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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봉선사, 세조 광릉을 지키는 원찰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부평리에 있는 봉선사(奉先寺)이다. 수원 융릉.건릉의 용주사, 서울 선릉.정릉의 봉은사와 함께 조선왕릉을 지키는 대표적인 원찰이다. 500여년 전 세조비 정희왕후가 선왕의 위엄을 기리고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세조의 광릉 부근에 있던 운악사를 크게 중창하고 봉선사로 고쳐부르면서 원찰로 삼았다. 명종 때에는 전국 교종을 대표하는 사찰로 경기도 내 전사찰을 관창하기도 하였다. 당시 전국 승려들의 교학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과거시험인 승과가 이곳에서 열렸으며, 서산.사명대사 같은 고승들도 응시하였다고 한다.

정희왕후가 봉선사를 크게 중장할 당시에는 사찰 가람의 규모는 89칸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등을 거치면서 여러차례 중수가 있었으며, 한국전쟁 때 사찰 전체가 불타버려 오래된 건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오늘날 봉선사 건물 대부분은 그 이후 새로 지은 것이다. 사찰 출입문을 비롯하여 왕릉을 지키는 원찰에서 특이한 가람배치가 반영되어 있다. 봉선사에 남아 있는 문화재로는 조선초기 범종인 대종(보물)이 있다. 세조와 정희왕후의 광릉에서 1 km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 광릉숲과 함께 둘러보기 좋은 곳이다.

<남양주 봉선사>

세조비 정희왕후가 광릉을 지키는 원찰로 삼으면서 크게 중창하였다. 서울 봉은사, 화성 용주사와 함께 조선왕릉을 지키는 대표적인 원찰이다.

<봉선사 일주문>

<승탑과 탑비들>

<사찰 입구에 조성된 큰 연못>

<승과평 표지석>

연못을 지나  사찰 아래 넓은 공터에 옛 승과평이 있었던 곳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조선 명종대에 승과시험 과거장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 많은 고승들이 이곳에서 실시된 승과에 참여했다 전한다.

<봉선사 들어가는 길>

<고목>

광릉 원찰로 봉선사를 크게 중창할 때 같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500년 이상된 느티나무가 사찰 입구에 남아 있다.

<사찰 강당의 성격을 갖는 청풍루>

원래 이곳에 천왕문과 해탈문이 있었다고 한다.

<봉선사 대종(보물)이 있는 범종각>

<봉선사의 주불전인 큰법당>

봉선사 주불전은 정희왕후가  봉선사를 크게 중창했을때 한강 이북에서 가장 큰 불전이었한다. 현재의 건물은 1970년에 중건하면서 대웅전이라는 이름대신 ‘큰법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큰 법당 앞 마당에 있는 삼층석탑>

<큰법당 오른편에 위치한 지장전>

앞면 5칸에 옆면 3칸의 상당히 큰 규모의 불전이다. 원래는 세조와 정희왕후의 위패를 모셨던 어실각으로 봉선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다. 한국전쟁때 불타버린것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큰법당 왼쪽편에 위치한 관음전>

<관음전 뒷편 삼성각>

일제강점기에 지은 건물로 한국전쟁 때 불타지 않은 유일한 건물이다.

<고승들의 영정을 모신 조사전>

<방적당>

승려들이 수행하는 요사채 중 경내 오른편에 위치한 방적당. 원래는 어느 단계의 수행을 끝내고 다음 수행을 준비하는 공간이라고 한다.

<운하당>

왼쪽편에 위치한 큰 규모의 요사채 건물인 운하당은 이 사찰을 찾는 신도들이 머물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조선시대 광릉을 참배하기 위해 찾은 왕실이나 주요 인사들이 묵었던 공간으로 보인다. 뒷편으로 손님들이 묵을 수 있는 여러 동의 요사채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봉선사는 요사채 출입문>

양반가옥이나 재실처럼 솟을대문을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솟을대문 양쪽으로는 이 절을 방문한 신도들이나 손님들이 묵을 수 있도록 문간채가 준비되어 있다. 정희왕후를 비롯한 왕실가족들이 방문하는 경우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운하당 아래 넓은 마당과 문간채>

<운하당 툇마루>

여러 방들을 오가는 통로이자 이곳을 찾은 신도들이 잠시 걸터 앉아 쉴 수 있는 곳이다.

<판사관무헌>

운하당 왼쪽편으로는 판사관무헌이라는 건물이 있다. 조선시대에 봉선사 주지가 왕실로부터 세조와 정희왕후의 위패를 모시는 어실각을 봉향하는 봉향판사라는 직위를 받았기 때문에 판사관무헌이라고 한다. 원찰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옛부터 이 사찰의 주지가 머무는 공간이다.

<요사채>

운하당 뒷편으로도 여러동의 건물이 있는데, 이 사찰을 찾는 신도나 손심이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운하당 뒷편 장독대>

<최근에 지은 요사채인 선열당>

남양주 봉선사,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봉선사는 고려 광종 20년(969)에 법인국사 탄둔이 운악산 기슭에 창건하고 운악사라 칭하였다고 한다. 운악사는 조선 세종 때 7개의 종파를 선종과 교종으로 통합됨에 따라 혁파되었다가 예종 1년(1469)에 정희왕후 윤씨가 선왕인 세조의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89칸으로 중창하고 봉선사라 개칭하였다. 봉선사는 명종 6년(1551)에 교종을 대표하는 사찰로서 전국의 승려 및 신도에 대한 교학진흥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으며 고종 광무 6년(1902)에는 경기도 내 전 사찰을 관장하기도 하였다. 1962년 전국의 사찰 중 제25교구 본사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어 지금에 이른다. 이 절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훼손되어 수차례 중수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법당 등 14동 150칸의 사우가 또다시 완전 소실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모두 근대에 건립된 것이다. 경내에는 조선초기 범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봉선사 대종(보물 397호)이 있으며, 짜임새 있는 구성과 사실적 묘사수법을 보여주는 봉선사괘불이 있다. <출처:문화재청>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