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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해미읍성(사적), 충청병영이 있었던 읍성

충남 서신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해미읍성(海美邑城, 사적)이다.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해안지역을 침입하는 왜구에 대응하기 위해 쌓은 읍성 중 하나이다. 조선 태종 때(1471년)에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옮기기 위해 성을 쌓기 시작하여 세종 때 (1421년)에 완공하였다. 조선후기 효종 때(1652년) 병영이 청주로 옮겨가지 전까지 충청지역 군사 거점이었다. 이후에도 무관인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어 인근지역 군사업무를 총괄했다. 1970년대 이후 관아 건물을 복원하는 등 유적지를 재정비하여 조선시대 읍성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벽과 성문 등 주요 시설들이 잘 남아 있어 순천 낙안읍성과 함께 조선시대 읍성을 대표하는 유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1<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년>

SANYO DIGITAL CAMERA<서산 해미읍성(사적), 2009년>

해미읍성은 북동쪽의 낮은 구릉을 중심으로 넓은 평지에 성벽을 쌓았다. 성의 둘레는 1,500m 정도이며 동,서,남,북 4곳에 성문을 두고 있다. 읍성은 서산 천수만 바다에서 약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고 있다. 남쪽으로 해미천, 동쪽으로는 황락천, 서쪽으로는 반양천이 흐르고 있으며 동북쪽을 통해 가야산(해발 678m) 주변 산맥과 연결된다.

서산 해미읍성(사적)<해미읍성 주변 위성사진, 2023년>

 성벽의 높이는 4.9m이며 상부의 폭은 약 2.1m정도이다. 성벽 아래쪽에는 큰 돌을 다듬어 사용하고 위쪽는 작은 돌을 사용했으며, 성벽 안쪽에는 흙으로 쌓았다.  성벽 바깥에는 해자를 팠으며 주위에 탱자를 돌려 심어 방어를 보완하였다. 성벽 위에 조총을 방어하기 위한 여장은 설치되어 있지 않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6<해미읍성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6<아래쪽 큰 돌로 쌓은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8<안쪽 흙으로 쌓은 성벽>

SANYO DIGITAL CAMERA<성벽 위>

해미읍성<성벽 바깥 해자>

해미읍성의 정문인 진남문(鎭南門)은 천수만 바다가 있는 서남쪽을 향하고 있다. 조선초에 쌓은 읍성의 성문으로 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옹성은 없다. 출입문은 돌로 쌓은 홍예가 있으며 그 위에 문루를 두고 있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2<진남문>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7<안쪽에서 본 모습>

진남문은 마차 1대정도가 지나갈 정도이다. 읍성 성문의 평균적인 도로폭으로 보인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5<홍예>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4<성문 앞에 세워진 공덕비>

SANYO DIGITAL CAMERA<진남문, 2009년>

성문 안쪽에는  1491년(홍치 4년)에 축성되었다는 내용이 돌에 새겨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축성연대를 기록해 놓은 글씨>

해미읍성은 조선초에 쌓은 읍성으로 성벽 위에 조총 공격에 대비한 방어시설인 여장을 두고 있지 않다. 천수만 바다를 향하고 있는 서남쪽에 2곳에 치성을 두고 있다. 규모는 약간 큰 편으로 포대를 설치할 수 있는 규모이나 이를 위한 방어시설은 없고 누각만 올려져 있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3<진남문 서쪽 1번째 치성>

SANYO DIGITAL CAMERA<2번째 치성>

SANYO DIGITAL CAMERA<진남문 문루 옆 성벽과 1번째 치성>

SANYO DIGITAL CAMERA<1번째 치성에서 보이는 진남문과 성벽>

SANYO DIGITAL CAMERA<1번째 치성에서 보이는 성벽과 2번째 치성>

SANYO DIGITAL CAMERA<1번째 치성과 주변 성벽>

SANYO DIGITAL CAMERA<흙으로 쌓은 안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서문 옆 성벽에서 보이는 관아와 청허정이 있는 동산>

SANYO DIGITAL CAMERA<서남쪽 성벽 안쪽>

SANYO DIGITAL CAMERA<서문 문루>

서문은 1974년 읍성을 정비할 때 복원되었다. 서문에는 지성루(枳城樓)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데 바깥쪽에 탱자나무를 심었던 사실에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성문에 옹성이나 치성 등 별도의 방어시설은 두고 있지 않다.

SANYO DIGITAL CAMERA<읍성 서문>

SANYO DIGITAL CAMERA<서문 남쪽 성벽>

SANYO DIGITAL CAMERA<서문 북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4<서문과 주변 성벽(안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0<안쪽에서 본 서문>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1<서문 남쪽 성벽(안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9<서문 남쪽 성벽(안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2<서문 북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3<북서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8<북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0<북동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2<동문>

SANYO DIGITAL CAMERA<동문 문루>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3<동문 북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5<동문 남쪽 성벽>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34<동문 남쪽 성벽>

읍성 내부에는 해미읍성이 폐지된 후 관아와 많은 민가들이 모여 있다. 객사는 초등학교로, 동헌은 면사무소로 사용하였다. 1970년대 읍성 복원공사를 하면서 민가들은 읍성 바깥으로 이주하고 지금은 객사, 동헌, 내아 등 관아 건물과 민가 몇채가 복원되어 관광지 역할을 하고 있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09<진남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읍성 내부>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6<읍성 내부>

해미현 관아 건물로는 읍성내에 동헌, 내아, 객사 등이 있다. 원래 있던 건물들은 아니고 해미읍성을 유적지로 정비할 때 고증을 통해 복원하였다. 충청병영이 있었다고 하나 건물들은 종6품 현감이 수령인 고을의 위상에 걸맞게 아담한 규모이다.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0<해미현 관아>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1<동헌>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2<객사>

해미현 관아 뒷편 동산에는 정자 건물이 청허정이 있다. 높지는 않지만 멀리 천수만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고 군사작전을 지휘하는 장대(將臺) 역할을 했던 공간이다.

SANYO DIGITAL CAMERA<관아 뒷편 동산>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24<동문에서 본 모>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5<동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읍치>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7<청허정>

서산 해미읍성(사적) 20230127_16<청허정에서 멀리 보이는 천수만 바다>

SANYO DIGITAL CAMERA<성벽에서 보이는 민가>

SANYO DIGITAL CAMERA<민가>

서산 해미읍성
해미읍성(海美邑城)은 조선 시대 충청도의 전군(全軍)을 지휘하던 병마절도사영성(兵馬節度使營城)이다. 이 성은 고려 말부터 침입이 잦았던 왜구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하여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해미로 옮기면서 1417년(태종17)부터 쌓기 시작해 1421년(세종3)에 완공되었다. 주 출입구인 진남문(鎭南門)은 잘 다듬어진 돌로 만든 반원형의 홍예문이다. 성 밖은 해자를 둘렀는데 발굴조사를 통해 북쪽 해자의 일부를 복원했다. 기록에는 성벽 위에 여장(女墻)이 있었다고 되어 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성곽 둘레는 1500m이며 높이는 5m로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 주변에 탱자나무를 심었다. 흔히 ‘탱자 성’이라는 뜻으로 ‘지성(枳城)’이라고 한다. 이곳은1652년(효종3)까지 230여 년간 병마절도사영의 기능을 하였지만,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간 후 해미 현감이 겸영장(兼營將)이 되면서 해미읍성이 되었다. 충청도 5군영 중 하나인 호서좌영(湖西左營)으로 1895년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까지 243년간 내포 지방 12개 군현의 군권을 지휘하였다. 영장(營將)은 도적이나 반란 세력을 토벌하는 토포사(討捕使)의 임무도 맡았으므로, 이곳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시기에 내포 지역의 신자들이 끌려와 죽임을 당하는 순교의 현장이기도 하다. 해미읍성에는 병마절도사와 겸영장이 집무하던 동헌을 비롯해 관아와 객사 등이 꽉 들어차 있어 장관이었다고 한다. 1579년(선조12)에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한 적도 있고,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해미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1910년 읍성 철거령에 따라 시설물들은 모두 철거되었고, 성안으로 민가가 들어서면서 옛 모습이 거의 사라졌다. 그러다가 1973년부터 정비에 들어갔고, 1997년부터는 발굴이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출처>

  1.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3년
  3. 위키백과, 2023년

 

충청도 해미현 관아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해미읍성(사적)에 잏는 해미현(海美縣) 관아이다. 해미현은 1407년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을 합쳐서 설치하였다. 이 지역은 충남 서해안 연안 해로를 지키고 관리하기 위한 중요한 요충지이다.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던 조선초에는 충청병영과 충청수영이 모두 이곳에 있었다. 이후 충청병영은 청주로, 충청수영은 보령으로 이전하였다. 해미현 수령은 총6품 현감으로 무관을 임명하여 영장토포사(營將討捕使)를 겸하게 하여 주변 고을의 군사적인 업무를 총괄하였다.

서산 해미현 관아 20230127_11<서산 해미현 관아, 2023년>

해미현 관아 건물로는 읍성내에 동헌, 내아, 객사 등이 있다. 원래 있던 건물들은 아니고 해미읍성을 유적지로 정비할 때 고증을 통해 복원하였다. 충청병영이 있었다고 하나 건물들은 종6품 현감이 수령인 고을의 위상에 걸맞게 아담한 규모이다.

서산 해미읍성(사적)<해미읍성과 해미현 관아>

SANYO DIGITAL CAMERA<해미현 관아, 2009년>

SANYO DIGITAL CAMERA<서문 근처에 본 모습>

조선시대 객사는 관아의 중심건물이다. 특히, 병영이나 수영의 객사는 군사작전 등을 위해 건물규모가 상당히 큰 편인데 비해 해미현 객사는 규모가 작은 편이다. 정청과 좌.우익랑의 구분없이 앞면 7칸 규모의 단일 건물이다. 가운데 3칸은 정청이고 좌, 우에 2칸씩 익랑을 두고 있다.

서산 해미현 관아 20230127_23<해미현 객사>

서산 해미현 관아 20230127_21<옆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남문 문루에서 보이는 객사>

서산 해미현 관아 20230127_22<객사에서 보이는 읍치>

해미읍성 객사
객사는 건물의 중앙 정청에 궐(闕)자가 새겨진 위패를 모시고 삭망(매월 초하루, 보름)에 관아의 대소 관원들이 국왕에 대한 예를 올렸으며, 양편 익식은 조정이나 상부에서 파견된 관원 및 귀빈들의 숙소로도 사용했던 곳이다. 해미읍성 객사는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1999년 7월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동헌 출입문으로 2층 문루를 두고 있다.  문루에는 ‘충청좌영’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SANYO DIGITAL CAMERA<동헌 문루>

동헌은 해미현감겸영장의 집무실로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지던 건물이다. 해미현감겸영장은 인근 12개 군, 현의 병무행정과 토포사를 겸한 지위였다. 동헌 건물은 앞면 5칸으로 약간 큰 편이다.

서산 해미현 관아 20230127_12<동헌 마당>

서산 해미현 관아 20230127_17<동헌>

동헌 뒷편에 있는 건물은 책방 또는 책사라 불렀다고 한다. 현감겸영장의 사적인 일을 돕거나 그들 자제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하던 곳이다.

서산 해미현 관아 20230127_15<동헌 뒷편 책방>

동헌 서쪽에는 하급관리들이 근무하던 부속건물이 있다. ‘ㄱ’자형 건물로 사무실 용도의 방과 창고로 구성되어 있다.

서산 해미현 관아 20230127_16<동헌 부속 건물>

동헌은 병마절도사를 비롯한 현감경영장(縣監兼營將)의 집무실로 관할지역의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지던 건물이다. 해미 현감겸영장은 인근 12개군, 현의 병무행정과 토포사(討捕使)를 겸한 지위였다.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동헌 옆에는 해미현감 가족들이 생활하던 관사 건물인 내아가 있다. 앞면 5칸의 일자형 주택 건물로 부엌과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의 규모는 크지 않다.

서산 해미현 관아 20230127_18<내아 마당>

서산 해미현 관아 20230127_20<내아>

서산 해미현 관아 20230127_19<내아 앞 부속 건물>

해미읍성 내아
관리와 가족들이 생활하던 관사 건물로 동헌이 고을의 공무를 수행하는 곳인데 반해, 내아는 살림집이다. 해미읍성 내아는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2000년 11월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해미현 관아 뒷편 동산에는 정자 건물이 청허정이 있다. 높지는 않지만 멀리 천수만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고 군사작전을 지휘하는 장대(將臺) 역할을 했던 공간이다.

SANYO DIGITAL CAMERA<관아 뒷편 동산>

서산 해미현 관아 20230127_24<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해미읍성>

서산 해미현 관아 20230127_26<청허정>

서산 해미현 관아 20230127_25<정자에서 멀리 내려다 보이는 서해바다>

청허정
정자는 일반 가옥과 달리 자연을 배경으로 특별히 지은 건물이다. 청허정은 조선 성종 22년(1491) 충청도병마절도사 조숙기가 세웠던 것을 다신 복원한 것으로 조선전기 대표학자 성현의 개인문집 <허백당짐>에 그 유래가 정한다. 정자의 이름인 ‘청허淸虛’는 잡된 생각이 없이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이곳에 오는 이들에게 한결같은 마음가짐을 당부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조선초기의 해미읍성은 충청도 육군사령부 역할을 하는 충청병영성으로 최고 책임자는 병마절도사였다. 조숙기가 병사로 부임하여 해미읍성을 수리하면서 숲이 우거진 뒷동산에 청허정을 지었다. 이후 이곳에 온 관리들은 청허정에서 무예를 익히거나 휴식을 취하는 등, 시를 짓고 글을 남겼다. 1494년 방문한 충감사 조위는 청허정 주변 소나무와 멀리 보이는 바다의 풍경에 대한 시를 남겼고, 권오복의 문집 <수헌집>에 절도사와 수령이 일을 마치고 청허정에 모여 지은 시가 전한다. 1579년 충청병영에서 근무했던 이순신, 1790년 해미로 귀양 왔던 다산 정약용도 이 청허정에 머물렀을 것이다. 1872년 <해미현지도>에는 예터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1800년대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자리에 일본식 신사가 세워졌다가 광복 후 철거되었고, 1976년 복원한 후 2011년 다시 정비하였다.(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해미읍성은 구한말 천주교 박해와 관련이 있는 곳이다.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 옥사에서 투옥되어 문초를 받았다고 하며 옥사 앞 회화나무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해미읍성 옥사>

SANYO DIGITAL CAMERA<해미읍성 옥사>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의 천주교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곳 이다. 교도들을 투옥하고 문초하였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터만 남아 있던 옥사를 발굴 작업 뒤 복원, 재현하였다. 1935년에 간행된 <해미 순교자 약사>의 기록을 토대로 복원하였으며 내옥과 외혹이 있고, 각각 정면 3칸의 건물로 남녀의 옥사가 구분되어 있다. 1790년부터 100여 년간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규정하여 이곳에서 투옥 및 처형을 하였는데,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안내문, 서산시청, 2023년)

해미읍성 회화나무는 수령 300년 이상의 고목으로 이곳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매달아 고문했던 곳 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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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 회화나무>

 <출처>

  1. 안내문, 서산시청, 2009년, 2023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3. 실록위키,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동의보감(국보)

동의보감(東醫寶鑑, 국보)허준이 선조의 명을 받들어 편찬한 의서이다. 그 이전까지 편찬된 중국과 우리나라의 의서들을 참고하여 구체적인 질병의 증상과 치료법을 기록한 한의학의 백과전서이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청나라와 일본에서도 크게 인기를 얻었다. 16세기 동아시아 의학을 집대성해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와 치료 기술을 자세하게 다뤄 의료의 대중화에 이바지하였다. 의학 서적으로는 최초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조선 광해군 때(1613년) 목활자로 내의원에서 간행하였는데, 모두 25권 25책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동의보감(국보)>는 완질을 갖추고 있으며, 한국학연구원 소장본 <동의보감(국보)>도 동일본으로 완질을 갖추고 있다. 2본의 동의보감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동의보감(국보)>은 태백산사고본 24권24책, 동일판본이나 17권17책이 남아 있다. 두종류를 합해 완질을 구성하고 있으며 국가에서 소장해온 초간본이라는데 큰 의미가 있다.

중악박물관 등에서 다양한 시기에 발간된 <동의보감>을 소장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허준이 지은 의학서적(東醫寶鑑, 허준, 조선후기), 허준이 그린 <신형장부도(身形臟腑圖):몸과 형체, 장기 그림, 중앙박물관 소장>

허준 등이 선조의 명을 받아 편찬한 의학 서적으로, 그 이전까지 편찬된 중국과 우리나라의 의서들을 참고하여 구체적인 질병의 증상과 치료법을 기록한 한의학의 백과전서이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청나라와 일본에서도 크게 인기를 얻었다. 허준은 『동의보감』의 맨 앞에 이 그림을 실어 의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허준은 하늘을 상징하는 머리와 땅을 나타내는 몸, 이 둘을 인체의 척추가 연결하며 하늘과 땅의 선천적 기운에 인체의 후천적 기운을 소통시키고 있다고 하였다. 다음은 이 그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쓴 글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사람은 우주에서 가장 귀한 존재이다. 머리가 둥근 것은 하늘을 본뜬 것이고, 발이 네모진 것은 땅을 본받은 것이다. 하늘에 사시(四時)가 있으니 사람에게는 사지(四肢)가 있다. 하늘에 오행(五行)이 있으니 사람에게는 오장(五臟)이 있다. 하늘에 육극(六極)이 있으니 사람에게는 육부(六腑)가 있다. 하늘에 팔풍(八風)이 있으니 사람에게는 팔절(八節)이 있다. 하늘에 구성(九星)이 있으니 사람에게는 구규(九竅)가 있다. 하늘에 12시가 있으니 사람에게는 12정맥이 있다. 하늘에 24기가 있으니 사람에게는 24유(兪)가 있다. 하늘에 365도(度)가 있으니 사람에게는 365골절이 있다. 하늘에 일월(日月)이 있으니 사람에게는 안목(眼目)이 있다. 하늘에 밤낮이 있으니 사람에게는 오매(寤寐)가 있다. 하늘에 뇌전(雷電)이 있으니 사람에게는 희로(喜怒)가 있고, 하늘에 우로(雨露)가 있으니 사람에게는 눈물이 있다. 하늘에 음양이 있으니 사람에게는 한열(寒熱)이 이씨고, 땅에 천수(泉水)가 있으니 사람에게는 혈맥이 있으며 땅에 초목과 금석이 있으니 사람에게는 모발과 치아가 있다. 이러한 것은 모두 사대(四大)와 오상(五常)이 묘하고 아름답게 조화되어 성립된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OLYMPUS DIGITAL CAMERA<동의보감, 허준, 조선, 중앙박물관특별전>

허준이 1610년(광해군2)에 완성한 것을 1613년에 총 25권 25책으로 간행한 의학서이다. 당시까지 나온 우리나라와 중국의 주요 의학서들을 거의 망라하여 인용하면서 고금의 처방을 일목요연하게 살필 수 있도록 하였다. 책의 서두에서 허준은 병이 난 뒤에 치료하는 것보다 평소 맑고 고요한 수양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내단 수련 위주의 도교적 양생 관념과 실제 수련의 전통이 꾸준히 축적되어 온 것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3년)

OLYMPUS DIGITAL CAMERA<동의보감, 조선, 고궁박물관 소장>

OLYMPUS DIGITAL CAMERA<표지>

동의보감,
의학서적으로는 최초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동의보감은 16세기 동아시 의학을 집대성해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누구나 쉽게 구하거나 접근할 수 있는 약재와 치료 기술을 자세히 다뤄 의료 대중화에도 크게 이바지 하였다. 백성을 위하여 국가가 직접 의료를 제공한다는 시대를 앞선 의미도 지닌 동의보감은 이번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2질이 각각 국립중앙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14년)

SANYO DIGITAL CAMERA<동의보감, 허준, 고궁박물관 소장>

허준이 선조의 명을 받들어 편찬한 의서이다. 의학 서적으로는 최초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동의보감은 16세기 동아시아 <의학을 집대성해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와 치료 기술을 자세하게 다뤄 의료의 대중화에 이바지하였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10년)

<출처>

  1. 안내문, 고궁박물관, 2010년, 2014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3년, 2015년
  3.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백자 달항아리(국보), 2007-2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백자 달항아리’(국보)이다. 조선후기 왕실의 도자기를 공급하던 관요인 사옹원 분원 백자제작소에서 만든 것이다. 높이 43.9 cm, 몸통지름 44cm 대형 백자 항아리로 유약과 태토의 상태가 우수하고, 입지름과 바닥지름이 비례가 안정감을 주고 있다. 약간 비틀어지고 변형된 상태이지만 전체적인 조형미에 생동감을 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백사발항아리(백자대호, 국보)>

SANYO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출처>

  1. 안내문, 고궁박물관,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국보), 한글로 번역된 가장 오래된 필사본

강원도 평창군 월정사 성보박물관 소장하고 있는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국보)이다. 세조 때 왕사인 신미 등이 국왕의 만수무강을 빌고자 상원사를 중창하면서 지은 글이다. 세조가 이를 전해 듣고 쌀, 무명, 베, 철 등을 보내면서 쓴 글과 함께 월정사에서 보관해 왔다. 한문 원문과 한글 번역으로 되어 있는데, 신미 등이 쓴 글에는 수결이 있고, 세조가 보낸 글에는 수결과 도장이 찍혀 있다. 한글로 번역된 가장 오래된 필사본이다. 세조는 반정에 의해 왕위에 올랐지만 월인석보상절을 비롯하여 한글 사용에 큰 역할을 했다.

OLYMPUS DIGITAL CAMERA<오대산 상원사를 다시 세우며 쓴글, 국보, 복제품, 조선 1464년>

OLYMPUS DIGITAL CAMERA<도장이 찍힌 부분>

세조10년(1464) 세조의 총애를 받던 신미스님 등이 상원사를 새롭게 단장하면서 임금의 만수무강을 빌고자 지은 글이다. 한글로 번역된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필사본이다. 신미스님이 부처님께 기도한 일을 전해들은 세조가 쌀, 무명, 베 등을 보내면서 쓴 글도 신미스님의 기원문과 함께 실려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0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채정,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