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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특별전, 조선의 승려장인] 그들이 꿈꾼 세계

불전(佛殿)은 불교의 교리와 세계관을 구현한 공간이다. 불단에는 불상을 봉안하고 그 뒷편에는 불화가 걸려 있다. 승려 장인들은 각종 예술적인 재능과 신앙심을 바쳐 아름다운 불국토를 만들었다. 승려장인들은 도전을 거듭하여 새롭고 창의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단응이 만든 ‘목각설법성’은 입체감있는 조각을 통해 다른 시각의 불국토를 보여주고 있으며, 화엄이 그린 화엄경변상도(국보)는 화엄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복잡한 불교의 우주를 그림으로 구현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조각승 단응 등이 만든 <아미타여래삼존과 아미타여래의 설법장면(보물)>, 화승 화련 등이 한 화면에 펼쳐낸 불교의 우주(송광사 화엄경변상도, 국보)가 전시되어 작품의 장엄한 모습을 감상할 수 있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20220125_01<73. 단응이 수조각승으로 참여한 첫 불상, 마곡사 영산전 목조석가여래좌상, 단응 등 20명, 조선 1681년, 공주 마곡사>

수조각상 단응이 1681년 2월부터 6월까지 열아홉 명의 조각승을 이끌고 제작한 <마곡사 영산전 목조칠불좌상> 일곱구 중 하나입니다. 칠불좌상은 지난 세상에 나타난 일곱 부처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일곱 부처 중 석가모니로 불리는 이 목조여래좌상은 오른손을 무릎에 댄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크기도 다른 여섯구의 불상보다 10센티미터 정도 더 큽니다. 이 불상들은 단응이 수조각승으로 활약하며 조성한 첫 작품입니다. 단응은 주로 경상북도 북부와 그 인근에서 활동했다고 알려졌으나, 이 칠불상의 기록이 소개됨에 따라 충청남도 지역 불사에도 참여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함께 참여한 탁밀과 학륜 등 조각승 여섯 명은 3년 뒤 1684년 단응이 예천 <용문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을 만들 떄도 동참했습니다. 불상을 받치고 있는 목조대좌 역시 중요한 작품입니다. 대좌는 높이가 낮은 ‘亞’자 모양의 삼단 수미좌(須彌座) 위에 다시 연꽃 모양 대좌를 얹었습니다. 대좌의 형태와 세부 문양은 1684년 단응이 만든 예천 <용문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과 흡사하여 단응과 그를 따르던 조각승들이 만든 대좌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새로운 장르의 개척자, 단응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초까지 활동한 단응은 당시 여러 지역에서 뛰어난 기량을 갖추고 각자 개성을 발휘해 불교조각의 다양화에 기여했던 대표 조각승들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작은 목조불감을 비롯해 지난 세상에 출현했던 일곱 부처의 불상 등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그는 경상도 지역에서 명망있던 고승인 소영 신경 등과 긴밀하게 소통하고 교감하면서 불상과 불화를 융합한 목각설법상(木刻說法像) 같은 새로운 종류의 상을 조성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조각승 단응(端應), 탁밀(卓密) 등 만든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불화와 조각을 절묘하게 접목한 독창적이면서 창의적인 작품이다. 현존하는 6점은 문경 대승사, 예천 용문사, 상주 남장사, 서울 경국사, 상주 남장사 관음선원, 남원 실상사 약수암)에 남아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20220125_02<74. 조각승 단응 등이 만든 아미타여래삼존과 아미타여래의 설법장면, 용문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과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단응 등 7명, 조선 1684년, 예천 용문사, 보물>

1684년(숙종10) 가을, 단응과 탁밀 등 조각승 아홉 명이 예천 용문사 대장전에서 아미타여래의 극락세계를 새롭게 구현했습니다. 아미타여래삼존좌상과 목각설법상 속 부처가 겹겹이 배치되어 괴로움 없는, 지극히 안락한 아미타여래의 극락세계가 환영처럼 펼쳐지는 듯합니다. 나무를 위쪽에는 인도의 고대 문자인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한 범자인 ‘옴’자와 거꾸로 된’卍’자를, 아래쪽에는 ‘明’자와 ‘心’자를, 그리고 사이에 중국 고전인 <주역>의 64괘 중 아홉개를 배치하여 불교와 유교 등이 혼합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불사에서는 당시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소영 신경이 지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신경의 문도였던 단응은 그의 수행관과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금빛 찬란한 부처의 세계로
‘목각설법상’은 조선의 승려 장인이 어떻게 하면 법당을 더 아름답고 경건하게 만들고 사람들의 신심을 드높일지를 고민한 끝에 탄생한 독창적인 장르였습니다. 목각설법상은 불전에서 불상 뒤쪽에 배치되어 기종의 후불화 역할을 대체했습니다. 승려 장인은 깊이감이 느껴지는 입체적인 평면을 만들어 불국토를 시각적으로 보여 주는데 성공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금빛 찬란한 목각설법상을 처음 보았을 떄의 반응을 상상해 봅니다. 마치 오늘날 3D 영상을 보며 실감 나는 체험을 하듯이 직접 불국토에 가서 여러 존상을 마주한 듯한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요?(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화엄경변상도>는 <화엄경>의 7처 9회의 설법내용을 그린 그림이다. 상.하단 모두 법회장면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계획적이고 짜임색 있는 구도를 하고 있으며 황토색 바탕에 홍색과 녹색 및 금생을 사용하여 화면이 밝고 화려하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20220125_03<75. 화승 화련 등이 한 화면에 펼쳐낸 불교의 우주, 송광사 화엄경변상도, 화련 등 13명, 조선 1770년, 비단에 색, 송광사 성보박물관, 국보>

화련을 비롯한 화승 열세 명은 인도 마가다국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부처가 일곱장소에서 아홉 번에 걸쳐 <화엄경>의 방대한 가르침을 전하는 과정을 한 화면에 담아냈습니다. 737명이나 되는 존상이 등장해 복잡해 보이지만 설법회 명칭과 참여한 이들의 이름을 함께 적어 두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성 당시 승려들은 이 불화를 <화엄경> 주석서 목판 수천매가 보관된 화엄전이라는 특별한 수행 공간에 봉안했습니다. 전각을 드나들던 승려들은 이 그림을 보면서 장엄하고 복잡한 화엄사상과 불교 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한 화폭에 내용을 모두 담기까지 끊임없이 불교 교리에 매진한 화승의 면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승려 장인이 구현한 우주
불교의 우주는 관념 속에서 무한히 확장되는 세계입니다. 깨달음을 얻어 모든 것을 초월한 부처는 유일한 존재가 아니며 시공을 넘나들며 두루 존재합니다. 승려 장인은 화면을 빼곡히 채우는 천불을 비롯해 시간적 개념의 불세계와 공간적 개념의 정토를 표현했습니다. 불교에서 그리는 세계는 모든 것이 하나에 그치지 않고 한없이 연결되며 무한히 겹쳐져서 우주를 이룹니다. 조선 후기에는 화엄교학이 유행하여 비로나자불의 서원(誓願)으로 이룩된 정토인 연화장 세계를 그림으로 펼쳐 낸 작품이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불교 사상을 온전히 이해한 수행자였기에 이토록 무궁한 불교의 우주를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관음보살이 살고 있는 정토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는 수월관음도이다. 18세기 최고의 화승으로 평가받은 의겸이 그린 그림으로 전체적으로 고려시대 그림과 비슷하나 다양한 안료를 사용하여 짙게 채색하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20220125_21
<76. 화승 의겸 등이 다양한 기법으로 그린 관음보살, 관음보살도, 의겸 등 5명, 조선 1730년, 비단에 색,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의겸이 화승 네 명과 함께 보타락가산에 머무는 관음보살과 가르침을 얻으려고 그를 방문한 선재동자를 그렸습니다. 엷은 색과 먹으로 부드럽게 산수를 표현한 데 비해 관음보살은 짙게 채색했습니다. 다양한 안료를 자유롭게 사용한 의겸의 솜씨가 잘 드러납니다. 18세기를 대표하는 화승 의겸은 1730년 고성 운흥사에서 이 불화 조성에 참여한 행종, 채인과 관음보살도를 비롯해 목조관음보살좌상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불화를 그리는 화승 중에는 의겸처럼 불상 제작에도 능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20220125_04<그림 그리는 파랑새 이야기>

옛날 어느 사찰에서 법당 벽화를 완성할 장인을 찾지 못해 근심하던 차에 한 노인이 나타나 자신이 벽화를 그릴테니 벽화가 완성되기 전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하지만 호기심을 참지 못한 한 동자승이 안을 들여다보니, 법당 안에는 붓을 문 파랑새 한마리가 날아 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엿본 것을 안 파랑새가 바로 날아가 관음보살도의 눈동자는 미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참다운 성보를 만드는 마지막 절차를 암시합니다. <관음보살도>에 그려진 새는 관음보살의 화신이지만, 마치 성스러운 그림을 그렸던 전설 속 파랑새가 떠오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송광사 응진당에 있는 불화로 석가모니와 보살들을 그린 영산회상도를 중심으로 십육나한도가 배치되어 있다. 그림들은 응진전 내부에 신앙적인 구도에 맞추어 제작되어 당시의 구도와 제도를 살펴볼 수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20220125_07<77. 의겸이 판테온처럼 구성한 송광사 응진당 영산회상도와 십육나한도, 송광사 응진당 영산회상도와 십육나한도, 삼베에 색, 송광사 성보박물고, 보물, 1. 영산회상도, 의겸 등 11명, 1724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20220125_06<2. 제11.13.15존자, 붕안 등 3명, 1725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20220125_08<3. 제12.14.16존자, 회안 등 3명, 1725년>

의겸은 전각 전체를 장엄하는 큰 불사를 맡았습니다. 그는 1724년부터 1725년까지 제자들을 이끌고 송광사의 응진당, 영산전, 불조전 등 전체 불화를 새롭게 그리는 일을 맡았습니다. 이들은 전각 내부를 통일된 주제로 장엄하기 위해 건축 공간 벽면 전체를 하나의 화폭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응진당 영산회상도>에는 불화 조성을 주도한 수화승인 의겸이 이름이 있지만 함께 조성한 <십육나한도>에는 그의 이름이 없습니다. 여러 폭의 불화를 제작할 때는 각기 주제를 분담하되, 조성을 주도하는 수화승의 밑그림과 제작 방식, 양식 등을 화승들이 습득하였기에 불화 전체가 외형적으로 통일되었을 것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20220125_11<78. 화승 의겸 등이 그린 영취산에서 석가모니의 설법 장면, 해인사 영산회상도, 의겸 등 12명, 조선 1729년, 비단에 색, 합천 해인사, 보물>

의겸을 비롯해 열두 명의 화승이 1729년에 완성한 영산회상도입니다. 석가모니부처를 중심으로 보살, 나한, 사천왕, 팔부중 등 존상 253명을 크기를 달리하며 원근감 있게 그렸습니다. 금니를 자유자재로 사용한 붓의 필력과 본존에 채색된 금색을 바탕천 뒤쪽으로 배어 나오게 한 배채법에서 그가 조선 전기 불화 전통을 계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화 화기에는 의겸 이름 앞에 ‘붓의 신선’이란 호칭이 적혀 있습니다. 불보살과 나한이 입고 있는 옷의 문양부터 대좌와 같은 기물에 이르기까지 매우 화려합니다. 화면 전체를 장식한 금니 문양 등의 섬세한 표현은 왜 그를 ‘붓의 신선’이라 불렀는지 짐작케 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붓의 신선, 의겸
의겸은 조선 전기의 불화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여 불화의 또 다른 전통을 만든 18세기의 대표적 화승입니다. 의겸에게는 붓의 신선을 뜻하는 ‘호선(毫仙)’,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승려라는 의미의 ‘존숙’, 최고의 존칭인 ‘대정경(大正經)’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불화의 안정적인 구도와 탁월한 인물묘사, 세심한 필선은 왜 그에게 이런 수식어가 붙었는지 보여줍니다. 의겸은 대형 괘불의 조성과 전각 전체를 장엄하는 대형 불사를 여러 차례 총괄했고, 그 어떤 화승보다도 먼 길을 오가며 왕성한 삶의 자취를 남겼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자리한 곳을 정토로
사찰의 전각은 불교 교리와 세계관을 입체적으로 재현한 공간입니다. 불단에는 신앙의 대상을 상징하는 불상이 봉안되고, 그 뒤편에는 불화가 걸려 전각이 상징하는 세계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자신의 손길이 닿은 모든 것을 정신과 믿음이 깃든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만들었던 승려 장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명예나 부귀에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가는곳마다. 주인이 되고, 하늘 일마다 진실하고 아름답게 임했던 예술가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함께한 모든 이의 행복을 바란 그들은 진정한 예술가이자 수행자였습니다. 그들의 손끝에서 이상적인 부처의 세계와 고요한 설법 장면이 만들어졌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20220125_09<79. 화승 신겸이 그린 사십이수관음보살도 밑그림과 완성작, 고운사 사십이수관음보살도 밑그림, 신겸, 조선 1828년, 종이에 먹, 통도사 성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20220125_10
<2. 고운사 사십이수관음보살도, 신겸 등 40명, 조선 1828년, 비단에 색, 의성 고운사>

화승 신겸이 제작한 <사십이수관음보살도>의 밑그림과 완성작입니다. 밑그림의 유려하고 복잡한 필선에서 30년 이상 활동하며 이룩한 신겸의 높은 경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관음보살은 마흔두 개의 손에 갖가지 물건을 들고 있는데, 이 가운데 촉지인과 설법인을 한 여래의 모습은 이전에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시도입니다. 긴 얼굴에 큰 코, 가운데 몰려 있는 이목구비는 신겸 특유의 얼굴표현 방식을 보여줍니다. 밑그림 하단에는 ‘푸른 붓’을 의미하는 낙관도 찍혀 있어 화승으로서 신겸의 자의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색을 입혀 완성한 불화에는 화승 40명이 참여했습니다. 강렬한 색채 대비와 적극적인 금색의 사용이 돋보입니다. 불화에 장식성과 화려함을 더하는 신겸의 화풍이 작품에 잘 나타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20220125_14
<80. 신겸이 필사한 사경, 묘법연화경요해, 신겸, 조선 1821 ~1824년, 감지에 금니, 서울 청량사>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20220125_15<필사한 사경>

화승 신겸이 1821년부터 1824년까지 여러 사찰 승려의 도움을 받아 직접 필사한 사경입니다. 권마다 기록된 시주자 명단에는 경상도 인근 사찰뿐 아니라 강원도, 충청도 등 다른 지역 사찰의 승려들까지 폭넓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권5에는 신겸의 법과 계를 받은 제자 24명이 계를 만들어 필사를 도운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이밖에도 신겸은 10년에 걸쳐 다른 승려들에게 종이와 먹을 시주받아 <화엄경소초> 80권을 필사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신겸은 불화뿐만 아니라 경전의 필사에도 매우 뛰어났습니다. 그가 완성한 사경에는 수행승으로서의 그의 면모와 큰스님으로 존경받던 폭넓은 인맥이 담겨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20220125_12<81. 승려 장인, 신겸의 얼굴, 신겸 진영, 조선 19세기, 비단에 색, 문경 김룡사>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20220125_13<얼굴부분>

경상북도 문경에 있는 사불산 대승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화승 집단을 대표하는 신겸의 초상화입니다. 신겸은 화승이자 대선사로 존경받았으며, 화면에는 ‘퇴운당 대선사 신겸 진영’이라 적혀 있습니다. 그는 완숙한 경지에 다다른 화승으로 경전의 필사에도 매우 뛰어났으며, 불사 내용이 교리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살펴보는 증명의 역할까지 맡는 등 수행승이자 예술가로서 승려 장인의 정체성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현재 전하는 화승의 초상은 매우 드문 편으로, 실제 불화를 그린 화승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떠올리게 해줍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화승이자 사찰의 가장 큰 어른, 신겸
승려 장인이 실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모습이었는지 대부분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까지 활동한 화승 신겸은 ‘대선사’로 존경받으며 승려 문중의 두터운 신임을 얻은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만의 독자적 도상과 화풍을 구사했습니다. 거침없이 이어지는 불화의 필선은 화승으로서 그의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며 오랜 시간에 걸친 경전 필사는 수행승으로서 그의 면모를 드러냅니다. 화승이자 선사로서 그의 삶과 정체성은 후배 화승에게 이어졌습니다. 드물게 남아 있는 신겸의 초상화는 실천적 자세로 불사와 수행에 임한 그의 삶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그들이 꿈꾼 세계
조선시대 불상과 불화가 봉안된 전각에서 우리는 승려 장인이 꿈꾼 아름다운 불교 세계와 마주합니다. 이들은 불교 교리를 바탕으로 동원할 수 있는 각종 시각 매체의 힘을 빌려 자리한 곳을 아름다운 불국토로 만들었습니다. 승려 장인은 매일 어두운 전각에서 향을 피우며 부처에게 예배를 올렸고, 앞 시기의 누군가가 만들어 낸 금빛 찬란한 부처와 마주하며 새로운 영감을 받았습니다. 조선시대의 법당은 그림과 조각, 공예품이 어우러진 마치 갤러리와 같은 아름다운 곳이었으며, 승려 장인의 꿈과 불교의 진리가 담긴 성스러운 공간이었습니다. 그들은 도식화된 기존의 표현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거듭했습니다. 목각설법상이라는 입체적인 정토(淨土)를 만들고, 시공을 초월한 부처의 세계를 표현하고, 무수하게 중첩된 불교 세계관을 하나의 평면에 담아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깊은 감동을 선사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20220125_17<89. 서방정토로 오르는 승려 뒷모습, 염불서승도, 김홍도, 조선 19세기 초, 모시에 엷은 색, 간송미술문화재단>

노승이 연꽃 위에 앉아 있습니다. 뒷모습이라 스님의 얼굴 표정은 알 수 없지만 곧은 자세에 야윈 목, 달빛처럼 머리 주변을 비추는 둥근 광배는 그의 오랜 수행을 짐작케합니다. 김홍도는 간략한 필선으로 승려의 머리를 그리고, 붓질 몇 번으로 폭이 넓은 잿빛 장삼을 표현했습니다. 감상자를 보지 않고 뒤돌아 앉아 서방 세계를 향하는 노승의 꼿꼿한 모습에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오롯하게 수행하며 또 다른 예술을 만들어 낸 조선의 승려 장인이 떠오릅니다. 초월적인 존재를 그린 불교회화를 일반 화화와 동일하게 논할 수는 업겠지만,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김홍도처럼 우리 곁에는 마음이 머물고 싶은 곳,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손끝으로 펼쳐낸 또 다른 예술가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승려 장인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20220125_16<승려장인을 기억하며>

불교미술은 조선 후기 문화를 떠받치는 하나의 축이었고, 승려 장인은 이 시기 문화를 풍부하게 만들어 준 숨은 주역이었습니다. 승려 장인은 사찰이라는 공개된 장소에서 모두에게 열린 미술 세계를 펼쳐 보였습니다. 이상향에 대한 꿈을 함께 나누며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치유와 안식을 주고자 했습니다. 승려 장인은 스스로 공동체적 성격을 띠었을 뿐만 아니라 결과물 또한 공동체를 지향했습니다. 조선시대 승려 장인과 같은 집단은 근현대 역사의 굴곡속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으며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도로서 승려 장인의 전통은 없어졌을지 몰라도 공동체를 꿈꾸었던 그들의 정신과 마음은 단절되지 않고 문화적 DNA로 우리 삶에 남아 지금도 자연스럽게 여러 모습으로 발현되고 있지 않을까요? 만든 이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조선 후기의 불상을 바라보며 승려 장인들을 기억해 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2. 국가문하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조선의 승려장인] 화승, 불화를 그리는 승려 장인

불화(佛畵)는 불교적인 내용을 그린 그림으로 불전에 모셔 놓고 예배를 드리거나 신도들을 교화하기 위해 그렸다. 불화를 언제부터 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불교 경전에 부처의 형상을 그려 예배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오래전부터 그려왔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알려진 최초의 불화는 인도 아잔타석굴의 벽화들로 기원전 2세기 작품들이다. 화승(畵僧)은 불화를 전문적으로 그리거나 회화작업에 종사하는 승려를 말한다.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 전문적인 장인들이 그 작업을 수행한데 반해 우리나라는 출가한 승려들이 불화를 그리는 역할을 도맡았다. 불화를 그리는 승려들은 단체로 사찰을 옮겨다니면서 불화를 그리면서 집단을 형성했으며 빼어난 작품을 그린 걸출한 화승들이 배출되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화승20220125_12
<56. 초본, 불화의 밑그림, 여래도 밑그림, 조선 19~20세기,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종이에 목탄으로 여래의 전체 형태를 그리고, 옷 주름 부분만 먹으로 그린 밑그림입니다. 여래의 무릎 아랫부분을 먹으로 그리면서 수정한 흔적이 확인됩니다. 초본은 불화나 단청을 제작하기 위한 밑그림입니다. 초본을 그리는 것을 ‘초를 낸다’는 의미로 출초라고 합니다. 초본을 그릴 때는 먼저 목탄으로 큰 형태를 잡은 다음 먹으로 세부를 표현합니다. 세부 묘사를 해낼 수 있는 필력이 요구되기 떄문에 기량이 뛰어난 화승이 맡았습니다. 이 초본은 어떻게; 화승이 밑그림을 그렸는지 보여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화승20220125_11
<57. 화승 약효가 그린 인물도 밑그림, 인물도 밑그림, 약효, 조선 19~20세기,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약효(?~1928년)는 50년 넘게 활동하며 100여 점이 넘는 불화를 그린 한국 근대 대표 화승입니다. 그는 공주 마곡사를 거점으로 활동하면서 제자를 양성했습니다. 약효는 18세기에 뛰어난 화승이었던 유성의 밑그림을 모방하며 수천수만 장을 연습했다고 전합니다. 이 초본에서는 매우 가는 선으로 인물의 얼굴을 능숙하게 표현했고 거친 붓으로 옷 주름을 자유롭게 그렸습니다. 불화 제작에 실제로 사용했다기보다 제자의 학습이나 참골르 위해 약효가 그린 밑그림으로 추정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화승20220125_13
<58. 색을 일일이 적어둔 지장보살 밑그림, 지장보살도 밑그림, 조선 19~20세기,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연화좌에 앉은 지장보살과 그를 보좌하는 두 인물을 그리고, 색을 참조하도록 각 부분에 한글로 ‘양녹’, ‘옥석’, ‘삼청’, ‘장단’, ‘진흥’을 적거나 한문으로 ‘백’, ‘황’ 등을 적어 두었습니다. 보살의 어깨 주변에는 입고 턱수염을 연습한 흔적도 남아 있습니다. 이 밑그림은 1917년에 <자수지장보살도>를 조성하려고 보현(1890~1979년)이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보현은 서울 경국사에서 출가하여 화승으로 입문했고, 사찰을 책임지고 주관하는 주지직을 맡아 사회 주요 인사와 교류하는 등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 승려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화승20220125_01<여래도, 59. 불화 밑그림 첩, 초본첩, 종선후기, 종이에 먹, 통도사성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화승20220125_02<보살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화승20220125_03<신중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화승20220125_04<사천왕도>

도상 연습과 전승을 위해 실제보다 작게 그린 소형 불화 밑그림을 엮은 초본첩입니다. 소형 초본은 실물 크기의 초본을 작성하기 전 연습할 때 교본으로 사용되었으며 지역 간 도상 교류와 사제 간의 도상 전승, 실제 불화 제작에도 적극 활용되었습니다. 근대에 이름을 날렸던 화승 철유(1851~1917년)는 금강산 유점사에서 사천왕도를 조성할 때 유점사 노스님의 사천왕 초본 중 한 점을 확대해서 그렸다고 전합니다. 초본의 각 면에는 아미타여래와 석가여래, 사자를 탄 문수보살,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 보주를 든 용왕과 코끼리관을 쓴 야차, 사자관을 쓴 건달바, 탑을 든 사천왕과 여의주를 든 사천왕이 그려져 있습니다. 작은 화면에도 불구하고 불보살과 신중의 모습을 유려하고 세밀하게 표현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초본: 설계도이자 또 하나의 작품
불화 밑그림인 초본은 완성될 불화 모습을 미리 구현한 일종의 설계도입니다. 누군가 그린 초본 위에 다른 이들은 오색을 펼쳐 냈습니다. 화승의 초본은 단순한 밑그림이 아니라 오랜 수련 시간과 부처를 향한 평생의 신심이 함축된 결과물이었습니다. 이들은 필선을 연습하고, 불화를 구상하고, 도상을 전승하기 위해서도 초본을 그렸습니다. 여러 세대를 거쳐 전승된 초본은 앞선 화승들의 정신과 기술의 결정체였습니다. 그렇기에 초본은 로 밑그림이라는 본래 성격을 넘어 완성된 불화에 버금가는 수준 높은 면모를 보여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팔상도(八相圖)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8장면으로 표현한 그림으로 팔상전이나 영산전에 봉안된다. 영산회상도와 함께 많이 그려진 불화의 주제로 신도들이 불교를 해할 수 있도록 그림으로 쉽게 표현하고 있다. 통도사 팔상도(보물)은 8장면이 그림이 밑그림과 같이 남아 있어 당시 화승들이 작업한 내력들을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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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석가모니의 탄생, 1. 통도사 팔상도 밑그림(비람강생상), 조선 18세기,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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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통도사 팔상도, 포관 등 2명, 조선 1775년, 비단에 색, 통도사성보박물관, 보물>

팔상도의 두 번째 장면입니다. 싯다르타 태자가 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하는 현장을 담았습니다.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싯다르타 태자가 태어나고, 아홉마리 용이 신성한 물을 뱉어내고 있습니다. 갖가지 색으로 이들이 완성한 불화에서는 불교 세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통도사 팔상도>는 화승 수십명이 열덟 화폭을 함께 조성했는데, 이 화폭에는 해당 화면 제작을 주도한 포관과 유성의 이름만 적혀 있습니다. 통도사에 전하는 <팔상기문>과 팔상도 첫번째 화폭인 <도솔래의상>에는 두훈이 수화승으로 적혀 있어, 두훈이 전체 불사를 주관하고 실제 불화 제작은 포관을 중심으로 유성과 여러 화승이 담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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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출가를 결심한 싯다르타 태자, 1. 통도사 팔상도 밑그림(사문유관상), 조선 18세기,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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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통도사 팔상도(사문유관상), 포관 등 5명, 조선 1775년, 비단에 색, 통도사 성보박물관, 보물>

팔상도 중 세번째 그림입니다. 왕궁 밖을 나선 싯다르타 태자가 노인과 병자, 죽은 이의 시신을 보고 삶의 고통과 죽음을 깨달은 모습을 담았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북문에서 수도자를 보고 출가를 결심합니다. 화면 중앙의 소나무를 중심으로 상하좌우에 중요한 네 장면을 배치했고, 오른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밑그림은 먹선으로 대담하게 그린 소나무 두 그루가 서로 얽혀서 화면의 중심을 이룹니다. 뒷면에는 철유가 스승에게 전승받은 이 밑그림에 필획을 더하여 쓴 묵서가 남아 있습니다. <사문유관상> 화폭에는 포관과 유성을 비롯해 화승 다섯명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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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눈 덮힌 산에서 수행하는 석가모니, 1. 통도사 팔상도 밑그림(설산수도상), 조선 18세기,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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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통도사 팔상도(설산수도상), 포관, 조선 1775년, 비단에 색, 통도사 성보박물관, 보물>

팔상도 중 다섯 번째 그림입니다. 출가 후 궁으로 돌아오라는 청을 거절한 채 설산에서 수행하는 석가모니 모습을 그렸습니다. 출가한 후의 이야기를 그렸기에 이제 궁궐은 등장하지 않고 나무나 바위, 산 묘사가 중심을 이룹니다. 밑그림 속 바위나 나무 기둥의 거친 묵법으로 석가모니의 극적인 수행장면을 속도감 있게 전달합니다. 채색본에는 포관의 이름만 적혀 있습니다. <팔상기문>에 수화승으로 기록된 두훈보다 포관의 이름이 여러 화폭에서 가장 많이 확인됩니다. 전라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18세기 화승 의겸 역시 불사를 총괄하면서 각 화폭을 책임지는 화승을 따로 지정해서 그리게 한 사례가 있어 당시 화승들의 분업체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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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마왕을 물리치고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부처, 1. 통도사 팔상도 밑그림(수하항마상), 조선 18세기,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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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통도사 팔상도 (수하항마상), 조선 1775년, 비단에 색, 통도사 성보박물관, 보물>

팔상도 중 여서번째 그림입니다. 나무 아래에서 마군에게 항복을 받고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부처를 그렸습니다. 마왕 군대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얼굴 표현이 돋보입니다. 원라 중국 팔상도에서는 뇌신(雷神)이 부처의 수행을 방해하는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이 팔상도에서는 오히려 뇌신이 마군을 공격하는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화승이 새롭게 도상을 바꾼 덕분에 석가모니 부처의 힘을 강조하고 마군을 물리치는 ‘항마(降魔)’ 주제를 더욱 강조한 것처럼 보입니다. 채색된 불화에는 마왕의 세 딸 중 한 명의 모습이 훼손되었는데, 밑그림으로 원래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초본과 완성본
낱장의 밑그림에서 불화가 완성되기까지 화승들은 얼마나 많이 고심하고 열과 성을 다했을까요? 1775년 통도사에는 화승 수십명이 모여 석가모니부처의 생애를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렸습니다. 이 불화를 위해 그린 것으로 보이는 밑그림이 함께 전합니다. 밑그림을 그린 화승들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각 구조와 인물의 모습,나무와 암석 윤곽은 물론 배치 간격도 거의 동일합니다. 밑그림과 완성된 불화를 비교하는 것은 단순히 어디가 같고 다른지를 보기 위함이 아닙니다. 함께 놓인 밑그림과 완성본을 대하며 그 사이에 화승이 마주했을 수많은 고민과 인내의 과정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화승의 스튜디오
화승의 작업공간은 부처의 모습을 조성하는 신성함과 여러 승려의 분주함이 공존했습니다. 경건한 자세로 그림을 그리는 화승 곁에는 증명(證明)을 맡은 승려와 불교의 주문인 진언을 염송하는 송주(誦呪)가 함께 있었고, 일반인은 이 공간에 드나들 수 없었습니다. 불화를 그리는 데 필요한 삼베, 비단, 종이, 면과 같은 바탕 재료나 채색 안료는 시주를 받거나 다른 승려에게서 조달했습니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모은 재료는 화승의 손끝에서 부처의 세계로 변모했습니다. 또한 불사 현장은 보조 화승이 한무리의 우두머리로 성장하는 배움터이자 문화가 전승되는 공간이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조선의 승려장인] 복장물, 생명력을 불어넣다.

복장(服裝)이란 불상과 불화에 안치하는 종교적인 성격을 갖는 물목으로 생명력과 신성성을 갖게 해 준다. 복장물의 핵심은 후령통으로 사리를 비롯해 오보병, 오곡, 오보, 오약, 오향 등 오방과 진귀한 물품이 들어간다. 이외에도 각종 다라니를 적은 진언과 경전, 비단천을 비롯한 복식 등이 들어간다. 복장을 안치하는 방식은 고려시대에 정립되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 간행된 <조상경(造像經)>에 그 절차와 품목 등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02<60. 조각승 해심이 만든 불상과 닮은 여래좌상, 목조석가여래좌상, 조선 17세기 중반, 국립중앙박물관>

귀가 크고 턱이 발달했으며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띠고 있습니다. 상체가 길고 가슴과 배가 적당히 부푼 신체 표현이 특징입니다. 이 여래좌상의 정확한 제작 연대와 원래 봉안되었던 사찰은 알 수 없으나, 이와 비슷한 불상으로 전라북도 고창 <문수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좌상>이나 고창 <상원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좌상>이 있습니다. 17세기에 활동한 조가승 무염 밑에서 배운 해심이 이 불상들을 만든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시에 출품된 이 여래좌상도 17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불상 안에서는 후령통과 직물로 만든 오보병(五寶甁), 경전과 다라니가 수습되었습니다. 수습 당시 후령통 안은 비어 있었습니다. 복장물이 완전한 형태로 전하지는 않지만, 조선 후기 복장물의 형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03<61. 석가여래좌상 몸 안에 있었던 신성한 물건, 목조석가여래좌상 복장물, 조선 17세기, 국립중앙박물관, 1. 후령통(핵심적인 복장을 넣는 통), 2. 원경(둥근거울), 3. 진언(불교의 주문)>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04<4. 다라니(신비한 힘을 가진 주문)>

후령통(喉領筒)은 복장물의 핵심으로 그 안에는 사리를 비롯해 오보병, 오곡, 오보, 오약, 오향 등 오방과 진귀한 물품들이 들어간다. 동(청색), 남(적색), 서(백색), 북(흑색), 중앙(황색)으로 방위와 색을 규정한 <조상경(彫像經)>을 절차를 따르고 있다. 다섯가지 보물인 종자(씨앗), 금강저, 채번(깃발), 산개(양산), 보병(병)을 직물로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05 <5. 오보병(다섯가지 보물을 담는 병)>

불상 조성이 끝난 다음 종교적 예배 대상이 되려면 또 다른 의식과 절차가 필요합니다. 불사리나 경전처럼 종교적 상징이 담긴 물건과 조성 기록을 적은 발원문을 내부에 넣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이처럼 불상 내부에 성스럽게 넣은 물건을 복장물이라고 합니다. 앞에서 소개한 목조석가여래좌상 몸 안에 넣었던 복장물의 일부입니다. 불상의 복장물로 빈 후령통과 오보병의 일부 그리고 내부 공간을 채우는 용도 등으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 경전과 다리니가 발견되었습니다. 오보병은 제 병이 아니라 다섯 가지 색깔의 직물로 만들었습니다. 동(청색), 남(적색), 서(백색), 북(흑색), 중앙(황색)으로 방위와 색을 규정한 <조상경(彫像經)>의 내용과 비슷합니다. 색깔별로 종자, 금강저, 채번, 산개, 보병의 형태를 한 세트로 만들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인조 때 일가족이 거의 몰살당할 때 살아남은 소현세자의 셋째아들을 모셨던 궁중 나인들이 발원한 보살상에 모셔졌던 복장물이다. 경안군이 오랜 귀향살이를 끝내고 결혼하게 되자 그의 무사함을 기원하는 바램이 담겨 있다. 이 유물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반영하고 있어 지금까지도 귀중하게 여겨지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06<62. 소현세자의 아들을 위해 궁중 나인이 발원한 보살상 복장물, 송광사 관음전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물, 조선 1662년, 비단 등, 송광사 성보박물관, 보물, 1.저고리>

낡은 남색 저고리와 녹색 배자, 붉은색 비단 등은 모두 전라남도 순천 송광사 관음전의 목조관음보살좌상 내부에서 나온 복장물입니다. 복장물의 중심은 갖가지 성물을 담은 후령통이지만, 함께 발견된 남색 저고리와 초록색 배자, 목숨 ‘수(壽)’자와 영지무늬를 화려한 금실로 수놓은 붉은색 비단이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저고리 안쪽에는 1662년 정월 궁중 나인이었던 노예성이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 부부 등의 장수를 기원하며 관음보살상을 발원했다는 내용이 정성스레 적혀 있습니다. 녹색 배자 안쪽에는 시주자 유씨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글도적혀 있습니다. 저고리와 같은 옷을 복장물에 넣는 풍습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온 것입니다. 이 옷들은 시주자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동시에 핵심적인 복장을 넣은 후령통 같은 복장물을 고정하고 보호하며 공간을 채우는 기능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07<2.저고리 위에 덧입는 배자, 3. 발원문>

성품을 돌이켜 들으시고 원통을 깨우치셨네. 관음불이 관음의 이름 주시고 위로는 자비의 힘을 갖추고 아래로는 자애를 갖추게 하니 32응신(應身)이 온 누리에 두루 미치네. 경안군 이씨와 부인 허씨 두 분의 수명장원을, 경자생 박씨와 노씨의 수명장원을, 윤씨의 수명장원을 기원합니다. 신축생 나인 노예성이 발원하여 1662년 정월에 관음보살상을 삼가 조성하니 이로써 공덕이 두루 미치고 나를 비롯한 모든 중생이 함께 성불하기를 기원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08 <4. 후령통>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09<5. ‘수’자와 영지무늬가 있는 비단>

장수를 의미하는 ‘수(壽)’자 직물을 넣은 까닭
경안군의 아버지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귀국한 지 얼마되지 않아 세상을 떴고, 어머니 강씨도 인조 독살 시도라는 누명을 쓰고 사사되었습니다. 1647년 네살이었던 경안군은 제주로 유배를 가고 이듬해 두 형마저 죽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1659년 그가 경안군으로 복권되고 1661년 허씨와 혼인한 점을 고려하면, 1662년 완성된 보살상에서 나온 장수를 상징하는 ‘수(壽)’자가 수놓아진 직물은 더욱 특별합니다. 한 많은 삶을 뒤로하고 혼인한 경안군의 평온한 미래와 무병장수를 간절히 바란 나인들의 염원이 깃든 복장물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10<63. 조각승 여찬 등이 불상을 만들며 넣은 바람이 담긴 글, 문경 쌍계사 불상 조성 발원문, 조선 1723년, 종이에 붉은 먹, 국립중앙박물관>

경상북도 문경 쌍계사에서 아미타여래삼존상을 조성하며 마련한 발원문입니다. 현재 이 절과 불상은 모두 확인되지 않고 발원문만 전합니다. 상을 만든 승려 장인은 여찬과 삼인, 신찰, 지찰, 성현입니다. 18세기 전반에 활동한 여찬은 강원도 고성 유점사 대종을 고쳐 만들떄는 화원으로, 경남 고성 <옥천사 시오아도>(1744년)와 서울 <봉은사 목조사천왕상>(1746년)을 조성할 때는 복장물 시주자로 참여하며 다양한 역할을 했습니다. 비록 불상은 전하지 않으나, 이 발원문은 불상 조성에 관여한 이들의 정보와 발원문 구성을 살필 수 있는 자료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11<65. 화승 신겸이 그린 시왕도의 복장물, 시왕도 복장물, 조선 1829년, 국립중앙박물관, 1. 발원문, 2. 후렴통>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12 <3. 열금강지방지도, 4. 진언>

시왕도에 봉안된 복장물입니다. 시왕도는 모두 열점으로 조성되었지만 복장물은 현재 다섯점만 남아 있습니다. 과학적 조사로 납작한 네모 형태의 종이 후령통 안에서 각종 곡물과 사리가 담긴 오보병, 불교의 주문인 진언과 여러 직물이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함께 발견된 발원문으로 화승 신겸과 신선이 이 불화를 조성한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내부에 공간이 있어서 그 안에 복장물을 넣을 수 있는 불상과는 달리 불화는 낱장 형태여서 복장물을 넣기에 어려움이 따릅니다. 이러한 이유로 불화의 복장물은 주머니에 담아 그림 상단에 걸거나, 그림 뒷면에 쉽게 부착할 수 있는 납작한 종이 상자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공간과 재질에 맞춰 복장물을 제작했던 승려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01
<64. 화승 신겸과 신선이 그린 지옥 풍경, 시왕도, 신겸 등 2명, 조선 1829년, 비단에 색, 국립중앙박물관>

신겸과 신선이 1829년 북한산성의 중심 사찰인 중흥사에 봉안하려고 조성한 시왕도입니다. 신겸은 1828년에 의성 고운사에서 시왕도를 그렸습니다. 이때 그린 밑그림을 사용하여 1829년 중흥사 시왕도를 제작했습니다. 이 불화는 사후 세계를 다스리는 열 명의 왕 중 두번째인 초강대왕과 지옥의 형벌장면을 묘사했습니다. 성곽으로 구획된 지옥 안에서는 죄를 지은 영혼이 뜨거운 가마솥에서 고통을 받고 있으며, 지옥문 바깥에는 그들을 구하려고 지장보살이 자리했습니다. 대부분 불화에 봉안된 복장물은 남아있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이 불화는 종이로 된 납작한 후령통과 복장물이 함께 전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생명력을 불어넣다
불상과 불화가 일반 미술과 다른 차이점의 하나는 제작을 마친 다음 종교적 예배 대상으로 생명력을 불어넣는 의식과 절차를 거친다는 것입니다. 불상과 불화는 각각 입체와 평면이라는 공간을 감안해 복장물을 넣었습니다. 복장물은 불상이나 불화를 예배대상으로 변모시키기 위해 함께 봉안하는 여러 신성한 물건을 의미합니다. 불상과 불화에 복장물을 납입하고, 신비한 힘과 권위를 부여해 종교적 생명력을 불어 넣는 점안(點眼)의식이 거행되면 금빛 찬란한 불상과 화려한 색의 불화는 비로소 부처의 세계로 바뀝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13<67. 문수사 지장시왕도를 그리며 남긴 기록, 문수사 지장시왕도 발원문, 조선 1774년, 종이에 먹, 서산 문수사>

설훈과 화승 일곱 명을 비롯해 1774년 불사에 참여한 승려의 이름과 조성시기, 봉안될 공간을 적은 글입니다. 화승 설훈과 증명을 맡은 국밀은 불화 뒷면에서 나온 편지의 주인이기도 합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14<문수사 지장시왕도에서 나온 편지, 문수사 지장시왕도 서신, 조선 1773~1774년, 종이에 먹, 서산 문수사>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15<문수사 지장시왕도에서 나온 편지>

<지장시왕도>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승려들이 주고받은 편지 여섯 통이 발견되었습니다. 그중에서 화승 설훈과 오래전부터 인연이 있었던 서산 삼길암의 승려 광률이 불상에 금을 다시 입히는 작업을 비밀스럽게 부탁하는 편지가 있습니다. 또한 광률이 문수사 청련암의 최고 어른 스님께 불상에 넣을 복장물을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도 있습니다. 광률은 왜 비밀스럽게 요청했을까요? 어떤 이류로 불화 뒷면에 편지를 넣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불화가 완성되기 전 불사 현장의 이모저모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복장물 20220125_16<66. 설훈 등이 그린 지장시왕도, 문수사 지장시왕도, 설훈 등 8명, 조선 1774년, 비단에 색, 서산 문수사>

뛰어난 그림 솜씨로 승려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았던 화승 설훈이 충청남도 서산 문수사 청련암에 봉안하려고 조성한 지장시왕도입니다. 설훈은 불화뿐 아니라 불상 제작과 개금에도 참여했습니다. 그가 활동하던 18세기에는 불상 제작 수요가 줄어 들면서 화승이 불상 중수와 개금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이 그림에는 다채롭게 뻗어가는 신비로운 빛과 구름 가운데 지옥의 영혼을 구원하는 지장보살, 지옥에서 죄를 심판하는 시왕과 무리를 그렸습니다. 이 불화의 뒷면에서는 제작 당시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승려들의 편지가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과거 불사 현장의 생생한 흔적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사 현장의 이모저모
사찰에 필요한 것을 만드는 일인 ‘불사(佛事)’는 어떤 과정을 거쳐 진행되었을까요? 우리는 이미 완성된 불상과 불화만 접하므로 과거의 불사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충청남도 서산 문수사 청련암에는 불화를 그릴 때 현장에서 승려들이 주고 받았던 편지가 남아 있습니다. 이 편지는 18세기 후반 전문적인 화승 집단이 서로 어떻게 연락했는지, 불사 주문과 진행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알려 주며, 재료 수급 과정과 인맥에 따른 개인적인 요청 등 작업 현장의 이모저모를 생생히 보여 줍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3. 위키백과, 2023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조선의 승려장인] 불상을 제작한 조각승

조선 중기까지 많은 사찰들이 정치,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영향력이 약화되어 큰 불사를 일으키기 힘들었던 것으로보인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승병들이 크게 활약하면서 전국적으로 큰 불사를 일으킬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이 시기에는 많은 불전들이 중건되었는데 이와함께 불상들도 같이 제작되었다. 불상의 제작은 수조각승을 중심으로 여러 명이 함께 하였으며, 함께 작업하는 과정에서 기술이 예술적 특징이 자연스럽게 전승되었다.

조선후기에는 금속을 주조해서 만드는 금동불상보다는 주변에서 쉽게 재료를 구할 수 있는 소조불상이나 목조불상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목조불상은 대체로 세개 이상의 나무로 만든 부재를 연결하였으며 내부는 복장물을 안치하기 위해 깊게 팠다. 조선시대 불상은 조형적인 예술성이나 종교적인 표현 등이 돋보이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특색있는 고유의 불상의 형태를 보여준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조각승 20220125_02<1.무릎편, 28. 목조불상의 내부 구조를 보여주는 부재, 목조불상편,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1. 따로 만들어 결합했던 무릎편입니다. 무릎 뒤편 중앙의 좌우에는 거멀쇠로 몸체와 고정했던 홈이 파여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조각승 20220125_03<2.보살상 오른쪽 몸체편, 3.보살상 왼쪽 몸체편>

2. 머리에서 몸통까지 중앙과 좌우로 삼등분한 보살상의 오른쪽 몸체 부분입니다. 몸체를 연결했던 ‘ㄷ’자 모양 거멀쇠가 남아 있습니다. 손을 꽂기 위해 뚫은 홈도 확인됩니다. 3. 왼쪽손을 꽂았던 둥근 홈이 파여 있습니다. 하단부가 정연하게 다듬어진 데서 무릎을 따로 제작하여 결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조각승 20220125_04<4. 여래상 머리편>

따로 만들어 붙인 나발은 거의 떨어져 나갔습니다. 귀 부분에는 따로 만든 귀를 고정했던 못이 남아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보살상의 몸체편과 무릎편, 여래상의 머리편입니다. 이 편으로는 원래 모습을 가늠하기 어렵지만 조선후기에 나무를 결합해서 만든 접목조 방식의 목조 불상 내부 구조를 살필 수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조각승 20220125_05<29. 내부에 인도 고대 문자를 써넣은 보살상, 목조보살입상편,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나무로 만든 이 보살상 내부에는 먹으로 쓴 범자가 있습니다. 인도 고대 문자인 산스크리트어로, 글자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습니다. 이 범자들은 조선 후기 불교의식집인 <조상경>에 수록된 오륜종자(五輪種子)인 ‘암’, ‘람’, ‘밤’, ‘함’, ‘캄’입니다. 각 범자는 방위와 신체를 상징합니다. 불상 안쪽에 범자를 써넣는 것은 불화에서 부처 신체의 각 부분에 오륜종자를 포함한 각종 범자를 써넣어 상징성을 강화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승려 장인으로 추정되는 제작자가 상을 만들면서 적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조각승 20220125_06<30. 나비장으로 표면을 연결한 검은 옻칠의 지장보살상, 목조지장보살좌상,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조선후기에는 전란으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이들의 명복을 빌고자 많은 사찰에서 명부전을 지었으며,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상을 봉안했습니다. 이 지장보살상은 머리에 두건을 쓰지 않은 민머리이고 검은 옻칠의 표면이 눈에 띕니다. 금박이 벗겨진 상 표면에는 나비장으로 목재를 연결한 흔적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불상 내부를 연결하는데 나비장을 사용했으나 후기에는 이처럼 바깥으로 드러나게 연겨래 제작하기 편리한 방향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떤 연유로 금박이 거의 벗겨진 채 전해졌는지 알 수 없으나 금박을 입히기 전 옻칠 단계의 불상 모습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조각승 20220125_07<31. 여러 나무를 결합하여 만든 목조불상, 목조여래좌상,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여러 편의 나무를 결합해서 만드는 접목조 방식으로 제작된 불상입니다. 이 불상은 얼굴, 머리 뒤로 이어지는 몸, 무릎을 각각 따로 만들어 접합했습니다. 앞으로 튀어나온 무릎부분은 ‘ㄷ’자 모양의 거멀쇠를 사용하여 상체와 연결했고, 바닥판에는 못 여러 개를 박아 몸체와 고정했습니다. 상체의 옷 주름은 물결치듯 유려하고 변화가 풍부한 반면, 하체의 옷 주름은 비교적 간략합니다. 지긋이 관조하는듯한 얼굴 표정과 둥글둥글한 몸의 조형성이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을 줍니다. 조성 발원문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조선 후기 조각승의 솜씨로 보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목조불상 완성되기까지
나무로 불상을 만들 때 나무 한 개로 만들 수도 있고(통목조 방식), 나무 여러편을 연결해서 만들기도 합니다. (접목조 방식). 후자의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상의 형태를 정하고 나무를 준비합니다. 일반적으로 세 개 이상의 나무 부재를 연결해 불상을 만들었습니다. 몸체 내부는 나무의 뒤틀림을 방지하고 복장물을 안치하기 위해 깊게 파냈습니다. 손이나 귀, 바닥판 등은 따로 만든 다음 몸체에 결합했습니다. 나무를 연결할 때는 접착제나 쇠못을 주로 이용했습니다.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은 다음 옻을 올리고, 금박을 입히면 불상 제작이 마무리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18세기 이후 사회가 안정되면서 불상 제작 수요가 줄어들고 조각승의 활동영역은 크게 줄어들었고 기존에 있는 불상을 수리하고 다시 도금하는 작업이 많아졌다. 이런 작업들을 불화를 그리는 승려들이 주관하기도 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조각승 20220125_19<32. 의천이 수리한 목조불상, 목조여래좌상, 의천 중수, 조선 16세기 후반 조성 1704년 중수, 국립중앙박물관>

이 불상은 언제 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무릎 폭과 어깨가 좁고 긴 허리에 늘씬한 모습은 15세기 불상의 특징과 비슷하고, 허리에 띠 매듭이 없고 불상 밑바닥에 넓은 판을 대는 방식은 조선후기 불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16세기 후반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처음 제작될 때의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1704년 승려 장인 의천이 중수하며 적은 글이 확인되었습니다. 이처럼 불상을 만든 다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수리를 하여 오래 보존되도록 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조각승 20220125_20<33. 불상을 수리하며 적은 글, 목조여래좌상 중수 발원문, 조선 1704년,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1704년 금을 다시 입혔다고 적은 발원문입니다. 의천이라는 승려 장인 이름과 함께 개금불사에 필요한 황금과 오금(烏金)을 시주한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조각승 20220125_21<34. 취겸이 조성하고 법총이 중수한 관음보살상, 목조관음보살좌상, 취겸 등 8명이 조성, 법총 등 2명이 중수, 조선 1763년 조성, 1855년 중수, 국립중앙박물관>

머리에 높은 보관을 쓴 관음보살상입니다. 머리와 몸체는 한 나무로 만들었으며 머리 위 보계와 양손 그리고 밑판을 따로 만들어 결합했습니다. 몸체 내부는 나무 속을 파서 만들었기에, 머리 안쪽에도 복장물이 들어 있습니다. 보살상을 처음 만들며 적은 글과 수리하면서 적은 글이 모두 발견되어 1763년 취겸을 비롯한 조각승 8명이 조성했고, 90여 년이 지난 1855년 법총과 혜호가 수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법총과 혜호는 19세기에 불화를 그리던 화승입니다.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이처럼 불상을 새로 고치거나 금을 입히는 개금을 할 때 화승이 이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조각승 20220125_22<조성발원문, 35. 관음보살상을 조성하고 수리하며 넣은 글, 목조관음보살좌상 발원문, 조선 1763년, 1855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조각승 20220125_23<중수발원문>

흰 종이에 먹으로 1763년 처음 보살상을 만들 때 참여한 사람들 명단과 그들의 바람을, 푸른 비단에는 붉은 글씨로 1855년 다시 수리하며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과 바람을 적었습니다. 중수에 임한 이들의 마음을 발원문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새롭게 고쳐 봉안하다.
목조불상은 대개 50~80년을 주기로 보수했습니다. 다시 고치고 표면에 금을 입히는 승려 장인의 경건한 마음가짐은 불상을 새로 조성할 때와 다름없었습니다. 조선 후기인 17세기부터 18세기 전반까지는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불상을 새롭게 조성하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그 뒤에는 새로 만들기보다 수리하고 표면에 금을 다시 입히는 불상 중수가 더 많았습니다. 새로운 불상 제작 수요가 줄어듦에 따라 조각승의 활동 영역은 급격히 줄어 들었고, 불화를 그리는 화승이 불상을 고치거나 만드는 일이 잦아졌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조각승 20220125_38
<36. 나비장으로 나무를 이어 만든 보살상, 목조보살입상, 조선전기, 국립중앙박물관>

제작자를 알 수 없는 조선 전기의 보살상입니다. 이 시기의 불상은 남아 있는 사례가 드뭅니다. 보살상 옆면을 CT로 촬영해보니, 앞뒤판을 결합할 때 나비 모양 부재인 나비장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내부를 나비장으로 결구한 것은 조선전기 불상 제작 방식입니다. 풍성한 치마가 여러 겹 우아하게 몸을 감싸고 어깨에서 팔로 마치 숄처럼 천의를 두르고 있습니다. 기품있는 조선 전기 보살의 자세에서 앞으로 나아갈 듯한 운동감이 느껴집니다. 왼팔을 덮은 천의 끝자락은 나무가 아닌 삼베로 덧대어 보완한 것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조각승 20220125_37
<37, 나무로 만든 다음 흙으로 세부를 표현한 관음보살상, 소조관음보살입상, 조선전기, 국립중앙박물관>

얼굴 표현이나 중앙에 원형 꽃무늬 장식이 있는 단순한 형태의 가슴장식은 조선 전기 보살상의 특징입니다. 나무 부재를 못으로 연결하여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 흙으로 형태를 잡은 다음 옻칠과 금박을 입혀 제작했습니다. 양손은 따로 만들어 구멍에 끼워 넣었습니다. 배 앞부분의 옷주름 일부와 양옆으로 뻗치는 옷자락 중 오른쪽 부분은 나무로 만들어 연결했습니다. 제작자를 알 수 없는 상이지만 나무와 흙을 모두 자유자재로 다룬 빼어난 솜씨를 엿볼 수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조각승 20220125_36
<38. 나무로 만든 다음 흙으로 세부를 표현한 지장보살상, 소조지장보살입상, 조선전기, 국립중앙박물관>

현재 남아 있는 사례가 매우 드문 조선 전기 소조지장보살상입니다. 제작연대, 발원자와 제작자 등의 정보를 담은 복장물이나 관련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옆의 관음보살상과 마찬가지로 못으로 연결하여 속이 빈 목심을 만들고, 흙으로 지장보살상의 형태를 만들었습니다. 오른손은 높이 들어 올리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앞으로 내밀었는데, 지장보살을 상징하는 지팡이인 석장과 보배구슬을 들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관음보살상과 이 지장보살상은 아미타여래상의 좌우에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석(zeolite)는 경주 인근 지역에서 주로 산출되는 돌이다. 입자가 작교 표면이 매끄러우면서 단단하고 가벼워 불상의 재료로 많이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불석으로 만든 불상은 재료의 산출되는 경주 인근에서 제작되어 봉안할 사찰로 옮겨졌다. 해남 대흥사 석조천불좌상의 사례로 볼 때 경주 기림사에서 제작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조각승 20220125_08<39. 불석으로 반든 관음보살상, 석조관음보살좌상, 조선 전기, 돌(제올라이트), 국립중앙박물관>

비교적 조각하기 쉬운 무른 재질의 돌인 불석으로 화려한 영락과 옷주름, 보관을 정교하게 표현했습니다. 몸체 내부는 마치 목조불상처럼 깊게 파서 복장물을 넣을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높은 보관은 따로 만든 다음 머리 위에 씌웠습니다. 이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 보살상에서 보이는 높은 보관을 재현한 것입니다. 나무로 양손과 무릎 안쪽에 흘러내린 옷 주름을 만들어 몸체에 결합했는데, 이 옷 주름은 부식이 심해 2014년에 복원했습니다. 돌과 나무를 자유자재로 이용한 제작자의 능숙한 솜씨가 돋보이는 조선 전기 석조관음보사랑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조각승 20220125_09<40. 불석으로 만든 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 조선 17세기 후반, 돌(제올라이트), 국립중앙박물관>

경상북도 경주 일대에서 발견되는 무른 석재인 불석으로 만든 여래좌상입니다. 불석은 백색을 띠며 입자가 작고 표면이 매끄러워 ‘옥석’으로도 불렸는데, 석질이 무른 덕에 세밀한 조각이 가능했습니다. 조선초기부터 불상 제작에 불석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 17세기 이후에는 조성 살례가 급격히 늘어납니다. 이 불상은 둥글고 높은 머리와 처진 어깨, 높은 무릎, 편평한 면이 강조된 옷 주름 표현이 특징입니다. 불석제 불상 조각에 매우 능한 조각승 승호가 17세기 후반 무렵에 조성한 불상과 매우 유사하며, 이 불상 역시 승호 또는 그와 관련된 조각승이 만든 것으로 추정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조각승 20220125_10<41.일본 화가의 눈에 비친 대흥사 승려, 조선표객도, 우키다 잇케이, 일본 에도 1838년, 종이에 엷은색, 한림대학교박물관>

일본 화가 우키다 잇케이가 1818년 1월 쓰시마저에 갔을 때 표류하다 일본에 머물렀던 대흥사 승려들을 만났고 20년 뒤인 1838년 11월에 그떄의 기억을 되살려 그린 그림입니다. 화면 위쪽에 대흥사 승려들과 운송하던 천불상의 일부로 추정되는 불상들이, 아랫쪽에 흰옷을 입은 뱃사공 둘이 있습니다. 짧은 편지글은 조선 승려가 우키다에게 쓴 답장인데, 어떤 제안을 완곡히 거절하는 내용입니다. 아마도 불상과 함께 일본에서 지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조선표객도>는 대흥사 천불상이 일본에 표류한 사실을 뒷받침하면서, 일본 화가의 눈에 비친 조선 승려 장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매우 드문 자료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조각승 20220125_11<42. 일본에 표류했다 극적으로 돌아온 천불상, 대흥사 석조천불좌상, 현정 등 44명, 조선 1817년, 돌(제올라이트), 해남 대흥사>

1817년 현정을 비롯한 서울, 영남, 전라 지역 승려 44명이 협력하여 경주 일대에서만 채취되는 불석으로 만든 천불상입니다. 불타 버린 해남 대흥사 천불전을 재건하려고 승려 윤우가 현장과 다른 승려 장인들을 이끌고 경주 기림사에서 조성했습니다. 불상을 만든 다음 대흥사로 옮기던 중 바닷길에서 예기치 않게 표류하여 일본에 7개월 동안 머물다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대흥사 석조천불좌상은 19세기 초 여러 지역 조각승의 협력 양상, 불상 재료의 산출과 수급 과정, 일본 표류와 귀환 과정 등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좋은 돌에 대한 열망
경상북도 경주 인근 지역에서는 ‘불석’이라불리는 제올라이트(zeolite) 재질의 돌이 많이 산출되었습니다. 입자가 작고 표면이 매끄러우며 흡착력이 좋은 불석은 단단하지만 가볍고 조각하기 쉬워 불상 재료로 애용되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불석제 불상 조각에 능한 승려 장인도 등장합니다. 조각승 승호가 대표적입니다. 목조나 소조불상은 대부분 가까운 곳에서 구한 재료로 만들었으나 특정 지역에서만 나는 불석과 같은 재료로 불상을 만든 뒤 봉안할 사찰까지 옮긴 사례도 있었습니다. 주문 제작이 끝난 다음 바닷길로 운반하던 중 멀리 일본까지 표류했다 돌아온 대흥사 천불의 사연은 원하는 재료를 구하기 위해 애썼던 승려의 마음을 전해줍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조각승 20220125_12<43. 조각승 진열이 만든 관음보살상, 목조관음보살상, 진열 등 12명, 조선 1720년, 국립중앙박물관>

1720년 진열과 태원을 비롯하나 조각승 열두 명이 조성한 관음보살상입니다. 불상 조성을 주도한 진열의 이름이 발원문 중 조각승 명단 가장 앞에 적혀 있습니다. 진열 앞에는 ‘상(上)’, 두번째로 적힌 태원의 이름 앞에는 ‘부(副)’가 붙어 있어서 조각승들의 위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온화한 얼굴에 비교적 긴 상반신의 신체 비율은 1720년대 초반에 제작한 다른 불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귓볼을 타고 내려온 머리카라 두 줄이 어깨 위에서 원을 겹쳐 그리며 세 가닥으로 늘어지는 모습은 그가 조성한 다른 보살상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진열은 18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조각승으로, 앞 시기 조각승이 이룩한 불상 양식을 응용해 다양한 불상을 만들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조각승 20220125_13<44. 관음보살상을 조성하며 넣은 글, 목조관음보살 발원문, 조선 1720년, 국립중앙박물관>

운흥사가 두곳으로 갈라진 뒤 나한상을 고쳐 새로 조성할 때, 관음불상 한 구를 함께 만들어 절의 동남쪽 법운암에 봉안했다는 내용의 글입니다. 진열로 시작되는 조각승 집단을 ‘조화(雕画)라고 표현했습니다. 진열과 태원을 비롯한 일성, 치상, 처림, 청휘, 관성, 수영, 운익, 옥총, 일호, 취상 등 조각승 열두 명의 이름이 차례로 적혀 있습니다. 승려 석만은 불상 조성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과 모든 중생이 올바른 깨달음을 이루기를 염원하는 내용을 함께 적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조각승 20220125_14<45. 화승이자 조각승 취겸이 만든 관음보살상, 목조관음보살좌상, 취겸 등 7명, 조선 1766년, 국립중앙박물관>

1766년 취겸 등 승려 장인 일곱 명이 조성한 관음보살상입니다. 발원문에 취겸은 ‘증명을 겸한 용안’이라 적혀 있습니다. 용안(龍眼)은 단청이나 불화를 그리는 승려인 화승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용면(龍眠)을 표기하려던 것 같습니다. 증명(證明)은 불상이나 조성이 교리에 맞는지 살펴보고 복장 의례를 총괄하는 스님입니다. 불상과 불화를 만든 승려 장인 중에는 제작자뿐만 아니라 증명을 겸할 정도로 그 역할ㅇ르 확장하기도 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조각승 20220125_15<46. 관음보살상을 조성하며 넣은 글, 목조관음보살좌상 발원문, 조선 1766년,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1766년 관음보살상과 법당에 봉안할 불화 3점을 함께 조성하며 적은 글입니다. 불사에 참여하며 다른 역할을 맡은 승려와 불상을 제작한 승려 장인 일곱 명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발원문 첫머리에 불사에 임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드러나 있습니다. “평소 발원을 하려면 마음을 부처님께 모아 먼저 그 마음을 재계한 다음 삼엄을 맑게 해야 합니다. 물속의 달처럼 청정한 도량에서 허공같은 마음으로 조성하니, 그것이 곧 불상이나 불화로서 절집의 주인이라 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과학의 눈으로 들여다 본 불상
오랜 세월을 견뎌 낸 불상에는 수많은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최근 컴퓨터 단층촬영과 같은 과학 기술에 힘입어 불상 내부의 비밀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나무로 만든 불상은 어떻게 나누고 연결했을까요? 상 산의 복장물은 어떻게 봉안했을까요? 조선시대 불상 제작 당시 조각승의 생생한 손길을 과학의 눈으로 들여다 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조각승들은 불상 뿐만 아니라 사찰에서 필요한 다양한 물품을 제작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전란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명부전(지장전)이 많이 조성되었다. 지장전에서 볼 수 있는 시왕상과 동자상 등이 당시 조각승들이 제작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외에도 국왕이나 부처를 상징하는 전패나 불패, 개인적인 용도로 휴대하는 작은 불감 등도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조각승 20220125_01<47. 조각승 현윤이 만든 아미타삼존상 불감, 목조아미타삼존불감, 현윤, 조선 1637년, 동국대박물관>

문을 여닫을 수 있게 만든 작은 휴대용 불감입니다. 가운데에 아미타여래상을, 그 양쪽에 보관을 쓴 관음보살상과 합장한 지장보살상을 모셔습니다. 1637년 8월에 화원 현윤이 제작했고 풍배, 성규 등이 대시주로 참여했습니다. 현윤은 17세기 전반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활동한 조각승으로 청헌, 청허 등과 함께 작업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조각승 20220125_17<48. 연꽃을 잡은 동자를 새긴 작은 받침대, 목조대좌, 조선 후기, 국립중앙박물관>

연꽃과 노니는 두 동자가 조각된 원통 모양 받침대입니다. 통나무를 깎아서 만든 것으로 무엇인가를 올려 놓을 수 있도록 윗면에 편평한 넓은 면을 만들었습니다. 뒷면은 속을 깊게 파냈습니다. 파란 물결 위에 솟아오른 연꽃 좌우에는 동자둘이 연봉오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상은 사찰의 불단이나 불교공예품에서 주로 보이지만, 목포 <달성사 명부전 지장보살좌상>과 같이 목조대좌에서도 나타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조각승 20220125_16<49. 불전 위쪽에 매달았던 등잔, 봉황 모양 등잔,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불전 천장 또는 닫집 부분에 매달아 내부를 장엄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봉황 모양 등장입니다. 등 위에 얕게 홈을 파서 등잔을 얹었습니다. 날개를 펼쳐 날면서 두 발을 오므려 무언가를 잡으려는 자세를 실감나게 표현했습니다. 오므린 두 발의 발톱 사이에는 구멍이 있어 원래 무엇인가를 쥐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1621년 중건한 강화도 전등사 대웅보전 닫짐에 달린 봉황은 발톱에 여의주를 쥐었는데, 이 봉황도 여의주와 같은 것을 잡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상상의 새인 봉황을 능숙하게 표현하나 승려 장인의 기량을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조각승 20220125_32
<50. 명부전에서 시왕상을 모시는 동자상과 동녀상, 목조동자입상과 목조동녀입상,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조선후기 동자상과 동녀상은 주로 저승세계를 상징하는 명부전에서 시왕상 옆에 서 있습니다. 이는 동자와 동녀가 죽은 자를 심판하는 시왕의 시종 역할을 한다는 경전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조선 후기 승려 장인은 명부전의 주존인 지장보살상을 만들면서 동자상을 비롯한 판관상, 사자상, 장군상 등을 한꺼번에 제작했습니다. 명부전과 응진전에 모시는 상들은 다른 전각보다 수량이 많고 다양한 표현이 가능했으므로 승려 장인은 예술적 기량을 마음껏 발휘해서 이 상들을 만들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승려장인 조각승 20220125_31
<51. 나한전에 모셨던 제석천상, 목조제석천의좌상,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의자에 앉아 있는 제석천상으로 나한전 또는 응진전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 후기 나한전에는 주존인 석가모니삼존불 좌우로 십육나한과 제석천 한쌍이 좌우에 놓이고, 이어 일반적으로 판관과 사자(使者), 장군이 배치되었습니다. 나한전을 구성하는 존상들은 불사가 있을 때 한꺼번에 제작됩니다. 따라서 제석천을 포함한 나한전 상들에는 중아에 봉안된 불상을 조성한 조각승의 조각적 특징이 상당 부분 그대로 반영됩니다. 특히 얼굴에서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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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소원하는 글을 담은 통, 목조소통, 조선 17세기, 통도사 성보박물관>

소통(疏通)은 소망을 담은 글을 적어 넣어두는 통으로, 소대(疏臺)라고도합니다. 소통은 불단에 올리는 의식구이지만, 불패, 촛대와 함께 불전을 장엄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부처를 봉안한 불단은 종교적 상징과 구원의 이미지를 입체적으로 나타내려고 다양한 도상과 무늬로 장식되는데, 소통에는 불단에 새겨진 도상과 무늬가 동일하게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소통은 장엄구로서 불단과 함께 불교의 상징성을 보여주며, 섬세하고 다양한 조각과 화려한 채색 등으로 조선 후기 불교 목조공예를 대표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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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세상 가등한 불교의 세가지 보물의 덕성을 기리는 불전 장엄구, ‘시방삼보지존’이 쓰여진 목조불패, 조선 17세기 후반, 국립중앙박물관>

유교의 위패와 비슷하게 부처 이름을 써넣은 장엄구입니다. 연꽃받침 위에 몸체를 올리고 가운데에 틀을 마련하여 ‘시방삼보자존(十方三寶慈尊)’을 새겼습니다. ‘시방’은 열가지 방향을, ‘삼보’는 불.법.승을, ‘자존’은 자비로운 존재를 뜻합니다. 세상에 가등한 불교의 자비로운 세 가지 보물을 기린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뒷면에는 산송에 있는 전각과 그 주위로 봉황, 용, 호랑이 등을 조각했습니다. 바위산의 형태가 완전하지 않지만 수미산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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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보리 등의 승려 장인이 왕, 왕비, 세자를 위해 만든 전패, 목조 전패, 보리 등 3명, 조선 1701년, 국립중앙박물관>

국왕, 왕비, 세자를 위해 절에 봉안한 삼전패(三殿牌) 가운데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世)’라고 적은 전패입니다. ‘주상전하수만세’ 전패의 받침 안쪽에 1701년 9월부터 10월까지 승려 장인 보리, 정윤, 민성이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모난 받침대 위에 따로 만든 몸체와 머리 부분을 끼워 완성했습니다. 몸체는 조각으로 문양을 표현했고 뒤쪽은 그림으로 장식했습니다. 국왕의 전패에는 위엄있는 용을 표현한 반면 이 전패와 함께 만들어진 ‘세자저하수천추’를 적은 전패에는 모란을 새겨 위계에 차이를 두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무엇을 만들어 드릴까요?
사찰에는 근엄하고 위엄 있는 부처와 보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승 세계를 관장하는 명부전에서는 어린아이 모습을 한 천진난만해 보이는 동자상도 만날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전란으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이들의 명복을 빌고자 많은 사찰에서 명부전을 지었습니다. 동자상은 사람이 죽은 다음의 세계를 관장하는 시왕상을 보좌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한편 멀리 이동하거나 개인 수행을 위한 용도로 추정되는 작은 불감(佛龕)도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이처럼 승려 장인은 봉안 목적과 공간을 고려하여 불상과 보살상뿐만 아니라 다양한 조각상과 공예품을 제작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상과 불화를 만든 공간
불상과 불화 조성은 오랜 수련으로 실력을 갖춘 승려 장인을 초빙하는 일로 시작되었습니다. 조각승과 화승은 불사가 있는 사찰의 기존 공간을 이용하거나 때로는 임시 작업장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함께 작업하는 과정에서 수조각승과 수화승의 기술과 작품은 후배나 제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전해졌습니다. 부처의 형을 표현하는 것은 일반 조각이나 회화와는 다른 매우 신성한 작업이었습니다. 불사 현장에 모여든 승려 장인은 필요한 다른 소임을 맡은 승려들과 함께 신성한 예배상을 조성할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작업 전에는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작업 중에는 바깥 출입을 삼갔습니다. 형상을 완성한다고 모든 과정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법당에 봉안하는 예배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불교 의식집인 <조상경(造像經)>의 내용에 근거하여 불복장(佛腹藏) 의식을 마무리하면 마침내 불상과 불화는 종교적 예경의 대상으로 생명력을 갖추게 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조각승의 스튜디오
조선후기로 갈수록 조각승은 불상의 재료로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와 흙을 선호했습니다. 조선 전 시기에 걸쳐 널리 유행한 목조불은 통목조보다 여러 부재를 연결하는 접목조방식이 더 많습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불상을 제작하기 위한 조각승의 선택이었습니다. 때로는 특정 지역에서만 나는 불석(沸石)과 같은 재료로 불상을 만들고자 해당 산지에서 직접 만든 다음 봉안할 사찰로 옮겨 오기도 했습니다. 불상의 조성은 수조각승을 중심으로 여러 명이 함께 하였으며, 이들은 성스러운 부처와 보살을 정성스레 만들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3. 위키백과, 2023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조선의 승려장인] 움직이는 공방

불상나 불화 등을 조성하는 불사는 사찰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승려 장인들은 불사가 있는 사찰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매번 작업을 위해 먼길을 떠났으며 때로는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던 승려와 함께 모여 협업을 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서로의 개성이 영향을 주고 받아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내었다. 조선시대 승려 장인들은 다양한 표현으로 불렸는데 그림을 그리는 관직과 같은 이름인 ‘화원’이 가장 많이 쓰였다. 당시 전문적인 기술이나 예술적 소양이 높아던 승려 장인들은 불사 뿐 아니라 성곽을 축성, 다리의 건설 등 사회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많은 발자취를 남겨 놓고 있다.

상주 남장사 불사 과정을 기록한 <불사성공록>에는 전국에서 초빙된 70여 명의 승려 장인들이 작업했던 내용들을 세부적으로 기록해 놓고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이동하는공방 20220125_13<15. 상주 남장사 불사 과정을 기록한 책, 불사성공록(佛事成功錄), 조선 1788년, 종이에 먹, 상주 남장사, 보물>

해남 대흥사의 13대 강사 중 한 사람인 영파 성규가 1788년 상주 남장사에서 있었던 불사 과정을 기록한 책입니다. 서울.경기 지역의 화승 상겸과 문경 대승사를 권역으로 활동하던 대승화공 홍안, 전라도 지역의 호남화공 쾌윤 등 70여 명이 함께 모여 20여 일에 걸쳐 대형 불화인 괘불과 지장보살도, 시왕도를 그리고 명부전에 빠진 상을 보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사를 기획해 실행하는 과정과 지역을 넘어선 화승의 협업, 동참한 이들의 노력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이때 절에서 의견이 하나로 모여 괘불을 만드는 큰 일을 시작해 장인 70여 명을 모아 장면을 나누어 그리게 하였다. 호탐의 쾌윤과 사불산의 홍안은 유명회(幽冥會)를, 경성의 상겸은 영산회(靈山會)를 그렸는데, 4월 초파일 우리 부처님이 탄생하신 날 붓을 들어 20일에 붓을 놓았다.” – <불사성공록>(1788) 중에서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영사 목조 전패와 불패>에는 17세기 금강산 여행을 떠났던 승려 장인들이 여행 도중 울진 불영사의 부탁을 받아 잠시 머무르면서 불사를 지원했던 내용을 기록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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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영사 목조 불패> <16. 화승 철현이 잠시 머물며 만든 전패와 불패, 불영사 목조전패와 목조불패, 철현 등 3명, 조선 1678년, 울진 불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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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영사 목조 전패>

포항 오어사의 화승 철현, 양산 통도사의 영현과 탁진은 함께 금강산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도중에 울진 불영사에서 잠시 머물렀는데, 주지인 혜능 스님이 전각에 모실 불전패(佛殿牌) 제작을 요청했습니다. 큰 전패는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작은 불패는 불보살상의 이름을 새겨 법당에 새워 두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전패 뒷면에는 사찰이 만세토록 보존되기를 기원하며 불패 세 점과 전패 세 점을 조성했다고 적혀 있지만 지금은 두 점만 전합니다.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매순간 처한 상황에 맞춰 불교미술품을 발원하고 제작했던 승려 장인의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경상도 운제산 오어사의 철현과 영축산 통도사의 영현, 탁진 등이 함께 바닷길을 따라 풍악(楓嶽, 금강산)을 향하던 중 강원도 불영사를 방문했는데, 경관이 매우 뛰어나고 자취가 성스러워 마음이 혼연히 기뻐 여름 한 철을 머물게 되었다. ~ “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움직이는 공방, 이동하는 승려
승려 장인에게는 요청된 상황에 따르는 ‘장인(匠人)’이라는 정체성과 전 공정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작가’라는 정체성이 함께 있습니다. 불사가 있는 사찰을 중심으로 시주자와 재료가 모이고 불사를 감독하고 증명하는 절차가 진행되었기에 승려 장인이 불사 장소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승려 장인의 작업 공방은 불사가 있는 사찰에 차려졌는데, 이때 누각이나 암자를 임시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때로 근거지에서 불화나 불상을 조성한 후 봉안처로 보내기도 했고, 여정 중에 요청을 받아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승려 장인은 매번 작업 환경이 바뀌는 상황을 견뎌내며 자신을 부르는 곳으로 달려갔고, 이들이 자리한 곳이 곧 부처의 세계가 만들어지는 공방이 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길 길위를 걷는 승려
승려 장인은 근거지가 되는 사찰과 자신이 속한 승려 문중이라는 인적관계를 기반으로 작업했기에 활동 범위가 넓었습니다. 본디 승려는 머물되 항사 떠날 수 있는 수행자의 삶을 살지만, 특히 승려 장인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불사가 있는 곳이라면 먼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던 승려 장인이 모여 협업하며 개성과 개성이 만나 영향을 주고받고,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남장사 십육나한도>는 비슷한 내용을 그렸지만 지역에 따른 화풍이 반영되어 그 차이점을 살펴볼 수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이동하는공방 20220125_11<17. 서로 다른 지역에서 활동한 화승이 함께 완성한 십육나한도, 남장사 십육나한도, 조선 1790년, 비단에 색, 상주 남장사>

중앙박물관특별전 이동하는공방 20220125_12<남장사 십육나한도>

두폭의 그림은 나한을 표현했지만 서로 다르게 그려졌습니다. 경상북도 지역에서 활동한 영수.위전과 서울.경기 지역에서 활동한 상겸 등 다른 지역에서 활동한 화승 집단이 나누어 그렸기 때문입니다. 영수와 위전이 그린 나한도에는 오색구름과 꽃으로 둘러 싸인 산을 배경으로 바위에 나한이 앉아 있는데, 강렬한 채색의 대비가 돋보입니다. 상겸 등이 그린 나한도에는 바위 사이로 자라는 소나무 옆에 섬세한 필치로 나한을 그렸습니다. <남장사 십육나한도>는 1788년 <불사성공록>에 기록된 불사 이후에도 서울.경기 지역에서 활동한 경성화공과 문경 대승사 지역에서 활동한 대승화공이 협업한 사례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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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화승 축연이 그린 금강산을 유람하는 나한, 통도사 십육나한도(제10존자), 축연 등 2명, 1926년, 비단에 색, 통도사 성보박물관>

금강산 구룡폭포 앞에 앉아 있는 나한을 그린 특이한 그림입니다. 이러한 화면 구성은 불사를 따라 이동하는 승려 장인의 삶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이 그림을 그린 축연은 1915년 ‘금강산 유점사의 화승’으로 신문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했습니다. 1910년대 중반 이후 금강산 관광이 유행하고 철로가 개통되면서 관광안내서와 사진첩이 간행되었습니다. 축연은 당시 유통되던 시각 이미지를 자신의 작품에 응용했습니다. 나한보다 화면 중앙의 폭포를 강조한 파격적인 구상이 흥미롭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승려 장인, 그들의 이름을 찾아서
조선시대 승려 장인은 ‘화원(畵員)’을 비롯해 ‘화사(畵師), ‘양공(良工, 기술이 뛰어난 장인)’, 금어(金魚, 단청이나 불화를 그리는 승려)’ 등 다양한 표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중에서 조선의 승려 장인을 일컫는 호칭으로는 ‘화원’이 가장 많이 쓰였고, 조각승과 화승을 따로 구분해서 사용한 공식 명칭은 없는 듯합니다. 다만 19세기 말 이후에는 이들을 존경하는 뜻을 담아 ‘불모(佛母)’로 부르기도했습니다. 특정 승려 장인에게는 ‘묘수장사(妙手匠師, 빼어난 솜씨의 승려장인), ‘교장(巧匠, 솜씨가 교모한 장인), ‘호선(毫仙, 붓의 신선), ‘존숙(尊宿, 본보기가 될 만한 승려)’과 같은 특별한 수식어가 붙기도 했습니다.

승려 장인의 시대
조선 후기 승려 장인에는 예배 대상인 불상과 불화를 만드는 조각승과 화승 뿐만 아니라 불전을 짓는 건축승과 기와를 굽는 기와승, 범종을 만드는 주종승(鑄鐘僧), 비석과 목판에 글을 새기는 각자승과 판각승, 목재 불구(佛具)를 만드는 목공예승 등 여러 분야가 있었습니다. 일부 승려 장인은 분야를 넘나들며 사찰 곳곳에 다양한 불교미술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비록 당시의 사회적 지위는 높지 않았지만 예배 대상을 비롯해 사찰의 상당수를 만들어 낸 승려 장인은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불교미술의 관점에서 볼 때 조선 후기는 ‘승려 장인의 시대’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조선시대 승려들은 사찰 건축 등 불사를 주도했을뿐 아니라 사회에서 필요한 분야에 적극 참여하였다. 성곽의 축성이나 다리 건설 등에서 승려 장인은 많은 역할을 했으며 수원화성을 비롯하여 전국의 읍성과 산성, 돌다리 등에 그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 이동하는공방 20220125_14<19. 승려, 성곽을 짓다, 화성성역의궤, 조선 1801년,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중앙박물관특별전 이동하는공방 20220125_15<단청에 참여한 승려 장인 명단>

조선시대 승려 장인들은 불교미술품 제작 외에 성곽이나 왕릉의 조성처럼 국가적인 공사에도 참여했습니다. 정조의 꿈이 담긴 새로운 도시 수원 화성의 축성 과정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에는 성을 쌓는데 참여한 승려 장인 73명의 이름과 거주 지역, 참여 일수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여에 참여한 여러 승려 장인 가운데 나무를 잘 다루어 편수(篇首, 책임을 맡은 기술자)가 된 강원도 김화 출신 굉흡의 활약이 주목됩니다. 그는 장안문과 방화수류정 건축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조선시대 승려 장인은 이처럼 나라의 비중있는 건축 사업에 동원될 정도로 기술과 역량을 인정받았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남북 문루는 15일 전데 단청을 시작했는데, 화공 수가 적어 분배할 수 없어서 관문을 발송한다. 경내 각 사찰에서 솜씨가 뛰어난 화승을 일일이 수색 탐방하여 오는 15일까지 공역 장소에 대기시키고, 덕사(德寺, 양주 흥국사) 화승 연흥을 도화승으로 임명하여 보내니 즉시 전교한 후 사람을 올려 보내서 지연되지 않도록 한다.” – <화성성역의궤> 권3 양주목, 1794년 9월11일(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이동하는공방 20220125_16<20. 중흥사에서 모임에 함께 한 승려들, 금란계회도, 조선 1857년, 종이에 엷은 색, 국립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 이동하는공방 20220125_17<주요 장면>

북한산 중흥사 인근 야외에서 안시윤이 벗들과 가진 모임을 그린 것입니다. 중흥사는 조선 후기에 북한 산성을 쌓은 후 승군을 총괄하는 총사령관격인 팔도도총섭(八道都總攝)이 머물던 사찰입니다. 19세기에는 추사 김정희나 다산 정약용 등 많은 문인이 중흥사를 방문하여 시를 지으며 승려들과 교유했습니다. 그림에는 안시윤을 비롯한 여러 사람과 승려들이 무리를 지어 편하게 앉아 글을 쓰고 이야기를 나구고 있습니다. 고깔을 쓰고 염주 목걸이를 한 스님 세명은 중흥사 승려 태월, 수월, 한파로 보입니다. 조선시대 문인 모임에 승려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렸음을 잘 보여주는 기록화이자 풍속화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이동하는공방 20220125_04
<21.화승 의인이 그린 선비들의모임, 을축갑회도, 의인, 조선 1686년, 비단에 색, 서울역사발물관>

청주 보살사의 화승 의인이 을축년(1625년)에 청주 지역에서 출생한 동년배 모임을 그린 그림입니다. 이 모임을 그림으로 남기자고 제안한 사람이 바로 의인입니다. 붉은색을 사용한 얼굴묘사와 길게 늘어진 옷 주름선 등은 고승의 초상화인 진영(眞影)의 표현방식과 유사합니다. 이 작품으로 불화뿐만 아니라 일반 회화까지도 승려 장인이 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화승은 동실대를 살아간 다른 신부의 사람들 모임도 화폭에 담아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이동하는공방 20220125_05
<22. 화승 혜호가 그린 삿갓쓰고 나막신 신은 소동파, 소동파입극도, 혜호,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국립중앙박물관>

화승 혜호가 그린 북송대 문인 소식의 모습입니다. 소식은 소동파라는 호로 더 유명합니다. 혜호는 19세기 경기.강원 지역에서 활동하며 금강산 일대 사찰 불사를 주로 담당했고, 다른 화승들이 잘 그리지 않는 유배 중인 소동파 그림을 모사했습니다. 아마도 김정희 제자인 허련의 그림을 옮겨 그렸을 것입니다. 당시 문예계를 이끌던 김정희는 혜호의 스승인 화담 경화 문중의 승려들과 긴밀하게 교류했고, 혜호도 김정희나 그의 제자들과 관계를 쌓았습니다. 당대 문인과의 폭넓게 교류했던 승려 장인의 작품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시대와 함께한 승려 장인
승려 장인은 출가한 수행자였지만 사회의 한 일원으로 시대가 요구하는 다양한 역할을 동시에 해냈습니다. 승려 장인이 남긴 결과물은 불상과 불화를 비롯한 사찰과 관련된 것에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나라와 관청의 부름을 받아 궁궐과 도성을 짓거나 심지어 마을에 다리를 놓는 일까지 크고 작은 일에 동원되어 전문성을 발휘했습니다. 또한 당대 문인들과 스스럼없이 교유하며 그들의 문화를 공유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내용을 표현했습니다. 속세를 떠났지만 그들은 대중과 더불어 동시대를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승려 장인은 불상이나 불화 등을 제작하는 기술자이나 예술가 역할 뿐 아니라 불사를 위한 모금활동, 전문 기술자의 초빙 및 역할 분배 등 제작자로서의 역할도 하면서 사찰건축이나 불사에 큰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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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화승 혜식 등이 그린 영취산에서의 석가모니부처 설법 장면, 영취사 영산회상도, 혜식, 조선 1742년, 비단에 색, 국립중앙박물관>

18세기 경상도 일대에서 활동했던 혜식을 비롯한 화승 일곱명이 그린 영산회상도입니다. 조선 후기 승려 추파 홍유가 쓴 <안음영취사기>에 따르면 당시 사찰의 주지였던 보안의 주도로 쇠락한 영취사를 7년에 걸쳐 재건한 후 대웅전에 봉안할 불화 네점을 조성했습니다. 새로 그린 대웅전 불화 가운데 이 불화만이 전합니다. 하단부에는 붉은 화기란을 마련해 불화를 제작한 일자와 화승, 영취사의 승려들과 시주자의 이름을 금으로 적어 놓았습니다. 불사의 성대함을 반영하듯 ‘대영산’을 그려 봉안했다고 했으며, 불화를 그린 화스의 모임을 비수갈마천의 모임이라는 뜻인 ‘비수회’ 로 기록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비수갈마천에 빗대어 종교적 위상을 높임과 동시에 장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이동하는공방 20220125_21<24. 혜식의 평생 소원이 담긴 발원문, 파계사 건칠관음보살좌상 발원문, 조선 1740년, 종이에 먹, 대구 파계사, 보물>

중앙박물관특별전 이동하는공방 20220125_20<뒷부분>

파계사 원통전 건칠관음보살좌상의 발원문으로, 관음보살상의 개금뿐만 아니라 인근 사찰과 소속 암자의 불사를 진행한 내역이 기록되었습니다. 1740년에 있었던 영조대 왕실 불사의 총감독은 도화원 혜식이었습니다. 혜식은 불보살을 그려 각각 존상을 갖추는 것이 자신의 평생 소원임을 밝히고 밀기, 명준, 위순, 성청 등 열세 명과 거의 2년에 걸쳐 인근 지역과 암자의 불상을 개금하고 불화 세트를 그렸습니다. 단순한 제작자를 넘어 평생의 소원으로 불사를 기획한 승려 장인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발원문입니다. ”도화원 혜식의 평생 소원인 불보살을 그리고 존상을 갖춘 일과 횟수를 가려 적은 기록”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중앙박물관특별전 이동하는공방 20220125_22<25.화승 철유가 자신을 그린 그림, 자화상, 철유, 20세기 초, 비단에 엷은색, 간송미술문화재단>

한 승려가 어딘가를 바라보며 고요히 앉아 있습니다. 먼 곳을 응시하는 눈매는 수행자의 내적 경지를 드러내는 듯 합니다. 이 그림은 근대 화승인 철유의 자화상입니다. 철유는 불화 뿐 아니라 산수화, 신선이나 불교 고승을 그린 그림에도 뛰어나 명성을 얻었고, 근대 최고 화승으로 당시 신문에도 몇 차례 소개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현재 전하는 유일한 화승의 자화상입니다. 철유는 법식을 갖춘 노승 혹은 화승의 모습이 아닌 편안한 노인의 모습으로 자신을 담담히 표현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화승 철유(1851~1971년)는 어떤 인물일까요?
속세의 성은 김씨이고 섭호는 석용입니다. 건봉사 화승으로 알려진 혜호에게 가르침을 받아 약 40년간 불화를 제작했습니다. 실력이 뛰어나 수화승으로 활약하며 30점 가량의 불화를 남겼고, 일제강점기에는 축연과 함께 당대 최고의 화승으로 불렸습니다. 금강산화파의 대표 화승으로서 불화와 산수화에 모두 뛰어났다고 합니다. 철유는 금강산 표훈사, 신계사, 유점사를 비롯한 많은 사찰의 불화를 그리고 불상을 개금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제작자에서 기획자로
승려 장인은 제작자뿐만 아니라 시주자나 화주로도 참여하는 등 하나의 불사에서 두가지 이상의 소임을 맡기도 했습니다. 여러 불사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불교 교리와 도상을 깊이 이해했기에 불상이나 불화의 내용이 맞는 지 살펴보는 증명으로도 초빙되었습니다. 옛 불화와 불상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수행하던 이들이 어느새 화가가 되고 조각가가 되어 후배와 제자들을 길러 냈습니다. 또한 점차 제작자에서 불사를 일으키는 기획자가 되어 후원을 하고 사원 중수에도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사의 소임, 인연을 맺은 사람들
소임은 맡은 직책이나 임무를 뜻합니다. 사찰 내에서 위계에 따라 혹은 불사가 있을 때마다 승려는 그에 적합한 다양한 역할, 즉 소임을 다했습니다. 불상과 불화를 만드는 것 역시 승려 소임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교리를 잘 아는 경험 많은 승려는 법식대로 바르게 진행되는지 감독하는 역할을 하고, 어떤 승려는 속세를 다니며 시주를 유도하고 동참자를 모으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불사를 위해 젓가락을 준비하는 사소한 일부터 전각을 관리하는 일까지 모두 소임의 하나입니다. 크고 작은 역할의 구분 없이 정성스럽게 임한 이들의 마음은 만물에 차별을 두지 않는 부처의 가르침과도 맞닿아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