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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옥산서원(사적), 회재 이언적을 모신 서원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옥산서원(玉山書院, 사적)이다. 조선중기 유학자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 ~ 1553년)을 기리기 위해 1592년(선조5)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처음 세웠으며 1573년 국왕으로부터 ‘옥산(玉山)’이라는 이름이 내려져 사액서원이 되었다. 옥산서원은 건축양식이 정형화된 후기의 서원들과는 달리 건물 배치나 건축양식에 있어서 자유로우면서도 형식적이고 절제된 면을 보여주고 있다. 강당건물인 구인당(求仁堂)을 중심으로 한 강학공간이 앞쪽에, 위패를 모신 체인묘(體仁廟)를 중심으로 제향공간이 뒷쪽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서원 입구에 위치한 청분각에는 이언적의 <수필고본>(보물), 김부식의 <삼국사기> 완본 9권(국보) 등 많은 서적들을 소장하고 있다. <한국의 역사마을, 양동마을>과 <한국의 서원>의 일부로 유네스코문화유산에 이중으로 등재되어 있다.

회재 이언적(1491~1553년)은 조선중기 문신으로 주로 중종대에 명종대에 관리이자 학자로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이 시기에 일어난 여러번의 사화에서 관직에 물러나거나 여러 사건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이언적은 학자로서 성리학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주자의 주리론에 근본을 두면서 당시 성리학의 거두였던 조한보와 무극태극논쟁을 벌였으며, 이는 조선 성리학사에 최초의 본격전인 논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학설은 이후 퇴계 이황에 의해 계승.발전되어 영남학파의 선구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학문적 성과에 따라 1610년(광해군2)에 명종의 배향공신으로 종묘에 배향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옥산서원(사적)>

들어가는 길

옥산서원은 경북 안강읍 옥산천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이언적은 말년에 관직을 그만두고 정혜사지 절터 부근에 독락당을 짓고 거처하면서 학문에 전념했다. 옥산천 계곡에서 경치가 뺴어난 바위 5곳에 이름을 짓고 오대(五臺)라 불렀는데 그 중 독락당 남쪽 600m 정도 떨어진 세심대(洗心臺) 부근에 서원이 세워졌다. 서원 부근에는 오랜 세월 다양한 나무가 심어져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옥산서원 입구의 울창한 숲>

OLYMPUS DIGITAL CAMERA<서원 들어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서원 앞 마당>

세심대(洗心臺)는 서원 앞을 흐르는 개천 가운데 있는 넓은 너럭바위 일대를 말한다. 독락당에서 흘러내려온 개천은 세심대에서 작은 폭포와 용소(龍沼)를 만들어 빼어난 경치를 만들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세심대>

세심대는 옥산서원 앞으로 흐르는 자계천 가운데에 자리한 너럭바위 일대를 말한다. 자계천을 흐르는 물은 세심대에서 떨어져 내려 작은 폭포와 용소(龍沼)를 만들이 빼어난 경치를 이른다.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4~1553)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독락당을 지어 머물면서 주변의 산과 계곡에 이름을 붙였는데 이를 사산오대(四山五臺)라고 하며, 그 중 하나가 바로 세심대이다. 세심대는 마음을 씻고 자연을 삼아 학문을 구하는 곳이라는 뜻이며, 바위에 새겨진 글씨는 퇴계 이황이 쓴 것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서원 정문에 해당하는 역락문 (亦樂門)은 삼문의 형식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주위로는 옥산서원 특유의 흙과 벽돌을 섞어서 만든 토담으로 둘러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원 정문인 역락문>

강학공간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세워진 서원으로 제향공간이 중심이 되었던 후대의 서원에 비해 강학공간과 고직사의 규모가 크고 학문연구에 중점을 둔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서원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다. 강학공간에는 강당건물인 구인당(求仁堂)을 중심으로 유생들의 기숙사인 민구재(敏求齋, 동재), 암수재(闇修齋. 서재), 휴식공간인 무변루(無邊樓)로 구성되어 있으며 교육중심의 서원답게 규모가 크고 짜임새 있는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독락문을 들어서면 출입문이자 이곳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의 휴식공간인 무변루가 있다.

유생들의 휴식공간인 무변루는 앞면 5칸의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설치하였다. 건물 양쪽에는 작은 누마루을 설치하였다. 계곡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대청마루에는 판문을 달아 놓고 있다. 경치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누각 건물인 무변루>

OLYMPUS DIGITAL CAMERA<강당에서 보이는 무변루>

OLYMPUS DIGITAL CAMERA<무변루 내부>

무변루 앞마당에는 계곡에서 물을 끌어 들여 흐를 수 있도록 작은 수로를 만들어 놓고 있다. 이는 궁궐 건물에서 볼 수 있는 금천과 비슷하게 서원 안팎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무변루 앞 마당>

강당건물인 구인당은 유생들이 공부하고 학문을 논하는 강학공간의 중심건물이다. 건물은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로,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잘 지어진 건물은 아니지만 단정하면서도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구인당은 이언적이 쓴 ‘구인록’에서 이름을 따 왔는데 당대의 명필 한석봉이 글씨를 썼다.

OLYMPUS DIGITAL CAMERA<강당건물인 구인당>

옥산서원은 선조에게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당대 명필 이산해가 현판글씨를 썼는데 구한말 화재로 소실되면서 추사 김정희가 다시 현판글씨를 썼다.

OLYMPUS DIGITAL CAMERA<옥산서원 현판>

OLYMPUS DIGITAL CAMERA<’구인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강당 대청마루>

OLYMPUS DIGITAL CAMERA<천정에 걸려 있는 글>

OLYMPUS DIGITAL CAMERA<오른쪽 온돌방>

OLYMPUS DIGITAL CAMERA<왼쪽 온돌방>

OLYMPUS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온돌방 아궁이>

강당 앞 마당 양쪽에는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던 동.서재에 해당하는 민구재와 암수재가 있다. 민구재는 상급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기거하던 곳으로 앞면 5는 건물로 온돌방 3칸과 작은 대청마루를 1칸씩, 2개를 두고 있다. 유생들을 서열에 따라서 분리하여 공부했음을 알 수 있다. 암수재는 하급생이 기거하는 곳으로 건물구조는 민구재와 똑깥다. 다른 서원에 비해 건물규모가 큰 편으로 교육기관의 역할이 강조되었던 초기 서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민구재>

OLYMPUS DIGITAL CAMERA<암수재>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강학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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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 옆 계곡을 출입하는 작은 쪽문과 오래된 고목>

강학 영역은 학문을 연구하는 공간으로 무변루, 구인당, 민구재(동재), 암수재(서재) 등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 유생들의 휴식 공간인 무변루는 ‘끝이 없는 누각’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편액의 글씨는 석봉 한호가 쓴 것이다. 처음 이름은 납청루였으나, 노수신이 ‘스승이 남긴 뜻에 맞지 않다’ 며 주돈이의 ‘풍월무변(風月無邊)’을 따와서 무변루로 고쳤다. 무변루를 마주 보고 있는 구인당은 이언적이 쓴 ‘구인록’ 에서 이름을 따왔는데, 이 현판도 석봉 한호가 썼다. 구인당은 헌종 4년 1838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지어졌다. 이곳은 강의와 토론이 열렸던 곳으로, 서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마루 양쪽의 양진재(兩進齋)와 해립재(偕立齋)는 교수와 유사(有司)들이 기거하던 곳으로 현대 학교의 교무실에 해당한다. 강당의 앞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이 학문을 닦으며 기거하던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있는데, 유생들 간에도 위계가 있어 나이가 많은 유생들이 동재에 기거하였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제향공간

제향공간은 위패를 모신 사당인 체인묘(體仁廟)를 중심으로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 서원 소장 목판을 보관하던 경각(經閣), 신도비가 있는 비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은 내삼문인 체인문 주위로 담장이 둘려져 있다. 사당 건물은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사당 건물 형태를 하고 있는데 규모가 크지 않고 단정하면서 절제된 느낌을 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체인문과 제향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

OLYMPUS DIGITAL CAMERA<사당인 체인묘와 전사청>

사당 옆에는 회재 이언적을 기리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이 신도비는 이언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건립한 것이다. 비문은 당대 유학지 기대승이 짓고, 글씨는 명필 이산해가 썼다. 원래 신도비는 서원 앞 계곡 부근에 세워져 있었는데, 안전을 위해서 후대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OLYMPUS DIGITAL CAMERA<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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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적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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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에 새겨진 글씨, 명필 이산해의 뛰어난 글씨체를 볼 수 있다.>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
문원공 회재 이언적(1491~1553년)은 조선 중종, 명종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이자 사림파 관료로 동방오현(東方五賢) 중 한사람으로 꼽힌다. 주자(朱子)의 주리론(主理論)에 근본을 두었으며 그의 이우위설(理優位說)은 이후 퇴계 이황에 의해 계승, 발전되어 영남학파 성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이 신도비는 이언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후학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비문은 호남의 거유(巨儒)였던 고봉 기대승이 짓고, 아계 이산해가 썼다. 비의 전체 높이는 320cm 이며, 비신의 높이는 204cm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경각은 옥산서원이 소장하고 있던 전적을 보관하는 건물로 앞면 3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이곳에는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어서, 어필, 내사본, 퇴계수필, 각종 전적 등을 봉안하고 있었다. 옥산서원은 경주부윤을 통해 국가에서 발행한 중요한 전적을 소장하고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각>

국보 322-1호 <삼국사기>는 1573년 경주부(慶州府)에서 옥산서원에 보내준 것으로 고려시대 원판, 조선 태조 때 새긴 것, 중종 때 시갠 것 등이 3종류의 판이 섞여 있다. 총9책으로 구성된 완질본으로 인출상태와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서울 성암고서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국보 322-2호 <삼국사기>는 1512년 다시 새긴 것을 찍은 것으로 인출당 당시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삼국사기, 고려 1145년, 1573년 인쇄, 종이에 인쇄, 국보 322-1호, 경주 옥산서원>

제향 영역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과 이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체인문, 체인묘, 전사청, 경각, 비각 등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체인문을 들어서면 회재 이언적의 위패를 모신 체인묘(體仁廟)가 있다. 사당은 신성한 공간이며 위엄을 갖추어야 하기에 내삼문의 주위로 담장을 둘렀다. 전사청(典祀廳)은 제사를 지내기 전날에 제수를 보관하던 곳으로, 평상시에는 제기와 제구를 보관한다. 사당 오른쪽에 있는 경각(經閣)에는 어서(御書), 어필(御筆), 내사본(內賜本), 퇴계수필(退溪手筆), 각종 전적 등을 봉안하고 있다. 사당 왼쪽에 있는 것은 선조 10년(1577)에 세워진 이언적의 신도비각이다. 신도비의 비문은 고봉 기대승이 짓고, 글씨는 아계 이산해가 썼다. 건립 당시에는 이 서원 앞의 계곡에 있었으나 훼손을 막으려고 서원 안으로 옮겼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고직사를 비롯한 부속건물들

동재인 민구재 옆으로는 살림집 형태의 고직사 건물들이 있는데 다른 서원에 비해 그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다. 고직사에는 상당히 많은 방을 두고 있는데, 서원을 방문하는 유력인사들이 잠시 머물 수 있도록 건물을 크게 지은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고직사>

OLYMPUS DIGITAL CAMERA<고직사 본채>

OLYMPUS DIGITAL CAMERA<고직사 행랑채>

OLYMPUS DIGITAL CAMERA<바깥에서 본 고직사>

OLYMPUS DIGITAL CAMERA<민구재와 고직사 사이의 공간>

OLYMPUS DIGITAL CAMERA<고직사에서 서원을 출입하는 작은 쪽문>

OLYMPUS DIGITAL CAMERA<옥산서원 유물전시관>

옥산서원(玉山書院, 사적)
이 서원은 회재 이언적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세웠다. 이언적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그의 성리학은 퇴계 이황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종묘에 명종의 공신으로 모셔져 있다. 그가 타계한 후 1572년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지방유림의 뜻에 따라 서원을 창건하였으며 1574년에는 선조에게서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5년(1868)에 흥선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에도 헐리지 않고 그대로 살아남은 47개의 서원과 사당 중 하나이다. 서원 건축의 역사로 보면 옥산서원은 초기의 건축물에 해당하는데, 당시에 지어진 서원들이 비교적 자유로운 구성을 따랐던 데 비해, 이 서원은 틀에 짠 듯 질서 정연한 형식을 보이고 있다. 까다롭기로 유명했다던 이 서원의 원규(지금의 학칙)만큼 이 건축물에서도 긴장과 절제가 묻어난다. 정문인 역락문을 들어서면 누각인 무변루가 있고, 강당인 구인당의 양쪽으로는 동재와 서재가 있으며, 강당 뒤쪽에 서 있는 것이 회재를 모신 사당인 체인묘이다. 동재의 오른쪽으로 지어진 여러 건물들은 서원의 살림을 맡았던 곳이다. 이곳 고직사(庫直舍)는 다른 서원에 비해 유난히 규모가 커서 예전의 재산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고직사 뒤에 있는 문집판각(文集板閣)은 목판을 보관하는 곳이다. 옥산서원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며, 그 현판 뒤에는 아계 이산해가 쓴 또 다른 현판도 걸려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청양 장곡사 하 대웅전(보물)

충남 청양군 칠갑산 장곡사 하 대웅전(보물)이다. 칠갑산 중턱에 자리잡은 장곡사는 경사진 지형에 위,아래에 2개의 대웅전을 배치하고 있다. 상 대웅전보다 늦은 조선 중기에 지어졌으며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려말 충목왕 때(1346년) 조성된 금동약사여래좌상(보물)를 모시고 있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화려한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다.

청양 장곡사 하 대웅전 보물 181호 01-20210414<청양 장곡사 하 대웅전 (보물)>

청양 장곡사 하 대웅전 보물 181호 03-20210414<대웅전 현판과 공포>

청양 장곡사 하 대웅전 보물 181호 02-20210414<지붕을 받치는 다포계 공포와 화려한 단청>

청양 장곡사 하 대웅전 보물 181호 04-20210414<하 대웅전 내부에 모셔진 금동약사여래좌상(보물)>

청양 장곡사 하 대웅전 보물 181호 08-20210414<정면에서 본 모습>

청양 장곡사 하 대웅전 보물 181호 05-20210414<옆쪽에서 본 모습>

청양 장곡사 하 대웅전 보물 181호 06-20210414<아래쪽에서 본 모습>

청양 장곡사 하 대웅전 보물 181호 07-20210414<장곡사 하 대웅전 영역>

청양 장곡사 하 대웅전 (靑陽 長谷寺 下 大雄殿)
장곡사 850년(신라 문성왕 12년)에 보조선사(普照禪師)가 처음 건립하였다고 전하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변천이 있어 지금은 대웅전(大雄殿)이 상 • 하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다. 하 대웅전(下 大雄殿)은 조선 중기에 건립되었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대체로 소규모의 맞배식 건물에는 주심포(柱心包) 양식을 따르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건물은 특이하게 다포식(式)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包)가 배치되어 있는데, 특히 중앙 칸은 간격이 넓어서 공포가 두 개 배치되어 있다. 자연석의 기단(基) 위에 다듬지 않은 주춧돌을 놓고, 기둥은 민흘림에 가까운 배흘림의 등근 기둥을 세웠다. 대응전에는 석가여래(釋迦如來)를 주존으로 모시는 것이 보통이나, 이 건물 내에는 금동약사여래좌상(金銅藥師如來坐像)을 모시고 있다. (안내문, 청양 장곡사, 2021년)

<출처>

  1. 안내문, 청양 장곡사, 202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몽산화상법어약록(보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몽산화상법어약록 언해(蒙山和尙法語略綠 諺解, 보물)이다. 원나라 승려 몽산화상 설교집을 한글로 풀이한 책이다. 조선초 승려 신미(信眉)가 토를 달고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조선초 세조 때(1467년) 때 국가기관인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것으로 초기 한글의 변화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현재 남아 있는 5종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성문영어>의 저자 송성문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유물이다.

보물 767호 02-20200212<몽산화상법어약록, 몽산스님의 설교을 한글로 풀이한 책, 조선 1472년 판, 몽산화상법어약록>

원나라 승려 몽산화상 덕이(德異)의 설교를 추려서 한글로 구결을 단 후 번역·간행한 불경언해서이다. 선(禪) 수행의 길잡이 구실을 한 지침서로, 몽산화상의 법어 6편과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懶翁)의 법어 1편 등 모두 7편이 실려 있다. 본문에 한글 소자(小字)로 구결을 단 후 행을 달리하여 빈 칸을 두고 한자와 한글 중자(中字)로 언해하였다. 사용된 표기법이 『월인석보(月印釋譜』 등 훈민정음 창제 초기의 문헌과 가까워 우리말의 음운 변천사를 연구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0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대방광불화엄경소 권30(보물), 송나라에서 받은 목판으로 찍은 경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대방광불화엄경소 권30(보물)>이다. 대광불화엄경은 보통 화엄경이라 부르며 화엄종의 근본경전이다. 당나라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주본 80권에 대하여 송나라 정원(淨源)이 해설을 단 것으로, 전체 120권 중 권30이다. 고려 선종 때(1087년) 송나라에서 보내온 목판으로 조선시대에 찍은 것이다. 목판은 조선초 세종 때(1423년) 대장경을 요청했던 일본에 보내졌다. 옛 학습참고서 <성문영어>의 저자 송성문씨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문화재 중 하나이다.

송성문기증 고려불경 06-20200212<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 권제30, 화엄경을 풀이한 글, 보물, 14세기>

보물1124호 02-20200212<뒷부분>

당나라의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에 대한 징관(澄觀)의 해석과 부연 설명을 송나라의 정원(淨源)이 각 본문 아래 기록하여 엮은 책이다. 그 목판은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송나라에 갔을 때 각별한 교분을 맺은 정원이 의천에게 전달한 것이다. 한편 조선 세종 6년(1424)에 팔만대장경판(고려대장경판)을 끈질기게 요구하던 일본에 이 책을 찍은 목판을 보냈다는 점에서, 송→고려→조선→일본으로 이어진 동아시아 문화 교류의 연구에 가치 있는 자료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0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0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경상도 청송도호부 관아, 객사 운봉관(雲鳳館)과 누각

청송도호부(靑松都護府)는 경북 청송군 일대를 관할했던 지방행정조직으로 현재의 청송읍, 주왕산면, 부남면 등을 관할하였다. 경북 내륙 산악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고을의 규모가 크지 않은 고려 때 까지 청부현(靑鳧縣)이 있었는데 세종 때 왕비 소왕후의 관향이라 하여 인근 진보현(眞寶縣)과 통합하여 청보군(靑寶郡)이 설치되었다. 이후 지리적인 이유로 진보현이 분리되고 인근 송생현(松生縣)을 합쳐 청송군이라 했다. 이후 세조는 어머니의 관향인 청송군을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종3품 도호부사(都護府使)가 고을 수령이었으며, 규모에 비해 위상이 높았던 고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청송심씨 시조 심홍부의 무덤이 읍치에서 2 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청송도호부 01-20201204<청송도호부 관아가 있는 소현공원>

청송도호부 10-20201204<역대 청송도호부사 공덕비>

청송도호부 읍치(邑治)였던 청송읍 일대는 고을의 중심지이기는 하나 주변에 농경지와 인구가 많지 않으며 진보면소재지와는 약 15 km 정도 떨어져 있다. 산악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읍성(邑城)이나 산성(山城)이 없으며 군사조직인 진보(鎭堡)도 없었다. 관아 건물로는 객사(客舍)인 운봉관(雲鳳館), 동헌(東軒), 향사당(鄕射堂), 누각인 찬경루(讚慶樓, 보물 2049호) 등이 있었는데 지금은 운봉관과 찬경루만이 남아 있다.

청송도호부 06-20201204<청송도호부 객사인 운봉관>

운봉관(雲鳳館)은 청송도호부 관아 객사 건물이다. 건물은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신 정당(正堂)과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된 좌·우익사를 두고 있다. 정당은 앞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동.서익사는 각각 앞면 5칸으로 넓은 마루와 온돌방을 두고 있다. 일제강점기 정당과 서익사는 철거되고 동익사만 남았으나 최근에 고증을 통해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청송도호부 04-20201204<국왕의 전패를 모신 정당>

청송도호부 12-20201204<일제강점기 이후 철거되지 않고 남아 있던 동익사>

청송도호부 11-20201204<복원된 서익사>

청송도호부 07-20201204<서익사 마루>

청송도호부 08-20201204<온돌방>

청송도호부 09-20201204<동쪽에서 본 운봉관>

운봉관(雲鳳館)
운봉관은 세종 10년(1428)에 청송 군수였던 하담이 찬경루와 함께 건축한 것인데 객사로 사용하였다. 선조(宣祖) 때 한차례 손보고 고쳤으며, 숙종 43년(1717)에 부사 성환(成)이, 순조 12년(1812)에는 부사 강휘옥(革)이, 고종 8년(1871)에 부사 윤현기(尹顯岐) 가 각각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객사는 고을에서 가장 권위가 있던 건물이며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나 외국의 사신들이 머무는 공공 숙박의 기능을 한다. 그리고 객사의 중당(中堂)에는 임금의 전패를 모셔놓고 출장 중인 관원과 고을의 부사가 임금께 예를 올렸다. 특히, 이곳 운봉관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이 내린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날 무렵인 1896년 3월 12일에 청송의 유생들이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일으킨 역사적인 장소이다. 이후 운봉관은 일제강점기인 1918년 무렵에 중당(堂)과 서익사가 강제로 철거 되었고, 동익사에 ‘운봉관’ 이란 현판을 달아서 보존하여 왔다. 현재의 운봉관의 모습은 철거지에 대한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2008년에 중당과 서익사를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다. (안내문, 청송군청, 2020년)

찬경루(讚慶樓, 보물 2049호)눈 세종 때(1428년) 군수 하담이 객사와 함께 관아에 속한 누각으로 처음 세웠다. 관아에서 사신접대나 연회 등을 위해 세운 큰 규모의 누각 건물이다. 청송은 작은 고을이었지만 권문세가였던 청송심씨 관향이었던 까닭에 많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큰 규모의 건물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건물은 1972년 중건한 것이다.

청송도호부 15-20201204<찬경루>

청송도호부 05-20201204<객사에서 본 찬경루>

청송도호부 03-20201204<찬경루 옆 작은 부속건물>

<출처>

  1. 안내문, 청송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