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일본의 불교 미술

일본의 불교는 6세기 중반 백제를 통해 받아들여졌다. 처음에는 대승불교를 통해 율령국가를 세웠으며 국가의 지원을 받아 많은 사찰이 세워졌다. 헤이안시대에는 당나라 유학을 통해 전해진 밀교인 진언종과 천태종이 크게 유행하면서 일본적인 불교가 자리잡았으며 가마쿠라 시대에는 정토종과 선종이 널리 퍼졌다. 시대를 이끌었던 지배계층의 지원을 받은 일본 불교는 일본 문화의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앙박물관 일본불교 20220824_11<1. 목조대일여래좌상, 헤이안시대 12세기, 나무/칠,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밀교의 가르침을 그림으로 그린 것을 ‘만다라’라고 하는데, 이 중 태장계 만다라와 금강계 만다라를 합쳐 ‘양계만다라’라고 한다. 양계만다라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대일여래는 보통 여래상과 달리 머리를 묶고 장신구를 걸친 보살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손 모양은 태장계 대일여래는 배 앞에서 두 손을 모은 선정인(禪定印)을 취하고 있지만, 금강계 대일여래는 왼손 검지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싼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다. 금강계 대일여래는 우리나라에서 통일신라 후기부터 널리 유행한 비로자나불과 손모양이 같다. 그러나 우리나라 비로자나불은 일본의 대일여래와 달리 나발의 머리에 법의를 입은 모습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밀교의 발달
밀교(密敎)는 7세기무렵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의 한 갈래로, 토착 종교의 영향을 받아 은밀하고 주술적 성격이 강한 수행법을 발전시켰다. 8세기 동아시아에 전해진 밀교는 경전 <대일경(大日經)>과 <금강정경(金剛頂經)>을 바탕으로 신앙 체계를 갖추었다. 일본의 밀교는 헤이안 시대 홍법대사 구카이(空海, 774~835)가 당니라에서 밀교를 공부하고 돌아와 처음 소개했다. 일본의 밀교는 구카이가 처음 시작한 진언밀교(眞言密敎)와 전교대사(傳敎大師) 사이초(最澄, 766~822)가 처음 내세운 천태밀교(天台密敎)로 나뉘며, 두 밀교 신앙을 중심으로 조형 활동이 펼쳐졌다. 헤이안 시대에는 양계만다라의 중심인 대이리여래를 비롯해서 오대명왕(五大明王), 십이천(十二天) 등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불상이 많이 만들어졌다. 밀교에서 중심이 되는 부처인 대일여래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우주 자체를 상징한다. 이 대일여래와 여러 세계를 기하학적으로 나타낸 양계만다라(兩界曼茶羅)는 우주의 진리, 깨달음의 경지를 상징적으로 그려내 밀교의식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불교 20220824_21
<2. 목조아미타여래입상, 가마쿠라 시대, 나무/칠/옥안, 높이 89.3cm,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이 불상은 양손의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을 맞대어 오른손은 가슴 앞까지 올리고 왼손은 아래로 내린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손 모양을 ‘내영인(來迎印)’이라고 하는데, 아미타여래가 중생을 맞이할 때 갖추는 손모양이다. 헤이안 시대에는 아미타여래상이 두 손가락을 구부린 채 맞댄 ‘미타정인(彌陀定印)’의 손 모양을 하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많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가마쿠라 시대에는 새로 들어온 남송 불화의 영향을 받아 내영인을 한 채 서 있는 모습으로 많이 만들어졌다. 불상 왼쪽 발아래에 먹으로 “안아미타(安阿彌陀)”라고 쓰여 있어 눈길을 끈다. ‘아아미타불’은 가카쿠라 시대 대표 불사인 가이케이(~1227)의 법명이다. 이를 서명으로 사용하여 제작한 3척(약 90cm)의 내영인 아마타여래입상이 있어, 이와 같을 불상을 ‘안아미 양식’이라 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불교 20220824_12<3. 목조아미타여래좌상, 헤이안시대 12세기, 나무, 높이 48.5cm,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두 손가락을 구부린 채 맞댄 ‘미타정인’의 손 모양을 하고 않아 있는 아미타여래상이다. 옷 주름이 얕으며 얼굴 표정이 부드럽고 우아한 모습에서 뵤도인 호오도에 있는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좌상은 목재 몇 개를 나누어 조각한 다음 조립하는 ‘요세기즈쿠리(寄木造)’기법으로 만들어졌다. 요세기즈쿠리 기법은 여러 사람이 일을 나누어 많은 불상을 쉽고 빠르게 만들수 있는 방법으로 조초가 완성했다고 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정토종의 유행
정토(淨土)는 부처와 앞으로 부처가 될 보살이 사는 청정한 세계를 뜻한다. 중생이 사는 현실세계인 예토(穢土)와는 반대되는 곳이다. 불교에서 정토는 이 세상의 동서남북 네 방향과 사유(四維, 동남, 남서, 서북, 북동) 그리고 상하(上下)의 열 곳에 있으며, 각 정토에는 서로 다른 부처가 살고 있다. 그 가운데 아미타여래가 중심이 되는 서방의 극락정토(極樂淨土)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7세기 후반부터 일본에는 아미타여래에게 서방 극락정토에서 다시 태어나게 해 달라고 비는 신앙이 있었다. 이는 돌아가신 부모님 등 죽은 이의 왕생을 기원하는 신앙이었다. 이후 헤이안 시대에 와서는 이 세상의 고난에서 구원받고 다음 세상에서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하는 신앙으로 발전한다. 헤이안 시대 후기에는 정토교 사상이 귀족 사회에 깊이 파고 들어 화려한 정토교 미술을 꽃피웠다. 후지와라노 요리미치(992~1074)가 1052년에 세운 뵤도인(平等院)은 아미타 정토를 현세아 나타내어 화려함의 최고 경지를 보여 준다. 특지 조초(?~1057)가 만든 호오도(鳳凰堂)의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일본 불상 양식의 기준이 되어 오랜 기간 동안 계승되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정토종이 전국으로 퍼져 나가면서 귀족뿐 아니라 무사계급이나 서민들 사이에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아미타당(阿彌陀堂)의 건립이나 아미타여래상의 조성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불교 20220824_13<4. 목조남신좌상, 가마쿠라시대 13세기, 나무/채색, 높이 52.5cm, 일본 도쿄국립박물관>,<5. 목조여신좌상, 가마쿠리시대 13세기, 나무/채색, 높이 38.0cm, 일본 도교국립박물관>

이 남신상과 여신상은 헤이안 시대 중기 이후 신상의 얕고 단순한 옷 주름 표현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얼굴 표정과 사실적인 조각 표현 등 가마쿠라 신상만의 특징을 보여 준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전체를 나무 하나로 조각하는 ‘이치보쿠즈쿠리(一木造)’기법으로 만들어졌으며, 속은 파내지 않았다. 머리 부분에는 검게 칠한 흔적이 남아 있으며, 몸에도 여러 곳에 칠 자국이 있다. 칠이 벗겨진 부분은 나뭇결이 드러나 있다. 남신상은 높은 관을 쓰고 조복을 입고 있다. 가슴 앞 두 손을 덮은 옷자락 위쪽에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홀(笏)을 들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신상은 정갈하게 앞가르마를 한 머리가 흘러내려 두 어깨를 덮었고, 남신상과 같이 두 손을 가슴 앞에서 모아 소맷자락 속에 넣은 단정한 모습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신불습합
일본에는 6세기 후반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고유의 민간 신앙인 ‘신도(神道)’가 뿌리내리고 있었다. 고대 일본인은 조상은 물론 동식물, 강, 바다, 대지, 천둥, 바람 등 세상의 모든 것에 신령한 힘이 있다고 믿으며 숭배했다. 온갖 신에 둘러싸여 살던 일본인은 이국적인 모습의 부처와 보살을 외국에서 들어온 또 다른 신으로 받아들였다. 불교의 수많은 부처와 신도가 믿는 많은 신의 경계가 조금씩 흐려지면서 부처는 신도의 신으로, 신도의 신은 부처로 표현되었다. 이처럼 불교가 신도와 합해진 신앙 형태를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고 한다. 신불습합은 헤이안 시대에 들어와 일본의 신과 부처를 직접 관련짓는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로 발전했다. 부처는 본원적인 존재(本地)이며, 신도의 신들은 중생을 구하러 이 세상에 나타난 부처의 화신(垂迹)이라 하여 일본 고유의 신들을 불교 체계로 끌어들인 것이다. 이로 인해 절에는 불법의 순호신으로 신도의 신들이 모셔졌고 신사에는 불상을 따라 만든 신상이 들어섰다.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일본 고유의 신은 형상을 만들지 않다가 8세기부터 불사의 영향을 받아 신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9세기 후반부터는 불상의 영향에서 벗어나 신상만을 표현하는 방법이 시도되었다. 신상은 불상과 달리 정해진 모양이 없었으므로 당시 귀족의 모습을 나타냈으며, 표정도 불사아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 많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일본에서는 헤이안 전기에 해당하는 9세기부터 목조불이 불상의 중심이 됩니다. 헤이안 시대에 나무가 불상 재료로 쓰인 이유를 두고 여러 논의가 있습니다. 그중 불상을 많이 만들게 되면서 구리나 칠 그리고 인도.동남아시아에서만 자라는 전단나무 같은 기존의 값비싼 재료를 대체하려고 일본에서 가장 구하기 쉬운 나무를 사용했다는 말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게다가 일본에서는 오래된 나무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영목신앙(靈木信仰)’이 있었기에, 신령스러운 나무에 부처 모습을 새겨 드러낸다는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헤이안 전기에는 비자나무, 후기에는 노송나무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이치보쿠즈쿠리’ 기법은 불상의 머리 부분과 몸체를 나무 하나로 만드는 기법으로, 통목조라고도 합니다. 겉면을 갈라지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전체 무게를 줄이려고 머리나 몸의 뒷면을 파내기도 했습니다. ‘요세기즈쿠리’ 기법은 나무 여러 개를 맞춰 불상을 만드는 기법으로 접목조라고도 합니다. 헤이안 후기를 대표하는 조각가 조초(定朝, ?~1057)가 완성한 이후 일본 불교조각품을 만드는 일반적인 방식이 되었습니다. 이 기법은 당시 갑자기 늘어난 불상 수요에 맞추려고 나온 불상 제작 방식입니다. 공방에서 여러 사람이 분업할 수 있어 많은 불상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5미터가 넘는 큰 불상도 만들게 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일본 불교 조각의 세계
일본의 불교미술은 6세기 이후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해왔습니다. 초기에는 한국과 중국의 영향을 받은 불상을 만들었으나, 헤이안시대에 해당하는 9세기부터는 일본의 독자적인 불교문화가 나타납니다. 대일여래를 중심으로 한 밀교와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한 정토교(淨土敎)가 대표적입니다. 그리고 일본 고유의 신앙과 불교가 합해진 신불습합(神佛習合) 또한 한국과 중국에서는 없는 일본의 독특한 불교문화입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일본의 불교신앙인 밀교, 정토교, 신불습합을 대표하는 5점의 조각품을 선보입니다. 전시품은 모두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품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도쿄국립박물관의 지속적인 교류와 협력이 일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일본에서 불상은 주로 국가사업이나 귀족, 무사 가문의 후원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완성된 불상은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에게 위안과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불상에 담긴 염원은 시간과 장소를 뛰어넘습니다. 어려운 상화에서도 국경을 넘어 우리를 찾아온 부처와 만나, 그 염원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불교 20220215_41<이사나천, 비사문천>

1. 이사나천(伊舍那天, 동북), 이마에 제3의 눈이 있고 몸이 녹색이며 해골을 연결한 목걸이와 피가 담긴 그릇을 들고 있다. 힌두교 주신 시바(Shiva)에 해당한다. 2. 바사문천(毘沙門天, 북방), 투구를 쓰고, 여래가 현현(顯現)한 탑과 삼지창을 들고 있다. 인도 신화 속 북방의 수호신 쿠베라(Kuvera)에 해당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불교 20220215_42<풍천, 수천>

3. 풍천(風天, 서북방), 머리, 옷자락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이다. 인도 신화 속 바람의 신 바유(Vayu)에 해당한다. 4. 수천(水天, 서방), 뱀과 용이 꿈틀대는 관을 쓰고 청색의 몸을 가지고 있다. 인도 신화속 물의 신 바루나(Varuna)에 해당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불교 20220215_31
<5. 나찰천(羅刹天, 서남방)>

갑옷과 검을 갖추어 무장한 모습이다. 인도 신화의 악마 락샤사(Raksasa)에 해당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불교 20220215_32
<6. 염마천(焰摩天, 남방)>

인간의 머리를 얹은 지방이를 들고 있다. 힌두교 저승세계를 관장하는 야마(Yama)에 해당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불교 20220215_33
<7. 화천(火天, 동남방)>

눈이 셋, 팔이 넷인 고행선인(苦行仙人)의 모습으로 전신이 화염에 휩싸여 있다. 인도 신화 속 불의 신 아그니(Agni)에 해당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불교 20220215_34
<8. 제석천(帝釋天, 동방)>

이마에 제3의 눈이 있고 꽃 모양 거울인 팔엽경을 들었다. 인도 신화 속 전쟁의 신 인드라(Indra)에 해당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불교 20220215_35
<9. 지천(地天, 땅)>

왼손에 꽃이 든 그릇을 들고 있다. 힌두교 대지의 여신 부미(Bhumi)에 해당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불교 20220215_36
<10. 범천(梵天, 하늘)>

4면(四面) 4비(四臂)이며 각 손에 연꽃과 정병, 삼지창과 불자를 쥐고 있다. 힌두교 창조의 신 브라흐마(Brahuma)에 해당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불교 20220215_37
<11. 월천(月天, 달)>

달을 의미하는 흰 원을 가지고 있다. 인도 신화 속 달의 신 찬드라(Candra)에 해당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불교 20220215_38
<12. 일천(日天, 태양)>

태양을 의미하는 붉은 원을 가지고 있다. 인도 신화 속 태양의 신 수리야(Surya)에 해당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십이천(十二天), 가마쿠라 시대, 13세기 말 ~ 14세기 초, 액사/비단에 채색
하얀 물보라가 흩날리는 물 위로 솟아오른 바위에 털실로 짠 자리를 마련하여 십이천을 모신 열두 폭 그림이다. 십이천은 여덟 방위와 하늘, 땅 그리고 낮과 밤의 시간과 공간을 지키는 신이다. 이 불화는 원래 관정(灌頂) 의식에 사용하려고 만든 병풍이다. 밀교에서 관정이란 스승이 제자의 머리에 물을 붓고 여러 계율과 자격을 이어 나가게 하는 의식이다. 지금은 액자로 되어 있지만, 근대 이전까지 일본 교토 소렌인(靑蓮院)에 족자로 전해졌다. 족자를 보관하던 나무 상자에는 덴쇼 20년(1592)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고, 그중 이사나천(동북쪽 하늘), 화천(동남쪽 하늘), 비사문천(북쪽 하늘), 풍천(서북쪽 하늘), 수천(서쪽 하늘)의 뒷면에는 에이로쿠 8년(1565)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색을 짙게 칠했을 뿐만 아니라 붓 선이 명확하고 사물을 분명하게 묘사하여 가마쿠라 시대 후기 불화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늦어도 13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밀교
밀교(密敎)는 7세기 무렵에 인도에서 일어난 불교의 한 갈래이다. 술법과 주술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밀교에서는 성스러운 장소를 정해 향과 나무를 태우면서 주문을 외우고 기도하는 방식으로 수행했다. 또한 얼굴과 팔이 여럿인 힌두교 신들의 특징을 이어받은 여러 모양의 불상들을 만들었다. 십일면관음이나 여의륜관음과 같은 색다른 불상들, 분노에 찬 무서운 표정의 부동명왕이나 애염명왕 등은 밀교 특유의 조각상들이다. 일본에서는 806년 고보대사(弘法大師) 구카이(空海, 774~835)가 당나라의 청룡사(靑龍寺)에서 밀교를 수학하고 귀국하면서 본격적으로 밀교가 소개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불교 20220215_03<진고지경(神護寺經), 헤이안시대 12세기, 두루마리/감지에 금은니>

중앙박물관 일본불교 20220215_02<그림>

중앙박물관 일본불교 20220215_04<앞부분>

중앙박물관 일본불교 20220215_05<뒷부분>

헤이안 시대를 대표하는 대장경 ‘진고지경’가운데 한 권으로, 일본 교토 다가오에 있는 절 진고지(神護寺)에 전해 내려온다. 불교에서 신도가 지켜야 할 규범을 담은 <십송률> 가운데 ‘제사송’을 썼다. 짙은 남색으로 물들인 종이에 은색으로 경계선을 긋고 금색으로 불경의 문구를 썼다. 표지에는 보상꽃과 당초 덩굴이 어우러진 무늬를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영취산을 배경으로 석가모니가 대중들에게 설법하는 모습을 그렸다. 그림 아래 한 줄을 비운 뒤에 계율의 제목을 쓰고 그 밑에 ‘神護寺’라는 네모난 도장을 찍었다. 도바덴노(1103~1156)의 뜻에 따라 만들어져, 고시라키와인 시대에 진고지에 기부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사경
불교 경전을 옮겨 쓰는 것을 ‘사경(寫經)’이라고 한다. 6세기에 불교가 일본에 전해진 이후 나라 시대에는 국가의 안녕을 위해 정부가 사경소를 세우고 경전을 베껴 쓰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경생을 뽑아 사경사업을 크게 펼쳤다. 헤이안 시대에는 궁정 귀족과 지방 호족이 사경사업을 크게 후원했는데, 특히 귀족들의 미의식을 반영하여 화려하게 장식한 책이 만들어졌다. <구노지경(久能寺經)>, <지쿠부시마경(竹生島經)>, <주손지경(中尊寺經)>, <진고지경(神護寺經)> 등이 대표적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불교 20220215_01<관음보살, 가마쿠라 시대 후기, 동>

둥근 청동 판에 두꺼운 부조로 구리 불상을 붙이과 위쪽 양옆에는 사자 모양 금속 고리를 매달 수 있게 만든 관음보살상이다. 중앙에는 연꽃 모양 자리에 앉은 불상이 있고 머리 뒤에는 덩굴무늬의 둥근 빛 모양 조각이 있다. 불상 좌우에는 꽃병을 대칭으로 배치했으며, 불상의 머리 위에는 양산을 설치했던 흔적이 있다. 둥근 청동 판은 일본 고유 신앙에서 신이 머무는 장소인 거울을 의미한다. 이러한 청동 판에 관음보살 조각을 붙인 이 작품은 일본 고유신앙과 외래 종교인 불교가 융합한 신앙인 신불습합을 대표하는 유물이다. 이러한 작품은 사찰이나 신사 내부에 걸려 숭배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신불습합
일본 토착 신앙에서는 신령을 상징하는 거울을 만드는 것 이외에는 신의 모습을 그리거나 조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6세기에 불교가 전해지면서 일본 고유 종교인 ‘신도(神道)’에서는 조각상을 만들고 신사를 세우는 새로운 바람이 일어났다. 일본의 신들은 불교에 귀의하는 형식을 빌려 부처나 보살의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이처럼 일본 고유의 신앙과 불교가 융합하는 것을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고 한다. 신불습합은 부처가 일본의 중생을 구원하고자 일본 토착 신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믿는 본지수적(本地垂迹) 사상으로 발전했다. 불교는 신불습합과 본지수적 사상으로 일본 고유 신들을 불교 체계로 편입시켜 독자적인 종교관을 만들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불교의 수용과 전개
일본 문화는 6세기 중반에 백제에서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빠르게 발전했다. 불교는 역법, 천문, 지리, 의학, 새로운 농업생산 지식과 함께 일본에 전해졌으며 건축, 조각, 회화, 장식과 같은 예술 분야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서 받아들인 불교는 중국에서 발달한 대승불교, 밀교(密敎), 선종(禪宗)이었다. 7~8세기 아스카 시대와 나라 시대에는 대승불교의 권위를 이용해 율령국가(법률로 다스리는 국가)를 세웠다. 불교는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전국에 절을 세우고 국가사업으로 도다이지(東大寺) 대불을 만들었다. 헤이안 시대(794~1192)에는 귀족계층의 지지를 받은 진언종(眞言宗)과 천태종(天台宗)이 유행하며 밀교 미술이 발달했다. 진언종과 천태종은 모두 주술적이고 복을 비는 성격이 강했으며 귀족들은 현세의 이익을 보호하고자 불교를 믿었다. 가마쿠라 시대(1192~1333)에는 ‘신불교(新佛敎)라고 불린 정토종(淨土宗)과 선종이 널리 퍼졌다. 교토 오산의 승려들은 초상화와 수묵화가 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무로마치 막부의 보호를 받으며 그들의 정치 조언자로 활동했다. 이처럼 일본 불교는 대륙의 불교문화를 받아 들이고 발전시켜 시대 요구에 맞추며 이어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일본 근대 미술품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덕수궁 석조전을 근대 미술 전시관으로 사용하였다. 이를 위해 당시에는 현대 미술품에 해당하는 다수의 작품을 수집하였다. 이후 덕수궁미술관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통합되면서 작품들도 같이 소장하게 되었다. 동시대 일본의 미술경향을 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20220215_51
<창가, 미나미 군조, 1934년, 캔버스에 유채>

노란색 원피를 입은 여성이 창가에 앉아 뜨개질을 하는 모습이다. 19세기 유럽의 인상파 화가들은 레스토랑, 카페, 극장, 발레리나, 보트놀이 등 근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주로 그렸다. 이 작품처럼 중산층 여성의 소일거리를 하며 한가로운 여가를 보내는 장면 역시 인상파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주제이다. 일본에서는 일종의 근대적 현모양처의 재현으로 많이 그렸다. 작가인 미나미 군조는 근대 일본 서양화단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명으로, 인상파의 영향이 두드러지는 유화와 수채화를 그렸다. 1902년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오카다사부로스케에게 서양화를 배우고 1907년 영국으로 유학하여 폴 존슨에게 그림을 배우써다. 1910년 일본으로 귀국해 백마회 회원으로 활동했고, 1913년 이시이 하쿠테이 등과 함께 일본 수채화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1932년부터 1943년까지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가 교수로 재직하며 후진을 양성했다. 군조는 1925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근대미술품 20220215_03
<1. 광원비약, 나이토 신, 1932년 경, 나무>

고대의 인물이 사냥을 떠나는 기마상이다. 둥근 능선이 겹친 산의 모습을 한 받침대 위로 대지를 박차고 달려 나가는 말은 두 앞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기세 좋게 장애물을 뛰어 넘고 있다. 말 위의 남자는 상반신을 말 머리에 닿을 만큼 깊이 숙이고 고삐를 세게 쥐어 엄청난 말의 속도를 견디며 앞을 바라보고 있다. 남자의 장신구와 마구는 화려하게 채색했다. 작가인 나이코 신은 도쿄미술학교 조각과 출신으로, 일본 목조계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 인물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근대미술품 20220215_01<2. 평안노모, 히라쿠시 댄추, 1936년, 나무>

도쿄 지요다구에 지금도 남아 있는 서예 용품 가게 ‘헤이안도’의 주인 오카다 규지로가 어머니의 13주기를 기리며 히라쿠시 덴추에게 부탁하여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을 출품했을 때 이왕가미술관에서 구입 의사를 밝히자 덴추는 이 작품은 제작을 맡기 오카다에게 주고 똑같은 모양으로 하나를 더 만들어 미술관에 보냈다. 덴추는 목조에 석고 원형과 컴퍼스를 쓰는 기법으로 같은 작품을 여러 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근대미술품 20220215_04
<3. 기예천, 다카무리 고운, 1920년대 후반 이후, 나무>

일본 근대조각의 거장 다카무라 고운이 만년에 제작한 불교조각 <기예천>이다. 기예천은 모든 기예를 관장하고 복을 가져오는 불교의 천부 중 하나로, 이와 관련된 밀교 수법에서 화려한 장식을 몸에 걸치고 오른손으로는 치맛자락을, 왼손에는 천화를 들고 등장한다. 고운의 기예천은 오른손으로 치맛자락을 쥐는 대신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왼손에는 꽃이 가득 담긴 그릇을 받쳐 들어 천화의 존재를 강조했다. 작은 크기이지만 형태는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노련한 기술로 완성한 세부 표현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상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근대미술품 20220215_05
<4. 훈염, 고토 세이지, 1941년, 나무>

가지런히 무릎을 꿇고 가는 몸체를 세워 턱을 위라 향하고 두 눈은 살짝 감았다. 하늘을 향한 얼굴 위로 나부끼는 날개옷 표현이 경쾌하다. 양손은 향로를 받쳐 들었다. ‘훈염’이란 본래 ‘향가가 스며들다’라는 의미인데, 이것이 변하여 ‘좋은 감화를 받아’라는 뜻이 되었다. 만든 이인 고토 세이치는 쇼와 시대 전기를 대표하는 작가로, 왼쪽에 전시 중인 <기예천>의 작아인 다카무라 고운에게 목조를 배웠다. ‘훈염’은 현재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유물인 <마야부인과 천인상>의 천인상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근대미술품 20220215_02<1. 수반 <봄의 물>, 미야시로 겐조, 1941년, 유리/금속(철)>

금속 망치로 두들겨 표면을 장식한 다섯줄의 철 고리를 같은 간격으로 배치하고, 그 위에 같은 철판으로 만든 연잎과 개구리 세 마리를 배치하였다. 철 고리를 틀로 하여 안쪽에는 아름다운 보라색 유리를 대었다. 유리의 색이 군데군데 뭉친 부분과 금속의 거친 표면 장식이 ㅎ훌륭한 조화를 이루며 마치 연못의 수면 위로 반짝이는 잔물결을 연상시킨다. 그 위로 연잎 사이를 자유롭게 헤엄치는 개구리들이 잔잔한 봄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인 미야시로 겐조는 금속판을 두드려 입체적으로 만드는 공예를 전문적으로 하는 금속공예가였다.(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근대미술품 20220215_06
<2. 꽃을 담는 그릇, 이와타 도시치, 20세기 초, 유리>

성형한 유리 표면에 연마제를 바르고 회전 숫돌로 홈을 파내거나 곡면을 깎아내어 만드는 ‘크트글라스’ 기법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몸체와 긴 다리 사이에 끼워 넣은 동그란 원형 유리는 커트글라스 기법으로 별 모양을 새겨 넣고, 다리에는 마름모 문양을 연속하여 새긴 뒤에 금가루를 매워 장식했다. 다리와 받침 사이에도 금을 바른 뒤에 커트글라스 기법으로 국화 문양을 새겨 넣어 호화롭게 만들었다. 작가인 이와타 도시치는 일본 유리 공예의 선구자 중 한사람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근대미술품 20220215_07
<3. 꽃단지, 가노 쇼코쿠, 1935년, 채색도자>

항아리 모양의 꽃병으로 전면에 암녹색의 유약을 바른 뒤 홈을 따라 녹색의 유약을 흘러내리게하여 고대 청동기의 바라색을 연상시키는 추상적인 무늬를 만들어냈다. 작가인 가노 쇼코쿠는 에도시대부터 도예로 유명한 가문의 제자로 들어가 도자 제작 기술을 배우고, 교토도자기시험소에서 화학 안료를 사용하여 색을 입히는 기술을 습득했다. 이 <꽃 단지>는 1936년 문전 감사전에 출품된 것을 이왕가에서 매입한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근대미술품 20220215_08
<4. 꽃병, 이와타 도시치, 1935년, 유리, 금속(은)>

화초 문양의 은선을 세공하여 바구니의 형태를 만들고, 그 안에 녹인 유리를 불어 넣어 제작한 꽃병이다. 바깥쪽은 선명한 노란색, 안쪽은 하얀색이고 주둥이에는 은 장식을 둘렀다. 유리보다는 은의 유려한 세공과 교묘한 조합이 매우 뛰어나다. 본래 도쿄미술학교에서 조금 기법을 배운 유리공예가였던 작가의 기술 경력이 잘 조합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근대미술품 20220215_09
<5. 닭 모양 주둥이 꽃병, 가와무리 세이잔, 1938년, 채색도자>

12각형으로 각이 진 기형의 목이 긴 꽃병으로 구연부는 닭의 머리로 형상화되었다. 구연부 곡선은 닭의 몸을 형상화하고 닭의 꼬리로 표현된 손잡이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문양이 없이 투명하고 담백한 색채의 백자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목 부분에는 에도 시대부터 발달한 후키즈미 기법을 대담하게 용용해 분사기로 청화 안료를 뿌려 은은하게 색과 문양이 퍼져나가는 효과를 주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일본 근대 미술품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일본 근대 미술품은 1933년부터 1943년까지 이왕가 미술관에서 수집한 것으로 일본화 93점, 서양화 37점, 판화 4점, 조각 20점, 공예 44점 등 모두 198점이다. 1933년 조선 총독부가 덕수궁 석조전을 수리하여 근대 미술 작품 전용 전시관으로 만들면서 작품 수집이 시작되었다. 해방 바로 전인 1945년까지 해마다 꾸준히 작품을 사들였는데, 수집품 현황은 <덕수궁 일본 근대 미술품 대장>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왕가미술관은 당시에는 ‘현대미술품’이었던 근대 미술품들을 주로 전시나 소개, 추천을 통해 사들였으며 일부는 작가에게서 기증받기도 했다. 작품을 관리하던 이왕가미술관은 덕수궁미술관으로 이름이 바뀌어 유지되다가 1969년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통합되었으며, 그 결과 일본 근대 미술 수집품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게 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일본 무사, 문화와 예술의 후원자

일본 헤이안시대 말기에 사원세력을 누르고 교토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고용한 무사들이 중앙 전예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귀족에 고용된 신분이었으나 점차 강한 무력을 바탕을 정치권력을 장악하면서 막부체제를 탄생시키고 지배계급이 되었다. 무사들은 문화와 예술을 후원하고 새로운 문화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무사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미적감각으로 예능, 다도, 공예, 도자 등에서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어 냈다.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뛰어난 기능의 칼과 갑옷은 대대손손 전해지면서, 단순히 전쟁에 사용하는 무기와 신체 보호용 의복의 차원을 넘어 일본 무사들의 정신세계를 반영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훌륭한 도검과 갑주는 미적 가치를 인정받아 예술품이 되었고, 더 나아가 신에게 바치는 신성한 봉헌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 20220215_01<1. 우치가타이, 명문없음, 에도시대 19세기, 철, 단조, 2. 와키자시, 명문없음, 에도시대, 19세기, 철, 단조, 전체길이 69.3cm, 날 길이 55.6cm>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 20220215_02<손잡이, 우치가타이, 명문없음, 에도시대 19세기, 철, 단조>

전국시대 이후에 일본 칼의 주류가 된 우치가타나는 칼집 그대로 허리춤에 끼워 칼날을 위로 향하게 하여 찬다. ‘가타나’라고 부르기도 하며, 날 길이는 60cm 이상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 20220215_03<손잡이, 2. 와키자시, 명문없음, 에도시대, 19세기, 철, 단조, 전체길이 69.3cm, 날 길이 55.6cm

와키자시는 우치가타나와 같이 허리에 끼워 칼날을 위로 향하게 하여 찬다. 우치가타나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며, 날 길이는 30~60cm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 20220215_04<3.우치가타나, 에도시대, 17세기, 철, 단조, 날 길이 99.6cm, 4. 와키자시, 에도시대, 17세기, 철, 단조, 날길이 70.8cm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 20220215_05<칼끝에 새겨진 글자>

우치가타나, 칼자루에 끼우는 칼날 부분에 제작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와키자시, 칼자루에 끼우는 칼날 부분 양쪽에 제작자의 이름과 국화무늬가 새겨져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일본 칼의 역사는 야요이 시대(기원전 5세기 ~기원후 3세기)에 대륙에서 칼날이 직선인 큰 칼(大刀)이 전해지며 시작되었다. ‘일본도’라고도 불리는 ‘다치(太刀)’는 헤이안 시대 후기인 11세기에 처음 등장했는데, 칼날이 약간 굽은 곡선 모양의 긴 칼로 무사들이 허리에 차고 다녔다. 16세기 전국시대가 되자 많은 군사가 직접 부딪쳐 싸우는 접근전으로 전투 방식이 바뀌면서 다치보다 가볍고 뽑기 쉬운 ‘우치가타나(打刀)’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한편 ‘와키자시(협도脇刀)’는 우치가타나보다 짧은 칼인데, 에도시대 무사는 한 쌍의 우치가타나와 와키자시를 허리춤에 끼워 지니고 다녔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무사의 칼과 갑주
몸을 보호하는 투구와 갑옷, 그리고 적을 베는 칼은 무사와 떼라야 뗄 수 없는 것들이다. 칼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1573~1603)까지는 무사와 승려, 농민이 모두 쓰던 무기였다. 그러나 1588년에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농민이 칼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도수령(刀狩令)을 전국에 내렸다. 그리고 에도막부 제5대 통치자인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무사만이 칼을 가질 수 있도록 엄격히 규제했다. 이로써 칼은 무사 계급의 상징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한편 헤이안시대 기마 무사가 입었던 ‘오요로이(大鎧)’는 아릅답고 튼튼했지만 무겁고 대량으로 만들 수 없었다. 그런데 16세기 전국 시대에 전투 방식이 보병집단끼리 가까이에서 싸우는 접근전으로 바뀌면서 갑주(甲胄)도 가벽고 쉽게 착용할 수 있으며 대량으로 만들 수도 있는 ‘도마루(胴丸)’, ‘하라마키(複卷)’ 등으로 바뀌었다. 그 뒤에 몸통 부분을 판 하나로 만들어 구조를 단순하게 하고 철을 이용해 방어력을 높인 ‘도세구소쿠(富世具足)’라는 갑주도 나타났다. 평화로운 에도 시대가 되자 무사는 칼과 갑주를 무사 권위의 상징으로 여기고 더는 실제로 쓰지 않았다. 무사는 차츰 칼과 갑주 이외에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는 독특한 문화와 예술을 창조하며 새 시대의 주역이 되어 갔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 20220215_11
<1.흰색 끈으로 엮은 도마루 갑옷, 에도시대 18~19세기, 철/가죽/칠/비단 등, 몸통높이 71.0cm>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 20220215_07<투구>

도마루는 갑옷 몸통 부분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오른쪽 옆구리에서 묶는 방식으로 입기에 편하다. 또 허리와 넓적다리를 가리는 구사즈리(草摺)가 다섯개 이상으로 나뉘어 있어 다리를 움직이기 쉽다. 가죽이나 쇠로 된 작은 직사각형 조각을 ‘고자네(小札)’라고 하는데, 몸통과 허리, 어꺠를 덮는 부분은 이 고자네를 얽어매어 만들었다. 비늘 모양으로 가죽이나 쇳조각을 얽어매는 것을 ‘오도시(威)’라고 하는데, 이 도마루에는 흰 실로 오도시를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 20220215_12
<2, 여러 색 끈으로 엮은 도세구소쿠 갑옷, 에도시대 18세기, 철/가죽/칠/비단 등, 몸통 높이 70.4cm>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 20220215_08<투구>

16세기 전국시대 때 등장한 도세구소쿠 갑옷은 몸통 부분을 판 하나로 만들면서 이전 갑옷들보다 구조가 단순해져 대량 생산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재료도 가죽에서 철로 바뀌면서 방어력도 향상되었다. 이 갑옷은 판 하나로 몸통 부분을 만들고 적생, 흰색, 남색실로 구사즈리를 엮은 도세구소쿠 갑옷이다. 용머리 장식을 한 투구는 중세시대 투구를 모방해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 20220215_13
<2. 보라색 끈으로 엮은 니마이도 갑옷, 에도시대 18세기, 철/가죽/칠/비단 등>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 20220215_09<투구>

몸통을 앞뒤로 나누고 한쪽을 경첩으로 고정하여 여닫을 수 있도록 만든 갑옷이다. 몸통 부분이 두 장으로 되어 있다는 뜻으로 ‘니마이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갑옷은 보라색 실로 고자네와 구사즈리 몸통 부분을 엮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갑주
일본의 갑주는 몸을 감싸는 갑옷 ‘요로이(鎧)’와 투구 ‘가부토(兜)’로 이루어진다. 헤이안시대부터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1192~1333)에 걸쳐 사용했던 상급 무사용 갑주’오요로이(大鎧)’는 본래 말을 타고 화살을 쏘는 기마 무사가 입었다. 남북조시대 이후에 전투방식이 가까이 붙어서 벌이는 접근전으로 바뀌면서 차츰 가볍고 입기 쉬운 ‘도마루(胴丸)’와 ‘하라마키(複卷)’를 입게 되었다. 대규모 전투를 겪으며 무기와 기술 수준이 높아지고 스페인, 포르투갈 등 서양 갑주의 영향을 받으면서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1333~1573) 말기에는 도마루보다 방어 성능을 높인 도세구소쿠(富世具足)라는 갑옷이 나타났다.

차를 마시는 다도(茶道)는 중국 때 성행하여 한반도와 일본에 전해졌다. 특히 일본에서는 선종 사찰과 막부의 고위층과 상급무사, 귀족층들에 인기를 끌었다. 전국 시대 다도가였던 센노리큐(1522~1591)는 흙으로 벽을 바른 소박한 다실에서 검소한 그릇들로 차를 만들고 즐기는 새로운 다도 문화를 창조했다. 이를 ‘와비차(侘茶)’라고 부르는데, 이후 지방 영주 다이묘와 서민들도 차츰 와비차를 즐기게 되었다. 다도는 오늘날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로 여겨지고 있다.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20220215_22<구로오리베 다완, 일본 모모야마 시대 16세기말 ~17세기, 미노야키 도기>

구로오리베 다완은 현재 일본 기후현 일대에 위치했던 요지에서 생산했던 미노야키 도자기의 한 종류로, 검은 유약을 일부러 바르지 않은 희 부분을 만들고 그곳에 다양한 무늬를 그려 넣은 찻잔이다. 잔의 형태를 왜곡시켜 대담하게 변형한 것이 특징이다. 구로오리베는 가마에서 다 구웠을 때 가마 밖으로 끌어내 급속하게 냉각시켜 철유를 칠흑같은 검은색으로 발색시킨다. 이때무늬를 그려 넣지 않고 형태만 왜곡시킨다면 ‘오래베구로’가 되고, 흰색 유약을 노출시켜 무늬를 그려 넣으면 ‘구로오리베’가 된다. 16세기 후반이 되면 다도에서 중국에서 수입된 찻잔(덴모쿠)을 대신해 조선에서 유입된 고려 다완이 애호되었고, 뒤를 이어 일본 국내에서 직접 생산한 찻잔이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센노 리큐(1522~1591)는 와비차의 미의식에 어울리는 고려 다완을 선택해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미의식을 표현한 찻잔을 직접 만들어냈다. 그것이 라쿠 다완이다. 구로오리베 다완은 이러한 일본 다도의 발전 과정 속에서 17세기 에도 시대 때 인기를 얻었던 일본 국내에서 생산된 대표적인 찻잔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20220215_24<1. 나뭇잎 무늬 차솥, 찻물을 끓이는 솥, 2. 찻잔, 대마도 소재 요에서 제작된 조선식 찻잔, 3. 차통, 말차(抹茶)를 담는 용기, 4. 물단지, 차솥에 보충할 물이나 찻잔이나 솥을 씻는 물을 담는 용기>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20220215_25
<5. 꽃병, 꽃을 넣는 용기>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20220215_21<에도시대 다실(재현)>

무사와 다도
차를 마시는 것은 헤이안 시대부터 왕족과 귀족 등 지배 계급이 즐기던 문화였으나 차츰 무사계급으로 퍼져 나갔다. 전국 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도가였던 센노리큐(1522~1591)가 귀족들이 선호했던 값비싼 중국 찻잔 등을 거부하고 흙으로 벽을 바른 소박한 다실에서 검소한 그릇들로 차를 만들고 즐기는 새로운 다도 문화를 창조했다. 이를 ‘와비차(侘茶)’라고 부르는데, 이후 지방 영주 다이묘와 서민들도 차츰 와비차를 즐기게 되었다. 에도 막부 3대 통치자인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다도가였던 고보리 엔슈(1579~1647)는 센노 리큐의 다도에 궁정 취향을 더해 무가의 차 문화를 부흥시켜 ‘기레이사비’라는 새로운 풍조를 일으켰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노(能)는  분라쿠(文楽), 가부키(歌舞伎)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전통예술이다. 가마쿠라 시대 말기인 14세기에 시작된 것으로 노멘(能面)이라 부르는 가면을 사용하며, 전용 극장인 노가쿠도(能樂堂)에서 공연된다. 막부세력의 비호를 받으면서 발전해 왔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하여 무사계층에서 특히 좋아했다. 노(能)의 내용은 죽은이의 혼령이 주인공인 몽환 노(夢幻能)와 현세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현재노(現在能)로 나누어진다. 몽환노가 전통적인 노의 형식과 내용을 계승하고 있다면, 현재노는 무사들의 무용담을 표현하고 있어 무사계층들이 선호했던 분야이다.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20220215_26<1. 가와즈(蛙), 에도시대, 18세기>

두꺼비를 뜻하는 말인 ‘가와즈’가면은 광대뼈가 툭 튀어 나오고 눈두덩이 움푹 패여 있ㅇ드며, 이마에 젖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다. 이러한 특징은 물에 빠져 죽은 남성의 혼령을 표현하기에 적합하여, <후지토(藤戶)>, <아코기(阿漕)>와 같이 익사한 자의 혼령이 등장하는 극에서 주로 사용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20220215_27
<2. 아야카시(怪士), 에도시대, 18세기>

눈이 붉게 충혈되고 눈썹과 수염이 솟구쳐 있는 것이 특징인 가면으로, 젊은 무사의 혼령 역할에 사용된다. 특히 ‘아야카시’는 바다에 나타나는 괴물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기때문에, 후나벤케이(船弁慶)와 같이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극에서 자주 사용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20220215_28
<3. 하나코부 아쿠조(鼻瘤惡尉), 아즈티모모야마~에도 시대, 16~17세기>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20220215_29<4.고히메(小姬), 에도시대, 17세기>

젊은 여인의 역할에 사용되는 가면이다. 여인의 가면은 종류가 매우 다양한데, 이마에서 관자놀이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의 가닥수와 흐트러짐, 볼의 야윔, 주름살의 수에 미묘한 변화를 주어 연령대와 성격을 다르게 표현하다. 이 가면의 명칭인 ‘고희메’는 여인의 가면 중에서도 매우 드문 것으로, 여인의 가면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고오모테(小面)’가면을 대신하는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20220215_30<5. 조온나(增女), 에도시대, 17~18세기>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20220215_31<6. 우바(姥), 에도 시대, 17~18세기>

나이 든 여인의 모습을 표현한 가면이다. 눈가가 길게 찢어지고 처진 것으로 보아 앞이 잘 보이지 않는 할머니의 역할에 사용하였을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한냐(般若)는 질투를 참지 못해 괴물로 변해버린 여인의 모습을 표현한 가면이다.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20220215_32<7. 한냐(般若), 에도시대, 19세기>

뿔이 난 도깨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스스로의 질투심을 이기지 못해 흉하게 변해버린 여인의 역할에 사용하는 가면이다. 눈알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었으며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다. 이마 위의 크고 높은 뿔은 여인의 몹쓸 질투심이 넘쳐흘러 솟아난 것이다. 노가면은 이처럼 인간으 심리를 시각적으로 나타내는 독특한 방식을 지니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20220215_33
<8. 하시히메(矯姬), 에도시대, 19세기>

분노에 가득 차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고 눈에는 핏발이 서리고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험악한 모습의 가면으로, 질투에 눈이 멀어 생령(生靈)이 된 여인의 역할에 사용한다. 생령이란 질투나 원한 등의 감정이 너무 강해 살아있는 몸에서 분리되어 나온 영혼을 말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20220215_34
<9. 와카오토코(若男), 에도시대, 17세기 후반>

노 무대 위에서 이승의 남성은 가면을 쓰지 않는다. 따라서 전시된 가면과 같이 젊은 남성의 가면은 주로 요절한 무사의 혼령 역할에 사용된다. 무사를 주인공으로 한 ‘현재 노’중에는, 생전에 전쟁을 업으로 삼아 아수라(阿修羅) 지옥에 떨어진 이들의 성불을 기원하는 내용이 많다. 막부의 후원을 받는 예술가로서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무사들의 영혼을 달래주는 일은 중요한 의무였기때문일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20220215_35
<10. 시카미(顰), 에도시대, 19세기>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20220215_36<11. 고베시미(小癋見), 에도시대, 19세기>

베시미 가면은 14세기에 간아미(觀阿弥)와 제아미(世阿弥) 부자도 착용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오래된 도깨비 가면의 한 종류이다. 크기에 따라 오베시미(大癋見)와 고베시미로 나누는데, 전시된 고베시미는 지옥의 도깨비 역할에 사용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무사의 악극, 노
노(能)는 가면을 쓴 배우가 악기 연주에 맞춰 노래와 연기를 하고 춤을 추며 진행되는 일본의 전통 가면극이다. 노는 나라시대(710~794)에 중국에서 전해진 가무극에서 영향을 받아 생겨났다. 이후 무로마치 막부가 노의 형식을 완성시킨 예술가들을 후원하면서 무사 사회에서 크게 유행했다. 노는 아즈치모모야먀 시대(1573~1603) 전국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던 무사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유달리 노를 즐겼다고 한다. 에도 막부는 노를 공식적인 자리에서 공연했는데, 쇼군이 다이묘의 저택을 방문할 때나 가문의 후계자가가 태어났을 때, 그리고 무사의 성인식, 혼례와 같은 기쁜 일이 있을 때 공연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노 가면
노 가면에느 오키나(翁), 조(尉), 기신(鬼神), 오토코(男), 온나(女)의 다섯가지가 있다. 오키나 가면은 오곡 풍성, 자손 번영 등을 기원하는 의식에 쓰는 가면이며, 조 가면은 주로 노인과 신 역할에 쓴다. 기신 가면은 무섭고 특이한 귀신 역할에 쓰는 가면으로, 용왕이나 동물의 신령, 부처, 악귀 가면 등이 있닫. 오토코 가면은 남성을 나타내는 가면으로 귀족, 무사, 청년, 귀공자, 소년 가면 등이 있다. 온나 가면은 여성을 나타내는 가면으로 젊은 여성부터 중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연령대와 다양한 감정을 표현한 가면들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귀족문화의 발달과 함께 10세부터는 풍경이나 풍속을 표현한 야마토에(大和絵)라는 그림이 그려졌다. 전통적인 동양화라 할 수 있는 수묵화는 15세기에 독자적인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에도시대에는 일본미술을 대표하는 분야로 풍경이나 풍속을 간략한 선과 화려한 색채로 표현하는 우키오예(浮世絵)가 많이 그려졌으며, 판화(版畵)형태로 널리 공급되었다. 일본의 그림들은 한국이나 중국의 산수화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고 있으며, 이런 일본의 회화는 유럽의 인상파 화가들을 비롯하여 서구 미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20220215_40<도쿠시바 변령국도, 일본 에도시대 17세기, 8폭 병풍 1쌍, 종이에 채색>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20220215_41 <도쿠시바 변령국도, 일본 에도시대 17세기, 8폭 병풍 1쌍, 종이에 채색>

이 병풍은 에도 시대에 현재 일본 효고 현에 속한 이와지 섬과 시코쿠 섬에 위치한 고치 현이 동쪽 지역 일부를 다스렸던 도쿠시마 번의 영토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묘사한 것이다. 8폭 병풍 2틀이 한쌍을 이루며, 오른쪽 병풍은 아오지국(아와지 섬의 옛 지명)을, 왼쪽 병풍은 아와노 국(고치현 동쪽 지역의 옛 지명)을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시점으로 묘사했다. 도쿠시마 번을 다스렸던 영주인 하치스카 가문에서 제작을 주문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와지 섬을 그린 오른쪽 병풍 중앙 하단에는 하치스카 가문의 성인 유라 성이 아직 건재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1630년 유라 성이 폐성되기 이전 시기의 풍경임을 알 수 있다. 유라 성은 장대한 석축 위에 여러 층의 누각이 지어진 훌륭한 모습이다. 유라 성 앞의 항구로 여러 척의 배들이 들어오는 모습을 묘사하여 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오른쪽 병풍 상단 우측에는 아외지 섬에 있었던 마을 숫자와 함께 버려진 옛 성터의 위치를 쓴 기록이 있다. 병풍에서도 석축만 남은 옛 성터를 찾을 수 있다. 왼쪽 병풍은 현재의 고치 현 동쪽 지방에 위치했던 아와노 국의 모습을 묘사했는데, 바다로 흘러 드는 여러 하천을 중심으로 마을이 발달했음을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일본 병풍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그 위에 종이 혹은 비단을 붙인 뒤 종이 경첩으로 연결시켜 만든다. 일본 병풍의 단위는 화면 6장으로 이루어진 1척(隻)이며, 2척이 세트를 이룬 1쌍이 기본적인 형식이다. 화면은 하나당 1선(扇)이라고 하며, 접히는 화면 수에 따라 2곡, 6곡 병풍 등으로 부른다. 나라, 헤이안 시대 때는 병풍의 각 선을 가죽끈으로 연결시켰다. 가마쿠라 시대가 되면 종이 경첩이 발명되어 현재와 같이 앞뒤로 접을 수 있는 병풍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2척 1쌍이 일본 병풍의 기본적인 단위가 된 것은 14세기 전반기부터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가노파와 도사파
에도 막부와 교토 궁정은 그림을 도맡아서 그리는 화가 집단을 두었다. 막부 화가는 ‘고요에시’, 궁정 화가는 ‘에도코로아즈카리’라는 직책을 받았다. 이들은 에도조(江戶城)와 교토 궁궐 전각 안쪽 벽에 그림을 그리거나 공식 의례에 쓰는 병풍, 외국 사절에게 줄 선물 등을 제작했다. 가노파는 에도 막부의 고요에시로 활동한 화가 집단이다. 가노파는 공방을 만들어 많은 주문에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전국 시대 무장들이 요구하는대로 그림을 그리며 빠르게 성장했다. 1617년에 가노 단유(1602~1674)가 에도 막부 고요에시에 임명된 뒤 가노파는 막부와 관련되 ㄴ회화를 도맡아 그리게 되었다. 한편 도사파(士佐派)는 헤이안 시대에 세운 전통 회화 양식으로 일본 풍경이나 풍속을 그린 화가 집단이다. 에도 시대에 에도코로아즈카리를 맡아 세밀하고 정교한 화풍으로 화려하게 색을 칠하는 우아한 궁정 취향의 작품을 그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도사 미츠오키는 에도 시대 초기 도사파 화가로서, 17세기 중반 궁중화가로 활동화면서 야마토에를 중심으로 하는 도사파를 부흥시킨 인물이다.  헤이안 귀족들의 생활상이 아름답게 묘사된 각 화면에서 에도인들의 귀족 문화에 대한 동경심을 느낄 수 있다.

중앙박물관 세계관 일본무사20220215_42<겐지모노가타리 화첩, 전 도사 미쓰오키(1617~1691), 에도시대 17세기, 화첩/종이에 먹/채색/금, 28.5×25.3cm>

<겐지모노가타리> 54첩에서 한 장면씩 골라 그 내용을 적고 그림을 그려 완성한 화첩이다. 교토 궁정의 회화를 도맡아 그렸던 화파인 도사파 화가의 작품으로 인물의 복식과 풍경을 자세하게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장면 아랫부분과 윗부분을 금빛 구름으로 감싸고 나머지 부분에 화려하게 색칠한 그림을 배치했다. 이야기는 여러 가지 풀과 꽃이 금으로 그려진 화려한 종이에 쓰여 있다. 첫 줄에는 각 첩의 제목이 쓰여 있어 어떤 내용인지 알게 해 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새로운 ‘왕’의 지배권위 – 교토와 <겐지모노카타리(源氏物語)>를 그린 그림
전국시대 무장인 오다 노부나가는 1574년에 <낙중낙외도>와 <게지모노가타리 병풍> 각 한 쌍을 우에스기 겐신이라는 무장에게 선물했다. 왕의 거주지이자 국가 제사와 의례를 치르는 중심지인 교토의 모습을 그린 <낙중낙외도>와 왕권 이야기를 그린 소설 <겐지모노가타리>는 모두 왕조 세계의 권위를 상징한다. <겐지모노가타리>는 왕의 아들로 태어나 신하로 신분이 낮아졌지만 결국 아들을 왕으로 앉히고 자신도 준상왕이 되어 권세와 영화를 누렸던 히카루 게지(光源氏)의 이야기이다. 노부나가는 자신이 ‘수도’ 교토와 <겐지모노가타리>로 대표되는 ‘왕조 세계’의 지배자로서 정통성을 지닌 새로운 ‘왕’임을 두 작품으로 과시한 것이다. 이처럼 전국 시대 무사들은 군사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왕에게서 오는 권위를 장악함으로써 지배의 정통성을 얻으려 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무사, 문화와 예술의 후원자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92)말기, 강해진 사원 세력을 누르고 수도 교토의 치안을 유지하고자 고용한 무사들이 중앙 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무사는 처음에는 귀족에게 고용된 신분이었으나 강한 무력을 바탕으로 중앙 조정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동시에 토지를 지배하며 점차 전국으로 세력을 넓혀 나갔다. 결국 이들은 막부체제를 탄생시키고 지배 계급이 되었다. 그러나 무사들은 무력만을 앞세운 지배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일본 문화와 예술을 후원하여 각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 흐름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이전 지배계층이었던 귀족과는 달리 독특한 미적 감각으로 전통 예능, 다도, 회화, 공예, 도자 등에서 자신들만의 예술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예술은 무사가 ‘전사’라는 자아를 유지하면서 ‘통치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이루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세계문화관 일본실에서는 문화와 예술을 발전시킨 무사의 새로운 면을 바라볼 수 있는 전시를 선보인다. 칼을 든 전사이면서 교양을 갖춘 문화인이자 통치자였던 무사를 아는 일은 가깝고도 먼 이웃 일본을 바르게 이해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공예 20220215_04<벗풀.당초무늬 마키에 가마, 에도시대 19세기, 나무에 칠>

중앙박물관 일본공예 20220215_01<옆에서 본 모습>

중앙박물관 일본공예 20220215_02<뒤에서 본 모습>

중앙박물관 일본공예 20220215_03<내부>

검은 옻을 칠하고 금가루를 뿌리는 마키에 기법으로 벗풀과 덩굴무늬를 그려 넣은 가마이다. 벗풀무늬는 지금의 히로시마시에 근거지를 두었던 다이묘 모리(毛利) 가문의 상징이었으므로 이 가문의 여성이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마키에 기법으로 가문의 상징과 덩굴무늬를 넣은 가마는 상류 무사 계급만이 이용할 수 있었다. 가마 안쪽은 금색 바탕 위에 화려하게 색을 칠한 꽃과 새 그림으로 꾸몄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여성이 타는 가마 – 온나노리모노
지위가 높은 무사 가문의 여성이 타는 가마를 ‘온나노리모노(女乘物)’라고 한다. 5미터쯤 되는 긴 대를 가마 위쪽 끝에 끼우고 앞뒤에서 사람이 들어 나른다. ‘온나노리모노’는 신분에 따라 구조와 디자인이 정해져 있었다. 신분이 높은 쇼군 가문과 상급 다이묘 가문 여성이 사용하는 ‘온나노리모노’는 겉에 검은 칠을 하고 금가루를 뿌려 무늬를 그리는 마키에(蒔繪) 기법으로 호화롭게 꾸몄으며 안쪽은 꽃과 새를 그린 화조화나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를 그린 송죽매 그림, <겐지모노가타리> 그림 등으로 꾸몄다. 특히 무사 계급의 혼례 도구로 만드는 가마는 가문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신분이 높을수록 더욱 화려하게 꾸몄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공예 20220215_05<1. 화장도구 수납함, 에도시대 19세기, 나무에 칠(마키에)>

네모 반듯한 쟁반 모양에 3단 서랍을 배치한 화장 도구 받침대 겸 수납함이다. 서랍에는 거울과 빗 등을 넣어 둔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공예 20220215_21
<2. 손잡이가 달린 거울 수납상자, 에도시대 19세기, 나무에 칠(마키에)>

손잡이가 달린 거울 에카가미를 넣어 두는 상자이다. 에카가미는 고려와 조선의 손잡이 거울과 사용 방법과 모양 등에서 큰 영향을 받아 무로마치 시대 후기에 처음 나타났다. 일본 병경은 처음에는 지름이 10cm 정도인 작은 거울이었으나 에도 시대가 되면서 크기가 커지기 시작했고 17세기 말에는 지름 24cm 전후의 큰 거울이 나타났다. 거울이 커지면서 거울 뒷면을 꾸미는 문양도 다양해졌는데,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나 거북, 학과 같은 장수와 행복을 상징하는 무늬, 후지산을 비롯한 명소, 가문의 문장 등이 장식되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공예 20220215_06<3. 이를 검게 물들이는 도구, 에도시대 19세기, 나무에 칠(마키에)>

이를 검게 물들이는 오하구로 화장도구이다. 이를 검게 물들이는 것은 에도 시대 귀족과 무가 부인들의 중요한 몸가짐이었다. 미미다라이는 대야 양쪽에 귀 모양 손잡이가 달린 것에서 붙은 이름이다. 이를 물들이는 검은 액체를 바를 때 주위가 더러워지지 않게 하려고 쓰는 대야인데 입이나 손을 씻을 때도 썼다. 와다이는 미미다라이의 높이를 조절하는 도구이며 누키스는 미미다라이의 덮개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공예 20220215_07<4. 손톱 다듬는 칼, 에도시대 19세기, 나무에 칠(마키에)>

손톱을 다듬을 때 사용하는 칼 두자루와 그것을 보관하는 상자이다. 상자 안에 공간을 나눌 수 있는 별도의 칸막이가 있어 두 자루의 손톱칼을 분리하여 보관할 수 있다. 다른 혼례도구와 마찬가지로 칠을 바르고 그것이 마르기 전에 금가루를 뿌려 고정시키는 ‘마키에’ 기법으로 접시꽃, 모란, 당초무늬를 장식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혼례도구
혼례 도구는 여성이 혼인할 때 가져가는 모든 생활 도구를 가리킨다. 놀이 도구, 서랍장, 화장품, 문방구, 의류 수납 도구, 음식기 수납 도구 등이 있다. 원래 헤이안 시대 귀족 사회에서는 대부분 남자가 처가로 가서 혼례를 올렸다. 그러다가 무사가 권력을 잡은 가마쿠라시대부터 강력한 가부장제가 이루어지고 지방 영주 사이에 정치적인 의도로 혼인 관계를 맺는 일이 많아졌다. 이때부터 여자가 남자 집으로 들어가서 혼례를 올리는 형식으로 바뀌면서 여성이 혼인할 때 모든 생활 도구를 만들어 가지고 가게 되었다. 무가의 혼례 도구는 무가 계급이 권력과 문화 면에서 왕성한 시기를 맞이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 제일 화려하게 만들어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공예 20220215_08<1. 이로에 참외무늬 발, 고구타니 아오데 양식, 에도시대 17세기>

전형적인 고쿠타니 아오데 양식의 그릇으로, 전체를 진한 색깔로 칠한 대접이다. 붉은색 물감을 전혀 쓰지 않고 보라, 노랑, 녹색, 파랑 가운데 세 가지 또는 두가지 색을 썼다. 여백을 거의 남기지 않고 그릇 전체에 색을 칠하는 것이 아오데 양식의 특징이다. 이 작품은 배경에 노란색 국화를 깔고 그 위에 초록색 참외 줄기와 잎, 보라색 열매를 대담한 구도로 표현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공예 20220215_09<2,3. 이로에 호랑이무늬 접시, 고구타니 양식, 에도시대 17세기 후반>

초록, 노랑, 보라색으로 호랑이와 바위, 대나무를 표현하였으며, 그릇 뒷면에는 운수가 좋기를 바라는 뜻에서 ‘복(福)’이라는 글자를 넣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공예 20220215_10<4. 이로에 초충무늬 접시, 고구타니 양식, 에도시대 18세기>

파랑, 노랑, 녹색으로 민들레와 나비를 표현했으며, 그릇 뒷면에는 운수가 좋기를 바라는 뜻에서 ‘복’이라는 글자를 넣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공예 20220215_11<5. 소메스케 안개.매화무늬 큰 접시, 니베시마 자기, 에도시대 18섹 전반>

‘소매스케(梁付)’란 하얀 바탕에 코발트로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유리질의 투명한 잿물을 발라 구워 문양이 남색으로 드러나게 만든 도자기이다. 이 작품에서는 안개에 싸인 커다란 매화나무를 표현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일본공예 20220215_12<6. 이로에 소나무.대나무.매화나무 접시, 니베시마 자기, 에도시대 18세기 전반>

‘이로에(色繪)’는 잿물을 발라 구운 도가지 위에 부드러운 물감으로 무늬를 그려넣고 색을 칠해 낮은 온도에서 한번 더 구운 것이다. 소나무는 평안과 장수, 대나무는 무사, 매화는 생기를 뜻하여 좋은 운수를 기대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접시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무사의 자기, 고구타니와 나베시마
일본 자기는 1610년대에 규슈 히젠지방(지금의 사가현과 나가사키현 일부)에서 조선의 기술과 중국의 형식이 결합하여 생겨났다. 1640년대에는 잿물을 발라 높은 온도로 구운 도자 겉면에 물감으로 무늬를 그리고 낮은 온도로 한 번 더 구워 빛깔ㅇ르 내는 채색 기술이 들어왔다. 고구타니(古九穀) 자기는 1640 ~ 50년대에 만들어진 초기 채색 자기이다. 다이쇼지번(지금의 이시카와현)을 다스렸던 마에다 도시하루가 중심이 되어 만들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히젠 지방 아리타요에서 만든 자기라는 견해도 있다. 에도 시대 전기 무가 사회의 시대정신과 문화를 반영하여 자기 무늬가 힘이 넘치고 강렬한 것이 특징이다. 나베시마(鍋島)자기는 사가번을 다스리는 나베시마 가문이 다쿠가와 가문과 다이묘들에게 바치려고 만든 최고급 자기이다. 주로 식기를 만들었는데 지름이 약 15cm, 약 21cm, 약 30cm인 둥근 접시가 주요 품목이다. 남빛 바탕에 빨강, 녹색, 황색을 칠하고 복숭아, 항아리, 책, 물레방아, 토끼 등을 그린 세련된 디자인이 매우 참신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에도 시대와 근대 공예
에도 시대 도쿠가와 막부의 체제 아래에 있는 다이묘들은 여러 물건을 만드는 직속 장인을 두었다. 직속 장인에는 칼장신구를 만드는 ‘긴코시(金工師)’, 칠고예품을 만드는 ‘마키에시(蒔繪師)’, 도자기를 만드는 ‘야키모노시’ 등이 있었다. 이 장인들은 쇼군 가문과 다이묘 가문에서 필요한 생활 도구들도 만들었다. 에도 막부가 통치권을 교토 조정에 반납하여 무사 시대가 끝난 메이지 시대에는 공예가 경제 발전에 중요한 산업이 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칠보공예품, 금속 공예품, 칠공예품, 도자기 등을 적극적으로 국외에 수출하여 외화를 벌어들이고자 했다. 장인들은 공예가로 변신하여 세계 여러 곳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에 작품을 내기도 했다. 또한 재능이 뛰어난 이들은 ‘제실기예원’에 임명되어 고위 관리 대우를 받으며 공예품 만들기에 몰두했다. 제실기예원은 미술공예가를 보호하고 공예품 제작을 장려하기 위해 만든 직위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5년, 2022년
  2. 위키백과, 2023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반송재, 청나라 말 학자의 서재(재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의 ‘반송재’라는 전시공간은 청나라말 중국 학자의 서재와 내실을 재현해 놓은 곳이다. 당시 유행했던 고증학이 반영된 서재의 모습으로 수집한 골동품을 비롯하여 그림 등으로 방을 장식하고 있다. 당시 한국 선비들의 사랑방을 재현해 놓은 모습과 비교해 보면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

중앙박물관 세계관 반송재 20220215_01<세계문화관 반송재>

중앙박물관 세계관 반송재 20220215_03<책상과 문방구>

중앙박물관 세계관 반송재 20220215_02<수집한 골동품으로 장식한 벽면>

중앙박물관 세계관 반송재 20220215_04<산수화, 이사달, 1610년, 종이에 먹>

중앙박물관 세계관 반송재 20220215_05<경태람동향로, 귀갑문/기린/보수문, 청>

중앙박물관 세계관 반송재 20220215_21
<1. 금동박산향훈로, 서한, 2. 동박산향훈로(소형), 한 1~3세기,>

중앙박물관 세계관 반송재 20220215_06<3. 박산훈향로, 남조 6세기, 강서홍주요,>

중앙박물관 세계관 반송재 20220215_07
<4. 청자향훈로, 서진 월주요, 3세기>

중앙박물관 세계관 반송재 20220215_08
<5. 교태유도삼족정향로, 당 8세기초>

중앙박물관 세계관 반송재 20220215_09
<6. 소형향로명기(5점), 원대 용천요, 13~14세기>

중앙박물관 세계관 반송재 20220215_10<7. 백자삼족향로, 송 복건건녕요, 12~13세기, 8. 석조향동자, 명 15~16세기>

중앙박물관 세계관 반송재 20220215_11
<9. 청화백자향로, 원말명초 14~15세기, 10. 남유묘금어문향로, 명초 14~15세기, 11. 삼족향로, 금-원 13~14세기, 균요계학벽요>

중앙박물관 세계관 반송재 20220215_12
<12. 흑유향완, 명, 섬서요두요, 15~16세기, 13. 청자향로, 원말명초, 용천요, 14~15세기>

중앙박물관 세계관 반송재 20220215_22
<백유쌍용쌍이병, 당>

중앙박물관 세계관 반송재 20220215_13<고석도, 고양(17세기 활동), 목판화, 십죽재서화보(17세기 중엽), 현본 연대 미상>

중앙박물관 세계관 반송재 20220215_23
<수묵산수화, 사사표(1615~1698), 17세기 후반, 종이에 먹>

반송재(伴松齋)
반송재는 중국미술사학자이자 국립중앙박물관 제9대 관장을 역임한 김홍남박사가 세계문화관 개관을 기념하여 헌정한 전시실입니다. 중국 청말(18~19세기) 학자의 집을 서재와 내실을 중심으로 재현하고 그의 중국수집품을 배치하여 일상의 미학적 품격과 상고취향을 생동감 있게 담아내고자 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

 

[중앙박물관 세계문화관] 명.청대 중국 회화

중국에서는 처음에 인물화를 그리기 시작하였으며 당대 후기부터 자연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실제 중송대 초기에 아름다운 경치를 묘사하는 수준높은 산수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북송 후기에는 화면을 단순화하여 느낌을 묘사하는 중국회화의 전통이 확립되었다. 명대 초기에는 송대 회화의 전통을 따르는 절파(浙派)가 궁정과 민간에서 활약했고, 중기 이후에는 원대의 문인화를 계승한 오파(吳派)가 소주(蘇州)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청대 초기  문인화의 전통 계승하는 화가들도 있었으며 반청의식을 가진 승려화가들은 개성적인 화법을 창조했다. 청대 중기 이후에는 주요 활동 지역별로 화파를 형성하면서 활발히 활동한다. 또한 서양화법이 소개되어 전통적인 중국화 재료에 서양화의 투시법, 명암법을 구사하는 동서 융합의 화풍이 출현하기도 한다.

중앙박물관 세계관 명청회화 20220215_01<산수, 동기창(1555~1636), 명, 비단에 먹>

동기창은 중국 명대의 화가로 자는 현재, 호는 사백, 향광거사이다. 그는 관리로서의 명성도 높았지만 시문에 능하며 서예와 그림에 뛰어났다. 화론에도 정통하여 중국 역대 회화를 남종화와 북종화로 구분하고, 문인화 중심의 남종화를 종통으로 삼는 ‘남북종론(南北宗論)’을 주장하여 후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기교에 치중하는 직업화가의 화풍을 비판하고 남종화의 시조인 왕유를 비롯하여 동원, 황공망 등의 수묵산수화법을 기초로 독창적인 그림을 그렸다. 또한 서화 감정에도 일가견이 있어 많은 작품을 감식하고 소장하기도 했다. 이 그림은 모두 8면으로 이루어진 산수 화첩으로 다양한 필법과 풍부한 먹색을 이용하여 표현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명청회화 20220215_02<후적벽부, 문징명(1470~1559), 1558년 작, 종이에 먹>

문징명은 중국 명대의 서화가로 시.서.화에 모두 능했다. 어려서부터 왕희지, 구양순, 조맹부, 소식, 황정견 등과 같은 대가들의 서체를 스스로 습득하면서 문인화가로 갖추어야 할 소양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데 필요한 용필법의 기초를 다졌다. 이 작품은 소동파로 널리 알려진 북송시대 문학가 소식의 후적벽부를 문징명이 행초서체로 쓴 것이다. 소식의 적벽부는 중국의 화단과 서단에서 가장 애호된 문학작품으로 소식이 황주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 현실을 잊고 자연을 만끽한 감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 작품은 문징명의 나이 89세 때에 쓴 것으로 그의 고매한 성품과 함께 문인의 서권기 넘치는 필체가 잘 드러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명청회화 20220215_03<산수, 석도(1642~1707), 1695년작, 종이에 먹>

석도의 본명은 주약극, 법명은 원제이며, 석도 이외에도 고과화상, 대척자 등의 여러 호를 사용하였다. 명나라 황실의 후예로 명나라가 망한 후 승려가 되어 여러 지방을 떠돌아 다녔다. 석도는 청대 초기 팔대산인, 곤잔, 홍인과 함께 네명의 승려화가, 즉 사승화가 중의 한 사람이다. 석도는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필치로 개성이 두드러진 인물, 산수, 화훼를 그렸다. 황산 등을 유람하며 실경을 다양하게 묘사하기도 했는데, 과감한 구도, 주름진 산의 표 현, 구불구불한 선묘, 강한 흑백대조 등이 석도 산수화의 특징이다. 또한 독창적인 화론을 내세워 회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는데, <고과화상어록>에서는 ‘일획론’을 주장하였다. 이 작품은 석도의 독특한 필치로 산, 나무, 바위 등을 묘사하여 개성 있는 그의 필법을 잘 보여주는 산수 화첩으로 모두 10면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명청회화 20220215_04<화조도, 마원어(1669~1722), 1696년작, 종이에 엷은 채색>

마원어는 청대화가로 자는 부희, 호는 서하, 천우산인이다. 윤곽선을 그리지 않는 몰골기법의 화훼화로 명성을 얻은 운수평에게 직접 그림을 배웠으며, 사생을 잘했다. 그의 작품은 수묵화가 대부분이지만 아름다운 채색을 한 그림도 있어 많은 화가들이 모방했다. 이 작품은 종이의 질을 잘 활용하여 먹과 채색의 갈필 효과를 잘 나타내었는데, 부드러운 담채를 사용하여 몰골기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각 화면마다 소재가 다양하고 감각적인 화풍을 잘 구사되어 있으며, 매화, 제비, 백모란, 꾀꼬리, 실과 괴석화조, 청죽, 국화, 새, 수국이 그려져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명청회화 20220215_05<잠자리와 나비, 제백석(1863~1975), 1934년작, 종이에 채색>

제백석은 20세기 중국의 저명한 화가로 시문, 서화, 전각에 모두 능통하였다. 본명은 순지였으나, 나중에 황으로 바꾸었다. 자는 위청이며, 호는 백석이다. 가난한 목공 출신이었던 그는 서위, 팔대산인, 석도, 오창석 등의 화법을 계승하면서도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활달한 필치에 강한 채색을 통하여 자신만의 개성있는 화풍을 이루었다. 사생을 중시하여 여행을 많이 하고 자연을 세심하게 관찰하였다. 특히 화조하에서 중국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 했는데 그림의 소재, 내용, 형식 등에서 보수적인 화가들의 그림과는 차이를 보인다. 이 그림은 활달하고 능숙한 필치로 표현한 붉은 꽃과 정교하게 묘사한 곤충의 표현이 매우 뛰어나다. 간결하고 세련된 구도에 선명하면서도 화려한 색채의 표현으로 화면전체에 생기가 넘친다. 관기에 ‘갑술춘이월’이라 적혀 있어 1934년 봄에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명청회화 20220215_06<새우, 제백석, 1934년작, 종이에 먹>

제백석은 인물, 산수, 화조, 초충 등의 모든 분야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주괁거인 표현을 중시한 사의화조화가 가장 대표적이다. 작품활동 초기에는 초상화를 비롯하여 화조와 초충의 공필화(대상을 정교하고 세밀하게 그리는 기법)를 그렸다. 그 후 표현의 한계를 느끼고 자연의 여러 모습과 생물들의 특성을 관찰하여 수묵과 채색으로 사의화조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의 화조화에는 일상생활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소재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특히 새우는 제백석이 가장 즐겨 그리던 소재이다. 이 그림음 새우의 무리를 수묵으로 자유분방한 필치로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으며, 특히 수묵의 농담효과를 이용해 새우몸체의 투명감을 표현해 그의 비범한 필묵법을 볼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명청회화 20220215_21
<겨울산수, (전) 마원(1189~1225이전 활동) 축, 비단에 먹>

중앙박물관 세계관 명청회화 20220215_07<그림 중 선비가 동자와 함께 매화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

마원이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남송의 화원에서 활약한 화가로 그의 집안은 증조부로부터 5대에 걸쳐서 7명의 화원의 화가를 배출한 유명한 화가 집안이다. 마원은 이러한 가문의 대를 이어 그림을 업으로 삼으며, 가풍을 배우면서도 당시 새로운 화풍으로 각광받은 이당의 화풍을 계승하여, 웅장하면서도 기묘하고, 간략하면서도 세련된 자신만의 독창적인 마원화풍으로 발전시켰다. 화면의 구성은 복잡한 자연을 가장 아름다운 각도에서 포착하여 단순하고 시적인 구도로 구성하였으며 여백을 많이 살렸다. 이 그림은 사게산수도 중 겨울을 그린 작품으로 동자를 거느린 고사(高士)가 눈 속에 핀 매화를 찾아 심산유곡으로 나선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화면 왼쪽 하단에 ‘마원’의 서명이 있으나 친필로 보기는 어려우며 원대내 명초에 마원의 화풍을 따른 직업화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명청회화 20220215_22
<눈내리는 산, 남영(1585~1664), 1640년작, 비단에 먹과 엷은 채색>

중앙박물관 세계관 명청회화 20220215_08<그림 중 선비가 다리를 건너는 모습>

남영은 명대 화가로 자는 전숙, 호는 접수, 석두타 등이다. 그는 저장성 항저우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문인과 교유하고, 스스로 시문도 쓰며 문인화한 직업화가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1640년에 그려진 작품으로 눈 내리는 깊은 걔곡의 다리를 건너는 선비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화면 가득 들어선 웅장한 산세, 자레 나누어진 바위의 모습, 명쾌한 윤곽, 그리고 눈꽃을 표현한 흰색 등 채색의 산뜻한 조화는 남영의 독자적인 화법이라 할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명청회화 20220215_23
<눈 속의 꽃과 새, 여기(약1477~ 약1503 활동), 명, 비단에 먹과 채색>

여기는 저장성 닝포(寧波) 출신으로 자는 정진이며 호는 낙우, 낙어이다. 명대 대표적인 궁정 화가이며 금의위지휘라는 관직에까지 오르며 활약하였다. 이 그림은 구륵전채(鉤勒塡彩, 윤곽선을 그리고 채색을 하는 화법) 기법으로 그려졌는데, 설경을 배경으로 한 쌍의 꿩과 대나마, 매화, 동백이 표현되어 있다. 굵은 매화나무 가지에는 산비둘기로 보이는 새 이외에도 작은 새가 여러 마리 앉아 있다. 꿩은 당나라 이래 화조화의 중요한 줒였는데 명대에 이르러 길상적인 의미가 더욱 부각되어 많이 그려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명청회화 20220215_35
<겨울 숲 속 두마리 매, 임량(약1416~1480), 명, 비단에 먹>

임량은 명대화가로 광동 출신이며 자는 이선이다. 그림에 뛰어난 재능이 알려지면서 궁정의 화조화가로 활동하였다. 그는 변문진, 여기와 함께 명대 궁정 화조화의 발전을 이끈 대표적인 화가이다. 힘차고 자유분방한 수묵화 조화에 뛰어나 사의를 중시하는 문인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특히 독수리와 매를 비롯한 맹금류를 잘 그렸다. 이 그림은 추운 겨울에 눈이 쌓인 가지에 앉은 두 마리의 매를 묘사하였다. 화면 중앙에 두 마리의 매가 마주 앉아 있고 왼쪽 위로는 두 마리 새가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고 있다. 그의 거칠고 빠른 필치는 마치 서예의 초서를 쓰는 듯 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명청회화 20220215_24
<악기를 연주하다, 오위(1459~1508), 명, 비단에 먹>

오위는 후베이성 우창(武昌) 사람으로 자는 사영, 호는 소선이다. 문인집안 출신이었으나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집안이 몰락하자 직업화가의 길을 택하였다. 궁정에 들어가 활동하였으나 성품이 괴팍하여 결국 조정의 속박을 견디지 못하고 궁정을 떠난 방랑하였다.. 오위는 대진에 뒤를 이은 절파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빠르고 거친 필법의 산수인물화를 잘 그렸다. 이 그림은 소략한 배경에 빠르고 거침없는 필법으로 악기를 연주하며 흥에 겨워 춤을 추는 두 인물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명청회화 20220215_25
<현악기 연주를 듣다, 왕가(16세기 후반~17세기 초 활동), 1624년작, 종이에 먹과 채색>

중앙박물관 세계관 명청회화 20220215_10<그림 중 현악기 연주를 듣는 모습>

왕기는 명대의 화가로 장쑤성 쑤저우(蘇州)사람이며, 자는 이약이다. 어려서부터 집안의 영향을 받아 산수, 인물, 수석 등을 잘 그렸다. 화법에 구애되지 않고 고아하고 간결한 필치의 그림을 많이 그렸다. 이 그림은 문인의 정원에서 한 인물이 의자에 앉아 악기를 연주하고 다른 한 인물은 연주를 듣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 상단 맨 오른쪽에 왕기가 1624년 12월 1일에 그렸음을 밝히고 있다. 화면 맨 아래 오른쪽과 왼쪽의 부분에는 각각 사송주(18세기 사람), 왕계천(1907년생)의 감장인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명청회화 20220215_26
<겨울에 홀로 낚시하다. 왕봉원(16세기 중엽 활동), 명, 비단에 먹과 채색>

왕봉원은 명대의 서화가로 난징 출신이며 자는 자신 호는 길산이다.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고 서예로 이름이 높았다. ‘한강독조(寒江獨釣)’의 주제는 당대 유종원의 시로도 유명하다. 눈 덮인 추운 겨울에 강에서 홀로 낚시하는 장면은 매우 시적인 정취를 자아내기도 하지만 은거하는 군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홀로 낚시하는 인물을 생동감 있게 배치하였으며, 강가에 자란 대나무와 매화는 은거하는 군자의 고고한 품성을 나타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중앙박물관 세계관 명청회화 20220215_27
<시냇물에 발을 씻다. 장굉(1580~1659), 1648년, 종이에 먹과 채색>

중앙박물관 세계관 명청회화 20220215_12<그림 중 발을 씻는 모습>

장굉은 장쑤성 쑤저우 출신으로 자는 군도이며, 호는 학간이라 하였다. 그는 심주의 화법을 배워 먹색이 차분하면서 변화가 다양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장굉의 산수화 특색은 실경 묘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각지의 명승을 유람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는 점이다. 1648년에 그려진 이 작품은 깊은 산속의 시냇물에 나무를 걸치고 편한 자세로 앉아 더위를 식히며 사색에 잠긴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시냇물에 발을 씻는 ‘탁족(濯足)’은 세속을 초탈하여 자연에서 유유자적하는 선비를 상징하는 모습으로서 문인들이 매우 애오한 주제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명.청 회화
명.청대에는 송.원대의 전통회화를 계승하면서 다양한 화파와 화법이 새롭게 등장한다. 명대초기에는 송대 회화의 전통을 따르는 절파(浙派)가 궁정과 민간에서 활약했고, 중기 이후에는 원대의 문인화를 계승한 오파(吳派)가 소주(蘇州)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청대 초기에는 ‘사왕四王’이라고 불리는 왕시민, 왕감, 왕원기, 왕휘가 문인화의 정통을 잇는 반면에 반청의식을 지닌 네 명의 승려화가 팔대산인, 석도, 곤잔, 홍인 등은 개성적인 화법을 창조했다. 청대 중기 이후에는 주요 활동 지역의 이름을 딴 양주팔괴, 안휘파, 금릉팔가, 상해화파, 영남화파 등이 화파별 화가들이 활발히 활동한다. 또한 서양화법이 소개되어 전통적인 중국화 재료에 서양화의 투시법, 명암법을 구사하는 동서 융합의 화풍이 출현하기도 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3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