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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 특별전, 신라의 황금문화와 불교미술] 신라인과 황금

신라는 <일본서기>>에 “금은의 나라”로 표현될 정도로 화려한 황금문화를 꽃피웠다. 신라 마립간 시기(5~6세기)에 조성된 경주 도심의 고분들에서는 금관 외에도 금귀걸이, 금제드리개, 금반지, 금팔찌 등 다양한 장신구들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무덤에 묻을 껴묻거리로 제작된 것도 있겠지만, 무덤의 주인들이 생전에 실제 사용했던 것도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출토된 장신구들은 제작수법이 상당히 정교하며 디자인이나 조형미 등은 오늘날 현대적인 감각의 장신구에 비해서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우수하다. 동시대 백제나 고구려에서도 화려한 장신구들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돌무지덧널무덤이라는 신라의 매장방식이 도굴을 어렵게 하여 오늘날까지 신라의 유물들이 많이 남아 있는 측면도 있다.

<신라인의 황금문화를 보여주는 금으로 만든 각종 장신구들>

대릉원을 비롯하여 경주 도심에 모여있는 5~6세기 지배층의 무덤에서는 많은 수량의 장신구들이 출토되었다.

“[박물관] 신관에 발을 들여놓자 나는 황홀하게 넋을 잃었다. 첫째로 찬란한 황금관이 햇발과 같이 번쩍인다. 전체가 순금으로 된 것만 해도 끔찍한 일이어든, 그 치장과 잔손질은 또 얼마나 정교하고 혼란하냐….”
– 현진건, 「고도순례 경주 2」, 동아일보, 1929.7.20 –

금제 드리개, 5세기, 황남대총 북분

금은 고대부터 권위의 상징이나 화폐등으로 사용되었으며, 변하지 않고 펴지는 전성(展性)과 늘어나는 연성(延性)이 가장 뛰어나 다양한 새김, 돋을새김, 낱알기법 등 다양하고 정교한 세공이 가능하여 화려한 장신구의 재료가 되었다. 또한 은이나 동 등 다른 금속에 금을 입히는 도금(淘金)기법은 금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어서 널리 활용되었다. 마립간 시기 고분에서 출토된 금은으로 만든 장신구들에는 다양한 기법의 세공기술이 적용되어 신라 황금문화의 화려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금제드리개(5세기, 황남대총 북분), 금귀걸이(5세기, 황남대총 북분), 금귀걸이(5세기, 황남동 442번지 무덤),

금귀걸이(5세기, 황남대총 북분), 금제 드리개(5세기, 황남대총 북분)

금귀걸이(6세기, 탑리), 금귀걸이, 금귀걸이(6세기, 황오동 4호무덤), 금귀걸이(6세기, 황남동 151호무덤), 금귀걸이(6세기, 노서동 138호 무덤),

금제드리개(6세기, 황오동 4호 무덤), 금귀걸이(6세기, 황오동), 금귀걸이(6세기, 황남동 151호 무덤), 금귀걸이

경주 구도심 대로변에 위치한 황오동 고분군.

신라 귀족들의 무덤으로 다양한 장신구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뒷쪽으로는 쪽샘지구라 부르며 도시화되면서 주택들이 들어섰는데 최근에 이 지역을 정비하면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쪽샘지구(발굴.조사 당시 모습)

월성로 고분도 이 지역에 포함된다.

옥이나 유리제품

금은같은 귀금속 외에도 옥이나 유리제품 또한 장신구로서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리구슬, 곱은옥달린 유리목걸이(6세기, 황오동), 곱은옥 달린 유리 목걸이(6세기, 황오동 5호 무덤),곱은옥달린 유리목걸이, 곱은옥달린 유리목걸이(6세기, 황오동 4호 무덤), 곱은옥 달린 유리목걸이(6세기, 황오동 4호 무덤),

가슴걸이(4~5세기, 월성로 가-13호 무덤)

유리구슬(6세기, 황오동), 곱은옥달린 유리 장신구(6세기, 황오동 4호 무덤), 곱은옥 달리 유리목걸이,

금구슬(6세기, 황오동 5호무덤),

유리구슬(4세기, 월성로 가-13호 무덤), 곱은옥 달린 유리목걸이(4세기, 월성로 가-29호 무덤)

금귀걸이(6세기, 천마총),

금귀걸이(6세기, 노서동 138호 무덤), 금귀걸이(6세기, 월성로 가-5-1호 무덤),

금제드리개(4~6세기, 월성로 가-13호 무덤), 금목걸이

금반지(6세기, 노서동 138호 무덤), 금반지(5세기, 황남대총 남분), 금반지(6세기, 황오동), 금반지(5세기, 황남대총 북분), 금반지(6세기, 율동), 금반지(6세기, 황오동 5호 무덤),

금팔찌(6세기, 황오동 5호무덤), 금팔찌(5세기, 황남대총)


금제드리개(5세기, 황남대총 북분)

금제 바리, 5세기, 서봉총

손잡이 달린 금동제 그릇, 5세기, 금관총

구연부에 은제 테두리를 덧대었고, 별도의 손잡이를 꽂는 부분도 은판으로 감쌌습니다. 손잡이와 몸통의 접합부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금귀걸이, 5세기, 황오동 14호 무덤

금팔지, 보물, 6세기, 노서동 215번지 무덤

바깥쪽을 따라 59개의 원형 돌기가 있고, 측면에는 4마리의 용이 서로 꼬리를 문 역동적인 무늬를 넣었습니다. 장식적이고 화려하게 변해 간 6세기 신라 금속공예품의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금귀걸이, 5세기, 금관총

금귀걸이, 5세기, 금관총

금관이 출토되었던 서봉총.

일제는 1926년 발굴.조사를 하면서, 당시 방한했던 고고학에 조예가 깊었던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를 참여시켰다. 고분의 이름도 스웨덴을 의미하는 서(瑞)자와 봉황대를 의미하는 봉(鳳)자를 합쳐서 서봉총이라 부른다. 서봉총에는 금관을 비롯하여 각종 청동제 그릇과 금.은 장신구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봉분의 조성형식 또한 전형적인 돌무지덧널무덤 형식을 취하고 있다.

금귀걸이, 5세기, 서봉총

보석장신구, 5세기, 서봉총

유리팔찌, 5세기, 서봉총

1926년 조선총독부박물관이 발굴한 서봉총의 출토품입니다. 이 무덤에서는 금관과 금제 허리띠를 비롯한 여러 문화재가 출토되었습니다. 발굴당시 스웨덴의 구스타브 황태자가 발굴을 참관하였습니다. 출토된 금관에 세 마리의 봉황이 장식된 점에 착안, 무덤 이름을 서전의 ‘서’자와 봉황의 ‘봉’자를 따서 ‘서봉총’으로 지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금관총.

일제강점기 처음으로 금관이 발견되어 신라의 찬란한 황금문화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곱은옥, 5세기, 금관총

유리구슬, 5세기 금관총

금팔찌, 5세기, 금관총

금반지, 5세기, 금관총

금장식, 금동제 장식 금동제 물고기장식,  5세기, 금관총

금동제 장식(5세기, 금관총), 세모꼴은 각각 두 개가 맞붙어 있었고, 안쪽에 직물이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새의 날개와 같은 곡선형 장식에는 용무늬를 새겨 넣었습니다. 금동제 물고기장식(5세기, 금관총). 허리띠에 매달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물고기 내부 전체를 맞새김하여 무늬를 베풀었으며, 곳곳에 달개를 달았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

신라인과 황금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고 빛을 발하는 금은 예로부터 영원함과 고귀함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신라인들도 죽은 이의 영원한 안식과 내세에서의 고귀한 삶을 위해 각종 금제품을 무덤 안에 묻었을 것입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기 65년 금성 서쪽 시림(始林) 숲속의 나뭇가지에 걸린 금궤에서 김씨의 시조로 추앙되는 알지(閼智)가 나왔습니다. 이는 돌무지덧널무덤 단계인 4~6세기에 새롭게 등장하는 금의 존재와 김씨 집단과의 관련성을 짐장케 합니다. 일성왕(재위 134~154년) 때인 144년 민간은 금은주옥(金銀珠玉) 사용을 금지했던 사실은 신라 사회에 일찍부터 금이 유통되었음을 알게 합니다. 4~6세기에 축조된 신라능묘의 수많은 황금제품은 왕과 왕족 등의 지배집단이 지녔던 특별한 인식과 그에 따른 상징과 의미를 보여줍니다. 720년에 지어진 일본의 『일본서기』에는 신라를 “눈부신 금은채색(金銀彩色)이 많은 나라” 또는 “금은의 나라”로 묘사하여, 고대 일본인들의 눈에 비친 신라의 이미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출처: 경주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