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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회화실] 산수화(山水畵), 자연을 그린 그림

자연을 그린 산수화(山水畵)는 조선시대 회화를 대표하는 분야이다. 동양화(東洋畵)라는 단어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 또한 산수화이다. 우리나라 산수화는 삼국시대의 무덤벽화나 백제의 산수무늬가 그려진 벽돌 등에서도 나타나듯이 아주 오래전 부터 그려졌다.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에도 산수화가 많이 그려졌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거의 없다. 오늘날 볼수 있는 산수화는 조선시대에 그려진 작품들이다. 산수화는 문인화로서 전문화가인 도화서 화원 뿐만 아니라 사대부계층에서도 많이 그렸다. 이는 자연의 이치를 담은 마음속의 산수를 그리는 중국 남종화(南宗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안견(安堅, ?~?)으로 대표되는 조선전기 화가들은 산수의 아름다움과 계절의 변화를 담은 산수화를 많이 그렸다. 김명국으로 대표되는 조선중기에는 인물과 산수과 조화를 이룬 산수인물도를 그렸다. 조선중기까지 산수화는 실제 눈에 보이는 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전해오는 고사(古事)나 마음속에 바라던 이상적인 풍경을 그렸다. 정선(鄭敾, 1676~1759)으로 대표되는 조선후기 화가들은 실제 풍경이라 할 수 있는 우리의 산천을 표현하여 산수화의 경지를 높이 끌어올렸다. 또한 일반서민들의 민화산수화도 크게 유행하였다. 중앙박물관에서는 진품은 아니지만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전시하기도 했으며, 이징(李澄)을 비롯하여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산수화 걸작들을 살펴볼 수 있다.

산수화(山水畵)
산수화는 자연을 그린 그림이다. 옛사람들은 항상 자연과 더불어 살기를 꿈꾸었으며 화가들은 자연을 살아 숨쉬는 듯 느끼며 생동감 있게 그리고자 노력하였다. 우리나라 산수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이다. 삼국시대 무덤 벽화의 산과 나무 표현에서 고대 산수화의 양상을 엿볼 수 있다. 통일신라 이후의 산수화는 전해지는 작품이 거의 없어서 자세한 모습을 알기 어려우나 고려시대에는 감상을 위하여 산수화를 본격적으로 그렸으며 주위의 산천을 그리는 전통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산수화는 남아 있는 작품이 많아 쉽게 시기별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화가들은 중국의 새로운 기법을 받아들이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이룩해 나갔다. 안견을 중심으로 한 조선 전기의 화가들은 산수의 아름다움과 계절의 변화를 담은 산수화를 주로 그렸다. 김명국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 중기의 화가들은 산수와 인물이 조화를 이룬 대범한 분위기의 산수인물도를 많이 그렸다. 산수화가들은 자연의 이치를 담은 마음속의 산수를 그리고자 하였다. 중국의 문인화풍인 남종화의 예술 사상과 기법은 조선 후기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한편 후기의 진경산수화는 조선의 산천을 우리식으로 표현하여 산수화의 경지를 높이 끌어올렸다. 조선말기에는 정신세계를 중시하는 문인화의 흐름이 깊어진 가운데 근대적 감각을 보이는 참신한 화풍의 산수화가 그려졌다. 또한 일반 서민들의 민화 산수화도 유행하면서 다음 시대로 이어졌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꿈속에서 여행한 복사꽃 마을(몽유도원도), 안견, 1447년, 복제본. 조선전기 화가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는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산수화이다. 원본은 일본에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몽유도원도는 중국 화풍을 이어받은 정통 산수화라고 할 수 있다. 실제 경치기가 아닌 상상속의 경치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그림 왼쪽편에 적혀 있는 글씨. 평대군의 제서와 시 1수를 비롯해 당대 문인들이 쓴 20여 편의 찬문이 이어져 있다.

이 두루마리 그림은 안평대군이 꿈에 복사꽃 마을을 여행한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안평대군이 직접 쓴 발문에 의하면 안견이 3일 만에 그림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평화로운 도원을 여행한 꿈 이야기는 중국 동진대에 시인 도연명이 지은 <도화원기>와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이 두루마리에는 안평대군의 제서와 시 1수를 비롯해 당대 문인들이 쓴 20여 편의 찬문이 이어져 있다. “지곡가도”라는 안견의 관지가 있고, 그 아래 “가도”라는 붉은 색 도장이 찍혀 있다. 그림의 왼쪽은 나지막한 야산들로 이루어진 현실 세계를, 나머지는 꿈속 장면으로, 도원의 바깥쪽 입구와 안쪽 입구, 그리고 복사꽃이 피어 있는 도원의 경치를 보여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사계절의 산수,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전 안견(安堅), 15세기, 비단에 엷은 색. 정선과 함께 산수화를 대표하는 안견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작품이다. 그의 화풍을 살펴볼 수 있다.

안견은 중국 북송 곽희 화풍을 기본으로 독특한 화풍을 이루었다. 그의 화품은 다른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쳐, 조선 전기 산수화의 큰 줄기인 안견파 화풍이 형성되었다. 초봄과 늦봄, 초여름과 늦여름, 초가을과 늦가을, 초겨울과 늦겨울 등 한 계절의 흐름을 두 화면에 담았다. 가까운 언덕과 멀리 보이는 산을 연결시키지 않고 수면과 안개 등으로 넓은 공간을 만드는 것은 안견파 화풍의 특징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사계절의 산수,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전 안견(安堅), 15세기, 비단에 엷은 색

OLYMPUS DIGITAL CAMERA사계절 산수,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김명국(金明國, 1600~1663 이후), 1662년, 비난에 금니.<달마도(達磨圖)>로 유명한 김명국(金明國, ?~?)이 그린 그림이다. 그는 도화서 화원출신으로 조선중기의 화가로 산수화와 인물화를 잘그렸으며 두차례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왔다. 붓의 움직임이 힘차고 거친 필치가 특징으로 산수와 인물이 조화를 이룬 산수인물화를 잘 그렸다고 한다.

비단에 먹물을 입히고 금니로 그린 그림이다. 사계절을 각기 두폭씩 그린 사계 산수 중 가을이다. 두 폭씩 쌍을 이루어 한쪽으로 치우친 구도로 그려져 중앙을 비우는 화면 구성이다. 나뉘 탄 인물과 앞서 갈 길을 재촉하는 듯한 시동, 먼 산 위로 날아가는 새들 등에서 서정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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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현에 있는 별장,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蔣圖), 이징(李澄), 1643년, 비단에 먹, 보물 1046호. 화가 이징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전문화가로 다양한 종류의 그림을 남겨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별장과 주변의 경치를 엷게 그려 놓고 있다.

지리산 화개현에 있던 정여창의 별장을 그린 것이다. 후에 별장이 훼손된 것이 아쉬워 화가 이징을 불러 기록에 의거해 그리도록 한 것이다. 맨 위에는 “화개현구장도”란 제목이 전서체로 적혀 있고, 중간에는 별장의 주변 산수를 엷게 그렸다. 그림 전체의 배치가 오른쪽에 치우쳐 있으면서 근경, 중경, 원경이 잘 나타나 있고 산과 바위에는 흑백의 대조가 뚜렷하다. 그림 아래에는 정여창과 유호인의 시와 제작배경을 적은 글 등이 있다. 이징은 문인화가 이경윤의 서자로, 1628년에는 태조의 진영을 개수한 공으로 동반의 6품직을 받았다. 산수를 비롯한 인물.영모.초충 등 모두 능하여 당대 제일의 기량을 갖춘 화가로 평가받았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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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도(山水圖), 전 이징, 조선 17세기, 비단에 색.  화가 이징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산수화로 안견의 화풍을 이어받은 전문 화가가 그린 정통 산수화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이 그림은 뱃놀이하고 낚시하는 장면, 독서하는 장면, 벗을 찾아가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면이 수려한 산수 속에 조화롭게 묘사되어 있다.

이징은 이경윤(李慶胤)의 서자로 벼슬은 주부(主簿)를 지냈다. 이 그림은 뱃놀이를 하고 낚시하는 장면, 독서하는 장면, 벗을 찾아가는 사름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면이 수려한 산수속에 조화롭게 묘사되어 목가적인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산은 강에서 뒤로 물러나면서 점차 높아지고 멀어지는 삼단구도의 안견파 화풍을 보여준다. 산수는 청록의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은 소청록 산수로서, 먼 산은 청록으로 설채하고 앞산과 바위에는 청록을 혼합한 녹색의 태점을 찍어 화원 특유의 정교함과 화려함을 살리면서 수묵의 우아함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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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도, 전 이징, 조선중기, 종이에 먹

이징은 20대부터 나라 안에서 최고가는 화가로 소꼽혔으며 인조에게 총애받는 화원으로 활약하였다. 여유로운 필선과 치열한 구성, 둥글둥글한 산의 형태, 산세를 따라 찍혀 있는 태점 등이 그의 그림의 특징이다. 중앙에 바둑 두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기암절벽이 복잡하게 화면을 꽉 채우고 있는 내용의 산수화다. 화면에 ‘완산이징’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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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상의 여덟 풍경,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이징, 조선 17세기 전반, 비단에 엷은 색

‘소상팔경도’는 중국 호남성 동정호(洞庭湖) 남쪽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이 합류하는 지역의 빼어난 경관을 여덟 장면으로 그린 것이다. 이 주제는 이상경(理想景)을 대표하는 산수화의 상징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조선 초기에 제작이 활발하였다. 작가 이징은 조선 중기 화가 이경윤(李慶胤)의 서자로 태어나 화원으로 활약하며 인조에게 총애를 받았다. 여유로운 필선과 치밀한 구성, 둥글둥글한 산의 형태와 산봉우리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폭포, 산세를 따라 찍혀 있는 태점(苔點) 등 이징 그림의 특징적인 면들이 나타나 있다. 화면에 ‘완산이징이라는 주문방인 찍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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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일과 누에치기를 그린 그림, 빈풍칠월도(豳風七月圖), 작가미상, 비단채색. 실제 풍경을 그린 진경산수화와는 달리 전통적인 산수화는 문헌이나 그림으로 알고 있었던 풍경에 화가의 주관을 들어간 상상의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주로 고사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풍경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시경>의 ‘빈풍칠월’편을 그린 그림이 빈풍칠월도인데, 빈나라(주나라의 옛이름)의 국풍을 말하는 것이다. 빈풍칠월편은 주나라 문황에게 백성들의 어려움을 일깨우고자 삼촌인 주공이 지은 것이라 한다. 이 그림은 청록산수화풍으로 그려졌으며, 빈풍칠월시에서 노래하고 있는 뽕잎 따는 여인, 지붕 위의 박 따는 장면 등이 그려져 있다. 금니의 선을 긋고 윤곽선을 따라 태점을 찍어 화려하게 장식한 청록산수화로, 각이 진 산의 형태에 청록의 농담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입체감을 부여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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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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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도(山水圖), 작자미상, 16세기, 종이에 먹

조선초기 화가 안견 화풍의 영향을 받은 16세기 산수도로, 왼쪽으로 치우친 편파구도로 그려졌다. 원경, 중경, 근경의 삼단 구성을 보인다. ‘학포사(學圃寫)’의 관지에 이어 ‘양평손장(梁彭孫藏)’으로 판독되는 도장이 있다. 원경의 산들은 중첩되었고, 죽림의 초가집은 비워두고 언덕에 올라 담소를 나누는 선비들의 모습이 정겨워 보인다. 산의 치형돌기, 침엽수림, 나무의 해조묘법 등에서 안견파 화풍의 영향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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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궤도(金櫃圖), 17세기, 전 조숙비단에 색. 신라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최북이 그린 사계절의 그림,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최북(崔北), 18세기, 종이에 엷은 채색. 최북은 조선후기 영조대에 활동한 화가로 괴팍한 성질과 관련된 일화가 유명하다. 그는 인물.초충도 등도 잘 그렸으나 남아 있는 작품은 대부분 산수화이다. 그는 진경산수화와 남종화풍의 산수화를 그렸는데, 이 그림은 남종화풍의 산수화이다. 

최북(1712~1786)은 자가 칠칠(七七), 호가 호생관(毫生館)으로, 성격이 괴팍하고 행적이 기이하여 적지 않은 일화를 남겼다. 이 화첩은 사계절의 풍경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사시팔경도로 적절히 구사된 담채가 깔끔하고 청아하게 느껴진다. 왼편의 <한강조어도(漢江釣魚圖)>는 이 화첩의 마지막 폭으로 눈이 소복하게 내린 추운 겨울 강에서 낚시를 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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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가득한 산 속에 은거하는 선비, 매화서옥(梅花書屋), 조희룡(趙熙龍), 18세기

눈송이 같은 매화꽃이 만발한 산 속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는 선비를 주제로 한 그림이다. 이것은 중국 청대 다농 장심(茶農 張深)이 그린 매감도(梅龕圖)를 떠올리며 그린 것이다. 서예적인 필치로 사물의 형태에 연연해하지 않은 조희룡 특유의 활달하고 현대적인 감각이 돋보인다. <매화서옥도>는 김정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조선시대 문인들 사이에 성행하였고, 조희룡, 전기, 김수철, 박기준 등에 의해서도 애호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끝없이 펼쳐진 강과 산,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1, 이인문(李寅文), 18세기, 비단에 엷은 색. 대자연의 풍경을 긴 두루마리에 그린 그림으로 추사 김정희의 소장품이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강산무진도-2

OLYMPUS DIGITAL CAMERA강산무진도-3

산과 물이 서로 만나고 갈라지면서 이루는 대자연의 절경과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다양한 활동을 그린 긴 두루마리 그림이다. 높은 곳에서 멀리 내려다 보는 듯한 시점으로 산수의 변화무쌍함을 장대하게 구성하였다. 국토와 백성을 상징하는 한편, 강과산이 끝없이 펼쳐지듯 왕조가 영원하길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세련된 필치, 감각적인 색채는 조선후기 김홍도와 쌍벽을 이룬 화원화가 이인문의 뛰어난 솜씨를 잘 보여준다. 화면 앞뒤에 <추사(秋史)>와 <추사진장(秋史珍藏)>이라고 새겨진 도장이 있어 김정희의 소장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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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을 본받아 그린 산수, 방오진산수도(倣吳鎭山水圖), 심사정, 조선 1735년, 비단에 엷은 색.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은 정선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스스로 깨쳐 중국 남종화를 토착화시킨 인물로 김홍도와 함께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산수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을묘년(1735) 여름 심사정이 20대 때 그린 초기 산수도이다. 발문(跋文)에 의하면 중국 원사대가(元四大家) 중의 한 인물인 오진(吳鎭, 1280~1354)의 필의를 따랐다고 적혀 있다. 산을 쌓아올린 듯 중첩된 주산(主山)의 표현이나 화면 전반에 거친 갈필(渴筆)을 구사한 점 등에서 원사대가의 화풍이 엿보인다. 심사정은 중국의 남종화법을 수려하며 오진 뿐만 아니라 황공망(黃公望), 왕몽(王蒙), 심주(心柱) 등 다양한 중국 문인화를 모방한 작품들을 남겼다. 이렇듯 중국 대가의 화풍을 모방했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은 심사정 산수화의 큰 특징 중 하나이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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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놀이, 주유도(舟遊圖), 작가미상,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강 위에 우뚝 솟은 기암절벽과 산봉우리들 사이로 돛단배 4척과 나룻배 2척이 떠 있는 모습이다. 산 어귀를 돌아 낚시를 하고 돌아오는 돛단배는 포구 근처에 이르러 돛을 내리고 있으며, 나룻배들은 사람들을 태우고 막 출발했거나 정박하고 있다. 화면 가운데 위치한 누각 근처에 붉은 꽃이 핀 것으로 보아 화창한 봄날을 배경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화면 하단 포구를 향하고 있는 선비와 고깔을 쓴 승려는 화면 가운데 위치한 사찰에서 나오는 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수직준(垂直皴)을 써서 뽀족하고 깍아지른 듯한 바위산을 묘사하면서도, 부드러운 담채로 산수의 정취를 살렸다. 또한 중국풍의 인물이 아닌 조선의 선비가 등장하는 점 등으로 미루어 19세기 무렵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사계절의 산수, 사계산수도(四季山水圖)-1, 정수영(鄭遂榮, 1743~1831), 조선 1814년, 종이에 엷은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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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문인화가 정수영의 사계산수도로 그는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시서화(詩書畵)를 즐겨 했던 인물이다. 총 8폭의 화면에는 사계절이 각 2장면씩 그려졌으며, 각 폭의 상단에는 늙고 병든 심경을 담은 자작시(自作詩)와 함께 ‘군방(君芳)’, ‘지우재인(之又齋印)’이라는 낙관이 찍혀 있다. 마지막 겨울 장면에는 갈필로 산세의 윤곽만을 그려 황량한 겨울의 느낌을 잘 살렸고, 화면 아래 나귀를 탄 나그네는 고갯길을 지나 화면 상단에 자리 잡은 고을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8면에 “갑술련(1814) 여름 72세의 노인 정수영이 병중에 그렸다.”고 밝히고 있다. 전체적으로 안정된 구도에 차분한 갈필과 담채로 말년의 무르익은 기량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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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쌓인 소나무, 설송도(雪松圖), 이인상, 조선 18세기, 종이에 먹.

추운 겨울에 독야청청한 소나무는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한다. 꼿꼿이 서 있는 소나무와 오른쪽으로 휘어지는 소나무는 서로 교차하며 관람자의 눈앞으로 바짝 당겨져 과감하면서도 파격적인 구도를 만들고 있다. 그림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눈 쌓인 표현이다. 소나무 주변 가지에 먹을 가하지 않고 남겨둔 부분이 자연스럽게 눈처러머 보이게 된다. 능호관 이인상은 담백하고 격조 있는 문인화를 즐겨 그렸던 조선후기 화가다. 서얼 출신이면서도 사대부 벗들에게 청렴한 선비로 추앙받았고, 그들과 더불어 평생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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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속에 길 떠나는 선비, 설중여행풍(雪中旅行風), 김명국, 조선 17세기, 모시에 엷은 색

조선중기 대표적 도화서 화원인 김명국의 작품으로, 겨울 새벽녁 먼 길 떠나는 인물과 사립문에 기대어 배웅하는 동자의 모습을 담고 있다. 부벽준을 대담하게 그린 날카로운 절벽과 앙상한 나무는 매서운 겨울날의 계절감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한쪽으로 치우친 산수와 힘있는 필획은 중국 절파(浙派) 화풍의 영향을 보여준다. 경물의 기이하고 과장된 모습과 대담한 필묵은 김명국의 특징이기도 하다. 문 앞까지 나와 떠나는 길을 배웅하는 동자를 뒤돌아보며 아쉬움을 전하는 나귀 탄 고사(高士)의 모습은 매화를 찾아 떠나는 중국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을 연상케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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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를 찾아 떠나는 선비, 파교심매도(灞橋尋梅圖), 심사정, 조선 1766년, 비단에 엷은 색

중국 당나라의 시인 맹호연이 겨울날 파교를 건너 산속으로 들어가 눈 속에 핀 매화를 찾아 다녔다는 고사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화면 상단의 낙관(落款)을 통해 조선 후기 문인화가인 심사정이 66세가 되던 해 초여름에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나귀를 타고 파교를 건너려는 맹호연과 그를 따르는 시동(侍童)이 화면의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그 주위는 눈 덮인 삭막한 겨울 풍경이 에워싸고 있다. 전체적인 구도나 인물, 소라껍데기 형태의 언덕, 한림(寒林)과 구불거리는 필선 등에서 심사정 만년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산수도(山水圖), 윤의립(尹毅立, 1658~1643), 조선 17세기, 비단에 엷은 색

OLYMPUS DIGITAL CAMERA 산수도(山水圖), 윤의립(尹毅立, 1658~1643),

조선 중기에 활당한 월담 윤의립의 작품으로, 총 6면의 화첩으로 구성되어 있다. 윤의립은 선조대 문과에 급제하여 판서까지 지낸 문인화가로, 중국 남송의 마하파(馬夏派)와 조선 초기의 안견파(安堅派) 화풍이 융합된 화풍을 구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마지막 설경사수도를 살펴보면 월담이 붓을 들었다는 뜻의 “월담농묵(月潭弄墨)”이 붉은 색으로 적혀 있다. 또한 화첩 곳곳에는 금박의 흔적이 보이고, 주로 조선 중기에 선호되었던 니금(泥金)으로 산세를 표현하기도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정이 선생을 기다리는 제자, 정문입설도(程門立雪圖), 정선, 조선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 진경산수화라는 새로운 화풍을 개척한 겸재 정선이 그린 그림이다. 전통적인 남종화에 가까운 그림이다.

눈으로 덮인 초옥(草屋)에 사는 노인과 앞마당에서 있는 두 선비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이는 ‘정씨 집 문 앞에 서서 눈을 맞는다. 程門立雪’는 내용을 그린 것이다. 중국 송나라에서 유래한 일화로, 제자들이 유학자 정이(程頤, 1033~1107)를 찾아 갔을 때 선생이 사색에 잠겨 있었고, 마침내 눈을 떴을 떄는 이미 눈이 한자나 쌓였다는 내용이다. 마당에 서 있는 두 사람의 무릎 아래를 여백으로 남겨 밤새 눈이 쌓였음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좌씨 별장에서 열린 밤의 연회, 야연좌씨장(夜宴左氏莊), 이방운(李昉運, 1761~1815년 이후), 조선 18세기 말 ~19세기 초), 종이에 먹,

초승달과 별이 떠 있는 밤하늘 아래 두 인물이 거문고와 칼을 앞에 두고 마주보고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화면 좌측 상단에 쓰인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를 화제(畵題)로 한 시의도(詩意圖)이다. 시 아래에 찍혀 있는 ‘유련(流連)’이라는 인장을 통해 조선 후기 화가 이방운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방운은 조선 후기 화가들 중 가장 많은 시의도를 남긴 화가로, 이방운 특유의 구도와 필치를 잘 보여주는 이 작품은 현재 전하는 ‘야연좌씨장’을 다룬 시의도로는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명나라 심주를 본받아 그린 산수, 강세황(姜世晃), 1749년, 종이에 엷은 색. 옛 대가의 화풍에 따라서 그리는 방倣이라는 형태의 그림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중국 명나라 때의 화가 심주(沈周)를 모방하여 그린 두루마리 산수화이다. 방倣은 옛 대가의 그림을 따라 그리는 것을 넘어서서 필의(筆意), 즉 그림에 담긴 뜻과 필치를 본받는 것으로 문인화의 중요한 전통이었다. 심주는 남종화풍의 중요한 갈래인 오파(吳派) 화풍을 창시한 화가이다. 부드럽고 온화한 느낌은 강세황이 심주의 화풍을 잘 소화하였음을 보여준다. 강세황이 남종화풍(南宗畵風)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 문인화의 정신을 중요하게 생각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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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주를 따른 산수도, 방심석전산수도(倣沈石田山水圖), 심사정(沈師正), 1758년, 종이 엷은색

심사정이 51세 때인 1758년 가을에 서강 정영년에게 그려준 그림이다. 명대 오파(吳派)의 석전 심주(心柱)의 화법을 따랐다고 밝혔다. 근경과 중경 사이는 수면으로, 중경과 원경 사이는 옅은 안개로 채웠다. 모서리마다 각진 바위, 화면의 곳곳에 액센트로 찍은 진한 먹점 등은 심사정 화풍의 특징적 요소들이다. 강세황은 심사정이 중년 이후에 대부벽준을 쓰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는데, 중경의 절벽에 부벽춘이 구사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연못 위 정자에서 수업하는 두 인물, 이인문(李寅文), 15세기, 종이에 엷은 색

25점의 그림으로 구성된 화첩이다. 산수 표현에 능숙한 기량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괴석과 다양한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는 연못 위 정자에 두 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방석 위에 앉은 인물 앞에 책을 펴 놓고 앉아 있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낚시를 하고 있는 인물, 두 마리의 사슴, 빈 배 등의 소재와 맑은 담채가 잘 어우러져 서정적인 분위기로 그려졌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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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폭(九龍瀑), 이인상(李麟祥, 1710~1760), 1752년, 종이에 엷은 색
이인상은 28세인 1737년 당시 인제 군수였던 임안세를 모시고 금강산 여행을 하였다. 그 후로 15년이 지난 1752년에 그린 금강산 구룡폭 그림이다. 그런데 실제 구룡폭 경관과 전혀 비슷하지 않다. 이인상은 마음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일부러 색을 칠하지 않고 뼈대만 그렸다고 밝혔다. ‘이인상인(李麟祥印)’과 ‘보산인(寶山仁)’ 2개의 도장을 찍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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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바위, 수석도(樹石圖), 이인상, 1739년, 종이에 엷은 색

26세 때인 1739년에 그린 세 그루의 나무와 바위 그림이다. 추위에 놓인 나무의 모습에서 빼어냄을 찾아내고, 무늬가 있어 멋있는 바위의 모습에서 거침을 보았다. 추위에 놓인 모습의 빼어남, 무늬가 있는 멋스러움과 기질은 상반되는 개념이다. 이인상은 그 속에 서로 공존하는 천연의 경치를 보고 있다. 이 그림의 묘미는 들여다볼수록 점점 드러나는 바위의 윤곽이다. 물기가 많은 옆은 미필로 그려진 바위는 마치 그림자처럼 보일듯 말 듯 하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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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도, 이인상

OLYMPUS DIGITAL CAMERA산은 고요하고 해는 기네, 산정일장도(山靜日長圖), 이인문(李寅文), 1817년, 종이에 엷은 색

이인문은 김홍도와 함께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화원화가이다. 자를 문욱 호를 고송류순관도인이라고 했고, 산수화에 특히 뛰어났다. 이 그림은 중국 송나라의 문인 나대경(羅大經, 1196-1242)이 자신의 산거 생활을 묘사한 글인 <산정일정(山靜日長)>을 바탕으로 그린 병풍이다. 조선후기에는 복잡한 세상을 벗어나 자연을 벗아여 살아가고자 하는 선비의 생활을 그린 그림이 많이 그려졌다. 그 중에서도 산정일정도는 이름난 문인의 은거 생활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그림으로서 즐겨 감상되었는데, 글의 내용을 여덟장면으로 나누어 병풍으로 꾸미느는 경우가 많았다. 이 작품은 이인문이 73세 때 그린 것으로 여덟폭이 모두 갖추어져 있으며, 만년의 완숙한 기량이 돋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산수화의 준법(皴法). 준법이라 바위, 산, 나무를 그릴 때 입체감이나 표면의 질감을 표현하는 기법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단선점준(短線點皴), 2~3mm 정도의 짧은 선이나 점의 형태로 산, 언덕의 능선, 바위표면의 질감을 나타내는 준법이다. 조선시대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에 유행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피마준(披麻皴), 마(麻)의 올을 풀어서 늘어놓은 것처럼 선을 반복하여 그린것이다. 가장 많이 쓰이는 준법으로 바위 없는 산을 그릴 때 사용한다.

OLYMPUS DIGITAL CAMERA하엽준(荷葉皴), 연잎 줄기가 퍼져내려 간 것처럼 표현하는 기법이다. 주로 산봉우리나 물이 흘러 고랑이 생긴 산비탈 등을 나타낼 때 사용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우모준(牛毛皴), 소의 털과 같이 짧고 가느다란 필선으로 표현하는 기법이다. 피마준보다 짧고 가늘다.

OLYMPUS DIGITAL CAMERA미점준(米點皴), 붓을 옆으로 뉘어서 횡으로 쌀 모양의 점을 찍는 기법이다. 북송대의 화가 미불(米芾)이 창안하여 그의 성을 따른 것으로 주로 안개가 끼어 있거나 멀리 있는 산을 그릴 때 사용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수직준(垂直皴), 예리한 필선을 죽죽 그어 내린 기법으로, 정선이 창안하였다. 강하고 활달한 맛을 내며, 금강산 내외경의 뾰족한 바위산을 묘사하는데 많이 사용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부벽준(斧劈皴), 도끼로 나무를 찍었을 때 생기는 단면처럼 바위나 산의 질감을 표현하는 기법이다. 붓을 기울인 자세로 쥐고, 폭넓게 끌어당겨 형태를 만든다.

OLYMPUS DIGITAL CAMERA반두준(礬頭皴), 백반 덩어리와 같은 모양으로 그리는 기법이다. 모서리가 마멸되거나 부식된 작은 산봉우리를 묘사할 때 사용한다.

 

[중앙박물관 회화실] 초상화와 고사인물화(故事人物畵)

실제 생존했던 인물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는 당대의 상류층에서 가장 많은 공을 들여서 그렸던 그림이다. 이는 서양의 회화에서도 볼 수 있는 비슷한 경향으로 레오나르드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를 비롯하여 많은 걸작들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초상화는 왕의 초상을 그린 어진에서부터 관복을 입고 그린 사대부들의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들이 그려졌다. 인물화는 작가의 주관보다는 현재의 사진과 같은 의미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아주 세밀하고 정성스럽게 그려졌다. 인물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그 인물의 정신적인 특징을 반영하고자 하는 노력이 많았다. 중앙박물관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많은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지만, 회화는 많은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지 않다. 중앙박물관에는 국보 239호로 지정된 송시열 초상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초상화의 경향을 알 수 있는 다수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인물화로 이야기속에 전해오는 인물들을 그린 고사인물화(故事人物畵)와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가 있다. 고사인물화는 주로 중국의 유명한 인물들을 그린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우리나라 사람을 그린 경우도 있다. 이런 그림들은 삶에 교훈을 주거나 이야기속 주인공처럼 되고 싶은 소망을 담고 있는 그림이다. 도석인물화는 도교 또는 불교와 관련된 인물들을 그린 그림이다. 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대표적인 고석인물화로는 17세기 김명국이 선종의 시조 달마대사(達磨大師)를 그린 달마도가 있다. 또한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화가인 단원 김홍도는 도교적인 내용을 그린 여러 작품들을 남겼는데, 그중 대표적인 작품을 볼 수 있다. 자화상을 그린 윤두서가 그린 고사인물화도 볼 수 있다.

초상화
초상화(肖像畵)는 생존했던 인물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진(眞), 영(影), 상(像), 진영(眞影)이라고도 부른다. 훌륭한 인물을 본 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리기 시작하여 조상이나 스승을 섬기고 추모하기 위하여 그렸다. 초상화를 그린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확인되지만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때는 고려시대이다. 현재 남아 있는 초상화는 대부분 조선시대에 그려진 것이다. 인물의 신분과 성격에 따라 왕, 어질고 지혜로운 성현과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 벼슬이나 무벌이 높은 사대부, 여인, 승려의 초상이 전해진다. 특히 조선 후기의 사대부 초상은 관복이나 평상복 차림으로 많이 그려졌다. 초상화를 그릴 때에는 털 한 올이라도 본래의 모습과 차이가 나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정성을 들였다. 또 인물의 외모뿐만 아니라 인품과 학식 등 정신적인 면까지 표현하고 노력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중앙박물관 2층 회화실 중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는 공간. 전시작품은 많지 않지만 작품성이 뛰어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전시내용은 수시로 바뀐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원이나 영당 등에 모셔졌던 초상화 중 시대를 대표하는 초상화들이다.  대표적인 걸작으로 국보로 지정된 송시열 초상화와 윤두수의 자화상을 들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송시열 초상(宋時烈 肖像). 조선시대 초상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조선후기 지배계층이었던 서인이 영수이자 그들의 정신세계를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송시열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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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초상(宋時烈 肖像), 국보 239호, 작가모름, 조선, 18세기, 비단에 색,

평상복 차림인 심의(深衣)에 복건을 쓰고 공수 자세로 오른쪽을 향한 반신상이다. 송시열(1607~1689)은 평생 주자의 학설을 잇는 것으로 자부했다. 그의 제자들은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하였고, 후학들은 송시열을 추앙하고 존승하였다. 화면 상단에 어제와 1778년 간기(干記)가 있어서 18세기에 그려진 이모본으로 보인다. 얼굴의 주름과 수염에 가해진 섬세한 필치가 돋보이며, 옷 주름은 고른 선으로 간략히 표현되어 있다. 왼쪽 어깨가 오른쪽보다 약간 올라가 있으며 목이 앞으로 나온 구부정한 노인의 자세, 화면의 반을 차지하는 과장된 체구 등은 조선후기 학문과 사상을 지배한 거유(巨儒)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임경업 초상, 조선 19세기, 비단에 채색.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초상화 중 하나이다. 병자호란 당시 활약한 명장으로서의 기백이 넘치는 초상화이다.

임경업(1594~1646)은 조선 중기의 명장으로 본관은 평택, 자는 영배, 호는 고송, 시호는 충민이다. 1618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1624년에 이괄의 난을 평정하여 진무원종공신 1등이 되었다. 병자호란 때 진무원종공신 1등이 되었다. 병자화란 때 활약하다가, 끝까지 청에 맞서겠다는 의지를 버리지 않고 1643년에 명나라에 망명하여 명군의 총병이 되었다. 친명배청의식이 높았던 병자호란 이후 우국충정의 명장으로 인식되었으나, 결국 청의 승리로 조국에서 친국을 받던 중 장살되는 비운을 맞는다. 오사모에 푸른색 단령을 착용하고 정면을 향하고 앉은 관복전신좌상이다. 흉배는 인조대에 나라에 공을 세운 무인들에게 내려주었던 독특한 모양이다. 주인공 옆 탁자에 놓은 세한삼우(소나무, 매화, 대나무)는 그의 절개를 상징한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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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백 초상, 조선후기, 비단채색

이시백은 인조반정의 주역인 이귀의 장남으로 아버지 이귀, 동생 이시방과 함께 인조반정으로 정사공신에 녹훈되었다. 또한 최명길과 함께 병자호란에서의 패전 상황을 수습하고 대동법을 실시하여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효종대에 연양부원군에 봉해졌다. 사모를 쓰고 청색 단령을 입고 있는 반신상이다. 화면 상단에 “정사공신 영의정 연양부원군 충익공 조암이선생진상”이라 묵서되어 있다. 사모의 높이가 매우 낮고 모정이 평평하며 양각이 짧고 넓은 점, 흉배가 큰 점은 조선 중기 복식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유순정 초상, 조선후기, 비단채색

유순정은 본관 진주, 자는 지옹 시호는 무안, 문성이다. 1506년 중종 반정에 공을 세우고 정국공신 1등으로 청천부원군에 봉해졌다. 이어서 이과의 옥사를 다스려 정나공신1등에 책록되었다. 1509년 좌의정에 오르고 1510년에 부산포.내이포.염포 등 삼포에서 거주하고 있던 왜인들이 대마도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삼포왜란 때에는 직접 경상도도원수로 출정, 난을 평정했다.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반신상 초상화로 오사모에 금으로 그려진 한 쌍의 공작이 부착된 흉배를 착용하고 있다. 오사모의 양쪽 각이 둥글고 흉배가 금으로만 그려진 점은 조선 초기 공신 초상화의 특징이나 어깨 선을 각지지 않고 둥글게 처리한 점 등으로 보아 조선 후기의 이모본으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조경 초상, 17세기, 비단채색

조경(1541~1609)은 조선 중기의 무관으로 본관은 풍양이며 자는 사척, 시호는 장의이다. 임진왜란 때 수원부사로 재임하면서 적에게 포위된 독산성의 권율 장군을 응원하고 이듬해에 다시 도원수였던 권율과 함께 행주산성에서 대승하여 가선대부에 가자되었다. 서울이 수복되자 도성서도포도대장이 되고, 1596년에는 훈련대장이 되었다. 1599년 충청병사, 회령부사를 지냈으며 1604년에는 선무공신 3등에 책봉되고 풍양군에 봉해졌다. 오사모에 단호흉배가 부착된 흑색 단령을 착용하고 앉아 있는 전신교의 좌상이다. 바닥에는 채전이 깔려 있다. 얼굴과 이목구비, 수염을 그린 선이 매우 활달하다. 얼굴에는 붉은 빛으로 음영과 입체감을 표현하였는데 특히 광대뼈 쪽에 홍기를 두드러지게 가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이원익 초상, 17세기, 종이에 색

이원익(1547~1634)의 본관은 전주, 자는 공려, 호는 오리이다. 태동의 12번째 아들인 익령군의 4대손으로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명재상이다. 임진왜란 때 이여송과 합세해 평양을 탈환한 공로로 숭정대부에 가자(加資)되었다. 1624년 이괄의 난 때에는 80세에 가까운 노구로 왕을 호종하였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세자와 왕을 호위하였다. 모란 공작 흉배를 부착한 흑자색의 운문단 단령을 입고 앉은 관복전신교의좌상이다. 전신상 초상화이면서 종이 바탕에 초본 형식으로 그려진 점이 특이하다. 비단에 그려진 정본 초상화와는 달리 필치 구사와 채색 바탕이 매우 자유롭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남구만 초상, 작가모름, 비단에 색. 조선후기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의 온화한 표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남구만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로 시작되는 유명한 시조를 남긴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이었다. 남구만 초상은 녹포단령(깃을 둥글게 만든 푸른색의 공복) 차림에 양손을 앞으로 모아 소매 안으로 넣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모습은 조선시대 공신상의 전형을 보여준다. 사모는 높아지고 폭은 약간 좁아졌으며 18세기 이후에 등장하는 구름과 학이 포함되어 있다. 얼굴 살결은 이전에 비해 가는 붓으로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 이 영정 외에 남구만이 영의정 재직시에 모사한 영정이 현재 경기도 용인시 파담마을에 위치한 사당에 남아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윤봉구 초상, 작가모름, 18세기, 모시에 색. 복건을 쓰고 있는 꼿꼿한 선비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복건에 심의를 입은 반신상 한 점이 함께 첩으로 꾸며져 있다. 윤봉구는 호는 병계, 또는 구암이다. 권상하의 문인으로 대사헌을 지낸 성리학자다. 갈색 선으로 얼굴의 윤곽, 코 등을 그리고 선염을 가하여 입체감을 표현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이정보 초상, 작가모름, 조선 18세기, 강하면서도 꼿꼿한 인품을 잘 드러내고 있는 초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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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보 초상, 작가모름, 조선 18세기,

이정보(李鼎輔, 1693~1766)는 예조판서, 대제학에 이어 판중추부사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오른 사람이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시조(時調)의 대로서 78수의 작품을 남겼다. 쌍학 흉배가 달린 청색 단령(團領)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이목구비는 선으로 윤곽을 그린 후, 분홍색으로 밝고 화사하게 칠하였다. 짧은 선을 그어 양 볼의 양감을 살렸다. 종이품 이상의 학정금대(鶴頂金帶)를 착용하고 있어 이정보가 1748년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할 즈음의 모습으로 보인다. 신체에 비해 의자와 발받침대의 비중이 작고 장식적인 요소가 절제되어 있는 전신 초상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분무원종공신녹권(奮武原從功臣錄券), 1728년

OLYMPUS DIGITAL CAMERA공신녹권에 실린 초상화, 

1728년 이인좌의 난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분무공신 녹훈 관련 사적을 기록한 책이다. 분무녹훈도감에서 편찬하였다. 1등 공신에는 오명향, 2등 공신에는 박찬신.박문수 등 7명, 3등 공신에는 조현명 등 7명으로 모두 15명이 녹훈되었다. 책머리에 윤순이 쓴 분무토역반교문이 실려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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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이 하쿠세키 초상, 츠바키 산잔, 일본 에도, 1828년, 종이에 색, 우리나라 초상화에 비해 표현이 섬세하다.

에도 중기의 유학자이자 정치가인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1725)의 초상이다. 호피로 만든 방석 위에 허리에 칼을 찬 채 무릎 꿇은 자세로 앉아 있다. 짙은 눈썹과 연한 수염이 대조를 이루는 얼굴은 찌푸린 미간, 꾹 다문 입술 등을 통해 온화하면서도 의로운 인상을 풍긴다. 선 위주의 그린 이목구비에 연한 홍조를 띠게 함으로써 얼굴의 생기를 불어 넣었다. 초상을 그린 츠바키 산잔은 에도 후기의 문인화가로서 와타나베 카자(1793~1841)에게 그림의 사사를 받았다. 카잔이 투옥되었을 때, 산잔은 그를 구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고, 스승의 유족들을 보살폈다. 산잔은 명말청초의 운수평(惲壽平, 1633~1690)의 몰골과 담채의 기법으로 화훼도를 그렸다. 후쿠오카 현의 태수이 미나모토 요시의 찬문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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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인 초상, 작가 모름, 중국 청, 한국의 초상화와는 달리 사진을 찍은 듯한 사실적인 표현이 특징이다. 서양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권위의 상징물인 호피 위에 위엄 있게 정면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만주족 관리의 관복 좌상이다. 바닥에는 꽃무늬 채전(彩氈)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삿갓 모자를 쓰고 발 받침대 위에 다리를 벌린 채 앉아 있는 관리의 모습에서 전형적인 중국 초상화의 특징을 보여준다. 양손이 소매 밖으로 나오지 않고 가려져 있는 점이 다르다. 청색 조복(朝服)차림의 주인공은 큰 키에 시선의 교환을 통해 관자(觀者)와의 상호작용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다부진 인상을 풍긴다. 마치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보듯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영당
영당(影堂)이란 초상화를 모신 곳을 말한다. 국가에 큰 공을 세웠거나 삶의 모범이 된 충신과 학자 등의 초상화를 이곳에 모셨다. 영당에 초상화를 모신 이유는 선현의 훌륭한 업적을 후세까지 널리 전하고 조상의 높은 뜻을 일깨우는 데에 있다. 초상화를 모시는 풍습은 신라 말부터 시작되어 고려시대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고려시대에는 절에 영당을 지어 초상화를 모셨는데 이러한 전통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집 안에 짓는 사당이 가묘(家廟)가 발달하면서 영당도 많이 세워졌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영당과 영당에 모셔진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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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 초상, 안향상(安珦像), 작가모름, 조선 18세기, 비단에 색,

안향(1243~1306) 초상은 홍포(紅袍) 직령(直領)에 평정건(平頂巾)을 쓴 모습이다. 상단에는 그의 아들 안우기(安于器, 1265~1329)가 쓴 발문과 찬시가 있는데, 이것에 의하면 1318년 왕명으로 초상화를 그려 문묘에 봉안하고, 한 벌을 더 그려 고향인 홍주 향교에 모셨다고 한다. 이 초상은 이목구비를 또렷하게 표현하고, 원만한 몸체에 옷 주름을 곧고 간결하게 묘사하여 단아하고 엄정한 기품이 있다. 조선 후기의 이모본이지만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고려시대 초상화의 자료로서 중요하다. 안향이 도입한 주자학이 조선시대에 사상의 주류로 정리됨에 따라, 선학(先學)을 받들고 기리기 위해 초상화가 이모되고 전승되는 양상을 살펴볼 수 있어 의미가 깊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영당에 모셔진 초상, 18세기, 비단에 색

사모에 흉배 없는 담홍포(淡紅袍)와 삽은대(鈒銀帶)를 착용한 반신좌상이다. 화면에 주인공에 대해 알려주는 단서는 없으며 성모씨의 초상으로 전래되고 있다. 얼굴은 갈색 선으로 윤곽선과 이목구비를 뚜렷하게 표현하였다. 이마, 콧등, 콧망을, 귀에 붉은기를 주고 눈 주위와 법령에 음영을 넣어 입체감을 표현하였다. 옷주름은 다소 딱딱하며, 옷주름을 많이 묘사하지 않아 단정한 느낌을 준다. 얼굴 묘사에 있어서 콧날의 선과 눈두덩이, 법령 등을 윤곽선으로 표현하고 피부의 색조를 선염으로 나타낸 것으로 보아 18세기 중반경의 초상화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고사.도석 인물화
고사인물화(故事人物畵)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의 인물을 그린 것이다. 주로 중국의 유명한 인물을 그린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의 이야기를 그린 것도 있다. 이런 그림들은 삶에 교훈을 주거나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되고 싶은 소망을 나타내며, 때로는 현실을 풍자하려는 의도를 담기도 한다.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는 도교, 불교와 관련된 인물을 그린 그림이다. 도교의 소재로는 신선을 그린 것이 많으며, 장수와 화복 등을 상징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욱 좋아하였다. 불교의 소재로는 중국 선종의 시조인 달마(達磨)를 비롯하여 부처의 제자인 나한(羅漢)을 주로 그렸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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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 김명국, 17세기. 달마도는 우리나라, 중국, 일본에서 가장 많이 그려진 그림의 주제 중 하나인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달마도>라고 할 수 있다. 빠른 붓놀림과 과감한 생략 등을 통해서 그려진 상당히 수준 높은 그림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달마대사의 모습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달마대사의 모습은 이 그림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친 그림이다.

달마는 선종화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재로 손꼽히며, 김명국의 현존하는 그림 가운데 걸작이다. 측면을 향한 달마대사는 두건을 쓰고 있으며 팔자 눈썹에 부릅뜬 눈, 주먹같은 메부리코, 짙은 콧수염과 구레나룻 등의 생김새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보여준다. 9년동안 벽을 향해 좌선 수행행하였던 그의 진면목, 피안의 진리를 깨닫고자 힘쓴 그의 정신 세계를 단적으로 잘 보여준다. 빠른 붓놀림과 과감하게 생략한 표현 등은 김명국이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음을 말해준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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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명의 신선, 김홍도, 1779년, 비단채색. 단원 김홍도가 그린 신선도로 그가 그린 작품의 다양성을 잘 보여준다. 김홍도는 풍속화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도교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장면 등을 많이 그렸다.

표암 강세황의 화평이 매 폭마다 적혀있는 단원 김홍도의 인물화 중 한 폭이다. 마지막 제8폭에 적혀있는 글씨에서 1779년 그의 나이 35세 때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강세황은 김홍도에 대하여 ‘특히 신선과 화자를 잘하여 그것만 가지고도 한 세대를 울리며 후대에까지 전하기에 충분하다’고 한 바 있다. 이 그림은 칼을 차고 있는 여동빈을 가운데에 그리고, 그 위에 여동빈의 스승인 종리권, 제일 아래에 종리권의 선생인 동화자를 그린 <삼선도>이다. 유려하고 여유있는 김홍도 후대의 화풍과는 달리 딱딱한 선묘의 특징을 보인다. 바탕에는 담묵을 칠하여 고아한 분위기를 내고 있으며, 다양한 농도의 채색과 금채, 호분을 적절하게 구사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서원에서의 아취 넘치는 모임, 김홍도, 1778년, 비단에 엷은 색.

김홍도가 34세 때에 그린 고사 인물화이다. ‘서원아집(西園雅執)’이란 송나라 때 왕선(王詵)이 자신의 집 정원인 서원에서 친구인 소식(蘇軾)을 비롯한 당시 유명한 유학자, 승려, 도사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였던 모임을 말한다. 이 모임에 참여한 화가 이공린(李公麟)이 이를 그려 <서원아집도(西園雅執圖)>라 하였다. 이 그림은 우리나라에서도 고사인물화의 소재로 유행하였다. 그림의 내용은 탁자 위에서 서화를 완성하는 장면, 암벽에 동자를 데리고 시를 새기는 광경, 담소하며 비파를 타는 정경, 그리고 석교 건너편의 대나무 숲에서 한담하는 모습들이 그려져 있다. 소나무와 암벽에 보이는 필치는 김홍도가 30대에 정립한 독특한 표현법으로 필선이 명로하고 세밀하여 화려하고 말끔한 느낌을 준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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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에서 떨어지는 진단선생, 윤두서, 1715년, 비단에 색.

중국 북송 때의 학자 진단(陳摶)의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다. 나라가 다섯번이나 바뀌어 혼란하던 시절에 참된 군주를 기다리던 진단은 나귀를 타고 가다가 나그네로부터 우연히 조광윤(趙匡胤)이 송나라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나머지 그는 나귀에서 떨어지면서 “이제 천하는 안정되리라”고 외쳤다고 한다. 윤두서(尹斗緖)는 화사하면서도 산뜻한 청록을 써서 태평성대를 바라는 군주와 백성의 마음을 그림에 담았다. 숙종이 그림을 감상하고 덧붙인 시가 화면의 상단에 적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옛 왕후들의 이야기, 열조왕후도(列朝王后圖), 작가모름, 조선, 비단에 색, 송나라 태조(재위960~975)의 어머니 황태후 두씨(杜氏)가 아들 태조에게 백성을 위한 정치의 중요성에 대해 일꺠워 주고 있는 장면.

OLYMPUS DIGITAL CAMERA  송나라 영종(英宗, 재위1064~1067)의 황후 고씨(高氏)가 문병을 온 신하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이 그림은 중국의 역대 왕후의 행적을 그린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왕과 왕후의 사적을 궁중 화원들에게 그리게 한 기록들이 있다. 주문왕(周文王)의 후비인 제(齊) 효공부인(孝公夫人) 맹희(孟姬), 초(楚) 번희(樊姬), 한(漢) 명덕황후(明德皇后), 당(唐) 장손황후(長孫皇后), 송(宋) 인종(仁宗) 조황후(曺皇后) 등이 대표적이다. 이 그림은 송나라 태조(재위960~975)의 어머니 황태후 두씨(杜氏)가 아들 태조에게 백성을 위한 정치의 중요성에 대해 일꺠워 주고 있는 장면과 송나라 영종(英宗, 재위1064~1067)의 황후 고씨(高氏)가 문병을 온 신하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이러한 그림은 옛 성현들을 본받고 성찰과 교훈의 자료로 삼아 덕치를 행하기 위한 것으로 일종의 감계화(鑑戒畵)이다. <출처: 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공자의 행적, 성행도(聖行圖), 김진여(金振汝, 1675~1760), 조선 1700년, 비단에 색, 공자가 수레를 타고 여행을 하는 장면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공자가 제후를 만나는 장면으로 보인다.

김진녀는 평양출신으로 조세걸의 제자이다. 1713년 숙종어진도사에 어용화사(御用畵師)로 발탁될 정도로 설채에 남다른 재능을 지녔다. 이 화첩은 공자의 생애 동안 일어난 중대한 사건이나 일화를 그린 것이다. 원나라화가 왕진붕(王振鵬)이 그린 성적도(聖蹟圖)를 모사한 것으로 유소년기의 공자, 직무에 충실한 인품의 소유자, 박학다식한 면모, 교육자,공자의 가르침, 성인으로서의 남다른 혜안, 수양의 모습, 수난과 시기의 대상이 된 모습, 제자들의 공자 섬김과 덕행, 후대 왕들의 공자 받들기 등 공자와 주변 인물들의 일화들을 담고 있다. 전체적으로 정치한 솜씨를 띠며, 공자의 얼굴에 음영을 많이 가한 점, 시공간을 달리한 장면 배치 등이 흥미롭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초상화의 제작과정

조선시대 초상화의 제작은 그 절차가 매우 복잡하다. 여러 기록을 참고하여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1744)》 중 <이의현 초상>의 제작 과정을 추정하여 다음과 같이 재현해 보았다. 초상화 제작의 전체 과정 속에서 초본의 역할을 살펴 보면 보다 명확하게 초본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작품조사

OLYMPUS DIGITAL CAMERA유지(油紙) 초본 제작

OLYMPUS DIGITAL CAMERA비단 정본(正本) 제작

OLYMPUS DIGITAL CAMERA1) 유지 위의 유탄초(柳炭草), 2) 유지 위의 먹선초, 3) 유지 초본 뒷면의 색,

OLYMPUS DIGITAL CAMERA 4) 앞에서 유지초본 마무리 5) 유지초본 위에 비단을 올려놓고 먹선 그리기 6) 초본의 먹선 따라 그리기 완성,

OLYMPUS DIGITAL CAMERA 7) 비단 뒷면의 색, 8) 팡에서 비단 정본 마무리

 

[중앙박물관 회화실] 풍속화(風俗畵), 일상생활 모습을 그린 그림.

풍속화는 일상생활을 표현한 그림으로 산수화와 함께 조선시대 회화를 대표한다. 풍속화에서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감정, 옷차림 등을 실감나게 묘사하여 당시 사람들이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 준다. 간략한 선으로 사람과 풍경을 묘사하고, 과감한 생략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잘 묘사하는 가장 한국적인 그림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인 김홍도와 신윤복은 다른 분야 그림도 잘 그렸던 가장 뛰어난 화가였지만 그들의 진면목은 그들의 풍속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이 그린 풍속화는 현대인 기준에서도 표현이 섬세하고 그 수준이 상당히 높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해외 유수의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고고학박물관과 미술관의 성격을 같이 가지고 있는 박물관이다. 박물관에서 미술관 중 회화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은 2층에 마련되어 있다. 회화작품은 한국적인 미(美)를 잘 표현하고 있는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일생생활 모습을 표현한 풍속화를 비롯하여, 사당에 모시는 인물을 그린 초상화를 비롯한 인물화, 동양 회화를 대표하는 산수화, 민화와 궁중기록화 및 장식화, 부처를 비롯하여 불교에서 교화를 위해 그렸던 불교회화 등이 있다. 옛 사람들은 글, 글씨(서예)와 함께 그림 그리기를 중시하였다. 고구려벽화에서 삼국시대 그림의 수준이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불교탱화 작품들 많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개성이 뛰어난 산수화를 그렸으며, 조선후기에는 일상 생활 모습을 그린 풍속화, 실제 풍경을 그린 진경산수화 등이 나타났다.

회화(繪畵)
회화는 인간의 마음과 생각, 사회와 자연의 현상을 선과 면, 색으로 표현하는 예술이다. 일찍부터 순수 감상의 대사으로 여겨졌으나 제작 목적에 따라 공간을 장식하고 행사를 기록하는 등 그 종류와 성격이 매우 다양하다. 옛 사람들은 글씨와 그림을 ‘같은 뿌리에서 자란 것(同根異枝)’으로 보아 흔히 서화(書畵)라고 부르며 시와 글씨와 그림, 즉 문학, 서예, 회화가 함께 무르익은 경지(시서화일치詩書畵一致)에 이르기를 염원하였다. 특히 여가에 그림 그리기를 즐긴 문인화가들은 사물의 겉모습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것(형사形寫)을 넘어서 마음속에 품은 뜻을 나타내는 것(사의寫意)을 중요하게 여겼다. 우리나라의 회화는 선사시대의 바위그림과 청동기의 무늬 등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나 본격적으로 발달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다. 고구려 무덤벽화는 당시의 회화가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고려시대에는 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한 도화원(圖畵院)을 중심으로 이녕(李寧) 등 전문 화원들이 활약하였다.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삼은 조선시대에는 더욱 다양하게 그림을 그렸다. 중국 회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우리의 정서와 아름다움을 불어 넣어 독창적인 미술을 이루어 냈다. 15세기를 대표하는 안견(安堅), 강희안(姜希顔) 등은 문화의 꽃을 피운 세종대의 사회 분위기에 힘입어 회화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6, 17세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도 이징(李澄), 김명국(金明國) 등과 같은 뛰어난 화가들이 개성적인 화풍을 이룩하였다. 18세기에는 정선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김홍도의 풍속화 등 우리나라의 자연과 일상생활의 모습을 표현한 그림들이 나타났다. 19세기에는 김정희를 중심으로 화가들이 문인화(文人畵)에 깊이를 더하였으며, 이후 새로운 회화의 양상이 등장하면서 근대 화단으로 이어지는 변화를 보였다. <출처: 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중앙박물관 2층 회화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미술 작품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전통회화인 풍속화, 인물화, 산수화, 민화, 불교회화를 대표하는 주요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풍속화
풍속화(風俗畵)는 사람들의 일상생활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풍속 장면이 우리나라 회화에 처음 나타난 것은 고구려 무덤벽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풍속화라고 하면 18세기 무렵에 본격적으로 유행한 그림을 말한다. 그 당시에 풍속화는 인기가 매우 높아서 임금도 즐겨 감상하였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풍속화가는 김홍도와 신윤복이다. 김홍도는 대장간, 추수 광경, 서당, 씨름 등 삶의 이모저모를 익살스럽고 정겹게 표현하였다. 그의 풍속화는 마치 우리가 그 현장에 함께 있는 듯한 생생한 감동을 전해 준다. 신윤복은 기녀와 벼슬 없이 한가롭게 지내는 한량의 모습 등 남녀간의 감정을 은근하게 나타냈다. 산뜻하고 세련되 색채를 사용한 그의 풍속화는 김홍도의 그림과는 또 다른 멋이 있다. 풍속화는 당시 사람들의 옷차림, 살아가는 모습 등을 실감나게 묘사하여 선조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포구에서 항아리와 광주리를 맨 아낙네를 표현한 <매염파행(賣塩婆行)>, 강가에서 배를 기다리는 광경을 그린 <진두대주(津頭待舟)>, 대장간에서 쇠를 두드리는 장면인 <노변야로(路邊冶爐)>, 술이 취한채 판결을 내리는 장면인 <취중송사(醉中訟事)>

OLYMPUS DIGITAL CAMERA 들녁에서 목화 따는 아낙을 바라보는 선비를 그린 <파안흥취(破鞍興趣)>,  <소를 타고 가는 아낙네를 살펴보는 나그네>, 벼타작을 하는 장면을 그린 <타도락취(打稻樂趣)>, 당나귀와 물새가 서로 만나 놀라는 장면을 그린 <과교경객(過橋驚客)>,

세상살이 엿보기, 행려풍속도(行旅風俗圖), 김홍도, 조선 1778년, 비단에 엷은 색, 이 그림은 선비가 세상을 유람하면서 마주치게 되는 광경들로 구성되어 있는 1778년 김홍도의 나이 서른넷에 강희언의 집 담졸헌(澹拙軒)에서 그린 것이다. <노변야로(路邊冶爐)>에서는 대장관에서 쇠를 두드리는 장면과 주막에서 밥을 먹는 나그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진두대주(津頭待舟)>는 강가에서 배를 기다리는 광경이, <매염파행(賣塩婆行)>은 포구에서 항아리와 광주리를 머리에 인 아낙, <파안흥취(破鞍興趣)>는 들녁에서 목화 따는 아낙들을 바라보는 선비의 모습을 담고 있다. <과교경객(過橋驚客)>은 당나귀와 물새가 서로 놀라는 돌발적인 상황을 설정하여 생동감을 더해준다. <타도락취(打稻樂趣)>에서는 벼타작은 신분 계층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표현은 <취중송사(醉中訟事)>에서도 은유적으로 드러나 있다. 표암 강세황의 감상평은 그림의 격조와 흥취를 높여준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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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이기>, 보물 527호로 지정된 단원풍속도첩은 풍속화의 소재를 총망라하여 그린 총 25폭의 화첩이다. 서민들이 사는 모습을 생동감과 해악성이 풍부한 그림들이다. 풍속화는 조선시대 많이 그려졌던 <의궤> 등 기록화와 비슷한 형태이지만 작가의 주관과 의도가 아주 생생하게 반영되었다. 배경을 간단하게 처리하고 장면만을 강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생활의 정감이 배어나고 생동감이 넘친다. 짜임새 있는 구성과 투박하지만 힘있는 필선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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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 일에 몰두하고 있는 대장간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 벌겋게 달군 히를 두드리며 행여나 불꽃이 튀거나 실패할까봐 조심스러워 하는 모습이 생생하다. 옆에서는 완성된 낫을 갈고 있어 현장감을 배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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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동, 춤추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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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파안(路上破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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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길> 상업이 발달된 조선후기의 생활상을 볼 수 있다. 장터에서 장사를 마친 이들이 말을 타고 돌아오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여유있게 담배를 피우는 이들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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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윷놀이> 나무를 하러 산에 왔던 총각들이 짐을 내려놓고 윷놀이에 정신이 팔려 있다. 발을 모은 구경꾼은 무슨 수를 쓰는지 알겠다는 듯 슬며시 웃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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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상> 배경을 생략하고 등장인물의 자세와 표정만으로 화면을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행상을 하고 있는 남녀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아기를 업고 치마를 올려 묶은 여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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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터> 김홍도, 아낙들이 개울에서 빨래를 하고 뒷쪽에 선비가 이를 훔쳐보고 있다. 해학적이고 풍자적은 풍속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일상의 풍경,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 보물527호, 김홍도, 조선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 <단원풍속도첩>은 소탈한 서민 생활을 해학과 정취를 곁들여 생생하게 묘사하여 당시의 사회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등장하는 인물의 모습과 작품의 소재 등을 보면 김홍도가 즐겨 그린 것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을 정도로 조선후기 풍속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주변의 배경을 생략하고 인물을 중심으로 묘사한 것으로서 연습삼아 그린 작품처럼 보이면서도 투박하고 강한 필치와 짜임새 있는 구성을 띠고 있다. 김홍도의 풍속화는 당시 서민들의 삶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이에 대해 강세황은 <김홍도가 풍속화를 그릴 때, 한 번 붓이 떨어지면 손뼉을 치며 신기하다고 부르짖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평하였다. 김홍도 특유의 짜임새 있는 구성과 투박하지만 힘있는 필선이 돋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평안감사 부임 축하잔치, 월야선유도>이다. 당시 평양감사의 위세와 평양성의 모습을 화려한 색감과 필치로 잘 묘사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평안감사 부임 축하잔치, 월야선유도(月夜船遊圖), 전 김홍도, 19세기, 종이에 색,새로 부임한 평안감사를 환영하여 평양의 대동강가에서 벌어진 잔치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궁중이나 관청에서 열린 행사를 그리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 그림은 특정한 행사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방 관아의 일상화된 풍속을 그린 풍속화이다. 대동강변의 실경과 밤낮에 걸쳐 벌어진 잔치의 분위기를 잘 전달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세상살이 엿보기, 행려풍속도(行旅風俗圖), 신윤복, 조선 1813, 비단에 엷은색, 김홍도의 행려풍속도와는 따른 신윤복만의 독특한 풍자와 해학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은 장기와 씨름을 즐기는 인물들(野遊), 나들이 나온 여인들이 젊은 승려에게 길을 묻는 모습(路上問僧), 더운 여름 나무 아래에서 더위를 식히며 담소를 즐기는 모습(樹下納凉), 나귀를 탄 나그네가 여행을 떠나는 장면(騎驢渡橋) 등 총 네폭으로 이루어져 있다. 1813년 여름에 그림 이 그림은 김홍도의 행려풍속도에서 흔히 보이는 일상적인 모습 외에도, 장옷 입은 여인들의 나들이 모습에서 신윤복이 즐겨 그린 소재임을 알 수 있다. 인물들의 모습은 작게 그려진 반면 산수의 비중이 크고, 섬세하고 감각적인 필치로 묘사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장기와 씨름을 즐기는 인물들(野遊)

OLYMPUS DIGITAL CAMERA나들이 나온 여인들이 젊은 승려에게 길을 묻는 모습(路上問僧),

OLYMPUS DIGITAL CAMERA더운 여름 나무 아래에서 더위를 식히며 담소를 즐기는 모습(樹下納凉),

OLYMPUS DIGITAL CAMERA나귀를 탄 나그네가 여행을 떠나는 장면(騎驢渡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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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 줄 고르기>, 서민들이 일상생활을 많이 그렸던 김홍도 풍속화와는 달리 신윤복은 도시에서 일어나는 남녀간의 풍류를 즐겨 그렸다. <여속도첩>은 그의 풍속화에 자주 등장하는 기녀와 여인의 모습을 따로 떼어 낸 듯한 여섯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섬세한 필치와 고운 채색을 쓴 그의 그림은 여인네의 모습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전해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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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잣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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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네 쓴 여인>

OLYMPUS DIGITAL CAMERA<아기 업은 여인>, 신윤복,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 배경이 없는 작은 화면에 아기를 업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그렸다. 훤칠한 키에 가녀린 몸매, 항아리 같이 넓은 치마에 풍성한 가채를 얹은 젊은 여인이 그려졌다. 짤고 꼭 끼는 저고리 밑으로 젖가슴이 드러나 있는데, 젖먹이 어린 아이를 등에 업은 모습에서 모성애가 느껴진다. 화면 여백에는 부설거사가 그림을 보고 미인도를 즐겨 그린 중국 당의 화가 주방의 그림에 빗대면서도 어린아이를 업은 모습에서 평범하지 않은 솜씨를 언급하고 있어 흥미롭다. 그림 왼쪽 위에는 ‘혜원신가권자덕여(蕙園申可權子德如)’라는 표제가 쓰여져 있다. 신윤복이 풍속화의 대상으로 즐겨 그린 조선시대 여인의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다. 훤칠한 키에 가채를 장식한 머리, 젖가슴이 드러난 저고리, 바닥에 끌린 유난히 긴 치마 등 당시 유행한 복식과 여인의 머리 형태를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표현하였다. 여인의 표정이 진지한 데 반해 등에 업힌 어린아이의 모습은 마냥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여 정감을 준다.  <출처:중앙박물관>

여인들의 모습, 여속도첩(女俗圖帖), 신윤복, 조선 18세기, 비단에 엷은 색, 신윤복은 화원(畵員)을 지낸 신한평(1726~1809 이후)의 아들로서 김홍도와 더불어 조선후기 풍속화를 이끌어간 대가였다. 그는 주로 기생과 한량이 펼치는 풍류(風流)와 애정행락(愛情行樂)을 대담하게 그려 시대상의 단면을 반영하고 있다. 인물의 모습은 부드러운 필치로 그린 다음 청록, 빨강, 노란색 등으로 화려하게 채색하였다. 신윤복은 김홍도와는 달리 주변 배경을 치밀하게 설정하여 주변 분위기와 인물의 심리묘사에 치중한 점이 돋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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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놀이, 전 윤덕희, 18세기, 비단에 먹,

조선시대 아이들의 공기놀이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버드나무 아래 두 사내아이가 공기놀이를 하고 있고, 바람개비를 손에 들고 구경하는 아이가 옆에 서 있다. 윤덕희는 풍속화를 여러 점 남긴 공재 윤두서의 아들로 호는 낙서 연옹 등이며 벼슬은 정릉현감을 지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벼베기. 승려와 원숭이, 심사정,  김홍도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심사정이 그린 풍속화이다.

18세기 비단에 먹,심사정의 호는 현재로 조선후기에 활동한 문인화가다. 산수, 영모, 인물 등 다양한 분야의 그림을 그렸다. 심사정의 풍속화로는 드물게 남아 있는 예로, 농촌 풍속의 장면을 사실감 있게 담아냈다. 노승의 지팡이를 잡아 당기는 원숭이는 승려의 소재에 재미를 곁들이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겨울철 장으로 가는 행렬, 전 이형록, 19세기 비단에 엷은 색, 이형록은 19세기에 활동한 화원 화가로 자는 여통, 호는 송석이다. 이 화첩에 실린 <설중향시도>는 눈 덮힌 설경이 널찍하게 펼쳐진 동네 앞길에 황소를 앞세우고 장에 가는 행렬이 늘어서 있는 정경을 약간 높은 시점에서 내려다 본 것으로 행렬속의 말에 가해진 청색과 주황색의 대비 효과로 화면에 생기를 주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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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나르기(부옹負甕), 오명현(吳命顯), 조선 18세기, 비단에 엷은 색,

오명현은 평양출신으로 자를 도숙(道叔), 호를 기곡(箕谷)이라고 했다. 그의 생애, 교유관계, 작품 활동 등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윤용(1708~?), 조영석(1686~1761)의 뒤를 이어 개성미와 현장 사생의 참신함을 잘 살린 화가로서 유명하다. 이 그림은 옹기를 지게에 지고 가는 벙거지를 쓴 인물을 생기있게 묘사한 것으로서 일상의 단면을 담담하게 구사한 오명현의 개성이 엿보인다. 현장감 있는 사생력, 먹의 농담을 살려 화면 한쪽에 치우치게 한 배치, 일상에서 찾은 소재 등에서 윤두서와 조영석의 작품을 연상시켜 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연광정에서의 환영 잔치, 연광정연회도(練光亭宴會圖), 작가 모름, 조선 19세기, 종이에 색, 평안감사가 벌렸던 연회 장면을 그린 일종의 사가행사도(私家行事圖)로 당시 살았던 사람들을 모습을 표현한 풍속화 성격도 같이 가지고 있다.

이 그림은 새로 부임해 온 평안감사를 위해 마련한 연회 장면이다. 잔치는 관서팔경(關西八景)의 하나인 연광정(練光亭)에서 열렸다. 평양성과 대동강을 배경으로 서 있는 연광정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조감하여 그렸다. 연회도는 궁중행사를 그리던 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당시 지방 관아의 일상과 풍류를 잘 보여준다. 평안감사는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여인들을 바라보고 있으며, 연광정 바깥에는 선비들을 포함한 많은 인파들이 구경을 하고 있다. 평양성 내성(內城)의 동문인 읍호루 안쪽에는 행인들, 소를 끄는 인물, 물동이를 나르는 사람, 포졸 등 다양한 인물과 풍물을 실감나게 묘사하여 번화한 성 안의 모습을 잘 전해준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삶의 일생, 평생도(平生圖), 작가모름, 조선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한사람의 일생을 그린 평생도는 사가행사도와 함께 많이 그려졌던 그림으로 오늘날 기념사진첩과 같은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사대부(士大夫) 일생에서 기념이 될 만한 일들을 그린 풍속화이다. 출세(出世)와 입신양명(立身揚名)을 보여주는 오늘날의 기념사진과도 같다. 그림의 구성은 돌잔치, 혼인, 회갑 등과 같은 통과의례나 과거급제 후 삼일동안 인사를 다니는 삼일유가(三日遊街), 벼슬길과 부임행차(赴任行次) 장면 등으로 되어 있다. 이 그림은 소과(小科)에 응시하는 장면과 관직에 나아간 지 60주년을 기념하는 회방례(回榜禮)와 회혼례(回婚禮) 장면이 눈에 띤다. 세부적인 표현을 소흘히 하지 않고 등장인물의 다양한 표정까지 잘 포착하여 꼼꼼하게 그린 점이 돋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