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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보물), 손기정이 기증한 그리스 투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보물)이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한 기념으로 받은 것을 기증한 것이다. 기원전 6세기 경 그리스 코린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투구를 썼을 때 눈과 입이 나오고 콧들을 가리도록 만들어졌으며 뒷부분은 목까지 보호하도록 되어 있다.

보물 904호 02-20200212
<청동 투구, 그리스 기원전 6세기, 보물>

보물 904호 03-20200212
<옆에서 본 모습>

손기정(孫基禎,1912~2002) 선생은 마라톤 선수로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대회에 참가하여 세계 기록을 세우며 우승하였다. 선생이 기증한 그리스 투구는 당시 우승자에게 수여한 부상품이었다. 그런데 올림픽 경기 우승자에게는 부상을 줄 수 없다는 규정에 의해 당시에는 전달받지 못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50년이 지난 1986년, 베를린올림픽 개최 50주년 기념행사에서 이를 수여받았다. 1987년 이 투구는 보물 제904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선생은 ‘이 투구는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것’ 이라는 뜻을 밝히며 투구를 국가에 기증하였다. 이 투구는 1875년부터 진행된 그리스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 발굴을 통해 발견되었다. 일체형으로 제작되었으며, 눈과 입을 제외한 머리 전체를 감싸는 형태이다. 이러한 ‘코린트 양식’ 투구는 기원전 7세기부터 코린트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머리에서 목까지의 연결이 직선으로 처리된 초기 투구보다 발달된 형태로, 머리 아래가 잘록하게 들어가고 목 부분이 나팔처럼 퍼진 모습이 특징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0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황남대총 북분 유리잔(보물), 서역에서 들어온 유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황남대총 북분 유리잔(보물)이다. 경주 신라 대릉원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되었다. 높이 7 cm, 윗부분 지름 10.5 cm 크기이다. 받침에 약간 손상이 있기는 하지만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외형이나 유리의 무늬는 한국이나 중국에서 볼 수 없는 형태로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에서 들어온 대표적인 유물이다.

보물624호 02-20200212<유리잔, 경주 황남대총 북분, 삼국시대(신라) 6세기, 보물>

OLYMPUS DIGITAL CAMERA<위에서 본 모습>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유리잔으로 아가리부분이 넓게 바깥쪽으로 벌여졌고, 몸통부분은 밥 그릇 모양으로 밑아 약간 넓어진다. 우리나라에서 잘 볼 수 없는 형태로 서역에서 전해진 유물로 보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경주 대릉원 황남대총은 천마총과 함께 70년대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신라 황금문화의 존재를 다시 한번 부각시킨 무덤이다. 왕의 무덤으로 주청되는 남분과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북분으로 구성된 무덤이다.

SANYO DIGITAL CAMERA<경주 대릉원 황남대총>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2020년
  2. 안내문, 경주박물관특별전, 2015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국보), 신라를 대표하는 걸작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明器, 국보)이다. 경주 대릉원 금령총에서 출토된 1쌍의 도기이다. 말을 타고 먼 여행을 떠나는 주인과 하인을 모습을 하고 있는데 죽은이의 영혼이 저세상으로 떠나는 모습을 잘 표현하고 이다. 두꺼운 사각형 판위에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인데 엉덩이 위에 등잔이 있고, 앞 가슴에는 물을 따를 수 있는 긴 대롱이 있고 속은 비어 있다. 신라사람들을 사후세계관, 복식, 말갖춤 등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사람의 표정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

중앙박물관에 있는 유물 중 가장 인상적인 것으로 저승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무덤 주인의 모습과 심경을 너무도 잘 묘사하고 있다.

국보91호01-20200212<말탄사람토기(주인), 국보, 삼국시대(신라) 6세기, 경주 금령총>

주인의 모습이다. 말 등에 둥근 깔개기와 가슴에는 액체를 따를 수 있는 긴 대롱이 있고 속이 비어 있어 주전자와 같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OLYMPUS DIGITAL CAMERA<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무덤 주인의 담담하고 무표정하면서도 비장함이 잘 표현되어 있다.>

국보91호02-20200212<반대편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뒤편에서 본 모습>

방울을 흔들며 주인의 영혼을 인도하는 하인의 모습이다. 머리에 띠를 두르고 어깨에 짐을 메었으며 오른손에는 방울을 들고 있다. 금령총에서 출토될 당시 앞쪽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주인을 표현한 토기와는 달리 말갖춤을 간단하게 갖추고 있다. 약간은 가벼워 보이면서도 주인과 함께 저승으로 여행을 떠나는 하인의 비장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국보91호03-20200212<말탄사람 토기(하인), 국보, 삼국시대(신라) 6세기, 경주 금령총>

머리에 띠를 두르고 어깨에 짐을 메고 있다. 오른손에는 방울을 들고 있는데, 방울을 흔드는 장면은 마치 주인의 영혼을 인도하는 하인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 보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국보91호04-20200212<반대편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금관이 발견된 경주 노동리 고분 중 금령총은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작은 규모의 고분이지만 금관을 비롯하여 기마인물형토기, 금령총 방울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금령총>

경주-대릉원-호우총-09-20220129 <경주 대릉원 노서동, 노동동 고분군>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대고려] 고려의 수도 개경

개성은 신라 때 송악군(松岳郡)으로 불렸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즉위 이듬해 (919년) 도읍을 개성으로 옮기고 개주(開州)라 불렀으며 광종 때(960년) 개경(開京)으로, 성종 때(995년) 개성부(開城府)가 되었다. 개성에는 강감찬이 1029년 완성한 도성인 나성(羅城)을 비롯하여 궁성인 반월성, 궁궐터인 만월대, 흥국사지를 비롯한 절터, 사직단, 성균관 등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다. 전성기 개경에는 10만가구가 살았다고 하며 많은 외국상인들이 벽란도를 통해 개성을 드나들었다. 서구에 알려진 코리아라는 국가명칭은 당시 고려의 국제적인 성격을 잘 보여주는 잘 보여주고 있다.

모든 이를 환영하다. 국제무역 벽란도(碧瀾渡)
다양한 물산과 사람이 드나들었던 고려의 관문, 벽란도에 도착했습니다. 예성강 하구에 위치한 벽란도는 수도 개경 으로 들어가기 위한 외항입니다. 개경과 가깝고 수심이 깊어 배가 지나다니기 쉬워, 무역항으로 크게 발전했습니다. ‘코리아Corea 라는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렸을 만큼 벽란도에는 많은 외국인이 방문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주머니 모양 주자, 중국 9 ~10세기(월주요 추정), 개성부근 출토>

가죽 물통은 말을 타고 광활한 지역을 이동하는 북방민족이 사용하던 생활 용기이다. 이 주자는 유목생활을 한 거란족이 썼던 가죽 용기를 모방해 만든 것으로, 물이나 술과 같은 액체류를 담을 때 사용하였다. 「고려사」에 요.금같은 북방민족과의 도자 교류 기록은 거의 없지만, 고려시대 무덤 부장품을 통해 국제교류의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황비창천(煌丕昌天)」이 쓰인 거울, 고려, 개성부근, 청동

파도가 출렁이는 먼 바다로 배 한척이 나아가고 있다. 배 안에 표현된 인물은 새로운 세계로 거침없이 향하던 고려인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바다는 다양한 물건이 오가는 교류의 길이지만 예상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청동 거울을 바다에 던져 넣거나 거울을 사용해 제사를 지내며 무사히 항해를 마칠 수 있도록 기원했다. “밝게 빛나는 창성한 하늘”을 의미하는 글씨 황비창천(煌丕昌天)이 거울에 써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유리 주자(Glass Ewer), 개성부근 출토, 유리>

개경의 외항인 벽란도는 낯선 용모의 외국인들에게도 열려 있었다. <고려사>에는 현종대인 1024년과 1025년 1040년에만 약 100명의 대식국(大食國), 즉 아라비아 상인이 방문했다고 한다. <쌍화점(雙花店)>을 비롯한 고려 가요에 회회(回回)아비가 운영하는 가게가 있었으며, 귀화한 무슬림이 고위 관직을 역임한 기록도 전한다. 개성 부근에서 출토된 이 주자의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지만, 형태는 이슬람교의 예배의식에서 성수(聖水)를 남는 병과도 유사하다. 고려 무덤에 부장된 수입품으로 개경의 일상공간과 외부 세계와의 교류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례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고려의 중국어 교재 <노걸대(老乞大)>, 고려 16세기 인쇄, 종이에 인쇄>

고려 후기부터 역관(譯官)들이 사용한 중국어 학습 교재다. 고려 상인 3명이 인삼 같은 고려의 특산물을 팔러 원나라 수도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에 갔다가, 원나라 물건을 사서 다시 고려로 돌아오는 여정을 담았다. 음식 주문이나 시장에서 흥정하는 법처럼 여행과 상업 활동에서 실제 겪을 만한 일들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이 <노결대>는 조선시대 16세기에 다시 찍은 판본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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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 귀화한 유지성의 묘지명, 고려, 돌>

중국 송 양주(揚州)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한 유지성(972~1039년)의 묘지명이다. 죽은지 8년 뒤에 다시 장사 지내면서 만든 이 묘지명에는 장사랑, 조의태부 등의 관직명만 나열되어 있고 귀화한 시기나 동기는 기록하지 않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물류가 국력이다.
한 나라에서 생산되는 물품은 그 나라가 가진 국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고려 종이.청자 나전칠기.인삼까지 당시 기록에 남아 있는 고려산 물건의 우수성은 중세 동아시아에서 고려가 점유했던 문화적 위치와 경쟁력을 알려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우리나라의 영문 명칭인  ”는 ‘고려’에서 유래했다. 고려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자국 언어로 고려를 불렀으며 점차 ‘코리아’ 라는 이름으로 기록된다. 코리아라는 명칭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몽골이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장악한 윈(元)대에는 마르코폴로를 비롯하여 서구인들이 중국을 많이 방문했으며 이들을 통해 고려가 서구에 많이 소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더들리의 해도첩 <바다의 신비>에 실린 한반도, 이탈리아 1646 ~ 1647년, 종이.가죽,>

옛 유럽 지도에 나타나는 우리나라의 이름은 ‘고려’의 국호에서 비롯되었다. 영국 출신으로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더들리(Rovert Dudley, 1574 ~ 1649)는 최초로 메르카토르 투영법을 써서 해도첩을 만들었으며, 한국을 반도로 표시했다. 한반도는 ‘코라이왕국(Regno di Corai)’라고 적었고 동해는 ‘코라이해’라 기록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마르티니의 <신중국지도첩>에 실린 한반도, 네덜란드, 1655년, 동판화>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인 마르티니(Martino Martini, 1614~1661년)는 1643년부터 1650년까지 중국에 머물면서 중국의 지리와 역사를 연구했다. 마르티니가 만든 이 지도에는 한국이 반도로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COREA’라는 지명도 기재되어 있다. 나라 이름 외에 ‘Pinggan(평안)’과 같은 행정구역이 중국어 발음으로 표시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타타르와 중국전도’ 속의 한반도, 프랑스 1732년, 동판화>

프랑스의 지도 제작자 당빌(1697~1782년)이 만든 동아시아 지도이다. 당빌은청제국의 지도첩인 <황여전람도(皇與全覽圖>를 바탕으로 한 중국 지도와 <조선도>에 일본 지도를 첨가해 이 지도를 만들었다. 동해안의 여백에 한반도 지역 명칭 여러 개를 표시했는데, 그중 하나가 ‘고려국’을 나타내는 ‘KAO Li KOUE’이다. 또한 고려엣 유래한 코리아를 써서 ‘ROYAUME DE COREE’로 표기하기도 했고, 제작 당시의 국가 명칭인 조선을 중국어 발음으로 읽어 ‘TCHA-SEN’이라는 명칭도 기재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9년)

고려, 코리아
오늘날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코리아Korea’라는 영문 명칭은 ‘고려인이 사는 나라’, ‘고려인의 땅’이라는 의미에서 유래 했습니다. 고려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각자 자기 나라 언어에 맞추어 고려를 불렀고, 시간이 지나 고려는 ‘코리아’ 라는 이름으로 기록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해동의 천자국, 대고려(大高麗)
고려는 <고려사>나 금석문의 기록, 황실의 제도와 문서 양식, 관제, 팔관회와 같은 제천 의례에서 보듯 고려 중심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지녔으며, 스스로 황제국가라 칭했습니다. 수도 개경을 ‘황도(皇都)’라 불렀고, 황제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천자(天子)’를 자칭했습니다. 고려 숙종(肅宗)의 딸’ 복녕궁주(福寧宮主) 묘지명에서도 ‘천자의 딸’이라고 칭하는 등 강한 자주의식이 드러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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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녕궁주 왕씨 묘지명, 고려 1133년, 돌>

고려 숙종(재외 1095~1105년)의 넷째 딸이자 예종의 친동생인 복녕궁주 왕씨(1096~1133년)의 묘지명이다. 이 묘지명에서는 중국 송나라의 연호를 쓰면서도 복녕궁주를 “천자의 딸(天子之女)’이라고 표현하였다. 사대 외교의 형식 속에서도 스스로를 천자의 나라로 자부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삼국을 계승하고
정사(正史)는 국가가 관여하여 만든 정식 역사서로, 당시 지배층이 자신들의 뿌리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알려줍니다. 고려는 고구려·백제·신라와 고려 통일의 역사를 정리하고, ‘삼국’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되는 역사서를 편찬하여 삼국 계승 인식을 드러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김부식이 지은 삼국의 역사 ‘삼국사기’, 고려 1145년, 1573년 인쇄, 종이에 인쇄, 국보 322-1호, 경주 옥산서원>

1145년(인종 23) 김부식 (1075~1161) 등이 고려 인종 (仁宗, 재위 1122~1146년)의 명을 받아 편찬한 역사서이다. 군주의 정치 관련 기사인 본기(本紀), 신하들의 개인 전기인 열전(列傳), 통치제도나 문물 등을 분류한 지(志)와 연표로 구성된 기전체(紀傳體) 방식이다. 신라.고구려.백제 순으로 삼국의 정치 · 역사 · 경제 인물 등을 정리했다. 김부식은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는데, 현종(재위 1010~1031) 이후 고려의 왕이 신라 왕실의 혈통을 이어받았음을 강조하여 고려 건국 초기 지배층이 가졌던 고구려 계승 의식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신화를 되살리고
『삼국사기』가 전통적인 역사편찬 방식으로 쓰여졌다면, 『삼국유사』는 보다 자유로운 체재로 우리에게 뿌리가 된 나라와 왕들을 기록했습니다. 단군신화를 비롯한 신화가 또다른 역사로 수록되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승려 일연이 지은 삼국의 역사 ‘삼국유사’, 고려 1281년, 14세기 인쇄, 종이에 목판 보물 419-3호, 부산 범어사>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와 더불어 삼국의 역사를 알려주는 귀중한 기록 유산이다. ‘삼국사기’가 왕명을 받아 유교사관에 입각해 편찬한 역사서라면, <삼국유사>는 승려 일연(一然, 1206~1289년)이 당시 전해오던 전설과 신화, 풍속, 종교 등 삼국사기에서는 다루지 않은 사건과 기록을 폭넓게 담아냈다. 이 책에는 삼국의 역사뿐만 아니라 단군신화, 부여, 삼한, 가야, 후백제의 이야기까지 담겨 있으며, 고승들의 행적이나 효를 향한 사람들, 신이(神異)한 불교 전승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수록했다. 단군에 대해 기록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마침내 ‘우리’가 되다.
사람들은 상황이 어려울수록 힘을 한데 뭉쳐서 고난을 극복 하려고 합니다. 다양한 민족과 국가가 격동하던 중세 동북 아시아에서 고려는 주변국의 침입을 막아내며 외부와 구별 되는 고려의 위치, 고려의 역사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혼란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이승휴(李承休)는 고조선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 후삼국과 발해까지 우리의 역사로 인식하며 중국과 구별되는 고려의 독자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이승휴가 쓴 역사 서사시 ‘제왕운기(帝王韻紀)’, 고려 1287년, 이후 인쇄, 종이에 인쇄, 보물 1091-1호)>

고려 후기의 문신 이승휴(1224 ~ 1300년)가 1287년에 저술하였다.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삼아 쓴 시를 모은 형식으로, 상.하 2권으로 엮었다. 상권에 중국의 역사를 읊은 칠언고시를, 하권에는 단군 시기부터 충렬왕대까지 우리나라의 역사를 읊은 칠언고시와 오언고시를 수록하였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구분한 체제는 고려의 전통과 역사적 유구함을 드러내기 위한 고민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고려인에게 중요하게 인식되지 않았던 발해를 고려 역사의 일부로 설정함으로써 역사 인식의 폭이 넓어진 면 역시 주목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고려의 수도 개경
고려는 해상세력 출신이 세운 나라답게 바깥세상을 향해 열려 있었습니다. 태조 왕건은 즉위 이듬해인 919년 송악산 남쪽 개경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고려사」에 따르면 13세기 전반 개경에는 10만 가구가 살았다고 합니다. 1가구당 구성원이 5명이라고 쳐도 50만명이어서, 비슷한 시기 이탈리아 피렌체의 인구가 10만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도시 규모와 번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개경은 많은 외국인이 드나드는 국제도시였습니다. 송(宋).거란(遼).여진(金)과의 외교관계에 따른 공무역으로 다양한 물산이 유통되었고, 동.서 여진과 탐라에서도 사절단을 보내왔습니다. 이들은 고려의 국가행사인 팔관회에도 참여하여 고려황제의 장수를 빌고 예물을 바쳤습니다. 개경에서 30리 떨어진 예성강변의 벽란도에는 조운선, 장삿배 등 끊임없이 드나들었습니다. 기록상으로만 현종대(1010 ~ 1031년)부터 13세기 말 충렬왕 때까지 260여 년간 120여 회에 걸쳐 약 5천명의 송나라 상인이 다녀갔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물품은 비단과 자기, 약재, 악기, 서화 차 등 고급 생활용품과 서적, 미술품 등으로 다양했습니다. 송 상인이 교역하던 동남아시아, 인도, 서아시아의 물건도 고려에 들어왔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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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전도(開城全圖), 조선 1872년, 종이에 먹과 색>

개경을 그린 고려시대의 지도는 현존하지 않지만, 조선 후기에 제작한 여러 개성 지도에 고려시대 개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지도에는 개경을 둘러싼 외성(外城)과 내성(內城), 송악산과 그 아래 고려의 황궁 터인 만월대(滿月禮), 고려 태조의 능인 현릉(顯陵) 등이 표시되어 있다. 중요 항구였던 벽란도도 예성강가에 표시되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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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도성 요약>

 

고려의 건국과 희랑대사
태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왕으로, 고려 그 자체를 상징합니다. 희랑대사는 왕건의 정신적 지주로 후삼국시대 (901~936)에 수세에 몰린 왕건을 도왔으며, 이후에는 왕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스님의 실제 모습을 담은 희랑대사상에서 천 년의 시간을 넘어 인간적인 면모가 느껴집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과 왕의 스승인 희랑대사는 고려 오백 년을 지속하게 한 힘을 상징합니다. 국가 수호의 중심이 되었던 ‘왕권’과 국가 운영의 ‘정신적 기반’을 상징하는 두사람의 조각상은 조성된 당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스승과 제자의 천백 년만의 만남이 이루어지길 기원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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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칠희랑대사좌상, 고려 10세기, 건칠과 나무에 채색, 국보 333호, 해인사>

희랑대사의 얼굴과 신체, 체격을 그사실적으로 표현한 초상조각으로 10세기 중반 조각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자 우리나라에 유일한 고승 초상 조각입니다. 동시대 중국과 일본에서는 입적한 고승에 대한 추모와 숭앙의 의미로 고승의 상을 활발히 제작한 데 반해 우리나라에는 유래가 거의 전하지 않습니다. 앞면은 건칠, 뒷면 일부는 목조로 이루어졌는데 이렇게 재료를 혼용하는 일은 이례적입니다. 18세기의 기록에서 이 상의 알굴과 손이 까맣다고 묘사한 것을 보면 지금의 채색은 조선시대 18세기 이후에 보수하면서 입혀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슴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희랑대사가 가슴에 구멍을 뚫어 모기에 피를 보시함으로써 다른 스님들의 수행 정진을 도왔다는 이야기가 해인사에 전해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중앙박물관에서는 2018년 겨울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 특별전을 열었다. 전시는 10 ~ 14세기까지 존재했던 고려시대를 다시 한번 조명해 보는 내용이다. 전시는 고려의 수도 개경, 불교문화, 차문화, 공예미술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중요 유물들을 직접 살펴볼 수 있는 좋은 특별전이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중앙박물관 특별전,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

태조 왕건은 분열된 시대를 극복하고 통일국가 고려를 세웠습니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한 개경이 새로운 수도가 되었습니다. 고려(918~1392)는 주변에서 다양한 민족과 국가가 난립하던 격변의 시기에 여러 나라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개방적이고 독창적인 문화를 이루었습니다. 전시의 이야기는 고려 수도 개경에서 출발합니다. 밖으로 열려 있던 사회, 상업이 중시되고 물류가 국력이었던 시기, 왕실의 권위와 최고의 미를 상징하는 다채롭고 화려한 미술이 펼쳐집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사찰의 미술입니다. 1100년의 지혜가 담긴, 신비한 마법과 같은 세계를 느리게 걸으며 고려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불교 미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전시의 세 번째 공간은 차 향기 가득한 다점(茶店)입니다. 차는 국가와 왕실, 사찰의 각종 의례와 고려인의 삶 속에 함께 했던 문화로, 다점에서 고려의 지식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전시의 네 번째 이야기는 고려의 찬란한 기술과 디자인으로, 예술성의 정점을 이룬 공예 미술의 아름다움을 준비했습니다. 고려로부터의 선물이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긴 이야기를 모았습니다. 천백 년 전 그 어느 날처럼, 2018년 고려와의 결정적인 만남이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백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중앙박물관특별전, 황금인간의 땅] 카자흐스탄 은공예품

카자흐스탄에 살아왔던  사람들은 선사시대부터 중앙아시아의 넓은 초원에서 유목 생활을 했다. 초원에서 항상 옮겨 다니면서 살았던 유목민들은 가볍고 휴대하기에 편리한 금속공예품을 선호했다. 전시에서는 19 ~ 20세기 카자흐스탄 사람들이 사용했던 은공예품을 전시하고 있는데 고대 이래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사용했던 금속공예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중 삼국시대 고분에서 출토된 장신구나 말갖춤과 비슷한 형태와 용도를 보여주고 있어 중앙아시아 초원지역의 문화가 한반도까지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은공예품
예부터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은을 선호하였다. 중세초기부터 은세공 기술이 본격적으로 발달하였고 카자흐스탄의 남부 오트라르와 분지카트를 중심으로 튀르크 장인이 만든 은공예품이 크게 유행하였다. 유목민은 전통적인 의례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다양한 은장신구를 착용하거나 선물하며 자신들의 전통과 문화를 이어 나갔다. 사람들은 은을 정화와 벽사의 기능을 하는 신성한 금속으로 여겼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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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승달장식귀걸이 ‘아이스르가(Aysyrga), 19세기, 은, 카자흐스탄 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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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미개 ‘캅시르마(Kapsyrma)’, 19세기, 은, 카자흐스탄 서부>

OLYMPUS DIGITAL CAMERA<3. 여미개 ‘캅시르마’, 20세기, 은.홍옥수, 카자흐스탄 북부>

캅시르마는 옷을 여밀때 사용하는 여미개이다. 이 여미개는 꽃잎 모양의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가운데 둥근 부분에 홍옥수를 박아서 장식했다. 원추형과 원형의 드리개 열한개가 사슬고리에 달려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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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가슴꾸미개 ‘오니르지예크(Onirzhiek)’, 19세기, 은.유리, 카자흐스탄 서부, 2. 초승달장식 귀걸이 ‘아이시르가’, 19~20세기, 은, 카자흐스탄 북부, 3. 드리개 ‘세켈리크(Shekelik)’, 20세기, 은.에나멜, 카자흐스탄 남부>

세켈리크는 관모 등에 달아 관자놀이 부근을 장식하는 드리개이다. 이 세켈리크는 원모양 장식과 마름모 모양 장식, 드리개로 구성된다. 원모양 장식에는 식물문양을 새겼고, 마름모 모양장식의 양쪽 끝에는 문양을 붙였다. 각각의 장식 끝에는 고리를 달아 동물 발톱 모양의 장식을 매달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4. 드리개 ‘세켈리크’, 19세기, 은, 카자흐스탄 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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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반지 ‘주지크(Zhuzik)’, 19세기, 은, 카자흐스탄 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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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신물을 담는 장신구 ‘보이투마르(Boitumar)’, 19세기, 은, 카자흐스탄 남부>

보이투마르는 호신물을 담는 장신구이다. 속이 빈 대롱과 마름모 모양 드리개로 구성되었다. 대롱에는 부적 등의 호신물이 들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9년)

팔찌는 경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팔찌(보물 623호)와 비슷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당시 이 지역에서 수입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게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2. 쌍팔찌 ‘코스 빌레지크(Kos Blezik)’ 19세기, 은, 카자흐스탄 서부>

OLYMPUS DIGITAL CAMERA<3. 쌍팔찌 ‘코스 빌레지크’, 19세기, 은, 카자흐스탄 남부, 4. 여미개 ‘캅 시르마’, 20세기, 은, 홍옥수, 카자흐스탄 북부>

가슴꾸미개도 황남대총을 비롯한 신라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이다. 신라 가슴꾸미개도 다양한 형태와 재질의 장신구로 장식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많이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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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슴꾸미개 ‘오니르지예크’, 19세기, 은.유리, 카자흐스탄 서부, 2. 드리개 ‘세켈리크’, 19세기 은, 카자흐스탄 남부, 3. 귀걸이 ‘시르가’, 19세기, 은. 카자흐스탄 남부>

OLYMPUS DIGITAL CAMERA<4. 단추 ‘투이메(Tuime)’, 19~20세기, 은, 카자흐스탄 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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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골무가 달린 반지 ‘오미마크-주지크(Oymak-zhuzik), 19~20세기, 은, 카자흐스탄 서부>

오미마크 주지크는 골무가 달린 반지이다. 반지는 링과 마름모 모양 장식으로 구성되었다. 반지의 링에는 잎사귀 모양을 조각했고 마름모 장식에는 물방울 모양을 세공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6. 새부리모양 반지 ‘쿠스무린 주지크(Kusmourin zhuzik)’, 19세기, 은, 카자흐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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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슴꾸미개 ‘오니르지예크’, 19세기, 은.유리, 카자흐스탄 서부, 2. 귀걸이 ‘시르가’, 19세기, 은.산호, 카자흐스탄 남부, 3. 귀걸이 ‘시르가’, 19세기, 은, 카자흐스탄 남부>

OLYMPUS DIGITAL CAMERA<4. 새부리모양 반지 ‘쿠스무린 주지크(Kusmourin zhuzik)’, 19세기, 은, 카자흐스탄 서부, 5. 쌍팔찌 ‘코스 빌레지크(Kos Blezik)’ 19세기, 은.유리, 카자흐스탄 서부>

빌레지크는 판형팔찌로 한쪽팔에만 차거나 양팔에 쌍으로 착용했다. 팔찌의 표면은 대부분 보석을 상감하거나 동물문양이나 식물문양을 새겨 장식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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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걸이 ‘시르가’, 19세기, 은.산호, 카자흐스탄 남부, 2. 초승달장식귀걸이 ‘아이스르가(Aysyrga), 19세기, 은, 카자흐스탄 북부, 3. 의복용 장신구 ‘타나(Tana)’, 19~20세기, 은.홍옥수, 카자흐스탄 남부, 4. 목꾸미개 ‘타막샤(Tamaksha)’, 19세기, 은.유리, 카자흐스탄 남부>

목꾸미개 타막사는 장방형의 몸체 두개와 사실에 달린 드리개 열두개로 구성되었다. 몸체는 황색이며 식물문양으로 장식했다. 두몸체는 경첩으로 연결되며 각각 중앙에 적갈색 보석을 박아 넣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5. 팔찌 ‘빌레지크’, 19세기, 은.홍옥수, 카자흐스탄 서부, 6. 팔찌 ‘빌레지크’, 19세기, 은, 카자흐스탄 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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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장식 ‘샤시바우(Shashbau)’, 19세기, 은, 카자흐스탄 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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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장식 ‘샤시바우(Shashbau)’, 19세기, 은.에나멜.술장식, 카자흐스탄 남부>

다양한 은 장신구를 엮어 형태를 만들고 양쪽 끝에 술장식을 달았다. 이 샤시바우는 여성의 땋은 머리카락의 끝에 달아서 사용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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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슴꾸미개 ‘오니르지예크’, 19세기, 유리, 카자흐스탄 북부, 2. 머리장식 ‘샤시바우’, 20세기, 은, 카자흐스탄 남부>

오니르지예크는 카자흐의 전통 가슴 꾸미개이다. 대개 밝은 보석과 유리로 장식했다. 이 가슴꾸미개는 세개의 장식판과 다섯개의 드리개 장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식판 세개 중 위쪽 장식판 두개는 장방형이고 아래쪽 장식판은 오각형이다. 장식판에는 모두 홍옥수 유리가 박혀 있으며 그 주위를 덩굴모양과 삼각형 모양으로 장식했다. 샤시바우는 여성의 머리를 치장하기 위한 장식품으로, 움직일 때 소리가 난다. 땋은 머리의 양쪽 끝에 고정하여 미적인 장식효과를 주었다. 이 머리 장식은 두 개의 긴 사슬과 두 개의 짧은 사슬로 이루어져 있다. 네 개의 장식판이 고리로 연결되었고 사슬끝에는 마름모 모양의 드리개를 달았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1. 위생용품이 달린 장신구, 19~20세기, 은, 카자흐스탄, 2. 위생용품이 달린 장신구(투마르, 타잘리크 구랄리), 19~20세기, 은, 카자흐스탄 북부>

투마르 또는 타잘리크 쿠랄리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 장신구이다. 가운데 삼각형 판 아래 은제 이쑤시개나 귀이개 등 위생용품을 매달아 활용했다. 또한 사람들은 삼각형 판 가운데는 눈 모양의 녹색 장식이 벽사의 기능을 한다고 여겼다. 따라서 여성들의 머리나 목, 등, 가슴에 착용하여 부정과 악귀로부터 보호받고자 했다. 이처럼 호신을 위한 장신구의 제작은 유목민의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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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단추 ‘투이메’, 19~20세기, 은, 카자흐스탄 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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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머리장식 ‘숄피(Sholpy)’, 19~20세기, 은.홍옥수, 카자흐스탄 북부, 2 머리장식 ‘숄피(Sholpy)’, 19~20세기, 은.홍옥수, 카자흐스탄 북부>

숄피는 카자흐 여성이 착용했던 화려한 장신구이다. 머리끝에 달아서 움직일 때마다 경쾌한 소리가 나도록 했다. 민간신앙에 따르면 인간 영혼의 일부가 머리카락속에 살고 있어서 숄피의 소리가 나쁜 기운을 몰아낸다고 한다. 이 숄피는 홍옥수가 박힌 꽃모양 장식 네개와 문양이 있는 메달리온 여덟개를 원형의 고리로 연결하여 만들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1. 중매인의 반지 ‘쿠다기 주지크(Kudagi zhuzik), 19세기, 은, 카자흐스탄, 2. 여미개 ‘캅시르마’, 20세기, 은.홍옥수, 카자흐스탄 북부>

쿠다기 주지크는 신부의 어머니가 신랑.신부를 연결시켜 준 중매인에게 선물하는 반지이다. 신랑과 신부를 연결해 준다는 의미에서 손가락을 넣은 고리가 두개 붙어 있다. 이 중매인 반지는 두개의 타원형 장식에 붉은 색 유리가 박혀 있고 타원형 장식의 주위로 꽃과 삼각형 문양이 새겨져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9년)

신라고분에서 금관과 함께 출토되는 허리띠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다양한 생활용품을 달고 다녔던 당시 허리띠의 용도를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OLYMPUS DIGITAL CAMERA<1. 사냥용 허리띠 ‘키세 벨디크(Kise beldik), 20세기초, 가죽, 금속은도금, 카자흐스탄 남부, 2. 사냥용 허리띠 ‘키세 벨디크(Kise beldik), 19세기, 가죽, 금속은도금, 카자흐스탄 북부>

허리띠에 일상용품과 함꼐 칼이나 화약통, 화살통 등을 달아 사용했다. 남성의 허리띠는 전사들에게 상징적 의미를 가졌고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지표로 활용되었다. 이 사냥용 허리띠는 가죽끈과 띠고리, 각종 물건을 담을 수 있는 부속 장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폭이 좁은 가죽 끈은 여러 종류의 꾸미개로 장식되었다. 끈의 양끝에는 갈고리 모양의 띠고리가 있으며 명문이 적혀 있다. 부속 장식으로는 주머니와 드리개 등이 달려 있다. 두개의 고리로 고정된 오각형의 납작한 주머니는 부싯돌이나 부시 등 기타 필요한 물건을 담는데 사용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3. 허리띠 ‘벨디크’, 19세기, 은.직물, 카자흐스탄 북부,  4. 여성용 허리띠 ‘벨디크’, 20세기, 은.직물, 카자흐스탄 북부, 5. 허리띠 ‘벨디크’, 18세기, 가죽.금속, 카자흐스탄 남부, 6. 허리띠 ‘벨디크’, 20세기, 가죽.금속, 카자흐스탄 남부, 7. 허리띠 ‘벨디크’, 20세기, 직물.금속.에나멜, 카자흐스탄 남부>

벨디크는 가죽과 벨벳, 비단 등을 사용해서 만든 허리띠이다. 허리띠는 카자흐인들의 복식에서 꼭 필요한 부분이다. 예복용 허리띠의 경우 값비싼 재료를 아낌없이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장신의 수준높은 기술을 총동원할 정도로 제작에 공을 들였다. 이 여성용 허리띠는 직물로 만든 끈과 양끝의 띠고리, 끈을 장식하는 일곱개의 꾸미개로 이루어져 있다. 끈에 부착된 일곱개의 꾸미개장식은 꽃모양의 바탕에 타출기법을 이용해 식물문양을 새겼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9년)

결혼식
전통 혼례에서 ‘베타샤르’는 신부 얼굴을 가린 천을 벗기는 의식이다. 결혼식에서 이 의식이 끝나기 전에는 그 누구도 신부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신부는 유르트에 모인 마을 사람들 앞에서 시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화로에 불을 피운다. 그리고 노래를 듣는데, 여기에는 새로 맞이할 가족과 친척을 존경하고 민속의 관습과 전통을 귀하게 여기며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행동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신부는 노래가 끝나면 얼굴을 가린 채 신랑의 친척들에게 인사하고 친척들이 주는 선물을 받는다. 결혼식 말미에 신부의 얼굴이 공개된다. 이후 신랑과 신부는 두 개의 반쪽이 하나로 합쳐진다는 의미의 노래를 들으며 자신들의 유르트로 돌아간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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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용 예복, 여성용예복, 21세기, 수집품>

카자흐 남성의 전통예복이다. 머리에는 아이에르칼파크(Ayyrkalpak)라고 부르는 모자를 썼다. 이 전통 모자는 자주색 벨벳으로 만들었고 안감으로는 자주색 공단을 댔다. 모자 모양은 끝이 뭉툭한 원추형이고 낣은 창에는 폭이 좁은 금색 띠로 테를 둘렀다. 슬기를 따라 끈을 꼬아서 달았으며 황금색 실로 식물 문양을 수 놓았다. 의복은 먼저 안으로 속셔츠인 제이데(Zheyde)와 바지인 살바르(Shalbar)를 입었다. 제이데는 백색 면직물로 만들었으며 옷깃에 황금색 견사로 식물문양을 수놓았다. 실바르는 연갈색 벨벳으로 만들었으며 제이데와 마찬가지로 견사자수를 두어 장식했다. 제이데 위로 녹색 벨벳으로 제작한 베시펜드(Beshpent)를 입고 그 위로 샤파(Shapan)을 걸쳤다. 샤판은 긴소매가 달린 외투로, 전통적으로 축제기간에 많이 입었다. 자주색 벨벳에 금속실로 문양을 만들어 장식했으며 앞섶 가장자리에는 은색실로 수를 놓았다. 마지막으로 남성용 부츠를 신었다. 신발코가 들려 있고 굽이 있는 형태이며 염색한 가죽으로 만들었다. 흑색 바탕에 연갈색과 적색문양으로 장식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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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혼례복, 남성용예복, 21세기 수집품>

카자흐스탄 전통 결혼식에서 신부가 입는 혼례복이다. 신부는 결혼식날 흰색 베일인 젤레크(Zhelek)로 장식한 원뿔형 모자를 썼다. 이 모자는 사우켈러(Saukele)라고 부르는데, 결혼식 이후에도 새댁은 명절마다 사우겔레를 머리에 썼다. 또 신부는 원피스 형태인 코일레크(Koylek)를 입고 그 위로 베시펜트(Beshpent)를 걸쳤다. 마네킹이 입은 코일레크는 붉은색 벨벳으로 만들어 소매와 앞섶, 밑단부분을 금실로 화려하게 꾸몄다. 베시펜트는 외투의 일종이며 코일레크와 같이 붉은색 벨벳으로 만든 후 수매와 앞섶 등에 동물과 식물 문양을 금실로 수놓아 장식했다. 여기에 가죽 부츠인 에티크(Etik)를 신으면 혼례 복장이 완성되었다. 신부는 이렇게 예복을 차려입고 집안의 어른들과 손님들에게 인사를 드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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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용 신부 모자 ‘사우켈레(Saukele)’, 21세기, 비단.벨벳.유리, 카자흐스탄 서부>

말갖춤
유목민은 광활한 초원에서 목초지를 찾아다니며 이동 생활을 하였다. 유목민은 주기적으로 목초지를 찾아 가축을 몰고 이동하는 수평유목, 계절별로 고지대와 저지대를 오가는 수직유목, 목죽과 농사를 함께하는 유복 드으이 형태로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며 살아갔다. 이동 생활을 하는 유목민에게 말은 각별한 존재였다. 유목민은 말을 타고 이동하거나 가축을 돌보고, 적과 싸우고, 말의 젖과 고기를 먹고, 말의 배설물을 연료로 사용하였다. 아이들은 어릴적부터 말 타는 법을 배웠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유목생활을 자연스레 경험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말갖춤>

OLYMPUS DIGITAL CAMERA<아동용 안장 ‘발라 에르(Bala er)’ 19세기, 나무.가죽.금속, 카자흐스탄 남부, 여성용 안장 ‘아이엘 에르(Ayel er)’, 19세기, 나무.가죽.금속, 카자흐스탄 동부>

카자흐인은 나이와 성별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안장을 사용했다. 일반적으로 남성용 안장을 에르(Er), 여성용 안장을 아이엘에르(Ayel er), 아동용 안장을 발라 에르(Bala er)라 불렀다. 이 여성용 안장 아이엘 에르는 앞가리개에 옥수를 박어 넣고 기하학적 형태의 식물 문양으로 멋을 냈다. 안장 앞가리개는 폭이 좁고 수직 방향으로 길쭉하다. 안장 뒷가리개는 안장 앞가리개와 동일한 문양을 장식했고 보석을 감입하지는 않았다. 안장의 가죽 겉면에는 코시카르 무이이츠(Koshkar muyts)라고 부르는 양의 뿔 문양을 입안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채찍 ‘캄시(Kamshy)’, 20세기, 가죽.금속, 카자흐스탄 중부, 굴레 ‘주겐(Zhugen)’, 19세기, 가죽.금속, 카자흐스탄 동부>

채찍은 그 종류가 다양하지만 주로 조팝나무, 뿔이나 뼈로 만들었다. 조팝나무는 적자색을 띠며 굳고 단단하다. 카자흐스탄인들은 조팝나무가 악령을 물리친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믿음은 카자흐 동화와 신화에서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채찍은 손잡이 부분을 영양의 정강이뼈로 만들었고 손잡이 양옆으로 백색 금솟판 장식이 달렸는데, 장식에는 터키석이 박혀있다.  굴레는 이음쇠를 연력하여 넓은 T자 형태로 만들고 십자형 꾸미개 및 화살모양 드리개로 장식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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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이 ‘우젠기(Uzengi)’, 19세기, 금속, 카자흐스탄 동부

발걸이가 발명되고 널리 보급되면서 말을 더욱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말을 탈 때 발걸이에 발을 걸게 되면서 무게 중심을 조정하고 말을 제어할 수 있었다. 또한 발걸이는 말을 타는 사람의 다리에 말의 땀이 닿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다. 이 발걸이의 상단은 장방형, 하단은 타원형이며 식물문양을 새겨 장식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후걸이 ‘쿠이이스칸’, 19세기 가죽.금속, 수집품, 가슴걸이 ‘오밀디리크(Omidirik)’, 19세기, 가죽.금속, 카자흐스탄 남부>

후걸이는 안장이 앞으로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말의 꼬리 밑으로 걸어 안장의 뒷부분에 매는 끈이다. 가죽으로 만들었으며 여러 문양이 새겨진 금속 꾸미개로 장식했다. 가슴걸이는 마구의 부속품 중 말의 가슴쪽에 거는 가죽 끈으로, 말을 타고 오르막을 오를 때 안장이 뒤로 밀리지 않게 잡아 준다. 가슴걸이의 끝 부분은 안장틀에 고정하고 중간 부분은 복대와 끈으로 연결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안장 ‘에르’ 19세기, 나무.가죽.금속, 카자흐스탄 남부>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황금인간의 땅, 카자흐스탄”, 2019년
  2.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