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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금산사 미륵전(국보 62호), 삼국시대 장륙전 모습이 남아 있는 거대 불전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사 경내에 있는 미륵전(국보62호)이다. 미륵삼존상을 모시고 있는 불전으로 삼국시대  목탑과 함께 주불전으로 지어졌던 장륙전의 모습이 잘 남아 있다. 삼국시대 지어졌던 건물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으며 이후 인조 때(1635)에 중수하였다. 건물은 외형상 3층 건물을 하고 있으며, 내부는 통층으로 되어 있다. 1층과 2층은 앞면 5칸, 옆면 4칸이며, 3층은 앞면 3칸, 옆면 2칸이다.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는 등 조선시대 불전 건축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옛 장륙전의 웅장한 모습이 잘 남아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장륙전 모습이 남아 있는 불전으로는 화엄사 각황전(국보 67호), 법주사 대웅보전(보물 915호), 무량사 극락전(보물 356호) 등이 있다. 금산사는 삼국시대 진표(? ~ 752)가 법상종 근본도량으로 창건한 사찰로 법주사와 함께 미륵신앙을 대표하는 사찰로 손꼽힌다.

SANYO DIGITAL CAMERA금산사 미륵전(국보 62호). 삼국시대에 주불전으로 많이 지어졌던 미륵삼존상을 모신 장륙전의 모습이 잘 남아 있는 대표적인 불전이다.

SANYO DIGITAL CAMERA정면에서 본 모습. 건물 1층과 2층은 앞면 5칸, 3층은 앞면 3칸 규모이며, 조선시대 건축에서 주로 볼 수 있는 팔작지붕에 다포계 양식을 사용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건물 1층에는 ’대자보전; 2층에는 ;용화지회’, 3층에는 ‘미륵전’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SANYO DIGITAL CAMERA건물 모퉁이 귀공포. 건물 모서리에는 활주를 세워 지붕을 받치고 있다.

김제 금산사 미륵전 국보62호 11-20190819건물 내부는 통층으로 되어 있다. 제일 높은 기둥은 하나의 통나무가 아닌 여러개의 나무를 이어서 사용하고 있다.

김제 금산사 미륵전 국보62호 12-20190819

미륵전에 모셔진 삼존상. 미륵전에 모셔져 있는 원래의 삼존불상은 정유재란 때 불타버렸으며, 현재의 불상은 인조 때 새로 조성된 소조상이다. 그 중 본존불은 1934년에 다시 중수하였다.

SANYO DIGITAL CAMERA금산사 방등계단에서 내려다 보이는 미륵전.

SANYO DIGITAL CAMERA남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금산사 경내 모습. 석가모니 사리를 모신 방등계단이 중심축에 있으며, 미륵전은 경내 동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미륵전, 국보 62호
미륵전은 진표율사가 미륵장륙상을 봉안하기 위하여 766년, 신라 혜공왕 2년에 처음 건립한 법당이다. 법당내에는 미륵불 등 삼존상이 조성되어 있다. 미륵전은 정유재란에 전소되었으나 인조 13년, 1635년에 수문대사가 한국 유일의 삼층법당으로 재건한 것이다. 법당 외부 1층과 2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고, 3층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형식이며, 법당 내부는 층이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은 통층이다. 건물 중앙의 제일 높은 기둥이 하나가 아니라 몇개의 기둥을 연결하여 만든 것이다. 이러한 기둥양식은 목조탑 양식에서 변안된 양식이다. 오랜 세월을 지내는 동안 목재가 썪고 건물이 낡아 1988년부터 1993년까지 5년간 문화재관리국의 주관으로 건물을 전면 보수하였으며 이후 다시 번와공사를 하였다. 법당 내부 지하에는 연대미상의 철제연와대가 있는데, 이로 미루어 법당 내부에는 원래 철불이 모셔져 있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다. 항간에는 연화대가 솥으로 알려져 있으며 솥을 만지는 사람은 속세의 업장을 소멸하고 소원을 성취한다고 전해오고 있다. 미륵전의 터는 원래 용이 살고 있던 연못이었으나 어떤 고승의 가름침에 따라 솥으로 연못을 메워 용을 쫓고 미륵전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안내문, 김제 금산사, 2009년)

<출처>

  1. 안내문, 김제 금산사,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

전라도 김제군 관아, 동헌과 내아 (사적 482호)

전북 김제시 교동에 위치한 옛 김제군 관아이다. 관아터에는 김제군수가 근무하던 동헌과 살림집인 내아, 동헌에 딸린 작은 정자인 피금각이 남아 있으며, 관아근처에 향교가 자리잡고 있다. 동헌은 조선중기 숙종 때 새로 고쳐 지은 것이다. 건물은 앞면 7칸, 옆면 4칸으로 지방 관아 건물 중 비교적 큰 편이다. 살림집은 내아는 ‘ㄷ’자형 안채만 남아 있다. 피금각은 정철의 아들 정홍명이 군수로 재임할 때 지은 것으로 그 규모나 형태가 전남 담양에 있는 정철 후손들이 지은 송강정과 비슷하다.

김제는 벼농사가 발달한 지역으로 특히 조선중기 이후 농업생산력을 기반으로 풍요를 누리던 지역이다. 유력한 정치세력을 배출하지는 않았지만 경제력을 바탕으로 종4품 군수가 고을 수령으로 파견된 지역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관아 건물도 다른 지역에 비해 그 규모가 크고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역내 서원이 많지 않아 향교도 비교적 큰 규모를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김제시 도심에 남아 있는 옛 김제군 관아. 지방 관아 건물 중에는 비교적 큰 규모를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김제군수 집무공간인 동헌. 앞면 7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비교적 큰 규모의 동헌 건물로 중앙부처나 감영 동헌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겹처마와 익공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는데 건축수법이나 자재가 고급스럽다. 농업생산력이 풍부했던 김제군 관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동헌

SANYO DIGITAL CAMERA동헌 뒷면. 한쪽에만 온돌방을 두고 있다.

김제동헌
이곳은 조선시대 김제 고을의 수령이 업무를 맡아보던 청사로 동헌이라 하였다. 김제동헌은 조선 현종 8년(1667)에 세워 근민헌이라 칭하여 오다 숙종 25년(1699)에 동헌을 고쳐지어 사칠헌으로 개명하였다가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 초까지 김제읍사무소로 사용되었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기둥, 처마, 지붕에 쓰인 부재나 장식이 장중하여 건물의 높은 품격과 관아의 위계를 볼 수 있다. 현존하는 관아 중 동헌과 내아가 함께 보존되는 경우가 매우 드문 예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높게 평가 받아 2007년 7월 3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근민헌이란 편액은 백성에게 가깝게 있는 관청이란 의미로 사적 지정을 기념하여 제작되었다. (안내문, 김제시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동헌 앞 언덕에 세워진 작은 정자인 피감각. 가운데 작은 온돌방을 두고 툇마루로 둘러싸인 형태를 하고 있다. 송강 정철의 아들 정홍명이 김제군수로 재직할 때 지은 것이라 한다.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피금각.

SANYO DIGITAL CAMERA동헌 뒷편 김제군수가 거처했던 살림집인 내아.

SANYO DIGITAL CAMERA건물은 ‘ㄷ’자형을 하고 있는 안채만 남아 있다. 가운데 중문을 두고 양쪽에 온돌방이 배치되어 있는데 동헌 방향으로 방문과 툇마루를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내부는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들이 배치되어 있다. 지방관아 내아 건물 중에는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이다.

SANYO DIGITAL CAMERA내아에 딸린 작은 부엌. 일반 주택에 비해 부엌이 작은 편이다.

김제 내아
이곳은 조선시대 김제 고을의 수령이 기거하던 살림집이다. 관아는 외동헌과 내동헌으로 나뉘는데, 외동헌은 사무처로 흔이 이를 동헌이라 불렀으며 내동헌은 수령의 처소이다. 김제 내아는 내동헌으로 조선 현종 8년(1667)에 세운 문화재로서 현재는 동쪽이 트인 <ㄷ>자형 안채 건물 하나만 남아 있지만 원래는 여러 부속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춧돌이나 기둥, 처마에 쓰인 목재가 모두 질이 좋고 정성껏 다듬은 것들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동헌과 함께 남아 있는 내아로서 중요한 학술자료로 평가된다. (안내문, 김제시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김제 관아에서 약 130 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김제향교. 중등교육기관을 담당하던 곳이다. 김제 지역에는 유력 양반세력이 없어 서원이 발달하지 않아 오랜 기간 교육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

 김제 옛 관아(동헌.내아), 사적 482호, 전북 김제시 교동
김제 옛 관아는 조선시대 지방행정의 치소로서 도시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동헌과 내아가 함께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매우 드문 사례이다. 현재 김제관에는 동헌과 내아, 피금각이 남아 있으며 비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어 당대의 지방행정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실례가 되고 있다. 김제군 수령의 공무집행 공간이었던 동헌의 경우 1667년(현종 8) 김제군수 민도가 처음 세우고 이를 근민헌이라 칭하였으며, 1699년(숙종 25)에 중수하여 명칭을 사칠헌으로 고쳤다고 전한다. 그러나 1667년 이전에 이미 김제 동헌에 대한 시문이 전해지고 있어, 건립시기는 수령의 살림채인 내아(내동헌)과 함께 1500년대 중반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한편 1633년(인조 11)에 지어진 피금각은 송강 정철의 아들 정홍명이 김제 군수 재임 시 동헌에서 업무를 마친 후 가야금과 바둑, 서책을 읽으며 휴식하기 위한 공간으로 지어졌다. 김제 관아는 현존하는 동헌, 내아, 피금각 이외에 외삼문과 내삼문, 호적고, 사령층 등이 김제지방도(1872년)에 보이며 외삼문의 경우 중층 문루형식에 상층엔 징벽루, 하층엔 벽지아문이라 편액하였다. (안내문, 김제시청, 2018년)

<출처>

  1. 안내문, 김제시청, 2010년,2018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19년

정읍 피향정(보물 289호), 호남지방을 대표하는 정자 건축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에 옛 태인현 읍치에 남아 있는 피향정(披香亭, 보물 289호)이다. 태인현 관아에서 공식행사를 위해 설치한 것으로 남원 광한루와 함께 호남지방을 대표하는 정자 건축물이다. 창건연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현재의 건물은 조선중기 숙종 때(1716)에 새로 지은 것이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4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큰 규모로 사방이 개방되어 있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나 가운데에는 우물천장으로 꾸며놓고 있다. 천장 아래에는 이곳을 찾았던 인사들이 남겨놓은 글이 적혀 있는 현판들이 많이 남아 있다. 건물 앞.뒤로 큰 연못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앞쪽 연못만 남아 있다. 조선중기 목조건축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손꼽히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정읍 피향정(보물 289호). 태인현 읍치에 남아 있는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정자건축물이다.

SANYO DIGITAL CAMERA옆면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정자를 받치는 기둥. 커다른 화강암 석재를 가공하여 초석 위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SANYO DIGITAL CAMERA앞면에서 본 모습. ‘호남제일정’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SANYO DIGITAL CAMERA정자 내부. 넓은 마루로 되어 있으며 사방이 개방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천장은 대부분 서까래가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을 하고 있는데 가운데 부분만 우물천장으로 장식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천장 아래 걸려 있는 ‘피향정’이라 적힌 현판

SANYO DIGITAL CAMERA천장 아래에는 이곳을 찾은 인사들이 남겨놓은 글이 적힌 현판들이 많이 걸려 있다. 통일신라 때 유학자 최치원의 발자취를 찾아 이곳을 방문했던 인사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정자에서 내려다 보이는 연못 풍경. 농업용 저수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 오래된 연못으로 보인다. 원래는 앞.뒤에 연못이 있었는데 지금은 앞쪽 연못만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피향정이 있는 옛 태인현 읍치.

정읍 피향정(披香亭), 보물 289호,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
피향정은 호남 제일의 정자이다. 원래 이 정자는 앞뒤로 상.하연지가 있어 아름다운 경승을 이루고 있었으나 현재는 하연지만 남아 있다. 신라시대에 최치원 선생이 태산군수로 재임중에 이곳 연지가를 소요하며 풍월을 읊었다는 전설이 있으나 정자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의 정자는 조선시대 중기의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집이다. 4면이 모두 개방되어 있고 주위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다. 공포는 간결한 초익공 건물로 천장은 연등천장인데 합각 밑에는 작은 우물천장이 특이하게 설치되어 있다. (안내문, 정읍시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정읍시청,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전라도 태인현 관아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에 남아 있는 옛 태인현 관아 건물이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로는 태인현감이 근무했던 동헌과 관아에서 설치했든 큰 규모의 누각건물인 피향정(보물 289호)이 남아 있다. 동헌은 조선후기 순조 때 (1816)에 새로 지은 건물로 <청녕헌>이라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은 앞면 6칸으로 지방관아 동헌 중에는 그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당시 전라감영 선화당을 지은 이름난 목수가 지었다고 전해지며 형태나 제작수법 등이 상당히 뛰어난 건물이다. 관아에서 큰 행사를 치루기 위해 설치했던 피향정 또한 그 규모가 크고 제작수법이 뛰어나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정자건축으로 손꼽힌다.

태인현은 백제 때 처음 설치되었던 태산현과 인의현이 조선초 태종 때 합쳐서 생긴 조선시대 지방행정조직이다. 부안.고부.정읍.김제 등 주변지역과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로 산악지대에서 넓은 호남평야가 시작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통일신라 때 최치원이 고을 수령을 지냈으며, 부근에 최치원과 정극인을 모신 무성서원이 있다. 태인동헌은 동학혁명당시 농민군이 점령했던 곳으로 전봉준의 농민군 주력이 태인동헌 뒷산인 성황산전투에서 패하자, 이 곳에서 군대를 완전히 해산하였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옛 태인현 관아. 태인현감이 근무하던 동헌 건물만 남아 있다. 뒷편 객사가 있던 자리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SANYO DIGITAL CAMERA태인동헌. 앞면 6칸으로 지방관아 건물 중에는 비교적 크고 웅장하게 지었다.

SANYO DIGITAL CAMERA오른쪽 3칸은 넓은 대청마루가, 오른쪽 3칸은 온돌방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청녕헌>이라 적힌 현판.

SANYO DIGITAL CAMERA서까래는 겹처마를 하고 있으며, 지붕을 받치는 공포에서 이 건물의 지은 목수의 뛰어난 솜씨를 알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온돌방 옆 1칸은 책이나 문서 등을 보관하는 다락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바깥쪽에서 본 모습.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지붕을  상당히 높게 만들었으며 구조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잘 지은 건물임을 알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태인현 읍치가 있던 태인면소재지. 피향정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뒷편으로 동학군이 마지막 결전을 벌렸던 성황산이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태인현 읍치 가운데 위치한 피향정(보물 289호). 관아에서 공식행사를 위해 설치하는 누각으로 남원 광한루와 함께 호남지방을 대표하는 누각건축물이다.

SANYO DIGITAL CAMERA피향정 앞 마당에 모아놓은 태인현 고을 수령을 역임한 인물들의 공덕비이다. 제일 안쪽에 동학혁명의 발단이 되었던 고부군수 조병갑의 아버지 조규순의 공덕비가 있다.

태인동헌,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이 건물은 조선시대 태인 고을의 수령이 업무를 보던 청사이다. 이 동헌은 조선 중종 때 태인현감 신잠이 세웠으며, 현존 건물은 순조 16년(1816)에 다시 세운 것이다. 건물 정면에는 고을을 편안하게 잘 다스린다는 뜻의 <청녕헌>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전설에 따르면 전라감영의 선화당을 지은 목수가 3천냥의 비용으로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여 지은 건물이라 한다. 이 동헌은 현존하는 조선시대 동헌 중에서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건물 가운데 하나이다. (안내문, 정읍시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정읍시청,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해남 해남윤씨 녹우당(사적 167호), 윤선도 고택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에 있는 녹우당(사적 167호)이다. 윤선도가 살았던 곳으로 잘 알려진 해남윤씨 고택으로 입향조인 윤효정이 연동리 마을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처음 지은 집이다. 원래 있던 집에 윤선도가 효종으로 부터 하사받은 사랑채를 옮겨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전한다. 집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마당 한쪽편에는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있으며, 담장 바깥에 윤효정과 윤선도를 모신 사당을 따로 두고 있다. 호남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의 민간주택으로 대지주계층이 살았던 저택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해남 연동리마을 남아 있는 해남윤씨 고택. 입구에는 녹우당을 상징하는 은행나무 고목이 우뚝 솟아 있다. 전체적으로 남서향을 하고 있으며, 행랑채 오른쪽에 솟을대문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솟을대문

SANYO DIGITAL CAMERA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윤선도가 수원에서 옮겨왔다는 사랑채를 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사랑채 전경. 앞에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차양을 두고 있는데 상류층 주택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형태는 아니다.

SANYO DIGITAL CAMERA사랑채는 여러개의 방으로 되어 있으며, ‘녹우당’이라 적힌 현판을 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사랑채 서까래 아래에 걸려 있는 글씨.

SANYO DIGITAL CAMERA사랑채 왼쪽편에 툇마루가 없는 문을 볼 수 있는데 넓은 마루방인 것으로 보인다. 그 옆쪽에 안채를 출입하는 문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사랑채 마당에 있는 잘 꾸며진 연못.

SANYO DIGITAL CAMERA연못 안쪽에 있는 초가지붕을 하고 있는 행랑채.

SANYO DIGITAL CAMERA사랑채 마당에서 보이는 솟을대문. 그 옆에 외양간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솟을대문 옆쪽에 있는 행랑채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사랑채.

SANYO DIGITAL CAMERA사랑채 마당과 안채 마당 사이에 공간을 분리해 주는 담장.

SANYO DIGITAL CAMERA담장 안쪽으로 가족들의 생활공간인 안채가 있다. 안채는 ‘ㄷ’자 형태로 안마당을 향해 툇마루를 두어 여자들이 일하면서 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해남 녹우당 21-20150928안채와 안마당.

SANYO DIGITAL CAMERA안채 뒷마당에, 대나무를 비롯하여 다양한 나무를 심어 정원을 가꾸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안채 마당 한쪽편에 있는 가묘. 불천위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다.

SANYO DIGITAL CAMERA사당은 툇마루를 두고 있는 3칸 규모의 비교적 큰 규모의 건물이다.

해남윤씨 녹우당, 사적 167호,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녹우당은 해남 윤씨의 고택이다. 윤선도의 4대조부의 효정(어초은, 1467~1543)이 연동에 삶터를 정하면서 지은 15세기 중엽의 건물이다. 사랑채는 효종이 스승인 윤선도에게 하사했던 경기도 수원집을 현종 9년(1668)에 해상운송하여 이곳에 이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윤선도(호: 고산, 1587~1671)는 한성부 남부 명례방(현 서울 명동)에서 살다가 중년에 연동으로 내려와 해남 금쇄동과 완도 보길도를 내왕하면서 불후의 시조문학을 남겼다. 녹우당의 건축은 풍수지리에 따라 덕음산을 진산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으로 구성되고 행랑채가 갖추어져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경역에는 가묘, 어초은사당, 고산사당 등이 있으며 입구에는 당시에 심은 은행나무가 녹우당을 상징하고 뒷산에는 오백여년된 비자나무 숲(천연기념물 제241호)이 우겨져 있다. 이곳에는 윤두서자화상(국보 제240호), 산중신곡집(보물 482호), 어부사시사집, 노비문권(보물 제483호) 등으이 지정문화재와 3천여건의 많은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안내문, 해남군청, 2018년)

<출처>

  1. 안내문, 해남군청,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