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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규장각(奎章閣)] 조선시대 규장각을 계승한 학술연구기관

규장각은 조선후기 왕실의 학문연구기관이자 도서관으로 원래는 역대 임금의 어제, 친필 등을 보관하던 곳이었다. 조선 숙종때부터 규장각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정조가 즉위한 해인 1776년에 창덕궁에 규장각을 세우고 관리를 두면서  학술연구기관의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 후기 영.정조 부흥기에 사회적 변화에 대처하려는 필요성에 따라 국왕 직속의 학술 기관으로 조선과 중국에서 간행된 책들을 소장하고, 당시 사회적인 수요에 따라 각종 서적을 편찬하고, 국왕의 정책을 학문적으로 뒷받침 했던 곳이다.

규장각은 창덕궁 정문 부근에 위치한 궐내각사에 처음 세워졌으며, 정조대에는 창덕궁 후원 주합루에도 규장각이 설치되었다.또한 소장 도서의 안전한 보관을 위해 강화도에 외규장각이 설치되어 있었다. 외규장각에서 보관하고 있는 다수의 문서들은 구한말 프랑스와 전쟁인 병용양요시 프랑스군이 침탈하여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현재 이의 반환문제가 논의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국왕을 보좌하는 학술연구기관이었던 규장각은 그 기능이 크게 축소되어 왕실 도서를 관리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전국의 도서들이 규장각으로 통합되었으며, 경성제국대학에서 도서들을 관리하였다. 해방 이후 규장각 도서들은 서울대학교 부속도서관으로 이관.관리되었다.

현재 규장각은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던 조선시대 고문서를 비롯하여, 다양한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다. 규장각 소장 도서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기록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와 왕실 행사 보고서인 각종 의궤를 소장하고 있다. 이외에 규장각의 기본 역할이었던 역대국왕의 친필과 기록화 등과 조선시대 그려진 각종지도와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다양한 고문서들을 소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유형의 문화재들을 소장.전시하고 있는 곳이 중앙박물관이라면, 각종 도서와 고문서들을 소장.보관.연구하는 기능을 지금도 규장각에서 하고 있다고 보면 무방할 것이다.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 있는 규장각>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비롯하여 조선후기 규장각에서 소장했던 많은 문서들이 이곳에 있다.

<규장각 전시실 입구>

규장각의 서적 간행과 수집
규장각은 본래 어제(御製)와 어필(御筆)을 보관하던 전각이었다는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처음에는 왕실문헌을 보존하는 것이 본래의 기능이었다. 정조가 즉위한 1776년, 학술연구기관으로서의 규장각을 창설하면서 많은 서적의 편찬이 규장각에서 이루어졌다. 규장각 주변에는 중국본 서적을 보관하는 개유와(皆有窩)와 열고관(閱古觀), 조선본 서적을 보관하는 서고(西庫) 등의 부속 건물이 세워졌다. 1777년에는 국립출판소에 해당하는 교서관(校書館)을 규장각에 통합시켰고, 임진자(壬辰字).정유자(丁酉字).생생자(生生字).정리자(整理字) 등의 활자를 주조하여 서적의 출판을 규장각이 주도하게 하였다. 정조대 규장각에서 편찬되 서적은 <군서표기(群書標記)>라는 책자에 정리되어 있는데, 정조가 직접 편찬한 어정서(御定書)와 신료들이 분담하여 편찬한 명찬서(命撰書)로 구분되어 있다. 정조는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과 같은 중국본 도서의 구입에도 힘썼다. 1781년 규장각에 소장된 서적의 분류목록과 해제가 정리된 <규장총목(奎章總目)>을 완성하였다. 이러한 정조의 서적 간행과 수집 노력이 바탕이 되어 오늘날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한 26만여 점에 달하는 방대한 고전적(古典籍)아카이브가 형성될 수 있었다. <출처:규장각>

<창덕궁 입구 궐내각사에 위치한 규장각>

원래 숙종대에 국왕의 어제와 어필을 보관하기 위한 건물이었는데, 정조대에 기존 역할 외에 국내외 도서을 수집.보관하고 서적을 편찬하는 정부기관으로서 역할이 바뀌었다. 정조는 규장각을 확장하면서 창덕궁 후원에 주합루를 세우면서 그곳에 별도로 규장각 현판을 달았다는 것으로 볼 때 이곳은 기존 규장각 역할 건물을 계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규장각 내부 책을 보관하던 모습(재현)>

2012년 초 고궁박물관에서 일본으로부터 의궤를 반환받은 것을 기념하여 개최한 특별전 “다시찾은 조선왕실 의궤와 도서”에서 재현한 모습이다.

<강화 행궁에 지어졌던 외규장각>

전란 등의 국가 위기를 대비하여 정조는 역대 왕들의 어제, 어필과 중요한 도서들을 이곳에 보관하였다. 특히 국왕이 직접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  대부분을 이곳으로 보내졌다.

<창덕궁 규장각>

부용지 북쪽 언덕에는 정조가 학술연구기관으로 세운 규장각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정조는 즉위 원년에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세웠는데, 이는 세종이 경복궁에서 공식연회가 열리는 장소인 경회루 앞에 집현전을 세웠던 사례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규장각 내 건물로는 2층 누각으로 세운 주합루를 비롯하여 서쪽에 서향각, 동쪽에 작은 정자인 천석정을 두고 있으며, 출입문으로 어수문을 세워두고 있다.

조선의 기록문화와 규장각의 법고창신(法古創新)
1776년 정조(正祖)가 설립한 규장각은 본래 선왕의 어제(御製)와 어필(御筆)을 보관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조선후기 정치.사회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려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규장각은 조선과 중국에서 간행된 각종 도서를 소장하고, 학식이 뛰어난 정예의 관리들이 소속되어 각종 서적을 편찬하며, 국가의 주요 정책을 마련하는 학문과 정치의 중심 기구로 발전하였다. 옛 서적을 통해 오늘의 새 정치를 추구 했다는 점에서 규장각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이 가장 잘 구현된 기관이라 할 수 있다. 200여년의 역사와 풍상을 겪으면서도 규장각에서 편찬.수집된 도서들은 오늘날까지 우리의 역사와 전통이 남긴 소중한 자료로 남게 되었고, 국제기구에 의해서 인류가 모두 함께 아끼고 보존해야할 세계적인 기록유산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규장각의 대표적인 소장 자료는 그 성격에 따라 ①세계적인 기록유산, ②의궤(儀軌), ③어필과 기록화, ④고지도와 지리지, ⑤국제교류에 관한 자료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세계적인 기록유산으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등 7종의 국보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동의보감(東醫寶鑑)>,<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등 26종의 보물이 있다. 이중에서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를 비롯하여 조선왕조 의궤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둘째로 의궤는 조선시대 왕실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정리한 종합보고서이다. 왕실의 결혼, 장례, 왕실 잔치 등과 같이 국왕의 일생에 관한 것이 많다. 이밖에도 활쏘기, 악기제조, 외교의전, 궁궐이나 성곽공사, 실록편찬, 국왕이나 관청의 인장 제작 등 실로 다양한 행사를 다루고 있다. 의궤는 행사참여자를 미천한 신분까지 하나하나 기록하고 물품과 비용을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않고 기재할 뿐 아니라, 생동감 넘치는 현장의 모습을 담은 반차도(班次圖)와 도설(圖說)까지 실려 있어서 ‘조선왕조 기록문화의 꽃’이라 불린다.

셋째 어필과 기록화는 왕실문화의 멋과 품위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다. 규장각에는 선조, 효종, 숙종, 경종, 영조, 정조의 글씨가 남아 있어서 왕의 성품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왕세자나 왕실 관련 인물이 쓴 글씨도 남아 있는데, 순원왕후의 한글편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 눈길을 끈다. 연로한 신하들을 예우하는 잔치인 기로연(耆老宴), 왕세자 입학, 청계천 준설, 임진왜란의 전투 모습 등을 보여주는 많은 기록화들은 비디오카메라가 없었던 과거의 행사나 역사적 사건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넷째로 우리땅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고지도와 지리지가 있다. 고지도에는 당시의 지리적 지식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 예술성 등이 반영되어 있고, 지리지는 각 군현의 연혁, 인물, 물산, 문화유적 등을 담고 있어서 각 지방의 고유한 역사와 풍속을 돌아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규장은은 국내 최대으 고지도 소장처로서 군현지도에서부터 우리나라 전도, 세계지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법과 축적의 지도를 볼 수 있다.

다섯째 세계와의 교류를 보여주는 자료로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기록인 연행록과, 일본 통신사의 기행문 등이 있고, <노걸대언해(老乞大諺解)>, 나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와 같은 외국어 학습서도 조선시대의 국제교류를 위한 노력을 보여준다. <혼일장리역대국토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와 <천하도지도(天下都地圖)> 등의 세계지도를 통해서는 선조들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변해가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이밖에도 규장각에는 조선시대 생활사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는 고문서류를 비롯하여, 학자들이 남긴 개인 문집 2천여 종, 유교 경전과 법전류 등의 책판 등이 다수 소장되어 있다. 또한 근대사의 격동을 살펴볼 수 있는 근대정부기록물을 비롯하여, 서구 열강이나 일본과 맺은 조약문 자료도 다수 남아 있는데, 일본의 불법적인 국권침탈과 대한제국 정부의 국권 수호 노력을 돌아볼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출처:규장각>

규장각 현판. 주합루 1층에 걸려 있던 것이다. (고궁박물관 전시)

취규루(聚奎樓) 현판, 이문원에 속해 있던 건물 중 하나이다.

규장각학사지서현판(奎章閣學士之署 懸板)

이문원(摛文院) 건물의 중앙에 걸려 있던 현판이다. 이문원은 규장각의 부대시설로서 조선시대 역대 왕의 어제(御製).어필(御筆) 등을 봉안(奉安).편찬.간행.보관한 곳이다. 현판의 글씨는 1781년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 김종수(金鍾秀)가 썼다. <출처:규장각>

수교현판(受敎懸板).

정조대왕 당시 규장각의 위상과 정조의 규장각에 대한 기대를 한눈에 알 수 있는 현판이다.

수교란 임금이 내리는 가르침을 일컫는 말로서, 수교 현판에는 규장각의 운영에 대한 왕의 명령이 적혀 있다. 규장각에는 총 4개의 수교현판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객래불기(客來不起), 손님이 오더라도 일어나지 말라.

.각신재직대관자의(閣臣在直戴冠坐椅), 각신은 근무 중에 관을 쓰고 의자에 앉아 있으라

.수대관문형비선생무득승당(雖大官文衡非先生毋得升堂), 비록 대관과 대제학이라도 전임 각신이 아니면 당 위에 오르지 말라.

.범각신재직 비공사무득하청(凡閣臣在直 非公事毋得下廳), 모든 각신은 근무 중에 공무가 아니면 청을 내려가지 말라. <출처:규장각>

화성원행반차도(華城園行班次圖, 앞쪽 1번째), 1795년(정조19) 이후, 채색필사본.

행사에 참가한 사람의 명단과 그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행사를 주관했던 정리사(整理使)가 행렬을 이끌고 있다. 주로 호조판서가 정리사를 겸했다고 한다. 그 뒷편으로 국왕의 가마 행렬이 보인다. 정조는 가마를 타지 않고 말을 타고 뒷편에 있었다고 한다.

화성원행반차도(2번째).

장용영의 많은 군사들이 호위를 하고 있다.

화성원행반차도(3번째)

화성원행반차도(4번째),

혜궁궁 홍씨의 가마가 보이고 그 뒷편이 국왕이 탄 말이 그려져 있다. 국왕은 반차도에 그려지지 않는다. 국왕 주위를 많은 군사들이 호위하고 있다.

1795년 2월,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에 행차한 모습을 그린 반차도, 정조의 화성 행차를 정리한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반차도가 측면에서 본 모습을 그렸던 반면, 이 반차도는 후면에서 본 모습을 그렸다. 본 반차도는 총길이가 16m인데, 국왕 및 자궁(慈宮, 혜경궁)의 가마를 비롯하여 행렬에 참가한 사람과 의장기, 악대 등의 모습이 상세히 그려져 있어 성대한 축제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출처:규장각>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김정호, 1861년(철종 12) 목판본, 22첩.

규장각 전시실을 내려가는 계단에서 볼 수 있는 고산자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이다. 총 22첩의 지도를 상하로 연결하여 우리나라 전도를 구성하고 있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세기의 학자 김정호(金正浩)가 제작한 조선전도. 우리나라를 남북으로 120리 간격 22층으로 구분하여 하나의 층을 1첩(帖)으로 만들고 22첩의 지도를 상하로 연결하여 세로 약 6.7m, 가로 약 3.3m에 달하는 대형 지도가 되도록 하였다. 1첩의 지도는 동서 80리 간격으로 구분하여 1절로 하고 1절을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는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 지도를 만들어 휴대, 열람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지도 윤곽의 정확성, 산지를 선(線)으로 연결하여 그린 점, 도로를 직선으로 그리고 십리마다 점을 찍어 거리와 축척을 나타낸 점, 군현의 경계를 표시한 점, 역이나 창고 등 시설물을 기호화하여 좁은 지면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설명을 줄인 점에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또 옛 지명을 지도에 일일이 표시하고, 목판본으로 간행을 함으로써 지도의 보급과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왕세자입학도(王世子入學圖), 1817년(순조 17), 6폭, 채색도.

순조의 아들인 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할때의 의식 절차를 그린 그림 중 세자가 궁을 출발하여 성균관에 이르는 모습을 그린 ‘출궁의’이다.

대성전 신위에 헌작하는 작헌의(酌獻儀)

 왕세자가 명륜당에 들어가는 장면을 그린 왕복의(往復儀).

 박사(博士)에게 예물을 바치는 수폐의(脩幣儀).

명륜당에서 공부하는 입학의(入學儀)

세자가 궁으로 돌아와 성균관 입학의 축하를 받는 수하의(受賀儀)

익종(翼宗)이 성균관에 입학할 때의 의식 절차를 기록과 그림으로 그린 첩. 그림은 세자가 궁(宮)을 출발하여 성균관에 이르는 출궁의(出宮儀), 왕세자가 성균관 대성전(大成殿)의 신위(神位)에 헌작(獻爵)하는 작헌의(酌獻儀), 왕세자가 명륜당에 들어가 박사(博士)에게 예물을 바친 뒤 수업을 하는 왕복의(往復儀).수폐의(脩幣儀).입학의(入學儀), 세자가 궁으로 돌아와 성균관 입학의 축하를 받는 수하의(受賀儀)로 되어 있다. <출처:규장각>

정종대왕국장도감의궤(正宗大王國葬都監儀軌), 국장도감편, 1800년(순조 즉위년), 4책, 필사본

정조대왕의 국장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상여행렬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 반차도이다.

1800년 정조의 장례식 과정을 기록한 책. 표지의 제목은 <정종대왕국장도감의궤>인데 ‘정종대왕’은 정조를 가리킨다. 대한제국 시기인 1899년에 정종이 선황제(先皇帝)로 추존되면서 묘호가 정조로 바뀌었다.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하자 사망 당일에 국장도감이 설치되고 7월3일 빈전(殯殿)을 마련하였다. 11월 3일 발인하여 시흥과 수원 행궁에서 각각 하룻밤씩 묵은 뒤 11월 5일 화산의 정자각(丁字閣)에 도착하였고 6일 하관(下棺)하였다. 우제(虞祭) 등을 거쳐 11월 7일 오후 4시경에 창덕궁 선정전으로 신주를 모시는 반우(返虞)를 행하고 그날로 국장도감을 해산한 후 이책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반차도>는 일방의궤의 말미에 40면에 걸쳐 그려져 있다. <출처:규장각>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은 조선 세종대의 집현전에 그 근원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왕건을 위협하던 세력들을 누르고, 학문이 깊은 신하들을 모아 학문을 토론하게 하고 학문을 장려함으로써 그들을 국왕의 친위세력화하는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세종대의 집현전 학자들 상당수가 단종의 복위를 꾀했던 사육신이나 생육신이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많은 자료들을 보면 정조는 규장각 학자들을 상당히 우대했으며,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규장각은 구한말 갑오개혁으로 폐지되었다가 해방이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으로 변신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홍재전서(弘齋全書), 1814년(순조 14), 활자본(정리자).

정조 사망후 순조대에 규장각에서 정조의 글을 정리하여 출판한 책이다. 규장각에서 출판한 대표적인 책이라하 할 수 있다.

규장각에서 정리하고 인쇄한 정조 문집의 최종본. 정조가 사망한 후인 1801년에 규장각에서 정조의 어제를 종합 정리한 <홍재전서> 필사본을 순조에게 올린 바 있었는데, 이 책은 1801년본을 수정 윤문하여 인쇄한 본이다. 활자는 인연이 깊은 정리자(整理字)를 사용했고, 총 30질을 인쇄하여 규장각, 홍문관, 세자시강원, 수원의 화령전 등에 배포하였다. <출처:규장각>

초계문신제명록(抄啓文臣題名錄),

정조대왕 당시 규장각의 학문을 진흥하기 위해 실시한 제도로 당시에 학문을 한다고 하는 젋은 학자들을 초계문신으로 뽑았다고 하는데, 당시의 명단이다.

초계문신에 뽑힌 인물의 명단을 기록한 책. 초계문신은 정조가 문풍(文風)을 진작하기 위해 37세 이하의 문신을 뽑아 경서(經書)와 시문(時文)을 익히고 시험을 보여 그 성적에 따라 상벌을 내리게 한 제도이다. 1786년(정조10)부터 1848년(헌종 14)까지 12차에 걸친 초계문신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출처:규장각>

어전친막제명첩(御前親幕祭名帖), 1831년(순조31).

정조가 친위세력으로 국왕을 호위하는 별군에 내린 각종 글들을 모은 것이라고 한다.

별군직(別軍職)과 관련된 정조의 글과 글씨, 전령의 양식, 제명(題名) 등을 묶은 책. 별군직은 병자호란 때에 세자의 시위군관(侍衛軍官)에서 유래하였는데, 나중에는 국왕의 호위를 담당했다. <제어전친막제명첩(題御前親幕祭名帖)>은 정조가 1787년에 별군직의 유래와 임무 등에 대하여 적은 글이고, ‘어진친막(御前親幕)’과 ‘어진친비직려(御前親裨直廬)’는 정조가 친필로 써서 별군직에 하사한 것이다. <출처:규장각>

소학제가집주(小學諸家集註), 이이(李珥) 편, 1694년.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사도세자가 정조에게 물려준 율곡 선생이 쓴 <소학>에 대한 주석서이다. 정조가 상당히 소중히 다루었을 것으로 보이는 귀한 책자이다.

율곡 이이가 편찬한 아동용 학습서 <소학(小學)>에 대한 주석서. 이 책은 1694년 개주(改鑄) 갑인자의 활자본으로서, 영조가 1736년 사도세자의 첫돌을 맞이하여 반사한 것을 다시 세자가 1753년 9월22일 정조가 첫돌을 맞이하였을 때 반사한 것으로서 역대왕의 수택(手澤)이 낀 귀중본이다. 표지 뒷면에는 사도세자가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칠언시(七言詩)가 붉은 글씨로 적혀 있다. <출처:규장각>

오경백선(五經百選), 정조편, 1796년.

정조가 오경에서 직접 글을 엄선하여 편찬한 책이라고 한다. 정조대왕의 높은 식견을 보여주는 책자라 할 수 있다.

정조가 오경(五經) 중에서 학자가 항상 익혀야 할 100편의 글을 선정하여 편집한 책. 정조는 학자들이 오경의 핵심을 빠른 시간에 학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이 책을 편찬하였다. 선정된 글은 <주역> 7편, <상서> 12편, <시경> 66편, <춘추> 10편, <예기> 5편 등 총 100편이다. 전시면은 정조가 규장각 직제학 이만수에게 책을 하사하면서 준 어찰(御札)인데, 이 책이 그 집안의 보물로 전해지기를 기대했다. <출처:규장각>

윤음언해(綸音諺解).

정조의 말을 정리하여 한글로 적어서 출판한 책으로 주로 궁중에서 읽었을 것으로 보이는 책이다. 조선후기 한글이 일반민중에게 보편화되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1781년부터 1784년까지 정조가 내리 각종 윤음(綸音, 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의 언해본 12종을 모은 책. 아래 윤음은 1781년 제주 3읍에 흉년이 들어 기근이 심해지자 각종 구휼과 헤택을 베풀라는 내용이다. 윤음을 한글로 옮겨 모은 것은 궁중이나 일반 백성에게 읽히기 위해서 엮은 것으로 보인다. <출처:규장각>

금속활자 전사자(全史字).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純祖)의 생모인 수빈박씨(綏嬪朴氏)의 오빠 박종경(朴宗慶)이 1816년에 청나라 무영전취진판 <이십일사(二十一史)>의 자체(字體)로 주조한 금속활자. 박종경의 호를 따서 돈암인서체자(敦巖印書體字)라고도 하며 활자 실물 200여 자가 규장각에 남아 있다. 대한제국 말기까지 개인문집이나 과학기술서, 도교서, 불서 등의 인쇄에 주로 쓰였고, 규장각 소장 <사소절(士小節)>이 이 활자로 간행되었다. <출처:규장각>

어정인서록(御定人瑞錄), 1794년, 활자본(생생자)

정조가 자신의 즉위 20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 그리고 영조의 비 김씨가 51세 되는 해인 을묘년(乙卯年, 1795년)을 기념하기 위해 한 해 전인 1794년에 전국의 장수한 노인들을 선별하여 잔치를 베풀어 주고 상을 내린 일의 전말을 기록한 책이다. 본문은 활자로 간행하였고, 권두에 수록된 정조의 어제서(御製序)는 목판으로 찍었다. 당시 시상 내역을 보면, 조관(朝官)으로 70세 이상, 사서인(士庶人)으로 80세 이상 되는 사람에게 1자급(資級)을 더하였고, 부부가 해로한 경우는 추가로 상을 내렸으며, 100세가 넘는 사람에게는 조야를 막론하고 숭정(崇政)의 품계를 내리도록 하였다. 이 때에 전국적으로 포상을 받은 사람이 모두 75,145인에 이르렀다. 우측의 판목은 정조의 어제서를 새긴 책판의 일부이다. <출처:규장각>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1725년,

중국 청나라에서 편찬한 상당히 방대한 분량의 백과사전으로 북경에서 상당한 거금을 주고 구입한 책이라하고 한다. 규장각에서 소장했던 것으로 보이며, 정조의 도장이 찍혀 있는 것으로 봐서 소중히 다루었던 책자로 보인다.

청나라에서 1725년에 편찬한 백과사전으로 5,022책의 활자본이다. 고금의 서적에 수록된 내용을 주제별로 분류한 백과사전으로 총 권수는 1만권, 목록만 40권에 이른다. 1777년 북경에 파견된 서호수(徐浩修)가 은자(銀子) 2,150냥을 지불하고 구입했다. 책의 첫째면마다 정조의 도서인인 ‘조선국(朝鮮國)’, ‘홍재(弘齋)’,’만기지가(萬機之暇)’,’극(極)’ 등의 도장이 찍혀 있다. <출처:규장각>

전제분류문고(典製分類文稿), 1887년

청나라 상해에서 1887년에 인쇄한 10책의 석판본이다. 고종의 서재였던 집옥재(集玉齋)에 소장된 도서로 크기가 6.4m x 6cm인 수진본(手珍本)으로서 표지에 ‘집옥재’라는 장서인이 찍혀 있다. <출처:규장각>

수진본(手珍本)
옛 책 가운데에는 한 손에 들어오는 매우 작은 책도 있었는데, 이를 소매에 넣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작다는 의미에서 ‘수진본(手珍本)’, 두건을 넣는 작은 상자에 넣을 수 있다고 하여 ‘건상본(巾箱本)’이라고도 한다. 수진본은 장소의 제약을 많이 받았던 기존 책의 단점을 보완하여 크기를 대폭 축소함으로써 손쉽게 가지고 다니면서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유생(儒生)들이 사서오경(四書五經) 또는 시문류를, 학승(學僧)들이 주요 불경을, 그리고 그 밖의 인사들이 평상시 자주 보는 것을 조그마한 책에 작을 글씨로 깨알같이 써서 소매에 놓고 다녔다. 명(明) 등림(登林)이 <사서집주(四書集註)>를 보완하여 편집한 글에 등욱(登煜)이 편차하고 기문우(祁文友), 두정기(杜定基)가 교정하여 1886년 6책으로 간행한 <사서비지(四書備旨)> 11.5 x 6.7 cm, 청 홍균(洪鈞)이 역대 사료를 종류별로 분류하여 1887년 10책으로 간행한 <전제분류문고(典製分類文稿)>는 6.4 x 6cm 밖에 되지 않는다. <전제분류문고>는 역대 전적에서 내용을 성현(聖賢), 제왕(帝王), 보좌(補佐) 등 45개 항목을 지정한 뒤 세부적으로 종류를 기술하는 백과사전류로서 평상시에 필요에 따라 열람하기 쉽도록 수진본으로 간행하였다. <출처:규장각>

규장각(奎章閣)
규장각의 ‘규(奎)’는 문장을 주관하는 별의 이름이며, ‘규장(奎章)’은 황제 친필 글씨를 의미한다. 따라서 ‘규장각(奎章閣)’은 ‘국왕이나 황제의 친필 글씨를 보관한 건물’이라는 뜻이 된다. 규장각은 1694년(숙종20)에 처음 설립되어 역대 국왕의 문장이나 친필 글씨, 왕실족보 등을 보관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1776년 정조(正祖)가 즉위한 이후 규장각의 기능은 크게 확대되었다. 즉 국왕의 문장.글씨를 관리하는 본연의 업무뿐만 아니라 서적의 출판.보관, 홍문관.승정원의 업무 대행, 사관(史官) 및 과거시험 주관 등의 임무도 수행하였다. 또, 우수한 문신(文臣)들을 선발하여 재교육하는 초계문신제도(抄啓文臣制度)를 주관함으로써 정조의 친위세력을 양성하고 개혁정치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규장각은 18세기 정조대의 문예부흥에 있어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정조 사후 규장각은 왕실의 문서를 보관하는 도서관으로 그 기능이 축소되었다. 고종대 개혁정책의 추진과정에서 일시적으로 규장각의 기능이 강화되기도 하였지만, 고종이 강제 퇴위된 이후 규장각은 일제에 의해 장악되었다. 일제는 궁궐내 각 기관의 소장 도서와 지방 사고(史庫)의 도서들을 규장각 도서로 일괄 편입하였으며, 한일합병 이후 조선총독부와 경성제국대학 등에서 규장각 도서들을 관리하였다. 광복 이후 규장각 도서는 서울대학교 부속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가 1975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규장각 도서관리실’이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분리.독립되어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승격되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규장각의 사업이 대폭 확대되고 인원이 증가하면서 기존 건물만으로는 업무 수행에 충분한 공간확보가 어려워졌다. 이에 2003년 5월에 규장각 건물의 연면적을 2배 이상 확장하는 증축공사에 착공하여 2004년 12월에 완공하고, 2005년 4월 증축 개관식을 가졌다. 2006년 2월1일 규장각은 한국학 연구 기능의 확대.강화를 목적으로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와 통합하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새롭게 출범하였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설립으로 소장자료의 보존.관리 및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출판.교육.전시 등 다양한 사업들을 보다 종합적이고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은 고도서 17만5천여 책, 고문서 5만여 점, 책판 1만7천여 장 등 총27만여 점의 한국학 관련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이 중 7종 7,125책이 국보로, 25종 165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보고(寶庫)인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은 앞으로 선조들이 남긴 뛰어난 기록문화유산을 기반으로 폭넓은 연구와 교육 사업을 수행함으로써, 한국학 연구기관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고자 한다. <출처:규장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