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탑비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보물 17호), 절터 부근에 남아 있는 탑비

충북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에 있는 법경대사탑비(보물 17호)이다. 탑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은 전통적인 탑비 양식을 따르고 있다. 거북받침돌에 표현된 용의 얼굴이나 몸통, 머릿돌에 새겨진 용의 모습이 사실적이며 생동감있게 표현되어 있다. 머릿돌 가운데에는 비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몸돌에는 그의 행적이 새겨져 있다. 원래 아랫쪽에 있는 정토사지 절터에 있던것을 충주댐 건설로 절터가 수몰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법경대사 현휘(玄暉, 875~941년)은 통일신라말에서 고려초까지 활동했던 승려이다. 중국 당나라에 유학했으며, 귀국하여 충주 정토사에 머물면서 불교를 가르쳤다. 국사로 대우받았으며 그가 죽은 후 고려 태조는 ‘법경(法鏡)’이라는 호를 내렸으며, 탑이름은 ‘자등(慈燈)’이라 하였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최언위가 글을 짓고, 명필이었던 구족달이 구양순체로 글을 썼다. 법경대사 사리를 모신 승탑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되어 국내에는 남아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보물 17호). 당나라 탑비 양식이 잘 반연되어 있는 고려초에 세운 탑비이다. 전체적인 조형미나 세부 조각수법 등이 양호하다.

OLYMPUS DIGITAL CAMERA비몸을 받치고 있는 거북받침돌. 얼굴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몸통을 받치는 발은 형식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뒷쪽에서 본 거북받침돌. 등껍질에 새겨진 육각형의 무늬에서 전통적인 비석받침돌의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법경대사의 행적이 새겨진 비몸. 당대 문장가 최언위가 글을 짓고, 명필 구족달이 글씨를 썼다. 선명하게 남아 있는 글자는 단정하면서도 힘이 있는 필체를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머릿돌에는 ‘법경대사’라는 탑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용의 형상을 입체감있게 조각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탑비.

보물17호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 01-20060220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기 전 모습. 탑비는 원래 부근 정토사지 절터에 있었는데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OLYMPUS DIGITAL CAMERA탑비는 원래 있던 절터 부근으로 옮겨졌다. 뒷편에 있던 큰 나무가 옛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나무와 비슷한 것으로 볼 때 절터는 현위치에 아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절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곳(?).

OLYMPUS DIGITAL CAMERA탑비가 옮겨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마을.

정토사법경대사자등탑비, 보물17호,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절골
충주댐 수몰지역 내 정토사지에 있던 비를 1983년에 발굴조사를 실시한 후 현 위치로 옮겼는데, 고려 태조 26년(943)에 법경대사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법경대사는 신라말 ~ 고려초의 고승으로 정토사를 창건, 포교에 힘썼고, 고려 태조 7년(924)에 국사로 추대되었으며, 태조 24년(941)에 63세로 돌아가시자 생전의 업적에 따라 법경이라는 호를 내리고 공적을 칭송하기 위해 최언위가 글을 짓고 구족달이 써서 건립하였다. 이 비문에는 충주를 ‘중주’로 표기하고 있어, 탑평리 7층석탑을 중앙탑이라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 지역이 한반도의 중심지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부처의 진리가 사방으로 퍼지는 빛을 상징하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거북모양의 받침돌과 영혼이 천상의 세계로 인도됨을 의미하는 두마리 용을 조각한 비의 머리 등은 고려초기 석조미술의 정수를 이루고 있다. 법경대사자등탑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고 한다. 같이 있던 사리탑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남아 있지 않다. (안내문, 충주시청, 2011년)

<출처>

  1. 충주시청
  2. 문화재청
  3. 두산백과
  4. 위키백과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비(보물 359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홍법국사탑비(보물 359호)이다. 홍법국사탑과 함께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 정토사 절터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경복궁으로 옮겼다가 지금은 중앙박물관 야외에 전시되고 있다. 거북받침돌 위에 비석을 올려놓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와 고려초기 탑비의 형식을 하고 있다. 용의 얼굴을 한 거북받침돌은 생동감있는 표현되었으며, 머릿돌에 새겨진 용의 모습이 매우 사실적이며 힘이 넘치는 조각수법이 특징이다. 비의 앞면에는 홍법국사의 행적이, 뒷면에는 제자들의 이름을 기록하였는데 마모가 심하여 지금은 알아보기 힘들다. 고려초인 1017년에 세워졌다.

홍법(弘法, ?~?)국사는 고려초에 활동한 승려로 당나라에 유학했으며 말년에 충주 정토사에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탑비에 적힌 글자의 마모가 심해 알아보기 힘들어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는 편이다. 고려 목종으로부터 홍법이라는 시호와 실상(實相)이라는 탑호를 받았다. 그의 사리를 모신 승탑(국보 102호)도 중앙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다. 그가 머물렀던 정토사는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었으며, 절터에 있던 법경대사탑비(보물 17호)는 인근 마을에 옮겨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국립중앙박물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홍법국사탑비(보물 3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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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얼굴을 한 거북받침돌 위에 탑비를 올려 놓고 있다.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생동감있게 표현된 세부 조각수법도 양호한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비석을 받치고 있는 거북받침돌. 세부 표현은 양호하지만 정형화된 통일신라말 이후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거북받침돌.

OLYMPUS DIGITAL CAMERA정형화된 모습의 거북받침돌과는 달리 머릿돌에 조각된 용의 모습은 섬세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조각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가운데에  ‘實相之塔(실상지탑)’이라 적힌 국왕이 내린 탑의 이름이 적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머릿돌. 섬세하면서 생동감 넘치는 표현이 돋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비몸에는 홍법국사의 행적을 적고 있으나 글자가 심하게 닳아 판독하기 쉽지 않다. 윗쪽에 탑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비석 뒷편에는 홍법국사 제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심하게 닳아 판도이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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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홍법국사탑(국보 102호)과 함께 최근에 보수작업이 완료되어 박물관 야외에 전시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흥법국사탑과 탑비가 있던 충주 정토사지는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어 현재는 찾아가 볼 수 없다.

OLYMPUS DIGITAL CAMERA절터에 있던 법경대사탑비(보물 17호)와 절터에서 출토된 건축부재들은 인근 마을에 옮겨져 전시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인근 마을에 옮겨진 법경대사탑비(보물 17호)와 홍법국사탑 모형.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비, 충북 충주시 정토사터, 고려 1017년, 보물 359호
비의 앞면에는 홍법국사의 행적이, 뒷면에는 제자들의 이름이 해서로 적혀 있다. 홍법국사가 정토사에 머물다 입적하자 고려 목종은 실상(實相)이라는 탑명을 내리고 1017년 손몽주에게 비의 글을 짓도록 하였다. 받침돌에 거북 머리 대신 용의 머리를 조각하는 것은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7년)

<출처>

  1. 중앙박물관
  2. 문화재청
  3. 두산백과
  4. 위키백과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보물 360호), 중앙박물관 로비에 전시되어 있는 탑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는 원랑선사탑비(보물 360호)이다. 충북 제천 월광사 절터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경복궁으로 옮겨 놓은 후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로비 공간에 전시되어 있다.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리돌을 얹은 정형화된 통일신라 탑비의 형태를 하고 있다. 비몸에는 원랑선사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데 글씨는 당나라 구양순의 해서체이다.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은 그 조각수법이 매우 사실적이고 활력있어 보인다. 탑비의 구성부분이 온전히 남아 있고, 비례에 있어서 안정감을 보여주고 있어 우리나라 탑비를 대표하는 유물로 중앙박물관 중앙 로비에 전시된 것으로 보인다.

원랑선사 대통(816~883년)은 통일신라말에 활동한 승려이다. 당나라에 11년간 유학한 후 월광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성주산문을 열었던 낭혜화상 무염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통일신라 헌강왕이 ‘대보선광’이라는 탑명을 내리고 글을 짓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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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보물 360호). 당나라 비석 양식의 영향을 받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탑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비석을 받치고 있는 거북받침돌. 용의 얼굴을 하고 있는 거북의 형상을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거북받침돌.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거북받침돌. 등껍질에는 육각형의 무늬를 새기고, 그 안에 연꽃문양을 새겨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비몸에는 원랑선사의 행적을 적고 있는데, 사각형으로 구획을 나눈 후 글씨를 새겼다. 지금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글씨를 선명하게 새겼다.

OLYMPUS DIGITAL CAMERA구름과 용을 생감있게 표현하고 있는 머릿돌. 조각수법이 섬세하면도 화려하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머릿돌.

OLYMPUS DIGITAL CAMERA거북받침돌, 비몸, 머릿돌이 제대로 남아 있어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탑비로 중앙박물관 로비에 한가운데 전시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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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편에서 본 모습.

<출처>

  1. 중앙박물관
  2. 문화재청
  3. 두산백과
  4. 위키백과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국보8호), 성주산문을 열었던 낭혜화상의 탑비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사지(사적 307호)에 남아 있는 낭혜화상탑비(국보 8호)이다.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만든 높이 4.55 m의 이 탑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과 머리돌을 올려놓은 전형적인 당나라 비석의 형태를 하고 있다. 거북받침돌 머리는 얼굴 일부가 깨져 있는데, 머리 위에 둥근 뿔이 있고, 입은 불을 내뿜으려는 형상을 하고 있다. 거북 등에는 육각무늬를 세웠으며, 움직이려는 네 발은 사실적으로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머릿돌에는 구름과 용이 뒤엉킨 모양을 입체감 있게 조각했다. 통일신라 탑비 중에서도 웅장하면서 화려한 조각수법 등의 돋보이는 걸작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탑비 중에서는 가장 웅장하고 완성도가 높은 것이라 한다.

낭혜화상 무염(801~888년)은 태종무열왕의 8대손으로 당나라에서 선종을 배우고 와서 이 곳에서 통일신라 구산선문 중 하나인 성주산문을 세웠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을 자세히 적고 있는데 당대 최고 문인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 최인곤이 글씨를 썼다. 비문 내용 중 낭혜화상의 신분과 관련된 용어들이 적혀 있어 신라 골품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낭혜는 국왕이 내린 시호이고, 탑 이름은 ‘백월보광’이라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충남 보령시 성주산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성주사지 옛 절터 뒷편에 있는 낭혜화상탑비(국보 8호). 탑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어 놓고 있다. 통일신라말 진성여왕 때 세워진 것으로 승려의 탑비로는 그 제작연대가 오래된 것 중 하나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거북받침돌. 얼굴은 용이 불을 뿜을려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땅을 받치고 있는 못을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등에는 육각무늬를 새겼으며, 가운데에는 구름무늬로 장식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구름사이로 용이 다투는 모습을 입체감있게 표현하고 있는 머릿돌.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머릿돌.

OLYMPUS DIGITAL CAMERA최치원이 글을 지은 4개의 비석 중 하나로 글씨는 최인연이 썼다. 비문의 내용은 낭혜화상의 업적을 적고 있는데, 통일신라 사회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내용들이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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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강 탑비 탁본

OLYMPUS DIGITAL CAMERA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 탑비 탁본첩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국보8호,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신라 선문구산 가운데 하나였던 성주산문을 처음으로 창설한 낭혜화상 무염(801~888년)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다. 몸돌을 받치고 있는 지대석 일부가 손상되었을 뿐 비신과 머리돌이 원래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낭혜화상은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8대손으로 성은 김씨, 호는 무량 혹은 무주이다. 낭혜는 그가 죽은 후 내려진 시호이다. 그는 12세에 출가하여 821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선종을 습득하고 20여년 동안 중국 여러 곳을 다니며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운 사람들을 돌보았다. 중국 사람들은 이러한 그를 지칭하여 “동방대보살”이라 일컬었다. 847년에 귀국하여 40여년간 성주사에 머무르면서 불법을 크게 떨쳐 성주산문을 일으켰다. 비가 세워진 연대는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낭혜 화상이 세상을 떠난 2년 뒤인 890년(진성여왕 2년)으로 짐작된다. (보령시, 2010년)

성주사(聖住寺)는 보령 성주산 남쪽 기슭에 있었던 사찰로 통일신라 선종 구산선문 중 성주산파의 중심사찰이었다. 충남 보령시에서 공주, 부여와 연결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산중에 자리잡고 있지만 그 규모가 상당히 큰 평지사찰로 금당 뒷편에 3기의 삼층석탑, 앞편에는 오층석탑이 배치된 특이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동삼층석탑은 다른 곳에서 옮겨 왔기 떄문에 금당 뒷편에 2개의 탑이 세워 별도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을 중요시 했던 기존 불교와는 달리 수행을 중시여기는 선종계열 불교의 특징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최치원 글을 지은 낭혜화상탑비(국보 8호)가 절터에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보령 성주사지(사적 307호). 통일신라말 크게 번창한 선종 구산선문 중 하나였던 큰 절터이다. 이곳에는 낭혜화상탑비(국보8호)를 비롯하여 4기의 석탑 등이 남아 있다.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보령시청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보물 446호)

강원도 양양군 서면 선림원지 옛 절터에 남아 있는 홍각선사탑비(보물 446호)이다. 통일신라 때(886년)에 홍각선사를 기리기 위해서 세워진 탑비이다. 거북받침돌, 비몸, 머릿돌로 구성된 전형적인 탑비의 형태를 하고 있다. 조선시대 이전에 파손되어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던 것을 최근 몸돌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거북받침돌은 용의 머리가 직립하고 있는 모습이며, 비몸을 올려놓았단 자리에는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거북받침돌에는 “홍각선사비명”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주위는 구름과 용이 새겨져 있다. 글자가 새겨지 비몸 일부만 남아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다.

홍각선사는 통일신라 헌강왕 때 활동한 선종(禪宗) 계통의 승려이다. 그를 기리는 비석의 비몸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서서(書史)에 해박하며, 전국의 이름난 산을 찾아다니며 수행했다고 한다. 비문은 왕희지의 글씨를 모아 새겼다.

OLYMPUS DIGITAL CAMERA양양 선림원지 절터에 남아 있는 홍각선사탑비(보물 446호).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비몸을 복원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거북받침돌. 얼굴은 용이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거북등에는 육각모양이 새겨져 있다. 조각수법이 섬세하거나 생동감이 넘치지는 않는다.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비몸을 올리는 받침에는 연꽃무늬과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머릿돌에는 탑비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주위와 구름속을 나는 용을 입체감 있게 조각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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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각선사의 업적을 새긴 비몸(복원품).

OLYMPUS DIGITAL CAMERA홍각선사 비편(The Fragment of a stele), 통일신라, 양양 선림원지.

통일신라 헌강왕 때의 고승인 홍각선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신의 일부이다. 탑비의 귀부와 이수는 현재 양양 선림원지에 남아 있다. 비면이 심하게 마멸되고 여러 곳이 깨져 있어 판독에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남아 있는 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홍각선사는 17세에 출가하여, 880년(헌강왕5) 법랍 50세로 입적하였다. 출가전에 이미 경사에 능통했으며, 출가 후에는 불경을 깊이 연구하고 영산을 두루 찾아다니며 수행하였다. 수양이 깊어지자 많은 사람들이 도를 구하였고 왕도 그의 덕을 흠모하여 궁궐로 청해 설법을 듣기도 하였다. 이 비는 886년(헌강왕12)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김원이 짓고 승려 운철이 왕희지의 글씨를 모아 새겼다고 한다. 글자는 2cm 정도 크기의 행서체로 통일신라 말기에 왕희지의 글씨가 신라 전역에 보급되었음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이다. (안내문, 춘천박물관,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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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쪽에서 본 홍각선사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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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쪽에서 본 모습.

선림원(禪林院)은 강원도 동해안 양양과 속초지역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인 56번국도가 지나가는 구룡령 아래 계곡에 위치한 큰 사찰이었다. 통일신라 때(9세기) 홍각선사가 창건한 이 사찰은 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선종계열 사찰이었다. 구룡령을 넘기전에 잠시 머물수 있었던 곳으로 많은 승려들과 여행객들을 위한 쌀을 씻은 물이 끝없이 흘러내린다고 해서 미천골로 불렸다. 1948년에 명문(銘文)이 있는 신라 범종이 발견되었으며, 절터에는 석탑(보물 444호)을 비롯하여 석등(보물 445호)·홍각선사탑비(보물 446호)·승탑(보물 447호) 등이 전해지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양양 미천골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선림원지 절터.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보물 446호, 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이리
이 탑비는 홍각선사(弘覺禪師, ?~880년)의 부도 탑비로서 신라 정강왕 원년(886)에 세워졌다. 17세기 중엽 이전에 이미 파손되어 비신 잔편 일부는 국립춘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던 것을 2008년에 비신을 새로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귀부는 용의 머리가 직립한 모습이고, 비좌에는 구름무늬가 둘러져 있다. 이수에는 “홍각선사비명”이라는 전액을 양각으로 새기고 주위에는 운용문으로 장식하여 신라 하대 석비의 전형적인 특징이 보인다. 비신은 가로 94.0 cm, 세로 173.5 cm의 크기로 재현하였다. 대략 1,340여자 내외의 글자가 적혀 있었을 것으로 고증되며 총 710자의 글자를 복원하였다. 비분의 내용은 비명, 비문 찬술 관련자, 홍각선사의 생애, 선사 사후 비석건립 경위, 관련인물, 건비 시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0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