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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편전, 국왕의 업무공간 선정전과 희정당

궁궐의 공간은 크게 관청들이 배치되는 외조, 왕이 정치를 하는 치조, 왕과 왕비가 생활하는 연조로 나누는데 남북 방향 일직선으로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조선의 법궁으로 세워진 경복궁이 이런 법칙에 따라 공간을 배치하고 있다. 반면에 창덕궁은 태종때 상왕을 위한 이궁으로 세워진 궁궐로 자연지세에 순응하는 형태로 공간을 배치하고 있다.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있어 정문인 돈화문이 남서쪽 모서리에 설치되어 있고, 편전인 선정전과 연조인 대조전 등이 정전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국왕이 신하들과 정치를 하는 공간인 치조(治朝)는 공식적인 행사를 거행하는 정전영역과 국왕이 일상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인 편전으로 구성된다. 창덕궁 편전은 인정전 동쪽편에 세워진 선정전이며, 임진왜란 이후 창덕궁이 법궁역할을 하면서 좁은 선정전을 보완하기 위해 침전이었던 희정당을 크게 중건하여 신하들과 경연을 하거나 정치를 논할 수 있는 편전으로 활용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선정전은 청색유리기와를 하고 있는 크지 않는 규모의 건물이다. 희정당은 침전 건물을 편전으로 바꾸어 사용했는데 원래는 앞면 5칸 규모의 경복궁 사정전과 비슷한 규모의 건물이었다. 현재의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소실된 것을 중건하면서 서양식 건물의 특징이 반영하고 있으며, 앞면 11칸에 부속건물들을 연결하여 ‘ㅁ’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창덕궁 선정전 영역>

선정전(宣政殿)

선정전은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위치한 건물로 창덕궁의 공식적인 편전이다. 이곳에서는 3품 이상 당상관들이 국왕과 함께 정치를 논하는 곳이다. 국왕이 이곳에서 신하들과 정치를 논할때 사관이 국왕의 좌.우에서 사초를 기록하였하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647년(인조25)에 인왕산 아래에 있던 ‘인경궁’ 건물을 헐어 중건한 것을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건물이라고 한다. 선정전은 또한 궁궐 건물 중 유일하게 청색유리기와를 얹은 건물인데, 중국에서 ‘회회청’이라는 안료를 수입하여 청기와를 구웠다고 한다. 건물은 앞면 3칸, 측면 3칸으로 다포계 공포에 팔작지붕을 사용하고 있으며, 출입문과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선정문>

<복도각>

선정문은 행각에 중앙출입문을 솟을대문처럼 높게 한 삼문으로 이루어졌다. 계단에 답도를 설치하지 않고 있다. 궁궐전각으로는 특이하게 출입문에서 편전까지 복도각으로 되어 있다. 선정전이 혼전으로 사용된 흔적이라고 한다.

<창덕궁 선정전(보물)>

국왕이 평상시 집무를 보던 편전 건물이다. 이곳은 한때 혼전으로 사용되었으며 건물이 크지 않고 비좁은 편이다. 선정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크지 않은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으로 서궐에 있던 광정전을 옮겨 중건한 것이라 한다.

<지붕>

지붕은 궁궐건물중 유일하게 청기와를 올려 놓고 있다. 청기와는 중국에서 ‘회회청’이라는 비싼 안료를 수입하여 구운 유리기와이다.

<선정전 월대>

국왕이 일상업무를 보던 편전으로 넓지는 않지만 1층으로 된 월대를 두고 있다. 월대에는 화재를 경계하는 의미로 ‘드므’를 설치해 놓았다.

<내부>

닫집안에 의자가 설치된 정전과는 달리 편전은 보좌에 앉아서 업무를 보거나 신하들을 접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뒷편에는 국왕의 상징인 일월오악병풍을 두르고 벽을 쳤다. 선정전 내부 공간은 그리 넓지 않은 편으로 많은 인원이 이곳에서 개최된 회의나 경연을 참석할 수 없기 때문에 주로 정삼품 이상 당상관이 참여하는 회의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천장>

 천장은 우물반자 천정을 하고 있으며, 가운데에 봉황무늬를 양쪽에는 꽃무늬를 그려놓고 있다. 양쪽으로는 공포가 드러나 있어 장식적인 효과를 주고 있다.

<행각>

지금은 선정전을 둘러싸고 있는 행각이 회랑처럼 꾸며져 있는데, 원래는 창고와 국왕수행하는 사람들이 거처했던 방이 있었다.

<선정문 앞 마당>

원래 숙장문을 들어서면 선정전 정면에 ‘빈청(賓廳)’이라 하여 정승들이 편전에 들기 전에 대기하며 국사를 의논하던 장소가 있었다.

선정전(보물)
선정전은 궁궐의 편전으로서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더불어 일상업무를 보던 곳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 세미나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매일같이 열렸다. 주위를 둘러싼 행각들은 비서실, 창고 등으로 이용되었으나 전체적으로 비좁았다. 선정전은 청기와를 올린 것과 앞쪽 선정문까지 복도각 건물로 연결한 것이 특징이다. 선정전은 한때 혼전으로 쓰였는데, 복도는 그때의 흔적이다. <출처:문화재청>

희정당(熙政堂)

희정당은 본래 침전으로 사용하다가 조선후기부터 국왕 집무실인 편전으로 사용하였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조선후기에는 창덕궁이 법궁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경복궁 편전 서쪽편에 집현전 건물(현 수정전)을 참조하여 많은 사람이 참석하여 학문을 논하는 경연이나 중요한 정치적인 회의를 하기 위해 편전으로 역할이 바뀐 것으로 생각된다. 원래는 숭문당이었는데 연산군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하면서 희정당으로 불렀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소실된것을 경복궁 침전이었던 강녕전 건물을 옮기면서 현대식 건물에서 볼 수 있는 특징들이 반영되었다. 건물은 앞면 11칸.옆면4칸의 본채 건물과 현관 및 부속시설들이 있는 ‘ㄷ’자형 건물이 복도로 연결되어 전체적으로 ‘ㅁ’자를 이루고 있다. 건물 정면에는 서양식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자동차를 세울 수 있는 시설인 포치(Porch)가 한옥양식으로 세워져 있으며, 내부에는 전기시설을 하였으며, 유리창을 사용하는 등 변화된 생활상을 반영하고 있다. 구한말과 대한제국 시절 왕의 사무실과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으로 마지막 황제 순종이 이곳에 집무를 보았다고 한다.

<창덕궁 희정당 영역>

선전정 동쪽에는 국왕의 편전 또는 침전으로 사용하는 희정당이 있다. 희정당은 집현전 자리에 세워진 경복궁 수정전처럼 국왕의 연구기관으로 지어진 숭문당이 있어 편전으로 사용하였다. 건물은 집무실을 뒷편에 두고 앞건물은 통로와 부속시설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면 두건물은 양쪽에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가운데 출입문과 포치>

건물 중앙 마루 앞에 서양식 건물에서 볼 수 있는 포치(porch)를 한옥의 누각형태로 만들어 놓고 있다. 자동차가 도입된 일제강점기에 이 건물을 수리하면서 국왕이 출입할 때 자동차를 세우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출입문 사이로 보이는 모습>

중앙 복도 사이로 보이는 접견실 겸 집무실이 있는 희정당 본채 건물이 보인다. 가운데에 중정형식으로 마당을 두고 있다.

<건물 왼쪽편 출입문>

국왕을 접견하는 신하들이나 손님이 출입하는 문으로 생각된다.

<건물 오른쪽>

희정당 앞쪽 건물은 전체적으로 ‘ㄷ’자형으로 되어 있으며, 희정당 본채건물과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내부에는 크고 작은 방들이 있는데 일제강점기 국왕을 수행하는 인원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뒤에서 본 희정당 본채>

건물은은 앞면 11칸, 옆면 5칸의 건물로 경북궁 침전 건물인 강녕전을 허물고 이곳으로 옮겨 중건하였다고 한다. 가운데 3칸은 응접실, 서쪽은 회의실, 동쪽은 크고 작은 방들로 사용하고 있다.

<희정당 내부 응접실>

<응접실 천정에 설치된 전등>

<희정당 뒷편 복도>

전통 궁궐건물 형태를 사용하고 있지만 창호지대신 유리를 사용하고 있다.

<사진으로 남아 있는 희정당 접견실>

옛형태를 일부 복원한 지금의 건물과는 달리 전형적인 서양식 건물 형태를 하고 있다.

<희정당 마당>

희정당은 일제강점기에 중건된 건물로 건물 앞에 월대를 설치하지 않고 있다.

<대조전과 연결되는 복도각>

편전인 희정당과 침전인 대조전이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경복궁에서는 볼 수 없는 구조로 궁궐건물 배치 원칙에는 맞지 않는 듯 하며, 일제강점기에 희정당을 중건하면서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희정당(보물)
원래 왕의 연구실인 숭문당이었는데 연산군 대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비좁은 선정전이 종종 국장에 사용되면서 또 다른 편전으로 활용되었고, 왕의 침실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의 화재를 복구하면서 경복궁의 강녕전을 이건한 것으로 원래의 모습과 완전히 다르다. 전면에 자동차 승하차를 위한 현관이 마련되고, 내부는 유리창과 전등, 근대적 화장실을 설치하고 바로크풍의 가구를 갖추는 등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출처: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