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중국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기] 신분에 따른 예기 사용

청동예기는 하나라 때 고대국가의 형성과 함께 출현하였으며 하나라와 서주 이후 정치권력의 상징물이 되었다. <예기(禮記)>에 의하면 신분 계급에 따라 청동기의 매장 수량을 달리했는데 이를 열정제도(列鼎制度)라 한다. 천자는 9개의 정과 8개의 궤를, 제후는 7개의 정과 6개의 궤를, 경대부는 5개의 정과 4개의 궤를, 사는 3개의 정과 2개의 궤를 사용한다. 문헌에 따르면 천자는 9개의 정(鼎) 소, 양, 돼지, 생선, 말린 고기, 위장, 껍질, 신선한 생선, 신선한 말린 고기를 담았다고 한다. 제후는 신선한 생선과 신선한 말린 고기 두 음식을 줄이고 경대부(卿大夫)는 다시 소와 위장 두 음식을 줄이며 사(士)는 돼지, 생선, 말린 고기를 담았다고 한다. 이런 내용들은 허난 성(河南省), 산시 성(山西省) 등지의 왕, 제후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기에 의해 역사적 사실로 증명되고 있다. 열정제도는 비종교적인 것으로 귀족들이 구질서에 충성을 다하는 의식에 해당하며 이러한 우열의 질서는 정치적이면서 윤리적인 것이었다. 열정제도는 망자가 죽은 후 정치적 지위를 나타냈기 때문에 실제로는 신분을 넘어서는 경우가 많았으며 유교에서는 ‘초과의례’라 하여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天子用九鼎八簋, 諸侯用七鼎六簋, 卿大夫用五鼎四簋, 士用三鼎二簋,”
(천자는 9개의 정과 8개의 궤를, 제후는 7개의 정과 6개의 궤를, 경대부는 5개의 정과 4개의 궤를, 사는 3개의 정과 2개의 궤를 사용한다.)
- <禮記> “禮器篇” -

소극정(小克鼎)은 서주시대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로 열정제도를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모두 7점으로 구성되어 제후의 지위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0124. ‘소극’ 글자가 있는 고기 삶는 세발솥(소극정小克鼎, Ding), 서주 효왕 기원전 10세기 말

왕*(효왕) 23년 9월, 왕은 종주宗周(서주의 수도, 현재의 샨시성 시안 부근)에 있었다. 왕은 선부(膳夫) 극에게 명령하여 동쪽 뤄양을 새로운 도성인 성주(成周)로 정비했다. 이에 극은 성주의 팔사八師(서주왕실의 군대)를 정비하였다. 극은 할아버지인 리계(釐季)를 기념하기 위해 보물 예기를 만들어 사당에 모셨다. 이 예기로 선조에게 제사를 올리고 동시에 왕의 건강과 만수무강을 기원한다. 자손들도 이 그릇을 영원히 보배로 사용하라. (소극정 글 해설)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03<옆에서 본 모습>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02<반대편>

세발솥의 주인 극은 서주 효왕 때의 귀족으로 주 왕실에서 중요한 벼슬을 하였습니다. 극의 할아버이진 사화보(師華父)가 주 왕실을 세우고 관리하는 공훈을 세워 주나라 왕은 그 공덕을 잊지 않고 손자 극을 중요한 직책에 임명하였습니다. 극은 왕의 은덕과 할아버지의 도움을 잊지 않기 위해 8점의 세발솥을 제작하여 기념하였습니다. 큰 세발솥 1점은 왕이 본인을 임용하고 상을 내린 것과 할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하였고, 작은 세발솥 7점은 후손에게 영원히 명예를 지키라는 의미로 만든 것입니다. ‘극씨 가문이 만든 작은 정’이라는 의미로 ‘소극정小克鼎’이라고 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할아버지를 위해 손자가 만든 보물 소극정(小克鼎)
청나라 덕종(1875~1908년) 때, 샨시성 바오지시 푸펑현에서 7점의 작은 세발솥(소극정小克鼎)과 1점의 큰 세발솥(대극정大克鼎), 편종 6점 등 120여 점의 청동기가 발견되었습니다. 이곳은 서주 왕조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주원(周原)의 일부입니다. 이후 전국으로 흩어졌고 현재는 상하이박물관, 베이징, 고궁박물원, 텐진박물관, 난징대학박물관, 일본 도쿄서도박물관, 교토후지이유린관, 쿠로카와고문화연구소 7개 기관에 나누어 보관되고 있습니다. 7개의 작은 세발솥은 경대부 대귀족의 그릇으로 열정제도에 사용하기 위해 크기별로 제작했습니다. 이중 상하이박물관의 세발솥이 가장 크고 웅장합니다. 몸통에는 변형된 동물얼굴무늬가 장식되어 있으며, 이 세발솥을 만든 목적을 설명하는 글이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고기 삶는 세발솥(變形交龍文鼎)은 열정제도를 잘 보여주는 춘추시대 청동예기이다. 5개로 구성되었는데 형태와 무늬는 같고 크기만 약간 다르다. 이 유물의 주인이 경대부(卿大夫) 지위에 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경(卿)은 고위관직인 상대부(上大夫)를 말하며 대부는 그 아래 지위인 중대부, 하대부를 말한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09<34~38. 고기 삶는 세발솥(변형교룡문정變形交龍文鼎, Ding), 춘주전기, 기원전 770년 ~ 기원전 7세기>

다섯점의 세발솥은 형태와 무늬가 같고 크기는 조금씩 다릅니다. 이런 세발솥 세트를 ‘열정列鼎’이라고 합니다. 옛 문헌에 천자는 세발솥 아홉에 소, 양, 돼지, 생선, 말린 고기, 위장, 껍질, 신선한 생선, 신선한 말린 고기를 담았다고 합니다. 제후의 세발솥은 일곱개로 신선한 생선과 신선한 말린 고기 두 음식을 줄입니다. 경대부(卿大夫)가 사용한 세발솥은 다섯으로 다시 소와 위장 두 음식을 줄입니다. 사(士)가 사용한 세발솥 셋에는 돼지, 생선, 말린 고기를 담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세발솥의 주인이 경대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04<1번째>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05<2번째>

궤(簋, Gui)는 정(鼎)과 함께 신분을 드러내는 중요한 예기로 곡식을 담는 그릇이다. 신분에 따라 소유할 수 있는 수량을 엄격히 달리했다. 괵강궤(虢姜簋)는 괵나라 왕과 결혼한 강씨부인을 위해 만들었다는 글자가 있다. 제후국 왕비는 경대부에 해당하여 4개의 궤를 사용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10<39, 40, ‘괵강’ 글자가 있는 곡식 담는 그릇(괵강궤虢姜簋, Gui), 서주 후기 기원전 9세기 전반 ~ 기원전 77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11<괵강궤>

주나라는 신분에 따라 세발솥(鼎)과 곡식 담는 그릇(簋)의 개수를 정해 두었습니다. 천자는 9정8궤, 제후는 7정6궤, 경대부는 5정4궤, 사는 3정2궤입니다. 이런 모양의 곡식 담는 그릇은 서주 후기에 유행한 것으로 그릇과 뚜껑에 글자가 있습니다. “서주의 제후국인 괵나라의 왕과 결혼한 강씨 여성이 이 그릇을 만들었다.”라는 내용입니다. 주나라 때는 예법에 의하면 제후국 왕의 부인은 경대부에 해당되어 5정4궤를 사용해야 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天子九鼎, 諸侯七, 卿大夫五, 元士三 <춘추공양전>

신분에 따른 예기 사용, 열정제도
‘열정제도列鼎制度’란 신분에 따라 의례에 사용할 수 있는 세발솥(鼎)과 곡식 담는 그릇(궤簋)의 개수를 정해둔 것입니다. 천자는 9정 8궤, 제후는 7정 6궤, 경대부는 5정 4궤, 사는 3정 2궤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한편 봉건제후의 무덤에서 9개의 정이 발굴되어 열정제도가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았던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악현제도(樂懸制度)는 신분에 따라 의례에 사용할 수 있는 악기의 종류와 배치 방식을 규정한 제도이다. 편성은 종과 경을 매달아 놓고 연주하는 편종(編鐘)과 편경(編磬), 특정한 한 음만을 매달아놓고 연주하는 특종(特鐘)과 특경(特磬)이다. 천자를 위한 악대는 궁현(宮懸)이라 하여 동, 서, 남, 북의 4면에 배치하며, 제후를 위한 악대는 헌현(軒懸)이라하면 남쪽을 제외한 3면에, 경대부를 위한 악대는 판현(判懸)이라 하여 동,서 2면에, 사(士)를 위한 악대는 특현(特懸)이라 하여 동쪽 1면에만 편성한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16<41. 종(반룡문박蟠龍文鎛, Bo), 춘추 후기, 기원전 6세기 전반 ~ 기원전 476년>

우리나라에서는 종, 중국에서는 박이라고 부르는 대형 타악기입니다. 보통 용종, 뉴종, 편경과 함께 연주하는데 곡의 시작을 알리거나 보조를 맞추는 역할을 합니다. 이 악기의 저음은 함께 연주하는 다른 악기의 고음과 어우러져 화음을 이루기도 합니다. 걸이는 대칭되는 두 마리의 용이 등을 맞대는 모습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또 돌기 사이의 사이에도 용무늬를 장식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12<종>

신분에 따른 악기 사용, 악현제도
‘악현제도(樂懸制度)’는 신분에 따라 의례에 사용할 수 있는 악기의 종류와 배치 방식을 규정한 제도입니다. 이때의 악기른 걸어서 연주하는 편종(編鍾)이나 편경(編磬)입니다. 편종과 편경은 크기가 다른 여러 개를 사용하여 다른 음을 내도록 하였습니다. 편종의 하나인 박(鎛)은 천자와 제후만 쓸 수 있도록 하여 차등을 두었습니다. 또 신분에 따른 배치도 달랐습니다. 천자는 4면, 제후는 3면, 경대부는 2면, 사는 1면에 악기를 배치할 수 있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금문(金文)은 청동기에 새겨진 글씨로 상나라 중기 이후 시작되어 서주 시기에 크게 번성하였다. 주로 왕이나 기족들의 활동과 관련된 내용으로 제사, 전쟁, 상훈, 계약 등의 역사적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서주시대 금문은 거의 모든 주나라 왕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어 후대 역사서의 주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대부분의 청동예기에 글자가 남아 있는대 특히 정(鼎)과 종(鐘)에 많이 남아 있어 ‘종정문(鐘鼎文)’이라고도 부른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17<45. ‘천민부경’ 글자가 있는 세발 술잔(천민부경각天黽父庚角, Jia), 상 후기 기원전 13 ~ 11세기>

상나라 세발 술잔 중에 그릇의 양쪽이 모두 새의 꼬리를 닮은 것을 각(角)이라고 하는데 종종 세발술잔(爵) 대신 나팔모양 술잔과 세트로 발견됩니다. 소머리 모양의 손잡이가 세로로 붙어 있고 그 안쪽에 “天黽父庚”이라는 글자가 있습니다. 천민은 만든 사람의 성씨이고 부경은 아버지가 경일에 사망하였다는 표시입니다. 천족은 황제(皇帝)의 후예를 가리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18<46. ‘추부정’글자가 있는 곡식 담는 그릇(추부정궤醜父丁簋, Gui), 상 후기 기원전 13 ~ 11세기>

동물얼굴이 장식된 손잡이와 굽다리에 새무늬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내부에 “추부정”글자가 있습니다. 추는 제작한 사람의 성씨이고 부정은 아버지가 정(丁)일에 사망했음을 표시한 것입니다. 글자의 크기가 다르고 선의 굵기가 다른 것은 상나라 금문의 특징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한자의 기원: 금문(金文)
청동기에 기록되어 있는 글자를 금문(金文)이라고 합니다. 금문은 상나라 중기 이후부터 보이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성씨나 가족의 이름, 사망한 날 등 한 두 자만 간단하게 새겨 넣었습니다. 형태는 한자 초기의 상형문자와 비슷하고 크기도 각각 달랐습니다. 기원전 11세기부터 금문은 긴 문장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제도, 전쟁, 상훈 등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특히 서주 왕조의 금문은 마지막 단락에 “子子孫孫永寶用(자손들이 영원히 보배로 사용하기를 기원한다.”는 문구를 넣은 것이 특징입니다. 금문은 중국의 갑골문(甲骨文)과 함께 한자의 기원이 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청동으로 다양한 형태의 무기가 만들어졌다. 그 중 도끼에 해당하는 부(斧)와 월(鉞)은 화려한 무늬로 장식하고 글자를 새겨 절대 권력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창으로는 찌르는 무기인 모(矛), 적을 끌어 내리는 꺽창인 과(戈)가 있으며 칼로는 쪽에 날이 있는 검(剑), 한쪽에 날이 있는 도(刀)가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19<47. 도끼(용문월龍文鉞, Yue), 상 후기 기원전 13 ~ 11세기>

도끼 중 하나인 월(鉞)은 손잡이를 나무 자루에 직각으로 끼우고 끈으로 묶어 사용하였습니다. 이런 도끼는 신석기시대부터 등장하였는데 실제 전쟁에서도 사용했지만 주로 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이 도끼의 앞뒷면 양쪽으로 용무늬가 있고 손잡이에는 동물얼굴무늬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20<48. 칼(도刀, Dao), 상 후기 기원전 13 ~ 11세기>

칼은 전쟁 시 병사끼리 싸울 때 사용한 무기입니다. 이 칼의 자루에는 나무가 붙어 있어 나무 자루에 고정해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21<49. 투겁창(모矛, Mao), 상 후기 기원전 13 ~ 11세기>

투겁창은 공간이 비어 있는 자루에 긴 나무 자루를 끼워 상대방을 찌르는 용도의 무기입니다. 창은 방패와 세트로 사용되어 공격과 방어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자루에 두 개의 반원형 고리가 있어 나무 막대와 끝으로 묶으면 투겁창이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자루 입구에 불꽃무늬가 있고 그 위에 변형 매미무늬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22<50. ‘경’글자가 있는 창(경과京戈, Ge), 상 후기 기원전 13 ~ 11세기>

끝이 뾰족한 꺾창으로 나무자루에 끼워 사용하였습니다. 꺾창은 창끝으로 상대를 찌르거나 날로 상대를 벨 수 있습니다. 전차를 타고 싸울 때는 짧은 자루를 묶어 사용하였습니다. 뒤쪽에 ‘경’이라는 글자가 있는데 만든 사람의 성씨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전쟁의 기록
상나라는 주변국가(方國)와 연합하여 영토를 관리하는 연맹체 국가였는데, 이들은 상의 권력을 수시로 넘보았습니다. 상나라 왕은 이를 견제하고자 청동기로 도끼 등 무기를 만들어 화려한 무늬로 장식하고 글자를 새겨 절대 권력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주나라 역시 무기를 이용하여 권력을 굳건히 하고자 했습니다. 주나라 때까지는 무기를 정교하게 만들긴 했지만 그 종류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춘추시대 이후 제후국의 세력 다툼으로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무기가 점점 진화하였고, 형태와 종류가 다양해졌습니다. 무기 뿐 아니라 청동기에 있는 글을 통해서도 당시의 전쟁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와 관련된 물함지는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이 사실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그릇 권력의상징 20211013_23<51. ‘오왕부차’ 글자가 있는 물함지(와왕부차감吳王夫差鍳, Jian), 춘추후기 기원전 6세기 전반 ~ 476년, 하남성 후이현 출토(傳)>

넓고 깊은 그릇에 물을 가득 채ㅔ워 얼굴을 비춰보는 것이 주된 쓰임새입니다. 또 얼음을 담고 그 안에 술병을 두어 술을 차갑게 하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그릇 안쪽에 “功吳王夫差擇厥吉金, 自作御鍳”이라는 13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오나라는 희(姬)씨 성으로 주나라의 제후국입니다. 부차는 춘추오패 중 한명인 오나라 왕 합려의 아들로 부차는 와신상담의 주인공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와신상담
와신상담(臥薪嘗膽)은 춘추시대 말 오나라와 월나의 전쟁에서 비롯된 고사성어입니다. 오나라 왕 합려는 군사를 일으켜 월나라를 침공하였는데, 월나라 왕 구천에게 크게 패한 후 죽으면서 아들 부차에게 반드시 원수를 갚아 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에 부차는 거친 땔나무 위에 누워 자며 복수심을 키웠습니다. 마침내 전쟁에서 부차는 구천을 사로잡았지만, 구천은 월나라 재상 범려의 지혜로 목숩을 건졌습니다. 이후 부차는 오나라 충신 오자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천을 놓아주게 됩니다. 풀려난 구천 역시 쓸개를 곁에 매달아 두고 쓰디쓴 쓸개를 맛보며 복수를 다짐하였습니다. 또한 서시라는 미녈르 부차에게 보내서 정사를 소흘하게 합니다. 마침내 구천은 오나라를 멸망시키게 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3. 권력의 상징
주나라는 의례에 사용하는 음식그릇과 악기를 신분에 따라 구분하였습니다. 천자를 정점으로 한 신분 질서를 강화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청동기읭 제작 목적이 신에서 인간으로 옮겨졌습니다. 주나라의 등장과 함께 술 바치는 의례가 서서히 쇠퇴하고 음식 바치는 의례가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이 때문에 상나라에서 발달했던 여러 술그릇은 사라지거나 모양이 바뀌게 되고 그 대신 음식그릇이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음식그릇은 조리기와 차림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조리기는 아궁이가 없어도 내부를 가열할 수 있도록 그릇 아래에 발이 달렸습니다. 고기 삶는 세발솥과 찜통이 대표적입니다. 차림기로는 곡식담는 그릇, 장조림 같은 음식을 담았던 굽다리 접시 등이 있습니다. 한편 서주 때에는 음식그릇과 함께 여러 악기도 발달합니다. 음식그릇과 악기는 신분에 따라 사용방법을 구분하였고, 천자를 정점으로 한 신분 질서를 유지하는데 쓰였습니다. 상나라 때에는 신을 위해, 주나라 때에는 인간의 권력을 위해 청동기를 사용한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3. 위키백과, 2023년
  4. 실록위키, 2023년
  5. 바이두백과(https://baike.baidu.com/), 2023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중국고대청동기] 청동기 문화의 시작

고대 중국에서 지배층이 신분을 나타내거나 종묘와 궁궐 등에서 의식을 거행할 때 사용하는 도구를 예기(禮器)라 한다. 청동으로 만든 예기로는 곡식 등을 담는 그릇, 술잔, 솥 등이 있으며 신분에 따라 사용이 제한되었다. 중국 역사와 문화를 관통하는 종묘와 왕실 의식의 유물인 예기는 중국은 물론 한반도에서도 고대국가에서부터 조선시대를 거쳐 현대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국의 청동예기는 기원전 20세기 하나라 때부터 만들어지 시작한다. 이전에 사용했던 토기를 본 떠서 만들었는데 최초의 청동예기는 술을 데우는 세발 술잔인 가(斝, Jia)와 고(觚, Gu), 작(爵, Jue)와 고기를 삶는 그릇인 정(鼎, Ding), 력(鬲 Li) 등이다. 초기의 청동 예기는 형태와 문양이 단순했는데 기술의 발전에 따라 그릇의 종류와 무늬가 다양해진다.

정(鼎, Ding)은 청동예기를 대표하는 것으로 원형의 용기에 세발이 붙은 형태로 음식을 조리할 때 사용하는 식기(食器)에 해당한다. 가장 많이 사용된 예기로 상(商)대부터 한(漢)대까지 사용되었으며 후대에는 향로로 많이 사용되었다. 궤(簋)와 함께 왕이나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예기로 여겨졌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01<1.고기 삶는 세발솥(수면문정 獸面文鼎 Ding), Tripod Cauldron, 서주 전기 기원전 11~10 세기 전반>

신비한 무늬로 가득 차 있는 이 청동기는 고기를 삶을 때 사용한 세발솥(鼎)입니다. 하나라 때 등장한 뒤, 제사나 의례에 빠지지 않고 사용되던 가장 중요한 청동기입니다. 몸통에는 온통 동물얼굴무늬가 가득한데, 도철(饕餮)무늬라고도 합니다. 도철은 무엇이든 먹어치워 결국 자신의 몸도 먹어버려 머리만 남았다는 전설 속에 나오는 괴수입니다. 도철을 장식한 청동기는 신비한 힘으로 악령을 퇴치하는 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때문에 절대적인 권위를 상징하게 되어 왕이 사용하는 청동기에 장식되었습니다. 동물얼굴무늬는 상 중기부터 서주 전기까지 유행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02<2. 술 데우는 세발 그릇(연주문가連珠文斝 Jia), Wine Vessel, 하 후기, 기원전 18 ~ 16세기>

의례 때 사용한 울창주(울금향과 검은 기장으로 빚어 만든 술)를 따뜻하게 데워 담았던 그릇입니다. 아가리에 있는 두 개의 짧은 기둥은 술에 남은 찌꺼기를 거르는 망을 걸 때 사용하였습니다. 초기에는 제작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탓에 다리의 빈 공간에 술이 고였습니다. 표면에 불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고 내부에도 흰색 찌꺼기가 붙어 있어 당시 실제로 술을 데우는 데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슬무늬 장식은 하나라 청동기의 특징이며 상나라 때 점차 없어집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작(爵)은 중국 청동예기 중 하나로 술을 따르는 용도로는 사용되는 주기(酒器)이다. 손잡이와 발이 셋이 있는데 크기가 작고 참새를 닮았다고 하여 작(爵)이라 한다. 서주 중기까지 사용되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03<3. 세발 술잔(수면문작 獸面文爵 Jue), 상 전기 기원전 16~15세기 중엽>

상나라 때는 세발 술잔의 아가리에 짧은 기둥 두 개를 세우는데 이 술잔은 모두 떨어져 버렸습니다. 두 개의 다리는 몸통 아래 양쪽으로 배치하고 한 개의 다리는 손잡이 아래에 배치하여 수평을 잡았습니다. 몸통 중간의 동물얼굴무늬 장식은 전형적인 상 전기의 양식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고(觚)는 작(爵)과 함께 술잔으로 사용되었던 나팔모양의 청동기이다. 오래된 예기(禮器) 중 하나로 어리터우(二里頭) 문화에서 도제(陶製)가 사용되었고, 상대에 청동제의 고가 유행하였다. 상부에는 파초문이, 중간과 하부에는 도철무늬로 장식되었으며 바닥 안쪽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04<4. 나팔 모양 술잔(수면문고 獸面文觚 Gu), Wine Beaker, 상 중기 기원전 15세기 중엽 ~ 13세기>

술을 마시거나 따르는 용도로 사용한 나팔 모양 술잔입니다. 원래 이름은 ‘동同’이고, 송나라 이후부터 ‘고觚’라고 불렀습니다. 이 술잔은 초기의 것으로 크기가 작고 굽다리에 십자형 구멍 3개가 있습니다. 굵은 선을 이용한 몸통의 동물얼굴무늬와 굽다리의 용무늬 장식 역시 이 시기의 특징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05<동물얼굴무늬(몸통) 용무늬(굽다리)>

가(斝)는 술을 데우는 비교적 큰 그릇으로 입 가장자리에 두 개의 삿갓 모양의 작은 기둥이 솟아 있고 측면에 하나의 손잡이가 있으며 다리가 셋이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09<5. 술 데우는 세발 그릇(수면문가 獸面文斝 Jia), 상 중기 기원전 15세기 중엽 ~ 기원전 13세기>

술을 데울 때 사용한 그릇입니다. 목과 몸통에 동물얼굴무늬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돌출된 눈을 제외하고 선의 굵기로 무늬의 차이를 표현하였습니다. 목에는 가는 선을, 몸통에는 굵은 선을 사용했습니다. 이런 표현 방법은 상 중기에 유행한 장식기법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06<6.고기 삶는 세발솥(수면문정 獸面文鼎 Ding), 상 전기 기원전 16 ~ 15세기 중엽>

배다 부른 몸통에 바닥이 둥글고 그 아래로 납작하며 끝이 뾰족한 용 모양 다리 세 개가 붙어 있습니다. 이런 다리를 가진 세발솥은 신석기시대 토기를 본 떠 만들던 세발솥이 청동예기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몸통에는 동물얼굴무늬를 한 줄로 두르고 그 아래위에 각각 구슬무늬를 장식하였습니다. 상 전기에 유행했던 무늬입니다. 솥의 바닥과 다리 안쪽에는 그을음이 있어 실제로 고기를 삶는데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다리 하나에는 용무늬가 없는데, 떨어져 나간 것을 뒤에 새로 붙이면서 용무늬가 생략된 것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07<7. 고기 삶는 세발솥, (수면문정 獸面文鼎 Ding), 상 중기 기원전 15세기 중엽 ~ 13세기>

이 세발솥은 상 중기에 만들었지만 전기의 형태를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두꺼운 두 귀와 몸체에 비해 비교적 길고 공간이 비어 있는 송곳 모양 다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귀와 다리를 일직선상에 배치하여 시각적으로 불안해 보입니다. 다리는 지면에 닿는 부분이 둥글게 처리되어 있어, 뾰족한 모양의 다리가 원기둥 모양으로 변하는 과도기 형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몸통에 동물얼굴무늬가 장식되어 있고, 그 아래위에 모두 구슬무늬가 있습니다. 허난성 은허 유적 무덤에서도 비슷한 모양의 세발솥이 발견되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역(鬲)은 음식을 조리하는 식기(食器)에 해당한다. 고기를 삶는데 주로 쓰였으며 정(鼎)에 비해 크기가 작은 편이다. 서주때 조리기구로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08<8. 세발솥(수면문력 獸面文鬲 Li), Tripod Cauldron), 상 중기 기원전 15세기 중엽 ~ 13세기>

음식을 끓일 때 사용하던 세발솥으로 신석기새대에는 토기로 제작하던 그릇입니다. 상 중기 청동기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무늬의 면적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몸통에 한 줄의 띠로 무늬를 둘렀던 전기와 달리 중기부터는 몸통 전체에 장식하였습니다. 열을 가하지 않아 무늬와 색이 그대로 잘 남아 있습니다. 상 중기에는 이미 청동기 제작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잘 보여줍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1. 청동기 문화의 시작
중국의 청동그릇은 기원전 2천년 무렵 하나라 때부터 제작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토기를 본떠 청동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최초의 청동 그릇은 세발 술잔과 고기 삶는 세발솥입니다. 중국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청동기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첫번째 나라인 하나라 때부터 입니다. 전설처럼 알려지던 하나라는 1959년 허난(河南)성 옌스(偃师)현 얼리터우(二里頭)에서 궁전유적이 발견되면서 역사적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하나라는 전설속의 우왕이 기원전 21세기에 세운 뒤 17대 걸왕에 이르기까지 500년 가까이 존속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라 사람들은 이 지역에 오랜 기간 계속되고 있었던 신석기시대 룽산(龍山)문화의 구리 가공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청동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신석기시대 토기의 모양을 본뜬 단순한 무늬의 세발 술잔이나 고기 삶는 세발솥이었습니다. 뒤이은 상나라 때에는 그릇의 종류와 무늬가 다양해집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우는 그제야 천자자리에 올라 …. 나라 이름은 하후, 성은 사씨라 하였다. <<사기>><하본기>
나라의 큰일은 제사와 전쟁에 있다. <춘추좌전>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10<1. 굽다리 술잔 모양 토기 만들기>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11<2. 바깥 거푸집 만들기>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12<3. 바깥 거푸집에 무늬 추가, 4. 안쪽 거푸집 만들기>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13<5. 거푸집 합치고 굽기>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14<6. 쇳물 부어 완성>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15<9. 청동기 주조 모형>

청동기의 제작
상주시대에는 청동예기를 만들 때 먼저 흙으로 만들고자하는 형태를 만들고 여기에 진흙을 발라 바깥 거푸집을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 처음 만든 토기의 포면을 깎아낸 뒤 바깥 거푸집과 합쳐 그 사이에 쇳물을 붓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쇳물을 넣어 식힌 뒤, 바깥 거푸집을 부수고 청동기를 꺼내야 했기에 상주시대에 만든 청동기 중 똑깥은 것은 없습니다. 세상에 딱 하나만 존재합니다. 한편, 기원전 10세기 무렵 상나라의 분주법(分鑄法)은 복잡한 형태의 청동기 제작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분주법은 청동기의 손잡이나 다리 등 튀어 나온 부분을 먼저 주조한 뒤 이를 거푸집에 넣고 쇳물을 주입하여 몸통과 결합하는 방식입니다. 이로써 다양한 청동기의 제작이 가능해져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1921년 가을 <중국고대청동기, 신에서 인간으로>라는 제목으로 특별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중국에서도 청동예기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상하이박물관과 협력하여 고대 중국을 대표하는 형태의 청동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소개할 수 있는 유물들을 전시하였다. 여러 박물관에서 단편적으로 볼 수 있었던 중국 고대 청동기들의 역사와 용도, 의미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였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청동기문화시작 20211013_16
<중국고대청동기, 신에서 인간으로>

전시를 열며
국립중앙박물관은 중국 청동기 대표 박물관인 상하이박물관과 협력하여 중국 고대 청동기 특별전을 개최합니다. 1928년 은허(殷墟) 유적에서 삼천 삼백여 년 전의 청동기가 대규모로 발굴되었습니다. 안개 속에 싸여 있던 상나라의 실체가 처음으로 드러났습니다. 황하문명을 세계에 알린 순간이기도 합니다. 이어진 발굴조사로 중국 청동기는 기원전 21세기경 하나라 때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되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전쟁과 같은 생사를 가르는 중대사를 결정할 때 왕은 직접 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 의식에 사용하는 청동 그릇에 들이는 정성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무서운 괴수 얼굴이 떠오르는 기괴한 무늬, 탄성을 자아내는 압도적인 크기와 형태는 신에게 바치기 위한 제례 도구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신을 위해 사용되던 청동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왕과 제후의 권력을 상징하는 수단으로 변화합니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에 철기가 사용되자 청동기는 일상용기로 쓰임새가 다시 한번 바뀝니다. 세계 다른 어떤 지역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보적인 문화유산 중국 청동기, 이번 특별전에서 시대에 따른 중국 고대 청동기 문화의 변화상과 함께 청동기의 제작방법, 무늬,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중국 역사의 단면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웃나라 중국의 고대 역사를 담고 있는 그릇, 상하이박물관의 보물을 지금부터 만나 보십시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상하이박물관
1952년 개관한 상하이 박물관은 중국 동남부의 대표박물관으로 중국 국가박물관, 샨시역사박물관과 함께 중국 3대 청동기 박물관으로 세계 최고의 청동기 컬렉션을 자랑합니다. 청동기 이외에도 도자기, 회화 및 서예 작품이 유명하며 14만여 점의 중요 고대 유물을 포함하여 약 102만점의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건물 외관은 ‘천원지방’, 즉 둥근 하늘과 네모진 땅이라는 중국의 세계관을 반영하였고 위쪽에 솟은 반원형 장식은 세발솥을 모티브로 하였습니다. 이러한 독특한 외관으로 상하이의 랜드마크가 되었습니다. 상하이박물관은 1950년대 중국에서 일어난 ‘쇠붙이 모으기 운동’을 기반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당시 항구가 있던 상하이에 가장 큰 제련소가 있었고 엄청나게 많은 청동기가 유입되었습니다. 이 중에 고대 청동기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고 3만 여점의 청동기가 상하이박물관으로 전달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청동기의 진위문제를 말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이후 중국 내 유적 발굴이 활발해지면서 상하이박물관 소장품 대부분이 진품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1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3. 위키백과, 2023년
  4. 미술사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2020년

 

 

중국 둔황(敦煌), 서역으로 출발하는 실크로드 도시

중국 간쑤성(甘肃省) 둔황(敦煌)은 간쑤성, 청해성(青海省), 신장 위구르자치구가 만나는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는 인구 19만의 지방소도시이다. 고대 실크로드에서 중국 밖(外地)으로 떠나는 출발지이자, 시안(長安)에서 옥문관까지 이어지는 길이 900 km 하서주랑(河西走廊)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기원전 111년 한무제가 실크로드를 개척하면서 둔황현(敦煌縣)을 설치하였으며 명나라 때 해상교역로가 활성화되기 전까지 실크로드 관문도시로서 물자와 문화 교류의 중심지였다. 지금은 철도를 비롯한 주요 교통로에서 소외되어 있으며 농업과 관광에 주로 의존하고 있다. 주요 유적으로 실크로드 서역북도 출발점인 옥문관, 서역남도 출발점인 양관, 천불동이라 불리는 막고굴 등이 있으며, 중앙아시아 사막 풍경을 대표하는 명사산과 월아천, 아단지질공원 등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실크로드를 대표하는 풍경인 명사산과 월아천>

둔황공황은 도심에서 동쪽으로 12.7 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란저우, 우루무치, 시안, 베이징 등과 연결되는 항공편이 있다. 둔황 공항 앞에 기차역이 있으며 시안에서 둔황까지는 10시간 이상 소요된다. 막고굴이 남쪽 15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버스로 직접 연결된다.

SANYO DIGITAL CAMERA<둔황 공항>

막고굴(莫高窟, Mogao Cave)은 명사산 동쪽 남북으로 약 1.6 km 걸쳐 약 600 여개의 석굴사원을 말한다. 오호십육국 때 처음 조성되기 시작되어으며 원대(元代)까지 약 1,000에 걸쳐 조성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은 5세기 북양 때 조성된 것이며 북위 때 조성된 굴에는 서역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북주(北周)와 수당(隋唐) 조성된 굴에서는 중국적인 모습을 많이 보인다. 19세기 말 장경동에서 많은 고문서들이 발견되면서 서구에 그 존재가 알려졌으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막고굴이 있는 명사산 동쪽 언덕>

SANYO DIGITAL CAMERA<둔황 막고굴>

SANYO DIGITAL CAMERA<막고굴 96호굴인 북대불전>

명사산은 감숙성 둔황시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모래언덕으로 모래들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가 울림소리처럼 들린다고 하여 명사산(鳴沙山)이라 부르며 그 아래 샘이 솟는 작은 오아시스인 월아천이 사막의 극적인 풍경을 잘 표현하고 있어 예로부터 둔황을 대표하는 명소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명사산과 월아천은 낙타를 타고 실크로드를 출발하는 장면으로 많이 등장하는 곳이다.

SANYO DIGITAL CAMERA<명사산 모래언덕>

OLYMPUS DIGITAL CAMERA<월아천과 월아산장>

둔황의 전통시장인 사주시장(沙州夜市)에서는 실크로드의 전통 음식과 이곳에서 거래되었던 물품들과 지역민들이 사용하는 생활용품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시장에서는 물품이 활발히 거래되는 옛날의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고, 중소도시 전통 재래시장의 모습을 접할 수 있다. 신장의 중심도시인 우루무치에서 옛 실크로드의 모습이 재현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둔황 사주시장>

SANYO DIGITAL CAMERA<생필품이 거래되는 모습>

사주시장에서는 다양한 먹거리와 이를 즐기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에서 시장의 활기찬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시장 광장 한편에 설치된 벤치에서 다양한 음식들을 즐길 수 있다. 이곳은 음식을 만드는 사람과 주문을 받는 사람이 다르며 음식 주문을 받으면 서비스를 하는 사람이 여러 곳에서 음식을 가져다 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사주시장 중심부 광장>

SANYO DIGITAL CAMERA<광장에 설치된 테이블과 의자>

SANYO DIGITAL CAMERA<실크로드의 특성을 보여주는 낙타고기 요리>

SANYO DIGITAL CAMERA<도심에 위치한 호텔>

실크로드(緋緞路)는 근대 이전 중국과 서역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를 말하며 좁게는 고대 북방민족이 중앙아시아 오아시스를 연결하는 오아시스길을 말한다. 둔황은 실크로드 타클라마칸 사막 남북쪽에 만들어진 서역남로와 북로가 만나는 지점으로 이곳에서 중국 바깥으로 나간다고 여겨졌다. 둔황에는 한대 만리장성 서쪽 끝 2개의 관문인 양관(陽關)과 옥문관(玉門關)이 있다. 양관(陽關)은 서역남로를 출발하는 관문으로 타클라마칸사막 남쪽길을 통해 호탄, 카슈카르 등을 거쳐 서역으로 연결된다. 옥문관(玉門關)은 서역북로를 출발하는 관문으로 누란, 투루판, 쿠울러 등을 거쳐 서역으로 연결된다.

SANYO DIGITAL CAMERA<옥문관 부근 한대 만리장성>

옥문관(玉門關)은 한 무제 때 흉노를 공략하기 위해 하서사군(河西四郡)을 설치하면서 옥(玉)을 수입하던 통로라 하여 옥문관이라 불렀다. 옥문관은 설치된 이래 여러 차례 위치를 옮겼으며 당대(唐代)까지 서역과 연결되는 중요 교통로로 번창하였다. 둔황 북서쪽 90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옥문관 유적은 1907년 영국 탐험가가 소방반성(小方盤城)을 조사하다가 옥문도위(玉門都尉)라 적힌 목간을 발견하면서 그 위치가 확인되었다. 현재의 유적은 당나라 때 건설된 것이다.

SANYO DIGITAL CAMERA<옥문관 관성>

SANYO DIGITAL CAMERA<한대 만리장성 성벽>

SANYO DIGITAL CAMERA<옥문관 주변 봉수대>

아단국가지질공원(敦煌雅丹国家地質公園)은 옥문관에서 25 km 정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옥문관을 나서 사막길에 볼 수 있었던 이채로운 풍경은 많은 전설을 만들어 냈던 것으로 보인다. 옥문관에서 사막을 가로질러 물이 흘렀던 강을 따라서 도로가 개설되어 있는데 주변에 다양한 모습의 바위들을 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둔황국가지질공원 전경>

SANYO DIGITAL CAMERA<기암괴석>

양관(陽關)은 서역 남도(南道)로 나가는 관문으로 당대(唐代) 인도를 방문했던 현장법사가 양관을 통해 중국으로 돌아왔다. 양관 일대는 소륵하(疏勒河, Shule River) 주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크게 번창했는데 송대(宋代) 이후 실크로드와 함께 쇠퇴하였다. 당시 쌓았던 성벽은 남아 있지 않으며 언덕에 봉수대터만 볼 수 있다. 지금은 양관박물관이 세워져 실크로드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한대 만리장성 관문을 재현해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양관 부근 봉수대>

양관박물관에는 엣 양관의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벽돌로 쌓은 명청대 성벽에 비해 성벽이 높지 않으며 내부도 넓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양관 성문, 성벽, 치성, 공성과 방어무기 등을 재현해 놓고 있다.  옥문관 주변 있는 한대 장성의 원래 모습을 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양관박물관>

양관은 둔황 도심에서 남서쪽으로 75 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양관 일대는 남쪽 높은 산악 지역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모이는 곳으로 여러 곳의 오아시스가 있고, 그 주변에 농경지와 촌락이 형성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양관 성벽 안쪽에 있는 오래된 오아시스, 황수 파수고(黄水坝水库)라 한다.>

SANYO DIGITAL CAMERA<사막과 풍부한 수량의 저수지>

SANYO DIGITAL CAMERA<저수지 뒷편으로 보이는 양관 봉수대 유적지>

SANYO DIGITAL CAMERA<큰 규모의 저수지>

SANYO DIGITAL CAMERA<저수지 제방>

SANYO DIGITAL CAMERA<제방 아래 수로 입구>

SANYO DIGITAL CAMERA<풍부한 수량의 마을 수로>

마을은 사막지역에 방풍림으로 많이 이용되는 포플러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가운데에 농작물이 심어져 있다.  이 곳의 농작물을 주로 포도를 많이 재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대부분 건포도를 만들어서 내륙으로 보내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경제 발전에 따라서 수요가 늘어서인지 경작지는 계속 넓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최근에 심은 어린 포도나무들을 자주 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방풍림이 울창한 마을 가로수>

SANYO DIGITAL CAMERA<마을 주택가>

SANYO DIGITAL CAMERA <포도 농장>

SANYO DIGITAL CAMERA<포노 농장 식당>

SANYO DIGITAL CAMERA<사막에서 볼 수 있는 포도 건조장>

<출처>

  1. 위키백과, 2021년
  2. 실크로드 문명기행, 정수일, 한겨레출판, 2006년
  3. 실크로드사전, 편저 정수일, 창비, 2013년
  4. 百度百科, 2021년

 

중국 투루판(吐鲁番), 실크로드를 대표하는 도시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있는 투루판시(吐鲁番市)이다. 타틀라마칸 사막과 천산산맥 사이에 있는  투루판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동서교역로였던 실크로도 북도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북쪽 만년설이 쌓여 있는 천산산맥 흐르는 풍부한 수량에 의존해 살고 있다. 전한(前漢) 이후 차사전국(車師前國)이 자호허고성(交河故城)에, 당대에는 고창국(高昌國)이 가오창고성에 자리 잡았다. 당대 이후에는 위구르족이 터를 잡고 살아오고 있다. 투루판분지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고 여름에는 매우 더운 건조지역으로 카레즈(Karez)라는 관개시스템을 이용하여 포도를 비롯한 과일을 풍부하게 생산하고 있다. 인구는 약 60만명으로 주요 민족으로 위구르족(70%), 한족(23%), 후이족(6%) 등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투루판 화염산>

투루판은 우루무치와는 187 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투루판 분지 서쪽 자오허고성(交河故城) 부근에 도심이 자리잡고 있으며, 베제클리크 계곡 입구 가오창고성(高昌古城) 부근에도 구도심이 형성되어 있다. 도심은 다른 도시에 비해서 도로가 넓고 거리도 상당히 깨끗하다. 철도가 도심을 지나가지 않고 인구가 많이 살고 있지 않아 도심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과 자동차도 많지 않은 편이다.

SANYO DIGITAL CAMERA<도심 대로>

투루판은 카레즈라는 관개시스템을 통해 천산산맥에서 지하수로를 통해 물을 충분히 공급받고 있다. 도심에는 많은 가로수들이 심어져 있고, 농경 주변이나 마을 근처에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경제 발전에 따라 중국내 과일 수요가 많아서 그런지 사람들은 경제적으로는 비교적 풍부해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투루판 관개시스템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도심 호수공원>

SANYO DIGITAL CAMERA<가로수가 울창한 도로>

SANYO DIGITAL CAMERA<도심 거리>

SANYO DIGITAL CAMERA<호수공원을 즐기는 시민들>

투루판은 천산산맥 관개수로에 의존한 오아시스 농업과 실크로드 교통요지로 역사 이래 번창했던 도시였다. 기원전 1세경 한(漢) 왕조에 정복되기 전에는 차사전국(車師前國)이 자오허고성을 중심으로 번창했다. 이후 한족과 소그드족이 투루판에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여러 왕조가 이 지역을 지배했으며 5세기까지 자오허고성이 지역의 중심지였다. 카라호자라 불리는 고창(高昌)은 투루판분지 중심부 가오창고성에 존재했던 국가이다. 고창국은 5호16국시대 북량의 패잔병들이 자리를 잡았으며 여러 왕조가 바뀌면 651년 당나라에 멸망하기까지 실크로드에 불교의 전파 등 동서교류에 큰 역할을 했다. 가오창고성, 이스타나고분군, 베제클리크 석굴, 토욕구 석굴 등 이 대표적인 고창국 유적이다. 당나라는 투루판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했다. 803년 위구르인이 투루판을 점령하면서 위구르족이 대량으로 이주해 왔으며 이후 위구르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자오허고성(交河故城)>

SANYO DIGITAL CAMERA<가오창고성(高昌古城)>

SANYO DIGITAL CAMERA<아스타나 고분군(阿斯塔那古墓)>

불교는 실크로드 천산북로를 따라 4~5세경 중국 북위에 전파되었으며 투루판지역도 불교가 크게 번성하였다. 고창국은 당나라 현장법사가 불경을 구하려 인도를 여행할 때 융숭한 대접을 받았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가오창고성과 자오허고성에 남아 있는 절터는 실크로드 도시에서 불교사원의 위상을 살펴볼 수 있다. 투루판분지 입구에 있는 석굴사원 단지인 토유크천불동과 베제클리크천불동이 당시 번성했던 불교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자오허고성 대불사 절터>

SANYO DIGITAL CAMERA<가오창고성 대불사 절터>

SANYO DIGITAL CAMERA<토유크석굴 사원(吐峪沟石窟)>

SANYO DIGITAL CAMERA<베제클리크 석굴(柏孜克里千佛洞)>

위구르인(Uygurla)은 중앙아시아 튀르크계 민족으로 신장 위구르자치구에 주로 고 있다. 투루판 주민의 75% 정도가 위구르인이다. 866년 위구르족은 투루판지역을 장악하고 가오창고성에 위구르왕국을 세웠다. 원(元), 명(明) 시기 중국과 갈등 관계였으며 1755년 청나라에 속하게 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구르인은 원래 마니교인이었는데 불교로 개종했으며 점차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15세기 이후 이슬람 사회가 되었다. 이슬람 관련 유적으로 토요크 마가촌에 1,300년 전 이슬람을 전파한 현자들의 무덤인 <오카피 마자(霍加木麻扎)>와 이슬람 사원이 소공탑 등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오카피 마자(霍加木麻扎)>

SANYO DIGITAL CAMERA<소공탑>

SANYO DIGITAL CAMERA<토유크 마가촌>

투루판 분지는 평균 고도가 해수면 보다 낮으며 중동의 사해(死海) 다음으로 수면이 낮은 아이딩호가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분지이다. 여름에는 일평균 40˚C 이상 올라가는 경우가 많으며, 그늘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비가 오듯 흘러내린다고 한다. 투루판 명소 중 한곳인 화염산은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져 햇빛을 받으면 마치 불길이 치솟는 모양이다. 소설 서유기에는 손오공이 천상세계에서 화로를 땅으로 던져 투푸판 분지가 만들어 졌고, 화로의 열기로 불타오르는 화염산이 생겼으며 파초선으로 불을 껐다고 표현되어 있다. 이곳의 더위는 여행객이나 주민들에게 모두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풀한포기 찾아 볼 수 없는 투루판 분지 북쪽에 있는 화염산>

SANYO DIGITAL CAMERA<화염산 골짜기 바위언덕>

천산산맥 남쪽 실크로드에서 투루판 분지로 이어지는 길과 큰 강은 크게 동쪽 신산현(鄯善县)으로 연결되는 계곡, 토욕구 석굴이 있는 계곡, 베제클리크 석굴이 있는 계곡과 우루무치로 연결되는 길이 있다. 오랜 세월 분지로 들어오는 입구에 도시가 번성했다.

SANYO DIGITAL CAMERA<우루무치에서 투루판 분지로 이어지는 계곡>

SANYO DIGITAL CAMERA< 베제클리크 석굴사원이 있는 계곡>

SANYO DIGITAL CAMERA<베제클리크 석굴사원과 천산산맥 남쪽으로 이어지는 계곡>

SANYO DIGITAL CAMERA<토욕구 계곡에서 내려다 보이는 투루판분지>

투루판 분지는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 끝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타클라마칸 사막은 물이 거의 없어 죽음의 사막으로 알려졌으며, 이 사막을 건넌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로 간주되었다.  고대 실크로드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막 남쪽 쿤룬 산맥을 따라서 인도로 향하는 남도와 북쪽 천산산맥을 따라 가는 북도가 있었다.

SANYO DIGITAL CAMERA<타클라마칸 사막>

도심에서 동쪽으로 60 km 정도 떨어진 농촌 지역으로 가면 거대한 모래산을 볼 수 는데 타클라마칸 사막을 대표하는 풍경 중 하나이다. 모래사구 앞쪽에는 언제 물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큰 강물이 흘렀던 흔적을 볼 수 있다. 이 곳 사람들은 신경통에 좋다고 해서 파라솔을 세워 놓고 모래찜질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거 한다.

SANYO DIGITAL CAMERA<타클라마칸 사막 모래사구>

SANYO DIGITAL CAMERA<사막에 물이 흘렀던 흔적>

SANYO DIGITAL CAMERA<모래찜질을 하기 위해 사막을 찾는 현지 주민들>

투루판 분지에서 유전이 발견되어 석유 산업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천산산맥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강풍이 풍력발전이라는 새로운 에너지원을 제공해 주고 있다. 시추한 원유를 저장하는 시설. 저장탱크는 크지 않은 편이다. 투루판 지역은 천연가스도 많이 생산되는 것으로 보이며 많은 자동차들이 천연가스를 연료로 사용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투루판분지 사막에서 볼 수 있는 석유시추공>

SANYO DIGITAL CAMERA<투루판 석유회사에서 운영하는 도심 호텔>

투루판에서 우루무치로 연결되는 고속도로에서는 끝없이 펼쳐진 풍력발전소 풍차들을 볼 수 있다. 투루판은 바람이 많은 지역으로 북쪽 천산 산맥에서 투루판 분지로 바람이 분다.

SANYO DIGITAL CAMERA<우루무치 가는 길에 볼 수 있는 끝없이 이어지는 바람개비>

SANYO DIGITAL CAMERA<풍력발전소 바람개비>

투루판 사람들은 북쪽 천산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끌어 들여 경작을 하고 있다. 옛날에는 비교적 풍부한 수량의 강물이 흘렀으며 사람이 정착해 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점차 강의 수량이 줄어들면서 사람들은 인공적으로 관개수로를 만들었는데 이를 카레즈라고 부른다. 카레즈는 운하처럼 수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물의 증발을 막기 위해 지하 수m~수십m에 터널을 파서 관개수로를 만드는 것으로 전체가 5천 km에 이른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자오허고성 주위를 흐르는 강물>

SANYO DIGITAL CAMERA<카레지 지하수로>

SANYO DIGITAL CAMERA<지하수로에 연결된 우물>

투르판은 지열이 높고 일조량이 많으며 과일이 풍부하게 산출되며, 당도도 높다. 카레즈라 불리는 관개시스템 덕분에 수량도 비교적 풍부하여 농업이 발달한 편이다. 투루판을 대표하는 작물로는 포도, 하미과 등이 있으며 면화와 채소류의 재배도 활발한 편이다.

SANYO DIGITAL CAMERA<투루판에서 재배되는 포도>

SANYO DIGITAL CAMERA<사막에서 볼 수 있는 포도건조장>

SANYO DIGITAL CAMERA<시장에서 볼 수 있는 수박과 하미과(노란색)>

투루판은 다른 지역에 비해 생활이 약간 윤택하고 여유로운 느낌을 주고 있었으며, 시골마을 곳곳에 작은 시장고 가게를 많이 볼 수 있다. 장터에서는 이슬람식 절차에 따라 잡은 양고기를 팔고 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위구르인들은 양고기와 토마토를 비롯한 채소를 이용하여 다양한 요리를 만든다.

SANYO DIGITAL CAMERA<투루판 시골길>

SANYO DIGITAL CAMERA<시골마을 장터>

SANYO DIGITAL CAMERA<장터에서 거래되고 있는 양고기>

SANYO DIGITAL CAMERA<시골 작은 상점>

<출처>

  1. 위키백과, 2021년
  2. 百度百科, 2021년
  3. 실크로드문명기행, 정수일, 한겨레출판사, 2006년

 

중국 우루무치(乌鲁木齐), 신장 위구르 자치구 중심도시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중심도시인 우루무치(乌鲁木齐, Ürümqi)이다. 중국 서부지역을 남북으로 가르는 천산산맥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업과 교통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고대 이래 동서교역로인 실크로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문화적으로 중앙아시아 국가의 도시와 비슷하다. 인구는 350만 정로 한족(75%), 위구르족(13%), 후이족(8%)이 주를 이루며 카자흐족, 만주족, 몽골족, 우주벡족 등 다양한 소수민족들이 모여살고 있다. 바다에서 2,300 km 이상 떨어져 있어 ‘바다로부터 가장 먼 도시’, ‘유라시아대륙의 중심점’ 등으로 불린다. 예전에는 시안에서 열차를 타고 30시간 이상 가야 했으나 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13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우루무치는 투루판에 있었던 차사국(車師國) 영역이었으며 당나라가 천산 북쪽에 룬타이현(轮台县)을 설치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위구인을 비롯하여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땅이었으며 1763년 청나라 건륭제가 이 지역을 정벌하면서 중국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우루무치 도심>

SANYO DIGITAL CAMERA<우루무치 도심 고층빌딩>

SANYO DIGITAL CAMERA<도심 대로>

SANYO DIGITAL CAMERA<도시를 오가는 버스>

우루무치는 표준시가 북경시에 맞추어져 있어 여름에는 저녁 10시가 지나야 해가 진다. 되어야 어두워진다. 해가 지면 많은 사람들을 도심 거리에서 밤을 즐긴다. 이슬람 교도인 위구르인들은 술과 담배를 전혀 하지 않고 밤거리에는 한족이 주를 이루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밤이 되면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

SANYO DIGITAL CAMERA<노점에서 양꼬치를 굽는 설비>

우르무치는 회교국가인 중앙아시아 도시들과 문화적으로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슬람사원이 모스크를 중심으로 시장인 바자르가 형성되어 있다. 현재 우루무치는 중국과 중앙아시아 국가를 연결하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으며 도시 경제에서 3차산업의 비중이 비교적 큰 편이다. 한족들이 많이 살고 있지만 바자르(시장)에서 중앙아시아 도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우루무치 전통 바자르(시장)>

SANYO DIGITAL CAMERA
<현대식 바자르>

우루무치는 해발 800 m 이상의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천산산맥이 투루판 사막지역과 분리하고 있다. 연간 강수량이 많지 않지만 천산산맥에 쌓인 눈이 녹아 흐르는 강물과 지하수 등으로 물은 비교적 풍부한 편이다. 주요 관광지로는 천산 천지(天山 天池), 남산목장(南山牧场), 신장 국제 대바르(新疆国际大巴扎), 신장 위구르자치구 박물관(新疆维吾尔自治区博物馆), 홍산공원(红山公园) 등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투루판에서 우루무치를 가는 길에 볼 수 있는 천산산맥>

SANYO DIGITAL CAMERA<천산산맥과 농촌마을>

천산 천지(天山 天池)는 우루무치 일대에서 제일 유명한 명소이다. 천산산맥 보거다봉(博格达峰. 해발 5445 m) 북쪽에 위치한 천연호수로 울창한 숲, 눈덮힌 산과 빙하, 고산호수가 빼어난 경치를 만들고 있다. 호수는 해발 1,910 m의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북으로 3.5 km, 동서로 0.8 ~ 1.5 km 정도의 넓이며 가장 깊은 지점은 103 m이다.

SANYO DIGITAL CAMERA<천산 천지와 눈덮힌 보거다봉(5,445 m)>

SANYO DIGITAL CAMERA<천지를 오르는 케이블카에서 보이는 풍경>

남산목장(南山牧场)은 남쪽으로 75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남산목장은 천산산맥 라우청봉(喀拉乌成峰) 쪽 기슭에서 산중턱에서 고산지대로 바뀌는 지역을 말하며 해발 고도 2,100 m 이상이다. 울창한 수목, 산지초원, 계곡, 목초지 등 다양한 자연경관을 보여주고 있으며 청나라 때부터 유명한 피서지였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남산목장의 대표적인 명소인 서백양구 입구>

SANYO DIGITAL CAMERA<서백양구 계곡>

신장 국제 대바자르(新疆国际大巴扎)는 우루무치시 톈산구에 있는 전통 이슬람 바자르(시장)이다. 우루무치에서 제일 유명한 랜드마크로 모스크인 이도교청진사(二道桥清真寺)를 중심으로 바자르가 형성되어 있다. 실크로드를 통해 거래되었던 향신료를 비롯한 다양한 물품들을 볼 수 있다. 대형 현대건축물과 전통 바자르 등이 혼재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이도교청진사(二道桥清真寺)>

SANYO DIGITAL CAMERA
<첨탑>

신장 위구르 자치구 박물관은 실크로드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지역을 대표하는 박물관이다. 투루판을 비롯하여 실크로드 교통로에 있는 주요 유적지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을 살펴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신장 위구르 자치구 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박물관 내부>

<출처>

  1. 百度百科, 2021년
  2.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