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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국보8호), 성주산문을 열었던 낭혜화상의 탑비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사지(사적 307호)에 남아 있는 낭혜화상탑비(국보 8호)이다.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만든 높이 4.55 m의 이 탑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과 머리돌을 올려놓은 전형적인 당나라 비석의 형태를 하고 있다. 거북받침돌 머리는 얼굴 일부가 깨져 있는데, 머리 위에 둥근 뿔이 있고, 입은 불을 내뿜으려는 형상을 하고 있다. 거북 등에는 육각무늬를 세웠으며, 움직이려는 네 발은 사실적으로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머릿돌에는 구름과 용이 뒤엉킨 모양을 입체감 있게 조각했다. 통일신라 탑비 중에서도 웅장하면서 화려한 조각수법 등의 돋보이는 걸작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탑비 중에서는 가장 웅장하고 완성도가 높은 것이라 한다.

낭혜화상 무염(801~888년)은 태종무열왕의 8대손으로 당나라에서 선종을 배우고 와서 이 곳에서 통일신라 구산선문 중 하나인 성주산문을 세웠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을 자세히 적고 있는데 당대 최고 문인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 최인곤이 글씨를 썼다. 비문 내용 중 낭혜화상의 신분과 관련된 용어들이 적혀 있어 신라 골품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낭혜는 국왕이 내린 시호이고, 탑 이름은 ‘백월보광’이라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충남 보령시 성주산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성주사지 옛 절터 뒷편에 있는 낭혜화상탑비(국보 8호). 탑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어 놓고 있다. 통일신라말 진성여왕 때 세워진 것으로 승려의 탑비로는 그 제작연대가 오래된 것 중 하나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거북받침돌. 얼굴은 용이 불을 뿜을려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땅을 받치고 있는 못을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등에는 육각무늬를 새겼으며, 가운데에는 구름무늬로 장식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구름사이로 용이 다투는 모습을 입체감있게 표현하고 있는 머릿돌.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머릿돌.

OLYMPUS DIGITAL CAMERA최치원이 글을 지은 4개의 비석 중 하나로 글씨는 최인연이 썼다. 비문의 내용은 낭혜화상의 업적을 적고 있는데, 통일신라 사회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내용들이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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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강 탑비 탁본

OLYMPUS DIGITAL CAMERA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 탑비 탁본첩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국보8호,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신라 선문구산 가운데 하나였던 성주산문을 처음으로 창설한 낭혜화상 무염(801~888년)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다. 몸돌을 받치고 있는 지대석 일부가 손상되었을 뿐 비신과 머리돌이 원래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낭혜화상은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8대손으로 성은 김씨, 호는 무량 혹은 무주이다. 낭혜는 그가 죽은 후 내려진 시호이다. 그는 12세에 출가하여 821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선종을 습득하고 20여년 동안 중국 여러 곳을 다니며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운 사람들을 돌보았다. 중국 사람들은 이러한 그를 지칭하여 “동방대보살”이라 일컬었다. 847년에 귀국하여 40여년간 성주사에 머무르면서 불법을 크게 떨쳐 성주산문을 일으켰다. 비가 세워진 연대는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낭혜 화상이 세상을 떠난 2년 뒤인 890년(진성여왕 2년)으로 짐작된다. (보령시, 2010년)

성주사(聖住寺)는 보령 성주산 남쪽 기슭에 있었던 사찰로 통일신라 선종 구산선문 중 성주산파의 중심사찰이었다. 충남 보령시에서 공주, 부여와 연결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산중에 자리잡고 있지만 그 규모가 상당히 큰 평지사찰로 금당 뒷편에 3기의 삼층석탑, 앞편에는 오층석탑이 배치된 특이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동삼층석탑은 다른 곳에서 옮겨 왔기 떄문에 금당 뒷편에 2개의 탑이 세워 별도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을 중요시 했던 기존 불교와는 달리 수행을 중시여기는 선종계열 불교의 특징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최치원 글을 지은 낭혜화상탑비(국보 8호)가 절터에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보령 성주사지(사적 307호). 통일신라말 크게 번창한 선종 구산선문 중 하나였던 큰 절터이다. 이곳에는 낭혜화상탑비(국보8호)를 비롯하여 4기의 석탑 등이 남아 있다.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보령시청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보물 446호)

강원도 양양군 서면 선림원지 옛 절터에 남아 있는 홍각선사탑비(보물 446호)이다. 통일신라 때(886년)에 홍각선사를 기리기 위해서 세워진 탑비이다. 거북받침돌, 비몸, 머릿돌로 구성된 전형적인 탑비의 형태를 하고 있다. 조선시대 이전에 파손되어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던 것을 최근 몸돌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거북받침돌은 용의 머리가 직립하고 있는 모습이며, 비몸을 올려놓았단 자리에는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거북받침돌에는 “홍각선사비명”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주위는 구름과 용이 새겨져 있다. 글자가 새겨지 비몸 일부만 남아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다.

홍각선사는 통일신라 헌강왕 때 활동한 선종(禪宗) 계통의 승려이다. 그를 기리는 비석의 비몸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서서(書史)에 해박하며, 전국의 이름난 산을 찾아다니며 수행했다고 한다. 비문은 왕희지의 글씨를 모아 새겼다.

OLYMPUS DIGITAL CAMERA양양 선림원지 절터에 남아 있는 홍각선사탑비(보물 446호).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비몸을 복원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거북받침돌. 얼굴은 용이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거북등에는 육각모양이 새겨져 있다. 조각수법이 섬세하거나 생동감이 넘치지는 않는다.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비몸을 올리는 받침에는 연꽃무늬과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머릿돌에는 탑비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주위와 구름속을 나는 용을 입체감 있게 조각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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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각선사의 업적을 새긴 비몸(복원품).

OLYMPUS DIGITAL CAMERA홍각선사 비편(The Fragment of a stele), 통일신라, 양양 선림원지.

통일신라 헌강왕 때의 고승인 홍각선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신의 일부이다. 탑비의 귀부와 이수는 현재 양양 선림원지에 남아 있다. 비면이 심하게 마멸되고 여러 곳이 깨져 있어 판독에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남아 있는 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홍각선사는 17세에 출가하여, 880년(헌강왕5) 법랍 50세로 입적하였다. 출가전에 이미 경사에 능통했으며, 출가 후에는 불경을 깊이 연구하고 영산을 두루 찾아다니며 수행하였다. 수양이 깊어지자 많은 사람들이 도를 구하였고 왕도 그의 덕을 흠모하여 궁궐로 청해 설법을 듣기도 하였다. 이 비는 886년(헌강왕12)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김원이 짓고 승려 운철이 왕희지의 글씨를 모아 새겼다고 한다. 글자는 2cm 정도 크기의 행서체로 통일신라 말기에 왕희지의 글씨가 신라 전역에 보급되었음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이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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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쪽에서 본 홍각선사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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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쪽에서 본 모습.

선림원(禪林院)은 강원도 동해안 양양과 속초지역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인 56번국도가 지나가는 구룡령 아래 계곡에 위치한 큰 사찰이었다. 통일신라 때(9세기) 홍각선사가 창건한 이 사찰은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선종계열 사찰이었다. 구룡령을 넘기전에 잠시 머물수 있었던 곳으로 많은 승려들과 여행객들을 위한 쌀을 씻은 물이 끝없이 흘러내린다고 해서 미천골로 불렸다. 1948년에 명문(銘文)이 있는 신라 범종이 발견되었으며, 절터에는 석탑(보물 444호)을 비롯하여 석등(보물 445호)·홍각선사탑비(보물 446호)·승탑(보물 447호) 등이 전해지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양양 미천골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선림원지 절터.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보물 446호, 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이리
이 탑비는 홍각선사(弘覺禪師, ?~880년)의 부도 탑비로서 신라 정강왕 원년(886)에 세워졌다. 17세기 중엽 이전에 이미 파손되어 비신 잔편 일부는 국립춘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던 것을 2008년에 비신을 새로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귀부는 용의 머리가 직립한 모습이고, 비좌에는 구름무늬가 둘러져 있다. 이수에는 “홍각선사비명”이라는 전액을 양각으로 새기고 주위에는 운용문으로 장식하여 신라 하대 석비의 전형적인 특징이 보인다. 비신은 가로 94.0 cm, 세로 173.5 cm의 크기로 재현하였다. 대략 1,340여자 내외의 글자가 적혀 있었을 것으로 고증되며 총 710자의 글자를 복원하였다. 비분의 내용은 비명, 비문 찬술 관련자, 홍각선사의 생애, 선사 사후 비석건립 경위, 관련인물, 건비 시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0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보물 275호)

전남 곡성군 죽곡면 동리산 태안사 입구에 있는 광자대사탑비(보물 275호)이다. 고려초 태안사를 크게 일으킨 광자대사 윤다의 행적과 업적을 기리는 내용을 적은 탑비이다. 현재는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이 온전히 있으며, 글이 적힌 비몸은 일부 조각만 남아 있다. 거북받침돌은 사실적 표현과 조각수법이 돋보인다. 머릿돌에는 네귀퉁이에 이무기 머리를 조각했으며 앞면에는 극락조를 입체감있게 새겼다. 비봄이 파손되어 글자를 읽을 수 없지만 옛기록에 따르면 광자대사의 행적을 기록해 놓았다고 한다.

광자대사 윤다(廣慈大師 允多, 864~945년)는 고려초 구산선문 동리산파 3대 종조(宗祖)이자 태안사를 크게 중창하였다. 어려서 집을 나와 사방을 다니다가 동리산에서 선을 수행했으며 승려 혜철에게서 배웠다. 선승(禪僧)이면서도 율법을 중시여겼다. 시호는 광자대사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보물 275호). 글자가 적힌 비몸은 파손되어 없고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사실적이며 생동감 넘치는 표현과 세부적인 조각수법이 뛰어난 걸작이다. 머릿돌은 네귀퉁이에 이무기 머리를 새겼으며, 위에는 3개의 꽃봉우리, 앞쪽에는 극락조가 표현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머릿돌.

OLYMPUS DIGITAL CAMERA뒷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광자대사탑(보물 274호)

OLYMPUS DIGITAL CAMERA승탑들이 세워져 있는 태안사 입구.

태안사(泰安寺)는 곡성군 동리산(桐裏山)에 있는 사찰로 통일신라 때 3명의 승려가 창건했다 전해진다. 통일신라 말 승려 혜철이 머물면서 선종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동리산문의 중심사찰이 되었다. 고려초에는 광자대사가 크게 중창하면서 지역의 중심사찰이 되었으나 고려중기 이후 수선결사를 이끈 송광사가 번창하면서 크게 위축되었다. 조선초에는 효령대군이 머물기도 했다. 사찰내에는 적인선사탑(보물 273호), 광자대사탑(보물 274호), 광자대사탑비(보물275호) 등의 문화재가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통일신라 선종 동리산문 중심사찰이었던 곡성 태안사.

곡성 태안사 광자대사탑비, 보물 275호, 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광자대사탑비는 광자대사를 기리기 위해 그 행적을 새긴 석비이다. 석비는 거북이 모양이 귀부를 맨 아래에 두고 그 위에 비문이 새겨진 비신을 세운 다음 맨 위에 용으로 꾸며진 이수를 얹은 모습을 하고 있다. 현재는 비신이 파괴되어 그 일부가 석비 옆에 남아 있으며 새겨진 글자도 마모되어 부분적으로만 판독할 수 있는 상태이다. “조선금석총람”과 “해동금석원” 등의 문헌에 따르면 광자대사탑비는 고려 초 태안사를 고쳐 지은 광자대사의 탑비로 고려 광종 원년(950)에 세워졌다. 또한 효공왕의 측근으로 불심에 대한 문답을 주고 받았으며 고려 태조 왕건에게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귀부는 아래에 얇은 받침돌을 두었고 귀갑무늬와 꼬리, 뒷발이 뚜렷이 조각되어 있다. 특히 용머리는 목이 짧으나 생김새가 사실성을 띠고 있으며 비석 받침대에는 구름과 소용돌이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수에는 네 모서리에 몸을 감고 있는 용이 표현되었고 연꽃 봉우리가 세 곳에 얹어져 있으며 중앙에는 극락조로 보이는 새가 조각되어 있다. 비신의 일부가 소실되어 아쉽기는 하나 광자대사승탑과 함께 스님의 행적을 기리고 가람의 장엄함을 돋보이게 하는 귀한 탑비라고 할 수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보물 106호)

충남 서산시 운산면 보원사지(사적 316호) 절터에 있는 법인국사탑비(보물 106호)이다. 고려초 승려 법인국사 탄문(坦文, 900∼975)의 행적과 업적을 적은 탑비이다. 높이 4.5 m이 비교적 큰 규모의 비석으로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과 머릿돌을 올렸다. 크고 웅장하게 만들었으나 조형미나 조각수법이 뛰어나거나 독창성을 보이는 것은 아니고 정형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비문은 김정언이 짓고 한윤이 썼다. 글씨는 구양순체로 필력과 짜임새가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법인국사는 신라 말과 고려 초에 활약한 유명한 승려로 경기도 광주 출신이다. 북한산 장의사에서 불경 등을 배웠으며, 고려 광종과는 개인적인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종 때 왕사와 국사가 되었으며,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 광종은 ‘법인(法印)’이라 시호와, ‘보승(寶乘)’이라는 탑이름을 내렸다.

SANYO DIGITAL CAMERA서산 보원사지 절터에 남아 있는 법인국사탑비(보물 106호). 높이 4.5 m로 크고 웅장하게 만들었으나 정형화된 느낌을 준다.

SANYO DIGITAL CAMERA보원사지 절터에 나란히 세워져 있는 법인국사탑(보물 105호)과 탑비

보원사(普願寺)는 그 내력이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절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84호)이 있으며, 절터에서 6세기 중엽에 제작된 금동불상이 발견된 것으로 볼 때 백제때부터 있었던 사찰로 여겨진다. 통일신라때는 최치원이 언급한 의상대사를 계승한 화엄십찰 중 하나로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다. 절터에는 오층석탑(보물 104호), 법인국사탑(보물 105호) 등이 있으며, 절터에서 출토된 거대한 철조불상이 중앙박물관에서 소장.전시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서산 보원사지 절터(사적 316호). 화엄십찰 중 한곳으로 충남 서해안 지역을 대표하는 큰 사찰이었다.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 보물 106호,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법인국사의 탑비이며 978년(고려 경조3)에 경종의 지시로 세워졌다. 비몸 높이 230 cm, 폭 115 cm, 글자수 5,000여자나 되는 거비이며 국공(國工)을 파견하여 이들이 세우게 했다. 이분은 신라말 ~고려초의 고승으로 법호는 탑문이다. 비문의 내용은 탄문의 일대기이며 900년(신라 효공왕4)에 출생하여 15세에 계를 받고 968년(광종 19)에 왕사, 974년(광종25)에 국사를 지내다가 이곳 보원사에 와서 975년(광종 26)에 입적하였다. 역대 왕들과 가까웠으며 국가 시행 불사를 도맡아 시행하였고 특히 광종은 왕권강화 작업 기간 이후 정신적인 지주로서 왕사, 국사로 가까이 있게 했으며 입적하자 매우 슬퍼하였다. 이분은 학승으로 제자가 많아 말년에 보원사에 올 때 선, 교승 천여명이 영접했으며 이곳을 「고산(故山)」이라 하고 여기에 와서 묻혔다. 이것으로 보아 어렸을 때 이곳에서 수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문화재청, 2009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보물 658호)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청룡사 절터에 남아 있는 보각국사탑비(보물 658호)이다. 고려말에 활동한 보각국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비이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돌을 올려놓은 단순한 형태이다. 조선 태조의 명을 받아 승려 희달이 세운 것으로 개국공신 중 한명인 권근이 글을 짓고, 승려 천택이 글씨를 썼다. 비석에 새겨진 글씨는 필체가 힘이 넘치며 격조를 갖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보각국사 혼수(混修, 1320~1392년)는 고려말 활동한 승려로 문장과 글씨에 능했으며, 계율을 따를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젊었을때는 청룡사에서 머물렀으며, 전국을 돌며 수도하다가 이곳 청룡사에서 입적했다고 한다. 시호는 ‘보각(普覺)’이며 탑이름은 ‘정혜원륭(定慧圓融)’이다.

SANYO DIGITAL CAMERA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보물 658호).  조선초에 세워진 비석으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올려 놓은 단순한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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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에 새긴 글은 조선 개국공신 중 한명인 권근이 글을 짓고, 승려 천택이 글씨를 썼다. 보각국사의 행적와 그를 기리는 내용이 적혀 있다.

SANYO DIGITAL CAMERA비석에 새겨진 글씨, 글자가 아주 또렷하며 힘이 넘친다. 사진으로 봐서도 상당히 잘 쓴 글씨로 보이는데, 당대 최고 수준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 글씨라 한다.

청룡사(靑龍寺)는 충주 남한강 북쪽 청계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여주 고달사, 원주 거돈사, 법천사, 흥덕사 등과 함께 남한강 수운과 연계된 주요 교통로에 자리잡고 있으며, 지역 호족들의 후원을 받아온 사찰이다. 사찰이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려진바가 없지만 숙종 때 세워진 위전비의 내용으로 볼 때 조선후기까지 사찰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폐사되어 오늘날은 승탑만 남아 있다. 절터에는 보각국사탑(국보197호), 탑비(658호), 석등(보물656호) 등이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보각국사탑(국보197호), 석등(보물 656호)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보물658호, 충북 충주시 소태면
고려 공민왕과 공양왕 및 조선 태조의 국사였던 고려말 승려 보각국사비이다. 문인선사 희달이 태조3년(1294)에 왕의 명을 받아 세운 것으로 비문은 권근이 지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고려 우왕 9년(1388)에 국사가 되어 73세에 입적한 사실과 보각국사의 덕과 지혜를 추앙하고 기리기 위하여 왕명으로 세운다는 것이다. 비 윗부분의 장식물이 없는 대신에 양끝부분 모서리를 꺽은 것이 특징이다. (안내문, 문화재청, 2009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