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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단속사지 동, 서 삼층석탑(보물)

경남 산청군 단성면 운리 단속사지 절터에 남아 있는 동, 서 삼층석탑(보물)이다. 금당터 앞에 2개의 삼층석탑이 동서로 나란히 세워져 있는 전형적인 통일신라 쌍탑식 가람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기단 이래층은 바닥돌 역할을 겸하고 있으며 그 위에 다시 기단을 올렸다. 몸돌과 지붕돌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을 새긴 것 외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다.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을 받치는 노반과 연꽃모양의 앙화가 남아 있다. 장식이 거의 없으나 각부분의 비례나 조각수법이 우수한 편이다. 통일신라 전성기 삼층석탑의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산청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보물) 01-20220222<산청 단속사지 동, 서 삼층석탑(보물)>

산청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보물) 08-20220222<동탑>

기단부 1층에는 양쪽 모서리와 가운데 2개의 모서리 장식을 새겨 놓고 있으며 2층 기단부에는 모서리와 가운데 1개의 기둥장식을 새겨 놓고 있다.

산청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보물) 02-20220222<동탑 기단부>

탑신 몸돌에는 모서리에 기둥장식을 새겨 놓고 있다. 지붕돌은 각각 5단의 받침을 새겨 놓고 있다.

산청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보물) 03-20220222<동탑 1층 몸돌과 지붕돌>

산청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보물) 05-20220222<동탑 머리장식>

산청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보물) 14-20220222<동탑 정면>

산청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보물) 24-20220222
<동탑 서쪽면>

산청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보물) 25-20220222
<동탑 북쪽면>

산청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보물) 26-20220222
<동탑 동쪽면>

서탑은 동탑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는데 동탑에 비해 많이 훼손되었다.

산청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보물) 07-20220222<서탑>

산청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보물) 11-20220222<서탑 기단부>

산청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보물) 12-20220222<서탑 1층 몸돌>

산청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보물) 13-20220222<서탑 지붕돌>

산청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보물) 06-20220222<서탑 머리장식>

산청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보물) 09-20220222<정면에서 본 모습>

산청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보물) 21-20220222
<서탑 서쪽면>

산청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보물) 22-20220222
<서탑 북쪽면>

산청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보물) 23-20220222
<서탑 동쪽면>

단속사(斷俗寺)신라 35대 경덕왕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단속사는 조선초기 교종에 속한 사찰로 존속했으나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절터에는 동, 서 삼층석탑(보물)이 남아 있으며 건물 기둥을 받쳤던 초석 등이 일부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는 솔거가 그린 그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절터 입구에는 최치원이 쓴 글자를 새긴 돌과 최치원의 독서당이 있었다고 한다.

분황사 관음보살상과 단속사 유마상
또 경주의 분황사 관음보살과 진주의 단속사 유마상(維摩像)도 모두 그의 필적이다. 대대로 신화(神畵)라고 전한다. (삼국사기 권 제 48 열전 제8 솔거,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산청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보물) 10-20220222<단속사지 동, 서 삼층석탑(보물)>

산청 단속사지 동.서 삼층석탑, 보물
불탑은 부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돌이나 나무로 만든 조형물로, 실제 사리가 없더라도 부처를 모신 신성한 대상으로 여겨진다. 산청 단속사지 동삼층석탑과 산청 단속사지 서 삼층석탑은 단속사지의 금당 터 앞에 동서로 세워져 있는 불탑이다. 기단, 몸돌과 지붕돌, 머리장식이 남아 있는데, 기단은 2단이고 몸돌과 지붕돌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머리 장식은 일부만 남아 있다. 기단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아래층 가운데에는 기둥 모양이 2개 있고 위층 가운데에는 1개만 있으며, 각 층 몸돌의 모서리에도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고, 모시리에는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을 받쳐 두는 네모난 장식인 노반과 연꽃 모양의 장식인 앙화가 남아 있다. 장식이 많지 않고 간략하다는 점에서 9세기 통일 신라 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문화재이다. (안내문, 산청군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산청군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5. 삼국사기 권 제 48 열전 제8 솔거,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거제 둔덕기성(사적), 견내량을 지키는 통일신라 산성

경남 거제시 둔덕면에 있는 둔덕기성(屯德岐城, 사적)이다. 거제도 섬의 관문이자 연안 해로의 중요한 거점이 견내량이 내려다 보이는 우봉산(해발 325 m) 정상부를 둘러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으로 7세기 신라 때 처음 쌓았으며 고려 때 보수하여 다시 사용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상사리(裳四里)’라는 글자가 있는 기와를 비롯하여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신라 문무왕 때 설치된 상군(裳郡)과 경덕왕 때 거제군의 치소(治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중기 무신란 때 폐위된 의종이 유배되었던 곳으로 폐왕성(廢王城))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초 고려 왕족들이 유배된 장소로 기록에 남아 있다. 남해안 연안 해로를 통제하기 위해 주요 거점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01-20220221<거제 둔덕기성(사적)>

둔덕기성은 우봉산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약 526 m 정도이다.성벽의 높이는 최고 4.95 m 정도로 중간크기의 납작한 돌을 촘촘히 쌓은 통일신라 산성의 축성방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동, 서, 남문 3곳에 성문을 두고 있는데 서문은 통일신라 산성에서 볼 수 있는 현문식 산성의 특징이 잘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도 보수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문루을 올렸던 초석들이 성문터에 남아 있다.

거제 둔덕기성(사적)<둔덕기성 공간배치>

거제 둔덕기성 (사적) 03-20220221<둔덕기성 내부로 올라가는 탐방로>

거제 둔덕기성 (사적) 04-20220221<복원작업하는 과정에서 만든 내부로 들어가는 통로(성문터는 아님)>

동문과 남문 사이 성벽 일부를 복원했는데 판석 형태의 돌을 촘촘히 쌓아 올린 신라 산성의 축성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벽 위에는 목책을 올려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05-20220221<복원된 성벽(바깥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06-20220221<복원된 동남쪽 성벽(위)>

거제 둔덕기성 (사적) 10-20220221 <복원된 성벽 끝부분>

거제 둔덕기성 (사적) 09-20220221<남문 부근 성벽>

거제 둔덕기성 (사적) 12-20220221<남문 부근>

남문은 동쪽으로 거림리 일대, 서쪽으로는 견내량과 한산대첩이 있었던 통영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남쪽 거림리 일대에서 성안으로 출입하는 성문인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 결과 고려 때 성벽을 보수하면서 성문을 새로 낸 것으로 밝혀졌다. 성문터 내부에는 앞면 1칸, 옆면 1칸 규모의 문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초석이 확인되었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14-20220221<남문터>

거제 둔덕기성 (사적) 15-20220221<남문과 주위 성벽(바깥쪽)>

남문지
둔덕기성의 남문지는 동쪽으로는 거림리 일대, 서쪽으로는 견내량(見乃梁)을 비롯한 통영 일대가 조망되는 곳이다. 발굴조사를 통해 남문지는 고려 제18대 의종(재위 1146~1170)이 무신난으로 폐위된 뒤, 거제도(둔덕기성)에 유배된 시기(1170년)를 전후하여 축조된 것으로 밝혀 졌다. 둔덕기성 남문의 경우, 고려시대에 삼국시대 성벽 바깥쪽으로 성벽 일부를 확장하면서 새로 문을 낸 것으로 밝혀졌다. 문지는 허튼층쌓기하여 삼국시대 문지에 비해 정교함은 떨어 진다. 통로부 내측에 전면 1칸, 측면 1칸의 초석이 남아 있어 작은 문루(門樓)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동문지와 서문지 사이의 간문(間門)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시대 남문지 안쪽에서 확인된 삼국시대 성벽은 바른층쌓기 하였으며, 하부에는 성벽 보강시설인 기단보축이 확인되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거제 둔덕기성 (사적) 16-20220221<남문터 서쪽 성벽(바깥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13-20220221<남문터 서쪽 성벽(안쪽)>

서문은 서쪽 견내량과 통영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둔덕기성이 처음 축조될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고려 때 성을 수리하면서 성문을 크게 하고 문루를 세웠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문터 내부에는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큰 문루가 있었던 초석이 남아 있다. 견내량과 통영 방향에서 성안을 출입할 때 사용된 성문으로 보인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18-20220221<서문 터>

거제 둔덕기성 (사적) 19-20220221<서문과 문루 건물 초석>

거제 둔덕기성 (사적) 17-20220221<서문 남쪽 성벽(안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20-20220221<서문 남쪽 성벽(바깥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21-20220221<서문과 북쪽 성벽(바깥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26-20220221<서문 북쪽 성벽(안쪽)>

서문지(西門址)
둔덕기성 서문지는 서쪽으로 견내량(見乃梁)을 비롯한 통영일대가 한눈에 조망되는 곳이다. 발굴조사 결과, 서문지는 둔덕기성이 처음 축조된 삼국시대부터 있었으며, 고려 제18대 의종(재위 1146~1170)이 무신난으로 폐위된 뒤, 거제도(둔덕기성)에 유배된 시기 (1170년)를 전후하여 동문지 및 남문지와 함께 수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통로부의 고려시대 계단시설 아래에 삼국시대의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서문지도 붕괴된 삼국시대 문지를 고려시대에 수축하여 사용 하였는데, 출입이 용이한 평문식으로 조사되었다. 문지는 비교적 정교함이 떨어지는 허튼층 쌓기 하였으며, 통로부 내측에 전면 3칸, 측면 2칸의 초석이 남아 있어 웅장한 문루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서문 북쪽으로는 주위를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할 수 있는 장대역할을 정상부가 있다. 정상부에는 전투에 사용하기 위해 몽돌을 모아 놓은 석환군과 식량 등을 저장했던 저장고가 있다. 정상부 전망대에 북쪽으로 고성 앞바다와 견내량 해협, 서쪽으로는 통영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임진왜란 때 격전지였던 한산대첩 당시 견내량을 지나는 배의 움직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27-20220221<북쪽 성벽>

거제 둔덕기성 (사적) 25-20220221<정상부 전망대>

거제 둔덕기성 (사적) 28-20220221<북쪽 고성 앞바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29-20220221<견내량과 통영 앞바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24-20220221<석환군>

석환군(石丸群)
석환은 인근 바닷가의 몽돌을 투석용 무기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성내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 대부분 직경 10~20cm 크기의 원형 및 타원형 몽돌로서 성내 곳곳에 산포되어 있다. 특히, 성내 정상부 암반의 남쪽에 연접한 장타원형의 넓은 범위에서 약 2,000여 개 정도로 추산되는 석환군이 조사되었다. 우리나라의 삼국 ~ 조선시대 성곽에서 성내 농성시 방어용 투석자로 사용된 석환이 흔히 발견되는데 이와 같이 대량으로 확인된 경우는 거의 없으며, 남해 임진산성에서 석환군이 확인된 바 있다. 한편, 우리나라 산성 중 성내에 성황당을 짓고 마을을 수호하는 성황신에 제사를 지내거나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으로서의 기능을 겸비하는 사례도 있어 둔덕기성의 제사장으로 이용하였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주변에서 출토된 기와 및 도기편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거제 둔덕기성 (사적) 30-20220221<저장고 터>

저장고
둔덕기성의 성내 최북단에 위치하는 저장고는 성내에서 소요되는 여러 가지 식품류와 경작 등을 위한 씨앗류 등의 지장을 위해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저장고는 먼저 고려시대 북쪽 성벽 하부의 자연암반층 및 기존 대지조성 층을 1~1.7m 깊이까지 방형으로 굴착한 후, 굴착면에 덧대어 방형석축을 조성하였다. 그 후 바닥과 사방에는 0.6~0.7m 두께의 점토를 발라 방온、방습처리를 하였다. 그리고 내부 에는 정방형으로 ‘田’자 형태의 목곽을 설치하고, 내부에 ‘十’ 자상으로 구획된 4개 의 공간에는 평평한 할석을 깔아 바닥면을 조성하였다. 저장고는 크게 1회 이상 수리, 보수한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내부에서 출토된 토기, 철기, 기와류 등으로 보아 삼국 ~ 통일신라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둔덕기성 저장고는 삼국시대에 축성된 인근의 고령 주산성 의 저장고(목곽고)와도 동일한 구조 및 성격을 보이고 있어 삼국시대 산성의 성내 저장고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동문은 조선시대 오양역이 설치되었던 북쪽의 오량성과 남쪽 거림에서 올라오는 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성안으로 들오은 출입문이다. 동문은 사다리 등을 이용하여 출입하는 현문식 성문 구조가 남아 있다. 성문 안쪽에는 고려 때 문루를 설치했던 초석들이 남아 있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31-20220221<동문과 남쪽 성벽>

거제 둔덕기성 (사적) 36-20220221<동문터>

거제 둔덕기성 (사적) 41-20220221<현문식 성문>

거제 둔덕기성 (사적) 35-20220221<동문 북쪽 성벽(안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37-20220221<동문 북쪽 성벽(바깥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02-20220221<동문 남쪽 성벽(바깥쪽)>

동문지
둔덕기성 동문지는 북쪽의 오량리와 남동쪽의 거림리에서 이어지는 두 갈래 길이 만나는 종착지로서, 삼국 ~ 고려시대의 거제 치소지가 위치하는 거림리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주요 통로로 추정된다. 발굴조사 결과,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 되었 으며, 고려 제18대 의종(재위 1146~1170)이 무신난으로 폐위된 뒤, , 거제도 (둔덕기성)에 유배된 시기(1170년)를 전후하여 서문지 및 남문지와 함께 수축된 것으로 밝혀졌다. 고려시대 문지 아래에서 확인된 삼국시대의 동문지는 사다리 등을 통해 성내로 진입할 수 있는 현문(懸門, 일명 다락문) 구조이다. 통로부 너비는 약 8.8m에 이르며, 문지의 성벽 두께도 7~9m로 주변 성벽보다 훨씬 두껍게 축조하였다. 외벽은 바른층쌓기로 정연하게 축조 하였으며, 기저부에는 성벽이 무너지지 않게 기단보축시설로 보강하였다. 고려시대의 동문지는 붕괴된 삼국시대 문지를 수축하여 현문식으로 사용하였다. 문지 성벽은 비교적 정교함이 떨어지는 허튼층쌓기 하였으며, 통로부 내측에 전면 3칸, 측면 2칸의 초석이 남아 있어 상당히 웅장한 문루였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둔덕기성은 통일신라때 거제군의 치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내부에는 통일신라와 고려 때 치소역할을 했던 건물터가 있으며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 물을 모아 두었던 연못 형태의 집수조가 남아 있다.

거제 둔덕기성 (사적) 11-20220221<둔덕기성 내부>

거제 둔덕기성 (사적) 32-20220221<건물터>

거제 둔덕기성 (사적) 33-20220221<건물터>

거제 둔덕기성 (사적) 39-20220221<복원된 집수조>

성내 건물지
성내 건물지는 둔덕기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시설로서 둔덕기성 운용 당시의 정치, 행정, 생활, 제의 등과 관련된 시설로 구분된다. 특히, 성내 중심 지역에 위치한 이곳은 기성의 핵심시설이 위치할 것으로 추정되어 2016년 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삼국 ~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건물지의 기단석열, 초석 및 적심, 수혈 등의 유구가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거제 둔덕기성 (사적) 40-20220221<둔덕기성 남쪽>

거제 둔덕기성, 사적
거제 둔덕기성(屯德崎城)은 7세기 신라 시대 축조 수법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현문식(懸門式) 구조인 동문지와 삼국시대에 처음 쌓고 고려 시대에 보수된 성벽 등은 축성법의 변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학술적 자료이다. 이 유적에서 인화문 토기, ‘상사리’라는 글자가 새겨진 명문기와, 청자 접시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이 성은 신라 문무왕대 설치된 상군(裳郡) 및 경덕왕대 거제군의 치소성(治所城)으로 추정된다. 또한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 따르면, 고려 의종이 3년간 거제도에 유배됐고 조선 초 고려 왕족들이 유배된 장소로도 기록되어 있는 등 역사성을 지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등면과 둔덕면의 경계가 되는 우봉산 자락에 위치하는데, 성벽의 둘레는 약 526 m이고 최고 높이가 4.85 m이다. 성 안에는 여러 곳에 건물터와 연못 터가 남아 있고, 북쪽에는 기우제와 산신제를 지냈던 제단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의종이 배를 타고 건넜던 수로 변에는 아직도 ‘전하도목(殿下渡目)’이라 불리는 지명이 있으며 ‘고려골’이라 부는는 곳에는 고려인들의 무덤이 남아 있다. 왕을 받들어 왔던 반씨 성을 가진 장군의 후손들이 지금도 둔덕면에 살고 있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경주 성덕왕릉 귀부(거북받침돌)

경북 경주시 조양동에 있는 거북받침돌이다. 성덕왕릉에 100 m 떨어진 곳에 있는 성덕왕비(聖德王碑) 거북받침돌이다. 글자를 새긴 비몸과 머릿들은 남아 있지 않다. 성덕왕의 아들인 형인 효성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경덕왕 때(745년) 세워졌다. 경덕왕은 아버지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성덕대왕 신종(국보)을 주조하기도 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성덕왕릉 귀부(거북받침돌)>

거북받침돌은 목이 부려져 남아 있지 않다. 발은 앞으로 나아갈려는 모습을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등에는 육각형 무늬가 새져져 있으며 비몬을 올려놓았던 홈이 파여 있다. 당나라 능묘제도가 받아들여지면서 왕릉 앞에 세워졌던 비(碑)의 양식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불국사가 세워졌던 8세기에 만들어졌던 것으로 조각수법이나 조형미가 뛰어나다.

OLYMPUS DIGITAL CAMERA<정면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뒷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앞발>

OLYMPUS DIGITAL CAMERA<뒷발>

OLYMPUS DIGITAL CAMERA<등에 새겨진 육각형 무늬>

OLYMPUS DIGITAL CAMERA<비몸을 올려 놓았던 자리>

OLYMPUS DIGITAL CAMERA<성덕왕릉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신라 33대 성덕왕릉>

성덕왕릉 귀부, 경북 경주시 조양동 666
이 귀부는 신라 성덕왕(聖德王)의 능비에 세웠던 받침돌이다. 거북머리는 깨어져 없지만, 발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형상이다. 등에는 육각 귀갑(龜甲)무늬가 새겨졌고, 가운데에 비몸[碑身)을 꽂았던 네모난 홈이 파여 있다. 여기에 새겨진 거북 등무늬나 당초문은 8세기의 신라 왕릉에 건립된 귀부의 제작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비신과 머릿돌은 없어졌지만 경덕왕(景德王)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귀부는 6세기 이후부터 8세기 사이의 귀부 양식을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성덕왕릉, 신라 33대 성덕왕

경북 경주시 조양동에 있는 신라 33대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년)의 능이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 형인 효소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36년 동안 통일신라 전성기를 이끌었다. 당나라와 외교문서를 전담하는 통문박사를 설치하고, 당나라에 약43회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당나라왕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유교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당나라에서 가져온 공자와 중국 선현들의 초상화를 태학에 두었다. 당의 균전제를 본떠 자영농에서 정전을 지븍하여 재정적인 기반을 튼튼히 하였다. 당에 사신을 보내 발해를 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가 중단하기도했으며. 대동강 이남을 통일신라의 영토로 확정된 시기이기도 하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성덕왕릉(사적)>

성덕왕이 왕위에 오르다 ( 702년 07월(음) )
성덕왕(聖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흥광(興光)이다. 본래 이름은 융기(隆基)였는데, 현종(玄宗)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에 선천(先天) 연간(712~713)에 고쳤다 『당서(唐書)』에는 김지성(金志誠)이라고 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의 둘째 아들로서 효소왕(孝昭王)의 친동생[同母弟]이다. 효소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효소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위하여 애도하고 이틀간 조회(朝會)를 열지 않았다. 사신을 보내 조문·위로하고 왕을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아울러 형의 장군(將軍)·도독(都督) 칭호를 잇게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8 신라본기 제8,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성덕왕이 죽다 ( 737년 (음) )
왕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8 신라본기 제8,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왕릉은 밑둘레가 46 m, 높이 5 m로 조선 왕릉 봉분규모와 비슷한데 이는 신라가 당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정형화되어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봉분 둘레에는 둘레석을 세우고 바깥쪽에는 삼각형의 돌로 세워 받치고 있다. 둘레석 받침돌 사이에는 화강석을 입체적으로 조각해서 만든 십이지신상이 세워져 있다.  봉분 바깥쪽에는 난간을 둘러세웠다. 무덤 주위에는 사자상과 문인석을 배치하였으며 약간 떨어진 곳에 비석을 세웠던 거북받침돌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둘레석과 삼각형 받침대>

둘레석이 돋을새김으로 한 다른 왕릉의 십이지산상과는 달리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후대에 추가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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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받침돌 사이에 세워진 십이지산상1>

OLYMPUS DIGITAL CAMERA<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돌난간>

정면에는 상석을 설치하였는데 규모가 큰 편이며 서구의 신전 등에서 볼 수 있는 제단과 비슷한 형태이다. 신라 왕릉의 완성된 형식을 보여주는 38대 원성왕릉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성덕왕릉부터 정형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앞에 있는 상석>

성덕왕릉에는 무인석 1쌍이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하나만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고, 하나는 일부만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무인석1>

OLYMPUS DIGITAL CAMERA<일부만 남은 무인석>

왕릉의 네모서리에는 4기의 사자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3기가 남아 있다. 성덕왕릉은 사자상, 문인상 등 석물을 배치한 전형적인 왕릉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자상 1>

OLYMPUS DIGITAL CAMERA<사자상 2>

OLYMPUS DIGITAL CAMERA<사자상 3>

성덕왕릉비는 경덕왕 때(754년)에 세워졌다. 현재는 비석을 받치는 거북받침돌만 남아 있는데 이를 기준은 성덕왕릉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성덕왕비를 세우다 ( 754년 05월(음) )
5월에 성덕왕비(聖德王碑)를 세웠다. (삼국사기 권 제9 신라본기 제9,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OLYMPUS DIGITAL CAMERA<비를 세웠던 거북받침돌>

신라 성덕왕릉(新羅 聖德王陵), 사적, 경북 경주시 조양동 산 8
이 능은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 김흥광)을 모신 곳이다. 토함산(吐含山)의 서쪽에 있는 형제봉(兄弟峰)의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 말단부에 위치 하고 있다. 성덕왕은 신문왕(神文王)의 둘째 아들로 형인 효소왕 (孝昭王)의 뒤를 이어 36년 동안 통치하면서, 안으로는 정치를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당(唐)과 외교를 활발히 하였으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워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무덤은 밑둘레가 46 m, 지름이 14.5 m, 높이가 5 m이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고정시켰으며, 그 바깥쪽에 삼각형의 돌을 세워 받치고 있다.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입체 (立體)로 배치되어 있는데, 네모난 돌 위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인데,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능 주위에는 돌사자(石獅子)와 문인석(文人石)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비석을 세웠던 돌거북이 파손된 채 남아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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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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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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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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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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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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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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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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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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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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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산상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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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12>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원성왕릉(사적), 신라 38대 원성왕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년)의 능이다 원성왕은 상대등 김양상 (선덕왕)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평정한 후 그 공을 인정받아 선덕왕 즉위 후 상대등이 되었고 선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원성왕으로 즉위하였다. 당나라와 통교하였으며 유교정치를 지향하여 독서삼품과를 두어 인재를 등용하였다. 김제 벽골제를 증축 농사를 장려하였다. 선덕왕과 원성왕 집권기는 귀족들이 요직을 장악하고 그들 사이의 권력투쟁을 통해서 왕위를 계승하는 통일신라 후대의 정치 혼란상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원성왕릉(사적)>

원성왕이 즉위하다 ( 785년 01월(음) )
원성왕(元聖王)이 즉위하였다. 왕의 이름은 경신(敬信)으로 나물왕(奈勿王)의 12세손이다. 어머니는 박씨(朴氏) 계오부인(繼烏夫人)이고 왕비는 김씨로 신술(神述)5 각간(角干)의 딸이다. 일찍이 혜공왕(惠恭王) 말년에 반신(叛臣)이 발호(跋扈)하였는데, 선덕왕(宣德王)이 당시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앞장서서 임금의 곁에 있는 나쁜 무리를 제거할 것을 주장하였다. 경신이 그에 동조하여 난을 평정하는데 공이 있었기에, 선덕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왕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자, 여러 신하들이 회의를 한 후에 왕의 집안 조카인 주원(周元)을 옹립하고자 하였다. 주원의 집은 서울에서 〔왕궁으로부터〕 북쪽으로 20리(里) 떨어진 곳에 위치였는데, 마침 큰비가 와서 알천(閼川)의 물이 넘쳐 주원이 알천을 건너 〔왕궁으로〕 오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왕[人君]은 큰 자리라 진실로 사람이 도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갑자기 비가 쏟아진 것은 하늘이 혹시 주원을 왕으로 세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 상대등 경신은 전왕의 동생으로 평소 덕망이 높고 왕의 자질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들의 뜻이 모아져 경신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그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만세를 외쳤다. (삼국사기 권 제10 신라본기 제10,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원성왕이 죽다 ( 798년 12월29일(음) )
〔14년(798)〕 겨울 12월 29일에 왕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원성(元聖)이라 하고, 유명(遺命)에 따라 관[柩]을 옮겨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0 신라본기 제10,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원성왕릉은 괘릉(掛陵)으로도 불리는데, 무덤을 조성할 떄 물이 괘어 널을 걸어 묻었다는 조선시대 민간신앙과 결부된 전설에 따른 것이다. <삼국유사>에 ‘원성왕릉이 토함산 동곡사에 있는데, 동곡사는 당시 숭복사로 최치원이 비문을 쓴 비석이 있다’는 기록과 괘릉 근처에 숭복사터가 있어 원성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원성왕릉 입구>

OLYMPUS DIGITAL CAMERA<입구에서 보이는 능역>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앞에서 보이는 능역 입구>

왕의 능은 토함산(吐含山) 서동(西洞) 곡사(鵠寺)에 있는데,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가 있다. 또한 보은사(報恩寺)와 망덕루(望德樓)를 창건했으며, 할아버지인 훈입 잡간(訓入 匝干)을 추봉하여 흥평대왕(興平大王)이라 하고, 증조 의관 잡간(義官 匝干)을 신영대왕(神英大王)으로 삼았으며, 고조 법선 대아간(法宣 大阿干)을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삼았다. 현성대왕의 아버지가 바로 마질차 잡간(摩叱次 匝干)이다. (삼국유사 권 제2 제 2기이,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원성왕릉은 12지신상으로 둘레돌을 돌린 원형봉토분으로 봉토 주위에는 수십개의 기둥을 세우고 난간을 설치했으며, 중앙에는 안상이 조각된 서역풍의 상석이 놓여 있다. 봉분에서 떨어진 왕릉 입구에은 사자 2쌍, 문무인석 각 1쌍, 석화표 1쌍이 서 있다. 괘릉은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여 신랑왕릉 중에서는 형식적으로 가장 잘 갖추어져 있으며, 십이지상석을 둘레돌에 새겨 넣는 등 신라 특유의 봉분 양식도 잘 반영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원성왕릉 능역>

봉분은 봉분은 밑둘레 70 m, 지름 21.9 m, 높이 7.7 m 규모로 둘레석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바깥쪽에 난간을 세웠다.

OLYMPUS DIGITAL CAMERA<원성왕릉>

봉분 앞에 세워진 상석(床石)은 후대 조선왕릉이나 다른 신라 왕릉과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서구의 신전 등에서 볼 수 있는 제단과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 무인석과 함께 서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앞에 세워진 상석>

OLYMPUS DIGITAL CAMERA<난간석>

봉토 둘레에는 방향에 따라서 이에 해당하는 십이지신상을 새겨놓고 있는데 그 조각수법이 상당히 세밀하고 뛰어나다.

OLYMPUS DIGITAL CAMERA<봉분 둘레석>

OLYMPUS DIGITAL CAMERA<쥐(子), 0시>

OLYMPUS DIGITAL CAMERA<소(丑), 1시>

OLYMPUS DIGITAL CAMERA<호랑이(寅), 2시>

OLYMPUS DIGITAL CAMERA<토끼(卯), 3시>

OLYMPUS DIGITAL CAMERA<용(辰), 4시>

OLYMPUS DIGITAL CAMERA<뱀(巳), 5시>

OLYMPUS DIGITAL CAMERA<말(午), 6시>

OLYMPUS DIGITAL CAMERA<양(未), 7시>

OLYMPUS DIGITAL CAMERA<원숭이(申), 8시>

OLYMPUS DIGITAL CAMERA<닭(酉), 9시>

OLYMPUS DIGITAL CAMERA<개(戌), 10시>

OLYMPUS DIGITAL CAMERA<돼지(亥), 11시>

울창한 송림으로 둘러싸인 낮은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원성왕릉은 신라 왕릉 중에서 형식적으로 가장 잘 갖추어져 있는 왕릉으로 후대 왕릉 조성의 표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여서 봉분을 조성하고 그 앞에는 문.무인상을 비롯한 석물을 세워놓고 있다. 조선왕릉의 석물이 봉분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는 반면에 원성왕릉은 봉분과 떨어진 왕릉 입구 출입로 양쪽에 세워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왕릉 입구 서쪽편에 세워진 석물들>

상스러운 동물인 사자 2마리, 문인석, 무인석, 화표석이 나란히 서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석물들은 봉분 둘레석의  12지신상과 더불어 신라 왕릉의 독창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쪽편 석물들>

무인석은 ‘처용가’에 등장하는 처용의 얼굴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서역인 얼굴 특징을 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서역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유물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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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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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석>

OLYMPUS DIGITAL CAMERA<사자상>

경주 원성왕릉, 사적
이 능은 신라 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년)을 모신 곳이다. 경주 시내에서 울산 방면으로 약 12 km 떨어진 거리에 있다. 밑둘레 약 69 m, 지름 약 22 m, 높이 약 7.4 m이며, 능의 둘레에 있는 호석石에는 십이지신상이 돋을새김되어 있고 그 주위로 돌난간이 에워싸고 있다. 봉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화표석, 문인석, 무인석과 돌사자를 좌우로 마주보게 세웠으며,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 모습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 능은 신라 능묘 중 가장 완비된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조각 수법도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 되고 있다. 원래 이곳에는 곡사라는 절이 있었으나 현재의 숭복사터로 옮기고 그 자리에 왕릉을 만들었다. 별칭으로 괘릉(掛陵)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덤의 구덩이를 팔 때 물이 괴어 널을 걸어 묻었다는 조선시대의 민간신앙이 결부된 전설에 따른 것이다. 왕은 독서삼품과라는 제도를 두어 인재를 뽑았으며 벽골제를 고치기도 하였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5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삼국사기 권 제10 신라본기 제10,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4. 삼국유사 권 제2 제 2기이,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