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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옥산성, 거제현 읍치를 지키는 작은 산성

경남 거제시 거제면 동상리에 있는 옥산성(玉山城)이다. 거제현 관아가 있는 동상리 뒷편 수정봉(141m) 정상부에 쌓은 산성으로 둘레 778.5 m이다. 외형상 삼국시대에 쌓은 작은 산성처럼 보이지만 구한말 고종 때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산성이다. 이곳에 있는 비석에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고종 때(1873년) 거제부사가 군사적 요충지에 위치한 읍치를 방어하기 위해 읍성을 쌓으려 했으나 조정의 허락을 받지 못해 관아 뒷편 수정봉에 산성을 쌓고 무기와 군량을 비축했다고 한다. 성안에는 큰 우물과 군사업무 목적으로 지은 건물터 등이 남아 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있었던 구한말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거제 옥산성 13-20220221<거제 옥산성>

성문은 동.서.남.북 4개의 문이 있는데 동문과 서문의 규모가 크고 형태도 잘 보존되어 있다. 서문은 관아가 있는 읍치와 연결되는데 약 700 m 정도 떨어져 있다.

거제 옥산성<거제 옥산성>

거제 옥산성 30-20220221<옥산성 동문>

거제 옥산성 31-20220221<동문 북쪽 성벽>

거제 옥산성 12-20220221<서문 내부>

동문을 들어서면 옥산성 정상부에 세워진 작은 정자가 보인다. 원래 사방을 감시하면서 군사를 지휘하는 장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부에는 약간의 평지와 내성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 낮은 성벽이 남아 있다.

거제 옥산성 01-20220221<옥산성 정상부>

거제 옥산성 29-20220221<내부에서 보이는 서문>

거제 옥산성 03-20220221<옥산성 내부에 있는 낮은 성벽>

거제 옥산성 02-20220221<동문에서 남문으로 이어지는 성벽>

남쪽 성벽에는 작은 암문으로 보이는 성문이 보인다.

거제 옥산성 05-20220221<남쪽 성벽>

거제 옥산성 25-20220221<정상부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쪽 성벽>

거제 옥산성 24-20220221<남쪽 성벽 아래 지역>

옥산성 동쪽편에 약간의 공간이 있으며, 군사업무를 위한 건물이나 창고 등은 동문 안쪽에 배치되어 있다.

거제 옥산성 10-20220221<옥산성 동문>

거제 옥산성 11-20220221<동문 북쪽 성벽>

거제 옥산성 08-20220221<동문 남쪽 성벽>

거제 옥산성 06-20220221<동문 안쪽 건물터가 있는 곳>

거제 옥산성 09-20220221<내부에서 보이는 동문>

거제 옥산성 14-20220221<동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옥산성 내부>

거제 옥산성 16-20220221<건물터>

2019년 도지정문화재 보수사업의 일환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돌로 쌓은 기단과 계단을 갖춘 초석이 있는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높이가 약 1m정도인 기단은 처음 축조된 기단석에 덧붙여 한차례 증축한 것으로 확인 되었으며, 계단은 기단부 앞쪽에 3개가 설치되었다. 확인된 초석으로 보아 정면 6칸, 측면 2칸의 건물지로 규모는 길이 17.5m 너비 5.6m, 면적 98m2이다. 건물지의 벽은 흙과 돌을 섞어 축조하였고, 벽의 기초부에 회백색의 점토를 발라서 미장하였으며, 바닥에는 박석을 깔았다. 출토된 기와로 보아 건물지의 축조시기는 조선시대 후기로 판단되며, 이 건물지 왼쪽에 세워져 있는 ‘옥산금성축성비’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이 건물은 벽에 회를 발라 미장한 점, 바닥에 박석을 깐 점, 그리고 난방시설인 온돌 시설이 없는 점으로 보아 주거시설이라기 보다는 행정 또는 사무 등의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거제 옥산성 15-20220221<옥산성 정상부로 오르는 길>

옥산성 정상부에는 장대 역할을 했던 자리에 작은 정자가 있다. 정자 동쪽로는 약간의 공간이 있는데 우물과 건물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제 옥산성 18-20220221<옥산성 정상부>

거제 옥산성 17-20220221<우물>

거제 옥산성 19-20220221<발굴  현장>

거제 옥산성 23-20220221<정상부에서 내려다 보이는 거제현 읍치>

거제 옥산성 26-20220221<옥산성 북쪽>

거제 옥산성 27-20220221<북쪽 성벽>

거제 옥산성 28-20220221<북쪽 성벽>

<출처>

  1.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거제 반곡서원

경남 거세시 거제면 동상리에 있는 반곡서원이다. 우암 송시열을 모시기 위해 조선후기 숙종 때(1705년) 창건되었다. 이후 송시열의 문인이자 대표적인 노론 학자인 김진규, 김창집 등을 추가 배향하였다.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최근에 복원되었다. 거제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거제현 관아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 성격이 강한 서원인 것으로 보인다.

거제 반곡서원 01-20220221<거제 반곡서원>

반곡서원은 거제현 관아 뒷편 옥산성 중턱 경사진 지형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은 외삼문, 강학공간, 제향공간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거제 반곡서원 09-20220221<외삼문>

거제 반곡서원 05-20220221<강당>

거제 반곡서원 02-20220221<서재>

거제 반곡서원 03-20220221<동재>

거제 반곡서원 07-20220221<내삼문>

거제 반곡서원 08-20220221<사당>

거제 반곡서원 06-20220221<고직사>

반곡서원(盤谷書院)
이 서원은 거제 유림 윤도원, 옥삼헌, 김일채, 윤명한, 허유일, 신수오 등이 문정공 우암 송시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704년(숙종 30)에 창건하였다. 그 후 문청공 죽천 김진규, 충헌공 몽와 김창집, 부제 학공 이중협, 문충공 민진, 정문공 김수근이 추가로 배향되었다. 1868년(고종 5)에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되었으나, 1906년 거제 유림에서 서원의 옛터에 제단과 반곡서원유허비를 세우고 매년 가을에 단제를 치렀다. 1971년 거제 향교의 책임자 윤병재가 서원의 복원을 발의하고 유림총회의 찬성으로 1974년 우암사를 중건하였다. 또한 인접 지역 고택 세 채를 철거하여 나온 부재로 강당을 개축하는 과정을 거쳐 옛 모습을 되찾았으며, 2010년부터 2012년까지 3년간의 대대적인 복원 사업을 진행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동록당은 추사 김정희가 군자라 칭송했던 동록 정혼성을 배향한 곳이다. 반곡서원은 전학후묘의 전형적인 배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거제 기성관(보물), 거제현 관아 객사

경남 거제시 거제면 읍내로에 있는 기성관(보물)이다. 조선시대 거제현 및 거제도호부 관아 객사로 사용된 건물이다. 조선후기 현종 때 관아가 있던 고현성을 폐쇄하고 현재의 위치로 옮길 때(1665년) 지어졌다. 이후 여러차례 중건을 거치면서 1909년까지 관아 건물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초등학교 교시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1976년에 옛모습을 복원하였다. 해체수리과정에서 상량묵서와 상량문 등이 발견되어 창건 내력 등의 내용이 잘 남아 있다. 관아객사이지만 내부는 전체가 넓은 대청마루로 구성되어 있어 통제영 객사인 세병관(국보)과 마찬가지로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통영 세병관(국보), 밀양 영남루(보물), 진주 촉석루와 함께 경남지역을 대표하는 관아 건축물로 손꼽힌다.

거제 기성관 (보물) 01-20220221<거제 기성관(보물)>

건물은 앞면 9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가운데 3칸은 궐패를 모시는 정청이며 양쪽에 좌우 익실을 두고 있다. 가운데 정청 지붕으로 좌우 익실보다 약간 높게 지어 전체적으로 솟을 지붕처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거제 기성관 (보물) 15-20220221<가운데 정청>

거제 기성관 (보물) 16-20220221<왼쪽 익실>

거제 기성관 (보물) 17-20220221<오른쪽 익실>

거제 기성관 (보물) 05-20220221<기성관 현판>

거제 기성관 (보물) 04-20220221<지붕을 받치는 공포와 겹처마>

거제 기성관 (보물) 07-20220221<내부 천장>

궐패를 모시는 공간도 주위와 같은 높이의 대청마루로 되어 있으며 많은 사람이 모여 회의를 할 수 있도록 내부가 누각처럼 내부가 개방되어 있다.

거제 기성관 (보물) 06-20220221<정청 내부>

거제 기성관 (보물) 12-20220221<뒷편에서 본 정청>

거제 기성관 (보물) 08-20220221<객사 내부>

거제 기성관 (보물) 09-20220221<앞쪽 통로>

거제 기성관 (보물) 10-20220221<뒷쪽 통로>

거제 기성관 (보물) 14-20220221<정면에서 본 모습>

거제 기성관 (보물) 03-20220221<옆쪽에서 본 모습>

거제 기성관 (보물) 11-20220221<뒷편에서 본 기성관>

기성관(岐城館), 보물, 경남 거제시 읍내로
기성관은 거제현 관아의 ‘객사’로 사용된 건물이다. 객사는 왕과 궁궐을 상징하는 전패를 봉안하고 지방의 관청에서 임금을 공경하고 충성심을 표시하기 위한 의식을 행하는 곳이며, 왕이 지방 군현에 보낸 사신이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이다. 기성관 가운데에는 왕의 전패를 모신 정당이 있고, 좌우 양쪽에 사신의 숙소로 사용되던 익실이 있었다. 정면 9칸, 측면 3칸으로 이루어진 사방이 탁 트인 마루로 된 웅대한 구조이다. 현종 5년(1664) 거제현 관아가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지금의 위치에 지어졌으며, 1976년 건물 전체를 해체, 복원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와 해방 당시에는 거제초등학교 교실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기성관은 거제현 관아의 다른 건물과 달리 팔작지붕 및 화려한 단청으로 장식하였다. 이는 객사가 임금의 전패가 안치되어 있던 곳이라는 점에서 임금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성관은 통영 세병관(국보), 밀양 영남루(보물), 진주 촉석루와 함께 경상남도의 조선시대 4대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국보)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국보)이다. 조선후기 정조 때(1782년) 국왕의 명으로 창덕궁 규장각 부속 건물인 이문원 앞에서 설치되었던 측우대 이다. 대리석을 다듬어 만든 것으로 남아 있는 측우대 중 외형이나 새겨진 글씨 등이 매우 뛰어나다. 바깥에는 비를 기원하는 뜻으로 세종 때 예를 본받아 창덕궁에 측우기를 설치했다는 내용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정조 6년(1782), 보물>

OLYMPUS DIGITAL CAMERA<측우대에 새겨진 글자>

“측우기는 세종24년(1442)에 시작되었다. 구리로 만들고 높이가 1차5치이며 지름이 7치이다. 서운관과 각 도의 고을에 두어 비올 때마다 그 깊이를 재어서 보고하게 하였다. 선왕이신 영조 46년(1770)에 옛날 제도를 본떠서 창덕궁, 경희궁과 팔도와 한성부, 개성부에 만들어 두었다. …. 정조6년(1782) 여름에 경기도가 크게 가물어서 임금께서 예복을 갖추고 저녁이 지나도록 찬 곳에서 제사를 올리시고, 날이 샌 뒤에 옥문 밖에 대가를 머무르고 경한 범죄자를 모두 석방하였다. 이에 도성 안 선비와 부인들이 우러러 보고 감격해 하였다. 해가 지기도 전에 큰 비가 밤까지 내렸으니 우리 성상의 지극한 정성에 하늘이 감동한 것이다. … 비의 양이 미흡하다 여기셔 내각에 분부하여 측우기를 창덕궁 이문원 뜰에 설치하고 기다리게 하였다. 이내 내리는 비에 흡족해 하시고 신에게 이 글을 쓰라 하시니 그 기쁨을 기념한 것이다. …. 이 측우기에는 임금과 백성들의 걱정과 기쁨이 얽혀 있으니 신 등이 감히 공손하게 지키고 삼가 기다리지 않으랴…” 심염조 지음 (안내문, 고궁박물관, 2014년)

이문원(摛文院)은 조선시대 역대 임금의 어진, 어필 등을 보관하는 기관이다. 정조는 창덕궁 금호문 안쪽에 규장각 건물을 짓고 정청에 ‘摛文之院(이문지원)’을 써서 붙였다. 이 측우기는 이문원 앞 마당에 세워져 있던 것이다.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국보) 06-20220504<이문원 측우대 위치>

OLYMPUS DIGITAL CAMERA<창덕궁 규장간 정청 건물>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의 받침대이다. 네 측면에는 가뭄이 극심해지자 정조임금이 비를 기원하는 뜻에서 세종 대의 측우기를 원형으로 삼아 만들어 창덕궁에 두었다는 내용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황동 측우기는 보물561호 금영측우기를 복원한 것이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14년)

<출처>

  1. 안내문, 고궁박물관, 2014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국보)

서울 종로구 국립기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국보)이다. 조선후기 영조 때 측우제도를 재정비하면서 전국 감영에 설치된 측우대 중 하나이다. 높이 46 cm의 돌로 만들어진 것으로 새겨진 명문을 통해 영조 46년(1770)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경상감영 선화당 앞 마당에 있던 것을 총독부관측소로 옮겼으며 현재는 국립기상박물관에서 소장, 전시하고 있다. 강수량을 측정하던 측우기는 남아 있지 않으나 공주 충청감영에 있던 측우기와 같은 형태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국보) 01-20220504<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국보, 영조 46년(1770)>

‘측우대건륭경인오월조(測雨臺乾隆庚寅五月造)’이라고 새겨진 글자를 통해 영조 46년(1770)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국보) 02-20220504<옆에서 본 모습>

영조실록에 따르면 세종 대의 옛 제도를 모방하여 측우기를 만들어 창덕궁과 경희궁에 설치하라고 명하고, 8도와 유수부에도 설치하여 측우를 보고하게 했다. 이때 측우대의 규격을 공식화했다. 이 유물은 실록의 규격를 따르고 있어 당시 제도를 살펴볼 수 있게 해 준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국보) 03-20220504<측우기 설치에 관한 기록이 있는 영조실록>

팔도와 양도에 측우기를 만들어 우수의 다소를 살필 것 등을 명하다.

세종조(世宗朝)의 옛 제도를 모방하여 측우기(測雨器)를 만들어 창덕궁(昌德宮)과 경희궁(慶熙宮)에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도 모두 만들어 설치하여 우수(雨水)의 다소를 살피도록 하고, 측우기의 척촌(尺寸)이 얼마인가를 치계(馳啓)하여 알리도록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이는 곧 옛날에 일풍 일우(一風一雨)를 살피라고 명하신 성의(聖意)를 본뜬 것이니, 어찌 감히 소홀히 하겠는가? 듣건대,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측우기는 석대(石臺)를 만들어 안치(安置)하였다고 하였다. 금번 두 궁궐(宮闕)과 두 서운관(書雲觀)에 모두 석대를 만들되 높이는 포백척(布帛尺)으로 1척이요, 넓이는 8촌이며, 석대(石臺) 위에 둥그런 구멍을 만들어 〈측우기를〉 앉히는데, 구멍의 깊이는 1촌이니, 경신년126) 의 신제척(新製尺)을 사용하라.”
하였다. 대체로 〈경신년의 신제척은〉 경신년에 삼척부(三陟府)에 있는 세종조 때의 포백척을 취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참고해서 자[尺]의 규식(規式)을 새로이 만든 것이다. (영조실록 114권, 영조 46년 5월 1일,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국보) 04-20220504
<조선후기 헌종 때(1837년)에 제작되어 충청감영에 설치되었던 측우기>

OLYMPUS DIGITAL CAMERA<측우기가 설치되었던 대구 경상감영 선화당, 건물 앞에 측우대(복제품)을 볼 수 있다.>

대구경상감영측우대
후면에 ‘측우대, 건륭 경인년 5월에 만듦(測雨臺乾隆庚寅五月造)이라고 새겨진 명문을 통해 영조 46년(1770)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기상학자였던 와다 유지의 기록에 따르면, 본 측우대는 경상감영 선화당 뜰에 있다가 총독부 관측소로 옮겨졌다고 하며 이후 기상청에서 소장해왔다. 측우 제도는 임진왜란 등을 거치며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영조의 대에 다시 실행되었는데, 본 측우대는 이때 재건된 측우 제도를 증명해주는 유물로서 의의가 있다. 영조는 세종 대의 옛 제도를 모방하여 측우기를 만들어 창덕궁과 경희궁에 설치하라고 명하고, 8도와 유수부에도 설치하여 측우를 보고하게 했다. 이때 측우대의 규격을 공식화했다. 높이는 포백척(布帛尺)으로 1자, 너비는 8치, 석대 위 둥그런 구멍의 깊이는 1치로 정했다. 포백척의 1자가 약 46cm인데 현재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높이가 46cm이다. 이를 통해 본 측우기는 영조 대의 측우제도가 반영되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국립기상박물관, 2022년)

<출처>

  1. 안내문, 국립기상박물관,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5. 영조실록 114권, 영조 46년 5월 1일,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