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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성덕왕릉 귀부(거북받침돌)

경북 경주시 조양동에 있는 거북받침돌이다. 성덕왕릉에 100 m 떨어진 곳에 있는 성덕왕비(聖德王碑) 거북받침돌이다. 글자를 새긴 비몸과 머릿들은 남아 있지 않다. 성덕왕의 아들인 형인 효성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경덕왕 때(745년) 세워졌다. 경덕왕은 아버지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성덕대왕 신종(국보)을 주조하기도 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성덕왕릉 귀부(거북받침돌)>

거북받침돌은 목이 부려져 남아 있지 않다. 발은 앞으로 나아갈려는 모습을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등에는 육각형 무늬가 새져져 있으며 비몬을 올려놓았던 홈이 파여 있다. 당나라 능묘제도가 받아들여지면서 왕릉 앞에 세워졌던 비(碑)의 양식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불국사가 세워졌던 8세기에 만들어졌던 것으로 조각수법이나 조형미가 뛰어나다.

OLYMPUS DIGITAL CAMERA<정면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뒷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앞발>

OLYMPUS DIGITAL CAMERA<뒷발>

OLYMPUS DIGITAL CAMERA<등에 새겨진 육각형 무늬>

OLYMPUS DIGITAL CAMERA<비몸을 올려 놓았던 자리>

OLYMPUS DIGITAL CAMERA<성덕왕릉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신라 33대 성덕왕릉>

성덕왕릉 귀부, 경북 경주시 조양동 666
이 귀부는 신라 성덕왕(聖德王)의 능비에 세웠던 받침돌이다. 거북머리는 깨어져 없지만, 발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형상이다. 등에는 육각 귀갑(龜甲)무늬가 새겨졌고, 가운데에 비몸[碑身)을 꽂았던 네모난 홈이 파여 있다. 여기에 새겨진 거북 등무늬나 당초문은 8세기의 신라 왕릉에 건립된 귀부의 제작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비신과 머릿돌은 없어졌지만 경덕왕(景德王)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귀부는 6세기 이후부터 8세기 사이의 귀부 양식을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성덕왕릉, 신라 33대 성덕왕

경북 경주시 조양동에 있는 신라 33대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년)의 능이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 형인 효소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36년 동안 통일신라 전성기를 이끌었다. 당나라와 외교문서를 전담하는 통문박사를 설치하고, 당나라에 약43회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당나라왕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유교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당나라에서 가져온 공자와 중국 선현들의 초상화를 태학에 두었다. 당의 균전제를 본떠 자영농에서 정전을 지븍하여 재정적인 기반을 튼튼히 하였다. 당에 사신을 보내 발해를 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가 중단하기도했으며. 대동강 이남을 통일신라의 영토로 확정된 시기이기도 하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성덕왕릉(사적)>

성덕왕이 왕위에 오르다 ( 702년 07월(음) )
성덕왕(聖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흥광(興光)이다. 본래 이름은 융기(隆基)였는데, 현종(玄宗)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에 선천(先天) 연간(712~713)에 고쳤다 『당서(唐書)』에는 김지성(金志誠)이라고 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의 둘째 아들로서 효소왕(孝昭王)의 친동생[同母弟]이다. 효소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효소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위하여 애도하고 이틀간 조회(朝會)를 열지 않았다. 사신을 보내 조문·위로하고 왕을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아울러 형의 장군(將軍)·도독(都督) 칭호를 잇게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8 신라본기 제8,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성덕왕이 죽다 ( 737년 (음) )
왕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8 신라본기 제8,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왕릉은 밑둘레가 46 m, 높이 5 m로 조선 왕릉 봉분규모와 비슷한데 이는 신라가 당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정형화되어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봉분 둘레에는 둘레석을 세우고 바깥쪽에는 삼각형의 돌로 세워 받치고 있다. 둘레석 받침돌 사이에는 화강석을 입체적으로 조각해서 만든 십이지신상이 세워져 있다.  봉분 바깥쪽에는 난간을 둘러세웠다. 무덤 주위에는 사자상과 문인석을 배치하였으며 약간 떨어진 곳에 비석을 세웠던 거북받침돌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둘레석과 삼각형 받침대>

둘레석이 돋을새김으로 한 다른 왕릉의 십이지산상과는 달리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후대에 추가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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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받침돌 사이에 세워진 십이지산상1>

OLYMPUS DIGITAL CAMERA<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돌난간>

정면에는 상석을 설치하였는데 규모가 큰 편이며 서구의 신전 등에서 볼 수 있는 제단과 비슷한 형태이다. 신라 왕릉의 완성된 형식을 보여주는 38대 원성왕릉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성덕왕릉부터 정형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앞에 있는 상석>

성덕왕릉에는 무인석 1쌍이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하나만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고, 하나는 일부만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무인석1>

OLYMPUS DIGITAL CAMERA<일부만 남은 무인석>

왕릉의 네모서리에는 4기의 사자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3기가 남아 있다. 성덕왕릉은 사자상, 문인상 등 석물을 배치한 전형적인 왕릉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자상 1>

OLYMPUS DIGITAL CAMERA<사자상 2>

OLYMPUS DIGITAL CAMERA<사자상 3>

성덕왕릉비는 경덕왕 때(754년)에 세워졌다. 현재는 비석을 받치는 거북받침돌만 남아 있는데 이를 기준은 성덕왕릉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성덕왕비를 세우다 ( 754년 05월(음) )
5월에 성덕왕비(聖德王碑)를 세웠다. (삼국사기 권 제9 신라본기 제9,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OLYMPUS DIGITAL CAMERA<비를 세웠던 거북받침돌>

신라 성덕왕릉(新羅 聖德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조양동 산 8
이 능은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 김흥광)을 모신 곳이다. 토함산(吐含山)의 서쪽에 있는 형제봉(兄弟峰)의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 말단부에 위치 하고 있다. 성덕왕은 신문왕(神文王)의 둘째 아들로 형인 효소왕 (孝昭王)의 뒤를 이어 36년 동안 통치하면서, 안으로는 정치를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당(唐)과 외교를 활발히 하였으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워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무덤은 밑둘레가 46 m, 지름이 14.5 m, 높이가 5 m이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고정시켰으며, 그 바깥쪽에 삼각형의 돌을 세워 받치고 있다.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입체 (立體)로 배치되어 있는데, 네모난 돌 위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인데,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능 주위에는 돌사자(石獅子)와 문인석(文人石)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비석을 세웠던 돌거북이 파손된 채 남아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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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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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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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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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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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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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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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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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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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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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산상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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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12>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원성왕릉(사적), 신라 38대 원성왕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년)의 능이다 원성왕은 상대등 김양상 (선덕왕)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평정한 후 그 공을 인정받아 선덕왕 즉위 후 상대등이 되었고 선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원성왕으로 즉위하였다. 당나라와 통교하였으며 유교정치를 지향하여 독서삼품과를 두어 인재를 등용하였다. 김제 벽골제를 증축 농사를 장려하였다. 선덕왕과 원성왕 집권기는 귀족들이 요직을 장악하고 그들 사이의 권력투쟁을 통해서 왕위를 계승하는 통일신라 후대의 정치 혼란상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원성왕릉(사적)>

원성왕이 즉위하다 ( 785년 01월(음) )
원성왕(元聖王)이 즉위하였다. 왕의 이름은 경신(敬信)으로 나물왕(奈勿王)의 12세손이다. 어머니는 박씨(朴氏) 계오부인(繼烏夫人)이고 왕비는 김씨로 신술(神述)5 각간(角干)의 딸이다. 일찍이 혜공왕(惠恭王) 말년에 반신(叛臣)이 발호(跋扈)하였는데, 선덕왕(宣德王)이 당시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앞장서서 임금의 곁에 있는 나쁜 무리를 제거할 것을 주장하였다. 경신이 그에 동조하여 난을 평정하는데 공이 있었기에, 선덕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왕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자, 여러 신하들이 회의를 한 후에 왕의 집안 조카인 주원(周元)을 옹립하고자 하였다. 주원의 집은 서울에서 〔왕궁으로부터〕 북쪽으로 20리(里) 떨어진 곳에 위치였는데, 마침 큰비가 와서 알천(閼川)의 물이 넘쳐 주원이 알천을 건너 〔왕궁으로〕 오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왕[人君]은 큰 자리라 진실로 사람이 도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갑자기 비가 쏟아진 것은 하늘이 혹시 주원을 왕으로 세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 상대등 경신은 전왕의 동생으로 평소 덕망이 높고 왕의 자질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들의 뜻이 모아져 경신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그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만세를 외쳤다. (삼국사기 권 제10 신라본기 제10,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원성왕이 죽다 ( 798년 12월29일(음) )
〔14년(798)〕 겨울 12월 29일에 왕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원성(元聖)이라 하고, 유명(遺命)에 따라 관[柩]을 옮겨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0 신라본기 제10,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원성왕릉은 괘릉(掛陵)으로도 불리는데, 무덤을 조성할 떄 물이 괘어 널을 걸어 묻었다는 조선시대 민간신앙과 결부된 전설에 따른 것이다. <삼국유사>에 ‘원성왕릉이 토함산 동곡사에 있는데, 동곡사는 당시 숭복사로 최치원이 비문을 쓴 비석이 있다’는 기록과 괘릉 근처에 숭복사터가 있어 원성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원성왕릉 입구>

OLYMPUS DIGITAL CAMERA<입구에서 보이는 능역>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앞에서 보이는 능역 입구>

왕의 능은 토함산(吐含山) 서동(西洞) 곡사(鵠寺)에 있는데,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가 있다. 또한 보은사(報恩寺)와 망덕루(望德樓)를 창건했으며, 할아버지인 훈입 잡간(訓入 匝干)을 추봉하여 흥평대왕(興平大王)이라 하고, 증조 의관 잡간(義官 匝干)을 신영대왕(神英大王)으로 삼았으며, 고조 법선 대아간(法宣 大阿干)을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삼았다. 현성대왕의 아버지가 바로 마질차 잡간(摩叱次 匝干)이다. (삼국유사 권 제2 제 2기이,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원성왕릉은 12지신상으로 둘레돌을 돌린 원형봉토분으로 봉토 주위에는 수십개의 기둥을 세우고 난간을 설치했으며, 중앙에는 안상이 조각된 서역풍의 상석이 놓여 있다. 봉분에서 떨어진 왕릉 입구에은 사자 2쌍, 문무인석 각 1쌍, 석화표 1쌍이 서 있다. 괘릉은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여 신랑왕릉 중에서는 형식적으로 가장 잘 갖추어져 있으며, 십이지상석을 둘레돌에 새겨 넣는 등 신라 특유의 봉분 양식도 잘 반영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원성왕릉 능역>

봉분은 봉분은 밑둘레 70 m, 지름 21.9 m, 높이 7.7 m 규모로 둘레석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바깥쪽에 난간을 세웠다.

OLYMPUS DIGITAL CAMERA<원성왕릉>

봉분 앞에 세워진 상석(床石)은 후대 조선왕릉이나 다른 신라 왕릉과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서구의 신전 등에서 볼 수 있는 제단과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 무인석과 함께 서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앞에 세워진 상석>

OLYMPUS DIGITAL CAMERA<난간석>

봉토 둘레에는 방향에 따라서 이에 해당하는 십이지신상을 새겨놓고 있는데 그 조각수법이 상당히 세밀하고 뛰어나다.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둘레석>

OLYMPUS DIGITAL CAMERA<쥐(子), 0시>

OLYMPUS DIGITAL CAMERA<소(丑), 1시>

OLYMPUS DIGITAL CAMERA<호랑이(寅), 2시>

OLYMPUS DIGITAL CAMERA<토끼(卯), 3시>

OLYMPUS DIGITAL CAMERA<용(辰), 4시>

OLYMPUS DIGITAL CAMERA<뱀(巳), 5시>

OLYMPUS DIGITAL CAMERA<말(午), 6시>

OLYMPUS DIGITAL CAMERA<양(未), 7시>

OLYMPUS DIGITAL CAMERA<원숭이(申), 8시>

OLYMPUS DIGITAL CAMERA<닭(酉), 9시>

OLYMPUS DIGITAL CAMERA<개(戌), 10시>

OLYMPUS DIGITAL CAMERA<돼지(亥), 11시>

울창한 송림으로 둘러싸인 낮은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원성왕릉은 신라 왕릉 중에서 형식적으로 가장 잘 갖추어져 있는 왕릉으로 후대 왕릉 조성의 표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여서 봉분을 조성하고 그 앞에는 문.무인상을 비롯한 석물을 세워놓고 있다. 조선왕릉의 석물이 봉분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는 반면에 원성왕릉은 봉분과 떨어진 왕릉 입구 출입로 양쪽에 세워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왕릉 입구 서쪽편에 세워진 석물들>

상스러운 동물인 사자 2마리, 문인석, 무인석, 화표석이 나란히 서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석물들은 봉분 둘레석의  12지신상과 더불어 신라 왕릉의 독창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쪽편 석물들>

무인석은 ‘처용가’에 등장하는 처용의 얼굴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서역인 얼굴 특징을 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서역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유물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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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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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석>

OLYMPUS DIGITAL CAMERA<사자상>

경주 원성왕릉, 사적
이 능은 신라 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년)을 모신 곳이다. 경주 시내에서 울산 방면으로 약 12 km 떨어진 거리에 있다. 밑둘레 약 69 m, 지름 약 22 m, 높이 약 7.4 m이며, 능의 둘레에 있는 호석石에는 십이지신상이 돋을새김되어 있고 그 주위로 돌난간이 에워싸고 있다. 봉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화표석, 문인석, 무인석과 돌사자를 좌우로 마주보게 세웠으며,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 모습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 능은 신라 능묘 중 가장 완비된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조각 수법도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 되고 있다. 원래 이곳에는 곡사라는 절이 있었으나 현재의 숭복사터로 옮기고 그 자리에 왕릉을 만들었다. 별칭으로 괘릉(掛陵)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덤의 구덩이를 팔 때 물이 괴어 널을 걸어 묻었다는 조선시대의 민간신앙이 결부된 전설에 따른 것이다. 왕은 독서삼품과라는 제도를 두어 인재를 뽑았으며 벽골제를 고치기도 하였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5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삼국사기 권 제10 신라본기 제10,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4. 삼국유사 권 제2 제 2기이,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불국사 석조(보물)

경북 경주시 진현동 불국사 경내에 있는 석조(石槽, 보물)이다. 길이 265 cm, 폭 123 cm, 높이 56 cm로 직사각형을 기본으로 하면서 모서리를 둥글게 곡면처리했다. 다른 석조와는 달리 내.외면에 조각이 새겨져 있고 내부 바닥면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조각수법이나 조형미가 뛰어나며 지금도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돌의 재질도 우수한 것으로 보인다.

석조(石槽)는 물을 담아 두는 그릇으로 큰 돌을 넓게 파고 물을 받아 사용하도록 만든 일종의 돌그릇으로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많이 사용되었다. 카톨릭 성당이나 이슬람 사원을 출입하기 전에 손과 발을 씻는 수조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불교와 함께 사찰을 구성하는 요소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불국사 석조(보물)>

OLYMPUS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앞에서 본 모습>

경주_불국사_석조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는 석조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석조에 물을 담는 모습>

불국사 석조(佛國寺 石槽), 보물,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1
이것은 장방형의 돌출된 물통(長方形石槽)으로 원래 위치가 어느 곳인지 확실하지 않으며 크기는 가로 265 cm, 높이 56 cm이다. 석조의 바깥면은 도드라진 띠와 안상(眼象)으로 장식되어 있고, 입구부분은 네 모서리와 장변(長邊) 중앙에서 안쪽으로 둥글게 다듬어져 있다. 내부바닥 중앙부에 타원형 공간을 마련하고 그 장축 양쪽 둘레에 작은 연꽃을 이중으로 새기고, 양쪽 머리에는 큰 연잎 속에 연꽃을 새긴 독특한 모습이다. 내부 장벽 중앙부에 바닥의 것과 같은 연꽃 무늬를 새기고 그 양 옆으로 다시 다른 연꽃무늬를 새겨 놓았다. 바닥 가운데에 있는 타원형을 연꽃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이다.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경주 불국사,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 불국사,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5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경주 불국사 청운교 및 백운교(국보)

경북 경주시 진현동 불국사 경내에 있는 청운교 및 백운교(국보)이다. 삼층석탑과 다보탑이 있는 불국사 대웅전 영역을 출입하는 계단으로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을 잘 표현하고 있다. 전체 34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에는 16계단의 청운교가 있고 아래에는 18계단의 백운교가 있다. 계단의 경사는 45˚이며 청운교와 백운교 사이에 무지개 모양 아치를 구성하여 그 아래로 도솔천을 상징하는 물이 흐르도록 하고 있다. 통일신라 떄 지어진 건축물로 그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아치형 다리는 성문이 돌다리에서 반원형 아치구조물인 홍예(虹霓)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후대 건축물에 비해서도 건축기법이나 조형미가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불국사 청운교 및 백운교(국보)>

불국사 대웅전 경내로 오르는 계단인 청운교와 백운교는 석굴암과 함께 리나라 불교 사찰을 대표하는 장면으로 손꼽힌다. 33계단으로 구성된 이 계단은 궁궐 정전영역처럼 웅장하면서 위압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불국사와 우리나라 사찰을 대표하는 장면>

OLYMPUS DIGITAL CAMERA<정면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청운교는 17단으로 이루어진 아래쪽 계단을 말하며 높이 3.82 m, 너비 5.14 m이며, 백운교는 16단으로 이루어진 위쪽 계단으로 높이 3.15 m, 너비 3.09 m이다. 이 다리는 계단을 다리의 형식으로 만든 것으로 경사면을 45도로 하고 있으며 축대를 쌓고 계단을 구성하는 자재를 다듬은 수법이 상당히 정교하다. 물이 지나가는 수로를 의미하는 아치형 구조물은 홍예형식으로 만든 다리의 초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청운교>

SANYO DIGITAL CAMERA<홍예로 불리는 아치형 다리>

SANYO DIGITAL CAMERA<위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돌난간>

불국사 청운교 · 백운교 (靑雲橋·白雲橋), 국보,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1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에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속세와 다리 위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두 계단 중 아래의 것은 17단의 청운교로 높이 3.82 m, 너비 5.14 m이며, 위의 것은 16단의 백운교로 높이 3.15 m, 너비 5.09 m이다. 전체 33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33이라는 숫자는 불교에서 아직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서른세 가지의 단계를 의미한다. 청운교는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는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인생을 상징한다. 백운교 다리 아래에 작은 통로가 있고, 그 양쪽에 길게 옆으로 뻗은 청운교와 제작 수법이 비슷한 얇고 넓은 덮개돌이 있다.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하여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만들었으며 다듬은 수법도 정교하다.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10년(750)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신라 시대의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어 매우 귀중하다. 또한 무지개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랫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볼 수 있는 반원아치 모양을 한 횽예교(虹霓橋)의 초기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안내문, 경주 불국사,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 불국사,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5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