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례(五禮)는 조선시대 국가에서 행했던 중요한 의례를 그 형태나 목적, 내용 등을 5가지 종류로 분류한 것을 말한다. 유학에서는 『서경(書經』에서 오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주(註)에 오례는 길(吉).흉(凶).빈(賓).군(軍).가례(嘉禮)라고 하고 있다. 조선사회는 유학을 이념으로한 왕도정치를 추구한 사회로 유학의 법도에 맞게 예(禮)를 행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 여겼으며 이를 통해 국왕과 집권세력의 권위와 정통성을 강화하였다. 오례는 고려시대에 시작되어 조선시대에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정착되었다. 조선시대 오례는 세종실록에서 정리되기 시작하여 성종대에 『국조오례의』가 완성되면서 국가적인 법규체제가 되었다.
조선사회에서 국가적으로 행하는 주요 의례로 제사에 해당하는 길례(吉禮), 국왕 등의 장례절차와 관련된 흉례(凶禮), 왕실의 결혼 등 경사스러운 일에 관한 가례(嘉禮), 전쟁과 관련된 군례(軍禮), 외국사신을 맞이하는 빈례(賓禮)가 있다. 오례는 중국에서 시작되어 조선사회에 정착되었는데 춘추전국시대와는 달리 비교적 안정된 사회였으며, 국가간 교류가 많지 않았던 조선사회에는 군례나 빈례에 대한 국가적인 비중은 그리 높지 않은 편이었으며, 실제로는 종묘와 사직, 선대 왕에 대한 제사 등과 관련된 길례와 장례절차에 관련된 흉례가 빈번하게 행해졌던 의례였으며, 조상을 모시는 유교사회에서는 매우 중요시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길례와 관련된 종묘, 길례와 흉례와 관련된 조선왕릉이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도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왕실의 의례
조선은 유교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하여 운영된 국가로 ‘예禮’가 최고의 권위와 타당성이 있는 규범 질서이고, 각종 국가 통치제도와 백성의 생활을 효과적으로 통치하는 장치였다. 조선은 왕실의 정치적 권위와 왕조의 정통성을 국가의 다섯가지 의례인 오례五禮를 통하여 확립하고자 하였다. 오례는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흉례凶禮를 말한다. 오례의 체제는 고려시대에 시작되어 조선시대에 정착되었다. 조선왕실의 오례는 『세종실록』의 「오례」에서 정리되기 시작하였고, 성종대에 『국조오례의』가 완성됨으로써 조선 왕실의 권위를 지켜주는 기본 의례서가 되었다. 『국조오례의』의 서문에서는 “예를 기술한 것에 3천3백 가지의 글이 있지만 그 요점은 길吉,흉凶, 군軍,빈賓, 가嘉 다섯 가지에 지나지 아니할 뿐이다. .. 이 다섯가지의 예를 갖춤으로써 사람의 도리가 구체화되는 것이니 천하 국가를 다스리려는 자가 이를 버리면 다른 할 일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국가 통치에 있어 오례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왕실의 오례
길례, 길례는 왕실의 조상신을 모시는 종묘제(宗廟祭)와 땅과 곡식의 신에게 풍요를 기원하는 사직제社稷祭 등의 각종 국가 제례를 가리키며, 제사를 지내는 대상의 위상과 제사의 규모에 따라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나뉜다. <출처:고궁박물관>
궤(簋)와 보(盙), 제례때 사용한 그릇, 종묘제례 때 사용하던 제기이다. 궤는 하늘을 본 떠 둥글게 만들었으며, 메 기장과 찰 기장을 담아 보(盙)와 나란히 놓는다. 보는 땅을 본 떠 네모지게 만들었으며, 쌀이나 기장 등을 담아서 궤와 함께 놓는다. <출처:고궁박물관>
가례, 가례는 왕실의 혼례와 성년례인 관례(官隷), 왕비나 왕세자.왕세자빈의 책봉의식, 왕실 어른의 탄신 축하 의식 등 왕실의 경사스러운 의식을 통틀어 칭한다. <출처:고궁박물관>
의소세손 책봉 시 내린 인장과 죽책, 1751년(영조27) 영조가 사도세자의 첫째 아들 정을 세손으로 책봉하면서 제작한 옥인과 죽책이다. 왕세손의 책봉은 오례 중 가례에 속한다. <출처:고궁박물관>
흉례, 흉례는 상장(喪葬)에 관련된 의식이다. 왕이나 왕비, 왕세자와 세자빈 등이 승하하실 경우 국장(國葬)이나 예장(禮葬)을 치르게 되는데 장례와 관련된 일체의 의식과 신위를 종묘에 모시는 부묘(祔廟)의식 등이 여기에 속한다.
숙종과 숙종비의 왕릉 그림, 명릉도, 18세기 중반, 명릉은 조선 19대 왕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의 능이다. 3년상이 끝나기 전까지는 흉례의 예로써 혼전(魂殿)과 능에서 제사를 올렸으며 그 이후에는 길례의 예로써 종묘에서 제사를 올렸다. <출처:고궁박물관>
빈례는 외교와 관련되는 국가 의식을 말한다. 중국 사신을 태평관에서 접대하는 연회와 일본, 유구, 여진족 사신을 대궐에서 맞이하는 의식 등이 있다. 군례는 왕이 활쏘기나 무예행사, 군대 사열에 참여하는 등의 의식을 가리킨다. 왕은 병권의 최고 권력자로서 군례에 몸소 참여하여 군사들을 격려하고 군사 지휘 계통의 원활한 운용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귀면 무늬 쇠몽둥이, 은입사귀면문철퇴(보물1444호), 짧은 자루 끝에 무거운 쇳덩이를 달아서 그 무게로 적에게 타격을 가하는 무기이다. 손잡이와 몽둥이 끝에는 섬세한 은입사 기법으로 꽃무늬와 귀면 무늬를 장식하고 있어 의례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고궁박물관>
왕실의 번영, 왕실 아기의 탄생
왕실의 출산과 교육은 왕조의 생명을 유지하는 근간으로서, 조선왕실에서는 자손을 얻고 교육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왕실 자손을 잉태한 때부터 산모는 왕실의 풍속에 따라 태교를 하였다. 태아를 위해 성현의 고전을 읽거나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서 몸가짐을 소중히 하고 안전한 출산으로 건강한 아기가 탄생하도록 힘썼다. 출산에 임해서는 산모와 태아의 안전을 위해 산실청(産室廳)을 설치하고 필요한 인력을 준비하였다. 산달이 되면 산실에 방위자와 부적을 붙이고 산자리를 마련하였다. 원자가 태어나면 종묘에 아뢰고 백관의 축하를 받았다. 출산 7일 후 권초제(捲抄祭)가 끝나면 산실청이 폐지되었고, 태를 태항아리에 갈무리하여 길한 장소에 모시고 안장할 때를 기다렸다. <출처:고궁박물관>
조선왕실의 안태의식(安胎儀式)
태봉(胎峯)에 태실(胎室)을 만들어 태항아리를 봉안하는 안태의례(安胎儀禮)는 태어난 아기의 장수와 복을 비는 의식으로 왕조의 운명과 직결되는 중요한 행사였다. 태봉은 들판에 우뚝 솟아 하늘을 떠받치는 듯한 둥근 야산을 선택했다. 태실 주변에는 벌목과 농사를 금지하였고 그 바깥에 산불을 막기 위해 나무와 풀을 불살라 화소(火巢)구역을 두었다. 태의 주인이 왕이 된 경우에는 태실 위에 석물을 올리고 주위에 팔각 난간석을 설치한 후 새로운 태실비를 세웠다. 이를 가봉(加封)태실이라 한다. 태실을 만드는 과정은 미리 정해진 일자와 시각에 맞추어 정확히 이루어졌다. 왕실 태실의 조성은 조선 말까지 계속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산실구봉안, 산실물건을 봉안한 곳의 현판(1773년), 산실에 쓰였던 물자를 봉안한 곳에 걸렸던 현판으로 영조가 80세에 쓴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태조태외항.태지석, 태조의 태를 담은 항아리와 태지석, 조선왕조의 창업자 태조 이성계의 태외항아리와 태지석이다. 충남 금산군 추부면에 있었던 태조의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서삼릉으로 이전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태지석을 다시 만들어 묻었다.
“고려 충숙왕 4년(1335) 출생한 태조 고황제의 태항아리를 강희28년(1689) 3월29일 태전군 산내면에 다시 묻었다가 소화4년(1929) 이장하다.”
세종대왕 자제들의 태실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서진산에은 세종대왕의 왕자 18명과 세손 단종의 태실이 한 군데에 조성되어 있다. 전체 19기 중 14기는 조성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다섯왕자(안평대군,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의 태실은 1457년(세조3)에 파괴되어 1975년에 보수한 기단석만 남아 있다. 세조의 경우에는 왕이 되었기때문에 즉위 이후 태실비 앞에 귀부가 있는 가봉비가 세워졌다. 이곳에 태실을 처음 만든 것은 1451년(문종 원년)으로, 당시 세자였던 단종의 태실을 이곳으로 옮겨 묻고 사방 주위를 정한 뒤 차례로 다른 왕자들의 태실을 옮겨 조성하였다. 태를 묻은 뒤에는 3년마다 한 번씩 태실 안위제를 지내고 관원을 보내어 잡목을 뽑게 하는 등 철저히 관리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세조의 태를 담은 항아리와 태지석(1483년., 서삼릉 출토), 조선 제7대 왕인 세조의 태내.외항아리와 태지석이다. 경북 성주군 월항면에 있던 세조의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서삼릉으로 이전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명 영락15년(1417) 9월 24일생 진양대군 유의 태를 정통3년(1483) 3월 0일에 묻다.”
순조태봉도, 손조의 태실을 그린 그림(1806년, 복제) 순조의 태를 묻은 태실의 석물을 단장하고 주변의 산세와 경관을 묘사한 그림이다. 태실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속리산 안에 위치하며 태봉의 아래부분에는 법주사가 그려져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순조의 태를 담은 항아리(1790년, 서삼릉 출토), 조선 제23대 왕인 순조의 태내.외항아리이다. 키가 작고 풍만한 몸체에 큰 뚜껑을 지니고 있으며 끈을 묶기 위한 고리는 어깨 아래로 내려와 있다. 조선후기 태앙아리의 말기 형태를 보여준다.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에 있었던 순조의 태실은 1929년 서삼릉으로 이전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명종의 태를 담은 항아리와 태지석(1538년, 서삼릉 출토), 조선 13대 왕인 명종의 태내.외항아리와 태지석이다. 충남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에 있었던 명종의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서삼릉으로 이전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제13대왕 명종의 태실(1546년, 복제 3/4축소), 명종은 중종의 둘째 아들이자 인종의 아우이다. 명종의 태는 1538년(중종33) 2월21일 아침에 안장되었으며, 명종이 왕위에 오른 뒤 1546년(명종1) 10월에 태실을 가봉하고 비석을 세웠다. 그 후 비석이 훼손되어 1711년(숙종37)에 가봉비를 다시 세웠다. 명종의 태실은 현존하는 가봉 태실 중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 이 태실은 현재 충남 서산시 운산면 대봉리에 있는 태실을 3/4크기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한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서삼릉 태실
태실을 조성할 태봉지(胎封地)는 예조(禮曹)의 관상감(觀象監)에서 선정하였으며, 왕손의 출산 때마다 지관(地官)을 파견하여 후보지를 물색하였다. 이렇게 조성된 조선왕실의 태실은 전국적으로 131기에 달하였고, 이는 왕실에서 엄격하게 관리하였다. 그러나 이제강점기인 1928년부터 1930년 사이 조선총독부 이왕직에서는 전국 각지에 흩어진 태실의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전국의 주요 태실을 한군데에 모아 서삼릉으로 이봉하였다. 이봉하는 과정에서 봉분과 석물은 사라지고 태실비만 흡사 묘지의 형태로 나열되어 태실 본래 형태와 의미는 훼손되었다. 현재 서삼릉에 이봉되어 있는 태실은 태조를 비롯한 왕의 태실 22기, 왕자와 공주의 태실 32기로 총 54기이다. <출처:고궁박물관>
국가의 가장 큰 슬픔, 흉례(凶禮)
왕실에서 치르는 상례(喪禮) 또는 장례(葬禮)와 관련된 모든 의식을 통틀어 흉례(凶禮)라 한다. 특히 왕과 왕비의 죽음은 국가와 백성들의 가장 큰 슬픔으로 국장은 최고의 예를 갖추어 엄숙하게 치러졌다. 왕이나 왕비가 돌아가시면 장례 준비를 위한 임시 관청인 삼도감(국장도감國葬都監, 빈전도감殯殿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이 설치되었다. 국장도감은 장례를 총괄하고 왕의 관(재궁, 齋宮)을 왕릉에 모시는 일을, 빈전도감은 시신을 수습하여 빈소를 차리고 염습과 상복을 준비하는 일을, 산릉도감은 능을 만드는 일을 담당하였다. 또 장례를 치른 후 신주를 모시고 삼년상을 치르는 혼전을 담당하는 혼전도감(混戰都監)이 별도로 설치되기도 했는데, 대부분은 빈전도감이 혼전의 업무까지 담당하여 빈전혼전도감이라 불렸다. 왕의 관을 왕릉으로 모시기까지 약 5개월의 기간이 소요되었으며, 부묘도감에서 삼년상을 치른 후 왕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부묘의식을 끝내면 국장 절차가 모두 끝나게 된다. <출처:고궁박물관>
순종의 승하를 애도하는 만방(1926년), 순종의 승하를 애도하는 신하들의 글을 종이에 써서 이어붙인 만장이다. 순종은 1926년 4월25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장례는 조선총독부의 주도 하에 축소된 채 진행되어 승하한 지 46일 만인 6월10일에 발인하였는데, 이는 6.10만세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순종의 승하를 애도하는 글(민영휘, 1926년), 순조의 승하를 애도하는 글로 민영휘가 지었다. 왕과 왕비가 승하하면 지극한 슬픔을 나타내는 애책문을 지어 올렸다. 애책문에는 지존을 잃은 슬픔과 함께 살아 계실 때의 행적을 함께 적었다. <출처:고궁박물관>
국상을 치르는 의례를 설명한 책, 국조상례보편(1758년), 국상을 치르는 의례를 『국조오례의』와 과거 대소상(大小喪)의 예를 참고하여 당시의 실정에 맞게 다시 보완하여 정리한 책이다. 영조의 서문과 함께 고명(顧命)부터 발인(發引) 이전까지의 장례절차, 발인 및 혼전에서의 의식 등 국장의 의식 전반을 다루고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영조가 부묘례 후 감회를 적은 현판(1759년), 1759년(영조35) 5월6일 영조가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의 신주(神主)를 종묘에 모시는 의식인 부묘례를 거행한 후 감회를 적은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조선왕릉
조선시대에는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 왕과 추존 왕비가 있는데, 이들의 무덤을 조선왕릉이라 한다.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能),원(園),묘(墓)로 분류된다. 능은 추존 왕, 추존 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왕의 친아버지)의 무덤을 말한다. 묘는 나머지 왕족, 즉 정궁의 아들.딸인 대군과 공주, 후궁의 아들.딸인 군과 옹주, 후궁, 귀인 등의 무덤을 일컫는다. 현재 국내에 온전하게 남아 있는 조선시대 왕릉은 40기, 원은 13기이다. 이 중 왕릉은 500년을 넘게 이어온 왕조의 역사와 문화, 사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면서도 옛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점을 인정받아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태조가 왕릉지를 살피는 그림(19세기),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능을 어디에 쓸지 고민하고 있을 때 남재가 자신의 장지로 정해 두었던 터를 언급하자 함께 가보고 그곳을 수릉지(왕이 살아 있을 때 미리 자신의 능으로 정한 곳)으로 결정했다는 일화를 그린 그림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장릉에 관한 글, 장릉지, 추존왕 원종과 그의 비 인헌왕후의 능인 장릉의 조성에 관한 글이다.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은 1627년(인조5) 원종으로 추존되었으며 이에 따라 1632년(인조10) 그의 묘인 흥경원은 장릉으로 봉해졌다. 홍릉에 관한글, 홍릉지(1814년), 영조비 정성왕후의 능인 홍릉을 조성하면서 정성왕후와 홍릉의 조성 전반에 관하여 쓴 글이다. 정성왕후가 승하한 1757년(영조33) 지은 글을 1814년(순조14)에 고쳐 썼다. <출처:고궁박물관>
왕과 왕비의 제삿날을 적은 판. 국기판(國忌板19세기), 태조부터 익종까지 역대 왕과 왕비의 제삿날을 적은 기록판이다. 왕실의 제사는 엄격하게 지켜야 할 중대한 행사였으므로 이를 쓴 국기판 역시 중요하게 여겼다. <출처:고궁박물관>
북도각릉전도형(20세기초), 태조의 4대조 선조들의 능과 태조와 관련된 사적지를 풍수도 형식으로 그린 것이다. 산릉도 6폭과 사적지6폭의 총12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선릉의 정자각을 다시 세우면서 쓴 상량문, 선릉 정자각중건 상량문(18세기), 조선왕조 9대왕인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인 선릉의 정자각을 다시 세우면서 쓴 상량문이다. 선릉의 역사와 의미, 그리고 정자각을 다시 세우는 감회 등이 담겨 있다. 조선후기의 문신 최석항이 지었다. <출처: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