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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 당 대명궁(大明宮) 유적

중국 시안에 있는 당나라 황궁이었던 대명궁(大明宮) 유적이다. 당 고종 때(662년) 처음 지어져 220년 동안 당나라 황궁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당나라 초기에는 장안성 안에 있는 수나라 때 정궁으로 지은 태극궁을 사용했으나 습하고 벌레가 많아 이궁(離宮)으로 건설되었는데 당 고종 때 대대적을 수리하면서 정궁이 되었다. 당나라 말 황소의 난(875 ~ 884년) 이후 지방 병마절도사들의 반란으로 파괴된 후 황궁의 기능을 상실했다.

대명궁은 궁궐배치의 기준이 되는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의 원칙을 제대로 따르고 있다. ’3문3조(三門三朝)’의 원칙에 따라 황실가족의 생활공간인 내조(內朝), 집무공간인 중조(中朝), 신하들이 집무공간인 외조(外朝)가 담장으로 분리되어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건물은 정전인 함원전(含元殿), 편전인 선정전(宣政殿), 내전인 자신전(紫宸殿)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선정전 서쪽에 영녕전(永寧殿)과 외조에 해당하는 궐내각사 등이 있었다. 내전인 자진전 뒷편에는 태액지(太液池)라는 큰 연못이 있으면 넓은 정원에는 황실에서 숭상했던 도교사원 등이 들어서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당 대명궁 유적>

OLYMPUS DIGITAL CAMERA<유적 입구에 세워진 기념 조형물>

OLYMPUS DIGITAL CAMERA<대명궁 유적지 들어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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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궁 유적지 공간배치도>

OLYMPUS DIGITAL CAMERA<입구 매표소>

 외조(外朝), 함원전 바깥 영역

외조(外朝)는  궁궐 바깥 영역으로 대명궁에서는 오문(午門)에 해당하는 단봉문(丹鳳門)에서 정전에 해당하는 함원전까지 길이 630 m의 넓은 공간을 말한다. 함원전을 중심으로 외국 사신의 접견, 황제 즉위식 등 국가의 중요 행사가 열리는 공간이다. 베이징 자금성이나 서울 경복궁의 경우 정전 정문까지 공간을 말하며 그 기능의 거의 비슷하다. 함원전 월대 아래로 바깥세상과 궁궐을 공간적으로 분리하는 금수(錦水)라 불리는 수로가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함원전 앞 광장>

함원전(含元殿, Hanyuan Hall) 함원전은 대명궁(大明宮) 중심축에 있는 첫번째 건물로 궁궐 의례 공간인 정전(正殿) 영역의 중심건물이다. 기록에 따르면 당 고종 14년(663년)에 완공되었으며 886년까지 224년 동안 사용되었다. 함원전 영역은 정전, 복도, 동.서 누각, 종루와 고루, 통로(龍尾道)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함원전 앞에는 넓은 광장과 외부세계와 분리해주는 역할을 하는 수로가 있다. 건물 양쪽에는 신하들이 대기했던 조당(朝堂)이 있었으며 양쪽 누각 아래에 함원전으로 오르는 통로가 있다. 건물 뒷편에는 내전을 출입하는 선정문(宣政門)이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명궁 정전인 함원전>

OLYMPUS DIGITAL CAMERA<함원전 건물 모형>

함원전은 높게 쌓은 월대 위에 세워졌는데 고고학적 조사에 따르면 건물 바닥은 동서 76.8 m, 남북 43 m, 높이 3.46 m의 3층 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함원전 월대는 수로(水路)로 둘러싸여 있으며 북쪽으로 내전으로 연결되는 길이다. 함원전 양쪽에는 비슷한 높이 큰 누각인 서봉루와 상란각이 있으며 건물들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날개가 있는 봉황의 형상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함원전 터에 복원해 놓은 월대>

월대는 벽돌로 쌓았으며 양쪽에 월대를 오르는 계단이 있고 가운데 정전 건물이 세워져 있다. 월대는 자금성 태화전과 마찬가지로 3층으로 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함원전 월대>

OLYMPUS DIGITAL CAMERA<아래에서 본 함원전 월대>

OLYMPUS DIGITAL CAMERA<함원전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건물 바닥에 깔려 있는 전돌>

OLYMPUS DIGITAL CAMERA<남아 있는 건물 구조물>

함원전은 중국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궁궐 건축물이다. 전면에 14개이 기둥이 있고 기둥 사이 간격은 5.35 m이다. 측면에는 6개의 기둥이 있으며 간격은 4.6 m이다. 전체 62개의 기둥을 받치는 추춧돌이 있었는데 그 중 일부만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현재까지 남아 있는 주춧돌>

OLYMPUS DIGITAL CAMERA<건물기둥을 받치는 주춧돌>

당육전(唐六典)”에 “함원전(含元殿) 양쪽에는 누각이 있는데 동쪽에 상란각(翔鸞閣), 서쪽에 서봉각(栖鳳閣)이라 한다.”라 기록되어 있다. 누각은 새의 날개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으며 함원전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봉황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이런 형태의 건물을 오봉루(五鳳樓)라고 하며 자금성 정전 입구에 있는 오문(午門)이 이런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원래는 상란각이라 불렀든데 지금은 난상각 (鸞翔閣)이라 부른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 상란각(翔鸞閣),  Luanxiang Pavilion) 터>

OLYMPUS DIGITAL CAMERA<아래쪽에서 본 상란각 월대>

OLYMPUS DIGITAL CAMERA<서쪽 서봉각(栖鳳閣) 터>

OLYMPUS DIGITAL CAMERA<아래에서 본 서봉각 월대와 함원전을 오르는 통로>

동조당(东朝堂)은 난상각 아래 있는 건물로 서봉각 아래 서조당과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함원전이 있는 정전 영역을 구성하는 주요 건물이다. 당 고조 때(662년) 함원전과 함께 세워졌다. 이 건물은 신하들이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기다리는 장소이다. 태자와 승상이 관리들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했다.

OLYMPUS DIGITAL CAMERA<월대 아래 동조당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서조당 건물터>

함원전 뒷편으로는 편전인 선정전(宣政殿)과 내전인 자신전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선정전 서쪽에 영녕전(永寧殿)과 외조에 해당하는 궐내각사 등이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함원전에서 선정전으로 내려가는 계단>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함원전>

 함원전 양쪽으로는 성벽 수준의 높고 견고한 담장이 세워져 와조와 중조를 분리하고 있다. 이를 제이도궁장(第二道宮墻)이라 한다. 지금읜 옛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제이도궁장>

중조(中朝), 치조(治朝) 또는 조정(朝廷)이라 불렸던 정치의 중심 공간

중조(中朝)는 치조(治朝)라고도 하며 궁궐에서 국왕이 신하들과 함께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이다.  자금성이나 경복궁은 국가적인 행사기 치러지는 정전(正殿)이 치조의 중심공간이나 대명궁은 편전에 해당하는 선정전(宣政殿)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반면에 정전인 함원전은 외조 공간의 중심이 되고 있다. 황제와 신하들의 정치공간인 조정(朝廷)은 선정전 마당을 말하며 선정전 좌우에 궐내각사에 해당하는 중서성, 문하성, 어사대, 전중내성(殿中内省) 등 황제 직속 기관들이 들어서 있었다. 경복궁의 경우 동쪽은 왕세자의 공간인 동궁(東宮)이, 서쪽에 국왕직속 기관들이 모여있는 궐내각사가 배치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중조(中朝)함원전과 선정전 사이 공간>

선정전에서 130 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선정문(宣政門)은 함원전과 선정전을 연결하는 유일한 출입문이다. 당문종(唐文宗) 재위시 황제는 실권자였던 환관을 죽일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는데 이를 “감로지변(甘露之变)”이라 한다. 당시 황제는 선정문을 통해 선정전으로 탈출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다. 양쪽으로 중서성 등 황제직속 기관들이 있는 궐내각사 출입문인 월화문(月华門) 등이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선정문 모형>

선정전(宣政殿, Xuanzheng Hall)은 함원전에서 북쪽으로 약 300 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선정전은 대명궁에서 함원전 다음으로 큰 건물로 신하들의 접견, 과거시험 합격자 발표, 사신 접견 등 공식적인 행사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자금성 건청궁 선정전은 대명궁에서 중요한 장소이지만 아직 발굴되지 않고 있다. 선정전터에는 벽돌과 나무로 옛 형태 일부를 재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선정전과 조정>

OLYMPUS DIGITAL CAMERA<선정전 터 내부>

선정전 건물을 앞면 11칸의 중층 건물로 대명궁에서 함원전 다음으로 큰 건물이다. 건물 형태는 가운데 5칸은 나무로 만든 판문이, 양쪽 3칸 씩은 창문이 있는 벽으로 되어 있다. 통일신라와 일본에서 이런 양식 거대 건축물들이 많이 세워졌다. 봉정사 극락전 등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건축물에서도 볼 수 있는 형태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선정전 모형>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선정전터>

OLYMPUS DIGITAL CAMERA<선정전 앞 조정>

대명궁 중조(中朝)는 선정전 좌우로 직속 관청들이 있는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서쪽에 당의 정치제도인 3성6부 중 법령 초안을 입안하는 중서성, 최고 감찰기구인 어사대, 전중내성과 창고 등이, 동쪽에 문하성을 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館), 정책 연구기관인 홍문관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과는 달리 황세자를 위한 동궁은 두고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선정전 동쪽 중서성 등 궐내각사가 있었던 옛터>

중서성(中書省)은 문하성.상서성과 함께 당나라 최고 정치기구인 3성 중 하나이다. 황제가 내리는 조칙과 국가법령 초안을 작성하는 등 황제를 보좌하면서 정책을 결정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중서성 장관은 중서령(中書令)이라 불렸으며 우상(右相)이라고도 한다. 상서성  장관인 상서령을 실제로 두지 않기때문에 최고의 관직이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중서성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중서성 모형>

어사대(御史台) 중서성(中書省) 남쪽과 월화문(月华門)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어사대는 당나라 최고 감찰기관으로 조선시대 사헌부에 해당하는 기관이다. 고위직 관원을 감찰하는 기관으로 조선시대 사헌부는 의정부와 함께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어사대 옛터>

전중내성(殿中内省院落)은 중서성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주로 황실과 궁궐 관청에 식사와 의복, 의약 등을 제공하는 업문를 수행했다. 창덕궁 궐내각사에도 내의원과 약방이 홍문관 뒷편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전중내성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전중내성 건물 모형>

경림고(琼林庫), 대영고(大盈庫)는 황실의 보물을을 보관하는 창고로 조선시대 내탕고(內帑庫)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그 위치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당나라 백자에 그 이름이 남아 있다. 이곳에 보관된 보물들을 황제가 신하들에 하사하는 용도 등으로 사용되었다. 전중내성과 서쪽편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창고 건물터에 전시해 놓은 조형물>

함원전과 마찬가지로 선정전 건물을 중심으로 양쪽에는 제삼도궁장(第三道宮墻)이라는 높은 담장이 있었으며 그 안쪽으로 내전에 해당하는 전각들이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선정전 동쪽편 제삼도궁장(第三道宮墻) 터>

OLYMPUS DIGITAL CAMERA<궁장을 재현해 놓은 모습>

내조(內朝), 황제와 가족들의 생활공간

내조(內朝)는 황제와 가족들이 생활하는 생활 공간으로 연조(燕朝)라고도 부른다. 내조에는 황제가 일상적으로 머무는 공간인 자신전(紫宸殿, Zichen Hall)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황실가족들이 거처하는 생활공간과 불교사찰, 도교사원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서쪽에는 신하들을 접견하는 공간인 연영전(延英殿)과 사정전(思政殿), 최고 학술기관인 한림원(翰林院), 공식 연회 공간인 인덕전(麟德殿)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이는 경회루, 수정전(옛 집현전) 등이 서쪽에, 자경전(慈慶殿) 등이 동쪽에 배치된 경복궁과 같은 공간배치이다. 자신전 뒷편으로는 경주 반월지(안압지)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는 큰 연못인 태액지(太液池)와 여름 별궁인 함량전(含凉殿)과 다양한 수목이 심어져 있는 넓은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명궁 내조>

자신전(紫宸殿, Zichen Hall)은 선정정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함원전과 함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다. 당 고종 때(663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내전의 중심건물로 황제가 거처하면서 일상적인 업무를 논의하는 공간이었다. 내부는 전실과 후실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전실에서는 업무를 처리하고 후실은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었다. 당나라 최고 관료들만 자진전에 출입할 수 있었다. 서쪽에 있는 사정전과 연영전이 일상 업무를 처리하고 신하와 외국 특사를 접견하는 공식 장소였지만 황제는 자진전을 많이 사용하였다. 자진전 건물터는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건물터에 철골구조로 옛 자진전 목재 구조를 재현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자신전터, 철골로 목조건축물 구조를 재현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자신전 건물 모형, 앞면 9칸의 2층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자신전 구조물 모형>

OLYMPUS DIGITAL CAMERA<자신전 건물터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자신전 정문인 자신문(紫宸門)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자신전 앞 마당>

OLYMPUS DIGITAL CAMERA<자신전 담장터>

연영전(延英殿, Yanying Hall)은 자신전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황제과 고위 관리들과 국무를 논의하고 군사적인 결정을 내린 장소이다. 황제는 국가적인 공식행사를 제외하고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하던 곳으로 당나라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연영전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연영전 영역 건물 모형>

OLYMPUS DIGITAL CAMERA<건물터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연영전 출입문과 부속건물터>

사정전(思政殿, Sizheng Hall)은 연영전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황제가 신하들에게 상을 주거나 간단한 연회를 여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당후기 황제의 권력약화로 국정을 관료들과 환관들이 국사를 처리했는데 자진전이나 연영전은 황제의 공간이었기때문에 주로 사정전에 모여 업무를 처리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정전 건물터>

사정전과 연영전 뒷편으로는 함상전(含象殿), 명의전(明義殿), 시정원(侍政院), 내시별성(內侍別省) 등의 건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건물 이름으로 볼 때 황제를 보필하는 환관들이 근무했던 공간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사정전 옆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사정전 뒷편 건물터>

자신전 뒷편으로는 침전인 연옆전(蓮葉殿)을 비롯하여 온실전(溫室殿), 선휘전(宣徽殿)같은 생활공간과 불교사찰인 명덕사(明德寺)가 있었으며 태액지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는 청휘각(淸暉閣) 같은 휴식공간이 자리잡고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자신전 뒷편>

OLYMPUS DIGITAL CAMERA<자신전 동쪽편 건물터>

후원(後苑)

태액지(太液池)는 대명궁 북쪽에 있는 황실정원으로 연꽃이 아름다워 연옆지(蓮葉池)라고도 불렀다. 태액지는 동쪽과 서쪽에 2개의 연못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쪽이 더 큰 규모이다. 서쪽 연못은 인덕전과 함께 황실을 찾은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경복경 경회루 연못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으며 동쪽 연못은 황실 가족을 위한 공간이다. 사각형을 하고 있는 경회루 연못과는 달리 경주 반월지처럼 타원형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다. 서쪽 연못 가운데에는 작은 섬을 두어 신선이 사는 봉래산을 구현하고 있다. 연못 북쪽에는 여름 별궁에 해당하는 함량전(含凉殿)과 도교사원, 불교사찰 등이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명궁 태액지>

OLYMPUS DIGITAL CAMERA<태액지 옛모습을 그린 그림>

함량전(含凉殿, Hanliang Hall)은 태액지 동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료에 따르면 황실은 여름 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함량전을 세웠다. 함령전은 물방울을 뿌려주는 냉방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함량전 모형>

<출처>

  1. 안내문, 시안시, 2019년
  2. 위키백과, 2020년
  3. 百度百科, 2020년

부여 백제문화단지, 백제 왕궁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합정리 백제문화단지에 재현해 놓은 사비기 백제 왕궁이다. 재현해 놓은 백제왕궁은 정전에 해당하는 중궁과 동궁,서궁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배치 등은 부소산성 아래 관북리 유적(사적 428호) 발굴.조사 결과 확인된 건물터와 후대 궁궐 건물 배치를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건축물의 양식은 백제기술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일본 나라의 동대사 금당 건물의 양식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여 관북리유적(사적428호)은 백제 왕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여러 차례의 발굴조사과정을 통해 대형 전각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터, 연못, 우물터, 기와로 만든 배수관 등이 확인되었다. 연못터에서는 백제시대의 기와 및 토기편, 목간, 짚신, 금동제귀걸이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또한 백제의 토목기술을 보여주는 진흙을 다져 포장한 도로와 왕실에 필요한 철기, 금속제품을 만들던 공방과 창고 등의 건물터도 발견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부여 백제문화단지에 재현해 놓은 백제 왕궁. 정전에 해당하는 중궁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문(文)에 관한 집무를 보던 동궁이, 서쪽에 군사와 관련된 집무를 보던 서궁이 배치되어 있다. 당시 절터나 후대 궁궐에서 볼 수 있는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는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부여 백제문화단지에 재현해 놓은 옛 사비성의 정문이다. 삼국시대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치미가 눈에 띄는 앞면 5칸의 2층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정문을 들어서면 정전에 해당하는 중궁 출입문이 보인다. 출입문은 앞면 5칸의 2층 건물이며, 양쪽에 회랑건물로 연결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편 동궁 출입문과 회랑.

OLYMPUS DIGITAL CAMERA서쪽편 서궁 출입문과 회랑

OLYMPUS DIGITAL CAMERA왕궁 정전에 해당하는 천정전. 앞면 7칸의 2층 건물이다. 조선시대 궁궐과는 달리 가운데 3칸은 판문으로, 양쪽에 창살이 있는 창문이 있다. 봉정사 극락전과 일본 나라 동대사 금당에서 볼 수 있는 건축양식이다. 지붕에는 치마로 장식하여 웅장함을 더해주고 있다.

사비궁 중궁(Central Palace), 백제 사비시기의 중궁을 재현해 놓은 곳이다. 정전인 천정전은 국가의 큰 정사를 하늘에 고하여 결정했다는 천정대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 곳 중궁의 정전은 왕의 즉위 의레, 신년 행사 등 각종 국가 의식이 거행되고, 외국사신을 맞이하는 왕궁 내의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다. (백제문화단지,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고려시대 이후에 볼수 있는 주심포, 다포계, 익공계와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는데, 주심포 계열과 비슷하게 만들었다. 일본 나라 동대사 금당 건축양식을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천정전 내부로 들어가는 출입문. 일본 나라의 동대사 금당이 비슷한 형태의 출입문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나무 창살이 있는 창문.

OLYMPUS DIGITAL CAMERA백제 건축의 영향을 받은 것을 알려진 일본 나라 동대사 금당. 삼국시대 금당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건축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회랑으로 둘러져 있는 정전 앞 마당. 경복궁 정전 영역과 비슷하며 삼국시대 사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공간배치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회랑내부.

OLYMPUS DIGITAL CAMERA군사와 관련된 업무를 보는 편전에 해당하는 공간인 서궁 앞쪽에 인덕전, 뒷편에 무덕전이 자리잡고 있다.

 

정전이 있는 중궁 서쪽편에는 무반에 관련된 업무를 보던 서궁이 자리잡고 있다. 서궁(West Palace)은 정전과 외전으로 구성되었다. 정전인 무덕전은 서궁에서 가장 중심적인 건물로 왕이 평소 집무를 보는 공간이다. 주로 무관에 관한 집무공간으로서 무는 서쪽을 의미한다. 외전인 인덕전으로 태평성대에 나타나는 영물인 기린의 덕을 의미한다. (백제문화단지,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서궁 외전에 해당하는 인덕전, 앞면 5칸의 단층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인덕전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는 일정적인 업무공간인 무덕전이 자리잡고 있다. 앞면 7칸의 큰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서궁은 독립된 공간으로 회랑으로 둘러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편에는 문반과 관련된 업무를 보는 공간인 동궁이 자리잡고 있다. 왕궁에서 일상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동궁(East Palace)은 정전과 외전으로 구성되었다. 정전인 문사전은 동궁에서 가장 중심적인 건물로 왕이 평소 집무를 보는 공간이다. 주로 문관에 관한 집무공간으로서 문사전의 문은 동쪽을 의미한다. 외전은 연영전으로 신하들의 집무공간이며 천하의 인재를 맞이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백제문화단지,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동궁 외전에 해당하는 연영전.

OLYMPUS DIGITAL CAMERA연영전 내부. 신하들과 일상적인 회의를 하는 공간을 재현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 있는 문사전은 동궁에서 가장 중심적인 건물로 왕이 평소 집무를 보는 공간이다. 동중, 중궁과 마찬가지로 앞면 7칸의 단층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내부에는 닫집이 있은 어좌가 놓여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궁 회랑.

OLYMPUS DIGITAL CAMERA동궁 뒷편 회랑. 생활공간과 연결되는 출입문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왕궁 뒷편 언덕에 세워진 정자.

OLYMPUS DIGITAL CAMERA부여 관북리 유적(사적 428호) 대형건물터. 왕궁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터이다.

<출처>

  1. 문화재청
  2. 부여박물관
  3. 백제문화단지.

익산 왕궁리 유적(사적 408호),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 확인되는 궁궐터

전북 익산시 왕궁면과 금마면에 있는 왕궁리 유적(사적 408호)이다. 오층석탑이 남아 있던 이곳은 마한의 도읍지설 등 다양한 의견들이 있었으나 발굴.조사 결과 백제후기에서 통일신라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 확인되는 중요한 유적이다. 유적은 백제 무왕 때 조성은 궁성 영역과 백제말 또는 통일신라 때 조성된 사찰영역이 혼재되어 있다.

궁성은 치밀한 계획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중국의 영향을 받아 남북 490 m, 동서 240 m 정도의 직사각형 형태의 넓은 공간이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후대의 궁궐과는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앞쪽에는 정전과 동.서쪽 장랑으로 구성된 정전 영역을 두고 있다. 가운데에는 업무공간인 편전과 생활공간인 내전에 해당하는 영역으로 크고 작은 건물터가 확인되고 았다. 오층석탑과 금당, 강당이 일렬로 배치된 사찰 영역은 백제말 이후 궁궐 건물들이 사찰로 바뀌면서 그 형태가 약간 바뀐 것으로 보인다. 사찰 뒷편으로는 큰 연못과 다양한 수목들이 심어진 후원 영역이 있었으며, 서쪽 담장 안쪽으로 관청 건물과 부엌, 공방, 화장실 등 다양한 건물터가 확인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익산 왕궁리 유적지. 삼국시대 백제 무왕이 조성한 궁성와 사찰 유적이 같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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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리 유적지 공간배치. 대형 건물터와 장랑 건물터가 정전 영역이 앞쪽에 있으며, 사찰영역으로 바뀐 편전, 내전 영역, 뒷편의 후원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백제 말 또는 통일신라 때 사찰로 바뀌면서 규모가 축소되면서 건물배치도 일부 바뀐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왕궁리 유적지.

왕궁리 유적
왕궁리유적은 백제 무왕대의 궁성지로서 남북 490여 m, 동서 240여 m의 장방형 구조를 갖고 있다. 현재 이 유적은 궁성과 사찰 유적의 두가지 성격으로 구분되는데 궁성은 백제 무왕대 축조되어 운영되다가, 백제 말경에 사찰 중심으로 성격이 변화되어 9세기 통일신라 말까지 존속되었다. 궁성은 치밀한 계획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크게 보면 남과 북으로 2분하여 남편 대지는 중심거주 공간으로 활용하고 북편은 후원형태로 사용하였다. 평면 구조는 중국 도성제의 영향을 받아 장방형의 구획을 하였는데, 내부 공간을 활용하기 위하여 경사진 면에 축대를 축조하여 계단식으로 평탄 대지를 조성한 후 그 대지 위에 건물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공간들은 남에서부터 앞마당->궁전 건물지->생활 건물지-> 뒤뜰 정원 순으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서북면에는 공방지가 있어 왕실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제작하였다. 사찰은 궁성지 위에 남북 일직선상의 중심축을 기준으로 탑->금당->강당을 배치하였다. 창건 연대는 백제 말경이며 통일신라 말기까지 운영되었다. 목탑이 소실되어 통일신라대에 새로이 축조된 것을 알려진 국보 289호 왕궁리 오층석탑에서는 1965년 해체.복원과정에서 금제금강반야경판과 수정 사리병 등 사리장치가 발견되어 국보 123호로 지정되었다. (왕궁리유적전시관,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백제 궁성 정문. 궁성은 동서 240 m, 남북 490 m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정문이 있었단 이곳에서 왕궁리 유적지의 이정표인 오층석탑이  한눈에 들어온다.

OLYMPUS DIGITAL CAMERA궁성 남측 담장(동쪽편). 최근에 발굴.조사를 진행하면서 원래 형태를 추정해서 복원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남측 궁궐 담장
궁궐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으로 동서 길이가 약 240 m, 남북이 약 490 m의 직사각형이다. 담장의 폭은 3 m정도로, 잘 다듬은 석재를 쌓아 올려 만들었다. 담장의 안팎으로 돌을 깔아 보도를 만들고, 담장 경계인 석렬시설을 설치하였다. 부속시설로는 물 빠짐을 위한 수구와 배수로가 있고, 동.서.북측에 각 1개소, 남측에 3개소의 궁궐문터가 발견되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궁성 남측 담장(서쪽편)

건물지
왕궁리유적에서 건물지는 지금까지 백제시대 건물지 14기, 통일신라 건물지 6기, 고려시대 건물지 1기 등 총 21기가 조사되었다. 백제시대 건물지는 기단의 축조 재료에 의해 석축기단 건물과 와적기단 건물로 구분되며, 초석의 유무에 따라 초석건물과 굴립주건물, 적심의 조성방법에 따라 적심건물과 토심적심건물로 구분할 수 있다. 중요 건물지는 대부분 초석을 사용한 기단 건물지와 와적기단건물지, 굴립주건물지도 확인되고 있다. 건물지의 위치를 보면 정전 건물지는 중문의 중심축과 같은 선상에 있으나 나머지 건물은 사찰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제거되어 금당지와 강당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중심에서 벗어나 동편에 치우쳐 있다. 정전 건물지는 왕궁리 유적의 중문에서 들어가면 접할 수 있는 첫번째 건물이며, 유적 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건물로서 주변에서 수부명 기와가 출토되고 토심적심의 특이한 기초공법이 확인됨에 따라 정사를 돌보던 곳이나 의례, 의식을 행하던 정전 건물로 추정되고 있다.   (왕궁리유적전시관,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정문을 들어서면 첫번째로 볼 수 있는 대형건물터. 앞면 7칸, 옆면 4칸의 대형건물이 있었던 곳으로 왕궁 중심축에 위치하고 있다. 공식 행사가 열렸던 정전과 비슷한 성격의 건물로 보인다.  그런데, 궁궐 정전 영역이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넓은 마당과 회랑을 두고 있지 않다. 백제의 궁궐 건물에는 적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형 건물터
이 건물터는 왕궁리 유적 건물터 중 가장 크다. 건물은 정면 7칸(31 m), 측면 4칸(15 m)의 크기로 남문과 같이 왕궁의 남북 중심축에 있다. 규모나 건축 기법, 위치로 볼 때 대규모 집회나 연회 등에 사용한 건물로 추정된다. 이 건물터에는 대형 건물의 기둥을 받치기 위한 독특한 건축 기법이 사용되었다. 즉, 커다란 구덩이를 파서 그 속에 점토를 단단히 다져 넣고 기둥을 세운 토심 구조를 말한다. 부여 관북리 백제 유적에서도 이와 규모와 건축 기법이 비슷한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궁성 담장 안쪽 발굴 현장.

OLYMPUS DIGITAL CAMERA대형 건물터 뒷편 서쪽편에 있는 작은 건물터이다. 석축을 넘어 안쪽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루와 비슷한 성격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터
위치와 구조로 보아 석축을 넘나들기 위한 출입시설로 추정되는 건물터다. 동서방향 석축에서 튀어 나와서 양쪽으로 면을 맞춰 돌을 쌓았는데, 동서 길이가 약 8 m, 남북이 약 7 m, 높이 0.6 m 정도가 남아 있다. 석축의 동쪽에도 비슷한 건물터가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동쪽편 출입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건물터.

건물터
왼쪽 건물터는 위치와 구조로 볼 때, 석축을 넘나들기 위한 출입시설로 추정된다. 동서방향 석축에서 튀어나와 양쪽으로 면을 맞춰 돌을 쌓았는데, 동서 길이가 약 6 m, 남북이 약 4 m 가량 남아 있다. 석축의 서쪽에도 비슷한 건물터가 있다. 오른쪽 건물터는 원형 추춧돌 3개와 기초시설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한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로 추정된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왕궁 앞쪽 대형 건물터가 있는 공간과 업무.생활 공간이 있는 영역은 석축으로 분리되어 있다. 동.서방향으로 길이 95 m의 석축 흔적이 남아 있다.

석축
석축은 왕궁 안에서 동서 방향으로 4개, 남북 방향으로 2개가 발견되었다. 비탈진 땅을 평평하게 다지려고 석축을 쌓았는데, 잘 다듬어진 돌을 먼저 쌓고 막돌과 점토로 뒤채움을 하였다. 동서 방향의 첫번째 석축을 길이 95 m, 높이 0.9 m인데, 원래 높이는 2 m 정도로 추정된다. 석축 근처에서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 중국 청자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당시 왕궁 내 생활상과 대외교류, 왕궁의 축조시기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왕궁리 오층석탑(국보 289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높이 9 m의 거대한 석탑으로 1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려 놓고 있다. 기단부가 낮아 균형미는 떨어지는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왕궁리오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구(국보 123호, 7세기 전반), 함께 출토된 불상과 함께 제작연대가 9기말 ~10세기 초로 알려졌으나, 미륵사지 사리구가 발견되면서 백제 때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왕궁리 오층석탑, 국보289호
미륵사지 석탑을 본떠서 만든 백제계 석탑이다. 높이가 9 m인 이 석탑은 단층기단, 얇고 넓은 옥개석, 3단의 옥개 받침 등이 특징적이다. 1965~1966년에 해체.복원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여러 유물이 발견되었다. 제1층 옥개석 중앙과 기단에서는 금강경판 19장, 금동제 사리함, 사리병 같은 사리장엄구(국보123호), 석탑 밑에서는 가로 16.8 m, 세로 12.7 m인 건물 기초가 발견되었다. 이 건물 기초를 보면 이 석탑은 본디 목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석탑 주변에서는 ‘왕궁사’, ‘관궁사’, 대관관사’, ‘대관궁사’라는 글자가 적힌 통일신라 시대 명문 기와가 여럿 출토되었다. 지금도 이 탑의 축조 시기를 놓고, ‘백제, 통일신라, 고려 초’라는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왕궁리 오층석탑 뒷편에 있는 건물터. 금당터와 오층석탑 사이에 있는 건물터이다. 일반적인 경우 목탑이 있는 위치이다. 사찰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 보인다.

건물터
궁궐조성을 위한 기초시설로 보이는 동서방향 석축의 중간에 들어서 있다. 땅을 판 후 잘 다듬은 석재를 1~2단으로 쌓아 터를 만들었다. 한 변의 길이가 12 m인 정사각형 건물로 추정된다. 건물터 주변으로 기와를 잇댄 토관을 설치하여 배수처리를 하였다. 위치와 구조로 보아 사찰의 중요한 건물로 추정된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오층석탑 동쪽편에 있는 건물터와 남북방향 석축

건물터
왕궁리 유저지의 건물터는 대개 동서 방향의 석축들 앞에 있다. 건물터는 사찰 이전의 왕궁 건물터와 사찰 건물터에서 45곳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는 땅을 파서 다지고 그 위에 주춧돌을 놓은 토심 구조, 나무와 흙으로 단을 올린 토축 기단 구조, 건물 바닥을 지면에서 띄워서 지은 굴립주 건물 구조를 볼 수 있다. 이 세 유형의 건물터는 당시 건축 기술을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남북방향 석축. 사찰내 금당이 있는 중심 영역을 조성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북방향 석축
석축은 경사면에 돌을 쌓아 대지를 평탄하게 만들기 위한 시설이다. 현재는 길이 약 30 m, 높이 0.55 m 정도가 남아 있다. 궁궐 관련 건물에서 사용된 석부재가 포함되어 있어 금당을 비롯한 사찰의 대지를 조성하기 위한 시설로 추정된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남북방향 석축 바깥쪽에 있는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기와를 굽던 가마터. 삼국통일 이후 이곳에 사찰이 있던 시기에 사용되었던 가마터이다.

기와 가마터
기와를 굽던 두 기의 가마가 동서로 나란하게 자리하고 있다. 모두 소성실의 천장이 무너진 상태로, 아궁이와 연소실 내부에서 숯과 불에 탄 흙, 기왓조각이 발견되었다. 앞쪽의 가마터는 소성실의 크기가 너비 1.7 m, 길이 2.6 m 정도로 반 지하식 가마이다. 이 두 기의 가마는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되어 사용된 것이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오층석탑 서쪽편에 있는 건물터. 왕궁에 속한 관청건물 2동이 있던 건물터이다. 건물의 규모가 크고 원형 주춧돌을 사용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오층석탑 석쪽편 바깥쪽에 있는 건물터.

OLYMPUS DIGITAL CAMERA건물 복원도.

건물터
건물의 규모와 원형 주춧돌을 사용한 것으로 볼 때 왕궁의 행정 업무를 보던 정청으로 추정된다. 한 건물에 방 두 개가 있는 건물 두 채가 동서 방향으로 나란히 서 있다. 건물은 정면 9칸, 측면 4칸으로 되어 있는데, 내부에는 한 변의 길이가 6 m인 방이 두 개 있다. 건물 주위에서 백제 시대의 유물인 뚜껑이 있는 접시인 개배와 토기, 기와 파편 등이 출토되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오층석탑 뒷편 금당터. 앞면 4칸 규모의 건물이 있던 곳이다. 백제말 또는 통일신라 때 이곳이 사찰로 바뀌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금당터
왕궁리의 사찰은 백제 말에서 통일신라 초기에 궁궐터에 들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사찰터의 동쪽으로 약간 기운 남북 축에 오층석탑, 금당터, 강당터가 있어 ’1탑 1금당’이라는 사찰 배치 양식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를 모시는 금당은 사찰의 중심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된 통간 구조이다. 그 밖의 사찰 유적으로는 오층석탑 동편의 기와 가마터와 강당터 서편의 건물터 두 자리가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왕궁리 사찰영역 뒷편에 있는 강당터. 앞면  4칸 규모의 건물이다. 1탑1금당식 가람배치의 형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강당터
금당터 뒤에 있는 강당터는 승려들이 설법과 강연을 하던 건물터이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4칸으로 된 통간 형식의 건물이다. 강당터 남쪽 약 10 m 지점에서 계단 흔적이 세 군데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이 자리에는 지금 강당터가 있던 시기보다 더 앞선 시기에도 강당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근처에서 부정형의 공방 폐기지도 발견되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강당 동쪽편에 있는 와적기와 건물터이다. 기와로 기단을 쌓은 백제의 건축양식이 적용된 왕궁 부속 건물터이다.

와적기단 건물터
이 건물터는 와적기단이 사용된 왕궁부속건물지이다. 와적이단은 기단 외부에 기와를 쌓아 장식하는 기법으로, 사비시대에 부여와 익산지역에서 유행하다가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 와적기단 건물터는 백제 건축기술과 그 전개 양상을 밝혀낼 수 있는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구이다. 부여 관북리 유적, 정림사지에서도 와적기단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와적기단 건물터 바깥쪽에 있는 큰 건물터이다. 상당히 큰 규모의 궁궐 부속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터
사방 16 m 길이의 석렬시설로 건물터를 만들었다. 잘 다듬어진 면석을 0.8 ~0.9 m 폭으로 세운 후, 내부를 진흙으로 단단하게 다졌다. 주변에선 길쭉하거나 둥근 형태의 폐기 구덩이가 여럿 발견되었는데, 6세기 중반에 중국에서 만들어진 청자파편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위치나 출토유물로 보아 궁궐의 중요한 건물로 추정된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와적기와 건물터 앞쪽에 있는 길이 16 m의 큰 건물터이다.

건물터
오른쪽의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는 건물터에는 둥근 형태의 적심이 1.5 m 내지 2.8 m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앞쪽의 건물터는 한 건물 내에 너비 약 3 m, 길이 약 5 m 크기의 두 개의 방을 가진 구조이다. 이런 구조는 뒤편에 있는 와적기단 건물터를 비롯하여 익산 미륵사지, 부여 능산리사지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 백제 고대 건축양식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강당터 서쪽에 있는 큰 건물터.

건물터
강당터 서쪽에서 남북으로 나란히 자리한 두 개의 건물터다. 앞쪽의 큰 건물터에는 강 자갈돌을 둥글게 쌓은 적심이 동서로 1칸, 남북으로 7칸 남아 있고, 뒤쪽의 건물터는 적심이 불규칙하게 흩어져 있다. 앞쪽 건물터에서 대형항아리를 땅속에 묻었던 시설이 발견되었다. 건물터의 위치나 구조로 보아 승방과 같은 사찰의 부속 건물로 추정된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왕궁리 유적은 백제 무왕이 왕궁으로 조성한 영역으로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정전으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터 양쪽에 회랑과 비슷한 장랑 형식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이와 비슷한 형식의 건물 배치는 일본에서도 여러곳 발견되고 있다.

왕궁리 유적 발굴 현장
백제 궁성 양식의 일본 전파(익산 왕궁성과 일본 아스카 오카모토노미야 장랑형 건물배치도)
익산 왕궁성의 정전 건물 좌우에 장랑 형식의 건물지가 확인됨. 이런 형식의 건물지는 일본에서 기원후 645년에 조성된나니와나가라토요사키노미야, 656년의 아토아스카오카모토노미야, 667년의 오오미오오쓰노미야에서 이미 발견된 바가 있음. 이에 익산 왕궁성과 일본의 궁성에 대해 궁장 및 부속시설, 건물에 대한 세부적인 비교 및 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됨.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장랑형 건물지 주변 발굴.조사 모습.

장랑형 건물지 및 주변 유구 배치도
장량형 건물지는 고대 동아시아 궁성에서는 대형 전각 건물의 좌우 양쪽으로 남북으로 긴 형태의 건물임. 기단석 1매, 기둥과 관련된 판형 석재 3매를 통하여 볼 때, 건물의 규모는 정면(남북) 10칸(27.5 m), 남북 1칸(2.75 m)로 추정됨.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궁궐 서쪽편 모퉁이에는 장량형 건물터가, 그 안쪽으로는 다양한 양식과 용도의 궁궐 부속 건물들이 있던 건물터가 확인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궁궐 서쪽 담장 안쪽에 있는 초석 건물지. 서쪽편 담장 아

OLYMPUS DIGITAL CAMERA원형 초석이 확인된 건물터 발굴 당시 모습.

초석 건물지
서측 궁장 안쪽의 석축시설 남서편에서 원형 초석 3매가 1.5 m 간격으로 남아 있는 건물지 39가 확인됨. 토층단면으로 보아, 원형 초석은 기단과 함께 기초를 조성하면서 만든 것으로 확인됨. 초석에서 약 50 cm 떨어진 지점에서 기단 석재가 빠진 흔적도 확인됨. 건물지39는 통일신라시대 와요지가 들어서면서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굴립주 방식의 건물터. 여러 동의 크고 작은 부속 건물터가 확인되고 있다.

굴립주 건물지
궁성 내 서남편 지역에서 서측 궁장을 따라 동서 방향으로 긴 건물지 1기(건물지 37)와 남북 방향으로 긴 형태의 건물지 5기(건물지 38, 건물지 40~42, 건물지 44)가 발견되었음. 원형 혹은 타원형의 구덩이를 파고 나무를 세워 만들었음. 특히 건물지 37은 다른 건물과 달리 동서방향으로 긴 형태를 하고 있음. 규모는 정면 5칸(520 cm), 측면 4칸(주칸거리 100 cm)임. 특히 북쪽 중앙에서 180 cm 떨어진 지점에 출입과 관련된 주공이 210 cm 간격으로 확인됨. 건물 주변에는 석축배수로도 확인됨.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왕궁 부엌터 발굴 모습.

왕궁의 부엌터 및 출토유물
왕궁 내의 부엌 및 창고등을 가리켜 수라간 혹은 어주(御廚) 등으로 불림. 부엌 내에서 조리와 관련된 물건이나 불을 땐 흔적 등이 확인됨. 특히 부엌터 내의 타원형 수혈에서 철제솥 2점, 직구단경호 1점, 광견호 2점, 단경병 2점, 철제가래날 1점, 철부 1점, 숫돌 3점이 출토되었다. 건물의 축조 및 사용시기, 출토유물을 통하여 존손 기간은 백제말로 추정됨.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사찰영역 뒷편 구릉에는 다른 왕궁과 마찬가지로 휴식공간으로 큰 연못이 있는 정원과 다양한 수목들이 심어졌던 후원터가 확인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궁궐 뒷편에는 연못을 중심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정원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후대 궁궐 건축에서도 볼 수 있는 공간배치이다.

정원
궁성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구분하는 동서석축4의 우측 말단부에 축대의 높낮이를 활용하여 네모난 못(방지, 方池) 스타일의 화려한 정원이 확인되었음. 정원의 중심공간은 괴석과 판석을 사용하여 장방형의 못을 만든 후에 조경석과 자갈돌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만들었음. 이외에 물을 보관하는 장방형의 수조시설, 물의 양을 조절하는 ‘ㄱ’자 형태의 암거시설, 정원 중심공간에서 나온 물을 모아 두는 방형계의 집수시설도 있음. 또한 넓적하면서도 둥근 자갈돌을 깐 보도시설과 함께 건물지도 있음. 정원은 백제 궁성에서 전모가 밝혀진 최초의 사례로 자연 친화적인 기법으로 만든 백제 조경기술의 정수를 밝힐 수 있음.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낮은 구릉에 조성된 후원 발굴.조사 모습.

후원
궁성내의 북동편 구릉에 위치함. 후원은 구릉 사면에서 크게 휘어지는 ‘U’자형의 환수구에 의하여 돌려져 있음. 후원의 남.서편에서는 구불구불한 수로(曲水路)가 단독 혹은 이중으로 설치되어 있고, 다시 이 수로에 또 다른 수로가 연결되어 있음. 후원의 남동편 모서리 지점은 궁성 전각 구역에서 후원으로 진입하기 위하여 뚫려 있음. 후원 내부의 남편에서는 동서 방향의 보도용 석렬시설, 중앙에서는 정면 4칸 × 측면 4칸의 건물(건물지 36)이 확인되었음. 이외에 수량을 조절하기 위한 집수시설도 있음. 이런 수로시설은 배수 뿐만 아니라 궁성 중심 공간에서 필요한 물을 저장하여 공급하기 위한 용도로도 활용되었음. 궁성 내부에서 그 실체가 국내에서 최초로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음.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발굴.조사가 진행 중인 후원 서쪽편 영역. 화장실, 공방시설 등 다양한 부속시설 등이 확인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형화장실 발굴.조사 모습과 출토 유물.

화장실
궁성 후반부에서 지대가 낮은 서편의 저지대에서 화장실과 공방이 확인됨. 화장실을 동서 방향으로 크기가 다른 3기가 나란하게 위치하고 있는데, 오수를 저장하여 정화하였다가 긴 수로를 통과하면서 정화를 시켜 동서석축배수로-서벽 암거를 통하여 서측 궁궐 담장으로 빠져나가는 오늘날의 정화조와 같은 과학적 구조를 하고 있음. 3기의 화장실 중에서 가장 큰 대형화장실1의 규모는 너비 10.8 m, 너비 1.8 m, 깊이 3.4 m임. 내부에서 뒤처리용 나무막대를 비롯하여 건축 부재로 추정되는 목제품, 나무방망이, 백제 짚신, 목제 칠기 뚜껑 등이 출토됨.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공방 지역 발굴.조사 모습과 출토 유물.

공방은 동서석축배수로 북편에 위치함. 남북으로 긴 2동의 공방 관련 건물이 자리하고, 이 좌측에 공방 관련 원려, 재료, 도구들을 버리는 폐기지가 확인됨. 특히 공방 작업면의 습기를 제거하기 위한 독특한 지하 시설이 확인됨. 공방 관련 시설에서는 금.유리제품 및 반제품, 금속.유리제작용 도가니, 슬래그, 송풍관, 원재료, 소토덩어리, 벽체편 등 다양한 종류의 공방 관련 유물이 다량 출토됨. 장기간에 걸친 대규모 생산시설이 존재한 것으로 추정됨.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OLYMPUS DIGITAL CAMERA왕궁리 유적지 사찰영역

익산 왕궁리유적, 사적 408호
왕궁리는 예로부터 왕궁평, 왕검이, 왕금성으로 불려 고대 백제의 왕궁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 지역의 유적은 고대 백제의 왕궁이 있던 자리에 사찰이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왕궁 유적과 사찰 유적이 함께 남아 있다. 발굴.조사 결과 백제 무왕(600~641년) 때 왕궁으로 조성된 이후 백제 말에서 신라 초기에 사찰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왕궁은 규모가 동서 약 240 m, 남북 약 490 m이다. 궁장을 쌓고 나서 내부 경사면을 따라 석축으로 단을 만들어 대지를 조성하고 건물을 지었는데, 왕궁 내에서 물과 조경석을 이용한 조경 시설이 발견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유적지 내에는 왕궁 건물터와 금당 등의 사찰 건물터가 여럿 남아 있다. 사찰 유적 중 국보로 지정된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289호)은 조형미가 뛰어나 백제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왕궁리 유적에는 마한의 기준 도읍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 등 다양한 견해가 얽혀 있는데, 최근의 연구로 백제 궁성의 구조와 기능 등 역사 속 비밀이 하나 둘씩 밝혀지고 있어 왕궁리 유적의 실체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지평이 열리고 있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7년)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왕궁리 유적전시관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경희궁] 발굴과 복원

경희궁은 1970년대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한 이후 그 터만 남았던 것을 발굴.조사를 거쳐 전각 일부를 복원하였다. 조선후기 많은 전각들이 있던 넓은 경희궁 권역에는 서울고 이전 이후 원래의 모습을 찾기보다는 도심에 있던 위치적인 장점때문에 많은 공공기관들이 들어설려고 했으며, 그 중 서울시교육청이 경희궁 서쪽 언덕에 이전해 왔으며, 서울역사박물관을 비롯하여 일부 공공기관이 자리잡게 되었다.

1980년대 발굴.조사 이후 경희궁은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자정전, 태령전 등 일부 전각들과 금천교만이 복원되었으며,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했던 흥화문은 원래 자리가 아닌 숭정전 남쪽 개양문에 있던 자리로 옮겨져 간략하게 궁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복원된 건물 외 옛 숭정전 건물은 동국대에 있는 사찰인 정각원 불전으로 지금도 사용하고 있으며, 경희궁 주변에는 옛 경희궁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반쪽자리 경희궁 발굴과 복원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한 후 1978년 경희궁지를 매입한 현대그룹은 이곳에 사옥을 조성하려 했다. 그러나 공원녹지를 확보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자 1980년 서울시는 이를 재매입하였고, 이때 경희궁터는 사적 271호로 지정되었다. 이 부지는 1986년에 경희궁지 사적공원 조성과 시립박물관 건립지로 모색된 이래 발굴조사가 여러 차례 이뤄졌다. 그 결과를 토대로 숭정전, 자정전, 태령전, 금천교 등이 복원되어 2002년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그러나 서궐도안에 나타난 70여 개 주요 전각 가운데 단 3개만 복원되었고 흥화문만이 제 자리를 찾았을 뿐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경희궁 복원전경, 1980년대

경희궁,미완의 과제
빽빽한 도심 속에 서울고등학교가 떠난 빈터가 생기자 이곳은 부지를 확보하려는 공공기관들의 각축장이 됐다.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가 경희궁 영역의 서쪽 부지를 얻어 1981년에 이전해 왔고, 서울시립미술관은 88서울올림픽 개막에 맞춰 임시 사용할 목적으로 구 서울고 본관을 개.보수했다. 1995년에는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관이 건축돼 현재 시립미술관 경희궁 분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2002년에는 경희궁 동궁 영역에 서울역사박물관이 건립.개관했다. 현재 대형 건물로 둘러싸인 경희궁은 한껏 움츠린 채 겨우 자그마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1. 정비.복원을 위한 경희궁지 제2차 발굴조사보고서 外, 2. 시립서울박물관(가칭) 전시기본계획, 1995년,

OLYMPUS DIGITAL CAMERA3. 경희궁지 내 서울시립박물관 건립검토 회신 – 부지현황, 1985년

OLYMPUS DIGITAL CAMERA4. 경희궁지내 서울시립박물관 건립검토 회신(복제), 1985년, 경희궁지내 서울시립박물관 건립에 관하여 검토한 문서이다. 경희궁의 유적발굴을 철저히 조사한 후 박물관 건축을 진행하도록 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5. 토지대장 및 지적도 사본 송부, 1980년, 경희궁지의 토지매각 및 이전관계를 설명하는 토지대장 자료이다. 6,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던 흥화문을 1974년 서울시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하는 문서이다

경희궁은 살아있다.
현재 경희궁의 몇개 전각이 복원되어 개방되고 있지만, ‘경희궁’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낯설다. 실제 궁궐의 모습은 사라지고 터만 남았다는 뜻에서 ‘경희궁지’라는 이름으로 사적에 등록되었을 뿐이다. 서울시교육청과 서울역사박물관 및 동쪽의 주택가를 아우르며 큰 권역을 형성했던 경희궁의원형을 상상하기란 이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경희궁은 우리 주변 곳곳에 살아 있다. 경희궁의 정문이었던 흥화문은 비록 그 위치가 이전되었으나 현재 복원된 경희궁의 정문으로 또다시 쓰인다. 정전이었던 숭정전은 동국대학교 정각원 건물로 사용된다. 황학정은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채 사직단 주변으로 옮겨갔다. 또한 궁장의 일부나 돌계단, 영렬천 등이 경희궁 주변의 주택가 및 길가에 남아 있어 옛 경희궁의 위용을 추정케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폐허가 된 숭정전, 1890년대, 프랑스국립기메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뽕나무로 덮인 궁궐, 1898년, 프랑스

OLYMPUS DIGITAL CAMERA서울고등학교, 1970년대

OLYMPUS DIGITAL CAMERA경희궁 전경, 1890년대. 고종대 경복궁 중건 과정에 대부분의 전각이 헐려서 당시에도 숭정전을 비롯한 일부 전각만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숭정전이 보이는 경희궁 전경, 1890년대

OLYMPUS DIGITAL CAMERA경희궁 숭정전, 1909년

OLYMPUS DIGITAL CAMERA경희궁 흥화문, 1909년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총독부중학교, 1910년대

OLYMPUS DIGITAL CAMERA흥화문과 경희궁, 1890년대

OLYMPUS DIGITAL CAMERA복원된 경희궁, 2015년

OLYMPUS DIGITAL CAMERA현재의 경희궁

경희궁의 마지막을 지킨 건물들
경성중학교가 들어설 시기에 경희궁에는 숭ㅈ어전, 흥화문, 회상전, 흥정당, 황학정 등 5개의 건물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매국 관사를 짓기 위해 황학정이 사직단 북쪽으로 옮겨간 것을 시작으로, 경성중학교 교실로 사용된 숭정전과 임시 소학교 교원양성소 교실로 이용된 회상전과 함께 교원양성소 교실과 기숙사로 쓰인 흥정당도 1928년 장충동에 있는 광운사로 이전되었다. 마지막으로 흥화문은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옮겨져서 야주개를 밝게 비추던 현판도 ‘경춘문’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흥정당, 1928년 광운사 이전, 1950년대 동북중학교 시절 변형된 흥정당.

OLYMPUS DIGITAL CAMERA흥화문, 1933년 박문사로 이전. 최근까지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하다가 경희궁을 복원할 때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곳 또한 원래 있던 곳이 아니고 개양문이 있던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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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전(1975년), 1926년 일본계 사찰로 이전

OLYMPUS DIGITAL CAMERA황학정, 1922년 사직단 북쪽 이전.  1898년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궁술 연습을 위해 지은 사정이다. 황학정은 1913년 경희궁이 헐리고 1922년 총독부 전매국 관사가 황학정 자리에 지어지면서 현재의 사직동으로 옮겨졌다.

OLYMPUS DIGITAL CAMERA잔존하는 경희궁의 현판들, 경희궁 전각들에 걸려 있던 각종 현판들이다. 현재는 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희궁 발굴유물(1985년, 1987년) 중 도자기류

OLYMPUS DIGITAL CAMERA건축부재들

두개의 숭정전
현재 경희궁 숭정전의 건물은 두개다. 경희궁 권역에 새롭게 복원된 숭정전과 동국대학교 정각원의 법전으로 사용되고 있는 본래의 숭정전이다. 숭정전은 1926년 일본계 사찰인 조동종 조계사에 매각됐다가 1976년에 동국대학교 내 현재의 자리로 이전.복원됐다. 또한 숭정전의 답도 2개 가운데 하나는복원된 숭정전, 다른 하나는 정각원에 놓여 있는 등 반반씩 나누어져 있다. 어좌의 닫집은 동국대학교 박물관의불상 위 천장에 부착돼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동국대 정각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숭정전 건물.

OLYMPUS DIGITAL CAMERA동국대박물관 불상위에 있는 닫집

OLYMPUS DIGITAL CAMERA1, 숭정전 현판, 2. 숭정전 어탑 부재, 3. 숭정전 토수, 4. 숭정전 봉황문 답도(탁본), 5. 숭정전 공작문 답도(탁본),

OLYMPUS DIGITAL CAMERA복원된 숭정전.

OLYMPUS DIGITAL CAMERA경희궁지에 남아 있는 옛 경희궁 흔적들

OLYMPUS DIGITAL CAMERA경희궁 흔적들.

새롭게 밝혀지는 경희궁의 흔적들
지금의 성곡미술관 자리는 경희궁의 영취정과 춘화정이 있던 곳으로 경치가 좋아 왕들이 이곳에서 꽃구경을 즐겼다. 특히 숙종은 이곳의 정취를 시로 짓기도 했고, 아름다운 이곳을 ‘반월형 석조 연못’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이 석조는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켰으나 경희궁의 것으로 인식되지 못하다가 최근에야 제 기억을 되찾게 됐다. 또 서울고등학교의 상징인 돌거북은 경희궁 금천교를 오랫동안 지켜온 것이며, 경희궁 인근 주택가에서 발견된 괴석도 궁정에서 사용되던 기이한 모양의 돌이다. 그러나 흥화문과 함께 옮겨간 해치모양의 석물과 개양문,흥정당의 행방은 여전히 찾을 길이 없다.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사라진 것을 찾는 일이 더 시급한 과제일 것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누각 위의 봄바람 좋아
섬돌 가에 반달같은 연못 있네.
앉아 물고기 뛰어 노는 곳을 보니
조용히 려천(戾天) 시를 읊네
- 「춘화정에서 반달연못을 바라보며」 숙종 -

OLYMPUS DIGITAL CAMERA반월형 석조, 복제, 숙종대 추정,

이 석조 연지는 통돌(全石)로 안팎을 반월형으로 가공하고 안쪽에는 두마리 잉어가 여의주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조각하고, 연지 상단 테두리에는 세마리의 서수(瑞獸)를 조각했다. 서수상 아래에는 구름 형태의 모란문이 조각되어 있으며, 서수의 자세와 표현방법, 문양과 조각기법을 통해 춘화정이 건립된 1704년 경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현재 이 유물은 영취정과 춘화정 자리에 있는 성곡미술관 연못에 설치되어 있으며, 전시를 준비 현장조사 과정에서 경희궁의 것으로 새롭게 밝혀진 것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어제망관악시(御製望冠嶽詩), 경희궁 영취정에 걸렸던 현판으로 숙종이 영취정에서 관악산을 바라보고 감회를 적은 칠언절구이다.

“좌의 명산이 富林(지금의 과천)에 위치해 있는데
머리 들어 남쪽 바라보니 흰구름이 깊구나.
때때로 북암유상기를 읽으니 이 몸이 관악산에
올라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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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석(塊石), 현재 경희궁 흥화문 남쪽 주택가 음식점에서 발견된 괴석으로 모란문이 들어간 석함에 올려져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돌거북(石龜), 서울고등학교 본관 앞에 있는 돌거북이다. 학교가 경희궁지에 있었을때부터 본관 입구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것은 창덕궁 금천교 하단에 놓인 돌거북의 형태와 유사하며, 현재도 복원된 경희궁 금천교에는 돌거북의 받침돌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울역사박물관 입구 흥화문이 있던 자리 앞에 복원해 놓은 금천교.

OLYMPUS DIGITAL CAMERA개양문

경희궁의 나쪽 문, 지금의 흥화문이 놓인 자리는 원래 개양문이 있던 곳이다. 개양문은 서본원사, 경성방송국을 떠돌다 성균관대학교 정문으로 사용되었고, 1970년대 신라호텔로 매각되었다고 구전되나 지금은 그 행방을 찾을 수 없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흥화문 석물

흥화문이 박문사 정문으로 헐려나갈 때 같이 옮겨간 것으로 추정되는 석물이다. 흥화문 철거 기사 오른쪽 하단의 석물과 박문사 정문으로 옮겨진 후의 왼쪽 해태상(사자상)은 같은 것으로 여겨지며, 1959년까지 기록에는 현존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 이후로는 행방이 묘연하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출처>
1. 서울역사박물관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경희궁] 구한말 이후 터만 남은 경희궁지

조선후기 국왕의 임시거처이자 왕실가족의 생활공간으로 서궐(西闕)로 불렸던 경희궁은 구한말 고종대 경복궁 중건과 함께 그 역할이 크게 축소되면서 궁궐로서 의미가 크게 퇴색될 수 밖에 없었다. 경복궁 중건과정에서 많은 전각들을 헐어 건축자재로 사용되었으며, 왕실가족이 생활하는 이궁(離宮)의 역할은 법궁이었던 동궐이 맡게 되면서 경희궁은 실질적인 용도가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이후 숭정전을 비롯하여 일부 전각만 남아 있는 넓은 공터만 남게 되었다. 덕수궁의 대한제국 법궁으로 정해지면서 새로운 역할의 생기는 듯 했으나 조선의 멸망과 함께 역사속의 궁전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일제가 일본인을 위한 경성중학교를 세우면서 1970년대까지 서울고등학교에서 경희궁 옛터를 사용하다가 숭정전을 비롯한 일부 전각들만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희궁지(慶熙宮址)
고종 대 경복궁의 중건사업은 조선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경희궁에는 비극의 서막이었다. 경희궁의 전각을 헐어 경복궁 중건의 건축 자재로 활용하면서 경희궁은 폐허의 궁으로 전락했다. 대한제국기의 경희궁은 궁 본래의 쓰임새가 거의 사라지고 일부 전각만 겨우 존속하는 상태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관료 자제들의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아예 궁의 이름조차 사라지고 경희궁 터라는 기억만 남았다. 광복 이후에는 서울고등학교가 이곳을 활용했고, 1980년에 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게 되자 서울시가 경희궁지를 매입해 공원을 만들었다. 1980년대 후반에 와서는 경희궁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 작업이 여러 차례 이뤄졌다. 이후 서울시교육청과 서울역사박물관 등이 들어섰고, 숭정전 및 자정전 일대가 복원대 2002년에 시민에게 공개됐다. 그리고 현재에는 사적으로 지정된 경희궁 터 위에 몇 개의 전각만이 궁으로서의 흔적을 증언해 주고 있을 뿐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1970년 경희궁터에 있었던 서울고등학교 전경. 옛궁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고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경희궁은 고종대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그 필요성이 없으졌으며, 그 뒤 순차적으로 전각들이 헐어졌다.

경희궁의 공허지와와 고종대의 활용
경복궁 중건이 있었던 고종 대를 거치면서 경희궁은 궁궐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 경희궁의 빈터는 토지로 개간되어 용동궁 등 4개의 궁에 분배됐고, 화폐를 만드는 곳으로 활용되기도 했으며, 개화 정책의 일환으로 양잠소가 설치되기도 했다. 또 1899년 독일의 하인리히 친왕이 방한했을 때는 제국의 면모를 드러내 보이는 관병식이 진행되었다. 1902년에 경운궁과 경희궁을 연결하는 운교가 놓이는 등 몇가지 시도기 있기는 했으나, 궁궐로서의 역할을 되찾은 것은 아니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1. 한성부지적도(漢城府地籍圖), 1908년

현재 세종로 사거리에서 서울역사박물관 입구에 이르는 새문안로와 경희궁 주변지역이다. 우측 경계물길은 백운동천이며, 표기된 다리는 송기교(松杞橋)이다. 그 아래 태평로 신교(新橋)가 표기되어 있다. 도로 한가운데로 서대문으로 연결되는 전차 선로가 표시되어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2. 경희궁내신기전사궁분배도양안(慶熙宮內新起田四宮分排都量案), 1868년

1868년 5월과 1870년 3월 두 번에 걸쳐 경희궁 내의 전(田)을 명례궁, 용동궁 등 4궁에 분배한 뒤 개간한 내역을 정리한 것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3. 경복궁영건일기(景福宮營建日記), 1865년. 8월22일 기사에는 경복궁의 복원에 필요한 자재의 마련을 위해 경희궁을 훼철한 내용이 담겨 있다.

‘서궐 내에는 숭정전, 회상전, 정심합, 사현합, 흥정단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좋은 것을 골라서 나인간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했다. 이날부터 궁궐의 뜰에 깔린 전석과 층계석을 뽑아내어 먼저 광화문 역소에 사용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4. 육전조례(六典條例), 1867년.

가위장(假衛將) 혹은 공궐위장(空闕衛將)이라고 불리며, 조선후기 왕이 거주하지 않는 빈 대궐의 수비를 담당한 관직이다. 왕은 보통 창덕궁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경복궁.경희궁.창경궁에 설치되었고, 그 수는 각각 3인씩이었다. 다만, 왕이 경희궁으로 옮겨 거주할 때는 경희궁의 공궐위장이 창덕궁으로 이설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5. 진신(搢紳), 1890년.

1890년도의 관직표로 이 당시 경희궁은 빈 궁궐이었기 때문에 공궐위장이 3인으로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6. 화약통(19세기), 7. 주화당오전(鑄貨當五錢),

화약통, 흥화문 주변 행각에 화약을 제조하는 자초소가 있어서 근처 창고에 땔감을 쌓아 놓기도 했다. 1883년에는 화약이 폭발하여 흥화문이 소실되었으나 바로 복구되었다. 주화당오전(鑄貨當五錢), 개항 이후 정부는 막대한 개항정비, 외국사건에 대한 보상금, 신식군대의 설치비 등을 부담학 되어 재정의 궁핍은 가속화되었다. 이에 정부는 재정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1883년 당오전을 주조, 발행하게 되었고 경희궁에서 이 화폐를 주조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8. 왕궁사(王宮史), 1954년

OLYMPUS DIGITAL CAMERA9. 황학정, 일제강점기

OLYMPUS DIGITAL CAMERA사직단 뒷편 언덕으로 옮겨진 황학정. 당시 모습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황학정은 1899년 회상전 북쪽에 세운 사정(射亭)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922년 전매국 관사를 짓는다는 명목으로 인왕산 아래 현재의 사직공원 북쪽의 등과정 옛터로 옮겨졌으며 현재도 그 위치에 남아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10. 1902년 경희궁과 경운궁을 연결했던 홍교가 설치된 사진이다. 고종은 경운궁과 경희궁을 연결하여 두 궁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려 했다. 다리 밑으로는 2개이 출입로가 있으며, 이 밑으로 전차가 달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1908년 무렵에 홍교는 사라졌다., 로세티 촬영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11. 흥화문 유리원판 사진, 1905년, 유리원판 필름이다. 숯을 지게에 지고 있는 두 남자의 모습 뒤로 흥화문이 보인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12. 서울부분도, 1901년, 콜로넬 브라운스 제작, 경희궁 터에 뽕나무 궁궐(Mulberry Palace)이라고 표시된 지도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주변시설 변화
조선시대 훈국신영이 있던 자리에는 신식 군대의 초급 장교를 육성하는 무관학교가 들어섰고, 일본의 경의 철도 부설에 대항한 서북철도국도 잠시 이 근처에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인 협률사도 무관학교 동쪽에 있다가 철폐되었고, 같은 자리에는 1908년에 신연극의 출발지인 원각사가 생겼다.당주동 일대에는 근대식 학교인 사립흥화학교와 새문안교회, 구세군회관 등 종교시설이 들어서면서 이 일대에는 ‘변화와 개화’를 보여주는 새로운 경관이 펼쳐졌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1, 경성부시가도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2, 무관학교 전경, 189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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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관학교 도면, 1909년, 서대문내각부관사부지평면도로 무관학교의 배치도이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 동쪽에 무관학교가 위치하고 있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4. 전차개통식, 1899년,

1899년 동대문에서 거행된 전차 개통식 광경이다. 행사장 간이천막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걸려 있는 것이 보이며, 한국 사람들이 이 전차를 ‘Devil Car’라고 불렀다고 기사에 적혀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5. 법규유편(法規類編), 1908년,

협률사 자리에 잠시 있었던 서북철도국은 1902년 경의선을 부설하기 위하여 궁내부에 설치되었다. 1904년 일본이 러일전쟁의 일환으로 군용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하면서 이 국은 폐지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5. 협률사 사진,

협률사는 현재 새문안교회와 대우빌딩 사이에 위치하고 있던 기관으로 1902년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 공연장이었다. 1906년 경영상의 문제로 문을 닫고 2년 후 원각사로 재개관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경성중학교의 건립
경희궁이 궁궐로서의 면모를 완전히 상실하고 새로운 위상이 부여된 것은 1910년 경성중학교가 이곳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학교 건립 초기인 1909년에는 독립관 일대를 교사를 활용하다가 1910년에 경희궁 터에 건물을 완공했다. 그때까지 유지되던 숭정전 등 일부 전각은 경성중학교 교사로 사용됐고, 이전 시기에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던 공허지는 학교 운동장이 된 것이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그나마 몇 개 남아 있던 전각마저 외부에 매각됨으로써 경희궁 건물은 잔해조차 완전히 사라졌다. 한편 경성중학교는 1932년 대화재로 목조 건축인 본관 등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1935년에 신축 교사를 완공함으로써 새로운 위용으로 학교의 모습을 일신시켰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P1208053-horz-20161218경성중학교 신축교사.

OLYMPUS DIGITAL CAMERA경성중학교 건물

OLYMPUS DIGITAL CAMERA2. 경성중학교 엽서, 1913년

OLYMPUS DIGITAL CAMERA3. 경성중학교 모자, 일제강점기

OLYMPUS DIGITAL CAMERA4. 경성중학교 교우회지, 일제강점기

OLYMPUS DIGITAL CAMERA5. 경성발달사, 1912년. 경성중학교의 전신인 통감부중학교의 설립 배경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는데, 독립관을 학교 시설로 사용하게 된 내역을 설명하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6. 경성부사, 1934년, 경희궁 부지를 조선총독부에서 차입한 내용이 실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7. 경성부사, 1934년, 경성중학교 시절 현존하고 있던 회상전과 벽파담 사진이다. 담 너머로는 확학정이 보인다.

잠식당하는 경희궁 영역
경희궁 터에 경성중학교만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조선총독부는 1908년에 경희궁 주변에 관사를 짓기 시작했고 1922년에는 궁의 부지 동쪽 부분을 잘라 내고서 그곳에 직원용 관사를 건설했다. 경희궁 북서쪽의 지대가 높은 송월동에는 경성측후소가 근대식 건축물로 1932년에 건립됐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막바지로 치닫는 전황 속에서 연합군의 공습에 대비한 방공호가 경성중학교 내 숭정전 동쪽 행랑 부근에 건설되었다. 현재 이 시설은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 부지에 위치하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태령전 발굴유물

OLYMPUS DIGITAL CAMERA경희궁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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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구개정예정계획 경성시가전도, 1913년,

시구개정예정노선도가 표시된 지도이다. 현재의 세종로사거리에서 서대문으로 향하는 도로가 확장 표시되어 있다. 이 사업으로 인해 경희궁 남쪽 영역이 잘려나갔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2. 관사부지 설계도, 1920년대,

경희궁 주변과 경희궁 동쪽부지에 들어선 관사 설계도이다. 현재 서울역사박물관 동쪽편 주택가가 관사 자리이며, 일부 관사는 개조되어 음식점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3. 조선과 건축, 1935년,

일제강점기 경성에 지어진 관사의 현황을 알 수 있는 사진이다. 표준적인 관사의 유형이 있었으며, 고급 관료 주택의 경우 넓은 대지에 화려한 외관으로 건축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4. 국유임야대부대장사본, 1935년,

1935년 경성부 도시계획계에서 작성한 ‘국유임야 대부대장’ 사본으로, 조선총독부 관유지의 대부사항을 기록하고 있으며, 경성중학교 부지와 전매국 관사 부지도 포함되어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5. 경성부 방공시가지 계획조사서, 1937년,

일본은 대륙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전시체제의 일환으로 경성에 여러 전쟁에 대비한 시설을 설치하였다. 지하전차, 지하공동구, 신설저수지, 대피소 등이며 넓은 경성중학교 부지는 유사시 대피할 장소로 지정하였다. 이런 이유로 이곳에 방공호가 1944년 설치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새문안로의 변화
대한제국기 전차의 개설은 새문안로의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898년에 흥화문에서 전차기공식이 열렸고 이듬해 본격적으로 새문안로에 전차가 운행되어 서대문 성문 사이로 전차가 지나갔다. 일제강점기에 들어 경성시구개수사업의 일환으로 1915년 도로가 확장되고 서대문이 헐려나갔다. 이 와중에 종로와 맞닿아 있던 흥화문은 위치가 변경되어 동향에서 남향이 되었고 경희궁의 남쪽 권역도 일부 잘려나가게 되었다. 도로 폭이 좁고 지대가 높아 통행이 불편했던 새문안로가 통행의 ‘편리’를 위해 개수된 것은 기존의 공간 질서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6. 경성시구개정사업 회고이십년, 1930년,

경성시구개정사업의 변화상을 파악할 수 있는 사진첩이다. 서대문로의 확장으로 인해 동향이던 흥화문이 남향으로 바뀐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7, 1899년 전차가 개통되어 서대문 성문 사이로 전차가 지나가는 사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8. 서대문 입체사진

서울고등학교의 설립
광복 이후에도 경희궁은 학교부지로 활용됐다. 경성중학교는 1946년에 명칭이 변경되어 현재 서울고등학교의 전신인 서울공립중학교로 개교했으며, 강남으로 이전하기 전인 1980년까지 이곳에 있었다. 서울고등학교는 경희궁 터의 수려한 자연환경과 고적의 흔적을 간직한 최고의 명문 학교로 명성을 날렸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1. 서울고등학교 교명판,

OLYMPUS DIGITAL CAMERA2. 경희 제4집, 1952년. 3.서울고등학교 교지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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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울고등학교 연혁집

OLYMPUS DIGITAL CAMERA5. 서울고등학교 요람, 196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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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울고등학교 사진집, 195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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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경희신문, 1961년,

서울고 배치도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방공호는 ‘지하체신국’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이곳은 1970년대까지 체신국에서 활용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8. 서울고 1회 졸업앨범, 1949년

OLYMPUS DIGITAL CAMERA9. 서울고 졸업앨범, 1953년

OLYMPUS DIGITAL CAMERA10. 서울고 졸업앨범, 1962년

OLYMPUS DIGITAL CAMERA11.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한 후 학교에 남아 있는 경희궁의 유적물을 조사한 자료이다. 숭정전의 답도와 축대가 그대로 남아 있다. 1980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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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서울고등학교 부지가 현대건설에 매각된 관계를 나타내는 문서이다. 1980년

<출처>
1. 서울역사박물관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