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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속리산 법주사(사적), 미륵신앙을 대표하는 사찰

충북 보은군 속리산에 있는 법주사(法住寺, 사적)이다. 삼국시대 진흥왕 때(553년) 의신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통일신라 때 진표가 법주사를 크게 중창함으로써 대형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법주사를 창건한 진표는 전북 완주에 금산사를 창건하면서 법상종을 열었는데, 법주사는 금산사와 함께 우니라라 미륵신앙을 대표하는 사찰로 자리잡았다. 고려 초 숙종이 이곳에서 대각국사를 위해 큰 법회를 열었으며, 조선시대 태조와 세조가 직접 법주사를 찾았다고 하며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원찰(願刹)로서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임진왜란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 참여했던 벽암이 화엄사와 함께 법주사를 크게 중창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보은 속리산 법주사(사적)>

금산사와 함께 미륵신앙을 대표하는 사찰로 통일신라 때 진표가 크게 중창하였다. 목탑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로 삼국시대 평지사찰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법주사는 속리산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기는 하지만 탑, 금당, 강당이 일렬로 배치된 삼국시대 평지사찰 형태가 잘 남아 있다. 정문인 천왕문, 목탑, 주불전인 대웅전이 일렬 배치되어 있다. 옛 금당이 있었던 건물 앞에 쌍사자석등이 남아 있으며, 주불전인 대웅보전은 옛 강당터에 건물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승려들이 거처하는 요사채들이 불전 동쪽편에 배치되어 있고, 원통보전 등 불전들은 서쪽편에 배치되어 있다. 강당은 중건되지 않았으며, 당시 산중사찰의 건물배치 등을 참조하여 불전 등을 중건한 것으로 보인다. 법주사에는 임진왜란 전까지 미륵장륙존상이 있었으며, 벽암이 중창할 때 다시 금동미륵불상을 크게 조성했는데 구한말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과정에 없애버렸다. 일제강점기 이후 시멘트로 미륵불상을 조성하기도 했으며, 최근에 금동미륵대불을 다시 조성하여 미륵신앙의 중심지로 그 역할을 이어오고 있다.

<법주사 가람배치>

천왕문과 목탑인 팔상전, 주불전인 대웅보전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불국사처럼 목탑과 금당을 중심으로 회랑으로 둘러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당은 쌍사자석탑이 있는 곳에, 강당은 대웅보전이 있는 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쪽편에는 요사채가, 서쪽에는 불전들이 배치되어 있다.

법주사 들어가는 길

법주사는 속리산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들어가는 길은 법주사 앞을 흐르는 계곡을 따라서 이어지는 숲길이다. 원래는 암자가 있는 계곡 서쪽편 길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동쪽편 길을 사용하고 있다. 법주사 옛길로 보이는 입구에는 부도군과 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의좌상(보물)가 있으며, 사찰입구임을 알려주는 철당간과 물을 담아 두었던 석조와 석연지(국보)가 있다.

<법주사 입구>

<법주사 들어가는 숲길>

<일주문>

<사찰입구에 세워져 있는 벽암대사비와 속리산 사실기비>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 참전했으며 법주사를 크게 중창했던 벽암선사의 행적을 기록해 놓고 있다. 비문은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이 썼다. 그 옆에는 송시열이 지은 속리산의 내력을 적은 글을 새겨 놓은 속리산 사실기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법주사 들어가는 길>

개울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서 들어간다. 당간지주 등의 위치로 볼 때 원래의 출입로는 아닌듯 하다.

<금강문>

<마애여래의좌상(보물)>

법주사로 들어오는 옛길에 있는 마애여래의좌상(보물)이다. 법주사 바깥쪽에 있는 높이 6m에 이르는 큰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상이다. 고려초에 조성된 불상으로 통일신라말 혼란기를 거쳐면 크게 쇠퇴한 불상조각 수준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마애여래의좌상 바깥쪽에 있는 부도군>

<금강문 안쪽 마당>

금강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사찰입구임을 알려주는 철당간과 석연지가 있다.

<법주사 석연지(국보)>

통일신라 전성기에 조성된 것으로 다른 사찰에서 없는 특이한 형태의 유물이다. 돌로 만든 작은 연못으로 연꽃을 띄어 두어 극락세계를 표한하고 있다. 연지는 팔각형 받침돌 위에 버섯모양의 사잇돌이 몸돌을 받치고 있다. 몸돌은 큼직만한 연꽃모양을 하고 있으며, 표면에는 연꽃잎을 새겨 장식하고 있다.

<석조>

법주사 예배공간

법주사는 통일신라 때 법상종을 열었던 진표가 크게 중창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고 있다. 화엄종이나 선종계열 사찰과는 달리 불교가 전래되면서 서역의 영향을 받아 형식과 장중함을 중요시 여기는 초기 불교의 가람배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예배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회랑은 남아 있지않지만, 천왕문.목탑.금당이 일렬로 배치된 전통적인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반면에 사찰 서쪽편에는 불상을 모시는 불전을, 동쪽에는 승려들의 수행공간이 요사채가 배치를 화엄종이나 선종계열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가람배치의 특징들도 반영되어 있다.

<옛길에서 보이는 법주사>

목탑과 궁궐 정전을 연상시키는 대웅전, 왼쪽편 금동미륵대불의 법주사의 장엄함을 더해주고 있다.

<천왕문>

법주사의 주 출입문인 천왕문. 최근에 지은 금강문이 앞쪽에 있지만, 천왕문이 원래 출입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면 5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이다. 천왕문 앞에 심어둔 전나무 두그루가 사찰 앞 당간지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궁궐 정전이나 삼국시대 가람배치에서는 천왕문 좌우로 회랑이 연결된다.

<법주사 팔상전(국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목탑을 중건한 것으로 5층 목탑의 형태를 하고 있다. 건물은 1층 기준으로 앞면 5칸, 옆면 5칸의 정사각형 형태를 하고 있다. 4면에 돌계단이 있는 낮은 기단 위에 목탑이 세워져 있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다. 내부에는 사리를 모시는 공간, 팔상도를 모시는 공간, 예불을 드리는 공간으로 되어 있다. 사리를 모시는 목탑이지만 팔상도를 모시고 있어 팔상전이라 부른다.

<팔상전 내부>

전체적으로 뚫려 있는 구조를 하고 있으며, 지붕을 받치는 기둥을 볼 수 있다. 내부에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그린 팔상도가 모셔져 있다.

<팔상전에서 보이는 쌍사자석등(국보)>

팔상전을 지나면 통일신라시대 석등 중 걸작으로 손꼽히는 쌍사자석등(국보)을 볼 수 있다. 8각형의 바닥돌 위에 두마리의 사자가 석등을 받쳐들고 있는 형태이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은 8각형으로 4면에 창을 두어 불을 밝히도록 하고 있다. 석등 뒷편 공간은 비어 있는데 당시의 가람배치를 고려해 볼 때 금당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쌍사자석등(국보)>

석등을 받치고 있는 사자상은 몸의 형태나 근육 등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대웅보전 앞 사천왕 석등(보물)>

팔각형의 받침돌 위에 화사석이 올려져 있는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등의 모습을 하고있다. 받침돌은 안상이 새겨진 아래받침돌, 기둥모양의 가운데 받침돌, 연꽃모양이 조각된 윗받침돌로 되어 있다. 원래 팔상전 앞에 있던 것으로 대웅보전 앞으로 옮겼다고 한다.

<주불전인 대웅보전(보물)>

경주 황룡사 금당을 연상시키는 이 건물은 우리나라 불전 중 손꼽을 정도로 큰 규모로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불전으로 불린다.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1624년) 새로 지은 것으로 건축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건물은 앞면 7칸 규모의 2층 건물로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으며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대웅보전 돌계단>

궁궐 정전 월대를 오르는 계단인 답도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조선왕실(특히, 세조)와 관련된 사찰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보물)>

소조불상상 중 가장 큰 규모의 불상이라고 하며 본존불인 비로자나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석가여래좌상, 왼쪽에 아미타여래좌상이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 앞에서 본 목탑과 쌍사자석등>

<목탑 서쪽에 우뚝 서 있는 금동미륵대불>

이곳에는 통일신라 때 법주사를 크게 중창한 진표율사가 조성한 금동미륵대불이 있었다. 정유재란 이후 법주사를 중창할 때 이곳에 용화전을 세우고 다시 중건하였으며,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불상을 몰수해가면서 없어졌다. 일제강점기 조각가 김복진이 시멘트로 거대불상을 조성하여 1986년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금산사 미륵전과 비슷현 형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법주사 원통보전(보물)>

조선후기 인조 때 벽암대사가 법주사를 크게 중건할 때 세워진 불전으로 대웅보전 앞 마당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앞면 3칸, 옆면 3칸에 사모지붕을 하고 있는 특이한 형태의 건물이다.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는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원통보전 뒷편에 있는 석조희견보살입상(보물)>

지대석 위에 큰 향로를 머리에 이고 서 있는 조각상으로 향불을 공양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받침돌, 몸체, 향로받침까지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그 위에 향로가 올려져 있다.

<약사전>

<원통보전 뒷편에 있는 진영각>

법주사와 관련된 고승들의 영정을 모신 일종의 사당이다. 일반적으로 조사당이라 부른다.

<영정각에 모셔진 고승들의 영정>

<명부전>

<사찰 제일 안쪽에 있는 삼성각>

산중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의 경우 산신을 모시는 산식각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법주사는 산신,칠성,독성을 같이 모시는 삼성각을 두고 있다. 평지사찰 성격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능인전(能仁殿)>

능인전은 담장으로 둘러져 있으며, 불상이 모셔진 능인전과 요사채에 해당하는 사리각(舍利閣)을 갖추고 있으며, 뒷편에는 부처의 사리를 모신 세존사리탑을 두고 있다. 법주사 내에서 독립적인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부속암자 성격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능인전>

<능인전 뒷편 세존사리탑>

<대웅보전 오른편 요사채>

승려들이 거처하면서 수행하는 공간인 요사채들이 들어서 있다. 법주사의 오랜 내력에 걸맞는 유서깊은 건물은 없다. 대부분 최근에 지어진 것들로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들이다.

<동쪽에 있는 큰 규모의 요사채>

<요사채 건물과 함께 있는 선희궁 원당>

인조의 후궁 영빈 이씨를 모신 사당이다. 법주사가 조선후기에도 왕실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보은 법주사 선희궁 원당.
원당이란 특정 개인의 사당과 같은 성격의 건물로 조선 영조 41년(1765)에 후궁인 영빈 이씨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건립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건물로 구조는 장대석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내2출목.외1출목으로 익공형식과 주심포형식이 혼용된 주삼포형식으로 되어 있다. 외부로 뻗은 2개의 제공 위아래엔느 연화와 연봉을 조각하였으며, 공포 위에는 봉황머리 장식을 더했다. 원당 정면에는 솟을삼문을 두고 주위로는 담장을 둘렀는데, 자연석 담장에는 2단의 화강암 장대석을 하부에 놓고 둥근 돌들을 이용해 쌓고 전면에는 여러 가지 길상문양과 별문양을 장식하고 있다. 이 원당은 한국 전통의 담장과 솟을삼문을 두어 대웅보전 전면 동측에 다른 건물과 독립되어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향교, 서원 등에 자주 사용된 전형적인 유교적 건축 형식이다. (안내문, 법주사, 2016년)

<범종각>

<법주사 경내에 남아 있는 철솥(보물)>

지름 2.7m, 무게 약 20톤의 거대한 솥이다. 사발 모양을 하고 있는 단순한 형태이지만 높은 온도에서 주철로 주조되어 기술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유물이다. 몸체에 문양이나 글자가 남아 있지 않아 제작연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법주사가 크게 번창했던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바깥쪽 새로 지은 요사채>

<2008년 법주사>

속리산 법주사 일원, 사적,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법주사를 중심으로 속리산의 천왕봉과 관음봉을 연결하는 일대 18,590,000㎡를 말한다. 속리산은 해발 1,057 m의 천왕봉을 비롯해 9개의 봉우리가 있어 원래는 구봉산이라 불렀으나, 신라 때부터 속리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속리산 일원은 대한 8경중의 하나로 제2금강 또는 소금강으로 불리는데 4계절의 변화에 따른 경치와 기암, 기석은 절경을 이루고 있고, 대소 사찰이 곳곳에 있어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속리산의 대표사찰인 법주사는 553년 의신조사가 서역에서 불경을 가져와 산세험준함을 보고 큰 절을 세워 법주사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혜공왕 12년(776)에 진표율사가 대규모로 중창하였으며, 고려시대를 거치며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으나 정유재란으로 전소되었다. 조선 인조 2년(1624)에 사명대사 및 벽암대사에 의해 다시 중건되고 보수 증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화유산으로는 국내 유일의 목탑인 법주사 팔상전(국보 56호)을 비롯 쌍사자석등(국보 5호), 석련지(국보 64호), 사천왕석등(보물 15호) 대웅보전(보물 915호) 등 국보 3점, 보물 12점, 천연기념물 1점, 도지정문화재 25점이 소장되어 있다. 속리산 법주사 일원은 1966년 사적 및 명승 제4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 속리산은 명승으로, 법주사 주변지역은 사적으로 변경지정 되었으며 산중에는 복천암, 탈골암 등 11개소의 전통사찰이 산재하고 있다. (안내문, 법주사, 2016년)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