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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금당실마을 반송재 고택

경북 예천군 용문면 삼금곡리 금당실마을에 있는 반송재(伴松齋) 고택이다. 조선 숙종 때 문신 김빈이 낙향하여 살기 위해 지은 집이다. 이후 구한말 때 원래 살던집이 팔리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건물은 앞쪽에 ‘-’자형 사랑채가, 뒷편에 ‘ㄷ’자형 안채가 있는 튼 ‘ㅁ’자형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영남 북부지역 고위직을 지낸 상류층의 살았던 저택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집주인이 살고 있지 않고 비어 있어 금당실마을을 찾은 탐방객이 마을 고택의 모습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10<예천 반송재 고택>

대문채는 초가지붕을 하고 있는 크지 않은 건물이다. 대문 양쪽에는 작은 온돌방을 두고 있다.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13<대문채>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11<안쪽에서 본 모습>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12<사랑채 앞 마당>

사랑채는 ‘-’자형 건물로 앞면 5칸반 규모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마루이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있다. 대청마루 앞에는 문짝을 달아 마루방을 만들어 놓고 있으며, 왼쪽 온돌방 앞에 작은 마루를 두고 있다.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01<사랑채>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02<왼쪽 온돌방>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08<뒷편에서 본 사랑채>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03<안채를 출입하는 중문>

안채는 앞면 5칸, 옆면 3칸 규모로 양쪽에 날개채를 달아내어 ‘ㄷ’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04<안채>

안채는 가운데 2칸은 대청마루로, 양쪽은 온돌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오른쪽 날개채는 온돌방을, 왼쪽 날개채는 온돌방과 부엌으로 되어 있다.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05<안채와 안마당>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07<대청마루>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06<부엌이 있는 날개채>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09<중문 안쪽에 있는 곳간채>

반송재 고택
반송재(伴松齋) 고택은 조선시대 문신 갈천 김빈(1621~1694)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조선 숙종 6년(1680) 경에 처음 세웠다. 210여년 뒤 구한말의 대신 이유인이 99칸 대저택을 지으려고 2,000여 평의 부지를 매입할 때 그 땅에 있던 갈천 고택도 함께 사들였다. 갈천 고택은 고종 36년(1899)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고, 이유인의 동생인 이유직이 살았다. 그 후 1940년 김빈의 아우인 반송헌 김정의 10대 주손 김환명이 이를 되찾아 반송헌의 종가로 삼으면서 ‘반송재’라 이름 붙였다. 고택의 전체적인 구조는 튼 ‘ㅁ’자형으로, ‘ㄷ’자형의 안채와 ‘-’자형 사랑채를 남쪽으로 두고 곳간채는 동쪽으로 두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고, 사랑채는 정면 5칸반,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사랑채 가운데 있는 2칸의 대청은 앞에 장지문 네짝을 달아 마루방으로 꾸몄다. 각 방의 여러 종류의 창호 형식, 창문틀의 구조 수법 등이 섬세하고 우아하다. 반송재 고택은 영남 북부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 배치와 평면 구성법을 지니고 있어 조선후기의 건축 양식이 돋보인다. (안내문, 예천군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예천군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예천 춘우재 고택

경북 예천군 용문면 제곡리에 있는 춘우재(春雨齋) 고택이다. 이집은 야옹 권의의 손자인 권진이 17세기초에 세운 고택이 19세기에 화재로 소실되면서 다시 지은 것이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7칸 규모로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건물 앞면에 사랑채와 중문채가 있으며 안채는 ‘ㄷ’자형을 이루고 있다.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며 건물구성이나 배치가 19세기 상류층이 살았던 저택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예천 춘우재고택 20221130_01<예천 춘우재 고택>

안채_정면<안채>

춘우재 고택
춘우재(春雨齋) 고택은 안동 권씨 제곡리 입향조인 야옹 권의의 손자인 춘우재 권진(1566 ~ 1620년)이 세운 가옥이다. 1600년대 초에 처음 세웠다가 불터 무너진 것을 1800년대에 다시 세웠다. 고택의 이름인 춘우재는 권진의 호에서 따 온 것으로, ‘봄비가 내린다’는 뜻이다. 고택은 작약산 기슭 평탄한 곳에 터를 잡고 있으며, 내성천 건너 학가산 아래 문전의 들판을 내려다보는 동남향 건물이다. 건물 구조는 ‘ㅁ’자형으로 전면에 ‘-’자형의 중문간채를 두고, 안쪽으로 ‘ㄷ’자형 안채를 배치하여 정면 5칸, 측면 7칸을 이루고 있다. 본채의 왼쪽 뒤편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사당이 있다. 이는 조선시대 이 지역 중상류층의 전형적인 민가 유형이다. 중문간채 좌우의 마루방.사랑방.안방 등의 평면 구성과 특히 기둥을 다루는 고급 기법이 19세기까지 전승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안내문, 예천군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예천군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예천 야옹정(보물)

경북 예천군 용문면 제곡리에 있는 야옹정(野翁亭, 보물)이다. 조선중기 명종 때(1566년) 때 권심언이 아버지 야용 권의(1475~1558년)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정자 건물이다.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3칸의 건물로 오른쪽 1칸을 돌출시켰다. 대청 앞에는 비교적 넓은 툇마루를 달아내고 큰 기둥으로 받쳐 전체적으로 누마루를 구성하고 있다. 건물 왼쪽에는 약간의 퇴간을 두고 있으며 지붕을 큰 기둥으로 받치고 있다. 세부적인 건축수법에서 조선전기 건축양식이 많이 남아 있으며 단청을 했던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예천 야옹정(보물) 20221130_01<예천 야옹정(보물)>

건물 앞쪽에는 반칸 정도의 툇마루를 두고 있는데 6개의 목재기둥으로 받치고 있어 난간을 둘러 건물 전체가 누마루를 두고 있는 모습이다.

예천 야옹정(보물) 20221130_07<건물 앞면 툇간>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3포 초익공을 사용하고 있는데 조선전기 이전에 많이 사용되었던 주심포 양식과 비슷하다. 막새기와를 사용하고 있으며 단청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예천 야옹정(보물) 20221130_04<지붕을 받치는 공포와 기와>

예천 야옹정(보물) 20221130_08<지붕을 받치는 기둥과 서까래>

창호는 가운데 작은 기둥인 설주가 세워진 형태로 조선전기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예천 야옹정(보물) 20221130_03<오른쪽 옆면>

예천_야옹정 (2)
<창호>

예천 야옹정(보물) 20221130_06<왼쪽 옆면>

예천_야옹정<대청마루 내부>

예천_야옹정 (1)<천장>

건물 주위에 담장을 둘렀으며 오른쪽에 출입문을 두었다.

예천 야옹정(보물) 20221130_10<예천 야옹정>

예천 야옹정(보물) 20221130_02<예천 야옹정>

예천 야옹정(보물) 20221130_05<예천 야옹정>

예천 야옹정, 보물
이 건물은 조선 중종 때 학자로 의흥현감을 역임한 야용 권의(1475~1558년)의 학덕을 받들기 위해 그의 아들 권심언이 명종 21년(1566)에 세운 정자이다. 정면 4칸, 옆면 3칸의 건물로 왼쪽에 6칸 대청 마루가 있고, 오른쪽에는 온돌방이 놓였으며, 오른쪽 앞면 1칸에 돌출한 마루가 마련되어 있다. 대청 앞면으로 폭이 넓은 툇마루를 설치하고 난간을 돌려 건물 전면을 누각식으로 꾸몄다. 대청 앞 기둥 위 공포의 장식 수법은 조선초기에 볼 수 있는 것이고, 대들보 위의 주조재인 화반이나 대공도 고식으로 꾸며져 있다. 건물 뒷면은 일부 개조되었으나 조선 중기 이전 건축양식의 세부를 간직한 점에서 중요시되는 건물이다. (안내문, 예천군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예천군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예천 예천권씨 초간공파 종택과 별당(보물)

경북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에 있는 초간공파 종택과 별당(보물)이다. 초간 권문해의 할아버지 권오상이 1589년에 처음 지었다고 전해지는 고택이다. 조선중기에 지어진 집으로 현존하는 고택 중 건립연대가 상당히 빠른 편이다. 경사진 지형에 축대를 쌓아 대지를 조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려 웅장한 느낌을 주고 있다. 사랑채 대청마루에 올라서면 넓은 들판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누각처럼 지은 사랑채가 앞쪽으로 돌출해 있으며 뒷편에 ‘ㅁ’자형 안채가 있다. 안채 앞에는 예천권씨 집안에서 전해내려오는 <권문해 초간일기>(보물), <대동운부군옥목판 및 고본>(보물) 등을 보관하는 서고인 백승각(百乘閣)이 있으며 뒷편에 불천위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 별당 앞에는 행랑채 겸 대문채가 있었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조선중기 이전 고위직을 지낸 양반가 고택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예천 예천권씨 초간공파 종택과 별당(보물) 20221130_22<예천 예천권씨 초간공파 종택>

초간종택 별당(보물)은 앞면 4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큰 건물이다. 앞면 오른쪽 3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청마루 앞면에는 문짝이 없이 개방되어 있으며 옆면과 뒷편에는 판문을 달았으며 집주위에 난간을 둘렀다. 이는 일반적인 고택 사랑채와는 달리 서원 강당 등에서 볼 수 있는 구조이다.

예천 예천권씨 초간공파 종택과 별당(보물) 20221130_01<초간종택 별당(보물)>

예천 예천권씨 초간공파 종택과 별당(보물) 20221130_16<넓은 대청마루>

예천 예천권씨 초간공파 종택과 별당(보물) 20221130_06<온돌방>

예천 예천권씨 초간공파 종택과 별당(보물) 20221130_17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난간>

예천 예천권씨 초간공파 종택과 별당(보물) 20221130_13<지붕을 받치는 공포와 서까래>

예천 예천권씨 초간공파 종택과 별당(보물) 20221130_10<뒷편>

예천 예천권씨 초간공파 종택과 별당(보물) 20221130_02<정면에서 본 모습>

예천 예천권씨 초간공파 종택과 별당(보물) 20221130_15<사랑채 대청마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사랑채는 독립된 건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왼쪽에 날개채가 있어 안채와 연결되어 있다. 안채에서 손님을 접대하기 편하도록 동선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예천 예천권씨 초간공파 종택과 별당(보물) 20221130_04<온돌방과 안채와 연결된 날개채>

예천권씨 초간종택 별당, 보물
예천권씨 초간종택 별당은 풍수지리상 명당 자리로 유명한 죽림지 대수마을에 있다. 조선 중기 문인 초간 권문해(1534~1591년)의 할아버지 권오상이 지었다고 전하며, 예천권씨 초간공파 종택 안채의 오른쪽 앞에 있는 별당 형식의 사랑채이다. 평지 위에 막돌로 높게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집을 세우고 난간을 돌린 다락집 모양이다. 실제로는 안채와 연결되어 있으나 지붕이 팔작지붕이기 때문에 정면에서 보면 독립된 건물처럼 보인다.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오른쪽 3칸은 대청이고, 왼쪽 1칸은 온돌방이다. 대청 앞면은 문짝 없이 개방하고 옆면과 뒷면은 판벽을 쳤다. 외관은 네모 기둥에 주두만을 얹어 대들보를 받친 간소하고 소박한 모습이나 별당 내부 천장은 상당히 공을 들여 정교하게 꾸몄다. 일반 주택 건축으로는 보기 드물게 뛰어난 기법으로 건물 안쪽을 장식하여 꾸민 조선시대 별당 건축물이다. (안내문, 예천군청, 2022년)

안채는 ‘ㅁ’자형 구조를 하고 있는데 앞면 5칸, 옆면 5칸 규모이다. 축대를 2층으로 쌓아 상당히 웅장해 보인다. 안채에서 문을 열면 사랑채처럼 넓은 들판이 내려다 보인다.

예천 예천권씨 초간공파 종택과 별당(보물) 20221130_05<안채>

안채_전경
<안채 전경>

사랑채 뒷편에는 불천위 조상을 모시는 집안 사당이다.

예천 예천권씨 초간공파 종택과 별당(보물) 20221130_09<사당 출입문>

예천 예천권씨 초간공파 종택과 별당(보물) 20221130_11<사당>

안채 앞마당에는 예천권씨 초간공파 집안에서 내려오는 문적들을 보관하는 건물인 백승각(百乘閣)이 있다. <권문해 초간일기>(보물), <대동운부군옥목판 및 고본>(보물), <해동잡록> 등 주요 문화재로 지정된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예천 예천권씨 초간공파 종택과 별당(보물) 20221130_03<백승각>

예천권씨 종가문적
예천권씨 종가문적은 조선 인조 때의 학자 죽소 권별(1589~1671)이 쓴 <죽소부군일기> 1책과 인물사전식 설화집 <해동잡록> 14책으로 이루어진 총 2종 15책의 문적이다. <죽소부군일기>는 조선 인조 3년(1625) 정월부터 인조 4년(1626) 12월까지 2년 동안 726일의 일상사를 기록한 친필 일기이다. 이 일기를 쓴 권별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을 지은 초간 권문해의 아들이다. <해동잡록>은 벼슬을 한 인물을 왕조별.성씨별로 분류하고, 그들의 학문과 일화를 기록한 문헌설화집으로, <대동운부군옥>에 기록된 인물사를 보완.정리하여 총 14권 14책으로 엮은 것이다. 조선 현종 11년(1670)에 완성된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인물사전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현재 예천권씨 종가문적은 예천권씨 초간공파 종택에 있는 백승각에 <대동운부군옥 목판 밒 고본>(보물), <권문해 초간일기>(보물) 등을 비롯한 여러 문적과 함께 보관되어 있다. (안내문, 예천군청, 2022년)

예천 예천권씨 초간공파 종택과 별당(보물) 20221130_08<최근에 새로 지은 건물>

초간일기<권문해 초간일기(보물)>

권문해 초간일기, 보물
<권문해 초간일기>는 초간 권문해가 쓴 친필 일기이다. 총 3책으로 조선 선조 13년(1560)부터 24년(1591)까지 일상생활과 국가 중대사 등 저자가 겪은 다양한 일을 <선조일록>, <초간일기>, <신묘일기> 순으로 기록하였다. <선조일록>은 저자가 공주 목사와 삼사의 관직에 있을 때인 조선 선조 13년(1560)부터 17년(1584)까지의 일기로 관직에서 겪은 일을 117장에 상세히 기록하였고, <초간일기>는 선조 13년부터 23년(1590)까지 일들을 90장에 기록하였다. <신묘일기>는 승지로 있을 때인 선조 24년(1591) 7월부터 10월까지 국정에 관한 일을 34장 1책에 기록하였다. <권문해 초간일기>는 저자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비교적 상세히 담고 있어 당시 사대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관직 생활을 하면서 겪은 여러 가지 사항도 기록되어 있어, 당시 관청의 기능과 관리들의 생활 및 정치.국방.사회.교육.문화.지리 등 전반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임진왜란 전에 쓰인 관료의 자필 일기로, 사라진 임진왜란 이전의 부족한 사료를 보완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안내문, 예천군청, 2022년)

대동운부군옥초고본<대동운부군옥 초고본(보물)>

대동운부군옥책판
<대동운부군옥목판(보물)>

대동운부군옥목판 및 고본, 보물
<대동운부군옥>은 조선 선조 22년(1589)에 초간 권문해가 편찬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중국 송나라 음시부(陰詩夫)가 편찬한 <운부군옥>의 체제를 본떠 단분부터 조선 선조까지 역사.지리.문학.철학.예술.풍속.인물 등에 대한 내용이 20권 20책으로 정리되어 있다. 목판은 양면이며 667판으로 된 초판본이고 고본은 3종 27책이다. 순조 21년(1812)부터 만들기 시작하여 헌종 2년(1836)에 완성하였으며, 목판의 크기는 가로 57.4cm, 세로 24cm, 두께 2cm이다. 고본은 체재와 형식 등이 다소 다른 미완의 책으로, 비록 빠진 부분이 있지만 <대동운부군옥>을 편찬하는데 바탕이 되는 자료인 점과 4백여 년간 전해진 고본이라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임진왜란 이전 개인이 엮은 저서로서는 양적.질적으로 매우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또한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임진왜란 이전 사회의 여러 분야를 이해하는 데 참고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안내문, 예천군청, 2022년)

고택은 낮은 뒷동산을 배경으로 약간 경사진 대지 위에 자리잡고 있다. 앞으로는 비교적 넓은 농토들이 펼쳐져 있고 멀리 용문면 소재지이자 양반들이 모여 살았던 큰 마을인 금당실마을이 보인다. 멀지 않은 곳에 초간 권문해가 낙향하여 정자인 초간정(명승)이 있다. 고택 입구에는 입향조인 권오상이 가져와 심었다고 전해지는 울릉도 향나무를 볼 수 있다.

예천 예천권씨 초간공파 종택과 별당(보물) 20221130_20<예천권씨 초간공파 종택>

예천 예천권씨 초간공파 종택과 별당(보물) 20221130_21<종택 앞 향나무>

예천 죽림리 향나무
죽림라 향나무는 예천 권씨 초간공파 종택 및 예천 권씨 초간종택 별당(보물) 입구 앞쪽 연못가에 있는 노거수(老巨樹)로, 일명 울향(鬱香)나무라고 불린다.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6m, 줄기 둘레가 2.5m 정도이고, 수령은 300여 년으로 추정한다. 전설에 따르면 죽림리 대수마을의 예천권씨 입향조인 권오상이 무오사화 때 전라남도 해남으로 귀향을 갔다가 돌아오면서 울릉도 향나무를 가져다 심었다고 한다. 지금의 죽림리 향나무는 권오상이 처음에 심었던 울릉도 향나무의 후손으로 보인다. 오랜 세월 대수마을의 역사와 함께 한 이 나무는 오늘날까지 예천 권씨 후손들과 마을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안내문, 예천군청, 2022년)

예천 예천권씨 초간공파 종택과 별당(보물) 20221130_19<작은 연못>

초간정 원림(草澗亭 園林, 명승)은 권문해가 처음 세운 정자와 주변 숲을 말한다. 용문산(770m)에서 발원하여 용문면 일대를 흐르는 금곡천이 암반 지역을 굽이쳐 흐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큰 암반 위에 세워진 정자와 정 아래에 형성된 좁은 계곡이 주변의 울창한 숲과 어우러져 빼어난 경치를 만들고 있다.

예천 초간정 원림(명승) 20221130_19<초간정 원림(명승)>

예천 예천권씨 초간공파 종택
예천권씨 초간공파 종택은 초간 권문해의 할아버지 권오상이 지은 가옥으로, 숲이 우거진 낮은 뒷동산을 배경 삼아 다소 경사진 대지에 동남향으로 위치한다. 안채는 ‘ㅁ’자형을 정면 5칸, 측면 5칸이고, 지붕는 팔작지붕집이다. 2단의 기단위에 세워져 있어 건물 전체가 매우 높고 웅장하다. 안채의 오른쪽 앞면에는 사랑채인 별당(보물)이 나와있고, 왼쪽에는 대동운부군옥목판 및 고본(보물), 권문해 초간일기(보물) 외 여러 서적을 보관한 백승각이 있다. 별당 앞쪽에 행랑채 겸 대문채가 있었으나 철거되었다. 안채와 사랑채인 별당은 두 공간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연결하였다. 이는 조선 전기 손님 접대를 중요시하는 살림집의 특징이자 누각형 접객 건물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드문 사례이다. 안채 오른쪽 뒤편 사당은 출입문에 붙였다 떼었다 하는 중간 설주가 있다. 이러한 설주 양식이 나타나는 곳은 이 종택이 유일하다. 조선 전기의 건물로서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당대 건축 구조와 양식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안내문, 예천군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예천군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보물), 강학공간 중심건물

경북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에 있는 전교당(典敎堂, 보물)이다. 조선중기 선조 때(1574년)에 지은 건물로 유생들이 모여 공부하던 강당이다. 사당인 상덕사를 제외하고는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낙동강과 주변 경치를 감상하기 좋다. 온돌방과 넓은 대청마루로 이루어진 매우 간소하게 지어진 건물이다. 대청마루 앞 현판에 적힌 ‘도산서원(陶山書院)’이라는 글씨는 선조가 도산서원에 이름을 내리면서 명필 한석봉이 선조 앞에서 쓴 글씨라고 한다.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보물) 01-20221029<안동 도산서원 전교당(보물)>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보물) 11-20221029<도산서원 현판>

전교당은 앞면 4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조선중기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서쪽 1칸은 온돌방으로 도산서원 원장이 머물렀던 곳으로 한존재(閑存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동쪽 3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되어 있는데 앞면은 개방되어 있고 옆면과 뒷면에는 쌍여닫이문이 있다.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보물) 13-20221029<도선서원 전교당>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보물) 09-20221029<옆에서 본 모습>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보물) 07-20221029<뒤에서 본 모습>

쌍여닫이문은 가운데에 나무로 만든 틀이 있는데, 조선중기 건물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보물) 08-20221029<쌍여닫이문>

온돌방 문을 들어올리면 전체가 하나의 공간이 되며 많은 유생들이 학문을 논했던 서원 강당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내부에는 전교당(典敎堂)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으며 이곳을 찾은 유력 인사들이 남긴 글이 적힌 액자들이 걸려 있다.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보물) 05-20221029<강당 대청마루 내부>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보물) 06-20221029<옆에서 본 모습>

천정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을 하고 있다. 간결하면서 단순하게 지은 건물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보물) 10-20221029<내부 천장>

잘 다듬은 화강석 석재로 기단을 쌓고 건물을 올렸는데 높은 편이다. 가운데 2개의 계단이 있으며 옆에 불을 밝히는 정료대가 있다. 앞마당 양쪽에는 유생들의 기숙인 박약재(동재)와 홍의재(서재)가 있다.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보물) 02-20221029<도산서원 강학공간>

도산서원<도산서원 공간배치>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典敎堂), 보물
전교당은 도산서원의 강당으로 1574년에 세워다. 강당은 유생들이 경학을 공부하는 서원의 중심 건물이다. 전교당은 대청과 서쪽에 한존재(閑存齋)라는 온돌방이 있다. 도산서원의 원장이 머물렀던 한존재의 문을 들어 올리면 대청까지 트인 넓은 공간이 확보된다. 정면에 걸린 ‘도산서원(陶山書院)’ 현판은 1575년 선조가 내려주었으며, 글씨는 한석봉이 썼다. 전교당 서쪽 계단 옆에는 높게 만든 돌기둥 위에 반원 모양의 돌을 받쳐 놓았는데, 이것은 밤에 행사할 때 불을 밝히던 정료대이다. 전교당 동쪽 뒤편 높은 곳에 사당인 상덕사(尙德祀)가 있다.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안동시청, 2022년
  2. 도산서원 홈페이지, 2022년
  3.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