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한옥

산청 남사리 이씨고가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에 있는 고택인 ‘이씨고가’이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으로 18세기에 지어졌다. 건물을 안채, 사랑채, 외양간채, 곳간채가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공간은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 공간을 넓게 사용하여 개방적인 분위기를 주고 있다. 보통 사랑채는 집주인이 손님을 접견하는 용도로 사용하지만 이 집은 가족들의 생활공간을로 사용할 수 있도록 공간배치를 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조선후기 남부지방 상류층 저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산청 남사마을 이씨고가 01-20220222<산청 남사마을 이씨고가>

고택은 담장이 있는 골목길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골목길에는 ‘부부 회회나무’로 잘 알려진 2그루의 고목이 아치를 이루고 있다. 드라마 ‘왕의 남자’ 촬영장소로 유명하다.

산청 남사마을 이씨고가 13-20220222<부부 회화나무>

부부 회화나무, 수령 310년
선비나무로 불리는 두 그루의 회화나무는 서로에게 빛을 더 잘 들게 하려고 몸을 구부리며 자랐고, 부부가 나무 아래를 통과하면 금실 좋게 백년해로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부부나무로 불린다. 중국 주나라 시대에 회화나무 아래 삼공이 모여 정사를 논의한 것에서 유래되어 학자나무라고도 불린다. (아내문, 산청군청, 2022년)

산청 남사마을 이씨고가 14-20220222<대문>

대문을 들어서면 바깥주인의 생활공간이 사랑채와 초가지붕을 하고 있는 곳간채가 있다. 사랑채는 앞면 4칸 규모로 주거용도로 사용되었다. 일반적이 사랑채에 비해 대청마루가 작은 편이며 오른쪽에 온돌방 2칸, 왼쪽에는 누마루와 온돌방 1칸이 있다.

산청 남사마을 이씨고가 15-20220222<사랑채 마당>

산청 남사마을 이씨고가 03-20220222<사랑채>

산청 남사마을 이씨고가 05-20220222<대청마루와 온돌방, 누마루>

산청 남사마을 이씨고가 04-20220222<온돌방>

산청 남사마을 이씨고가 09-20220222<안마당에서 보이는 사랑채>

산청 남사마을 이씨고가 12-20220222<맞은편 곳간채>

산청 남사마을 이씨고가 02-20220222<안채를 출입하는 중문>

산청 남사마을 이씨고가 10-20220222<안마당에서 본 중문>

안채가 있는 살림공간에는 안채를 중심으로 양쪽에 외양간채와 곳간채가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산청 남사마을 이씨고가 11-20220222<안마당>

안채는 남부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자형 건물로 앞면 7칸 규모로 건넌방 1칸, 대청 2칸, 안방 2칸을 두고 있으며 오른쪽 2칸은 부엌으로 보인다. 온돌방과 대청마루 앞에는 툇마루를 두어 통로로 사용하고 있으며, 오른쪽 방 앞에는 툇마루를 높게 하여 누마루처럼 사용하고 있다.

산청 남사마을 이씨고가 06-20220222<안채>

아래채는 초가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앞면 4칸 규모이다. 부엌, 방, 대청 등을 배치하고 앞쪽에 툇마루를 두고 있다.

산청 남사마을 이씨고가 08-20220222<아래채>

곳간채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기와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그 규모로 볼 때 상당한 부유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산청 남사마을 이씨고가 07-20220222<곳간채>

남사마을을 지리산 중산리로 연결되는 교통로에 있는 전통마을로 지금은 남사예담촌이라 부른다. 마을에는 20세초에 지어진 많은 기와집이 모여있다. 성주 이씨, 밀양 박씨, 진양 하씨가 주로 모여살고 있다.

산청 남사마을 이씨고가 21-20220222<산청 남사마을>

산청 남사리 이씨고가
산청 남사리 이씨고가는 남사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으로 1700년대에 세운 전통적인 남부지방 사대부 가옥이다. 남북으로 긴 대지에 사랑채, 외양간채, 곳간채가 안채를 중심으로 ‘ㅁ’자 모양이다. 안채는 앞면 7칸, 옆면 3칸 규모이며, 남부지방에서 가장 잘 나타나는 일(一)자 모양의 건물이다. 사랑채는 앞면 4칸, 옆면 3칸 규모이며, 안채와 앞뒤로 나란히 있다. 일반적으로 사랑채는 바깥주인이 살며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이나, 이씨고가의 사랑채는 안채처럼 주로 주거 용도로 쓰였다. 사랑채의 내부는 안채의 내부와 비슷한데 지붕 아래에 방을 두줄로 배열하여 앞쪽에는 생활하는 공간을 두고, 뒤쪽으로는 생활용품이나 가재도구 등을 보관하는 공간을 둔 겹집으로 꾸몄다. 사당은 담장을 둘러 독립적으로 배치하였다. 사당은 안채의 부엌에서부터 먼 곳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고가에서는 가깝게 둔 것이 특이하다. (안내문, 산청군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산청군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대한민국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2022년

경주 교촌마을 경주법주 고택

경북 경주시 교동 교촌마을에 있는 경주법주 고택이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18세기 교촌마을 경주최씨 7대 최언경이 향교 옆으로 이사오면서 지은 집이다. 종가인 경주 최부잣집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작은댁이라 불린다. 이집은 최부자집에서 대로 빚어온 경주 교동법주를 계승하고 있다. 교동법주는 숙종 때 사옹원 참봉을 지낸 최국준이 처음 빚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현재는 최경이 2대째 기능보유자로 명맥을 잇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교촌마을 경주법주 고택>

OLYMPUS DIGITAL CAMERA<대문채>

OLYMPUS DIGITAL CAMERA<대문채에 전시되어 있는 경주 교동법주>

OLYMPUS DIGITAL CAMERA<사랑채와 중문>

경주 교동 법주(慶州 校洞 法酒), 경북 경주시 교동 69
법주는 경주 교동 최부자댁에 전해 오는 비주(秘酒)로 조선 숙종(宗) 때 궁중에서 음식을 관장하던 관직에 있던 최국선(崔國)이 고향으로 내려와 최초로 빚은 궁중에서 유래된 술이다. 술 빚기는 9월~4월까지가 적기이고, 연중 보관이 가능하다. 술은 그 재료인 물이 중요한데, 이 법주는 최씨댁 마당의 우물물을 써서 만든다. 원료는 밑술로 밀누룩과 찹쌀을 쓰고, 덧술로 찹쌀밥을 넣어 빚는데 100여 일간을 숙성시킨다. 숙성된 법주는 외관이 밝고 투명한 미황색을 띠며, 특유의 향기와 감미에 약간의 산미를 내는 부드러운 술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경주교촌마을 홈페이지, 2022년
  3.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경주 교촌마을 최부자댁, 경주 대지주계층 대저택

경북 경주시 교동에 있는 고택인 경주 최부자댁이다. 1700년 대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는 가옥으로 99칸 규모의 대저택이었다. 저택은 사랑채, 안채, 문간채, 곳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남일대에서 손꼽히는 부호이지만 저택의 건물규모가 크거나 화려하게 꾸미지는 않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신라 고도 경주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지위가 높은 사람 대부분은 이 집에서 묵었다고 한다. 전통주인 교동법주를 비롯하여 손님접대를 성실히 했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일제강점기 황태자시절에 서봉총 발굴에 참여했던 스웨덴의 구스타브 국왕도 이 저택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강릉의 대저택인 선교장과 비슷하게 찾아오는 손님을 맞기 위해 저택 규모가 확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교촌마을 최부자댁 솟을대문>

솟을대문 앞에는 고택과 독립운동가 최준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는 안내판이 양쪽에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랑채>

사랑채는 1970년대 화재로 불타버린 것을 다시 중건한 건물이다. 경주 지역의 특징을 보여주는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기단을 쌓은 석재나 주춧돌은 통일신라 절터에서 사용했던 것을 재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옆에 있는 경주 향교보다 낮게 보이기 위해 기단과 건물을 낮게 지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랑채 누마루>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누마루>

사랑채는 앞면 5칸 규모로 왼쪽 2칸은 대청마루, 가운데 2칸은 온돌방, 오른쪽 1칸은 온돌방과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랑채 툇마루>

OLYMPUS DIGITAL CAMERA<절터 주춧돌을 재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주춧돌>

경주 최부자로 잘 알려져 있는 이 집안은 바람직한 모습을 보였던 조선시대 부호로 잘 알려져 있다. 조선중기부터 터를 잡고 살아온 경주최씨 집안은 9대 진사, 12대 만석군을 배출하였다. 벼슬은 체면유지용으로 진사까지만 하고 정치에 끼어들지 말라는 유지가 있었고 실제를 대부분의 후손들이 이를 실천했다고 한다. 다만 마지막 부자라 할 수 있는 최준은 독립군에 군자금을 대고 백산상회를 설립하는 등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해방 후에는 전 재산을 기부하여 현재의 영남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랑채 뒷편에 있는 사당>

안채는 트인 ‘ㅁ’자형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ㄷ’자형 안채와 ‘-’자형 중문채로 구성되어 있다. 중문채는 ‘-’ 자 형으로 오른쪽에 작은 행랑방과 부엌이, 가운데 중문과 창고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채 앞 ‘-자형 중문채>

OLYMPUS DIGITAL CAMERA<안채를 출입하는 중문>

OLYMPUS DIGITAL CAMERA<안채에서 보이는 중문채>

안채는 앞면 7칸 규모의 본채를 중심으로 양쪽에 4칸 규모의 날개채를 달아 내었다. 안채는 집안 식구들이 생활하던 공간으로 작은 방을 많이 두고 있다. 앞쪽에는 통로로 툇마루를 달아내어 놓고 있다. 안채 대청마루는 2칸 규모로 저택 규모에 비해 넓지 않은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채와 안마당>

OLYMPUS DIGITAL CAMERA<본채>

OLYMPUS DIGITAL CAMERA<안채 대청마루>

OLYMPUS DIGITAL CAMERA<동쪽편 날개채>

OLYMPUS DIGITAL CAMERA<서쪽편 날개채>

OLYMPUS DIGITAL CAMERA<사당이 있는 뒷마당과 연결되는 서쪽 날개채 마루>

안채 앞 마당에는 앞면 2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큰곳간이 있다. 대문채에도 큰 곳간이 있어 대대로 만석군 집안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큰 곳간>

OLYMPUS DIGITAL CAMERA<대문채>

OLYMPUS DIGITAL CAMERA<마당 정원에 있는 주춧돌>

OLYMPUS DIGITAL CAMERA<석조>

OLYMPUS DIGITAL CAMERA<석탑 지붕돌로 보이는 석재>

OLYMPUS DIGITAL CAMERA<담장 너머로 모이는 별채와 큰 나무>

경주 교동 최씨 고택(慶州 校洞 崔氏 古宅), 경북 경주시 교동 69
이 가옥은 경주 최씨(慶州崔氏)의 종가로 1700년경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월성(月城)을 끼고 흐르는 남천 (南川) 옆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았고, 문간채·사랑채·안채·사당·고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99칸 이었다고 하는데 사랑채와 별당은 1970년에 불타고 주춧돌만 남았다. 안채는 ‘ᄆ’자 모양이고 대문채는 ‘-’자 모양이다. 사당(祠堂)은 사랑채와 서당으로 이용된 별당 사이에 배치되어 공간적 깊이를 느끼게 한 특징이 있다. 조선 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가치가 크다. 최씨 집안이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이곳 교동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것은 조선 중기 무렵이다. 여기에서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19대에 걸쳐 진사(進士)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독립유공자 최준(崔浚) 선생 생가
문파(汶坡) 최준(崔浚, 1884 ~ 1970) 선생은 이른바 9대 진사 12대 만석의 마지막 부자로 이곳 교촌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영남의 대지주(大地主) 로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回復團)과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 특히 대한광복회에서 재무를 맡아 총사령관 박상진(朴尙鎭) 의사와 더불어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심한 옥고(獄苦)를 치렀다. 선생은 또 이곳 사랑채에서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1885~1943) 선생과 함께 백산상회(白山商會) 설립을 결의하고 대표에 취임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 을 자금을 지원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 에게 거액의 군자금을 보내는 등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공적을 남겼다. 이 밖에 선생은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문화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1920년에 경주고적보존회를 설립하고 1932년 정인보선생 등과 「동경통지」 를 편찬하는 등, 신라문화의 유산을 지키고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해방 직후 선생은 나라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길러야 한다며 모든 재산을 기증하여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을 설립하니, 곧 오늘의 영남대학교 전신이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제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일생을 항일운동에 헌신한 선생의 숭고한 정신과 실천적 삶을 여기 기록하고, 길이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호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경주 양동마을 강학당

경북 경주시 강동면 안강마을에 있는 강학당(講學堂)이다. 구한말에 마을 여주이씨 집안에서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작은 서당이다. 건물은 ‘ㄱ’자형으로 넓은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을 배치했으며 오른쪽에 마루와 작은 방이 있는 날개채를 달아 내었다. 건물 뒷편에는 서당을 관리하기 위해 지은 작은 행랑채가 있다. 앞쪽에 있던 서당건물이었던 심수정이 화재로 소실되었을 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양반 집성촌에서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었던 서당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양동마을 강학당>

OLYMPUS DIGITAL CAMERA<강학당 대청마루>

OLYMPUS DIGITAL CAMERA<날개채에 있는 작은 장판각>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행랑채>

OLYMPUS DIGITAL CAMERA<강학당으로 들어오는 길>

강학당(講學堂)
이집은 여주 이씨 집안의 서당으로 지족당 이연상이 고종7년(1870)경에 세웠다. 경주 손씨 집안의 서당인 안락정과 쌍벽을 이룬다. 공부하는 곳이니 만큼 대문과 담장 없이 소박하고 간결하게 지었으며 앞마당에서 마을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장판각’이라는 편액이 걸린 1/3칸짜리 방은 책과 경판을 보관하던 곳이다. 이씨 집안은 이 서당 이외에도 규모가 좀더 큰 경산서당을 소유하고 있다. 동쪽에 서 있는 행랑채는 서당의 살림살이를 맡았던 곳이다.(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주 양동마을 이향정 고택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에 있는 이향정(二香亭) 고택이다. 온양군수를 지낸 이향정 이범중이 살던 집으로 조선후기 숙종 때 지어진 집이다. 이 집은 마을 입구 근처 언덕에 위치한 저택으로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하고 있다. 건물은 안채, 사랑채, 아래채, 방앗간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곡식을 보관했던 광을 많이 두고 있다. 마을입구에 위치한 고택의 위치나 건물의 배치, 규모 등으로 볼 때 조선후기 사회적, 경제적으로 성공한 후손이 살았던 대저택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양동마을 이향정>

사랑채는 앞면 6칸 규모로 가운데 2칸 대청마루를,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있다. 왼쪽 온돌방 앞에는 툇마루를 달아내고 난간을 달아 누마루처럼 사용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랑채>

OLYMPUS DIGITAL CAMERA<누마루처럼 사용하고 있는 왼쪽 온돌방>

OLYMPUS DIGITAL CAMERA<가운데 대청마루>

OLYMPUS DIGITAL CAMERA<오른쪽 온돌방>

살림집은안채, 아래채, 방앗간채가 있는데 마당을 비롯하여 공간을 넓고 사용하고 있으며 곡식 등을 보관하는 광을 많이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채>

OLYMPUS DIGITAL CAMERA<안채 안방과 툇마루>

안채_대청에서_내다본_풍경<안채 대청마루에서 보이는 모습>

이향정(二香亭)
이집은 온양군수를 지낸 이향정 이범중이 숙종 21년(1695)경에 지은 것으로, 그의 호에서 집의 이름을 따왔다. 안채 뒤쪽으로 산길을 따라 쌓은 담장이 인상적인데, 사랑채 앞으로도 낮은 산이 자리하고 있어 아늑한 느낌을 준다. 담장을 따라 올라가는 오솔길에는 초여름이면 찔레꽃이 만발하여 그윽한 향기를 풍긴다. 안마당이 넓고 방앗간채가 따로 있으며, 곳간이 매우 많은 점으로 미루어 집주인이 부농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