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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청송도호부 관아, 객사 운봉관(雲鳳館)과 누각

청송도호부(靑松都護府)는 경북 청송군 일대를 관할했던 지방행정조직으로 현재의 청송읍, 주왕산면, 부남면 등을 관할하였다. 경북 내륙 산악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고을의 규모가 크지 않은 고려 때 까지 청부현(靑鳧縣)이 있었는데 세종 때 왕비 소왕후의 관향이라 하여 인근 진보현(眞寶縣)과 통합하여 청보군(靑寶郡)이 설치되었다. 이후 지리적인 이유로 진보현이 분리되고 인근 송생현(松生縣)을 합쳐 청송군이라 했다. 이후 세조는 어머니의 관향인 청송군을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종3품 도호부사(都護府使)가 고을 수령이었으며, 규모에 비해 위상이 높았던 고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청송심씨 시조 심홍부의 무덤이 읍치에서 2 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청송도호부 01-20201204<청송도호부 관아가 있는 소현공원>

청송도호부 10-20201204<역대 청송도호부사 공덕비>

청송도호부 읍치(邑治)였던 청송읍 일대는 고을의 중심지이기는 하나 주변에 농경지와 인구가 많지 않으며 진보면소재지와는 약 15 km 정도 떨어져 있다. 산악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읍성(邑城)이나 산성(山城)이 없으며 군사조직인 진보(鎭堡)도 없었다. 관아 건물로는 객사(客舍)인 운봉관(雲鳳館), 동헌(東軒), 향사당(鄕射堂), 누각인 찬경루(讚慶樓, 보물 2049호) 등이 있었는데 지금은 운봉관과 찬경루만이 남아 있다.

청송도호부 06-20201204<청송도호부 객사인 운봉관>

운봉관(雲鳳館)은 청송도호부 관아 객사 건물이다. 건물은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신 정당(正堂)과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된 좌·우익사를 두고 있다. 정당은 앞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동.서익사는 각각 앞면 5칸으로 넓은 마루와 온돌방을 두고 있다. 일제강점기 정당과 서익사는 철거되고 동익사만 남았으나 최근에 고증을 통해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청송도호부 04-20201204<국왕의 전패를 모신 정당>

청송도호부 12-20201204<일제강점기 이후 철거되지 않고 남아 있던 동익사>

청송도호부 11-20201204<복원된 서익사>

청송도호부 07-20201204<서익사 마루>

청송도호부 08-20201204<온돌방>

청송도호부 09-20201204<동쪽에서 본 운봉관>

운봉관(雲鳳館)
운봉관은 세종 10년(1428)에 청송 군수였던 하담이 찬경루와 함께 건축한 것인데 객사로 사용하였다. 선조(宣祖) 때 한차례 손보고 고쳤으며, 숙종 43년(1717)에 부사 성환(成)이, 순조 12년(1812)에는 부사 강휘옥(革)이, 고종 8년(1871)에 부사 윤현기(尹顯岐) 가 각각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객사는 고을에서 가장 권위가 있던 건물이며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나 외국의 사신들이 머무는 공공 숙박의 기능을 한다. 그리고 객사의 중당(中堂)에는 임금의 전패를 모셔놓고 출장 중인 관원과 고을의 부사가 임금께 예를 올렸다. 특히, 이곳 운봉관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이 내린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날 무렵인 1896년 3월 12일에 청송의 유생들이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일으킨 역사적인 장소이다. 이후 운봉관은 일제강점기인 1918년 무렵에 중당(堂)과 서익사가 강제로 철거 되었고, 동익사에 ‘운봉관’ 이란 현판을 달아서 보존하여 왔다. 현재의 운봉관의 모습은 철거지에 대한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2008년에 중당과 서익사를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다. (안내문, 청송군청, 2020년)

찬경루(讚慶樓, 보물 2049호)눈 세종 때(1428년) 군수 하담이 객사와 함께 관아에 속한 누각으로 처음 세웠다. 관아에서 사신접대나 연회 등을 위해 세운 큰 규모의 누각 건물이다. 청송은 작은 고을이었지만 권문세가였던 청송심씨 관향이었던 까닭에 많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큰 규모의 건물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건물은 1972년 중건한 것이다.

청송도호부 15-20201204<찬경루>

청송도호부 05-20201204<객사에서 본 찬경루>

청송도호부 03-20201204<찬경루 옆 작은 부속건물>

<출처>

  1. 안내문, 청송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청송 찬경루(讚慶樓, 보물 2049호), 관아에 운영했던 누각

경북 청송군 청송읍에 있는 찬경루(讚慶樓, 보물 2049호)이다. 조선초 세종 때(1428년) 군수 하담이 객사와 함께 관아에 속한 누각으로 처음 세웠다. 청송군이 세종의 비 소현왕후의 관향임을 들어 당시 관찰사가 찬경루(讚慶樓)라 이름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1972년 중건한 것이다. 관아에서 사신접대나 연회 등을 위해 세운 큰 규모의 누각 건물이다. 청송은 작은 고을이었지만 권문세가였던 청송심씨 관향이었던 까닭에 많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큰 규모의 건물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청송 찬경루 보물2049호 01-20201204<청송 찬경루(보물 2049호)>

건물을 앞면 4칸, 옆면 4칸의 2층 누각으로 강변 경치가 좋은 암반 위에 세워져 있다. 경치좋은 용전천 주변 풍경과 멀리 청송심씨 시조 심홍부의 무덤이 보이는 방향으로 넓은 대청마루가 있으며 뒷편에 온돌방이 배치되어 있다.

청송 찬경루 보물2049호 02-20201204<정면에서 본 모습. 겹처마에 화려한 단청을 >

청송 찬경루 보물2049호 11-20201204<찬경루 현판>

청송 찬경루 보물2049호 12-20201204<자연 암반 위에 올려놓은 건물 기둥>

건물 내부 뒷편에는 2칸 정도의 온돌방을 두고 있다. 온돌방 앞에는 국왕이 앉을 수 있도록 마루바닥을 주변보다 한단 높게 만들어 놓고 있다. 일반적인 관아 누각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찬경루만의 특징이다.

청송 찬경루 보물2049호 06-20201204<찬경루 내부>

건물 내부에는 안평대군이 쓴 송백강릉(松栢岡陵) 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었으나 화재로 불타서 없어지고 정조 때 (1792) 한철유가 쓴 액자가 걸려 있다. 유명인사였던 서거정, 김종직, 송시열, 홍성민 등이 시문을 남겼다.

청송 찬경루 보물2049호 05-20201204 < ’송백강릉(松栢岡陵)’이라 적힌 현판>

청송 찬경루 보물2049호 08-20201204<뒷편에서 본 모습>

청송 찬경루 보물2049호 10-20201204<동쪽에서 본 모습>

청송 찬경루 보물2049호 07-20201204<서쪽에서 본 모습>

청송 대전사 보광전 보물1570호 21-20201205<주왕산 대전사>

찬경루(讚慶樓), 보물 제2049호
찬경루는 세종 10년(1428)에 운봉관과 함께 청송 군수였던 하담이 2층 16칸 으로 세운 누각이다. 조선시대 때 누각은 객사와 이웃하여 있으면서, 사신들을 위한 연회나 지방 유생들을 위한 백일장 장소로 사용되었다. 숙종 14년(1688)에 손보고 고쳤으며, 화재로 인해 불타서 없어진 것을 정조 16년(1792)에 다시 일으켜 세우는 등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2008년에 건물을 다시 고치고 단청(丹靑)도 새로 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홍여방이 찬경루에 대해 쓴 문서에는 “지금까지 왕후와 왕족이 끊이지 않는 복을 누리고 있으니 이 누(樓)에 올라 그 묘(墓)를 바라보면 저절로 우러러 찬미하게 되어 찬경(讚慶樓)이라 이름 지었다.” 라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렇듯 ‘찬경루’ 라는 이름은, 청송 심씨 가문에서 소헌왕후가 탄생하였고 이 누각이 청송 심씨 시조 묘소를 바라보고 있음에 따라, ‘우러러 찬미하다’ 라는 의미를 지닌다. 건물 내 사분합문 위쪽에는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쓴 송백강릉(松栢岡陵) 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었으나 화재로 불타서 없어졌다. 지금은 정조 16년(1792)에 부사 한광근(韓光)의 아들 한철유(裕)가 쓴 송백강릉(松岡陵)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다. 건물 안에 조선시대 때 명성을 떨치던 서거정, 김종직, 송시열, 홍성민 등이 남긴 시문이 보관되어 있다.(안내문, 청송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청송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청도 청도읍성, 청도군 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읍성

경북 청도군 화양읍 일대에 있는 옛 청도군 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청도읍성이다.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고려말 왜구의 피해가 극심할 때 쌓은 읍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읍성은 임진왜란 직전 부산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에 있던 방어시설을 정비할 때 다시 쌓았다. 일제강점기 이후 기초부분만 남고 성벽을 비롯한 대부분의 시설이 허물어졌던 것을 최근에 다시 복원하고 있다.

성은 둘레 1.88 km 정도이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성벽의 높이는 약 1.7 m이며 북쪽이 낮은 경사진 지형을 적절히 활용하였다. 동.서.북쪽에 성문과 문루가 있었으며, 고종 때 남문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방어시설로는 성문과 모서리부분에 치성을 쌓았으며 성문 앞에는 옹성을 두었다. 정사각형 형태를 하고 있는 남원성이나 인근 언양읍성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청도 청도읍성 17-20200106청도군 읍치에 남아 있는 청도읍성. 임진왜란에 대비하여 다시 쌓은 읍성으로 둘레 1.8 km의 사각형을 평면을 하고 있다.

청도 청도읍성 01-20200106청도읍성 동쪽 성벽. 약 340 m 정도 일직선으로 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기초만 남아 있던 것을 옛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동쪽 성벽에는 동문, 동문을 방어하기 위한 치성, 동북쪽 모서리에 있는 치성 등 방어시설을 하고 이다.

청도 청도읍성 05-20200106읍성 동문터. 읍성 내부를 들어오는 주출입문으로 일제강점기 이후 도로를 개설하면서 주위가 훼손되었다.

청도 청도읍성 03-20200106동문 남쪽에 있는 치성. 바깥으로 길게 나와 있어 동문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청도 청도읍성 02-20200106동쪽 성벽 바깥쪽 언덕에 있는 석빙고(보물 323호). 동쪽 바깥은 경사가 있는 언덕으로 되어 있어 적을 방어하기 쉽다. 산성에서 볼 수 있는 지형적 특징이다.

청도 청도읍성 07-20200106동문 안쪽 성벽. 바깥쪽은 큰돌로 석축을 쌓았으며 안쪾은 토성처럼 흙으로 쌓아 쉽게 오르내릴 수 있다. 조선시대 읍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청도 청도읍성 21-20200205복원하기 전 모습. 성벽은 무너지고 기단부 석축만 일부 남아 있다.

청도읍성 동쪽 성벽
청도읍성 동쪽 성벽은 읍성 동쪽에 일직선으로 쌓은 총 길이 약 340 m이다. 성벽 구간은 2005년 지표조사에서 성 터 위에 집 짓고 길을 내면서 헐리고 남은 성벽과 함께 동문루, 폐문루, 치성 3곳이 확인되었다. 문헌에 동문루는 임진왜란 때 북.서문루와 함께 불타 없어진 뒤 숙종 35년(1709)에 봉일루로 새로 지었고 그 후 다시 없어져 정조 22년(1798) 옛 터에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성벽 주위로 땅을 사서 2006년에 동문루 터, 2007년에 동문루 옆 치성, 2016 ~ 2018년에 성벽을 차례로 발굴조사했다. 성벽 조사에서기초와 몸체(체성+내탁)가 확인되었다. 기초는 정리한 터 위에 층마다 크기가 다른 잡석을 흙과 섞어 마주보게 다진 3층이다. 기초 밖에는 잡석과 흙을 섞어 다져 보강했다. 몸체는 기초 위에 약 5 m 너비로 성돌을 마주보게 내.왜벽을 쌓고, 그 사이에 잡석을 채우고 틈새에는 잔돌과 흙을 채워 쌓아 올렸다. 몸체 안쪽에는 흙으로 완만하게 경사를 두어 성벽을 튼튼하게 하고, 성벽으로 오르내리기 쉽도록 내탁했다. 동문루 터는 일제강점기 때 도로를 내면서, 근.현대에는 도로를 넓히면서 훼손되었음이 확인되었다. 폐문루 터는 임진왜란 이후에 성벽을 고쳐 문루를 설치했다가 19세기 쯤에 사용하지 않았음이 확인되었다. 성벽 밖으로 네모반듯하게 돌출시켜 성벽과 함께 쌓은 치성은 동문루 옆과 성벽 남.북쪽 모서리에서 각기 확인되었다. 정비사항은 2008년에 주차장, 관광안내소, 화장실 등 이곳을 찾은 탐방객을 위한 휴게 편의시설을 설치했다. 2009 ~ 2010년에 동문루 좌.우측의 성벽과 치성, 2018년에 동문루 남쪽의 성벽을 남은 성벽 위에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쌓기법대로 쌓았다. 성문 흔적이 확인되지 않은 동문루는 이전 모습으로 재정비했고, 폐문루는 이전 모습으로 덮어 터를 보존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청도 청도읍성 04-20200106동문 북쪽 성벽.

청도 청도읍성 13-20200106북동쪽 모서리에 방어상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새 설치한 치성.

청도 청도읍성 15-20200106치성 아래에서 본 동쪽 성벽

청도 청도읍성 14-20200106청도읍성 남쪽 성벽. 북쪽으로 경사진 지형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으며 그 아래쪽에 해자처럼 연못이 있다.

청도 청도읍성 08-20200106북동쪽 성벽 위. 토성처럼 흙으로 쌓은 성벽길이 있으며 조총공격에 대비해 여장을 설치하였다.

청도 청도읍성 09-20200106북동쪽 모서리에 설치한 치성.

청도 청도읍성 11-20200106치성에서 보이는 동문 부근 동쪽 성벽.

청도 청도읍성 12-20200106북쪽 성벽.

청도 청도읍성 10-20200106치성에서 보이는 북쪽 성벽. 멀리 치성과 북문이 보인다. 양쪽 치성에서 성벽을 오르는 적을 제압할 수 있다.

청도 청도읍성 16-20200106고지도에 표현된 청도읍성. 평지에 거의 정사각형을 하고 있는 인근 언양읍성이나 남원성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01-20200106읍성내 있는 옛 청도군 관아 객사.

청도읍성, 경북 청도군 화양읍 일원
읍성은 지방관아가 소재한 고을의 방어를 목적으로 축성된 성곽이다. 청도읍성이 처음 축성된 시기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 전해지며, 현재의 규모는 조선시대 선조 년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선조 때 왜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동래에서 서울로 향하는 주요 도로변에 성을 수축하였는데 청도군수 이은휘가 선조 23년(1590) 시작하여 2년 후 완공하였다. 둘레가 1,570보(약 1.88 km), 높이는 5자 5촌(약 1.65 m)이며 동문.서문.북문이 있었다. 임진왜란과 여러 번의 화재로 소실되기도 하였지만 수차례 개축하여 읍성을 유지하여 왔고, 고종 7년 (1870) 남문을 건립하여 4문을 갖추게 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도시화와 도로개설로 문루는 철거되고 성벽 일부는 훼손되었으나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경상북도 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었다. 청도읍성은 성의 기저부가 전역에 걸쳐 남아 있고, 각종 지리지와 고지도에 자세한 기록이 있어 발굴조사와 고문헌 고증을 거쳐 북문(공북루)를 중심으로 성벽과 옹성 등 성곽을 복원해 나가고 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경상도 청도군 관아, 객사인 도주관과 동헌

경북 청도군 화양읍 일대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청도군 관아 건물들이다. 청도군 읍치였던 청도읍성내에는 옛 관아건물로 객사인 도주관, 군수가 근무했던 동헌, 얼음창고인 석빙고(보물 323호)가 남아 있다. “도주관(道州館)”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는 객사는 조선 현종 때 지어진 것으로 가운데 정청과 우익헌이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좌익헌을 다시 지어 옛모습을 복원해 놓고 있다. 동헌은 객사 뒷편 초동학교 교정에 남아 있는데 학교건물로 사용하면서 많이 훼손되었는데 최근에 옛모습으로 복원해 놓고 있다. 읍치였던 화양읍 일대가 원래 청도군 중심지였으나 일제강점기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청도역이 있는 청도읍이 중심지로 바뀌었다.

청도군은 대구 남쪽, 경주 서쪽에 위치한 조선시대 지방행정구역으로 종4품 군수가 고을 수령이었던 비교적 큰 규모의 고을이었다. 경주로 가는 중요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가 건국하면서 주변지역을 통합하면서 지금의 청도군을 형성하였다. 고려초 현급인 감무가 설치되었다가 고려 충햬왕 때 청도군으로 승격되었다. 고려말 이후 큰 성씨들이 많아 다스리기 어려운 지역으로 알려졌으며 김일손, 김대유 등 사림파 문신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주변에 운문산, 가지산, 천왕산 등 큰 산들이 많으며, 동창천.청도천 등 큰 하천이 밀양강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청도 청도군 관아 01-20200106청도군 관아 중심건물이었던 객사. 가운데 궐패를 모시는 궐패를 두고 양쪽에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된 동.서익헌을 두고 있다.

청도 청도군 관아 17-20200106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신 정청. “도주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도주는 청도의 다른 이름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05-20200106정청 내부. 일제강점기 이후 면사무소 건물로 사용되면서 개조되었던 것을 복원하였다.

청도 청도군 관아 21-20200106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동익헌. 앞면 6칸 규모로 상당히 큰 편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02-20200106옆에서 본 모습.

청도 청도군 관아 20-20200106서익헌. 앞면 6칸 규모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없어진 것을 복원해 놓았다.

청도 청도군 관아 06-20200106서익헌 앞 마루.

청도 청도군 관아 03-20200106객사 뒷편.

청도 청도군 관아 19-20200106객사를 출입하는 객사문.

청도 청도군 관아 08-20200106객사 마당 한쪽편에 남아 있는 창고로 보이는 건물

도주관, 경북 청도군 화양읍 서상리
조주는 청도의 옛이름으로 이 건물은 조선시대 청도군의 객사로 쓰이던 곳이다. 객사는 중앙에 정청을 두고 좌우에 동헌, 서헌을 둔 구조로 정청에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어 지방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배례하였으며, 동.서헌은 접객시설로 외국사신들이나 중앙관리들의 이동시 접대 및 유숙하는 곳이었다. 도주관은 조선 초기부터 있었으나 노후하여 중종 38년(1543) 관찰사 임백령이 중창하였고 주세붕이 쓴 “도주관 중수기문”에 중창기록이 남겨져 있다. 이후 정청과 우객사만이 남아 있었으나 2006년 좌객사를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정청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익공집이며, 동.서헌은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정청의 외관은 기둥을 건물 폭에 비하여 높게 세워 좌우 건물보다 고준한 느낌을 준다. 도주관 앞에는 고종 8년(1871) 병인.신미양요를 치른 뒤 쇄국의 결의를 다지고 국민에게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해 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옮겨져 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청도 청도군 관아 13-20200106화양초등학교 교정에 남아 있는 동헌. 앞면 7칸 규모로 비교적 큰 규모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16-20200106청도군수가 공식 업무를 보던 공간인 넓은 대청마루.

청도 청도군 관아 15-20200106동헌 뒷편으로 2칸 정도 누마루를 달아내어 정자처럼 손님을 접견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청도 청도군 관아 14-20200106옆에서 본 청도동헌.

청도동헌, 경북 청도군 화양읍 동상리
동헌은 조선시대 지방관아 건물로 관찰사.수령 등의 정청으로서 일반행정 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지던 곳이다. 1917년 군 청사를 고수동으로 신축 이전함에 따라 동헌건물은 도주학원 및 초등학교 교실로 사용되어 왔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앞쪽 칸은 퇴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동헌이 없어지고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은 현실에서 조선시대 지방사회의 역사성과 관아건축 연구에 귀중한 문화재이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청도 청도군 관아 11-20200106읍성 동문 안쪽에 복원해 놓은 옛 관아 건물인 고마청

고마청은 민간의 말을 삯을 주고 징발하는 일을 맡아보는 관아이다. 조선 숙종 때 고마법의 실시로 사신이나 수령 등 지방관의 교체와 영송에 따른 제반 비용ㅇㄹ 마련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청도관련 고문헌에 도마청이 최초 기록된 것은 영조 년간에 편찬된 『여지도서』 「창고」조이다. 이후 1895년 청도군읍지에 고마청의 위치가 동문 안에 있으며 현감 조원붕이 신.구관 환송비용으로 준비된 녹봉을 줄여 세웠고 수기와 현판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문헌 기록을 토대로 청도읍성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2013년 복원되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0

청도 청도군 관아 10-20200106청도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읍성.

청도 청도군 관아 09-20200106읍성 동문 밖에 있는 석빙고(보물 323호). 전국에 남아 있는 6곳의 석빙고 중 하나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31-20200106읍성 앞에 모아놓은 청도군수를 지낸 인물들의 공덕비.

청도 청도군 관아 18-20200106객사 앞으로 옮겨 놓은 구한말에 세운 척화비

청도 청도군 관아 12-20200106옛지도에 나타난 청도군

청도군의 연혁
청도군은 선시시대 유적 중 바위그늘과 지석묘, 석관묘 등의 유적이 각지에서 발견되어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변한 12국 중 우유국의 위치가 청도라고 비정되기도 하나 확실치는 않고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실린 이서국이 청도에 존재했던 초기국가이다. 이서국은 유리왕 19년(42) 신라에 복속되었다고 하나, 유례왕 14년(297) 이서국이 금성(지금의 경주)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의 지배체제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은 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를 전후해 솔이산성, 오도산성, 가산성으로 신라에 편입되었고 경덕왕 16년(757) 소산현, 형산현, 오악현으로 개명하고 밀성군(지금의 밀양)의 속군이 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 3현을 합하여 청도군이 되고 – 일명 도주 – 직급이 낮은 지방관인 감무가 파견되는 곳이었다. 1342년(충혜왕 3) 이곳 출신인 김선장의 공로에 의해 지군사로 승격되었고, 다음해 강등되었으나 김한귀의 청원으로 1366(공민왕 15) 다시 지군사가 되어 조선시대에도 청도군의 읍격은 그대로 유지되어 내려왔다. 1896년 도제의 실시에 따라 경상북도에 속하게 되고 1900년대 초 대구에 속했던 풍각, 각북, 각초면이 청도군에 편입되고, 외서면은 밀양군에 속하게 되는 등 여러 번의 행정구역 변경을 거쳐 2읍 7면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청도 삼족대, 조선중기 문신 김대유가 후학 양성을 위해 지은 정자

경북 청도군 매전면 금곡리에 있는 삼족대이다. 조선중기 문신 김대유가 세웠던 작은 정자로 동강천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삼족대’라는 이름은 김대유의 호 ‘삼족당’에서 따왔다. 김대유는 중종 때 일어난 기묘사화로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면서 주세붕.조식.박하담 등 당대의 학자들과 교류를 하였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사방에 담을 두르고 있다. 후대에 여러차례 중수를 하면서 조선후기 건축양식을 하고 있다. 건물 마루에서 내려다 보는 동창천과 주변 경치가 아름답다.

청도 삼족대 01-20200106동창천을 내려보는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세워진 작은 정자인 삼족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공간으로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담을 둘러 쌓은 것으로 보인다.

청도 삼족대 06-20200106건물은 온돌방 2칸, 부엌 등을 두고 있는 작은 살림집 형태이다. 마루에 걸터 앉아 내려다 보는 경치가 아름답다.

청도 삼족대 07-20200106마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동창천(상류방향)

청도 삼족대 05-20200106동창천 하류 방향

청도 삼족대 03-20200106삼족대 아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지은 작은 정자

청도 삼족대 02-20200106정자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청도 삼족대 04-20200106삼족대 아래에 있는 집 마당에서 보이는 삼족대

청도 삼족대 11-20200204반대편에서 본 모습.

청도 삼족대, 경북 청도군 매전면 금곡리
이 정자는 조선 중종 14년(1519) 삼족당 김대유(1479 ~ 1552년)가 후진을 교육하기 위하여 처음 건립하였고, 그의 호를 따라 삼족대라 불렀다. 김대유는 조광조의 문인으로 중종 2년(1507) 정시에 장원급제한 이후 정언, 칠원 현감 등을 지내고 1519년 기묘사화 이후에는 관직을 사임하고 향리에 은거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으로 사방에 토담을 쌓고 일각문을 두어 그 안에 정자를 배치하였는데 방 두칸과 부엌, 우물마루가 ‘ㄱ’자로 배열되어 있다. 1519년 경에 건립되었다고 하나 후대에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치는 동안 조선후기 건축양식으로 변모하였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