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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 국왕의 정책을 자문하고 보필하는 기관

창덕궁 금천 동쪽편에는 궐내각사로 홍문관, 예문관, 내의원 등이 정전인 창덕궁 인정전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다. 홍문관은 원래 왕실을 서적을 관리하고 국왕을 자문을 정책연구기관이었다. 반면에 예문관은 승정원처럼 국왕의 말과 글을 대신 짓는 등 실무적으로 국왕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는 기관이다. 창덕궁 궐내각사 중 국왕과 가장 가까운 곳에 예문관과 내의원이 위치하고 있고, 그 앞쪽에 국정을 자문하는 홍문관이 자리잡고 있다. 예문관, 내의원 등은 정전 옆 작은 출입문을 통해 정전으로 출입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복궁에서 집현전이 근정전 서쪽편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국왕을 보좌하던 것과 같은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들 건물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철거되고 없어졌던 것을 2005년 창덕궁 궐내각사가 먼저 복원되었다.

홍문관(弘文館), 국왕을 자문하는 정책연구기관

홍문관은 사헌부.사간원과 더불어 언론 삼사라 불리며, 조선시대 청요직의 상징으로 판서나 정승 등 고위직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부서 중 하나였다. 홍문관은 영사와 대제학에서 부제학, 직제학, 교리 등 다양한 직책의 관원들로 구성되며, 3정승을 비롯하여 다양한 관원들이 겸직하였다. 원래는 세조대에 집현전을 혁파하면서 국가의 서적을 관리하고 왕의 자문을 맡는 역할을 가지고 있다. 홍문관 대제학은 조선사회에서 학문의 수장으로 여겨지며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인사가 맡았다. 홍문관을 비롯한 언론삼사는 조선시대 관직 중에서도 선비들이 가장 선호하는 관직으로 후손들에게도 그들의 경력 중 가장 중요시 된다. 지금도 서원에 모셔진 많은 조선시대 학자들은 이런 관직을 거쳐간 경우가 대부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동궐도에 나타난 궐내각사 중 홍문관과 예문관

OLYMPUS DIGITAL CAMERA창덕궁 금천교를 건너면 정면에 진선문이 있고, 북쪽편에 궐내각사들이 들어서 있다.

그 중 제일 먼저 보이는 건물이 조선시대 엘리트들이 선호했던 삼사 중 하나인 홍문관 건물이 있다. 홍문관은 세종대 집현전의 기능 중 왕실 도서의 수집.출판을 관장하는 기능을 가진 부서지만, 실제로는 학문을 연구하고 국왕을 자문하는 중요한 요직이었으며, 국왕이 학문을 논하는 경연에 참여하는 왕권을 견제하는 기능을 가진 곳으로 여겨졌다.

OLYMPUS DIGITAL CAMERA 홍문관은 ’옥당(玉堂)’이라는 현판이 걸린 건물과 주변 행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구조는 대체로 국정을 논하는 중요한 기관답게 폐쇄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으며, 다른 궐내각사 건물들과는 쪽문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정문을 통해서만 옥당으로 출입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홍문관’현판(1699년).

창덕궁 홍문관에 걸었던 편액으로 옥당은 홍문관의 다른 이름이다. 1699년(숙종25) 당시 홍문관 응교였던 김진규(1658~1716년0의 글씨이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행각으로 이루어진 옥당 출입문을 들어서면 특이하게 담장으로 막혀있고, 3개의 작은 쪽문을 두고 있다. 외부에서 홍문관 내부를 볼 수 없도록 만든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옥당 내부를 출입하는 작은 쪽문. 3면에 쪽문을 두고 있으며, 가운데 쪽문은 옥당 건물로, 양쪽 쪽문은 행각으로 출입하게 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옥당 마당 앞에 세워진 담장. 내부 전체적으로 통행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니고, 통행은 담장 사이로 가능하지만, 시야를 가려주어 각건물내에서 하는 일들을 볼 수 없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옥당 마당 담장 바깥에서 본 옥당.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만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옥당은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궁궐 밖 육조거리에 있었던 주요 관청 건물에 비해서 건물 규모는 작은 편이다. 이 건물에서는 대제학을 비롯하여 고위직 인사들이 근무했던 공간으로 보인다. 홍문관 관리들은 과거시험에서 성적이 좋은 사람들 중에서도 집안배경이나 정치적 위상이 높은 가문에 속한 사람들로 하위직이라 할지라도 궁궐정문 출입이 허용될 정도로 우대를 받았다.

OLYMPUS DIGITAL CAMERA출입문 옆 행각.

다른 건물의 행각에 비해서 격식있게 구성되어 있다. 홍문관 하위직 관리들이 근무하던 장소로 보인다. 도서의 수집.관리를 담당하던 기관으로 책들을 보관하기 위한 책방으로 행각에 다락방들을 많이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적과 문서들을 보관하던 다락방으로 이루어진 서쪽편 행각.

OLYMPUS DIGITAL CAMERA옥당 뒷마당. 뒷편에는 별도의 건물을 두고 있지 않다. 조선시대 삼사에 속한 중요한 관청이었지만 궐내에 위치하고 있어 건물은 협소한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옥당 서쪽편 금천이 흐르는 곳에는 나무들을 심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홍문관지, 1784년(정조8),

이노춘 등 지음, 홍문관의 연혁, 직관, 담당업무 등을 기록한 도서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경현당 어제 어필 화재첩, 1741년

영조가 「춘추」강독을 마친 것을 기념해 승정원.홍문관 관원들에게 경현당에서 술일 내린 일을 기록한 첩이다.

예문관(藝文館), 국왕의 말과 글을 대신하는 기관

예문관은 국왕의 말이나 글을 대필하는 기관으로 세조대에 집현전이 혁파되면서 도서출판의 기능은 홍문관으로, 학술연구는 예문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대체로 홍문관과 예문관은 학술을 연구한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홍문관은 왕을 자문하는 역할로 견제의 기능을 갖고 있어 삼사 중 하나로 여겼고, 예문관은 왕의 말과 글을 대신하는 기관으로 비서실격인 승정원과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문관는 영사(정1품)을 비롯하여 실무진인 대교(정8품), 검열(정9품)까지 여러 직책이 있으나 영의정이 겸임하는 영사를 비롯하여 직제학은 도승지가 겸하는 등 대부분의 직책은 홍문관을 비롯하여 다른 부서에서 그 직책을 겸하기때문에 실제로는 홍문관 관원이 겸임하는 봉교(정7품) 이하의 관원으로 구성된 실무부서라고 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창덕궁 정전 회랑과 붙어 있는 예문관은 단독건물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행각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국왕을 가까운 거리에 보좌하는 관원들의 근무하던 건물로 건물자체는 격식이 있게 꾸며져 있다. 예문관 건물은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예문관은 국왕의 건강을 살피는 내의원과 함께 정전인 인정전 회랑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전 서쪽편에 있는 출입문을 통해서 출입이 가능하다.

OLYMPUS DIGITAL CAMERA창덕궁 인정전 서쪽편에 위치한 건물들. 예문관 바깥쪽으로 선원전 재실 기능을 했던 양지당이란 건물이 있고, 그 바깥쪽에 마당이 있는 큰 건물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인정전 서쪽편 행각. 국왕을 실무적으로 보좌하는 예문관, 내의원 등 궐내각사와 연결되는 출입문이 있으며, 행각 끝에는 향과  축문을 관리하는 향실이 있다.

규장각(奎章閣), 정조대 문예부흥을 이끌었던 학술연구기관

규장각은 원래 숙종대에 왕이 지은 글인 어제와 왕의 글씨인 어필을 봉안하기 위해 지은 작은 건물이었으나, 정조대에 규장각을 확장하여 창덕궁 후원에 2층건물을 짓고 1층에 규장각 현판을 걸고 정식 정부기관으로 자리잡았다. 정조는 규장각에 기존의 어재.어필 뿐만 아니라 국내외의 방대한 도서를 수집.정리하게 하였으며, 당대 최고의 인재들과 함께 많은 도서들을 간행하였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했을 당시 규장각에는 국내서적 약 1만여점, 중국서적 약 2만여점을 소장하고 있으고, 부속으로 역대 임금의 글과 그림을 보관하는 봉모당, 국내 서적을 보관하는 서고, 중국서적을 보관하는 열고관 등을 두었다. 정조 사후 규장각은 그 기능이 약해지기는 했으나 1910년 한일병합으로 해체될 때 10만여점의 장서가 있었다고 한다. 그후 규장각 도서들은 총독부 학무국을 거쳐 경성제국대학 부속 도서관으로 이관되었고,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조선왕조 실록을 비롯하여 규장각 도서들을 보관하고 있으며, 연구기능도 계속 이어오고 있다.

규장각의 원래 위치는 창덕궁 입구 궐내각였지만 정조가 즉위하던 해에 창덕궁에서 경치가 가장 좋은 부용지 연못가 언덕에 2층 누각건물인 주합루를 크게 짓고 그 기능을 확장하였다. 건물 1층에는 왕실직속연구기관인 규장각을, 2층에는 열람실겸 누마루를 조성하고 ‘주합루’라 적힌 현판을 달았다. 또한 강화 행궁에 별도의 서고인 외규장각을 지어 전시를 대비하여 역대 왕들의 어제, 어필과 중요 도서들을 보관하였다.

창덕궁 궐내각사, 규장각(奎章閣)과 검서청(檢書廳)

창덕궁 궐내각사 중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조선 왕실의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는 규장각(奎章閣)이다. 조선초기 세종이 창설했던 학술 연구기관인 집현전의 예를 본받아 정조가 즉위하던 해인 1776년에 창설된 기관이다. 창덕궁 외조 출입문 앞을 흐르는 금천을 기준으로 바깥에 위치하고 있는 규장각은 책을 보관하던 주 건물인 규장각을 비롯하여 검서관들이 근무했던 검서청(檢書廳), 역대왕들의 글과 그림을 봉안하던 봉모당(奉謨堂), 입구의 행각, 뒷편의 책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궐도에서 보이는 창덕궁 규장각

OLYMPUS DIGITAL CAMERA창덕궁 금천 서쪽편에 위치한 궐내각사는 규장각과 부속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앞쪽에 책 등을 보관하던 창고가 대부분인 행각을 두고 있으며, 그 안쪽에 규장각과 실무관원들이 근무하던 검서청이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궐내각사 바깥쪽 행각 가운데에 출입문을 두고 있다. 출입문에는 ‘내각’이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창고와 실무관원들이 근무하던 작은 방들로 이루어진 궐내각사 규장각 바깥쪽 행각. 문간채를 이루고 있는 행각은 여러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문살이 있는 방과 판문으로 닫혀 있는 창고로 구성되어 있는데 창고가 많은 편이다. 창고에는 서적 출판을 위한 자료들을 보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금천까지 이어진 행각. 큰 규모의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규장각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검서청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창덕궁을 흐르는 금천 서쪽편에 규장각과 검서청이 자리잡고 있다. 금천 동쪽으로 국왕을 보좌하는 홍문관을 비롯한 관청들이 들어서 있다.

궐내각사 규장각

창덕궁 궐내각사 중 핵심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 규장각이다. 원래 숙종대에 국왕의 어제와 어필을 보관하기 위한 건물이었는데, 정조대에 기존 역할 외에 국내외 도서을 수집.보관하고 서적을 편찬하는 정부기관으로서 역할이 바뀌었다. 정조는 규장각을 확장하면서 창덕궁 후원에 주합루를 세우면서 그곳에 별도로 규장각 현판을 달았다는 것으로 볼 때 이곳은 기존 규장각 역할 건물을 계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궐내각사 규장각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건물은 가운데 3칸은 책을 보관했던 넓은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양쪽에 1칸씩 작은 방을 두고 있다. 국왕의 어제와 어필을 보관하는 장소로 통풍을 중요시하여 일반건물에 비해서 마루를 높게 만들었고, 나무계단을 통해 내부로 출입하게 되어 있다. 규장각 건물은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물로 삼도의 형식을 반영한 3개의 계단을 두고 있으며, 추녀마루에는 잡상을 세워 놓았다.

OLYMPUS DIGITAL CAMERA규장각 추녀마루의 잡상

OLYMPUS DIGITAL CAMERA궐내각사 규장각 내부.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양쪽 1칸씩 방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규장각 서고에서 책을 보관하던 모습.

2012년 초 고궁박물관에서 일본으로부터 의궤를 반환받은 것을 기념하여 개최한 특별전 “다시찾은 조선왕실 의궤와 도서”에서 재현한 모습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규장각.

궐내각사 검서청, 서적의 교정을 맡았던 검서관들이 근무하던 관청

창덕궁 궐내각사 중 금천 서쪽편에는 규장각 부속건물로 출판될 서적의 교정과 서사를 맡았던 검사관들이 근무하는 검서청이라는 건물이 금천 옆에 자리하고 있다. 검서관은 규장각에 속한 관리 중에서 실무를 담당하던 관직으로 4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조대에 검서관직을 신설하면서 서얼도 등용할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검서청 건물은 앞면 4칸반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창덕궁에서도 경관이 좋은 금천 바로 옆에 누마루를 세워 놓고 있다. 마당은 행각으로 둘러져 있는데 방도 있지만, 서적 등을 보관했던 창고를 많이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검서청 건물은 실무관원들인 검서관을 위한 건물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규장각에 근무했던 대부분의 관원들이 머물렀던 장소였고, 뒷편에 있는 규장각 건물은 국왕을 위한 공간으로 남겨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복궁 경회루 앞에 있는 집현전 건물이었던 수정정과 마찬가지로 학자를 우대하고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마련해 두고 있는 조선시대 궁궐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없어진 것을 2005년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 창덕궁 궐내각사  검서청

규장각 부속 건물로 출판서적의 교정과 서사를 맡았던 실무관원인 검서관을 위한 집무공간으로 마련한 검서청. 건물은 앞면 4칸반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가운데 1칸은 대청마루 2칸은 방, 양쪽에 크고 작은 누마루를 두고 있는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검서청

다른 관아건물들과는 달리 금천 옆에 일반사대부이 사랑채나 정자처럼 지어진 건물이다. 건물이름은 검서관들을 위한 검서청이지만, 실제로 규장각에서 근무하던 관원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실무를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창덕궁 내에서도 상당히 경치가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집현전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경회루 앞 수정전처럼 학자를 우대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검서청 오른 편에는 금천에 석조 기둥을 세우고 올린 누마루를 두고 있다. 동쪽편 홍문관 옥당에 비해서도 경치가 뛰어나고, 근무하기도 좋은 장소이다.

OLYMPUS DIGITAL CAMERA 검서청 대청마루. 뒷편 규장각 건물에 넓은 대청마루가 있고, 바로 옆에 누마루가 있어서 실무를 보던 검서청에서는 넓은 마루가 필요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검서청 온돌방.

OLYMPUS DIGITAL CAMERA건물 오른편에도 약간 높게 작은 누마루를 설치해 놓고 있다. 일반 사대부 저택의 책방과 비슷한 구조이지만, 누마루 기능도 함께 있는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청마루와 누마루 뒷편으로 난간이 있는 툇마루를 달아내어 놓고 있다. 조선후기 사대부 저택의 사랑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구조이다.

OLYMPUS DIGITAL CAMERA 규장각과 검서청 사이의 마당.

봉모당(奉謨堂)과 서고(書庫)

규장각 뒷편으로는 역대왕들의 글과 그림 등을 보관하는 봉모당, 책고 등 여러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지금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없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장소였을 것이다.

OLYMPUS DIGITAL CAMERA 규장각 뒷편에는 역대 왕들의 글과 그림 등을 보관하고 있는 봉모당이 있다. 사당과 비슷한 기능을 하고 있는 건물로 여겨지며, 삼문의 형식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출입문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봉모당은 5칸 정도 규모의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 규장각 뒷편 서적들을 보관한 창고인 책고로 들어가는 길에는 금천으로 가로막는 담과 작은 출입문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앞쪽편에 있는 책고는 앞면 6칸, 옆면 1칸의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뒷쪽편에 있은 책고

OLYMPUS DIGITAL CAMERA궐내각사 뒷편 역대 국왕의 어진을 모셨던 선원전 앞에 위치한 억석루. 역대 국왕이 적은 현판을 보관하는 장소로 한옥이지만 중국풍의 건물형태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규장각학사지서현판

이문원 건물의 중앙에 걸려 있던 현판이다. 이문원은 규장각의 부대시설로서 조선시대 역대 왕의 어제.어필 등을 봉안.편찬.간행.보관한 곳이다. 현판의 글씨는 1781년 규장각제학 김종수가 썼다. <출처:규장각>

주합루(宙合樓)

부용지 북쪽 언덕에는 정조가 학술연구기관으로 세운 규장각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정조는 즉위 원년에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세웠는데, 이는 세종이 경복궁에서 공식연회가 열리는 장소인 경회루 앞에 집현전을 세웠던 사례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규장각 내 건물로는 2층 누각으로 세운 주합루를 비롯하여 서쪽에 서향각, 동쪽에 작은 정자인 천석정을 두고 있으며, 출입문으로 어수문을 세워두고 있다.

어수문(魚水門)과 주합루(宙合樓)
주합루는 정조 원년(1776)에 창건된 2층의 누각건물이다. 아래층에는 왕실 직속 기관인 규장각을, 위층에는 열람실 겸 누마루를 조성했다. 규장각은 정조의 개혁 정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책 개발과 이를 위한 도서 수집 및 연구기관으로 설립되었다. 정조는 세손시절부터 정적들로부터 끊임없는 질시와 위협에 시달렸는데, 이에 굴하지 않고 학문연구와 심신단련에 힘을 써 위대한 계몽군주가 될 수 있었다. 주합루로 오르는 길에 작은 어수문이 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격언과 같이 통치자들은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이 담겨진 문으로, 정조의 민본적인 정치철학을 보여준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주합루

앞면5칸 옆면4칸의 2층 누각이다. 정조는 박식하여 많은 저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서책들을 많이 출판하였다. 주합루는 좋은 환경에서 학자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배려한 정조의 의도를 잘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주합루 아래층에 규장각이라하여 수만권의 책을 보존하는 서고로 꾸몄다.

OLYMPUS DIGITAL CAMERA동궐도에서 보이는 주합루와 규장각

OLYMPUS DIGITAL CAMERA정조대에 만들어진 왕실 도서관의 그림, 규장각도, 김홍도, 1776년.

정조가 영조의 글을 봉안하기 위해 창건한 창덕궁 후원의 규장각을 그린 그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주합루

창덕궁의 공식 행사장이라 할 수 있는 영화당과 같은 공간을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취병이라는 담장을 두르고 어수문이라는 출입문을 두고 의도적으로 공간을 분리하고 있다. 주합루 어수문은 작은 출입문이지만 국왕이 주관하는 공간으로 삼문의 형식을 하고 있다. 어수문은 국왕이 드나드는 문이고 양쪽에 신하들이 출입하는 작은 문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어수문에서 본 주합루.

5칸 중 가운데 3칸은 서고와 분합문이 있는  방으로 꾸몄으며 둘레에 넓은 마루를 두어 부용정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규장각’ 현판. 원래 주합루 1층에 걸려 있던 것이라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수교주련,

임금의 지침을 적은 규장각 기둥 주련(1850년, 1864년), 이 주련들은 규장각에 걸려 있던 것으로 규장각에서 근무하는 신료들이 지켜야 할 임금이 내린 지침이 적혀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0 수교견래객불기(손님이 찾아와도 그 자리를 떠나지 말라)
0 수교 각신재직 대관좌의 (규장각 신료는 근무 중에 관을 쓰고 의자에 앉아 있으라)

0 수교수대관문형 비선생 무득승당(비록 대신이나 대제학이라도 규장각 전임자가 아니면 들어오지 말라)
0 수교범각신재직 비공사 무득하청(모든 규장각 신료는 근무 중에 공사가 아니면 자리를 비울 수 없다.)

OLYMPUS DIGITAL CAMERA주합루 서쪽에는 규작각 각신들이 근무했던 관아 건물로 보이는 서향각이다.

현재 남아 있는 종친부나 삼군부 본청 건물과 비슷한 규모이다. 다른 관아와는 달리 행각을 두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볼 때 궐내각사 서쪽편에 검서청과 같이 있는 규장각 건물과 이곳을 같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곳은 국왕과 함께하는 경연이나 학술토론 행사를 했던 장소로 생각된다.

내각상조회, 정조와 규장각 신하들의 꽃구경 모임,
정조대에 규장각 신하(각신)들은 다른 관료에 비해 지위와 신분을 특별히 보장받았고 왕의 고문으로 우대되었다. 정조는 규장각 신하들과 봄에 창덕궁 후원에서 꽃을 감상하고 낚시하는 모임(내각상조회)을 정기적으로 가졌다. 이 모임에서 꽃구경, 낚시, 활쏘기, 음주 외에도 즉흥시짓기가 행해졌다. 정조와 신하들은 공동으로 시를 창작함으로써 군신 상하간의 친분을 돈독히 하고 후세까지 변치 않는 관게를 맺고자 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내원상화임자갱재축,

정조와 규장각 신하들의 즉흥시 모음(1792년), 1792년 3월 21일에 창덕궁 후원에서 정조와 규장각 신하들이 농산정에서 꽃구경하고 수택재(현 부용정)에서 낚시를 즐긴 후 쓴 시를 모은 두루마리이다. <출처:고궁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모임에 참석했던 신하들이 쓴 글

SANYO DIGITAL CAMERA 고궁박물관에 전시중인 정조어제어필.

이글은 1793년 정조가 규장각 관원들과 창덕궁 후원에서 곡수에 술잘을 띄워 돌리며 시를 짓는 곡수유상을 베풀었던 모임에서 적은 글이다. 이 모임에는 규장각 전.현직 관원 및 그 자제, 승지나 사관을 지낸 사람 등 41명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이 모임에서 정조가 손수 짓고 쓴 시, 신하들이 지은 시 40수가 남아 있어 고궁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정조가 규장각 관원들을 상당히 우대했음을 잘 보여준다.

규장각의 서적 간행과 수집
규장각은 본래 어제와 어필을 보관하던 전각이었다는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처음에는 왕실문헌을 보존하는 것이 본래의 기능이었다. 정조가 즉위한 1776년, 학술연구기관으로서의 규장각을 창설하면서 많은 서적으 편찬이 규장각에서 이루어졌다. 규장각 주변에는 중국본 서적을 보관하는 개유와와 열고관, 조선본 서적을 보관하는 서고 등의 부속 건물이 세워졌다. 1777년에는 국립출판소에 해당하는 교서관을 규장각에 통합시켰고, 임진자.정유자.생생자.정리자 등의 활자를 주조하여 서적으 출판을 규장각이 주도하게 하였다. 정조대 규장각에서 편찬되 서적은 <군서표기>라는 책자에 정리되어 있는데, 정조가 직접 편찬한 어정서와 신료들이 분담하여 편찬한 명찬서로 구분되어 있다. 정조는 <고금도서집성>과 같은 중국본 도서의 구입에도 힘썼다. 1781년 규장각에 소장된 서적의 분류목록과 해제가 정리된 <규장총목>을 완성하였다. <출처:규장각>

OLYMPUS DIGITAL CAMERA규장각지, 1784년(정조8),

1784년에 정조의 명에 의해 편찬된 규장각 역사서로 규장각의 연혁과 제도, 기능, 의식, 보관서적 등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규장각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초계문신제명록,

정조대왕 당시 규장각의 학문을 진흥하기 위해 실시한 제도로 당시에 학문을 한다고 하는 젋은 학자들을 초계문신으로 뽑았다고 하는데, 당시의 명단이다.

초계문신에 뽑힌 인물의 명단을 기록한 책. 초계문신은 정조가 문풍을 진작하기 위해 37세 이하의 문신을 뽑아 경서와 시문을 익히고 시험을 보여 그 성적에 따라 상벌을 내리게 한 제도이다. 1786년(정조10)부터 1848년(헌종 14)까지 12차에 걸친 초계문신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출처:규장각>

OLYMPUS DIGITAL CAMERA정조와 초계문신과의 문답서(초계강의),

정조가 초계문이나 경연관과 대학, 중용에 대해 서로 묻고 답한 것을 기록한 책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규장전운,

규장각 신하들이 편찬한 운서(1796년), 정조가 이덕무 등 규장각 신하들에게 명하여 편찬한 운서(한자의 운을 분류한 책)이다. 조선의 한자음과 중국의 본토자음을 함께 표시하고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문원보불,

각 관청에서 사용하는 문장의 모범(1787년), 조선왕조 초기부터 정조 초기까지 각 관청에서 사용한 여러 형태의 문장을 모야 엮은 책이다. 조선시대에 왕의 이름으로 작성되는 모든 공문서의 서식과 종류 및 역대왕조의 대외 정책을 살필 수 있다. 규장각 신하들이 교정과 인쇄의 제반 과정을 담당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외규장각

외규장각은 강화에 행궁과 전각이 세워지고 왕실의 자료들이 별고에 보관된 것을 계기로 보다 체계적인 관리와 안전의 목적으로 정조 때에 세워졌다. 이것은 조선후기 문화운동을 선도했던 규장각의 분소와 같은 성격을 띠는 것이었으며, 역대 왕들의 어제, 어필과 고금의 도서 일부를 이곳으로 옮겨 보관시켰다. 특히 국왕이 친히 열람한 어람용 의궤 대부분은 외규장각에 보내졌다. 그러나 병인양요(1866년) 당시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되고 방화되어 그 흔적만이 남아 있으며 약탈당한 도서들은 지금도 프랑스에 보관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강화 행궁에 지어졌던 외규장각.

전란 등의 국가 위기를 대비하여 정조는 역대 왕들의 어제, 어필과 중요한 도서들을 이곳에 보관하였다. 특히 국왕이 직접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  대부분을 이곳으로 보내졌다.

OLYMPUS DIGITAL CAMERA 수빈휘경원원소도감의궤, 1822년(순조22년), 가장먼저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

1822년 12월부터 1823년 3월까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현목수빈 박씨의 묘소, 휘경원 조성사업에 관해 기록한 의궤이다. 상.하로 이루어진 이 의궤의 상권은 1993년 9월 한국을 방문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직접 전달하였고, 하권은 2011년에 외규장각 의궤 296권과 함께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출처:중앙박물관>

서울대 규장각, 오늘날까지 남아 그 기능이 남아 있는 곳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은 조선 세종대의 집현전에 그 근원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왕건을 위협하던 세력들을 누르고, 학문이 깊은 신하들을 모아 학문을 토론하게 하고 학문을 장려함으로써 그들을 국왕의 친위세력화하는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세종대의 집현전 학자들 상당수가 단종의 복위를 꾀했던 사육신이나 생육신이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많은 자료들을 보면 정조는 규장각 학자들을 상당히 우대했으며,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규장각은 구한말 갑오개혁으로 폐지되었다가 해방이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으로 변신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현재 규장각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던 조선시대 고문서를 비롯하여, 다양한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규장각 소장 도서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기록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와 왕실 행사 보고서인 각종 의궤를 소장하고 있다. 이외에 규장각의 기본 역할이었던 역대국왕의 친필과 기록화 등과 조선시대 그려진 각종지도와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다양한 고문서들을 소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유형의 문화재들을 소장.전시하고 있는 곳이 중앙박물관이라면, 각종 도서와 고문서들을 소장.보관.연구하는 기능을 지금도 규장각에서 하고 있다고 보면 무방할 것이다.

OLYMPUS DIGITAL CAMERA 홍재전서, 1814년(순조 14), 활자본(정리자). 

정조 사망후 순조대에 규장각에서 정조의 글을 정리하여 출판한 책이다. 규장각에서 출판한 대표적인 책이라하 할 수 있다.

규장각에서 정리하고 인쇄한 정조 문집의 최종본. 정조가 사망한 후인 1801년에 규장각에서 정조의 어제를 종합 정리한 <홍재전서> 필사본을 순조에게 올린 바 있었는데, 이 책은 1801년본을 수정 윤문하여 인쇄한 본이다. 활자는 인연이 깊은 정리자를 사용했고, 총 30질을 인쇄하여 규장각, 홍문관, 세자시강원, 수원의 화령전 등에 배포하였다. <출처:규장각>

규장각(奎章閣)
정조대에는 규장각이 설립되어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일컬어지는 문화 중흥을 이끌었다. 규장각은 원래 1694년(숙종20) 여러 임금의 글과 글씨를 보관하기 위해 별도로 종정시 내에 만든 작은 건물이었다. 정조는 이를 모태로 하여 1776년 즉위 후 규장각을 임금이 쓴 글, 즉 어제를 봉안하기 위한 명분으로 창덕궁 후원에 설립하였다. 이후 규장각은 다수의 서적을 편찬.발간하면서 학술기관이자 당대의 정치와 사상을 선도하는 기구로 확대되었다. 규장각 건물은 창덕궁 후원에서도 가장 경치가 좋은 영화당 옆의 언덕에 2층 누각으로 지어졌다. 2층에 어필로 ‘주합루’라고 쓴 현판을 달았으며, 1층은 ‘규장각’ 현판을 걸었다. 규장각은 정조 이후에는 그 기능이 축소되었으나 조선 말기까지도 역대의 주요 서적을 보관하는 대표적인 왕실 도서관이자 학문을 연구하는 중심기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창덕궁 후원 연경당,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를 위해 사대부 저택처럼 지은 공간

창덕궁 후원 2번째 공간인 애련지 일원에 위치한 연경당은 낙선재와 함께 궁궐 건물 형식을 취하지 않고 사대부저택처럼 지어진 건물이다. 궁궐생활에 탈피하여 조용한 숲속에서 사대부 저택처럼 집을 짓고 휴식을 취하고 싶은 구한말 국왕들의 취향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국왕에 즉위하기 전 어린 시절을 사가(私家)에서 보냈던 고종은 궁궐보다는 사대부 저택을 선호하여 이곳 연경당을 애호했으며, 경복궁에도 후원에 건청궁을 짓고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손님들을 접견하였다.

연경당은 원래 순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손자로 세도정치가 극심했던 구한말 왕권을 회복할 수 있는 인물로 많은 사람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한 효명세자(1809~1830년)가 아버지 순조를 위해 지은 건물이다. 연경당은 창덕궁 후원 숲속에 사대부저택처럼 지은 건물로 안채와 사랑채가 분리되어 있다. 이후에 지어진 낙선재가 폐쇄적인 ‘ㅁ’자형 안채를 하고 있는 반면에, 연경당은 안채가 사랑채처럼 개방적인 ‘ㄱ’자형 구조를 하고 있으며, 넓은 마당과 행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연경당이 국왕을 위해 지어진 건물이기는 하지만, 국왕이나 왕비가 주최하는 각종 연회를 위한 공간으로 지어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효명세자는 아버지 순조를 위해 연경당을 짓고 여러차례를 연회를 열어 신하들을 초대하여 국왕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연경당 건물은 고종대에 중건된 것으로 고종과 순종은 이곳에 내외 인사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자주 가졌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 창덕궁 후원 2번째 공간인 애련지 부근 숲속에 자리잡고 있는 연경당(延慶堂)이다. 애련지 일대는 순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손자로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한몸에 받았지만 젊은 나이에 요절한 효명세자의 발자취가 많이 남아 있는 공간이다.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를 위해 사대부 저택처럼 지은 창덕궁 내 이궁(離宮)이라 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일반 사대부 저택처럼 솟을대문을 하고 있는 연경당 출입문인 장락문(長樂門). 연경당은 사대부 저택처럼 지었으나, 이궁(離宮)답게 장락문 앞으로 물길을 돌려 실개천이 흐르도록 하여 금천(禁川)과 같은 역할을 하도록 하고 있으며, 금천을 건너는 돌다리인 금천교(錦川橋)를 두고 있다. 반면에 국왕의 사적인 공간으로 삼도(三道)의 형식을 취하지는 않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연경당 앞을 흐르는 실개천은 애련지 연못으로 흘러든다.

OLYMPUS DIGITAL CAMERA연경당 앞 마당. 애련지와 의두합 안쪽에 위치한 연경당은 앞쪽으로 규장각이 있던 주합루와 창덕궁 침전영역과 연결되며, 뒷편으로는 옥류천과 길이 연결되어 있다. 조선시대 실제 국왕 일행이 후원을 행차할 때 이용하던 길이다.

SANYO DIGITAL CAMERA장락문을 들어서면 일반 사대부 저택처럼 대문간 행랑채가 있고 안채와 사랑채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별도로 있는 중문과 행랑채로 둘러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문간채 행각들. 일반 사대부저택과 달리 가마를 둘 수 있는 공간이 많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채가 있는 마당으로 들어가는 중문.

SANYO DIGITAL CAMERA연경당 안채. ‘ㄱ’자형 구조를 하고 있는 건물로 사당채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낙선재 안채가 폐쇄적인 경북지역 사대부 저택의 ‘ㅁ’자형 안채 구조를 하고 있는 반면에 연경당은 넓은 마당에 개방적인 구조를 하고 있는 중부지역 저택의 형태를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안채는 일반 사대부 저택과 달리 사랑채처럼 부엌을 두지 않고 있다. 연경당이 효명세자가 부모를 위해 궁중 연회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지었기때문에 넓은 대청마루와 방을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안채와 사랑채는 건물이 연결되어 있으며, 작은 쪽문을 통해 사랑채를 드나들 수 있도록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안채는 크고 작은 방들이 있는 행각으로 둘러져 있다. 국왕을 수행하는 인원들이 머물 수 있도록 많은 방을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안채. 궁궐내 휴식공간으로 지어졌기때문에 사방에 툇마루를 두고 있다. 툇마루에 걸터 앉아 마당과 주변 숲을 바라보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연경당 안채. 건물 규모는 크지 않지만 은근히 화려한 사대부집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안채와 사랑채 마당을 담장으로 분리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안채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행각. 일반 사대부저택에서는 볼 수 없는 구조로 많은 수행원들이나 손님들이 묵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연경당 사랑채. 앞면 6칸에 누마루가 있는 ‘-’자 형태의 건물이다. 안채와는 건물이 연결되어 있으며, 넓은 대청마루와 마당을 두고 있어 손님을 초대하여 연회를 가질 수 있는 건물구조이다. 현재의 연경당 건물은 순조대에 지어진 것은 아니고 고종대에 중건된 것이라고 한다. 연경당은 갑신정변때 김옥균 등 개화파들이 고종을 모시고 잠시 피한적이 있으며, 고종과 순종은 이곳에서 손님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자주 베풀었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사랑채에도 수행원이나 손님들이 머물 수 있는 행각이 많은 편이며, 뒷편에는 고종이 서재로 지었다는 선향재(善香齋)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선향재는 고종이 서재 겸 손님을 접견할 수 있는 응접실 용도로 지은 건물로 벽돌로 지은 중국풍의 건물이다. 경복궁 후원 건청궁 뒷편에 지은 집옥재와 비슷한 용도의 건물로 중국풍 건물을 선호했던 고종의 취향이 남아 있는 건물이다. 앞에는 차양을 설치하여 햇볕을 막거나 비를 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연경당은 국왕 거처하는 이궁으로 지은 건물로 중문도 솟을 대문을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수행원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인 행각들. 국왕이 모시는 가마를 둘 수 있는 공간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연경당 사랑채 마당

SANYO DIGITAL CAMERA연경당 사랑채와 안채를 분리해주는 담장. 그 앞에 괴석을 놓아서 장식적은 효과를 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뒷마당에도 담장으로 공간을 분리하고 있으며, 작은 쪽문을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선향재 뒷편 작은 동산에는 농수정(濃繡亭)이라는 작은 정자를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 농수정(濃繡亭)은 1칸짜라 작은 사모정 형태의 정자로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반도지 언덕에 있는 승재정과 비슷한 형태이다.

SANYO DIGITAL CAMERA연경당 사랑채로 출입하는 작은 협문. 국왕을 제외한 수행원들을 대체로 이 문을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연경당 안채 행각 바깥쪽.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수행원들이 출입하는 출입문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옥류천에서 내려오는 길에서 보이는 연경당 전경

OLYMPUS DIGITAL CAMERA연경당은 창덕궁에서 국왕 가족의 생활공간인 침전 뒷편 언덕 너머에 위치하고 있으며, 궐내각사와도 연결되어 있다.

연경당
효명세자는 아버지인 순조에게 진작례를 올리기 위해 1828년에 연경당을 건립했는데, 원래 모습은 지금과 상당히 달랐다. 진작례란 신하들이 왕과 왕비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는 행사로서 효명세자는 이를 왕권강화책으로 이용했다. 현재의 연경당은 1865년 고종이 새롭게 건립했다. 사대부 살림집의 제도를 본떠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서재인 선향재는 중국풍의 벽체와 서양풍 차양을 설치했다. 뒷마당 모퉁이 높은 곳의 농수정은 마치 매가 날개를 편 것 같이 날렵한 모습이다.

 

창덕궁 후원, 옥류천(玉流川) 일원

창덕궁 후원 깊은 곳에 위치한 옥류천 일원이다. 이곳은 옥류천 물길을 널찍한 바위인 소요암 위를 흐르게 만든 어정(御井)을 중심으로 작은 정자들인 소요정, 취한정, 태극정, 청의정, 농산정이 모여 있다. 이들 정자들은 농산정을 제외하고는 국왕이 비를 피하거나 잠시 쉬어갈 수 있는 1~3칸규모의 작은 정자이다. 옥류천 일대 정자들은 대부분 인조대에 지어진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으며, 옥류천(玉流川)일 적힌 선조의 글씨가 전해내려오는 것으로 볼 때 그 이전부터 옥류천 일대를 국왕이 찾은 것으로 보인다. 옥류천 뒷편 청의정 주변에는 국왕이 농사를 짓는 시범을 보였던 작은 논이 있다. 원래 국왕은 창경궁 춘당지에 있었던 논에서 농사짓는 시범을 보였는데, 이곳에소도 간략하게 시범을 보였다고 한다. 청의정의 초가 지붕은 이곳에서 재배한 볏집으로 엮었다고 한다.

농산정은 국왕이 옥류천 일대를 찾았을 때 다과상을 마련하거나 신하들과 강연을 할 수 있는 규모이다. 특히, 정조는 규장각 각신들을 이곳 옥류천으로 초대하여 시를 짓는 모임을 가졌으며, 순조와 효명세자 또한 정조을 본받고자 이곳에서 학문이 높은 신하들이나 유생들을 초정하여 강연을 열었다고 하다. 또한 어정에는 홈을 파서 물이 흐르도록 하여 그 위에 술잔을 돌리면서 시를 짓는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동궐 후원 중에서도 제일 깊은 곳에 위치한 오류천 주변은 국왕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었지만, 국왕이 신하들을 초청하여 관계를 돈독히 하던 사교의 장소로 사용된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존덕정에서 옥류천으로 넘어가는 언덕길

OLYMPUS DIGITAL CAMERA옥류천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쉬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취규정(聚奎亭)이 세워져 있다. 앞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인조18년(1640)에 처음 세워졌다고 한다. 취규정(聚奎亭)은 ‘학자들이 모인다’는 뜻으로 창덕궁 후원 숲속에서 조용히 쉴 수 있게 마련된 공간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취규정이 있는 언덕 아래로 보이는 옥류천 일대. 소요암을 흐르는 옥류천을 중심으로 취한정,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농산정(籠山亭), 취한정(翠寒亭) , 청의정(淸線亭) 같은 작은 정자들이 모요 있다. 원래는 창덕궁 후원에서도 제일 깊은 곳에 위치한 조용한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성균관대학교 교정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어 시끄러운 편이다.

취한정과 소요정
옥류천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취한정이다. 옥류천 언저리의 어정(御井)에서 약수를 들고 되돌아올 때 쉴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소박한 정자이다. 건축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취한정에 대한 숙종과 정조의 시(詩)가 전하고 있다. 취한정의 아래쪽에는 옥류천 폭포가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소요정(逍遙亭)이 자리하고 있다. 소요정에서는 옥류천과 소요암, 폭포 등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심산 계곡의 운치를 느낄 수 있다. <출처: 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옥류천 입구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취한정. 취한정은 국왕이 옥류천 어정에서 약수를 마시고 돌아갈 때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정자의 규모은 앞면3칸, 옆면1칸으로 그리 크지 않은편으로 숙종대 이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취한정 주련

OLYMPUS DIGITAL CAMERA소요정을 지나 흘러 내려오는 옥류천. 인공적으로 축대를 쌓아서 만든 작은 수로이다.

SANYO DIGITAL CAMERA 2008년 가을 취한정

OLYMPUS DIGITAL CAMERA창경궁으로 흘러내려가는 옥류천

OLYMPUS DIGITAL CAMERA  소요정은 옥류천 바로 아래에 있는 앞면과 옆면이 1칸인 사모지붕을 하고 있는 작은 정자이다. 인조대에 처음 세워졌으며 후대 국왕들이 이곳 경치를 묘사한 시를 남겼다고 한다. 소요정은 좁은 공간으로 국왕 혼자 정자에 올라 옥류천 물길을 감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 옥류천은 창덕궁 후원 제일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샘물에서 시작하여 개울이 되어 흘러 내려간다. 옥류천 어정(御井)은 커다란 바위였던 소요암을 파내어 인공적으로 옥류천 물이 흐르도록 하고 있다. 소요정에서는 어정에서 작은 폭포를 이루면서 떨어지는 시냇물을 감상할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2008년 가을 소요정

옥류천 어정(御井)
창덕궁의 후원 북쪽 깊은 골짜기에 흐르는 개울을 옥류천이라 한다 인조 14년(1636), 널찍한 바위인 소요암 위에 U자형의 홈을 파서 물을 돌게 하여 임금이 신하들과 더불어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기도 하였다. 창덕궁의 후원 북쪽 깊은 골짜기에 흐르는 개울을 옥류천이라 한다 인조 14년(1636), 널찍한 바위인 소요암 위에 U자형의 홈을 파서 물을 돌게 하여 임금이 신하들과 더불어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기도 하였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옥류천 어정. 바위에 홈을 파서 옥류천 물이 흐로고 있다. 국왕이 신하들과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역대임금의 필적을 모은책.

선조에서 숙종까지의 어필을 모아 판각하여 목판으로 찍은 책이다. 목판본 열성어필은 숙종 년간에 처음으로 간행되었고 경조과 영조초에도 간행되었다. 그중 선조임금 난초그림과 창덕궁 후원에 있는 ‘옥류천’을 적은 글씨이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옥류천 어정. 샘물이 솟아 오르는 바위에는 인조가 써 놓은 글씨가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
바위에 새겨진 글씨

청의정(清漪亭), 태극정(太極亭), 농산정농산정(籠山亭)
옥류천 공간의 제일 안쪽에는 청의정(清漪亭)이 자리잡고 있는데, 궁궐 안에서 유일하게 초가 지붕을 한 특이한 정자이다. 농사의 소중함을 백성들에게 일깨워 주기 위해, 임금이 정자 앞쪽의 논에서 손수 수확한 볏집으로 이엉을 잇게 하였다. 태극정의 아래쪽에는 농산정(籠山亭)이 있는데, 납도리로 엮은 홑처마의 맞배 지붕 집이다. 1636년 인조 14년에 창건되어 임금이 옥류천 주변으로 거동하였을 때 다과상 등을 마련하던 집으로 쓰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 이유로 집 모양도 일반 행랑채처럼 소박하게 꾸며져 있다. 1636년 인조 14년에 세운 정자로 처음에는 운영정(雲影亭)이라고 했다. 건물은 굴도리를 엮은 1칸짜리 네모 정자로 지붕 중앙에 절병통을 놓았고 바닥 기둥 밖으로 아(亞)자살로 궁창부를 꾸민 평난간을 둘렀다. <출처: 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 청의정은 옥류천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정자로 초가 지붕을 하고 있다. 청의정 주위로는 국왕이 직접 농사를 짓는다는 의미로 벼가 심어져 있다. 청의정 지붕은 이곳에서 재배했던 볏짚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앞면 1칸짜리의 작은 정자이다.

SANYO DIGITAL CAMERA2008년 가을 청의정

OLYMPUS DIGITAL CAMERA  청의정 앞쪽에 위치한 작은 정자인 태극정이다. 인조대에 처음 세워진 것으로 앞면 1칸에 사모지붕을 하고 있는 작은 정자이다. 다른 정자들과는 달리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려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2008년 가을 태극정

OLYMPUS DIGITAL CAMERA옥류천 일대 정자 중 가장 큰 규모를 하고 있는 농산정이다. 앞면 5칸으로 대청마루2칸, 온돌방2칸, 부엌 1칸으로 이루어졌다.  이곳은 국왕이 옥류천을 찾았을 때 식사등을 하던 공식적인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농산정은 정조가 규장각 각신들을 옥류천 일대로 초대해서 꽃놀이를 즐겼던 장소이며, 순조와 효명세자 또한 이곳에 성균관 유생이나 학자들을 초대하여 경론을 강론하게 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 내원상화임자갱재축, 정조와 규장각 신하들의 즉흥시 모음(1792년),

1792년 3월 21일에 창덕궁 후원에서 정조와 규장각 신하들이 농산정에서 꽃구경하고 수택재(현 부용정)에서 낚시를 즐긴 후 쓴 시를 모은 두루마리이다. <출처:고궁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 규장각 각신들과 모임에 정조가 직접 짓고 쓴 정조어제어필

SANYO DIGITAL CAMERA 정조는 규장각 각신들과 창덕궁 후원에서 모임을 자주 가졌는데, 1792년 정조와 신하들이 짓고 쓴 친필 시를 모아 연결한 것이다.

SANYO DIGITAL CAMERA2008년 가을 농산정

OLYMPUS DIGITAL CAMERA옥류천을 나와서 다시 연경당으로 걸어가는 길

옥류천(玉流川) 일원
후원 북쪽 깊은 골짜기에 흐르는 시내를 옥류천이라 한다. 1636년,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다듬어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 들였고 작은 폭포로 떨어져 옥류천이 시작된다. 때로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유상곡수연이 이곳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바위에 새겨진 ‘玉流川’ 세 글자는 인조의 친필이고, 오언절구 시는 일대의 경치를 읊은 숙종의 작품이다.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농산정(籠山亭), 취한정(翠寒亭) 등 간략한 규모의 정자를 곳곳에 세워 매우 은밀한 정원을 이루었다. 작은 논을 끼고 있는 청의정(淸線亭)은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궁궐내 유일한 초가집이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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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 존덕정과 폄우사

창덕궁 후원 3번째 공간은 한반도 모양을 하고 있는 연못인 반도지(半島池)를 중심으로 공간이 형성되어 있다. 영화당과 규장각 주합루가 있는 부용정 부근이 공적인 성격이 강하다면, 연못 주위에 작은 정자들이 있는 반도지 일대는 국왕 개인을 위한 사적인 공간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반도지는 원래 둥근 연못 1곳과 작은 네모꼴 연못 2개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변형되었다고 한다.

반도지 일대는 후원 중에서도 비교적 늦은 시기에 조성된 공간으로 가장 오래된 건물이 17세기에 조성된 존덕정이다. 존덕정에는 정조가 지은 글을 새긴 현판이 걸려 있으며, 그 옆에는 폄우사가 자리하고 있다. 연못가에 자리잡은 관람정과 승재성은 작은 정자이지만 장식성이 강하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는데, 청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SANYO DIGITAL CAMERA동궐 후원 3번째 공간으로 반도지(半島池)라는 연못을 중심으로 공간이 형성되어 있다. 이곳은 공식적인 연회나 행사를 위한 공간은 없고 국왕이 개인적으로 사색을 즐기기나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연못주변에 작은 정자인 존덕정, 폄우사, 관람정, 승재정이 자리잡고 있다. 정조가 직접 지은 글이 현판에 걸려 있는 존덕정이 가장 오래되으며, 대부분 구한말에 조성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궐 후원 3번째 공간인 반도지 일대로 들어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반도지는 곡선형으로 만든 연못으로 한반도처럼 생겼다고 해서 반도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래는 네모꼴 연못 2개와 둥근 연못 1개가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지금의 모양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반도지를 지나서 옥류천으로 연결되는 길

승재정(勝在亭)
승재정은 관람정의 건너편 연지(蓮池)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위치한 정자로 우거진 숲 사이에 있다. 장대석으로 쌓은 4각형의 기단 위에 사방 1칸씩으로 된 건물로 둥근 기둥을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사모 지붕이며 지붕 정상에 절병통을 놓았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 반도지 남쪽 언덕위에 세워진 정자로 화강석 기단 위에 1칸짜리 건물을 올려 놓고 있다. 창덕궁 후원 정자 중에서는 비교적 늦은 시기인 구한말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관람정 뒷편 언덕에서 보이는 승재정. 경복궁 향원정과 비슷한 분위기를 주고 있는 구한말 양식의 건물이다.

SANYO DIGITAL CAMERA연못 남쪽 언덕위에 정자가 세워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2008년 가을 승재정

존덕정(尊德亭)
반월지 남쪽에 이중 지붕을 한 육각형 정자가 눈길을 끄는데 존덕정이다. 인조 22년(1644)에 세워져 처음에는 ‘육면정(六面亭)’이라 했다가 나중에 이름을 고쳤다. 반월지(反月池)란 이름으로 보면 반달 모양의 연못이어야 하는데 한 눈에 보아도 그렇지 않다. ‘동궐도(東闕圖)’에는 존덕정 북쪽에 네모난 연못과 반달 모양의 연못이 묘사되어 있다. <출처:문화재청>

존덕정과 정조의 교시
존덕정 안 북쪽 벽에는 ‘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제목으로 빽빽하게 쓴 현판이 걸려 있는데 정조가 집권 말기인 1798년에 직접 지은 글이다. “세상의 모든 시내는 달을 품고 있지만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유일하니, 그 달은 곧 임금인 나이고 시내는 곧 너희 신하들이다. 따라서 시내가 달을 따르는 것이 우주의 이치”라는 강력한 내용이다. 평생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던 정조의 준엄한 꾸짖음을 듣는 듯하다. 천장 중앙에는 쌍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 역시 왕권의 지엄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반월지라는 작은 연못과 반도지 사이에 있는 존덕정. 이곳에 있는 4개의 정자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644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정자에는 정조가 쓴 글이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다.

SANYO DIGITAL CAMERA존덕정 또한 창덕궁 후원의 다른 정자처럼 작은 연못에 발을 걸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존덕정 뒷편으로 반월지라는 작은 연못이 있고, 수로를 통해 반월지에서 반도지로 물이 흐른다.

OLYMPUS DIGITAL CAMERA수로를 건너는 아치형 돌다리

OLYMPUS DIGITAL CAMERA반도지로 물이 흐르는 좁은 수로. 배수시설인 석누조를 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존덕정으로 들어가는 돌다리

OLYMPUS DIGITAL CAMERA돌다리 앞에 세워져 있는 연잎모양을 하고 있는 석물

폄우사(砭愚榭)
존덕정 서쪽에는 폄우사가 있다. ‘폄우’란 이름은 원래 송나라 학자 장재의 좌우명에서 따온 것이다. 장재는 서재 양쪽에 ‘어리석음을 고친다’라는 뜻의 ‘폄우’와 ‘아둔함을 고친다’라는 뜻의 ‘정완(訂頑)’을 붙여 놓고 좌우명으로 삼았다. <동궐도>를 보면 원래 폄우사는 ‘ㄱ’자 모양이었으나, 현재는 동향을 했던 부분은 없어지고 ‘ㅡ’자 모양의 집만 남아 있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 존덕정 안쪽에 있는 작은 정자인 폄우사이다. ‘폄우(砭愚)’란 ‘어리석음을 고치다’라는 뜻이다. 폄우사는 1827년에 그려진 <동궐도>에는 ‘ㄱ’자로 그려져 있으나 지금은 날개채는 없고 앞면 3칸 규모의 ‘-’자형 건물이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 2008년 폄우사.

관람정(觀纜亭)
반도지(半島池)라 불리는 연못가에 있는 이 정자는 그 평면이 합죽선(合竹扇)을 편 듯한 모양으로 되어 마루틀이나 지붕틀에서도 평면형태에 따라 곡재를 사용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태의 건물이다.현재까지 남아있는 정자 중에 하나밖에 없는 부채골 정자인 관람정은 6개의 초석 위에 가늘고 긴 두리기둥을 세워 굴도리를 결구하였다. <출처:문화재청>

OLYMPUS DIGITAL CAMERA 반도지 연못에 발을 걸치고 있는 작은 정자인 관람정이다. 19세기에 제작된 동궐도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구한말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부채꼴 모양을 하고 있으며, 장식적인 요소를 많이 갖고 있는 정자로 구한말 청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SANYO DIGITAL CAMERA2008년 가을 관람정

SANYO DIGITAL CAMERA2008년 가을 반도지 주변

SANYO DIGITAL CAMERA반도지 주변 단풍

OLYMPUS DIGITAL CAMERA옥류천(玉流川) 계곡으로 넘어가는 숲길

SANYO DIGITAL CAMERA2008년 가을

존덕정과 폄우사
이 부근은 후원 안에서 가장 늦게 지금의 모습을 갖춘 곳이다. 연지는 원래 두 네모꼴과 둥근 한 개의 연못으로 나누어졋다가 일제강점기에 하나의 곡선형으로 바뀌었다. 주변에 육각 겹지붕 정자인 존덕정, 부채꼴모양의 관람정, 길쭉한 맞배지붕을 가진 폄우사 등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이 세워졌다. 관람정 맞은 편 언덕에는 단칸의 사모지붕을 가진 승재정이 날아갈 듯 앉아 있다. 1644년 건립된 존덕정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관람정과 승재정은 1830년대 이후에 세워졌다. <출처: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