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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도자공예-청자실] 고려의 자기문화

비색청자로 불렸던 고려 청자는 은은한 녹색을 띠는 도자기로 우리나라을 대표하는 문화재이자 예술작품이다. 고려청자는 도자기 종주국인 송나라 사람들조차도 그 빛깔이 중국 청자보다 뛰어나다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비색청자는 유약이 반투명하며 그릇표면에 금이 생기지 않고 광택이 은은한 것이 특징으로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전반에 절정기를 이루며 12세기에는 상감기법이 도입되어 그 빛깔과 함께 예술적 조형미까지 갖추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자기가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통일신라 말기인 9~10시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았던 것 같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이전에 청자가 만들어졌다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말에서 일부 만들기는 크게 발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중국에서 도자기들이 일부 계층을 중심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자기를 만드는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황소의 난에서 시작된 당나라 말에서 오대에 이르는 혼란기에 중국 도자기 기술자들이 한반도로 넘어오면서 월주요의 영향을 받은 도자기들이 고려초기부터 생산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초기의 가마들은 수도 개경을 부근에서 중국 월주요의 자기들을 생산했다고 하며, 11세기에 들어서는 중국 송나라와 일본과의 중요한 교역거점이었던 전북 부안과 전남 강진이 청자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청자 제작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고려청자는 아름다운 비취색으로 대변되는 고려청자 특유의 색과 장식기법으로 고려만의 자기를 만들게 된다. 현재까지도 한국을 대표하는 자기와 문화재로는 고려청자를 첫손가락에 꼽고 있을 정도로 그 제작수법과 예술성이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고려청자 관련 주요 연표

차문화의 발달과 함께 월주요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11세기 비색청차.

대접(靑磁大楪, 고려 11세기),

고려시대에 크게 성행했던 차를 마시는 다도문화와 관련됫 찻그릇인 완이다. 단순하면서 아름다운 색과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해무리굽완은 초기 청자의 양식적 변화를 나타낸다. 굽의 형식은 선해무리굽에서 중국식 해무리굽, 한국식해무리굽, 퇴화해무리굽의 단계를 거치며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경에 사라진다. 이 해무리굽완은 좁은 내저원각에 굽 안바닥까지 시유하였고, 내화토받침으로 번조한 한국식해무리굽 단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출처:중앙박물관>

연꽃잎무늬 합(靑磁陰刻蓮瓣文盒, 고려 11세기), 잔(靑磁盞, 고려11세기),

접시(靑磁楪匙, 고려11세기), 접시(靑磁楪匙, 고려11세기),

 연꽃잎무늬대접(靑磁陰刻蓮瓣文大楪, 고려11세기),

꽃모양접시(靑磁花形楪匙, 고려10~11세기), 꽃모양접시(靑磁花形楪匙, 고려10~11세기).

비색청자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12세기에 만들어진 다양한 기형의 청자들.


병(靑磁甁, 고려 11~12세기),

청자제작 초기단계에는 무늬가 없는 청자가 주로 만들어졌으며, 색의 시대에 들어와 고려만의 비색으로 꽃을 피운다. 이후 장식의 시대에 들어서도 무늬없는 청자는 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무늬없이 광택이 밝은 반투명 유약을 시유한 이 병은 고려 초 금속기를 모방하였던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균형 잡힌 조형감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매병(靑磁梅甁, 고려 11~12세기), 병(靑磁甁, 고려 11~12세기)

꽃모양접시(靑磁花形楪匙, 고려12세기).

 고려 고분에서 출토된 아름답고 완벽한 12세기 전반 절정기의 순청자이다. 이와 유사한 접시가 중국 송나라 접시에도 보이지만, 이 접시는 꽃잎의 표현과 유약의 아름다움에서 고려청자 고유의 세련된 멋이 느껴진다.

발(靑磁鉢, 고려11~12세기), 반(靑磁盤, 고려11~12세기),

꽃모양발(靑磁花形鉢, 고려12세기)

병(靑磁甁, 고려 12세기), 항아리(靑磁壺, 고려12세기)

비색청자
고려청자의 은은한 녹색은 흔히 비취색, 곧 ‘비색(翡色)’에 비유된다. 비색을 띤 청자에 고려 사람들은 깊은 애정과 긍지를 가지고 있었고, 도자기의 종주국인 중국 송나라 사람들도 중국 청자보다 뛰어나다고 칭송하였다. 비색 청자 유약은 반투명하며, 그릇 표면에 갈라진 금이 생기지 않고 광택이 은은한 것이 특징이다. 비색 청자는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전반까지 가장 세련된 색을 띤다. 12세기 중엽부터는 상감 청자가 유행하여 비색 유약에서 상감무늬가 잘 드러나는 맑고 투명한 유약으로 바뀌게 된다. <출처:중앙박물관>

고려청자의 시작과 발전
한국에서 언제부터 자기를 생산했는지에 대해선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대체로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에 시작되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한국에서 청자를 직접 만들게 된 것은 중국 청자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늘어나면서부터이다. 삼국시대에는 약간의 중국 청자가 무덤에 넣는 부장품으로 사용되었으나,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중국 청자와 백자가 실생활에 쓰였다. 초기의 가마들은 고려의 수도 개경이 위치한 중서부 지역에서 중국 월주요 청자의 영향을 받은 자기를 생산하였다. 11세기에는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이 청자의 중심 제작지가 되었으며, 점차 완성도 높은 청자를 생산하게 되었다. 12세기 전반에 이르면 고려청자는 아름다운 비취색과 다양한 장식기법으로 세련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출처: 중앙박물관>

시흥 방산동 가마터 출토품,

경기도 시흥 방산동 가마는 초기 고려청자의 표식유물인 해무리굽완과 화형접시를 비롯하여 주구가 긴 주자, 뚜껑, 잔탁 등을 제작하였는데, 출토유물의 형태와 유색이 중국 오대(907~960년) 오월국 월주요 청자와 매우 흡사하여 그 시기를 10세기 중반 경으로 추정하였다. 발형(鉢形)과 통형(筒形)의 갑발, 갑발 받침과 고리형 받침 등의 요도구가 사용되었다. 갑발에 새겨진 ‘봉호(奉化)’라는 글씨는 오월국 봉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출처:중앙박물관>

용인 서리(중덕, 상반) 가마터 출토품

경기도 용인 서리 중덕 가마는 처음에는 장방형 벽돌을 사용하여 쌓았지만 이후 진흙을 쌓아 만든 형태로 전환하여 주목된다. 가마와 가마 좌우측 퇴적 구릉의 4개의 자연층위가 확인되었고, 해무리굽완과 화형접시, 주자, 잔탁 등의 기종뿐 아니라 해무리 굽완보다 앞서는 선해무리굽완의 존재가 드러나게 되었다. 한편 용인 서리 상반 가마는 폐기장에서 벽돌편이 수습되었으나 진흙 가마의 구조만이 확인되었고, 출토유물은 중덕 가마의 3,4기층과 유사하다.

강진 용운리 가마터(63호, 9호, 10호1층) 수습품.출토품,

고려의 자기 생산지가 남부로 이동한 후 가장 활발한 생산이 이루어진 곳은 전라남도 강진이다. 강진에서는 대구소(大口所, 현 대구면 용운리.사당리)와 칠량소(七樑所, 현 칠량면 삼흥리0 두곳이 자기소 체제로 운영되었다. 강진의 진흙가마 가운데 현재까지 확인된 바 가장 시기가 이른 것은 용운리 63호이다. 해무리굽완, 화형접시, 옥연접시 등이 발견되었고, 번조 시 구멍 뚫린 갑발이 사용되었다. 용운리 9호와 10호1층에서도 초기 청자가 제작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순화4년’이 새겨진 항아리

시작과 전개
고려는 10세기 경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청자 제작에 성공하였는데, 오랜 경험으로 축적된 도기 제작의 전통 위에 중국의 월주요(越州窯)와 같은 선진기술의 영향과 차 문화의 유행 및 확산 등으로 청자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초기의 가마들은 벽돌가마(塼築窯) 형태로 고려의 수도인 개경과 가까운 한반도 중서부 지역에 있었지만, 11세기에는 남서부 지역에서 진흙가마(土築窯)가 본격적으로 운영되면서 요업의 중심이 점차 전남 강진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강진 사당리 가마터 출토품

전라남도 강진 사당리 가마는 고려청자 전성기 가운데서도 정품 중의 정품을 생산해 낸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1960년대 국립중앙박물관이 발굴조사한 사당리 당전마을 가마터는 고려시대 대구소 자기소 체제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바 기종과 기형, 문양장식이 가장 다채롭고 정교하며 유색 또한 매우 좋다. <출처:중앙박물관>

부안 유천리 가마터 출토품

전라북도 부안 유천리 가마는 강진 용운리.사당리 가마와 더불어 전성기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생산지이다. 강진에 비해 개요(開窯)시기가 다소 늦는 점을 빼고는 생산품의 양상이 거의 비슷하다. 1960년대 유천리 12호 가마에 대한 국립중앙박물관의 발굴조사 이후 1990년대에는 원광대학교 박물관에서 7구역을 발굴한 바 있다. 일제강점기 후카다가 12호 가마에서 도굴하였다고 하는 상당량의 파편이 국립중앙박물관과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 나뉘어 소장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용인 보정동 가마터 출토품

경기도 용인 보정동 가마는 고려 중기 지방 청자 생산지로, 매우 다양한 기종과 기형, 장식문양으로 주목할 만하다. 강진 청자의 전국적 확산을 의미하는 동시에 시차가 크지 않은 예로 보인다. 품질은 떨어지나 강진 용운리 10호 가마 2층과 유사한 맥락이며, 나한상과 보살상 등 불상과 화분, 의자 등을 제작하여 주목된다. <출처:중앙박물관>

인종 장릉 출토품
고려 17대 임금인 인종(재위 1122~1146년)의 능인 장릉 출토품으로 전해지는 이 일괄유물은 <참외모양 병>, <사각받침대>, <잔과 뚜껑>, <국화모양 합> 등 순청자와 <청동도장>, <은제수저>, <청동내함>, <석제외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종 장릉 출토품을 통해 12세기 전반 고려 왕실의 공예문화와 고려청자가 절정기로 접어드는 양상을 볼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고려 17대 인종의 장릉에서 출토된 전성기 고려청자.

받침대(靑磁方形臺, 고려12세기, 전 인종 장릉 출토),

잔(靑磁盞, 고려12세기, 전 인종 장릉 출토), 국화모양합(靑磁菊形盒, 고려12세기, 전 인종 장릉 출토)


참외모양병(靑磁瓜形甁, 고려12세기, 전 인종 장릉 출토, 국보

이러한 모양의 병은 중국 고대 청동기인 준이라는 병에 기원을 둔다. 뛰어난 색과 완벽한 균형미로 널리 알려진 고려청자의 대표적 명품이다.

고려 17대 인종(재위 1122~1146년)의 장릉에서 ‘황통 6년(1146)’의 기록이 있는 인종의 시책(諡冊)과 함께 출토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양식은 중국 송대(宋代)부터 유래하였으나, 중국 것에 비해 훨씬 부드럽고 단정한 곡선미를 보인다. 단아한 기형과 함께 고도로 정선된 유약과 태토는 고려청자의 최성기 작품 수준을 보여준다. <출처:중앙박물관>

1.표주박모양주자(靑磁瓢形注子, 고려12세기), 2.참외모양주자(靑磁瓜形注子, 고려12세기), 3.참외모양주자(靑磁瓜形注子, 고려12세기),

4.모란무늬합(靑磁陰刻牡丹文盒,고려12세기), 5.연잎무늬합(靑磁陰刻荷葉文盒,고려12세기),

6.구름넝쿨무늬병(靑磁陰刻雲唐草文油甁,고려12세기), ), 7.병(靑磁油甁,고려12세기),

8.’상약국’이 새겨진 용무늬 합(靑磁陰刻雲龍文尙藥局銘盒,고려12세기, 보물

고려시대 존재했던 의료기관인 ‘상약국’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합이다.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조형미와 빛깔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절정과 확산
고려청자는 11세기 중후반부터 눈에 띠게 발전하여 12세기에는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의 두 지역을 중심으로 절정의 경지에 이른다. 다양한 무늬로 아름답게 꾸며진 그릇과 같은 일상용품을 비롯해서 기와나 타일같은 건축자재까지 만들었다. 특히 고려청자는 중국 자기의 양식을 답습하는데 그치지 않고 고려만의 독특한 미감을 살려 색과 장식기법, 무늬, 그리고 기형 등에서 중국과는 다른 면모를 뚜렷하게 나타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는 유약이 은은한 비취색을 띠는 ‘비색(翡色)’의 완성과 도자 예술의 새로운 경지를 연 ‘상감(賞鑑)’기법의 개발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음각청자(陰刻靑磁, Incised Celadon)
조각칼과 같은 도구로 그릇 표면에 홈을 내어 무늬를 새기는 가장 초보적인 기법의 청자이다. 조각칼을 옆으로 늬어 새기면 선이 굵어지고 반쯤 양각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연꽃넝쿨무늬매병(靑磁陰刻蓮唐草文梅甁, 고려12세기,국보

청자 음각연꽃넝쿨무늬매병(국보97호), 좁은 아가리 넓고 풍만한 어깨와 몸통, 잘록한 허리 등 청자 매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연꽃무늬를 감싸고 있는 넝쿨무늬의 윤곽선은 조각칼을 뉘여서 음각하였기 때문에 반쯤 양각된 것처럼 보인다. 고려청자에 사용된 음각기법은 초기에는 가늘고 예리한 음각무늬이지만, 고려청자 전성기인 12세기 중엽이 되면 이처럼 선이 굵어지고 반양각된 것처럼 처리하는 특징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보상화무늬대접(靑磁陰刻寶相華文大楪, 고려 12세기), 앵무무늬대접(靑磁陰刻鸚鹉文大楪, 고려 12~13세기),


물고기무늬대접(靑磁陰刻波魚文大楪, 고려 12~13세기), 동자무늬꽃모양대접(靑磁陽刻童子文花形大楪, 고려 12세기),

양각청자(陽刻靑磁, Celadon with Decoration in Relief)
무늬주변을 조각칼로 파내어 도드라지게 만든 청자이다. 무늬틀로 찍어서 나타내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는 압출양각 또는 인각(印刻), 양인각이라 한다.

황촉규무늬꽃모양대접(靑磁陽刻黃蜀葵唐草文花形大楪, 고려 12세기), 모란무늬꽃모양대접(靑磁陽刻牡丹文花形大楪, 고려 12세기),


모란무늬꽃모양대접(靑磁陽刻牡丹文花形大楪, 고려 12세기), 용무늬대접(靑磁陽刻龍文大楪, 고려 13세기),


모란무늬대접(靑磁陽刻牡丹文大楪, 고려 12세기), 연꽃넝쿨무늬발(靑磁陽刻蓮唐草文鉢, 고려 12세기),

1.잔과 잔받침(靑磁 托盞, 고려12세기), 2.접시(靑磁楪匙, 고려 12세기),

 3.모란넝쿨무늬타호(靑磁陰刻牡丹唐草文唾壺, 고려12세기), 4.모란무늬접시(靑磁陰刻牡丹文楪匙, 고려12세기),

5.연꽃잎무늬대접(靑磁陰刻蓮瓣文大楪, 고려12세기),


6.주자(靑磁注子, 고려12세기),

연꽃잎모양을 한 승반과 금속기형태의 기형을 지닌 주자가 한쌍을 이루고 있다. 주자의 뚜껑에는 연꽃좌대 위에 사자모양 상형장식이 올려져 있다. 이러한 기형은 중국 당말(唐末)오대(五代)의 청동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미 북송대 자기류에서 비슷한 양식들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7.구름용무늬숟가락(靑磁陰刻雲龍文匙, 고려12~13세기),

8.잔과 잔받침(靑磁托盞, 고려12세기), 9.접시(靑磁楪匙, 고려12세기),

1.잔받침(靑磁托盞, 고려12세기), 2.부용무늬꽃모양잔(靑磁陰刻芙蓉文花形盞, 고려12세기),

3.풀꽃무늬부용모양잔(靑磁陽刻草花文芙蓉形盞, 고려12세기),  4.연꽃잎무늬잔(靑磁陽刻蓮瓣文盞, 고려12세기),

틀을 이용하여 무늬를 찍어내는 기법을 ‘압출양각(壓出陽刻)’ 또는 ‘인각(印刻)’이라고 한다. 그러나 무늬의 섬세한 세부를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어 대체로 음각기법이 함께 사용된다. 이 작품도 모란무늬를 틀로 찍어낸 후 윤각을 음각선으로 선명하게 만들었다. <출처:중앙박물관>

5.연잎무늬귀때발(靑磁陰刻荷葉文片口鉢, 고려12세기),

 6.이룡무늬꽃모양접시(靑磁陰刻螭龍文花形楪匙, 고려12세기), 7.꽃무늬잔(靑磁陽刻花文盞, 고려12세기),

 8.잔받침(靑磁盞托, 고려12세기)

투각청자(透刻靑磁, Openwork Celadon)
무늬의 바깥부분을 도려내어 만드는 청자이다. 작업과정이 복잡하고 까다로우며, 12세기 전성기 청자에서 많이 나타난다.

연꽃동자무늬주자(靑磁透刻蓮花童子文注子, 고려12세기)

상형청자(像型靑磁, Sculptural Celadon)
인물이나 각종 동식물의 모양을 본떠 만든 청자를 말한다. 대표적인 특징만을 살려서 간결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실물보다 강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1.석류모양 연적(靑磁石榴形硯滴, 고려12세기), 2.3.원숭이모양 먹 항아리(靑磁猿形墨壺, 고려12세기)

고려의 자기문화
도자기는 흙과 불, 그리고 사람이 하나가 되어 만드는 예술이다. 특히 “자기(磁器)”의 제작은 세계 도자기 역사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유약을 입혀 1,200도 정도의 높은 온도로 구워내는 자기는 최상의 기술로 완성된 섬세한 예술품이다. 한국에서 자기가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초 무렵이다. 그동안 쌓아온 토기 제작 기술과 중국 월주요(越州窯) 자기의 영향으로 청자나 백자 같은 자기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초기의 가마들은 고려의 수도 개경(현재의 개성)에 가까운 중서부 지역에 있었다. 11세기에 접어들면서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 두 지역을 중심으로 청자가 제작되었고, 초기에 비해 제작기술이 정교해졌다. 고려자기는 11세기 중엽부터 눈에 띄게 발전하며 12세기에는 절정의 경지에 이른다. 특히 청자는 다양한 무늬로 아름답게 꾸며졌으며, 그릇과 같은 일상용품을 비롯해서 기와나 타일같은 건축자재까지 만들어진다.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는 유약이 은은한 비취색을 띠는 ‘비색(翡色)청자’의 완성과 도자예술의 새로운 경지를 연 ‘상감(象嵌)’기법의 개발이다. 고려는 13세기에 중국 원나라와 전쟁을 오래 치르면서 나라 안 사정이 매우 어려워졌는데, 이런 상황은 청자를 만드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비색 청자의 우아한 형태와 아름다운 빛깔은 점점 사라지고, 청자의 질도 눈에 띄게 변화했다. 특히 14세기 후반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남부지방이 황폐해지자 강진과 부안의 장인들 또한 살길을 찾아 내륙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 때문에 자기 생산이 널리 확대되고 자기를 사용하는 계층의 폭도 넓어져 고려말의 상감 청자는 조선시대 ‘분청사기(粉靑沙器)’로 이어지게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중앙박물관
4.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