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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동궁과 월지(사적), 안압지로 불렸던 월지(月池)

경북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신라 궁궐 후원 연못인 월지(月池)이다. 안압지(雁鴨池)로 잘 알려진 이 연못은 동궁 영역에 있지만 국가적인 연회를 베푸는 경복궁 경회루 연못과 같은 기능과 위상을 갖는 곳이다. <삼국사기>에 문무왕 때(674년) 궁궐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짐승과 새를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연못의 규모는 동서 200 m, 남북180 m 정도이다. 궁궐 전각이 있는 서쪽과 남쪽은 석축을 높게 쌓아 직선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데 반해 북쪽과 동쪽은 들쭉날쭉한 곡선으로 되어 있다. 연못에는 발해만 동쪽에 있다는 삼신도를 본떠서 만든 크고 작은 3개의 섬을 배치하고 북쪽과 동쪽에 무산12봉을 상징하는 언덕을 조성해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안압지로 불렸던 경주 월지(사적)>

OLYMPUS DIGITAL CAMERA<야경>

SANYO DIGITAL CAMERA<직선적인 연못 서쪽 석축과 연회가 열렸던 누각 건물들>

OLYMPUS DIGITAL CAMERA<야경>

조선시대 궁궐 연못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天圓地方)’는 우주관을 반영하여 직사각형 연못에  섬을 배치한데 비해 도교 신선사상이 많이 반영되어 신선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당나라 장안의 대명궁 후원 연못인 태액지(太液池)와 비슷한 분위기를 주고 있다. 대명궁 태액지 주변에는 도교사원, 불교사찰 등이 있었는데 안압지에서 불상 등 불교관련 유물이 출토되는 것으로 볼 때 비슷한 종교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동궁과월지<경주 동궁과 월지>

SANYO DIGITAL CAMERA<첫번째 누각 건물에서 보이는 섬>

OLYMPUS DIGITAL CAMERA<야경>

SANYO DIGITAL CAMERA<2번째 섬과 주변 숲>

SANYO DIGITAL CAMERA<1번째 섬과 2번째 섬>

안압지는 서쪽과 남쪽은 직선이지만 변화를 주었고 동쪽과 북쪽은 들쑥날쑥한 곡선으로 석축을 쌓아  한번에 연못 전체 경치를 볼 수 없다. 북쪽과 동쪽에는 신선이 사는 무산12봉을 상징하는 언덕을 조성해 놓고 있다. 그 중 큰 연회가 열렸던 제3건물터 누각 건물과 마주보고 있는 동쪽 호숫가를 화려하면서 신비롭게 조성해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경복궁 경회루처럼 국가적인 연회가 열렸던 제3건물터 복원건물>

OLYMPUS DIGITAL CAMERA<야경>

SANYO DIGITAL CAMERA<2번째 섬 뒷편 봉우리>

SANYO DIGITAL CAMERA<북쪽에서 본 모습>

배는 연못 동쪽에서 뒤집힌 채 발견되었다. 세쪽의 나무를 통째로 파낸뒤 이물과 고물쪽 뱃바닥에 참나무 각재를 가로질러 조립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압지  출토 통나무 배>

연뭇 북서쪽에는 작은 규모의 연회을 열 수 있는 정자 건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북쪽 언덕은 자연스러운 풍경을 만들고 있다. 북동쪽 긑에는 물을 빼는 배수 시설이 당시의 나무물마개가 꽃힌채로 발견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안입지 북서쪽에 있는 제5건물터 복원 건물>

 

SANYO DIGITAL CAMERA<3번째 섬>

SANYO DIGITAL CAMERA<가까운데서 본 3번째 섬>

SANYO DIGITAL CAMERA<연못 배수시설이 있던 북동쪽 모서리로 들어가는 물길>

SANYO DIGITAL CAMERA<3번째 섬과 안압지 북쪽 석축>

SANYO DIGITAL CAMERA<안압지 북쪽 석축과 봉우리들>

안압지에서는 소.말.돼지.개.노루.산양.사슴.멧돼지, 그리고 꿩.오리.닭.거위.기러기 등의 뼈가 많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궁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 <삼국사기> 내용이 사실임을 보여준다.

OLYMPUS DIGITAL CAMERA<산양뼈>

OLYMPUS DIGITAL CAMERA<맹금류, 기러기, 꿩의 뼈>

SANYO DIGITAL CAMERA<배수시설이 발견된 북동쪽 모서리>

SANYO DIGITAL CAMERA<동쪽 연못가 수로>

SANYO DIGITAL CAMERA<수로에서 보이는 풍경>

장석에 4개의 구멍을 뚫어 물을 빼는 배수 시설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에 사용했던 나무물마개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나무물마개>

연못 동남쪽 모서리에는 연못에 물을 대는 시설인 두개의 수조가 있는데, 수위 조절과 함께 물의 낙차를 이용, 산소를 연못에 공급함으로써 수질의 부패를 방지하는 효과를 거두었음을 알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외부에서 안압지을 들어오는 물길>

SANYO DIGITAL CAMERA<연못에 물을 대는 시실인 수조 유구>

SANYO DIGITAL CAMERA <수조에서 연못으로 흐는 물길>

SANYO DIGITAL CAMERA<연못으로 연결되는 물길, 끝에 작은 폭포가 있다.>

수조 유구
화강석으로 만든 이 수조는 연못으로 흘러 들어가는 입수로에 놓여 있는데 40 cm 높이의 차이를 두고 2개가 연결되어 있다. 반월형으로 안쪽을 깎아 내어 물을 고이게 하였고 가장자리에는 용으로 보이는 조각의 흔적이 있다. 수조 좌우에는 큰 간설을 놓고 가장자라에 벽석을 세워 공간을 마련한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 물놀이를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잔잔히 흐르는 물을 모아 폭포를 이루어 연못으로 흐르도록 변화를 주었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태액지(太液池)는 대명궁 북쪽에 있는 황실정원으로 연꽃이 아름다워 연엽지(蓮葉池)라고도 불렀다. 태액지는 동쪽과 서쪽에 2개의 연못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쪽이 더 큰 규모이다. 서쪽 연못은 인덕전과 함께 황실을 찾은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경복경 경회루 연못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으며 동쪽 연못은 황실 가족을 위한 공간이다. 태액지는 안압지(월지)처럼 타원형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다. 서쪽 연못 가운데에는 작은 섬을 두어 신선이 사는 봉래산을 구현하고 있다. 연못 북쪽에는 여름 별궁에 해당하는 함량전(含凉殿)과 도교사원, 불교사찰 등이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중국 시안 당 대명궁 태액지>

1970년 발굴조사 결과, 기와를 비롯하여 건축부재와 장식물, 금동여래삼존상을 비롯한 금동불상,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그릇을 비롯한 생활용품, 당시 문자생활을 보여주는 목간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압지 출토 금동판 불상(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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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여래입상>

자물쇠 중에는 ‘사정당북의문’, 동궁아일’ 등 명문이 있는 것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명문은 자물쇠가 사용되던 장소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안압지 주변의 ‘사정당’과 ‘동궁’이라고 부르던 건축물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궁아일(東宮衙鎰)’명 자물쇠>

주령구(酒令具)는 연회장에서 흥을 돋우기 위한 놀이도구의 하나로 육각형이 8면, 정사각형이 6면인 14면체이다. 각면에는 주령구를 굴린 사람에게 어떤 행동을 지시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발굴당시 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기는 하지만 실물을 복원 중 불타버렸다.

 

OLYMPUS DIGITAL CAMERA<목제놀이기구, 주령구(복제품)>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Cultural Heritage Wiki, 문화재청, 2022년
  5. 위키백과, 2022년

경주 동궁과 월지(사적), 임해전지와 신라 별궁터

경북 경주시 인왕동 일대에 있는 신라 왕궁 별궁터이다. 신라 태자가 머물던 거처를 중심으로 국가적인 행사나 귀한 손님을 맞을 떄를 연회를 베풀던 곳으로 동궁 이상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문무왕 때(674) 큰 연못을 파고 꽃과 나무를 심어 정원을 조성다는 기록과 경순왕이 왕건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는 “안압지의 서에는 임해전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발굴조사 결과 연못 서쪽에는 크고 작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되었으며 그 중 연못 서쪽 건물터 중 3곳과 연못을 복원하였다. 당나라 장안의 대명궁 후원 태액지가 거의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다. 경주와 신라를 대표하는 장면 중 하나로 손꼽힌다.

SANYO DIGITAL CAMERA<경주 동궁과 월지(사적)>

OLYMPUS DIGITAL CAMERA<야경>

궁궐 안에 연못을 파다 ( 674년 02월(음) )
2월에 궁궐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 (삼국사기 권 제7 신라본기 제7,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동궁을 짓고 문의 이름을 정하다 ( 679년 08월(음) )
동궁(東宮)을 짓고 처음으로 궁궐 안팎 여러 문의 이름을 정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7 신라본기 제7,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태조가 왕을 찾아가다 ( 931년 02월(음) )
5년(931) 봄 2월에 태조가 5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경기(京畿)에 이르러 만나 뵙기를 청하였다. 왕이 백관(百官)과 교외에서 맞아 궁으로 들어와 상대하는데 간곡하게 정성과 예의를 다하였다. 임해전(臨海殿)에서 잔치를 벌였는데 ~ (삼국사기 권 제12 신라본기 제12,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경주 동궁과월지<경주 동궁과 월지(사적) 일대>

안압지 서쪽에는 발굴, 조사 결과 회랑지를 비롯하여 26곳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건물 배치는 출입문, 별궁 정전처럼 보이는 주건물과 편전처럼 보이는 뒷편 건물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고 마당 동쪽 안압지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누각 용도의 건물들이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들을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동쪽 누각을 제외한 건물 배치는 불국사 대웅전 영역이나 조선시대 궁궐 정전 영역과 비슷하다. 확인된 건물 중 하나가 <삼국사기> 등에 기록된 임해전(臨海殿)인 것으로 추정된다.

SANYO DIGITAL CAMERA<안압지 동쪽 발굴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발굴 건물터를 기준으로 재현한 모형>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형>

발굴 건물터
발굴 조사 결과 안압지 주변에는 26개소 (주 건물터 및 회랑터)의 크기가 각각 다른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그중 연목 서쪽가의 5개 건물터 중 3개소에만 건물 추정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재현하였다. 그 나머지 23개소의 건물터는 발굴된 유구를 발굴 전의 형태로 덮고 그 위에 성토하여 건물의 기단부를 새로 만들어 재현하였다. 초석은 신라 시대의 초석 모습 그대로 화강석을 사용하여 재현하였다. 이들 건물터 중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임해전(臨海殿)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나 확실하지는 않다. 새로 만들어 놓은 초석은 모두 267개로서 회랑터를 제외한 주 건물에만 설치하였다.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안압지 연못 남쪽에도 비교적 큰 규모 건물터가 있다. 건물 배치나 형태 등으로 볼 때 실무적인 용도의 부속건물인 듯 하다.

SANYO DIGITAL CAMERA<출입문 앞 동쪽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출입문 앞 동쪽에 있는 부속 건물터>

앞쪽 가운데 있는 건물터는 임해전지 영역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인 것으로 보인다. 궁궐 정전처렴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출입문과 회랑 건물터>

출입문을 들어서면 정전처럼 보이는 주건물터를 중심으로 회랑으로 둘러싸인 마당이 있으며 안압지가 있는 동쪽에 누각형태의 제1 건물터가 있다. 정전 건물 뒷편으로는 편전이나 사찰 강당처럼 생활공간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SANYO DIGITAL CAMERA<동궁 영역 중심 건물로 보이는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정전처럼 보이는 주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주건물터 영역>

주건물이 있는 영역 동쪽 제 1 건물터에는 복원된 건물이 있다. 발굴, 조사  결과와 안압지 출토 유물 등을 고려 하여 건물을 복원하였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단층 누각 건물이다. 복원된 건물 규모로 볼 때 소규모 연회를 가졌던 공간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복원된 제 1건물>

SANYO DIGITAL CAMERA<안압지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야경>

복원 건물: 제 1 건물
발굴 조사 결과 확인된 연못 서쪽가의 5개 건물터 중 현재 복원된 3동의 건물(제1, 2, 5 건물)은 원래 기단부가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을 복원하고 건축부재는 목부재와 기와 등 출토유물을 본따 신라 시대의 원형대로 추정 재현한 것이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목조 팔작지붕으로 건평 103 ㎡, 건물 높이 9 m의 누각 형태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주건물 뒷편으로는 약간 긴 형태의 건물터가 남아 있다. 경복궁 건물 배치를 고려하면 정전 뒷편 편전에 해당하는 공간으로 보인다. 주건물이 대규모 공식행사를 하는 공간이라면 뒷편은 회의 등 일상적인 업무나 생활을 하는 공간인 것으로 보인다. 사찰 가람배치에서는 강당이 자리잡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뒷편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서쪽편 회랑과 뒷편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뒷편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동쪽편 회랑 건물터>

건물을 따라서 빗물이르 흐르도록 만든 배수로로 추정되는 석조 유구를 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석조 유구>

석조 유구
건물터를 따라 연결되는 이 석조 유구(石造 遺構)는 건물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흐르도록 만든 뚜껑없는 배수로로 생각되며 물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게 되어 있어 그 끝은 연못에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남아 있는 석조 유구는 그 일부분으로서 길이가 83 m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주건물이 있는 영역 뒷편 모퉁이에는 복원된 제 3건물을 볼 수 있다. 안압지 풍경을 감상하기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건물로 앞면 5칸, 옆면 4칸 규모의 상당히 큰 누각건물이다. 경복궁에서 국가적인 연회가 열렸던 경회루와 같은 기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임해전(臨海殿)이 8차례 등장하는데 대부눈 큰 연회를 베풀었다는 내용이다. 이 건물이 임해전으로 보이는데 확인된 것은 아니다.

SANYO DIGITAL CAMERA<제 3건물>

OLYMPUS DIGITAL CAMERA<제 3건물 야경>

복원 건물: 제 3건물
발굴 조사 결과 확인된 연못 서쪽가의 5개 건물터 중 현재 복원된 3동의 건물(제 1, 3, 5건물)은 원래 기단부가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을 복원하고 건축부재는 목부재와 기와 등 출토 유물을 본따 신라시대의 원형대로 추정 재현한 것이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목조 팔작지붕으로 건명 187 ㎡, 건물 높이 10 m의 누각 형태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안압지 서쪽은 석축을 높게 쌓았는데 석축에는 5개의 돌출된 건물지가 있다. 다양한 규모의 누각 건물들이 있어 다양한 경치를 감상할 수 있게 해준다.

SANYO DIGITAL CAMERA<다양한 규모의 누각 건물들이 있는 안압지 서쪽 석축>

OLYMPUS DIGITAL CAMERA<야경>

SANYO DIGITAL CAMERA<제 1건물과 제 3건물 사이의 1칸 규모의 건물터>

SANYO DIGITAL CAMERA<제1 건물과 제 3건물 사이 석축>

SANYO DIGITAL CAMERA<제 3건물과 제 5건물 사이의 석축과 건물터>

뒷편에 있는 제5건물은 앞면 3칸의 단층 목조건물이다. 뒷마당에 약간 떨어져 있는 누각 건물로 안압지 호수와 동궁 누각 건물들이 만드는 경치를 감상하기 좋은 곳이다.

SANYO DIGITAL CAMERA<제 5건물지>

SANYO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제 5건물지>

복원 건물: 제5건물
발굴 조사 결과 확인된 연못 서쪽의 5개 건물터 중 현재 복원된 3동의 건물(제1, 3, 5건물)은 원래 기단부가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을 복원하고 건축부재는 목부재와 기와 등 출토 유물을 본따 신라시대의 원형대로 추정 재현한 것이다. 이 건물은 정면 3칸의 단층 목조 사모 지붕으로 건물 43.5 ㎡, 건물높이 9 m로서 이 건물텉터 주변의 연못 속에서 나온 돌난간 부재를 본따 난간을 복원하였다.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발굴 건물터>

경주 임해전지, 사적, 경북 경주시 인왕동
이곳은 통일신라시대 별궁 안에 있던 것으로 그 안에는 임재전을 비롯한 부속 건물들과 정원이 있었다.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귀한 새와 기이한 짐승들을 길었다. 임해전은 931년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는 등의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군신들의 연회나 귀빈 접대 장소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못 이름은 원래 월지(月池)였는데 조선시대에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어 ‘안압지(雁鴨池)’라고 부르게 되었다. 1975년 준설을 겸한 발굴조사에서 산라 떄 축조되었던 안압지의 모습을 거의 확인하였고, 임해전터에서 출토된 보상화문전에 새겨진 기년명으로 궁궐의 축조 연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苑池)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Cultural Heritage Wiki, 문화재청, 2022년
  5. 위키백과, 2022년

 

 

시안 당 대명궁(大明宮) 유적

중국 시안에 있는 당나라 황궁이었던 대명궁(大明宮) 유적이다. 당 고종 때(662년) 처음 지어져 220년 동안 당나라 황궁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당나라 초기에는 장안성 안에 있는 수나라 때 정궁으로 지은 태극궁을 사용했으나 습하고 벌레가 많아 이궁(離宮)으로 건설되었는데 당 고종 때 대대적을 수리하면서 정궁이 되었다. 당나라 말 황소의 난(875 ~ 884년) 이후 지방 병마절도사들의 반란으로 파괴된 후 황궁의 기능을 상실했다.

대명궁은 궁궐배치의 기준이 되는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의 원칙을 제대로 따르고 있다. ’3문3조(三門三朝)’의 원칙에 따라 황실가족의 생활공간인 내조(內朝), 집무공간인 중조(中朝), 신하들이 집무공간인 외조(外朝)가 담장으로 분리되어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건물은 정전인 함원전(含元殿), 편전인 선정전(宣政殿), 내전인 자신전(紫宸殿)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선정전 서쪽에 영녕전(永寧殿)과 외조에 해당하는 궐내각사 등이 있었다. 내전인 자진전 뒷편에는 태액지(太液池)라는 큰 연못이 있으면 넓은 정원에는 황실에서 숭상했던 도교사원 등이 들어서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당 대명궁 유적>

OLYMPUS DIGITAL CAMERA<유적 입구에 세워진 기념 조형물>

OLYMPUS DIGITAL CAMERA<대명궁 유적지 들어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대명궁 유적지 공간배치도>

OLYMPUS DIGITAL CAMERA<입구 매표소>

 외조(外朝), 함원전 바깥 영역

외조(外朝)는  궁궐 바깥 영역으로 대명궁에서는 오문(午門)에 해당하는 단봉문(丹鳳門)에서 정전에 해당하는 함원전까지 길이 630 m의 넓은 공간을 말한다. 함원전을 중심으로 외국 사신의 접견, 황제 즉위식 등 국가의 중요 행사가 열리는 공간이다. 베이징 자금성이나 서울 경복궁의 경우 정전 정문까지 공간을 말하며 그 기능의 거의 비슷하다. 함원전 월대 아래로 바깥세상과 궁궐을 공간적으로 분리하는 금수(錦水)라 불리는 수로가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함원전 앞 광장>

함원전(含元殿, Hanyuan Hall) 함원전은 대명궁(大明宮) 중심축에 있는 첫번째 건물로 궁궐 의례 공간인 정전(正殿) 영역의 중심건물이다. 기록에 따르면 당 고종 14년(663년)에 완공되었으며 886년까지 224년 동안 사용되었다. 함원전 영역은 정전, 복도, 동.서 누각, 종루와 고루, 통로(龍尾道)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함원전 앞에는 넓은 광장과 외부세계와 분리해주는 역할을 하는 수로가 있다. 건물 양쪽에는 신하들이 대기했던 조당(朝堂)이 있었으며 양쪽 누각 아래에 함원전으로 오르는 통로가 있다. 건물 뒷편에는 내전을 출입하는 선정문(宣政門)이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명궁 정전인 함원전>

OLYMPUS DIGITAL CAMERA<함원전 건물 모형>

함원전은 높게 쌓은 월대 위에 세워졌는데 고고학적 조사에 따르면 건물 바닥은 동서 76.8 m, 남북 43 m, 높이 3.46 m의 3층 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함원전 월대는 수로(水路)로 둘러싸여 있으며 북쪽으로 내전으로 연결되는 길이다. 함원전 양쪽에는 비슷한 높이 큰 누각인 서봉루와 상란각이 있으며 건물들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날개가 있는 봉황의 형상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함원전 터에 복원해 놓은 월대>

월대는 벽돌로 쌓았으며 양쪽에 월대를 오르는 계단이 있고 가운데 정전 건물이 세워져 있다. 월대는 자금성 태화전과 마찬가지로 3층으로 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함원전 월대>

OLYMPUS DIGITAL CAMERA<아래에서 본 함원전 월대>

OLYMPUS DIGITAL CAMERA<함원전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건물 바닥에 깔려 있는 전돌>

OLYMPUS DIGITAL CAMERA<남아 있는 건물 구조물>

함원전은 중국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궁궐 건축물이다. 전면에 14개이 기둥이 있고 기둥 사이 간격은 5.35 m이다. 측면에는 6개의 기둥이 있으며 간격은 4.6 m이다. 전체 62개의 기둥을 받치는 추춧돌이 있었는데 그 중 일부만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현재까지 남아 있는 주춧돌>

OLYMPUS DIGITAL CAMERA<건물기둥을 받치는 주춧돌>

당육전(唐六典)”에 “함원전(含元殿) 양쪽에는 누각이 있는데 동쪽에 상란각(翔鸞閣), 서쪽에 서봉각(栖鳳閣)이라 한다.”라 기록되어 있다. 누각은 새의 날개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으며 함원전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봉황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이런 형태의 건물을 오봉루(五鳳樓)라고 하며 자금성 정전 입구에 있는 오문(午門)이 이런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원래는 상란각이라 불렀든데 지금은 난상각 (鸞翔閣)이라 부른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 상란각(翔鸞閣),  Luanxiang Pavilion) 터>

OLYMPUS DIGITAL CAMERA<아래쪽에서 본 상란각 월대>

OLYMPUS DIGITAL CAMERA<서쪽 서봉각(栖鳳閣) 터>

OLYMPUS DIGITAL CAMERA<아래에서 본 서봉각 월대와 함원전을 오르는 통로>

동조당(东朝堂)은 난상각 아래 있는 건물로 서봉각 아래 서조당과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함원전이 있는 정전 영역을 구성하는 주요 건물이다. 당 고조 때(662년) 함원전과 함께 세워졌다. 이 건물은 신하들이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기다리는 장소이다. 태자와 승상이 관리들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했다.

OLYMPUS DIGITAL CAMERA<월대 아래 동조당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서조당 건물터>

함원전 뒷편으로는 편전인 선정전(宣政殿)과 내전인 자신전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선정전 서쪽에 영녕전(永寧殿)과 외조에 해당하는 궐내각사 등이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함원전에서 선정전으로 내려가는 계단>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함원전>

 함원전 양쪽으로는 성벽 수준의 높고 견고한 담장이 세워져 와조와 중조를 분리하고 있다. 이를 제이도궁장(第二道宮墻)이라 한다. 지금읜 옛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제이도궁장>

중조(中朝), 치조(治朝) 또는 조정(朝廷)이라 불렸던 정치의 중심 공간

중조(中朝)는 치조(治朝)라고도 하며 궁궐에서 국왕이 신하들과 함께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이다.  자금성이나 경복궁은 국가적인 행사기 치러지는 정전(正殿)이 치조의 중심공간이나 대명궁은 편전에 해당하는 선정전(宣政殿)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반면에 정전인 함원전은 외조 공간의 중심이 되고 있다. 황제와 신하들의 정치공간인 조정(朝廷)은 선정전 마당을 말하며 선정전 좌우에 궐내각사에 해당하는 중서성, 문하성, 어사대, 전중내성(殿中内省) 등 황제 직속 기관들이 들어서 있었다. 경복궁의 경우 동쪽은 왕세자의 공간인 동궁(東宮)이, 서쪽에 국왕직속 기관들이 모여있는 궐내각사가 배치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중조(中朝)함원전과 선정전 사이 공간>

선정전에서 130 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선정문(宣政門)은 함원전과 선정전을 연결하는 유일한 출입문이다. 당문종(唐文宗) 재위시 황제는 실권자였던 환관을 죽일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는데 이를 “감로지변(甘露之变)”이라 한다. 당시 황제는 선정문을 통해 선정전으로 탈출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다. 양쪽으로 중서성 등 황제직속 기관들이 있는 궐내각사 출입문인 월화문(月华門) 등이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선정문 모형>

선정전(宣政殿, Xuanzheng Hall)은 함원전에서 북쪽으로 약 300 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선정전은 대명궁에서 함원전 다음으로 큰 건물로 신하들의 접견, 과거시험 합격자 발표, 사신 접견 등 공식적인 행사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자금성 건청궁 선정전은 대명궁에서 중요한 장소이지만 아직 발굴되지 않고 있다. 선정전터에는 벽돌과 나무로 옛 형태 일부를 재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선정전과 조정>

OLYMPUS DIGITAL CAMERA<선정전 터 내부>

선정전 건물을 앞면 11칸의 중층 건물로 대명궁에서 함원전 다음으로 큰 건물이다. 건물 형태는 가운데 5칸은 나무로 만든 판문이, 양쪽 3칸 씩은 창문이 있는 벽으로 되어 있다. 통일신라와 일본에서 이런 양식 거대 건축물들이 많이 세워졌다. 봉정사 극락전 등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건축물에서도 볼 수 있는 형태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선정전 모형>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선정전터>

OLYMPUS DIGITAL CAMERA<선정전 앞 조정>

대명궁 중조(中朝)는 선정전 좌우로 직속 관청들이 있는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서쪽에 당의 정치제도인 3성6부 중 법령 초안을 입안하는 중서성, 최고 감찰기구인 어사대, 전중내성과 창고 등이, 동쪽에 문하성을 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館), 정책 연구기관인 홍문관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과는 달리 황세자를 위한 동궁은 두고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선정전 동쪽 중서성 등 궐내각사가 있었던 옛터>

중서성(中書省)은 문하성.상서성과 함께 당나라 최고 정치기구인 3성 중 하나이다. 황제가 내리는 조칙과 국가법령 초안을 작성하는 등 황제를 보좌하면서 정책을 결정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중서성 장관은 중서령(中書令)이라 불렸으며 우상(右相)이라고도 한다. 상서성  장관인 상서령을 실제로 두지 않기때문에 최고의 관직이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중서성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중서성 모형>

어사대(御史台) 중서성(中書省) 남쪽과 월화문(月华門)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어사대는 당나라 최고 감찰기관으로 조선시대 사헌부에 해당하는 기관이다. 고위직 관원을 감찰하는 기관으로 조선시대 사헌부는 의정부와 함께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어사대 옛터>

전중내성(殿中内省院落)은 중서성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주로 황실과 궁궐 관청에 식사와 의복, 의약 등을 제공하는 업문를 수행했다. 창덕궁 궐내각사에도 내의원과 약방이 홍문관 뒷편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전중내성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전중내성 건물 모형>

경림고(琼林庫), 대영고(大盈庫)는 황실의 보물을을 보관하는 창고로 조선시대 내탕고(內帑庫)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그 위치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당나라 백자에 그 이름이 남아 있다. 이곳에 보관된 보물들을 황제가 신하들에 하사하는 용도 등으로 사용되었다. 전중내성과 서쪽편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창고 건물터에 전시해 놓은 조형물>

함원전과 마찬가지로 선정전 건물을 중심으로 양쪽에는 제삼도궁장(第三道宮墻)이라는 높은 담장이 있었으며 그 안쪽으로 내전에 해당하는 전각들이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선정전 동쪽편 제삼도궁장(第三道宮墻) 터>

OLYMPUS DIGITAL CAMERA<궁장을 재현해 놓은 모습>

내조(內朝), 황제와 가족들의 생활공간

내조(內朝)는 황제와 가족들이 생활하는 생활 공간으로 연조(燕朝)라고도 부른다. 내조에는 황제가 일상적으로 머무는 공간인 자신전(紫宸殿, Zichen Hall)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황실가족들이 거처하는 생활공간과 불교사찰, 도교사원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서쪽에는 신하들을 접견하는 공간인 연영전(延英殿)과 사정전(思政殿), 최고 학술기관인 한림원(翰林院), 공식 연회 공간인 인덕전(麟德殿)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이는 경회루, 수정전(옛 집현전) 등이 서쪽에, 자경전(慈慶殿) 등이 동쪽에 배치된 경복궁과 같은 공간배치이다. 자신전 뒷편으로는 경주 반월지(안압지)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는 큰 연못인 태액지(太液池)와 여름 별궁인 함량전(含凉殿)과 다양한 수목이 심어져 있는 넓은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명궁 내조>

자신전(紫宸殿, Zichen Hall)은 선정정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함원전과 함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다. 당 고종 때(663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내전의 중심건물로 황제가 거처하면서 일상적인 업무를 논의하는 공간이었다. 내부는 전실과 후실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전실에서는 업무를 처리하고 후실은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었다. 당나라 최고 관료들만 자진전에 출입할 수 있었다. 서쪽에 있는 사정전과 연영전이 일상 업무를 처리하고 신하와 외국 특사를 접견하는 공식 장소였지만 황제는 자진전을 많이 사용하였다. 자진전 건물터는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건물터에 철골구조로 옛 자진전 목재 구조를 재현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자신전터, 철골로 목조건축물 구조를 재현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자신전 건물 모형, 앞면 9칸의 2층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자신전 구조물 모형>

OLYMPUS DIGITAL CAMERA<자신전 건물터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자신전 정문인 자신문(紫宸門)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자신전 앞 마당>

OLYMPUS DIGITAL CAMERA<자신전 담장터>

연영전(延英殿, Yanying Hall)은 자신전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황제과 고위 관리들과 국무를 논의하고 군사적인 결정을 내린 장소이다. 황제는 국가적인 공식행사를 제외하고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하던 곳으로 당나라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연영전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연영전 영역 건물 모형>

OLYMPUS DIGITAL CAMERA<건물터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연영전 출입문과 부속건물터>

사정전(思政殿, Sizheng Hall)은 연영전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황제가 신하들에게 상을 주거나 간단한 연회를 여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당후기 황제의 권력약화로 국정을 관료들과 환관들이 국사를 처리했는데 자진전이나 연영전은 황제의 공간이었기때문에 주로 사정전에 모여 업무를 처리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정전 건물터>

사정전과 연영전 뒷편으로는 함상전(含象殿), 명의전(明義殿), 시정원(侍政院), 내시별성(內侍別省) 등의 건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건물 이름으로 볼 때 황제를 보필하는 환관들이 근무했던 공간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정전 옆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사정전 뒷편 건물터>

자신전 뒷편으로는 침전인 연옆전(蓮葉殿)을 비롯하여 온실전(溫室殿), 선휘전(宣徽殿)같은 생활공간과 불교사찰인 명덕사(明德寺)가 있었으며 태액지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는 청휘각(淸暉閣) 같은 휴식공간이 자리잡고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자신전 뒷편>

OLYMPUS DIGITAL CAMERA<자신전 동쪽편 건물터>

후원(後苑)

태액지(太液池)는 대명궁 북쪽에 있는 황실정원으로 연꽃이 아름다워 연엽지(蓮葉池)라고도 불렀다. 태액지는 동쪽과 서쪽에 2개의 연못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쪽이 더 큰 규모이다. 서쪽 연못은 인덕전과 함께 황실을 찾은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경복경 경회루 연못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으며 동쪽 연못은 황실 가족을 위한 공간이다. 사각형을 하고 있는 경회루 연못과는 달리 경주 반월지처럼 타원형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다. 서쪽 연못 가운데에는 작은 섬을 두어 신선이 사는 봉래산을 구현하고 있다. 연못 북쪽에는 여름 별궁에 해당하는 함량전(含凉殿)과 도교사원, 불교사찰 등이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명궁 태액지>

OLYMPUS DIGITAL CAMERA<태액지 옛모습을 그린 그림>

함량전(含凉殿, Hanliang Hall)은 태액지 동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료에 따르면 황실은 여름 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함량전을 세웠다. 함령전은 물방울을 뿌려주는 냉방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함량전 모형>

<출처>

  1. 안내문, 시안시, 2019년
  2. 위키백과, 2020년
  3. 百度百科, 2020년

부여 백제문화단지, 백제 왕궁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합정리 백제문화단지에 재현해 놓은 사비기 백제 왕궁이다. 재현해 놓은 백제왕궁은 정전에 해당하는 중궁과 동궁,서궁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배치 등은 부소산성 아래 관북리 유적(사적 428호) 발굴.조사 결과 확인된 건물터와 후대 궁궐 건물 배치를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건축물의 양식은 백제기술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일본 나라의 동대사 금당 건물의 양식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여 관북리유적(사적428호)은 백제 왕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여러 차례의 발굴조사과정을 통해 대형 전각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터, 연못, 우물터, 기와로 만든 배수관 등이 확인되었다. 연못터에서는 백제시대의 기와 및 토기편, 목간, 짚신, 금동제귀걸이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또한 백제의 토목기술을 보여주는 진흙을 다져 포장한 도로와 왕실에 필요한 철기, 금속제품을 만들던 공방과 창고 등의 건물터도 발견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부여 백제문화단지에 재현해 놓은 백제 왕궁. 정전에 해당하는 중궁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문(文)에 관한 집무를 보던 동궁이, 서쪽에 군사와 관련된 집무를 보던 서궁이 배치되어 있다. 당시 절터나 후대 궁궐에서 볼 수 있는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는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부여 백제문화단지에 재현해 놓은 옛 사비성의 정문이다. 삼국시대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치미가 눈에 띄는 앞면 5칸의 2층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정문을 들어서면 정전에 해당하는 중궁 출입문이 보인다. 출입문은 앞면 5칸의 2층 건물이며, 양쪽에 회랑건물로 연결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편 동궁 출입문과 회랑.

OLYMPUS DIGITAL CAMERA서쪽편 서궁 출입문과 회랑

OLYMPUS DIGITAL CAMERA왕궁 정전에 해당하는 천정전. 앞면 7칸의 2층 건물이다. 조선시대 궁궐과는 달리 가운데 3칸은 판문으로, 양쪽에 창살이 있는 창문이 있다. 봉정사 극락전과 일본 나라 동대사 금당에서 볼 수 있는 건축양식이다. 지붕에는 치마로 장식하여 웅장함을 더해주고 있다.

사비궁 중궁(Central Palace), 백제 사비시기의 중궁을 재현해 놓은 곳이다. 정전인 천정전은 국가의 큰 정사를 하늘에 고하여 결정했다는 천정대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 곳 중궁의 정전은 왕의 즉위 의레, 신년 행사 등 각종 국가 의식이 거행되고, 외국사신을 맞이하는 왕궁 내의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다. (백제문화단지,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고려시대 이후에 볼수 있는 주심포, 다포계, 익공계와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는데, 주심포 계열과 비슷하게 만들었다. 일본 나라 동대사 금당 건축양식을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천정전 내부로 들어가는 출입문. 일본 나라의 동대사 금당이 비슷한 형태의 출입문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나무 창살이 있는 창문.

OLYMPUS DIGITAL CAMERA백제 건축의 영향을 받은 것을 알려진 일본 나라 동대사 금당. 삼국시대 금당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건축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회랑으로 둘러져 있는 정전 앞 마당. 경복궁 정전 영역과 비슷하며 삼국시대 사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공간배치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회랑내부.

OLYMPUS DIGITAL CAMERA군사와 관련된 업무를 보는 편전에 해당하는 공간인 서궁 앞쪽에 인덕전, 뒷편에 무덕전이 자리잡고 있다.

 

정전이 있는 중궁 서쪽편에는 무반에 관련된 업무를 보던 서궁이 자리잡고 있다. 서궁(West Palace)은 정전과 외전으로 구성되었다. 정전인 무덕전은 서궁에서 가장 중심적인 건물로 왕이 평소 집무를 보는 공간이다. 주로 무관에 관한 집무공간으로서 무는 서쪽을 의미한다. 외전인 인덕전으로 태평성대에 나타나는 영물인 기린의 덕을 의미한다. (백제문화단지,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서궁 외전에 해당하는 인덕전, 앞면 5칸의 단층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인덕전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는 일정적인 업무공간인 무덕전이 자리잡고 있다. 앞면 7칸의 큰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서궁은 독립된 공간으로 회랑으로 둘러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편에는 문반과 관련된 업무를 보는 공간인 동궁이 자리잡고 있다. 왕궁에서 일상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동궁(East Palace)은 정전과 외전으로 구성되었다. 정전인 문사전은 동궁에서 가장 중심적인 건물로 왕이 평소 집무를 보는 공간이다. 주로 문관에 관한 집무공간으로서 문사전의 문은 동쪽을 의미한다. 외전은 연영전으로 신하들의 집무공간이며 천하의 인재를 맞이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백제문화단지,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동궁 외전에 해당하는 연영전.

OLYMPUS DIGITAL CAMERA연영전 내부. 신하들과 일상적인 회의를 하는 공간을 재현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 있는 문사전은 동궁에서 가장 중심적인 건물로 왕이 평소 집무를 보는 공간이다. 동중, 중궁과 마찬가지로 앞면 7칸의 단층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내부에는 닫집이 있은 어좌가 놓여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궁 회랑.

OLYMPUS DIGITAL CAMERA동궁 뒷편 회랑. 생활공간과 연결되는 출입문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왕궁 뒷편 언덕에 세워진 정자.

OLYMPUS DIGITAL CAMERA부여 관북리 유적(사적 428호) 대형건물터. 왕궁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터이다.

<출처>

  1. 문화재청
  2. 부여박물관
  3. 백제문화단지.

익산 왕궁리 유적(사적),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 확인되는 궁궐터

전북 익산시 왕궁면과 금마면에 있는 왕궁리 유적(사적)이다. 오층석탑이 남아 있던 이곳은 마한의 도읍지설 등 다양한 의견들이 있었으나 발굴.조사 결과 백제후기에서 통일신라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 확인되는 중요한 유적이다. 유적은 백제 무왕 때 조성은 궁성 영역과 백제말 또는 통일신라 때 조성된 사찰영역이 혼재되어 있다.

궁성은 치밀한 계획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중국의 영향을 받아 남북 490 m, 동서 240 m 정도의 직사각형 형태의 넓은 공간이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후대의 궁궐과는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앞쪽에는 정전과 동.서쪽 장랑으로 구성된 정전 영역을 두고 있다. 가운데에는 업무공간인 편전과 생활공간인 내전에 해당하는 영역으로 크고 작은 건물터가 확인되고 았다. 오층석탑과 금당, 강당이 일렬로 배치된 사찰 영역은 백제말 이후 궁궐 건물들이 사찰로 바뀌면서 그 형태가 약간 바뀐 것으로 보인다. 사찰 뒷편으로는 큰 연못과 다양한 수목들이 심어진 후원 영역이 있었으며, 서쪽 담장 안쪽으로 관청 건물과 부엌, 공방, 화장실 등 다양한 건물터가 확인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익산 왕궁리 유적지. 삼국시대 백제 무왕이 조성한 궁성와 사찰 유적이 같이 있는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
왕궁리 유적지 공간배치. 대형 건물터와 장랑 건물터가 정전 영역이 앞쪽에 있으며, 사찰영역으로 바뀐 편전, 내전 영역, 뒷편의 후원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백제 말 또는 통일신라 때 사찰로 바뀌면서 규모가 축소되면서 건물배치도 일부 바뀐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왕궁리 유적지.

왕궁리 유적
왕궁리유적은 백제 무왕대의 궁성지로서 남북 490여 m, 동서 240여 m의 장방형 구조를 갖고 있다. 현재 이 유적은 궁성과 사찰 유적의 두가지 성격으로 구분되는데 궁성은 백제 무왕대 축조되어 운영되다가, 백제 말경에 사찰 중심으로 성격이 변화되어 9세기 통일신라 말까지 존속되었다. 궁성은 치밀한 계획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크게 보면 남과 북으로 2분하여 남편 대지는 중심거주 공간으로 활용하고 북편은 후원형태로 사용하였다. 평면 구조는 중국 도성제의 영향을 받아 장방형의 구획을 하였는데, 내부 공간을 활용하기 위하여 경사진 면에 축대를 축조하여 계단식으로 평탄 대지를 조성한 후 그 대지 위에 건물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공간들은 남에서부터 앞마당->궁전 건물지->생활 건물지-> 뒤뜰 정원 순으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서북면에는 공방지가 있어 왕실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제작하였다. 사찰은 궁성지 위에 남북 일직선상의 중심축을 기준으로 탑->금당->강당을 배치하였다. 창건 연대는 백제 말경이며 통일신라 말기까지 운영되었다. 목탑이 소실되어 통일신라대에 새로이 축조된 것을 알려진 국보 289호 왕궁리 오층석탑에서는 1965년 해체.복원과정에서 금제금강반야경판과 수정 사리병 등 사리장치가 발견되어 국보 123호로 지정되었다. (왕궁리유적전시관,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백제 궁성 정문. 궁성은 동서 240 m, 남북 490 m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정문이 있었단 이곳에서 왕궁리 유적지의 이정표인 오층석탑이  한눈에 들어온다.

OLYMPUS DIGITAL CAMERA궁성 남측 담장(동쪽편). 최근에 발굴.조사를 진행하면서 원래 형태를 추정해서 복원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남측 궁궐 담장
궁궐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으로 동서 길이가 약 240 m, 남북이 약 490 m의 직사각형이다. 담장의 폭은 3 m정도로, 잘 다듬은 석재를 쌓아 올려 만들었다. 담장의 안팎으로 돌을 깔아 보도를 만들고, 담장 경계인 석렬시설을 설치하였다. 부속시설로는 물 빠짐을 위한 수구와 배수로가 있고, 동.서.북측에 각 1개소, 남측에 3개소의 궁궐문터가 발견되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궁성 남측 담장(서쪽편)

건물지
왕궁리유적에서 건물지는 지금까지 백제시대 건물지 14기, 통일신라 건물지 6기, 고려시대 건물지 1기 등 총 21기가 조사되었다. 백제시대 건물지는 기단의 축조 재료에 의해 석축기단 건물과 와적기단 건물로 구분되며, 초석의 유무에 따라 초석건물과 굴립주건물, 적심의 조성방법에 따라 적심건물과 토심적심건물로 구분할 수 있다. 중요 건물지는 대부분 초석을 사용한 기단 건물지와 와적기단건물지, 굴립주건물지도 확인되고 있다. 건물지의 위치를 보면 정전 건물지는 중문의 중심축과 같은 선상에 있으나 나머지 건물은 사찰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제거되어 금당지와 강당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중심에서 벗어나 동편에 치우쳐 있다. 정전 건물지는 왕궁리 유적의 중문에서 들어가면 접할 수 있는 첫번째 건물이며, 유적 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건물로서 주변에서 수부명 기와가 출토되고 토심적심의 특이한 기초공법이 확인됨에 따라 정사를 돌보던 곳이나 의례, 의식을 행하던 정전 건물로 추정되고 있다.   (왕궁리유적전시관,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정문을 들어서면 첫번째로 볼 수 있는 대형건물터. 앞면 7칸, 옆면 4칸의 대형건물이 있었던 곳으로 왕궁 중심축에 위치하고 있다. 공식 행사가 열렸던 정전과 비슷한 성격의 건물로 보인다.  그런데, 궁궐 정전 영역이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넓은 마당과 회랑을 두고 있지 않다. 백제의 궁궐 건물에는 적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형 건물터
이 건물터는 왕궁리 유적 건물터 중 가장 크다. 건물은 정면 7칸(31 m), 측면 4칸(15 m)의 크기로 남문과 같이 왕궁의 남북 중심축에 있다. 규모나 건축 기법, 위치로 볼 때 대규모 집회나 연회 등에 사용한 건물로 추정된다. 이 건물터에는 대형 건물의 기둥을 받치기 위한 독특한 건축 기법이 사용되었다. 즉, 커다란 구덩이를 파서 그 속에 점토를 단단히 다져 넣고 기둥을 세운 토심 구조를 말한다. 부여 관북리 백제 유적에서도 이와 규모와 건축 기법이 비슷한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궁성 담장 안쪽 발굴 현장.

OLYMPUS DIGITAL CAMERA대형 건물터 뒷편 서쪽편에 있는 작은 건물터이다. 석축을 넘어 안쪽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루와 비슷한 성격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터
위치와 구조로 보아 석축을 넘나들기 위한 출입시설로 추정되는 건물터다. 동서방향 석축에서 튀어 나와서 양쪽으로 면을 맞춰 돌을 쌓았는데, 동서 길이가 약 8 m, 남북이 약 7 m, 높이 0.6 m 정도가 남아 있다. 석축의 동쪽에도 비슷한 건물터가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동쪽편 출입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건물터.

건물터
왼쪽 건물터는 위치와 구조로 볼 때, 석축을 넘나들기 위한 출입시설로 추정된다. 동서방향 석축에서 튀어나와 양쪽으로 면을 맞춰 돌을 쌓았는데, 동서 길이가 약 6 m, 남북이 약 4 m 가량 남아 있다. 석축의 서쪽에도 비슷한 건물터가 있다. 오른쪽 건물터는 원형 추춧돌 3개와 기초시설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한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로 추정된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왕궁 앞쪽 대형 건물터가 있는 공간과 업무.생활 공간이 있는 영역은 석축으로 분리되어 있다. 동.서방향으로 길이 95 m의 석축 흔적이 남아 있다.

석축
석축은 왕궁 안에서 동서 방향으로 4개, 남북 방향으로 2개가 발견되었다. 비탈진 땅을 평평하게 다지려고 석축을 쌓았는데, 잘 다듬어진 돌을 먼저 쌓고 막돌과 점토로 뒤채움을 하였다. 동서 방향의 첫번째 석축을 길이 95 m, 높이 0.9 m인데, 원래 높이는 2 m 정도로 추정된다. 석축 근처에서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 중국 청자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당시 왕궁 내 생활상과 대외교류, 왕궁의 축조시기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왕궁리 오층석탑(국보 289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높이 9 m의 거대한 석탑으로 1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려 놓고 있다. 기단부가 낮아 균형미는 떨어지는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왕궁리오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구(국보 123호, 7세기 전반), 함께 출토된 불상과 함께 제작연대가 9기말 ~10세기 초로 알려졌으나, 미륵사지 사리구가 발견되면서 백제 때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왕궁리 오층석탑, 국보289호
미륵사지 석탑을 본떠서 만든 백제계 석탑이다. 높이가 9 m인 이 석탑은 단층기단, 얇고 넓은 옥개석, 3단의 옥개 받침 등이 특징적이다. 1965~1966년에 해체.복원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여러 유물이 발견되었다. 제1층 옥개석 중앙과 기단에서는 금강경판 19장, 금동제 사리함, 사리병 같은 사리장엄구(국보123호), 석탑 밑에서는 가로 16.8 m, 세로 12.7 m인 건물 기초가 발견되었다. 이 건물 기초를 보면 이 석탑은 본디 목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석탑 주변에서는 ‘왕궁사’, ‘관궁사’, 대관관사’, ‘대관궁사’라는 글자가 적힌 통일신라 시대 명문 기와가 여럿 출토되었다. 지금도 이 탑의 축조 시기를 놓고, ‘백제, 통일신라, 고려 초’라는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왕궁리 오층석탑 뒷편에 있는 건물터. 금당터와 오층석탑 사이에 있는 건물터이다. 일반적인 경우 목탑이 있는 위치이다. 사찰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 보인다.

건물터
궁궐조성을 위한 기초시설로 보이는 동서방향 석축의 중간에 들어서 있다. 땅을 판 후 잘 다듬은 석재를 1~2단으로 쌓아 터를 만들었다. 한 변의 길이가 12 m인 정사각형 건물로 추정된다. 건물터 주변으로 기와를 잇댄 토관을 설치하여 배수처리를 하였다. 위치와 구조로 보아 사찰의 중요한 건물로 추정된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오층석탑 동쪽편에 있는 건물터와 남북방향 석축

건물터
왕궁리 유저지의 건물터는 대개 동서 방향의 석축들 앞에 있다. 건물터는 사찰 이전의 왕궁 건물터와 사찰 건물터에서 45곳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는 땅을 파서 다지고 그 위에 주춧돌을 놓은 토심 구조, 나무와 흙으로 단을 올린 토축 기단 구조, 건물 바닥을 지면에서 띄워서 지은 굴립주 건물 구조를 볼 수 있다. 이 세 유형의 건물터는 당시 건축 기술을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남북방향 석축. 사찰내 금당이 있는 중심 영역을 조성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북방향 석축
석축은 경사면에 돌을 쌓아 대지를 평탄하게 만들기 위한 시설이다. 현재는 길이 약 30 m, 높이 0.55 m 정도가 남아 있다. 궁궐 관련 건물에서 사용된 석부재가 포함되어 있어 금당을 비롯한 사찰의 대지를 조성하기 위한 시설로 추정된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남북방향 석축 바깥쪽에 있는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기와를 굽던 가마터. 삼국통일 이후 이곳에 사찰이 있던 시기에 사용되었던 가마터이다.

기와 가마터
기와를 굽던 두 기의 가마가 동서로 나란하게 자리하고 있다. 모두 소성실의 천장이 무너진 상태로, 아궁이와 연소실 내부에서 숯과 불에 탄 흙, 기왓조각이 발견되었다. 앞쪽의 가마터는 소성실의 크기가 너비 1.7 m, 길이 2.6 m 정도로 반 지하식 가마이다. 이 두 기의 가마는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되어 사용된 것이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오층석탑 서쪽편에 있는 건물터. 왕궁에 속한 관청건물 2동이 있던 건물터이다. 건물의 규모가 크고 원형 주춧돌을 사용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오층석탑 석쪽편 바깥쪽에 있는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건물 복원도.

건물터
건물의 규모와 원형 주춧돌을 사용한 것으로 볼 때 왕궁의 행정 업무를 보던 정청으로 추정된다. 한 건물에 방 두 개가 있는 건물 두 채가 동서 방향으로 나란히 서 있다. 건물은 정면 9칸, 측면 4칸으로 되어 있는데, 내부에는 한 변의 길이가 6 m인 방이 두 개 있다. 건물 주위에서 백제 시대의 유물인 뚜껑이 있는 접시인 개배와 토기, 기와 파편 등이 출토되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오층석탑 뒷편 금당터. 앞면 4칸 규모의 건물이 있던 곳이다. 백제말 또는 통일신라 때 이곳이 사찰로 바뀌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금당터
왕궁리의 사찰은 백제 말에서 통일신라 초기에 궁궐터에 들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사찰터의 동쪽으로 약간 기운 남북 축에 오층석탑, 금당터, 강당터가 있어 ’1탑 1금당’이라는 사찰 배치 양식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를 모시는 금당은 사찰의 중심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된 통간 구조이다. 그 밖의 사찰 유적으로는 오층석탑 동편의 기와 가마터와 강당터 서편의 건물터 두 자리가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왕궁리 사찰영역 뒷편에 있는 강당터. 앞면  4칸 규모의 건물이다. 1탑1금당식 가람배치의 형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강당터
금당터 뒤에 있는 강당터는 승려들이 설법과 강연을 하던 건물터이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4칸으로 된 통간 형식의 건물이다. 강당터 남쪽 약 10 m 지점에서 계단 흔적이 세 군데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이 자리에는 지금 강당터가 있던 시기보다 더 앞선 시기에도 강당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근처에서 부정형의 공방 폐기지도 발견되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강당 동쪽편에 있는 와적기와 건물터이다. 기와로 기단을 쌓은 백제의 건축양식이 적용된 왕궁 부속 건물터이다.

와적기단 건물터
이 건물터는 와적기단이 사용된 왕궁부속건물지이다. 와적이단은 기단 외부에 기와를 쌓아 장식하는 기법으로, 사비시대에 부여와 익산지역에서 유행하다가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 와적기단 건물터는 백제 건축기술과 그 전개 양상을 밝혀낼 수 있는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구이다. 부여 관북리 유적, 정림사지에서도 와적기단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와적기단 건물터 바깥쪽에 있는 큰 건물터이다. 상당히 큰 규모의 궁궐 부속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터
사방 16 m 길이의 석렬시설로 건물터를 만들었다. 잘 다듬어진 면석을 0.8 ~0.9 m 폭으로 세운 후, 내부를 진흙으로 단단하게 다졌다. 주변에선 길쭉하거나 둥근 형태의 폐기 구덩이가 여럿 발견되었는데, 6세기 중반에 중국에서 만들어진 청자파편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위치나 출토유물로 보아 궁궐의 중요한 건물로 추정된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와적기와 건물터 앞쪽에 있는 길이 16 m의 큰 건물터이다.

건물터
오른쪽의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는 건물터에는 둥근 형태의 적심이 1.5 m 내지 2.8 m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앞쪽의 건물터는 한 건물 내에 너비 약 3 m, 길이 약 5 m 크기의 두 개의 방을 가진 구조이다. 이런 구조는 뒤편에 있는 와적기단 건물터를 비롯하여 익산 미륵사지, 부여 능산리사지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 백제 고대 건축양식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강당터 서쪽에 있는 큰 건물터.

건물터
강당터 서쪽에서 남북으로 나란히 자리한 두 개의 건물터다. 앞쪽의 큰 건물터에는 강 자갈돌을 둥글게 쌓은 적심이 동서로 1칸, 남북으로 7칸 남아 있고, 뒤쪽의 건물터는 적심이 불규칙하게 흩어져 있다. 앞쪽 건물터에서 대형항아리를 땅속에 묻었던 시설이 발견되었다. 건물터의 위치나 구조로 보아 승방과 같은 사찰의 부속 건물로 추정된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왕궁리 유적은 백제 무왕이 왕궁으로 조성한 영역으로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정전으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터 양쪽에 회랑과 비슷한 장랑 형식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이와 비슷한 형식의 건물 배치는 일본에서도 여러곳 발견되고 있다.

왕궁리 유적 발굴 현장
백제 궁성 양식의 일본 전파(익산 왕궁성과 일본 아스카 오카모토노미야 장랑형 건물배치도)
익산 왕궁성의 정전 건물 좌우에 장랑 형식의 건물지가 확인됨. 이런 형식의 건물지는 일본에서 기원후 645년에 조성된나니와나가라토요사키노미야, 656년의 아토아스카오카모토노미야, 667년의 오오미오오쓰노미야에서 이미 발견된 바가 있음. 이에 익산 왕궁성과 일본의 궁성에 대해 궁장 및 부속시설, 건물에 대한 세부적인 비교 및 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됨.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장랑형 건물지 주변 발굴.조사 모습.

장랑형 건물지 및 주변 유구 배치도
장량형 건물지는 고대 동아시아 궁성에서는 대형 전각 건물의 좌우 양쪽으로 남북으로 긴 형태의 건물임. 기단석 1매, 기둥과 관련된 판형 석재 3매를 통하여 볼 때, 건물의 규모는 정면(남북) 10칸(27.5 m), 남북 1칸(2.75 m)로 추정됨.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궁궐 서쪽편 모퉁이에는 장량형 건물터가, 그 안쪽으로는 다양한 양식과 용도의 궁궐 부속 건물들이 있던 건물터가 확인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궁궐 서쪽 담장 안쪽에 있는 초석 건물지. 서쪽편 담장 아

OLYMPUS DIGITAL CAMERA원형 초석이 확인된 건물터 발굴 당시 모습.

초석 건물지
서측 궁장 안쪽의 석축시설 남서편에서 원형 초석 3매가 1.5 m 간격으로 남아 있는 건물지 39가 확인됨. 토층단면으로 보아, 원형 초석은 기단과 함께 기초를 조성하면서 만든 것으로 확인됨. 초석에서 약 50 cm 떨어진 지점에서 기단 석재가 빠진 흔적도 확인됨. 건물지39는 통일신라시대 와요지가 들어서면서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굴립주 방식의 건물터. 여러 동의 크고 작은 부속 건물터가 확인되고 있다.

굴립주 건물지
궁성 내 서남편 지역에서 서측 궁장을 따라 동서 방향으로 긴 건물지 1기(건물지 37)와 남북 방향으로 긴 형태의 건물지 5기(건물지 38, 건물지 40~42, 건물지 44)가 발견되었음. 원형 혹은 타원형의 구덩이를 파고 나무를 세워 만들었음. 특히 건물지 37은 다른 건물과 달리 동서방향으로 긴 형태를 하고 있음. 규모는 정면 5칸(520 cm), 측면 4칸(주칸거리 100 cm)임. 특히 북쪽 중앙에서 180 cm 떨어진 지점에 출입과 관련된 주공이 210 cm 간격으로 확인됨. 건물 주변에는 석축배수로도 확인됨.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왕궁 부엌터 발굴 모습.

왕궁의 부엌터 및 출토유물
왕궁 내의 부엌 및 창고등을 가리켜 수라간 혹은 어주(御廚) 등으로 불림. 부엌 내에서 조리와 관련된 물건이나 불을 땐 흔적 등이 확인됨. 특히 부엌터 내의 타원형 수혈에서 철제솥 2점, 직구단경호 1점, 광견호 2점, 단경병 2점, 철제가래날 1점, 철부 1점, 숫돌 3점이 출토되었다. 건물의 축조 및 사용시기, 출토유물을 통하여 존손 기간은 백제말로 추정됨.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사찰영역 뒷편 구릉에는 다른 왕궁과 마찬가지로 휴식공간으로 큰 연못이 있는 정원과 다양한 수목들이 심어졌던 후원터가 확인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궁궐 뒷편에는 연못을 중심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정원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후대 궁궐 건축에서도 볼 수 있는 공간배치이다.

정원
궁성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구분하는 동서석축4의 우측 말단부에 축대의 높낮이를 활용하여 네모난 못(방지, 方池) 스타일의 화려한 정원이 확인되었음. 정원의 중심공간은 괴석과 판석을 사용하여 장방형의 못을 만든 후에 조경석과 자갈돌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만들었음. 이외에 물을 보관하는 장방형의 수조시설, 물의 양을 조절하는 ‘ㄱ’자 형태의 암거시설, 정원 중심공간에서 나온 물을 모아 두는 방형계의 집수시설도 있음. 또한 넓적하면서도 둥근 자갈돌을 깐 보도시설과 함께 건물지도 있음. 정원은 백제 궁성에서 전모가 밝혀진 최초의 사례로 자연 친화적인 기법으로 만든 백제 조경기술의 정수를 밝힐 수 있음.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낮은 구릉에 조성된 후원 발굴.조사 모습.

후원
궁성내의 북동편 구릉에 위치함. 후원은 구릉 사면에서 크게 휘어지는 ‘U’자형의 환수구에 의하여 돌려져 있음. 후원의 남.서편에서는 구불구불한 수로(曲水路)가 단독 혹은 이중으로 설치되어 있고, 다시 이 수로에 또 다른 수로가 연결되어 있음. 후원의 남동편 모서리 지점은 궁성 전각 구역에서 후원으로 진입하기 위하여 뚫려 있음. 후원 내부의 남편에서는 동서 방향의 보도용 석렬시설, 중앙에서는 정면 4칸 × 측면 4칸의 건물(건물지 36)이 확인되었음. 이외에 수량을 조절하기 위한 집수시설도 있음. 이런 수로시설은 배수 뿐만 아니라 궁성 중심 공간에서 필요한 물을 저장하여 공급하기 위한 용도로도 활용되었음. 궁성 내부에서 그 실체가 국내에서 최초로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음.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발굴.조사가 진행 중인 후원 서쪽편 영역. 화장실, 공방시설 등 다양한 부속시설 등이 확인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형화장실 발굴.조사 모습과 출토 유물.

화장실
궁성 후반부에서 지대가 낮은 서편의 저지대에서 화장실과 공방이 확인됨. 화장실을 동서 방향으로 크기가 다른 3기가 나란하게 위치하고 있는데, 오수를 저장하여 정화하였다가 긴 수로를 통과하면서 정화를 시켜 동서석축배수로-서벽 암거를 통하여 서측 궁궐 담장으로 빠져나가는 오늘날의 정화조와 같은 과학적 구조를 하고 있음. 3기의 화장실 중에서 가장 큰 대형화장실1의 규모는 너비 10.8 m, 너비 1.8 m, 깊이 3.4 m임. 내부에서 뒤처리용 나무막대를 비롯하여 건축 부재로 추정되는 목제품, 나무방망이, 백제 짚신, 목제 칠기 뚜껑 등이 출토됨.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공방 지역 발굴.조사 모습과 출토 유물.

공방은 동서석축배수로 북편에 위치함. 남북으로 긴 2동의 공방 관련 건물이 자리하고, 이 좌측에 공방 관련 원려, 재료, 도구들을 버리는 폐기지가 확인됨. 특히 공방 작업면의 습기를 제거하기 위한 독특한 지하 시설이 확인됨. 공방 관련 시설에서는 금.유리제품 및 반제품, 금속.유리제작용 도가니, 슬래그, 송풍관, 원재료, 소토덩어리, 벽체편 등 다양한 종류의 공방 관련 유물이 다량 출토됨. 장기간에 걸친 대규모 생산시설이 존재한 것으로 추정됨.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왕궁리 유적지 사찰영역

익산 왕궁리유적, 사적 408호
왕궁리는 예로부터 왕궁평, 왕검이, 왕금성으로 불려 고대 백제의 왕궁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 지역의 유적은 고대 백제의 왕궁이 있던 자리에 사찰이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왕궁 유적과 사찰 유적이 함께 남아 있다. 발굴.조사 결과 백제 무왕(600~641년) 때 왕궁으로 조성된 이후 백제 말에서 신라 초기에 사찰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왕궁은 규모가 동서 약 240 m, 남북 약 490 m이다. 궁장을 쌓고 나서 내부 경사면을 따라 석축으로 단을 만들어 대지를 조성하고 건물을 지었는데, 왕궁 내에서 물과 조경석을 이용한 조경 시설이 발견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유적지 내에는 왕궁 건물터와 금당 등의 사찰 건물터가 여럿 남아 있다. 사찰 유적 중 국보로 지정된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289호)은 조형미가 뛰어나 백제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왕궁리 유적에는 마한의 기준 도읍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 등 다양한 견해가 얽혀 있는데, 최근의 연구로 백제 궁성의 구조와 기능 등 역사 속 비밀이 하나 둘씩 밝혀지고 있어 왕궁리 유적의 실체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지평이 열리고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왕궁리 유적전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