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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덕천마을 송소 고택, 99칸의 대저택

경북 청송군 파천면 덕천마을에 있는 송소고택(松韶古宅)이다. 19세기말 만석군 심호택 일가가 조상의 본가인 덕천마을로 옮기면서 지은 99칸 규모의 대저택이다. 경북 북부지역 한옥 양식을 하고 있으며 공간을 넓게 쓰고 있다. 각 건물마다 독립된 마당을 두고 있으며 담장으로 공간을 분리하고 있다. 건물은 큰사랑채, 작은사랑채, 안채, 별채, 행랑채(문간채), 방앗간채 등이 남아 있는데 다른 한옥에 비해 규모가 상당히 크다. 구한말 대지주 계층이 살았던 대저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청송 송소고택 20230831_12<청송 송소 고택>

청송 송소고택<공간배치>

솟을대문이 있는 문간채를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문에는 송소세장(松韶世莊)’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은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양쪽을 3칸씩 행랑채를 두고 있다. 남쪽 행랑채는 온돌방 2칸, 창고 1칸이, 북쪽 행랑채는 온돌방 1칸, 창고 2칸으로 되어 있다.

청송 송소고택 20230831_14<문간채>

청송 송소고택 20230831_02<안쪽에서 본 문간채>

대문을 들어서면 안채를 출입하는 중문을 막고 있는 담장을 볼 수 있다. 남쪽에는 큰사랑채가 있는 마당, 북쪽에는 작은사랑채가 있는 마당이 있다. 남쪽 마당 안쪽으로는 별채가 있으며, 북쪽 마당 안쪽에는 방앗간, 창고 등 작업공간이 있다.

청송 송소고택 20230831_15<대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담장과 큰사랑채 마당>

큰사랑채는 앞면 5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상당히 큰 건물이다. 가운데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책방, 왼쪽에는 온돌방 2칸이 있다.

청송 송소고택 20230831_17<큰사랑채>

청송 송소고택 20230831_03<사랑채 왼쪽 누마루역할을 하는 공간>

청송 송소고택 20230831_04<가운데 대청마루>

청송 송소고택 20230831_05<오른쪽 온돌방>

청송 송소고택 20230831_22<큰사랑채 앞 마당>

큰사랑채 안쪽으로는 독립된 공간의 별채가 있는데 제사를 올리는 별묘라고 한다. 건물은 앞면 4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재실형태의 건물이다. 4대 이상의 제사를 모실 수 있는 공간으로 민속학적인 가치가 있는 독특한 건물이다.

청송 송소고택 20230831_18<별채 출입문>

청송 송소고택 20230831_20<별채 중문 앞 마당>

청송 송소고택 20230831_21<별채 중문>

청송 송소고택 20230831_19<별채>

작은사랑채와 큰사랑채는 담장으로 구분하고 있다. 작은사랑채에는 안채로 출입하는 중문이 있다. 작은사랑채와 안채는 가족들의 생활공간이라 할 수 있다.  마당 주위로 방앗간, 창고 등의 건물들이 있다.

청송 송소고택 20230831_13<마당 가운데 있는 담장>

작은사랑채는 앞면 5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중문, 창고, 온돌방, 대청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청송 송소고택 20230831_16<작은 사랑채>

안채는 앞면 6칸 규모로 가운데 1칸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이 2칸씩 두고 있다. 다른 고택에 비해 안채 대청마루가 넓지 않은 편이다.  양쪽 날개채, 작은사랑채,큰사랑채가 함께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마당이 상당히 넓다.

청송 송소고택 20230831_06<안채>

작은사랑채 뒷편 안쪽에는 작업공간이라 할 수 있는 방앗간채가 있고, 앞쪽에는 창고처럼 보이는 큰 건물이 있다.

청송 송소고택 20230831_10<작은사랑채 뒷편>

청송 송소고택 20230831_08<방앗간채>

청송 송소고택 20230831_11<앞쪽 창고건물>

청송 송소고택 20230831_07<문간채 옆 작은 건물(사무실)>

청송 송소 고택
이 집은 조선 영조때 만석의 부를 누린 심처대의 7세손 송소 심호택이 호박골에서 조상의 본거지인 덕천마을로 옮겨오면서 지은 99칸의 저택으로 1880년 경에 건립되었다. 대문은 솟을대문에 홍살을 설치하였으며, 큰 사랑채에는 주인이 거처하였고 우측에 작은 사랑이 있다. 안채는 안주인이 거처하던 곳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대청마루에는 세살문 위에 빗살무늬의 교창을 달았다. 건물마다 독립된 마당으로 공간이 구분되어 있는 등 조선후기 상류층 주택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송소고택은 조선시대 12대 만석꾼인 경주 최부자와 함께 9대에 걸쳐 무려 250여 년간 만석의 부를 누렸던 영남의 대부호로 한때 전국적인 명성을 떨쳤던 대표적인 고택이며 청송 심부자가 살았던 집이다. (안내문  청송군청, 2023년)

<출처>

  1. 안내문, 청송군청, 2023년
  2. ‘국가민속문화재 청송 송소 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3. ‘청송 송소 고택’, 디지털청송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의성 추원재, 사촌마을 안동김씨 재실

경북 의성군 단촌면 관덕리에 있는 재실 건물인 추원재(追遠齋)이다. 의성 사촌마을 만취당을 지은 조선중기 유학자 김사원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지은 재실 건물이다. 건물은 앞면 4칸 규모로 오른쪽에 대청마루를 2칸을 두고, 오른쪽에 온돌방 2칸을 두고 있는 ‘편방형(偏房形)’ 평면을 하고 있다. 1809년 후손들과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지었다고 한다. ‘관덕리 삼층석탑’이 남아 있는 절터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의성 추원재 20230830_51<의성 추원재>

의성 추원재 20230830_53<반대편에서 본 모습>

의성 추원재 20230830_54<뒤에서 본 모습>

의성 추원재 20230830_52<바깥에서 본 모습>

의성 추원재 20230830_59<추원재 뒷편에 있는 절터>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01<의성 사촌마을 만취당(보물)>

<출처>

  1.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의성 추원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의성 사촌마을 안동김씨 종택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마을에 있는 안동김씨 종택이다. 의성 만취당(보물) 옆에 위치하고 있다. 입향조인 김자첨이 1392년 사촌마을로 이주하면서 정착했다고 한다. 서애 유성룡의 외가이자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만취당과 비슷한 시기인 1584년에 처음 지어졌으나 원래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1959년에 중건하였다고 한다.

의성 사촌마을 안동김씨 종택 20230830_01<의성 사촌마을 안동김씨 종택>

의성 만취당<공간배치>

의성 사촌마을 안동김씨 종택 20230830_02<대문채>

건물은 안채와 사랑채,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는 중문을 중심으로 양쪽에 큰사랑채와 작은 사랑채가 배치되어 있다.

의성 사촌마을 안동김씨 종택 20230830_06<사랑채>

의성 사촌마을 안동김씨 종택 20230830_03<큰사랑채>

의성 사촌마을 안동김씨 종택 20230830_04<작은 사랑채>

의성 사촌마을 안동김씨 종택 20230830_08<안채를 출입하는 중문>

의성 사촌마을 안동김씨 종택 20230830_07<의성 만취당(보물)>

의성 사촌마을 안동김씨 종택 20230830_05<만취당에서 본 모습>

의성 사촌마을 안동김씨 종택 20230830_11<반대편에서 본 모습>

<출처>

  1. ‘사촌리 안동김씨 종택’, 디지털의성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의성 사촌마을 만취당(보물)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마을에 있는 고택인 만취당(晩翠堂, 보물)이다. 김사원이 1582년에 지은 건물로 자신의 호를 따서 만취당이라 불렀다. 원래는 후진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서원 강당 규모로 크게 지었는데 후대에 마을 안동김씨 종가의 모임 장소로 사용되었다. ‘만취당’이라 적힌 현판은 석봉 한호의 친필이다. 대청마루에는 이곳을 찾은 온계 이해, 서애 류성룡 등이 남긴 글들이 남아 있다. 영조 때 동쪽으로 2칸, 서쪽으로 1칸씩 온돌방을 증축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한옥 건물 중에서도 상당히 오래된 건물로 16세기 사대부계층이 살았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원래의 건물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어 당시 건축양식을 잘 살펴볼 수 있다.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01<의성 만취당(보물)>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03<남쪽에서 본 모습>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18<동쪽 길에서 본 모습>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19<뒷편에서 본 모습>

  건물은 ‘T’자 형을 하고 있는데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온돌방을 달아내었다. 대청마루는 앞면 2칸, 옆면 4칸의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로 사찰 강당이나 관아 누각을 연상시킨다. 바닥은 우물마루이며, 천장은 서까래가 드러난 연등천장을 하고있다.  앞면 추녀에는 활주를 세워 지붕의 무게를 받치도록 하였다.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04<의성 만취당>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05<가운데 대청마루>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08<대청마루 내부>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09<서까래가 드러난 연등천장>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07<지붕을 받치는 익공형 공포>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10<대청마루에 걸린 현판>

마루 서쪽에는 여닫이 판문을, 남쪽에는  띠살들문을 달았으며 동쪽 벽면에는 문설 기둥만을 세웠다. 동쪽 벽면에 있는 문설 기둥은 조선중기 목조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14<마루 남쪽 띠살들문>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06<서쪽 여닫이 판문>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12<동쪽 문설기둥>

북쪽에는 동쪽 2칸, 서쪽 2칸 등 3칸을 달아내었다. 조선후기 영조 때 증축한 부분이다. 동쪽 온돌방에는 남쪽에 쪽마루와 아궁이를 두었다. ‘복재(復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15<동쪽편 온돌방>

김사원(金士元, 1539~1601)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이 건물을 지었다. 김사원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지역민을 구제하여 지역민의 추앙을 받았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만취당 옆에 종택이 있는데 100년 전에 지어진 건물이다. 사촌마을은 구한말 의병활동으로 만취당을 제외하고 대부분 불타버렸는데 당시 새로 지어진 건물들이 주로 남아 있다.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16<만취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종택>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13<만취당 뒷마당>

의성 만취당(보물) 20230830_17<만취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사촌마을>

의성 만취당(晩翠堂), 보물
만취당은 퇴계 이황의 제자 만취당 김사원이 학문을 닦고 후배들을 기르기 위해 세운 건물로, 현판은 석봉 한호가 썼다. 김사원이 선조 15년(1582)에 짓기 시작하여 선조 17년(184)에 완공하였다. 이후 영조 3년(1727)에 동쪽으로 2칸, 영조 40년(1764)에 서쪽으로 1칸을 덧붙여 지어 현재와 같은 ‘ㅜ’자형 평민이 완성되었다. 처음에 지은 대청과 나중에 지은 온돌방 부분은 문틀을 짜 맞추는 방법이 서로 달라 지은 시기가 다름을 알 수 있다. 기둥 위의 처마나 지붕은 처음 지을 당시의 모습을 손상시키지 않고 덧붙여 지어 원래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만취당은 16세기 사대부집의 주거와 선비문화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건물이 점점 변화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안내문, 의성군청, 2023년)

<출처>

  1. 안내문, 의성군청, 2023년
  2. ‘보물 의성 만취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3. ‘의성 만취당’,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4. ‘의성 만취당’, 디지털의성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예천 금당실마을 반송재 고택

경북 예천군 용문면 삼금곡리 금당실마을에 있는 반송재(伴松齋) 고택이다. 조선 숙종 때 문신 김빈이 낙향하여 살기 위해 지은 집이다. 이후 구한말 때 원래 살던집이 팔리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건물은 앞쪽에 ‘-’자형 사랑채가, 뒷편에 ‘ㄷ’자형 안채가 있는 튼 ‘ㅁ’자형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영남 북부지역 고위직을 지낸 상류층의 살았던 저택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집주인이 살고 있지 않고 비어 있어 금당실마을을 찾은 탐방객이 마을 고택의 모습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10<예천 반송재 고택>

대문채는 초가지붕을 하고 있는 크지 않은 건물이다. 대문 양쪽에는 작은 온돌방을 두고 있다.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13<대문채>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11<안쪽에서 본 모습>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12<사랑채 앞 마당>

사랑채는 ‘-’자형 건물로 앞면 5칸반 규모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마루이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있다. 대청마루 앞에는 문짝을 달아 마루방을 만들어 놓고 있으며, 왼쪽 온돌방 앞에 작은 마루를 두고 있다.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01<사랑채>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02<왼쪽 온돌방>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08<뒷편에서 본 사랑채>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03<안채를 출입하는 중문>

안채는 앞면 5칸, 옆면 3칸 규모로 양쪽에 날개채를 달아내어 ‘ㄷ’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04<안채>

안채는 가운데 2칸은 대청마루로, 양쪽은 온돌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오른쪽 날개채는 온돌방을, 왼쪽 날개채는 온돌방과 부엌으로 되어 있다.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05<안채와 안마당>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07<대청마루>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06<부엌이 있는 날개채>

예천 반송재 고택 20221130_09<중문 안쪽에 있는 곳간채>

반송재 고택
반송재(伴松齋) 고택은 조선시대 문신 갈천 김빈(1621~1694)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으로 돌아와 조선 숙종 6년(1680) 경에 처음 세웠다. 210여년 뒤 구한말의 대신 이유인이 99칸 대저택을 지으려고 2,000여 평의 부지를 매입할 때 그 땅에 있던 갈천 고택도 함께 사들였다. 갈천 고택은 고종 36년(1899)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고, 이유인의 동생인 이유직이 살았다. 그 후 1940년 김빈의 아우인 반송헌 김정의 10대 주손 김환명이 이를 되찾아 반송헌의 종가로 삼으면서 ‘반송재’라 이름 붙였다. 고택의 전체적인 구조는 튼 ‘ㅁ’자형으로, ‘ㄷ’자형의 안채와 ‘-’자형 사랑채를 남쪽으로 두고 곳간채는 동쪽으로 두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고, 사랑채는 정면 5칸반,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사랑채 가운데 있는 2칸의 대청은 앞에 장지문 네짝을 달아 마루방으로 꾸몄다. 각 방의 여러 종류의 창호 형식, 창문틀의 구조 수법 등이 섬세하고 우아하다. 반송재 고택은 영남 북부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 배치와 평면 구성법을 지니고 있어 조선후기의 건축 양식이 돋보인다. (안내문, 예천군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예천군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