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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사촌마을 만취당(보물)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마을에 있는 고택인 만취당(晩翠堂, 보물)이다. 김사원이 1582년에 지은 건물로 자신의 호를 따서 만취당이라 불렀다. 원래는 후진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서원 강당 규모로 크게 지었는데 후대에 마을 안동김씨 종가의 모임 장소로 사용되었다. ‘만취당’이라 적힌 현판은 석봉 한호의 친필이다. 대청마루에는 이곳을 찾은 온계 이해, 서애 류성룡 등이 남긴 글들이 남아 있다. 영조 때 동쪽으로 2칸, 서쪽으로 1칸씩 온돌방을 증축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한옥 건물 중에서도 상당히 오래된 건물로 16세기 사대부계층이 살았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원래의 건물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어 당시 건축양식을 잘 살펴볼 수 있다.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01<의성 만취당(보물)>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03<남쪽에서 본 모습>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18<동쪽 길에서 본 모습>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19<뒷편에서 본 모습>

  건물은 ‘T’자 형을 하고 있는데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온돌방을 달아내었다. 대청마루는 앞면 2칸, 옆면 4칸의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로 사찰 강당이나 관아 누각을 연상시킨다. 바닥은 우물마루이며, 천장은 서까래가 드러난 연등천장을 하고있다.  앞면 추녀에는 활주를 세워 지붕의 무게를 받치도록 하였다.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04<의성 만취당>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05<가운데 대청마루>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08<대청마루 내부>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09<서까래가 드러난 연등천장>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07<지붕을 받치는 익공형 공포>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10<대청마루에 걸린 현판>

마루 서쪽에는 여닫이 판문을, 남쪽에는  띠살들문을 달았으며 동쪽 벽면에는 문설 기둥만을 세웠다. 동쪽 벽면에 있는 문설 기둥은 조선중기 목조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14<마루 남쪽 띠살들문>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06<서쪽 여닫이 판문>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12<동쪽 문설기둥>

북쪽에는 동쪽 2칸, 서쪽 2칸 등 3칸을 달아내었다. 조선후기 영조 때 증축한 부분이다. 동쪽 온돌방에는 남쪽에 쪽마루와 아궁이를 두었다. ‘복재(復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15<동쪽편 온돌방>

김사원(金士元, 1539~1601)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이 건물을 지었다. 김사원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지역민을 구제하여 지역민의 추앙을 받았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만취당 옆에 종택이 있는데 100년 전에 지어진 건물이다. 사촌마을은 구한말 의병활동으로 만취당을 제외하고 대부분 불타버렸는데 당시 새로 지어진 건물들이 주로 남아 있다.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16<만취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종택>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13<만취당 뒷마당>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17<만취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사촌마을>

의성 만취당(晩翠堂), 보물
만취당은 퇴계 이황의 제자 만취당 김사원이 학문을 닦고 후배들을 기르기 위해 세운 건물로, 현판은 석봉 한호가 썼다. 김사원이 선조 15년(1582)에 짓기 시작하여 선조 17년(184)에 완공하였다. 이후 영조 3년(1727)에 동쪽으로 2칸, 영조 40년(1764)에 서쪽으로 1칸을 덧붙여 지어 현재와 같은 ‘ㅜ’자형 평민이 완성되었다. 처음에 지은 대청과 나중에 지은 온돌방 부분은 문틀을 짜 맞추는 방법이 서로 달라 지은 시기가 다름을 알 수 있다. 기둥 위의 처마나 지붕은 처음 지을 당시의 모습을 손상시키지 않고 덧붙여 지어 원래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만취당은 16세기 사대부집의 주거와 선비문화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건물이 점점 변화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안내문, 의성군청, 2023년)

<출처>

  1. 안내문, 의성군청, 2023년
  2. ‘보물 의성 만취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3. ‘의성 만취당’,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4. ‘의성 만취당’, 디지털의성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공주 동학사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동학사에 있는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 및 복장유물(보물)이다. 계룡산 동학사 대웅전에 모셔진 삼세불로 주불전인 대웅전에 모셔졌다.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 따르면 1606년에 제작되었다고 한다. 17세기 전반 활동한 조각승 석준(釋俊), 각민(覺敏) 등이 불상 조성에 참여했다고 한다. 삼세불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양옆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앉아 있는 형식이다. 임진왜란 이후 비로자나삼불상과 함께 크게 유행하였다고 한다.

공주 동학사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20230727_01<공주 동학사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공주 동학사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20230727_05
<석가여래>

공주 동학사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20230727_04
<약사여래>

공주 동학사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20230727_03
<아미타여래>

공주 동학사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20230727_02<공주 동학사 대웅전>

발원문
<발원문>

공주 동학사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 및 복장유물, 보물
공주 동학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은 동학사에 있는 불상이다. 목조 석가여래삼불좌상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양옆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앉아 있는 모습의 삼세불이다. 삼세불은 모든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부처를 뜻한다. 즉 석가여래는 현재의 부처이면서 이 세계의 부처이고, 약사여래는 동방의 부처이면서 과거의 부처이며, 아미타여래는 서방의 부처이면서 미래의 부처이다. 2010년 불상의 금박 작업을 하던 중 불상의 내력을 적은 발원문과 고려말, 조선 초에 만들어진 사경, 경전류 등 78건 136점의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다.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이 불상들은 17세기 전반에 승려 조각가 각인의 주도로 1605년부터 1606년에 걸쳐 계룡산 청림사 대웅전에 봉안하기 위해 제작되었다고 한다. 불상을 동학사로 옮겨온 시기는 1883년 무렵인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공주 동학사, 2023년)

<출처>

  1. 안내문, 공주 동학사, 2023년
  2. ‘보물 공주 동학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예천 야옹정(보물)

경북 예천군 용문면 제곡리에 있는 야옹정(野翁亭, 보물)이다. 조선중기 명종 때(1566년) 때 권심언이 아버지 야용 권의(1475~1558년)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정자 건물이다.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3칸의 건물로 오른쪽 1칸을 돌출시켰다. 대청 앞에는 비교적 넓은 툇마루를 달아내고 큰 기둥으로 받쳐 전체적으로 누마루를 구성하고 있다. 건물 왼쪽에는 약간의 퇴간을 두고 있으며 지붕을 큰 기둥으로 받치고 있다. 세부적인 건축수법에서 조선전기 건축양식이 많이 남아 있으며 단청을 했던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예천 야옹정(보물) 20221130_01<예천 야옹정(보물)>

건물 앞쪽에는 반칸 정도의 툇마루를 두고 있는데 6개의 목재기둥으로 받치고 있어 난간을 둘러 건물 전체가 누마루를 두고 있는 모습이다.

예천 야옹정(보물) 20221130_07<건물 앞면 툇간>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3포 초익공을 사용하고 있는데 조선전기 이전에 많이 사용되었던 주심포 양식과 비슷하다. 막새기와를 사용하고 있으며 단청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예천 야옹정(보물) 20221130_04<지붕을 받치는 공포와 기와>

예천 야옹정(보물) 20221130_08<지붕을 받치는 기둥과 서까래>

창호는 가운데 작은 기둥인 설주가 세워진 형태로 조선전기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예천 야옹정(보물) 20221130_03<오른쪽 옆면>

예천_야옹정 (2)
<창호>

예천 야옹정(보물) 20221130_06<왼쪽 옆면>

예천_야옹정<대청마루 내부>

예천_야옹정 (1)<천장>

건물 주위에 담장을 둘렀으며 오른쪽에 출입문을 두었다.

예천 야옹정(보물) 20221130_10<예천 야옹정>

예천 야옹정(보물) 20221130_02<예천 야옹정>

예천 야옹정(보물) 20221130_05<예천 야옹정>

예천 야옹정, 보물
이 건물은 조선 중종 때 학자로 의흥현감을 역임한 야용 권의(1475~1558년)의 학덕을 받들기 위해 그의 아들 권심언이 명종 21년(1566)에 세운 정자이다. 정면 4칸, 옆면 3칸의 건물로 왼쪽에 6칸 대청 마루가 있고, 오른쪽에는 온돌방이 놓였으며, 오른쪽 앞면 1칸에 돌출한 마루가 마련되어 있다. 대청 앞면으로 폭이 넓은 툇마루를 설치하고 난간을 돌려 건물 전면을 누각식으로 꾸몄다. 대청 앞 기둥 위 공포의 장식 수법은 조선초기에 볼 수 있는 것이고, 대들보 위의 주조재인 화반이나 대공도 고식으로 꾸며져 있다. 건물 뒷면은 일부 개조되었으나 조선 중기 이전 건축양식의 세부를 간직한 점에서 중요시되는 건물이다. (안내문, 예천군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예천군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경주 양동마을 낙선당 고택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에 있는 낙선당(樂善堂) 고택이다. 입향조 손소의 셋째 아들인 손숙돈이 분가하면서 지은 집으로 조선중기 중종 때 처음 지어졌다. 사랑채가 대문채, 아래채와 함께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고, 오른쪽에 행랑채와 안채가 ‘ㅁ’자형 본채를 이루고 있다. 집주인이 천석꾼이었다고 하며 많은 곳간을 두고 있다. 마을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저택에 속하지면 기난을 낮게 하고 건물들은 소박하게 지어졌다. 안채 오른쪽에는 사당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양동마을 낙선당 고택>

대문채는 앞면 3칸  규모로 가운데 출입문, 오른쪽에 행랑방, 왼쪽에 외양간을 두고 있다. 대문채 왼쪽으로 큰 규모의 아래채가 있는데 큰 광과 작은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채 끝에 있는 작은 온돌방은 작은 사랑방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대문채>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아래채>

OLYMPUS DIGITAL CAMERA<아래채 끝에 있는 작은 온돌방, 작은 사랑방인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는 앞면 5칸 규모로 왼쪽에 대청마루, 오른쪽에 온돌방을 두고 있다. 사랑채는 안채와 연결되어 있다. 낙선당(樂善堂)은 사랑채의 이름이며 병자호란 떄 순절한 낙선당 손종로의 호에서 이름을 따왔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랑채>

OLYMPUS DIGITAL CAMERA<’낙선당’ 현판이 걸려 있는 대청마루>

OLYMPUS DIGITAL CAMERA<사랑채 온돌방>

본채는 앞면 7칸의 행랑채와 ‘ㄷ’자형 몸채를 두어 전체적으로 ‘ㅁ’자형 평면을 하고 있다. 안채는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안사랑방, 광 등이 있고 왼쪽에 안방, 부엌 등이 있다. 행랑채은 중문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행랑방을, 오른쪽에는 큰 광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행랑채>

OLYMPUS DIGITAL CAMERA<안채 대청마루와 안방>

OLYMPUS DIGITAL CAMERA<왼쪽 날개채>

OLYMPUS DIGITAL CAMERA<오른쪽 날개채>

OLYMPUS DIGITAL CAMERA<사당>

낙선당(樂善堂)
이 집은 손소의 셋째 아들인 망재 손숙돈이 분가할 때 지은 것이다. 병자호란 때 순절한 낙선당 손종로(1598~1636년)의 호에서 집의 이름을 따왔다. 양반가의 큰 집들은 기단을 높게 쌓은 위에 건물을 올리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집은 기단이 매우 낮은 것이 특징이다. 이 집의 주인이 천석꾼이었다고 하는데, 유난히 많은 곳간과 곡식을 찧었던 디딜방아채의 모습에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본채 옆에 자리한 건물은 사당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주 양동마을 송첨종택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에 있는 송첨종택(松簷宗宅)이다. 조선중기에 경주손씨 마을 입향조인 손소가 지은 집으로 아들 손중돈과 외손자 이언적이 태어난 유서깊은 고택이다. 이 집터에서 세명의 현인이 태어났다고 해서 풍수적으로 관심을 끌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건물은 ‘-’자형 대문채가 있고 그 안에 안채, 사랑채, 행랑채가 ‘ㅁ’자형을 하고 있다. 사랑채 뒷편에 사당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양동마을 송첨종택>

OLYMPUS DIGITAL CAMERA<대문채>

사랑채<사랑채>

아래채에서_바라본_안채<안채와 안마당>

서백당(書百堂)
이 집은 경주 손씨의 대종택으로, 양민공 손소(1433~1484년)가 만호 류복하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이 마을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곳이기에 유서가 깊다. 지관이 ‘이 집터에서 세명의 현인이 탄생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손소의 아들인 우재 손중돈과 외손자인 회재 이언적이 여기에서 태어났다. 사랑채에 걸린 ‘서백당’이라는 현판은 ‘참을 인(忍)자 백번을 쓰며 인내를 기른다’는 뜻이다. 사랑채의 뒤쪽 높은곳에 있는 건물은 사당이며, 마당의 향나무는 500여년이 넘은 것으로 추정한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