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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장기리 암각화(보물), 알터마을 입구 큰 바위에 새겨진 그림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장기리에 있는 암각화(보물)이다. 알터마을 입구 큰 바위에 동심원, 십자형, 가면모양 등 다양한 그림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동심원은 풍요를 기원하는 태양신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며, 십자형은 마을의 생활권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가면모양은 머리카락과 수염 등이 묘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에서 정면으로 내려다 보이는 낙동강 지천인 회천 옆 알터마을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근처 고인돌에 있는 유적에서 석기와 토기 등의 출토되고 있어 청동기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암각화는 북방민족과 관련된 유적으로 민족의 기원을 보여주며 당시 사람들의 신앙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는 유적이다.

SANYO DIGITAL CAMERA고령 장기리 암각화(보물).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바위에 새긴 그림으로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암각화 실측도

SANYO DIGITAL CAMERA바위 그림 중 태양신을 상징하는 동심원을 볼 수 있다. 농업사회에서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를 갖는 듯 하다.

SANYO DIGITAL CAMERA바위에 새겨진 그림 중 선명하게 보이는 부분. 청동기 유물 중 동기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수염이 있는 사람 얼굴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며 부적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암각화가 새겨진 바위가 있는 알터마을 입구.

고령 양전동 암각화, 보물 605호, 경북 고령군 고령읍 장기리
이 그림은 청동기시대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암각화이다. 경북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며 소칭 ‘알터마을’이라 불리는 곳에 위치한다. 그림은 높이 3 m, 너비 6 m 정도의 산비탈 절벽에 새겨져 있다. 검파형은 상하로 긴 장방형에 안쪽을 가로선만으로 2~3개로 구분하고 그 안에는 성혈을 묘사하였으며 윗부분은 U자형으로 홈을 파서 깃털모양의 선을 위와 양쪽으로 새겼으며, 모두 29개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가운데의 성혈을 중심으로 3중의 동심원이 가운데와 양쪽으로 각각 1개씩 확인되며, 오른 쪽 위에는 원안에 4개의 점을 찍은 것도 보인다. 이러한 동심원을 일반적으로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를 가진 태양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일대에서 청동기시대 유물이 함께 채집되었는데 이것들과의 직접적인 연관은 없으나 이곳이 청동기인들의 생활의 터전임을 추측케 한다. 청동기인들이 검파형암각으로 대표되는 신성물을 새기고 동심원으로 태양신을 묘사한 후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던 제의 장소로서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안내문, 고령군청, 2009년)

<출처>

  1. 안내문, 고령군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년

울주 천전리 각석(국보),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선사시대 바위그림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에 있는 바위그림인 천전리 각석(국보)이다. 반구대 암각화(국보)가 있는 대곡천에서 상류방향으로 2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암각화 유적으로 바위에 각종 동문문양과 동심원을 비롯한 기학학적인 문양이 상부에 새겨져 있다. 반구대 암각화, 고령 알터마을 암각화와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형태의 암각화는 신석기말이나 청동기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농경의 풍요와 다산을 비는 종교적 상징으로 해석되며 북방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하부에는 돛을 단 배, 말, 용 등의 그림과 글씨들이 가는 선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신라 때 새겨진 것으로 기마행렬도, 배가 항해하는 모습 인물 등의 그림들은 당시 생활양식을 연구하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그림과 함께 800여자 이상의 글씨가 새겨졌던 것으로 추정되며, 약 300여 자 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 주로 신라 법흥왕때 새겨진 것들이다.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사람들이 새겨놓은 그림으로 당시의 생활모습이나 정신세계 등을 보여주고 있는 유적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울주 천전리 각석(국보).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오랜 세월동안 바위에 새겨진 그림들이다. 윗부분이 15도 정도 기울어진 형태의 바위에 각종 그림과 글씨가 새겨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바위에 새겨진 그림들. 윗부분에는 각종 동물문양과 동심원, 나선형, 마름모등 추상적인 문양들이 새겨져 있고 아랫부분에는 돛을 단 배와 말 등의 그림과 글씨가 새겨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바위에 새겨진 글씨와 그림 등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놓은 안내표지판의 그림. 아래쪽에 글씨가 많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국보147호 울주 천전리 각석 15-20171114

바위그림에 새겨진 각종 문양과 그림들.

암각화란 바위위나 큰 절벽, 동굴 안 벽면 등에 사물이나 기호를 쪼기, 새기기, 칠하기 등의 기법으로 그린 그림을 ‘바위그림’, ‘암각화’라고 한다. 바위그림은 후기 구석기시대의 유적에서도 발견되지만 전형적인 사례들은 신석기 및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주로 찾아진다. 바위그림은 대개의 경우, 풍요, 다산 제의의 산물로 이해되고 있다.
- 기하학무늬: 둥근무늬, 우렁무늬, 마름모꼴무늬, 굽은무늬, 가지무늬
- 동물상: 사슴, 호랑이, 파충류, 환상적인 동물, 물고기
- 인물상, 서있는 입상, 인물상 (안내문, 울산시청, 2011년)

OLYMPUS DIGITAL CAMERA왼쪽편에 새겨진 그림들. 눈으로 인식하기는 쉽지 않지만, 동물그림 등이 많이 새겨진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왼쪽에서 2번째, 마름모꼴 무늬와 물고기모양 무늬 등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왼쪽에서 3번째. 마름모꼴무늬, 사람얼굴 등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심원, 마름모꼴, 타원형 등 다양한 형태의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왼쪽에서 4번째

OLYMPUS DIGITAL CAMERA왼쪽에서 5번째

OLYMPUS DIGITAL CAMERA아래쪽에 새겨진 그림과 글씨들. 신라 법흥왕 때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며 돛을 단배, 말 등의 그림이 새겨져 있는데 눈으로 인식하기가 쉽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아래쪽에 새겨진 그림들

OLYMPUS DIGITAL CAMERA천전리 각석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이곳은 반구대 암각화가 있는 대곡천에서 상류방향으로 2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그림이 새겨진 바위 입구.

OLYMPUS DIGITAL CAMERA그림이 새겨진 바위.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천전리 각석 앞을 흐르는 대곡천. 반구대 암각화 주변과 마찬가지로 기암괴석이 빼어난 경치를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맞은편에도 비슷한 형태의 바위들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바위 앞을 흐는 대곡천.

울주 천전리 각석(국보 147호),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산 210
천전리 각석은 1970년 12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암각화 유적으로, 대곡천변에 있는 윗부분이 15도 가량 경사진 형태의 바위에 각종 동물문양과 동심원, 나선형, 음문, 마름모와 추상적인 문양, 역사시대에 새겨진 돛을 단 배, 말과 용 등이 가는 선 그림, 신라시대 명문 등이 새겨져 있다. 청동기시대로 추정되는 추상적인 문양들이 암면의 전면에 걸쳐 분포되어 있으며 이러한 추상적인 도형 그림은 농경의 풍요와 다산을 비는 일종의 종교적 상징으로 해석된다. 신라시대로 추정되는 날카로운 금속도구를 이용하여 그어서 새긴 세선화는, 망를 끌거나 돛을 단 단배, 말 등이 행렬을 이루고 있으며, 용 그림 등도 확인된다. 신라시대 명문은 을사, 기미, 등을 통해 6세기 초의 기록으로 추정되며, 명문은 크게 법흥왕의 동생 사부지갈문왕이 을사년(645년) 6월 18일 새벽에 천전리로 놀러와 새긴 것과 사부지갈문왕 부인 지몰시혜가 남편이 죽자 그리움에 사무쳐 그의 흔척이 남은 천전리 계곡으로 어린 아들(후의 진흥왕)과 함께 찾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천전리 각석은 선시대뿐만 아니라 고대사 연구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유적이다. (안내문, 울산시청, 2011년)

<출처>

  1. 울산시청
  2. 문화재청
  3. 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국보), 선사시대 생활모습을 표현한 그림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에 위치한 반구대 암각화(국보)이다. 태화강변의 바위절벽에 새긴 그림으로 사람을 비롯해 사냥대상이던 고래, 거북이, 사슴, 호랑이, 멧돼지 등이 새겨져 있다. 사람은 짐승을 사냥하거나 배를 탄 모습, 그리고 춤을 추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성기를 강조한 경우가 많다. 짐승은 그물이나 우리에 갇히거나, 새끼를 배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선과 점을 이용하여 동물과 사냥장면을 생동감있게 묘사하고 있다. 사냥 및 고기잡이의 성공을 빌기 위한 것으로 생각되며, 당시 사람들의 생활과 풍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시베리아 일대의 선사시대 바위그림들과 비교되며 신석기시대 말기에서 청동기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반구대(盤龜臺)는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에 있는 태화강 태화강 상류지역을 말한다. 이 곳 반구대의 계곡은 암각화가 있는 곳을 비롯하여 바위절벽이 여러곳에 있어 예로부터 경치가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언양IC에서 나와 경주방향으로 20분쯤 달려가다 고속도로 방향으로 좁은길로 들어서서 한 10분쯤 자동차로 달려가면 반구대가 있는 계곡을 찾아 갈 수 있다. 1965년 건설된 사연댐때문에 겨울을 제외하고는 암각화는 대부분 물에 잠겨 있다. 암각화를 볼 수 없을 때가 많지만, 반구대 주변의 경치 또한 뛰어나다.

SANYO DIGITAL CAMERA반구대 암각화가 있는 바위절벽. 댐건설로 대부분 물에 잠겨 있다.

SANYO DIGITAL CAMERA암각화가 잠겨 있는 부분.

국보285호 울주 대곡리 반구대암각화 13-2017_11_14겨울 동안 물이 빠졌을 때 드러난 반구대 암각화.

SANYO DIGITAL CAMERA반구대 암각화 사진. 신석기인의 생활모습과 정신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신석기시대 후기 또는 청동기 초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어로를 중심으로 생계를 이어갔던 한반도 신석기인의 바램을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반구대 암각화가 있는 곳으로 들어오는 길에 볼 수 있는 바위절벽. 이곳을 반구대라고 부르며, 주변에서 바위절벽이 있는 지형이 많다. 맞은 편에 반구서원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반구대 맞은편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곳에 반구서원이 세워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반구서원 앞을 지나는 길.

SANYO DIGITAL CAMERA2개의 하천이 만나는 지점. 암각화가 있는 곳에서 약간 떨어진 곳이지만 물에 잠기지는 않았다.

SANYO DIGITAL CAMERA암각화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보이는 반구서원.

SANYO DIGITAL CAMERA암각화가 있는 곳에 가까워지면 수목들이 물에 잠기기 시작한다.

SANYO DIGITAL CAMERA반구대 암각화 앞 안내표지판. 이곳에서 암각화가 있는 바위 절벽을 내려다 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암각화가 새겨져 있는 바위절벽. 태화강 상류에 위치한 반구대는 기암괴석이 만들어 내는 경치가 빼어난 곳이다.

SANYO DIGITAL CAMERA암각화가 있는 절벽 부근.

울산 대곡리 반구대암각화, 국보 285호,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이것은 암벽 경사면(10 m × 3 m)에 290여 점의 물상들이 새겨져 있는 선사시대의 암각화이다. 강바닥보다 높은 암반 위에 새겨져 있어서 원래는 물에 잠기지 않았으나 주변에 사연댐이 건설되면서부터 댐속에 잠겨 가뭄 때가 아니면 볼 수 없게 되었다. 암각화는 여러가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인물상, 동물상, 기타 배 같은 물상들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인물상은 탈을 쓴 가면, 물짐승을 잡는 사냥꾼, 배를 타고 고기잡이 하는 어부 등이며, 동물상은 사슴, 호랑이, 멧돼지, 고래 등이고, 물상은 이 짐승들을 잡는 배, 그물, 덫 등이다. 이 조각(그림)들은 바위면을 쪼아가는 기법으로 조각한 것인데 선과 점으로 단순 소박하게 새겼지만,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과 역동감을 느낄 수 있어서 자연주의 양식에서 추상주의 양식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신석기 후기 내지 청동기시대으 사냥미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다. 따라서 이 조각은 울산지역에서 고기잡이와 사냥에 종사하던 수렵어로인들이 사냥의 풍성과 다산을 기원해서 만든 일종의 종교적인 선사미술의 대표작품이다. (안내문, 울산시청, 2008년)

<출처>

  1. 울산시청
  2. 문화재청
  3. 중앙박물관
  4. 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여 산직리 지석묘, 송국리 유적지 부근에 남아 있는 고인돌

충남 부여군 초촌면 산직리에 남아 있는 청동기시대 지석묘이다. 송국리 주거유적지(사적) 부근 낮은 구릉지대가 끝나고, 넓은 평야의 논이 시작되는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2기의 고인돌이 나란히 있는데, 큰 판돌을 4개의 고인돌로 고인 탁자식 고인돌 1개와 받침돌이 없는 덮개식 고인돌 1개가 있다. 동쪽에 있는 탁자식 고인돌은 덮개돌이 길이 5.8 m, 너비 3.7 m로 받돌은 일부만 남아 있다. 서쪽편 고인돌도 길이 5.8 m, 너비 4.2 m로 받침돌이 없으며 매장한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아 제단의 기능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부근에 있는 송국리 유적(사적)은 송국리형토기를 비롯하여 동시대를 대표하는 다양한 유물들이 발굴된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주거유적이다. 1975년 이후 여러 차례의 조사를 통하여 60여 기의 움집과 돌널무덤.독무덤 등이 확인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부여 산직리 지석묘. 송국리 유적이 있는 구릉 남쪽편에 2기의 고인돌이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동쪽편에 있는 고인돌. 받침돌이 있는 탁자식 고인돌로 규모는 비교적 큰 편이다.

SANYO DIGITAL CAMERA덮개돌 위에는 의미가 있는 듯 구멍을 판 흔적이 있지만, 석재로 쓰기 위해 후대에 판 채석공이라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서쪽편에 있는 덮개식 고인돌. 덮개돌의 규모는 탁자식 고인돌과 비슷한 크기이다. 덮개돌 아래에 무덤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제단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고인돌이 있는 구릉 아래로 보이는 논산평야

SANYO DIGITAL CAMERA송국리 유적지(사적 249호)

거대한 바윗돌로 만든 무덤으로 농경의 비중이 점차 커지던 청동기 시대에 나타났다. 큰 판돌을 4개의 돌로 고인 탁자식 고인돌과 고인돌이 없는 덮개식 고인돌이 있다. 석성천으로 흘러드는 연화천에 의해 형성된 낮은 구릉 끝에 자리하고 있어 당시 농경집단의 영역 표시적인 기능과 무덤의 기능을 같이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기 모두 일찍이 훼손되어 1991년과 1992년의 발굴 조사에서는 아무런 유물도 확인하지 못하였다. 현재 지석묘의 뚜껑돌에 보이는 자국들은 이 돌을 깨뜨려 석재로 사용하려 했던 후세 사람들의 채석공 흔적이다. (안내문, 부여군청, 2010년)

<출처>

  1. 부여군청
  2. 문화재청
  3.  두산백과
  4.  위키백과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부여 송국리 유적(사적), 송국리형 토기로 대표되는 청동기시대 주거유적지

충남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에 있는 송국리 유적(사적)이다. 부여 송국리는 부여와 논산의 경계가 되는 지점의 낮은 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송국리형토기를 비롯하여 동시대를 대표하는 다양한 유물들이 발굴된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주거유적이다. 1975년 이후 여러 차례의 조사를 통하여 60여 기의 움집과 돌널무덤.독무덤 등이 확인되었으며, 마을 둘레에는 나무울타리를 둘렀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다량의 불탄 쌀과 농공구, 요령식 동검, 청동도끼 거푸집 등을 통하여 본격적인 벼농사와 함께 청동기의 제작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부여박물관에는 벼농사와 관련된 대표적인 유물로 이 곳 송국리에서 출토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실제 유적지는 발굴 후 다시 흙으로 덮어 버렸기때문에 재현해 놓은 움집 등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유물은 볼 수는 없지만 청동기시대 마을이 형성된 지역적 특징과 여러 모형들로 선사시대에 대한 간접 체험을 할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부여 송국리 유적(사적 249호) 입구. 넓은 평야지대인 논산과 부여.공주가 경계를 이루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송국리유적지는 해발 20~60 m의 낮은 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원형 또는 방형의 움집, 목책을 꽂았던 자리, 각종 무덤 등이 확인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유적지 동쪽편. 전시관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송국리 선사 주거유적지 주변의 넓은 평야. 논농사가 발달할 수 있는 지형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큰 강은 흐리지 않지만, 북쪽편 계룡산을 중심으로 산간지역에서 개천이 흘러와서 금강을 향해서 흘러가는 지역으로 수량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송국리 유적지 모형(부여박물관, 2012년). ‘∩’자 모양으로 생긴 구릉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송국리 유적지 형태. 평야 지대에 위치한 낮은 구을으로 양쪽으로 작은 개천이 흐르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마을 모형(부여박물관).

송국리 선사취락지
송국리 일대는 해발 25 ~ 60 m에 달하는 구릉지역으로, 청동기시대부터 고려시대에 걸친 여러가지 유적이 분포하고 있는 야외박물관이다. 이중 가장 중요한 유적은 청동기시대 취락 유적이다. 1975년부터 시작된 발굴조사 결과 60 ha나 되는 넓은 지역에 평면이 원형이거나 방형인 집자라와 마을을 둘러싸는 구덩이와 나무울타리, 마뭇가지를 둑에 꽂아 외부로부터 오는 적이나 짐승을 맞았던 녹채 시설같은 방어시설이 확인되었다. 토기를 굽던 가마와 마을의 물을 다루었던 배수로, 저장구덩이도 나타났다. 또 매장시설로는 돌널무덤과 움무덤, 독무덤도 조사되었다. 가까운 산척리에는 고인돌이 있어 이들의 무덤으로 보인다. 이 밖에 백제시대의 움무덤과 독무덤, 토기가마, 고려시대의 움무덤과 돌곽무덤, 조선시대의 움무덤도 확인되었다. 송국리 청동기시대 유적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중기, 혹은 후기의 문화에 속하며, 농사를 본격적으로 지었던 마을 유적이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10년)

SANYO DIGITAL CAMERA송국리 유적지 입구.

SANYO DIGITAL CAMERA전시관 옆에 움집을 재현해 놓고 있다. 대표적인 원형과 네모모양의 움집을 재현해 놓았다.

SANYO DIGITAL CAMERA송국리 유적지에 전시된 송국리집터(원형집자리)

OLYMPUS DIGITAL CAMERA부여박물관에 재현해 놓은 움집모형(부여박물관,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움집 내부 모형(부여박물관, 2012년)

이제까지 조사된 43기의 집자리유적 중 원형집자리는 14기인데 중심지역은 54지구이다. 크기는 평면의 지름이 3.5~5.3 m, 깊이 0.3~1.5 m로, 크기가 다양한데, 대개 지름이 4.5 m내외이다. 원래 깊이는 1 m가 넘었으나 많이 깎여 나간 듯하다. 바닥 중앙에 길이 1 m정도의 구덩이를 길게 파고 그 양쪽 끝 부분에 기둥구멍을 대칭으로 배치한 것이 특징인데, 원형이나 방형 집자리에 이런 구조를 가진 것을 송국리형 집자리하고 부른다. 이 구덩이 바깥 양쪽에, 혹은 구덩이 주위에 4개 기둥을 배치한 형식이 있다. 출입구 시설은 보이지 않아 사다리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바닥에는 흙을 깔거나 다진 흔적이 있으나 화덕이 보이지 않는다. 층위로 보아 환호나 나무울타리, 방형 집자리보다 늦은 시기에 만들어졌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10년)

SANYO DIGITAL CAMERA 송국리집터(장방형집자리).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은 모습이 후대의 주거시설과 비슷한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원형집터보다 연대가 빠르다고 한다. 동시대에 같이 존재한 것으로 보이며 기능적인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SANYO DIGITAL CAMERA집터 모형(송국리유적 전시관, 2010년)

원형 집자리보다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집자리는 짧은 변이 3~5 m, 긴 변이 4~7 m, 깊이 0.3 m 정도이며 넓이는 24 ~ 28 m²정도이다. 한 사람이 차지하는 면적을 5 m²로 계산하면 하집에 5~6명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형 집자리에서 보이는 타원형 구덩이가 거의 보이지 않으며, 화덕시설이 명확하지 않고, 출입구 시설이 보이지 않는다. 54-2호 집자리에서는 벽면에 판자를 세워 마무리하였다. 54지구와 57지구 조사결과 나무 울타리와 집자리를 짓기 위하여 경사면을 깎아 대지를 마련한 공사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원형 집자리보다 깊이가 얕아 반수혈 혹은 지상건물일 가능성이 높으며, 층위로 보면 원형 집자리보다 이르지만, 기능의 차이로 보는 견해도 있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SANYO DIGITAL CAMERA마울 경계와 방어를 위해 설치한 목책. 송국리에서는 약 430 m 정도의 목책이 확인되었다.

청동기마을의 밖에 나무울타리를 세워 영역을 구획한 시설이다. 송국리유적에서는 430 m 정도가 확인되었으며 지름 30 cm가 되는 기둥을 180 cm 간격으로 열을 지어 세우고 나무를 가로질러 고정하고 점토로 벽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 목책은 방형주거지와 관련된 시설로 여겨진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목책 바깥에 방어를 위해 설치했던 시설인 녹채.

경사진 벽에 작은 나뭇가지를 꽂아 밖에서 들어오는 사람이나 동물들을 저지하는 시설이다. 이 시설은 목책열 밖의 경사면에 지름이 50~60 cm 정도의 비교적 큰 기둥구멍들이 130 cm 간격으로 배치되거나, 작은 기둥은 지름이 10~30 cm로 크기가 다양하며 배열이 불규칙하다. (송국리유적전시관,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마을 능선에는 목채 외 참호처럼 U자형으로 구덩이를 파서 만든 환호시설도 확인되었다.

환호시설
54지구와 57지구의 능선에 남동-북서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앞선 시기의 나무 울타리 시설을 파괴하고 지나가고 있다. 구덩이의 단면은 낮은 U자형으로, 너비는 차이가 있으나 2.7~3.8 m, 깊이는 0.9~1.4 m 정도이다. 환호는 원래 적이나 짐승의 침입을 막는 마을의 방어시설이지만, 송국리 경우에는 지형이 많이 깎여 나갔을 가능성이 있으나, 현재의 깊이가 낮아 방어보다는 다른 기능을 가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나 방향이나 지형으로 보아 55지구의 원형 집자리를 둘러싼 유구로 보이는데, 층위에서 보듯이 환호와 원형 집자리가 목책과 방형집자리보다 늦게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10년)

SANYO DIGITAL CAMERA솟대.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힌 마을의 신앙대상물이다. 마을의 안녕과 수호, 그리고 풍농을 위하여 마을에서 공동으로 세우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주로 마을 입구에 세워진다. 이는 마을 밖의 부정을 막고 마을의 신성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형태는 긴 장대 꼭대기에 세 갈래로 된 나뭇가지 위에 세 마리의 새를 조각하여 올려놓은 것이 일반적이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10년)

SANYO DIGITAL CAMERA송국리유적 발굴.조사 당시 모습.  1975년부터 모두 11차례의 발굴.조사가 이었다. 유적지에서는 집터, 무덤 등이 확인되었으며, 송국리형 토기를 비롯하여 당시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송국리 일대에서는 이전부터 농사를 짓다가 유물들이 발견되어 국립부여박물관을 비롯한 대학박물관에 신고되었는데, 특히 주목을 끝 것은 1974년도에 요령식동검이 들어 있는 돌널무덤이 발견된 일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1975년부터이다. 농수산부가 송국리 일대 야산 약 80만 ㎡를 농지를 개간하기 위한 농지확대개발사업을 계획하였는데, 사업 이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후 현재까지 모두 11차에 걸쳐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단편적인 조사에 지나지 않아, 마을 전체의 모습을 밝히는데는 어려움이 많다. 이제까지 조사된 청동기시대 유적은 원형 집자리 14기, 장방형 집자리 26기, 부정형 2기, 미상 1기를 비롯하여 독무덤, 돌널무덤, 나무울타리, 환호 등이 있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09년)

OLYMPUS DIGITAL CAMERA불탄쌀, 부여 송국리, 청동기, 부여박물관

쌀농사의 확인
이삭따는 반달칼이나, 땅을 파는 도구인 홈자귀, 갈판 등이 발굴된 것은 송국리 주민들이 농사를 지었따는 방증자료이다. 특히 54-1호 집자리에서 나온 불탄 쌀은 토기 바닥에 찍혀 있는 볍씨자국과 더불어 벼농사가 이루어진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해줄 뿐 아니라, 한반도와 일본에 쌀농사가 전해진 경로를 추정해 보는데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이 쌀은 화북지방과 한반도, 일본에서 즐겨 재배한 자포니카라는 짧고 통통한 종류로, 중국 화북지방에서 동북지방을 거쳐 한반도와 일본에 들어간 전파과정을 말해준다. 송국리 일대에서 논유적을 찾는데 실패했으나, 다른 벼농사 유적의 입지와 매우 비슷하고 구릉 양쪽으로 흐르는 작은 냇가와 저지대, 집자리가 자리한 낮은 구릉은 농사짓기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고 있어 논농사의 흔적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09년)

OLYMPUS DIGITAL CAMERA세모돌칼(부여 송국리), 반달돌칼(서산 휴암리), 청동기, 부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갈돌, 부여 송국리, 부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낫, 부여 송국리, 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자귀와 홈자귀, 9,11.충남 부여 송국리(1982년 발굴), 대팻날, 10.충남 부여 송국리(1982년 발굴)

송국리형 석기의 특징.
이삭따는 도구로 반달칼이 나왔고, 화살촉이나 석검.석창.환상석부같은 무구, 그리고 생산 및 생활도구로 돌도끼.돌끌.칼.대팻날.흠자귀.숫돌.방추차.갈돌과 갈판.망칫돌 등이 있다. 수화도구들이 많이 나오는 한편, 그물추는 한 점도 없어, 송국리인들이 고기잡이 보다는 농경에 기반을 두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여러 종류의 숫돌이 많이 나와 석기제작 활동이 활발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소형의 숫돌이 많은 것은 휴대용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칼판과 갈돌은 신석기시대에 이어 널리 사용된 조리용구였고, 방추차가 많은 점으로 보아 베를 짠 직조기술도 상당히 발달했을 것이다. 불탄나무판자는 나무를 다루는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른 것을 말해준다. 특히 거풋집이 집자리에서 나온 것은 최초의 일로, 초보적이나마 청동기 주조도 행해졌다고 볼 수 있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09년)

OLYMPUS DIGITAL CAMERA붉은간토기(Red-burnished pottery), 부여 송국리, 부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붉은간토기(Red-burnished pottery), 부여 송국리, 부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붉은간 두귀단지, 부여 송국라, 부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민무늬토기 바리, 부여 송국리, 부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송국리형 토기, 부여 송국리

좁은 바닥에 배부분이 팽창되다가 아가리부분에서 좁아지고 다시 입술부분에서 밖으로 벌어지는 특징적인 토기를 송국리형 토기라고 부른다. 이런 형태를 가진 완전한 토기가 송국리에서 처음 나와서 붙인 이름인데, 요즈음에는 충청남도를 비롯하여 호남지방, 경상도지방에서도 많이 나오고 있으며, 서일본에도 영향을 미쳐 20여개소에서 비슷한 토기가 발견되었다. 점토에 장석이나 운모, 고운 모래알을 섞어 만든 것이 대부분이고, 홍토의 바탕흙처럼 고운 것도 있다. 최대 지름이 배 부분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어 불안하기도 하나, 전체 균형이 잘 어울리고 당당한 느낌을 준다. 타원형 구덩이가 있는 송국리형 집자리와 더불어 송국리 문화를 대표하는 표식중의 하나이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09년)

OLYMPUS DIGITAL CAMERA바퀴날도끼(부여 송국리), 청동기시대, 부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화살촉, 부여 송국리,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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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요령식 동검, 22.칼, 부여 송국리, 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23.끌, 24.옥, 부여 송국리, 중앙박물관

지배자의 등장 
농경사회에서는 개별 가족 단위의 활동을 넘어 마을 전체의 단결과 공동노동이 중요해진다. 이에 따라 새로운 농경지를 둘러싼 분쟁이나 잉여생산물의 배분 등 갈등을 조정하고 사회통합을 이끌어내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 청동검이나 간돌검이며, 달도끼나 별도끼 등도 당시의 사회적 계층이나 권위를 대변하기도 한다. 고인돌의 축조와 같은 마을 지배자의 장송의례는 마을 전체의 공동행사로 지배자의 권위를 확고히 하는 동시에 농경사회 내부의 크고 작은 갈등을 완화시키는 기능을 하였다. (부여박물관, 2012년)

SANYO DIGITAL CAMERA돌널무덤,

51, 52지구 남쪽 경사면에서 4기가 확인되었다. 이중 중심무덤은 요령식 동검이 나온 1호인데, 모두 남북방향으로 일직선상에 자리하고 있고, 구조가 비슷하여 같은 시기에 일정한 기획성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1호 무덤은 풍화암반을 파고 바닥에 3장의 판석을 깔아 시상대(주검을 놓는 바닥)을 마련하였고, 넓은 판석을 세워 벽을 만들었다. 그 위에 커다란 한 장의 판석을 덮어 마무리하였는데, 지상에서는 아무런 표지가 없었다. 주검의 왼팔쪽에서 요령식 동검과 화살총.대롱옥.귀걸이 오이, 허리 부분에 돌칼과 청동 끌이 나왔다. 이 무덤의 집자리와 같은 시기에 속하는데, 날이 비파처럼 생긴 요령식 동검은 송국리 문화와 요령지방의 청동기문화가 관계가 있음을 말해준다. (송국리유적 전시관, 2009년)

SANYO DIGITAL CAMERA송국리 유적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신직리 고인돌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길.

SANYO DIGITAL CAMERA산직리 고인돌. 송국리유적의 구릉 남단에 위치한 고인돌로서 네 개의 돌기둥을 세워 그 위에 덮개돌을 수평에 맞춰 놓은 형상이다. 하부에 매장구조가 없어 제사를 지낸 제단기능을 가졌던 고인돌로 추정된다.

<출처>

  1. 부여군청
  2. 문화재청
  3.  두산백과
  4.  위키백과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