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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이하응 초상화(보물 1499호)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초상화(보물 1499호). 구한말 최고의 어진화사 이한철이 그렸는데 다양한 복식을 하고 있는 5점의 초상화가 남아 있다. 초상화에 나타난 흥선대원군의 복식은 <흑단령포본>, <흑건청포본>, <와룡관학창의본>, <복건심의본>, <금관조복본>이 있다. 의관과 기물이 매우 화려하며 당대 최고의 화가가 그린 초상화답게 표현이 매우 뛰어난 걸작이다. 초상화와 함께 초상화를 보관했던 영덩함 등이 고스란히 전하고 있어 당시 초상화와 관련된 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4점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1점은 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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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점의 초상화 중 <와룡관학창의본>이다. 일상생활에서 입었던 복식으로 주위의 화려한 기물들이 함께 표현되어 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50세 때 초상으로, 와룡관 학창의본이다. 주인공의 서탁 위에는 자명종, 벼루, 전갑, 인장과 인주합, 안경, 타구 등이, 협탁에는 네모난 향로와 시저병이 놓여 있다. 이 기물들은 모두 당시 문인들에게 애호되던 것이다. 자명종이나 청 황실에서 사용했다는 벼루 송화석연, ‘척사검’이라는 글자가 입사된 칼 등의 진귀한 물건은 대원군의 권위와 권력을 상징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고궁박물관 특별전, 조선왕실의 어진과 진전] 어진과 진전의 역사

2015년 겨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조선 왕실의 어진과 진전”이라는 제목의 특별전이 열렸다. 전시에서는 조선시대 왕의 초상화가 가지는 상징성, 어진 제작과정, 어진 제작에 참여했던 대표적인 화원 및 문인화가, 어진을 모셨던 다양한 진전들, 어진과 관련된 의례 등을 살펴볼 수 있는 내용이었다. 조선시대 왕의 초상화가 가지는 의미를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전시회였다.

어진(御眞)은 왕의 초상화를 지칭하는 말이다. 왕의 초상화는 어진 외에 진용(眞容), 진영(眞影), 어용(御容)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는데, 조선 숙종 때 왕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어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어진은 국왕 자신과 왕실의 권위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상징물로 고대 이래로 대부분의 통치자들에서 볼 수 있는 형태 중 하나이다. 진전(眞殿)은 어진을 모시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셨던 진전이 전국적으로 세워졌으며 국가적으로 크게 중요하게 관리되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대표적인 진전으로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전주 경기전과 창덕궁 내 역대 국왕의 어진을 모셨던 선원전이 있다.

우리나라 어진과 진전의 역사
국왕의 초상화에 대한 본격적인 기록은 고려 시대부터 나타난다. 고려시대에는 왕과 왕후들의 초상화가 활발하게 제작되었으며 초상 조각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고려의 어진은 궁궐 안의 진전인 경령전(景靈殿)과 원찰(願刹)내의 진전에 봉안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경령전에는 고려 태조와 선대 왕 4대의 어진을 모시고 원찰 내의 진전에는 왕과 왕후들의 어진을 개별적으로 모셨다. 조선 왕실은 고려의 어진 제작과 진전 운영의 전통을 선별적으로 계승하여 지속적으로 어진을 제작했다. 어진과 진전에 대한 관심은 조선 후기로 올수록 증대되어 재위 중인 왕들의 어진이 활발하게 제작되었으며, 어진 제작 및 봉안과 관련된 의례들이 보다 확대되고 세부적으로 정비되었다. 선원전(璿源殿)과 영희전(永禧殿) 등 궁궐 내외의 진전에 선대 왕들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는 행사들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국왕 자신의 정통성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수단이기도 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창덕궁 구선선원전(보물 817호),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익종), 헌종의 어진을 봉안했던 진전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창덕궁 구선원전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경복궁 태원전.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어진을 모셨던 건물이다.

순종황제 어진 보존처리
국립고궁박물관은 2007년 영조어진.철종어진.연잉군 초상을 시작으로, 한국전쟁 직후 피난지 부산에서 화재 피해를 입은 조선왕실 어진을 꾸준히 보존처리하고 있다. 순종황제 어진은 오른쪽 반이 소실되고 표제도 사라져 주인공을 알 수 없었으나, 보존처리를 위한 기초조사 과정에서 1928년 김은호가 그린 순종황제 어진임이 밝혀졌다. 보존처리 과정은 ‘조사-이물질 제거 표접 – 구배접기 제거 및 배접 – 표장비단 및 상하축 연결 – 보관’의 순수로 진행되었다. 먼저 어진의 기초구성 및 상태를 조사하여 보존처리 방향을 결정하였다. 그 후 표면 이물질을 제거한 후 보호막을 부착하고, 뒷면에 부착되어 있던 구배접지를 최대한 제거하여 손상된 물질이 다른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였다. 유물원형의 조직과 색상에 가깝도록 메움견을 준비하여 손상된 부분을 채움으로써 어진의 원래 크기를 회복하였다. 표면 보호막을 제거하고 새로운 배접지로 여러 차례 뒷면을 보강하면서 표장비단을 연결하고, 상축.하축.낙영.유소 등으로 족자형태를 꾸밈으로써 보존처리를 완료하여 오동나무 상자에 보관하였다. 보존처리를 통해 순종황제 어진의 보존상태가 안정화되었으며 외형적 완성도까지 갖추게 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순종 어진 보존처리 과정,

조선 왕실 기록화에 보이는 왕의 존재
대부분 조선 왕실 기록화는 왕이나 왕세자, 대비 등 왕실의 주요 인물들을 위해 거행한 행사를 기념하여 제작된 것들이다. 그러나 이들 기록화에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자리에 놓인 용상이나 일월오봉도 병풍과 같이 왕을 상징하는 의물들을 통해 그 존재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양상은 중국 황제의 경우 기록화에도 직접적으로 묘사되었던 것과 대비된다. 『성종실록』에는 어느 일본인이 그린 세조의 초상화를 두고 신숙주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신하와 백성들이 임금의 성용(聖容)을 만들지 못하며, 범한 사람은 중죄를 받는다,’라고 말하는 내용이 있다. 이를 통해 국왕의 모습을 함부로 형상화하는 것을 불경스러운 것으로 인식하여 금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왕의 모습은 국왕의 명에 의해 엄격한 절차와 형식을 지켜 제작되는 초상화의 형태로만 형상화되었으며, 이러한 전통이 조선 말기까지 변함없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경복궁 근정전 터에서 베푼 왕실 잔치 그림, 조신시대 왕실 행사를 그린 그림이다. 국왕은 직접 그리지 않고 의자나 일월오봉도 등으로 왕의 존재를 표현하고 있다.

1767년(영조 43) 12월 16일 영조가 경복궁 근정전 터에서 왕세손과 대신에게 베푼 연회를 그린 그림이다. 중앙의 빈 의자가 국왕의 자리인데, 왕을 직접 그리는 대신 일월오봉도를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개성 경령전 유적

고려시대 어진과 진전
현존하는 고려 국왕의 어진은 없지만 기록을 통해 국왕과 왕후들의 어진이 꾸준히 제작된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려 태조의 경두 다수의 초상화와 조상이 제작되어 진전에 봉안되었고 이들이 조선초기까지 전해 왔으나, 조선 왕실은 전 왕조의 어진들을 불태우거나 땅에 묻는 방식으로 없애 버렸다. 고려 왕실은 중국 송나라 황제의 초상화를 봉안한 경령궁을 본떠 개성의 궁안에 경령전을 설치하고 그곳에 역대 국왕의 어진을 봉안했다. 경령전은 5실로 구성되어 제1실에 고려 태조의 어진을 영구적으로 봉안하고 나머지 4개의 감실에는 현재 왕을 기준으로 4대조의 어진을 각각 모셨다.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가장 오래 된 왕의 어진은 궁궐 밖 원찰에 마련된 진전으로 옮겨졌다. 원찰은 특정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로, 고려 왕실에서는 원찰 안에 진전 건물을 마련하여 왕과 왕후들의 어진을 봉안하고 기일마다 불교식 재를 올려 명복을 빌었다. 원찰과 연계한 진전 운영은 고려 왕실의 조상 숭배 문화가 불교와 융합하여 나타난 것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현화사비 탁본첩, 20세기초, 고려 제8대왕 현종이 부모인 안종과 헌정왕후를 기리기 위해 현화사를 지으면서 건립한 비석의 뒷면 탁본이다. 현종이 안종과 헌정왕후의 초상화를 제작하여 현화사에 봉안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사찰을 짓는 공사가 거의 끝나고 불상의 모습도 갖추어지자 다시 절안 서북쪽에 별도의 진전 한 곳을 지어 임금님의 돌아가신 아버님이신 안종현경영문효대왕과 돌아가신 어머님이신 효숙인혜순정대왕태후 그리고 돌아가신 누님인 성목장공주원정왕후 등의 진영을 봉안하고 …

SANYO DIGITAL CAMERA연천 숭의전에 모셔진 고려 태조의 위패와 초상화. 초상화는 후대에 다시 그려진 것이다.

조선시대의 어진과 진진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전통을 계승하여 활발하게 어진을 제작하고 진전을 운영했으며, 이는 조선 왕실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창업주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여러 본이 제작되어 전국 여러 곳에 봉안되었다. 세조의 경우 그의 능인 광릉의 원찰 근처에 마련된 진전(봉선전)에 어진이 봉안되었으나, 다른 국왕의 어진들은 대부분 경복궁 선원전에 봉안되었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어진들은 임진왜란 때 대부분 망실되고 태조 어진 일부와 세조 어진만 보전되었다. 광해군과 숙종은 전란으로 흐트러진 진전 제도를 재정비하고 태조 어진의 모사와 봉안에 힘을 기울였다. 숙종은 자신의 초상화 제작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한동안 중단되었던 어진 제작의 전통을 되살렸다. 뒤를 이은 영조는 어진에 특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약 10년 주기로 꾸준히 어진을 제작했으며 정조를 포함한 후대 왕들도 이러한 전통을 따랐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국조오례의, 조선,

왕실을 중심으로 한 국가의 기본 예식을 길례.가례.빈례.군례.흉례로 구분하여 정리한 책이다. 길례에 진전 의례의 내용이 속해 있으며 태조 진전에 올리는 제향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국조오례의 서례, 조선,

국조오례의를 시행하는 데 필요한 참고사항을 다섯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책이다. 조선 초기 진전 건물의 평면도가 실려 있어 당시 진전의 운영 상황과 함께 진전 건축의 특징을 알게 해 준다. <출처: 고궁박물관>

조선왕실 어진의 특징
조선 왕실 어진은 대부분 의례용으로 제작되었으며 진전에 걸어 봉안하기 적합한 괘축(족자) 형태이다. 현존하는 조선 왕실 어진은 전체적인 크기가 일반 사대부나 공신 초상에 비해 상당히 크다. 대개 몸과 얼굴이 약간 오른쪽을 향하고 있으며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의 전신상이다. 두 손을 앞에 모아 포개어 잡은 공수자세를 취한 경우가 많으며 이때 손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비교적 다양한 옷차림의 어진이 그려졌지만, 기본적으로 익선관.곤룡포 차림과 원유관.강사포 차림이 선호되었다. 표현기법을 보면 조선 초기에는 주로 선묘로 이목구비를 표현하고 부분적으로 물감을 번지게 하여 얼굴 윤곽을 묘사했다. 18세기 이후에는 도드라진 부위에 붓질을 덜하고, 들어간 부위에는 붓질을 반복하여 어둡게 표현하는 방식으로 보다 입체감 있게 얼굴을 묘사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춘관통고, 조선 1788년경,

OLYMPUS DIGITAL CAMERA춘관통고, 조선 1788년경,

정조의 명으로 예제와 의례 관련 업무를 오례를 기준으로 종합하여 정리한 책이다. 숙종과 영조, 정조대를 거치며 새롭게 정비된 의례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창덕궁 주합루에서 행해진 정조 어진 관련 의례도 수록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태조.숙종.영조.정조.순조.문조.헌종 영정모사도감의궤, 대한제국 1901년, 1900년부터 약 1년간 진행된 7조의 어진 모사 작업과 봉안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조선시대 어진 제작 체계
조선시대의 어진 제작 방식은 대개 도사(圖寫), 추사(追寫), 모사(摸寫)로 구분된다. 도사는 살아 계신 국왕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리는 방식을 말하며, 추사는 살아 계실 때 그린 어진이 없는 경우 그 얼굴을 아는 이들의 기억에 의존해 그리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모사는 기존의 어진이 훼손되었거나 기존 어진을 그대로 두고 다른 진전에 추가로 봉안해야 할 때, 기존 어진을 바탕으로 또 한 본의 어진을 제작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국왕과 신하들이 논의하여 어진을 제작하기로 결정하면 임시 기구인 도감을 설치하거나 담당 관리를 임명하여 어진 제작에 대한 전반적인 일을 주관하도록 했다. 선대 왕의 어진을 모사하는 경우에는 대개 도감을 설치한 반면, 재위 중인 왕의 어진을 도사할 때에는 따로 도감을 설치하지 않고 종친이나 신료들 중에서 담당자를 정하여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화원이 본격적으로 어진을 제작하는 과정에서는 단계별로 어진의 제작 상황을 살펴보는 봉심(奉審)이 이루어졌다. <출처: 고궁박물관>

어진 제작과정
도감 또는 담당 관원이 정해지고 어진화사(御眞畵師)가 선발되면 본격적으로 어진을 제작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어진 제작은 일반적으로 초본제작-상초(上綃)-설채(設彩)- 장축(粧軸)-표제(標題)의 순서로 이루어졌다. 초본은 밑그림을 말하는데 왕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리는 도사의 경우 국왕의 마음에 들 때까지 여러 본의 초본이 제작되기도 했다. 초본이 완성되면 그 위에 비단천을 겹쳐 놓고 비단 위로 비쳐 보이는 형상을 따라 그리는 작업을 하는데 이를 ‘상초’라 하였다. ‘설채’는 채색작업으로서 조선 왕실 어진에는 시간이 흘러도 안료가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비단의 뒷면에도 채색을 하는 배체(背彩) 기법이 사용되었다. 채색이 끝나면 초상화를 종이와 비단으로 장황하고 위아래에 축을 달아 족자 형태로 꾸민 다음, 화면 위에 주인공과 제작 시기를 알려 주는 표제를 썼다. 이렇게 완성된 어진을 진전 또는 궁궐 내외의 특정한 장소에 봉안하고, 어진 제작과 봉안 과정에 참여했던 관리와 화원, 장인들에게 상을 내림으로써 마무리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숙종 어진 도사 과정을 기록한 의궤, 조선 1713년,

1713년(숙종 39)에 있었던 숙종 어진 도사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의궤에는 어진화사를 선발하는 과정, 어진 도사 시 국왕의 의관 선택, 어진 봉안 절차를 둘러싼 논의 등 어진 도사에 관한 상세한 사항들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세조 어진 모사 과정을 기록한 의궤, 조선 1735년,

1735년(영조 11) 영희전 제2실에 봉안되어 있던 세조의 어진을 모사한 일을 기록한 의궤이다. 어진의 상태가 나빠질 때를 대비하여 모사한 것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숙종 어진 모사 과정을 기록한 의궤, 조선 1748년. 어진을 봉안하는 과장을 그린 반차도가 수록되어 있다.

숙종의 어진을 영희전에 봉안하기 위해 1748년(영조 24) 창덕궁 선원전의 숙종 어진을 새롭게 모사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새롭게 모사한 숙종 어진을 영희전에 봉안할 때의 행렬을 기른 반차도 18면이 수록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왕의 초상을 그린 화가들, 어진화사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담당하는 어진화사(御眞畵師)의 역할은 어진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어진화사는 대개 궁중에 필요한 그림을 제작하는 일을 담당했던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이나 지방 출신의 화사, 그리고 정조대 이후 새롭게 마련되어 국왕과 관련된 중요한 그림을 담당했던 규장각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 중에서 선발되었다. 어진화사는 기량과 역할에 따라 주관화사(主管畵師), 동참화사(同參畵師), 수종화사(隨從畵師)로 구분했다. 주관화사는 초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얼굴을 그리는 일을 담당했고, 동참화사는 의복과 신체 등을, 수종화사는 배경을 그리거나 채색하는 일을 맡았다. 주관화사는 왕이 지목하기도 하고 공개적으로 실력을 검증하는 시재(試才)를 거쳐 선발되기도 했다. 직업화가인 화원이나 화사들 외에 인물화에 뛰어난 실력을 갖춘 문인화가들이 어진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문인화가의 경우 직접 그림을 그리지는 않고 화원들의 작업을 지켜보며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 조언하는 역할을 했는데, 영조대의 조영석과 정조대의 강세황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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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복 초상, 조영석, 조선 1725년, 보물 1298호, 영조 때 숙종 어진 모사에 감역관으로 참여한 문인화가 조영복이 그린 초상화이다. 당시 어진 제작에 참여한 문인화가의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사대부 출신의 문인화가 조영석(1686~1761년)이 그린 조영복의 54세 초상이다. 조영복은 조영석의 형이다. 조영석은 1743년(영조 24) 숙종 어진을 모사할 때 화원들의 작업을 감독하는 감역관(監役官)으로 참여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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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증 초상, 장경주, 조선 1744년, 보물 1495호, 조선후기 소론의 영수였던 윤증을 그린 초상화이다. 어진 제작에 참여했던 화원의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윤증 초상화의 얼굴부분.

영조대 어진화사로 활동한 장경주(1700~?)가 그린 조선중기 유학자 윤증(1692~1711년)의 초상이다. 장경주는 1744년(영조 20) 영조의 51세 어진 도사와 1748년(영조 24)의 숙종 어진 모사에서 주관화사로 활약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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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 초상, 이명기, 조선 1792년, 보물 1477호, 정조 때 전성기를 이끌었던 채제공을 그린 초상화이다. 어진제작에 참여했던 화원 이명기의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채제공 초상 얼굴 부분. 사실적인 표현과 섬세한 필치가 돋보인다.

이명기(1756~1802년 이후)가 그린 채제공(1720~1799년)의 73세 초상이다. 1791년(정조 15) 정조의 어진을 도사할 때 도제조를 맡았던 채제공을 치하하기 위해 그려졌다. 이명기는 1791년과 1796년 정조 어진 도사에 주관도사로 발탁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중앙박물관 회화실] 초상화와 고사인물화(故事人物畵)

실제 생존했던 인물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는 당대의 상류층에서 가장 많은 공을 들여서 그렸던 그림이다. 이는 서양의 회화에서도 볼 수 있는 비슷한 경향으로 레오나르드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를 비롯하여 많은 걸작들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초상화는 왕의 초상을 그린 어진에서부터 관복을 입고 그린 사대부들의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들이 그려졌다. 인물화는 작가의 주관보다는 현재의 사진과 같은 의미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아주 세밀하고 정성스럽게 그려졌다. 인물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그 인물의 정신적인 특징을 반영하고자 하는 노력이 많았다. 중앙박물관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많은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지만, 회화는 많은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지 않다. 중앙박물관에는 국보 239호로 지정된 송시열 초상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초상화의 경향을 알 수 있는 다수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인물화로 이야기속에 전해오는 인물들을 그린 고사인물화(故事人物畵)와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가 있다. 고사인물화는 주로 중국의 유명한 인물들을 그린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우리나라 사람을 그린 경우도 있다. 이런 그림들은 삶에 교훈을 주거나 이야기속 주인공처럼 되고 싶은 소망을 담고 있는 그림이다. 도석인물화는 도교 또는 불교와 관련된 인물들을 그린 그림이다. 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대표적인 고석인물화로는 17세기 김명국이 선종의 시조 달마대사(達磨大師)를 그린 달마도가 있다. 또한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화가인 단원 김홍도는 도교적인 내용을 그린 여러 작품들을 남겼는데, 그중 대표적인 작품을 볼 수 있다. 자화상을 그린 윤두서가 그린 고사인물화도 볼 수 있다.

초상화
초상화(肖像畵)는 생존했던 인물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진(眞), 영(影), 상(像), 진영(眞影)이라고도 부른다. 훌륭한 인물을 본 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리기 시작하여 조상이나 스승을 섬기고 추모하기 위하여 그렸다. 초상화를 그린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확인되지만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때는 고려시대이다. 현재 남아 있는 초상화는 대부분 조선시대에 그려진 것이다. 인물의 신분과 성격에 따라 왕, 어질고 지혜로운 성현과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 벼슬이나 무벌이 높은 사대부, 여인, 승려의 초상이 전해진다. 특히 조선 후기의 사대부 초상은 관복이나 평상복 차림으로 많이 그려졌다. 초상화를 그릴 때에는 털 한 올이라도 본래의 모습과 차이가 나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정성을 들였다. 또 인물의 외모뿐만 아니라 인품과 학식 등 정신적인 면까지 표현하고 노력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중앙박물관 2층 회화실 중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는 공간. 전시작품은 많지 않지만 작품성이 뛰어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전시내용은 수시로 바뀐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원이나 영당 등에 모셔졌던 초상화 중 시대를 대표하는 초상화들이다.  대표적인 걸작으로 국보로 지정된 송시열 초상화와 윤두수의 자화상을 들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송시열 초상(宋時烈 肖像). 조선시대 초상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조선후기 지배계층이었던 서인이 영수이자 그들의 정신세계를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송시열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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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초상(宋時烈 肖像), 국보 239호, 작가모름, 조선, 18세기, 비단에 색,

평상복 차림인 심의(深衣)에 복건을 쓰고 공수 자세로 오른쪽을 향한 반신상이다. 송시열(1607~1689)은 평생 주자의 학설을 잇는 것으로 자부했다. 그의 제자들은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하였고, 후학들은 송시열을 추앙하고 존승하였다. 화면 상단에 어제와 1778년 간기(干記)가 있어서 18세기에 그려진 이모본으로 보인다. 얼굴의 주름과 수염에 가해진 섬세한 필치가 돋보이며, 옷 주름은 고른 선으로 간략히 표현되어 있다. 왼쪽 어깨가 오른쪽보다 약간 올라가 있으며 목이 앞으로 나온 구부정한 노인의 자세, 화면의 반을 차지하는 과장된 체구 등은 조선후기 학문과 사상을 지배한 거유(巨儒)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임경업 초상, 조선 19세기, 비단에 채색.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초상화 중 하나이다. 병자호란 당시 활약한 명장으로서의 기백이 넘치는 초상화이다.

임경업(1594~1646)은 조선 중기의 명장으로 본관은 평택, 자는 영배, 호는 고송, 시호는 충민이다. 1618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1624년에 이괄의 난을 평정하여 진무원종공신 1등이 되었다. 병자호란 때 진무원종공신 1등이 되었다. 병자화란 때 활약하다가, 끝까지 청에 맞서겠다는 의지를 버리지 않고 1643년에 명나라에 망명하여 명군의 총병이 되었다. 친명배청의식이 높았던 병자호란 이후 우국충정의 명장으로 인식되었으나, 결국 청의 승리로 조국에서 친국을 받던 중 장살되는 비운을 맞는다. 오사모에 푸른색 단령을 착용하고 정면을 향하고 앉은 관복전신좌상이다. 흉배는 인조대에 나라에 공을 세운 무인들에게 내려주었던 독특한 모양이다. 주인공 옆 탁자에 놓은 세한삼우(소나무, 매화, 대나무)는 그의 절개를 상징한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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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백 초상, 조선후기, 비단채색

이시백은 인조반정의 주역인 이귀의 장남으로 아버지 이귀, 동생 이시방과 함께 인조반정으로 정사공신에 녹훈되었다. 또한 최명길과 함께 병자호란에서의 패전 상황을 수습하고 대동법을 실시하여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효종대에 연양부원군에 봉해졌다. 사모를 쓰고 청색 단령을 입고 있는 반신상이다. 화면 상단에 “정사공신 영의정 연양부원군 충익공 조암이선생진상”이라 묵서되어 있다. 사모의 높이가 매우 낮고 모정이 평평하며 양각이 짧고 넓은 점, 흉배가 큰 점은 조선 중기 복식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유순정 초상, 조선후기, 비단채색

유순정은 본관 진주, 자는 지옹 시호는 무안, 문성이다. 1506년 중종 반정에 공을 세우고 정국공신 1등으로 청천부원군에 봉해졌다. 이어서 이과의 옥사를 다스려 정나공신1등에 책록되었다. 1509년 좌의정에 오르고 1510년에 부산포.내이포.염포 등 삼포에서 거주하고 있던 왜인들이 대마도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삼포왜란 때에는 직접 경상도도원수로 출정, 난을 평정했다.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반신상 초상화로 오사모에 금으로 그려진 한 쌍의 공작이 부착된 흉배를 착용하고 있다. 오사모의 양쪽 각이 둥글고 흉배가 금으로만 그려진 점은 조선 초기 공신 초상화의 특징이나 어깨 선을 각지지 않고 둥글게 처리한 점 등으로 보아 조선 후기의 이모본으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조경 초상, 17세기, 비단채색

조경(1541~1609)은 조선 중기의 무관으로 본관은 풍양이며 자는 사척, 시호는 장의이다. 임진왜란 때 수원부사로 재임하면서 적에게 포위된 독산성의 권율 장군을 응원하고 이듬해에 다시 도원수였던 권율과 함께 행주산성에서 대승하여 가선대부에 가자되었다. 서울이 수복되자 도성서도포도대장이 되고, 1596년에는 훈련대장이 되었다. 1599년 충청병사, 회령부사를 지냈으며 1604년에는 선무공신 3등에 책봉되고 풍양군에 봉해졌다. 오사모에 단호흉배가 부착된 흑색 단령을 착용하고 앉아 있는 전신교의 좌상이다. 바닥에는 채전이 깔려 있다. 얼굴과 이목구비, 수염을 그린 선이 매우 활달하다. 얼굴에는 붉은 빛으로 음영과 입체감을 표현하였는데 특히 광대뼈 쪽에 홍기를 두드러지게 가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이원익 초상, 17세기, 종이에 색

이원익(1547~1634)의 본관은 전주, 자는 공려, 호는 오리이다. 태동의 12번째 아들인 익령군의 4대손으로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명재상이다. 임진왜란 때 이여송과 합세해 평양을 탈환한 공로로 숭정대부에 가자(加資)되었다. 1624년 이괄의 난 때에는 80세에 가까운 노구로 왕을 호종하였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세자와 왕을 호위하였다. 모란 공작 흉배를 부착한 흑자색의 운문단 단령을 입고 앉은 관복전신교의좌상이다. 전신상 초상화이면서 종이 바탕에 초본 형식으로 그려진 점이 특이하다. 비단에 그려진 정본 초상화와는 달리 필치 구사와 채색 바탕이 매우 자유롭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남구만 초상, 작가모름, 비단에 색. 조선후기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의 온화한 표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남구만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로 시작되는 유명한 시조를 남긴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이었다. 남구만 초상은 녹포단령(깃을 둥글게 만든 푸른색의 공복) 차림에 양손을 앞으로 모아 소매 안으로 넣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모습은 조선시대 공신상의 전형을 보여준다. 사모는 높아지고 폭은 약간 좁아졌으며 18세기 이후에 등장하는 구름과 학이 포함되어 있다. 얼굴 살결은 이전에 비해 가는 붓으로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 이 영정 외에 남구만이 영의정 재직시에 모사한 영정이 현재 경기도 용인시 파담마을에 위치한 사당에 남아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윤봉구 초상, 작가모름, 18세기, 모시에 색. 복건을 쓰고 있는 꼿꼿한 선비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복건에 심의를 입은 반신상 한 점이 함께 첩으로 꾸며져 있다. 윤봉구는 호는 병계, 또는 구암이다. 권상하의 문인으로 대사헌을 지낸 성리학자다. 갈색 선으로 얼굴의 윤곽, 코 등을 그리고 선염을 가하여 입체감을 표현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이정보 초상, 작가모름, 조선 18세기, 강하면서도 꼿꼿한 인품을 잘 드러내고 있는 초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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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보 초상, 작가모름, 조선 18세기,

이정보(李鼎輔, 1693~1766)는 예조판서, 대제학에 이어 판중추부사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오른 사람이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시조(時調)의 대로서 78수의 작품을 남겼다. 쌍학 흉배가 달린 청색 단령(團領)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이목구비는 선으로 윤곽을 그린 후, 분홍색으로 밝고 화사하게 칠하였다. 짧은 선을 그어 양 볼의 양감을 살렸다. 종이품 이상의 학정금대(鶴頂金帶)를 착용하고 있어 이정보가 1748년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할 즈음의 모습으로 보인다. 신체에 비해 의자와 발받침대의 비중이 작고 장식적인 요소가 절제되어 있는 전신 초상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분무원종공신녹권(奮武原從功臣錄券), 1728년

OLYMPUS DIGITAL CAMERA공신녹권에 실린 초상화, 

1728년 이인좌의 난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분무공신 녹훈 관련 사적을 기록한 책이다. 분무녹훈도감에서 편찬하였다. 1등 공신에는 오명향, 2등 공신에는 박찬신.박문수 등 7명, 3등 공신에는 조현명 등 7명으로 모두 15명이 녹훈되었다. 책머리에 윤순이 쓴 분무토역반교문이 실려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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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이 하쿠세키 초상, 츠바키 산잔, 일본 에도, 1828년, 종이에 색, 우리나라 초상화에 비해 표현이 섬세하다.

에도 중기의 유학자이자 정치가인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1725)의 초상이다. 호피로 만든 방석 위에 허리에 칼을 찬 채 무릎 꿇은 자세로 앉아 있다. 짙은 눈썹과 연한 수염이 대조를 이루는 얼굴은 찌푸린 미간, 꾹 다문 입술 등을 통해 온화하면서도 의로운 인상을 풍긴다. 선 위주의 그린 이목구비에 연한 홍조를 띠게 함으로써 얼굴의 생기를 불어 넣었다. 초상을 그린 츠바키 산잔은 에도 후기의 문인화가로서 와타나베 카자(1793~1841)에게 그림의 사사를 받았다. 카잔이 투옥되었을 때, 산잔은 그를 구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고, 스승의 유족들을 보살폈다. 산잔은 명말청초의 운수평(惲壽平, 1633~1690)의 몰골과 담채의 기법으로 화훼도를 그렸다. 후쿠오카 현의 태수이 미나모토 요시의 찬문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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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인 초상, 작가 모름, 중국 청, 한국의 초상화와는 달리 사진을 찍은 듯한 사실적인 표현이 특징이다. 서양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권위의 상징물인 호피 위에 위엄 있게 정면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만주족 관리의 관복 좌상이다. 바닥에는 꽃무늬 채전(彩氈)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삿갓 모자를 쓰고 발 받침대 위에 다리를 벌린 채 앉아 있는 관리의 모습에서 전형적인 중국 초상화의 특징을 보여준다. 양손이 소매 밖으로 나오지 않고 가려져 있는 점이 다르다. 청색 조복(朝服)차림의 주인공은 큰 키에 시선의 교환을 통해 관자(觀者)와의 상호작용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다부진 인상을 풍긴다. 마치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보듯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영당
영당(影堂)이란 초상화를 모신 곳을 말한다. 국가에 큰 공을 세웠거나 삶의 모범이 된 충신과 학자 등의 초상화를 이곳에 모셨다. 영당에 초상화를 모신 이유는 선현의 훌륭한 업적을 후세까지 널리 전하고 조상의 높은 뜻을 일깨우는 데에 있다. 초상화를 모시는 풍습은 신라 말부터 시작되어 고려시대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고려시대에는 절에 영당을 지어 초상화를 모셨는데 이러한 전통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집 안에 짓는 사당이 가묘(家廟)가 발달하면서 영당도 많이 세워졌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영당과 영당에 모셔진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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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 초상, 안향상(安珦像), 작가모름, 조선 18세기, 비단에 색,

안향(1243~1306) 초상은 홍포(紅袍) 직령(直領)에 평정건(平頂巾)을 쓴 모습이다. 상단에는 그의 아들 안우기(安于器, 1265~1329)가 쓴 발문과 찬시가 있는데, 이것에 의하면 1318년 왕명으로 초상화를 그려 문묘에 봉안하고, 한 벌을 더 그려 고향인 홍주 향교에 모셨다고 한다. 이 초상은 이목구비를 또렷하게 표현하고, 원만한 몸체에 옷 주름을 곧고 간결하게 묘사하여 단아하고 엄정한 기품이 있다. 조선 후기의 이모본이지만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고려시대 초상화의 자료로서 중요하다. 안향이 도입한 주자학이 조선시대에 사상의 주류로 정리됨에 따라, 선학(先學)을 받들고 기리기 위해 초상화가 이모되고 전승되는 양상을 살펴볼 수 있어 의미가 깊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영당에 모셔진 초상, 18세기, 비단에 색

사모에 흉배 없는 담홍포(淡紅袍)와 삽은대(鈒銀帶)를 착용한 반신좌상이다. 화면에 주인공에 대해 알려주는 단서는 없으며 성모씨의 초상으로 전래되고 있다. 얼굴은 갈색 선으로 윤곽선과 이목구비를 뚜렷하게 표현하였다. 이마, 콧등, 콧망을, 귀에 붉은기를 주고 눈 주위와 법령에 음영을 넣어 입체감을 표현하였다. 옷주름은 다소 딱딱하며, 옷주름을 많이 묘사하지 않아 단정한 느낌을 준다. 얼굴 묘사에 있어서 콧날의 선과 눈두덩이, 법령 등을 윤곽선으로 표현하고 피부의 색조를 선염으로 나타낸 것으로 보아 18세기 중반경의 초상화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고사.도석 인물화
고사인물화(故事人物畵)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의 인물을 그린 것이다. 주로 중국의 유명한 인물을 그린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의 이야기를 그린 것도 있다. 이런 그림들은 삶에 교훈을 주거나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되고 싶은 소망을 나타내며, 때로는 현실을 풍자하려는 의도를 담기도 한다.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는 도교, 불교와 관련된 인물을 그린 그림이다. 도교의 소재로는 신선을 그린 것이 많으며, 장수와 화복 등을 상징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욱 좋아하였다. 불교의 소재로는 중국 선종의 시조인 달마(達磨)를 비롯하여 부처의 제자인 나한(羅漢)을 주로 그렸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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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 김명국, 17세기. 달마도는 우리나라, 중국, 일본에서 가장 많이 그려진 그림의 주제 중 하나인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달마도>라고 할 수 있다. 빠른 붓놀림과 과감한 생략 등을 통해서 그려진 상당히 수준 높은 그림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달마대사의 모습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달마대사의 모습은 이 그림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친 그림이다.

달마는 선종화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재로 손꼽히며, 김명국의 현존하는 그림 가운데 걸작이다. 측면을 향한 달마대사는 두건을 쓰고 있으며 팔자 눈썹에 부릅뜬 눈, 주먹같은 메부리코, 짙은 콧수염과 구레나룻 등의 생김새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보여준다. 9년동안 벽을 향해 좌선 수행행하였던 그의 진면목, 피안의 진리를 깨닫고자 힘쓴 그의 정신 세계를 단적으로 잘 보여준다. 빠른 붓놀림과 과감하게 생략한 표현 등은 김명국이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음을 말해준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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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명의 신선, 김홍도, 1779년, 비단채색. 단원 김홍도가 그린 신선도로 그가 그린 작품의 다양성을 잘 보여준다. 김홍도는 풍속화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도교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장면 등을 많이 그렸다.

표암 강세황의 화평이 매 폭마다 적혀있는 단원 김홍도의 인물화 중 한 폭이다. 마지막 제8폭에 적혀있는 글씨에서 1779년 그의 나이 35세 때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강세황은 김홍도에 대하여 ‘특히 신선과 화자를 잘하여 그것만 가지고도 한 세대를 울리며 후대에까지 전하기에 충분하다’고 한 바 있다. 이 그림은 칼을 차고 있는 여동빈을 가운데에 그리고, 그 위에 여동빈의 스승인 종리권, 제일 아래에 종리권의 선생인 동화자를 그린 <삼선도>이다. 유려하고 여유있는 김홍도 후대의 화풍과는 달리 딱딱한 선묘의 특징을 보인다. 바탕에는 담묵을 칠하여 고아한 분위기를 내고 있으며, 다양한 농도의 채색과 금채, 호분을 적절하게 구사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서원에서의 아취 넘치는 모임, 김홍도, 1778년, 비단에 엷은 색.

김홍도가 34세 때에 그린 고사 인물화이다. ‘서원아집(西園雅執)’이란 송나라 때 왕선(王詵)이 자신의 집 정원인 서원에서 친구인 소식(蘇軾)을 비롯한 당시 유명한 유학자, 승려, 도사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였던 모임을 말한다. 이 모임에 참여한 화가 이공린(李公麟)이 이를 그려 <서원아집도(西園雅執圖)>라 하였다. 이 그림은 우리나라에서도 고사인물화의 소재로 유행하였다. 그림의 내용은 탁자 위에서 서화를 완성하는 장면, 암벽에 동자를 데리고 시를 새기는 광경, 담소하며 비파를 타는 정경, 그리고 석교 건너편의 대나무 숲에서 한담하는 모습들이 그려져 있다. 소나무와 암벽에 보이는 필치는 김홍도가 30대에 정립한 독특한 표현법으로 필선이 명로하고 세밀하여 화려하고 말끔한 느낌을 준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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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에서 떨어지는 진단선생, 윤두서, 1715년, 비단에 색.

중국 북송 때의 학자 진단(陳摶)의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다. 나라가 다섯번이나 바뀌어 혼란하던 시절에 참된 군주를 기다리던 진단은 나귀를 타고 가다가 나그네로부터 우연히 조광윤(趙匡胤)이 송나라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나머지 그는 나귀에서 떨어지면서 “이제 천하는 안정되리라”고 외쳤다고 한다. 윤두서(尹斗緖)는 화사하면서도 산뜻한 청록을 써서 태평성대를 바라는 군주와 백성의 마음을 그림에 담았다. 숙종이 그림을 감상하고 덧붙인 시가 화면의 상단에 적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옛 왕후들의 이야기, 열조왕후도(列朝王后圖), 작가모름, 조선, 비단에 색, 송나라 태조(재위960~975)의 어머니 황태후 두씨(杜氏)가 아들 태조에게 백성을 위한 정치의 중요성에 대해 일꺠워 주고 있는 장면.

OLYMPUS DIGITAL CAMERA  송나라 영종(英宗, 재위1064~1067)의 황후 고씨(高氏)가 문병을 온 신하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이 그림은 중국의 역대 왕후의 행적을 그린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왕과 왕후의 사적을 궁중 화원들에게 그리게 한 기록들이 있다. 주문왕(周文王)의 후비인 제(齊) 효공부인(孝公夫人) 맹희(孟姬), 초(楚) 번희(樊姬), 한(漢) 명덕황후(明德皇后), 당(唐) 장손황후(長孫皇后), 송(宋) 인종(仁宗) 조황후(曺皇后) 등이 대표적이다. 이 그림은 송나라 태조(재위960~975)의 어머니 황태후 두씨(杜氏)가 아들 태조에게 백성을 위한 정치의 중요성에 대해 일꺠워 주고 있는 장면과 송나라 영종(英宗, 재위1064~1067)의 황후 고씨(高氏)가 문병을 온 신하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이러한 그림은 옛 성현들을 본받고 성찰과 교훈의 자료로 삼아 덕치를 행하기 위한 것으로 일종의 감계화(鑑戒畵)이다. <출처: 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공자의 행적, 성행도(聖行圖), 김진여(金振汝, 1675~1760), 조선 1700년, 비단에 색, 공자가 수레를 타고 여행을 하는 장면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공자가 제후를 만나는 장면으로 보인다.

김진녀는 평양출신으로 조세걸의 제자이다. 1713년 숙종어진도사에 어용화사(御用畵師)로 발탁될 정도로 설채에 남다른 재능을 지녔다. 이 화첩은 공자의 생애 동안 일어난 중대한 사건이나 일화를 그린 것이다. 원나라화가 왕진붕(王振鵬)이 그린 성적도(聖蹟圖)를 모사한 것으로 유소년기의 공자, 직무에 충실한 인품의 소유자, 박학다식한 면모, 교육자,공자의 가르침, 성인으로서의 남다른 혜안, 수양의 모습, 수난과 시기의 대상이 된 모습, 제자들의 공자 섬김과 덕행, 후대 왕들의 공자 받들기 등 공자와 주변 인물들의 일화들을 담고 있다. 전체적으로 정치한 솜씨를 띠며, 공자의 얼굴에 음영을 많이 가한 점, 시공간을 달리한 장면 배치 등이 흥미롭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초상화의 제작과정

조선시대 초상화의 제작은 그 절차가 매우 복잡하다. 여러 기록을 참고하여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1744)》 중 <이의현 초상>의 제작 과정을 추정하여 다음과 같이 재현해 보았다. 초상화 제작의 전체 과정 속에서 초본의 역할을 살펴 보면 보다 명확하게 초본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작품조사

OLYMPUS DIGITAL CAMERA유지(油紙) 초본 제작

OLYMPUS DIGITAL CAMERA비단 정본(正本) 제작

OLYMPUS DIGITAL CAMERA1) 유지 위의 유탄초(柳炭草), 2) 유지 위의 먹선초, 3) 유지 초본 뒷면의 색,

OLYMPUS DIGITAL CAMERA 4) 앞에서 유지초본 마무리 5) 유지초본 위에 비단을 올려놓고 먹선 그리기 6) 초본의 먹선 따라 그리기 완성,

OLYMPUS DIGITAL CAMERA 7) 비단 뒷면의 색, 8) 팡에서 비단 정본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