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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오죽헌(烏竹軒, 보물)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에 남아 있는 조선중기 고택인 오죽헌(烏竹軒, 보물)이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태어난 유서깊은 곳으로 개인이 살았던 저택 중 가장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오죽헌은 이 집의 별당 건물로 조선초기 문신이었던 최치운(1390~1440년)이 처음 지었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이 건물을 간결하면서 단정한 느낌을 주고 있다. 앞면 3칸 중 2칸은 넓은 대청마루, 1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온돌방은 율곡 선생이 태어난 장소로 몽룡실(夢龍室)이라 부른다. 넓은 대청마루가 있는 것으로 볼 때 생활공간이라기보다는 손님을 접견하고 집안행사를 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보인다.

율곡 이이는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어머니인 신사임당과 함께 지폐에 인물이 들어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며 존경받고 있다. 조선후기 관동팔경 유람을 떠났던 선비들이 그의 발자취를 찾아서 이곳을 많이 방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별당인 오죽헌은 개인이 살던 가옥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로 보존이 잘 되어 있다.

<강릉 오죽헌(보물)>

앞면 3칸 규모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별당 건물이다. 오른쪽 2칸은 넓은 대청마루, 왼쪽 1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있으며 가족들이 생활하는 안채와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볼 때 손님들을 접견하고 집안행사를 하는 공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처마와 공포>

오죽헌은 조선중기에 지어진 건물로  지붕을 떠받치는 공포에서 주심포양식에서 익공양식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창호와 기둥>

대청마루 옆면과 뒷편에는 판문을 달아두고 있다. 여름에는 바람이 잘 통할 수 있고, 겨울에는 문을 닫아 바람을 막을 수 있다.

<뒷편 툇마루>

온돌방 뒷편에는 작은 툇마루을 두어 걸터 앉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온돌방>

온돌방은 율곡 이이가 태어난 방이다. 태어나던 날 신사임당이 용꿈을 꾸었다고 하여 몽룡실 몽룡실(夢龍室)이라 부른다. 내부에는 신사임당 영정이 전시되어 있다.

<대청마루>

<대청마루>

오른쪽 앞면 2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되어 있다. 상당히 넓은 공간으로 서원 강당의 대청마루와 비슷한 규모이다. 서울이나 경북지방의 ‘ㅁ’자형 저택에서는 집안 행사를 위해 안채에 넓은 대청마루를 두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이 저택은 별당인 오죽헌에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있다. 관동팔경 유람을 위해 전국에서 방문하는 손님들이 많았던 강릉지방의 특징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대청마루 천장>

목재 구조물과 서까래 등이 노출된 연등천장이며, 우물천장도 일부 사용하고 있다. 조선중기에 지어진 것으로 장식적인 요소를 많이 고려한 구조이다.

<대들보에 걸려 있는 글씨가 적힌 현판>

<현판들>

율곡 이이가 태어난 유서깊은 장소답게 글씨가 적힌 현판들이 많이 걸려 있다.

<2010년 오죽헌>

강릉 오죽헌(烏竹軒), 보물,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
조선초기에 지어진 별당 건물로, 당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주택이다. 이 건물은 주심포양식에서 익공양식으로 변해과는 건축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물로 평가 받아 1963년 보물165호로 지정되었다. 왼쪽 마루방은 율곡이 여섯 살 때 까지 공부하던 곳이며, 오른쪽 방은 1536년 신사임당이 용이 문머리에 서려 있는 꿈을 꾸고 율곡을 낳은 곳이다. 몽룡실이라 부르고 있는 이 방에는 신사임당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출처:문화재청>

오죽헌이 있는 이 저택에는 안채, 사랑채, 별당, 율곡의 유품을 보관하던 어제각(御製閣)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ㄱ’자형으로 되어 있다. 안채는 온돌방, 부엌, 대청마루로 되어 있는데, 다른 저택들과는 달리 집안행사를 위한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있지 않다. 안채 옆쪽에는 문간채 역할을 하는 3칸 규모의 건물이 별도로 있다. 경포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사랑채는 중문과 붙어 있으며, 온돌방과 마루로 되어 있다. 사랑채 대청마루 또한 넓지 않은 것으로 볼 때 바깥주인의 일상적인 생활공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별당인 오죽헌 뒷편에는 율곡 이이의 유품을 보관하던 어제각이 있었는데, 1970년대 이곳에 율곡 영정을 모신 사당을 세우면서 안채 옆쪽으로 옮겼다.

<안채와 바깥채>

오죽헌 살림집에 해당하는 안채와 바깥채(사랑채). 앞편 3칸 규모의 바깥채와 중문을 앞쪽에 두고 뒷편에 ‘ㄱ’자형 안채와 행랑채를 두고 있다. 경북 북부 지방의 ‘ㅁ’자형 한옥과는 달리 개방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바깥채>

바깥채(사랑채)는 바깥주인이 일상적으로 거처하는 공간으로 별당인 오죽헌보다는 규모가 작은 편이다. 앞면3칸, 옆면 1칸반 규모로 온돌방과 마루방으로 되어 있으며, 경포호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앞쪽에 툇마루를 두고 있다.

<옆에서 본 모습>

별당인 오죽헌 방향으로 문이 열려 있다.

<바깥채 내부>

안방과 작은 마루방이 있다.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오죽헌 대청마루와는 달리 손님을 접견할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마루방이다.

<주련들>

바깥채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들은 추사 김정희가 쓴 글을 새겨 놓았다고 한다.

<바깥채 툇마루>

<중문>

바깥채 옆에 중문과 작은 문간방이 있고, 그 옆에 행랑채로 보이는 건물이 있다.

<안쪽에서 본 바깥채와 중문>

<가족들이 거처하는 살림집은 안채>

<왼쪽에서 본 모습>

‘ㄱ’자형 구조로 부엌, 온돌방, 마루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앞면 5칸 정도의 규모이다.

<안채 온돌방>

<안채 대청마루>

별당인 오죽헌 대청마루가 넓은 반면에 안채 마루는 1칸 규모로 좁은 편이다.

<안채 툇마루>

<부엌>

<행랑채>

안채 마당 안쪽에 앞면 3칸 규모의 행랑채가 별도로 있다. 비교적 좁은 안채를 보완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보인다.

<뒷편에서 본 행랑채>

<어제각>

안채 왼쪽편에는 율곡 이이의 유품을 보관하던 어제각이 있다. 원래는 오죽헌 앞 마당에 있던 것을 1970년대에 영정을 모시는 사당을 지으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안채.바깥채
조선초기에 지어진 오죽헌 내의 건물들은 1505년 병조참판을 지낸 최응현에 의해 전승되어 오다가, 오죽헌 정화사업으로 오죽헌(별당)과 바깥채를 제외하고 모두 철거되었다. 현재의 모습은 1996년 정부의 문화재 복원계획에 따라 옛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안채는 안주인이 생활하던 곳이고 바깥채는 바깥주인이 거처하던 곳이다. 바깥채의 툇마루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柱聯)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새겨 놓은 것이다. <출처: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중앙박물관
4.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