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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석빙고(보물 323호), 조선시대 얼음을 저장하던 창고

경북 청도군 화양읍 동천리 청도읍성 동문 바깥 언덕에 있는 석빙고(보물 323호)이다. 조선후기 숙종 때(1713년)에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창고이다. 천정을 받쳐주던 홍예를 제외하고는 지붕은 남아 있지 않다. 동.서로 길이 14.5 m, 폭 5 m 정도의 규모를 하고 있는데 경주 석빙고 다음으로 큰 규모이다. 서쪽에 출입문과 계단을 두고 있으며 바닥을 경사지게 하여 동쪽 구멍으로 물이 빠져 나갈 수 있록 하고 있다. 서쪽 입구에 공사 이력을 새겨놓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석빙고는 겨울에 채취한 얼음을 저장했다가 여름에 사용하기 위해 지은 얼음창고이다. 조선은 건국초기 부터 징빙제도가 있어 빙고(氷庫)라는 직제를 두어 관원들이 관리하였다. 대체로 성 바깥 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에도 한강변에 동.서빙고를 두었다. 현재 전국적으로 경주석빙고(보물 66호)를 비롯하여 6곳의 석빙고가 남아 있다.

청도 석빙고 보물323호01-20200106청도읍성 동문 밖 언덕에 있는 청도 석빙고(보물 323호). 지붕을 흙으로 덮어 봉분처럼 보이는 다른 석빙고와는 달리 지붕을 받치고 있던 석조구조물 만 남아 있어 석빙고의 구조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청도 석빙고 보물323호08-20200106석빙구 서쪽 입구. 큰 화강석을 다듬어 아치로 지붕을 하중을 받치고 있다.

청도 석빙고 보물323호06-20200106석빙고 지붕을 받치는 아치형 구조물

청도 석빙고 보물323호05-20200106아치 사이의 공간에 넓은 판석을 올려놓고 그 위에 흙으로 덮고 잔듸를 심어 봉분처럼 보이게 하고 있다. 경주 석빙고처럼 환기구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흔적을 확인할 수는 없다.

청도 석빙고 보물323호04-20200106옆쪽에서 본 모습

청도 석빙고 보물323호07-20200106동쪽에서 본 석빙고 내부. 동.서방향으로 경사지게 바닥을 만들어 물이 흐르도록 하고 있다. 서쪽 입구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청도 석빙고 보물323호03-20200106서쪽에서 본 석빙고 내부. 동쪽에 물이 빠져나갈 수 있는 배수구를 두었다.

청도 석빙고 보물323호02-20200106언덕에서 내려다 본 석빙고. 물이 잘 빠질 수 있도록 언덕 위에 석빙고를 만들었다.

청도 석빙고, 보물 323호, 경북 청도군 화양읍 동천리,
이 석빙고는 조선 숙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겨울철에 자연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봄, 여름에 사용하기 위한 얼음 저장고였다. 석빙고의 입구 좌측에는 숙종 39년(1713)에 세운 비가 있어 축조연대 및 인력과 공정 기간 등을 알 수 있다. 빙실 바닥은 길이 14.75 m, 폭 5 m의 장방형 구조인데 내부는 계단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 갈수록 점차 경사졌고 중앙에는 배수구가 있어 경사를 따라 물이 외부로 배출되게 되어 있다. 다듬은 돌로 윗부분을 반원형인 홍예로 들어 올리고 잡석으로 벽을 쌓았다. 현재 전국적으로 6기의 석빙고가 국가 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이것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청도 신지리마을 명중고택

경북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마을에 있는 명중고택이다. 운강고택 주인의 손자가 분가하면서 1881년에 지은 집이다. 건물은 ‘-’자형 안채와 중사랑채가 차례로 있으며 안마당에는 곳간채와 방앗간채가 마주보고 있어 전체적으로 ‘ㄹ’자형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앞쪽에 있던 사랑채와 대문채는 도로를 개설하면서 없어졌다.

청도 명중고택 05-20200106청도 신지리마을 명중고택. 구한말에 지어진 양반가옥으로 사랑채, 중사랑채, 안채가 일렬로 배치되어있는 큰 규모의 저택이었다.

청도 명중고택 02-20200106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있었던 중사랑채.

청도 명중고택 01-20200106중사랑채 안쪽으로 보이는 안채.

청도 명중고택 03-20200106옆에서 본 안채와 마당 안족에 있는 곳간채

청도 명중고택 04-20200106옆쪽 도로에서 보이는 명중고택. 비교적 큰 규모의 저택이다.

명중고택, 경북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이 고택은 운강 박시묵의 손자인 박래현이 고종 18년(1881)에 별서로 건립한 것이다. 그후 의 차자 순희공이 입주하여 명중고택이라 하였다. 가옥의 구성은 전체적으로 트인 ‘ㅁ’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고,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마당과 지금은 없어진 사랑채가 있었다. 안마당의 좌.우측에는 방앗간채와 곡간채가 있으며, 정침의 대청 전체에 문을 달아 폐쇄적인 양반댁 부녀자의 생활양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대문채는 6.25 전쟁 때 손실되었고 사랑채도 1990년 도로확장 공사로 철거되었다. 조선 말기 경북 남부지방 상류주택의 공간구성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청도 신지리마을 운남고택

경북 청도군 금천민 신지리 마을에 있는 운남고택이다. 대저택인 운강고택 옆에 있는 집으로 19세기에 분가하면서 지었다. 건물은 -’자형 안채와 사랑채가 앞.뒤로 배치되어 있으며 안채 마당에 헛간채를 두고 있다. 사랑채 앞 마당에는 운강고택처럼 작은 사랑을 두었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옆집 명중고택과 함께 후손들이 일가를 이루면서 모여살고 있다.

청도 운남고택 01-20200106운남고택 사랑채.

청도 운남고택 06-20200106사랑채 앞 마당에는 작은 사랑채가 있었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에 화재로 손실되었다고 한다.

청도 운남고택 03-20200106대문채. 헛간과 대문이 있는 단순한 구조이다.

청도 운남고택 08-20200106안쪽에서 본 대문채. 작은 문간방과 헛간이 있다.

청도 운남고택 04-20200106안채는 ‘-’자형 건물을 하고 있다.

청도 운남고택 05-20200106안마당. 사랑채와 사이에 헛간채를 두고 있다.

청도 운남고택 07-20200106뒷마당

운남고택, 경북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이 고택은 조선말기 운강 박시묵의 셋째 아들인 박재중이 분가하면서 건립한 것으로 운강고택 서편에 인접해 있다. 가옥의 구성은 ‘-’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 대청의 대들보와 보고임이 특이하고 대청 끝의 보고임에는 태극문양을 그려 넣어 멋을 더하였다. 안마당 동쪽에 위치한 중 사랑채는 1935년 경 화재로 인하여 손실되었다. 운강고택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놓여서 운강고택의 주변 경관을 고풍스럽게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청도 선암서원, 구한말 서원 훼철 이후 서당으로 다시 지어진 곳

경북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마을에 있는 선암서원이다. 삼족당 김대유와 소요당 박하담을 모시기 위한 서원으로 조선 선조 때(1567년)에 향현사라는 사당으로 처음 세워졌다 현재의 위치로 옮긴후 선암서원이라 하였다.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박하담의 후손들이 서당으로 다시 지었다.

일반적인 서원과는 달리 사당이 없고 강당이 있는 선암서당과 살림집인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선암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 문집 목판 등을 보관했던 장판각이 있다. 운문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낙동강 지류인 동창천 옆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청도 선암서원 01-20200106청도 선암서원. 구한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서당으로 다시 지어진 곳이다.

청도 선암서원 03-20200106서당으로 다시 지어진 강학공간. 큰 규모의 강당 건물과 사랑채, 목판을 보관했던 장판각이 있다.

청도 선암서원 04-20200106‘선암서당’ 현판이 걸려 있는 강당. 앞면 3칸의 강당 형태 건물로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있다.

청도 선암서원 05-20200106일상적인 생활공간인 사랑채. 행각 형태의 건물로 왼쪽편은 사랑방이, 오른쪽은 창고 등이 있다.

청도 선암서원 09-20200106살림집이 있는 안마당. 사랑채 한쪽편에 있는 창고가 보인다.

청도 선암서원 02-20200106선암서원 앞을 흐르는 낙동강 지류인 동창천.

청도 선암서원 07-20200106담장 바깥쪽 동천을 따라 이어지는 숲길.

청도 선암서원 06-20200106서당이 있는 마당을 출입하는 작은 출입문.

청도 선암서원 08-20200106출입문 앞에서 내려다 보이는 동창천. 경치가 빼어난 곳에 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선암서원, 경북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이 건물은 삼족당 김대유, 소요당 박하담의 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원래 매전면 동산동 운수정에서 향현사로 건립되었으나 조선 선조 10년(1577)에 군수 황응규가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선암서원으로 개칭하였다. 고종 15년(1878)에 다시 중건되고 선암서당으로 고쳐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건물은 강당인 소요당, 안채, 사랑채인 득월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암서원 건축이 특징은 주택에서 서당으로 쓰일 건물이 추가된 유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서원이나 서당보다는 지방 향리초호의 저택으로 더 가치가 있다. 선암서당의 뒤편 장판각에는 보물로 지정된 배자예부운략판목과 지방문화재 해동숙소학판목, 14의사목록판목 등이 보관되어 있어 한국학의 보고라 불렸다. 현재 이 유물들은 청도박물관과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에 전시.보관 중이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김제 금산사 미륵전(국보 62호), 삼국시대 장륙전 모습이 남아 있는 거대 불전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사 경내에 있는 미륵전(국보62호)이다. 미륵삼존상을 모시고 있는 불전으로 삼국시대  목탑과 함께 주불전으로 지어졌던 장륙전의 모습이 잘 남아 있다. 삼국시대 지어졌던 건물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으며 이후 인조 때(1635)에 중수하였다. 건물은 외형상 3층 건물을 하고 있으며, 내부는 통층으로 되어 있다. 1층과 2층은 앞면 5칸, 옆면 4칸이며, 3층은 앞면 3칸, 옆면 2칸이다.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는 등 조선시대 불전 건축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옛 장륙전의 웅장한 모습이 잘 남아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장륙전 모습이 남아 있는 불전으로는 화엄사 각황전(국보 67호), 법주사 대웅보전(보물 915호), 무량사 극락전(보물 356호) 등이 있다. 금산사는 삼국시대 진표(? ~ 752)가 법상종 근본도량으로 창건한 사찰로 법주사와 함께 미륵신앙을 대표하는 사찰로 손꼽힌다.

SANYO DIGITAL CAMERA금산사 미륵전(국보 62호). 삼국시대에 주불전으로 많이 지어졌던 미륵삼존상을 모신 장륙전의 모습이 잘 남아 있는 대표적인 불전이다.

SANYO DIGITAL CAMERA정면에서 본 모습. 건물 1층과 2층은 앞면 5칸, 3층은 앞면 3칸 규모이며, 조선시대 건축에서 주로 볼 수 있는 팔작지붕에 다포계 양식을 사용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건물 1층에는 ’대자보전; 2층에는 ;용화지회’, 3층에는 ‘미륵전’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SANYO DIGITAL CAMERA건물 모퉁이 귀공포. 건물 모서리에는 활주를 세워 지붕을 받치고 있다.

김제 금산사 미륵전 국보62호 11-20190819건물 내부는 통층으로 되어 있다. 제일 높은 기둥은 하나의 통나무가 아닌 여러개의 나무를 이어서 사용하고 있다.

김제 금산사 미륵전 국보62호 12-20190819

미륵전에 모셔진 삼존상. 미륵전에 모셔져 있는 원래의 삼존불상은 정유재란 때 불타버렸으며, 현재의 불상은 인조 때 새로 조성된 소조상이다. 그 중 본존불은 1934년에 다시 중수하였다.

SANYO DIGITAL CAMERA금산사 방등계단에서 내려다 보이는 미륵전.

SANYO DIGITAL CAMERA남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금산사 경내 모습. 석가모니 사리를 모신 방등계단이 중심축에 있으며, 미륵전은 경내 동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미륵전, 국보 62호
미륵전은 진표율사가 미륵장륙상을 봉안하기 위하여 766년, 신라 혜공왕 2년에 처음 건립한 법당이다. 법당내에는 미륵불 등 삼존상이 조성되어 있다. 미륵전은 정유재란에 전소되었으나 인조 13년, 1635년에 수문대사가 한국 유일의 삼층법당으로 재건한 것이다. 법당 외부 1층과 2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고, 3층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형식이며, 법당 내부는 층이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은 통층이다. 건물 중앙의 제일 높은 기둥이 하나가 아니라 몇개의 기둥을 연결하여 만든 것이다. 이러한 기둥양식은 목조탑 양식에서 변안된 양식이다. 오랜 세월을 지내는 동안 목재가 썪고 건물이 낡아 1988년부터 1993년까지 5년간 문화재관리국의 주관으로 건물을 전면 보수하였으며 이후 다시 번와공사를 하였다. 법당 내부 지하에는 연대미상의 철제연와대가 있는데, 이로 미루어 법당 내부에는 원래 철불이 모셔져 있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다. 항간에는 연화대가 솥으로 알려져 있으며 솥을 만지는 사람은 속세의 업장을 소멸하고 소원을 성취한다고 전해오고 있다. 미륵전의 터는 원래 용이 살고 있던 연못이었으나 어떤 고승의 가름침에 따라 솥으로 연못을 메워 용을 쫓고 미륵전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안내문, 김제 금산사, 2009년)

<출처>

  1. 안내문, 김제 금산사,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