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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불비상, 금은기, 도용 (남북조, 수, 당)

불비상은 비석형태에 돋을새김으로 불상 등이 새겨진 것으로 마을 입구, 주요 교차로, 사원 등 대외적이고 공적인 장소에 주로 세웠다. 조상의 안녕을 기리고 공덕을 쌓는 역할을 했다.우리나라에서 통일신라시대 초 충청도지방에서 불비상이 만들어 졌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01<중국 불비상>

조상비(造像碑)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래 새로운 형태의 조형물인 조상비가 등장했다. 조상비의 기본 형태는 네모난 돌에 불상과 명문을 새긴 것으로 중국의 전통적인 비(碑)에 종교적 숭배대상인 불상이 더해진 형식이다. 중국의 비가 지배계층을 위한 것이었다면 조상비 제작에는 지배계층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발원자로서 참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조상비는 마을 입구, 주요 교차로, 사원 등 대외적이고 공적인 장소에 주로 세웠으며, 조상의 안녕을 기리고 공덕을 쌓는 역할을 했다. 이곳에 전시된 네 점의 중국 불비상은 북위(北魏)와 당(唐)대에 제작된 것으로 대체로 석가불이나 아미타불, 미륵불이 묘사되고 있고, 일부에는 공양자상과 조상기(造像記)가 새겨져 있다. 이처럼 조상비는 당시 유행했던 불교 도상에 발원자의 염원을 담아 이들의 신앙과 바람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리고자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여래좌상을 중심으로 나한, 보살, 신장을 비롯하여 불화 등에서 볼 수 있는 다앙한 군상들이 묘사되어 있다. 하단에는 향로와 사자상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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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비상(佛碑像), 북제 ~ 수(隨)>

다양한 군상이 빽빽하게 묘사된 북제의 불비상이다. 앞면에는 앉아 있는 불상을 중심으로 나한과 보살, 신장이 주위에 둘러 서 있고 상단에는 꽃줄을 든 천인과 보탑이, 불상 아래에는 향로와 사자,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다. 뒷면은 2단으로 된 감실에 오존불과 반가사유상이 새겨져 있다. 다양한 상들로 가득 채워져 구도가 복잡하고 세부 표현이 다소 번잡하지만, 부피감이 살아 있는 인물 묘사나 허리를 쌀짝 비튼 보살의 삼곡(三曲) 자세는 눈길을 끈다. 앞면 하단의 명문에는 재주(齋主) 등 읍의 주요 인물 명단과 공양주 등이 “부모님을 위하여 한마음으로 부처를 모신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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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비상, 북제 ~ 수>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02<윗부분 오존불>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03<아랫부분 인물상>

높이가 162cm에 이르는 비교적 큰 북제 불비상이다. 앞면은 오존불(五尊佛)을, 중단에는 역사(力士)를 새겼고, 가장 윗부분에는 보탑(寶塔)과 천인을 조각했다. 중단의 역사는 자연스러우면서도 힘찬 모습이다. 뒷면은 상단에 용 장식과 오존불을 새기고, 중단에는 4개의 감실에 각각 삼존불을, 하단에는 향로와 사자, 인물상을 표현했다. 가장 아래에는 불비상에 조각된 각각의 상을 공양한 사람의 이름을 새겼다. 불상은 다소 경직된 모습이지만 사자는 예스럽고 소박한 느낌을 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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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비상, 당 현경 5년(660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04<윗부분 불상과 협시보살>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05<아랫부분 감실의 오존상>

당 현경 5년(660년)에 고만해 일가족이 발원한 불비상이다. 육감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한 불상과, 보살상은 전형적인 7세기 당대 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앞면 상단에는 의자에 앉은 자세의 불상과 협시보살이 있고 그 위로는 보탑과 천인이 있으며, 중단에는 2개의 감실에 오존상을 묘사했다. 뒷면 상단에는 용 장식이, 중단에는 삼존불과 나무를 새겼다. 명문은 앞면의 하단과 중단의 감실 사이에 새겨져 있는데, 고만해가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형수와 처, 조카, 아들, 딸 등 일가친척이 힘을 모아 불비상을 조성했다는 내용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앞쪽에 삼존불상이 새겨져 있으며, 위쪽에 서로 얽혀 있는 용으로 장식했다. 아래쪽에 발원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00여명 넘는 발원자가 참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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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비상, 북위 영안 2년(529년)>

북위 영안 2년(529년)에 조성된 불비상이다. 꼭대기 부분은 서로 얽혀 있는 용 4마리로 장식했고 상단에는 삼존불과 발원자의 관직명이, 중단에는 공양자상, 그리고 하단에는 함께 발원한 이들의 이름을 새겼다. 공양자상 사이에 명문이 있는데, 영안 2년에 국왕과 칠세부모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이 불비상은 마을의 신앙 공동체인 읍의 구성원인 개씨와 양씨, 왕씨 등을 포함하여 100명이 넘는 발원자가 함께 조성한 것이며 10여 명의 주요 공양자는 말을 타거나 일산(日傘)을 쓴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춘추전국시대 이후에는 금속으로 만든 실생활 기물이 많아졌고, 진한대에 이르면 금은입사(金銀入絲), 감옥(嵌玉), 누금세공 등을 이용한 화려하고 세밀한 금속기가 만들어졌다. 당대에는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으로부터 금속제 그릇들이 수입되었으며, 그들로 부터영향을 받아 상당히 수준높은 금속제 그릇이 만들어졌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09<금은기>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14<금은기>

당(唐)대의 금은기(金銀器)
당대에는 수준 높은 금속 제조 기법으로 완, 합, 배, 반, 호 등 다양한 금은기를 생산하였으며, 궁정과 귀족 계층에서 널리 사용했다. 실크로드를 통해 서아시아 문화가 유입되어 당나라 사람들 사이에서 이국풍이 인기를 끌면서 다양한 형태의 금은제 그릇이 제작되었다. 손잡이가 있는 잔, 굽다리 은잔 등은 서아시아 그릇에서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들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06<1. 사자 꽃무늬 은접시, 당>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07<2. 원앙무늬 합, 당>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08<3. 사자 보상화무늬 합, 당>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10<1. 상자, 당>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11<2. 포도 국화 넝쿨무늬 병, 당>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12
<3. 당초문이 새겨진 잔, 당><4. 손잡이가 달린 잔, 당>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13<5. 꽃 새 넝쿨무늬가 새겨진 은제 가위, 당>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15<1. 상자,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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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자무늬 주자, 요(遼, 916~11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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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꽃모양 잔,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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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귀때잔,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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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잔,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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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굽다리잔, 요>

굽과 몸통이 모두 밖으로 벌어진 굽다리잔이다. 굽 하단은 작은 금 알갱이를 붙이는 누금세공 기법으로 장식했다. 몸통 바같 면에는 큰 보상화(寶相華) 무늬와 활짝 핀 꽃무늬를 번갈아 새겼다. 그릇 안쪽 바닥 중앙에는 두들겨서 표현하는 타출(打出)기법으로 거북이를 표현하였고, 그 주변에는 8개의 보상화무늬를 새겨 장식하였다. 몸통 외면에도 보상화 무늬 12개를 음각했고 문양 사이사이에 꽃잎이 4개인 꽃무늬를 장식했다. 굽 주변에 명문이 새겨져 있어, 1026년에 제기용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도용(陶俑)은 중국에서 죽은이와 함께 묻는 인물.동물의 상을 말하며 명기의 일종으로 흙으로 빚어서 만든 것을 말한다. 이는 현실의 사람이나 가축 등을 본 떠 만들어 죽은이를 저승으로 호종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전국시대 순장제도가 사라지면서 예기(禮器)제도가 무의미해지고 껴묻거리의 종류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한대 이전에는 옥기, 청동그릇 등의 예기와 실생활에 사용된 토기, 무기, 마구류가 주로 매장되었지만, 한대 이후에는 인간의 감정이나 생활상을 실감나게 표현한 인물과 동물도용 제작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매장 수량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22<도용>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23<도용>

힘이 넘치는 사실성이 돋보이는 도용이다. 서역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서역지방을 통해서 외국말이 본격적으로 수입되기 전인 남북조시대까지는 다리가 짧은 중국 토종말 형태로 만들어지진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26<도용>

도용(陶俑)
진.한대에는 많은 부장품을 함께 묻는 후장(厚葬)제도가 유행하면서 지배층 무덤의 부장품 종류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한대 이전 무덤에서는 옥기, 청동그릇 등의 예기(禮器)와 실생활에 사용된 토기, 무기, 마구류들이 출토된 반면, 한대 이후 무덤에서는 인간의 감정이나 생활상을 표현한 인물과 동물 도용이 다수 출토되었다. 또한 당대에는 무덤을 지키는 용도로 채색이 화려한 삼채 진묘수, 말, 낙타 등을 함께 매장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21<2. 문관과 무사, 남북조>

죽은 자를 받들어 모시기 위하여 무덤에 부장되는 문관과 무사 모습의 도용이다. 복장은 모두 호복(胡服) 차림이다. 호복은 전국시대에 말 위에서 활을 쏘는 궁술과 함께 기마에 편한 복장이 북방 유목문화로부터 유입된 것으로, 바지와 길이가 짧은 웃옷을 의미한다. 북조에서는 신분에 관계없이 평상복과 조복으로 입을 만큼 정착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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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말 탄 여인,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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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호인,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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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매를 든 인물, 당>

손에 매를 들고 사냥하는 인물 모습의 도용이다. 북방 민족의 옷인 호복을 입고 복두를 쓴 남장한 여성으로, 당대에 매사냥은 여성들의 대표적인 야외 오락이었다. 인물은 옷깃을 양쪽으로 열어젖힌 번령포(飜領袍)를 입었고 허리에는 호풍의 여러 물품을 드리운 첩섭대(䩞鞢帶)를 둘렀는데, 이는 돌궐의 복제에서 유래된 것이다. 외래문화에 개방적이었던 당대에는 호풍이 이국 양식의 대명사로 여겨져 민간 및 여성들에게까지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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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남성과 여성, 서한>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24<1. 무덤을 지키는 괴수, 남북조>

외부의 나쁜 기운으로부터 죽은 이를 지키기 위해 무덤에 매장하는 괴수 모양 도용이다. 진묘수는 날카로운 사슴의 뿔 또는 사자의 갈기, 긴 혀, 괴기스럽게 포효하는 괴수의 얼굴 등이 특징인데, 이것은 보는 이를 위협하여 감히 무덤 내부로 침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이 진묘수는 네 발 짐승의 몸에 눈을 부릅 뜬 무서운 사람의 얼굴을 하였고 등의 갈기는 위로 곤두섰다. 이지러진 얼굴 표정에 보이는 생동감과 안정적인 자세는 장인의 숙련된 솜씨를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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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덤을 지키는 괴수(鎭墓獸),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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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소,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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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삼채말, 당>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41
<2. 말, 남북조>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수당시대 20220215_42
<3. 낙타, 당>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2. 위키백과, 2023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하,상,주,춘추전국,진,한)

기원전 3,000 ~ 5,000 년 전 황하 유역에 번성했던 신석기 앙소문화(仰韶文化) 동아시아에서 가장 앞섰던 선사문화로 여겨진다. 중국에서 확인된 앙소문화유적의 2/5 정도인 2,000 여개의 유적이 섬서성에 분포하고 있는데, 바닥이 뾰족한 항아리와 도기가 유명하다. 섬서지역은 앙소문화의 중심지에 있었으며 인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상호 작용을 통해 지역 간의 통일을 촉진했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01<채색항아리(彩陶), 신석기시대 앙소문화>

앙소문화(仰韶文化)는 황하 중상류에서 발생한 신석기 문화이며, 이 토기는 앙소문화권에서 생산된 것이다. 토기 표면에 흑색의 굵은 선으로 그린 반원형과 격자무늬, 그물무늬가 있고 허리 부분에는 양쪽으로 손잡이가 달려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갑골문(甲骨文)은 “계문(契文)”, “복사(卜辭), “라고도 부른다. 중국 상(商)말에서 주(周)초(기원전 1,300~1,100년경)까지 왕실에서 점복(占卜)의 결과를 거북껍질이나 동물뼈에 기록한 문자이다. 상나라 은허 유척에서 발견된 초기의 갑골문은 물체의 형상에 표현한 상형문자로 약 4,500여자 정도이다. 갑골문에서 발견된 문자는 내용이 확대되어 지사자(指事字, 상형자를 응용해서 만든 글자),상형자.회의자(여러개 문자를 합쳐 뜻을 만듬)뿐만 아리자 일부 형성자도 발견된다. 갑골문에 적힌 내용은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천문, 지리, 국방, 인물, 정벌, 교통, 의복, 목축, 종교 등 다양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02<갑골문(甲骨文), 상 기원전 16~11세기>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03 <갑골문(甲骨文), 상 기원전 16~11세기>

갑골문은 중국의 고대 문자로 거북이 배와 짐승 뼈에 새겨진 상형문자이다. 중국 상나라 유적에서 발견된 이후 중국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연대는 기원전 13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현재까지 십여 만 편에 4,600자 정도가 발견되었고, 그중 1,700여 자가 해독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고대 중국인들은 신체의 아홉개의 구멍을 금옥(金玉)으로 막으면 시신이 썩지 않는다고 하여 시신에 옥을 부장했는데, 이를 장옥(葬玉)이라 한다. 옛 사람들은 옥이 신령스러운 힘을 지녔다고 믿었는데, 매미는 부활, 돼지는 먹을 거리 같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04<1. 옥함, 2. 옥벽, 한>

옥편(玉片)은 시신이 입는 옥의(玉衣)의 일부로 네 모서리에는 끈을 끼울 수 있는 구멍을 뚫었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05<3. 색옥, 4. 옥돈, 5. 옥편(玉片), 한>

장옥(葬玉, Funerary Jades)
고대 중국인들은 옥이 시신을 보호하고 죽은 이를 선계(仙界)로 인도라는 힘을 가졌다고 믿었다. 신체의 아홉 구멍을 금옥(金玉)으로 막으면 시신이 썩지 않는다고 하여 시신에 옥을 부장했는데, 이를 장옥(葬玉)이라고 한다. 한대의 장옥은 용도에 따라 입믈 막는 함옥(含玉), 신체의 구멍을 막는 색옥(塞玉), 손에 쥐는 옥돈(玉豚), 가슴에 얹는 옥벽(玉璧) 등으로 구분된다. 매미모양의 함옥은 부활을 의미하고, 색옥은 유체의 정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하며, 손에 쥔 돼지모양의 옥돈은 내세에서 먹을 양식을 상징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국의 고대 청동기는 하(夏)나라때부터 만들기었으며, 지금도 그 광택이 수려하여 당시의 수준 높았던 주조 기술을 알 수 있다. 상(商).주(周)대에는 예기로써 신분에 엄격한 제한을 두고 사용되었으며, 진한대 이후 점점 쇠퇴하였다. 그릇 안쪽에 새겨진 금문을 통해 역사적 사실과 제작자의 이름 등을 알 수 있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06<청동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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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동호(靑銅壺), 상 기원전 16~11세기>

청동기로 만든 술 담는 의례용 그릇이다. 몸체는 타원형이고 그릇 표면에는 용과 새 무늬가 장식되어 있으며 양쪽에 귀가 달려 있다. 전형적인 상대 말기의 청동호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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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청동호, 상>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37
<3. 청동고(靑銅觚),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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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동고, 상>

고(觚)는 술을 담아 마셨던 잔이다. 나팔모양의 고는 오래된 청동 예기(禮器)로 상 말기 무덤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술잔 표면에는 상상 속의 괴수 도철(饕餮)무늬를 새겼고 잔 아래 바닥 안쪽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07<5. 청동정(靑銅鼎), 상>

정(鼎)은 양쪽에 손잡이가 있고 다리가 3개 또는 4개 달린 솥이다. 제사와 연회에서 육류를 담아 끓이는 데 사용했다. 지배층의 신분과 권위를 상징하는 중요한 기물로 정의 앞, 뒷면을 상상 속의 괴수 도철무늬로 장식하였다. 정 안에는 ‘子’ 모양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08<6. 청동궤(靑銅簋), 서주 기원전 11세기 ~ 771년>

중국 고대의 청동 예기인 궤(簋)와 정(鼎)은 소유자의 신분이 높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그릇으로, 여기에 곡식을 담았다. 이 궤는 안쪽 바닥 가운데에 상형문자로 된 명문이 새겨져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국 고대문화
중국 고대 문명은 신석기시대의 채도(彩陶)와 옥기(玉器), 청동기시대의 갑골문과 청동기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채도는 정착 생활과 농경이 시작되면서 생산되었으며, 도기 표면에는 동물무늬나 기하학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옥기는 지배계급의 상징물로서 주술적인 의미를 가졌으며 장신구 구실을 했다. 청동기는 고대국가 형성과 함께 제작되기 시작하여 주로 상나라와 주나라 때 제기와 식기, 무기 등으로 제작되었다. 왕과 제후무덤에서는 부장품으로 매장된 다양한 청동기가 발견되는데 신분계급에 따라 청동기의 매장 수량이 달랐다. 또한 청동그릇에는 사람이름과 관직명,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금문(金文)이 새겨져 있어서 당시의 사회 상황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껴묻거리로 만들어진 누각 모형이다. 4층 건물 형태로 주택, 부엌 등과는 달리 실제 생활하는 용도는 아니다. 사후세계에서 신선처럼 살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고 있다. 권력을 상징하는 건축물인 망루 형태의 궐(闕)이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남북조시대 이후 불교의 목탑과 석탑으로 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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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각모형, 동한(東漢, 25~220년), 녹유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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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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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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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쪽 옆에서 본 모습>

한대(漢代)에는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는 풍속이 유행하여 무덤에도 다양한 껴묻거리를 함께 묻었는데, 그 가운데는 집, 부엌, 축사, 방앗간, 화장실 등 망자를 위한 건축 모형도 있다. 이 망루 모형은 4층이며 층마다 난간을 만들어 인물상을 배치하고, 지붕 처마 끝에는 4개의 꽃잎이 달린 꽃모양 장식을 부착했다. 누각 모형의 양식은 한대의 실제 건축 양식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되어 왔지만, 최근에는 신선 사상과 관련하여 망자의 사후 영생을 기원하는 관념적 건축이하는 의견도 제기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한(漢)대 막새기와에 새겨진 내용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1~12 개의 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4자로 구성된 경우가 많다. 그 의미는 상서로운 단어, 공직, 궁궐, 능원, 관역(關驛)의 이름 등 다양하다.  주제는 사회 생활의 다양한 측면을 다루고 있으며 인장 글씨 스타일로 서예적인 가치를 보여준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09<1. ‘부귀만세(富貴萬歲)’가 적힌 수막새, 한><2. 구름과 나무무늬 수막새, 전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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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도철무늬 막새, 전국시대 기원전 475~2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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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꽃무늬 수막새, 전국시대><5. 도철무늬 막새, 전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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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동물무니 수막새, 전국시대 기원전 475~2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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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나무 동물무늬 반원막새, 전국시대 기원전 475~221년>

건죽의 미- 기와
기와는 비바람으로부터 지붕을 보호하고 동시에 건축을 장식하는 기능을 한다. 중국은 주나라 때부터 왕실을 주임으로 기와를 사용했으며, 전국시대에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중국의 기와에는 시대와 출토 지역에 따라 귀신, 사슴, 나무 등 다양한 무늬가 표현되어 있으며, 이외에 좋은 글귀를 새겨 넣기도 했다. 수.당대 이후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연꽃무늬 기와가 주류를 이루고, 송.원대 이후에는 청색과 황색 유약을 발라 구워 독특한 색깔을 띠는 다양한 기와들이 제작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청동거울은 제사장이나 부족장의 권위를 나타내는 주술적인 용도였으나, 점차적으로 화장을 위한 일상용품으로 그 용도가 변한다. 주술적의미나 장식적인 목적으로 다양한 그림이나 글자를 새겨 놓고 있으며, 조형미가 우수하며, 보존상태가 좋은 유물들이 많은 편이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14<청동거울>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15<1. 신선 동물무늬 거울(神獸鏡), 동한 25~220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16
<2. ‘장의자손(長宜子孫)’명 거울, 동한 25~2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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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용무늬 거울(龍文鏡), 한 기원전 206년 ~ 기원후 2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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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용무늬 거울(龍文鏡), 전국시대 기원전 475~2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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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신령스러운 동물무늬 거울(獸帶鏡), 동한 25~2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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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네개의 ‘산(山)’자가 새겨진 거울(四山鏡), 전국시대 기원전 475~2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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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네모난 청동거울, 전국시대 기원전 475~221년>

화장 도구 – 청동거울
고대에 주술적인 성격을 지녔던 청동거울이 점차 화장 도구로서의 기능을 갖추게 되면서, 춘추시대를 거쳐 전국시대에 이르면 정교하고 수준 높은 청동거울이 만들어진다. 동판의 표면을 잘 다듬어 얼굴을 비쳐볼 수 있는 청동거울은 뒷면에 다양한 무늬가 장식되어 있어서, 거울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후대에 와서도 수준 높은 주조 기법과 장식 기법을 보여주는 금속공예로 주목을 받는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등잔과 마찬가지로 향을 피우는 향로는 주나라 말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한나라 때에는 박산향로가 크게 유행하였다. 향로는 인도에 성행했는데 불교의 전래와 함께 널리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22<1. 박산향로, 동한 25~220년, 황갈유도기>

한나라때 유행했던 박산(중첩된 산악모양) 형 뚜껑으로 바다에서 3개의 산이 용솟음치는 형상이다. 몸체의 외벽에 신선,파도,구름, 풀과 나무 등의 무늬를 새겨넣었고 술을 담던 그릇이다. 앞선 시기에는 동물모양 그릇이 많았으나 한대에는 자연을 형상하여 만든 그릇이 유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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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박산단지, 한, 황유도기>

박산향로와 박산준(博山樽)
한대에는 신선 사상이 유행하여 불사영생(不死永生)하는 신선이 산다는 선계의 산, 즉 박산(博山)을 표현한 향로와 술잔을 많이 제작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박산향로에 향을 피우면서 신선을 불러내 불사약(不死藥)을 얻고자 했고, 박산준에 술을 담아 신산(神山)의 불사수(不死水)처러머 생명의 술로 변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아래에 전시된 박산향로는 뾰족한 산모양 뚜껑과 형태만 남은 가는 기둥으로 보아 단순화된 후대의 작품으로 보이며, 박산준은 세속화된 도교 신앙의 영향으로 틀을 이용해 많은 수량을 찍어 낸 제품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중국 고대문화 20220215_24<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황화에서 꽃핀 예술>

황하(黃河)에서 꽃핀 예술
중국은 황하 문명을 기반으로 성장했으며, 광할한 영토에 여러 민족의 흥망성쇠가 거듭되면서 다채로운 문화가 전개되었다. 하나라(夏, 기원전 21~16세기)를 시작으로 상나라(商, 기원전 16~11세기)와 주나라(周, 기원전 11세기~256년)에 이르러 국가의 틀이 마련되었고, 정치적 혼란기였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 기원전770~221년)에는 새로운 가치와 규범을 제시하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등장으로 사상과 학문이 꽃을 피운다.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 진나라(秦, 기원전 221~206년)와 그 뒤를 이은 한나라(漢, 기원전206~기원후220년)는 도량형과 문자를 통일하고 정치사회제도를 재정비하며 통합을 이루었다.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 221~589년)에는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가 융성하여 중국 전역에 사찰과 석굴사원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중국의 불교 사상과 미술 양식은 아시아 전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대(唐, 618~907년)에는 외래문화가 적극 수용되어 국제적인 성격의 문화가 융성하며 금속공예품과 삼채 도자기가 특히 발달하였다. 송대(宋, 960~1279년)에 이르면 전국의 가마에서 각기 개성을 살린 도자기들이 다양하게 생산되어 중국 도자문화가 크게 발전한다. 한편 자연의 위대함을 이상적으로 표현한 산수화와 함께 시서화(詩書畵)의 예술이라 부르는 문인화(文人畵)가 태동하여 원대(元, 1271~1368년)에는 복고적 문인화풍으로 이어진다. 명대(明, 1368~1644년)에는 고상한 취향의 문인화가 유행하고 궁정화원 소속 직업화가들의 활동이 활발했으며, 청대(淸, 1644~1911년)에는 서양화풍이 유행하면서 더욱 다채롭고 개성 있는 회화 세계가 펼쳐진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2. 위키백과, 2023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기] 일상 속 청동기

춘추전국시대를 지나면서 천자를 중심으로 한 신분질서는 느슨해지고 신분에 따른 사용을 규정한 열정제도도 지켜지지 않으면서 청동예기의 제작이 크게 줄어든다. 또한 철기가 대량생산되면서 무기나 공구 등은 철기로 대체된다. 반면에 일상 생활용품은 여전히 청동기로 제작되었다. 서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향로나 등잔, 사치품으로 사용된 거울이나 허리띠 등이 새로이 청동기로 만들어진다. 예기로 사용되었던 세발솥(鼎)이나 술통(壺) 등 여러 기물들도 일상생활 용품으로 사용되면서 화려한 장식 등은 간소화되고 실용성을 중시하게 된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01<52. 고기 삶는 세발솥(용문정龍文鼎, Ding), 춘추 중기 기원전 7세기 전반 ~ 6세기 전반>

춘추시대가 되면 청동기는 의례보다 실생활에서 사용하기 위해 많이 만듭니다. 이런 실생활 청동기는 화려함보다는 기능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용무늬는 가장 중요한 무늬 중 하나입니다. 이 세발솥에 장식한 용무늬는 사방으로 연속되면서 겹칩니다. 혀를 내밀고 있는 용의 모습이 재미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02<53. 곡식 담는 그릇(반룡문보蟠龍文盙, Fu), 춘추후기 기원전 6세기 전반 ~ 기원전 476년>

여러 기록에 따르면 기장, 벼, 조 등의 곡식을 담는 그릇 보(簠)는 서주 전기에 출현하였습니다. 뚜껑과 몸체는 모양이 같아 서로 뒤집어도 될 정도입니다. 몸체에 뚜껑을 닫으면 직육면체와 비슷한 모습이 됩니다. 뚜껑의 네 변에는 동물머리 모양의 작은 고리가 달려있고 경사진 벽에는 사방으로 연속하는 용무늬가 장식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청동 예기의 변화
청동예기는 춘추시대에 급격한 변화를 맞이합니다. 많은 종류의 그릇이 사라지거나 형태가 변하고 새로운 예기가 등장하였습니다. 음식물을 담는 그릇인 대(敦)는 고기 삶는 세발솥인 정(鼎)과 곡물 담는 그릇인 보(盙)의 특징이 결합된 새로운 그릇입니다. 술병인 호(壺) 역시 몸통이 납작한 모양이 유행합니다. 전국시대를 거쳐 한나라에 이르면 대부분의 청동예기가 사라집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08<54. 사슴 모양 돗자리 문진(녹형진鹿形鎭, Zhen), 서한 기원전 202년 ~ 기원후 8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09<54. 사슴 모양 돗자리 문진(녹형진鹿形鎭, Zhen), 서한 기원전 202년 ~ 기원후 8년>

한나라 때까지 사람들은 대개 바닥에 앉아서 생활하였습니다. 이에 일어나고 앉을 때 돗자리 모서리가 말리거나 옷이 걸리는 것을 막기 위해 자리의 네 모서리를 누르는 돗자리 문진이 발달합니다. 이 사슴 모양 문진은 청동을 도금한 것입니다. 사슴의 등에는 조개껍질을 끼워 넣었으며, 흰색과 옅은 노란색 바탕에 크기가 다른 흑갈색 반점이 있어 열대나 아열대 바다의 조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겁게 하기 위해 문진 속에 납을 가득 채웠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10<55. 술단지(쌍룡락문령雙龍絡文령_Ling), 춘추후기 기원전 6세기 전반>

몸통에는 끈무늬로 네모 칸을 두었는데, 서로 연결되는 곳에는 매듭을 만들었습니다. 네모 칸 안은 용무늬를 장식하였습니다. 모든 용무늬는 작은 원점무늬를 바탕으로 하여 배열이 가지런합니다. 이런 장식은 진(晉)나라와 연나라 청동기에 많이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등잔은 음식을 담는 용도의 예기인 두(豆)에 기름을 태워 불을 밝히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전국시대 이후에 제례의 용도 등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한나라 때 다양한 형태의 등잔들이 만들어졌다. 아마도 서역의 영향을 받아 종교적인 의미가 더해진 것으로 보인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11<56. 새모양 등잔(주작등朱雀燈, Deng), 서한 기원전 202년 ~ 기원후 8년>

한나라 때에는 동물 모양 등잔이 유행했습니다. 이 등은 주작 모양으로, 머리를 들고 꼬리는 세운 채 날개를 펴서 막 날아오르려는 모습입니다. 주작은 신령스러운 새로 상서로움을 나타냅니다. 청룡, 백호, 현무와 함께 사방을 지키는 신을 상징합니다. 비슷한 주작 모양 등잔이 허베이성의 유승 무덤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12<57. 기러기 다리 모양 등잔(양신가안족등 陽身家雁足燈, Deng), 서한 기원전 36년>

다리 모양 등잔은 한나라의 궁전에서 자주 사용되는 등잔의 하나였습니다. 이 등잔의 접시 중심에는 원통형의 삽입구가 있어 기름으로 불을 붙여 사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초를 사용할 수도 있었습니다. 등잔에는 서한 원제(元帝) 때인 기원전 36년 궁궐에서 사용한 뒤, 기원전 24년 성제(成帝)가 양평가(楊平家)에게 하사했던 사실을 기록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13<58. ‘림광궁’ 글자가 있는 등잔(림광궁등林光宮燈, Deng), 서한 기원전 38년>

이 등잔은 원래 행등(行燈)이라 부르던 것입니다. 긴 손잡이가 붙어 있어 들고 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등 접시의 벽이 곧고 깊이는 얕으며 중심에는 심지 고정 못이 있습니다. 25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림광궁은 서한 시기의 이궁(離宮)으로, 건소(建昭) 원년(기원전 38년)에 사용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등잔과 마찬가지로 향을 피우는 향로는 주나라 말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한나라 때에는 박산향로가 크게 유행하였다. 향로는 인도에 성행했는데 불교의 전래와 함께 널리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14<59. 향로(훈로薰爐, Lu), 서한 기원전 202년 ~ 기원후 8년>

향로는 받침, 몸통, 뚜껑으로 구성됩니다. 일부 받침은 쟁반으로 제작되어 물을 담아 윤기 나게 하고 청결을 유지하였습니다. 이 향로는 ‘豆’와 닮았는데, 모양이 우아하고 곡선이 아름답습니다. 뚜껑의 정중앙은 불무늬를 표현하였고, 그 주위에 투조한 세 개의 양 머리를 장식했습니다. 얇고 짧은 손잡이 아래의 받침에는 용무늬가 장식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청동거울(銅鏡)은 중국 상왕조부터 만들어졌는데 제사, 주술 등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상이나 동물문양으로 장식하여 종교적인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춘추전국시대 청동예기가 쇠퇴하면서 얼굴을 비치는 치장용으로 청동거울이 만들어졌으며 전국시대부터 당나라 때까지 많이 만들어졌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16<60. ‘대락부귀’ 글자가 있는 거울(대락부귀반룡문경大樂富貴蟠龍文鏡, Jing), 서한 기원전 202년 ~ 기원후 8년>

청동거울은 한나라 때 가장 많이 만들어진 청동기로, 당시 일상용 청동기가 점차 칠기와 도자기로 대체될 때 청동거울은 오히려 중요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뒷면에 3개의 꼭지를 만들고 주위에 용무늬를 두었습니다. 그 바깥에는 “大樂富貴, 千秋萬歲, 宜酒食”이라는 글을 둘렀습니다. 즐겁고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희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15<61. 거울 (사호문경四虎文鏡, Jing), 전국 기원전 475년 ~ 기원전 221년, 허난성 뤄양 진춘>

이 거울의 뒷면 가운데 다리 모양의 꼭지가 있습니다. 뒷면을 가득 채운 네 마리 호랑이의 머리는 가운데 꼭지 주위를 깨무는 모습입니다. 이런 호랑이무늬는 진(晉)나라 특유의 청동기 장식으로, 산시성 허우마 청동기 생산 유적에서 출토된 거푸집의 무늬와 굉장히 비슷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대구(帶鉤)는 고대 귀족과 군인 등이 고대에는 ‘서비(犀比)’라고도 불렀다. 주로 청동을 주조하여 만들었는데 금, 은, 철, 옥 등으로 만들기도 했다. 대구는 서주 때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진나라와 한나라 때 크게 유행했다. 대구는 허리를 매는 일상적인 용도뿐 아니라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으로도 사용되었다. 용, 동물, 새 등의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다양한 가공기술을 적용하여 예술적으로 수준이 높은 유물이 많다. 한반도에서도 호랑이나 말 형태를 하고 있는 허리띠고리가 출토되고 있다. 당시 중국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21<62. 허리띠 고리(용문대구龍文帶鉤, Daigou), 전국 기원전 475년 ~ 221년>

허리띠 고리는 허리띠에 달아 옷의 매무새를 다듬는 것으로 춘추시대에 출현하였습니다. 이 허리띠 고리는 전체적으로 삽 또는 숟가락 모양입니다. 머리는 길고 뾰족한 부리를 가진 새머리 모양이며 긴 목으로 몸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삽날과 비슷한 형태의 몸통에는 두 마리의 용이 장식되어 있으며 한 마리의 머리는 위를 향하고 다른 한 마리의 머리는 아래쪽을 향하여 몸통을 휘감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20<63. 허리띠 고리(조문대구鳥文帶鉤, Daigou), 전국 기원전 475년 ~ 221년>

이 허리띠 고리는 물새 모양으로, 고리의 머리는 새의 머리 모양이고 몸통은 새의 몸통 모양입니다. 이처럼 날개를 편 물새 모양 허리띠 고리는 전국시대의 초나라 무덤에서 많이 발견되며, 대개 허리띠 위에 끼워 검을 차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전국시대와 서한시대의허리띠 고리는 물새 모양이 가장 많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19<64. 허리띠 고리(은상감기하문대구銀象嵌幾何文帶鉤, Daigou), 전국 기원전 475년 ~ 221년>

이 허리띠 고리는 머리는 짧고 작으며 목은 가늘고 깁니다. 몸통은 좁은 비파 모양입니다. 이런 형태의 허리띠 고리는 주로 전국시대에 조나라, 위나라, 한나라에서 유행합니다. 전체적으로 금박과 은박을 상감하여 구성한 기하무늬는 화려하고 눈부십니다. 인체의 허리 부분과 딱 맞는 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18<65. 허리띠 고리(도금녹송석용문대구鍍金綠松石龍文帶鉤, Daigou), 전국 기원전 475년 ~ 221년>

이 허리띠 고리의 몸통은 용모양이며 꼬리는 용의 머리입니다. 구불구불한 용 몸통 위에 터키석을 상감하였으며, 용의 발톱을 정교하게 새긴 뒤, 전체를 도금하였습니다. 이런 허리띠 고리는 전국 전기에 출현하며 전국 후기에 유행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17<66. 호랑이 모양 허리띠 고리(호문대구虎文帶鉤, Daigou), 전국 기원전 475년 ~ 기원전 221년>

사람 또는 동물 모양을 본떠 만든 허리띠 고리는 대칭을 이루지 않아 한 방향으로 걸 수밖에 없습니다. 고리의 머리는 짧고 작으며 목은 비교적 길고 몸통은 머리를 돌린 호랑이 모양입니다. 이런 허리띠 고리는 허난성과 산시성에서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생활 청동기의 발달
전국시대 이후에는 춘추시대에 등장한 철기와 함께 칠기가 생활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지만, 황실과 귀족층에서는 여전히 청동기를 사용하는 습관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청동기의 제작 방식 역시 변모합니다. 고기 삶는 세발솥인 정(鼎)과 술통인 호(壺)와 같은 전통적인 청동기는 예기로서의 특징이 사라지게 됩니다. 또 청동기에 있는 명문은 이전과 달리 무게나 용량 같은 실용적인 용도로 변하고 무늬가 없는 청동기의 제작수량도 늘어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전국시대와 진한시대에는 다양한 장식이 더해진 청동기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용, 새, 호랑이, 물고기 등 다양한 동물과 연꽃 같은 식물 등 화려한 무늬로 장식하거나 상감기법과 도금, 투조 등 새로운 기법을 적용하여 장식성을 극대화하였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03<67. 상감 납작 술병(상감반사문편호 象嵌蟠蛇文編戶, Hu), 전국 후기 기원전 3세기 전반 ~ 221년>

납작 술병은 전국시대에 출현한 새로운 형태입니다. 앞면과 뒷면은 구리선으로 네모 칸을 만들고 그 안을 당시 유행하던 인모법(印模法)으로 만든 날개무늬로 장식하였습니다. ‘인모’란 흙을 구워 만든 무늬본입니다. 각종 무늬를 진흙판에 새겨 구워 무늬본을 만듭니다. 이런 무늬본은 반복해서 사용할 수 있어 청동기 제작 시간을 크게 감소시켰습니다. 청동기 주조 기술의 큰 발전으로서 청동기 장식에 예술성보다 효율성에 무게를 두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04<68. 상감네모술병(상감기하문방호 象嵌幾何文方壺, Hu), 전국 후기 기원전 3세기 전반 ~ 221년)>

이 술병은 가로 단면이 네모 모양으로 입술이 작고 목이 곧습니다. 곡선인 양쪽 어깨에는 짐승 얼굴에 연결된 고리를 붙였습니다. 몸통은 우아한 곡선을 이룹니다. 전체 무늬는 마름모무늬가 서로 교차하여 겹치는데 위아래로 맞물려 복잡한 구조를 이룹니다. 굵은 무늬와 가는 무늬 모두 구리로 상감했는데 일부는 탈락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05<69. 물고기 모양 술병(어형호 魚形壺), 서한 기원전 202년 ~ 2022년>

이 술병은 입이 작고 목은 가늘며, 둥글게 부푼 몸통에는 비늘 무늬를 두었습니다. 밖으로 벌어진 굽다리는 꼬리지느러미를 선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전국시대에 청동기의 표면에 끌과 정 같은 금속공구를 사용하여 점과 선을 새기거나 면을 파내어, 인물이나 동물 또는 생활 장면을 묘사하는 기법이 출현하였습니다. 이는 완전히 새로운 장식 기술로 서한시대에 유행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06<70. 거북이와 봉황받침 박산향로(龜鳳座博山爐, Lu), 동한 25년 ~ 2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생활속청동기 20211013_07<옆에서 본 모습>

뚜껑은 전설 속의 박산이고, 기둥은 날개를 펼친 봉황입니다. 봉황은 머리를 위로 들고 부리로 향로의 받침을 받치고 있습니다. 발로 머리를 든 거북이를 밟고 있으며 쟁반으로 연결됩니다. 봉황으로 만든 기둥은 진한 무덤에서도 보이는데, 기둥 아래에 연결된 거북이 받침은 전설 속 바다에 있는 산을 거북이가 등에 이고 있다는 것과 연결됩니다. 한나라 사람들의 신선사상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장식 청동기의 유행
전국시대와 진한시대에 유행한 일상용 청동기에는 다양한 장식이 더해집니다. 청동기 장식의 특징은 크게 두 갈래입니다. 하나는 화려한 무늬를 장식하는 것으로 용, 새, 호랑이, 물고기 등 다양한 동물과 연꽃 같은 식물을 사용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상감기법과 도금, 투조 등 새로운 기법을 채택하여 청동기의 장식성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발전은 거푸집 제작에 밀랍을 사용하는 실랍법(失蠟法)의 등장으로 가속화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4. 일상 속 청동기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주나라의 봉건질서가 약해지고 대량으로 철기도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합니다. 신분 질서를 유지하고자 만들었던 청동기는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옵니다. 춘추시대 중기가 되면 서주의 봉건제가 약해집니다. 이에 따른 천자를 정점으로 하는 신분 질서 역시 느슨해집니다. 신분에 따른 청동기 사용 규칙인 열정제도 역시 엄격하게 유지되지 않아, 전통적인 청동예기의 제작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또한 새롭게 철기가 등장하여 청동기 문화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전국시대가 되면 철을 생산하는 기술이 더욱 발전하여 무기나 공구 등은 급속히 철기로 대체됩니다. 무기나 공구가 아닌 일상 생활용품은 청동기로 제작되었습니다. 향로나 등잔 등 연회용구가 새롭게 등장하였고, 개인의 치장에 사용한 거울이나 허리띠 고리도 만들어집니다. 철기와 함께 청동기 제작기술도 발달하여 전국시대는 상나라 이후 가장 수준 높은 청동기가 제작되었습니다. 신분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이었던 청동기는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3. 위키백과, 2023년
  4. 바이두백과(https://baike.baidu.com), 2023년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청동 예기의 변화
청동예기는 춘추시대에 급격한 변화를 맞이합니다. 많은 종류의 그릇이 사라지거나 형태가 변하고 새로운 예기가 등장하였습니다. 음식물을 담는 그릇인 대(敦)는 고기 삶는 세발솥인 정(鼎)과 곡물 담는 그릇인 보(盙)의 특징이 결합된 새로운 그릇입니다. 술병인 호(壺) 역시 몸통이 납작한 모양이 유행합니다. 전국시대를 거쳐 한나라에 이르면 대부분의 청동예기가 사라집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기] 신분에 따른 예기 사용

청동예기는 하나라 때 고대국가의 형성과 함께 출현하였으며 하나라와 서주 이후 정치권력의 상징물이 되었다. <예기(禮記)>에 의하면 신분 계급에 따라 청동기의 매장 수량을 달리했는데 이를 열정제도(列鼎制度)라 한다. 천자는 9개의 정과 8개의 궤를, 제후는 7개의 정과 6개의 궤를, 경대부는 5개의 정과 4개의 궤를, 사는 3개의 정과 2개의 궤를 사용한다. 문헌에 따르면 천자는 9개의 정(鼎) 소, 양, 돼지, 생선, 말린 고기, 위장, 껍질, 신선한 생선, 신선한 말린 고기를 담았다고 한다. 제후는 신선한 생선과 신선한 말린 고기 두 음식을 줄이고 경대부(卿大夫)는 다시 소와 위장 두 음식을 줄이며 사(士)는 돼지, 생선, 말린 고기를 담았다고 한다. 이런 내용들은 허난 성(河南省), 산시 성(山西省) 등지의 왕, 제후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기에 의해 역사적 사실로 증명되고 있다. 열정제도는 비종교적인 것으로 귀족들이 구질서에 충성을 다하는 의식에 해당하며 이러한 우열의 질서는 정치적이면서 윤리적인 것이었다. 열정제도는 망자가 죽은 후 정치적 지위를 나타냈기 때문에 실제로는 신분을 넘어서는 경우가 많았으며 유교에서는 ‘초과의례’라 하여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天子用九鼎八簋, 諸侯用七鼎六簋, 卿大夫用五鼎四簋, 士用三鼎二簋,”
(천자는 9개의 정과 8개의 궤를, 제후는 7개의 정과 6개의 궤를, 경대부는 5개의 정과 4개의 궤를, 사는 3개의 정과 2개의 궤를 사용한다.)
- <禮記> “禮器篇” -

소극정(小克鼎)은 서주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로 열정제도를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모두 7점으로 구성되어 제후의 지위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0124. ‘소극’ 글자가 있는 고기 삶는 세발솥(소극정小克鼎, Ding), 서주 효왕 기원전 10세기 말

왕*(효왕) 23년 9월, 왕은 종주宗周(서주의 수도, 현재의 샨시성 시안 부근)에 있었다. 왕은 선부(膳夫) 극에게 명령하여 동쪽 뤄양을 새로운 도성인 성주(成周)로 정비했다. 이에 극은 성주의 팔사八師(서주왕실의 군대)를 정비하였다. 극은 할아버지인 리계(釐季)를 기념하기 위해 보물 예기를 만들어 사당에 모셨다. 이 예기로 선조에게 제사를 올리고 동시에 왕의 건강과 만수무강을 기원한다. 자손들도 이 그릇을 영원히 보배로 사용하라. (소극정 글 해설)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03<옆에서 본 모습>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02<반대편>

세발솥의 주인 극은 서주 효왕 때의 귀족으로 주 왕실에서 중요한 벼슬을 하였습니다. 극의 할아버이진 사화보(師華父)가 주 왕실을 세우고 관리하는 공훈을 세워 주나라 왕은 그 공덕을 잊지 않고 손자 극을 중요한 직책에 임명하였습니다. 극은 왕의 은덕과 할아버지의 도움을 잊지 않기 위해 8점의 세발솥을 제작하여 기념하였습니다. 큰 세발솥 1점은 왕이 본인을 임용하고 상을 내린 것과 할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하였고, 작은 세발솥 7점은 후손에게 영원히 명예를 지키라는 의미로 만든 것입니다. ‘극씨 가문이 만든 작은 정’이라는 의미로 ‘소극정小克鼎’이라고 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할아버지를 위해 손자가 만든 보물 소극정(小克鼎)
청나라 덕종(1875~1908년) 때, 샨시성 바오지시 푸펑현에서 7점의 작은 세발솥(소극정小克鼎)과 1점의 큰 세발솥(대극정大克鼎), 편종 6점 등 120여 점의 청동기가 발견되었습니다. 이곳은 서주 왕조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주원(周原)의 일부입니다. 이후 전국으로 흩어졌고 현재는 상하이박물관, 베이징, 고궁박물원, 텐진박물관, 난징대학박물관, 일본 도쿄서도박물관, 교토후지이유린관, 쿠로카와고문화연구소 7개 기관에 나누어 보관되고 있습니다. 7개의 작은 세발솥은 경대부 대귀족의 그릇으로 열정제도에 사용하기 위해 크기별로 제작했습니다. 이중 상하이박물관의 세발솥이 가장 크고 웅장합니다. 몸통에는 변형된 동물얼굴무늬가 장식되어 있으며, 이 세발솥을 만든 목적을 설명하는 글이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고기 삶는 세발솥(變形交龍文鼎)은 열정제도를 잘 보여주는 춘추시대 청동예기이다. 5개로 구성되었는데 형태와 무늬는 같고 크기만 약간 다르다. 이 유물의 주인이 경대부(卿大夫) 지위에 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경(卿)은 고위관직인 상대부(上大夫)를 말하며 대부는 그 아래 지위인 중대부, 하대부를 말한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09<34~38. 고기 삶는 세발솥(변형교룡문정變形交龍文鼎, Ding), 춘주전기, 기원전 770년 ~ 기원전 7세기>

다섯점의 세발솥은 형태와 무늬가 같고 크기는 조금씩 다릅니다. 이런 세발솥 세트를 ‘열정列鼎’이라고 합니다. 옛 문헌에 천자는 세발솥 아홉에 소, 양, 돼지, 생선, 말린 고기, 위장, 껍질, 신선한 생선, 신선한 말린 고기를 담았다고 합니다. 제후의 세발솥은 일곱개로 신선한 생선과 신선한 말린 고기 두 음식을 줄입니다. 경대부(卿大夫)가 사용한 세발솥은 다섯으로 다시 소와 위장 두 음식을 줄입니다. 사(士)가 사용한 세발솥 셋에는 돼지, 생선, 말린 고기를 담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세발솥의 주인이 경대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04<1번째>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05<2번째>

궤(簋, Gui)는 정(鼎)과 함께 신분을 드러내는 중요한 예기로 곡식을 담는 그릇이다. 신분에 따라 소유할 수 있는 수량을 엄격히 달리했다. 괵강궤(虢姜簋)는 괵나라 왕과 결혼한 강씨부인을 위해 만들었다는 글자가 있다. 제후국 왕비는 경대부에 해당하여 4개의 궤를 사용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10<39, 40, ‘괵강’ 글자가 있는 곡식 담는 그릇(괵강궤虢姜簋, Gui), 서주 후기 기원전 9세기 전반 ~ 기원전 77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11<괵강궤>

주나라는 신분에 따라 세발솥(鼎)과 곡식 담는 그릇(簋)의 개수를 정해 두었습니다. 천자는 9정8궤, 제후는 7정6궤, 경대부는 5정4궤, 사는 3정2궤입니다. 이런 모양의 곡식 담는 그릇은 서주 후기에 유행한 것으로 그릇과 뚜껑에 글자가 있습니다. “서주의 제후국인 괵나라의 왕과 결혼한 강씨 여성이 이 그릇을 만들었다.”라는 내용입니다. 주나라 때는 예법에 의하면 제후국 왕의 부인은 경대부에 해당되어 5정4궤를 사용해야 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天子九鼎, 諸侯七, 卿大夫五, 元士三 <춘추공양전>

신분에 따른 예기 사용, 열정제도
‘열정제도列鼎制度’란 신분에 따라 의례에 사용할 수 있는 세발솥(鼎)과 곡식 담는 그릇(궤簋)의 개수를 정해둔 것입니다. 천자는 9정 8궤, 제후는 7정 6궤, 경대부는 5정 4궤, 사는 3정 2궤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한편 봉건제후의 무덤에서 9개의 정이 발굴되어 열정제도가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았던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악현제도(樂懸制度)는 신분에 따라 의례에 사용할 수 있는 악기의 종류와 배치 방식을 규정한 제도이다. 편성은 종과 경을 매달아 놓고 연주하는 편종(編鐘)과 편경(編磬), 특정한 한 음만을 매달아놓고 연주하는 특종(特鐘)과 특경(特磬)이다. 천자를 위한 악대는 궁현(宮懸)이라 하여 동, 서, 남, 북의 4면에 배치하며, 제후를 위한 악대는 헌현(軒懸)이라하면 남쪽을 제외한 3면에, 경대부를 위한 악대는 판현(判懸)이라 하여 동,서 2면에, 사(士)를 위한 악대는 특현(特懸)이라 하여 동쪽 1면에만 편성한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16<41. 종(반룡문박蟠龍文鎛, Bo), 춘추 후기, 기원전 6세기 전반 ~ 기원전 476년>

우리나라에서는 종, 중국에서는 박이라고 부르는 대형 타악기입니다. 보통 용종, 뉴종, 편경과 함께 연주하는데 곡의 시작을 알리거나 보조를 맞추는 역할을 합니다. 이 악기의 저음은 함께 연주하는 다른 악기의 고음과 어우러져 화음을 이루기도 합니다. 걸이는 대칭되는 두 마리의 용이 등을 맞대는 모습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또 돌기 사이의 사이에도 용무늬를 장식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12<종>

신분에 따른 악기 사용, 악현제도
‘악현제도(樂懸制度)’는 신분에 따라 의례에 사용할 수 있는 악기의 종류와 배치 방식을 규정한 제도입니다. 이때의 악기른 걸어서 연주하는 편종(編鍾)이나 편경(編磬)입니다. 편종과 편경은 크기가 다른 여러 개를 사용하여 다른 음을 내도록 하였습니다. 편종의 하나인 박(鎛)은 천자와 제후만 쓸 수 있도록 하여 차등을 두었습니다. 또 신분에 따른 배치도 달랐습니다. 천자는 4면, 제후는 3면, 경대부는 2면, 사는 1면에 악기를 배치할 수 있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금문(金文)은 청동기에 새겨진 글씨로 상나라 중기 이후 시작되어 서주 시기에 크게 번성하였다. 주로 왕이나 기족들의 활동과 관련된 내용으로 제사, 전쟁, 상훈, 계약 등의 역사적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서주시대 금문은 거의 모든 주나라 왕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어 후대 역사서의 주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대부분의 청동예기에 글자가 남아 있는대 특히 정(鼎)과 종(鐘)에 많이 남아 있어 ‘종정문(鐘鼎文)’이라고도 부른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17<45. ‘천민부경’ 글자가 있는 세발 술잔(천민부경각天黽父庚角, Jia), 상 후기 기원전 13 ~ 11세기>

상나라 세발 술잔 중에 그릇의 양쪽이 모두 새의 꼬리를 닮은 것을 각(角)이라고 하는데 종종 세발술잔(爵) 대신 나팔모양 술잔과 세트로 발견됩니다. 소머리 모양의 손잡이가 세로로 붙어 있고 그 안쪽에 “天黽父庚”이라는 글자가 있습니다. 천민은 만든 사람의 성씨이고 부경은 아버지가 경일에 사망하였다는 표시입니다. 천족은 황제(皇帝)의 후예를 가리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18<46. ‘추부정’글자가 있는 곡식 담는 그릇(추부정궤醜父丁簋, Gui), 상 후기 기원전 13 ~ 11세기>

동물얼굴이 장식된 손잡이와 굽다리에 새무늬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내부에 “추부정”글자가 있습니다. 추는 제작한 사람의 성씨이고 부정은 아버지가 정(丁)일에 사망했음을 표시한 것입니다. 글자의 크기가 다르고 선의 굵기가 다른 것은 상나라 금문의 특징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한자의 기원: 금문(金文)
청동기에 기록되어 있는 글자를 금문(金文)이라고 합니다. 금문은 상나라 중기 이후부터 보이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성씨나 가족의 이름, 사망한 날 등 한 두 자만 간단하게 새겨 넣었습니다. 형태는 한자 초기의 상형문자와 비슷하고 크기도 각각 달랐습니다. 기원전 11세기부터 금문은 긴 문장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제도, 전쟁, 상훈 등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특히 서주 왕조의 금문은 마지막 단락에 “子子孫孫永寶用(자손들이 영원히 보배로 사용하기를 기원한다.”는 문구를 넣은 것이 특징입니다. 금문은 중국의 갑골문(甲骨文)과 함께 한자의 기원이 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청동으로 다양한 형태의 무기가 만들어졌다. 그 중 도끼에 해당하는 부(斧)와 월(鉞)은 화려한 무늬로 장식하고 글자를 새겨 절대 권력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창으로는 찌르는 무기인 모(矛), 적을 끌어 내리는 꺽창인 과(戈)가 있으며 칼로는 쪽에 날이 있는 검(剑), 한쪽에 날이 있는 도(刀)가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19<47. 도끼(용문월龍文鉞, Yue), 상 후기 기원전 13 ~ 11세기>

도끼 중 하나인 월(鉞)은 손잡이를 나무 자루에 직각으로 끼우고 끈으로 묶어 사용하였습니다. 이런 도끼는 신석기시대부터 등장하였는데 실제 전쟁에서도 사용했지만 주로 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이 도끼의 앞뒷면 양쪽으로 용무늬가 있고 손잡이에는 동물얼굴무늬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20<48. 칼(도刀, Dao), 상 후기 기원전 13 ~ 11세기>

칼은 전쟁 시 병사끼리 싸울 때 사용한 무기입니다. 이 칼의 자루에는 나무가 붙어 있어 나무 자루에 고정해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21<49. 투겁창(모矛, Mao), 상 후기 기원전 13 ~ 11세기>

투겁창은 공간이 비어 있는 자루에 긴 나무 자루를 끼워 상대방을 찌르는 용도의 무기입니다. 창은 방패와 세트로 사용되어 공격과 방어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자루에 두 개의 반원형 고리가 있어 나무 막대와 끝으로 묶으면 투겁창이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자루 입구에 불꽃무늬가 있고 그 위에 변형 매미무늬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22<50. ‘경’글자가 있는 창(경과京戈, Ge), 상 후기 기원전 13 ~ 11세기>

끝이 뾰족한 꺾창으로 나무자루에 끼워 사용하였습니다. 꺾창은 창끝으로 상대를 찌르거나 날로 상대를 벨 수 있습니다. 전차를 타고 싸울 때는 짧은 자루를 묶어 사용하였습니다. 뒤쪽에 ‘경’이라는 글자가 있는데 만든 사람의 성씨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전쟁의 기록
상나라는 주변국가(方國)와 연합하여 영토를 관리하는 연맹체 국가였는데, 이들은 상의 권력을 수시로 넘보았습니다. 상나라 왕은 이를 견제하고자 청동기로 도끼 등 무기를 만들어 화려한 무늬로 장식하고 글자를 새겨 절대 권력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주나라 역시 무기를 이용하여 권력을 굳건히 하고자 했습니다. 주나라 때까지는 무기를 정교하게 만들긴 했지만 그 종류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춘추시대 이후 제후국의 세력 다툼으로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무기가 점점 진화하였고, 형태와 종류가 다양해졌습니다. 무기 뿐 아니라 청동기에 있는 글을 통해서도 당시의 전쟁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와 관련된 물함지는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이 사실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23<51. ‘오왕부차’ 글자가 있는 물함지(와왕부차감吳王夫差鍳, Jian), 춘추후기 기원전 6세기 전반 ~ 476년, 하남성 후이현 출토(傳)>

넓고 깊은 그릇에 물을 가득 채ㅔ워 얼굴을 비춰보는 것이 주된 쓰임새입니다. 또 얼음을 담고 그 안에 술병을 두어 술을 차갑게 하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그릇 안쪽에 “功吳王夫差擇厥吉金, 自作御鍳”이라는 13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오나라는 희(姬)씨 성으로 주나라의 제후국입니다. 부차는 춘추오패 중 한명인 오나라 왕 합려의 아들로 부차는 와신상담의 주인공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와신상담
와신상담(臥薪嘗膽)은 춘추시대 말 오나라와 월나의 전쟁에서 비롯된 고사성어입니다. 오나라 왕 합려는 군사를 일으켜 월나라를 침공하였는데, 월나라 왕 구천에게 크게 패한 후 죽으면서 아들 부차에게 반드시 원수를 갚아 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에 부차는 거친 땔나무 위에 누워 자며 복수심을 키웠습니다. 마침내 전쟁에서 부차는 구천을 사로잡았지만, 구천은 월나라 재상 범려의 지혜로 목숩을 건졌습니다. 이후 부차는 오나라 충신 오자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천을 놓아주게 됩니다. 풀려난 구천 역시 쓸개를 곁에 매달아 두고 쓰디쓴 쓸개를 맛보며 복수를 다짐하였습니다. 또한 서시라는 미녈르 부차에게 보내서 정사를 소흘하게 합니다. 마침내 구천은 오나라를 멸망시키게 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3. 권력의 상징
주나라는 의례에 사용하는 음식그릇과 악기를 신분에 따라 구분하였습니다. 천자를 정점으로 한 신분 질서를 강화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청동기읭 제작 목적이 신에서 인간으로 옮겨졌습니다. 주나라의 등장과 함께 술 바치는 의례가 서서히 쇠퇴하고 음식 바치는 의례가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이 때문에 상나라에서 발달했던 여러 술그릇은 사라지거나 모양이 바뀌게 되고 그 대신 음식그릇이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음식그릇은 조리기와 차림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조리기는 아궁이가 없어도 내부를 가열할 수 있도록 그릇 아래에 발이 달렸습니다. 고기 삶는 세발솥과 찜통이 대표적입니다. 차림기로는 곡식담는 그릇, 장조림 같은 음식을 담았던 굽다리 접시 등이 있습니다. 한편 서주 때에는 음식그릇과 함께 여러 악기도 발달합니다. 음식그릇과 악기는 신분에 따라 사용방법을 구분하였고, 천자를 정점으로 한 신분 질서를 유지하는데 쓰였습니다. 상나라 때에는 신을 위해, 주나라 때에는 인간의 권력을 위해 청동기를 사용한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3. 위키백과, 2023년
  4. 실록위키, 2023년
  5. 바이두백과(https://baike.baidu.com/), 2023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기] 청동기 문화의 시작

고대 중국에서 지배층이 신분을 나타내거나 종묘와 궁궐 등에서 의식을 거행할 때 사용하는 도구를 예기(禮器)라 한다. 청동으로 만든 예기로는 곡식 등을 담는 그릇, 술잔, 솥 등이 있으며 신분에 따라 사용이 제한되었다. 중국 역사와 문화를 관통하는 종묘와 왕실 의식의 유물인 예기는 중국은 물론 한반도에서도 고대국가에서부터 조선시대를 거쳐 현대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국의 청동예기는 기원전 20세기 하나라 때부터 만들어지 시작한다. 이전에 사용했던 토기를 본 떠서 만들었는데 최초의 청동예기는 술을 데우는 세발 술잔인 가(斝, Jia)와 고(觚, Gu), 작(爵, Jue)와 고기를 삶는 그릇인 정(鼎, Ding), 력(鬲 Li) 등이다. 초기의 청동 예기는 형태와 문양이 단순했는데 기술의 발전에 따라 그릇의 종류와 무늬가 다양해진다.

정(鼎, Ding)은 청동예기를 대표하는 것으로 원형의 용기에 세발이 붙은 형태로 음식을 조리할 때 사용하는 식기(食器)에 해당한다. 가장 많이 사용된 예기로 상(商)대부터 한(漢)대까지 사용되었으며 후대에는 향로로 많이 사용되었다. 궤(簋)와 함께 왕이나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예기로 여겨졌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01<1.고기 삶는 세발솥(수면문정 獸面文鼎 Ding), Tripod Cauldron, 서주 전기 기원전 11~10 세기 전반>

신비한 무늬로 가득 차 있는 이 청동기는 고기를 삶을 때 사용한 세발솥(鼎)입니다. 하나라 때 등장한 뒤, 제사나 의례에 빠지지 않고 사용되던 가장 중요한 청동기입니다. 몸통에는 온통 동물얼굴무늬가 가득한데, 도철(饕餮)무늬라고도 합니다. 도철은 무엇이든 먹어치워 결국 자신의 몸도 먹어버려 머리만 남았다는 전설 속에 나오는 괴수입니다. 도철을 장식한 청동기는 신비한 힘으로 악령을 퇴치하는 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때문에 절대적인 권위를 상징하게 되어 왕이 사용하는 청동기에 장식되었습니다. 동물얼굴무늬는 상 중기부터 서주 전기까지 유행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02<2. 술 데우는 세발 그릇(연주문가連珠文斝 Jia), Wine Vessel, 하 후기, 기원전 18 ~ 16세기>

의례 때 사용한 울창주(울금향과 검은 기장으로 빚어 만든 술)를 따뜻하게 데워 담았던 그릇입니다. 아가리에 있는 두 개의 짧은 기둥은 술에 남은 찌꺼기를 거르는 망을 걸 때 사용하였습니다. 초기에는 제작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탓에 다리의 빈 공간에 술이 고였습니다. 표면에 불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고 내부에도 흰색 찌꺼기가 붙어 있어 당시 실제로 술을 데우는 데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슬무늬 장식은 하나라 청동기의 특징이며 상나라 때 점차 없어집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작(爵)은 중국 청동예기 중 하나로 술을 따르는 용도로는 사용되는 주기(酒器)이다. 손잡이와 발이 셋이 있는데 크기가 작고 참새를 닮았다고 하여 작(爵)이라 한다. 서주 중기까지 사용되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03<3. 세발 술잔(수면문작 獸面文爵 Jue), 상 전기 기원전 16~15세기 중엽>

상나라 때는 세발 술잔의 아가리에 짧은 기둥 두 개를 세우는데 이 술잔은 모두 떨어져 버렸습니다. 두 개의 다리는 몸통 아래 양쪽으로 배치하고 한 개의 다리는 손잡이 아래에 배치하여 수평을 잡았습니다. 몸통 중간의 동물얼굴무늬 장식은 전형적인 상 전기의 양식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고(觚)는 작(爵)과 함께 술잔으로 사용되었던 나팔모양의 청동기이다. 오래된 예기(禮器) 중 하나로 어리터우(二里頭) 문화에서 도제(陶製)가 사용되었고, 상대에 청동제의 고가 유행하였다. 상부에는 파초문이, 중간과 하부에는 도철무늬로 장식되었으며 바닥 안쪽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04<4. 나팔 모양 술잔(수면문고 獸面文觚 Gu), Wine Beaker, 상 중기 기원전 15세기 중엽 ~ 13세기>

술을 마시거나 따르는 용도로 사용한 나팔 모양 술잔입니다. 원래 이름은 ‘동同’이고, 송나라 이후부터 ‘고觚’라고 불렀습니다. 이 술잔은 초기의 것으로 크기가 작고 굽다리에 십자형 구멍 3개가 있습니다. 굵은 선을 이용한 몸통의 동물얼굴무늬와 굽다리의 용무늬 장식 역시 이 시기의 특징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05<동물얼굴무늬(몸통) 용무늬(굽다리)>

가(斝)는 술을 데우는 비교적 큰 그릇으로 입 가장자리에 두 개의 삿갓 모양의 작은 기둥이 솟아 있고 측면에 하나의 손잡이가 있으며 다리가 셋이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09<5. 술 데우는 세발 그릇(수면문가 獸面文斝 Jia), 상 중기 기원전 15세기 중엽 ~ 기원전 13세기>

술을 데울 때 사용한 그릇입니다. 목과 몸통에 동물얼굴무늬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돌출된 눈을 제외하고 선의 굵기로 무늬의 차이를 표현하였습니다. 목에는 가는 선을, 몸통에는 굵은 선을 사용했습니다. 이런 표현 방법은 상 중기에 유행한 장식기법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06<6.고기 삶는 세발솥(수면문정 獸面文鼎 Ding), 상 전기 기원전 16 ~ 15세기 중엽>

배다 부른 몸통에 바닥이 둥글고 그 아래로 납작하며 끝이 뾰족한 용 모양 다리 세 개가 붙어 있습니다. 이런 다리를 가진 세발솥은 신석기시대 토기를 본 떠 만들던 세발솥이 청동예기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몸통에는 동물얼굴무늬를 한 줄로 두르고 그 아래위에 각각 구슬무늬를 장식하였습니다. 상 전기에 유행했던 무늬입니다. 솥의 바닥과 다리 안쪽에는 그을음이 있어 실제로 고기를 삶는데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다리 하나에는 용무늬가 없는데, 떨어져 나간 것을 뒤에 새로 붙이면서 용무늬가 생략된 것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07<7. 고기 삶는 세발솥, (수면문정 獸面文鼎 Ding), 상 중기 기원전 15세기 중엽 ~ 13세기>

이 세발솥은 상 중기에 만들었지만 전기의 형태를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두꺼운 두 귀와 몸체에 비해 비교적 길고 공간이 비어 있는 송곳 모양 다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귀와 다리를 일직선상에 배치하여 시각적으로 불안해 보입니다. 다리는 지면에 닿는 부분이 둥글게 처리되어 있어, 뾰족한 모양의 다리가 원기둥 모양으로 변하는 과도기 형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몸통에 동물얼굴무늬가 장식되어 있고, 그 아래위에 모두 구슬무늬가 있습니다. 허난성 은허 유적 무덤에서도 비슷한 모양의 세발솥이 발견되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역(鬲)은 음식을 조리하는 식기(食器)에 해당한다. 고기를 삶는데 주로 쓰였으며 정(鼎)에 비해 크기가 작은 편이다. 서주때 조리기구로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08<8. 세발솥(수면문력 獸面文鬲 Li), Tripod Cauldron), 상 중기 기원전 15세기 중엽 ~ 13세기>

음식을 끓일 때 사용하던 세발솥으로 신석기새대에는 토기로 제작하던 그릇입니다. 상 중기 청동기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무늬의 면적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몸통에 한 줄의 띠로 무늬를 둘렀던 전기와 달리 중기부터는 몸통 전체에 장식하였습니다. 열을 가하지 않아 무늬와 색이 그대로 잘 남아 있습니다. 상 중기에는 이미 청동기 제작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잘 보여줍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1. 청동기 문화의 시작
중국의 청동그릇은 기원전 2천년 무렵 하나라 때부터 제작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토기를 본떠 청동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최초의 청동 그릇은 세발 술잔과 고기 삶는 세발솥입니다. 중국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청동기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첫번째 나라인 하나라 때부터 입니다. 전설처럼 알려지던 하나라는 1959년 허난(河南)성 옌스(偃师)현 얼리터우(二里頭)에서 궁전유적이 발견되면서 역사적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하나라는 전설속의 우왕이 기원전 21세기에 세운 뒤 17대 걸왕에 이르기까지 500년 가까이 존속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라 사람들은 이 지역에 오랜 기간 계속되고 있었던 신석기시대 룽산(龍山)문화의 구리 가공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청동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신석기시대 토기의 모양을 본뜬 단순한 무늬의 세발 술잔이나 고기 삶는 세발솥이었습니다. 뒤이은 상나라 때에는 그릇의 종류와 무늬가 다양해집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우는 그제야 천자자리에 올라 …. 나라 이름은 하후, 성은 사씨라 하였다. <<사기>><하본기>
나라의 큰일은 제사와 전쟁에 있다. <춘추좌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10<1. 굽다리 술잔 모양 토기 만들기>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11<2. 바깥 거푸집 만들기>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12<3. 바깥 거푸집에 무늬 추가, 4. 안쪽 거푸집 만들기>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13<5. 거푸집 합치고 굽기>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14<6. 쇳물 부어 완성>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15<9. 청동기 주조 모형>

청동기의 제작
상주시대에는 청동예기를 만들 때 먼저 흙으로 만들고자하는 형태를 만들고 여기에 진흙을 발라 바깥 거푸집을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 처음 만든 토기의 포면을 깎아낸 뒤 바깥 거푸집과 합쳐 그 사이에 쇳물을 붓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쇳물을 넣어 식힌 뒤, 바깥 거푸집을 부수고 청동기를 꺼내야 했기에 상주시대에 만든 청동기 중 똑깥은 것은 없습니다. 세상에 딱 하나만 존재합니다. 한편, 기원전 10세기 무렵 상나라의 분주법(分鑄法)은 복잡한 형태의 청동기 제작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분주법은 청동기의 손잡이나 다리 등 튀어 나온 부분을 먼저 주조한 뒤 이를 거푸집에 넣고 쇳물을 주입하여 몸통과 결합하는 방식입니다. 이로써 다양한 청동기의 제작이 가능해져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1921년 가을 <중국고대청동기, 신에서 인간으로>라는 제목으로 특별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중국에서도 청동예기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상하이박물관과 협력하여 고대 중국을 대표하는 형태의 청동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소개할 수 있는 유물들을 전시하였다. 여러 박물관에서 단편적으로 볼 수 있었던 중국 고대 청동기들의 역사와 용도, 의미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였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16
<중국고대청동기, 신에서 인간으로>

전시를 열며
국립중앙박물관은 중국 청동기 대표 박물관인 상하이박물관과 협력하여 중국 고대 청동기 특별전을 개최합니다. 1928년 은허(殷墟) 유적에서 삼천 삼백여 년 전의 청동기가 대규모로 발굴되었습니다. 안개 속에 싸여 있던 상나라의 실체가 처음으로 드러났습니다. 황하문명을 세계에 알린 순간이기도 합니다. 이어진 발굴조사로 중국 청동기는 기원전 21세기경 하나라 때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되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전쟁과 같은 생사를 가르는 중대사를 결정할 때 왕은 직접 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 의식에 사용하는 청동 그릇에 들이는 정성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무서운 괴수 얼굴이 떠오르는 기괴한 무늬, 탄성을 자아내는 압도적인 크기와 형태는 신에게 바치기 위한 제례 도구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신을 위해 사용되던 청동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왕과 제후의 권력을 상징하는 수단으로 변화합니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에 철기가 사용되자 청동기는 일상용기로 쓰임새가 다시 한번 바뀝니다. 세계 다른 어떤 지역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보적인 문화유산 중국 청동기, 이번 특별전에서 시대에 따른 중국 고대 청동기 문화의 변화상과 함께 청동기의 제작방법, 무늬,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중국 역사의 단면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웃나라 중국의 고대 역사를 담고 있는 그릇, 상하이박물관의 보물을 지금부터 만나 보십시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상하이박물관
1952년 개관한 상하이 박물관은 중국 동남부의 대표박물관으로 중국 국가박물관, 샨시역사박물관과 함께 중국 3대 청동기 박물관으로 세계 최고의 청동기 컬렉션을 자랑합니다. 청동기 이외에도 도자기, 회화 및 서예 작품이 유명하며 14만여 점의 중요 고대 유물을 포함하여 약 102만점의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건물 외관은 ‘천원지방’, 즉 둥근 하늘과 네모진 땅이라는 중국의 세계관을 반영하였고 위쪽에 솟은 반원형 장식은 세발솥을 모티브로 하였습니다. 이러한 독특한 외관으로 상하이의 랜드마크가 되었습니다. 상하이박물관은 1950년대 중국에서 일어난 ‘쇠붙이 모으기 운동’을 기반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당시 항구가 있던 상하이에 가장 큰 제련소가 있었고 엄청나게 많은 청동기가 유입되었습니다. 이 중에 고대 청동기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고 3만 여점의 청동기가 상하이박물관으로 전달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청동기의 진위문제를 말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이후 중국 내 유적 발굴이 활발해지면서 상하이박물관 소장품 대부분이 진품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3. 위키백과, 2023년
  4. 미술사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