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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경희궁] 발굴과 복원

경희궁은 1970년대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한 이후 그 터만 남았던 것을 발굴.조사를 거쳐 전각 일부를 복원하였다. 조선후기 많은 전각들이 있던 넓은 경희궁 권역에는 서울고 이전 이후 원래의 모습을 찾기보다는 도심에 있던 위치적인 장점때문에 많은 공공기관들이 들어설려고 했으며, 그 중 서울시교육청이 경희궁 서쪽 언덕에 이전해 왔으며, 서울역사박물관을 비롯하여 일부 공공기관이 자리잡게 되었다.

1980년대 발굴.조사 이후 경희궁은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자정전, 태령전 등 일부 전각들과 금천교만이 복원되었으며,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했던 흥화문은 원래 자리가 아닌 숭정전 남쪽 개양문에 있던 자리로 옮겨져 간략하게 궁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복원된 건물 외 옛 숭정전 건물은 동국대에 있는 사찰인 정각원 불전으로 지금도 사용하고 있으며, 경희궁 주변에는 옛 경희궁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반쪽자리 경희궁 발굴과 복원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한 후 1978년 경희궁지를 매입한 현대그룹은 이곳에 사옥을 조성하려 했다. 그러나 공원녹지를 확보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자 1980년 서울시는 이를 재매입하였고, 이때 경희궁터는 사적 271호로 지정되었다. 이 부지는 1986년에 경희궁지 사적공원 조성과 시립박물관 건립지로 모색된 이래 발굴조사가 여러 차례 이뤄졌다. 그 결과를 토대로 숭정전, 자정전, 태령전, 금천교 등이 복원되어 2002년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그러나 서궐도안에 나타난 70여 개 주요 전각 가운데 단 3개만 복원되었고 흥화문만이 제 자리를 찾았을 뿐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경희궁 복원전경, 1980년대

경희궁,미완의 과제
빽빽한 도심 속에 서울고등학교가 떠난 빈터가 생기자 이곳은 부지를 확보하려는 공공기관들의 각축장이 됐다.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가 경희궁 영역의 서쪽 부지를 얻어 1981년에 이전해 왔고, 서울시립미술관은 88서울올림픽 개막에 맞춰 임시 사용할 목적으로 구 서울고 본관을 개.보수했다. 1995년에는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관이 건축돼 현재 시립미술관 경희궁 분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2002년에는 경희궁 동궁 영역에 서울역사박물관이 건립.개관했다. 현재 대형 건물로 둘러싸인 경희궁은 한껏 움츠린 채 겨우 자그마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1. 정비.복원을 위한 경희궁지 제2차 발굴조사보고서 外, 2. 시립서울박물관(가칭) 전시기본계획, 1995년,

OLYMPUS DIGITAL CAMERA3. 경희궁지 내 서울시립박물관 건립검토 회신 – 부지현황, 1985년

OLYMPUS DIGITAL CAMERA4. 경희궁지내 서울시립박물관 건립검토 회신(복제), 1985년, 경희궁지내 서울시립박물관 건립에 관하여 검토한 문서이다. 경희궁의 유적발굴을 철저히 조사한 후 박물관 건축을 진행하도록 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5. 토지대장 및 지적도 사본 송부, 1980년, 경희궁지의 토지매각 및 이전관계를 설명하는 토지대장 자료이다. 6,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던 흥화문을 1974년 서울시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하는 문서이다

경희궁은 살아있다.
현재 경희궁의 몇개 전각이 복원되어 개방되고 있지만, ‘경희궁’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낯설다. 실제 궁궐의 모습은 사라지고 터만 남았다는 뜻에서 ‘경희궁지’라는 이름으로 사적에 등록되었을 뿐이다. 서울시교육청과 서울역사박물관 및 동쪽의 주택가를 아우르며 큰 권역을 형성했던 경희궁의원형을 상상하기란 이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경희궁은 우리 주변 곳곳에 살아 있다. 경희궁의 정문이었던 흥화문은 비록 그 위치가 이전되었으나 현재 복원된 경희궁의 정문으로 또다시 쓰인다. 정전이었던 숭정전은 동국대학교 정각원 건물로 사용된다. 황학정은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채 사직단 주변으로 옮겨갔다. 또한 궁장의 일부나 돌계단, 영렬천 등이 경희궁 주변의 주택가 및 길가에 남아 있어 옛 경희궁의 위용을 추정케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폐허가 된 숭정전, 1890년대, 프랑스국립기메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뽕나무로 덮인 궁궐, 1898년, 프랑스

OLYMPUS DIGITAL CAMERA서울고등학교, 1970년대

OLYMPUS DIGITAL CAMERA경희궁 전경, 1890년대. 고종대 경복궁 중건 과정에 대부분의 전각이 헐려서 당시에도 숭정전을 비롯한 일부 전각만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숭정전이 보이는 경희궁 전경, 1890년대

OLYMPUS DIGITAL CAMERA경희궁 숭정전, 1909년

OLYMPUS DIGITAL CAMERA경희궁 흥화문, 1909년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총독부중학교, 1910년대

OLYMPUS DIGITAL CAMERA흥화문과 경희궁, 1890년대

OLYMPUS DIGITAL CAMERA복원된 경희궁, 2015년

OLYMPUS DIGITAL CAMERA현재의 경희궁

경희궁의 마지막을 지킨 건물들
경성중학교가 들어설 시기에 경희궁에는 숭ㅈ어전, 흥화문, 회상전, 흥정당, 황학정 등 5개의 건물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매국 관사를 짓기 위해 황학정이 사직단 북쪽으로 옮겨간 것을 시작으로, 경성중학교 교실로 사용된 숭정전과 임시 소학교 교원양성소 교실로 이용된 회상전과 함께 교원양성소 교실과 기숙사로 쓰인 흥정당도 1928년 장충동에 있는 광운사로 이전되었다. 마지막으로 흥화문은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옮겨져서 야주개를 밝게 비추던 현판도 ‘경춘문’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흥정당, 1928년 광운사 이전, 1950년대 동북중학교 시절 변형된 흥정당.

OLYMPUS DIGITAL CAMERA흥화문, 1933년 박문사로 이전. 최근까지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하다가 경희궁을 복원할 때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곳 또한 원래 있던 곳이 아니고 개양문이 있던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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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전(1975년), 1926년 일본계 사찰로 이전

OLYMPUS DIGITAL CAMERA황학정, 1922년 사직단 북쪽 이전.  1898년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궁술 연습을 위해 지은 사정이다. 황학정은 1913년 경희궁이 헐리고 1922년 총독부 전매국 관사가 황학정 자리에 지어지면서 현재의 사직동으로 옮겨졌다.

OLYMPUS DIGITAL CAMERA잔존하는 경희궁의 현판들, 경희궁 전각들에 걸려 있던 각종 현판들이다. 현재는 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희궁 발굴유물(1985년, 1987년) 중 도자기류

OLYMPUS DIGITAL CAMERA건축부재들

두개의 숭정전
현재 경희궁 숭정전의 건물은 두개다. 경희궁 권역에 새롭게 복원된 숭정전과 동국대학교 정각원의 법전으로 사용되고 있는 본래의 숭정전이다. 숭정전은 1926년 일본계 사찰인 조동종 조계사에 매각됐다가 1976년에 동국대학교 내 현재의 자리로 이전.복원됐다. 또한 숭정전의 답도 2개 가운데 하나는복원된 숭정전, 다른 하나는 정각원에 놓여 있는 등 반반씩 나누어져 있다. 어좌의 닫집은 동국대학교 박물관의불상 위 천장에 부착돼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동국대 정각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숭정전 건물.

OLYMPUS DIGITAL CAMERA동국대박물관 불상위에 있는 닫집

OLYMPUS DIGITAL CAMERA1, 숭정전 현판, 2. 숭정전 어탑 부재, 3. 숭정전 토수, 4. 숭정전 봉황문 답도(탁본), 5. 숭정전 공작문 답도(탁본),

OLYMPUS DIGITAL CAMERA복원된 숭정전.

OLYMPUS DIGITAL CAMERA경희궁지에 남아 있는 옛 경희궁 흔적들

OLYMPUS DIGITAL CAMERA경희궁 흔적들.

새롭게 밝혀지는 경희궁의 흔적들
지금의 성곡미술관 자리는 경희궁의 영취정과 춘화정이 있던 곳으로 경치가 좋아 왕들이 이곳에서 꽃구경을 즐겼다. 특히 숙종은 이곳의 정취를 시로 짓기도 했고, 아름다운 이곳을 ‘반월형 석조 연못’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이 석조는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켰으나 경희궁의 것으로 인식되지 못하다가 최근에야 제 기억을 되찾게 됐다. 또 서울고등학교의 상징인 돌거북은 경희궁 금천교를 오랫동안 지켜온 것이며, 경희궁 인근 주택가에서 발견된 괴석도 궁정에서 사용되던 기이한 모양의 돌이다. 그러나 흥화문과 함께 옮겨간 해치모양의 석물과 개양문,흥정당의 행방은 여전히 찾을 길이 없다.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사라진 것을 찾는 일이 더 시급한 과제일 것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누각 위의 봄바람 좋아
섬돌 가에 반달같은 연못 있네.
앉아 물고기 뛰어 노는 곳을 보니
조용히 려천(戾天) 시를 읊네
- 「춘화정에서 반달연못을 바라보며」 숙종 -

OLYMPUS DIGITAL CAMERA반월형 석조, 복제, 숙종대 추정,

이 석조 연지는 통돌(全石)로 안팎을 반월형으로 가공하고 안쪽에는 두마리 잉어가 여의주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조각하고, 연지 상단 테두리에는 세마리의 서수(瑞獸)를 조각했다. 서수상 아래에는 구름 형태의 모란문이 조각되어 있으며, 서수의 자세와 표현방법, 문양과 조각기법을 통해 춘화정이 건립된 1704년 경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현재 이 유물은 영취정과 춘화정 자리에 있는 성곡미술관 연못에 설치되어 있으며, 전시를 준비 현장조사 과정에서 경희궁의 것으로 새롭게 밝혀진 것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어제망관악시(御製望冠嶽詩), 경희궁 영취정에 걸렸던 현판으로 숙종이 영취정에서 관악산을 바라보고 감회를 적은 칠언절구이다.

“좌의 명산이 富林(지금의 과천)에 위치해 있는데
머리 들어 남쪽 바라보니 흰구름이 깊구나.
때때로 북암유상기를 읽으니 이 몸이 관악산에
올라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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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석(塊石), 현재 경희궁 흥화문 남쪽 주택가 음식점에서 발견된 괴석으로 모란문이 들어간 석함에 올려져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돌거북(石龜), 서울고등학교 본관 앞에 있는 돌거북이다. 학교가 경희궁지에 있었을때부터 본관 입구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것은 창덕궁 금천교 하단에 놓인 돌거북의 형태와 유사하며, 현재도 복원된 경희궁 금천교에는 돌거북의 받침돌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울역사박물관 입구 흥화문이 있던 자리 앞에 복원해 놓은 금천교.

OLYMPUS DIGITAL CAMERA개양문

경희궁의 나쪽 문, 지금의 흥화문이 놓인 자리는 원래 개양문이 있던 곳이다. 개양문은 서본원사, 경성방송국을 떠돌다 성균관대학교 정문으로 사용되었고, 1970년대 신라호텔로 매각되었다고 구전되나 지금은 그 행방을 찾을 수 없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흥화문 석물

흥화문이 박문사 정문으로 헐려나갈 때 같이 옮겨간 것으로 추정되는 석물이다. 흥화문 철거 기사 오른쪽 하단의 석물과 박문사 정문으로 옮겨진 후의 왼쪽 해태상(사자상)은 같은 것으로 여겨지며, 1959년까지 기록에는 현존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 이후로는 행방이 묘연하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출처>
1. 서울역사박물관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경희궁] 구한말 이후 터만 남은 경희궁지

조선후기 국왕의 임시거처이자 왕실가족의 생활공간으로 서궐(西闕)로 불렸던 경희궁은 구한말 고종대 경복궁 중건과 함께 그 역할이 크게 축소되면서 궁궐로서 의미가 크게 퇴색될 수 밖에 없었다. 경복궁 중건과정에서 많은 전각들을 헐어 건축자재로 사용되었으며, 왕실가족이 생활하는 이궁(離宮)의 역할은 법궁이었던 동궐이 맡게 되면서 경희궁은 실질적인 용도가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이후 숭정전을 비롯하여 일부 전각만 남아 있는 넓은 공터만 남게 되었다. 덕수궁의 대한제국 법궁으로 정해지면서 새로운 역할의 생기는 듯 했으나 조선의 멸망과 함께 역사속의 궁전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일제가 일본인을 위한 경성중학교를 세우면서 1970년대까지 서울고등학교에서 경희궁 옛터를 사용하다가 숭정전을 비롯한 일부 전각들만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희궁지(慶熙宮址)
고종 대 경복궁의 중건사업은 조선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경희궁에는 비극의 서막이었다. 경희궁의 전각을 헐어 경복궁 중건의 건축 자재로 활용하면서 경희궁은 폐허의 궁으로 전락했다. 대한제국기의 경희궁은 궁 본래의 쓰임새가 거의 사라지고 일부 전각만 겨우 존속하는 상태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관료 자제들의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아예 궁의 이름조차 사라지고 경희궁 터라는 기억만 남았다. 광복 이후에는 서울고등학교가 이곳을 활용했고, 1980년에 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게 되자 서울시가 경희궁지를 매입해 공원을 만들었다. 1980년대 후반에 와서는 경희궁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 작업이 여러 차례 이뤄졌다. 이후 서울시교육청과 서울역사박물관 등이 들어섰고, 숭정전 및 자정전 일대가 복원대 2002년에 시민에게 공개됐다. 그리고 현재에는 사적으로 지정된 경희궁 터 위에 몇 개의 전각만이 궁으로서의 흔적을 증언해 주고 있을 뿐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1970년 경희궁터에 있었던 서울고등학교 전경. 옛궁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고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경희궁은 고종대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그 필요성이 없으졌으며, 그 뒤 순차적으로 전각들이 헐어졌다.

경희궁의 공허지와와 고종대의 활용
경복궁 중건이 있었던 고종 대를 거치면서 경희궁은 궁궐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 경희궁의 빈터는 토지로 개간되어 용동궁 등 4개의 궁에 분배됐고, 화폐를 만드는 곳으로 활용되기도 했으며, 개화 정책의 일환으로 양잠소가 설치되기도 했다. 또 1899년 독일의 하인리히 친왕이 방한했을 때는 제국의 면모를 드러내 보이는 관병식이 진행되었다. 1902년에 경운궁과 경희궁을 연결하는 운교가 놓이는 등 몇가지 시도기 있기는 했으나, 궁궐로서의 역할을 되찾은 것은 아니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1. 한성부지적도(漢城府地籍圖), 1908년

현재 세종로 사거리에서 서울역사박물관 입구에 이르는 새문안로와 경희궁 주변지역이다. 우측 경계물길은 백운동천이며, 표기된 다리는 송기교(松杞橋)이다. 그 아래 태평로 신교(新橋)가 표기되어 있다. 도로 한가운데로 서대문으로 연결되는 전차 선로가 표시되어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2. 경희궁내신기전사궁분배도양안(慶熙宮內新起田四宮分排都量案), 1868년

1868년 5월과 1870년 3월 두 번에 걸쳐 경희궁 내의 전(田)을 명례궁, 용동궁 등 4궁에 분배한 뒤 개간한 내역을 정리한 것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3. 경복궁영건일기(景福宮營建日記), 1865년. 8월22일 기사에는 경복궁의 복원에 필요한 자재의 마련을 위해 경희궁을 훼철한 내용이 담겨 있다.

‘서궐 내에는 숭정전, 회상전, 정심합, 사현합, 흥정단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좋은 것을 골라서 나인간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했다. 이날부터 궁궐의 뜰에 깔린 전석과 층계석을 뽑아내어 먼저 광화문 역소에 사용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4. 육전조례(六典條例), 1867년.

가위장(假衛將) 혹은 공궐위장(空闕衛將)이라고 불리며, 조선후기 왕이 거주하지 않는 빈 대궐의 수비를 담당한 관직이다. 왕은 보통 창덕궁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경복궁.경희궁.창경궁에 설치되었고, 그 수는 각각 3인씩이었다. 다만, 왕이 경희궁으로 옮겨 거주할 때는 경희궁의 공궐위장이 창덕궁으로 이설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5. 진신(搢紳), 1890년.

1890년도의 관직표로 이 당시 경희궁은 빈 궁궐이었기 때문에 공궐위장이 3인으로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6. 화약통(19세기), 7. 주화당오전(鑄貨當五錢),

화약통, 흥화문 주변 행각에 화약을 제조하는 자초소가 있어서 근처 창고에 땔감을 쌓아 놓기도 했다. 1883년에는 화약이 폭발하여 흥화문이 소실되었으나 바로 복구되었다. 주화당오전(鑄貨當五錢), 개항 이후 정부는 막대한 개항정비, 외국사건에 대한 보상금, 신식군대의 설치비 등을 부담학 되어 재정의 궁핍은 가속화되었다. 이에 정부는 재정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1883년 당오전을 주조, 발행하게 되었고 경희궁에서 이 화폐를 주조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8. 왕궁사(王宮史), 1954년

OLYMPUS DIGITAL CAMERA9. 황학정, 일제강점기

OLYMPUS DIGITAL CAMERA사직단 뒷편 언덕으로 옮겨진 황학정. 당시 모습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황학정은 1899년 회상전 북쪽에 세운 사정(射亭)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922년 전매국 관사를 짓는다는 명목으로 인왕산 아래 현재의 사직공원 북쪽의 등과정 옛터로 옮겨졌으며 현재도 그 위치에 남아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10. 1902년 경희궁과 경운궁을 연결했던 홍교가 설치된 사진이다. 고종은 경운궁과 경희궁을 연결하여 두 궁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려 했다. 다리 밑으로는 2개이 출입로가 있으며, 이 밑으로 전차가 달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1908년 무렵에 홍교는 사라졌다., 로세티 촬영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11. 흥화문 유리원판 사진, 1905년, 유리원판 필름이다. 숯을 지게에 지고 있는 두 남자의 모습 뒤로 흥화문이 보인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12. 서울부분도, 1901년, 콜로넬 브라운스 제작, 경희궁 터에 뽕나무 궁궐(Mulberry Palace)이라고 표시된 지도이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주변시설 변화
조선시대 훈국신영이 있던 자리에는 신식 군대의 초급 장교를 육성하는 무관학교가 들어섰고, 일본의 경의 철도 부설에 대항한 서북철도국도 잠시 이 근처에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인 협률사도 무관학교 동쪽에 있다가 철폐되었고, 같은 자리에는 1908년에 신연극의 출발지인 원각사가 생겼다.당주동 일대에는 근대식 학교인 사립흥화학교와 새문안교회, 구세군회관 등 종교시설이 들어서면서 이 일대에는 ‘변화와 개화’를 보여주는 새로운 경관이 펼쳐졌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1, 경성부시가도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2, 무관학교 전경, 189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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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관학교 도면, 1909년, 서대문내각부관사부지평면도로 무관학교의 배치도이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 동쪽에 무관학교가 위치하고 있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4. 전차개통식, 1899년,

1899년 동대문에서 거행된 전차 개통식 광경이다. 행사장 간이천막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걸려 있는 것이 보이며, 한국 사람들이 이 전차를 ‘Devil Car’라고 불렀다고 기사에 적혀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5. 법규유편(法規類編), 1908년,

협률사 자리에 잠시 있었던 서북철도국은 1902년 경의선을 부설하기 위하여 궁내부에 설치되었다. 1904년 일본이 러일전쟁의 일환으로 군용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하면서 이 국은 폐지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5. 협률사 사진,

협률사는 현재 새문안교회와 대우빌딩 사이에 위치하고 있던 기관으로 1902년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 공연장이었다. 1906년 경영상의 문제로 문을 닫고 2년 후 원각사로 재개관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경성중학교의 건립
경희궁이 궁궐로서의 면모를 완전히 상실하고 새로운 위상이 부여된 것은 1910년 경성중학교가 이곳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학교 건립 초기인 1909년에는 독립관 일대를 교사를 활용하다가 1910년에 경희궁 터에 건물을 완공했다. 그때까지 유지되던 숭정전 등 일부 전각은 경성중학교 교사로 사용됐고, 이전 시기에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던 공허지는 학교 운동장이 된 것이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그나마 몇 개 남아 있던 전각마저 외부에 매각됨으로써 경희궁 건물은 잔해조차 완전히 사라졌다. 한편 경성중학교는 1932년 대화재로 목조 건축인 본관 등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1935년에 신축 교사를 완공함으로써 새로운 위용으로 학교의 모습을 일신시켰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P1208053-horz-20161218경성중학교 신축교사.

OLYMPUS DIGITAL CAMERA경성중학교 건물

OLYMPUS DIGITAL CAMERA2. 경성중학교 엽서, 1913년

OLYMPUS DIGITAL CAMERA3. 경성중학교 모자, 일제강점기

OLYMPUS DIGITAL CAMERA4. 경성중학교 교우회지, 일제강점기

OLYMPUS DIGITAL CAMERA5. 경성발달사, 1912년. 경성중학교의 전신인 통감부중학교의 설립 배경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는데, 독립관을 학교 시설로 사용하게 된 내역을 설명하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6. 경성부사, 1934년, 경희궁 부지를 조선총독부에서 차입한 내용이 실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7. 경성부사, 1934년, 경성중학교 시절 현존하고 있던 회상전과 벽파담 사진이다. 담 너머로는 확학정이 보인다.

잠식당하는 경희궁 영역
경희궁 터에 경성중학교만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조선총독부는 1908년에 경희궁 주변에 관사를 짓기 시작했고 1922년에는 궁의 부지 동쪽 부분을 잘라 내고서 그곳에 직원용 관사를 건설했다. 경희궁 북서쪽의 지대가 높은 송월동에는 경성측후소가 근대식 건축물로 1932년에 건립됐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막바지로 치닫는 전황 속에서 연합군의 공습에 대비한 방공호가 경성중학교 내 숭정전 동쪽 행랑 부근에 건설되었다. 현재 이 시설은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 부지에 위치하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태령전 발굴유물

OLYMPUS DIGITAL CAMERA경희궁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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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구개정예정계획 경성시가전도, 1913년,

시구개정예정노선도가 표시된 지도이다. 현재의 세종로사거리에서 서대문으로 향하는 도로가 확장 표시되어 있다. 이 사업으로 인해 경희궁 남쪽 영역이 잘려나갔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2. 관사부지 설계도, 1920년대,

경희궁 주변과 경희궁 동쪽부지에 들어선 관사 설계도이다. 현재 서울역사박물관 동쪽편 주택가가 관사 자리이며, 일부 관사는 개조되어 음식점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3. 조선과 건축, 1935년,

일제강점기 경성에 지어진 관사의 현황을 알 수 있는 사진이다. 표준적인 관사의 유형이 있었으며, 고급 관료 주택의 경우 넓은 대지에 화려한 외관으로 건축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4. 국유임야대부대장사본, 1935년,

1935년 경성부 도시계획계에서 작성한 ‘국유임야 대부대장’ 사본으로, 조선총독부 관유지의 대부사항을 기록하고 있으며, 경성중학교 부지와 전매국 관사 부지도 포함되어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5. 경성부 방공시가지 계획조사서, 1937년,

일본은 대륙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전시체제의 일환으로 경성에 여러 전쟁에 대비한 시설을 설치하였다. 지하전차, 지하공동구, 신설저수지, 대피소 등이며 넓은 경성중학교 부지는 유사시 대피할 장소로 지정하였다. 이런 이유로 이곳에 방공호가 1944년 설치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새문안로의 변화
대한제국기 전차의 개설은 새문안로의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898년에 흥화문에서 전차기공식이 열렸고 이듬해 본격적으로 새문안로에 전차가 운행되어 서대문 성문 사이로 전차가 지나갔다. 일제강점기에 들어 경성시구개수사업의 일환으로 1915년 도로가 확장되고 서대문이 헐려나갔다. 이 와중에 종로와 맞닿아 있던 흥화문은 위치가 변경되어 동향에서 남향이 되었고 경희궁의 남쪽 권역도 일부 잘려나가게 되었다. 도로 폭이 좁고 지대가 높아 통행이 불편했던 새문안로가 통행의 ‘편리’를 위해 개수된 것은 기존의 공간 질서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6. 경성시구개정사업 회고이십년, 1930년,

경성시구개정사업의 변화상을 파악할 수 있는 사진첩이다. 서대문로의 확장으로 인해 동향이던 흥화문이 남향으로 바뀐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7, 1899년 전차가 개통되어 서대문 성문 사이로 전차가 지나가는 사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8. 서대문 입체사진

서울고등학교의 설립
광복 이후에도 경희궁은 학교부지로 활용됐다. 경성중학교는 1946년에 명칭이 변경되어 현재 서울고등학교의 전신인 서울공립중학교로 개교했으며, 강남으로 이전하기 전인 1980년까지 이곳에 있었다. 서울고등학교는 경희궁 터의 수려한 자연환경과 고적의 흔적을 간직한 최고의 명문 학교로 명성을 날렸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1. 서울고등학교 교명판,

OLYMPUS DIGITAL CAMERA2. 경희 제4집, 1952년. 3.서울고등학교 교지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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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울고등학교 연혁집

OLYMPUS DIGITAL CAMERA5. 서울고등학교 요람, 196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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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울고등학교 사진집, 195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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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경희신문, 1961년,

서울고 배치도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방공호는 ‘지하체신국’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이곳은 1970년대까지 체신국에서 활용되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8. 서울고 1회 졸업앨범, 1949년

OLYMPUS DIGITAL CAMERA9. 서울고 졸업앨범, 1953년

OLYMPUS DIGITAL CAMERA10. 서울고 졸업앨범, 1962년

OLYMPUS DIGITAL CAMERA11.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한 후 학교에 남아 있는 경희궁의 유적물을 조사한 자료이다. 숭정전의 답도와 축대가 그대로 남아 있다. 1980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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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서울고등학교 부지가 현대건설에 매각된 관계를 나타내는 문서이다. 1980년

<출처>
1. 서울역사박물관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경운궁(덕수궁) 양이재, 구한말 황족 교육을 전담한 수학원 건물

서울 중구 정동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교회 뒷편에 남아 있는 덕수궁(경운궁) 전각 중 하나인 양이재이다. 구한말인 1905년 덕수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지은 건물로 앞면 7칸 규모의 비교적 큰 건물이다. 함희당이라는 부속건물과 행각들이 함께 있었다고 하는데, 외형상 삼군부 총무당처럼 조선시대 한양의 관아 건물 형태를 하고 있다. 이곳은 황족과 귀족자제 교육을 전담하기 위해 궁궐 안에 지어진 건물이다. 건물의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며, 조선이 지은 마지막 관아 건물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부터 대한성공회에서 건물을 임대해 사용다가 사들여 사무실로 사용해 왔다. 덕수궁과 담장을 경계로 하고 있는 이곳은 구한말 당시 세계정세를 이끌던 초강대국 영국 대사관과 영국에서 건너온 성공회 교회가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주교좌성당 뒷편에 남아 있는 양이재. 앞면 7칸 규모로 온돌방, 대청마루, 누마루로 구성된 전형적인 조선시대 관아 건물 형태를 하고 있다. 구한말 황족과 귀족자제의 교육을 위해 궁궐에 지은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건물 양쪽에 누마루와 온돌방을 두고 있다. 성공회에서 사용해 오면서 건물을 잘 보존해왔기때문에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OLYMPUS DIGITAL CAMERA양이재에 딸린 부속건물.

OLYMPUS DIGITAL CAMERA경운궁 양이재

경운궁 양이재, 등록문화재 267호, 서울 중구 정동,
이 전각은 경운궁을 고쳐 지을 때인 1905년(광무9)에 세운 것이다. 경운궁 공사보고서인 《경운궁중건도감의궤》에는 중화전(中和殿)을 비롯한 주요 건물 11채만 따로 도면을 그렸는데 양이재도 그 중 하나다. 당시 양이재는 함희당(咸喜堂)이란 건물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행각과 꽃담으로 에워 싼 일곽은 홍원(紅園)이라 불렀다. 원래 건물의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4칸이었으며, 내부에는 온돌방과 마루, 누마루가 있었다. 건물의 지붕에는 양성바름에 용두를 써서, 격조를 높였다. 현재는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사무실로 쓰인다. 홍원 일대는 1906~1910년까지 황족과 귀족의 자제 교육을 전담한 수학원(修學院)으로 쓰였다. 대한성공회는 1912년부터 이곳을 임대해 쓰다가, 1920년 이곳을 사들인 후 건물을 옮겼다. 함희당은 1960년대에 헐렸으나 양이재 뒷편에 복도각 일부가 남아 있다.

<참고문헌>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문화재청, 3. 두산백과

내의원(內醫院), 국왕과 가족들의 건강을 보살피던 궁궐내 의료기관

창덕궁 궐내각사에는 국왕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정책을 보좌하던 홍문관, 예문관, 규장각 등과 함께  국왕의 건강을 관리하던 내의원(內醫院)이 자리하고 있다. 궁궐내 병원 역할을 했던 내의원은 ‘약방(藥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건물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행각들이 밀집해 있다. 약방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3칸의 비교적 큰 건물이다. 건물들은 격식을 차리지 않고 좁은 공간을 활용해서 많은 방들이 들어설 수 있도록 작은 행각들이 오밀조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국왕의 말과 글을 대필하던 예문관과 함께 국왕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모실 수 있도록 공간 배치를 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내의원은 왕의 약을 조제하는 일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전의원.혜민서와 함께 삼의원이라 불렀다. 내의원에는 정1품 도제조와 정2품제조, 정3품 부제조가 있기는 하지만 영의정과 도승지가 겸임하였다고 한다. 내의원에는 관원들과 서리 등 행정실무진과 어의, 침의 등 의료진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당히 많은 수의 인원들이 배속되어 있었다. 궐내각사 내의원은 많은 인원들이 근무하고, 환자가 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하여 많은 행각들을 두고 있는데, 주로 크고 작은 방들로 이루어져 있다.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 성정각이 한때는 내의원 건물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창덕궁 외조 중문에 해당하는 선정문 왼쪽 궐내각사로 들어가는 입구. 협문을 들어서면 내의원과 예문관이 있고, 그 안쪽에 역대국왕들의 초상화를 모셨던 선원전과 부속 건물들이 모여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내의원 동쪽마당과 행각. 안쪽으로 선원전과 재실들이 연결된다. 행각에서 내의원에 속했던 의원들과 실무진들이 대기했을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시대 최고의 의료진들이 근무했던 곳이라고 할 수 있는 내의원. ‘약방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큰 건물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행각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다. 약방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3칸의 큰 건물로 앞쪽과 옆쪽으로 행각이 연결되어 있다. 건물의 구조나 형태에서 대청마루나 툇마루가 없고 큰 출입문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중요한 약재 등을 보관하고 있던 건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약방 건물 서쪽편으로 대청마루와 방이 있는 건물이 연결되어 있다. 이 건물의 구조로 볼 때 내의원 의원들과 관원들이 근무했던 사무실 용도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약방 건물 앞쪽에는 앞면 1칸 옆면 2칸짜리 작은 건물이 있고, 복도로 약방건물과 연결되어 있다. 중요한 약재를 보관하던 건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이 건물은 안쪽에서는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바깥쪽에서는 서로 연결된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약방 마당 서쪽편에 있는 앞면 6칸짜리의 행각 건물. 가운데 대청마루가 있고, 양쪽에 방을 두고 있다. 의료진이나 관원들이 근무하는 건물이면서 궁궐내 환자들이 치료를 받았던 공간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창덕궁 동궁영역 성정각 마당에는 한때 내의원으로 사용된 건물을 볼 수 있다. 원래 성정각은 동궁에 속한 건물인데, 일제강점기 순종이 창덕궁에 머물면서 이곳에 내의원을 두었다고 한다.  ‘조화어약(調和御藥’), ‘보호성궁’(保護聖躬)이라는 편액도 보이는데 정조의 어필이라고 한다. 이곳으로 내의원을 옮길 때 같이 옮겨진 것이라 한다.

SANYO DIGITAL CAMERA내의원에 걸었던 현판.  ’조화어약’은 왕의 약을 조제하는 것을 뜻한다.

SANYO DIGITAL CAMERA ’보호성궁’은 왕의 몸을 보호하는 것을 뜻한다.

조선시대 의학을 발달
조선의 의학은 고려의 의학과 제도를 계승하고 보완해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우리나라 풍토에 맞는 향약을 연구하고, 자기 관찰과 실험에 의해 간행된 의석가 모두 90여종이 넘는다. 세종대 출간된 『향약집성방』과『의방유치』는 우리 풍토와 체질에 맞는 약재와 치료법을 정리한 것이고, 선조의 명으로 허준이 편찬한 『동의보감』은 역대 고금의 한의방의 정수를 채택하여 집대성한 것으로 일본과 청에 번각되어 우리의 수준 높은 의학을 대외적으로 알리게 된 의서이다. 또 고종대에 이제마는 사람의 체질을 네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식이요법과 감정을 다스려 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사상의학을 발전시켰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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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혈을 나타낸 청동 인체상(조선), 청동으로 만든 인체상에 전신에 흐르는 경혈을 선으로 새기고, 선 위에 총 354개의 경혈을 표시하였다. 궁중의 내의원에서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OLYMPUS DIGITAL CAMERA편주의학입문내집(조선), 내의원에서 중국 명나라 이천이 지은 의학입문서에 주석을 달아서 목판본으로 간행한 의학서이다.

SANYO DIGITAL CAMERA동의보감(조선, 허준지음), 허준이 선조의 명을 받들어 편찬한 의서이다. 의학 서적으로는 최초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동의보감은 16세기 동아시아 의학을 집대성해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와 치료 기술을 자세하게 다뤄 의료의 대중화에 이바지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증급유방, 15세기, 보물 1577호. 의가비전의 질병 처방인 ‘의가비전수신비용가감십상방’과 ‘경험급구방’을 한데 모아 조선전기에 간행한 의서이다. 한국 의학사와 출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국내에서 발견되지 않은 희소가치가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약장(조선)

OLYMPUS DIGITAL CAMERA약을 가는 기구(약연, 조선)

조선시대 의료기관
전통사회에서 최고 통치자인 왕의 건강은 정치적을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띠었다. 왕의 건강이 악화되어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제때 내릴 수 없게 되면 국정 운영이 순조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시대에는 궁궐 안에 왕실의 의료 업무를 전담하는 기관인 내의원을 설치하고 최고의 의료진으로 하여금 국왕의 건강을 보살피도록 하였다. 왕에 대한 진료는 왕의 거처에서 이루어졌으며 내의원에서는 의원을 파견하고 필요한 약재를 공급하였다. 조선말기 내의원에게는 고위관료, 의관, 의녀, 시종과 각종 노비를 합쳐 140명 이상의 의원이 근무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 국왕의 정책을 자문하고 보필하는 기관

창덕궁 금천 동쪽편에는 궐내각사로 홍문관, 예문관, 내의원 등이 정전인 창덕궁 인정전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다. 홍문관은 원래 왕실을 서적을 관리하고 국왕을 자문을 정책연구기관이었다. 반면에 예문관은 승정원처럼 국왕의 말과 글을 대신 짓는 등 실무적으로 국왕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는 기관이다. 창덕궁 궐내각사 중 국왕과 가장 가까운 곳에 예문관과 내의원이 위치하고 있고, 그 앞쪽에 국정을 자문하는 홍문관이 자리잡고 있다. 예문관, 내의원 등은 정전 옆 작은 출입문을 통해 정전으로 출입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복궁에서 집현전이 근정전 서쪽편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국왕을 보좌하던 것과 같은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들 건물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철거되고 없어졌던 것을 2005년 창덕궁 궐내각사가 먼저 복원되었다.

홍문관(弘文館), 국왕을 자문하는 정책연구기관

홍문관은 사헌부.사간원과 더불어 언론 삼사라 불리며, 조선시대 청요직의 상징으로 판서나 정승 등 고위직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부서 중 하나였다. 홍문관은 영사와 대제학에서 부제학, 직제학, 교리 등 다양한 직책의 관원들로 구성되며, 3정승을 비롯하여 다양한 관원들이 겸직하였다. 원래는 세조대에 집현전을 혁파하면서 국가의 서적을 관리하고 왕의 자문을 맡는 역할을 가지고 있다. 홍문관 대제학은 조선사회에서 학문의 수장으로 여겨지며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인사가 맡았다. 홍문관을 비롯한 언론삼사는 조선시대 관직 중에서도 선비들이 가장 선호하는 관직으로 후손들에게도 그들의 경력 중 가장 중요시 된다. 지금도 서원에 모셔진 많은 조선시대 학자들은 이런 관직을 거쳐간 경우가 대부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동궐도에 나타난 궐내각사 중 홍문관과 예문관

OLYMPUS DIGITAL CAMERA창덕궁 금천교를 건너면 정면에 진선문이 있고, 북쪽편에 궐내각사들이 들어서 있다.

그 중 제일 먼저 보이는 건물이 조선시대 엘리트들이 선호했던 삼사 중 하나인 홍문관 건물이 있다. 홍문관은 세종대 집현전의 기능 중 왕실 도서의 수집.출판을 관장하는 기능을 가진 부서지만, 실제로는 학문을 연구하고 국왕을 자문하는 중요한 요직이었으며, 국왕이 학문을 논하는 경연에 참여하는 왕권을 견제하는 기능을 가진 곳으로 여겨졌다.

OLYMPUS DIGITAL CAMERA 홍문관은 ’옥당(玉堂)’이라는 현판이 걸린 건물과 주변 행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구조는 대체로 국정을 논하는 중요한 기관답게 폐쇄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으며, 다른 궐내각사 건물들과는 쪽문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정문을 통해서만 옥당으로 출입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홍문관’현판(1699년).

창덕궁 홍문관에 걸었던 편액으로 옥당은 홍문관의 다른 이름이다. 1699년(숙종25) 당시 홍문관 응교였던 김진규(1658~1716년0의 글씨이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행각으로 이루어진 옥당 출입문을 들어서면 특이하게 담장으로 막혀있고, 3개의 작은 쪽문을 두고 있다. 외부에서 홍문관 내부를 볼 수 없도록 만든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옥당 내부를 출입하는 작은 쪽문. 3면에 쪽문을 두고 있으며, 가운데 쪽문은 옥당 건물로, 양쪽 쪽문은 행각으로 출입하게 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옥당 마당 앞에 세워진 담장. 내부 전체적으로 통행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니고, 통행은 담장 사이로 가능하지만, 시야를 가려주어 각건물내에서 하는 일들을 볼 수 없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옥당 마당 담장 바깥에서 본 옥당.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만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옥당은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궁궐 밖 육조거리에 있었던 주요 관청 건물에 비해서 건물 규모는 작은 편이다. 이 건물에서는 대제학을 비롯하여 고위직 인사들이 근무했던 공간으로 보인다. 홍문관 관리들은 과거시험에서 성적이 좋은 사람들 중에서도 집안배경이나 정치적 위상이 높은 가문에 속한 사람들로 하위직이라 할지라도 궁궐정문 출입이 허용될 정도로 우대를 받았다.

OLYMPUS DIGITAL CAMERA출입문 옆 행각.

다른 건물의 행각에 비해서 격식있게 구성되어 있다. 홍문관 하위직 관리들이 근무하던 장소로 보인다. 도서의 수집.관리를 담당하던 기관으로 책들을 보관하기 위한 책방으로 행각에 다락방들을 많이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적과 문서들을 보관하던 다락방으로 이루어진 서쪽편 행각.

OLYMPUS DIGITAL CAMERA옥당 뒷마당. 뒷편에는 별도의 건물을 두고 있지 않다. 조선시대 삼사에 속한 중요한 관청이었지만 궐내에 위치하고 있어 건물은 협소한 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옥당 서쪽편 금천이 흐르는 곳에는 나무들을 심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홍문관지, 1784년(정조8),

이노춘 등 지음, 홍문관의 연혁, 직관, 담당업무 등을 기록한 도서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경현당 어제 어필 화재첩, 1741년

영조가 「춘추」강독을 마친 것을 기념해 승정원.홍문관 관원들에게 경현당에서 술일 내린 일을 기록한 첩이다.

예문관(藝文館), 국왕의 말과 글을 대신하는 기관

예문관은 국왕의 말이나 글을 대필하는 기관으로 세조대에 집현전이 혁파되면서 도서출판의 기능은 홍문관으로, 학술연구는 예문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대체로 홍문관과 예문관은 학술을 연구한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홍문관은 왕을 자문하는 역할로 견제의 기능을 갖고 있어 삼사 중 하나로 여겼고, 예문관은 왕의 말과 글을 대신하는 기관으로 비서실격인 승정원과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문관는 영사(정1품)을 비롯하여 실무진인 대교(정8품), 검열(정9품)까지 여러 직책이 있으나 영의정이 겸임하는 영사를 비롯하여 직제학은 도승지가 겸하는 등 대부분의 직책은 홍문관을 비롯하여 다른 부서에서 그 직책을 겸하기때문에 실제로는 홍문관 관원이 겸임하는 봉교(정7품) 이하의 관원으로 구성된 실무부서라고 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창덕궁 정전 회랑과 붙어 있는 예문관은 단독건물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행각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국왕을 가까운 거리에 보좌하는 관원들의 근무하던 건물로 건물자체는 격식이 있게 꾸며져 있다. 예문관 건물은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예문관은 국왕의 건강을 살피는 내의원과 함께 정전인 인정전 회랑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전 서쪽편에 있는 출입문을 통해서 출입이 가능하다.

OLYMPUS DIGITAL CAMERA창덕궁 인정전 서쪽편에 위치한 건물들. 예문관 바깥쪽으로 선원전 재실 기능을 했던 양지당이란 건물이 있고, 그 바깥쪽에 마당이 있는 큰 건물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인정전 서쪽편 행각. 국왕을 실무적으로 보좌하는 예문관, 내의원 등 궐내각사와 연결되는 출입문이 있으며, 행각 끝에는 향과  축문을 관리하는 향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