았던 작은 초가집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읍성 북동쪽 모서리에 있는 치성. 낙안읍성은 동문 방향이 왜구의 예상 침입로인 벌교 방향과 연결되기 때문에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동문 주위에만 4곳의 치성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낙안읍성 북쪽 성벽. 관아 뒷편으로 성문을 두고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바깥으로는 군사훈련을 하기 위해 조성해 놓은 넓은 공간이 있다. 동문 주위와는 달리 해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성벽. 안쪽에서도 돌로 쌓은 견고한 석축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벽을 오르는 계단.

OLYMPUS DIGITAL CAMERA북쪽 성벽 바깥으로는 순천 지역으로 연결되는 교통로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북쪽 성벽에서 내려다 보이는 관아 건물인 객사. 관아 건물 중 원형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낙안군수가 근무했던 동헌. 사적지로 바뀌면서 복원된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관아 뒷편 성벽. 성벽길 너비가 꽤 넓은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동헌 뒷편을 지나 서문으로 연결되는 성벽길. 멀리 장대로 사용되었던 언덕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낙안읍성 서문. 원래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문루를 두고 있지는 않다. 방어시설로 성문 앞에 옹성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문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서문에서 장대역할을 했던 서남쪽 언덕으로 연결되는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읍성 내부에서 본 서문. 양쪽에 성벽을 오르는 계단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문 안쪽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언덕으로 오르는 성벽길.

OLYMPUS DIGITAL CAMERA성벽 중 가장 높은 곳에서 위치한 언덕. 보통 이곳에 군사를 지휘하는 장대를 두는데 낙안읍성에는 장대를 별도로 두고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언덕에서 남문으로 이어지는 성벽길. 양쪽으로 낙안읍성에서 터를 잡고 살았던 사람들의 민가들이 보인다. 낙안읍성을 대표하는 명장면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아래쪽 성벽에서 보이는 언덕.

OLYMPUS DIGITAL CAMERA낙안읍성 남문과 문루인 쌍청루. 전형적인 개거식 성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앞쪽에는 상당히 견고한 옹성을 쌓았다.

OLYMPUS DIGITAL CAMERA남문 문루인 쌍청루.

OLYMPUS DIGITAL CAMERA성문의 방어력을 보완하기 위해 성문 앞에 쌓은 옹성.

OLYMPUS DIGITAL CAMERA남문 앞쪽으로는 낙안벌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치성에서 보이는 성밖 마을과 장대역할을 했던 언덕.

OLYMPUS DIGITAL CAMERA동쪽으로 이어지는 성벽길.

OLYMPUS DIGITAL CAMERA동남쪽 모서리로 이어지는 성벽길.

OLYMPUS DIGITAL CAMERA바깥쪽에서 본 남쪽 성벽. 멀리 모퉁이에 설치해 놓은 치성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남쪽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남쪽 성벽 안쪽으로는 비상시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 조성해 놓은 연못과 우물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연못 한쪽편에 있는 우물.

OLYMPUS DIGITAL CAMERA읍성 바깥으로 물길을 연결시켜주는 작은 수문.

낙안읍성, 사적 302호, 전남 순천시 낙안면 동.서.남대리
낙안읍성은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읍성들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보존 된 곳으로 특히 성 안에는 전통적인 가옥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읍성은 고려 후기에 왜구의 잦은 침입이 있어 조선 태조 6년(1397)에 흙으로 쌓았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6년(1424)부터 여러 해에 걸쳐 돌로 다시 쌓아 성의 규모를 넓혔다고 한다. 읍성 전체 모양은 장방형이며 길이는 1,410 m이다. 동.서.남쪽 3곳에는 성 안의 큰 도로와 서로 연결된 문이 있고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4군데의 치성이 성 밖으로 돌출되어 있다. 성 안에는 90여 가구의 민가들이 있는데, 보통 1가구당 2~3채의 초가집과 마당, 텃밭으로 구성되었다. 초가집들은 3칸 정도의 일자형 안채와 아래채, 그리고 농기구 등을 보관하거나 외양간으로 겸용하는 헛간채와 재래변소로 이용하는 잿간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현대화 물결에 따라 전통적인 마을의 모습이 변형되기 시작하였고, 성의 일부가 점진적으로 붕괴 소실됨에 따라 1983년 사적 제302호로 지정하고 읍성의 종합적인 보존사업을 시작하였다. 특히 백성들이 살던 초가집들 가운데 보존가치가 가장 높은 9동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하였고, 일부 변형되었거나 낡은 집들은 복원.수리하였다. 관청터에서는 관아와 객사 주변의 담장.월대.삼문 등을 발굴.복원하고 성곽과 문루 등을 복원하였다. 여러 성씨가 모여 사는 이 마을 중앙에는 선정을 베풀었던 군수 임경업(1594~1646)의 선정비가 있고, 600여년 이상된 노거수 은행나무가 마을을 수호한다고 믿고 매년 추모.당제를 지내고 있다. 동문 밖 1 km거리에는 낙안향교가 있어 예전에는 이 지역 선비들을 양성하였으나, 지금은 당시의 풍속과 생활문화를 전하고 있다. (안내문, 순천시청, 2012년)

  1. 안내문, 순천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전라도 낙안군 관아

전남 순천시 낙안면.외서면과 보성군 벌교읍 등에 있었던 옛 지방 고을이었던 낙안군(樂安郡) 관아이다. 낙안군은 삼국시대 백제의 분차군이었으며, 그 후 여러차례 이름이 바뀌었다가 고려 초 낙안군으로 바뀌면서 구한말까지 존재해오다 1908년에 폐지되었다. 원래 읍치는 벌교읍 부근이었으나 고려말 왜구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낙안읍성이 있는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낙안읍성에는 당시 쌓았던 읍성을 비롯하여 관아, 읍치에 거주했던 주민들이 살았던 오래된 가옥들이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다. 낙안군 읍치는 조선시대 관아가 있었던 읍치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어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으며 옛사람들이 살았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유적지로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지역의 관광 명소로 잘 알려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낙안군 읍치였던 낙안읍성. 읍치는 남해안에서는 꽤 넓은 평야였던 낙안들판 북쪽편에 자리잡고 있다. 동쪽으로는 순천과 연결되며, 북쪽으로는 승주, 구례를 거 남원과, 서쪽으로는 보성지역과 연결되는 교통로이다. 고려말, 조선초에 왜구의 침입이 많았던 지역으로 해안에서 비교적 안전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곳에 읍성을 쌓아 대비했다.

OLYMPUS DIGITAL CAMERA관아 입구에 세워져 있는 임경업 장군 선정 비각, 인조 때 낙안군수를 역임한 임경업 장군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OLYMPUS DIGITAL CAMERA관아 중심 건물인 객사 입구에 세워져 있는 홍살문.

OLYMPUS DIGITAL CAMERA관아의 중심이 되는 객사. 조선시대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며 이곳을 방문한 중앙관리가 머무는 숙소로 사용되는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객사를 출입하는 객사문.

OLYMPUS DIGITAL CAMERA객사문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양쪽에 손님들을 수행했던 인원들이 묵을 수 있는 문간방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객사문 안쪽으로 보이는 낙안 객사.

OLYMPUS DIGITAL CAMERA낙악객사. 가운데 궐패를 모시는 앞면 3칸 규모의 정청을 두고 양쪽에 각 앞면 2칸씩 익랑을 두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객사 건물 형태를 하고 있다. 낙안읍성에서 볼 수 있는 관아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던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고 있는 가운데 정청 건물. ‘낙안지관’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편 익랑. 손님이 묵을 수 있는 온돌방 1칸과 손님과 연회를 할 수 있는 툇마루를 두고 있다. 문신들이 머무는 숙소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쪽편 익랑. 무신들이 머무는 숙소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낙안객사.

OLYMPUS DIGITAL CAMERA뒷편 낙안읍성 성벽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낙안객사.

낙안객사
객사는 손님을 접대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곳으로, 외국이나 조정에서 파견된 사신의 숙소였을 뿐만 아니라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셔두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 때 고을의 관리와 선비들이 모여 망궐례를 올리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이 객사는 세종 32년(1450) 군수 이인이 건립한 후 인조9년(1631)과 철종 8년(1857)에 각각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는 객사 본전만 남아 있어 전체의 모습은 알 수 없으나 1900년대 초까지는 모두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객사본전은 1909년 이후 낙안초등학교 건물로 사용되어 안팎으로 변조된 부분이 많았으나 1982년에 다시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완벽한 좌우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다. 지붕은 본사의 경우 맞배지붕이고, 양쪽 날개집은 팔작지붕이다. (안내문, 순천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동헌 입구에 세워져 있는 문루인 낙민루. 남원 광한루 등과 함께 호남지방에서는 유명한 문루였으나 한국전쟁 때 불타버려 남아 있지 않았는데 최근에 옛모습을 복원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낙민루 앞에 남아 있는 오래된 고목.

낙민루
낙민루는 조선 헌종 때 군수 민중헌이 중건하였다고 전해지며 1924년 일부분을 수리하였다고 한다. 남원의 광한루, 순천의 연자루와 더불어 호남의 명루로서 오랜 세월동안 희로애락을 나눈 누각이었으나 6.25전쟁 당시 불타 소실되었던 것을 1986년 기존이 초석 위에 17평 규모로 겹처마 팔작집의 누각형으로 복원하였다. (안내문, 순천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낙안군수가 집무를 보던 동헌을 출입하는 문. 양쪽에 행랑채를 두고 있는 형태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모습. 양쪽 행랑채는 창고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낙안군수가 집무를 보던 건물인 동헌. 앞면 5칸으로 양쪽에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앞면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가운데 대청마루. 낙안군수가 송사를 다루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군수가 손님을 접견하고 일상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인 온돌방.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동헌

OLYMPUS DIGITAL CAMERA마당에 재현해 놓은 재판을 받는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곤장을 맞는 모습도 재현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 읍성 성벽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동헌

동헌(시무당)
이 건물은 조선왕조 때 지방관청으로 감사, 병사, 수사, 수령 등이 지방행정과 송사를 다루던 곳으로동쪽은 수령이 서쪽방은 관리들이 사용하던 곳이다. 좌측에 있는 건물은 내아로서 수령의 안채로 사용하던 건물로 내동헌이라고 한다. 당초 건립 연대나 퇴락한 연대는 기록에 없어 알 수 없으나 문헌을 참고하여 옛 터의 발굴 조사와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1990년 복원하였다. (안내문, 순천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동헌 옆에 있는 군수의 생활공간인 내아를 출입하는 문.

OLYMPUS DIGITAL CAMERA생활 공간인 내아. 옛모습을 복원해 놓았다.

OLYMPUS DIGITAL CAMERA내아 대청마루.

OLYMPUS DIGITAL CAMERA건물 앞 통로로 사용되었던 툇마루.

OLYMPUS DIGITAL CAMERA온돌방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내아 뒷마당.

OLYMPUS DIGITAL CAMERA읍치 마을 가운데 위치한 옥사.

OLYMPUS DIGITAL CAMERA옥사 건물.

  1. 안내문, 순천시청, 2012년
  2. 위키백과,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

순천 송광사 묘법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삼현원찬과문(보물 204호)

순천 송광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묘법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삼현원찬과문(보물 204호)이다. 법화경이라고도 불리는 묘법연화경은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화엄종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에 큰 영향을 미친 경전이다. 이 책은 법화경 중 제25품인 관세음보살보문품을 송나라 시효가 풀이해서 쓴 것으로 관세음보살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고려시대 의천이 간행한 교장의 하나로 조선초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다시 목판을 새겨 간행한 것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묘법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삼현원찬과문, 보물 204호, 조선 1461년

묘법연화경은 줄여서 ‘법화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것을 기본사상으로 하고 있다. 이 책은 법화경 28품 중에서 제25품인 관세음보살보문품을 송나라 시효가 알기 쉽게 풀이하여 쓴 책이다. 책 끝에는 고려 숙종 4년(1099)에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다시 펴낸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출처>

  1.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