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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령전(華寧殿), 정조대왕 어진을 모신 영전(影殿)

수원 화성행궁에서 정전에 해당하는 봉수당 오른쪽에는 각종 연회나 행사가 열리던 화성행궁내에서 유일하게 남은 건물인 낙남헌과 오래된 목조 건물을 중심으로 한 건물군인 화령전(華寧殿, 사적115호)을 볼 수 있다. 이 곳은 수원화성과 행궁을 건설한 정조의 어진(御眞)을 모신 영전(影殿)으로 정조의 아들인 순조가 화성에 모셔진 정조의 건릉(健陵)과 사도세자의 (隆陵)을 참배할 때 문안을 올리기 위해 세었다고 한다.

화령전은 정조의 어진을 모신 운한각(雲漢閣)을 중심으로 비상시 어진을 옮겨놓은 이안청(移安廳), 재실인 풍화당(風化堂),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典祀廳),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조의 어진을 모신 운한각은 정전에 해당하는 건물로 앞면 5칸의 큰 규모의 건물이다. 건물 앞에는 제사를 올릴 때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할 수 있도록 월대(月臺)가 마련되어 있다. 운한각 오른쪽에는 비상시 어진을 옮길 수 있도록 이인청이 마련되어 있으며, 두 건물은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정전 영역 오른쪽에는 별도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재실 건물인 풍화당이, 왼쪽에는 전사청이 위치하고 있다.

화령전(華寧殿), 사적115호
화령전은 1800년 6월28일 정조대왕께서 돌아가시고 난 이후 정조대왕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만든 어진봉안각입니다. 정조대왕의 초상화는 평생 세차례 그려졌는데 화령전에는 융복(군복) 입은 초상화를 모셨습니다. 화령전은 화성(華城)에서 ‘화華’자를 따고, 사서삼경의 하나인 『시경』에서 ‘돌아가 부모에게 문안하리라, 귀령부모(歸寧父母)’에서 ‘령(寧)’자를 따서 붙인 것입니다. 곧 화령전은 국왕 순조가 화성에 묻힌 정조를 찾아가 문안을 여쭙는 전각이었던 것입니다. 정조의 사당인 이곳에서는 역대 국왕이 현륭원과 건릉을 다녀갈 때 마다 제향을 올렸으며 현재의 초상화는 2005년도에 새로 제작된 것입니다. 화령전을 구성하는 주요 건물은 정조의 어진을 봉인한 정전, 화재나 홍수 등 만약의 사태가 났을 때 정조의 어진을 옮겨 모시는 이안청, 그리고 국왕 및 제사를 모시기 위해 화령전에 온 관리들이 몸을 깨끗이 하고 대기하는 재실, 화령전 제사를 담당하는 관리들이 업무를 보는 전사청 등이 있습니다. <출처:수원시청>

OLYMPUS DIGITAL CAMERA정조의 어진이 모셔진 화령전 운한각. 오른쪽에는 임시로 어진을 옮길 수 있는 이안청이 마련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화령전 정문에 해당하는 외삼문.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양쪽에 작은 행각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외삼문. 외삼문에서 내삼문으로는 신도(神道)가 연결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화령전 정전인 운한각을 출입하는 내삼문.

OLYMPUS DIGITAL CAMERA화령전 마당에서 본 내삼문과 외삼문

운한각(雲漢閣)
운한각은 화령전의 정전으로 정조의 초상화를 봉인한 건물이다. 운한은 임금이 가뭄을 걱정하여 하늘에 기우제를 올릴 때 불려 졌다는 『시경』의 시구에서 따왔다. 앞에는 제사 때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월대가 있고, 세 개의 계단이 놓여 있는데 가운데 계단은 혼백만이 사용하는 계단이다. 1801년에 만들어진 조선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다. <출처:수원시청>

OLYMPUS DIGITAL CAMERA운한각은 앞면 5칸, 옆면 4칸의 팔작지붕을 한 목조 건물로 앞에는 월대가 세워져 있는데, 궁궐 정전 건물과 비슷한 규모이다. 운한각 오른쪽에는 복도각과 재실인 이안청이 연결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건물 앞에는 제사 때 사람들이 모여 서고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할 수 있도록 월대(月臺)가 마련되어 있다. 월대위에는 청동향로와 드므가 양모퉁이 위에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운한각은 지방 관아에 세운 전각이지만, 궁궐 전각에 못지않게 웅장하면서도 위엄있게 지어졌다.

OLYMPUS DIGITAL CAMERA운한각 추녀마루의 잡상들

OLYMPUS DIGITAL CAMERA운한각 현판.

OLYMPUS DIGITAL CAMERA운한각 문살과 기둥

OLYMPUS DIGITAL CAMERA화령전 운한각 내부에 모셔진 정조대왕 어진. 융복(군복)을 입은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내부 천장은 우물천장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화령전 중문에서 운향각까지는 삼도로 연결되어 있다. 원래는 박석이 깔려 있었겠지만 지금은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2010년 운한각

이안청(移安廳)
운한각에 모신 영정을 옮겨야 할 사정이 생겼을 때 영정을 임시 모셔두는 건물로 운한각과는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출처:수원시청>

OLYMPUS DIGITAL CAMERA운한각 오른편에는 이안청이 있는데, 화재 등 비상시에 어진을 옮겨 놓는 역할을 한다.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운한각과 이안청을 연결하는 복도각. 어진을 옮길때 비에 젖지 않도록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복도각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운한각.

OLYMPUS DIGITAL CAMERA건물 뒷편에는 벽돌을 사용하고 있다. 조선후기 청나라 건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환기시설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운한각 앞 마당.

풍화당(風化堂)
재실로서 제향이 있을 때 제를 올리는 사람이 미리 와서 머무는 건물이다. 풍화는 사회의 풍속과 기강을 교화시킨다는 의미이다. <출처:수원시청>

OLYMPUS DIGITAL CAMERA외삼문에서 재실인 풍화당으로 들어가는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풍화당은 화령전에 제사를 올릴때 머무는 재실로 앞면 5칸의 비교적 큰 규모의 건물이다. 순조는 융.건릉을 참배하기 위해 화성행궁을 방문할 때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 시연(詩宴)을 베풀기도 하였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풍화당 가운데 대청마루

OLYMPUS DIGITAL CAMERA풍화당 앞 마당. 국왕이 머물렀던 공간으로 어도(御道)가 마련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운학각 월대에서 본 풍화당

전사청(典祀廳)

OLYMPUS DIGITAL CAMERA화령전 왼쪽편에 위치한 전사청.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이자 실무관헌들이 머무는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건물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행각처럼 길게 지어졌다.

제정(祭井)
제정은 화령전의 제례에 사용될 정화수를 뜨는 우물로 어정(御井)이라고 한다. 화령전 제정은 정방향의 형태로 각 방향에 14개(4면 56개)의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 올렸다. 높이는 5.5m이과 바닥에서 물이 고인 높이는 4m이다. <출처:수원시청>

OLYMPUS DIGITAL CAMERA전사청 마당 한쪽편에 있는 우물

OLYMPUS DIGITAL CAMERA전사청 출입문

 

 

 

수원부(水原府) 관아, 낙남헌(落南軒)과 득중정(得中亭)

화성행궁에 속해 있던 많은 전각 중에서 원래 있던 건물 중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낙남헌(落南軒)이다. 낙남헌은 행궁 북쪽편에 위치한 건물로 화성유수가 손님을 접대하거나 연회가 펼쳐지던 곳으로 관아에서 누각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 누각인 낙남헌은 실제로는 수원유수가 사용하기 위해 세운것이 아니라 국왕이 행차할 때 사용하기 위한 건물이다.

낙남헌은 넓은 마루가 있고 앞 쪽에는 마당이 있어 행사하기 좋았던 장소로 보인다. 이 곳에서 정조의 화성 행차시 과거나 양로연 등 각종 행사가 펼쳐졌던 곳이다. 원래 이곳에는 수원유수가 활을 쏘면서 쉴 수 있는 공간인 득중정이 있었으나, 정조가 양위 후 자신이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낙남헌과 노래정을  짓고 득중정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세건물은 각각 독립된 것처럼 보이지만, 각 건물들이 연결되어 있어 하나의 건물군을 이룬다.

OLYMPUS DIGITAL CAMERA화성행궁 정전이자 동헌에 해당하는 봉수당 북쪽으로는 관아에서 주관하는 공식적인 연회를 가질 수 있는 정자에 해당하는 낙남헌(落南軒)과 활쏘기를 하면서 휴식을 취하는 용도로 지은 득중정(得中亭), 휴식공간으로 지은 노래당(老來堂)이 하나의 건물군을 형성하고 있다.

낙남헌(落南軒)
낙남헌은 각종 행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공간을 알맞게 배치한 행사용 건물이다.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득중정을 노래당(老來堂) 옆으로 옮겨 짓고, 그 터를 넓혀서 1794년에 완공하였다. 화성행궁 부속 건물 중에서 파괴되지 않고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유일한 건물이다. <출처:수원시청>

OLYMPUS DIGITAL CAMERA낙남헌은 앞면 5칸은 대형 건물로 관아에서 운영하는 누각이라 할 수 있다. 건물 앞쪽에는 넓은 마당이 있어 행사를 치루기 좋고 건물내부에도 넓은 마루가 있어 각종 연회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낙남헌은 넓지는 않지만 월대가 조성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낙남헌 내부. 온돌방 없이 넓은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 연회를 열기 위해 세워진 건물임을 알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낙남헌 내부 천장. 우물천장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낙남헌 뒷편으로 건물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2010년 3월 낙남헌

OLYMPUS DIGITAL CAMERA노래당은 낙남헌과 득중정에서 펼쳐지는 각종 행사 중에 휴식을 취하기 위한 건물이다. 또한 정조가 순조에게 양위하고 내려와 머룰려 했던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봉수당과 연결되는 출입문. 낙남헌 맞은편에는 원래 객사가 있었으나 다른 지방 관아와 마찬가지로 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득중정(得中亭)
득중정은 활을 쏘는 정자이다. 원래 낙남헌 자리에 있었으나, 1794년에 옮겨 짓고 옛 이름 그대로 정조가 쓴 편액을 달았다. 북쪽 방향으로 노래당과 이어져 있으며, 계단 앞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아 어사대(御射臺)를 두었다. 현재의 건물은 1998년 12월 복원된 것이다. <출처:수원시청>

OLYMPUS DIGITAL CAMERA득중정은 수원부 관아를 현재의 위치로 옮기때 세워진 정자이다. 원래는 낙남헌이 위치한 곳에 있었는데 정조가 낙남헌을 크게 지으면서 그 건물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두동의 건물이 연결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득중정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로 편액을 정조가 직접 써서 걸었고, 상량문은 홍양호가 짓고 썼다. 정조는 행차시 매번 활쏘기를 하였는데, 1790년에 새로 만들어진 이 정자에서 활을 4발 쏘아 4발을 모두 맞히고는 이를 기념하여 군사들의 회식을 이 곳에서 하였으며, 특별과거시험을 치러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을 선발하였는데 급제자에게 합격증을 내려 주는 행사도 이 곳에서 있었다. 또한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한 양로연을 시행하였다. <출처:수원시청>

OLYMPUS DIGITAL CAMERA득중정(得中亭)은 편액을 정조가 직접 써서 걸었다고 전해진다. 현재은 건물은 1998년에 복원했다고 하며 편액 또한 이때 다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득중정은 활을 쏘기 위해 사용한 정자이다. 많은 사람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활터는 아니고, 낙남헌 마당에서 특별한 행사가 있을때만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득중정 옆에 작은 행각 건물을 달아붙여 놓고 있다. 크지는 않지만 마루에 걸터 앉아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득중정에서 활쏘기를 할 때 수행하는 인원들을 위한 공간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화성행궁 뒷편 행각들.

 

수원부(水原府), 부속관청과 장용외영(壯勇外營)

화성행궁은 정조가 현륭원 행차시 임시로 머물던 행궁으로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곳이다. 이곳은 국왕 행차시 머무는 행궁과 수원유수가 근무하던 수원부 관아, 그리고 정조의 친위부대라 할 수 있는 장용영 군사들이 머물던 군영의 역할을 같이 하던 곳이다. 정조가 화성축성을 끝냈을 무렵에는 전체 430칸으로  궁궐에 버금가는 규모의 행궁이 완성되었다. 화성행궁은 일제강점기에 낙남헌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허물어졌다. 현재의 건물들온 1996년부터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객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복원되어 조선시대 행궁과 관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화성행궁에는 일반 관아에 비해 하급관리들이 근무하는 관아 건물이 많은 편이며, 정조가 수원화성을 건설하면서 친위군사조직인 장용외영을 설치했기때문에 군영 건물 또한 설치되었다.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는 일반 지방관아 아문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이 신풍루의 원래 이름은 진남루였는데 정조의 명으로 신풍루로 이름이 바뀌었다. 신풍루는 ‘국왕의 새로운 고향’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신풍루 좌우에는 수원 화성 장용외영 친군위가 숙직하던 남.북군영이 자리잡고 있다. 화성행궁에는 기병으로 구성된 장용외영의 핵심 병력인 친군가 수직근무하던 북군영과 남군영이 신풍루 좌.우에 자리잡고 있으며 각기 100명씩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북군영 안쪽에는 행궁의 잡무를 맡아 보던 집사청이 자리잡고 있으며, 남군영 안쪽에는 수원부에 근무하던 말단 관리들의 사무실인 비장청과 서리청이 자리잡고 있다.

화성행궁 유여택 앞쪽에는 외정리소가 설치되어 있다. 외정리소는 역대 임금이 화성행궁을 행차할 때 행사를 담당하는 관청으로 당시 화성행차른 준비에서 결과정리까지 모든 업무를 관장하는 기관으로 수원유수가 그 업무를 겸임했다고 한다. 지금도 정조시절 화성행차 결과를 정리한 원행을묘정리의궤는 화성성역의궤와 함께 우리의 빼어난 기록유산으로 남아 있으며, 수원화성의 의미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

화성행궁(華城行宮)
행궁은 왕이 항상 머물며 국사를 주관하는 본궁(本宮)과 달리 전라, 휴양, 능원 참배 등으로 지방에 행차하여 임시로 거처하는 행재소(行在所)로 사용하는 곳이다. 화성행궁은 화산 현륭원 참배의 목적 외에 정조 임금이 1804년 양위 후 장차 수원화성에 내려와 노후를 보낼 시설이었으므로 그 어떤 행궁보다도 대규모로 건설되었으며 팔달산 동쪽 기슭 수원화성의 중심부에 자리잡았다. 화성행궁은 1789년 옛 수원 읍치였던 화산아래에서 팔달산 아래로 옮긴 수원신읍(水原新邑)의 관아로 건축된 후 이듬해인 1790년 5월7일 약 430칸의 관아가 완공되면서 행궁의 역할도 지니게 되었다. 이후 1794년 화성성역을 시작하면서 각 건물을 증축하거나 재배치하여 1796년 화성성역이 끝날 무렵에 무도 합하여 576칸의 건물이 완성되었다. 1795년 윤2월 혜경궁 회갑연의 다양한 공연 예술 및 행사가 치러진 중심무대였으며 정종와 후대의 국왕들이 능행차 때마다 머물렀던 조선시대 최대의 행궁이었다. 화성행궁은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파괴되어 그 터는 경기 도립병원, 신풍초등학교, 수원경찰서 등이 자리하였고 낙남헌, 노래당 건물만이 신풍초등학교 운동장 한 귀퉁이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에 1989년 10월 화성행궁 복원추진위원회가 설립되었고 1996년부터 본격적인 화성행궁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2002년 1단계로 전체 576칸 중 482칸을 복원 완료하였다. <출처:수원시청>

신풍루(新豊樓)
신풍루(新豊樓)는 화성행궁의 정문이다. 신풍루는 1790년(정조 14년)에 세워졌는데 처음 이름은 진남루(鎭南樓)였다. 그 후 1795년에 정조의 명으로 신풍루로 변경하였다. 1795년에 정조가 행차했을 때 신풍루 앞에서 정조가 친히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행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출처: 위키백과>

OLYMPUS DIGITAL CAMERA신풍루는 화성행궁의 정문으로 2층누각을 하고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관찰사가 있던 감영(監營)이나, 목사(牧使)가 있는 목(牧), 부윤(府尹)이나 유수(留守)가 있던 부(府) 등 규모가 큰 지방행정 기관의 출입문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화성행궁의 성격이 수원부 유수의 집무장소이기 때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신풍루 추녀마루의 잡상들. 악귀를 물리치는 잡상은 궁궐 추녀마루에만 설치할 수 있는데, 국왕이 임시로 거처하는 화성행궁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화성행궁 앞 광장. 신풍루 앞에는 이곳에 관아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아주 큰 고목이 우뚝 서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화성행궁 건물배치를 형상화한 조각. 복원되지 않은 객사를 제외한 현재의 건물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화성행궁이라 적힌 현판,

OLYMPUS DIGITAL CAMERA화성행궁 앞 기념 조각상

SANYO DIGITAL CAMERA2010년 겨울 화성행궁 앞 광장

SANYO DIGITAL CAMERA관아 아문인 신풍루를 들어서면 정면에 중문에 해당하는 좌익문(左翼門)이 나타나고 좌.우에 수원부(水原府) 부속관청과 장용외영에 속한 남.북군영이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좌익문 앞 마당에서 본 신풍루와 행각들.

OLYMPUS DIGITAL CAMERA중문 앞 마당 집사청이 있는 왼쪽편 마당에 느티나무 고목이 남아 있다. 마당 오른쪽에 북군영과 집사청이 배치되어 있다, 원래는 객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마당 왼쪽편 출입문. 지금은 쉼터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원래는 객사로 연결되는 출입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집사청(執事廳)
화성행궁의 잡다한 사무를 보던 집사들이 사용하던 건물이다. 좌익문 밖 동북 담 안에 1789년에 세웠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완전히 파괴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2002년 7월에 옛 모습대로 복원된 것이다. <출처:수원시청>

OLYMPUS DIGITAL CAMERA집사란 주인을 모시고 그 살림을 맡아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행궁의 집사청은  궁궐의 액정서(국왕이 쓰는 붓과 먹.벼루 등을 보관하며 대궐안의 열쇠를 간수하고 여러가지 설비, 비품 등을 관리하는 관청)와 같이 잡다한 사무를 보던 집사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집사청 건물 맞은 편에 있는 건물. 집사청에는 행각을 두지 않고 두 동의 건물로 이루어졌다.

OLYMPUS DIGITAL CAMERA집사청에서 북군영으로 연결되는 출입문.

북군영(北軍營)
‘화성성역의궤’에는 관아건물로 분류해 놓았다. 장용외영의 친군위(화성의 기병)는 처음 좌.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하는 곳이 남.북군영이다. (화성행궁 전체는 동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 방위로 볼때 남쪽과 북쪽방향에 군영이 있다.) 1789년 군영 24칸을 지은데다가, 정조 18년 좌우익랑 21칸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1798년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우열은 파하고 1.2.3번의 입번을 정하여 각기 100명씩 양영에 나누어 방어하였다. <출처: 수원시청>

SANYO DIGITAL CAMERA장용외영 기병들이 숙직근무하던 북군영. 지휘부가 숙식하던 건물로 보이며, 주위에 행각들로 둘러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북군영 출입문과 행각

OLYMPUS DIGITAL CAMERA중문 앞 마당 왼쪽에 남군영과 비장청, 서리청, 외정리소가 배치되어 있다.

비장청(裨將廳)
조선시대 감사(監司), 유수(留守), 병사(兵使), 수사(水使) 등을 따라다니는 관원을 비장(裨將)이라고 하는데, 비장청은 수원부의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외정리소 앞에 남향 건물이다. 원래는 1789년에 세웠는데 1796년 서리청 건물을 수리하고 비장청으로 변경하여 사용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2002년 7월 복원된 것이다. <출처:수원시청>

OLYMPUS DIGITAL CAMERA비장청은 수원부 비장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외정리소 앞에 위치하고 있다. 비장은 관찰사나 절도사 등 지방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로 조선후기에는 방어사를 겸한 수령들까지 모두 비장을 거느리는 것을 관례화하여 민정 염탐을 시키기도 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비창청에 속한 행각

OLYMPUS DIGITAL CAMERA비장청에서 서리청을 출입하는 작은 협문

서리청(書吏廳)
서리(書吏)는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는 아전으로서 서리청은 그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비장청 앞에 위치했으며 남향이다. 예전의 금도청 건물을 이청으로 쓰게하고, 그 건물을 증축하여 사용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2002년 7월 복원된 것이다. <출처: 수원시청>

OLYMPUS DIGITAL CAMERA수원부 하급관리인 서리들이 근무했던 서리청. 현재 비장청 건물이 서리청이었나, 비장들에게 밀려났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서리청 행각

OLYMPUS DIGITAL CAMERA서리청 앞 마당.

OLYMPUS DIGITAL CAMERA서리청 출입문과 행각

남군영(南軍營)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는 관아 건물로 분류해 놓았다. 장용외영의 친군위(화성의 기병)는 처음 좌.우열로 각100명씩 입직숙위하는 곳이 남.북군영이다. 1789년 군영 24칸을 지은데다가 정조 18년 좌우익랑 21칸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현재의 건물은 2002년 7월 복원된 것이다. 1798년 군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우열은 파하고 1.2.3번의 입번을 정하여 매년 각기 100명씩 양영에 나누어 방어하였다. <출처:수원시청>

OLYMPUS DIGITAL CAMERA화성행궁 제일 앞쪽에 위치한 남군영 건물. 앞면 5칸 규모의 건물로 아마도 사무실과 지휘부가 숙직하던 장소로 생각된다. 복원된 건물이지만 당시 화성의궤에 워낙 세밀하게 정리되어 있기때문에 원형과는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남군영 100명의 군사들이 숙직했던 방들이 있는 남군영 행각들

OLYMPUS DIGITAL CAMERA행각은 창고와 온돌방으로 이루어졌으며 행각이 많은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남군영 출입문과 행각

외정리소(外整理所)
정리소는 1795년 을묘원행(乙卯園行)에서 펼쳐질 각종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1794년 12월에 설치한 임시기관이었는데, 화성성역이 끝난 후 외정리소라하여 정조를 비롯한 역대임금이 행차할 때 화성행궁에서 행사준비를 담당하는 관청이 되었다. 처음에 정리소는 장용영내 조방(소속 관원들이 조회하는 건물)에 설치하였는데, 1796년 화성행궁이 완공되면서 유여택 앞에 외정리소를 세우고 외정리아문이란 편액을 달았다. 외정리사(外整理使)는 호조판서가 겸임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화성의 경우는 수원유수가 겸직하였다.현재의 건물은 1998년 옛 모습대로 복원된 것이다. <출처: 수원시청>

OLYMPUS DIGITAL CAMERA화성행궁 유여택 앞에 있는 외정리소. 외정리소는 정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이 행차시 화성행궁의 행사를 담당하는 관청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외정리아문이라는 편액이 걸린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외정리소 마당. 외정리소는 수원유수가 거처하는 유여택 마당 행각 바깥쪽에 건물을 지어 공간을 마련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외정리소의 중심이 되는 건물. 크지는 않지만 온돌방과 대청마루를 갖춘 관아 건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건물은 온돌방 바깥쪽에 툇마루를 두어 정자나 사랑채 같은 분위기를 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외정리소 행각은 사람이 근무는 작은 온돌방도 있지만, 행사를 정리하기 위해 많은 책자 등을 보관하기 위한 다락방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많은 물건들을 보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정리사가 행사의 준비를 위해 행사 기물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장면을 연출한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기층헌(起層軒), 궁중음악에 사용되는 악기들이 보관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기층헌에는 진고(晋鼓), 특종(特鐘), 편종(編鐘), 특경(特磬) 같은 궁중악기를 전시하고 있다.

 

수원부(水原府) 관아, 내아(內衙)인 유여택(維與宅)과 복내당(福內堂)

화성행궁(華城行宮)은 국왕이 임시 거처로 사용되는 공간이자, 수원유수(留守)가 집무를 보는 수원부(水原府) 관아이기도 하다. 정조가 머물렀던 행궁의 중심 건물인 봉수당(奉壽堂)이 동헌에 해당한다면, 수원유수가 생활하는 공간인 내아(內衙)는 사랑채에 해당한는 유여택(維與宅), 안채에 해당하는 복내당(福內堂)과 혜경궁 홍씨가 머물렀던 장락당(長樂堂)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화성을 건설하면서 수원부 읍치(邑治)를 화성을 옮길때 행궁으로 조성했기때문에 다른 관아에 비해서 살림집에 해당하는 내아의 규모가 큰 편이다. 사랑채에 해당하는 유여택은 건물 형태나 규모로 볼 때 수원유수의 생활공간이 아니라 동헌처럼 일상적으로 근무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동헌인 봉수당은 평상시에는 비워두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안채에 해당하는 복내당과 장락당에는 국왕 일행을 수행하는 인원들이 머물수 있도록 많은 행랑들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유여택(維與宅), 수원유수가 일상적으로 거처하는 공간

화성행궁 유여택은 동헌인 봉수당 출입문인 중앙문 왼쪽편에 자리잡고 있는 건물이다. 평소에는 수원유수가 업무를 보며 거처하는 공간으로 다른 관아와는 달리 행궁으로 사용할 때 국왕이 집무하는 공간으로 사용했기때문에 많은 신하들이 도열할 수 있도록 앞에 넓은 마당과 행각을 두고 있다. 건물은 앞면 6칸 정도의 규모가 큰 편에 속하는 건물로 오른쪽편에 누각을 두고 있다. 일반 관청건물과는 달리 당시에 유행하던 권문세가 대저택의 사랑채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건물 앞에는 월대를 두고 있으며, 누각 앞에는 해시계가 있다. 건물 중앙에 마루를 두고 집무를 볼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마루 양쪽에 온돌방을 있다. 유여택 앞 마당은 궁궐 정전의 마당보다는 작지만 규모가 있어, 많은 사람이 참석하는 행사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유여택(維與宅)
유여택은 평상시에는 화성 유수가 거처하는 곳으로 쓰이다가, 임금이 행차하게 되면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곳으로 이용되던 건물이다. 1795년 행차 때, 정조는 이 건물에서 각종 행사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하교를 내렸다. 원래 이 건물은 1790년에 건립하고 ‘은약헌(隠若軒)’이라 하였다가, 1796년 증축하면서 유여택으로 이름을 바꿨다. 현재의 건물은 1998년 12월 복원된 것이다. <출처:수원시청>

SANYO DIGITAL CAMERA수원유수가 거처하는 내아 사랑채에 해당하는 유여택, 정조가 화성을 행사했을 때 이곳에서 집무를 보면서 신하들을 접견했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건물은 앞면 6칸 규모로 가운데 2칸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있다. 조선후기에 유행한 누마루를 오른쪽에 1칸 달아내어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유여택 내부에는 국왕이 집무를 보던 환경을 꾸며 놓고 있다. 평소에는 수원유수 처소로 이용된 공간이었다고 하니, 국왕이 집무를 볼 때와는 다른 모습을 꾸며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OLYMPUS DIGITAL CAMERA국왕이 집무를 보는 공간으로 꾸며 놓은 대청마루. 재남헌(扗南軒)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있고, 중앙에 어좌가 마련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유여택(維與宅)이라고 적힌 현판.

SANYO DIGITAL CAMERA유여택 오른쪽에는 누마루를 달아내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누마루에는 공신루(拱宸樓)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SANYO DIGITAL CAMERA유여택 월대. 수원유수의 처소였던 까닭에 삼도와 같은 궁궐의 형식은 배재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월대 아래에 놓인 해시계인 앙부일구

OLYMPUS DIGITAL CAMERA유여택 앞 마당과 정면 행각. 국왕을 수행하는 인원들이 거처할 수 있도록 크고 작은 방들과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봉수당 앞쪽 마당 방향의 행각.

SANYO DIGITAL CAMERA행각 한쪽에 전시해 놓은 뒤주. 사도세자가 죽었던 뒤주를 연상시킨다.

유여택이라는 이름은 시경의 내용 중 ‘상제께서 모두 물리치시고 나라의 규모를 크게하리라. 이내 서녁을 돌아보시고 이집을 주었다(유여택)’라는 내용이다. 유여택은 정조가 행차시 집무공간으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정조의 행궁 행차시에는 행궁의 주요 공간(봉수당, 장락당, 유여택 등)이 궁궐로 사용되었는데, 이 때 봉수당은 정조의 처소(업무를 마치고 머무르는 공간)로, 유여택은 정조의 집무공간으로 사용되었다. 평소에 유여택은 유수의 처소로 사용되었다. <출처:수원시청>

OLYMPUS DIGITAL CAMERA2014년 가을 유여택.

OLYMPUS DIGITAL CAMERA수원유수 관헌들을 위한 공간 중 외정리소에서 유여택 마당으로 출입하는 중문

OLYMPUS DIGITAL CAMERA유여택 마당에서 복내당으로 출입하는 중문

OLYMPUS DIGITAL CAMERA중문을 들어서면 행각과 작은 마당이 있다. 이 공간은 내아에서 사랑채에 해당하는 공간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유여택 뒷마당으로 출입하는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유여택 뒷마당.

OLYMPUS DIGITAL CAMERA유여택에서 복내당으로 출입하는 출입문

복내당(福內堂), 수원유수 가족들이 거처하는 내아

화성행궁 복내당(福內堂)은 행궁의 내당이자 실제 이 곳을 집무를 보던 수원유수 가족이 거처하던 내아(內衙)이다. 화성행궁의 성격자체가 국왕이 잠시머무르는 행궁의 성격과 수원화성을 책임지던 화성 유수의 집무공간이었던 까닭에 이 곳 화성행궁 복내당은 화성유속 가족들이 거처하던 주택과 행궁을 방문하는 국왕을 비롯한 고위급 인사들의 숙식을 지원해야하는 역할이 있었다. 그래서 복내당은 행각들이 상당히 많고, 국왕이 잠시 거처하던 봉수당과 장락당이 바로 붙어 있다. 아마도 정조대왕 시절에는 수원유수 가족들이 거처하는 공간이었지만 실제로 거처하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많은 국왕을 보필하는 인원들이 이 곳 복내당에 머물면서 행사를 준비했을 것으로 보인다.

복내당(福內堂)
복내당은 행궁의 내당으로 1789년에 건립되었으며, 1794년에 증축되었다. 평상시에는 화성유수의 가족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이곳의 현판은 정조가 직접 썼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판은 남아 있지 않으며 1997년에 복원된 것이다. <출처:수원시청>

OLYMPUS DIGITAL CAMERA수원유수 내아인 복내당. 건물자체로는 크지 않고 일반 저택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으나, 행궁에서 거행되는 행사를 지원해야 하는 까닭에 복내당을 중심으로 많은 행각들이 붙어 있고, 각 행각마다 많은 출입문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복내당 대청마루

SANYO DIGITAL CAMERA대청마루 안쪽편에 마련된 상석. 드라마 ‘대장금’에 등장했던 장면을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뒷편에 내명부에 대한 설명을 적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복내당 현판. 복내당은 ‘복은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SANYO DIGITAL CAMERA 복내당 부엌, 복내당은 1790년 수원부 신읍치소의 내아(內衙)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된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이곳은 복내당에 딸린 부엌으로 당시의 부엌 살림들이 연출되어 있어 수원부 유수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복내당에 딸린 행각. 장락당과 연결되는 통로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복내당에서 혜경궁 홍씨가 머물렀던 장락당과 연결되는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유여택에서 복내당으로 출입하는 작은 출입문. 화성행궁 복내당에는 건물 규모에 비해서 상당히 많은 출입문을 두고 있는데, 이는 복내당이 화성유수 내아로서의 역할보다는 궁궐 내당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점을 말해준다. 좁은 공간에 국왕을 수행하는 많은 수의 상궁, 내시들이 머물러야 했고 그들을 신분, 역할에 따라 구분해야 했기때문에 출입문이 많았다고 생각해 본다.

OLYMPUS DIGITAL CAMERA복내당 바깥쪽 행각. 대장금의 어린 시절 수락간 생각시 훈련장과 어선경연이 벌어졌던 곳이다. 의녀가 되기 위해 장금이 교육을 받았던 전의감 교육장, 궁궐안에서 보여지는 내의원의 모든 모습과 그 밖의 대장금의 주요 장면이 이 곳 수원화성에서 펼쳐졌다.

OLYMPUS DIGITAL CAMERATV드라마 ‘대장금’에서 대장금이 입었던 의상들을 살펴볼 수 있다. 어린 장금 생각시 의상, 어린 장금 의상, 장금 수랏간 생각시 의상, 장금 수랏간 나인 의상, 장금 의녀 의상, 장금 최고상궁 의상의 순서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복내당 뒷쪽편 행각들. 복내당과 작은 출입문으로 구분되어 있다. 아마도 뒷쪽편에는 국왕을 수행하던 상궁.나인들이 거처할 수 있도록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행각은 여러개의 방과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복내당 뒷편 행각과 마당

OLYMPUS DIGITAL CAMERA화성행궁 복내당 뒷쪽편. 상당히 많은 행각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정조대왕 행차시 많은 사람들이 머물 수 있도록 지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OLYMPUS DIGITAL CAMERA복내당 뒷마당 출입문. 행각과 솟을대문을 하고 있다. 이 문을 통해서 내아였던 복내당을 출입했던 것으로 보이며, 국왕 행차시 많은 인원들이 거처하기때문에 출입문을 크게 만들었다.

 

 

 

광주부(廣州府) 관아, 남한산성내 설치된 행궁과 관청들

경기도 광주는 고려 성종때 전국에 설치한 12개 행정구역 중 하나인 광주목이 설치된 지역으로 그 범위는 현재의 광주시,성남시, 서울의 강남지역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한성 백제의 수도가 있었던 지역이었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이성산성을 중심으로 한강유역의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했던 시기에도 광주호족은 전국의 유력 호족 가운데에서도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지역이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광주목은 인조대에 광주부로, 숙종대에는 광주유수로 승격되었다. 원래 광주의 중심지역은 현재 하남시 춘궁동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병자호란 이후에 관아를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하남시 춘궁동 일대에는 통일신라시대 산성인 이성산성과 고려초기 절터이 춘궁동사지가 있으며, 조선시대 공립교육기관이었던 향교가 남아 있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이후 국방상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어 숙종대와 영.정조대에 남쪽 성벽 부근을 비롯하여 방어상 취약했던 지점에 옹성을 쌓는 등 많은 보완이 있었다. 또한 남한산성에는 한강 동남쪽 지역을 관장하던 광주목 관아를 옮기고 행궁을 건설하는 등 행정적으로도 보완이 있었다. 남한산성 행궁은 종묘와 사직을 갖춘 유일한 행궁으로 비상시 국왕이 거처할 수 있도록 대비를 하였다. 남한산성을 관장하던 광주목사는 원래부터 정3품의 높은 관직이었지만 병자호란 이후에는 광주부로 승격하여 종2품의 부윤 또는 정2품의 유수가 수장으로 있었으며,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군사조직인 수어청 수장인 수어사도 겸하게 되었다. 평사시 남한산성에는 약 천명 정도의 군사가 상주하였으며, 주민은 4천명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산성을 축조하고 방어하기 위해 동원한 승병들을 위해 7개의 사찰을 산성내에 두었다고 한다.

광주부
조선시대 광주부의 영역은 경기도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 의왕시, 군포시 일대와 화성군 매송면 일부지역, 안산시 일부지역, 서울 송파고, 강동구 일부지역, 남양주시 와부읍 일부지역에 걸쳐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광주부 지도는 북쪽이 아니라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이는 남한산성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인 행궁을 중심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광주는 수운과 육로가 주요한 역할을 하는 지역이었으므로 지도에 물길과 도로망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광주의 중앙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광주지역의 행정과 군사를 담당하는 중심지였다. <출처:경기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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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에 편찬된 ‘광주부읍지’에 수록된 광주부의 지도이다. 1872년에 광주부에서 제작한 ‘광주전도’와 내용이 동일하고 채색부분만 다르다. 산과 하천의 표현이 선명하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산성도시를 세우다.
남한산성행궁(사적 480호)은 행궁 중 좌전(종묘)과 우실(사직단)을 갖춘 유일한 곳이다. 이 행궁은 국왕의 임시 거처일 뿐만 아니라 광주의 행정업무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몇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이들 관리들은 대개 군사업무도 겸임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는 남한산성이 군사방어체계에서 주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산성 내에는 산성 축성과 관리에 동원한 승려들을 위해 창건된 7개의 사찰이 있었으며,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에는 4천 명의 주민이 거주했다고 한다. 따라서 자연히 다양한 문화와 이야기가 생겨났는데, 지금까지 도당굿과 숭렬전 제례, 현절사 제향의 무형문화유산과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산성 안에 주민이 거주하면서 생업을 꾸리며 상업과 시장이 형성되어 있던 남한산성은 하나의 산성도시였다고 할 수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도, ‘고지도첩’, 17세기 후반. 이 그림은 남한산성 주요시설물을 간략하면서도 상징적으로 그려놓고 있는데, 지금 남아 있는 남한산성 유적들을 비교하면서 찾아보기 좋은 그림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의 성곽과 중요 건축물, 도로망을 간략하면서도 상징적으로 그렸다. 성곽의 경우 옹성과 대문 등을 자세하게 표현하였다. 산성 내부구조의 경우 최고의 권위 건축물이 행궁을 강조했으며, 중요 관청과 창고.사찰 등 핵심정보를 수록하였다. <출처:경기도박물관>

남한산성 행궁, 국왕의 임시 거처이자 광주유수부 관아

남한산성에 있는 옛 광주부 관아 건물이자 국왕이 임시로 머물수 있는 행궁이 설치된 사적 480호로 지정된 남한산성 행궁이다. 이 행궁은 비상시 국왕이 임시 거처로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 역할을 하는 좌전과 우실을 두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한산성 행궁은 일제강점기 이후 없어졌다가 최근에 옛 기록을 참조하여 복원하였다. 행궁은 국왕의 거처로 정전과 편전에 해당하는 하궐과 국왕이 머무는 내전에 해당하는 상궐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쪽편에 광주부 관아 건물인 좌승당과 광주유수의 숙소라 할 수 있는 일장각으로 구성되어 있고 국왕을 수행한 인원들이 머물 수 있는 많은 행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행궁(行宮)은 국왕이 궁궐을 떠나 전국 각지를 순행할 때 임시로 머무는 거처를 말하며 행재소(行在所)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국왕은 궁궐 밖에 머무는 경우는 지방의 민정을 살피기 위해 순행하는 경우와 전란을 피해 머무는 경우, 능행이나 신변치료를 위히 명승지를 찾는 경우 등이 있었다. 조선왕조 5백년 동안 국왕이 궁궐을 떠나 임시로 머물렀던 곳은 많았겠지만, 행궁으로 규모를 갖추었던 곳으로는 세종이 치료를 위치 찾았던 온양 행궁, 병자호란 이후 국방상의 이유로 설치했던 강화와 남산산성의 행궁, 정조가 능행과 정치적인 이유로 세웠던 화성행궁이 잘 알려져 있다.

남한산성행궁은 산성도시 안에서 가장 중심의 높은 지대에 자리 잡았는데, 동.서로에서 직접 바라볼 수 없도록 낮은 언덕으로 가려진 곳에 위치했다.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높낮이 차이를 둔 두 영역인 상궐과 하궐로 구분되고, 뒤에 좌전(종묘)과 우실(사직단)을 설치했다. 이는 전국의 행궁 중에서 유일한 사례로 남한산서의 국가와 왕실의 보장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행궁 뒤 언덕에는 숙동대 재덕당이 세워졌고, 하궐 앞에는 정조 때 한남루라는 외삼문의 누문이 세워졌다. 남한산성 행궁 안에는 광주유수의 집무처가 마련되어 있었다. 따라서 남한산성행궁은 국왕의 임시 거처이기도 하면서 광주부의 행정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출처:경기도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 모형. 남한산성은 좌전(종묘)과 우실(사직)을 갖춘 유일한 행궁이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 행궁 정문인 한남루(漢南樓). 행궁은 원래 지역을 다스리던 관아에 국왕이 거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곳이다. 남한산성 행궁 정문 또한 일반적인 관아 아문(衙門)과 마찬가지로 문루(門樓) 형태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 행궁은 경사진 지형에 축대를 쌓아서 조성해 놓고 있다. 문루인 한남루를 들어서면 행궁의 출입문이라 할 수 있는 외삼문과 주위에 행각들을 볼 수 있다. 남한산성 행궁은 비상시 국왕이 피신할 것을 전제로 지은 행궁이기때문에 많은 수행인원이 머물 수 있도록 행각에 많은 방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중문을 들어서면 넓지 않은 마당이 있고, 양쪽에 실무관원들이 머물 수 있는 행각이 마련되어 있다. 중문을 지나면 광주유수가 일상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인 하궐로 들어가게 된다.

OLYMPUS DIGITAL CAMERA중문 양쪽에 마련된 행각. 비상시 국왕을 수행하는 많은 인원이 머물 수 있도록 많은 방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 행궁의 중심건물인 하궐 외행전 건물이다. 앞면 7칸, 옆면 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상당히 큰 건물이다. 다른 행궁의 예로 볼 때 평상시에는 광주부 유수의 집무공간인 동헌의 역할을 하며, 국왕이 행궁에 머물때에는 국왕이 집무를 보는 정전과 편전의 기능을 하는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동헌 마당에 해당하는 외행전 마당. 다른 관아 동헌과는 달리 중문에서 외행전까지 국왕이 지나가는 삼도가 깔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외행전 마당 한쪽편에 위치한 창고 건물.

OLYMPUS DIGITAL CAMERA창고 윗쪽에는 길게 늘어선 행각 건물이 있다. 평상시에는 광주유수부 관리들의 집무공간으로, 비상시에는 국왕을 호위하는 관리들이 머문는 공간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국왕과 가족들이 머무는 침전 역할을 하는 내행전. 얖면 7칸의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 양쪽에 2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일반적인 관아에는 없는 행궁에서만 볼 수 있는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청마루로 된 가운데 3칸은 국왕이 머물면서 손님을 맞거나 집무를 볼 수 있는 공간으로 보인다. 어좌와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일월오봉도 병풍이 놓여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상궐 내행전 왼쪽으로는 국왕을 수행하는 인원이 머무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별도의 출입문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내행전 오른편에도 수행인원들이 머무는 공간이 있다. 행각으로 보이는 건물로 직급이 낮은 내시 등의 수행원이 머무는 공간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내행전 서쪽편 담장 너머로는 광주부유수의 집무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좌승당이 있다. 건물은 앞면 6칸, 옆면3칸으로 큰 규모의 건물이다. 광주유수는 동헌인 외행전 대신 이 건물을 일상적인 업무공간으로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좌승당 아래쪽으로는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건물인 일장각이 있다. 일반적인 관아 건물의 성격으로 볼 때 광주유수가 머무는 숙소인 내아에 해당되는 건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일장각은 앞면 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살림집으로는 그 규모가 작은 편이다. 광주유수는 정2품의 고위 관직으로 나이가 많은 편이어서 단심 부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내아의 규모 또한 작은 편이다. 마찬가지로 각도 감영 관아의 내아 또한 건물규모가 작은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일장각 대청마루. 광주유수가 머물던 공간임을 보여주는 가구배치를 하고 있다. 광주유수는 정2품의 상당히 직위가 높은 인물로 대체로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 머물렀던 것으로 생각된다.

OLYMPUS DIGITAL CAMERA일장각 온돌방.

OLYMPUS DIGITAL CAMERA재덕당 뒷편 언덕에 세워진 정자. 국왕을 위한 시설이라기보다는 광주유수가 손님을 접견하기 위해 세운 작은 정자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행궁 바깥쪽에 종묘와 사직에 해당하는 좌전과 우실이 있다.

남한산성을 거쳐 간 관리들
1559년부터 1899년까지 광주목사.광주부윤.광주유수를 역임한 관리는 379명이다. 이 중 광주부의 읍치가 남한산성 내에 옮겨진 인조 2년부터가 남한산성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는 관리들이라 할 수 있다. 이를 감안하면 남한산성을 거친 조선시대 관리는 총 266명이 된다. 조선시대 광주지역은 여러 차례 읍격의 오름내림에 따라 파견하는 관리의 품계에 차이가 있었다. 목사에서 부윤, 유수로 변경되었다가 다시 부윤으로 바뀌는 변화가 계속되었다. 남한산성 관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직책이 수어사이다. 초기의 수어청은 한성부 북부 진장방에 본청을 두어 수어사를 한성부윤이 겸직하도록 했다. 그리고 현장인 남한산성은 광주부윤을 부사로 임명해 운영하다가 이후 운영의 효율화를 위해 1795년(정조19)에 본청을 완전히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광주부윤을 강주유수로 승격시켜 수어사를 겸하게 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 남문 앞에 모아 놓은 광주부를 거쳐간 관리들의 공덕비. 광주목사, 광주부윤, 광주유수는 정2품에서 정3품에 이르는 장.차관급에 해당하는 높은 관직으로 당시 한양에서 고관을 지내던 인물들이 잠시 외관직을 맡았던 곳이기도 하다.

OLYMPUS DIGITAL CAMERA광주목사와 광주유수 등을 지낸 임연, 조태채, 조관빈의 초상.

OLYMPUS DIGITAL CAMERA중정남한지. 헌종 10년(1844)에 광주유수로 부임한 홍경모가 정조 3년(1779)에 남한수어사 서명응이 하명을 받고 편찬한 ‘남한지’에 광주부의 구지를 참작하고 관계기사를 채록하여 완성한 읍지이다.

연무관(演武館), 군사훈련을 지휘하던 곳

남한산성에는 별도의 군사조직인 수어청(守禦廳)이 정조대에 남한산성으로 옮겨지면서 광주유수가 수어사(守禦使)를 겸하게 하였다. 남한산성내 동쪽편에 위치한 행궁은 광주부 수장으로서 행정의 중심지였다면 산성내 중앙도로 북쪽편에 위치한 연무관과 주위 건물들은 군사조직인 수어청 산하 기관들이 들어서 있었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남한산성내에는 평상시 약 천명 정도의 군사가 상주하였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승병들을 위한 사찰이 7개, 산성내 마을에는 약 1천호 4천명의 주민이 상주하였다.

연무관은 군사들의 훈련을 위하여 건립한 곳으로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연무당이라 부르던 것을 숙종 때, 수어사 김좌명으로 하여금 다시 짓게 하고 연병관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정조 때에는 수어영이라 개칭하였으나 그 뒤에도 통칭 연병관 또는 연무관이라 부르고 있다. 연무관 규모는 약 330m²로 규모가 크고 육중하며 높은 기단 위에 자리잡고 있어 멀리서도 그 자태를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건물내부 가운데 있는 대들보에는 전,후면에 용을 그렸고 측면쪽 대들보에는 봉황을 그려 넣은 것이 특이하다. <출처:광주시청>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 내 관아건물 중 현재까지 그 원형이 남아 있는 연무관. 원래 연무당이라 부르던 것을 숙종대 연병관, 정조대에는 수어영이라 개칭했으나 통칭 연무관이라 부른다.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높은 기단 위에 건물이 세워져 있어서 웅장해 보인다. 수원 화성 연무대의 경우는 사방이 뚫려 있는 정자와 같은 형식을 하고 있으나, 남한산성은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내부는 열린 공간이지만, 삼면에 판문을 달아서 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연무관 현판

OLYMPUS DIGITAL CAMERA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

OLYMPUS DIGITAL CAMERA연무관 내부는 칸막이를 하고 온돌을 설치한 일반적인 관아 건물인 동헌과는 달리 내부가 넓은 마루로 되어 있다. 지붕을 받치는 들보에는 용이 그려져 있다. 연무관은 군사조직인 수어청 수사가 병사들의 훈련을 지휘하는 공간으로 수어사를 겸직했던 광주유수 근무처가 행궁내에 있었기때문에 이 곳에서 관리들이 상근했던 곳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수원화성의 연무대와 마찬가지로 군사훈련 지휘소라고 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 연무관은 수원화성 연무대와 달리 바람을 막기 위해 양쪽에 판문을 달아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 연무관

OLYMPUS DIGITAL CAMERA연무관 들어오는 길에는 남한산성과 그 역사를 같이한 오래된 고목을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연무관 동쪽편에는 산성초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보통 옛 관아가 있던 곳에서는 객사가 초등학교로 변한 경우가 많은데 원래 이 곳에는 수어청 소속 관아 건물들이 들어서 있던 곳이다. 남한산성 옛 지도에는 이곳을 영고(營庫)라 표시되어 있으며, 여러 건물들이 그려져 있는데, 아마도 무기고를 비롯하여 군인들이 근무하던 장소가 아닌가 생각된다.

OLYMPUS DIGITAL CAMERA연무관 올라가는 길.

수어청의 설치와 산성수비
조선후기의 군사제도는 훈련도감, 어영청, 총융청, 금위영, 수어청으로 구성된 5군영 체제였는데 이 중 수어청은 남한산성 일대의 방어를 위해 설치된 중앙군영이었다. 처음에는 경기병사 겸 총융사가 관활했으나 병자호란 이후부터는 군영으로 독립해 수어사를 두었다. 초기의 수어청은 한성부 북부 진장방에 본청을 두고 수어사를 한성부윤이 겸직하도록 했다. 이후 운영의 효율화를 위해 정조 19년(1795)에 본청을 완전히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광주부윤을 광주유수로 승격시켜 수어사를 겸하게 함으로써 군사지휘소 역할을 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연무관 상량문. 영조 39년(1763)에 연무관을 중수하면서 쓴 것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연무관 도리. 들보에 직각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 둘러 얹혀서 연직하중 또는 수평하중을 받는 가로재이다. 숙종 28년(1702) 3월 30일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출처:경기도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등단록. 조선후기 각 군영대장의 의망,수점단자를 모은 책으로 편자는 미상이다. 이 등단록은 총 3책의 등단록 중 제2책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장용대장, 총위대장, 수어사 등이 실려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수어영교리노졸수효기. 남한산성을 방어하던 수어청 광주부 소속의 군대 편성과 병력을 볼 수 있는 문서이다. 장교로부터 잡색군까지 직능별 병종과 인원이 앞뒤로 적혀 있고, 15겹으로 접게 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고아주부 소속 병력은 총 736명으로 장교 172명, 서리청직 121명, 군졸 238명, 잡색군 142명, 승군 63명으로 편성되어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이위정기 탁본첩, 1816년. 이위정은 순조 중엽(1815)에 남한산성에 세워졌던 사정이고, 기문을 쓴 사람은 김정희이다. 내용은 이렇다 “내가 여기에서 활쏘기를 하는 것은 호시를 일삼아 길이 힘쓰고자 함이 아니라 성안 사람들의 마음속에 인의와 충용이 길이 날로 일어났으면 하는 큰 바람에서이니 어찌 천하가 위복하지 않겠는가” <출처:경기도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이위정기 편액, 1816년

침괘정(枕戈亭), 무기제작소로 알려진 관아 건물

광주부가 있었던 광주부에는 행궁을 비롯하여 많은 관청들과 성벽을 관리하던 사찰과 큰 마을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없지고 관아건물로는 군사훈련을 지휘하던 연무당과 연못인 지수당, 무기제작소로 알려져 있지만 관아 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침괘정 정도만이 남아 있다. 조선 영조대에 지어진 침괘정은 문헌상 기록으로 무기제작소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건물의 형태는 온돌방과 마루바, 회랑 역할을 하는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는 집무실로 사용했던 관아 건물로 보인다. 아마도 부근에 무기를 제작하는 공방과 창고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남한산성 행궁 앞 광장에는 산성내에 시간을 알려주는 종각이 설치되어 있는데, 원래 이곳에는 국보 280호로 지정된 천흥사 종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침괘정
침괘정은 무기제작소라 알려져 왔으나 온돌과 마루방, 회랑처럼 된 툇마루 등 건물 구조로 보아 집무실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건립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주변에 있던 무기창고를 명나라 사신 정룡이 ‘총융무고’라 이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영조 27년(1751) 광주유수 이기진이 고쳐 짓고 ‘枕戈亭’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침과정’을 ‘침괘정’이라 부르는 까닭은 명확하지 않다. 무기제작소와 무기창고는 쵬괘정 부근에 별도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광주시청>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내 광주부 관아 역항를 했던 남한산성 행궁 앞 언덕에 위치한 침괘정. 무기제작소로 알려져 있으나, 상당히 큰 규모의 관아 건물로 사무실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침괘정은 앞면 7칸, 옆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일반 주택과는 달리 앞과 뒤가 똑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오른쪽 5칸은 회랑형식으로 툇마루를 앞뒤로 둘렀다.

OLYMPUS DIGITAL CAMERA가운데 3칸은 앞.뒤로 툇마루를 둘러싸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툇마루.

삶 그리고 문화
조선시대 남한산성 내에는 큰 길가 양 옆으로 초가로 지은 상점들이 연이어 들어섰고, 일반 민가들은 행궁보다 낮은 저지대인 비교적 평지에 밀집되어 도시적 마을을 형성했다. 주거지는 중앙의 동서로를 기준으로 남동과 북동으로 나뉘어졌다.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여지도서’의 통계를 보면 산성내 남동에 614호로 남자 1,119명 여자 1,055명, 북동에 462호에 남자 1,009명 여자 853명이 살아서 대략 6:4의 비율로, 개천이 흘러 생활여건이 상대적으로 나은 남동의 규모가 더 컸다고 보인다. 남한산성에서는 다양한 문화가 꽃피웠다. 군역동원을 위해 세운 사찰을 중심으로 불교문화가 형성되었으며,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고 무속신앙이 성행하였다. 또한 남한산성에는 숭렬전 제례와 도당굿 등 무형문화와 각종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침괘정이 있는 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한산성 광장, 행궁 앞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한산성 마을.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 행궁과 함께 복원된 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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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국보 280호로 지정된 천흥사 종이 걸려있었는데 지금은 중앙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고, 복제품을 종각에 걸어 놓고 있다. 천흥사종이라고 불리는 이종은 천안 성거산 천흥사에 있던 범종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남한산성에서 시간을 알리는 데 사용된 종이다. 서울의 보신각 종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행궁 앞 광장에서 남한산성 동문으로 연결되는 큰 길.

OLYMPUS DIGITAL CAMERA연무관 입구는 오일장이 열리던 장터였다한다. 조선말까지 성내에 읍지소가 있었고 민가가 일천호나 되는 큰 마을이었다. 주민들간에는 지금도 이곳을 장터라 부른다.

OLYMPUS DIGITAL CAMERA호패. 조선후기에 만드어져 남한산성에서 사용됐던 호패 세점이다. 호패는 16세 이상의 남자는 누구나 차고 다녀야 했는데, 인구수를 파악하고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호패로 보아 이만영은 경신년(1800)에 태어나서 남한산성 내 남부에 살았고, 이병희는 정해년(1827)에 태어났으며 이병희도 정해년(1827)에 태어났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지수당(池水堂)과 비상시 대비 물을 저장했던 연못

산성내에는 비상시에 대비하여 3개의 큰 연못이 파고 물을 저장해 두고 있다. 원래의 연못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매몰되거나 훼손되어 현재는 2의 연못이 남아 있다. 연못에는 1672년에 부윤 이세화가 세운 정자인 지수당이 복원되어 있으며 1804년 유수 김재찬이 지은 관어정은 그 터만 남아 있다. 남한산성 내에는 조선시대 차관급에 해당하는 군사조직인 수어사를 겸했던 정2품의 광주유수가 근무했던 행궁과 관아가 있었고, 연못의 정자는 관아에서 연회를 베풀던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남한산성내 연못과 정자는 조경과 연회를 위한 공간이기도 했지만, 군사적인 목적의 저수지 기능이 중요시 되었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지수당
지수당은 현종 13년(1672)에 부윤 이세화가 건립한 정자로 건립 당시에는 정자를 중심으로 앞뒤에 3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만 남아 있다. 정자의 동쪽에는 부윤 이세화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고 제3연못지로 추정되는 지역은 현재 논으로 바뀌어 있다. 정자의 남쪽에는 서에서 동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정자 옆의 연못은 ‘ㄷ’자형으로 파서 연못이 정자를 둘러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으나 을축년 대홍수(1925) 때 매몰된 것을 근래에 고증을 통하여 복원한 것이다. <출처:광주시청>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내 물을 저장했던 3개의 연못 중 가운데 연못에 세워진 작은 정자인 지수당. 이 정자는 1672년에 처음 세워졌다가 1925년 홍수로 매몰된 것을 최근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지수당은 앞면 3칸, 옆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정자이다. 광주부 유수가 차관급에 해당하는 종2품의 높은 관직에 있었지만, 군사방어상 중요했던 남한산성의 입지를 말해주듯이 그 규모는 크지 않은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지수당 내부와 현판.

OLYMPUS DIGITAL CAMERA지수당 앞 연못. 풍류를 즐기는 정원의 성격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산성내 물을 저장하는 공간이라는 기능적 측면이 강한 연못이라서 장식성을 배제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에서 물을 저장하는 공간으로서 주 역할을 했던 곳은 서쪽편 연못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지수당이 있는 동쪽편 연못에 비해서 그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쪽편 연못은 산성내 물을 저장하는 중요한 연못으로 그 규모가 큰 편이다. 연못한 가운데에는 작은 섬을 만들어 놓고 있다. 방형(사각형)연못에 원형의 작은 섬을 두고 있는 도교사상이 반영된 연못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연못 동쪽편에는 1804년 유수 김재찬이 지은 관어정(觀魚亭)이 있었다. 3개의 연못 중에서 서편 소도에 있는 정자로 지수당과 마주하고 있으며 소선을 두어 왕래하였다. 제갈량이 못에 임하여 방책을 경정하며, 적을 헤아렸다는 데서 그 이름을 취하였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연못 동쪽으로 흘러가는 개천, 산성 동쪽편 좌익문을 통해 광주지역으로 흘러내려 간다.

OLYMPUS DIGITAL CAMERA남한산성 축성과 방어를 위해 동원한 승병들을 위해 세운 7개 사찰 중 하나인 망월사.

OLYMPUS DIGITAL CAMERA남한가람지, 1931년. 남한지를 중심으로 남한산성의 사찰과 승군의 제도를 정리한 책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경기도 하남시 춘궁동에 위치한 광주향교. 조선숙종대에 지어진 건물로 경기도 지역에서는 큰 규모를 하고 있는 향교이다. 지금은 외삼문을 보수하고 있어서 그런지 약간은 혼란스러운 분위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