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은 원래 숙종대에 왕이 지은 글인 어제와 왕의 글씨인 어필을 봉안하기 위해 지은 작은 건물이었으나, 정조대에 규장각을 확장하여 창덕궁 후원에 2층건물을 짓고 1층에 규장각 현판을 걸고 정식 정부기관으로 자리잡았다. 정조는 규장각에 기존의 어재.어필 뿐만 아니라 국내외의 방대한 도서를 수집.정리하게 하였으며, 당대 최고의 인재들과 함께 많은 도서들을 간행하였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했을 당시 규장각에는 국내서적 약 1만여점, 중국서적 약 2만여점을 소장하고 있으고, 부속으로 역대 임금의 글과 그림을 보관하는 봉모당, 국내 서적을 보관하는 서고, 중국서적을 보관하는 열고관 등을 두었다. 정조 사후 규장각은 그 기능이 약해지기는 했으나 1910년 한일병합으로 해체될 때 10만여점의 장서가 있었다고 한다. 그후 규장각 도서들은 총독부 학무국을 거쳐 경성제국대학 부속 도서관으로 이관되었고,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조선왕조 실록을 비롯하여 규장각 도서들을 보관하고 있으며, 연구기능도 계속 이어오고 있다.
규장각의 원래 위치는 창덕궁 입구 궐내각였지만 정조가 즉위하던 해에 창덕궁에서 경치가 가장 좋은 부용지 연못가 언덕에 2층 누각건물인 주합루를 크게 짓고 그 기능을 확장하였다. 건물 1층에는 왕실직속연구기관인 규장각을, 2층에는 열람실겸 누마루를 조성하고 ‘주합루’라 적힌 현판을 달았다. 또한 강화 행궁에 별도의 서고인 외규장각을 지어 전시를 대비하여 역대 왕들의 어제, 어필과 중요 도서들을 보관하였다.
창덕궁 궐내각사, 규장각(奎章閣)과 검서청(檢書廳)
창덕궁 궐내각사 중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조선 왕실의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는 규장각(奎章閣)이다. 조선초기 세종이 창설했던 학술 연구기관인 집현전의 예를 본받아 정조가 즉위하던 해인 1776년에 창설된 기관이다. 창덕궁 외조 출입문 앞을 흐르는 금천을 기준으로 바깥에 위치하고 있는 규장각은 책을 보관하던 주 건물인 규장각을 비롯하여 검서관들이 근무했던 검서청(檢書廳), 역대왕들의 글과 그림을 봉안하던 봉모당(奉謨堂), 입구의 행각, 뒷편의 책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궐도에서 보이는 창덕궁 규장각
창덕궁 금천 서쪽편에 위치한 궐내각사는 규장각과 부속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앞쪽에 책 등을 보관하던 창고가 대부분인 행각을 두고 있으며, 그 안쪽에 규장각과 실무관원들이 근무하던 검서청이 자리잡고 있다.
궐내각사 바깥쪽 행각 가운데에 출입문을 두고 있다. 출입문에는 ‘내각’이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창고와 실무관원들이 근무하던 작은 방들로 이루어진 궐내각사 규장각 바깥쪽 행각. 문간채를 이루고 있는 행각은 여러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문살이 있는 방과 판문으로 닫혀 있는 창고로 구성되어 있는데 창고가 많은 편이다. 창고에는 서적 출판을 위한 자료들을 보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금천까지 이어진 행각. 큰 규모의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규장각 출입문.
검서청 출입문.
창덕궁을 흐르는 금천 서쪽편에 규장각과 검서청이 자리잡고 있다. 금천 동쪽으로 국왕을 보좌하는 홍문관을 비롯한 관청들이 들어서 있다.
궐내각사 규장각
창덕궁 궐내각사 중 핵심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 규장각이다. 원래 숙종대에 국왕의 어제와 어필을 보관하기 위한 건물이었는데, 정조대에 기존 역할 외에 국내외 도서을 수집.보관하고 서적을 편찬하는 정부기관으로서 역할이 바뀌었다. 정조는 규장각을 확장하면서 창덕궁 후원에 주합루를 세우면서 그곳에 별도로 규장각 현판을 달았다는 것으로 볼 때 이곳은 기존 규장각 역할 건물을 계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궐내각사 규장각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건물은 가운데 3칸은 책을 보관했던 넓은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양쪽에 1칸씩 작은 방을 두고 있다. 국왕의 어제와 어필을 보관하는 장소로 통풍을 중요시하여 일반건물에 비해서 마루를 높게 만들었고, 나무계단을 통해 내부로 출입하게 되어 있다. 규장각 건물은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물로 삼도의 형식을 반영한 3개의 계단을 두고 있으며, 추녀마루에는 잡상을 세워 놓았다.
규장각 추녀마루의 잡상
궐내각사 규장각 내부.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양쪽 1칸씩 방을 두고 있다.
규장각 서고에서 책을 보관하던 모습.
2012년 초 고궁박물관에서 일본으로부터 의궤를 반환받은 것을 기념하여 개최한 특별전 “다시찾은 조선왕실 의궤와 도서”에서 재현한 모습이다.
뒷편에서 본 규장각.
궐내각사 검서청, 서적의 교정을 맡았던 검서관들이 근무하던 관청
창덕궁 궐내각사 중 금천 서쪽편에는 규장각 부속건물로 출판될 서적의 교정과 서사를 맡았던 검사관들이 근무하는 검서청이라는 건물이 금천 옆에 자리하고 있다. 검서관은 규장각에 속한 관리 중에서 실무를 담당하던 관직으로 4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조대에 검서관직을 신설하면서 서얼도 등용할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검서청 건물은 앞면 4칸반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창덕궁에서도 경관이 좋은 금천 바로 옆에 누마루를 세워 놓고 있다. 마당은 행각으로 둘러져 있는데 방도 있지만, 서적 등을 보관했던 창고를 많이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검서청 건물은 실무관원들인 검서관을 위한 건물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규장각에 근무했던 대부분의 관원들이 머물렀던 장소였고, 뒷편에 있는 규장각 건물은 국왕을 위한 공간으로 남겨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복궁 경회루 앞에 있는 집현전 건물이었던 수정정과 마찬가지로 학자를 우대하고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마련해 두고 있는 조선시대 궁궐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없어진 것을 2005년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창덕궁 궐내각사 검서청
규장각 부속 건물로 출판서적의 교정과 서사를 맡았던 실무관원인 검서관을 위한 집무공간으로 마련한 검서청. 건물은 앞면 4칸반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가운데 1칸은 대청마루 2칸은 방, 양쪽에 크고 작은 누마루를 두고 있는 건물이다.
검서청
다른 관아건물들과는 달리 금천 옆에 일반사대부이 사랑채나 정자처럼 지어진 건물이다. 건물이름은 검서관들을 위한 검서청이지만, 실제로 규장각에서 근무하던 관원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실무를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창덕궁 내에서도 상당히 경치가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집현전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경회루 앞 수정전처럼 학자를 우대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검서청 오른 편에는 금천에 석조 기둥을 세우고 올린 누마루를 두고 있다. 동쪽편 홍문관 옥당에 비해서도 경치가 뛰어나고, 근무하기도 좋은 장소이다.
검서청 대청마루. 뒷편 규장각 건물에 넓은 대청마루가 있고, 바로 옆에 누마루가 있어서 실무를 보던 검서청에서는 넓은 마루가 필요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검서청 온돌방.
건물 오른편에도 약간 높게 작은 누마루를 설치해 놓고 있다. 일반 사대부 저택의 책방과 비슷한 구조이지만, 누마루 기능도 함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청마루와 누마루 뒷편으로 난간이 있는 툇마루를 달아내어 놓고 있다. 조선후기 사대부 저택의 사랑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구조이다.
규장각과 검서청 사이의 마당.
봉모당(奉謨堂)과 서고(書庫)
규장각 뒷편으로는 역대왕들의 글과 그림 등을 보관하는 봉모당, 책고 등 여러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지금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없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장소였을 것이다.
규장각 뒷편에는 역대 왕들의 글과 그림 등을 보관하고 있는 봉모당이 있다. 사당과 비슷한 기능을 하고 있는 건물로 여겨지며, 삼문의 형식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출입문을 두고 있다.
봉모당은 5칸 정도 규모의 건물이다.
규장각 뒷편 서적들을 보관한 창고인 책고로 들어가는 길에는 금천으로 가로막는 담과 작은 출입문을 두고 있다.
앞쪽편에 있는 책고는 앞면 6칸, 옆면 1칸의 건물이다.
뒷쪽편에 있은 책고
궐내각사 뒷편 역대 국왕의 어진을 모셨던 선원전 앞에 위치한 억석루. 역대 국왕이 적은 현판을 보관하는 장소로 한옥이지만 중국풍의 건물형태를 하고 있다.
규장각학사지서현판
이문원 건물의 중앙에 걸려 있던 현판이다. 이문원은 규장각의 부대시설로서 조선시대 역대 왕의 어제.어필 등을 봉안.편찬.간행.보관한 곳이다. 현판의 글씨는 1781년 규장각제학 김종수가 썼다. <출처:규장각>
주합루(宙合樓)
부용지 북쪽 언덕에는 정조가 학술연구기관으로 세운 규장각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정조는 즉위 원년에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세웠는데, 이는 세종이 경복궁에서 공식연회가 열리는 장소인 경회루 앞에 집현전을 세웠던 사례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규장각 내 건물로는 2층 누각으로 세운 주합루를 비롯하여 서쪽에 서향각, 동쪽에 작은 정자인 천석정을 두고 있으며, 출입문으로 어수문을 세워두고 있다.
어수문(魚水門)과 주합루(宙合樓)
주합루는 정조 원년(1776)에 창건된 2층의 누각건물이다. 아래층에는 왕실 직속 기관인 규장각을, 위층에는 열람실 겸 누마루를 조성했다. 규장각은 정조의 개혁 정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책 개발과 이를 위한 도서 수집 및 연구기관으로 설립되었다. 정조는 세손시절부터 정적들로부터 끊임없는 질시와 위협에 시달렸는데, 이에 굴하지 않고 학문연구와 심신단련에 힘을 써 위대한 계몽군주가 될 수 있었다. 주합루로 오르는 길에 작은 어수문이 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격언과 같이 통치자들은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이 담겨진 문으로, 정조의 민본적인 정치철학을 보여준다. <출처:문화재청>
주합루
앞면5칸 옆면4칸의 2층 누각이다. 정조는 박식하여 많은 저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서책들을 많이 출판하였다. 주합루는 좋은 환경에서 학자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배려한 정조의 의도를 잘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주합루 아래층에 규장각이라하여 수만권의 책을 보존하는 서고로 꾸몄다.
동궐도에서 보이는 주합루와 규장각
정조대에 만들어진 왕실 도서관의 그림, 규장각도, 김홍도, 1776년.
정조가 영조의 글을 봉안하기 위해 창건한 창덕궁 후원의 규장각을 그린 그림이다.
주합루
창덕궁의 공식 행사장이라 할 수 있는 영화당과 같은 공간을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취병이라는 담장을 두르고 어수문이라는 출입문을 두고 의도적으로 공간을 분리하고 있다. 주합루 어수문은 작은 출입문이지만 국왕이 주관하는 공간으로 삼문의 형식을 하고 있다. 어수문은 국왕이 드나드는 문이고 양쪽에 신하들이 출입하는 작은 문을 두고 있다.
어수문에서 본 주합루.
5칸 중 가운데 3칸은 서고와 분합문이 있는 방으로 꾸몄으며 둘레에 넓은 마루를 두어 부용정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규장각’ 현판. 원래 주합루 1층에 걸려 있던 것이라 한다.
수교주련,
임금의 지침을 적은 규장각 기둥 주련(1850년, 1864년), 이 주련들은 규장각에 걸려 있던 것으로 규장각에서 근무하는 신료들이 지켜야 할 임금이 내린 지침이 적혀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0 수교견래객불기(손님이 찾아와도 그 자리를 떠나지 말라)
0 수교 각신재직 대관좌의 (규장각 신료는 근무 중에 관을 쓰고 의자에 앉아 있으라)
0 수교수대관문형 비선생 무득승당(비록 대신이나 대제학이라도 규장각 전임자가 아니면 들어오지 말라)
0 수교범각신재직 비공사 무득하청(모든 규장각 신료는 근무 중에 공사가 아니면 자리를 비울 수 없다.)
주합루 서쪽에는 규작각 각신들이 근무했던 관아 건물로 보이는 서향각이다.
현재 남아 있는 종친부나 삼군부 본청 건물과 비슷한 규모이다. 다른 관아와는 달리 행각을 두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볼 때 궐내각사 서쪽편에 검서청과 같이 있는 규장각 건물과 이곳을 같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곳은 국왕과 함께하는 경연이나 학술토론 행사를 했던 장소로 생각된다.
내각상조회, 정조와 규장각 신하들의 꽃구경 모임,
정조대에 규장각 신하(각신)들은 다른 관료에 비해 지위와 신분을 특별히 보장받았고 왕의 고문으로 우대되었다. 정조는 규장각 신하들과 봄에 창덕궁 후원에서 꽃을 감상하고 낚시하는 모임(내각상조회)을 정기적으로 가졌다. 이 모임에서 꽃구경, 낚시, 활쏘기, 음주 외에도 즉흥시짓기가 행해졌다. 정조와 신하들은 공동으로 시를 창작함으로써 군신 상하간의 친분을 돈독히 하고 후세까지 변치 않는 관게를 맺고자 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내원상화임자갱재축,
정조와 규장각 신하들의 즉흥시 모음(1792년), 1792년 3월 21일에 창덕궁 후원에서 정조와 규장각 신하들이 농산정에서 꽃구경하고 수택재(현 부용정)에서 낚시를 즐긴 후 쓴 시를 모은 두루마리이다. <출처:고궁박물관>
모임에 참석했던 신하들이 쓴 글
고궁박물관에 전시중인 정조어제어필.
이글은 1793년 정조가 규장각 관원들과 창덕궁 후원에서 곡수에 술잘을 띄워 돌리며 시를 짓는 곡수유상을 베풀었던 모임에서 적은 글이다. 이 모임에는 규장각 전.현직 관원 및 그 자제, 승지나 사관을 지낸 사람 등 41명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이 모임에서 정조가 손수 짓고 쓴 시, 신하들이 지은 시 40수가 남아 있어 고궁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정조가 규장각 관원들을 상당히 우대했음을 잘 보여준다.
규장각의 서적 간행과 수집
규장각은 본래 어제와 어필을 보관하던 전각이었다는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처음에는 왕실문헌을 보존하는 것이 본래의 기능이었다. 정조가 즉위한 1776년, 학술연구기관으로서의 규장각을 창설하면서 많은 서적으 편찬이 규장각에서 이루어졌다. 규장각 주변에는 중국본 서적을 보관하는 개유와와 열고관, 조선본 서적을 보관하는 서고 등의 부속 건물이 세워졌다. 1777년에는 국립출판소에 해당하는 교서관을 규장각에 통합시켰고, 임진자.정유자.생생자.정리자 등의 활자를 주조하여 서적으 출판을 규장각이 주도하게 하였다. 정조대 규장각에서 편찬되 서적은 <군서표기>라는 책자에 정리되어 있는데, 정조가 직접 편찬한 어정서와 신료들이 분담하여 편찬한 명찬서로 구분되어 있다. 정조는 <고금도서집성>과 같은 중국본 도서의 구입에도 힘썼다. 1781년 규장각에 소장된 서적의 분류목록과 해제가 정리된 <규장총목>을 완성하였다. <출처:규장각>
규장각지, 1784년(정조8),
1784년에 정조의 명에 의해 편찬된 규장각 역사서로 규장각의 연혁과 제도, 기능, 의식, 보관서적 등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규장각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초계문신제명록,
정조대왕 당시 규장각의 학문을 진흥하기 위해 실시한 제도로 당시에 학문을 한다고 하는 젋은 학자들을 초계문신으로 뽑았다고 하는데, 당시의 명단이다.
초계문신에 뽑힌 인물의 명단을 기록한 책. 초계문신은 정조가 문풍을 진작하기 위해 37세 이하의 문신을 뽑아 경서와 시문을 익히고 시험을 보여 그 성적에 따라 상벌을 내리게 한 제도이다. 1786년(정조10)부터 1848년(헌종 14)까지 12차에 걸친 초계문신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출처:규장각>
정조와 초계문신과의 문답서(초계강의),
정조가 초계문이나 경연관과 대학, 중용에 대해 서로 묻고 답한 것을 기록한 책이다.
규장전운,
규장각 신하들이 편찬한 운서(1796년), 정조가 이덕무 등 규장각 신하들에게 명하여 편찬한 운서(한자의 운을 분류한 책)이다. 조선의 한자음과 중국의 본토자음을 함께 표시하고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문원보불,
각 관청에서 사용하는 문장의 모범(1787년), 조선왕조 초기부터 정조 초기까지 각 관청에서 사용한 여러 형태의 문장을 모야 엮은 책이다. 조선시대에 왕의 이름으로 작성되는 모든 공문서의 서식과 종류 및 역대왕조의 대외 정책을 살필 수 있다. 규장각 신하들이 교정과 인쇄의 제반 과정을 담당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외규장각
외규장각은 강화에 행궁과 전각이 세워지고 왕실의 자료들이 별고에 보관된 것을 계기로 보다 체계적인 관리와 안전의 목적으로 정조 때에 세워졌다. 이것은 조선후기 문화운동을 선도했던 규장각의 분소와 같은 성격을 띠는 것이었으며, 역대 왕들의 어제, 어필과 고금의 도서 일부를 이곳으로 옮겨 보관시켰다. 특히 국왕이 친히 열람한 어람용 의궤 대부분은 외규장각에 보내졌다. 그러나 병인양요(1866년) 당시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되고 방화되어 그 흔적만이 남아 있으며 약탈당한 도서들은 지금도 프랑스에 보관되어 있다.
강화 행궁에 지어졌던 외규장각.
전란 등의 국가 위기를 대비하여 정조는 역대 왕들의 어제, 어필과 중요한 도서들을 이곳에 보관하였다. 특히 국왕이 직접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 대부분을 이곳으로 보내졌다.
수빈휘경원원소도감의궤, 1822년(순조22년), 가장먼저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
1822년 12월부터 1823년 3월까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현목수빈 박씨의 묘소, 휘경원 조성사업에 관해 기록한 의궤이다. 상.하로 이루어진 이 의궤의 상권은 1993년 9월 한국을 방문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직접 전달하였고, 하권은 2011년에 외규장각 의궤 296권과 함께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출처:중앙박물관>
서울대 규장각, 오늘날까지 남아 그 기능이 남아 있는 곳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은 조선 세종대의 집현전에 그 근원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왕건을 위협하던 세력들을 누르고, 학문이 깊은 신하들을 모아 학문을 토론하게 하고 학문을 장려함으로써 그들을 국왕의 친위세력화하는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세종대의 집현전 학자들 상당수가 단종의 복위를 꾀했던 사육신이나 생육신이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많은 자료들을 보면 정조는 규장각 학자들을 상당히 우대했으며,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규장각은 구한말 갑오개혁으로 폐지되었다가 해방이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으로 변신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규장각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던 조선시대 고문서를 비롯하여, 다양한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규장각 소장 도서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기록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와 왕실 행사 보고서인 각종 의궤를 소장하고 있다. 이외에 규장각의 기본 역할이었던 역대국왕의 친필과 기록화 등과 조선시대 그려진 각종지도와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다양한 고문서들을 소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유형의 문화재들을 소장.전시하고 있는 곳이 중앙박물관이라면, 각종 도서와 고문서들을 소장.보관.연구하는 기능을 지금도 규장각에서 하고 있다고 보면 무방할 것이다.
홍재전서, 1814년(순조 14), 활자본(정리자).
정조 사망후 순조대에 규장각에서 정조의 글을 정리하여 출판한 책이다. 규장각에서 출판한 대표적인 책이라하 할 수 있다.
규장각에서 정리하고 인쇄한 정조 문집의 최종본. 정조가 사망한 후인 1801년에 규장각에서 정조의 어제를 종합 정리한 <홍재전서> 필사본을 순조에게 올린 바 있었는데, 이 책은 1801년본을 수정 윤문하여 인쇄한 본이다. 활자는 인연이 깊은 정리자를 사용했고, 총 30질을 인쇄하여 규장각, 홍문관, 세자시강원, 수원의 화령전 등에 배포하였다. <출처:규장각>
규장각(奎章閣)
정조대에는 규장각이 설립되어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일컬어지는 문화 중흥을 이끌었다. 규장각은 원래 1694년(숙종20) 여러 임금의 글과 글씨를 보관하기 위해 별도로 종정시 내에 만든 작은 건물이었다. 정조는 이를 모태로 하여 1776년 즉위 후 규장각을 임금이 쓴 글, 즉 어제를 봉안하기 위한 명분으로 창덕궁 후원에 설립하였다. 이후 규장각은 다수의 서적을 편찬.발간하면서 학술기관이자 당대의 정치와 사상을 선도하는 기구로 확대되었다. 규장각 건물은 창덕궁 후원에서도 가장 경치가 좋은 영화당 옆의 언덕에 2층 누각으로 지어졌다. 2층에 어필로 ‘주합루’라고 쓴 현판을 달았으며, 1층은 ‘규장각’ 현판을 걸었다. 규장각은 정조 이후에는 그 기능이 축소되었으나 조선 말기까지도 역대의 주요 서적을 보관하는 대표적인 왕실 도서관이자 학문을 연구하는 중심기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