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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의성김씨 학봉종택, 조선중기 학자 김성일이 살았던 집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위치한 의성김씨 학봉종택이다. 이 집은 조선중기 문신이자 임진왜란 직전 일본으로 파견되었던 학봉 김성일이 살았던 고택이다. 김성일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 서애 류성룡과 함께 퇴계의 학풍을 잇는 영남학파의 중심 인물이었다.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후 왜군의 침입이 없을 것이라는 잘못된 보고를 하였다고 하여 파직되었으나 경상우도 초유사로서 의병장 곽재우를 돕고, 각 지역의 의병을 규합하여 김시민이 진주성에서 왜군을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학봉 김성일은 원래 풍수지리적으로 4대 길지(吉地)로 손꼽히는 임하댐 아래 천전마을 출신으로 이마을에 터를 잡고 있던 안동 권씨와 결혼하면서 이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학봉종택은 현재의 위치에 원래 있었는데 조선후기 영조대에 부근으로 옮겨던 것을 1964년 안채만 옮겼다. 현재의 종택은 경북 안동지역 양반가 대저택의 형태를 갖주고 있는 데 살림집인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 역할을 하는 별채가 앞마당에 있고와  뒷편에 불천위 조상을 모시는 사당, 소장 유물들을 보관.전시한 운장각이 있다. 학봉종택은 전통한옥이지만 앞마당에 정원에 잔듸를 깔았으며, 꽃나무를 비롯하여 다양한 수목들로 정원을 꾸며놓고 있다. 전통한옥에서는 앞마당에 나무 등을 심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시대의 변화를 적절히 반영하여 사람이 살고 싶은 아름다운 한옥을 만들어 놓고 있다. 원래 학봉종택이 있던 곳에는 옛 사랑채 건물이 남아 있어 소계서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마을에 위치한 학봉종택>

문간채는 솟을대문 양쪽에 2칸씩 방을 두고 있다. 외양간이나 창고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1960년대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문간방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학봉종택 대문>
<안에서 본 모습>

전통 한옥의 경우 마당이 개방되고 수목이 심어져 있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곳은 담장을 두르고 다양한 수목을 정원수로 심어놓고 있다. 학봉종택은 정원을 아름답게 꾸며놓고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고급스러운 한옥이다.

<학봉종택 마당>

학봉종택은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을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경북 북부지방 한옥의 형태를 하고 있다. 종택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이곳에 지었던 소계서당 건물을 개조하여 사랑채로 사용하고 있다. 작은 사랑채로 사용할 수 있는 바깥으로 향하는 방에는 툇마루를 달아 놓았다. 안채 내부로 들어가는 중문이 2개이다.

<학봉종택>
<안채>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안채 마당>
<옆쪽에서 본 안채>

사랑채 앞면 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마루에 난간을 설치하였다. 원래 사랑채로 사용하던 건물은 원래 위치에 두고 새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원래 건물보다 크게 지었다.

<사랑채>
<대청마루>
<온돌방>
<사랑채 마루>

사랑채 뒷편으로 불천위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있고, 그 옆에 학봉종택에서 전해 내려오는 김성일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운장각이 있다. 사당 앞 정원을 아름답게 꾸며 놓고 있다.

<사당>
<운장각>

운장각은 주선 중기의 명신 학봉 김성일의 유물관으로 1987년에 개관했다. ‘운장’이란 “저높은 은하수처럼 하늘 가운데서 맑게 빛난다”라는 시경의 한 구절에서 취했다. 운장각에는 경연일기, 해사록 등 학봉의 친필 유고와 사기, 고려사절요 같은 조선 초기 간행의 전직 56종 261점과 교지, 간찰류의 고문서 17종 242점 등 73종 503점이 국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선생이 사용하던 안경.벼루를 비롯한 유품과 후손들의 서적, 고문서들이 일괄 보관되어 있다. 학봉은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청요직을 두루 거치고 명나라와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내치외교에 전력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초유사(招諭使), 경상우도관찰사로서 관군과 의병을 총지휘하여 임진왜란 삼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거두었다. 계사년(1593) 4월, 왜적과의 계속된 전투와 굶주리고 병든 백성의 구휼에 진력하던 중 진주공관에서 순국하였다. 청렴 강직한 성품과 애민, 애국의 삶으로 이조판서, 대제학에 추증되고, 文忠 道德博文日文, 危身奉上日忠의 시호를 받았다. <출처:문화재청>

<별채 건물인 풍뢰헌(風雷軒)>
<유물전시관>
<솟을대문 앞 마당>

학봉종택 북쪽 동산 아래에는 영조대에 옮겼던 종택이 있던 소계서당이 보인다. 재의 위치로 종택이 옮기기 전에 종택이 있었던 곳에는 원래 사랑채로 사용했던 건물이 남아 있고, 그 옆에 작은 살림집을 마련했다.

<안동 소계서당>

학봉 김성일이 태어나고 자랐던 임하댐 아래 천전마을 의성김씨 종택이. 보물로 지정된 이 저택은 김성일이 중국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보았던 중국의 저택을 참조하여 지었다고 한다.

<안동 의성김씨 종택(보물)>

안동 의성김씨 학봉종택(義城金氏 鶴峯宗宅),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이 집은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년)이 살았던 곳이다. 학봉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 성리학에 깊은 이해가 있었으며, 2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조선 선조 1년(1568)에 문과에 합격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의 학문은 영남학파의 학문적 전통계승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학봉종택은 원래 지금의 자리에 있었는데 지대가 낮아 물이 들어조자 영조 38년(1762)에 이곳에서 100m 떨어진 곳으로 옮겼다. 그후 1964년에 다시 지금의 위치에 안채만 옮기고 사랑채는 남겨두어 소계서당(邵溪書堂)으로 쓰도록 하였다. 안채는 오른쪽 3칸이 대청이고, 왼쪽 2칸이 안방이며 그 끝이 부엌이다. 이 건물은 많은 변화를 거쳤지만 종택으로서의 품위를 간직하고 있다. <출처:문화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