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 경릉(景陵, 사적), 조선 24대 헌종과 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사적)에 있는 경릉(景陵)이다. 조선 24대 헌종과 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이다. 왕과 왕비들의 능이 나란히 배치된 삼연릉이다. 헌종은 구한말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를 보냈던 왕으로 어린 시절에 왕위에 올라 권문세가에 시달렸던 대표적인 왕이다. 후사가 없어 강화도령이라 불렸던 철종이 왕위를 이었다. 효현왕후 사후 선조의 목릉(穆陵)이 있었던 자리에 별도 능역을 조성하지 않고 이곳에 왕릉을 조성한 것으로 보이며, 헌종과 계비 같은 사유로 이곳에 같이 능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구한말 세도정치 시기 왕권이 얼마나 약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동구릉(사적 193호)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1408년에 승하하면서 조성한 건원릉을 중심으로 역대 왕과 왕후의 능 9기가 조성되어 있다. 동구릉에는 한 분만 모신 단릉, 두분을 모신 쌍릉, 한곳에 산줄기를 달리해서 모신 동원이강릉, 두분을 함께 모신 합장릉, 세분을 나란히 모신 삼연릉이 있어 다양한 모습의 왕릉을 볼 수 있다. 동구릉에 왕릉을 조성한 왕으로는 태조를 비롯하여 5대 문종과 왕비, 14대 선조와 왕비,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18대 현종과 왕비, 21대 영조와 왕비, 추존왕인 문조와 왕비, 24대 헌종과 왕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동구릉 경릉. 조선 24대 헌종과 두분의 비가 같이 모셔진 삼연릉이다. 이곳은 원래 선조의 목릉이 있었던 자리이다. 구한말 세도정치기에 허약했던 왕실을 권위를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헌종.효현왕후.효정왕후 경릉
경릉은 조선 24대 왕 헌종과 두분의 비가 모셔진 능으로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세개의 봉분이 이어진 삼연릉 형식의 능이다. 헌종(1827~1849)은 1834년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15년 동안 임금 자리에 있었다. 효현왕후는 1837년(헌종3) 왕비가 되었고 1843년에 돌아가셔서 현 경릉의 첫 주인이 되었으며, 6년 뒤 현종이 돌아가시자 쌍릉 형식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이후 헌종의 두번째 비인 효정왕후가 1903년에 돌아가시자 삼연릉 형식으로 조성하게 되었다. 경릉에는 표석이 하나 있는데, 이는 1908년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진종, 헌종, 철종을 황제로 올리면서 제작한 비이다. 따라서 경릉 비석에는 ‘대한’과 ‘황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이 글자는 기존의 정릉 표석을 깎아서 다시 새긴 것이다. 표석의 전면과 후면에 새긴 글은 규장각 대재학 김학진이 지었고, 글씨는 당시 명필인 윤용구가 썼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능역 입구 정자각.

OLYMPUS DIGITAL CAMERA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 양쪽에도 박석을 깔아 놓은 것이 특이하다.

OLYMPUS DIGITAL CAMERA산릉제례를 올리는 공간인 정자각.

OLYMPUS DIGITAL CAMERA정자각 앞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왕릉 주인을 알려주는 표석이 세워진 비각.

OLYMPUS DIGITAL CAMERA왕과 왕비, 계비의 봉분이 나란히 배치된 삼연릉이다.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남양주 사릉(思陵, 사적), 조선 6대 단종 비 정순왕후의 능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에 있는 사릉(思陵, 사적)이다. 조선 제6대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능이다. 정순왕후는 1968년(숙종 24)에 단종이 왕으로 복위되면서 ‘정순왕후’라 봉해졌고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일생을 보냈다 하여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붙였다. 추존왕이나 단종의 장릉과 마찬가로 사릉에는 병풍석과 난간이 설치되지 않았으며, 석물 중 무석인은 생략되었다.

정순왕후는 1440년(세종 22)에 태어나 1454년(단종2)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노산부인으로 강등되었다가 단종인 죽은 후 왕실을 떠나 작은 집을 지어 평생 흰 옷만 입고 수절하였다고 한다. 1521년(중종 16)에 82세로 죽었다. 후손이 없어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 시가 묘역에 묻혔다. 정순왕후는 사림들이 집권세력으로 등장했던 종종 때까지 꽤 오래 살았기때문에 왕릉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예우를 갖춘 형태의 묘역이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사릉 봉분 주위에 경혜공주 시가인 해주정씨 묘역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양주 사릉(사적). 조선 6대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능이다. 정순왕후는 세조 집권후 노산부인으로 강등되어 서민으로 살다가 중종 때 죽었다. 단종 누이인 경혜공지 시가인 해주 정씨 묘역에 묻혔다. 사림이 집권세력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중종 때 묘역이 조성되어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고 있다.

남양주 사릉, 사적 209호,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
사릉은 조선 제6대 임금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의 능이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죽임을 당하자 왕실을 떠나 작은 집을 지어 평생 흰 옷만 입으면서 고기와 생선은 먹지 않고 수절하였다고 한다. 왕후가 후사없이 승하함에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시가인 해주 정씨가의 묘역에 장례하고 제사도 정씨가에서 지내왔다. 1968년(숙종 24)에 단종이 왕으로 복위되면서 ‘정순왕후’라 봉해졌고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일생을 보냈다하여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붙였다. 훗날 영조는 정순왕후가 궁궐을 나가 평생을 보낸 정업원(淨業院)터( 현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비각을 세우고 단종이 있는 영월 쪽을 좀 더 잘 보기 위해 올랐던 곳이라고 알려진 뒷산 바위에 ‘동망봉(東望峰)’이라는 글을 친필로 새겼다. <출처: 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사릉으로 들어가는 숲길.

OLYMPUS DIGITAL CAMERA산릉제례 공간인 정자각. 단종이 복권된 숙종때 왕릉의 모습을 갖추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자각 월대를 오르는 계단.  정자각 월대 규모가 다른 왕릉에 비해 약간 작은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자각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연결되는 참도.

OLYMPUS DIGITAL CAMERA정자각 앞 수라간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병풍석이나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추존왕이나 단종의 장릉처럼 무석인을 생략했다.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아래 왕릉 주인을 알려주는 표석이 세워진 비각

OLYMPUS DIGITAL CAMERA사릉이 있는 이곳은 단종 누이 경혜공주의 시가인 해주 정씨가의 묘역이다. 지금도 사릉 능역 안에는 해주 정씨 집안 무덤들이 여러곳 남아 있다. 왕릉으로 격상되기 전까지는 제사도 해주 정씨 집안에서 지내왔다고 한다.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구리 동구릉 숭릉(崇陵, 사적), 조선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사적)에 있는 숭릉(崇陵)이다. 조선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이다. 왕과 왕비의 능이 나란히 배치된 쌍릉이다. 숭릉은 산릉제례 공간인 정자각 양쪽에 통로 역할을 하는 익랑을 두고 있으며, 툇간 역할을 하는 배위청도 3칸이다. 이는 효종 영릉 천장과 숭릉 조성 시기가 겹치면서 국장을 간소하게 치르기 위해 임시빈전을 세우지 않고 정자각을 크게 지어 빈전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왕릉 석물도 효종 영릉을 이전하면서 묻어두었던 석물들을 다시 사용하였다.

현종은 효종의 북벌계획을 중단하고 훈련별대를 창설하는 등 군비증강에 힘썼다. 또한 국가재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대종법을 실시하였고 동철활자를 주조하였다. 현종이 재위했던 시기는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세력과 허목을 중심으로 한 남인세력간 당쟁이 심했던 시기로 특히 장례절차 문제로 정권이 교체되기도 하였다. 이런 까닭에 헌종의 능은 논쟁을 피하기 위해서 태조의 능역인 동구릉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동구릉(사적 193호)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1408년에 승하하면서 조성한 건원릉을 중심으로 역대 왕과 왕후의 능 9기가 조성되어 있다. 동구릉에는 한 분만 모신 단릉, 두분을 모신 쌍릉, 한곳에 산줄기를 달리해서 모신 동원이강릉, 두분을 함께 모신 합장릉, 세분을 나란히 모신 삼연릉이 있어 다양한 모습의 왕릉을 볼 수 있다. 동구릉에 왕릉을 조성한 왕으로는 태조를 비롯하여 5대 문종과 왕비, 14대 선조와 왕비,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18대 현종과 왕비, 21대 영조와 왕비, 추존왕인 문조와 왕비, 24대 헌종과 왕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조선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숭릉이다. 임시 빈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정자각을 크게 짓고, 효종 영릉에 사용되었던 석물을 사용하는 등 간손하게 조성된 왕릉이다.

현종.명성왕후 숭릉
제18대 현종(1641~1674)과 그의 비 명성왕후(1642~1683)가 안장되어 있는 숭릉은 동구릉에서 네 번째로 조성된 왕릉이다. 현종 숭릉의 특이한 점은 숭릉 정자각에는 양쪽에 벽이 없는 익랑이라는 공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양식을 가진 왕릉은 숭릉을 비롯하여 인경왕후 익릉, 장렬왕후 휘릉, 경종 의릉까지 4기가 있다. 이 중 숭릉 정자각 지붕은 유일하게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또한 숭릉 석물은 1659년 효종 영릉에서 사용하였던 석물을 다시 사용하였다. 효종 영릉은 본래 동구릉에 있다가 1673년(현종14)에 경기도 여주군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전에 사용하였던 석물을 모두 묻어 두었는데, 이듬해에 현종 숭릉을 조성하면서 효종 영릉의 석물을 꺼내어 다시 사용하게 된다. 이 내용은 숭릉이 만들어진 과정을 기록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숭릉산릉도감의궤>에 남아 있는데, 숙종과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석물을 새로 만들게 되면 백성의 노고가 가중될 것을 염려하여 다시 쓸것을 명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숭릉 들어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산릉제례을 올리는 공간인 정자각(보물 1742호). 이 정자각은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하게 남은 팔작지붕 정자각이다. 기존 정자각과는 달리 정전 5칸, 배위청 3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숭릉을 조성하던 시기와 효종 영릉을 여주로 천장하는 시기가 겹치면서 임시 빈전을 짓지 않고 정자각을 임시빈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기존 정자각보다 크게 만들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자각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숭릉 입구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연결되는 참도.

OLYMPUS DIGITAL CAMERA정자각 앞 수복방 건물.

OLYMPUS DIGITAL CAMERA왕릉의 주인을 알려주는 표석이 세워진 비각.

OLYMPUS DIGITAL CAMERA봉분은 하나의 담장 안에 왕과 왕비이 능이 나란히 있는 쌍릉 형식을 하고 있다. 석물들은 동구릉에 있던 효종 영릉을 여주로 옮기면서 묻어두었던 것들을 다시 사용하였다.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보물)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능역 내에 있는 숭릉 정자각(보물)이다. 이 정자각은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하게 남은 팔작지붕 정자각이다. 기존 정자각과는 달리 정전 5칸, 배위청 3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숭릉을 조성하던 시기와 효종 영릉을 여주로 천장하는 시기가 겹치면서 임시 빈전을 짓지 않고 정자각을 임시빈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기존 정자각보다 크게 만들었다. 이런 형태의 정자각은 숭릉을 비롯하여 익릉, 휘릉, 의릉이 있다.

숭릉(崇陵)은 조선 18대 현종과 비 명성왕후를 모신 능이다. 현종이 재위했던 시기에는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세력과 허목을 중심으로 한 남인세력간 당쟁이 심했던 시기로 특히 장례절차 문제로 정권이 교체되기도 하였다. 이런 까닭에 현종의 능은 논쟁을 피하기 위해서 태조의 능역인 동구릉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보물).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 보물 1742호,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은 조선 18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제향을 위하여 세운 정(丁)자 모습의 건물이다. 정청 5칸, 배위청 3칸인 건물로 조선왕릉 42기 정자각 가운데 유일하게 팔작지붕이다. 정청에는 처음으로 익랑(翼廊, 복도)을 설치한 숙종 즉위년(1674)의 모습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숭릉의 정자각은 17세기 정자각의 유형을 확인할 수 있는 희귀한 자료이다. <출처: 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하게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건물은 정전 5칸, 툇간에 해당하는 배위청 3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산릉제례을 올리는 정전 앞 복도가 형태로 만들어 놓은 배위청. 2칸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숭릉 정자각은 3칸으로 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자각 배위청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배위청이 있는 월대를 오르는 계단. 신도와 어도가 따로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산릉제례를 올리는 정전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정자각 추녀마루 잡상.

OLYMPUS DIGITAL CAMERA정전 양쪽에 통로에 해당하는 익랑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조선 18대 현종과 비 명성왕후의 숭릉.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남양주 봉선사, 세조 광릉을 지키는 원찰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부평리에 있는 봉선사(奉先寺)이다. 수원 융릉.건릉의 용주사, 서울 선릉.정릉의 봉은사와 함께 조선왕릉을 지키는 대표적인 원찰이다. 500여년 전 세조비 정희왕후가 선왕의 위엄을 기리고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세조의 광릉 부근에 있던 운악사를 크게 중창하고 봉선사로 고쳐부르면서 원찰로 삼았다. 명종 때에는 전국 교종을 대표하는 사찰로 경기도 내 전사찰을 관창하기도 하였다. 당시 전국 승려들의 교학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과거시험인 승과가 이곳에서 열렸으며, 서산.사명대사 같은 고승들도 응시하였다고 한다.

정희왕후가 봉선사를 크게 중장할 당시에는 사찰 가람의 규모는 89칸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등을 거치면서 여러차례 중수가 있었으며, 한국전쟁 때 사찰 전체가 불타버려 오래된 건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오늘날 봉선사 건물 대부분은 그 이후 새로 지은 것이다. 사찰 출입문을 비롯하여 왕릉을 지키는 원찰에서 특이한 가람배치가 반영되어 있다. 봉선사에 남아 있는 문화재로는 조선초기 범종인 대종(보물 397호)이 있다. 세조와 정희왕후의 광릉에서 1 km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 광릉숲과 함께 둘러보기 좋은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남양주 봉선사. 세조비 정희왕후가 광릉을 지키는 원찰로 삼으면서 크게 중창하였다. 서울 봉은사, 화성 용주사와 함께 조선왕릉을 지키는 대표적인 원찰이다.

남양주 봉선사,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봉선사는 고려 광종 20년(969)에 법인국사 탄둔이 운악산 기슭에 창건하고 운악사라 칭하였다고 한다. 운악사는 조선 세종 때 7개의 종파를 선종과 교종으로 통합됨에 따라 혁파되었다가 예종 1년(1469)에 정희왕후 윤씨가 선왕인 세조의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89칸으로 중창하고 봉선사라 개칭하였다. 봉선사는 명종 6년(1551)에 교종을 대표하는 사찰로서 전국의 승려 및 신도에 대한 교학진흥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으며 고종 광무 6년(1902)에는 경기도 내 전 사찰을 관장하기도 하였다. 1962년 전국의 사찰 중 제25교구 본사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어 지금에 이른다. 이 절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훼손되어 수차례 중수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법당 등 14동 150칸의 사우가 또다시 완전 소실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모두 근대에 건립된 것이다. 경내에는 조선초기 범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봉선사 대종(보물 397호)이 있으며, 짜임새 있는 구성과 사실적 묘사수법을 보여주는 봉선사괘불이 있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봉선사 일주문. 원래 있던 것은 아니고 최근에 새로 지은 것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찰 입구에 있는 고승들의 승탑과 탑비들

OLYMPUS DIGITAL CAMERA사찰 입구에 조성된 큰 연못.

OLYMPUS DIGITAL CAMERA연못을 지나  사찰 아래 넓은 공터에 옛 승과평이 있었던 곳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조선 명종대에 승과시험 과거장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 많은 고승들이 이곳에서 실시된 승과에 참여했다 전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봉선사 들어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광릉 원찰로 봉선사를 크게 중창할 때 같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500년 이상된 느티나무가 사찰 입구에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찰 강당의 성격을 갖는 청풍루. 원래 이곳에 천왕문과 해탈문이 있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봉선사 대종(보물 397호)이 있는 범종각

OLYMPUS DIGITAL CAMERA봉선사의 주불인 큰법당. 봉선사 주불전은 정희왕후가  봉선사를 크게 중창했을때 한강 이북에서 가장 큰 불전이었한다. 현재의 건물은 1970년에 중건하면서 대웅전이라는 이름대신 ‘큰법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큰 법당 앞 마당에 있는 삼층석탑.

OLYMPUS DIGITAL CAMERA큰법당 오른편에 위치한 지장전. 앞면 5칸에 옆면 3칸의 상당히 큰 규모의 불전이다. 원래는 세조와 정희왕후의 위패를 모셨던 어실각으로 봉선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다. 한국전쟁때 불타버린것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큰법당 왼쪽편에 위치한 관음전. 앞면 5칸의 상당히 큰 규모의 불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관음전 뒷편 삼성각. 일제강점기에 지은 건물로 한국전쟁 때 불타지 않은 유일한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지장전 뒷편 고승들의 영정을 모신 조사전.

OLYMPUS DIGITAL CAMERA승려들이 수행하는 요사채 중 경내 오른편에 위치한 방적당. 원래는 어느 단계의 수행을 끝내고 다음 수행을 준비하는 공간이라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왼쪽편에 위치한 큰 규모의 요사채 건물인 운하당은 이 사찰을 찾는 신도들이 머물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조선시대 광릉을 참배하기 위해 찾은 왕실이나 주요 인사들이 묵었던 공간으로 보인다. 뒷편으로 손님들이 묵을 수 있는 여러 동의 요사채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봉선사는 요사채 출입문. 양반가옥이나 재실처럼 솟을대문을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솟을대문 양쪽으로는 이 절을 방문한 신도들이나 손님들이 묵을 수 있도록 문간채가 준비되어 있다. 정희왕후를 비롯한 왕실가족들이 방문하는 경우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운하당 아래 넓은 마당과 문간채.

OLYMPUS DIGITAL CAMERA운하당 툇마루. 여러 방들을 오가는 통로이자 이곳을 찾은 신도들이 잠시 걸터 앉아 쉴 수 있는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운하당 왼쪽편으로는 판사관무헌이라는 건물이 있다. 조선시대에 봉선사 주지가 왕실로부터 세조와 정희왕후의 위패를 모시는 어실각을 봉향하는 봉향판사라는 직위를 받았기 때문에 판사관무헌이라고 한다. 원찰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옛부터 이 사찰의 주지가 머무는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운하당 뒷편으로도 여러동의 건물이 있는데, 이 사찰을 찾는 신도나 손심이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운하당 뒷편 장독대.

OLYMPUS DIGITAL CAMERA최근에 지은 요사채인 선열당.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