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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박물관 특별전, "헝가리왕실의 보물"] 전쟁의 영광, 17~19세기 헝가리 왕실과 귀족의 무기

전시의 4번째 주제는 ‘전쟁의 영광, 17~19세기 헝가리 왕실과 귀족의 무기’이다. 헝가리는 서유럽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국가이다. 헝가리는 동방 유목민들과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헝가리인들 또한 우랄산맥 부근에서 우크라이나 대평원에서 거쳐 이주해온 민족이다. 9세기경에 현재의 지역에 정착하였으며 10세기에 봉건국가를 형성하고 카톨릭을 국교로 받아들였다. 13세기에는 몽골의 침입으로 국토가 황폐해졌으며, 16세기에는 모하치전투에서 오스만투르크에 패한 이후 서부와 북부는 합스부르크가에, 동부 트란실바니아 지방은 오스만 투르크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헝가리는 동방에서 서유럽으로 들어오는 관문에 위치하고 있어 동방 유목민들 끊임없는 투쟁 역사를 가지고 있다. 훈족, 몽골, 오스만투르크 등 세계사를 뒤흔들었던 동방 유목민족들이 헝가리를 공략하였다. 이들 유목민들의 영향을 받아 헝가리는 유럽에서는 경기병이 빠른 시기에 받아들여졌으며, 여러 차례의 전쟁과정에서 큰 명성을 떨쳤다. 30년 전쟁에 참전한 트란실바니아공국의 경기병들은 합스부르크왕가와의 전투에 크게 명성을 떨쳤는데, 이 경기병들을 ‘후사르(Huszair)’라 부른다. 헝가리 경기병들이 사용한 초승달모양의 칼인 ‘사브르(Sabre)’는 18세기 이후 유럽 각지에 퍼져 유행했으며, 올림픽 펜싱 종목에도 사브레가 포함되어 있다. 합스부르크의 마리라테레지아(Maria Theresia)는 왕위계승전쟁에서 헝가리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승리하였으며, 헝가리 경기병들로 근위대를 구성하였다. 전시에서는 헝가리 귀족들이 사용했던 칼인 샤브르를 비롯하여 귀족들이 사용했던 마구(馬具)와 사냥용 총기류 등을 전시하고 있다.

16~19세기 헝가리 전쟁사

  • 1526년 모하치(Mohacsi) 전투: 오스만 제국에 패배
  • 1541년 트란실바니아 공국, 오스만 헝가리, 합스부르크헝가리로 3분할
  • 1664년 생고타르(Szehntgolthard)전투: 오스만 제국에 승리
  • 1683년 빈전투: 오스만 제국의 유럽침공 저지
  • 1686년 합스부르크-폴란드 연합군의 부더, 페슈트 탈환
  • 1699년 카르로비츠(Carlowitz)조약: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시작
  • 1703년 라코치페렌츠(Ralcoczi Ferenc)의 독립전쟁
  • 1788년 헝가리 귀족의 독립투쟁
  • 1848년 헝가리 독립 혁명: 합스부르크에 대항한 국민군 조직
  • 1867년 대타협(Ausgleich)체결: 헝가리 자치권 향상

OLYMPUS DIGITAL CAMERA16~19세기 헝가리 귀족들이 사용했던 칼과 갑옷, 장식적인 요소를 많이 갖추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기병의 칼(18세기 중엽, 위쪽), 도금 장식 검(17세기 중엽, 아래쪽),

헝가리 경기병은  ’후사르(Huszair)’라 불리며 30년전쟁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전쟁에 명성이 유럽전체에 퍼졌다. 헝가리 경기병이 사용한 초승달모양의 칼인 사브르(Sabre)는 18세기 이후 유럽각지에서 크게 유행했다. 유럽의 기마병들은 전통적으로 무거운 무기로 중무장하여 경기병에 비해 기동성이 떨어졌는데, 몽골의 비롯한 동방의 기병들은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 활과 가벼운 칼로 무장했다. 고구려의 고리자루칼 또한 가볍고 휴대하기 편한 기병용 무기이다.

경기병의 칼, 18세기 중엽, 헝가리 경기병의 샤브르로 넓은 곡선으로 된 칼날에는 해.달.별이, 자루 끝에는 헝가리의 수호 성인인 성모 마리아가 장식되어 있다. 칼집은 헝가리 경기병의 모습 등이 새겨진 은판으로 덮었다. 칼집의 맨 윗부분에 도금으로 처리된 팔드바리(Foldvary)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도금 장식 검, 17세기 중엽, 날이 넓은 검으로 자루에는 도금된 은장식에 터키석이 박혀 있다. 검집은 붉은 벨벳 바탕에 허리춤에 끈으로 매기 위한 두 개의 고리가 달려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도검 제작 과정이 장식된 칼(1816년, 왼쪽), 정교하게 장식한 칼(17세기 중엽, 오른쪽),

17~19세기에 만들어진 칼이다. 동양의 칼에 비해 장식성이 뛰어나다.

도검 제작 과정이 장식된 칼, 1816년, 샤브르의 칼날에 1816년 요제프 크라프트(Joseph Kraft)가 베스테르체바너(Beszterocebanya)의 공장에서 헝가리산 철광석으로 제작했다는 명문이 남아 있다. 강철로 제작된 칼집에는 광석을 캐는 인물, 소총, 헝가리 문장, 합스부르크 문장 등 8가지 모티브가장식되어 있다. 정교하게 장식한 칼, 17세기 중엽, 헝가리 특유의 사브르로 16세기 말 ~17세기 초에 활동했던 도검 장인 요한 분데스(Jahann Wundes)의 인장과 “KAMUTHI”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어, 1606년에 죽은 커무티벌라주(Kamuthy Balazs)를 위해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헝가리 왕의 모습이 장식된 칼, 1860년 경,

페르시아어와 조지아어 명문이 새겨진 사브르이다. 십자형 칼날의 중앙에는 라코치 죄르지 2세(Rakoczi Gyorgy II), 칼자루에는 이슈트반 1세(Istvan I)와 후녀디 마차시(Junyadi Matyas), 칼집에는 아틸라(Attila)와 러요시 1세(Layos I) 등 헝가리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이 새겨져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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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갑옷과 투구.방패, 1630년경,

중무장한 중세 기사들이 사용했던 판금갑옷이다. 중장기병의 역할의 거의 없어진 17세기에 의식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합스부르크의 황제가 사용했던 의식용 갑주와 방패이다. 투구는 12개의 철판을 이어 만든 것으로 뒷면에는 장식 깃털을 꽂기 위한 홈이 있고, 목보호대가 리벳으로 연결되어 있다. 흉갑과 등판에는 넝쿨에 잎과 꽃이 달린 좌우대칭의 문양이 도금되었고, 그 아래에는 8개의 금속판을 접을 수 있게 연결한 넓적다리 가리개가 달려 있다. 방패는 끝이 뾰족한 타원형의 모양이며 검은색 표면에 아칸투스 잎과 넝쿨에 감싸져 있는 꽃이 도금되었다. 방패 중앙에는 12개의 뾰족한 끝이 있는 별모양의 장식단추와 큰 리본 장식 단추가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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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갑옷,17세기 중엽,

갑옷은 중장기병과 기사가 쇠퇴한 근대에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세 기사를 연상시키는 장식용 갑옷이다.

카로이(Karolyi) 가문의 장식용 사슬갑옷으로 은제 또는 은을 힙힌 청동고리를 무수히 엮어 만들었다. 갑옷에는 별, 태양, 달 모양의 장식이 부착되었고, 목걸이 중앙에는 날개를 편 독수리 장식이 매달려 있다. 갑옷의 아랫단은 날카로운 톱니 모양으로 마무리되었고 각 톱날에는 별모양의 장식용 단추가 달려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헬레르 페렌츠 백작의 칼, 1840년

소총과 화포가 보편화되면서 칼이 의장용으로 사용되었던 19세기에 만들어진 칼이다.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놓고 있다.

헝가리 군인들이 근위대 대장인 헬레르 페렌츠에게 선물로 증정한 은장식 사브르이다. 칼날에 근위병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손잡이 부분에는 헬레르 가문의 문장 장식이, 은으로 된 칼집에는 기병, 경기병, 용, 아칸투스 잎이 돋을새김으로 장식되어 있다. 헬르 페레츠는 옛 트란실바니아 귀족 가문 출신으로 1860년 기병대 대장에서 은퇴하였고, 대타협(Ausgleich)이 이루어진 1867년 왕의 경호대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후사르, 용맹한 헝가리의 경기병
헝가리가 세 개의 나라로 분활되어 있던 시기에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군주베틀렌 가보르(Bethlen Gabor, 1580~1629년)는 나라를 안정시키고 헝가리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신.구교간 갈등으로 발발한 30년 전쟁에 신교국의 일원으로 참전한 트란실바니아공국은 구교국을 대표하는 합스부르크에 대항한 자유 전쟁의 지도자 역할을 맡아 헝가리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자 하였다. 이 전쟁에서 군사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지략과 용맹으로 무장하여 전공을 드높인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경기병들은 ‘후사르(Huszair)’라는 이름으로 그 명성이 유럽 전체에 널리 퍼졌다. 이 헝가리의 경기병들이 사용한 독트한 모양의 사브르(Sabre)는 18세기 이후 유럽 각지로 퍼져 유행하였고, 헝가리의 구족들 역시 경기병들의 사브르를 본 떠 자신의 장식용 무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귀족들의 샤브르는 로코코 잎사귀문양, 전리품, 전투장면, 신화속의 인물들이나 서술적인 그림 등의 문양으로 장식되었다. 헝가리 경기병들은 마구를 세심하게 관리하였으며 내구성 향상과 용맹성의 과시를 위해 도금하거나 은박을 입혀 장식하기도 했다. 헝가리 경기병의 명성을 익히 잘 알고 있었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Maria Theresia)은 각국에 흩어져 있던 120명의 헝가리 경기병을 모아 근위대를 구성하여 항상 호위하도록 하였다. 이 근위대는 옛 헝가리 경기병들의 제복과 칼을 모방한 복식을 착용하였는데, 이때 사용한 칼의 은판에는 근위대의 문장을 새기고 칼집은 붉은 벨벳을 감싸 장식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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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경기병, 하인리히 파핀, 1820년경,

헝가리는 우크라이나 평원과 흑해 일대에서 이동해오는 유목민과의 끊임없는 투쟁 역사를 가지고 있다. 몽골을 비롯한 동방 유목민들의 영향을 받아 유럽에서는 경기병이 빠른 시기에 받아들여졌으며, 여러 차례의 전쟁과정에서 큰 명성을 떨쳤다.

빈 출신 석판화가인 하인리히 파핀(Heinrich Papin)이 제작한 헝가리 경기병 대장을 표현한 작품이다. 헝가리 경기병 부대 ‘후사르(Huszar)’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동안 매우 유명해져 다른 유럽국가들도 후사르의 뛰어난 전술을 배웠으며 제복마저 본보기가 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에스테르하지 가문의 가방, 18세기말,

에스테르하지(Esterhazy) 가문 출신의 귀족이 소유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소형 가죽 가방으로 왕관과 헝가리ㅣ 문장을 돋을새김한 은판이 부착되어 있고, 그 주위로 금사와 진주로 화려하게 수놓은 식물 문양이 배치되었다. 사브르와 함께 착용하는 기병용가방이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마구, 17세기, 가벼운 무장을 하고 있는 경기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말을 타거나 부릴 때 쓰는 마구로 안장, 굴레와 가슴걸이, 등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말은 전쟁이나 사냥할 때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중요한 이동 수단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마구 역시 꼼꼼하게 관리했으며 귀한 판금이나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기도 하였다. 안장은 도금된 다양한 문양의 은판과 둥근 터키석으로 장식되었다. 붉은 가죽으로 된 굴레와 가슴장식에는 에메랄드, 루비, 터키석으로 장식된 은판과 도금판이 덮여 있고, 굴레와 가슴걸이가 나뉘는 부분에는 장미문양이 조각되었다. 끈 아래로 드리워진 긴 술 장식은 이 마구의 독특한 특징이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합스부르크 왕가의 문장으로 장식한 말편자(17세기 초,왼쪽), 트란실바니아식 등자(17세기 전반,오른쪽)

합스부르크 왕가의 문장으로 장식한 말편자, 17세기 초, 말발굽을 보호하기 위하여 발굽바닥에 장착하는 편자이다. 합스부르크의 문장과 다양한 장식이 화려하게 새겨져 있으며 가운데 부분은 개폐가 가능하다. 양쪽 날개 부분에는 용과 싸우는 성 게오르기우스(Saint Georgius)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트란실바니아식 등자, 17세기 전반., 등자는 말을 탈 때 두발로 밟고 디디는 것으로 대개 안장에 달아서 양쪽 옆구리로 늘어뜨린다. 터키풍으로 주조된 이 등자는 고리 부분과 측면에는 도금 처리된 넝쿨 문양 장식이, 바깥쪽 면에는 장미 문양의 리본 프리임 안에 터키석이 박혀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말안장 깔개, 17세기 중엽,

말안장 아래에 늘어뜨리는 천으로 네 모퉁이에 꽃나무가 자수로 장식되었다. 꽃나무의 잎이 달린 큰 줄기에는 카네이션이, 구불구불한 가지의 끝에는 석류가 달려 있다. 이러한 장식은 군주를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사냥용 권총, 18세기 후반, 화려하게 장식된 사냥용 권총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상아탄약통, 18세기 중엽,

상아로 만든 탄약통으로 사슴, 양 등의 동물이 장식되었다. 둘로 분리하여 탄약을 보충하고, 양 머리가 있는 입구 쪽을 총에 대어 장전하여 사용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도끼가 달린 총 (토포르, Topor), 17세기 후반,

도끼와 대구경 총이 결합된 무기이다. 슬레지엔(Schlesien)에서 제작된 것으로 도끼날에는 보병의 모습이 새겨져 있고, 나무 자루에는 동물 뼈와 자개로 사슴을 사냥하는 장면이 상감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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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용 칼과 허리띠, 19세기 전반,

사냥용 칼로 허리띠와 칼집이 함께 남아 있다. 칼 손잡이는 청동에 금도금을 하였고 아칸투스 잎과 개 문양이 장식되었다. 검은 가죽으로 된 칼집에는 포도넝쿨이 새겨진 도금판이 달려 있고 벨트는 금으로 장식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사냥용 총(18세기 후반, 위쪽). 쌍발 사냥용 총(1840년경),루돌프 황태자의 사냥용 총(1870년경, 가운데),

소총이 개발된 후 유럽에서 많은 전쟁을 거치면서 발달된 무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시기 조선에서는 화승총을 사용하고 있었다.

사냥용 총, 18세기 후반, 도금 장식한 사냥용 총이다. 쌍발 사냥용 총, 1840년경, 총구가 2개인 쌍발총으로 자루는 금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고 총신은 강철로 제작항렸다. 2연발이 가능하도록 제작된 이 총은 19세기 중반부터 왕실과 귀족들의 사냥용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루돌프 황태자의 사냥용 총, 1870년경, 프란츠 요제프1세(Franz Joseph I)의 외아들인 루돌프 황태자(Rudolf)가 사용했던 사냥용 총이다. 루돌프 황태자는 황제의 적장자로 황휘계승 1순이였으나 보수적이고 엄격한 합스부르크 왕가에 적응하지 못했으며, 결국 1889년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들소 사냥용 총, 17세기 후반,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소총으로 당시 헝가리 귀족들의 화려한 취향을 볼 수 있다.

들소를 사냥할 때 쓰는 총으로 8각형 총신과 나무자루가 결합되어 있다. 나무자루에는 동물뼈로 넝쿨, 석류 문양 등이 상감되었으며, 개머리판에는 넝쿨과 과일문양, 사슴과 토끼가 장식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사냥용총, 1670년,

8각형의 총신을 갖춘 사냥용 소총이다. 방아쇠 부분에는 총을 든 2명의 남자와 성의 모습을, 나무 자루에는 동물의 뼈와 자개, 은실 등으로 사냥 장면을 표현했다. 특히 방아쇠울에 남편의 엉덩이를 때리는 여자의 모습이 흥미롭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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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 사냥용 창, 19세기,

곰 사냥에 쓰이는 나뭇잎 모양의 창으로 니켈로 만들어졌다. 창의 자루에는 사슴뿔로 만들어진 윙(wing)이 부착되었고, 가죽 끈을 서로 교차시켜 감아 손이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했다. 창으로만 곰을 사냥하는 것은 왕실과 귀족들의 용맹함을 과시하는 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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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2세의 어린 시절 연습용 총(18세기 중엽), 아동용 칼(18세기 후반)

요제프 2세의 어린 시절 연습용 총, 18세기 중엽, 요제프2세(Joseph II, 1741~1790)가 어린 시절 연습용으로 사용했던 총이다. 어린 병사를 위한 연습용 총은 1754년에 제식화되었다. 총신은 단순한 장식의 나무자루와 동판으로 결합되었다. 후에 요제프 2세의 교관이었던 버챠니 카로이 요제프 백작(Batthyany Karoly Jozsef)에게 증정되었다. 아동용 칼, 18세기 후반, 은에 도금한 장식이 있는 아동용 사브르이며 죄르(Gyor)지방의 금세공업자가 제작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칼날에는 금색 바탕에 머리가 둘인 왕관을 쓴 독수리가, 칼자루에는 인물이 조각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철퇴(17세기 중엽, 왼쪽), 철퇴(17세기 전반, 오른쪽)

철퇴, 17세기 중엽, 귀족들이 사용하던 철퇴로 머리부분에는 9개의 금동판이 결합되었고 그 아래에는 비늘문양이 새겨져 있다. 손잡이의 중간 부분은 검은 염소 가죽으로 감쌌으며, 붉은 실과 은실로 된 2개의 술이 달려 있다. 철퇴, 17세기 전반, 귀족들이 사용하던 철퇴로 머리 부분에는 리본과 데이지꽃으로 된 프레임 안에 큰 터키석이 박혀 있다. 손잡이 부분은 은으로 주조되었고 표면에는 아라베스크 문양과 상어 가죽 문양에 준보석들이 박혀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전쟁의 영광, 17~19세기 헝가리 왕실과 귀족의 무기
국내외의 전란이 잦았던 17~19세기 헝가리의 왕과 귀족들은 전쟁에서 승리를 기원하고, 용맹함과 부를 과시하기 위해서 몸에 항상 무기를 장식하고 다녔다. 이러한 무기들은 대부분 진귀한 보석으로 꾸며졌는데, 터키석이 가장 유행했고 왕실이나 부유한 가문에서는 루비, 에머랄드, 다이아몬드로 장식하기도 했다. 휘어진 칼날이 특징인 샤브르(Sabre)는 17~19세기 헝가리의 전쟁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무기였다. 왕실이나 귀족의 아이들 역시 어릴 때부터 장남감 칼이나 어린이용 갑옷을 착용하도록 교육받았다. 1896년 헝가리 건국 1000주년을 맞아 전국적으로 기념행사가진행되었는데, 이때 헝가리 전통 의상과 함께 샤브르가 대규모로 생산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오랜 전쟁의 역사에 걸맞게 갑옷도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가장 일반적인것은 작은 고리를 연결하여 만든 쇠사슬 갑옷이며 철제갑옷과 폴란드에서 유래한 동제 갑옷도 착용하였다. 왕실과 귀족들의 갑옷은 모두 다양한 크기의 단추와 보석, 금박 꽃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헝가리 왕실과 귀족들은 다양한 화약무기도 사용하였는데, 자개와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18세기에는 권총과 사냥용 소총이 가장 유행하였으며, 사냥용 단도와 함께 착용되었다. 19세기에도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서 사냥의 인기는 계속되어 귀금속과 상아로 장식된 쌍발 소총을 주로 사용하였다. 또한 창 하나로만 곰을 사냥하는 것이 크게 유행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위험한 사냥은 진정한 남자로서의 능력과 귀족의 용맹함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고궁박물관 특별전, "헝가리 왕실의 보물"] 헝가리 귀족의 복식, 화려한 일상생활

전시회 두번째 주제는 ‘헝가리 귀족의 복식’이다. 헝가리 복식문화는 귀족들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르네상스 시기 유럽 직물산업의 발전과 함께 다양한 직물들과 재료들이 헝가리 귀족들의 복식에 사용되었다. 17세에는 평민들이 귀족의 복식을 모방하자 사치를 금지하는 규제가 실시되기도 하였다. 합스부르크 왕가 통치 시기에는 독일 복식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에 대한 반발로 기존 헝가리 농민들의 전통복식을 모방하기도 하였다.  특별전에 전시된 복식들은 합스부르크 왕가 통치시기인 18~19세기에 사용되었던 헝가리 귀족들의 복식을 전시하고 있다. 이들 복식들은 독일의 영향을 받은 갓으로 보이며, 전형적인 유럽 귀족 복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헝가리적인 요소가 일부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헝가리 왕실의 보물”의 두번째 주제는 ‘헝가리 귀족’의 복식이다. 헝가리의 귀족들을 중심으로 한 복식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헝가리 여성의 복식
헝가리 여성 복식의 주요 요소들은 16세기에 완성되었다. 유럽 상류층의 영향을 받은 헝가리 귀족 여성들은 화려한 자수나 구슬로 장식한 주름소매의 셔츠, 레이스나 벨벳테두리가 있는 긴주름치마, 코르셋, 화려하게 장식된 몸에 딱 붙는 보디스(Bodice), 자수와 레이스로 꾸며진 앞치마, 여성용 외투, 망토, 드레스 등 상류층의 권위에 맞도록 호화로운 장식과 부풀리고 과장된 복식을 선호하였다. 18~19세기 헝가리 귀족 여성들의 복식에서는 로맨틱 스타일의 영향이 나타난다. 이 시기 새롭게 유행한 귀족풍 의상은 목선을 옆으로 퍼지게 하여 어깨를 많이 드러내고 소매의 윗부분을 부풀리고 허리는 더욱 가늘게 조였으며, 스커트를 버팀대로 부풀린 형태였다. 여기에 주름이나 레이스장식을 통해 화려하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헝가리 귀족 여성들의 복식에서 가장 중시된 것은 색감과 장식의 조화였다. 헝가리 귀족 여성들은 다양한 색상의 옷을 즐겨 입었으며 비단, 벨벳 등의 옷감을 선호하였다. 그리고 금실과 비단장식자수, 금단추, 레이스 등으로 옷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때문에 비슷한 형태의 옷이라도 귀족 여성의 옷은 평민 여성의 옷에 비해 훨씬 더 장식적이고 화려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헝가리 여성의 연회복,

동화속에 많이 등장하는 전형적인 19세기 유럽의 연회식 복장이다. 대관식 연회에 입었던 것으로 당대 귀족들이 입었던 최고 수준의 연회복이라 할 수 있다.

1867년 머일나트 죄르지(Maijlith Gyorgy, 1786~1861년) 백작의 부인인 슈테파니아 프란다우(Stefania Prandau)가 1867년 프란츠 요제프1세(Franz Jeseph I)의 대관식에서 입은 연회복이다. 코르셋 스타일의 블라우스, 치마, 베일, 앞치마로 구성되어 있다. 1867년 대관식 이후, 백작부인의 후손이 1896년 헝가리 민족 정착 천년맞이 기념행사에서 이 드레스를 입었다. 헝가리 귀족들은 전통적인 헝가리의 의상을 입거나, 그 옷의 모티브를 이용해서 새 옷을 제작.주문하는 것을 즐겼다. 정장을 입을 때에는 장신구로 펜던트를 부착하기도 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다이아몬드로 장식한 펜던트(17세기초), 꽃모양 펜던트(17세기 중엽). 

꽃모양을 하고 있는 화려한 장식이다. 조선시대 왕실이나 상류층 여인들이 사용했던 것과 유사하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자들의 취양은 비슷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인어모양 펜던트(17세기초), 머리장식(17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은제 머리꽂이, 1748년

OLYMPUS DIGITAL CAMERA다이아몬드로 장식한 허리띠, 18세기 후반.

OLYMPUS DIGITAL CAMERA허리띠, 18세기 전반.

상당히 화려하게 꾸며 놓은 허리띠이다. 16세기 이후 평민들이 귀족들의 복식을 모방하면서, 상류층에서는 화려한 장신구로 서민층과 차별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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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용 가슴장식(Stomacher), 18세기 전반

OLYMPUS DIGITAL CAMERA망토 잠금 장식, 18세기 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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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미혼 여성의 머리장식(Parta), 18세기,

헝가리 미혼여성들이 착용했던 머리장식이다. 주로 축제 때 사용했던 것으로 금속실, 유리구슬 등 값비싼 귀금속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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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여성의 모자(Bonnet), 18세기,

여성이 쓰는 모자로 보통 기혼 여성들이 썼다. 보닛은 처음에는 귀족 여성들만 착용했으나 18세기 되면서 평민 여성들도 장식된 보닛을 쓰게 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여성 모자(Bonnet), 1850년 경,

출산 직후에 착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이 보닛은 엘리자베트 왕비(Eilsabeth von Wittelsbach, 1837~1898)가 자신의 가종교사였던 에마멘델네니(Emma Mendlenyi)에 선물한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여성용 신발(1770~1780년),

앞이 뽀족하고 좁은 여성용 신발로 굽은 부드러운 염소가죽으로 감쌌다. 18세기 유럽에서는 프랑스 궁중 패션이 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이 신발의 모양과 천, 장식은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엘리자베트 왕비의 부채, 1880년 경,

19세기 상류층 여자들이 많이 사용하던 얼굴을 가리는 부채이다.

흰색 레이스로 만든 부채로 부챗살은 자개로 장식하였다. 엘리자베트 왕비는 그녀의 미모에 대한 전설을 지키기 위해 대중 앞에 설 때는 종종 부채로 얼굴을 가리곤 했다. 이 부채는 왕비가 그녀의 시중을 들었던 코르니시 마리어(Kormis Maria)라는 헝가리 여인에게 선물한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엘리자베트 왕비의 손수건, 1880년 경,

가장자리에 레이스가 달린 흰 손수건으로 “E”가 바탕에 수놓아져 있다. 이 손수건은 원래 엘리자베트 왕비의 것이었으나, 후에 가정교사였던 에마멘델레니에게 선물한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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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트 왕비의 외출복, 1890년대,

엘리자베트 왕비의 외출복이다. 궁중 재단사가 제작한 것으로 허리 바로 아래까지는 몸에 딱 붙고 그 아래로는 점점 폭이 넓어져 엉덩이를 덮는 형태로 되어 있다. 이 옷은 왕비가 여행이나 외출 때 입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앞치마, 1830년대,

귀족 여성이 입었던 앞치마이다. 지위가 낮은 여성들이 일상생활에서 착용하던 앞치마는 귀족여성들이 농장과 집안일을 직접 감독하는 책임을 맡게 되면서 귀족의 복식이 되었다. 앞치마는 주부의 미덕을 상징하는 동시에 값비싼 재료와 화려한 장식으로 고귀함과 부유함을 나타내기도 했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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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상의(Bodice), 18세기 중엽,

여성용 상의로 몸에 꼭맞고 가슴부터 허리에 걸쳐 끈을 조여 입는 옷이다. 헝가리 여인들은 이러한 종류의 보디스를 고운 리넨으로 제작된 속옷 위에 입었다. 보통 보디스와 같은 재질로 만들어진 폭이 긴 치마와 함께 입는다. <출처:고궁박물관>

헝가리 남성의 복식
헝가리 남성들의 전통 복식은 돌마니(Dolmany, 몸에 딱 맞는 재킷), 통이 좁고 꽉 끼는 바지, 부츠, 멘테(Mente, 남성 상의), 커처가니(Kaczahany, 호랑이나 늑대 등의 가죽), 로제트와 깃털로 장식된 털모자 등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귀족 남성의 옷은 같은 양식이라도 벨벳, 공단, 진홍단과 같은 값비싼 옷감으로 만들었고 모피로 장식했다. 기독교의 유입이후, 헝가리에서는 고대 신앙이나 관습 등을 금지시켰다. 이에 따라 얼마간은 동쪽으로부터 유입되었던 아름다운 복식이 귀족들로부터 외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상류게층은 그들에게 친숙한 전통복식을 다시 찾기 시작했고, 11세기 이후부터 헝가리 귀족 남성은 구슬로 수놓은 셔츠, 어깨 위로 걸쳐진 걸쇠가 달려 있는 멘테, 뾰족한 모자, 수가 놓인 가죽 또는 모피 쾨드묀(Kodmon, 재킷), 높은 부츠 등을 착용하였다. 헝가리에는 가죽을 얻을 수 있는 동물이 많았다. 특히 담비의 수가 많았기때문에 귀족뿐만 아니라 평민들까지도 모피와 가죽으로 옷을 만들었다. 주로 바지, 부츠, 털모자, 벨트, 소형 가방, 안장, 술달린 마구 등을 가죽으로 만들고 했다. 귀족들은 평민들과의 차이를 두기 위해 계급을 나타내는 칼과 같은 장식을 더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헝가리 남성용 정장, 1916년,
남성용 정장으로 멘테(Mente), 돌먼(Dolman), 바지, 모자로 구성되어 있다. 귀족 세죄디 주켈테르 리요시(Szecodi Culkkelter Lajoi)의 옷으로, 마지막 헝가리 왕이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황제였던 카를1세(Karl I, 재위1916~1918년)의 대관식에 참여할 때 입기 위해 부다페스트에서 제작된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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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에 걸쳐 입는 재킷(Dolman), 1916년,

격식 있는 정장 안에 입는 상의이다. 회색 실크에 흰색과 금색의 장미 꽃봉오리 문양을 장식했다. 헝가리 귀족들이 입었던 대표적의 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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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토(Mente), 1916년,

헝가리 귀족 남성의 나들이용 외투이다. 소매 옆구리에 절개된 부분과 앞쪽 여밈에는 매듭 커프스를 장식했다. 커프스 아래쪽과 옷깃에는 장식줄로 식물문양이 표현되었다. 옷 뒤쪽의 절개선 부분은 금색 장식줄로 강조했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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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 1916년,

벨벳으로 만들어진 남성용 모자이다. 네 조각의 천으로 제작했는데 절개선 부분은 얇은 줄로 장식했다. 모자의 꼭대기 중앙부분에는 금실로 짠 단추와 세 줄로 땋은 장식줄이 달려 있고 깃털 장식을 꽂기 위한 작은 구멍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바지, 1916년,

파란색 실크로 제작한 헝가리식 바지이다. 바지 뒤쪽의 절개선은 금실로 테두리를 둘렀다. 앞쪽은 다양한 두께의 실로 만들어진 끝이 뾰족한 화살표 형태의 장식이 아래쪽으로 부착되어 있다. 바지 앞에 제작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금속 걸쇠와 비닐 단주로 바지를 잠글 수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부츠(20세기초), 자수부츠(19세기초), 자수신발(17세기 말) 

부츠, 20세기초, 짙은 가죽부츠로 폭이 좋은 형태이다. 부츠의 윗부분에는 끈을 꼬아 장식했다. 굽에는 작은 금속제 장식을 달았다. 헝가리 남성들은 정장차림을 할때 일반적으로 꼭 뿥은 바지에 이러한 부츠를 신었다.자수부츠, 19세기초, 위로 갈수록 통이 넓어지는 형태의 남성용 부츠이다. 부츠의 윗부분은 아치 모양으로 금색실을 꼬았고 중앙에는 장미모양 장식이 있다. 금실로 땋은 끈은 부츠 측면까지 내려오고, 나무줄기와 도토리 문양을 함께 장식했다. 자수신발, 17세기 말, 발목 길이의 가죽 신발로 당시의 실내화 모양을 따라 재단되었다. 황금색의 앞고 튤립 문양이 자수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넥타이, 20세기초,

2개의 끈으로 돌먼(Dolman) 옷깃 아래에 묶을 수 있는 형태의 넥타이이다. 프랑스 패션의 영향으로 헝가리 남성들은 그들의 전통 복식에 타이를 매기 시작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헝가리 의상을 입은 남녀, 론 얼러요시(Alajos Rohn), 1859년,

19세기 헝가리 귀족들의 전형적인 의상이다. 당시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헝가리 국립박물관을 배경으로 헝가리 의상을 입은 남녀를 그린 석판화이다. 당시 가을, 겨울의 패션을 보여주는 의상이다. 1848~1849년 독립전쟁의 좌절 후 처형된 영웅들의 장례식이 큰 사회적 행사가 되었고, 대중들은 저항의 상징으로 검은색 헝가리식 상복을 입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헝가리 의상을 입은 남성들, 1867년,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입었던 헝가리 전통 의상이다.

헝가리 문화의 상징인 헝가리 국립박물관 앞에 서 있는 7명의 남자를 그린 석판화이다. 왼쪽에서부터 순서대로 귀족, 평민, 전령, 후사르 기병, 그리고 가장 오른쪽은 시종이 각자의 신분이 나타나는 헝가리 의상을 입고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에스테르하지 백작 가족, 1830년대 초,

에스테르하지 팔(Esterhazy Pal, 1786~1866년) 백작 가족을 그린 그림이다. 에스테르하지 팔은 외교관이자 정치가로 1848년 헝가리 국회의 최초 책임자로서 왕의 측근인 장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헝가리의 외교정책을 대변하는 임무를 맡았다. 가장 부유한 헝가리 귀족 가문 중 하나였던 에스테르하지 가문은 호화로운 생활로 유명했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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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과 귀족 여성, 비케시 하인부허 요제프(Jozsef Bikessy-Heinbucher), 1816년,

19세기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에 반발하여 헝가리 전통의상을 입었던 시대상을 보여준다.

군인이 귀족 여성에게 작별을 고하는 장면을 묘사한 다색 석판화이다. 이들은 전형적인 헝가리 전통 복장을 입고 있는데, 당시 헝가리인들이 프랑스나 독일의 패션을 거부하고 전통 복식을 고수했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헝가리 귀족 남녀, 요한 크리스토프 슈미트하머(Johans Christopher Schmidhammer), 18세기,

헝가리 전통 축제 의상을 차려 입은 헝가리의 젊은 남.녀 귀족을 그린 다색 석판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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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키 요제프 백작, 1749년,

헝가리 부총리였던 차기 요제프(Csaky Jozseff, 1745~1799년) 백작의 어린 시절 초상화이다. 1749년에 그린 것으로 백작이 4살 되던 무렵의 모습이다. 초상화 속 모습은 실제보다 더 나이 들어 보여 마치 작은 어른과 같은 느낌을 주는데 인물의 개성보다는 사회저거 지위를 부각시켜 그랬던 당시 초상화 스타일의 유행을 따른 것이다. 정교하게 묘사된 어린 아이의 얼굴, 콘솔 탁자와 기둥, 장막이 있는 도해적인 배경을 통해 화가는 이 어린 아이 속에 내재되어 있는 미래의 영향력 있는 귀족 청년의 영혼을 표현해 내고자 했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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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키 언너 백작부인, 1750년경,

차키 요세프 백작의 부인인 차키 언너(Csaky Anna)의 초상화이다. 차기 요제프 백작의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백작부인은 그녀의 나이에 맞지 않은 훨씬 더 성숙한 신체비례를 보인다. 이런 종류의 초상화는 주인공의 사회적 위치를 과시하기 위해 저택의 회랑에 걸어 장식하였다. 언너는 망사 앞치마가 있는 연한 자주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상의를 묶는 끈 장식과 어깨에 두른 레이스는 오스트리아 빈과는 다른 헝가리 귀족 특유의 의상이다. <출처:고궁박물관>

헝가리 귀족의 복식
헝가리 귀족들은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화려하고 품위있는 복식에 관심이 많았다. 따라서 헝가리의 복식문화는 귀족들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르네상스 시기 유럽의 직물산업은 생산체제 뿐 아니라 기술도 크게 개선되어 기계가 개량되고 염색술의 발전으로 인해 새로운 상품이 계속 개발되었다. 고급 모직이 동방에서 전래되었고 단색의 벨벳, 자수를 놓은 직물과 같이 원단의 종류가 매우 다양해져 귀족들의 미적 감각이 높아졌다. 또한 동물의 모피가 상류층에서 애용되었으며 다양한 종류의 레이스가 개발되어 헝가리 귀족 복식에 사용되었다. 16세기에는 평민들의 귀족 복식 모방이 도를 넘어서자 귀족들이 강하게 반발하기 시작했고, 17세기에는 사치를 금지하는 규제가 실시되어 사회적 지위에 맞게 옷을 입도록 하는 법령이 선포되기도 했다. 이 시기 헝가리 귀족들은 평민들과 비슷한 형태의 옷을 입었지만 색, 품질, 장식 등으로 차이를 두려고 했다. 오스만제국 침략 시기에는 그 영향을 받아 복식의 형태가 더욱 단순해졌으나 색감은 화려하게 변하였다. 합스부르크왕가의 통치 아래 헝가리 귀족들은 독일 복식의 영향을 받아 공산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주로 모피로 만든 경기병 재킷, 수놓은 재킷, 보닛 모자, 장식 망토, 깃털로 장식한 모자 등이 헝가리 상류계층의 전형적인 복식이 되었다. 19세기에 들어 합스부르크 왕가의 압제정책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귀족들은 기존 헝가리 농민들의 전통 민속복식을 모방하기도 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전시회 세번째 주제는 ‘헝가리 귀족의 화려한 일상생활’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헝가리 귀족들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 이후에더 봉권 귀족의 특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귀족들은 영지에서 생산된 농산물이나 섬유제품 등을 오스트리아에 판매하면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들은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우호적인 관계속에서 서유럽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빠르게 받아 들였다. 전시회에서는 헝가리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을 보여주는 식기를 비롯한 생활용품, 섬유제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헝가리 귀족의 화려한 일상생활
헝가리 왕국의 귀족들이 건국 이래로 누려온 봉권적 특권은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헝가리 왕위를 세습하게 된 후에도 유지되었다. 헝가리 귀족들은 자신들의 영지에서 생산된 농산물과 섬유제품을 오스트리아에 판매하여 부를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왕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서유럽 귀족계급의 문화를 빠르게 받아들였다. 헝가리의 고위 귀족들은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의 문화에 깊이 물들었으며 일부 귀족은 빈에 저택을 두고 머무르기도 했다. 17세기 중반 이후 헝가리 왕국에서는 바로크 예술이 크게 유행하였다. 바로크 예술은 본래 카톨릭 예수회를 중심으로 한 반종교개혁의 표현수단이기도 했기 때문에 헝가리의 신교 운동을 탄압하려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방침과도 일치했다. 이 시기에 헝가리 각지의 카톨리 교회건축은 물론 고위 귀족의 저택도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에스테르하지(Esterhaxzy) 가문의 궁전이 대표적이다. 합스부르크 왕가 중심의 헝가리 재통일 이후인 18세기에는 보다 웅장하고 화려한 바로크예술이 헝가리에서 꽃피었다. 헝가리의 고위 귀족들은 바로크 양식의 궁전에 극장과 연주회장 등의 문화시설을 갖추고 서유럽의 극단, 악단과 예술가를 초빙했다. 일상생활에서도 빈 등지에서 들여온 가구, 금속 기물, 의상 등을 즐겨 사용하였다. 이처럼 18세기 헝가리 고위 귀족들은 헝가리어를 모국어로 하고 복식 등에 헝가리 민족 고유의 요소 일부를 지키고 있었지만 생활 문화의 대부분은 서유럽을 모델로 삼고 있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언드라시 가문의 식탁용 장식 분수, 1748년,

헝가리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와인을 담아 마시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세개의 주전자를 붙여 놓은 모양의 분수이다. 주전자 바닥에는 “Csinltata Andrassy Ferenc 1748(1748년 언드라시 페렌츠를 위해 제작)”이라는 명문이 있어 언드라시(Andrassy) 가문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와인을 담아 마시는데 사용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헝가리 귀족들의 정찬에 사용되었던 식기
18세기 이후 헝가리 귀족들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생산된 최고급 은식기를 수입, 사용하였다. 또한 헝가리 장인들도 헝가리의 전통과 오스트리아의 영향을 조화시켜 훌륭한 수준의 은식기를 제작하였으며, 식기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어 공방의 명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귀족들의 정찬에 유리잔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로, 유리 세공 기술이 크게 발달했던 베네치아와 슐레지엔에서 수입한 제품을 사용하다가 차츰 헝가리 자체 제작품을 사용하게 되었다. 18세기 이후로는 도자기 선호 현상이 뚜렷해져 헝가리의 도자기 제작기술이 발달하였으며, 1826년에는 유명한 헤렌드(Herend) 도자기 제작 회사가 설립되어 지금까지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포크, 나이프, 숟가락과 같은 ‘커틀러리(Cutlery)’를 현대처럼 한 세트로 갖추어 사용하게 된 것도 18세기에 이르러서이다. 숟가락과 포크는 시기에 따라 그 모양이 조금씩변형되기는 하였으나, 잎사귀와 꽃 모양으로 손잡이를 장식하였고, 음식의 용도에 따라 구분하여 여러가지 모양의 은제 커틀러리를 사용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18세기 이후 헝가리 귀족들이 사용했던 화려한 식기 세트이다. 유럽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은으로 만든 제품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18세기 이후 도자기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OLYMPUS DIGITAL CAMERA헝가리 귀족들의 정찬을 재현한 식탁.

OLYMPUS DIGITAL CAMERA술잔세트(1675년) 와 조개모양잔(17세기 말),

손잡이가 없는 잔으로 큰 잔에 작은 잔을 포개어 넣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잔에는 소유주였던 트란실바니아의 수상 텔레키 미하이(Teleki Mihaly)와 그의 부인 베르 유디트(Ver Judit)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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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주전자, 1752년,

포도주를 담았던 주전자이다. 몸체에 문장과 “Torcka Sz Gyorgyi Torockai Kata 1752(토로커 가문의 죄르지와 토로커 커터 1752년)”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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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병, 안드레에 쉬슬러(Andreas Schuussler), 1640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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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껑달린 와인잔(고블릿,Goblet with Lid), 1600~1610년.

뚜껑이 달려 있는 포도주 잔이다. 뚜껑 위에는 창과 방패를 들고 있는 로마전사가 주조되어 있다. 잔에 새겨진 글을 통해 라코치라슬로(Rakoczi Laszlo)와 반피 에르제베트(Banffy Erzsebet)가 소유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숟가락, 17세기 중엽

OLYMPUS DIGITAL CAMERA육각형 접시, 1669~1686년

OLYMPUS DIGITAL CAMERA주전자와 그릇, 1630년 경,

천사와 꽃문양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주전자와 그릇이다. 손을 씻을 때 사용하는 물을 담는 도구로 ‘세수식 세트(Lavabo-set)’라고도 한다. 타원형의 그릇 바닥에는 함께 사용하는 주전자를 놓을 수 있도록 홈을 파놓았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화장대, 18세기,

소나무 짜임에 호두나무와 단풍나무 판재를 덮은 트란실바니아에서 제작된 화장대이다. 상판의 중간부분에는 접고 펼 수 있는 거울이 달려있고, 양 옆으로는 수평의 받침대 아래로 서랍이 2개씩 있다. 의자의 뒷면은 서랍과 같은 모양으로 사용하지 않을 때는 화장대 중간에 끼워 넣어 보관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출처:고궁박물관>

헝가리의 섬유 공예
머저르족(Magyar)은 헝가리에 정착하기 이전부터 가내 수공업으로 섬유제품을 생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삼을 재배하고 이를 가공하여 베를 짜는 방직은 19세기 중반의 공업화 이전까지 헝가리 여성들의 가장 중요한 일거리였다. 헝가리의 섬유 공예는 오스만 제국의 오랜 지배 기간을 거치면서 이슬람 전통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다양한 패턴에 근거한 섬유 제작이 발달한 터기의 섬유 공예는 헝가리 귀족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중앙아시아에서 생산된 고급양탄자 등은 헝가리 왕실과 귀족들에게 인기를 끌어 많은 양이 수입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아시아 문화의 영향과 함께 18세기 전반부터는 유럽의 바로크와 로코코 문화의 영향을 받아 이 두 문화가 결합된 독특한 헝가리만의 자수 패턴이 나타나게 되었다. 18~19세기 이후 헝가리의 민족 운동이 활발해지게 되자 귀족들은 서민층의 전통 의상과 문화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서민 문화가 자수에도 반영되어 꽃과 잎사귀, 곤충 등의 문양이 어우러진 독특한 패턴이 만들어졌으며 현재도 이와 같은 패턴의 많은 자수 공예품이 특산물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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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그, 17세기 후반

터기의 우샤크(Usak) 지방에서 제작된 양탄자는 1920년 이전까지 헝가리 영토였던 트란실바니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트란실바니아 양탄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양탄자의 가운데 부분에는 두 개의 기도용 벽감과 앞사귀 무늬로 장식된 등불이 천장에 매달린 모습이 묘사되어 있으며 그 바탕은 넝쿨에서 돋아난 작은 장미 문양과 식물 문양으로 장식되었다. 벽감을 둘러싼 푸른색 네 귀퉁이는 별과 꽃으로 장식하였다. 바깥쪽 문양대에는 10개의 모서리가 있는 트란실바니아식 메달리온이 노란 바탕 사이에 붉은색과 흰색으로 번갈아 배치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베갯잇, 17세기 중엽,

카네이션과 장미 문양을 중앙에, 그 사이에 잎사귀와 작은 튤립 등을 채우고 아래위로 작은 장미, 튤립, 석류, 카네이션 등을 수놓아 장식한 배갯잇이다. 자수의 모티프와 색상, 수를 놓은 방식 등은 모두 터키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침대시트, 17세기말,

작은 꽃으로 장식된 석류, 넝쿨, 튤립 등을 수놓아 장식한 침대 시트이다. 침대 밖으로 흘러내리는 시트 부분을 장식하기 위해 리본 문양의 에리스를 하단에 부착했다. 17세기에는 헝가리 귀족들을 중심으로 터기 패턴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을 혼합한 헝가리식 ‘귀족자수’가 유행했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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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그, 17세기 전반,

탁자나 침대를 덮거나 벽걸이 융단으로 사용되던 러그이다. 터키의 우샤크 지방에서 제작된 것으로 중앙에는 붉은색 바탕에 노란 아라베스크 무늬가 장식되었고, 테두리는 푸른색 띠 위에 끝이 뾰족한 앞을 가진 식물 문양과 별 문양, 양식화된 쿠픽 문자가 번갈아가며 배열되었다. 회화 작품과 문헌 기록에 따르면 17세기에 동방의 값비싼 양탄자는 소수의 특권층만 소유할 수 있었다. <출처:고궁박물관>

 

 

[고궁박물관 특별전, "헝가리왕실의 보물"] 종속과 투쟁, 합스부르크 왕가와 헝가리의 귀족사회

2013년 겨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헝가리 왕실의 보물: 합스부르크왕가와 헝가리 귀족사회>라는 제목으로 특별전이 개최되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오스만투르크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았지만, 외세에 대한 저항과 협력을 통해 오늘날까지 정체성을 유지해온 헝가리의 발자취를 간략하게 소개해 주고 있다. 11세기 이후 헝가리왕국의 정체을 나타내는 ‘신성한 왕관’의 의미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던 시절 헝가리에서 치러진 대관식, 헝가리 역사에 큰 흔적을 남긴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내용들과 헝가리 귀족들이 살았던 모습 등을 보여주고 있다.

헝가리는 우랄산맥 근처에서 거주하던 유목민이 도나우강 유역의 중부유럽으로 진출하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외부세력에 대한 유럽의 방패 역할을 하면서 그 세력을 유지했으나, 16세기 근동지방의 강자로 등장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오스트리아 빈까지 공격해왔던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았으며, 17세기 오스만투르크 세력이 약화되면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헝가리 귀족세력은 자치권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차례 독립투쟁을 벌렸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8세기 오스트리아 마리아테레지이지 여왕이 프로이센과 왕위계승 전쟁에 휩쓸렸을 때 여왕을 귀족세력은 여왕을 지지하면서 세력을 인정받았고, 오스트리아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후 오랫동안 계속된 독립운동으로 1867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건설되었다. 합스부르크 왕조 통치기간에 헝가리는 정치.경제.문화.예술 등 사회 전반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으며, 헝가리 왕성이었던 부다와 경제적 중심지였던 페스트를 잇는 다리를 건설하면서 ‘부다페스트’라는 헝가리 수도가 탄생하였다. 이후 1차세계대전 패전국으로 오스트리아와 분리되면서 독립국가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2013년 겨울 고궁박물관에서 열렸던 <헝가리 왕실의 보물 – 합스부르크 왕가와 헝가리 귀족사회> 특별전시회, 합스부르크왕조로 일원이었던 헝가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한 전시회였다.

중부 유럽의 보석, 헝가리
헝가리는 유럽의 중앙 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으로 슬로바키아, 북동쪽으로 우크라이나, 동쪽으로 루마니아, 남쪽으로 유고슬라비아.크로아티아, 서쪽으로 오스트리아.슬로베니아 등 7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헝가리의 전체 면적은 93,030㎢이며 국토의 2/3가 온천개발이 가능한 온천국가로 전국에 1000여 개의 온천이 있다. 행정구역은 19개주(Megye), 22개 카운티(Megyei Varos), 1개시(부다페스트)로 이루어져 있다. 국민의 대부분이 머저르족(96.6%)이며, 독일인, 슬로바키아인과 남슬라브인, 루마니아인이 있다. 종교는 국민의 67.5%가 가톨릭교이고 개신교 20%, 그리스정교 2.6%이다. 헝가리는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다양한 문화유적이 산재하고 있는데 부다페스트의 도나우강 연안과 부더(Buda)왕궁 지구, 언드라시(Andrassy) 대로, 홀로쾨(Holloko) 전통마을, 어그텔레키(Aggteleki)와 슬로바키아 카르스트 동굴군, 퍼논허르마(Pannonhalma)의 베네딕트회 수도원과 자연환경, 호르토바지(Hortobagy)국립공원, 페치(Pecs)의 초기 기독교 묘지, 토커이(Tokai) 와인 지역 역사 문화 경관 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문화적 인프라로 국민들의 문화적 소양이 높으며, 헝가리가 배출한 위대한 천재 예술가들에 대한 자부심으로 중부 유럽의 문화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문카치 미하이(Munkacsy Mihaly) 등 세계적인 미술가를 배출하였으며, 세계적으로 저명한 음악가 리스트(Liszt Ference), 음악교수법으로 널리 알려진 코다이 졸탄(Codaly Zoltan) 등을 배출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부다페스트 전경 사진.

부다페스트(Budapest) 헝가리의 수도이자 정치.문화.산업 등 국가의 중심지이다. 인구는 180만 정도의 대도시이다. 1873년 도나우강 서편 부더(Buda)와 오부더(Obuda), 동편 페슈트(Pest)가 합쳐지면서 오늘날의 부다페스트가 되었다. 세계문화유신으로 등재된 부다페스트에는 부다성, 마차슈성당 등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어 화려했던 합스부르크왕조 시절의 영화를 보여주고 있다.

헝가리의 역사
헝가리 민족(머저르족)은 우랄 산맥 근처에서 거주하던 유목민족으로, 기원전 500년경 무렵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초대 국왕인 이슈트반1세(Istvan I, 재위 1000~1038)는 헝가리를 주변국과 동화시키고자 기독교를 수용하였고, 이교도의 침입을 막아내어 서유럽의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마챠시 1세(Matyas I, 재위 1458~1490년)의 통치시기에는 영토가 크게 확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술과 학문 또한 발전하였다. 그러나 16세기 오스만제국의 침입으로 수도 부더(Buda)가 함락되었고, 이후 약 100년 간 오스만제국, 트란실바니아 공국,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를 각각 분할하여 점령하는 시기가 이어졌다. 오스만 제국의 세력이 헝가리에서 물러난 뒤 약 300년간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 전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이 시기 헝가리의 완전한 독립을 위한 독립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재위 1740~1780) 여왕의 통치시기에 접어들면서 귀족 계층을 중심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황폐화되었던 헝가리의 경제는 점차 회복되었으며, 서유럽 문화의 영향을 받아 미술과 음악, 문학 분야도 급격히 발전하였다. 이후 지식인드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지속되자 1867년 마침내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건설되었다. 이 시기에 헝가리는 지금의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루마니아를 아우르는 영토를 가지게 되었으며 사회.경제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당시 패전국이 된 헝가리는 1920년 연합국 츠과 트리아농(Trianon) 조약을 맺으며 국토의 70%를 잃었으며 이후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에서도 패전국이 되면서 공산화 되었다. 1956년에는 스탈린 독재에 저항하는 민중 혁명으로 많은 시민들을 잃기도 하였으나 1989년 대립 세력 사이의 타협을 통해 평화적으로 민주화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부다페스트를 상징하는 건물 중 하나인 ‘어부의 요새’이다. 19세기 시민군이 왕궁을 지키고 있을 때 어부들이 이 요새를 방한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헝가리 역사의 주요 사건들. 몽골군의 원정, 오스만 제국의 침략 등 주로 동방과 서방의 경계의 위치한 헝가리의 지리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OLYMPUS DIGITAL CAMERA첫번째 전시 주제는 “종속과 투쟁, 합스부르크 왕가와 헝가리의 귀족 사회”라는 제목으로 헝가리 왕국과 합스부르크 왕가와 관계를 중심으로 주요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신성한 왕관, 헝가리 왕국의 상징
‘신성한 왕관(Szent Korona)’은 ‘성 이슈트반 왕관’이라고도 하는데 홀, 보주, 망토, 검과 함께 헝가리 국왕 대관식 상징물 중 하나이다. 이 왕관은 교황 실베스테르 2세(Pope Sylvester II, 재위 999~1003)가 1000년에 헝가리에 기독교를 처음으로 수용한 이슈트반 1세(Istvan I, 재위 1000~1038)에게 보낸 왕관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에 보내온 왕관은 남아 있지 않고 현존하는 왕관은 후대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헝가리 왕들은 12세기부터 대관식에서 이 왕관을 착용했고, 왕관은 1256년부터 ‘신성한 왕관’이라 일컬어졌다. 이 왕관은 헝가리 민족주권의 상징으로서 오직 대관식에서만 착용되었다. 대관식에서 이 왕관을 착용하지 못한 왕들은 정당한 왕으로 인정 받지 못했다. 일례로 카로이 1세(Karoy I, 재위 1307~1342)는 대관식을 3번이나 행하였으나, 1310년에 신성한 왕관을 쓰고 나서야 비로소 헝가리의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받았다. 신성한 왕관은 여러 차례 옮겨졌으며 도난 당하기도 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때에는 왕관 보관 책임자들이 왕관을 소련군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미군에 위탁했다. 왕관은 미국 연방 금괴 저장소가 위치한 포트녹스(Fort knox)에 보관되었다가 1978년 지미 카터 대통령에 의해 헝가리로 반환되었다. 이후 헝가리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었다가 2000년에 헝가리 국회의사당으로 옮겨졌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헝가리의 신성한 왕관(복제). 

11세기에 만들어진 헝가리를 상징하는 왕관으로 대관식에 이 왕관을 착용했다고 한다. 제2차세계대전 때 미군에 위탁했다가 1978년 헝가리에 반환되어 지금은 헝가리 국회의사당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반대쪽에서 본 왕관

OLYMPUS DIGITAL CAMERA다른 방향에서 본 왕관

이슈트반 1세(Istvan I, 재위 1000~1038)가 1000년 즉위식 때 받았다는 전설이 있는 왕관이다. 이슈트반 1세의 왕관은 왕의 권위를 상징함과 동시에 민족주권의 상징물로 여겨져 왔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왕관 중 하나로 실물은 헝가리 국회의사당에 보관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왕실의 상징(아우구스트 마이어, 1790년),

헝가리인들은 왕관과 왕권을 상징하는 보물을 묘사한 그림들을 많이 남겨 놓고 있다.

1790년에 왕관이 헝가리로 다시 돌아온 것을 기념하여 제작한 판화이다. 1780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요제프2세(Joseph II, 재위 1780~1790)가 헝가리 왕위를 물려받을 때 헝가리 왕관 대관식 의장들을 빈으로 가져갔고, 이후 왕관과 의장물들은 1790년이 되어서야 헝가리로 다시 반환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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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과 보주를 그린 그림(1881년 이후),

홀(오른쪽)은 왕권을 상징하는 손에 잡는 작은 지팡이를 말하며 보주는 신성한 물을 담는 물병이다.

헝가리 왕실의 홀과 보주를 그린 다색 석판화이다. 보주 상부에는 이중으로 된 십자가가 있고, 아르파드(Arpad) 왕가의 문장과 사자 문양이 있는 앙주(Anjou) 왕가의 문장이 장식되어 있다. 여기에 그려진 보주는 카로이 1세(Karoly I, 재위 1310~1342년)의 재위 기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왕실의 상징(18세기말). 왕을 상징하는 주요 의장물들을 그린 판화이다.

왕실 의장인 왕관, 홀, 보주, 망토, 검 등이 그려진 판화이다. 대관식 의장물과 함께 대관식에서 왕의 바로 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전령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90년 레오폴트2세(Leopold II, 재위 1790~1792)와 1792년 프란츠 2세(Franz II, 재위 1792~1830)무렵의 대관식에 관련된 그림으로 보인다.<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망토를 그린 그림(1881년 이후),

라우셔 러요시의 드로잉을 바탕으로 제작된 다색 석판화이다. 여기에 묘사된 망토는 이슈트반1세(Istvan I, 재위 1000~1038)와 왕비 기셀라(Gisela)가 1001년에세케슈페헤르바르(Szekesfervar)에 있는 성마리아 교회에 기부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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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왕관’을 그린 그림(라우셔 러요시, 1881년),

신성한 왕관을 장식하고 있는 그림들을 복제한 석판화이다.

1880년 ‘신성한 왕관’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었을 때, 요제프예술원(Jozsef Art Academy)의 드로잉과 판화교사였던 라우셔러요시(Raouscher Lajos, 1845~1914)가 그린 대관식 의장의 자세한 드로잉을 파리에 있는 피르맹 디도 인쇄소에서 대규모의 다색 석판화로 복제한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왕실의 상징(에두마르트 구르크, 1830년),

오스트리아의 궁정 화가인 에두아르트 구르크(Eduard Gurk, 1801~1841)의 석판화로 대관식의 왕실 의장인 왕관, 홀, 보주, 검 등이 그려져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고난과 영광, 17~19세기의 헝가리 왕조
헝가리를 지배하던 오스만 제국의 힘이 약해지자 합스부르크 왕조는 1686년 마침내 수도 부더(Buda)를 탈환했다. 헝가리 왕국의 왕위를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계승하도록 하고 헝가리의 귀족계층은 지방 각 주의 자치권만을 갖기로 하여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에 저항하여 1703년 라코치 페렌츠2세(Rakoczi Ferenc II, 1676~1735)가 대대적인 독립전쟁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끝났으며, 18세기부터는 안정적인 통치가 이루어졌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명민한 통치자였던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여왕의 통치시기(재위 1740~1780)에는 헝가리 귀족들이 여왕에게 충성 맹세를 하는 등 합스부르크에 우호적인 성향을 띠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합스부르크 왕조에서는 헝가리를 견제하고자 다양한 차별정책을 시행하였고, 이에 반발하여 헝가리에서는 세체니이슈트반(Szechenyi Istvan, 1791~1860), 코슈트 러요시(Kossuth Lajos, 1802~1894) 등이 합스부르크와 보수 헝가리 왕국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 갔다. 1848년에는 헝가리의 위대힌 민족시인 페퇴피 샨도로(Petofi Sandor, 1823~1849)를 중심으로 헝가리 독립 혁명이 일어났으며 혁명이 실패한 이후에도 헝가리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1867년 합스부르크 왕조는 결국 정치.외교.군사 등 모든 면에서 헝가리르 동등한 동반자로 인정하는 ‘대타협(Ausgleich)’을 선언하여 헝가리와의 평화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 대타협의 결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건설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는 1918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헝가리는 정치.경제.문화.예술 등 모든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으며, 헝가리 민족에 대한 자부심 또한 높아졌다. 헝가리의 왕도였던 부더와경제적 중심지였던 페슈트(Pest)를 잇는 다리가 건설되면서 두 지역이 통합되어 ‘부다페스트’라는 헝가리의 수도가 탄생한 것도 이 시기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17~19세기 합스부르크-헝가리 왕계도

종속과 투쟁, 합스부르크 왕가와 헝가리의 귀족 사회
헝가리의 귀족제도는 헝가리가 처음 건국된 896년부터 시작되어 1000년이 넘도록 지속되었다. 1222년 언드라시 2세(Andras II, 재위 1205~1235)가 왕에 대한 귀족의 저항권을 보장하는 칙서인 ‘어러니 불러(Arany Bulla)’를 발표하면서 귀족들의 세력은 더욱 커졌다. 또한 헝가리 고위 귀족의회에는 전통적으로 헝가리 왕의 승계를 결정하는 권한이 있었으므로 헝가리의 왕실과 귀족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하며 헝가리를 통치했다. 17세기 중반에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를 전면적으로 통치하게 되자 헝가리 귀족사회는 자신들의 특권과 자치권을 지키고자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고, 오스트리아가 헝가리 귀족들에 대한 유화 정책을 펼치면서 점차 합스부르크 왕가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18세기에 발발한 오스트리아 왕위 전쟁에서 헝가리 귀족들은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Maria Theresia, 재위 1740~1780)에게 충성맹세를 하면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한 지지축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한편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까지 펼쳐진 합스부르크 왕가의 헝가리 압제정책에 대항해 세체니 이슈트반(Szechenyi Istvan, 1791~1860)과 같은 헝가리 귀족들의 독립과 개혁을 위한 투쟁이 이어지기도 하였다. 17~19세기 합스부르크 지배 시기의 헝가리 귀족들은 합스부르크 왕가를 대표하는 오스트리아 빈의 문화와 예술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중요한 국가 행사나 의식 등에서 헝가리의 전통의상 착용을 고수하는 등 헝가리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꾸준하게 노력하였으며, 특히 합스부르크의 황제가 ‘헝가리의 신성한 왕관’을 직접 수여 받는 대관식 전통은 헝가리 민족의 자존심을 위해 엄격히 지켜나갔다. <출처:고궁박물관>

“신이여, 우리의 황제와 나라를 지켜주소서. 합스부르크의 왕관으로 제국이 통일될 것을 믿습니다. ” –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시대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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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식 의상을 입은 페르디난트 5세 (에두아르트 구르크, 1830년).

신성한 왕관을 쓰고 의장을 갖춘 왕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왕관을 쓰고 대관식 망토를 두른 페르디난트 5세가 말을 타고 대관식 언덕으로 향하는 장면으로 대관식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다색 판화 연작이다. 페르디난트 5세는 1830년 36세의 나이로 헝가리 국왕에 즉위했다. 과학, 식물학과 음악에 뛰어났으며 5개국 언어에 능통했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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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식 의상을 입은 루드너이 샨도르, (에두아르트 구르크, 1830년),

대관식을 주관했던 주교를 그린 그림이다.

페르디난트 5세의 대관식을 주관했단 에스테르곰의 대주교 루드너이 샨도르를 그린 그림으로 대관식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다색 판화 연작 중 한 작품이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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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의상을 입은 부호 에르되디 커예탄 (에두아르트 구르크, 1830년),

대관식에 참석했던 헝가리 귀족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헝가리 북부 버러슈드(Varasd)의 지사이자 궁내 장관이었던 에르되디 컹예탄(Erdody kajetan, 1795~1856) 백작의 모습이다. 1830년 페르디난트 5세의 대관식 행사에 참여했던 고위 귀족들의 모습을 도해한 다색 판화 연작 가운데 하나이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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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상을 입은 헝가리 귀족 여성 (에두아르트 구르크, 1830년),

대관식에 참석했던 헝가리 귀족 여성을 그린 그림.

페르디난트 5세의 대관식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다색 판화 연작 중 한 장면으로 대관식 예복을 입고 있는 헝가리 귀족 여성들을 그린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프란츠 2세의 대관식 맹세 (제바스티안 만슈펠트, 1792년), 대관식 장면을 그린 그림.

1792년 6월 6일 브라티슬라바(Bratislava)에서 진행된 프란츠 2세(Franz II, 재위 1792~1830)의 대관식 장면을 그렸다. 오스만제국의 헝가리 지배 시기 이후 1867년까지 요제프2세(Joseph II, 재위 1780~1790)를 제외한 헝가리 왕의 대관식은 모두 브라티슬라바(포조니 Pozony)에서 거행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페르디난트 5세의 대관식 (에드아르트 구르크, 1830년)

OLYMPUS DIGITAL CAMERA페르디난트 5세에게 선물을 바치는 행렬 (에두아르트 구르크, 1830년),

대관식 행사의 주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페르디난트 5세에게 대관식 예물을 바치기 위해 늘어선 행렬을 그린 것이다. 여러 도시와 자치주의 중요한 상업회사와 귀족들은 가장 좋은 상품을 왕에게 선물로 바쳤다. 페르디난트 5세의 대관식 다색 판화 연작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페르디난트 5세의 대관식 연회 (에두아르트 구르크, 1830년),

페르디난트 5세의 대관식 다색 판화 연작 중 한 장면이다. 대관식의 마지막 의식인 연회 장면을 그렸다. 왕족, 외교관을 비롯하여 각 영지의 귀족들이 모두 참여하는데 엄격한 위계질서에 따라 앉게 되고 규칙에 따라 접대 순서가 정해졌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페르디난트 5세의 대관식 연회 (에두아르트 구르크, 1830년)

 대관식에 이어지는 연회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대관식의 연회 장면으로 긴 탁자가 마련된 연회장에서 황제 프란츠 2세와 그의 왕비가 뒤를 따르는 젋은 왕 페르디난트 5세를 위해 건배를 하고 있다. 페르디난트 5세의 대관식 다색판화 연작이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페르디난트 5세의 대관식 대중연회 (프란츠 볼프, 1830년), 대관식 후 일반 민중들의 연회장면이다.

대관식 이후에 벌어지는 대중 연회 장면으로 왕의 대관을 축하하기 위해 몰려든 군중들을 그렸다. 페르디난트 5세의 대관식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다색 판화 연작에 포함된 작품이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프란츠 요제프 1세의 대관식 맹세 (빈젠츠 가츨러, 1867년),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 I, 재위 1867~1916)의 대관식 석판화이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헝가리를 동등한 협력자로 인정하고 1867년 ‘대타협(Ausgleich)’을 선언,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을 선포하였다. 이후 부다페스트 마챠시 성당에서 헝가리 왕으로 즉위, 절대군주로 군림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신성한 왕관’의 귀환 모습이 그려진 부채(1790년),

왕관을 되돌려 받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흰색 실크로 만들어진 부채로 중앙에는 헝가리의 왕관이 놓여 있고, 왕관을 지키는 네명의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다. 1790년 헝가리 왕관을 되돌려 받은 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이 시기에 제작된 부채들에는 왕관의 반환과 관련된 그림이 그려진 경우가 많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신성한 왕관’의 귀한 모습이 그려진 부채(1790년),

1790년 왕관의 귀환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부채이다. 왕관을 수호하고 있는 그림과 함께 중앙에는 “WO SIE VON IEHER WAR(영원히 있었던 곳으로)”라는 글이 적혀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마리아 테레지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능한 통치자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6세(Karl VI, 재위 1711~1740)의 장녀이자 유일한 직계 자손이었다. 부왕인 카를6세의 생존 당시에 여성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를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는 내용의 ‘국사조칙(Pragmatische Sanktion)’이 제정되어 1740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바이에른, 프로이센과 같은 유럽 열강이 이 상속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였다. 마리아 테리지아는 자신의 영토 가운데 가장 번창한 슐레지엔(Schlesien) 지방을 침략해온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후에 프리드리히 대왕)와의 협상을 거부하여 카를 6세의 상속권을 둘러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이 일어났다. 1741년 브라티슬라바(Bratislava)의회에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어린 아들을 안고 헝가리 귀족들 앞에서 연설을 하여 헝가리 귀족들의 충성맹세를 받았고, 왕위 계승 전쟁에 필요한 대대적인 군자금과 병력을 얻었다. 이로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가의 유산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그녀의 남편인 프란츠 1세(Franz I, 재위 1745~1765)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인정받았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녀를 16명이나 두었는데 그 중 요제프2세(Josef II, 재위 1765~1790), 레오폴드2세(Leopold II, 재위 1790~171792)가 황제로 즉위하였고, 막내 딸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가 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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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탄 마리아 테레지아 초상 (마르틴 판 마이텐스, 18세기 중엽),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계승자로 헝가리 귀족을 지원을 받아 왕위계승 전쟁을 통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대관식 장면을 그린 것이다. 헝가리의 군주는 국가를 상징하는 언덕을 말을 타고 넘은 후 서약을 하고, 칼로 언덕을 사방으로 가르는 의식을 치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임신한 몸으로 대관식이 있기 몇 주 전부터 승마연습을 했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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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헝가리 대신들 (19세기 초),

1741년 9월 11일 브라다슬라바의 의회에서 헝가리 대신들이 여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벌어지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브라다슬라바의 의회에서 헝가리 귀족들에게 연설을 하여 충성 맹세를 받은 후 군자금과 병력을 얻었다.<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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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자녀들 (마르틴 판 마이텐스 화파, 1740년대 말),

헝가리식 복장을 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다섯자녀들의 모습이다. 화면 중앙에는 요제프2세가 있고, 그 좌측에는 마리아 안나, 뒤쪽에는 가를 요제프가 있다. 오른쪽에는 마리아 엘리자메트 요제프가 꽃을 들고 있고, 뒤에는 마리아 아멜리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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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2세의 황태자 시절 의상 (18세기 중엽),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남인 요제프2세(Joseph II, 재외 1780~1790)의 헝가리식 연회 정장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자손들은 많은 회화와 조각작품에서 헝가리식 복장을 하고 있다. 헝가리 귀족들의 신임을 얻는 동시에 여왕의 자손이 헝가리의 왕위 계승자임을 각인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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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드라시 백작 (요한 요제프 라우흐, 1848년 이후),

헝가리의 정치가인 언드라시 줄러(Andrassy Gyula, 1823~1890)를 그린 석판화이다. 언드라시는 1848년 헝가리 독립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파리로 망명하였고, 10년 후 고국에 돌아와 왕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1867년 헝가리의 수상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외무장관도 역임했다. 엘리자베트ㅡ 왕비와 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대타협에 큰 공헌을 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엘리자베트 왕비, 헝가리 왕국의 뮤즈
‘시씨(Sissi)’라는 애칭으로 잘 알려진 엘리자베트 왕비(Elisabeth von Wittelsbach, 1837~1898)는 17세의 나이에 합스부르크의 황제 프라츠 요제프1세(Franz Joseph I, 재위 1848~1916)와 결혼했다. 자유분방한 성격의 왕비는 보수적이고 엄격한 왕가에서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특히 시어머니인 조피 대공비(Sophie of Bavaria)와 자녀 양육 문제로 갈등을 빚었고, 이에 대한 반발심으로 헝가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857년 처음 헝가리를 방문한 왕비는 열렬한 환영에 큰 감명을 받았고, 이후 헝가리어와 문화를 배우면서 많은 시간을 헝가리에서 보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헝가리어 선생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이더 페렌치(Ida Ferenczy, 1839~1929)의 영향을 받은 왕비는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헝가리와 평화 협정을 체결하도록 설득하였고, 1867년 대타협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건설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1867년 헝가리 마챠시 성당에서 거행된 프란츠 요제프1세와 엘리자베트의 대관식에서 왕비는 헝가리 전통 의상을 입고 참석하였고, 절세의 미모를 자랑하는 엘리자베트의 모습에 헝가리인들은 더욱 열광하였다. 즉위 기념으로 선사 받은 괴될뢰(Godollo) 왕궁은 이후 왕비가 주로 머무는 장소가 되었다. 1889년 아들인 루돌프 황태자가 자살한 이후 왕비는 검은 옷만 입고 생활하였으며, 노화된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항상 부채나 양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등 우울한 일상을 보냈다. 이후 1898년 스위스에서 이탈리아인 무정부주의자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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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의상을 입은 왕실 가족 (1867년경),

프란츠 요제프 1세 가족의 모습을 그린 석판화이다. 프란츠 요제프 1세와 함께 엘리자베트 왕비와 기젤라(Gisela), 루돌프(Rudolf)가 헝가리 의상을 입고 있으며, 가장 어린 마리아 발레리아(Maria Valeria)는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 있다. 헝가리 의상을 하고 헝가리를 배경으로 한 왕실 가족 그림은 헝가리에 대한 유화정책에서 비롯된 정치적 목적으로 그려진 것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괴될뢰의 왕궁 (루트비히 로흐보크, 19세기 중엽),

괴돌뢰(Godollo) 성을 그린 강판화이다. 괴될뢰 성은 1867년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 왕비에게 헝가리의 왕과 왕비 즉위 기념으로 헌상되었다. 특히 엘리자베트 왕비는 엄격한 빈의 궁정 생활에서 벗어나 이 성에서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겼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대관식 에복을 입은 엘리자베트 왕비 (아돌프 다우트하게, 19세기 후반), 헝가리 의상을 입은 엘리자베트 왕비 (프라츠 볼프, 19세기 후반), 젊은 시절의 엘리자베트 왕비 (아돌프 다우트하게, 19세기 후반)

대관식 에복을 입은 엘리자베트 왕비 (아돌프 다우트하게, 19세기 후반), 헝가리 대관식 예복을 입은 엘리자베트 왕비를 그린 석판화이다. 작가는 오스트리아인인 아돌프 다우트하게(Adolf Daughage, 1825~1833)로 당시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던 초상 석판화가였다. 헝가리 의상을 입은 엘리자베트 왕비 (프라츠 볼프, 19세기 후반), 세밀화 화가로 명성이 높았던 요한 리하르트 슈바거(1822~1880)의 작품을 석판화가인 프란츠 볼프(1795~1859)가 모사하여 제작한 작품으로 엘리자베트 왕비를 그린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왕비는 대관식 드레스와 유사한 헝가리식 복장을 하고 있다. 젊은 시절의 엘리자베트 왕비 (아돌프 다우트하게, 19세기 후반),1850년 경의 엘리자베트 왕비를 그린 석판화이다. 전설적인 미모로 유명했던 왕비는 헝가리인들에게 열렬한 숭배를 받았으며, 화가들은 그녀를 고대 조각과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이상화시켜 그렸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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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요제프 1세의 초상 (리슬로 펠뢰프 엘레크, 1899년),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 I, 1830~1916)가 69세 되던 해인 1899년에 그려진 초상화이다. 1889년 외아들인 황태자 루돌프가 자살하자 큰 충격을 받았으며 1898년 9월10일 아내 엘리자베트마저 제네바에서 암살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헝가리 화가인 라슬로 퓔뢰프 엘레크(Laszlo Fulop Elek, 1869~1937)가 그린 이 초상화는 자연스러운 포즈와 대상의 심리적인 면을 잘 포착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황제는 거의 제복 차림을 지냈다. 훈장은 달지 있지 않으며 그의 팔에 보이는 검은 리본은 사랑했던 아내 엘리자베트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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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트 왕비 초상 (코퍼이 요제프 아르파드, 19세기말),

헝가리 화가 코퍼이 요제프 아르파드(Koppay Jozsef Arpad, 1859~1927)가 그린 이 초상화는 엘리자베트 왕비의 사후, 남편인 요제프 1세가 제작을 의뢰한 것으로 엘리자베트으 시중을 들었던 마리아 페스테틱스(Maria Festetics)백작부인을 위한 선물로 마련된 것이다. 왕위 후계자였던 아들 루돌프가 죽고 난 후 왕비는 항상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이 그림에서도 왕비는 애도를 뜻하는 검은색 옷을 입고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헝가리 왕실의 보물: 합스부르크왕가와 헝가리 귀족 사회
헝가리는 유럽의 중앙부에 위치한 나라로, 헝가리 민족이 현재의 위치에 정착한 후 10세기경 왕조를 이루게 되었다. 지형적으로 서유럽의 가장 동쪽에 위치해 있어 아시아와 서유럽의 강대국 사이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으나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지키며 발전을 지속하여 19세기에는 유럽의 가장 강성한 국가 중 하나로 성장하였다. 헝가리 국립박물관과 국립고궁박물관이 공동으로 개최하는 이번 전시에서는 합스부르크왕가가 헝가리를 통치하였던 17~19세기의 화려한 왕실의 보물들이 소개된다. 비록 헝가리인 스스로가 독자적으로 왕조를 세우지 못했지만 독특한 헝가리의 문화와 유럽대륙 최고의 대제국이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화려한 문화가 조화된 이 시기의 유물들은 복잡한 중부 유럽의 역사와 문화를 잘 반영하고 있다.헝가리는 지정학적 특징으로 인해 주변국의 침략에 맞서 끊임없이 싸워 왔으며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굴곡진 근현대사를 겪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와도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번 전시는 그 동안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헝가리의 역사와 함께 합스부르크 왕가와 헝가리 귀족들의 화려한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출처: 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