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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나주목 관아(사적 483호), 객사인 금성관과 내아

전남 나주시 금계동 일대에 남아 있는 옛 나주목 관아터(사적 483호)이다. 나주시 구도심 중심부에 위치한 관아터에는 객사인 금성관, 내아인 금학헌, 동헌 출입문인 정수루 등이 남아 있다. 객사인 금성관은 조선초 처음 건립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구한말에 중수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군청사로 사용하면서 개조되어 정청만 남아 있다가 최근에 동익헌과 서익헌, 망화루 등이 복원되었다. 내아인 금학헌은 구한말에 다시 지어진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나주군수 관사로 사용되면서 일부 변형이 있었으나 최근에 원형을 복원하였다. 관아 건물들은 일제강점기에 일부 변형이 있기는 하지만 지방관아 중 비교적 큰 규모였던 나주목 관아의 옛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유서깊은 유적지이다.

나주는 전남지방을 흐르는 영산강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던 큰 고을로 고려시대부터 큰 규모의 지방행정 조직인 나주목(牧)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전주와 함께 호남지방을 대표하는 읍치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나주목지도 등 여러 문헌에 관아 건물들의 위치와 형태 등이 비교적 잘 남아 있어 현존하는 관아건물 등과 비교할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목 객사 출입문인 망화루. 객사인 금성관과 함께 조선초에 처음 세워졌다. 다른 지방 객사문과는 달리 문루 형식을 하고 있다. 내부에 중삼문과 내삼문을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목 객사 금성관 중삼문. 최근에 복원된 것으로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전통 객사문의 형식을 하고 있다. 삼문형식을 하고 있으며 문루에서 거친 박석으로 삼도형식이 통로가 조성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목 객사인 금성관. 가운데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신 정청을 두고 양쪽에 동익헌과 서익헌을 두고 있다. 일제강점기 군청건물로 사용하면서 정청만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동익헌과 서익헌을 다시 지어 원형을 복원하였다. 동.서익헌 건물의 규모가 다른 것이 특이하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목 객사 정청. ‘금성관’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로 지방관아 객사를 대표하는 건물 중 하나이다.

SANYO DIGITAL CAMERA정청 내부. 넓은 마루가 깔려 있다.

SANYO DIGITAL CAMERA천정은 우물천장과 서까래가 드러나 보이는 연등천장이 섞여 있다.

SANYO DIGITAL CAMERA앞면 6칸의 상당히 큰 규모를 하고 있는 동익헌. 가운데 2칸은 온돌방이며 오른쪽에 넓은 마루가 있다. 최근에 복원한 건물로 ‘벽오헌’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SANYO DIGITAL CAMERA서익헌은 앞면 5칸으로 동익헌에 비해 약간 작은 규모이다.

SANYO DIGITAL CAMERA서익현 앞쪽 툇마루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나주목 객사.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객사 앞 마당. 가운데 내삼문 터가 있다. 궁궐 정전 영역처럼 마당에 박석이 깔여 있으며 가운데 통로가 있다.

금성관은 나주목의 객사 정청이다. 객사는 관찰사가 관할구역을 순행할 때 업무를 보는 곳이며 중앙의 사신이 묵던 곳이다. 특히 정청(나주목은 금성관)에는 전패와 궐패를 모셔두고 망궐례를 행하던 공간이었다. 즉 사신을 접대하고, 왕정의 위덕을 펴서, 관부의 위엄을 세우는 곳이었다. 나주목 객사 금성관은 이유인 목사(1487.4.12 ~ 1489 재임)가 망화루와 함께 건립하였다. 이후 임란때 피해를 입어 김개목사가 1617년 4월 21일 중수하고 1774년 이명중 목사가 개수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나주군청사로 사용되다 1963년 보수를 거쳐 1876년 완전해체 복원하였다. 이후 나주목 금성관 복원정비 사업을 통해 금성관 앞을 가리고 있던 나주군청사를 헐고 금성관의 동익헌(벽오헌).서익헌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SANYO DIGITAL CAMERA객사 마당 한쪽편에 모아 놓은 공덕비들.

SANYO DIGITAL CAMERA객사 서쪽편에는 나주목사가 근무했던 동헌과 살림집인 내아가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은 동헌 출입문인 정수루와 내아인 금학헌이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목 동헌 출입문인 정수루.

SANYO DIGITAL CAMERA정수루를 들어서면 오른쪽에 내아였던 금학헌이 남아 있다. 구한말에 지어진 것으로 일제강점기 나주군수 관사로 사용하다가 최근에 원형을 복원하였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목사가 거처했던 살림집인 내아. ‘ㄷ’자형을 하고 있는 건물로 구한말 상류층 저택의 형태가 잘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내아에 딸린 행랑채에 해당하는 부속건물

나주목사 내아. 금학헌
이곳은 조선시대 나주목사가 기거하던 살림집을 상류주택의 안채와 같은 모습을 갖추고 있다. 성안에 있던 관아건물 중에서 객사 금성관과 동헌의 출입문 정수수와 함께 원형의 모습을 간직한 소중한 유산이다. 내아가 처음 세워진 때는 알 수 없으나 안채 상량문에 1825년(순조 25) 7월 1일 주춧돌을 놓고 7월 20일 상량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문간채는 1892년(고종 29)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19세기에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군수 관사로 사용하면서 원형이 변형되었으나 최근에 모두 충실하게 복원하였다. 목사내아는 주변에 객사, 정수루가 함께 있어 조선시대 관아건축 양식의 원형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SANYO DIGITAL CAMERA내아 부근에 남아 있는 의열각

나주목 관아.나주읍성
이곳은 천여년 동안 나주의 중심공간으로 금성관을 중심으로 하는 객사공간과 나주목사가 직접 정무를 보았던 나주목 동헌(정수루, 목사내아)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또한 이곳을 정점으로 동문(동점문), 서문(서성문), 남문(남고문), 북문(북망문)의 사대성문과 성벽을 쌓아 도시의 위용을 갖추었으며, 현재 규모는 김계희목사(1457.811 ~ 1459.11.21 재임)가 완성하였다. 나주읍성은 둘레가 3,679 m 면적은 974,390 ㎡ 이었다. 1789년 『호구총수』에는 읍성을 중심으로 동부면(16개리) 서부면(24개리)이 편재되어 1,361호 4,662명이 살았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여성이 378명이 많았다. 또한 남문밖에는 전라우영(현 나주초등학교)이, 서문밖에는 나주향교가 자리하고 동문밖에는 석장(석당간, 보물 49호)이 자리하고 있었다. 현재까지도 읍성을 중심으로 석당간, 나주향교, 목사내아, 정수루, 주사청 등의 건물이 있다. 좌측의 나주목고지도는 영.정조 때 비변사에서 사용하기 위해 제작한 지도로 나주읍성과 관아의 각 건물들의 모습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나주는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출처>

  1.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나주 나주향교(사적 483호), 교육기능을 제대로 갖춘 큰 규모의 향교

전남 나주시 교동에 있는 옛 나주목 중등교육기관이었던 나주향교(사적 483호)이다. 나주향교는 조선초 태종 7년(1407)에 처음 창건되었다. 조선시대 설치된 향교 중 전주향교, 강릉향교 등과 함께 가장 큰 규모를 하고 있다. 공자 아버지 위치를 봉안한 계성사가 있어 앞쪽에 제향공간이, 뒷편에 강학공간이 있는 전묘후학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제향공간에는 공자를 비롯한 5성, 송조 4현, 우리나라 18현을 모시고 있는데 대성전과 동.서무를 제대로 갖추고 있다. 대성전(보물 394호)은 앞면 5칸, 옆면 4칸의 상당히 큰 규모은 건축물로 대표적인 문묘 건축물로 손꼽힌다. 강학공간은 좌.우익랑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명륜당을 중심으로 양쪽에 동.서재를 두고 있다. 전체적인 규모나 공간배치에 있어 서울 성균관과 거의 유사하며 교육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대표적인 향교이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향교(사적 483호). 나주목 관아에서 운영했던 중등교육기관으로 전묘후학의 공간배치, 좌.우익랑을 갖춘 큰 규모의 대성전과 동.서재 등 성균관에 버금가는 규모를 갖춘 대표적인 향교이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향교 외삼문. 입구에 표지석과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강학공간으로는 문묘 옆 골목길을 통해 들어갈 수 이다.

SANYO DIGITAL CAMERA외삼문을 들어서면 마당이 있고 문묘 출입문인 내삼문까지 바닥돌이 깔린 신도가 연결되어 있다. 내삼문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삼문형식을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공자와 선현들을 모시는 제향공간인 문묘. 대성전(보물 394호)를 중심으로 동.서무를 제대로 갖추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향교 대성전(보물 394호). 앞면 5칸, 옆면 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이다. 우리나라 문묘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SANYO DIGITAL CAMERA선현들의 위패를 모신 서무. 앞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향교 외삼문 오른쪽 강학공간으로 들어가는 골목길. 정면에 전사청 등에 해당하는 부속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SANYO DIGITAL CAMERA강학공간 중심건물인 명륜당.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가 있는 강당을, 양쪽에 협실을 두고 있다. 성균관 명륜당과 같은 규모와 형태를 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구조이다.

SANYO DIGITAL CAMERA명륜당 현판이 걸려 있는 가운데 강당 건물. 앞쪽에 월대를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왼쪽편 협실. 앞면 3칸 규모로 넓은 대청마루 2칸과 온돌방 1칸을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오른쪽 협실. 최근에 크게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 명륜당 앞 마당 방향으로 회랑형식의 툇간을 두고 있다. 성균관 동.서재와 같은 형식으로 다른 향교에서는 보기 힘든 구조이다.

SANYO DIGITAL CAMERA반대편에는 비교적 넓은 마루를 두고 있어 유생들이 일상적으로 공부하면서 생활할 수 있는 구조이다.

SANYO DIGITAL CAMERA맞은편 서재. 동재와 같은 구조이다.

SANYO DIGITAL CAMERA명륜당 월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강학공간 마당과 대성전. 마당이 상당히 넓은 편이다.

SANYO DIGITAL CAMERA강학공간 동쪽편 전사청 등 부속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공간으로 출입하는 출입문. 성균관과 같은 공간배치이다.

SANYO DIGITAL CAMERA출입문을 들어서면 동재 앞 마당과 부속 건물들이 하나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뒷편 도서관에 해당하는 건물.

<출처>

  1.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나주 나주향교 대성전(보물 394호),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묘 건축물

전남 나주시 교동에 있는 나주향교 대성전(보물 394호)이다. 대상전은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 중심 건물로 문묘라고도 부른다. 나주향교는 전묘후학의 공간배치로 성균관 문묘처럼 앞쪽에 위치하고 있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성균관 문묘와 비슷한 규모이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주심포 양식을 사용하고 있으며,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 서울 문묘, 강릉향교, 장수향교와 더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묘 건축물이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향교 대성전(보물 394호).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묘 건축물로 서울 성균관 문묘에 버금가는 큰 규모의 대성전이다.

SANYO DIGITAL CAMERA건물은 앞면 5칸, 옆면 5칸 규모이다. 팔작지붕을 사용하고 있으며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주심포양식이다.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나주 나주향교 대성전 보물394호 01-20190828
건물 내부. 바닥에 전돌대신 마루가 깔려 있으며, 천장은 서까래가 드러나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SANYO DIGITAL CAMERA대성전 앞 월대.

나주향교 대성전, 보물 394호
대서어전은 향교의 중심건물로 공자를 중심으로 한 27위의 위패를 모신공간이다. 건물의 크기나 모양이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대성전 중에 으뜸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유교건축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대성전 벽흙은 공자의 고향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말과 임진왜란 이후 성균관을 다시 지을 때 나주향교 대성전을 참조하여 지었다는 말이 전해온다. 대성전은 조선시대 나주향교가 건립되면서 처음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670년 소두산 목사에 의해 대성전 중수가 이루어졌고 고종 6년(1869)에 대성전을 비롯하여 대대적인 보수를 거쳤으며, 순조 33년 ~ 헌종 3년(1833 ~1837), 고종 32년(1906), 2008년에 대성전 도리이상 해체.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안내문, 나주시청, 2017년)

<출처>

  1. 안내문, 나주시청, 2017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김제 금산사 대장전(보물 827호), 미륵전 앞 목탑으로 세워졌던 건물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사 불전인 대장전(보물 827호)이다. 원래 미륵전 앞에 세워져 있던 목탑으로 불경을 보관하던 장소였다.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인조 때(1635)에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하였으며, 1922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불경을 보관하는 기능은 없어지고 지금은 석가모니와 제자를 모시늘 불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로 목탑 건물로는 그 규모가 크지 않은 편이다. 지붕에 목탑이었을 때 사용하였던 부재가 올려져 있으며, 단층으로 변형되었지만 옛 목탑의 건축양식이 일부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금산사 대장전(보물 827호). 원래 미륵전 앞에 있던 목탑으로 불경을 보관하던 장소였다. 정유재란 때 목탑이 소실된 후 단층건물로 다시 지어졌다.

SANYO DIGITAL CAMERA대장전 현판. ‘대장전’이란 불전 이름에서 불경을 보관하던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

김제 금산사 대장전 보물827호 01-20190821
대장전 내부.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내부에 기둥이 있는 등 목탑 건축 양식이 일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대장전에 모셔진 불상. 석가보니와 제자들을 모시고 있는데 일반적인 불전과는 다른 형태이다.

김제 금산사 대장전 보물827호 02-20190821

건물 지붕을 장식하고 있는 옛 목탑의 건축부재.

SANYO DIGITAL CAMERA금산사 경내 미륵전과 마주보고 있는 위치에 있는 대장전, 원래 목탑처럼 미륵전 바로 앞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대장전, 보물 827호
대장전은 미륵전을 장엄하는 정중 목조탑으로 미륵전과 함께 일찍이 건립되었다. 정유재란에 소실된 후 1635년 조서너 인조 13년에 재건되었으며 1922년 미륵전 앞에서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현재 지붕위에 남아 있는 복발과 보수 등은 조선 인조 이전의 목탑 잔영이며 법당안에는 석가모니불과 상수제자인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봉안하고 있다. 건물은 비교적 단조롭고 소규모이지만 정중 목탑의 변형물로 주목되며 석가모니불의 후불광배의 조각이 뛰어나게 아름답다. (안내문, 김제 금산사, 2009년)

<출처>

  1. 안내문, 김제 금산사,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남원 남원향교, 남원도호부 중등교육기관

전북 남원시 향교동에 있는 조선시대 남원도호부 중등교육인 남원향교이다. 남원향교는 조선초 태종 때(1410년)에 처음 창건되었으며, 세종 때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정유재란 남원전투 때 소실되었다가 복원하였으며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성전을 비롯하여 동.서무, 강당인 명륜당과 동.서재, 문루인 진강루와 고직사 등을 두고 있다.

남원향교는 고을규모에 걸맞게 건물의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며 오랫동안 교육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북에 있는 향교 중  가장 많은 서적을 소장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남원은 지리산과 접하고 있으며 영남지방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 위치하고 있어 이곳을 찾은 방문객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방문객들을 위해 강당을 비롯하여 강학공간의 규모를 크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해안명승지에 위치한 강릉향교과 비슷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남원 출입문인 진강루. 앞면 3칸, 옆면 3칸 비교적 큰 규모의 2층 문루이다.

SANYO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모습. 주위 풍경을 감상하면서 쉴 수 있는 휴식공간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당과는 통로가 연결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강당인 명륜당. 앞면 5칸의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이다.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경사진 지형에 2층 건물처럼 지어졌다.

SANYO DIGITAL CAMERA강당과 문루를 연결하는 통로

SANYO DIGITAL CAMERA출입문에서 강학공간 마당으로 들어가는 길

SANYO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강당.

SANYO DIGITAL CAMERA유생들이 거처하는 기숙사인 동재. 앞면 5칸의 큰 건물로 교육기능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건물 앞에 비석이 세워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동재 툇마루.

SANYO DIGITAL CAMERA맞은편 서재. 앞면 4칸 규모이다.

SANYO DIGITAL CAMERA강학공간 안쪽에 있는 고직사.

SANYO DIGITAL CAMERA강당 뒷편 대성전 출입문.

SANYO DIGITAL CAMERA남원향교 대성전

남원향교 대성전, 전남 남원시 향교동
이곳 대성전은 공자를 모신 사당이다. 조선왕조는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나라에서 각 지방에 향교를 세우고 그 안에 대성전을 두어 유학을 장려하였다. 남원향교는 조선 태종 때 성안 서쪽 골짜기에 처음 세웠다가 얼마 후 요천 건너편으로 옮겼는데, 요천이 범람할 때마다 유생들이 향교에 다니기가 어려워 세종 25년(1443)에 지금의 자리로 다시 이사했다고 전한다. 그후 정유재란 때 향교 건물이 모두 불타버렸으나, 선조 32년(1599)에 지방의 유지 유인옥이 대성전을 다시 지었다. 대성전 안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여러 성현과 유학자를 모셨으며, 매년 봄가을에 이곳에서 <석전대제>라는 큰 제사를 지낸다. (안내문, 남원시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대성전 앞 서무.

SANYO DIGITAL CAMERA맞은편 동무.

<출처>

  1. 안내문, 남원시청,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