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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광릉(光陵, 사적), 조선 7대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 위치한 광릉(光陵, 사적)이다. 조선 7대 세조와 왕비 정희왕후 윤씨의 능이다. 조선 왕릉의 표준을 제시한 능으로 세조의 유명에 따라서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인 통일신라시대 이후 왕릉과 귀족들의 무덤에 사용하였던 석실과 십이지신상 등을 새겼던 병풍석을 없애면서 왕릉조성에 들어가던 경비를 크게 줄였다. 왕릉을 수호하는 상징으로 새겼던 12지신상 대신에 난간동자석주를 새기고, 석실은 회격으로 바꾸었다. 또한 능을 배치함에 있어서 정자각을 중심으로 왕과 왕비릉이 양쪽 언덕에 배치되는 동원이강의 형식이 처음 적용되었다. 이는 조선의 왕릉제도를 크게 바꾼 것으로 후대 왕릉 조성의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세조는 불교를 숭상했던 인물로 원찰로는 봉선사를 근처에 두고 있다.

<남양주 광릉(사적)>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 위치한 광릉(사적).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서울에서 약간 떨어진 이곳에 능을 마련하였다. 강력한 왕권을 가졌던 왕으로 태종의 헌릉이나 성종의 선릉처럼 독자적인 지역에 능역을 마련하고 있다.

<참도 자리>

광릉은 세조가 왕릉 조성을 간소화해라는 유지를 받을어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를 두고 있지 않다.

<산릉제례를 올리는 건물인 정자각>

<정자각 내부>

<정자각 뒷편 표석이 세워진 비각>

<표석>

<세조의 능>

광릉은 두 언덕에 봉분을 두고 그 사이에 정자각을 배치한 동원이강릉으로 처음 조성되었다. 서쪽편에 세조의 능이 있다.

<동쪽 언덕에 위치한 정희왕후의 능>

<봉분>

세조의 유훈에 따라 간소화된 모습으로 후대 왕릉의 모범이 되었다. 기존에 사용하였던 석실과 12지신상 등을 새겼던 둘레석을 없애고 회벽을 사용하였다.

<난간>

12지신상을 새겼던 둘레석을 없앴으며, 난간에 글자로 12지신을 새겼다.

<봉분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

<혼유석>

봉분 앞 혼령이 노니는 공간인 혼유석. 북모양의 4개 발이 받치고 있다.

<장명등>

<망주석>

<문석인>

조복을 입고 홀을 들고 있는 형상이다.

<무석인>

<문석인과 무석인 뒷편 석마>

세조는 세종의 둘째아들로 1453년 황보인, 김종서 등을 살해한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후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세종대에는 불경을 한글로 번역한 월인석보상절 저술을 주도하는 등 한글 창제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왕위에 오른 후에는 집현전을 폐지하고 의정부 중심에서 육조를 비롯한 집행기관 중심으로 정치제제를 바꾸었으며, 국왕 중심으로 정치제제와 제도를 정비하였다. 또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국방을 강화하여 북방 만주족의 위협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 세조는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등 불교를 가까이 한 인물로 오대산 월정사.상원사, 속리산 법주사, 금강산 건봉사 등 전국의 많은 사찰들이 세조와 관련되어 있다.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는 예종과 덕종을 낳았으며, 조선초기 불교가 살아남는게 큰 역할을 한 인물로 성종초에는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수렴청정을 하였다.

<정희왕후 봉분에서 내려다 본 모습>

광릉 주변이 풍수상 길지라 하여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봉분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이 산과 물, 계곡 등의 조화를 이루고 있어 보인다.

<광릉 재실>

<광릉 들어가는 길>

남양주시 진접읍에 위치한 광릉 능역은 지금도 다양한 수목들과 생명들이 살고 있는 숲으로 유명하다.

<광릉 수목원>

<아름다운 숲길로 손꼽히는 광릉 수목원 앞 도로>

<광릉 원찰 봉선사>

조선시대 불교에서 중요한 사찰이었고, 꽤 오래된 사찰이지만 한국전쟁으로 건물 대부분이 불타버렸다. 현재 사찰건물들은 대부분 그 이후에 지었다고 한다.

남양주 광릉, 사적,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광릉은 조선 제7대 세조와 왕비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능이다. 세조는 태종 17년(1417) 제 4대 세종대왕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세종 27년(1445) 수양대군으로 책봉되었다. 1452년 단종이 어린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1453년 황보인, 김종서 등을 살해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아우 안평대군을 제거하였으며, 1455년 단종으로 하여금 왕위를 넘겨주겠다는 교서를 내리게 하여 왕위에 올랐으며, 성삼문 등의 집현전 학자들이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발각되자 모두 사형에 처하고 집현전을 폐지하였다. 세조는 정관정요주해, 본국지도 등을 편찬하게 하고 변방의 경비를 굳건히 하며 국세의 조사에 힘을 기울였다. 국조보감의 찬술.군제개혁.찰방 신설. 팔방통화 주조 등 문무 제도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동국통감.역학계몽요해.잠서.선종영가집.금강경언해.원각경.오륜록 등을 간행하게 하였다. 규형.인지의를 제작하여 토지 측량을 쉽게 하었다. 또한 북쪽 변방을 침범하는 만주족을 정벌하였다. 세조는 재위 14년 동안 많은 업적을 쌓아 중앙집권적 왕권강화에 크게 공헌하였으나, 말년에는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은 것에 대한 인간적 고뇌에 싸여 번민하다가 불교에 가르침에 의지하였다. 정희왕후 윤씨는 파평부원군 윤번의 딸로 태어나, 세종 10년 (1428) 혼인하였고 1455년 왕비가 되었다. 덕종.예종.의숙공주를 낳았다. 성종이 왕위에 오른 후 7년 동안 나이 어린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린 조선시대 최초의 수렴청정을 한 왕후로 유명하다. <출처: 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