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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비 베개(국보)와 무령왕 발받침(국보)

무령왕릉에 출토된 무령왕비 베개(국보)와 무령왕 발받침(국보)이다. 무령왕릉 발굴 당시 머리부분과 발부분에 놓여 있었다. 무령왕 베개는 크게 손실되어 그 형체를 알 수 없었으며 왕비 베개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남아 있었다. 발받침은 왕과 왕비의 것이 온전히 남아 있었다.

왕비 베개는 나무에 주칠을 한뒤 금박등으로 구획을 나누어 그 속에 비천상, 봉황, 어룡 등 각종 그림을 그려 넣었다. 베개 위쪽에는 나무로 만든 새를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이 있었으며, ‘甲’, ‘乙’이라고 쓴 글씨가 남아 있었다. 베개를 장식하고 있는 비천상, 봉황, 어룡, 인동초 등의 그림과 거북등 모양 등은 도교에서 신성시 여기는 동물과 불교적인 내용이 반영된 것으로 당시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무령왕비 베개(복제품)>

무령왕비 베개, 국보,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무령왕릉 목관 안에서 발견된 왕비의 머리를 받치기 위한 장의용 나무 베개로, 위가 넓은 사다리꼴의 나무토막 가운데를 U자형으로 파내어 머리를 받치도록 하였다. 표면에는 붉은색 칠을 하고 금박을 붙여 거북등 무늬를 만든 다음, 칸칸마다 흑색·백색·적색 금선을 사용하여 비천상과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봉황·어룡(魚龍)·연꽃·덩굴무늬를 그려 넣었다. 베개의 양 옆 윗면에는 암수 한 쌍으로 보이는 목제 봉황머리가 놓여 있는데, 발굴 당시에는 두침 앞에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왕의 머리 받침은 거의 부식되어 두 토막만이 남아 있을 뿐이어서 형체를 알 수 없다. <출처:문화재청>

<진품 사진>

<무령왕비 베개 위쪽에 적혀 있던 글씨>

두글자이지만 웅진기 백제 때 쓰여진 유일한 글씨이다.

무령왕비 베개의 묵서명
왕비베개 윗부분에 올려진 봉황 아래에서는 붓으로 갑(甲), 을(乙)이라고 쓴 묵서명이 보존처리중에 확인되었다. 필체는 행서체로 왕비 지석에 새겨진 갑, 을의 서체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갑과 을은 10간의 첫째와 둘째를 가리키지만, 여거서는 두 마리 봉황의 암.수 성의 구별이나 좌.우를 가리키는 방위개념으로 쓰인 것으로 보여진다. 비록 갑, 을 두 글자에 지나지 않지만 웅진도읍기의 유일한 묵서 명문으로 그 역사적 가치는 매우 높은 것이라 하겠다. (안내문, 공주박물관, 2016년)

<무령왕 베개(복제품)>

발굴당시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었다고 한다. 발받침과 왕비 베개 형태를 참조하여 복원한 것이다.

발받침은 왕과 왕비의 것이 모두 남아 있었는데 그 중 왕의 발받침이 국보 165호로 지정되어 있다. 두개 모두 크기나 형태는 비슷하며 중앙에 W자형으로 깊게 파서 양발을 올려 놓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왕의 것은 검을 칠을 하였고 금판으로 거북등 모양으로 구획을 나누고 꽃무늬를 붙였다. 왕비의 것은 붉은 색 칠을 하였으며, 연꽃과 구름무늬를 그려 놓고 있다.

<무령왕 발받침(복제품)>

<진품 사진>

<무령왕비 발받침(복제품)>

<진품 사진>

<무령왕릉 발굴 당시 모습(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

무령왕 발받침, 국보,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무령왕릉 목관 안에서 발견된 장의용 나무 발 받침으로 왕의 발 받침대이다. 윗부분이 넓고 아랫부분이 좁은 사다리꼴 통나무의 중앙을 W자로 깊게 파서 양 발을 올려놓게 만들었다. 전면에 검은색 옻칠을 하고 폭 0.7㎝정도의 금판을 오려 거북등 무늬를 만들었으나 일부는 떨어져 없어졌다. 6잎의 금꽃을 거북등 무늬 모서리와 중앙에 장식하고, 꽃판 가운데에 옛날 부인의 머리장식의 하나인 보요(步搖)를 매달아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